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예선의 달콤한 작업실 10

친절한 브네 씨의 평온한 작업실

예술가의 작업실을 방문할 때는 기대하는 바가 있다. 영혼을 고취해줄 예술의 영감과 삶의 아우라! 몇 해 전 여름, 조각가 베르나르 브네(Bernar Venet)의 아틀리에를 취재하러 프랑스로 갈 때에도 그런 설렘이 있었다. 그의 작업실이 있는 남프랑스 르뮈(le Muy)는 관광지도 아니며 주민도 많지 않은 소읍이었다. 브네 씨는 계곡이 지나는 평평한 들판에 몇 채의 집과 너른 정원, 전시공간을 두고 작품 활동을 하며 사람들을 만났다.
르뮈는 베르나르 브네의 도시였다. 한마디로 ‘영지’였다. 취재팀 일행은 드넓은 벌판에 서서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예술의 영감 운운하기엔 실로 방대했기 때문이다. 브네의 철 조각의 규모를 떠올려보라. 그의 대표작이 전시된 두 채의 건물은 웬만한 시립미술관을 방불케 했고, 브네 씨가 소장해온 예술품들을 전시하는 게스트하우스 역시 박물관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프랭크 스텔라, 크리스토와 잔 클로드, 리처드 롱, 솔 르윗, 아르망, 엘스워스 켈리, 도널드 저드 등의 작품들이 지키는 사람도, 들어가지 말라는 표지판도 없이 벽에 걸려 있었다. 정원은 시민공원 정도의 규모였다. 연못과 계곡, 분수가 있는 정원에 브네의 대형 조각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브네 씨가 사랑하는 스포츠카도 눈에 띄었다. 부가티며 포르셰며…….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집에선 주눅이 들지 않았다. 수많은 예술작품(브네 씨는 “이거 친구들 젊었을 때 작품이에요”라고 했다) 외에는 화려한 살림살이도 없었고 위압감을 주는 그 어떤 장식도 없었다. 모든 게 개방되어 있었다. 공간은 넓지만 넉넉한 여백이 편안했고 관리자라고는 말수 적고 소심해 보이는 청년 알렉상드르뿐이었다.
당시 브네 씨는 일흔을 넘긴 나이였지만 그의 집에는 젊은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사무를 도와주는 비서 알렉상드르 외에도 정원을 가꾸고 집안일을 하는 사람과 페인팅 스튜디오에서 일하는 조수 몇몇이 조용히 드나들며 이야기를 나눴다. 파트너이자 친구인 갤러리스트도 멀리서 찾아왔다. 조용조용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후에 그들은 마치 자기 집처럼 자유롭게 그곳을 드나들며 개인적인 일을 했다.
브네 씨는 르뮈라는 한적한 동네를 한참 예찬한 후 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의 소중함을 이야기했다. 이 동네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고, 이 집을 ‘진정한 집’이라고 말했다. 아름다운 자연과 소박한 인심이 있고 예술과 사람과 장소가 자연스럽게 어울린다고. 그러한 이유로 파리도 뉴욕도 아닌 조용한 외딴 마을에 아틀리에와 재단을 겸한 집을 갖게 되었다.
촬영 시간이 제법 길어졌다. 여러 장소를 직접 보여주고 설명하던 브네 씨도 슬슬 지쳤는지 정원에 놓인 작은 의자에 주저앉았다. 촬영팀도 한낮의 열기에 지쳐 제각각 쉴 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누군가는 햇볕을 피해 거실 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드러누웠고, 또 누군가는 정원에 놓인 파고라 벤치에 앉아 분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비좁은 철재 의자에 앉아 우리를 도와주러 파리에서 온 한국인 갤러리스트와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문득 그의 맨발이 보였다. 브네 씨는 신발을 벗고 맨발을 잔디 속에 묻고 있었다. 초록색 풀의 시원한 감촉이 전해졌다. 그는 셔츠를 느슨하게 풀고 이야기를 하다 말다 까무룩 눈을 감았다. 한낮의 여유를 충분히 만끽하고 있었다. 나는 브네 씨가 진정 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흙과 풀의 초록색이 묻은 맨발, 드문드문 이어지는 목소리, 그의 몸에 익숙하게 닿은 의자들, 가볍게 흐르는 물소리, 그리고 자연의 일부처럼 곳곳에 놓여있는 그의 작품.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배열된 곳이었다. 그의 삶도 행동도 모두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그 집이 우리 모두에게 편안했던 것이다.
모든 게 자연스러워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나와 공간이, 나와 타인이 서로 겉돌지 않고 자연스러워지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내 삶과 나란 존재가 온전히 밀착되려면?
진정한 예술가란, 진정한 작가란, 몰두하는 대상과 던지는 말과 살아가는 방식이 일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베르나르 브네의 작업실에서 나는 내 작업실을 떠올렸다. 작업실은 어쩌다 마주친 길모퉁이의 흔적이 아니라 내가 오래오래 걸어야 하는 인생의 한 부분이구나…싶었다. 나와 닮은 모습으로 내 이야기를 품고 드러낼 이 공간. 작업실과 내가 자연스럽고 평화롭게 공존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취재로 오랫동안 비워두었던 작업실 문을 열었다. 익숙한 냄새가 강아지처럼 달려들었다. 나는 취재 자료로 무거워진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작업실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나를 기다려온 수줍은 연인 같은 이 공간에게 나는 안심한 얼굴로 인사한다.
나 다녀왔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