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미술과 通한 사람들 – 미술을 위한 화학, 미술재료학_전창림

미술을 위한 화학, 미술재료학

바이오화학공학과 교수 전창림

미술대학에서 강의하며, 미술대학 교재를 출판했고, 명화를 해설하는 책을 내기도 했는데, 디자이너들이 모이는 색채학회에서 제가 내미는 명함을 본 분들은 대개 깜짝 놀랍니다. 미술 전공이 아니라 생소한 바이오화학공학과 교수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화학과 미술이 무슨 관계인가? 진학 상담을 할 때도 미술계로 가는 사람이 화학에 관심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미술가와 과학자가 거의 동의어였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특별한 천재가 아니라도 중세의 화가들은 직접 물감을 만들며 상당한 화학지식을 갖추고 있었고, 공학과 재료에 관한 높은 지식을 갖춘 미술가들이 있었기에 기술적으로도 실현이 쉽지 않은 조형구조의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남겼습니다.
저는 미술대학을 진학하려던 꿈을 가지고 있었으나 아버지의 강압(?)에 의해 화학을 전공했습니다. 미술의 꿈을 못 버리고 유학지를 프랑스로 정하여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으나 화학이 너무 어려워 한눈을 팔지 못하였고 결국 화학과 교수까지 되었습니다. 그런데 화학에 눈을 뜨고 보니 이 화학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특히 벤젠의 구조는 그 자체가 아름다운 육각형 조형물입니다. 특히 이 육각형 고리에 약간의 방울(산소 원소 표시가 O2이기 때문)이 달린 아스피린 구조를 보면 조화와 균형과 약간의 파격이 어우러지면서 심플한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환희를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화학자 중에 미술에 관심을 가진 분은 거의 없습니다.
제가 전공하는 화학을 비롯하여 기술공학 분야는 효율성과 유용성을 놓고 다툽니다. 아름다움은 그 다음이죠. 그러나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진리는 어느 분야에서나 통합니다. 이 말의 역(逆)도 진리입니다. 맛 좋은 떡이 아름답습니다. 요즘은 제품마다 성능은 거의 비슷하여 디자인이 중요하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나오기까지 성능을 발전시키려는 피눈물 나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제야말로 기술과 미학의 완전한 융합이 필요한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화학은 기본적으로 어떤 새로운 물질을 만드는 학문입니다. 이렇게 태어난 새로운 물질은 새로운 성질과 형태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물질로 새로운 조형물을 만들면 새로운 예술이 되겠지요. 전통적인 재료로 만드는 작품에 수많은 미술가가 끝없이 도전하여 이제는 하늘 아래 새것이 있겠는가 하는 데까지 왔습니다. 지금까지 써 왔던 재료만으로는 표현양식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재료를 바꿔야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이제 재료에 대한 연구가 미술가에게 필요합니다. 화학이 미술에 절대적인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결국 미술은 시각적 결과를 작품으로 만듭니다. 그 시각적 결과물을 만드는 재료를 철저히 알지 못하고 어떻게 그 재료가 나타내는 모든 성질과 형태적 변화를 미술에 응용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저는 미술대학에서 미술재료학과 색채화학을 강의합니다. 또한 미술작품에 숨어 있는 과학적 요소들과 화학적 문제들에 대한 글을 쓰고 있기도 합니다. 저의 책《 미술관에 간 화학자》가 미술과 화학을 융합하였다고 대입 논술교재로도 쓰인다고 합니다만 저는 ‘미술과 화학의 융합’이라기보다는 ‘미술가를 위한 화학’을 제 필생의 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미술가들에게 꼭 필요한 화학과 재료에 관한 지식을 발전시키고 학문으로 정립하여 각 미술대학에 강좌를 개설하고 그 강좌를 담당할 미술과학자를 길러내는 일입니다. 이러한 미술과학을 체계적으로 교육받은 미술가는 자기 작품을 세대를 넘어 보존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갖추게 될 뿐만 아니라, 그 재료를 사용하여 다양하고 새로운 표현 기법도 응용할 수 있습니다. 융합과 통섭을 외치는 시대에 우리 미술가들은 좀 더 넓은 시각으로 새로운 재료와 미술재료학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많지 않지만 미술을 위한 화학과 융합학문을 정립하는 데 뜻을 같이 할 분이 많아지기를 기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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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창림은 한양대 화학공학과와 동 대학원 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국립대학교에서 고분자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물감과 안료의 변화나 색의 특성 등 미술과 화학의 접점을 찾고자 노력한다. 현재 홍익대 과학기술대학 바이오화학공학과 교수, 대학원 색채전공 강의교수로 재직 중이며 대한화학회, 공업화학회, 한국화학공학회 회원이자 한국색채학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