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ator’s Voice
배종헌 개인전: 고립여행 孤立旅行
대안공간 루프 1.6~2.12
정희라 | 미메시스아트뮤지엄 선임큐레이터
배종헌 〈격리구곡 隔離九曲〉 연작 (5점) 목판에 유채 2020 대안공간 루프 설치 전경 2023
“Ask the deer for my way.” 이는 배종헌이 사진 속 돌벽의 모양을 따라 긁어 새겨 넣은 문구이다. 작가는 글렌피딕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가 위치한 스코틀랜드에서 마주한 돌벽 속의 산수를 바라보며 자신의 상황을 사슴계곡(Glenfiddich)에 빗대어 길을 묻고 있다. 《배종헌 개인전: 고립여행 孤立旅行》은 자연을 닮은 유연한 형태의 나무 현판 위에 그려진 풍경을 보여줌으로써 배종헌만의 산수화 형식과 내용을 제시한다. 함께 전시된 〈돌 하나 (안)에 네 개의 풍경〉이라는 메모가 적힌 돌의 이미지는 이 하나의 프레임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엿보게 한다. 그는 벽을 이루는 돌의 모양에서 자신의 관념 속 풍경을 발견하는데, 우리는 이 풍경을 좇아 작가의 마음에 도달하게 된다. 자연 그 자체이면서 자연만은 아닌 산수의 개념이 녹아있는, 푸른 유화 물감 덩어리 사이에 길을 만들어 형태를 갖춘 풍경은 돌에서 발견한 실제 자연이기도 하지만, 누구에게나 실재하여 눈앞에 보이는 형체는 아니다. 장소의 역사 속에 존재하는 흔적을 통해 작가가 만들어 낸 관념적 풍경에 가깝다. 배종헌의 자연에 대한 몰두와 이해는 우물에 비친 구름의 모습을 관찰하던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하늘과 우물에 비친 하늘은 달랐다. 우물 속 한정적 프레임에 비친 구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 프레임에 갇혀 있는 하늘은 본래의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렇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순간들의 궤적이자 소멸의 현상을 지켜보았다. 그는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 낸 특정적 조건의 한시적인 자연의 모습에서 변화하는 실존의 흔적을 발견하곤 한다. 작가는 스코틀랜드에서의 작업에 대해 “나의 작업은 돌 속의 기록된 아주 오래된 자연의 역사를 해독하고 그 돌을 쪼개고 다듬던 석공의 노고를 위로하는 시간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한다. 사람의 손을 거쳐 쪼개져 가공된 마을 대부분의 건물 벽을 이루는 돌들의 형상은 한국에서 작가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시멘트벽을 만드는 미장이의 흔적과도 그 결이 같다. 돌을 다듬는 과정에서 남았을 어느 누군가의 손길을 떠올리게 된다. 시멘트벽에 남은 누군가의 흔적이든, 돌벽에 남은 또 다른 누군가의 흔적이든, 사람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사람의 역사에서 자연의 모양을 찾는 것은 배종헌의 특기이다.
이번 전시는 2021년 글렌피딕 레지던스에서의 경험을 기반으로 하는 유화들과 대구의 골목에서 발견한 동식물의 흔적과 산수 풍경을 그린 작업들을 함께 선보였다. 아름다운 정원과 자연의 향기가 담긴 작업과 도시의 콘크리트 냄새가 섞인 작업이 공존한다. 개인의 일상에서 출발하는 그의 작업 접근 방식을 이해한다면, 이 상반된 작업 환경도 동일한 조건임을 알 수 있다. 도시 일상 속에서 자연을 발견하던 배종헌은 스코틀랜드 레지던스에서 진짜 자연을 만끽하였다. 매일 아침 혹은 밤에 캐슬 언덕을 오르며 콘크리트나 아스팔트가 아닌 땅과 풀을 신체로 느낄 수 있었던 작가는 바람을 통해 현재와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발걸음에 담았다. 여행과도 같은 시골 마을에서의 생활은 자연의 작은 부분으로서의 돌의 일면에서 웅장한 대자연의 모습을 읽어내는 작업이 이 여행의 본질이 될 것이라고 직감하게 하였다. 이 여행에서 대구로 돌아온 작가는 2020부터 이어온 작업을 계속한다. 〈아래만 보며 걷는 어느 콘크리트 유랑자를 위한 드로잉 툴 박스〉는 도시의 길을 따라 걸으며 찾은 풍경을 그려 길 모양으로 설치한 작업이다. 스코틀랜드의 돌을 담은 유화는 그 돌 모양 전시장 벽 곳곳에 걸리고, 대구의 시멘트 길을 담은 설치 작업은 지하 전시장의 바닥에 놓였다.
배종헌은 산책을 제외한 레지던스 안에서의 생활 속에서 일상에 필요한 질서를 유지했고, 우주의 질서를 떠올렸다. 삶의 터전을 떠나서도 ‘내부’에 머물렀다는 그 생활이 ‘바깥의 내부’였다는 작가 본인의 표현이 잘 맞아떨어진다. 발견하고 체험하는 사물, 그 정체에 대한 배종헌만의 시각은 그가 어디에 있든 놀이로 발전하여 작업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확인하게 한다. 그는 2003년 〈청계천변 멸종위기 희귀생물 도감 작업〉에서 땅바닥에 버려진 것들, 눈여겨볼 필요가 없는 가치가 없는 것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미물들에 학명을 붙이고, 관찰하고 채집하여 자연사 박물관을 연상할 수 있게 했었다. 그 미물들에 가치를 부여하여, 사물과 우리네 삶의 밀접한 관계성을 다루었다. 서식처, 학명을 붙이면 작은 금속에 불과하던 미물이 양말 두 쪽을 연결하는 연결고리였으며 양말 장수가 그곳에 있었음을 유추하게 한다. 그가 경주에 머물렀을 때를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유적의 도시에서 눈에 들어온 작은 것들이 모두 유물로 보였던 그는 보잘것없는 것들이 흔하게 우리의 곁에 있기에 그것을 감지한 이의 감각을 끊임없이 자극한다고 보았다. 사물과 우리네 삶의 밀접한 관련성에 대한 그의 관심은 스코틀랜드에 가서도 통했다. 그는 건물의 벽을 이루는 돌이라는 오브제를 통해 그 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돌을 거쳐 간 사람들, 그리고 그 돌이 속했던 자연을 생각하였고 우주적 관점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생명으로서의 자연과 사람들을 엮어 나갔다.
그의 2019년 개인전 《미장제색 美匠霽色》을 떠올린다면, 이번 전시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그 전시의 모티브가 된 벽면의 산수에 대한 이야기는 작업 이해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첩첩산중에 갇힌 것 같이 꼼짝할 수 없는 상태에 놓였던 당시의 그는 단 한 걸음도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앞을 가로막은 벽을 마주하고 가만히 있다가 벽 속에서 거대한 ‘산’을 보았다. 그 어떤 산수화보다 아름답고 경이롭던 그 풍경을 규격화된 캔버스 대신 정형화되지 않은 자유로운 성질의 나무 화판에 유화로 그리기 시작했다. 이것을 계기로 시멘트의 벽, 콘크리트의 노면, 아스팔트 도로, 걷고 있는 길바닥과 지나치는 누군가의 집 담벼락에 생겨나 있는 얼룩과 형상들이 다 산수로 보이게 되었다. 그곳에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게 존재했던 누군가의 흔적이나 길의 얼룩들은 마치 어느 작업실에 발이 묶인 그 자신을 발견한 것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앞서 언급한 청계천 프로젝트에서는 생물학적 상상을, 경주에서의 작업은 고고학적 상상을 하였다면, 스코틀랜드에서는 앞서 한 상상에 더해 세탁기 속에서 돌아가는 물에서 블랙홀을 떠올리는 것과 같은 아주 평범한 일상적 상상이 더해졌다(전시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에세이를 정독한다면 알 수 있다). 익숙한 곳에서 벗어나 맛보는 여행의 성질을 경험한 이들이라면 작품 앞에서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이다.
배종헌 〈완벽산방누연폭도 完壁山訪屢淵瀑圖〉 목판에 유채 2022 대안공간 루프 설치 전경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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