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어제 같은 오늘

젊음과 늙음의 경계는 오늘에 있다. 늙은이의 오늘은 과거와 가깝고, 젊은이의 오늘은 미래와 가까운 까닭이다. 늙은이는 어제를 회상하고 젊은이는 내일을 기다린다. 그렇다면 지금에 나는 분명 늙은이 임에 틀림없다. 언젠가부터 미래를 꿈꾸기보다 과거의 기억을 갉아먹는 시간이 훨씬 많아졌기 때문이다. 좀처럼 희망이, 밝은 내일이 보이지 않는 요즘이다. 그래서일까?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이번호 특집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공교롭게도 이 기사를 담당한 임승현 기자는 우리 편집부 식구 가운데 가장 젊다. 같은 날 태어난 쌍둥이 사이에도 세대 차이가 난다는데, 십 수 년 나이 차이 나는 선배들 틈바구니에서 오죽이나 세대 차이를 실감 했을까. 그래도 내일을 좇는 임 기자에게 이번 기회는 여러 모로 공부가 되었을 게다.
최근에 본 전시 가운데 인상 깊었던 두 장면 있다. 먼저 소마미술관에서 열리는 <레트로 ’86-’88전〉(11.14~2015 1.11). 액자소설 같은 이 전시에서 그림마당 민 전시(김인숙 박영숙 윤석남 정정엽 등)와 관훈갤러리에서 열렸던 <로고스&파토스전〉(노상균 문범 문주 이기봉 등) 은 그야말로 감회가 남달랐다. 그리고 또 하나는 국제갤러리 도날드 저드와 조습의 개인전이다. 눈치 챘겠지만, 내가 이 전시를 흥미롭게 견주어 본 이유는 이들 전시 사이에 존재하는 성격 차이와 다름의 간극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 현대미술의 묘미가 있는 게 아닐까? 각기 다른 내용과 형식을 추구하고 차별화/전문화된 입장에서 미술과 세상을 해석하고 표현하는 작가들의 폭넓은 스펙트럼 말이다. 이런 다양성의 공존이야말로 한국 현대미술의 지층을 두텁게 하는 요소일 게다. 이렇듯 미술에는 정답이 없다. 절대적인 가치판단도 불가능하고 우열도 없지만 호(好)-불호(不好)는 가능하다. 그러니 창작자와 향유자 모두 나름대로의 가치관과 취향에 따라 판단하고 즐기면 된다. 여기서 《 월간미술》이 아주 적절한 ‘참고서’ 노릇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월간미술》이 ‘교과서’는 아니다. 그렇다고 대충 한번 쓰윽 훑어보고 버리는 그저 그런 ‘잡지(雜誌)’ 나부랭이도 아니다. 서가에 두고두고 꽂아 놓고 다시 꺼내서 보는 ‘책’이다. 전문가와 일반인은 미술을 대하는 눈높이가 다르고 기대치에서도 차이가 난다. 사정이 이러니 누구나 흡족하지는 않겠지만, 앞서 얘기한 것처럼 전시의 차이와 간극을 즐기듯《 월간미술》을 즐겼으면 좋겠다.
어느덧 한 해가 또 저물어 간다. 多事多難하지 않았던 해가 어디 있었으랴. 그럼에도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유독 깊게 남는 2014년이다. 오늘도 어제 같고 내일도 오늘 같길 바란다.
편집장 이준희 dam2@unitel.co.kr

[bold_title]CONTRIBUTORS[/bold_title]

MS-co

김언호 한길사 대표

마감기간이 되면 여기저기에 전화를 걸어 사진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 이번에는 김신의 디자인에세이 참고도판으로 헤이리 한길책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윌리엄모리스의 《초서저작집》 이미지를 구하기 위해 김 대표에게 S.O.S.를 청했다. 이 박물관은 윌리엄 모리스의 책공방 캠스콧 프레스가 간행한 모든 책을 소장하고 있다. 한 장의 사진을 위해 김 대표는 몇 번 통화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책을 예술품이라고 생각하며 책 만드는데 정성을 쏟는다는 그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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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영정은영 한국교원대 미술교육과 교수

저드 재단 공동대표의 바쁜 일정에 맞추어 촉박한 준비기간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대담 진행을 맡아주었다. 그리고 전시 리뷰까지. 이번 도날드 저드 기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 덕분에 가능했다. 정 교수는 이화여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 예술학과와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일리노이대 어바나-샴페인에서 미술사 석사과정을 마치고 동 대학원에서 댄 플래빈(Dan Flavin)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윌리엄앤메리대와 일리노이대 어바나-샴페인 방문교수, 필립스 컬렉션 미술관 박사후 연구원을 거쳐 한남대 교수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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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MG_0391권유정 전시코디네이터

전시 진행을 위해 서울과 창원을 오가는 생활을 했던 권유정 코디네이터. 창원 현지에서 취재진을 이끌고 현장을 설명했다. <창원조각비엔날레>를 소박한 듯 큰 행사라고 정의했다. 이 전시가 열린 창원은 현란함이 매력적이었다는 말과 함께. 지역에서 벌어지는 현대미술 행사가 쉽지 않았지만 그러한 상황을 변화시키는 데 이번 비엔날레가 일조할 것임을 확신했다. 미술이론과 예술경영 프로그램 등을 공부한 그녀의 관심사는 당연히 ‘커뮤니티 아트’다. 큰 키만큼이나 성장했을 계기가 되었길.

[Column]

문화예술 예산을 삭감할 것이 아니라 문화도 복지라는 마인드가 필요하다

백남준아트센터는 2014년 10월 28일 홈페이지 센터소식란을 통해 ‘11월 17일부터 2015년 1월 28일까지 전시교체 및 전시장 공사를 위해 전시장을 부분 운영하고 휴관한다’고 공지했다. 이 공지에 따라 1984년 새해 첫날 백남준이 인공위성을 이용해 중계한 <굿모닝 미스터 오웰> 30주년을 기념하여 7월 17일부터 11월 16일까지 개최한 <굿모닝미스터오웰2014>를 개편하여 1층에서만 연장 운영하고 2층은 휴관하고 있다. 결국 백남준아트센터 1층과 2층에서 열리던 전시는 <굿모닝미스터오웰2014 하이라이트>란 이름으로 축소돼 1층에서만 연장 전시하게 된 셈이다. 이 사실은 첫째, 백남준아트센터가 새로운 기획전을 꾸릴 여건이 조성되지 않아 전시를 연장해야 하는 형편이며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2층을 비워야 하는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백남준아트센터가 그동안 보여준 기획 역량을 고려할 때 새로운 기획전을 준비하지 못하고 기존 전시를 축소하여 연장할 수밖에 없었음은 백남준아트센터가 현재 심각한 재정난을 겪고 있음을 말해준다. 실제로 11월 19일자 온라인판《 아시아경제》 기사에 따르면 작년 대비 올해 경기도미술관의 예산은 9억2,250만 원에서 2억6,000만 원, 실학박물관은 8억5,000만 원에서 1억9,992만 원, 백남준아트센터는 5억1,600만 원에서 2억3,120만 원으로 거의 대부분 50% 이상 삭감되었고, 백남준아트센터는 예산이 없어서 2층 전시공간을 폐쇄하는 등 공간 축소를 진행한다고 한다.
경기도박물관, 경기도미술관, 경기창작센터, 백남준아트센터는 실학박물관, 경기도어린이박물관, 전곡선사박물관 등과 함께 경기문화재단에 소속돼 있다. 비영리 공익 재단이자 대한민국 최초의 문화재단으로 1997년에 설립된 경기문화재단은 2001년 1,000억 원의 기금을 조성하고 2002년부터 사무총장 직제를 폐지하는 대신 대표이사 체제로 변경했다. 2005년 경기도 산하기관으로 편입된 경기문화재단은 2008년 3월 1일 도내 박물관과 미술관의 통합을 단행하고, 그해 8월 백남준아트센터가 개관했다.
문제는 경기문화재단이 경기도로부터 받은 출연금으로 운영되는 것에서 비롯됐다. 경기도의 문화재단에 대한 출연금은 2008년 이후 계속 삭감됐다. 즉 2008년 286억 원이던 출연금이 2009년에는 250억 원으로 줄었으며, 2010년에는 687억 원이 책정됐으나, 대부분 어린이박물관과 전곡선사박물관 건립비로 배정된 것이었기 때문에 실제 운영예산은 200억 원대였다. 2012년 218억 원이던 출연금은 2013년 111억 원으로 줄었다. 경기도가 문화재단에 대한 출연금을 계속 줄여야 했던 배경에는 문화예술을 위한 가용예산을 줄여야 하는 속사정이 있었다. 즉 지난 이명박정부가 추진한 4대강 사업에 지자체가 매칭펀드를 조성해야 했으며, 현 정부에서도 급식, 보육 등의 복지예산을 지자체에 떠넘기면서 이쪽으로 예산을 집중 배정하다보니 애꿎은 문화예산을 줄여야 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2008년 도립박물관과 미술관이 문화재단에 통합된 이후 경기문화재단은 도립이면서도 민영화하였고, 경기도로부터 받은 출연금을 각 소속기관에 분배하면서 예산 기근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다보니 운영예산의 거의 90%를 출연금에 의존하는 경기도미술관이나 백남준아트센터의 운영 악화는 예견된 사태였다. 결국 경기도박물관이나 경기도미술관의 소장품 구입예산이 몇 년째 전액 삭감된 상황이며 백남준아트센터는 기획전시의 축소연장과 2층 전시장을 폐쇄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런 사태는 경기문화재단에 대한 경기도의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행정감사에서 ‘재단 사무처 및 산하기관의 출연금 대비 사업비가 매년 감소하여 사업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지적’에서도 확인된다. 경기도내 박물관과 미술관의 재정 악화는 경기도의 출연금에 의존한 채 경영에 소홀했던 경기문화재단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경기문화재단도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문화예술 기부 캠페인인 ‘문화이음’ 선포식 개최, 재계 인사를 주축으로 한 문화예술기부후원회 ‘문화이음 소사이어티’를 발족하는가 하면 재능기부를 유도하고, 기부문화 확산을 위한 인문학강좌, 콘서트 등을 개최했다. 이 문화이음 사업으로 문화재단이 2013년 8억 원의 기금을 확보했다고 하지만 경기도의 출연금이 점진적으로 삭감되고, 증액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더 일찍부터 기금 확보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다. 이런 점은 문화재단 소속 각 기관에도 해당한다. 매년 출연금이 삭감되는 현실을 직시하고 자구책을 마련했어야 했다. 각 기관장이 높은 전문성 못지않게 예술경영에 대한 비전을 갖고 기금 확보를 위해 노력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먼저 문화예술 예산부터 삭감하는 관행을 고치지 않으면 ‘문화의 시대’란 허망한 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다. 가난을 문화예술의 미덕으로 여기거나 문화예술이 행정의 장식쯤으로 치부된다면 기껏 지어놓은 문화예술기관이 겪어야 할 어려움은 지속될 것이며, 그만큼 문화발전도 기대할 수 없고 사람들이 누려야 할 문화권리도 정체될 수밖에 없다. 문화예술도 복지 차원에서 다루어야 한다. 급식과 보육은 당장 시급한 것이지만 정상적인 문화예술 급식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가까운 장래에 문화예술의 빈곤 현상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장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는 심정으로 문화예술 예산부터 삭감하는 것에서 손 쉬운 대안을 찾을 것이 아니라 문화예술을 복지로 보고 적정한 예산을 편성하는 마인드가 필요한 시점이다.
최태만・국민대 교수

[Column]

나라 밖의 우리 문화재, 오해와 이해

외국에 흩어져 있는 우리나라의 문화재들을 다루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고, 경험하게 된다. 문화재를 다루고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국외 소재 우리 문화재들에 대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이들 문화재에 대한 총체적인 실태를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해외에 반출된 우리 문화재가 개인 소장품을 포함하여 전부 몇 점이나 되는지, 국가별 소유 숫자는 얼마나 되며, 그 나라들의 어떤 기관이나 개인이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회화, 서예, 조각, 도자기, 금속공예, 목칠공예, 기타공예, 석조물, 건조물 등 분야별로 어떻게 분포하는지, 시대적 분포는 어떻게 되며, 격조는 얼마나 높은지, 반출 경위는 어떠한지 등등 하나같이 규명을 요하는 상태이다. 이것들이 어느 정도 파악되어야 반드시 환수해야 할 것과 현지에서 우리 문화와 역사를 올바르게 소개하는 데 활용할 것을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정확한 실태 파악이 최우선적인 과제이다. 이러한 일은 워낙 방대하고 시간과 예산이 많이 소요되는 일이어서 개인이나 민간단체에서는 ‘제대로’ 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국가가 많은 예산과 인력을 투입하여 장기간에 걸쳐 시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이를 위해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설립되었으나 설립된 지 2년밖에 안되어 인적구성, 예산, 시설 등 모든 것이 어설프고 어려운 점이 너무나 많다. 이러한 제약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효율적으로 운영되고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조사 연구, 활용 홍보, 경영 지원 등 여러 방면에서 기초를 잡아가는 데 주력하고 있다.
해외에 흩어져 있는 우리 문화재는 한 점 한 점 모두 보배롭지만 동시에 우리 손바닥 위에 놓여있는 밤송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밤송이 안에 맛있고 건강에 좋은 밤이 들어있는 것을 알지만 그것은 수많은 가시와 두껍고 견고한 껍질에 싸여있다. 섣불리 밤알을 꺼내려다가는 손바닥이 가시에 찔리거나 자칫 떨어뜨릴 수도 있다. 소중한 밤알을 꺼내려면 먼저 그것을 둘러싼 가시와 껍질을 제거해야 한다. 밤알은 알토란 같은 우리 문화재, 가시와 껍질은 많고도 견고한 저해요인인 셈이다. 문화재 환수나 현지 활용은, 밤송이의 수많은 가시나 단단한 껍질처럼 예민한 저해요인들과 장벽을 극복해야만 비로소 실현이 가능한 일이다. 계절이 바뀌면 밤송이는 스스로 입을 벌리고 밤알을 밖으로 토해낸다. 외국에 있는 우리 문화재들도 이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꿈같은 생각을 해보지만 마음이 조급한 우리는 그렇게 느긋하게 기다릴 수가 없다.
외국에 있는 우리의 문화재들에 대한 국민의 인식도 달라졌으면 좋겠다. 많은 국민은 막연하게 ① 외국에 있는 문화재는 모두 약탈 문화재이고, ② 따라서 모두 환수해야 하며, ③ 환수하되 우리 돈은 한 푼도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중에는 약탈 문화재와 더불어 국가 간의 외교적 선물이나 무역거래, 개인 간의 선물도 많이 포함되어 있고, ‘환수’ 못지않게 현지에서 우리 문화와 역사를 올바르게 소개하는 데 쓰는 ‘현지 활용’도 지극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데에서 비롯된다고 생각된다. 한번 빼앗기거나 해외로 반출된 문화재는 대부분 어떠한 형태로든 대가를 치러야 하므로 단돈 10원도 지급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거두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이 정부나 민간 차원에서 대대적, 적극적으로 거액을 아낌없이 투자해 자국의 수많은 문화재를 환수하고 있는 것은 타산지석이 될 만하다. 우리는 그렇게는 할 수 없지만 그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자국의 국위를 세계만방에 드높이 선양하고 자국민의 문화적 자긍심을 고양시킴으로써 보다 큰 국익을 도모하고 있는 사실만은 충분히 참고할 가치가 있다.
해외의 우리 문화재 환수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우리가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고 서두른다는 점이다. 성급하게 성과를 거두기 위해 서두르면 그 효과는 일시적이고 단발적인 반면에 오히려 장래의 일을 그르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 경우, 더 많은 문화재가 더욱 깊이깊이 숨어버리게 된다. “문화재 환수는 조용히, 느긋하게, 치밀한 계획하에 차근차근 추진해야 한다”고 필자가 기회 있을 때마다 주장하는 이유이다.
해외 소재 문화재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너무도 안타까운 것은 그중의 절대 다수가 ‘사장(私藏)’ 또는 ‘사장(死藏)’되어 있어서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공공의 박물관이나 기관들에 소장된 문화재들조차 수장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방치되듯 무관심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프랑스 파리의 국립도서관에 있던 외규장각의 의궤들도 박병선 박사의 노력에 힘입어 세상에 밝혀지기 전까지는 오랫동안 사장 상태에 있었다. 유사한 예가 수없이 많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사장은 우리 입장에서 보면 최악의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고 우리 문화재들이 현지에서 빛나는 진가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하게 하기 위하여 다방면에 걸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외국 박물관들의 학예원들을 초청하여 한국문화재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고조시키고, 아울러 보존 상태가 열악한 문화재들에 대하여는 우리의 인력과 기술을 동원하여 보존처리를 해주는 일 등은 그러한 예의 대표적 경우에 해당된다.
해외에 유출된 우리 문화재를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는 일본이다. 이 사실을 모르는 우리 국민은 없을 것이다. 해외 소재 문화재는 어림잡아 최소한 15만6,000여 점에 달하며 그중 6만7,000여 점이 일본에 있다고 파악되지만 실제로는 곱절이 넘을 가능성도 다분하다. 수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일본 소재 우리 문화재가 다른 어느 나라에 있는 것들보다 값져서 각별한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1965년 한·일협정 당시에 우리 정부가 요구한 4,000여 점의 문화재 중에서 1,432점이 환수되었으나 격조가 높지 않은 것이 다수를 차지했다. 우리 정부의 준비 부족과 다급한 경제협력 때문에 문화재 환수 문제를 비중있게 다루기가 어려웠던 측면도 있었지만 일본 정부가 자국의 한국문화재 소유 상황을 폭넓게 파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에 알려주지 않고 숨긴 데에도 원인이 있었음이 최근 언론 보도에 의해 밝혀졌다. 보도에 의하면 1965년 한·일협정 당시 일본 정부는 자국의 박물관, 대학, 동양문고 등이 소유한 한국문화재의 현황과 반입경로 등을 조사하고 문서로 작성까지 했으면서도 우리 정부의 반환 요청을 염려하여 그 문서들을 숨겨왔다는 것이다. ‘일한회담 문서 전면 공개를 요구하는 모임’이 제기한 소송에서 오노 게이치(小野啓一) 일본 외무성 동북아과장의 도쿄고등법원에 제출한 진술서에서 따르면, 1965년 한일회담 관련 문서들 중에는 한국 정부에 알리지 않은 문화재 목록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한국의 반환 요청을 염려하여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2008년에는 일본 정부가 한일회담 관련 외교문서 1,916건을 공개하면서도 22건은 밝히지 않았는데 그중에 문화재 관련 문서가 8건이었다. ‘한국 국보 고서적 목록’, ‘한국 국보 미술공예품 목록’, ‘이토 히로부미 수집 고려도자기 목록’ 등이 그중에 포함되었다. 일본이 정부 차원에서 일본 소재 한국문화재를 폭넓게 조사하여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으면서도 우리 정부에는 비밀에 부쳐온 것이다. 그 개연성은 진작부터 짐작해온 바이나 이번에 일본의 공식적인 절차에 따라 그 진상이 어느 정도 드러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일본이 우리 문화재를 이처럼 꼭꼭 숨기고 있고 사장(死藏)상태를 이어가고 있어서 우리 국민은 어떤 소중한 문화재들이 그 나라에 있는지조차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각종 전시를 통한 현지 활용조차 거의 불가능한 상태에 놓여있다. 일본이 최소한 어떠한 우리 문화재들을 소유하고 있는지라도 밝히면 좋겠으나 지금까지의 행태로 보아 기대하기조차 어렵다. 일본에 사장되어 있는 우리 문화재들을 어떻게 찾아내고 밝힐 것인지 지혜를 모으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장기적으로 모든 기회를 엿보는 수밖에 없다. 당분간은 극도로 경색된 한·일 간의 외교관계가 완화되고 우호적인 관계를 되찾기만을 고대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답답한 상황 속에서 우리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올해 ‘돌아온 문화재 총서’의 두 번째 사업으로 박재규 경남대학교 총장의 노력에 힘입어 1996년에 일본 야마구치현립대학(당시 야마구치여자대학)으로부터 되돌려받은 ‘데라우치문고(寺內文庫)’를 다루기로 했다. 첫 번째 사업이었던《 왜관수도원으로 돌아온 겸재정선화첩》은 왜관수도원의 선지훈 신부가 오랜 노력 끝에 독일의 상트 오틸리엔(St. Ottilien)수도원으로부터 영구대여 형식으로 되찾아온 정선의 화첩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이 화첩에 대하여 영인본 제작, 환수과정 및 학술적 의의를 밝히는 글들을 모은 단행본 발간, 특별강연회 개최, 고궁박물관과 협력하여 전시회 개최, 유공자 표창 등 다각적인 연구와 소개를 하여 국민의 많은 관심을 모은 바 있다.
두 번째 사업 대상인 데라우치문고에 대해서 철저한 학술적 검토를 기반으로 한 단행본 발간, 특별강연회 및 특별전시회를 개최한다. 즉 재단은 올해 ‘돌아온 문화재 총서 2’의 사업성과인《 경남대학교 데라우치문고 조선시대 서화》와《 경남대학교 데라우치문고 간찰 속의 조선시대》(11월 발간)를 발간하고, 특별강연회(12월 16일)와 <고국으로 돌아온 데라우치문고> 특별전시회(12.17~2015.2.22)를 고궁박물관에서 개최한다. 이를 통해 일본으로부터 돌아온 데라우치문고는 물론 재일 한국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한·일 양국 국민에게 새롭게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정치·외교적으로는 양국의 관계가 경직되어 있더라도 문화재와 문화 분야에서는 두 나라 국민들 사이에 소통이 이루어지고 우호적인 관계가 이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실마리가 되어 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재들이 햇빛을 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비단 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재만이 아니라 중국, 미국 등 다른 나라들에 사장되어 있는 문화재들에 대해서도 같은 관심을 가지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마땅할 것이다. 앞으로 갈 길이 참으로 멀고 험하다는 느낌이 든다.
안휘준・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명예교수

[Sight & Issue] 제5회 한-아세안 멀티미디어 공모전

아세안을 주목하라!

한국과 아세안 10개국 정부 간 경제 및 사회·문화분야 협력 증진을 위한 국제기구인 ‘한-아세안센터’에서는 회원국 청년작가들을 대상으로 사진, 영상, 뉴미디어 분야 공모전을 시행하고 있다. 2009년 한-아세안센터의 설립과 더불어 시작한 이 공모전은 올해로 5주년을 맞이한다. 아세안은 브루나이,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라오스, 말레이시아, 미얀마, 필리핀, 싱가포르, 태국, 베트남 10개 회원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과 아세안은 1989년부터 정치·경제·사회·문화 제반 분야에서 긴밀한 동반자 관계를 구축해왔다. 2009년에는 관계 수립 20주년을 맞이하여 더욱 강력한 동반자 관계를 위한 협력 제도화에 대한 필요성과 상호 협력관계 확대의 중요성에 인식을 같이하고 한-아세안센터를 설립했다. 경제 분야에서 아세안은 한국의 3대 교역 지역이며, 한국은 아세안의 5대 교역 상대국이다. 아세안은 2015년까지 인구 5억8000만여 명의 단일 시장과 생산기지를 목표로 하고 있어 동아시아 경제 성장에 큰 활력소가 될 것이며 한국에도 아주 중요하다. 사회·문화 분야에서도 한국과 아세안 간의 인적 교류가 더욱 증가하고 있다. 아세안은 한국인이 두 번째로 가장 많이 찾는 관광지이고 한국과 아세안 국가 상호 방문객이 지난 5년간 2배 이상 증가하여 연간 400만 명에 달한다. 이런 배경에서 한-아세안센터는 특히 문화예술분야의 다양한 국제행사들을 기획하며 아세안과 한국 간 이해를 도모하고 함께 평등하면서도 평화적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특히 시각예술분야에서는 보다 전문적인 작가들의 교류를 위한 <한-아세안 현대 미디어아트전>과 <한-아세안 멀티미디어 공모전>, 그리고 초등학생과 중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한-아세안 그림공모전> 등이 있고, 텍스타일, 가구, 기프트 쇼, 축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문화예술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한-아세안 멀티미디어 공모전>은 현대의 매체인 뉴미디어를 통해 한국과 아세안 청년들 간 상호 이해를 높이고 운송에 부담 없이 인터넷으로 자료를 보내 역동적인 교류를 할 수 있다는 장점에서 출발했다. 차별화된 전시감독(2009년 김유연, 2010년 신혜경, 2011년 서진석, 2012년 신수진) 체제하에 각국의 시각예술을 선도하는 기획, 미술평론가들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해 현대미술을 확장해 나가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해마다 주제를 선정해 작품을 공모하고 수상자들을 한국으로 초청해 예술기관들을 돌아보고 관계자들을 소개하고 있어 작가지망생들이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2010년 공모전 수상자인 필리핀의 대학생 나시(Nassier Nash Anggahan)는 국위를 선양한 젊은 예술가로 자국 대통령상을 받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장학생으로 유학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고 졸업 후 영화 메이커와 영상예술 전문작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브루나이는 인구 40만밖에 되지 않아 현대미술 전문가가 거의 없는 나라기에 아담 (Hassnal Adam Rassalhague Sulaiman)은 2011, 2012년도 두 번의 공모전에 연속 참여하고 수상하며 현대미술 보급에 기여하고 현재 브루나이를 대표하는 국제적인 미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런 성과를 보이며 공모전은 낙후된 과거와 현재가 아닌 미래의 아세안 지역의 새로운 이미지를 정립하고 글로컬 시대의 새로운 예술, 문화 정체성을 제시하고자 하는 목적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 2013년부터는 프로페셔널 작가전시와 젊은 작가를 위한 공모전을 격년제로 하면서 홍보와 기획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2014년의 경우 ‘아세안의 의(衣), 식(食), 주(住)(Lifestyle of ASEAN)’를 주제로 아시아의 다양한 패션, 장인정신, 식생활, 건축, 문화 등 일상생활의 소재를 통해 아세안의 새로운 문화적 가치를 조명하고자 한다. 일상적인 주제 안에서 11개국의 대상작 대부분은 특유의 전통 안에서 현대화되는 과정을 함축하는 번뜩이는 감각으로 포착한 작업들이다. 쌀 농사, 전통시장, 교통, 불교 건축물, 각국 의상은 전통과 현대, 계층, 성별을 아우르면서 독특한 문화예술을 전달하고 있다. 전시는 2015년 1월, 동대문 디자인플라자(DDP)의 갤러리 문, 하남시 문화예술회관, 경주시 예술의전당을 순회하며 한국 전역에 한국과 아세안 젊은 작가들의 시각을 선보일 예정이다. 이 기획을 통해 한-아세안의 젊은 시각이 문화대국 주변이 아닌 동등하게 다른 정체성으로 주목받으며 현대미술을 확장할 수 있는 예술의 장이 되기를 기대한다.
김미진·홍익대 미술대학원 교수

Nuttawuth_Fungfeang_The combination

누타우 풍펭 (Nuttawuth Fungfeang, 태국)) 태국의 오래된 주택과 현대적 건물을 표현한 작품이다

Giang_PHAM_A Quick nap

지앙 부 홍 팸(Giang Vu Hoang Pham, 베트남) 〈 Train’s Sleep 〉 기차 속 풍경은 베트남 사람들의 삶을 가장 잘 이해하는 방법 중 하나다

 

 

[Hot Art Space]

청화백자(靑畫白磁)는 공예와 회화가 절묘하게 결합해 조선왕실 미의식의 정수로 불린다. 청화백자를 대거 소개하는 <조선청화靑畫, 푸른빛에 물들다전>이 9월 30일부터 11월 16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렸다. 국보와 보물 10점을 비롯 총 500여 점을 선보이는 사상 최대 전시다. 그간 고려청자에 비해 청화백자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덜했던 것이 사실. 이에 이번 전시는 청화백자를 연상할 수 있는 현대미술 작품을 함께 배치한 섹션을 두어 관람객이 보다 친근감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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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 (2)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하고 현대자동차가 후원하는 작가 지원프로그램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가 제정돼 앞으로 10년간 매년 우리 중진작가 1인을 선정 지원한다. 그 첫 주인공은 이불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 2014: 이불전>으로 명명된 전시가 9월 30일부터 2015년 3월 1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열린다. 이 전시에는 <태양의 도시Ⅱ> <새벽의 노래Ⅲ>가 소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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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문화 (1)

11월 7일부터 12월 7일까지 김해 문화의전당 윤슬미술관에서 열리는 <한국현대미술의 흐름Ⅶ전>은 한국현대미술을 사조별로 다루는 연속된 형식의 전시다. 7회를 맞이하는 올해 전시는 <리얼리즘전>이다. 1980년대 민중미술과 부산의 형상미술, 그리고 행동주의 작가들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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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모아_권용주 (2)

설치작가 권용주의 개인전 <연경(Tying)>이 11월 15일부터 12월 14일까지 대림미술관 프로젝트 스페이스 구슬모아 당구장에서 열렸다. ‘연경(Tying)’은 직물을 짜기 위해 날실과 날실을 연결하는 공정을 일컫는 방직기술용어이다. 작가는 한국과 태국의 방직산업의 노동 형태를 다룬 3채널 비디오와 설치작품을 통해 우리가 속한 산업 환경과 개인적 삶 사이의 관계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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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비

달항아리와 수묵화가 만난 <달항아리와 몽중경(夢中景)>이 10월 29일부터 11월 19일까지 갤러리 가비에서 열렸다. 이번 전시는 전통 기법으로 달항아리를 빚는 성석진과 나무로 들어찬 풍경을 수묵화로 그려내는 구나영의 2인전이다. 흑과 백, 먹과 흰 도자기가 만나 마치 숲과 그 위로 떠오른 달이 어우러진 풍경을 보는 감흥을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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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주_고현주 (2)

6년 만에 열리는 사진작가 고현주의 개인전 타이틀은 <중산간(重山艮)>(갤러리 이마주, 11.5~21)이다. ‘중산간’은 《주역》의 52번째 괘로 “산들이 첩첩이 쌓여있어 나아가고 싶어도 나아갈 수 없으니 멈추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그 누구는 작가 혹은 우리이며, 풍경 또한 우리가 잃어버린 풍경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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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_이재효 (3)

이재효의 개인전 가 11월 14일부터 12월 14일까지 표갤러리에서 열린다. 나무와 철 등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섬세한 과정의 작업을 하는 작가는 그래서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이룬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구(球)’라는 가장 완벽하고 단순한 형태의 작업을 다수 선보이고 있는데 이는 ‘알 신화’, 즉 모든 사물의 기원에 대한 작가의 고민을 드러낸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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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메시스_민병헌 (2)

‘젤라틴 실버프린트’라는 전통적인 사진 인화방식을 고집하는 작가 민병헌의 개인전이 9월 13일부터 12월 14일까지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에서는 풍경 사진 외에도 <누드> 연작, 미발표작인 연작, 올해 작업을 시작한 <군산> 연작 등이 소개돼 작가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한눈에 살펴 볼 수 있다. 다양한 주제를 아우르는 작가 특유의 회색톤 사진은 절제미와 균형 감각을 잃지 않으며 독특한 아우라를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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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사이드_오원배 (1)

프레스코는 치밀한 준비 과정을 거쳐 제한된 시간 안에 빨리 완성시키는 기술을 요하는 어려운 장르이다. 하지만 서양미술의 역사는 프레스코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양화가 오원배는 갤러리 아트사이드에서 개최한 개인전 <순간의 영속>(10.23~11.19)에서 1980년대 유학시절 자취방에서 본 파리의 풍경을 천연 안료의 프레스코 기법으로 표현했다. 이를 통해 작가는 그리기의 위대한 노역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게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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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엠

용산구 동빙고동에 자리한 스페이스 비엠(space bm)에서 3명의 젊은 작가를 소개하는 전시가 열렸다. 김희연 최윤희 이은새가 참여한 <다른 공기전>(10.24~11.23)이 바로 그 것. 이번 전시는 풍경을 작가 각각의 감각적인 관점과 절제된 표현으로 풀어냈다는 공통점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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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리오_윤명로 (1)

 

윤명로 서울대 명예교수의 개인전 <정신의 흔적>이 10월 15일부터 11월 23일까지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열렸다. 한국의 대표적인 추상화가로 평가받는 윤 교수는 50여 년 화업을 이어오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78세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4m가 넘는 대작을 비롯 신작 20여 점이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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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호 (1)

9월 25일부터 11월 20일까지 슈페리어갤러리에서 열린 김태호 홍익대 회화과 교수의 개인전 타이틀은 <지우면 비로소 드러나는 것들>이다. 작가의 캔버스는 언뜻 패턴화된 균질성을 보여주는 듯하나 근접해서 보면 일일이 깎고 다듬어서 적층된 내부의 컬러를 드러내고 있다. 이를 통해 단조로움과 그 내부의 복잡 다단함을 동시에 드러내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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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무_이채영 (2)

먹과 모필을 이용해 풍경을 그리는 작가 이채영의 개인전 가 11월 18일부터 12월 8일까지 복합문화공간 에무에서 열린다. 작가는 일상에서 마주친 주변 풍경을 특유의 색감과 정서를 담은 모호한 풍경화로 표현한다. 이를 통해 전시장은 전체적으로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의 묘한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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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회동60_유승호 (4)

유승호의 개인전 <yodeleheeyoo~>가 11월 7일부터 26일까지 가회동 60에서 열렸다. 알려졌다시피 그의 작업은 세밀한 글씨로 표현하는 형상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작가의 작업에서 글과 그것이 구축하는 형상을 잇는 필연적인 관계는 없다. 이번 전시 또한 이렇게 글과 그림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작품으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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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익_정소연 (1)

네버랜드는 피터팬이 사는,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는 상상의 공간이다. 2000년대 초중반 미디어아트, 설치작업에 주력했던 작가 정소연은 최근 회화작업을 선보인다. 개인전 <네버랜드>(이화익갤러리 11.19~12.6)에서는 도감에서 차용한 식물과 하늘 이미지를 매끄러운 표면의 회화에 담아냈다. 작가는 실현 불가능한 기호의 숲을 네버랜드라고 명명하고 꿈과 현실이 해체된 또 다른 현실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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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드에이치_강상훈 (1)

작가 강상빈의 개인전 < We Are The Clay, You Are The Potter >가 10월 16부터 11월 14일까지 살롱 드 에이치에서 열렸다. 이번 전시의 주요 소재는 헤비메탈 그룹인 ‘아이언메이든’의 앨범 커버에 등장한 아이콘 ‘Eddie The Head'(일명 ‘에디’)이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아이콘이 어떻게 만들어지며, 사회적으로 어떻게 인식되고 구축되는지, 그리고 시각예술을 통해 어떻게 관계 맺게 되는지 탐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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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튼_박지혜

박지혜의 개인전 <파해(破海)>가 갤러리 버튼에서 11월 12일부터 12월 7일까지 열린다. “사랑이라는 통속적이고 일반적인 주제를 통해 그 관계의 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는 작가의 작업은 분할된 화면으로 남녀를 비춤으로써 관계 너머에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작가의 경험을 목격하는 인형은 부조리한 관계를 목격하는 또 하나의 작가의 분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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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원영

<Divine Theatre>로 명명된 오원영의 개인전이 11월 12일부터 25일까지 에이블 파인아트 갤러리(Able Fine Art Gallery)에서 열렸다. 사실적인 것과 환상적인 것의 병렬배치를 통해 그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을 드러내보이며 작가는 이번 전시에 12지(支) 동물을 연상시키는 피에타상, 정밀한 인체비례 구도 작업 등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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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크 (2)

 

11월 6일부터 12월 7일까지 누크갤러리에서 열리는 정직성과 홍승혜 2인전은 < Dance Macanique>로 명명됐다. 고도로 계산된 기하학적 프레임의 홍승혜와 붓질의 움짐임이 드러나는 정직성의 추상의 형태가 전시장에 함께 배치될 때 생성되는 새로운 조화를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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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스 캔_세흐부 (4)

인간의 정신작용이 이루어지는 뇌는 그 구조와 활동 과정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 11월 11일부터 29일까지 스페이스 캔과 오래된 집에서 열린 <살롱 드 세흐부: 두정현 씨의 정신풍경전>은 뇌에 관한 주제를 다양한 전문가들과 살롱 형식으로 논의하고, 이를 토대로 작품을 공동 제작한 다원예술프로젝트이다. 작가 신승연 윤지현 이예승 이준이 참여해 두 전시 공간을 두정현(頭情現)이라는 어떤 인물의 뇌 공간으로 설정해 다양한 감각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해석하는 방식의 작업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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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박물관 (1)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은 <근대회화-대한제국에서 1950년대까지전>(11.5~2015.04.11)을 개최한다. 이 전시는 대한제국기에서 1950년대까지 전통을 계승하며 한국화단의 기틀이 마련된 시기의 작품을 박물관 소장품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전시는 ‘근대회화의 태동: 대한제국’, ‘근대회화교육의 탄생:서화미술회, 서화협회’, ‘근대 동양화단의 발전: 새로움의 모색’, ‘문인문화의 근대적 향유: 금란묵회’, ‘서양화단의 형성’ 섹션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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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광모

구광모의 개인전 <순례자>가 11월 5일부터 11일까지 리서울갤러리에서 열렸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영원과 자유, 고요, 구원을 향한 여정으로 걸어가는 심상을 표현했다”며 “더욱 깊어진 세상의 사랑과 관용과 용서 기쁨을 알아갈 것이다”라고 밝혔다. 또한 동양철학을 바탕으로 작품을 통해 삶의 고요한 지점으로 향하는 여정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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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수

이동수의 개인전 <사물의 은유>가 10월 29일부터 11월 4일까지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열렸다. 작가는 사발, 책 등 익숙한 사물을 통해 영원과 찰나, 무한과 유한 등 대립하는 요소의 접점에 대해 사유한다. 한편 10월 19일부터 11월 4일까지 압구정 리더스피부과 내 갤러리에서도 작가의 전시가 열렸다.

[Special Feature]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것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것들

연탄(11.3%), 삐삐(9.3%), 공중전화(7.3%), 버스 안내양(5.3%), 시내버스 토근·회수권(5.1%). 이상은 2007년 갤럽에서 만 19세 이상 성인남녀를 대상으로 ‘지난 20년간 우리 주위에서 사라진 것들, 즉, 오래전에는 쉽게 볼 수 있었지만 요즘은 잘 볼 수 없거나 잊혀진 것들로 어떤 것이 가장 먼저 생각나십니까?’를 물은 조사에서 상위 5위를 차지한 답변이다. 새로운 상품, 건물이 사회를 언제나 진보시킨다는 이상 아래 우리의 일상 속 풍경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한다. 그러나 개발은 무엇의 소멸 위에 존재한다. 최근 새로 생긴 것만큼이나 사라진 것을 기억하는 바람이 여기저기서 불고 있다. 1980년대에 유행하던 가요의 리메이크앨범, 1990년대를 배경으로 삼은 드라마와 그 당시를 주름잡던 가수들의 컴백이 자연스러워졌다. 도시 속 네모반듯한 빌딩숲보다 얼마 남지 않은 오래된 동네가 관광지가 되고, 인터넷에는 ‘00년대 생 공감’이란 키워드로 1980~1990년대 출생한 젊은이들이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을 공유하는 시리즈가 유행처럼 번졌다. 지나간 시간을 기억하고, 소멸된 것에 대해 회고하는 자세는 단순히 나이 지긋한 이들의 ‘추억 팔이’에 그치지 않는다. 어제를 지나온 모두가 사라진 것을 곱씹는다.
미술은 익숙했으나 요즘은 잘 볼 수 없는 혹은 잊혀진 것들을 어떤 식으로 표현할까.
《월간미술》은 사라진 것을 작업의 소재나 주제로 취하는 작가 7인(팀)의 작품을 만나본다. 이들의 작업은 관객에게 경험하지 못한 혹은 경험한 과거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개발논리의 산물인 폐허라는 도시 속 공간에 대해 미술계에서 다양하게 시도되는 대처법, 최근 열린 일련의 전시에서 잊혀진 과거를 회고하는 성격을 띠는 전시도 짚어본다. 모든 것이 빨리 변화하고 쉽게 잊혀지는 지금, 생성되는것 보다는 없어진 것, 그리고 그 사라진 것들을 포착한 미술 속 기억의 책장을 열어본다. 2014년 끝에 서서, 지금 우리 곁에서 아련해져가는 것들에 대한 미술의 마주하는 법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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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추억

오브제의 발전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우리 주변을 둘러싼 다양한 도구가 어느새 오래되어 사라지고 그 자리는 새로운 무엇인가로 대체된다. 정재호의 작품은 지금은 사라진 익숙한 형태의 생활 속 물건을 보여준다.

정재호-대화_ 사본

<대화> 한지에 아크릴 135×200cm 2013

정재호-트랜지스터_ 사본

<트랜지스터> 한지에 아크릴 88×104cm 2014

“오래된 구형 전화기를 그린다면 그 이유는 전화기라는 쓰임에 있지 않다. 쓰임보다는 오히려 그 생김새에 있다. 투박한 외형은 그것이 다름 아닌 ‘전화기’라는 물건임을 강하게 보여준다. ‘전화기’라는 물건의 대명사에 요즘의 핸드폰 따위는 어울리지 않는다. 핸드폰은 존재감이 없다. 핸드폰뿐인가, 요즘의 사물은 모두 존재감이 없다. 얼마 전에 마트에서 커다란 TV를 보았는데 TV는 없고 화면만 있는 디자인이었다. 그러니까 사물의 기능이 형태가 되는 꼴이다. 나는 그런 사물을 보고 도무지 그릴 욕구가 생겨나지 않는다.
그림에 대한 욕구는 이야기에 대한 욕구와는 다르다. 그것은 순전히 생김새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난다. 이야기가 붓질을 지속시켜주지는 않는다. 그림은 매우 지루한 붓질의 과정이다. 그걸 지속시켜 주는 것은 역시 그 사물의 형태이다. 붓질은 떨어져 있는 사물들을 다시 만지는 행위이다. 저기 있는 저것은 만질/그릴 만한가? 다소 에로틱하지만 그게 진실이다.”
– 정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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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발하는 풍경

우리의 주거환경은 짧은 시간에 주택에서 아파트로 변화했다. 당대의 생활상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주거의 변화를 작가 김주리는 예민하게 드러낸다. 동네에서 사라져가는 근대주택은 흙과 물로 재현한 그의 작품에 의해 전시장에서도 서서히 무너져간다.

김주리 (3)

<휘경;揮景-h07> 흙, 물 70×36cm, 2012

김주리 (1)

< landscape-scence01(부분) > 흙 물 245×245×40cm 2014

“<휘경:揮景> 이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한국의 근대주택 시리즈는 1970~1980년대에 대량으로 지어진 주택으로 그 수가 점차 줄어들고 있지만 여전히 도시의 곳곳에서 서민의 보금자리 구실을 하고 있는 가옥들에 관한 작업이다. 근대건축물이 지어진 초기에 서구에서 들어온 붉은 벽돌과 시멘트 기와의 조합과 더불어 여러 형태의 문화와 욕구들이 혼합된 한국형 근대 주택의 모습이다.
실제 존재하는 집을 일정한 비율로 축소해 흙으로 재현해낸 다음 물을 부어 서서히 무너지는 과정을 통해 이 시대에 집이 가지는 의미와 역사성, 죽음과 소멸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 사회의 건축물은 당대의 정신과 문화, 재료, 시대적 상황이 혼합된 시대적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건축물을 흙으로 빚어 물로 녹이는 작업들은 생성과 소멸이라는 어쩌면 당연한 삶의 알고리즘으로 이는 삶에 대한 관심, 자기 반성적 존재성의 인식에 대한 고찰일 것이다.”
– 김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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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련한 공간

사진작가 김지연은 동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어린 시절 추억의 공간을 작품에 담는다.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었던 이발소, 정미소는 이제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이다. 아련한 추억을 회상시키는 그의 사진은 세대를 막론하고 복합적 감성을 자극한다.

김지연-이용원

<귀빈 이용원> 사진 2004

김지연 책-1

왼쪽에서부터 진안골 졸업사진첩, 근대화상회, 정미소의 풍경과 인물을 담은 사진집

“어떤 사람들은 나를 추억을 찍는 사진가라고 이야기한다. 시대에 뒤처진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향수를 달래는 감정을 사진을 빌려 말하는 사람이라 여긴다. 정미소라든지 이발소 등…
물론 여기에는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겨있다. 그런데 이것을 나 혼자 생각하고 있으면 향수지만 모두와 공유하면 역사가 되고 문화가 된다. 그러나 나는 한 이발소, 한 이발사와 정면으로 마주서서 이들의 직업, 이들의 인생을 직시하고자 했다. 사라지는 것을 기억한다는 일에 이미 감상적인 의미가 내포 되어 있다고 본다. 나는 그 감상을 무시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그 위에 떠있는 찌꺼기인 거품을 제하고 정제된 감정을 껴안고 싶다. 그렇다! 역사에 남을 일은 아니더라도 우리의 삶을 공유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을까!”
– 김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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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전시장

새로 생기는 갤러리만큼 이런저런 이유로 사라져가는 전시공간도 많다. 젊은 작가 오희원은 지난 몇 년간 생성, 소멸되는 전시장을 리서치해 지도에 표시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캔버스에 텅 빈 전시장을 담았다. 지금은 사라져 볼 수 없는 전시공간이 그의 그림에 남아있다.

Blind Site 4

종로구 통의동에 위치했던 브레인팩토리 전시장을 그렸다. < Blind Site : A dry atmosphere > Oil and color pencil on canvas 130.3×89.4cm 2012

Blind Site 2

강남구 청담동에 위치했던 PKM Trinity Gallery의 전시장을 그렸다. < Blind Site : Natural > Oil and color pencil on canvas, 145.5×97cm 2011

“회화 연작은 사라져가는 풍경을 기념한다거나 혹은, 묘사에 집중한 그림이나 제도 비판을 의도한바 또한 아닌 불명확한 상태에서 출발한 작업이었다. 전시장이란 특수한 공간에 내재하는 양상을 관찰하면서 재현된 회화는 익명의, 개별성을 함축한 공간으로 관망되면서 범주화된 전시장들의 축약된 세계로서 가시화돼왔다. 실공간의 기록을 단서 삼아 다층화된 시선 아래, 작업은 과거와 현재, 현실과 비현실, 시간의 연속성과 단절 같은 상반된 흔적을 기록하는 매개체로서 그려졌고, 의도의 개입 여부를 떠나 현재를 관찰하는 재현의 도구로 읽히면서 시간의 동반 아래 의미가 생성되고 있었다. 재현하는 대상과의 거리감을 확보하고자 한 회화는 강화된 과거와 망각돼가는 오늘 그리고 흐릿한 미래를 암시하는 정조를 드리우며 그려진 대상을 표지하는 상징으로 대리되었고, 과거의 미술이 설정했던 배경과는 달리, 눈에 보이지 않게 재편되는 사태를 기록해 나가는 과정을 취하면서 변모된 오늘의 이미지를 그려 나가고 있다.”
– 오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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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갈색의 마찰

요즘은 주변에서 찾기 힘들지만 예전에 성냥은 식당, 다방, 레스토랑 등에서 계산을 하고 손쉽게 구할 수 있던 물품이다. 이기일은 전시 리플렛을 성냥으로 제작하고, 성냥의 주재료인 유황을 사용한 다양한 작업을 선보였다.

이기일 (1)

<성냥그림> 캔버스에 발화제 232×160cm 2005

이기일 (2)

2005년 관훈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전시광경

“한때 전국에 300여 개의 수공업 형태 성냥공장이 있었으나 모두 사라지고 지금 단 한곳이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경북 의성에 위치한 국내 유일한 성냥공장 성광사의 협조를 받아 제작된 이 작업은 손의 움직임과 마찰에 의해 발화하는 구체적인 물질을 선택하였다. 격동기의 사상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군인의 형상을 성냥 재료인 유황으로 만들고 전시 마지막 날 돋보기로 점화하였다.”
– 이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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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쟁이의 리얼리즘

1990년대까지만 해도 영화관 앞에는 상영 영화를 소개하는 간판이 있었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를 담아 지나가는 이의 눈을 사로잡던 영화간판은 이제는 볼 수 없는 시각매체 중 하나다.

박태규 (2)

박태규 <추억 Memory1>합판위에 페인트 180×90cm 2002

“어느 순간 역사 속에서 사라진 극장 간판. 박태규는 유일하게 수제간판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이 시대 마지막 영화 간판쟁이다. 극장 간판하면 상업적인 것이 전면에 드러나 있어 순수미술의 영역에 포함시켜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박태규는 아카데미즘 미술에서는 볼 수 없는 대중적으로 친숙한 이미지와 매체적 특성을 무기로 삼아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축해오고 있다. 그의 작품 속에는 시대상이 담겨 있으며, 대중과 가까이 호흡하며 인생의 기쁨, 슬픔 등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매끄럽지 않고 다소 투박한 붓질은 의도적으로 사진과 같은 느낌을 피하고 우리네 인생사의 고단함을 화폭에 담아 따뜻하게 위로하고 싶은 작가의 속내가 묻어 있다. 그리하여 박태규의 작품은 보는 이들에게 각자의 삶의 역사를 돌아보게 하고 그 속에 살아 숨쉬었던 추억과 향수에 젖게 만드는 매개체 역할을 합니다. 한때는 저급한 것으로 여겨졌던 간판을 자신만의 독자적 미술세계로 승화시킨 작품을 통해 새로운 리얼리즘 미술의 매력을 경험하고,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각자의 생에서 아름다웠던 한때를 추억해 볼 수 있게 한다.”
– 나민환 (큐레이터)

그림1

김.강.박 씨 <우리생애 최고의 순간> 캔버스 위에 유화 100×65cm 2008

“물질주의에 의한 사회의 변질은 ‘인간을 위한 도구’에서 ‘도구를 위한 인간’의 형태로 삶을 변화시켰다고 생각한다. … 디지털 프린트나 화려한 컴퓨터 영상에서 느낄 수 있는 기계적 조형이 아닌, 직접 손으로 차곡차곡 그려 올린 영화간판을 통해 위트 있는 언어로 묵직한 아날로그적 감성을 담아냄으로써 잊혀가는 휴머니즘을 드러내고자 한다. 또한 간판 제작 형식을 통해(지워내고~그리는) 대상을 탐구하는데 있어 표면적 시각 요소보다 내포된 역사성이 주는 가치에 더욱 접근하는 탐구 방법을 취하고 있다.”
– 김.강.박 씨(김현승, 강천식, 박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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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

타임캡슐 봉인해제

잡지, 신문, 포스터를 포함한 다양한 디자인 소품은 세월이 지나면 당대를 보여주는 중요한 시각 사료 구실을 한다. 최근 과거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다양한 시각매체가 전시장에 등장했다. 단순히 지난 시간을 담은 사진이나 영상을 넘어 다양한 오브제들이 전시의 중요한 아카이브로서 함께 한다. 서울역사박물관의 기증유물특별전 <응답하라 1994 그후 20년>(10.29~2015.2.22)은 역사의 흐름을 생활 문물로 보여주는 전시다. 서울 수도 탄생 600주년이던 1994년 서울의 생활, 풍습, 인물, 문화예술 등을 상징하는 문물을 선정해 남산골 한옥마을에 매설한 타임캡슐과 1994년 어느 날을 영화, 비디오, 사진, 소리 등으로 기록한 이재용 감독의 기록물 <한 도시 이야기> 등을 전시했다.
이 기록물은 작가 최정화, 오형근을 비롯해 각 분야의 예술가들과 일반 시민들의 참여로 이뤄져 일상의 기록을 다각도의 시선으로 남겼다. 현재는 슬라이드 필름과 기록영상, 그 기록이 담긴 테이프와 필름이 전시되어 있다.
또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상설전시장은 다양한 시각자료로 한국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 볼 수 있게 전시했다. 반공, 유신, 산아제한 등을 다룬 포스터는 사회 변화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1960~1980년대 한국의 성장을 주제로 한 제3전시실은 영화, 음악, 스포츠, 패션 등 당시의 대중문화 아이템을 실물자료와 영상으로 살펴볼 수 있도록 전시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전시가 더 페이지갤러리에서 열린 한국근현대 체험전시 <노 모어 아트전>(7.3~9.28)이다. 이 전시는 복고주의적 시점에서 과거의 거리를 재현하고 마치 영화세트장처럼 관객이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 이중섭, 박수근, 구본웅, 이인성, 나혜석이 살았던 공간을 재구성하고 이상의 제비다방, 국제시장 같은 곳을 재현해 관객이 우리나라 근대문화의 중심을 체험해 볼 수 있도록 했다. 이처럼 생활 속 물품들이 전시장으로 들어와 우리의 향수와 기억을 자극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역사를 그리는 중요한 자료 구실을 하고 있다. 전시라는 방식을 통해 단순히 과거의 문화나 공간을 박제화하는 위험성도 있지만, 당시를 경험한 많은 이에게 추억을 떠올리고, 그 시대가 생소한 이들에게는 사료로서 읽힐 수 있기에 의미가 있다. 복고문화는 단순히 세대간의 차이로 구별짓기보다 그 간극을 좁히는 소통의 무대가 될 수 있다. 지금 너무나 익숙한 물건도 자료로서 또 사료로서 탈바꿈할 순간이 머지않았다.
– 임승현 기자

대한민국역사박물관 (5)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3전시장에 전시된 포스터와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물품들. 대중문화를 엿볼 수 있는 영화 포스터와 간판도 전시되어 있다.

더페이지 (9)

더페이지 (4)
더 페이지 갤러리에서 열린 <노 모어 아트전> 전시장 광경. 건물의 겉모습뿐 아니라 실내까지 재현했다.

응답하라 (6)
서울 60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타임캡슐을 포함해 1994년의 생활상을 당시의 물품을 통해 살펴보는 서울역사박물관 전시장 광경

[Special Feature]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것들

화단의 과거사가 때늦게 정리된 까닭은 …

반이정 미술비평

1981년 국내 개봉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테스>(1979)를 지난 11월 극장에서 관람했다. 칸영화제 클래식 복원 프로젝트에 따라 감독이 보관 중이던 필름을 4K 디지털 리마스터링 복원을 통해 HD급 화질로 복원한 덕에 33년 만에 재개봉되었기 때문이다. 칸영화제의 고전 명화 복원 사업과는 무관하게, 2000년 전후에 개봉한 영화들도 디지털 리마스터링 복원으로 화질과 음질을 보강한 버전으로 잇따라 재개봉되고 있다. <인터스텔라>의 흥행에 힘입어선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초기 히트작 <메멘토>(2000)도 디지털 리마스터링 복원으로 13년 만에 재개봉됐고, 레오 카락스의 <퐁네프의 연인들>
(1991)도 22년 만에 재개봉한다.
새 영화를 셀 수 없이 쏟아내는 오늘날 극장가에, 굳이 지난 시절 고전을 복원하는 후대의 오마주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재개봉한 <테스>의 보도자료에 따르면 복원을 통해 HD급 화질을 확보했다고는 하나, 오늘날 수준의 고화질을 기대하고 보면 안 된다. 상업예술계의 과거 복원 사업을 보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일 듯싶다. <테스>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나스타샤 킨스키의 나이는 18세다. 관객은 1980년 전후로 여배우의 얼굴을 인쇄한 영화 포스터를 아른아른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그 무렵의 자신을 환기하면서 향수에 젖을지도 모른다. 제도 예술계의 생존은 주목을 끄는 스타에 의존하기 마련이니, 지난날 스타들을 이상화하는 생존 전략은 이상한 것도 아닐 게다.
과거를 복원하는 또 다른 사정은 원작의 품질과는 무관하게, 복원 사업이 후대의 독자적인 성과물로 기록되기 때문일 것이다. 원작을 정교하게 복구하는 디지털 세대의 기술력은 아날로그 세대의 유산을 자기 방식으로 소화해서, 디지털 세대의 독자적인 성과물로 등록한다.
연말을 전후로 한국 화단의 과거사를 복원하는 전시가 3편 이상 개막했다. 아르코미술관은 <미술을 위한 캐비닛, 아카이브로 읽는 아르코미술관 40년>에서 지난 40년의 기록물 열람으로 아르코가 걸어온 40주년을 기념했다. 소마미술관의 은 한국 동시대미술의 추진력을 1986~1988년에 출현한 특정 전시장과 기획전에 있다고 가정한다. 그 시기에 출현한 일부 전시를 부분적으로 복원하는 전시회를 열었다. 올해 부산비엔날레도 국내 작가의 국제 비엔날레 참가 기록을 살펴보는 특별전 <한국현대미술 비엔날레 진출사 50년>을 마련했다. 모두 전시된 출품작보다 과거 자료의 열거와 자료집 출간에 집중한 아카이브형 전시였다. 우리 화단 역사의 지난 순간을 불완전하게 복원한 예는 드물게 있었다. ‘현실과 발언’동인 창립 30돌을 기린 <현실과 발언 30년>(2010) 같은 전시가 그런 경우다.
지난해 베니스비엔날레 개막 즈음 열린 (이하 )는 1969년 쿤스트할레 베른에서 열린 문제적 전시 (이하)을 44년이 지난 2013년 베니스로 옮겨놓은 과거 복원 전시의 대표적 국외 사례일 것이다. 그렇지만 44년의 시차를 타임머신도 극복할 순 없었다. “1969년 당시로선 일상적 오브제들로 채워진 전시장의 충격적인 풍경이, 오늘날 전시장에서 목격되는 다만 상식적인 풍경과 같아진 사정도 있다.”(필자의 글《 월간미술》 2013년 11월호) 이처럼 전설을 복원한 전시회는 세간의 주목을 받긴 쉬우나, 전설이 된 전시 앞에서 감동을 주문하는 관객들의 플라시보 효과로 과대평가받은 부분이 분명 있을 게다.
과거사를 복원하는 동력은 또 무엇이 있을까? 손쉬운 해답은 과거를 소홀히 다룬 우리의 부실한 기록문화에 대한 자성의 결과로 보는 거다. 그렇지만 아르코미술관이 소박한 이번 자료전을 마련하려고 개관 40주년까지 손놓고 있던 정황이나, 정권이 수차례 바뀐 연후에 ‘현실과 발언’의 30주년 전시가 마련된 점 등을 볼 때, 10년 단위 기념행사에 내면화 된 타성적인 대응 같기도 하다. 장소 이전과 두 차례 명칭 개정까지 무려 40년의 역사를 아르코미술관이 이제서 중간 정리한다는 것도 늦은 감이 있다. 국가 기관인 아르코의 뒤늦은 자기 역사 정리는 과거보다 현재의 성과에 집중하는 우리 사회의 부실한 기록문화를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이제 원로작가로 분류되는 김구림, 성능경, 이건용, 민정기, 윤석남 등이 전성기를 한참 지난 2000년대에 와서야 아르코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같은 국공립미술관에서 때늦은 회고전을 여는 현상은 어떻게 봐야 할까. 1990년대 이전까지 화단 헤게모니가 형식주의 미술가들에게 편중된 데에 따른, 후대의 뒤늦은 구조조정일 게다. 1세대 원로 실험미술가 회고전에서 그들을 평가하는 ‘국내 최초의’라는 수식어의 잦은 등장이나, 작가 연보와 세계미술사 연보를 나란히 배치하는 무리수나, 서정추상부터 실험영화와 대지예술에 이르는 다양한 실험이 작가 1인의 연보 안에 압축적으로 담긴 사정이나, 원로 작가가 여전히 자기과시형 작업을 내놓는 이유 등도, 형식주의 미술과 실험미술 사이의 비대칭적 평가에 대한 실험미술가들의 서운함의 표시처럼 보인다.
화단의 과거사를 정리하거나 재평가하는 작업이 근래에 자주 관찰되는 까닭은, 형식주의 미술과 실험미술 모두 자생적이기보다 후기식민주의적 조건이 초래한 결과여서일 것이다. 그건 한국 미술계가 자생적인 동시대성을 1980년대 전후에야 뒤늦게 확보했다는 방증 같기도 하다.
우리 화단의 과거사 복원 배후에는 당장의 성과에 집중하고, 압축 성장과 시대의 유행에 집중하는 공동체의 집단 무의식을 향한 자성이 작용해서일 게다. 지난 시절 기록물을 한자리에 모은다한들, 그 당시의 현장을 가감 없이 평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당사자들의 회고와 기록물에 의존한 과거 복원은 불완전하기 십상이다. 기억에 의존한 평가는 왜곡되고 윤색되기 쉽다.
근래 과거사 복원 움직임은, 동시대미술의 불안정에 대응하는 미술계의 고립감의 표현 같기도 하다. 아르코미술관의 <미술을 위한 캐비닛>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중견미술인의 인터뷰 영상을 보자. (근래 화단 트렌드에 익숙하지 않아) 전시장을 찾지 않게 된다는 윤석남의 고백, 새로운 시각예술 조류에 익숙하지 않다고 털어놓는 전-현직 문예진흥위원장들의 진술, 미술관들이 복합문화공간화하는 현상에 아쉬움을 표하면서 미술의 정체성을 살린 차별화된 미술관을 주문하는 안규철의 요청, 아카데미즘과 단색화가 지배한 1980년대 화단에서 ‘현실과 발언’이 주력한 대중과의 소통에 자부심을 드러낸 윤범모의 회고 등은, 손쉬운 키워드로는 포착되지 않는, 동시대 다변화된 한국 미술을 향한 중견 미술인들의 부적응처럼 느껴졌다. 매체 변화가 초래한 오늘날 미술의 다변화에 대해서는 그 어떤 미술 전문가도 쉽게 적응할 수 있다고 자신하기 어려울 게다. 때문에 수십 년 전 우리 미술의 과거를 재정리하고 재평가하는 일련의 복원 작업은, 단순한 키워드와 미술운동과 유대감만으로 존립할 수 있었던 구세대 미술인들이 비선형적인 동시대미술의 정체성을 견제하는 장치처럼 읽히기도 했다.
작년 베니스에서 을 복원한 이 열린 배경도 개별 작품이 관객과 1:1로 마주하며 감상가치를 지녔던 모더니즘의 패러다임에서, 다종의 출품작들이 한자리에 뒤엉켜 ‘어떤 느낌’을 연출하는 패러다임으로 전환되는 분기점을 후대의 동시대미술인들이 기리기 위한 것일 게다. 선명한 쟁점을 잡기 어려운 오늘날 미술계의 종잡기 힘든 풍경으로 넘어가는 분기점을 어쩌면 포스트미니멀리즘, 아르테포베라, 개념미술, 대지미술이 뒤엉킨 <WABF69> 으로 보고, 그 미학적 전환기에 보내는 후대의 예우 같기도 했다.

아르코 (4)

<미술을 위한 캐비닛, 아카이브로 읽는 아르코미술관 40년전>(아르코미술관 10.24~11.30) 전시장 광경

송동 (2)

2006년 광주비엔날레에 설치된 쑹둥의 <버릴것 없는(Waste Not)>

미술관 건축의 복원
이제까지 과거 미술사를 복원한 전시 기획의 생리만 다뤘는데, 미술관은 그 스스로 용도를 다한 건물을 복원하는 과정을 통해 문화적인 갱신을 꾀했다. 루브르 박물관이 프랑스혁명으로 대중에게 공개되기 전까지, 왕족의 소장품을 모아둔 궁궐이었던 사실이나, 철도역과 호텔을 겸한 건물을 허물지 않고 프랑스 인상주의미술의 성지로 전용한 오르세 미술관이나, 2차 대전 직후 지어진 화력발전소가 수명을 다하자 현대미술관으로 개조한 테이트 모던 등이 대표적이다. 우리에게도 있다. 구 서울역사를 원형 복원 후 복합문화공간으로 변형한 ‘문화역서울 284’나, 군사정권의 잔재인 기무사를 미술관으로 전환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나, 전성기를 지나 퇴락하는 문래동 철공소 거리를 다종의 대안공간들로 만든 ‘문래동 예술촌’처럼, 복원을 통해 공간성을 갱신해서 뇌리에 각인된 전시장이 적지 않다.
과거사를 손질한 기획전 프로젝트나 복원을 통해 갱신을 거듭한 미술관의 역사처럼 창작 행위 중에도 폐기된 과거를 손질해서 전에 없는 감동을 만든 시도가 있다. 폐목재를 모아 근대 여성의 인물 계보로 재구성한 윤석남의 설치작업은 버려진 사물과 여성의 일반적인 형편 사이의 유사성 때문에 해석의 지평을 넓혔다. 쇠락한 구식 아파트의 파사드를 연달아 기록한 정재호의 동양화는 제도권 화단에서 동양화의 구태의연한 존재감에 대한 자기고백처럼 읽히기도 한다. 철지난 사물을 집대성한 것만으로 고유한 미적 성취를 구현한 예는 올해 ‘문화역서울 284’에서 열린 최정화의 개인전 <총, 천연색>을 들 수 있다. 조악한 플라스틱으로 만든 최정화 스타일의 인공 설치물 외에, 출품작 중 절대다수는 그저 수집된 기성품들을 수북이 쌓고 나열한 것이었다. 이미 오래전 폐간된 잡지와 장난감, 영세하고 볼품없는 의자들의 컬렉션으로부터 관객은 전에 없는 감동을 발견하게 된다.
방대한 수집품목에서 창작의 발상을 얻은 예술가는 많다. 앤디 워홀이 사망할 때까지 수집한 물건이 담긴 상자에 날짜와 색인을 붙인 결과, 무려 612개의 상자가 나왔는데 <타임캡슐>이라 명명된 이 보관 상자에는 범죄사진과 치아 틀까지 보관되어 있었다. 저장강박증 때문에 물건을 버리지 못한 어머니의 1만점이 넘는 소지품들로 초대형 설치물을 구성한 중국 예술가 쑹둥도 있다. 전혀 사용할 수 없는 소지품들로 완성된 쑹둥의 설치물 <버릴 것 없는>은 쑹둥의 어머니의 일생을 대리 증언하기도 하며, 자신의 지난 추억을 환기시키는 물건을 발견한 관객에겐 감정이입의 감동을 줄 것이다.
복원하려는 욕구와 향수를 이끄는 동력은 어디서 올까? 서구의 한 연구에 따르면, 과거 유행했으나 현재 더는 구할 수 없는 물건이 소비자에게 향수어린 구매욕을 일으키는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자기 선택권이 있는 20대 초반에는 자신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사물과 정서적으로도 강하게 결합하게 된단다. 그 무렵 호감을 일으킨 사물은 세월이 많이 지나서도 향수와 애착을 일으키는 사물로 남는단다.
과거 복원을 통해, 한국 동시대미술의 출발점을 1980년대로 귀결시킨, 아카이브형 전시 두 편(아르코미술관, 소마미술관)을 둘러보던 중, 모순된 감정도 느꼈다. 국내 미술이 가까스로 자발적인 동시대성을 확보한 시기가 신군부 집권기와 우연히 일치했고, 신군부 때 요직을 맡은 박세직이나 전두환 같은 인물이 주요 전시 개막식에 요인으로 얼굴을 비춘 영상 자료들을 반복적으로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화단의 과거사를 정리할 때마저 정치적 트라우마에 직면해야 한다. ●

노순택·백승우가 서울관 건립 과정을 담은 영상·사진전시 의 모습

노순택·백승우가 서울관 건립 과정을 담은 영상·사진전시 <미술관의 탄생-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건립기록>의 모습

 

 

[Special Feature]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것들

폐허뿐인 세상의 미술

함영준  커먼센터 멤버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는 용어가 새삼 각광을 받는 모양이다. 도심재활성화라고 곧잘 번역되는 이 단어는 한 도시가 발전의 동력으로 삼던 산업의 양상이 바뀜에 따라 도시를 구성하는 인간의 생태가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산업 구조가 변화하면서 예전에는 필수적이었던 커다란 창고 같은 건물은 버려지게 된다. 그러면 작업실로 쓰기 위해 집세가 저렴한 큰 공간을 찾던 예술가에 의해 발견되어 다시 새로운 생태계가 일궈진다. 그리고 결국 새로운 상업지구로 변모해서 집세가 오른다. 그런데 이제는 이러한 수학공식과도 같은 일련의 과정을 목격하기 위해 굳이 뉴욕이나 런던 같은 서구의 대도시를 방문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뒤늦게 맞은 근대를 스쳐 보내버린 제3세계의 기형적인 도시들에서 이러한 현상은 보다 압축적이고 흥미롭게 재현되는 듯하다. 바로 서울말이다.
600년이 넘은 도시라고 하지만, 서울은 굉장히 많은 부분에서 역사가 단절돼 있다. 이것은 20세기 중반에 큰 전쟁을 겪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 보통 눈부시다고 수식되는 경제 발전의 기반을 여전히 건설업에 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 박원순 시장이 취임한 2011년 직전까지
서울
은 수많은 대규모 공사 계획이 수립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중 대부분은 몇 개의 동 단위 면적이 넘는 지구를 송두리째 철거하고 그 위에 다시 새로운 아파트를 짓는 거대한 계획이었다. 아파트 건설과 연관된 경제적 역학 관계에 대해서 이 글에서 깊게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중요한 것은 꽤 오랜 시간, 아니 6.25전쟁이 끝난 서울의 시민들은 단 한 번도 안정된 주거 환경 속에서 인생 전체를 설계할 기회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현대의 서울을 규정짓는 이미지 역시 쉽게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목동에 큰 아파트 단지가 생긴 직후였을거다. 내가 유년을 보낸 서울의 서북부는 한창 연립주택 공사 붐이 일었다. 원래 나의 동네에는 마당이 있는 1층 주택들이 늘어서 있었다. 언덕이 많아 수박 크기의 각진 돌을 쌓고 시멘트를 발라 고정시켜 둔 축대가 곳곳에 있던 동네였다. 이런 동네에 소규모 건설업자들과 복덕방 주인들과 집주인들이 다같이 합세해서 오래된 집을 헐고 연립주택을 짓기 시작했다. 아마도 보다 많은 가구의 주거권을 보장하기 위한 정부 정책과 맞물린 선택이었을 것이다. 또는 새집을 분양받아 재산을 늘리려고 했던 서민의 풋풋한 재테크 전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환경은 나에게 공사장에 대한 특징적인 이미지를 남겼다. 공사가 시작되면 인부들은 모래를 쌓아뒀는데 큰 무덤 크기였다. 바다에서 퍼왔는지 모래에는 작은 조개껍데기가 섞여 있었고, 놀이터가 없던 변두리의 아이들이 그 위에 올라 놀았다. 인부들은 옆에 세워 둔 체에 모래를 걸러내고 시멘트와 섞은 뒤에 등에 지고 일일이 ‘공구리’를 쳤다. 수평에 맞춰 실을 묶고 거기에 따라 벽돌을 쌓았다. 동네 전봇대마다 세로로 된 작은 현수막이 붙었는데, 어쩌구 빌라, 저쩌구 맨션이라는 이름의 새집을 20평 남짓의 크기로 분양하고 실입주금은 얼마라는 내용이었다. 그 빨갛고 노란 현수막과 모래의 밝은 황토색, 벽돌의 붉은색과 시멘트의 회색, 내가 겪은 유년의 이미지는 어렴풋하게나마 그러한 색깔로 구성되어 있다.

북서울 (10)

강북지역의 도시 근대화 과정에서 잊혀진 풍경과 삶의 모습을 살펴보는 <강북의 달>(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10.7~11.23)의 전시장 광경.

구슬모아당구장

대림미술관에서 운영하고 있는 대안공간, ‘구슬모아 당구장’의 건물 외관

세월이 흘러 그렇게 지어진 연립주택이 평균 20년 정도 되었을 시점이 되자 마지막으로 아파트 단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다. 강남을 중심으로 해서 잠실, 노원구, 양천구 등 아파트로 특징적인 주거 형태를 구성했던, 서울의 전통적인 동네가 아닌 동네들도 아파트를 원했다. 이러한 재개발은 잠실과 반포에 대규모로 계획된 야트막한 주공아파트를 새로 짓는 것과는 좀 달랐다. 붉은색 벽돌, 초록색 옥상, 노란색 물탱크로 대표되던 서민들의 언덕은 힐스테이트 같은 이름으로 새단장되었다. 이러한 난리통을 거쳐 결과적으로 궁극의 목표였던 시세 차익을 얻은 서민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2000년대에 유년을 보낸 청년 작가들에게 동 단위로 철거되어 엉성한 가림막 사이로 보이는 폐허의 이미지는 내가 동네에서 보았던 작은 공사장에 비해 훨씬 거대하고 막막하며 또한 쓸쓸한 감정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스프레이 래커로 ‘철거’라고 쓴 집들은 한동안 철거되지 않았고, ‘원주민 부동산’ 같은 맞춤형 상호를 양산했다. 모든 경제지표는 경쟁하듯 우울한 전망을 암시했고, 계급투쟁의 원리를 전지구적으로 공유하게 된 스마트폰을 맞이해 신자유주의라는 용어가 마치 공적처럼 일상화되었다.
올해 초에 나는 회화를 중심으로 하는 살롱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전시는 총 69명의 작가가 150여 점의 작품을 낸 기형적으로 큰 규모의 전시였고, 참여한 작가의 대부분은 20대에서 30대를 지나가던 중이었다. 이러한 규모는 처음 생각보다 좀 더 커진 것인데, 이는 젊은 작가의 작품들이 예상보다 그다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중 상당수의 풍경화는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자연과 맞물리는 풍경이 아니라, 도시를 소재로 하고 있었다. 그것도 도시의 틈새, 무너진 콘크리트와 그 주변을 담은 작업이 두드러졌다. 특히 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 주변을 들러 작가들을 만났을 때, 나는 꽤 많은 작가가 무엇을 그려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갈팡질팡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가장 쉽고 진정성 있는 접근법으로 일컬어지는 ‘제 주변에서 소재 찾는 법’을 시전했을 때, 그들이 계속해서 버려진 현대적 건축물에 집착하듯 달라붙는 장면은 꽤 신기했다.
신기함의 원인은 이러했다. 대부분의 경우 한국에서 미술을 전공하기 위해 겪어야 할 유년은 대강 예측이 가능했다. 비용을 지불하고 사교육을 통해야만 입학이 가능한 정도의 기술을 습득할 수 있다는 사실과, 미술문화를 가깝게 여기기 위한 배경 부모의 문화적 취향은 한국에서라면 아파트를 중심으로 구성된, 소위 중산층의 선택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아마 현재 젊은 작가의 대부분은 폐허로 이루어진 환경과는 먼 공간에서 성장하며 그 이미지에 영향을 받고 미술가의 꿈을 꾸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폐허는 무엇일까? 우선 그들에게 폐허란 존재하지 않은 과거를 향수하기 위한 관문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과거, 즉, 사라지는 것에 대한 향수는 새롭게 태어나는 것에 대한 일말의 기대 대신에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는 물리적 공간에 미술가로서 본인의 처지를 대입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마치 사회운동처럼 실천을 담보로 하는 미술이 폐허를 집중적으로 리서치해 온 이유는 파괴의 스펙터클 자체가 주는 묘한 쾌감이 그릇된 현실을 폭로하는 이미지로서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오히려 그러한 운동은 자칫 완벽한 논리적 구조를 추구해야 한다는 사명 때문에 오히려 작품 속의 미적 흐름이 가능한 공간을 차단하는, 때문에 굳이 미술작품으로 호명해야 할 이유가 없는 콘텐츠 덩어리가 되기 일쑤였다.
오히려 폐허는 젊은 작가들에게 앞서 제시한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그럴싸한 영단어가 주는 어감대로, 전지구적으로 공유된 지역-생태-재활-자생 등의 비교적 새로운 가치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전유되고 있다. 실제로 지난 한 해, 서울의 수많은 지역은 미술가들에 의해 ‘공공 리서치’라는 작업의 대상으로 선택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리서치 과정의 대부분은 커뮤니티가 처한 상황에 대해 감상적 인식 이상의 결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이는 우선 서울에만 500개가 넘는다는 지역 축제의 과잉 현상이 낳은 콘텐츠의 혼종교배 때문이기도 하다. 대중이라는 별명을 얻은 시민과 ‘쉬운’ 예술의 만남을 주선하는 수많은 행사에서 그래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어지는 수많은 조형 설치물을 한 지역에 대한 면밀한 조사와 연구를 통해 미술적 상황을 연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할 ‘공공 리서치 미술작업’과 변별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보다 깊은 운명적인 결핍이 있다. 그 결핍은 이제 더는 폐허나 오래된 커뮤니티가 현대적 도시의 보편적 경향을 드러내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뉴욕의 PS1과 런던의 테이트모던이 헌 건물을 미술공간으로 전용한 사실에 대한 수많은 연구 자료가 존재하며, 그렇게 폐허를 의도한 인테리어 디자인은 이미 쇼핑몰 디자인으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지나간 유행이기도 하다. 현재의 상태와는 다른 상황을 제시해서 각을 세우려는 태도가 더 이상 ‘대안공간’이라 불리는 전시장만의 태도가 아니라는 것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옛 기무사 건물을 존중하는 방식이나, 대림미술관 등의 대형 전시장에서 구슬모아 당구장 같은 (대안의) 대안공간을 운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그렇다면 다시 이야기해보자. 폐허가 지칭하는 문화적 지형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그 논의를 계속해서 진행해야 할까? 그럴 수 있을까? 2014년까지 서울의 미술계에 던져졌던 ‘폐허’라는 공간, ‘도시’라는 화두는 이미 살점이 다 뜯긴 채로 다시 어딘가에 버려질 운명에 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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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명의 젊은 작가가 참여한 커먼센터 개관전 <오늘의 살롱>전시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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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이후 한국의 동시대미술을 두 세대의 작가군으로 묶은 10쌍의 작가 전시가 열리고 있는 <청춘과 잉여>(커먼센터, 11.21~12.31) 전시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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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om in 케이크갤러리와 팀황학동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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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학동의 일부 되기”

케이크갤러리는 2010년부터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던 ‘솔로몬 아티스트 스튜디오’가 그 이름을 바꾼 전시 공간이다. 처음 이름이 입주건물명인 솔로몬빌딩에서 딴 것이라면, 이번 이름은 이 건물의 독특한 구조에서 땄다. 부채꼴 모양의 건물에는 마치 케이크를 잘라 놓은 듯 켜켜이 작은 공간들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이런 독특한 모양새를 한 것은 황학동 중고품시장이라는 특성상 작은 공간에 많은 상점이 들어 설 수 있게 하려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황학동 시장에서 판매하는 물건은 제작·유통되어 누군가의 소유물로 쓰이다가 그 기능을 다한 후 거리에 나온 것들로 이곳에서 말끔히 단장하고 다시 진열대에 놓이게 된다. 그러니까 시장의 제도적인 단계를 지나거나 (어떤 이유로든) 그 효력을 잃은 물건들이 제도와 무관한 방식으로 상품으로 재출현하는 ‘최후의 시장’이라고 볼 수 있다. 과거 어느 호시절에는 건물에 빈 공간 하나 없이 상점과 작업장이 입주해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더 이상 임대가 되지 않는 건물의 일부 빈 공간에 미술인들이 찾아오면서 전시 공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청계천 복원 공사 이후, 문화인류학이나 도시계획학 등 연구를 위해 황학동을 찾던 발걸음이 사라져갔다. 모두들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이곳 시장도 싹 바뀌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역사적으로 정부는 이 지역을 가리는데 급급했고, 서울의 근대화와 도시화를 거론할 때 황학동이란 이름을 배제했다. 하지만 지금도 황학동 시장은 살아서 움직이고 있고 그것을 목도한 이상, 미술을 매개로 기록하고 전시로 드러내 보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팀 황학동’은 리서처 5명(노해나 안성은 윤민화 이소라 장한별)과 작가 5명(손준호 오진욱 이호인 최기창 최우진)으로 구성된 프로젝트 팀이다. 황학동 솔로몬빌딩 104호를 거점으로 사진관을 운영하면서, 2014년 5월부터 10월까지 약 6개월 동안 황학동 중고품시장 상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그 모습을 사진에 담아서, 오늘의 황학동 시장을 기록했다.
솔직히 말해서 미술을, 전시를 기획한다는 것이 반드시 지역성이나 장소성에 기반을 둔 당위성을 가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황학동 시장의 중앙상가 건물인 솔로몬빌딩의 일부를 점유하고 ‘그곳에서’ 미술을 한다는 것은 묘한 책임감을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다. 한 때는 자신들의 거처이자, 상점이 있었던 솔로몬빌딩에 낯선 젊은이들이 찾아들어서 예술을 한다며 전시회를 열고, 그들끼리 어떤 행사들을 마련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마음은 어떠할까. “아마도 그런 일은, 청계천변의 노점상들을 싹 갈아엎고 그럴싸한 상가 건물들을 일렬로 세워둔 일이나, 텃밭을 가꾸던 곳에 들어선 롯데캐슬과도 같은, 너무나도 이질적이고 생소한 또 하나의 사례를 만드는 꼴이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고민을 거듭한 끝에 ‘팀 황학동’을 기획하게 되었다. 황학동 시장에 떨어진 기름 한 방울처럼 섞이지 못하는 미술이 아니라, 말 그대로 황학동과 함께 ‘팀’을 이루고 싶었다.
윤민화・독립큐레이터

팀황학동 (12)

케이크갤러리가 위치한 건물 외관

팀황학동 (15)

팀황학동의 전시장면

 

 

[Exhibition Focus] 어부들

 

한국사회의 역사적 사건과 이면을 과도한 연출 장면으로 재현하는 작가 조습. 그의 열번째 개인전이 10월 8일부터 11월 5일까지 갤러리 조선에서 열렸다. <어부들>이라는 타이틀로 열린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제주도 바닷가에서 작업한 신작을 선보였다. 디자인문화비평가 최범은 조습의 최근작은 ‘밤의 대한민국’을 포착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현실 비판적 리얼리즘 미술의 새로운 형식을 확립한 조습의 작품세계를 살펴본다.

개념과 형식으로 무장한 포스트민중미술 대표주자

최범(이하 최) 조습 씨 작품은 이미 많이 알려져서 그동안 간간이 봐왔어요. 처음 본 건 2000년《 디자인 문화비평》(안그라픽스) 2호에 실린 기사에서였고, 실제로 프린트된 작품을 본 건 2005년 대안공간 풀에서 열린 개인전 <묻지마> 전시로 기억하고 있어요.
조습(이하 조) 1999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첫 번째 개인전은 2001년 인사미술공간에서 <난 명랑을 보았네>라는 타이틀로 열었습니다. 최범 선생님은 2005년 <묻지마> 전시 때 처음 뵌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작가 경력 15년이 넘었네요. 나도 평론을 시작한 지 25년이 넘었고요. 그동안 여러 평론가가 조습 씨에 대한 글을 발표했는데, 지난해 박수근미술관에서 열린 조습 씨의 <일식> 개인전에 서문을 쓰면서 저도 뒤늦게 조습 평론가 대열에 합류했어요.
사회/과학 문화/과학적인 측면에서 좀 더 폭넓고 다양한 해석을 받고 싶어서 2013년에 최범 선생님께 <일식> 전시 글을 부탁드렸습니다. 아마도 2005년 <묻지마>하고는 조금 다른 작업이라서 흥미를 느끼지 않을까 했습니다.
초기 조습 씨 작품을 처음 본 순간부터 저는 조습의 팬이 됐어요. 완전히 내 스타일이었죠.(웃음) 그래서 처음부터 이해가 됐어요. 그런데 많은 사람이 조습의 작품을 보면 시각적으로 워낙 세고 너무 직접적이라 해학, 풍자, 패러디라고 생각하지 못해요. ‘저게 뭐야?’ 하며 장난 같다는 인상을 먼저 받죠. 또 사진작가인지, 퍼포먼스 작가인지 작가로서 조습 씨의 정체를 초기에는 헷갈려 하기도 했죠.
한국이란 나라가 좀 그런 것 같습니다. 뭐든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별 관심도 없죠. 미술 쪽을 바라보는 시선은 더 그런 것 같습니다. 굳이 제 직업을 명명하자면 ‘현대미술가’ 정도가 되지 않을까요?
<일식> 전시 서문 ‘밤의 시간과 벌거벗은 생명들’을 쓰기 위해 조습 씨에 관한 10여 편의 글을 찾아서 찬찬히 다 읽어봤어요. 심광현, 임근준, 노명우 등 웬만한 평론가는 다 썼더라고요. 내가 보기에 조습의 작업은 순수 형식주의보다는 내용주의 측면이 강합니다. 그래서 조습에 관한 텍스트를 읽는다기보다는 조습이라는 사람을 읽는 프레임, 다시 말해 조습이라는 작가가 한국 사회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는지 그 틀을 분석하려했지요. 특히 <일식> 연작은 조습의 이전 작업과 많이 달랐어요. 가장 먼저 눈에 띈 형식적인 변화는 낮이 아닌 밤에 촬영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과도한 분장 작업도 두드러졌고요. <일식> 연작을 보면서 작업이 변하는 변곡점의 시기임을 감지했습니다.
2013년 1월부터 6월까지 강원도 양구군에 있는 박수근미술관에서 1월부터 6월까지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일식> 은 그 레지던시 프로그램 기간 중에 제작한 연작이죠. 저는 군대를 못 가서 그런지 강원도 최전방 지역에서 생활은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수복지구인 양구, 화천, 인제에서 반공주의 혹은 전쟁의 기억은 제가 흔히 도시에서 느끼던 관념적 반공주의하고는 결이 조금 달랐습니다.
<일식> 연작은 기존 작업과 달라서, 어떻게 읽어야 하나, 처음엔 당황했어요. 하지만 조습 씨와 이야기하고 들여다보면서 서서히 파악됐죠. 조습의 표현 양식이 변하는 계기와 의미는 무엇일까? 고민하면서요. 결론적으로 저는 지금까지 조습 씨의 작업을 크게 두 시기로 구분합니다. 1999년부터 2012년까지를 1기로, 그 이후부터 현재까지를 2기로 말입니다. 1기와 2기의 시각적 차이는, 1기는 배경이 주로 낮의 공간인데 반해 <일식> 연작부터 시작되는 2기는 아직 진행형이지만 배경이 밤이에요. 이런 밤의 풍경이 일시적이지 않고 지속하는 걸 봐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든 걸로 보여요. 1기 낮 시기 작업은 낮의 대한민국을 그린 것이죠. 낮의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부조리와 ‘웃기고 자빠진’ 한국사회의 현실에 대한 비판 말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조형언어의 형식은 패러디, 조롱, 해학, 풍자, 전복…, 이고요. 이처럼 낮의 대한민국의 모순을 비판하고 공격하던 태도로 대상에 천착하던 조습은 새로운 생각과 깊이를 얻게 됩니다. 2012년부터 밤의 시대로 들어가 밤의 대한민국을 포착하게 됩니다. 낮의 이면을 보기 시작한 거죠. 낮의 대한민국의 모순을 비판하고 공격하던 중 그 이면을 포착하게 됩니다. 낮의 사건을 일으킨 진짜 진앙지를 만지는 느낌이랄까요. 어떤 사건의 배후는 결국 밤이라는 점을 깨달은 것 같아요.
강원도 양구에서의 생활을 돌이켜 기억하면 딱 두 가지가 떠오르는데 그건 밤과 추위입니다. 고도가 높은 지역이고 거주한 시기가 겨울이라서 해가 떠있는 시간이 길지 않아요. 그리고 해가 떨어지면 제가 처음 경험하는 아주 새까만 밤이 찾아오죠. 그래서 어딜 가든 손전등이 필요한데 그 손전등 불빛 아래 나무, 눈, 돌 뭐 이런 것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또 하나가 추위인데 건물 밖에 있는 물건 중에 얼어붙지 않은 것이 없었던 것 같아요.
작업 과정이 궁금해요. 배우 섭외나 장소 물색 등 어려운 점이 많았을 것 같은데?
등장 인물은 전문 배우가 아니고 주로 제가 평소에 알고 지내는 작가 혹은 동료 선후배들입니다. <일식> 연작은 촬영장소가 주로 강원도라서 4일이나 5일씩 촬영을 하고 돌아왔는데 이번 <어부들> 연작은 촬영지가 제주도라서 2달 정도 제주도에서 합숙 촬영을 했습니다. 다행히 제주시에서 작업실을 빌려줘서 체류 비용을 줄일 수 있었고, 예술인복지재단에서 기금을 지원받아서 마지막 후반작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제주도에서의 생활은 뭐 남자들끼리 지내는 군대 내무반 생활과 비슷합니다.(웃음) 촬영이 전부 바닷가에서 이루어지다보니 간조·만조 물때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어요. 여름이라 낮이 길어진 탓에 촬영 시간을 맞추기가 힘들었고요. 확실히 자연의 위대함을 배우고 왔습니다.(웃음)
물리적 비용이나 육체적으로도 힘들겠지만 사람 다루는 일도 만만치 않을텐데?
지금까지 촬영하다가 못 버티고 중간에 간 사람은 한 명도 없지만 짧은 시간에 촬영을 해야 해서 어려움이 참 많습니다. 어떻게 보면 전문 배우들보다 훨씬 헌신적이고 작품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야 가능한 일이죠. 간혹 제가 잠든 와중에도 이번 작품 촬영에 대해 대화하는 것을 보면 참 놀랍고 감사할 뿐입니다. 그런 분들을 생각하면 좀 더 좋은 작업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촬영하다보면 제 자신도 도망가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거든요.
도대체 어떤 관계이기에?
사진가도 있고 화가, 조각가도 있고 정당에서 일하는 정치인도 있어요. 그분들과 이야기하다보면 자신이 화면에 과장되게 나오는 모습 그 자체에 만족한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평상시와는 다른 낯선 자신의 모습을 보고 즐기는 거죠. 일탈의 경험인데, 미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이 시대에 반미치광이가 되어 보는거죠. 대놓고 미친 척하고 살 수는 없지만 사진 안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니까요.(웃음) 그래서 촬영을 하다보면 어떤 축제 같기도 해요. 요즘 자주 회자되는 일종의 사진 ‘굿’판을 벌리는 자(者)들인거죠. 그들에게는 일종의 운명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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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갤러리 팔레 드 서울에서 열린 개인전 <일식〉 전시광경

검은모래,피그먼트프린트,2014

〈빨래〉 피그먼트 프린트 2013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
이번 전시 제목인 <어부들(Fishermen)>에 등장하는 인물-군상(群像) 역시 2기의 첫 작업인 <일식> 연작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밤의 공간이 배경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버림받은 자, 누구나 죽여도 되는, 인간이 아닌 존재, 버러지 같은 생명들로 보입니다. 이탈리아 출신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이 주목한 ‘호모 사케르(Homo Sacer, 사람들이 범죄자로 판정한 자를 말한다. 그를 희생물로 바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지만 그를 죽이더라도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는다)’, 즉 ‘벌거벗은 생명’처럼 보입니다.
저는 요즘, 세월호 참사 이후 창작에 대한 공허함을 느끼는데 아무리 힘들었어도 세월호 사건 이전이 좋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죠. 되돌릴 수만 있다면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참사 이후 창작에 대한 욕망이 사치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지금 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정신적 공황상태 같은 무력감과 자괴감에 빠지게 됩니다. 그 배신감이 이번 <어부들> 연작에 중요한 중심축이라고 생각합니다. 올 봄, 제주 4·3항쟁 기념 전시 때문에 제주도를 여러 번 오가면서 바다와 관련된 작업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그 작업도 사실 물속에 수장된 사람보다는 그 사람들을 건져내는 육지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었죠.
저 역시 세월호 참사 희생자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것을 보고 아주 놀랐어요. <어부들> 전시에 나오는 사람들도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입니다. 원초적 욕망, 살아야겠다는 욕망만 있는 광인의 이미지,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곤란한 사람처럼 보이니까요. 좀 과장해서 해석하자면, 정상적이지 않은 한국 현대사에 대한 상징이라고나 할까요. 조습 씨는 <어부들> 연작을 통해 바로 이와 같은 대한민국의 밑바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습 씨가 작업을 통해 드러내는 한국 현대사의 밑바닥 모습은 <일식> 연작에서처럼 휴전선 일대를 헤매는 일종의 공비들이거나, 인간이라고 보기 곤란한 ‘어부들’로 나타난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미친 것 같은 어부들의 모습에서 ‘원초적 생명력’ 같은 진부한 해석이 아니라, 홍상수 감독의 영화 대사처럼 “우리, 인간은 못되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라고요. 또 다른 질문을 해보죠. 현대미술 어법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 관람객은 조습 씨의 작품을 마주했을 때 어떤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작품이 드러나는 방식, 즉 형식 때문에 내용적인 측면에서 놓치는 게 많지 않을까라는 우려도 하게 됩니다.
요즘 미술 하는 사람들도 미술을 잘 모르는데요.(웃음) 제 작업은 저를 이해해주는 ‘고정 팬’과 가는 것이라 볼 수 있겠네요.
기존 ‘고객’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말인가요?(웃음) 고정 팬을 위해서 가겠다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 미술제도의 혜택을 보는 ‘제도권 작가’로 미술 시스템에 안착하겠다는 말로 들리기도 하는데요. 예컨대 미술 시스템에 문외한인 일반인에게 이우환의 어려움과 조습의 어려움, 그 자체는 같습니다. 하지만 두 작가의 어려움은 완전히 다른 겁입니다. 따라서 어떤 이들에게는 조습이 이우환보다 훨씬 더 어려울 수 있다는 얘기죠. 그건 작가마다 특화된 조형언어 측면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자리에서 이야기할 대상은 아닌 것 같고, 아무튼 조습 씨의 이번 작품이 너무 예쁘고 완성도가 굉장히 높아서 어떻게 이해할까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겼습니다.
글쎄요. 그리 잘 만든 사진 같지는 않은데요.(웃음) 요즘 최근 사람들에게 제 작업이 ‘물화(物化)’됐다는 얘기를 듣기는 해요. 제 생각에도 예전에는 행위와 과정 자체를 즐기는데서 끝이었다면, 지금은 그 결과에서 완성된 시각적 효과를 찾으려고 노력하합니다. 오래 하다보니 장비를 다루는 기술이나 연출 등에서 양식적 완성도가 높아졌기 때문인 것 같아요. 결국은 카메라나 후보정, 프린트 기술이 좋아져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웃음)
누군가는 이런 테크닉이나 스킬이 좋아진 것이 작품의 의미와 상관관계가 있느냐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겠죠. 예를 들어 “너 작품 팔아먹으려고 이렇게 예쁘게 만들었지?”라고 물어 볼 수도 있단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부분에 대해 특별히 주목하지 않아요.
그렇게까지 직접적으로 얘기하시는 분은 없어요. 예전에 제 작품이 팔릴 확률이 3% 미만이었다면 지금은 9% 정도까지 높아진 것 같아요. 이런 확률 수치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소위 미술판에서 ‘잘나가는 작가’가 되는 건데, 저는 앞으로도 기껏해야 지금 이 정도를 유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한국에서 미술작품을 파는 것은 100% 작가의 운이라고 생각합니다.
걸작 중에 걸작은 이한열 걸개그림을 패러디한 <습이를 살려내라>(2002년)일 텐데, 이런 작업을 하던 친구가 ‘미술관 작가’가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조습이 미술관 작가가 되기를 바라지만 또 한편으로는 바라지 않거든요.
2012년 복합문화공간 에무에서 열린 <달타령>과 2013년 팔레 드 서울에서 열린 <일식>을 비교하면서 몇몇 분이 그런 점을 아쉬워하라고요. 더 다듬지 말고 날것 같은 모습, 시대의 야만성, 우리들의 탐욕 등을 좀 더 과감하게 표현하기를 원하시는데. 그분들 눈에는 계속 다듬어지고 제도화된다는 느낌이 나나 봐요.
사실 이런 것은 어쩔 수 없어요. 이런 것이 현대미술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 모순이고, 작가들은 이 모순과 함께 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만약에 <어부들> 작업이 리움에 소장된다면 그것을 일종의 ‘타협’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한국의 부르주아들에게 한 방 먹이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만약에 이런 작업을 리움이 수용한다면, 그것은 완벽한 속물적 수용이지 조습 작품의 메시지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메시지 수용을 배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국의 지배계급이 자기들의 모순을 일정정도 수용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영향 받은 외국 작가는 있나요?
미술계에 처음 들어오면서부터 사회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인지, 외국 작가보다는 생각을 같이하는 한국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예를 들어 가까이는 ‘현실과 발언’ 선생님들부터 조금 더 가까이는 2000년대 중반까지 대안공간 풀이나《 포럼 A》가 그분들이죠.
생각보다 세대 차이가 많이 납니다. 나는 1980년대를 관통한 70년대 학번이고, 조습 씨는 90년대 학번입니다. 20대 초반에 선배 세대들이 겪은 1980년대에 대한 동경, 혹은 자신이 겪지 못한 시대경험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이 있지 않나요.
원래부터 제가 발 디디고 사는 시대의 모습에 호기심이 많았어요. 1980년대를 안 살아본 자의 한(恨)이랄까?(웃음) 지금은 1970년대를 경험하고 있지만요.(웃음) 그렇게 지금 사회 변화의 원류를 찾고 고민하다보니 자연스레 역사에 관심이 많아진거죠.
조습은 역사의식 빼면 시체! 역사의식을 작업의 기반으로 삼아, 콘텐츠는 하드코어 같지만 시각적 형식은 매우 자유로워요. 바로 이 지점이 기존의 리얼리즘 미술과 구별되는 차이점이고 여기에 쾌락과 재미가 덧붙은 작업이지요. 내가 앞서 첫눈에 조습 씨의 작업을 이해한다고 한 것도 그 지점입니다. 민중미술과 포스트민중미술의 차이라고나 할까. 저는 디자인을 전공했어요. 그런데 디자인 쪽에선 1980~90년대 미학운동이 없기 때문에 민중미술 판에 참여했지요. 하지만 민중미술에 정치적 측면에서만 동의한 것이지 미학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개념적 의미에서만 동의한 것이죠. 이런 면에서 조습 씨의 작품은 나에게 시각적으로나 의미적으로 쾌락을 줍니다. 이런 개념과 형식의 조합을 ‘포스트민중미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고, 그래서 내가 조습 씨 팬이 됐다고 한 겁니다. 조습 씨의 작품은 기존의 현실 비판적 리얼리즘 계열에 새로운 형식을 도입했으니까요.

진행 정리・이준희 편집장

습이를 살려내라, 디지털 라이트 젯 프린트, 2002

〈습이를 살려내라〉 디지털 라이트 젯 프린트 2002

조습(본명 조병철)은 1976년 온양에서 태어났다. 경원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개인전 10회와 〈제2회 타이틀 매치전 이강소 vs 조습〉(쌈지스페이스, 2003), 〈코리안 랩소디〉(삼성미술관 리움, 2014) 등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제13회 오늘의 젊은예술가상〉(문화관광체육부, 2005)을 수상했고, 쌈지스페이스, 비즈아트(상하이), 도쿄윈터싸이트(도쿄), 창동창작스튜디오, 금천예술공장, 인천아트플랫폼, 박수근미술관 창작스튜디오 레지던시에 참여했다.

최범은 1957년 태어나 홍익대학교 산업디자인과와 동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했다. 월간 《디자인》 편집장, 민예총 문예아카데미 기획실장, 출판사 시지락 대표,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계약 교수, 〈2005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예술감독, 희망제작소 간판문화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디자인인문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hibition Topic] Donald Judd

20세기 미술의 거장 도날드 저드(Donald Judd)의 개인전이 10월 30일부터 11월 30일까지 국제갤러리에서 열렸다. 도날드 저드는 1960년대 초부터 1994년 타계할 때까지 전통적인 미술사의 흐름을 바꾸는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그는 재료 및 기술, 형태, 반복과 색채 등을 엄격하게 탐구해 회화도 조각도 아닌 오브제를 제작하고 ‘특정한 사물’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이번 전시에서는 <무제>(1991)를 비롯해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작가의 입체작품 총 13점을 만날 수 있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특수하다

정은영  한국교원대 교수

도날드 저드(Donald Judd)의 국내 개인전이 열렸다. 1991년 이후 20여 년 만이다. 전시의 첫인상은 ‘저드의 미니멀아트가 바야흐로 ‘클래식 모던’이 되었구나’로 요약된다. 이는 단지 도날드 저드라는 이름이 역사의 한 부분이 되었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올해는 그가 작고한 지 정확히 20년이 되는 해다), 그의 작업이 지닌 ‘클래식한’ 원리가 현재의 동시대미술을 배경으로 하여 비로소 확실하게 부각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기본 단위인 모듈을 정확하게 반복하고 리듬감 있게 변주하는 단순한 구성, 재료의 본래적인 재질과 속성에 어떠한 자의적 표현이나 사적인 감정도 더하지 않은 절제된 태도에서 우리는 고전적인 모더니즘의 진면목을 확인한다.
그러나 ‘클래식 모던’을 단순히 세련되고 편안한 조형미 정도로 받아들인다면 저드뿐 아니라 미니멀리즘의 핵심을 간과하는 것이다. 1960년대 초 뉴욕에서 등장한 미니멀아트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예술작품이란 무엇인가’라는 고래(古來)의 질문과 갈수록 첨예해지는 현대미술의 난제(難題)를 강력하게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예술의 종말’이나 ‘역사의 종언’과 같은 이른바 ‘끝내기’ 담론이 이미 수십 년 전에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바로 그로 인하여, ‘지금 여기 우리 앞에 있는 이것은 우리에게 무슨 말을 건네고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이 더욱 중요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클래식 모던’의 표면을 지탱하고 있는 저드의 이면(裏面), 미니멀리즘의 중핵(中核)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미니멀리즘이 겪은 역사적인 부침(浮沈)은 1960년대 이후 현대미술의 이론과 현장에서 드러난 아이러니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처음 등장했을 당시 미니멀아트는 마이클 프리드와 같은 모더니즘 이론가들로부터 그 단순한 사물성이 모더니즘의 순수성을 파괴한다는 비판을 받았고, 19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을 앞세운 신표현주의 회화가 유행했을 때에는 그 단순한 형식성이 억압적인 모더니즘의 온상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미니멀 작업에서 출발한 젊은 작가들이 개념미술이나 프로세스아트 혹은 대지미술로 외연을 확장하여 그 내적인 유연성을 실험할 때, 페미니즘 미술가와 이론가들에게 금속 박스와 강철판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결합된 차가운 권력의 상징으로 고착되어 파괴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모순적인 반응은 미니멀리즘 자체의 복합적인 위상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미니멀리즘은 형식주의 모더니즘의 정점에서 그 형식을 사용하여 그것에 도전하고 그것을 내파(內破)한 역사적인 접점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회고하건대 모더니즘의 형식 속에 탈(脫)모더니즘의 맹아를 품고 있던 미니멀아트는 모더니즘과 탈모더니즘을 잇는 통로에서 상황에 따라 어느 쪽으로도 열릴 수 있는 문과 흡사한 것이었다.
따라서 저드의 사물들, 예컨대 매끈하게 처리된 알루미늄 판이나 맑은 순색의 플랙시글라스, 아연 도금한 강철 박스나 대형 합판으로 만들어진 입방체에서 전통적인 조각도, 그것이 해체된 설치도 아닌, ‘명료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율배반적인 구조물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명료하지만 알 수 없는’ 구조물들은 상이한 방향으로 열릴 수 있는 하나의 문이다. 단순한 구조와 절제된 구성에 방점을 찍는 이는 ‘적을수록 많다’는 모더니즘의 격률을 되새길 것이고, 회화도 조각도 아닌 입방체가 벽에 걸려 있는 상황에 방점을 찍는 이는 그 사물들의 ‘기이한 위상(位相)’에 주목할 것이다. 30여 년에 걸친 저드 작업의 핵심적인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이번 전시에서 당신은 어느 쪽으로 문을 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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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왼쪽) 나무 91.5×152.4×152.4cm 1989

모든 것은 존재하는 것들의 편이다.
저드는 이 ‘알 수 없는’ 구조물들을 ‘특수한 사물들(specific objects)’이라 불렀다. 미니멀리즘의 필독서라 여겨지는 저드의 비평문 <특수한 사물들>(1965)은 바로 이 “회화도 조각도 아닌 것(neither painting nor sculpture)”을 상찬하는 문장으로 시작된다.1 한때 사람들은 이 ‘알 수 없는’ 구조물들을 지칭하는 데에 ‘알 수 있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초기 저드를 대표하는 밝은 선홍색(cadmium red light)의 목제 구조물을 ‘신발 걸이(shoe rack)’라고 부르거나 내부가 드러난 코르텐 강철 박스가 층층이 쌓인 연속 구조물을 ‘스택(stack)’이라 칭하는 등, ‘알 수 없는’ 것들에 익숙한 명칭을 붙여 대상을 규정하는 일종의 ‘개념적인 길들이기’를 시도한 것이다.
‘특수한 사물’은 ‘예술작품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저드의 대답이다. 어찌 보면 그는 ‘예술작품’이라는 용어를 ‘특수한 사물’이라는 구문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할 수 있는데, 말하자면 예술이라는 ‘추상적이고 모호한’ 관념을 ‘구체적이고 분명한’ 형용사로 대체하고, ‘작품’이라는 위계적인 존재를 ‘사물’이라는 비위계적인 차원으로 환치한 것이다.
특수한 것은 특정하고(particular) 분명하며(distinct) 개별적(singular)이다. 특수와 개별, 이것은 모든 존재하는 것의 일차적인 존재방식이며, 따라서 ‘특수한 사물들’은 사실상 모든 존재자를 일컫는 말과 다름없다. 우리는 이 특수와 개별을 주어진 범주에 따라 분류하고 일정한 개념에 적용하여 보편과 일반에 귀속시킨다. 보편과 일반이 관념의 영역이라면 특수와 개별은 존재의 영역이다. 하지만 보편 관념은 추상될 뿐 오직 개별 존재만이 살아지고(lived) 체험된다. 저드가 개별을 보편 속에 포섭하는 일체의 개념을 거부하는 이유다.2
“존재하는 것들[만]이 존재하며, 모든 것은 존재하는 것들의 편이다. 여기에 그것들이 있다는 것, 그것은 참으로 수수께끼 같은 일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아무것도 이야기할 수 없다… 모든 것은 동등하고 단지 존재할 뿐, 가치나 관심은 우연한 것에 불과하다.” 3
‘예술작품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다루는 저드의 화법은 단도직입적인 ‘직설법’이다. 어떠한 은유나 상징에도 의존하지 않는 즉물적인 사태(事態) 속에서 저드의 ‘특수한 사물들’이 무엇인가 말을 건네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특수하다’는 것이리라. 저드의 말대로, 여기에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 어떤 추론이나 연역도 필요치 않은, 그 자체로 놀라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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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왼쪽) 나무 알루미늄에 채색 121.9×210.8×121.9cm 1988 (1963년 작품 재 제작)


1 Donald Judd, , 《Arts Yearbook 8》, 1965, pp.74~84. 수많은 작품을 거론한 이 글에서 저드는 정작 자신의 작업은 언급하지 않았고 비평문 끝에 “내가 아니라 편집자가 내 작품의 사진을 삽입하였다”라고 첨언하며 비평가 저드와 미술가 저드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었지만, 그가 자신의 작품을 회화도 조각도 아닌 ‘특수한 사물’로 보았음은 확실하다.
2 저드가 미니멀아트라는 용어를 거부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유는 용어의 부적절함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한때 유행했던 것처럼 미니멀리즘 대신 ‘맥시멀리즘(Maximalism)’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그의 작업이 더 효과적으로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그가 거부한 것은 개별 작가들의 차이를 무효화하는 단체 명칭, 즉 특수한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대체해버리는 개념적인 용어였다는 뜻이다.
3 Donald Judd, <Black, White, and Gray>, 《Arts Magazine》,  Vol.38, No.6 , March 1964, pp.3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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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저드의 철학이 그대로 녹아있다”

도날드 저드 재단 공동대표 플래빈 저드(Flavin Ju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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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날드 저드의 개인전을 맞아 그의 아들이자 도날드 저드 재단 공동대표인 플래빈 저드가 내한했다. 한국 교원대 정은영 교수는 지난 10월 30일 국제갤러리에서 플래빈 저드와 인터뷰를 진행하며 저드의 삶과 작업세계에 관해 폭넓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 20여 년 만에 한국에서 도날드 저드의 개인전이 개최되었습니다. 저드 재단(Donald Judd Foundation) 공동대표로서 소감이 어떠신지요.
플래빈 저드(이하 ‘FJ’) 1991년 한국에서 처음 저드 개인전을 개최한 이후 두 번째 개인전을 열기까지 너무 오래 걸리지 않았나 생각합니다만, 이번 기회를 통해 아버지의 주요 작품들을 선보이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도날드 저드는 1946~1947년에 주한미군으로 한국에서 복무했습니다. 부친아버지께서 살아 계셨다면 이번 개인전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FJ 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1991년 전시를 위해 방한하셨을 때 매우 기뻐하시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아버지가 주한미군으로 복무할 당시 한국은 그가 겪은 서양 문화와 많이 달랐지만 40여 년 후 다시 방문한 한국은 크게 발전했기 때문이죠. 1980년대에 조부모님 댁을 방문했을 때 할머니께서 박스 하나를 보여주셨는데, 그 안에 엄청난 액수의 한국 돈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미군부대에서 용광로 만드는 작업을 하며 받은 추가 수고비였는데, 당시 작업을 도와주셨던 한국 노동자 두 분에게 전달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그 돈을 모두 미국에 들고 오셨다는 겁니다. 그 돈을 그들에게 주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이번 전시를 즐겁게 참관했습니다. 특히 작품이 설치된 방식이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이 전시에서 특별히 중점을 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FJ 전시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공간 내에서 작품이 조화를 이루는가’하는 점입니다. 20여 년 만에 한국에서 개최되는 개인전이기 때문에 (일반) 전시보다도 관람객의 동선을 많이 고려했습니다. K3 전시관의 경우 공간의 특징에 따라 작품과 작품 사이를 비교적 여유있게 배치하였습니다. 가끔 연작 시리즈를 병렬 배치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면 작품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어떤 작품들이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상호관계를 고려해 전시를 구성했습니다. 저는 특히 K3 전시관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좋은 전시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는 전반적으로 작품들이 서로 마주보는 식으로 배치되어, 함께 공간을 보여주기도 하고 각각의 작품이 작품 안의 공간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공간과 작품이 잘 어우러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은 저드를 컬러리스트라고 부르기도 하는데요. 특히 밝은 선홍색(cadmium red light)은 저드의 초기 작품을 대표하는 색채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초기 작품을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어서 매우 좋았습니다.
FJ 그는 색채에 관심이 매우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저드가 “차가운 느낌의 작품을 많이 만든다”라고 하는데 핫핑크나 선홍색은 결코 차가운 색채가 아닙니다. 이런 평판은 편견이 만든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저드는 이 빨간색을 굉장히 좋아했는데 색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분명한 색깔이죠. 특히 초기에는 이런 색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저드의 작품은 역사적인 맥락보다는 공간적인 상황이 매우 중요한데요. 하지만 이제는 그 자체로 매우 역사적인 미술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FJ 저드는 사실 역사적인 배경을 중시하지 않았습니다. 역사적인 맥락, 곧 미술사적인 측면을 작품에 연관시키는 상황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드가 작품 활동을 시작했을 당시에는 작품에 특별히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하거나 그렇게 보이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30년이 지나서야 이 작품들이 역사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 저드는 당시 사람들이 깊이 탐구하지 않은 매우 새로운 요소를 탐구했고, 저드 이후에 많은 작가가 비슷한 요소를 탐구하면서 이제는 저드가 개척한 영역이 문화적으로 익숙해지고 나아가 하나의 장르로 인식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텍사스 주 마파(Marfa)에 있는 치나티 재단(Chinati Foundation) 미술관과 저드가 지은 집을 방문했을 때, 저드의 작품에서 시간을 초월하면서도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무시간적(timeless)과 역사성이 공존하는 매우 특이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FJ 네, 현대적인 느낌도 들고 옛날 느낌도 들었을 겁니다. 어제 만든 작품 같기도 하고 또 수십 년 전에 만든 작품 같기도 합니다. 작품 자체에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버지가 해놓은 작품 전체 배치를 그대로 보존했습니다. 단 하나의 변화도 더하지 않았어요.
저드의 작품은 역사적인 참조점(reference)이 없기 때문에 작품 자체가 주는 시간을 관객이 그대로 느낀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FJ 시간적 개념이 필요 없이 그 작품 자체가 강렬하게 다가온다면 보는 사람은 시간적인 프레임 자체를 잊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아테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은 부분적으로 무너져 있습니다. 우리는 신전의 허물어진 부분을 보면서 시간의 흐름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저드의 작품에는 그런 면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시간적 차이나 흐름도 느끼지 않고 작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어느 작가의 작품이든지 그 작품이 강렬하다면 시간적인 이해나 인상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드의 작품을 경험주의나 실용주의와 연관지어 언급하곤 하는데요. 실용주의나 경험주의 철학이 저드의 작품에 어떻게 묻어나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FJ 적절한 언급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철학이 플라톤의 철학을 전복했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은 모든 사물에 그 사물의 존재를 결정하는 이데아 혹은 언어가 있다고 보았는데 그전까지는 사물을 존재 자체로 인식했습니다. 저드는 플라톤 이후 2000년 이상 지속된 관념적인 철학을 타파하고 싶어 했고 그래서 그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검증할 수 모든 것의 정의 또한 하나에 국한되지 않고 확장될 수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모든 것을 범주화할 수 있다면 말이죠. 그는 과학적으로 실재하는 것,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형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작업을 했습니다. 실재하는 것을 보이는 그대로, 역사적인 궤적에 의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리얼리티를 수용하는 작품세계를 추구했습니다.
저드가 1920년대의 미국철학에 관심이 있었나요?
FJ 네, 특히 (기호학자) 퍼스(Charles S. Peirce)를 좋아했습니다. 저도 퍼스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매우 기뻤습니다.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의 수학적인 논리철학으로는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수학으로는 문화를 설명할 수 없죠. 문화는 수학의 논리적 범주 그 이상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언어와 보통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을 들여다보는 학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퍼스의 기호학이 매우 흥미로운 것이죠. 또한 그래서 저드의 작품이 계속해서 기본적인 물리학과 과학적인 영역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합니다. 저드는 (수학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이 흥미로운 발견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드는 세계가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표현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철학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작품의 중심을 보면 물리학적인 측면이 다분합니다.
저드의 작품은 비(非)위계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지요.
FJ 아버지는 미국 중서부 농장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중서부에는 독특한 문화가 형성돼 있는데요. 굉장히 실용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하기 싫은 것은 절대 하지 않는 그런 생활방식이랄까요, 아버지는 그런 면에서 중서부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예컨대 미주리 농장에서 별을 본다고 하면 그 별을 보면서 얼마나 고상한 생각을 많이 하겠습니까? ‘신이 별을 만들었구나’, ‘이 세계가 굉장히 흥미롭구나’하는 식으로 생각하겠죠. 아버지는 이런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아버지는 흥미로운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저드의 말이 있는데요. ‘존재하는 것들이 존재한다’ 입니다. 이러한 저드의 철학이 이번 전시 작품에 그대로 녹아있는 것 같습니다.
FJ 네, 그게 바로 아버지께서 좋아하고 탐구하셨던 것입니다.
제가 특히 좋아하는 것은 저드의 작품이 언어에 저항한다는 점입니다.
FJ 네, 언어에 대항해야만 합니다. 서너 문장으로 축약되는 것은 예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번 국제갤러리 개인전은 한국 관객들이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도날드 저드의 주요 작품을 전체적으로 관람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전시입니다.
FJ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특히 이 전시는 그의 작품들이 공간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그의 작품이 전체적으로 어떤 흐름을 지니고 있는지를 볼 수 있도록 시대별로 다양한 형식의 작품으로 구성했습니다. 작품 간의 연관성이나 작업 전체의 의미를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Portrait of Donald Judd 1991_high res

도날드 저드 1991© Judd Foundation. All rights reserved.

La Mansana de Chinati-The Block, Southwest Studio, Marfa, TX

텍사스 주 마파에 위치한 치나티 재단 (La Mansana de Chinati/The Block)남서부 스튜디오 내부광경 © Judd Foundatio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