미술진흥법의 꿈과
추급제의 시간

심상용 서울대미술관 관장

“진흥(振興): 명사. 떨치어 일어남. 또는 떨치어 일으킴.”
무엇을 진흥시키는 법인가?

미술 영역만을 다루는 법이 제정되었다. 이름하여 ‘미술진흥법’이다. 어떤 미술을, 또는 미술의 어떤 것을 진흥시키겠다는 것인가? 사전적 의미로 묻자. “무엇을 떨치어 일어나도록” 하겠다는 것인가? 이에 대해 미술진흥법이 취하는 태도: 하나의 단서가 이 법의 목적을 규정한 제1조에서 드러난다. 제1조는 방법과 목적을 규정하는 두 구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조(목적) 이 법은 미술 진흥에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미술의 창작과 유통 및 향유를 촉진하고, 이로써 국민의 문화적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문화국가를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법은 미술의 목적을 국민의 문화적 삶의 질 향상과 문화국가 실현으로 규정한다. 미술의 인식과 활동을 국민이나 국가 개념으로 명시적으로 한정하는 접근이 타당한지 의문이다. 이에 연계해 ‘문화국가’의 정의, 개념도 미심쩍다. “문화적 이상에 현실 국가를 접근시켜 국가의 문화발전을 꾀한다”는 고틀리프 피히테(J. G. Fichte)의 ‘Kulturstaat’에서 나온 것인가? 그렇다면 미술(문화)의 이상에 대한 이 법의 철학적 관점은 무엇인가? 각 조문을 둘러보면 우려가 앞선다. 예컨대 ‘국제교류 및 해외 진출 지원’을 규정한 제11조를 볼 때 그렇다. “국제교류, 미술품과 작가의 해외 진출 촉진”을 통해 어떤 문화국가 이념의 성취가 담보되는가? 세계 무대에서 우리 미술의 위상을 높이고 과시하기에 충분한 국가 브랜드를 만드는 것인가? 2024년 2월 6일 배포된 ‘문체부 보도자료’에 중요한 표제어로 등장한 ‘글로벌 문화강국’이 이러한 우려를 뒷받침한다. “창조 행위는 권력 행위가 아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모든 신성한 것이 사라진 쭉정이뿐인 미술만 남게 된다. 우리는 지금 단추를 잘못 끼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맥락에서 제1조(목적)의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목적을 위한 방법을 나열한 부분이다. 먼저 조문은 “미술의 창작과 유통 및 향유를 촉진하고”로 되어 있다. 복수의 항목을 나열할 때, 가치의 우선성이나 서열의 의미가 반영되는 통상의 맥락에서 보면, 이 법이 드러내는 가치 부여의 우선순위는 다음과 같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1) 창작, 2) 유통, 3) 향유.

‘창작, 유통, 향유’가 아니라 ‘창작과 유통 및 향유’로 기술된 점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창작과 유통이 동등한 서열인 데 반해 향유는 상대적으로 한 단계 낮거나 동떨어져 있거나 부대적인 지위로 자리매김된다. “제2장 창작·유통 및 향유 등”의 기술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된다. 창작과 유통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몸통으로 묶여있는 반면, 향유는 동떨어져 있다. ‘국민의 문화적 삶의 질 향상’이 목적이라면, 유통보다는 향유가 우선적인 가치로 자리매김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앞서 언급한 2024년 ‘문체부 보도자료’를 가득 채운 용어와 개념들을 보라. 주요 추진과제는 ‘K-컬처 시대를 선도하는 글로벌 신(新)문화전략’, ‘세계 시장 선두주자 만들어 내기’ 등이다. 이를 위한 전략과 방법으로 ‘대표작가, 작품 창출을 위한 우수작품 레퍼토리화(대표작품화)’, ‘K-콘텐츠 전략펀드’ 등이 지루하게 열거된다. “국제무대에 올릴 경쟁력 있는 문화·예술 작품의 창출”, “문화·예술 등 모든 자원을 융합해 관광 효과로 연결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기” 결국 ‘모든 자원을 관광 효과로 집결시키기’가 미술진흥법이 떨치어 일어나도록 하겠다는 목적이다. 국민의 문화적 삶의 질 향상, 미술의 공공성, 공공재로서 미술품 등에 관한 언급은 국민의 문화 여가비 부담을 덜어주는 정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애써 붙잡으려 했던 가치가 예산 지원과 관련된 통계수치들과 빅 이벤트들에 참가한 횟수로 대체되어도 그만인 것들이었던가. 결국은 국제무대에 올릴 경쟁력 있는 상품들, 대표작품 브랜드화를 통한 국가 이미지 상승 효과 같은 것이었던가. “정신적이고 시적인 보물에 참여하는 것, 인간의 깊은 본성적인 요구, 고통, 울음, 비명, 한숨과 탄식에 응답함으로써 시대를 가로질러 인간을 축적하는 것”으로서의 미술은? 미술이 여전히 꿈꾸는 사람들의
자리로 남을 수 있을까? 충만 대신 공허에 시달리는 우리를 위해 더 높고 역동적인 선(善)의 가교 역할을 여전히 맡을 수 있을까? 공동체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의 필요에 부응하는 문제에 대한 녹록지 않은 질문들, 그 질문들 앞에서 미술가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가 자리매김되었던 그 지평이 소거되는 것 같다. “돈과 억압, 교묘하게 조장하고, 자극적으로 열광하는 것 이상의 동기를 알지 못하는 곳에 자유의 가능성은 없다.”(시몬 베유. Simone Weil)

추급제의 시간

추급권 추급권(追及權)이 처음 입법화되었던 1920년 당시, 앞서 판매된 것이 재판매될 때 발생하는 이익의 일부를 작가나 가족에게 보상한다는 추급권의 취지는 정당한 것이었다. 경제적 이익의 독점을 완화하고, 약자인 예술창작자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그 취지가 유효한지, 유효하다면 어느 정도 유효한지 따져보아야 한다.

추급권은 기본적으로 거래 관련 법이다. 따라서 거래되는 작품들을 위한 법이다. 거래되지 않는 것에 추급권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로부터 거래되지 않는 것들의 소외를 정당화하고, 취급 범주 밖으로 추방하는 상징적인 효과가 발생한다. 범주는 그 자체로 헤게모니와 권력의 재생산 기제로서 소외를 정당화하는 것이 그 주 기능이라는 톰 그레톤(Tom Gretton)의 ‘신미술사’ 담론을 소환하자. 게다가 이 법은 거래가, 거래량, 거래 빈도가 기준이 되는 극심한 쏠림현상을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 이는 오늘날의 이미 심각하게 기울어진 시장 메커니즘 맥락에서 법의 취지에 역행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 21세기 추급제와 환상 추급제 도입이 시장을 투명하게 하고, 그러면 더 많은 자본이 유입되고, 그러면 기성작가의 창작 여건이 안정되고, 신진 작가들의 창작 의욕이 고무될 것이다. 이것이 미술진흥법이 기대는, 그러면 미술이 진흥될 거라는 가설이다. 이 가설 자체가 ‘기계적인 등식의 덫’에 걸려있다는 방증 하나: 이로 인해 각각의 연결고리를 거칠 때마다 증폭되는 삐걱거림, 오류의 스노볼 효과가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이 왜 문화예술에는 조금도 적용되지 않을 거라고 약속이라도 한 듯 믿는 것일까? 자산수익률이 ‘예술적 가치 생성률’과 이를 위한 ‘의식과 신체의 몸부림률’을 이미 추월한 지 오래인데 말이다. 어떻게 세습자본주의적 특성, 즉 끔찍한 불평등, 점점 더 초-인위적으로, 거의 조작 수준으로 가공되는 스타와 그렇지 않은 예술가들 사이의 지옥을 방불케 하는 불평등 심화가 결과적으로 창작의 잠재력을 급진적으로 소모시켜 온 것에 대해 모르는 척할 수 있을까. 하물며 ‘인류세’에서 ‘자본세’로의 패러다임 변화를 입에 달고 다니는 시점이 아니던가. 정말 모르는 것이 아닐까?

이런 맥락에서 추급제를 대하는 미술진흥법의 기대는 상당히 초현실적이다. ‘시간’이라는 변수가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토록 다른 꿈을 꾸는 것이리라. 오늘의 상황은 최초 입법이 실현되었던 1920년대와 비교 불능이다. 시장의 이러한 변화를 짐작이라도 할 수 있었겠는가. 시간이 지나면서 변형이 초래되고 가속화되고 누적되었다. 이전에는 대체로 한 세대로도 충분치 않았던 예술성, 예술적 질의 평가가 분기별로 작성되다가 급기야는 투자 포트폴리오로 대체된다. 자본이 직접 예술의 조정자로 나서서 예술과 비예술, 명작과 졸작을 구분하는 전문성의 심장부까지 파고들어 자신의 놀이터로 만든다. 작가 그룹 ANO가 영국 국립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 앞에서 했던 뮤지컬-퍼포먼스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포함되어 있다. “석유 회사의 사장에게 혜택을 주기 위한 예술, 세탁용 미술관…”.

아트 스타, 블루칩 작가와 유행하는 스타일은 미술이 자본과 미디어 기술의 영향력 아래에 재배치된 산물이다. 유명작가 쏠림현상과 널뛰듯 하는 거래가 급등, 급락세를 보라. 이런 맥락에서 영국의 yBa 붐과 그 이후의 흐름을 꼼꼼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미술가들은 급진적인 속도로, 최소한의 견제도 없이 스타화되어 가격 고점에 도달하는 것을 상상하며 작업에 임하도록 부추겨진다. 5년, 10년이면 모든 일이 일어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시간이 이보다 적어도 7배는 느리게 흘렀던 시대에 작가의 노후나 유족들을 위해 설계된 추급제가 오늘 매우 제한적인 의미만을 지니게 되는 까닭이다. 미술가의 노동조건 안정화나 ‘신진 작가의 창작열 고취’ 같은 과제는 추급제로 접근하기에 버거운 뿌리 깊이 구조화된 문제다. 우리가 실제로 봉착한 문제의 실체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그것은 제도 한두 가지를 도입하는 것으로 호전될 만한 것이 아니다.

제대로 된 미술 진흥의 단서들

추급제를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인식해선 곤란하다. 그러한 인식이 모든 생산적인 논의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어 시장의 투명성과 시장의 위축 사이의 틈새에 끼어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추급제는 제대로 된 미술 진흥에 있어 지엽적인 문제일 뿐이다. 그것으로는 젊은 예술가들이 왜 진실을 향한 용기와 열정의 내적 용량을 키우는 일에 갈수록 무력감을 느끼고, 환멸의 감정에 빠져드는지에 관한 해답에 다가설 수 없다.

제대로 된 미술진흥, 진흥된 미술의 모습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그 답은 다음과 같은 단서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민주적 토론, 공공성을 둘러싼 갈등이 야기될 때 기꺼이 시민의 편에 서기, “영국 국민들이 낸 수백만 파운드의 세금을 정부로부터 지원받으면서도 미술계에서 그들의 발언권이 극히 미미할 뿐인” 영국의 것과 차별된 접근, 예술창작의 신성함을 소중히 여기고, 그로부터 오는 힘인 시련을 견디는 의식과 행동에 대한 존중, “그리스도와 유사한 자비심, 셰익스피어의 웃음, 사자(死者)에 대한 호메로스 풍의 깊은 존경심”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는 힘에 대한 존중, 무지에 의해 이 모든 것을 약간의 금전적 보상으로 대체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폐기하기, 그리고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로부터 긍정적으로 희망하기 “그들이 꽃이란 꽃은 남김없이 꺾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결코 봄의 주인은 될 수 없을 것이다.”1


1 장 지글러 『탐욕의 시대』 양영란 옮김 갈라파고스 2010 p.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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