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미래가 끝났을 때

김실비  단채널 HD영상 9분16초/컬러영상과 사운드 13분55초 2013

김실비 <M을 위한 노래> 단채널 HD영상 9분16초/컬러영상과 사운드 13분55초 2013

미래가 끝났을 때
하이트컬렉션 2.7~5.10

영문학자 시엔 느가이(Sienne Ngai)는 현대문학과 다른 예술분야에서 관객들이 하찮고 작은 것들에 관심을 지니는 계기를 이론화했다. 느가이에 따르면 귀엽고 수동적이며 하찮은 것들은 일차적으로는 동정심을 유발하지만 동시에 극도의 쓸모없음과 마주치게 될 때 관객들은 보다 복잡한 감정을 갖게 된다. 즉 수동적이고 단순하며 귀여운 것들이 반대로 비평적, 저항적, 공격적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다. 하이트컬렉션에서 열린 신진작가전, <미래가 끝났을 때>는 이른바 ‘삼포세대'(연애, 결혼, 출산 포기)에 속하는 젊은 작가들의 자기 풍자와 자기 연민의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느가이가 주장하는 수동적이고 일상적이며 하찮은 것들이 현대미술에서 보여주는 가능성과 문제점을 동시에 시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기성 작가들이자 선생님들이 직접 젊은 작가들을 뽑고 추천해서 전시를 꾸린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아카데미 전시회를 연상시킨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기성세대의 사회적 관심사나 미술계 상황과 대비되는 젊은 세대의 고민이 더욱 부각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작업이 흔히 말하는 88만원 세대, 혹은 삼포세대라고 불리는, 고도의 산업화된 사회에서 나타나는 약자로서 젊은이들의 상황을 주제로 하고 있다. 강정석의 <야간행>에서 작가는 시네마 베리테 스타일로 친구들과의 추억여행을 다룬다. 언뜻 로맨틱하게 들리지만 그들이 언급하는 학업, 아르바이트, 군대, 연애의 경험 중에서 딱히 성공적인 것은 없어 보인다. 이뿐만 아니라 그들의 몸에 달린 카메라가 어둠 속의 눈길을 매우 산만하게 편파적으로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들이 헤쳐 나가는 인생의 길 또한 예측불허다. 아울러 얼마 전 편의점에 취직한 작가의 친구를 모델로 한 작업에서 친구의 얼굴이 변하는 모습이 타자의 시선과 사회의 규율을 내재화하는 과정에 해당한다는 가설은 웃프기 그지없다. 코믹하기도 하지만 친구의 보수화 과정을 물리적으로 재현함으로써 무엇인가 저항적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작가의 시도가 궁극적으로 부질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작업들은 대부분 정리된 방식이 아니라 여기 저기 섬처럼 흩어져 있다. 바닥의 먼지를 이용해서 자신의 사인을 남긴 작업, 다이소에서 파는 스티커를 관객들이 직접 전시장 곳곳에 붙이도록 유도한 작업, 전시가 끝난 후에 통상적으로 남게 되는 벽면의 흔적을 그대로 재현한 작업들은 과연 하찮은 상태와 하찮은 것들이 어떻게 관객을 자극하고 젊은 작가들의 상황을 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고민하게 만든다. 특히 전시장 입구 바닥에 먼지로 만들어진 로와정의 사인과 외국 생활 중에 모아놓은 두루마리 심지로 만들어진 설치작업은 먼지처럼 가볍고 가변적인 작가의 존재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사용한 화장실 두루마리의 심지를 모아서 만든 작업은 가변적인 작가 자신의 존재감을 매일 스스로에게 인지시키고 사수하려는 시도로도 보인다.
또한 서보경은 <여름휴가>에서 사강의 소설을 연상시키는 프랑스의 여름휴가 장면을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한다. 자연 광경 속에 놓여 있는 작가는 어색하게 쏟아지는 물과 바람에 맞선다. 갑자기 닥치는 폭우와 광풍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뜨지 않고 견뎌내는 작가의 모습에서 로와정의 경우에서와 같이 자기 풍자와 자기 연민을 함께 엿볼 수 있다. 정승일의 덜 스펙터클해 보이는 유리로 만들어진 입방체, 삼각형의 뿔, 최윤의 다이소 스티커를 이용한 작업과 아마추어식 풍경화 <국민 매니페스토>, 이양정아의 월세 300에 보증금 20으로 구할 수 있는 집 리서치 프로젝트 등은 자신들이 처한 물리적, 미학적, 경제적 환경들을 솔직하게 다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양정아는 자신이 제시한 조건의 집을 서울에서 구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아예 300만 원으로 살수 있는 바닥의 면적을 사진작업으로 전시한다. 즉 자기 풍자적인 미학 이 저항이나 자기보존 본능과 연결되는 중요한 지점이다.
하지만 이들의 작업이 지닌 비평적인 쟁점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관객에게 전달될지를 걱정해 보아야 한다. 결국 자기 풍자를 통해서 비평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태도는 극도의 지적인 사고에서 유래한 것이기는 하지만 (비평의 대상을 모호하게 함으로써 각종 비평적 오류로부터 벗어나려는) 동시에 그 때문에 더 자기 과시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자신들을 풍자함으로써 자기보존 본능을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세련된 저항 방법일 수도 있지만 가장 비효율적인 현실변화의 수단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드러낸 솔직한 현실의 문제들은 너무 그럴싸한 화랑에서 열린 전시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절절하게 다가왔다. 삼포세대 중에서도 삼포세대,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사회에서 후세대 작가들이 처한 정치적, 경제적 상황은 과연 무엇이며 혹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고동연・미술사

[Review] 서혜영-사물의 공간

 미송 무늬목 MDF 자석 2014

미송 무늬목 MDF 자석 2014

서혜영-사물의 공간
갤러리 조선 2.12~3.5

뒤샹 이후의 현대예술은 일상의 평범한 사물을 미술제도의 문맥 속으로 옮겨 놓고 예술의 지위를 부여했다. 평범한 사물(事物)이 예술제도를 거쳐 평범하지 않은 작품의 지위로 격상된다. 한편에서는, 미술관 내에서 박제되는 미술에 대한 반발로 예술을 미술관, 갤러리가 아닌 일상의 공간 속에서 제작, 전시, 감상하려는 움직임 또한 활발하다. 대자연 속에서, 거리에서, 지하철, 공원, 식당 등 여러 ‘일상의 공간’ 속에 예술작품을 적극적으로 침투시키려는 노력이 진행 중이다. 일상 사물을 예술로 만들기 위한 노력과 예술을 평범한 공간 속으로 데려오려는 노력이 동시에 진행된다는 것은 그만큼 예술과 일상의 공간이 서로 먼 곳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갤러리와 미술관에서의 설치 및 드로잉 작업과 함께 대형 건물의 로비나 사무실, 상업 공간 등에 작품을 설치해온 서혜영의 활동은 일상과 미술제도 사이를 오가는 현대미술의 상황을 잘 드러내준다. 갤러리 조선에서 열린 이번 개인전 <사물(私物)의 공간(空間)>에서 작가는 ‘예술 작업의 결과물인 작품이 일상의 한 부분이 되는 상상에서 시작했다’고 말한다. 우측에는 천장까지 이어진 높은 기둥이 서 있고, 꺾어진 벽면에는 나무와 철제 조립물들이 섞여 있다. 좌측에는 두 개의 작은 조명이 내려와 있고 그 아래 중간에 나무 조형물들이 놓여 있다. 삼각형을 조립해서 만든 오브제는 작가가 이전에 즐겨 사용하던 모티프인 ‘벽돌’ 모양으로 구멍이 나있다. 그 구멍을 통해 빛이 새어나와 전구를 넣으면 조명 기능을 할 수 있는 형태이지만, 조명이 들어가지 않은 경우에는 감상용 오브제로 존재한다. 나무상자들은 여성사미술관에서의 공공미술 프로젝트에서의 의자와 등받이를 연상시킨다. 작가의 기대대로 누군가의 사적 공간 속에 들어가게 된다면, 몇 개는 의자가 되고, 몇 개는 조명이 되고, 또 몇 개는 특별한 기능 없이 존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블록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몇 개의 블록만으로 세계와 온갖 사물들을 만들어내며, 그것을 아끼고 행복해하듯이, 서혜영의 오브제들은 어른을 위한 블록이 될 수 있다. 조명의 유무에 따라 기능을 넣을 수도,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사물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이번 개인전에서 서혜영의 ‘사물’ 혹은 ‘작품’은 화이트 큐브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듯 잘 배치된 오브제들은 손댈 수 없을 듯 보였다. 즉 사적인 공간에서 어떻게 사용될 수 있을지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기보다는 예술작품의 아우라를 가진 오브제를 보여주는 완벽한 전시 공간으로 기능하였기 때문에 블록을 만난 아이들과 같은 기분을 느끼기는 다소 어려웠다 하겠다.
하지만 작가의 취지와 기대에는 공감할 수 있었다. 우리 대부분은 거의 똑같이 찍어낸 듯한 디자인의 가구와 조명기구, 미학적 고려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환경 속에서 먹고, 일하고, 잠을 잔다. 가격이 저렴하다는 이유로 선택된 사무가구들을 사용하고, 아파트 평수에 맞게 제시되는 좁은 선택지 속에서 물품들을 선택’당’한다. 주어진 규칙과 ‘정상’의 범위 속에서 살아가도록 권고받듯이 말이다. 서혜영은 자신의 미적, 기능적 선택에 따라 환경을 구축해보자고, 그럴 때 우리의 삶을 둘러싼 사물들은 그저 그런 사물이 아니라, 더 특별한 사물이 되고, 나아가 우리의 삶도 더 특별하고 의미 있게 만들어줄 거라고 말한다.

이수정・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Review] 한 Q-사물은 초즈의 치즈를 골랐다

한 Q-사물은 초즈의 치즈를 골랐다
아트스페이스 휴휴2.7~3.7

지난 1월 흥미로운 사건 하나가 발생했다. 윤진섭 크리큐라티스트(cricurartist)의 작품과 이광기 작가의 <통신3사 새끼들아, 요금 좀 내 려봐라>의 합작에 대한 사전 협의 문제가 불거진 것. 이광기 작가는 오래 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통신3사 새끼들아 요금 좀 내려봐라’라는 문구가 적힌 테이프를 윤진섭 크리큐라티스트에게 보냈는데 그는 이를 하나의 개념적 오브제로 간주하여 자신의 작품에 차용했다. 그런데 개념적 오브제로 사용하더라도 이광기 작가와 사전 협의가 있었어야 하지 않느냐는 문제가 작가들 중심으로 제기된 것이다. 다행히 전시 오픈식에 이광기 작가가 참석하고 전시 개념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오해는 풀렸고 테이프 작업을 현장에 설치하면서 전시는 더욱 풍성해졌다. 사실 이번 일은 자그마한 해프닝에 불과했지만 이를 통해 개념적 오브제의 존재를 새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이 쉽게 풀린 것은 이번 전시가 교환가치를 거부하는 개념적 오브제들의 향연이었기 때문이다.
<사물은 초즈의 치즈를 골랐다>라는 제목의 이번 전시는 작가 본인이 그동안 집에 모아 두었던 물건들로 대부분 구성되었다.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이 오브제들은 애초에 교환가치가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다지 주목받을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윤진섭 개인의 역사와 궤적을 같이하는 순간 자본의 속성과는 무관하게 빛을 발하게 된다. 이는 예술 행위에 의해 작품에 의미가 부여되는 현대미술의 메커니즘과도 맥이 닿아 있지만 우리 삶에서도 그러한 지평은 열리곤 한다. 특히 개인의 추억을 되새기는 사진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보존적 가치를 지닌다.
사실 삶의 주름을 촘촘히 들여다보면 자본의 가치를 뛰어넘는 보존적 가치가 꽤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성공이라는 이름 뒤에 도사린 자본의 막강한 힘에 모종의 복종을 맹세함으로써 이러한 보존적 가치들을 망각하거나 상실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특히 예술작품의 경우 예술시장에서 가격이 책정되고 일정한 금액으로 거래되는 순간 그 예술작품의 가치는 오로지 교환가치에 근거해서 판단된다. 기존의 보존가치가 강조되는 개념적 작품이라 할지라도 돈으로 환원되는 순간 가치의 기준이 순식간에 전치되어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이 자본에 잠식되지 않거나 저항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교환가치를 훼손하는 수밖에 없다. 이 전시가 흥미로운 건 자본에 대한 예술적 저항을 등장하는 모든 오브제가 온몸을 바쳐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시가 진행되면서 전시장의 오브제가 지속적으로 변하도록 설정한 행위 역시 자본에 포섭되지 않으려는 예술 수행의 전략이다. 또한 한 큐(韓 Q), 왕치(王治,Wangzie), 윤진섭을 비롯해 20여 개의 예명을 사용하는 것도 예술가의 명성이 작품의 교환가치를 높이는 예술계의 섭리에 포섭되지 않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이토록 자본에 저항하는 예술 행위를 수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온전한 삶의 가치를 보존하고픈 희망 때문이 아닐까. 50년 이상 정신병원에서 생활하는 이종누이의 삶(사진)과 자신의 피(혈당 체크 후 남은 피 묻은 솜들)를 병치한 작품은 이종누이의 혹독한 삶을 자신의 아픔으로 애도하기 위한 것이지 관례적인 예술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과는 무관하다. 이번 전시는 자본으로 환원되길 거부하고 삶의 역사를 빌려 예술의 가치를 발현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유의미성을 가진다. 그러나 관례를 떨쳐버리는 전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일쑤다. 과연 사물은 초즈의 치즈를 고를 수 있을까.

김재환・경남도립미술관 학예연구사

[Review] 허구영-불사조는 재로부터 나올 것인가?

허구영-불사조는 재로부터 나올 것인가?

쿤스트독갤러리 2.7~2.20

‘사별삼일(士別三日)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어서일까? 필자가 2012년 서울 사이아트갤러리에서 열린 <불사조는 재로부터 나올 것인가?>란 동일한 제목의 전시를 봤기 때문일까? 이번 전시를 보기 전부터 작가 허구영의 전시는 나름대로 기대를 가지게 했다. 더욱이 1990년 초반에 그가 보여준 일련의 그룹전 기획과 그를 통한 여러 가지 담론들은 필자에게 적지 않은 신선함과 미술을 대하는 반문(反問)들을 가지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준 바, 그의 태도를 존경해왔으며 언제나 그의 행보가 궁금했다.
분명 필자는 더 좋은 전시를 기대한 것이 아니라 작가 작업의 문맥(context)을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왜 아직도 그러한 담론에 매달려야 하는지? 한 부분에 대한 미련이 그의 전체에 집착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너무 많은 상념이 그의 작업을 정체(停滯)하게 하고 타자와의 관계를 무디게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가 말한 ‘갸우뚱한 균형’은 주체 안에 내제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타자 사이에 있는 것은 아닌가? 쿨하게 ‘작업은 개인적인 차원이다’라고만 말하고 전시를 통해 수정된 항해의 과정들이 전혀 없다면, 관계하지 않는 타자를 상정해 놓았다면 왜 전시를 하여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사견을 피력하려는 것인지? 이러한 의문점에서 그를 움직이지 않는 그로 볼 수밖에 없다.
왜 필자는 이렇게 비관적이어야 했을까? 그것은 전시장에서 2014년의 허구영을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전시장에는 캡션이 없는 작품들이 때 묻고 허름한 전시장 벽체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전시되어 있었는데 서로 어울리기보다는 작품을 구분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불친절이 의도된 것이라면 그 배후를 알아차릴 때 쾌감이 있을 진대, 이번 전시에서는 놓인 것이 없는 잔칫상을 보고 주인의 배려를 책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아니 그가 파놓은 함정에 누구도 빠지지않고 ‘이것은 무엇인가?’라는 푸념만 늘어놓는 뻘줌한 광경만 노출되고 있는 것 같았다.
짜증이 나는 것은 그가 작업실에서 만들어낸 그의 의도(언어로서)들을 네오룩과 갤러리 홈피에서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아니다. 그런 것 없이 전시현장에서 그의 생각들이 요해(了解)되지 못함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의 생각이 뒤틀어지고 비껴가는, 그렇게 사고에서 도주하는 작업들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필자는 그러한 단서조차 찾지 못했다. 함정에 안 빠지고서 그의 작업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것조차 전적으로 관람자의 몫이라고 하는 말조차 삼가는 그의 작업, 이번 전시만큼은 무거운 발걸음을 돌리게 한다.
전시는 그 현장에서 보여주어야만 한다. 작업실의 수많은 고민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죽지도 않고 다시 환생하지도 않는다. 전시장이라는 현장에서 무엇을 기획하고 무엇을 제공해야 한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것을 제공해야 한다. 그로 인해 자신의 사고와 거리두기, 자신과 작품의 거리두기, 작품과 관객의 거리두기에서 그의 입장은 오해되고 그의 욕망은 희석되고 관객은 그의 가르침에서 멀어질 수 있지 않을까?
ps. 닷새를 고민한 이 치기어린 후배의 보챔은 그가 만든 함정인가?

윤제・포천아트밸리 예술감독

[Review] 배종헌-별 헤는 밤

배종헌-별 헤는 밤
갤러리 분도 2.12~3.8

이거 참. 별이라니. 도대체 언제였던가. 우두커니 별을 올려다보며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던 그때가 말이다. 솔직히 말하겠다. 나는 여전히 종종 그렇게 한다. 다만 나는 내가 가끔 밤하늘을 올려다본다는 사실을 숨길뿐이다. 나는 소년이 아니니까. 별을 꿈꾸기보다 안정된 삶을 감당해야하는 어른이어야 하니까 말이다. 대구에서 배종헌이 별을 말하고 있다.
그는 갑자기 소년이라도 되어버린 걸까? 시선을 떨구고 어눌한 어조로 천천히 무언가 말을 할 때 배종헌은 영락없는 소년이다. 소년의 감성으로 바라본 별은 어떠할까. 여기서 갑자기 그는 훌쩍 커버린다. 그는 증거를 수집하는 감식가의 냉정한 시선으로 우리에게 과연 별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되묻고, 그것을 시각화한다. 그는 미학적 인류학자가 되어 별의 사회적 활용을 이야기한다. 그가 담담하게 털어 놓은 천공(天空)의 이야기는 자못 충격적이다. 우리는 모두 스스로 별이 되고자 욕망하고 있던 것이다. 그 욕망은 끊임없이 부추겨지고, 그럴수록 그 욕망의 실현은 멀어진다. 정작 충격적인 것은 별 헤는 소년의 감성으로 세상을 가로지르는 인류학자로서 배종헌이 들이대는 증거물들이다.
별의 욕망과 그 욕망의 불가능한 실현 사이의 간극을 도처에서 출현한 수많은 별이 메우고 있는 것이다. 이미 수많은 별이 하늘에서 내려와 아주 익숙하고 구체적인 일상의 사물들로 육화되어 있다(<운석> ). 세개의 별(삼성)이 울리는 알람이 아침을 깨운다. 일곱 개의 별(칠성사이다)이 목마름을 채운다. 별 관(冠)을 쓴 초록의 여신(스타벅스)이 감성을 달래주고, 삿포로에 취해 잠이 든다. 이미 거대한 별들이 하늘을 날고(보잉), 별이 빛나는 은행(국민은행)에서 재산을 불린다. 또 별이 되고픈 아이들을 응원하며 별이 되지 못한 좌절을 보상받는다(K팝스타). 오리온의 성좌는 이미 혀 위에서 달콤하게 녹아든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배종헌이 끌어모은 별의 증거들이 하찮은 쓰레기 더미의 몰골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별에 대한 욕망을 실현하지 못한다. 별이 될 수 없으므로 더 별을 소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쓰레기 더미들은 착취당한 욕망의 흔적일 뿐이다. 배종헌은 지극히 실증주의적인 태도로서 우리 사회에서 별이 활용되는 방식들에 접근한다. 그렇다고 배종헌이 별이 오늘날 소비자본주의 시대 이윤추구의 수단일 뿐이라는 뻔한 결론에 도달하는 것만은 아니다. 배종헌의 작업에서 읽어야 할 것은 자신의 예술을 성찰하는 방식이다. 예술은 별이 되려는 욕망을 실현하는 궁극적 형태였다. 반 고흐는 평생의 가난과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별이 되었다. 배종헌이 에어캡(뽁뽁이) 속에 별사탕을 끼워넣는 하찮은 방식을 취하는 이유는 별이 되려는 자신의 욕망과 투쟁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별 헤는 밤>이란 별에 대한 욕망과 이윤을 맞바꾸는 동시대 자본주의 체제를 미학적으로 탐험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예술을 재규정하는 시간이다. 그의 성찰이 그리는 궤적이 어떠할까를 예상하기란 쉽지 않다. 그 또한 이미 예술계에서 별이 되기를 강요받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만들어가는 길 위에서 한 발 한 발 자신의 걸음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동일・대구가톨릭대 교수

[Review] 박문희-미지의 생명체들

박문희-미지의 생명체들
송은아트큐브 1.16~2.22

전시장에는 구체적인 어떤 오브제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모든 것은 천으로 덮여있거나 걸레, 인조 머리카락, 인조 잔디 등으로 뒤덮여 있다. 우리는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상상하거나 추측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들추어서 그 실체를 확인 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강아지나 낙타 등등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 내에서 연결고리를 찾는 일뿐이다. 작가는 이렇게 전시된 것들을 ‘미지의 생명체들’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러한 미지의 생명체들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존재인 미지의 것과 접촉한다는 것은 우리의 인식에 큰 자극을 발생시킨다. 그것은 호기심이나 두려움이 이내 폭력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서로에게 긴장이 감도는 시간이다. 그러나 이내 익숙하게 되면 서로를 관찰하고 자신들이 알고 있는 지식들과 상식으로 미지의 것들을 분석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 과정에서 수많은 오해와 갈등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러한 오해와 갈등은 항해술의 발달로 신대륙을 발견한 유럽인들이 기술한 신대륙 원주민에 대한 탐험기와 선교사들의 책이나 인류학자들의 연구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이는 비단 과거만의 산물이 아닌 현재 인간 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갈등들의 원인이기도 하다.
박문희의 작품으로 다시 돌아와 보면 에서는 검은 얼룩이 진 천으로 덮인 무엇인가가 있다. 이것은 정말 단순한 형태를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 제목과 그 얼룩으로 자연스럽게 젖소 같은 동물이 생각난다. 심지어는 처럼 숨은 저녁이라는 제목이 붙어있고 테이블 다리가 보임에도 불구하고 낙타라고 생각해버리게 된다. 는 강아지를 연상하게 하고, , 는 인조 모발로 덮여 있지만 여성과 아이의 모습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그렇게만 바라볼 수는 없다. 이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그 모습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작품들 안에서 머리가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단순한 위장과 포장으로 인하여 우리는 순식간에 새로운 생명체들과 조우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상 이것이 정말 생명체인지도 알 수 없다. 그만큼 미지의 것을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도 이러한 간단한 장치만으로도 쉽게 우리의 인식에 혼란을 주는 언캐니한 상황을 만드는 것이 작가의 의도일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하나의 공식을 걸어 놓았다. 그 공식은 symbol(상징)+meaning(의미)+definition(정의)을 correlation(상관관계)분에 validity(타당성)로 계산하고 beauty(아름다움)를 제곱하는 것이다. 이렇게 박문희는 자신만의 공식을 찾고 우리들에게 ‘제가 찾은 답은 이것인 것 같은데 당신들의 생각은 어떤가요?’ 라고 자신의 공식을 받아들일 것을 종용한다. 만약 우리가 작가의 공식을 인정한다면 미지의 생명체는 더 이상 미지의 생명체가 아닐 것이다. 반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미지의 생명체를 파악하는 우리만의 공식을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작가가 만들어놓은 미지의 생명체를 마주하는 순간부터 작가가 만들어놓은 패러독스에 빠져버리게 된다. 아마도 이것이 박문희가 만들어내는 작업들의 흥미로운 지점일 것이다.

신승오・페리지갤러리 전시팀장

[Review] 윤병주-Exploration of Hwaseong

윤병주-Exploration of Hwaseong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2.7~28

윤병주는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의 신진작가 지원프로그램인 PT & Critic에 선정된 올해의 작가이다. 작가와 전문가, 컬렉터(collector), 그리고 관객의 진지한 토론을 통해 향후 작업방향에 대해 다같이 고민해볼 수 있게 기획된 프로그램이다. 윤병주는 이러한 과정에 기꺼이 진입하고자 하는 작가이며 서울예술대학교 사진과 졸업을 앞둔 무한 가능성을 가진 예비작가인 셈이다.
이번 전시에서 윤병주는 현재 땅을 파헤치고 도시개발이 한창인 경기도 화성(Hwaseong)지역에서 찍은 사진과 영상을 미지의 세계인 우주의 화성(Mars)을 탐험하고 기록한 것으로 설정한다. 실제 존재하는 지명인 화성과 비실제적인 우주 화성 간 동음이의어적 측면에다 동시에 두 장소 모두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는 지역으로서의 유사점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이렇게 화성이라는 특정 장소와 미지의 장소 화성 간의 간극은 우리 삶의 소통 중 생겨나는 끊임없는 미끄러짐과 닮아있다. 그리고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가상 현실이 실재(the Real)를 드러내듯 이번 전시는 우주 화성에 대한 우리의 판타지(Fantasy)와 함께 미지의 것을 정복하고 경쟁적으로 자본화하고자 하는 인간의 무한 욕망을 보여준다.
전시장은 실제로 존재하는 화성지역 곳곳의 사진과 영상, 사운드 채집 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작가는 사진가의 시선이 아닌 기계(무선 조종 자동차에 카메라를 장착하여 촬영)에 위임하여 자료를 객관화하고 마치 달 탐사선이 달을 탐사한다는 듯 조작된 사진과 영상을 배치한 후 이미지 자체는 화성(Mars)의 느낌으로 붉게 조작한다. 이때 조작이라는 기제를 통해 실제와 비실제 사이에 흥미로움과 재미가 더해진다. 작가는 붉게 또는 외계인 존재의 흔적인 양 조작된 이미지들, 마치 우주탐사기록과 결과를 홍보 전시하는 양 조작하는 행위들에서 상당한 쾌를 찾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즐거운 조작행위는 화성탐사과정과 수집된 조작물들을 아카이빙(archiving)한 것처럼 가정되고 멋진 탐험가로 위장한 작가 자신의 사진과 함께 영웅으로서의 기념비적 상황이 전개된다.
사진을 전공한 윤병주 작가의 이번 전시는 그에게는 매체에 대한 실험이었을 것이다. 그의 다른 사진작업 <우사단>에서는 카메라적 시선의 문제나 그 시선이 가진 정치 · 사회적 문제를 이미지 자체의 조작을 통해 다루고 있다. 반면, 이번 전시에서 보여준 <화성>, , 에서는 사진과 영상매체를 통해 가상 상황을 만들고 실재를 드러내는 기록으로서의 사진매체에, 즉 도시화의 욕망과 미지의 세계를 식민화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비교하여 다루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사진 전공자로서 사진이미지의 미학적 조작보다 실재를 드러내는 가상의 설정 속에서 사진과 영상매체를 기록방식으로 활용하는 것에 방점을 둔 것이다. 결국 그는 사진매체에 대한 다양한 탐험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예비작가 윤병주는 다음 전시에서 어떠한 작업을 보여줄 것인가? 향후 작업방향이 궁금해지는 지점이다.

오세원・문화역서울 284 운영팀장

[Review] 하정우-TRACE

하정우-TRACE
표갤러리 2.6~3.5

‘그는 우리의 얼굴에 잠시 정박했다 사라지는 잡을 수 없고 정의되지 않는 감정의 미묘한 곡선을, 화면 위에 새기고 자아를 화면에 투영하여 지우므로 우리에게 영혼의 카타르시스를 허락한다.’
우리 몸 가운데 얼굴은, 내면 깊숙이 흐르는 미스터리한 감정의 곡선이 잠시 머물렀다 사라지는 사유의 영역이며, 상징적 의사를 담고 지우는 의식과 무의식의 영적 교환이 이루어지는 성역이다. 종종 이 감정의 의사 표시는 음성언어보다 더 즉각적이고 놀라운 효과를 이끌어 오는데, 이것은 우리 내부 감정 변화의 불확실성을 명쾌함에 이르도록 안내하고 있다. 여기 자아와 실존 그리고 타자에 대한 성찰을 통한, 내적치유의 과정을 조형요소(점, 선, 면 그리고 색채)로 제안하는 작가 하정우가 있다.
그에게 예술의 행위는 “우리 정신에 깊숙이 숨고 자리한 ‘존재의 실체’를 대결과 화해를 통해, 거칠지만 감성어린 이미지를 2차원의 화면 위로 유도하여, ‘그리기’로 현상계의 수면에 풀어놓는 것”이라고 한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모든 호흡이 있고 없는 사물과 대상의 관찰과 교감하여, 그 내부의 심리적 상태를 극도로 함축한 조형언어로 사유의 장에 재현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적 행위는 그 자신의 자아와 실체를 인식하고, 가상과 실상(은막 위의 역할과 현실)의 경계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아의 방에 있는 스스로를 직시하고 경계하고자 하는 최소이자 최선의 몸부림이다.
이제 그의 화면을 바라보자! 우리 눈앞에 등장한 이미지는 저 미지의 영역에서 경험한 격정과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만 말문을 열기가 그리 쉽지 않는 듯한 인상이다. 다만 그곳으로 돌아가길 원치 않는 의사표시가 역력하고, 화면에는 아직 그곳에서 본 것으로 인해, 흔들리는 불안한 눈동자만이 가녀린 빛을 발하고 있을 뿐이다. 하정우의 또 다른 화면에는, 그와 인연이 된 인물들의 감정곡선뿐만 아니라 우리와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식물과 기물들에게도, 내면에 흐르는 감성과 감정이 허락되고 있다. 나아가서 그에 의해 호흡을 부여받은 사물들은 마치 인간의 그것과 같은 몸짓과 흔적을 드러내고 있다.
하정우의 이미지가 재현된 장소는 그의 정신과 육체가 합일되는 경계에 있다. 그곳은 그가 자신의 내면을 다스리고 통제하는 ‘확장성을 가진 다른 자아의 영토’이다. 그가 표현하길 원하는 ‘사실의 실체’는 그 자신의 ‘자아의 방’에 있는 낯선 폭력성과 두려움 그리고 정의되지 않는 슬픔들(은막 위의 등장한 모든 가상과 실상의 환영)이다. 그가 우리에게 소개한 이미지들은, 점과 선 그리고 면이 교차하여 그 우연성과 필연성의 획득을 통한 ‘내적 치유’의 흔적들로 제안되고 있다. 그는 이 조형적 접근법을, 그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상처 입은 영혼의 내적인 치유에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구기수・미술비평학

[Review] 고봉수-상상력의 기원

고봉수-상상력의 기원

금호미술관 2.13~23

냉철한 이성주의 예술가 고봉수가 현대미술에 딴죽을 거는 엉뚱한 상상력을 발휘했다. 지속적으로 추구했던 차가운 이성주의 문맥을 벗어나 발칙한 상상하기를 통해 이성의 객관성과 보편성의 틀을 깨고 예술적 상상의 자유로움과 확장성을 작품에 담아내는 전회를 시작한 것이다. 이번 전시는 그동안 작가가 보여준 작품세계와는 전혀 다른, 엉뚱하면서도 심도 있고, 현대미술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날카로운 풍자와 상상력이 돋보인다.
이번 전시에서는 르네상스에서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주요한 작품에 담긴 신화소와 아우라를 패러디함으로써 현대미술의 한 전략을 다시금 비틀고 그 메마른 의미를 되살려낸다. 기법적 측면에서 조각장르의 한계였던 중력과 형상이 제한하는 시공간, 미디엄이 차지하는 고정관념 등을 재구축하고 타 장르 혹은 금기시되었던 미디엄의 이질적인 특성들을 과감하게 결합시키는 초현실주의적인 콜라보레이션 작품을 등장시켰다. 더불어 내용적 측면에서는 전작들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거기에 탐미적 인체 형상과 초라한 실존적 형상들을 결합시킴으로써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감성을 충돌시킨다. 해서 그의 작품은 익숙하고 친숙했던 과거와 현재의 이미지들이 어색한 지점에서 조우하며 낯설 고 엉뚱하지만 현재의 유행적-양식화된 스타일을 조롱하며 실소를 유발하게 하는 코드를 생성한다. 미추(美醜)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자신이 추구했던 세계마저 파기시켜버리는 통렬한 블랙코미디 작품들은 과도하게 치장되고 포장된 현대미술의 골격이자 그 징후로서의 살들을 벗겨내버린다. 작가는 오랫동안 예술과 상상력의 역학관계를 깊숙이 사유했고, 지속적으로 추구했던 궁극적 단순명료함과 묵언적 형태 속에 숨겨두었다. 그러나 이제 비밀스럽고 내밀한 내러티브를 부활시킴으로써 현대인의 상상력을 추동하고 고정화하는 세계-추상 혹은 상상소의 근원을 다시 직시한다. 이것은 현대미술의 난점인 제한된 상상력에 대한 반발이자 현혹되기 쉬운 유행 현상에 대한 공격이다. 그리고 컨템포러리 아트의 주요 덕목이 창발적 변용과 신선한 충격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적 사고와 사유는 항상 턱없이 부족해 상상력과 사유의 부재를 초래하며 결과적으로 함량 미달의 작품들이 과잉생산되는 현 시점에 대한 부정의 메시지 역시 읽어낼 수 있다.
작가 고봉수의 차별성은 전시테제에서 확인할 수 있듯, 오늘의 상상력의 기원은 무엇인가를 되묻는 지점이며, 현대의 무차별적 패러디 현상과 상상력 부재의 근원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점이다. 예술세계의 페르소나가 아무리 강력할지라도 내밀하고도 절대적 자유로서의 상상력은 그의 작품을 관류하는 힘이자 예술정신의 기원이며 사유함의 향(香)이다.

황찬연・예술철학

[Review] 조형섭-부흥상회

가난과 쇠락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한국 사회는 발전, 개발 등과 더불어 부흥이라는 염원을 하나의 집단심리 표상으로 삼았다. ‘부흥상회’와 같은 이름은 한국 현대사의 초입에서 만날 수 있는 집단표상이다. 그러나 부흥이라는 낱말은 이미 진부해졌고, ‘○○상회’라 이름도 오래전의 일이라 ‘○○수퍼’의 단계를 지나 편의점과 할인마트의 시대를 맞았다. 따라서 ‘부흥상회’라는 간판은 역설적이게도 쇠락을 대변하는 오브제로 남았다. 조형섭은 부흥과 쇠락이라는 사회의 역설을 차용해서 예술을 이야기한다. 작업실과 전시장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의 행위를 통하여 명망성 경쟁의 우위를 확보하고 자본가치를 획득하는 것이 대세인 가치전도의 시대에 그는 예술의 장 바깥 마을의 서사를 탐구하고 있다. 조형섭의 출발은 채집이다.
그는 자신의 생활 주변에서 발견한 평범한 오브제를 중심으로 작업을 풀어나간다. 그의 오브제는 나무와 쇠, 플라스틱, 페인트, 자개 등의 물질들이다. 그런데 그의 오브제가 예술창작의 일반적인 질료들과 다른 점은 그 속에 시간과 공간의 서사를 탑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작가 자신과 연관한 장소의 상황을 집약한 따뜻한 오브제들이어서 예술적 소통을 위한 의제생성과 그것을 풀어나가는 다양한 방법론들을 펼쳐내기에 최적의 질료들이다. 다만 전제할 것은 그 오브제들을 채집한 예술가의 마음이다. 이미 그 자체로 장소성을 반영하여 모종의 상황을 담고 있는 물건을 선택하고 그 의미 맥락을 전유하려고 하는 예술가의 마음이야말로 채집한 사물을 예술작품으로 전환하는 결정적 변수이다.
오브제를 해체하고 다른 질료를 결합해 재조합하는 과정에서 조형섭은 새로운 오브제를 만든다. 버려진 물건들의 쓸모를 재발견하고 그것을 원본으로 복제본을 만드는 과정에서 소반이며 자개농, 의자, 슬리퍼 등의 사물들이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낸다. 예술가가 일상의 오브제를 채집한다는 것은 그 속에 담긴 서사를 획득한다는 것인데, 문제는 그 이후 예술적 전유의 맥락과 수준에 따라 소통과 공감의 수준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특히 예술가의 처소는 그의 마음을 좌지우지하는 매개요소다. 그는 대도시가 아닌 외딴 시골마을의 레지던시에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작업실과 마을 사이의 경계를 오가는 주변인으로서 생활 속의 서사와 예술적 담론 사이의 연계를 찾아나서는 조형섭의 작업은 오브제아트에서 마을예술로 진화하고 있다.

김준기・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