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Topic] Go Betweens:The World Seen through Children
중개자들, 어린이라는 장르
일본 롯폰기에 있는 모리미술관에서 5월 31일부터 8월 31일까지 <Go Betweens-아이들을 통해서 보는 세계전>이 열렸다. 전시 타이틀을 언뜻 보면 어린이를 위한 전시로 생각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전시는 어른의 고정된 시각이 세계를 보는 ‘상식’이 되어버린 현실에서 어린이가 세상을 살피는, 틀에 얽매이지 않은 시각을 소개한다. 또한 아이들을 둘러싼 세상의 다양한 요소를 바라보는데, 매개자로서 아이들은 어른에게 색다른 세상 보기를 제안하고 있다.
강수미 미학, 동덕여대 회화과 교수
글 제목을 보고 우선 당신은 ‘이 글은 별로 읽을 필요가 없다’고 넘길지 모른다. 어린이미술에는 큰 관심이 없으니까. 나도 그렇다. 그런데 우리의 바로 그 같은 관심의 선별이 어떤 선입관에서 연유한 것인지,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간과하게 하는지가 이 글의 주제다.
지난 5월 일본 도쿄 모리미술관에서 열린 <고 비트윈스: 아이들을 통해 보이는 세계(Go-Betweens: The World Seen through Children)>는 개막 시기도 그렇거니와, 전시 명을 통해서도 언뜻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어린이들의 전시’라는 인상을 준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미술계에서 5월 가족의 달부터 8월 여름방학까지, 관객 특수(特需)를 기대하고 여는 ‘대중 기획전’ 또는 ‘패키지 전시’ 유형의 하나로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고 비트윈스>를 두고, 전시장 곳곳에 핑크색과 파란색의 장난감 같은 순진무구한 작품들이 즐비하고, 유치원생부터 중학생까지 줄 맞춰 전시를 관람하며, 미술관 교육프로그램을 따라 아이들이 이것저것 미술 체험을 하는 현장을 눈앞에 그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기획전은 그런 알록달록하고 명랑 쾌활한 전시가 아니다. 오히려 주제 면에서 보면 어른들이 고민해야 할 현실의 무거운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정서적으로는 희로애락을 복합적으로 불러일으키는 의미심장한 전시다. 물론 전시 부제에 보듯이 그런 현실의 문제를 어른들의 관점이나 주장 대신 ‘아이들을 통해’ 보고 느끼고 생각하도록 하는데, 우리가 이 전시를 특별히 주목할 이유가 여기 있다. 요컨대 <고 비트윈스>는 맑은 동심이라며 아이들을 낭만화하지 않는다(그것은 어른이 무/의식적으로 아이를 중심에서 밀어내는 가장 손쉬운 방식이다). 그렇다고 어른들, 특히 국내외 미술계 전문가들만의 리그에 매몰되지도 않으면서, 전시는 우리가 속한 세계의 리얼리티를 입체적으로 보게 한다. 그 리얼리티란 글로벌리즘의 시대적 조류를 좇아 문화적 다양성, 차이, 이주, 유목, 다문화, 다자적 교류가 당연시되는 사회 내부에서 불안, 갈등, 배타, 고립, 단절, 혼란의 양상이 이미 발생했고 언제나 작용 중인 실재다. 어른이자 소위 전문가인 내가 이렇게 논리적 언어로밖에 쓰지 못하는 그 리얼리티를, <고 비트윈스>는 아이들의 얼굴 표정, 몸짓, 말, 꿈, 판타지, 그리고 무엇보다 생활 속에서 일어나 자잘하게 축적되는 내면의 일들(을 다룬 작품들)로 드러낸다.
‘어른 중심주의’가 가능하지 않은
어떤 친절한 어른이라도 아이들과 함께 하지 않는 일이 있다.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부정적인 문제로 인식되거나 골치 아픈 일을 아이들과 나누지 않는 것이다. 이야기를 해주지도 않고, 토로하지도 않고, 의논을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문제적인 일 자체를 아이들의 삶과 결부시켜 생각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 일은 오롯이 어른들만 겪고, 어른들만 알며, 어른들끼리만 의논하고 해결할 수 있는/해야 할 어른들 세계의 문제라고 단정한다. 피상적으로야 어린이는 사랑하고 보호할 대상이지만 실상 어른들의 무의식 속에 그들은 이미 항상 아무것도 모르고 뭔가를 할 수 있는 능력도 별로 없는 약자로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미래의 주인’ 또는 ‘다음세대’라는 말을 써도 그 어린 주인공들의 세계를 어른들의 세계와 단절시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어른 중심주의’다.
예컨대 2000년대 들어 싫든 좋든, 원하든 원치 않던 동시대인 모두가 따라야 할 계율처럼 된 세계화와, 그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우리 대다수가 정주하는 삶이 아니라 떠돌이의 불안정한 삶을 살게 되고, 국적불문 및 지역불문의 의식주 상품과 문화 소비재를 소비하고,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니며 우리나 그들도 아닌 낱알의 익명의 존재들이 된 상황을 ‘어린이’의 관점과 구체적 경험의 수준에서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특히 이 질문을 학자, 비평가, 큐레이터들에게 던져야 한다. 왜냐하면 비슷한 시기부터 ‘글로벌리즘과 연관된 비판적 연구, 글쓰기, 기획’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고, 현재도 여전한 마당에 우리는 거의 한 번도 그 이슈를 어린이의 내면, 경험, 지각, 정서라는 층위에서 탐색한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리미술관의 아라키 나쓰미(Araki Natsumi)가 기획한 <고 비트윈스>는 21세기 들어 우세한 가치로 떠오른 유동성, 이동성, 이질성, 혼종 등을 어른들의 시각과 판단으로 검토하는 대신 아이들의 모습, 행동, 감수성을 중심으로 들여다본다. 그렇게 해서 “다른 문화들, 현실세계와 상상세계, 성년과 유년”이 공생, 각축을 벌이는 현실의 차원을 미술로 훑어내는 것이다.
이런 경우를 떠올려보자. 중년이 다 돼 자신이 나고 자란 나라를 떠나 타국으로 이민을 간 부모, 그리고 그 부모를 따라 낯선 곳으로 이주해야 했던 어린아이. 부모는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쉽게 받아들이거나 그곳의 이질적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고 교포사회 안에서 제한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반면, 아이는 그 낯선 곳의 문화적 습속을 빠르게 습득해나간다. 그래서 차차 아이가 자신의 부모와 이민 간 나라의 사람들 간 소통 및 사회생활의 각종 일들을 맡아 하게 된다. 영미권에서는 이런 아이들을 일종의 가교 역할을 한다는 의미에서 ‘중개자(Go-Between)’라고 부른다. 사실 차이를 뜻하는 단어 ‘difference’에서 ‘fference’는 라틴어로 ‘전달, 운반’ 또는 ‘관계’를 뜻하는 단어 ‘ferre’를 어원으로 하는데, 그럼 중개자로서 이민자 아이들은 모국과 이국 사이에서 길을 잃은 부모세대에게 차이의 문화를 전달하고 서로 관계 짓는 역할을 한다고 풀이해도 좋을 것이다. 또 다르게는, 그런 어린이들 자체가 이름 그대로 이 상태와 저 상태 사이, 익숙한 문화와 낯선 문화 사이, 자유로운 이동과 뿌리 뽑힘 사이, 다양성과 정체 없음 사이를 실존적으로(go between) 구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 현존은 어른의 시각을 특권시하는 어른 중심주의만으로 파악할 수 없다.
<고 비트윈스>가 주목한 대상이 바로 그런 유년의 세계다. 전시에는 20세기 초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여자아이 사진을 통해 서구사회의 아동 노동착취 문제를 불러일으킨 루이스 하인(Lewis W. Hine)부터 한국의 김인숙과 원성원, 나라 요시토모(Nara Yoshitomo)를 비롯한 다수의 일본작가, 또 네덜란드, 호주, 핀란드 등 다양한 국적과 작업 성향을 가진 26팀/28명이 참여했다. 그리고 전시는 그 다양성을 배경으로 한 작품 속의 어린이들이 어떤 의미와 모습을 띠고 경계와 차이로 가득한 세계를 중개하고 있는지, 차이가 차별이 되는 어른 중심사회에서 어떻게 상처받거나 소외되며 왜곡에 빠지는지 등을 5개 섹션의 대규모 전시를 통해 펼치고 종합한다. ‘문화를 넘어’, ‘자유와 고립의 세계’, ‘고통과 갈등의 기억’, ‘어른과 아이 사이에 낌’, ‘다른 차원들 사이를 움직이기’가 그것이다. 섹션 주제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전시된 여러 작품에서 조명하는 ‘고 비트윈스/어린 중개자들’은 그 용어의 유래처럼 부모세대보다 강한 적응력으로 자신에게 강제 이식된 낯선 삶을 마찰이나 고통 없이 유연하게 살아내는 것만은 아니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거나 자유롭거나 행복하지 않다. 거기에는 예컨대 테레사 허바드와 알렉산더 비르클러(Teresa Hubbard & Alexander Birchler)의 비디오에서 여자아이가 즐거운 커뮤니티로부터 배제된 채 비를 흠뻑 맞으며 혼자 생일파티를 치르는 것과 같은 이방(異邦)의 서러움이 있다. 김인숙의 <달콤한 시간들>에 담긴 조선인민학교 출신 두 소녀의 성장기는 재일교포 2세, 3세의 가족사진과 더불어 한국과 일본 어디에도 귀속되지 못한 이민자들이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가며 구축한 마이크로월드를 드러내는데, 그 미시세계는 비연대기적(anachronic) 시간과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성을 품고 있다. 이는 원성원이 사진합성기법을 통해 만든 <나의 일곱 살> 사진연작 속 시간 및 복잡성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김인숙의 사진에서 착오적 시간과 문화적 복잡성은 일제 식민지배와 분단의 역사라는 외적 강압이 작은 개인을 넘어서 오랜 시간 교포사회에 파생시킨 결과다. 반면 원성원의 사진은 작가의 유년기 사적 경험과 기억을 사진의 객관성과 디지털 이미지합성 기술력을 혼합해 동심의 얼굴을 한 무시간적 가상세계로 변형한 결과다.
파괴적이며 활동적인
원성원 작품 속 가상성을 야마모토 다카유키(Yamamoto Takayuki)의 <새로운 지옥> 영상설치작품과 대구로 논해도 좋을 것이다. 작가는 이번 모리미술관 전시를 위해 4일에 걸쳐 아이들과 워크숍을 했고, 그 과정에서 선생의 경력을 살려 아이들에게 불교 만다라 등 일본미술사의 각종 지옥 형상을 가르쳤다. 아이들은 거기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그 영향으로 해골이 눌어붙은 집, 갈기갈기 찢긴 심장, 외눈박이 귀신 등 총천연색 지옥도/설치물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것에 대해 어른이 훈련시킨 발표 방식으로 카메라 앞에서 설명하는데, 작가는 최종적으로 그 영상과 새로운 지옥이미지를 함께 전시에 내놓았다. 여기서 우리는 아이의 상상력이 새하얀 도화지 같다거나 상실한 유년기가 가상의 풍요로 넘친다는 식의 묘사가 얼마나 어른들의 상투적 사고인지 새삼 느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은 어린아이들의 감각과 지성이 전통과 어른들의 교육에 의해 어떻게 주조되고, 그 아이들이 다시 자기 현실의 무엇을 중개하는지 두려운 눈으로 보는 일이다. 어린이란 어른의 보호 아래 고정된 일차원적 객체가 아니라 부모의 문화 속에서 태어나 그것을 먹어치우고, 자신의 문화를 만들며, 다시 그 스스로 부모의 문화가 되는 파괴적이고 활동적인 중간자인 것이다.
감상자들이 <고 비트윈스>에서 꽤나 충격적이고 어린이들의 전시로 부적합하다고 꼽을 작품은 아마도 기쿠치 도모코(Kikuchi Tomoko)의 <잃어버린 경계들> 영상일 것이다. 또 말로 꺼내기 민감한 성적 상상력을 자극한다고 느끼는 작품은 장오(Zhang O)의 <아빠와 나> 사진 연작이 아닐까 싶다. 베이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도모코는 <잃어버린 경계들>에서 하이틴 소녀가 남자로서 연상의 여자들과 성적 관계를 맺으며 자본주의적 성장으로 흥청거리는 중국 도시의 구석을 헤매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우리는 습관적 감성으로든 도덕의 이름으로든 그런 모습을 아이들과 결부시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 오의 사진들에서는 서구에 입양된 아시아 여자아이들이 자신의 의붓아버지와 다정하게 포즈를 취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어른 감상자 입장에서 그 포즈들은 부녀관계로는 부적절한 어떤 육체적 관계와 성적 교환처럼 느껴진다. 물론 그 느낌은 머리 굵은 어른의 입양에 대한 편견이나 몹쓸 상상력에 기인한 것일 수 있지만, 또한 자신에게 강제된 삶의 조건에서 사랑받고 살아남아야 하는 입양아동의 본능이 노출된 효과일 수도 있다.
어른들이 쉽게 단정해버리는 아이들의 속성은 ‘어리고 연약하다, 순진무구하다, 귀엽고 예쁘다’는 것 등이다. 그러고 보면 어른들이 생각하는 아이라는 존재는 애완동물과 별반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아이들은 <고 비트윈스>의 작품들 속 여러 양상처럼 어른과 마찬가지로 각자 자기 앞의 생을 살아나가야 하는 존재다. 그들에게도 글로벌리즘은 현실이며, 소통과 관계는 어려운 문제다. 어른만이 아닌, 어린이라는 특정 지대/장르를 통해 세계를 보고, 경험하고, 판단할 필연적 이유가 그 가운데 깊게 도사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