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시선의 정치, 동물원을 다시본다

탈식민주의적 시선에 대한 고민

정현 미술비평

“그들은 이야기 기법을 이용하고 역사적이고 탐험적인 태도를 취하며 해외 영토를 철저히 조작하거나 활성화했다.”
– 에드워드 사이드,《 문화와 제국주의》, 214쪽

최근 비서구권 국가들은 과거 유럽식민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서구 중심의 세계사가 아닌 역사 다시-쓰기를 추구한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늘날 문화텍스트를 다시 쓰려는 시도가 식민주의의 잔재의 반동으로 나타나는 반제국 투쟁과 연결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제3세계 지식인들의 연구가 낡은 규범과 관습의 폐해를 증명하여 세계에 관한 신선한 해석과 새로운 지식의 탄생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수많은 탈식민주의 담론 중 동물원 담론은 시점에 따라 다양한 관측이 가능한 대상이자 주제이다. 여기에서 동물원은 근대식민주의의 잔재이자 유럽제국주의 사상이 펼쳐지는 정치문화적 표상을 지시한다. 그러므로 표상으로서의 동물원은 식민주의의 흔적이자 우리가 극복할 대상이며 나아가 유사한 기획물인 식물원, 박물관, 미술관을 아우르고 있음을 미리 밝힌다.

실재와 가상의 겹침
모던보이 이상은 동물원에 관심이 있었다. <산촌여정>은 경성이라는 대도시를 벗어난 이상이 근대화의 영향이 상대적으로 덜 미친 시골을 방문해 목가적인 풍경과 정취에 대한 느낌을 적은 수필인데, 간혹 그곳에서마저 근대 문물의 영향을 목격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산촌여정>에서 이상은 야생에서 뛰노는 동물들을 보고 마치 동물원의 짐승들을 풀어놓은 것만 같다고 말한다. 현실과 가상의 관계가 겹친 이러한 인상은 일제에 의한 근대화의 한 단면을 시사한다. 문명이 자연을 인간의 목적에 맞도록 재단하는 기획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상이 야생에서 본 짐승을 동물원에 전시된 짐승으로 혼동하는 것을 통해 근대인이 바라보는 자연이 어떠했는지를 상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 최초의 동물원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한국 최초의 동물원은 식물원·박물관과 함께 창경궁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일제는 순종을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게 한 후 그곳에 동물원·식물원·박물관을 개설하고 1909년 11월 1일부터 일반인의 관람을 허가한다. 이 과정에서 일제는 창덕궁을 창경원으로 개명하는데 이는 한 국가의 군주의 거처이자 권위의 중심인 궁을 일반인이 즐길 수 있는 유락시설로 격하시킨 것이다. 동·식물원과 박물관이 창경궁 한곳에 설치된 것은 후쿠가외 유이치라는 인물이 일본에 동·식물원과 박물관을 함께 개설하려는 취지를 따른 것으로 일본은 이 장소들을 ‘서구의 근대 시설’이라는 시각으로 도입했다. 그러므로 한국 최초의 박물관은 대상만 다를 뿐 식민주의 지배 담론을 펼치기 위한 장치들로 구성된 공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일제는 동·식물원과 박물관을 궁 안에 개설하여 이른바 ‘근대문명’의 힘을 제시함과 동시에 절대 권력의 상징인 궁이라는 폐쇄적인 공간을 개방적인 공간으로 뒤바꾼다.(서태정, <대한제국기 일제의 동물원 설립과 그 성격>, 《한국근현대사연구》 2014년 봄호 제68호 참조) 이 사건은 식민주의에 의한 근대화라는 계몽주의 정치학이 피식민지 안에 어떻게 이식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영토의 재구성
제국주의의 권력은 동·식물원과 박물관이라는 장소 안에 희귀한 대상들, 즉 다른 지역의 문물을 비롯한 동식물 등을 한데 모아 세계 영토를 재구성한 후 피식민지인들에게 지식과 견문을 넓히도록 한다. 이 경우 대상의 차이만 있을 뿐 동·식물원과 박물관의 정체성은 거의 동일하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결국 문명화란 인간의 지혜와 기술을 바탕으로 자연을 기획하고 포획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으며 이 공간에 배치된 희귀한 동식물들은 표본화된 자연으로 근대화라는 유토피아를 구성하는 정치적 요소가 된다. 근대의 가치는 유물론적 관점으로 나타난다. 예술작품의 정신적 가치가 전시 가치로 이동하는 근대에 자본을 통한 예술품의 소유와 수집 문화가 탄생한다. 과거 국가적 차원의 전리품으로 채워진 박물관이 근대로 들어서자 개인의 취향을 과시하는 수집의 시대로 전환되면서 유럽의 부르주아 계층은 수집품을 통해 문화인으로서의 가치를 경쟁적으로 드러낸다. 전시 가치는 단순히 아름다운 예술품을 관람한다는 수동적 향유가 아닌 문화적 유산과 자본이 결합해 인간이 가진 가장 고귀한 가치를 소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문화학적 시각으로 본 전시 가치는 가치의 유형화, 서열화로 가지를 뻗는다. 희귀한 대상도 마찬가지다. 유럽 중심역사관에 의해 탄생한 기념비적 대상들(기념비, 유적, 예술작품 등)은 위대한 인간의 성스러움으로 고양시킨다면, 희귀한 혹은 특이한 대상들 (오세아니아의 민속물, 유색인, 기형아 등)은 야만성이나 원시주의의 대상으로의 가치를 부여받는다. 자연, 야생을 인공적으로 기획된 공간에 위치시킨다는 의도는 다분히 근대적 식민주의의 권위를 드러내는 정치적 태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동물원의 우리에 갇혀 전시물이 된 짐승들, 유리 천장으로 만들어진 수정궁 안에 이식된 열대 식물들은 근대 문명의 힘을 과시하는 전시장과 같다. 식물원을 오랑주리(Orangery)라 부르는 이유다. 자연을 인공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기술의 발달은 삶의 윤택함과 풍요로움을 제시함과 동시에 과거 불가능했던 상상의 세계를 현실로 재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렇게 현실화된 상상의 유토피아는 영토를 정치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는 또 다른 가능성으로 확장된다. 미셸 푸코가 언급한 ‘헤테로토피아’는 이처럼 현실이 된 유토피아의 장소들을 가리키는데, 미래의 안녕을 책임지는 보험회사를 비롯해 고급 기숙학교, 병원, 박물관 등도 이에 포함된다.

미술관 밖의 미술관
미술관의 원형인 루브르박물관를 비롯해 인류학, 역사, 자연사 박물관 등은 본질적으로 유럽 식민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구성되었기에 유럽과 비유럽, 서구와 비서구를 구분한 위계로 만들어졌다. 현대미술관 역시 서양미술사를 대표하는 역사의 표본 전시장으로 전 세계 미술의 지배 담론을 교육하는 장이기에 시대의 차이가 있을 뿐 그 구조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변화의 출발은 21세기로 진입하면서 나타난다. 새로운 미술관은 다원주의와 수평적 역사관을 바탕으로 다인종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이를 통해 동시대가 국가가 아닌 도시, 민족이나 인종이 아닌 개인의 시대라는 현실을 반영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현재의 현대미술관은 시대의 상황과 환경에 따라 진화하는 과정에 놓여 있기에 단순히 푸코적인 헤테로토피아라 단언하기 어렵고 반대로 현실을 충실히 반영하는 동시대성을 충분히 소화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도 없다. 비서구권의 경우 20세기 미술관이 서구사상의 틀 안에서 기획된 모델을 원본으로 삼았다면 최근 비정형적이고 다원적인 복합문화공간을 구축하고 있는 문화적 움직임은 서구적 역사관에 입각한 미술관 개념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다. 근대 유럽의 박물관은 일원화된 서구 사상과 역사관의 서사를 구조화한 유형이었다면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다원적 시점으로 역사를 재해석한 전시를 기획하거나 미술 이외 분야의 예술가, 큐레이터, 학자 등의 협업을 통해 유물의 전시장이 아닌 동시대와 소통하려는 의지를 드러내는 네트워크의 장소로 변화를 모색 중이다. 미술에 대한 정의가 불가능한 시대이기에 오늘날 미술관은 ‘과연 무엇이 미술인지를 모색하는 실험의 장’, ‘전 지구화 된 사회문화적 현상이 충돌하는 경계’, ‘현실적 문제들이 충돌하는 사건 지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배후에는 이른바 탈형식적인 실험들-매체가 섞이고 언어가 겹치거나 부서지고, 맥락이 깨져버린 동시대예술-이 존재하기에 이러한 시도가 나름의 당위성을 갖는 이유일 것이다.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이러한 유의미한 도발의 지평에는 역사 속의 식민주의, 현실의 식민주의, 자신 안에 내재하는 식민주의를 극복하려는 아직 온전히 언어가 되지 못한 몸부림이 존재한다. 이른바 포스트식민박물관으로 불리는 프랑스 파리의 케브랑리(Quai Branly)는 유럽 백인 남성 시점의 인류학에 따라 야만인을 발명하고 비유럽권의 인간을 타자화한 식민주의 관점을 극복하고자 문을 연다. 2012년 <인간동물원(Zoos Humains> 전시는 릴리안 튜람(Lilian Thuram)에 의해 기획되었다. 튜람은 알다시피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전 국가대표로 프랑스 식민지인 구아들루프(Guadeloupe, 카리브해 위치) 출신으로 은퇴 이후 반인종차별주의 단체를 설립한 사회활동가다. 그는 <인간동물원>을 통해 비유럽권의 유색인종이 어떻게 이국적인 야만의 존재가 되었으며 유럽 백인이 인종 분류학을 통해 어떻게 인간의 서열을 만들고 이를 서커스, 만국박람회, 동물원 등에 전시했는지를 진술하고자 했다. 전시는 식민주의의 과거 고백을 통해 반성과 화합의 메시지를 전달하며 누가 야만인인가 자문하게 한다. 서구의 발명으로 개념화된 야만인-타자인가? 아니면 폭력으로 영토를 점령하고 그들의 존재를 유럽인의 시각으로 재단한 유럽인인가? 이 같은 이중적인 물음은 과거를 극복하고 세계 역사를 새롭게 쓰려는 포스트모던박물관/미술관이 풀어야 할 과제이다. 마치 김애란의 《침묵의 미래》에서 소수성의 보존만을 강조한 <소수언어박물관>이 변화와 발전을 강조하면서 스스로 전형을 답습하는 듯한 미래의 묘사가 두렵게 다가오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의 현실과 닮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탈식민주의가 학술적 지식에서 문화와 예술에 의해 실천되는 시대로 바뀌는 즈음이다. 이러한 현실의 움직임을 과연 우리의 미술관이 어떻게 수용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할 때이다. 과거의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

칸디다 (1)_2

칸디다 (2)_2

칸디다 회퍼(Candida Höfer)
회퍼는 도서관, 극장, 강의실 등 공공건물의 내부 사진을 통해 시스템화된 사회를 보여주는 동시에 인간을 배제함으로써 사물 그 자체의 질서를 보여준다. <자연사박물관> 시리즈에서는 유난히 건축적 프레임이 강조되며 동물을 분류하고 보존하고 전시하는 광경에 이목을 집중시킨다.
위 <클로츠셰 보관소> C-Print 85×85cm 1999 아래  <로테르담 자연사박물관Ⅱ> C-Print 85×85cm 1999

스투르스 (2)_2

스투르스 (1)

토마스 스트루스(Thomas Struth)
스냅샷을 연상시키는 스투르스의 미술관 사진은 미술작품, 관람객, 전시공간 세 가지 모티프로 구성된다. 이 시리즈는 미술제도에 대한 작가의 인식론을 반영한 작품으로 사진과 미술의 관계, 작품과 관람객, 전시공간의 관계에 주목한다.
위 <루브르 1, 파리> 시바크롬 프린트 183×234cm 1989 아래 <시카고아트인스티튜트 2, 시카고> 시바크롬 프린트 219×184cm 1990

김신일 InvisibleMasterpiece-OnlyPhoto

김신일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미술품을 관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촬영하고 작품 이미지는 제거해 관람객이 감상하는 행위만 남겨 놓았다. 이를 통해 작가는 감상이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의미, 명화가 때로는 권력의 상징으로 기능하는 현상에 대해 언급한다. 이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관람객들의 윤곽선을 압인으로 표현한 애니메이션 작업도 제작했다.
<보이지 않는 명화> 알루-디본 포토 각 20.5×30.5cm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