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이 척박한 현실의 표층으로서의 젊은 작가들

contents 2013.11. Special Feature | 이 척박한 현실의 표층으로서의 젊은 작가들
이번호 《월간미술》에서는 국내에서 활동 중인 큐레이터 50인에게 20대 중반에서 30대 중반의 작가를 각 4명씩
추천받아 그중에서 100명을 추려 소개한다. 미술대학과 대학원, 혹은 유학을 마치고 갓 돌아와 활동하는 연배
의 작가들인 셈이다. 아마 미술계에서 가장 젊고 신선한 얼굴들일 것이다. 물론 큐레이터들의 시각과 미술에 대한 입
장, 그들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작가의 기준의 편차는 무척 클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추천을 받은 작가가 곧바로 한국
젊은 세대를 대표한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한편으로는 작가들을 추천하고 전시를 기획하는 주체들의 시각이 어
떠한지, 또한 그들이 바라보는 젊은 작가들은 누구인지를 알아보는 데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자료가 될 것이다. 사실
오늘날에는 이전과 달리 전시기획자, 평론가들이 거의 모든 공모전, 지원제도, 각종 심사에 빈번하게 참여하면서 작
가를 선정하고 그들을 모아 전시를 기획하는 주체들이기에 이들의 시선, 선택은 매우 중요하다 하겠다. 따라서 여기
에는 전문성과 안목, 그리고 나름의 윤리성이 요구된다. 나는 무엇보다도 작업을 잘 분별해서 보는 안목이 너무도 중
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특집은 다양한 작업을 하는 젊은 작가들을 한눈에 보여주면서 동시대 젊은 작가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살펴보
고자 하는 취지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사실 오늘날 우리 미술계는 끊임없이 젊은 작가들을 주목해왔고 이들을 선
별해내면서 작업 기회를 부여하거나 언론에 소개하는 한편 각종 레지던시 프로그램과 여러 종류의 지원제도를 통해
도움을 부여해왔다고 본다. 이전과 비교해서 현재 젊은 작가들의 작업환경은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편이다. 지금은
학교를 졸업한 이후 다양한 지원제도에 힘입어 곧바로 화단에 진출하거나 여러 전시, 아트페어 등에 참여하기가 용
이해진 측면도 있고 미술시장이 젊은 작가, 새로운 상품을 열심히 찾아내고 있기에 이미 20대 후반의 나이에도 왕성
한 활동을 하는 작가들을 자주 본다. 그런데 그것이 긍정적이냐 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이 문제다. 지원제도 등
에 맞춰 작품과 활동이 제약되거나 그 틀에 순종적인 작업이 양산되는가 하면 시장의 상품성에 과도하게 노출되는
부작용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작업의 내용도 획일적인가 하면 특정 스타일들이 양산되고 미술에 대한
인식의 협소함이나 피상적이고 상투적인 주제의식 등도 빈번하게 접한다. 작업환경이란 것도 좀 더 깊이 들어가 보
면 이 나라에서의 삶이 결코 녹록지 않기에 젊은 작가들의 작업환경이 이전과 비교해 좋다고만 말하기도 어렵다. 작
업 또한 이전과 비교해 좋아졌냐 하면(비교 자체도 어려운 일이지만) 선뜻 그렇다 말하기도 어렵다. 오늘날 젊은 작
가들의 작업환경과 작업수준, 나아가 이들의 삶과 작업 활동을 어떻게 볼 것이냐. 결론적으로 오늘날 젊은 세대 작가
들은 문제적이다. 그것은 미술계의 문제만이 아니라 동시대 한국 자본주의의 삶이 워낙 팍팍하다는 데서 기인한다.
현재 한국에서 삶이 가장 어려운 세대는 단연 노년 세대이다. 75세 이상 노인 자살률이 10만 명당 160명꼴이란다.
물론 88만원 세대로 불리는 청년들도 힘든 세대이다. 문제는 이 세대가 “한국의 사회문제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표층”
(한윤형)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바야흐로 후기자본주의의 문제가 불가피하게 파생시킨 인간형이 이들 젊은 세대
에 고스란히 낙인 찍혀있다. 지금 한국 사회는 무한경쟁의 정글로 이루어졌고 이 한국적 특수성은 단 한 가지 룰에 입
각한 기이한 경쟁을 독려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기실 경쟁이 아니라 사회 독점 계급을 생산해내고 정당화하는 도구
에 불과하다. IMF 외환위기 이후 대학생들은 이전과는 달리 더욱 치열한 경쟁의 공간에 노출되었고 그럼에도 불구
하고 괜찮은 일자리의 숫자는 줄어드는 현실에서 산다. 따라서 학벌사회의 승자이면서도 잉여 인간이 되고 있다. 이
들의 열패감은 대단하다. 그러나 이 낭패감을 공론화하지 못하고 자기학대로 이어지거나 현실을 비참하게 바라보는 것이 하나의 문화, 루저문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냉소가 되고 보수화
되고 정치나 사회현실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진다. 미술계를 예로 든다면
이전에는 유명 미술대학을 나오면 조교를 거쳐 대개 스승이 심사위원으로 포
진해 있는 공모전에서 수상을 하고 자연스레 시간강사를 거쳐 지방대에 취업
하거나 머지않아 서울에 있는 대학이나 운이 좋으면 모교의 교수가 되는 것
이 순리라고 여겼던 때가 있다. 유학을 갔다 오면 더 말할 나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유학은 필수고 심지어 실기 박사학위까지 반드시 요구되고 있다. 그
러다보니 외국 유학의 매력은 줄어드는 대신 죄다 박사과정에 들어가고 있
다. 유학을 마친 이들도 다시 국내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형편이다. 지방
대 출신들은 한결같이 서울에 있는 대학원을 거쳐 학벌세탁을 한다. 그렇다
고 대학에 자리 잡아 쉽게 전임이 되거나 좋은 작업을 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과도한 학벌 경쟁, 그로인한 경제적
지출을 무릅쓰고 그들은 이 한국 사회 못지않은, 더욱 심한 무한경쟁의 미술계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직업, 지위를 가
지려고 올인을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열정과 욕망이 작업으로 귀결되지 못하고 경력 쌓기나 스펙 만들기라는
차원에서만 작동된다는 점이다. 그러니 오늘날 젊은 작가들의 미술적 활동이란 결국 작업을 한다기보다는 그것을
수단으로 삼아 화려하고 그럴듯한 경력을 만드는 알리바이에 머물고 있다는 게 정확한 진단이라 할 것이다. 부모의
희생을 담보로 해서 말이다. 혹은 자신의 청춘을 죄다 소진하면서다. 내 주변에는 40대 이상의 미혼 작가들이 넘쳐난
다. 결정적인 이유는 경제적 사정으로 인해 결혼을 꿈꾸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이는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잔인한
무한경쟁을 촉발시키는 한국 사회와 경력을 요구하는 미술계 제도의 문제이다.

불안의 세대와 파편화된 취향
결론적으로 세대의 특성은 사회가 만든 것이다. 따라서 청년세대를 분석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탐구하려면 한국 자
본주의의 현재에 대해 말해야 한다. 오늘날 청년세대의 특징, 즉 인터넷, 대중문화, 민족주의의 정치성, 취업난, 그리
고 파편화된 취향은 모두 한국의 사회적인 조건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의 미술계 구조나 현실 역시 이 사회로
부터 강하게 견인되어 있다. 아울러 그것이 작업의 경향과 내용을 채우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오늘날의 젊은 작가
들은 미술, 미술계가 현실과 무관하다고 봐서는 결코 안된다. 작업이 안풀리는 것은 삶이 풀리지 않아서이다. 사회를,
미래를 총체적으로, 전망적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년작가들에게 사회를 바라보는 총체적인 시각을
가져야 할 필요성을 납득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차원에서 작업을 고민하고 미술계를, 자신의 작가로서의 삶을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젊은 세대, 청년문제에 대해 말하는 지식인들은 새로운 자기계발 담론을 통해 ‘멘토’
역할이나 가볍기 그지없는, 하나마나한 소리를 한다. 과연 그런 말이 위안이고 치유이며 대안일까? 그것은 더없이 보
수적인 언사들이다. 그리고 이는 삶에 지친 젊은 세대들이 듣고 싶은 조언을 소비하는 차원에서 작동된다. 요즈음에
스님들이 그 치유의 언사를 쏟아낸다. 머지않아 우리 미술계에서도 스님의 말씀이 미술평론을 대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수사가 삶과 작업을 결코 대신해주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젊은 작가들의 미술적 활동이란
결국 작업을 한다기보다는 그것을
수단으로 삼아 화려하고 그럴듯한
경력을 만드는 알리바이에 머물고
있다는 게 정확한 진단일 것이다. 부모의
희생을 담보로 해서 말이다. 혹은 자신의
청춘을 죄다 소진하면서다. 그리고
경제적 사정으로 인해 40대 이상의 미혼
작가들이 넘쳐난다. 이는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잔인한 무한경쟁을
촉발시키는 한국 사회와 경력을
요구하는 미술계 제도의 문제이다.
오늘날의 청년들은 각자의 고립된 공간에서 고립된 주체로 살아간다. 대
중문화와 인터넷은 파편화된 취향을 양산한다. 당연히 공동체의 공동 관심
사는 약화된다. 20~30대 작가들 역시 자기 또래의 젊은이들처럼 ‘파편화된
취향과 만성화된 불안의 세대’들이다. 이들은 미술계에서 인정받으며 작업
을 해야 한다는 비장한 욕망과 작업을 해서 먹고살아야 한다는 절박한 욕
망, 그리고 부모세대가 요구하는 번듯한 직장인으로서 가족을 부양하는 사
람이 되어야 한다는 집요한 요구사이에서 갈등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그래
서 무기력증과 우울함이 결합한 어떤 정신 상태로 내몰린 젊은 세대들이기
도 하다. 향후 한국자본주의가 어떻게 돌아갈지, 이 사회와 현실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불안감과 어떤 세상을 살아가게 될지 알 수가 없다는 느
낌은 세계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욕망을 갉아 먹는다. 미래가 없는, 없다고 여기는 세대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젊
은 세대이다. 미술 역시 전망과 확신, 열정이 사라진 자리에 권태로운 그리기, 강박적인 회화(일러스트 같은), 괴이하
고 음산한 상상력의 창궐, 작위적인 개념미술, 형식에 맞춘 작업의 (어거지 같은)담론들이 횡행한다. 심사를 하다보
면 젊은 작가들이 대부분 작업을 위한 설정을 너무 많이 두는 경향을 보게 된다.
개념미술의 잘못된 영향이라고 보는데 그 개념들이 한결같이 유사하고 상투적이다. 따라서 나는 심사에서 작가들
의 포트폴리오에 실린 작업노트를 읽는 것이 너무나 괴롭고 곤혹스럽다. 차라리 “그냥 그렸다”거나 “그리는 게 너무
좋아서 그렸다”라고 쓰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새로운 작가, 새로운 미술운동이란 새로운 미적 환경을 창조함으로써 ‘사회를 정신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재
구성할 수 있는 혁신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런 경우에 그것을 새로운 미술이라고 말하며 이를 주도해나가는 작가를
젊은 작가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새로운 미술운동을 추동해나가는 젊은 작가들은 매 시기 기성의
언어와 관습을 가로질러가는 자리에 피어났다. 그래서 그들에게 신세대, 혹은 젊은 세대의 감수성과 미의식, 새로운
미술 등의 수사를 붙여주었다. 그들은 이미 제도화된 미술언어를 구사하는 어른들과는 다른 감수성의 소유자들이며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미술운동과 소통방법의 확장에 대한 시도를 보여주는 존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젊은 작가들에게 나름의 기대를 걸게 된다. 1990년대 초반 한국미술계는 이른바 ‘신세대’ 논의로 뜨
거웠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이곳 미술계는 여전히 젊은 작가들에게 환호한다. 젊은 작가의 작품만이 가득하다는
인상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현재의 흐름은 이전의 ‘신세대미술운동’과는 어딘지 다르다. 기존 미술언어
와 제도에 저항하는 나름의 감수성과 미의식의 공유성도 없지는 않으나 오늘날 대다수 젊은 작가들의 작업은 이전으
로 되돌아가는 지극히 보수적 성향을 드러낸다. 더불어 달라진 삶의 환경, 자신이 살고 있는 이 현실 속에서 작가로서
의 삶, 그리고 이전과 다른 현재의 미술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와 고민의 흔적이 너무 엷어 보인다. 지금 젊은 작가들
의 작업이 과연 기존 미술계의 주류 언어를 문제시하고 달라진 미술개념을 구사하며 미술문화의 지형도 자체를 새롭
게 짜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기 시대를 관통하고 극복해나가려는 의지 아래 작가로서의 삶을 펼치고 있는 것일
까? 그런 의미에서 그들과 그들의 작업을 진정으로 젊은 작가, 새로운 미술운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