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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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호 : 사라진 풍경

2017.10.21~2017.12.17 미메시스 아트뮤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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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호 〈사라진 풍경〉 전시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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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된 형태를 부정하며 모호함과 불확실성을 주제로 작업하는 김태호의 개인전 〈사라진 풍경〉은 “사라진 것”에 대한 이야기다. 무엇이 사라진 것일까? 그 실마리를 작품 제목에서 찾으려 두리번거려 보지만 캡션이 일절 주어지지 않아 당혹감이 밀려온다. 감상 힌트를 얻을 길이 차단되자 개별 작품 하나하나에 집중하기보다 전시회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에 대해 재고하게 된다. 미메시스 아트뮤지엄의 특징인 부드러운 곡선 벽을 타고 흐르는 은은한 자연광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작품들이 마치 영화의 시퀀스처럼 펼쳐지며 전시장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캔버스가 되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김태호는 캔버스를, 이미지를 재현하는 장이 아니라, 입방체의 공간으로 다룬다. 그는 2012년부터 미온(微溫)의 색을 입힌 다양한 크기의 캔버스와 그 모습을 빼닮은-나무 또는 아크릴로 만든-납작한 입방체를 구분 없이 활용하며 ‘스케이프 드로잉(Scape Drawing)’이라고 통칭한다. 그의 스케이프 드로잉은 그리고 칠하는 과정을 수십, 수백 번 반복하는 행위를 통해 완성되는데, 은분을 섞은 단색으로 마무리하는 방식이라 최종적으로 우리의 망막에 맺히는 부분이 연한 빛을 발산하는 색면뿐일지라도, 사실은 입체적 층위를 형성하고 있다. 그의 표현대로 눈이 소복이 쌓여 있는 들판과 같은 “풍경”이다.

〈사라진 풍경〉을 지배하는 주인공 역시 스케이프 드로잉이다. 반듯하게 재단한 사각형을 기본 단위로 하는 색면들이 하나의 붓 자국처럼, 또는 이미지는 사라지고 빛만 남은 은막의 스크린처럼, 때로는 미니멀리즘 조각과 유사한 모습으로 전시장의 벽과 바닥에 질서를 부여한다. 그리고 그 사이 사이에 가로 또는 세로로 줄지어 배열한 사진작업과 출처를 알 수 없는 오브제들이 도무지 풀 수 없는 수수께끼처럼 난해하게 흩어져 있다. 이 작업들은 스케이프 드로잉 시리즈와 다르게 구체적인 형상을 드러낸다. 특히 사진작업은 대부분 어둠이 짙게 드리운 밤의 풍경을 연속적으로 포착한 것이다. 검은 장막을 친 듯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드러나는 윤곽선만으로 짐작할 수 있는 있는 사진 속 풍경들은 빛을 머금은 스케이프 드로잉의 화면 아래 켜켜이 잠복한 “사라진 풍경”의 실재를 엿보는 느낌을 준다.

스케이프 드로잉과 마찬가지로 사각의 프레임을 유지하는 사진작업보다 공룡, 자동차, 인형과 같은 어린아이의 장난감을 비롯해 화병, 책, 성모상, 유리병 등 누군가의 손때 묻은 오브제를 활용한 설치 작업은 훨씬 더 설명적이다. 김태호는 이 오브제들을 대형 이젤 두 개를 서로 마주보게 포개어 바닥에 눕혀놓은 듯 보이는 목조 구조물 위에 얼기설기 걸쳐놓았다. 모든 것을 덮어버린 스케이프 드로잉 시리즈에서 드러내 보일 수 없었던 풍경의 일부를 화폭 밖 세상으로 꺼내어 보여주는 듯하다. 그가 그리는 풍경이 다분히 그의 개인적인 기억과 회상의 공간일 수 있다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작품을 완성하는 모든 과정을 드로잉으로 간주하는 김태호에게 풍경을 그린다는 것은 캔버스라는 회화적 공간에 담을 수 없는, 저 너머 시간의 공간으로 흘러가버린, 기억 속에 희미하게나마 파편적으로 남아있는 심상을 붙잡는 행위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라진 풍경〉에서 마주하는 모든 작품들은 개별 작품이지만 하나의 드로잉이기도 하다. 결과이자 과정이며 전체이자 부분이다. 다시 말해, 〈사라진 풍경〉은 “사라진 풍경”을 붙잡는 과정과 결과를 한눈에 펼쳐 보이는 것이자, 과정으로서의 드로잉이라는 행위가 종결된 시점에서 얻은 결과물의 총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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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진혜윤 | 미술사, 서울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