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TOPIC | BEIJING Ai Weiw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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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 왕씨사당(汪氏祠堂) > 명말대 1300여 개의 나무조각에 채색 2100×1680×942cm 2015 < Chandelier >(아래 설치작업) 구리 수정 조명 400×241×231cm 2015(갤러리 콘티누아 설치작업) 아래 < Spouts installation > 1만여 개의 송대 주전자 꼭지 495×430cm 2015(당인당대예술공간 설치작업)

중국 작가들에게 물었다. 지금 베이징에서 누가 가장 ‘핫’한 작가냐고. 십중팔구의 대답은 한결같이 ‘아이웨이웨이’였다. 중국 당국에 여권을 압수당하고 가택연금당했던 중국 미술계의 앙팡테리블 아이웨이웨이의 전시가 베이징 5개 전시장에서 동시에 열렸다. 중국 정부 기관의 허가를 받은 첫 개인전이라는 점도 놀라운 일이고, 전시장 벽을 뚫는 등의 파격적 상황과 결부되어 전시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졌다는 점도 눈길을 끌고 있다. 아이웨이웨이가 전시장에서 풀어낸 고심의 흔적을 살펴보도록 한다.

베이징의 앙팡테리블, 아이웨이웨이

권은영 미술사

한 도시에서 생존 작가의 개인전이 5개의 각기 다른 기관에서 열리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중대형 화랑이 손을 잡고 공동으로 기획하여 벽을 뚫어가며 한 명의 작가 개인전을 동시에 개막, 행사를 추진하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일 것이다. 베이징은 물론 중국 내외의 예술 애호가들의 시선을 집중시킨 대망의 주인공은 바로 아이웨이웨이(艾未未)이다. 중국 정부의 허가를 받고 베이징에서 정식으로 당당하게 첫 개인전을 여는 그가 우리에게 당당히 쏟아내는 이야기에 어찌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미술계뿐만 아니라, 정치사회 관련 소식에서도 왕왕 접하게 되는 아이웨이웨이. ‘반체제 예술가’라는 수식어가 식상할 정도로 그는 끊임없이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안에서는 서슬 퍼런 비판을 받고 밖에서는 손바닥이 뜨거워질 만큼의 박수를 받아왔다. 2011년 81일간 구금당했던 그가 4년여 만에 중국 정부로부터 여권을 돌려받았다는 소식이 한창 회자되던 중에 돌연 중국 주재 영국대사관이 6개월 비자가 아닌, 20일 단기 비자만을 발급해줬다는 소식으로 다시금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며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지칠 줄 모르고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그가 1993년 중국에 귀국하고 처음으로 중국 정부의 허가를 받아 공개적으로 개인전을 쏟아냈다. 지난여름, 아이웨이웨이는 베이징의 5개 공간에서 서로 다른 4개의 개인전을 연이어 선보였다. 중국의 한 기자는 “베이징에서 그의 이름을 공공연하게 입 밖에 낼 수 있는 날이 올줄 몰랐다”며 그의 전시 소식을 전했고, 그의 전시는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6월 6일, 베이징 798예술구의 대표적인 화랑인 이탈리아계 ‘콘티누아 화랑(Galleria Continua)’과 화교계 ‘당대당인예술센터(?代唐人??中心)’가 ‘아이’, ‘웨이웨이’로 작가 이름을 사이 좋게 나누어 걸고 그의 개인전을 동시 개막했다. 이틀 뒤 같은 798예술구의 ‘마금석공간’(魔金石空?)에서 역시 ‘아이웨이웨이 개인전: AB형’(艾未未?展:AB型))이 개막했다. 그리고 건축가로서 아이웨이웨이 자신이 2007년 설계한 차오창디(草?地) 예술구의 미국계 ‘체임버스 파인 아트(Chambers Fine Art)’에서 6월 13일 <호랑이(彪)전>을 개막하고, 뒤이어 19일 같은 예술구의 ‘305박물관(305 Museum)’에서 <대단한 일(挺事?的)전>을 단 하루 선보였다. 지난 4년간 꾹꾹 참고 숨겨두었던 이야기 보따리를 한달음에 풀어놓은 그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역시 그는 ‘중국’이라는 큰 화두를 꼭 쥐고 있었다. 유구한 역사, 사회주의 국가 건설, 문화대혁명, 개혁개방,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 퇴색한 전통 그리고 인권. 가장 먼저 아이웨이웨이 개인전 축제의 포문을 연 ‘콘티누아 화랑’과 ‘당대당인예술센터’의 공동 기획전 <아이>, <웨이웨이>는 하나의 벽을 사이에 두고 있던 두 개의 전시공간을 뚫어 명나라 시대의 건축물을 세워 큰 관심을 받았다. 아이웨이웨이는 중국 전역을 다니며, 시간을 머금은 사연 많은 사물들을 모으기로 유명하다. 이번에 그는 장시(江西)성 우위안(?源)현 샤오치(?起)촌에 있던 400여 년의 역사를 품은 ‘왕가의 신주단지를 모시고 있는 사당(汪家祠)’을 통째로 베이징에 옮겨왔다. 본래 왕가에서 선조들에게 제사를 지내던 건물을 ‘월국공’(越?公) 왕화(汪?)가 개보수하여 다시 지은 왕가사당은 제사를 지내고, 축전을 하는 등 집안의 중대사를 함께한 가문 회합의 중심에 서서 전통을 쌓아왔다. 하지만 1950년대 지방 유지였던 왕씨 일가는 사회주의 혁명의 타파 대상으로 지목당했고, 왕가사당은 국가가 몰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급기야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왕씨 일가는 물론 국가로부터 방치된 사당은 결국 중당(中堂)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소수의 편에 선 작가
1500여 개의 부분으로 해체되었다가 다시 조립된 전시장 속 왕가사당은 사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중국의 화려했던 근세는 물론 질곡의 근대, 그리고 현대 중국의 풍파를 고스란히 머금었으니 오죽할까. 결국 왕가사당은 왕씨 일가의 가문의 역사에서 시작하여, 중국 전체의 역사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미술 전문 매체 《야창(雅昌)》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선조의 기억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흔적으로 남아 있다. 인류 문명은 한 줄기 강과도 같아 아주 먼 곳에서부터 흘러 흘러 오늘의 모습을 하고 있다. 누구든지 이 강이 어떤 경험을 해왔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오늘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며 정체성의 문제를 꼬집고 있다. 사람들이 종종 망각하지만, 좋든 싫든, 자랑스럽든 부끄럽든,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오늘의 우리를 다시 한번 각인시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체임버스 파인 아트의 <호랑이전>을 읽을 수 있다. 화랑의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에 뿌리가 잘린 대형 고목이 터줏대감처럼 서 있다. 마치 리처드 세라의 <기울어진 호>를 떠올리게 하는 대형 고목은 대문과 화랑 입구 사이를 막고 있어서, 관람객은 고목을 빙 돌아 화랑에 진입할 수밖에 없다. 또한 육중한 고목의 존재감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한걸음에 화랑에 진입할 수도 없게 만든다. 시골 마을 어귀에나 있었을 법한 대형 고목에 눈길을 주다 보면 돌연 고목의 가지 가지가 왠지 부자연스럽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사실 고목의 가지들은 자연 그대로의 줄기에서 뻗어 나온 가지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붙여 놓은 가지들이다. 2009년부터 청나라 시대 이전 사찰의 고목을 수집해 온 작가는 서로 다른 고목의 뿌리와 줄기들을 융합하여 또 다른 거대한 고목을 만드는 새로운 연작을 하고 있다. 그가 주목하는 지점은 역시 중국의 전통과 관련이 있다. 중국은 명나라 시기를 제외하고 그 전후에 굴곡 많고 여러 가지가 얽히고 설킨 고목을 이용하여 가구를 만들거나 장식물을 만드는 전통이 있다. 명나라 시기의 단아한 가구와는 상반되는 이러한 화려하고 희귀한 형태의 가구는 지금도 중국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작가는 전통 공예에 속하는 고목을 활용한 가구를 예술작품으로 승격시켜 다시금 중국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중국의 과거를 이야기하던 작가는 798예술구에서 <AB형>이라는 제목으로 오늘의 중국을 이야기했다. ‘경고’ 문구에 자주 사용되는 노란색으로 사방이 칠해진, 좁은 벽으로 양분된 전시장을 수백 포기의 “철 잡초”(?草)들이 관통하고, 천장에는 일상 생활에서 지나치기 쉬운 옷걸이를 모빌처럼 엮어 늘어뜨렸다. 앞선 3곳의 전시장에서 수백년 혹은 수천년의 시간을 머금은 사물들로 소통했던 데 반해, AB형 전시장에선 철, 잡초, 옷걸이라는 현대사회 일상 소재들로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잡초는 한없이 약하지만,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한다. 반면 철은 본래 건축 자재이면서도 강인함을 상징한다. 이 두 상반되는 성질을 머금은 <철 잡초>와 <옷걸이 모빌>을 통해 작가는 일상의 사소한 문제들을 꼬집고 새로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민초를 연상하게 하는 <철 잡초>를 보고 있자니, 소수의 편에 서서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곤 하는 작가의 오늘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번 일련의 개인전에서 전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비교적 온화했다. ‘반체제’, ‘인권’ 등 윗선의 심기를 거스르던 목소리는 잦아들고, 대륙 모두의 공공의 적 ‘사인방’에 대한 인민의 눈높이에 맞춘 일침이 돋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의 SNS에 작업실에서 도청기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올라 안타깝다. 현 정부와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는 그의 모습에 만감이 교차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리라. 무더웠던 올여름 798예술구를 더욱 뜨겁게 달구던 아이웨이웨이 전시들이 하나 둘 막을 내리고 있다. 갤러리 콘티누아만이 아이웨이웨이와 함께 올 연말을 마무리할 듯싶다. 그가 들려주는 400여 년 중국의 역사 이야기는 2015년 말까지 계속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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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웨이웨이 Ai Weiwei
1957년 태어났다. 베이징 영화학교를 졸업했다. 1981년 미국에 거주하면서 행위예술과 설치미술 작업을 시작했다. 1993년 중국으로 돌아온 그는 실험예술가의 모임 ‘이스트빌리지’를 결성하기도 했다. 베니스 비엔날레(1999), 카셀도쿠멘타(2007), 광주비엔날레(2012) 등에 출품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국가체육장 냐오차오(鳥巢)를 헤르초크&드뫼롱과 협업하여 설계했다. 그러나 그는 중국 정부가 올림픽을 지나치게 선전한다는 이유로 정작 개막식에는 불참했다. 2011년 공안에 연행되어 81일간 구금되기도 했으며, 여권을 압수당하고, 1년여 가택연금을 당하는 등 중국 정부에 대항하는 대표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