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것들

폐허뿐인 세상의 미술

함영준  커먼센터 멤버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는 용어가 새삼 각광을 받는 모양이다. 도심재활성화라고 곧잘 번역되는 이 단어는 한 도시가 발전의 동력으로 삼던 산업의 양상이 바뀜에 따라 도시를 구성하는 인간의 생태가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산업 구조가 변화하면서 예전에는 필수적이었던 커다란 창고 같은 건물은 버려지게 된다. 그러면 작업실로 쓰기 위해 집세가 저렴한 큰 공간을 찾던 예술가에 의해 발견되어 다시 새로운 생태계가 일궈진다. 그리고 결국 새로운 상업지구로 변모해서 집세가 오른다. 그런데 이제는 이러한 수학공식과도 같은 일련의 과정을 목격하기 위해 굳이 뉴욕이나 런던 같은 서구의 대도시를 방문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뒤늦게 맞은 근대를 스쳐 보내버린 제3세계의 기형적인 도시들에서 이러한 현상은 보다 압축적이고 흥미롭게 재현되는 듯하다. 바로 서울말이다.
600년이 넘은 도시라고 하지만, 서울은 굉장히 많은 부분에서 역사가 단절돼 있다. 이것은 20세기 중반에 큰 전쟁을 겪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 보통 눈부시다고 수식되는 경제 발전의 기반을 여전히 건설업에 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 박원순 시장이 취임한 2011년 직전까지
서울
은 수많은 대규모 공사 계획이 수립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중 대부분은 몇 개의 동 단위 면적이 넘는 지구를 송두리째 철거하고 그 위에 다시 새로운 아파트를 짓는 거대한 계획이었다. 아파트 건설과 연관된 경제적 역학 관계에 대해서 이 글에서 깊게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중요한 것은 꽤 오랜 시간, 아니 6.25전쟁이 끝난 서울의 시민들은 단 한 번도 안정된 주거 환경 속에서 인생 전체를 설계할 기회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현대의 서울을 규정짓는 이미지 역시 쉽게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목동에 큰 아파트 단지가 생긴 직후였을거다. 내가 유년을 보낸 서울의 서북부는 한창 연립주택 공사 붐이 일었다. 원래 나의 동네에는 마당이 있는 1층 주택들이 늘어서 있었다. 언덕이 많아 수박 크기의 각진 돌을 쌓고 시멘트를 발라 고정시켜 둔 축대가 곳곳에 있던 동네였다. 이런 동네에 소규모 건설업자들과 복덕방 주인들과 집주인들이 다같이 합세해서 오래된 집을 헐고 연립주택을 짓기 시작했다. 아마도 보다 많은 가구의 주거권을 보장하기 위한 정부 정책과 맞물린 선택이었을 것이다. 또는 새집을 분양받아 재산을 늘리려고 했던 서민의 풋풋한 재테크 전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환경은 나에게 공사장에 대한 특징적인 이미지를 남겼다. 공사가 시작되면 인부들은 모래를 쌓아뒀는데 큰 무덤 크기였다. 바다에서 퍼왔는지 모래에는 작은 조개껍데기가 섞여 있었고, 놀이터가 없던 변두리의 아이들이 그 위에 올라 놀았다. 인부들은 옆에 세워 둔 체에 모래를 걸러내고 시멘트와 섞은 뒤에 등에 지고 일일이 ‘공구리’를 쳤다. 수평에 맞춰 실을 묶고 거기에 따라 벽돌을 쌓았다. 동네 전봇대마다 세로로 된 작은 현수막이 붙었는데, 어쩌구 빌라, 저쩌구 맨션이라는 이름의 새집을 20평 남짓의 크기로 분양하고 실입주금은 얼마라는 내용이었다. 그 빨갛고 노란 현수막과 모래의 밝은 황토색, 벽돌의 붉은색과 시멘트의 회색, 내가 겪은 유년의 이미지는 어렴풋하게나마 그러한 색깔로 구성되어 있다.

북서울 (10)

강북지역의 도시 근대화 과정에서 잊혀진 풍경과 삶의 모습을 살펴보는 <강북의 달>(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10.7~11.23)의 전시장 광경.

구슬모아당구장

대림미술관에서 운영하고 있는 대안공간, ‘구슬모아 당구장’의 건물 외관

세월이 흘러 그렇게 지어진 연립주택이 평균 20년 정도 되었을 시점이 되자 마지막으로 아파트 단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다. 강남을 중심으로 해서 잠실, 노원구, 양천구 등 아파트로 특징적인 주거 형태를 구성했던, 서울의 전통적인 동네가 아닌 동네들도 아파트를 원했다. 이러한 재개발은 잠실과 반포에 대규모로 계획된 야트막한 주공아파트를 새로 짓는 것과는 좀 달랐다. 붉은색 벽돌, 초록색 옥상, 노란색 물탱크로 대표되던 서민들의 언덕은 힐스테이트 같은 이름으로 새단장되었다. 이러한 난리통을 거쳐 결과적으로 궁극의 목표였던 시세 차익을 얻은 서민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2000년대에 유년을 보낸 청년 작가들에게 동 단위로 철거되어 엉성한 가림막 사이로 보이는 폐허의 이미지는 내가 동네에서 보았던 작은 공사장에 비해 훨씬 거대하고 막막하며 또한 쓸쓸한 감정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스프레이 래커로 ‘철거’라고 쓴 집들은 한동안 철거되지 않았고, ‘원주민 부동산’ 같은 맞춤형 상호를 양산했다. 모든 경제지표는 경쟁하듯 우울한 전망을 암시했고, 계급투쟁의 원리를 전지구적으로 공유하게 된 스마트폰을 맞이해 신자유주의라는 용어가 마치 공적처럼 일상화되었다.
올해 초에 나는 회화를 중심으로 하는 살롱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전시는 총 69명의 작가가 150여 점의 작품을 낸 기형적으로 큰 규모의 전시였고, 참여한 작가의 대부분은 20대에서 30대를 지나가던 중이었다. 이러한 규모는 처음 생각보다 좀 더 커진 것인데, 이는 젊은 작가의 작품들이 예상보다 그다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중 상당수의 풍경화는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자연과 맞물리는 풍경이 아니라, 도시를 소재로 하고 있었다. 그것도 도시의 틈새, 무너진 콘크리트와 그 주변을 담은 작업이 두드러졌다. 특히 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 주변을 들러 작가들을 만났을 때, 나는 꽤 많은 작가가 무엇을 그려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갈팡질팡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가장 쉽고 진정성 있는 접근법으로 일컬어지는 ‘제 주변에서 소재 찾는 법’을 시전했을 때, 그들이 계속해서 버려진 현대적 건축물에 집착하듯 달라붙는 장면은 꽤 신기했다.
신기함의 원인은 이러했다. 대부분의 경우 한국에서 미술을 전공하기 위해 겪어야 할 유년은 대강 예측이 가능했다. 비용을 지불하고 사교육을 통해야만 입학이 가능한 정도의 기술을 습득할 수 있다는 사실과, 미술문화를 가깝게 여기기 위한 배경 부모의 문화적 취향은 한국에서라면 아파트를 중심으로 구성된, 소위 중산층의 선택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아마 현재 젊은 작가의 대부분은 폐허로 이루어진 환경과는 먼 공간에서 성장하며 그 이미지에 영향을 받고 미술가의 꿈을 꾸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폐허는 무엇일까? 우선 그들에게 폐허란 존재하지 않은 과거를 향수하기 위한 관문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과거, 즉, 사라지는 것에 대한 향수는 새롭게 태어나는 것에 대한 일말의 기대 대신에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는 물리적 공간에 미술가로서 본인의 처지를 대입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마치 사회운동처럼 실천을 담보로 하는 미술이 폐허를 집중적으로 리서치해 온 이유는 파괴의 스펙터클 자체가 주는 묘한 쾌감이 그릇된 현실을 폭로하는 이미지로서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오히려 그러한 운동은 자칫 완벽한 논리적 구조를 추구해야 한다는 사명 때문에 오히려 작품 속의 미적 흐름이 가능한 공간을 차단하는, 때문에 굳이 미술작품으로 호명해야 할 이유가 없는 콘텐츠 덩어리가 되기 일쑤였다.
오히려 폐허는 젊은 작가들에게 앞서 제시한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그럴싸한 영단어가 주는 어감대로, 전지구적으로 공유된 지역-생태-재활-자생 등의 비교적 새로운 가치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전유되고 있다. 실제로 지난 한 해, 서울의 수많은 지역은 미술가들에 의해 ‘공공 리서치’라는 작업의 대상으로 선택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리서치 과정의 대부분은 커뮤니티가 처한 상황에 대해 감상적 인식 이상의 결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이는 우선 서울에만 500개가 넘는다는 지역 축제의 과잉 현상이 낳은 콘텐츠의 혼종교배 때문이기도 하다. 대중이라는 별명을 얻은 시민과 ‘쉬운’ 예술의 만남을 주선하는 수많은 행사에서 그래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어지는 수많은 조형 설치물을 한 지역에 대한 면밀한 조사와 연구를 통해 미술적 상황을 연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할 ‘공공 리서치 미술작업’과 변별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보다 깊은 운명적인 결핍이 있다. 그 결핍은 이제 더는 폐허나 오래된 커뮤니티가 현대적 도시의 보편적 경향을 드러내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뉴욕의 PS1과 런던의 테이트모던이 헌 건물을 미술공간으로 전용한 사실에 대한 수많은 연구 자료가 존재하며, 그렇게 폐허를 의도한 인테리어 디자인은 이미 쇼핑몰 디자인으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지나간 유행이기도 하다. 현재의 상태와는 다른 상황을 제시해서 각을 세우려는 태도가 더 이상 ‘대안공간’이라 불리는 전시장만의 태도가 아니라는 것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옛 기무사 건물을 존중하는 방식이나, 대림미술관 등의 대형 전시장에서 구슬모아 당구장 같은 (대안의) 대안공간을 운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그렇다면 다시 이야기해보자. 폐허가 지칭하는 문화적 지형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그 논의를 계속해서 진행해야 할까? 그럴 수 있을까? 2014년까지 서울의 미술계에 던져졌던 ‘폐허’라는 공간, ‘도시’라는 화두는 이미 살점이 다 뜯긴 채로 다시 어딘가에 버려질 운명에 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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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명의 젊은 작가가 참여한 커먼센터 개관전 <오늘의 살롱>전시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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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이후 한국의 동시대미술을 두 세대의 작가군으로 묶은 10쌍의 작가 전시가 열리고 있는 <청춘과 잉여>(커먼센터, 11.21~12.31) 전시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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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om in 케이크갤러리와 팀황학동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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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학동의 일부 되기”

케이크갤러리는 2010년부터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던 ‘솔로몬 아티스트 스튜디오’가 그 이름을 바꾼 전시 공간이다. 처음 이름이 입주건물명인 솔로몬빌딩에서 딴 것이라면, 이번 이름은 이 건물의 독특한 구조에서 땄다. 부채꼴 모양의 건물에는 마치 케이크를 잘라 놓은 듯 켜켜이 작은 공간들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이런 독특한 모양새를 한 것은 황학동 중고품시장이라는 특성상 작은 공간에 많은 상점이 들어 설 수 있게 하려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황학동 시장에서 판매하는 물건은 제작·유통되어 누군가의 소유물로 쓰이다가 그 기능을 다한 후 거리에 나온 것들로 이곳에서 말끔히 단장하고 다시 진열대에 놓이게 된다. 그러니까 시장의 제도적인 단계를 지나거나 (어떤 이유로든) 그 효력을 잃은 물건들이 제도와 무관한 방식으로 상품으로 재출현하는 ‘최후의 시장’이라고 볼 수 있다. 과거 어느 호시절에는 건물에 빈 공간 하나 없이 상점과 작업장이 입주해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더 이상 임대가 되지 않는 건물의 일부 빈 공간에 미술인들이 찾아오면서 전시 공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청계천 복원 공사 이후, 문화인류학이나 도시계획학 등 연구를 위해 황학동을 찾던 발걸음이 사라져갔다. 모두들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이곳 시장도 싹 바뀌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역사적으로 정부는 이 지역을 가리는데 급급했고, 서울의 근대화와 도시화를 거론할 때 황학동이란 이름을 배제했다. 하지만 지금도 황학동 시장은 살아서 움직이고 있고 그것을 목도한 이상, 미술을 매개로 기록하고 전시로 드러내 보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팀 황학동’은 리서처 5명(노해나 안성은 윤민화 이소라 장한별)과 작가 5명(손준호 오진욱 이호인 최기창 최우진)으로 구성된 프로젝트 팀이다. 황학동 솔로몬빌딩 104호를 거점으로 사진관을 운영하면서, 2014년 5월부터 10월까지 약 6개월 동안 황학동 중고품시장 상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그 모습을 사진에 담아서, 오늘의 황학동 시장을 기록했다.
솔직히 말해서 미술을, 전시를 기획한다는 것이 반드시 지역성이나 장소성에 기반을 둔 당위성을 가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황학동 시장의 중앙상가 건물인 솔로몬빌딩의 일부를 점유하고 ‘그곳에서’ 미술을 한다는 것은 묘한 책임감을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다. 한 때는 자신들의 거처이자, 상점이 있었던 솔로몬빌딩에 낯선 젊은이들이 찾아들어서 예술을 한다며 전시회를 열고, 그들끼리 어떤 행사들을 마련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마음은 어떠할까. “아마도 그런 일은, 청계천변의 노점상들을 싹 갈아엎고 그럴싸한 상가 건물들을 일렬로 세워둔 일이나, 텃밭을 가꾸던 곳에 들어선 롯데캐슬과도 같은, 너무나도 이질적이고 생소한 또 하나의 사례를 만드는 꼴이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고민을 거듭한 끝에 ‘팀 황학동’을 기획하게 되었다. 황학동 시장에 떨어진 기름 한 방울처럼 섞이지 못하는 미술이 아니라, 말 그대로 황학동과 함께 ‘팀’을 이루고 싶었다.
윤민화・독립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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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크갤러리가 위치한 건물 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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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황학동의 전시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