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
.

정주영 : 풍경의 얼굴

2017.11.15~2017.12.24 갤러리현대

.

정주영 〈북한산 No.34〉(사진 오른쪽) 리넨에 유채 200 ×210 cm 2015

.


.

미술에서 다루는 대상은 저마다 요구하는 표현상의 관습이 있다. 인물은 초상으로, 과일과 꽃은 정물로, 산과 바다는 풍경으로. 그런데 그건 대상이 요구한 게 아니라 우리가 그 틀로 정해 온 것이다. 대상을 보는 우리의 습관이다. 그래서 그 보는 방식의 규정에서 벗어난 그림은 뭔가 이상하게 느낀다. 이것이 정주영의 산 그림이 낯설게 보이는 이유다.

그의 산 그림은 풍경이 아니라 정물이다. 도대체 산을 정물로 그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단순히 부분을 다뤄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건 우리가 산을 풍경으로 대하는 방식, 산을 보는 관습을 완전히 어긴 그림이다. 그의 산 회화는 초상화이기도 하다. 〈풍경의 얼굴〉이란 전시 제목이 바로 그 말이다. 그림은 산의 부분이건만 초상화처럼 화면을 당당하게 차지하고 관람자와 대면한다. 그의 그림과 같이 부분이 전체인 듯 의기양양한 건 처음 보는 일이다. 너무 가까이 들이대서 잘 몰라봤지, 그의 산은 북한산 맞다. 묘한 건, 우리는 첫눈에 그 흐릿하고 부분적인 이미지를 북한산으로 알아본다는 점이다. 정주영의 산 그림이 갖는 특징이 실경이란 점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작가가 북한산을 얼마나 쳐다보고 그렸기에, 조금만 보여줘도 그게 북한산인 것을 우리가 아는가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부분만 봐도 알아본다. 아니 부분을 아는 사랑이 진짜다. 그 사람의 ‘전체’ 모습에는 관계의 흔적이 없는 법이다. 체험적 관계란 부분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아봤고, 어깨에 기댔었고, 또 그 귓불을 들여다봤기에 그를 잘 아는 것이다. 우리는 전시에 나온 30여점의 그림 앞에 서서, 작가가 산의 어깻죽지와 옆구리, 그 정수리와 뒷골 부분을 얼마나 눈으로 더듬었으면 저 정도의 컷이 나오는가를 생각한다.

이번 전시에는 북한산 바위들 사이에 자신의 손 부분을 묘사한 작은 회화 10여점이 선보였다. 개인전을 10여 차례 가졌건만, 산 이외의 모티프가 등장한 건 처음인 듯싶다. 손의 부분을 확대해 그린 작은 그림들이 산의 부분 그림들 사이에 있고 모두 가까이 들이대니, 손이나 산이나 별반 다름이 없다. 회화의 몽환적 스크린에서 손의 주름과 산의 협곡은 그 형세를 공유한다.

리넨에 유채로 그린 산의 표면들은 그 피부가 거칠다. 가까이 보면 일정한 자국들로 덮여 있는데 그림은 그렸다기보다 긁어댄 듯하다. 산의 피부가 거칠어진 것은 2013년 전시 〈부분 밖의 부분〉부터라 보는데, 산의 표면이 온통 호피(虎皮)로 뒤덮인 듯 일정하고 균질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표면 결의 방향이 제각기 달라, 작가가 끝이 날카로운 기구로 일일이 긁어댄 듯하다. 그 자국이 예리하고 일정하여 그의 산 그림은 산을 드러내기보다 산을 지우는 느낌이 강하다. 산의 실루엣을 뭉개고 그 형태를 해체한다. 사진기의 초점이 흐려지듯, 정주영의 산은 눈의 기억에서 흐려진다. 그리고 그 산은 기억의 영역 어딘가에 ‘원형’으로 걸려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인간의 인식과 감각을 투사하는 어떠한 원형으로서의 형상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말했던 듯하다.

산에 대한 작가의 20여 년간의 탐구는 그 일관성에서 감탄할 만하다. 단순하고도 유사한 그 기암괴석의 면면은 산의 초상이라기보다 산을 는 기억의 편린들이다. 김홍도와 정선의 그림을 참조하여 시작된 정주영의 실경에 대한 탐구는 그것이 한국인이 익숙하게 봐 온 산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작가는 선조 화가들의 시각을 따라한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그의 산 그림은 산을 그린 것이라기보다 ‘산을 보는 시각’을 그린 그림이다. 그리고 그 시각에서 문제 삼는 것은 다름 아닌 ‘거리’다. 산의 여러 모양들이 단순히 클로즈업 돼 있어 도통 알아볼 수 없지만 동시에, 묘하게도 친숙한 모습이다. 그리고 미세한 차이로 그려진 산의 면면이 실경의 시간을 증명한다.

우리가 사물을 볼 때 너무 가까이 당겨보면 그것의 정체를 포착하지 못한다. 작가는 기괴한 바위의 모습이 각각의 별칭으로 불리며 사람들의 인식에 각인되는 과정에 개입한다. 대상을 파악하는 우리의 시각에 대한 실험인 셈이다. 정주영이 그린 산의 얼굴은 부분과 전체 사이, 추상과 구상 사이 그 어딘가에 아련히 걸려있다.

.


글:전영백 | 홍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