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계층화에 감싸인 ‘이우환 공간’

서양미술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전위적 작품과 사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관주의와 표현의 독재를 당연시하는 서구작가들의 태도와 달리 이우환은 사물을 사물 그대로, 있는 그대로 제시함으로써 그들과 변별되는 지점을 자신의 세계로 승화시킨 성과를 거두었다. 그것은 세상을 다르게 보게 하고 사물을 통해 세계와 인간을 풍요롭게 만나게 한다. 그리고 우리의 경직된 감성과 사유를 넘어서서 삶을 성찰하게 하는 것이 이우환 작업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1967년의 <관계항>과 오늘 부산시립미술관 앞 잔디밭 이우환의 <관계항>. 그리고 ‘이우환 공간’에 놓인 설치작업과 평면작업들은 과연 지금도 우리를 감동시키는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이우환 공간’ 개막 전후로 쏟아진 온갖 이론들과 상찬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은 ‘질케 폰 베르스부르트 발라베’의 저서 《이우환 (타자와의 만남)》의 결과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이론이나 천착의 결과를 읽지 않았거나 이우환의 작품을 처음 본 사람들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1967년 이후 그의 작품에선 별다른 변화를 목격하기 힘들다. 그 후의 시리즈 형식 평면작업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 변화 없음을 두고 뭐라 한다면 그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해서라고 잘라 말하거나 위의 책이라도 읽기를 요구할 것인가. 그러나 작품은 책을 읽고 연구한 후에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주장대로 정말 있는 그대로를 그 순간에 보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그러나 그의 작품은 있는 그대로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라는 말대로 보라는 지점에 와 있다. 그리고 그 말을 이해하고 그 말이 가진 의미 안에서 작품을 보게 하려 한다. 말하자면 그의 반복을 정당화하고 반복에서 보이는 차이를 첨예화하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있는 그대로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개념을 이해시키려 한다.
‘있는 그대로’는 시간의 현재성, 현장이 가진 지금의 공간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작품을 읽는 중요 태도이고 그의 작품이 미술사에 던진 의미이지만 이미 1967년에 있었던 일이며 그 이후 몇몇 작품에서 분명하게 확인되는 것이다. 그러나 2015년 오늘, 여기서 그때의 작품을 재현하면서 지금의 작품이며 지금의 공간과 시간에서 경험하기를 요구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작품을 보고 경험하는 현재가 아니라 지나간 의미를 되새기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변화 없는 것을 앞에 두고 변화를 읽어야만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말은 강제이고 자기기만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작품은 이제 생경함과 전위성과 현재성을 잃었다. 반복의 지루함과 반복을 새로운 이해로 강요하는 억지만 남을 뿐, 새로움은 거기 없다. 어느 작가가 40여 년 전의 작품을 재연하면서 그것이 새로운 것이며 새롭게 읽히는 것이며 새롭게 읽혀야 한다고 강요할 수 있을까. 이미 그의 작품엔 권위에 기댄 요구만 있을 뿐이다. 나는 그의 작품에 대한 발언과 평가적 차원의 이론적 고찰이 그의 작품을 감싸고 있으면서 그의 작품을 보지 못하게, 읽지 못하게, 느끼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해석과 설명에 의해 이해될 뿐, 여기서 그의 작품을 새롭게 보게 하는 것이 없다. 그의 작품 이론의 토대를 이루는 ‘있는 그대로’는 그의 작품을 자신 스스로 보기를 거부하며 이론적 배경으로 그의 40여 년간의 작품을 합리화하고 있다. 작품을 대하는 현재의 경험이라는 시간성의 문제는 이제 그를 다른 작가와 변별하기에 충분치 않다. 그것은 어느 작품에서나 가능한 일반적인 지각이론일 뿐이다.
재현의 대상을 벗어난 것이 그의 작품이지만 자신의 작품을 복제하는 듯한 재연은 재현이 아닌 것일까. 그의 이론적 입장에서는 자기 작품을 자신이 복제하는 것도 실은 용납되지 않는 일이다. 복제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 그가 주장하듯 시간의 현재성의 경험으로 정당화된다. 이우환의 ‘반복에 대한 차이’의 옹호는 《이우환》을 쓴 ‘질케 폰 베르스부르트 발라베’만으로 충분하다.
그 이상의 옹호는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향유할 만한 계층의 ‘이우환’ 상품화를 은폐하는 우리 사회의 허위의식일 뿐이다. 그의 작품이 던지는 의미가 상품화로 사물화되어 더 이상 우리 시대의 삶을 성찰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 시대를 사물화하는 데 왜곡되게 방기해서는 안 된다.
작품을 의미 생성의 자율성으로 혹은 자율적 의미존재로 보는 것은 작품을 정의하는 통상적 특징이다. 그러나 작품의 자율성은 근대의 산업화에 따른 대중화와 함께 일상성의 사물화와 작품의 사물화에 반항한 성과이다. 오늘날 미술작품에서 쉽게 목격하는 카툰, 삽화, 애니메이션 등의 대중적 취향이나 그런 특징이 강한 작품들은 형식과 내용에서 예술의 자율성을 위협하고 있다. 게다가 아트페어, 미술관의 팔리는 그림을 부추기는 기획전을 보면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일상과 미세담론의 전면 등장이 거대담론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반작용이었는지 되묻게 된다. 근대에 대한 반작용의 하나였던 포스트모더니즘의 성향도 이제 일상의 미세한 반응까지 상품화하는 세태 이상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때로 이 시대 작품이 가지는 이런 특징에 위험스러운 세태를 역설적으로 읽거나 형상화하는 것일까. 그것이 바로 이 시대를 그대로 증명하는 것일까. 그것은 억측일까.
그런 안타까운 희망도 숨기기 쉽지 않다. 예술의 자율성은 근대의 예술적 성과만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에게 충실한 표현의 성과이다. 그것이 근대기 삶의 일상성에 대응하는 성과라는 점에서 오늘날의 작품에서 읽히는 자율성의 포기와 퇴각은 예술의 사회적 임무를 해체하거나 상업성에 감염된 탓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인기 작가들의 팔리는 작품은 어떤 전위성, 어떤 성찰도 없지만 마치 한 시대의 ‘아름다움의 이상’으로 자율성을 덧붙여 소비하고 있다. 자율성은 이제 우리 미술계의 허위의식으로 대체된 것이다. 이우환의 자기복제는 자기유일성뿐 아니라 오늘의 예술 자체의 유일성을 의심하게 한다. 그래서 포스트모던한 지금에도 그가 현대적 작가일까. 그러나 40여 년간 같은 작품을 두고 현재성, 유일성의 부정이라는 화두는 허황되다. 자기복제와 자기인용으로 계속되는 이우환의 작품은 이제 자신의 자리에 대해 물어야 한다. 유수의 외국 공간에서 전시를 했다는 경력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런 기회가 그의 총체적 성과에 대한 평가에 다르지 않지만 여전히 그가 하고 있는 반복은 지루하다. 그 지루함을 정당화하려 하지 말고 생경한 있음, 있는 그대로의 새로운 진전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우환의 예술적 이념이나 평가와 무관하게 그의 반복되는 특징은 작품의 자율성을 확보하기보다 세상의 흐름을 타고 상품으로서 가치를 확보하려는 것에 지나치게 가까이 가 있다. 자율성에 대해 우리 사회 엘리트층의 소유욕과 그들의 소장품 가치의 영구화 혹은 보증으로서 ‘아름다운 가상’에 기여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가진 예술품에 대한 통속적 의식일 뿐이다. 예술은 이제 삶의 성찰이 아니라 상류층의 취향을 마치 대중이 지향할 가치인 양 기만하는 허위의식의 하부구조가 되고 만다. 소위 인기 작가들의 자기복제에 대한 정당화 주장은, 특히 이우환의 경우, 그 역시 자신의 세계를 정치, 경제 산업화의 하부 사물로 취급하는, 스스로 그것에 복속시키는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작품을 상품으로 소비해야 하는 화랑이나 투기 대상이 된 작품을 소장한 재력가나 엘리트층의 요구는 상품으로서 가치의 문제로 당면한 그것의 정당화를 위한 논리이지 작품의미의 가치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복제는 이미 어떤 전위성도 가지기 힘들다. 그리고 그것에서 차이 운운하는 것은 발표 당시에 가질 수 있는 태도나 의지이지 그것이 몇 십 년간 복제되고 고가의 상품으로 유통되고 있다면 당연히 작가는 이런 흐름에 반응해야 한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이 건물, ‘이우환 공간’은 작가의 설계와 요구를 전적으로 받아들여 만든 것이며 이 건물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라고 한다. 작가라면 누구나 꿈꿀만한 일이다. 작가의 기질과 완벽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없어진 중세의 교회나 절을 보는 듯하고 철저하게 현실과 분리된 공간을 꿈꾸는 특정장소로 독립되어 있다. 그 안의 공간 역시 성스러운 어떤 것을 보듯, 작품은 진열되었고, 자기연출이 과도한 공간은 작품을 만나기보다 우선 그 분위기에 압도당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작가가 타자와 만나려 한 것이었을까. 그것이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을까. 차이와 반복에서 차이를 강조하면서 그가 서구 현대미술 작가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려 한 지점일까. ‘이우환 공간’과 작품은 철저한 분리의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경계인으로서 그는 자신을 어느 곳에도 정착시키지 못하고 끝내 자신의 공간을 타자와 분리하고 자신의 작품을 유폐시키고 미술계를 계층화하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마치 그를 이해하는 사람은 소수이고 그 소수는 이 사회의 상층부로서 갖춘 사람들이며 그들만이 그의 작품을 제대로 보고 이해할 수 있으며 미술의 이해와 감상과 향유는 고급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 같다. 그의 공간이 주는 위화감은 그동안 미술관 내에 설립을 반대했던 부산 작가들이 했던 점이다. 미술관 부지 내에 건물을 세우고 누구나 와서 볼 수 있다는 것으로 이런 우려가 상쇄되거나 은폐되지 않는다.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논리는 노예상태에서라도 먹고살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자기기만이자 허위의식과 다르지 않다.
미술관 부지 안의 독립된 건물, 그의 명성과 초빙에 값하는 대접이라 하겠지만 현대미술에서 그가 추구하는 ‘있는 그대로’의 의미망을 벗어나는 짓이다. 예술과 일상의 분리, 삶과 사유의 분리를 거부하는 것들이 현대미술이고 전위였으며 많은 작가와 이론가들이 그것에 주목하고 온전한 삶과 예술의 관계를 담론화하려 했다. “이 세대의 비평가들은 규범과 대서사의 개념, 그리고 근본적으로 독창적인 작품을 만드는 유일한 행위자로서 예술가의 지위에 대해 비판”했지 않은가. 그러나 그의 이름을 단 건물은 이제 미술관 내의 모든 작품과 단절되고 그 자신만의 공간이 되어 타자와 만나는 것이 아니라 분리되고 있으며 그 분리는 작품 의미의 차이가 아니라 유명 작품과 아닌 것으로 속악하게 나눠지고 있을 뿐이다.
볼거리로 변한 이우환, 스펙터클의 한 지점이 된 부산시립미술관, 그것은 다른 말로 상품화된 이우환과 상품이 된 미술관이다. 삶의 구체적 장소인 부산이라는 지정학적 장소가, 사유의 가치를 위해 만든 미술관이 상품이 되어 진열된 셈이다. 상품은 사유가 아니라 소비이며 돈의 가치로 계량화된 사물이다. 세상의 많은 것이 상품으로 둔갑해서 대중적 호응과 이윤을 창출한다지만 미술관과 하나의 도시가 상품이 되는 사태에 대해서 왜 염려하지 않는 것일까. 그의 작품을 가진 자들에게는 작품가를 보장받을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겠지만 그의 의미는 이제 장사치들의 볼거리를 전시하는 진열대에 지나지 않게 되었으며 그 보증으로 미술관이 버티고 선 꼴이지 않은가. 우리 사회에서 볼거리는 곧 남루해지고 새롭지 않은 새로운 상품으로 대체된다는 인식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지역 언론조차 분리되는 미술계, 사회계층의 고착화 징후에 대해 지적하려 하지 않는다. 유명 인사에 경도된 이 사건은 우리에게 이 시대 미술계의 극단적 분리의 상징이 될 것이다. 그의 이론도 그의 이야기도 이제 반복에 의해 통속화되고 독립된 건물처럼 그의 작품과 공간은 우리 사회 상층부의 취향을 보여주는 표지가 되고 있다. 대중적 볼거리로 만든 듯 하지만 그것은 시혜와 특권의식이자 미술계 내의 분리를 당연시하는 인식과 다르지 않다. 그런 인식이란 다름 아니라 삶의 인식, 그들이 가진 이름으로 세상을 보는 인식일 뿐이다. 권력과 인식은 동의어라는 사실을 재확인시켜준다. 보는 이의 방법의 고급화란 그저, 허위의식일 뿐이다. 사원이 된 ‘이우환 공간’은 분리된 욕망에서 예술의 계층화를 부르는 통속화에 다르지 않다. 나는 이것을 이우환의 포퓰리즘이라 생각한다. “포퓰리즘 미술은 단순함을 특징으로 광범위한 대중에게 다가서며, 브랜드화한 이미지를 통해 상업대중문화와 적극 관계를 맺는다”는 그 이상이 아니다.
강선학 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