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FOCUS William Kentridge Peripheral Thin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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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시간의 거부> 5채널 영상설치 사운드 나무 2012 아래 <위비는 진실을 말한다> 35mm 컬러영상 (디지털로 변환) 사운드 1996~97와 <그림자 행렬> 35mm 애니메이션영상 1999이 순차적으로 상영되고 있는 전시장 광경

직전 세기 악명 높았던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가 펼쳐진 남아프리카공화국. 이곳에서 급진적 활동을 하던 집안에서 태어나 그 실상을 전한 작품으로 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는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 1955~)의 한국 첫 개인전 <윌리엄 켄트리지-주변적 고찰>(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2015.12.1~3.27)이 개막, 진행 중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잘 알려진 그의 목탄 드로잉 애니메이션을 비롯, 영상과 음악, 역사 등이 망라된 대표작이 출품됐다. 동서고금의 역사와 문화, 정치가 담긴 켄트리지의 전시를 살펴보면서 그가 제시하는 키워드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생각해 본다.

불확실성의 예술가, 윌리엄 켄트리지

이윤희 미술비평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백인 예술가로, 남아공의 인종분리정책과 관련된 정치적 격동기를 연상시키는 작품들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아왔다. 가장 잘 알려진 그의 작품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그의 개인전에도 포함된 애니메이션 형식의 작품들이지만, 그는 드로잉을 기본으로 하여 문학과 공연예술까지 아우르는 다매체적 작업을 지속해왔다. 남아공 출신의 백인이면서, 기존의 매체 개념에 국한되지 않는 탈장르적 경향을 보이는 작가임과 동시에, 자신이 처한 지역의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해 왔다는 이력은 그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요 특성들을 담지하고 있는 이 시대의 대표 작가로 자리매김는 데 촉매가 되었다.
남아공의 거의 모든 백인이 그러하듯이, 그는 조상이 선택한 이주를 통해 그곳의 일원이 되었다. 남아공의 백인 이주는 이미 17세기부터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켄트리지 가문은 유대인 혐오기류가 전 유럽에 팽배하던 19세기 말에 이주했다. 유대계인 그의 가문은 박해를 피해 증조부 시절에 남아공에 정착했고 몇 세대에 걸쳐 정계와 법조계에 영향력을 가지는 가문으로 성장했다. 변호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넬슨 만델라와 살해당한 흑인 인권운동가 스티븐 비코의 편에 서서 활동한 인물이다. 특정 작가의 작품을 논할 때 그가 어떤 집안 출신이라는 점을 이처럼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은 대개 불필요한 일이겠으나, 켄트리지의 경우 당시 남아공의 상황과 집안 배경은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열쇠가 된다.
1989년의 <요하네스버그, 파리 다음으로 위대한 도시(Johannesburg, 2nd Greatest City after Paris)>를 시작으로 2003년의 <조수간만표(Tide Table)>에 이르는, <프로젝션을 위한 드로잉(Drawings for Projection)> 연작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이해하는 데도 그의 출신 배경은 참고가 될 만하다. 이 연작들에서 각각 탐욕스러운 자본가와 예민한 예술가의 면모를 보이는 두 인물은 모두 어딘지 작가의 얼굴을 닮아 있다. 한 사람은 줄무늬 양복을 입은 풍채가 좋은 인물이고, 다른 한 사람은 줄곧 누드로 등장해 유약한 느낌을 주지만, 둘 다 머리가 반쯤 벗겨진 백인 남성이다. 펠릭스(Felix Teitlebaum)라 이름 붙여진 누드 남성은 켄트리지 자신의 현재 모습을 반영하여, 양복을 입은 소호(Soho Eckstein)라는 인물은 켄트리지가 조부 사진을 참조하여 그린 것인 만큼, 두 인물이 모두 작가를 닮아있는 것은 당연하다. 두 인물은 대개는 명백하게 구분되지만 때로는 비슷해 보이고 어느 순간 한 인물이 다른 인물로 변용되기도 하는데, 이는 켄트리지가 가진 이중적 정체성의 반영인 것으로 해석될 여지를 부여한다. 그는 반(反)아파르트헤이트 전선에 선 집안의 일원이지만, 백인 거주지에서 안락한 삶을 누리면서 흑인 고용인의 도움을 받고 백인 소년들을 위한 학교를 다니며 유럽적 문화와 전통을 교육받았다. 자신이 스스로 가해자편을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남아공의 백인이라는 자기 존재 자체가 모순적 정체성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박해를 피해 아프리카에 정착한 유대인의 후손인 자신은, 완전한 백인 가해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종주의에 맞서는 투사도 아니고, 그 두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의 작품 속에는 정치적으로 모순된 존재로서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성찰이 내재하며 동시에 유럽적 전통에 뿌리를 둔 자신의 예술적 감성에 대한 고뇌도 엿보인다. 그는 유럽 전통의 미술뿐 아니라 문학과 음악에 조예가 깊다. 그의 전방위적인 활동은 게오르크 뷔히너(Georg Buchner)의 희곡을 패러디한 작품(<하이펠트의 보이체크(Woyzeck on the Highveld)>(1992))과 괴테의 파우스트를 남아공의 상황에 빗댄 작품(<아프리카의 파우스트!(Faustus in Africa!)>(1995))으로부터,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몬테베르디의 <율리시즈의 귀환>, 쇼스타코비치의 <코> 등의 기존 오페라를 새로이 해석해 자신의 영상프로젝션, 무대디자인과 더불어 공연으로 올리는 작업에 이르렀다. 그는 유럽의 고전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다시 그리고, 다시 써서, 다시 제시한다. 그가 과거의 예술에 개입하여 다시 제시하는 메시지는 최신의 세트장과 영상과 의상들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문학작품이나 오페라 속의 줄거리에 배태되어 있는 모순적 상황들을 끄집어내서 반복하고 회의하는 방식인 것이다. 기존의 작품에서 선명했던 서사는 비틀어지고 균형감을 잃고 모호한 종말을 맞는다.

(사진 오른쪽) 철 알루미늄 자전거부품 발견된 오브제 253×150×150cm 2012

<무제(풀무)>(사진 오른쪽) 철 알루미늄 자전거부품 발견된 오브제 253×150×150cm 2012

견고한 상식을 깨다
기존의 명확했던 것을 곱씹어 회의하는 방식은 그가 작업실에 앉아 그림을 그릴 때에도 개입되는 태도이다. 잘 알려진 바대로, 그의 애니메이션은 종이 위에 목탄 드로잉을 기본으로 한다. 단색의 한계뿐 아니라 정착액을 뿌리기 전에는 지워지거나 번지기 쉬운 단점을 가지고 있는 목탄은 유럽미술의 전통에서 볼 때 결코 주된 재료가 아니다. 그러나 켄트리지는 목탄의 단점을 자신의 드로잉 작품, 드로잉을 기반으로 하는 애니메이션 형식의 작품에 동력으로 삼았다.
그는 종이에 목탄으로 어떤 형상을 그리고, 그린 형상을 부분적으로 지우고 거기에 덧그리는 과정을 사진으로 찍어 애니메이션을 제작한다. 대개 7~8분 정도 되는 한 작품에 적게는 20장, 많게는 60장의 드로잉 작품이 사용되는데, 분당 수백 장이 사용되는 셀 애니메이션과 비교해볼 때 많은 연속 장면이 종이 한 장으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방식이다. 연속된 장면, 그러니까 커피포트가 엘리베이터로 변했다가 수직갱도로 변하는 장면이나 검은 전화기가 고양이로 변하는 장면, 건물에 물이 들어차 잠기는 장면, 빈 벽에 그림이 차례로 걸리기 시작해 벽 전체에 빼곡히 들어차는 장면 등은 각각 하나의 종이에 그려진 그림이다. 물론 최종적인 드로잉은 그 자체로 하나의 드로잉 작품이다. 무엇인가를 그리고 번지게 하고 사라지게 하고 그 위에 새로운 것을 그리는 이러한 방식은, 하나의 화면이 구조적 완결성을 가진다는 기존의 견고한 상식을 흩어버린다.
게다가 그린 것을 지우고 덧그릴 때, 이미 그려진 것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고 화면에 흔적을 남긴다. 그는 처음 목탄 드로잉을 할 때 지울 부분을 완벽하게 지우려 노력했지만, 지워지지 않고 남는 흔적들이 일종의 시간의 은유를 담을 수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과거를 깨끗이 세탁한 현재가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지워진 흔적들과 그 위에 덧그려지는 형상들이 정지된 화면의 제한을 뛰어넘게 하는 것이다.
매끈하게 완결된 화면 대신 덜 지워진 흔적 위에 중첩해서 그리는 것은, 스토리보드 없이 시작해 형성 과정 그 자체의 순간에 의존하는 서사 구성 방식과 더불어, 그의 작품 기저에서 추구되는 가치가 명료성, 일관성, 완벽성에 대한 거부임을 보여준다. 물론 그의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은 끊임없이 일관되고 명료한 의미를 찾는 기존의 습성을 버리기 어렵다. 그리고 그것은 켄트리지가 관객을 낚아 올리는 미끼이기도 하다는 생각이다. 예컨대 소호의 부인과 펠릭스가 사랑에 빠질 때 등장하는 물고기, 점점 차올라 범람하는 홍수의 이미지 등은 관객을 도상학적 해석의 늪에 빠뜨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명료한 해석이 주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기독교나 그리스로마 전통의 도상을 넘어, 각 사물에 대한 개인적 도상학을 구축하여 해석의 여지를 개방하고 넓히는 것 역시 그의 작품 전반에서 보이는 특성이다.
다채널 영상작품들은 해석 그 자체를 분열시키는 더욱 유용한 수단이 되고 있다. 여덟 편의 영상이 동시에 상영되는 <나는 내가 아니다, 말은 내 것이 아니다(I am not me, the horse is not mine)>(2008)에서 타틀린의 기념비가 여러 채널에서 반복되는 점, 오페라 <코(The Nose)>에서 사용되었던 코의 형상이 빈출하는 지점 등이 일관된 해석의 여지를 남기지만, 한눈에 일별하는 것이 불가능한 스크린상의 내용이 단일한 결말을 보장해주지는 않는 것이다. 심지어 그의 퍼포먼스의 일환인 강연에서는, 켄트리지 스스로 연사가 되어 미리 준비된 발언을 하지만 자신의 강연 내용을 혼란에 빠뜨리는 영상들이 상영되어 때로는 코믹하고 때로는 골치 아픈 메시지 해독의 시간을 청중에게 선사하기도 한다. 이처럼 켄트리지의 작품에 대한 해석은 어느 하나로 수렴되기보다는 단서가 되는 특정 지점으로부터 무한히 발산된다. 남아공에 사는 백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에 대한 성찰이 다른 나라의 정치 상황으로까지 이어지는 사고의 궤적, 세계의 가장 변두리에서 사적인 고뇌와 슬픔을 표현하는 소재의 착종, 그리다가 중간에 멈추어버린 것 같은 수많은 드로잉 작품, 서로 지지하다가도 배반하는 내용의 영상의 동시 상영, 잘 알려진 고전 작품들의 재맥락화 등, 이 모든 켄트리지의 작품활동을 아우를 수 있는 단 하나의 지점은 불확실성에 대한 신뢰이다. 불확실성만이 확실하다는 것, 이는 논리적 귀결을 예견하고 어느 지점에 깃발을 꽂아 그 방향으로 달려갈 수 있었던 시대가 종결되었고, 이제는 장님이 지팡이를 더듬듯 어디가 길인지 더듬어가며 걸음을 내디딜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불확실한 가운데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아주 없지는 않은, 그리하여 이해 가능과 불가능의 사이에서 생각에 생각을 더하게 되는 것이 그의 작품을 바라보는 즐거움이자 괴로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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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국내 첫 개인전 연 윌리엄 켄트리지 William Kentridge

“예술 없이는 인생이 지속될 수 없다”

IMG_0240우선 한국에서의 전시를 축하한다. 먼저 소감을 묻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하고 싶다
직전에 중국 베이징의 울렌스현대미술센터(Ullens Center for Contemporary Art)에서 전시(2015.6.27~2015.8.30)를 열었다. 이번 한국에서의 전시는 이보다 규모가 더 크다. 어떻게 보면 새로운 공간에서 전시를 한다는 것은 작품과 공간의 만남, 일종의 대화가 시작되는 것인데 아직 공간에 친숙하지 않아서 서로 알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진 않고 있다.
역사적 공간에서 전시되는 당신의 작업과 제도화되고 권력화된 화이트 큐브에서 보여지는 당신의 작업은 어떤 차이를 가질 것으로 보는가?
예를 들면 <Refusal of Time>은 어디에서 전시되든 매번 변화를 주었다. 그런데 다르게 보여준다해도 투박함이 있어야 하는데 이 작품을 설치할 때 완벽하고 깔끔한 공간이 아니라 항상 거친 공간에 설치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작품을 운반할 때 썼던 박스, 벽에 설치하고 남은 나무조각들을 이용했다.
예전에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불가능할 것을 안다. 하지만 나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말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작가가 세상을 바꾸는 방식’은 무엇인가?
아티스트가 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관람객은 작품을 보면서 어떤 변화가 가능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지 않을까. 나도 영화나 소설, 미술작품 등을 보고 내 자신을 바꾸지는 않았지만 나 자신을 확인하고 소신을 갖게 된 경험이 있다. 즉 자아를 구성하는 데 기여한다는 말이다.
예술에 과연 치유할 수 있는 힘이 있을까? 이에 대해 <다른 얼굴들> 작업과 연계하여 생각을 들어보고 싶다
내 작품이 어떤 이에게는 치유의 힘이 될 수 있겠지만, 나는 사실 예술 없이는 인생이 지속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예술이라고 하면 전문적인 예술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상상력, 은유, 그리고 여러 가지 다른 상황에서 우리가 구현하는 의미에 동의하는 것이 있다. 이것 없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항상 하얀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는다. 작업에서 기본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것인가?
내게 컬러감이 있었다면 화려한 색깔의 옷을 입었을 텐데. 흑백 작업은 내가 컬러 작업을 못하기 때문이다.(웃음)
<Lesson> 연작을 보면 켄트리지가 켄트리지에게 질문한다. 자기를 타자화한 작업처럼 보인다
내가 만약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았다면 더 이상 작업을 안해도 되겠다.(웃음) 모든 작업은 나를 찾기 위한 답을 구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생을 마감할 때 이게 바로 나였구나 확인하는 것 같다. 사람은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다. 그래서 여러 명의 나를 작업실로 불러 재미있는 대화를 하는 것이다. 이 상자 안에 들어있는 내용이 그 프로세스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업을 떠나 당신이 기억하는 성장과정을 듣고 싶다
좋은 질문이다. 예전에 아버지가 찍어주신 영상을 보면, 좀체 가만있지 않았다. 뭔가를 항상 보여줘야 했다. 그러니깐 자신의 존재감을 강조하며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무엇인가를 항상 만들고 확인받고자 했다. 그래서 할아버지, 어머니에게 많은 드로잉을 선물했다. 그 드로잉과 지금 내 작업과 무엇인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당신의 작업은 딱히 어떻다 설명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내 작업은 무엇이다”라는 말을 직접 듣고 싶다
나는 메시지 등 작업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바를 고려하지 않는다. 단지 무엇인가 만들어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그러니까 제작한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의미를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황석권 수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