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아치 Yangachi

양아치의 전술적 미디어의 순간들:
데이터, 시스템, 네트워크

문혜진 미술비평

Artist

《When Two Galaxies Merge,》 아뜰리에 에르메스 전시 전경 2017
사진: 남기용 제공: 작가, 에르메스 재단

양아치 / 1970년생. 수원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커뮤니케이션 대학원에서 영상학(미디어아트)를 수학했다. 바라캇 컨템포러리, 아뜰리에 에르메스, 학고재갤러리, 아트센터나비, 일주아트하우스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코리아나 미술관, 부천아트벙커 B39, 아트센터나비, 세화미술관,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아르코미술관 등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했다. 2010년 아뜰리에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을 수상했으며, 주요 작품 소장처로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아모레퍼시픽미술관 등이 있다.


양아치의 전술적 미디어의 순간들: 데이터, 시스템, 네트워크
문혜진
미술비평

네덜란드 미디어 이론가이자 실천가인 헤이르트 로빙크 ( Geert Lovink)와 앤드루 가르시아(Andrew Garcia)는 1990년대 중반 인터넷을 비롯한 디지털 기반 뉴미디어의 등장과 함께 대두된 글로벌 문화실천의 새로운 경향성에 주목해 “전술적 미디어(Tactical Media)”라는 용어를 만들었다.1 이들은 넷 비평 및 넷 문화정치학을 위한 폐쇄형 메일링리스트인 넷타임을 통해 전술적 미디어에 대한 선언문을 작성해 배포했다.2 ‘전술적’이라는 용어는 아마추어 대 전문가, 대안 대 주류, 사적 대 공적 같은 경직된 이분법 너머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다.3 이들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미디어 바깥의 저항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미디어를 유연하게 활용하는 게릴라식 저항을 지향한다. “변종과 혼종을 끊임없이 만들고, 경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분야를 연결하고 재구성하며, 기술 변화의 속도와 규제 불확실성 때문에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미디어 내 자유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한 미디어에서 다른 미디어와 결합하거나 점프하는 욕구와 능력”이 전술적 실천가에게 가장 중요한 이동성(mobility)이다.4 “활동가, 유목적 미디어 전사, 장난꾸러기, 해커, 거리 래퍼, 캠코더 특공대” 같은 전술적 미디어 실천가들은 접근 가능한 매체로 바로 지금 여기, 현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1990년대 후반 유럽에서 발흥한 미디어 운동을 길게 소개한 것은 1990년대 후반부터 활동을 시작한 양아치의 작업 전반이 전술적 미디어의 근간과 직간접적으로 깊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혼종적 미디어, 일상 속 저항, 하위문화적 감성, 전투적인 동시에 시적인 문화실천, 시스템에 대한 자각 같은 전술적 미디어의 특징은 초기 웹아트 시절뿐 아니라 오브제와 퍼포먼스, 영상으로 매체를 다변화한 최근 작업까지 지속적으로 양아치 작업의 저류를 형성한다. 이 글은 미디어, 예술, 사회를 현상이 아닌 구조로서 바라본 양아치의 독특한 궤적을 초기 작업 중심으로 추적하고자 한다.

양아치는 조소를 전공한 엄연한 미술인이지만, 미술계에 합류하게 된 계기나 작업의 시발점에 있어 통상의 작가들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띤다. 양아치가 프로그래밍이나 인터넷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우연한 상황에서 출발한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일단 학교를 떠나 해외로 가보자는 생각으로 지인이 있던 보스턴으로 향했다. 1997년 상반기부터 약 2년 가량 체류하면서, 양아치는 친구의 추천으로 노스이스턴대 전산과에서 자바스크립트나 HTML 같은 언어의 프로그래밍 수업을 청강하며 인터넷 문화가 부흥하던 당대 미국의 청년문화에 흠뻑 빠져든다. 1990년대 말은 전세계적으로 디지털과 인터넷 붐이 불던 시기로, 하버드대와 MIT 등이 모여 있는 대학도시인 보스턴은 새롭게 태동하는 청년문화의 활기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5 존 마에다(John Maeda) 같은 유명 미디어 작가가 MIT 미디어랩의 교수로 재직하고, 여러 대학에서 흥미로운 특강과 학술행사가 연이어 열리던 보스턴은 한국 청년 양아치에게 무언가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확신과 흥분을 안겨주었다. 특히 그는 1997년 장쩌민 중국 주석이 하버드대를 방문했을 때의 일을 인상적으로 기억한다. 중국의 인권 문제에 항의하기 위해 엄청난 인파의 사람들이 PC통신을 통해 모이는 모습을 보고, 그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미디어가 사람들이 모이는 방식과 체계를 바꾸고 있음을 실감한다.6 현장에서 느끼는 새로운 예술의 강렬함은 흥미로운 작업을 소개하는 커뮤니티 페이지인 중국로봇(www.chinarobot.net)(1998)으로 발현된다. 타투이스트, 만화가, 인형제작자, 음악가, 웹아티스트 등 양아치가 보기에 ‘동시대’ 예술이라 생각되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작업을 소개하는 중국로봇 사이트는, 양아치가 전술적 미디어 개념을 이론적으로 접하기 전부터 이미 체험으로 느끼고 실천하고 있었음을 가리킨다.

〈양아치 조합〉
www.yangachiguild.com 일주아트하우스 2002

800원대였던 환율이 2200원대로 오르자 1999년 초반 무렵 그는 귀국한다. 이 시기 양아치는 생활을 위해 세운상가 필립스 도매상에서 웹마스터로 일하며 상품을 발주하고 온라인 쇼핑몰에 업로드하는 일을 한다. 이때의 경험이 후에 미술과 상품, 유통의 문제를 짚은 첫 작업〈양아치 조합〉(2002)으로 이어지니, 실제 시장에서 상품의 유통 논리를 경험한 것은 유통망의 구조를 파악하고 상품과 담론의 관계를 인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7 양아치가 세운상가에서 일하던 시절은 한국미술이 동시대 미술로 발돋움하는 부흥기였다. 1998년 암사동 쌈지스페이스 레지던시가 개관하고, 1999년 1세대 대안공간의 대표 주자인 대안공간 루프, 프로젝트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대안공간 풀이 연이어 설립되며, 환율위기로 귀국한 유학생 출신 작가들이 서구에서 보고 들은 새로운 동향을 마음껏 발산하던 시기, 양아치는 퇴근 후 인사동에서 젊은 작가들의 역동적 전시를 보며 미술을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다. 첫 작업이자 전시인 〈양아치 조합〉은 2001년 일주아트하우스의 신진작가지원 공모에 당선되면서 이루어진다. 양아치와 일주아트하우스의 인연은 단순하지 않다. 당시 일주아트하우스는 공공미술 1세대인 이섭과 박삼철이 프로그램 기획과 운영에 관여하고 있었고8, 그 영향으로 미디어가 공공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미디어아트·디지털영상 분야의 제작 및 창작 발표 여건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된 이 프로그램은 선정 작가에게 스튜디오의 장비 및 시설을 1년간 무료로 대여했고, 기술워크숍에 참여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아카이브에 등록된 실험영화·비디오·다큐멘터리 영상도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었다.9 기술교육과 실습, 사례 연구, 전시가 종합적으로 이루어지던 환경은 미디어 생태계 성장을 위한 기관의 공적 기여였다. 당시 양아치는 데뷔하지 않아 이력이 전무한 신진작가였지만, 미디어/공공성/웹이라는 기관의 지향에 정확히 부합하는 작가의 선정은 2002년 일주아트하우스에서의 성공적인 데뷔로 이어진다.

양아치의 첫 개인전 《양아치 조합》(2002)은 겉보기에 건조하게 구성된 설치였다. 박스형 전시장의 내외부에 출력물을 붙이고, 안쪽에 컴퓨터 한 대를 놓은 것이 전부였다. 전시장 외벽에는 쇼핑몰의 이미지를, 내벽에는 해당 페이지의 소스 코드를 붙여 스크린 이미지의 표면과 실체를 드러냈다.10 전시의 실질적인 내용은 컴퓨터로 접속하는 온라인 쇼핑몰이었다. 관객(유저)이 작가가 제작한 상품(이미지, 사운드, 텍스트 등)을 둘러보고 마음에 드는 작업을 구입하면 작가는 해당 상품을 메일로 전송했다. 이때 상품의 카테고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이고 진열된 상품은 ‘Press’, ‘Porno’, ‘School’, ‘GNP’, ‘Art’ 등 사회적 관계가 만들어낸 욕망을 상징한다.11 당시 한국의 사회적 현황이 작업의 소재가 되고 이것이 다시 콘텐츠/작업의 형태로 유통되는 구조는 정보자본주의의 구조를 암시하는 동시에 미술제도의 유통 시스템을 풍자하는 것이기도 했다. “상품들이 관람객의 구매 의사에 따라 이메일로 전송되고, 그 전송량이 〈양아치 조합〉에서 수치화”12되는 원리는 빅데이터 시대 양(量)의 논리를 예견하는 것이기도 하다. 〈양아치 조합〉은 그간 양아치의 모든 경험이 집적된 작업으로, 향후 작업의 방향을 예비한다. IMF 외환위기로 겪은 생활고로 정치사회적 문제가 개인의 구체적 삶과 직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고, 보스턴 생활에서 미디어가 사회에 개입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미디어의 공공적 역할과 관련한 일주아트하우스에서의 체험, 웹마스터로 상품시장경제의 구조를 속속들이 목도한 경험 등이〈양아치 조합〉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특히 〈양아치 조합〉이 당시 한국의 주된 웹아트 동향과 달랐다는 점이 중요하다. 제1회 국제디지털아트페스티벌(1999)에서 대상을 받은 〈설은아닷컴〉(1999)이나 2001년 웨비상을 수상한 장영혜중공업의 작업 등 당시 국내 웹아트는 플래시 기반의 애니메이션 중심이었으나, 양아치는 보스턴에서 프로그래밍을 배우던 초반부터 데이터가 웹아트의 본질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내벽에 소스 코드를 노출시킨 것도 그런 인식의 일환이다. 상품 경제에 대한 관심은 국립현대미술관《젊은 모색》(2004)에 출품한 〈하이퍼마켓〉(2004)에서 이어진다. TV 모니터나 사진으로 구현된 상품 이미지를 스캔하면 3차원으로 띄우는 AR 기술을 활용한 이 작업은 2D와 3D, 올드미디어와 뉴미디어를 결합시키는 동시에 가상 상품을 사고파는 〈양아치 조합〉의 개념을 계승한 것이다. 금융과 자본, 미디어의 화두는 가상화폐를 둘러싼 미디어 풍경을 드러내는 〈신용〉(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2018) 등의 작업으로 꾸준히 이어진다.

다음 해 열린 두 번째 개인전 《전자정부》(인사미술공간, 2003)는 데이터베이스의 문제를 감시와 연결시켰다. 이 작업 역시 양아치의 미술 밖 활동과 관계가 있다. 이 시기 그는 삼성에서 인터넷을 기반으로 운영하던 클럽 중 하나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가 속한 그룹은 기업이 전자정부 패키지를 각 정부기관에 판매하는 모임이었다.13 개인의 사적 정보와 일상이 통치로 직결되는 양상을 지켜보며 그는 충격을 받았고, 이는 전시와 동명인〈전자정부〉(2003) 작업으로 이어진다. 전자정부는 30여 가지의 개인정보를 입력해 전자정부의 주민으로 등록하는 웹작업으로, 처음에는 생일, 이름, 주소, 나이 같은 기본적 개인정보를 요구하지만 뒤로 갈수록 아버지, 어머니의 이름, 직업, 교육 수준을 넘어 종국에는 신용카드 정보까지 제출해야 한다.14 이런 설계는 개인정보라는 데이터가 국가권력과 직결되는 양상을 체감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디지털 파놉티콘의 문제적 상황을 선구적으로 다룬 것이다. 중국, 홍콩, 스페인, 프랑스 등 여러 도시 이미지를 배경으로 개인 정보를 입력하는 상황은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전 세계 어디서도 감시 체제를 벗어날 수 없다는 두려움은 서정적인 음악과 함께 제시되는 아름다운 도시 풍경과 부딪치며 묘한 불안감을 만들어낸다. 이 전시 역시 현상적으로는 건조하게 제시되었다. 플래카드와 폐쇄회로 감시 시스템, 컴퓨터, 스피커 등 필요한 요소만 정확히 설치된 전시는 화려한 시각 효과 위주의 당시 웹아트 양상에 대한 반발로 표면 아래 내재된 체제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감시라는 키워드는 이후 양아치의 중요한 주제가 된다. 가깝게는 사비나미술관 뒤편 CCTV를 해킹한 〈Surveillance Drama-Purpose of Love〉(쌈지스페이스, 2007), 멀게는 남한과 북한 사이 가상의 공간(미들 코리아)을 상정해 국가 시스템에 문제를 제기하는 ‘미들 코리아’(2008~2009) 연작, 설치된 장소의 CCTV 이미지를 활용해 감시와 역감시의 시선을 동시에 보여주는 〈밝은 비둘기 현숙씨〉(2010~2011) 연작을 꼽을 수 있다. 이들 작업에서 감시는 관람 모드로 바뀌며 어디서나 편재하는 감시의 현실을 폭로한다.

위 〈전자정부〉 2003
아래 〈하이퍼마켓〉 미디어 설치 2004

2000년대 초 양아치는 미술계에서 활동하는 가운데 미디어 활동가로도 활약한다. 보스턴에서 1G 인터넷 기반으로 정치적 집결과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목도한 그는 미디어가 사회를 드러내는 것을 넘어 개입하고 구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진보 네트워크(https://jinbo.net)15, 한국 노동 네트워크(http://www.nodong.net)의 활동가들과 교류하면서, 그는 활동가들의 홈페이지를 만들어주거나 미디어행동주의 관련 글을 기고했다.16 진보 네트워크에서 운영하는 월간네트워커에 2003~2006년 기고한 30여 편의 글이 후자의 예고, 박경주와 함께 이주노동자 인터넷 방송국 홈페이지를 구축한 것이 전자의 사례다. 양아치가 월간네트워커에 기고한 글의 목록을 살펴보면 그가 미디어와 사회, 예술을 어떻게 연결시키려 했는지가 잘 드러난다. 해외 주요 미디어 작가(슈퍼플렉스, 조디, 마크아메리카 등) 및 국내 웹아트 작가(블라인드사운드, 장영혜중공업, 노재운 등)를 대중에게 소개하고, 블린켄라이츠(Blinkenlights), 팩 맨해튼(Pac Manhattan), 링 프로젝트(Ring Project), 리코드닷컴(Re-Code.com)처럼 전술적 미디어 프로젝트의 사례를 통해 시민과 도시, 미디어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밝히며, 나아가 미디어아트 보존의 문제나 블로그 문화와 문화 콘텐츠 자본가의 관계를 통찰하는 기사의 내용은 깊고도 넓다.17 당시 그는 웹사이트를 무료로 개설해주는 진보 네트워크의 오픈소스 운동에 공감해 문화 활동가들과 진보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매개자 역할을 하며 웹 기반의 노동운동을 실천했다.18

미디어 활동가로서의 실천이 미술에 직접 적용된 것이 전술적 미디어 그룹 ‘Parasite-Tactical Media Network’(2004~2006)다. 이 그룹은 2001년 결성된 예술-사회-미디어 연구모임 ‘해킹을 통한 미술행위’가 발전된 형태로, 전지구적 미디어 환경에서 미디어를 통한 사회 개입을 추구했다. 특히 첫 전시인 《Tactical Media Stage》(아트스페이스 휴, 2004)에서 발표한 ‘패러사이트 선언문 1.0’은 그룹의 기치를 명시한 중요한 글이다. 이들은 동시대 미디어 환경이 전지구적 자본주의 속에서 유연성을 극대화하고 있으며, 패러사이트는 신자유주의적 유연성에 저항하기 위해 이 상황을 재전유해 새로운 정치적 유연성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9 미디어는 우리의 사유와 공간, 시간을 재편할 모든 환경이며, 그것에 저항하는 전술은 특별히 정해진 영역이 없고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이들의 주장은, 미디어 영역 밖의 정치는 불가능하고 전술적 미디어는 실천적이고, 실용적이며, 상황에 맞춰 항상 변화할 수 있다는 로빙크와 가르시아의 전술적 미디어 선언문을 떠올리게 한다.20 그룹으로서의 ‘Parasite-Tactical Media Network’는 2004년, 2006년 두 번의 전시까지 양아치 김장언 유비호의 3인으로 활동하다가 2006년 이후에는 양아치 조충연 최태윤 등으로 멤버가 교체된다. 2004년과 2006년 두 번의 전시 후 종료되었지만21, 하지만 이와 별개로 전술적 미디어의 정신은 양아치 작업 전반에 계속 이어진다. 일례로 2005년 아트센터나비의 국제 워크숍 ‘도시적 유희와 위치기반 미디어’에서 진행한 〈핸드폰 방송국〉(2005)은 풍문여고 매점을 둘러싼 학생들의 고충을 전화 인터뷰한 후 학교에 알리자 발생한 해프닝을 다뤘다. 학교는 교육청에 책임을 전가하고 교육청은 학교에 문제를 떠넘기는 상황은 고스란히 블로그에 수록(방송)되었다. 미디어(핸드폰)를 통해 평범한 시민이 사회에서 겪는 갈등에 개입한 〈핸드폰 방송국〉은 전술적 미디어의 전형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다음해 홍익대 운동장에서 진행한 〈Tactical Kettle〉(2006) 또한 제목처럼 미시적인 전술적 실천이다. “전술적 주전자는 일인시위를 위한 것입니다. 무신경한 곳으로 가세요. 사람들의 메시지를 확인하세요. 메시지를 쓰세요. 메시지가 마를 때까지 기다리세요. 01-04 과정을 반복하세요”22로 이루어진 작업 매뉴얼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1인 시위를 위해 쓰였다. 사람들이 세상에 얘기하고 싶은 바를 작가에게 문자로 보내면 작가는 이를 주전자에 담긴 물로 운동장에 글을 쓴다. 여기서도 작가는 문자라는 미디어로 시민과 사회를 연결하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미디어 행동주의 그룹 ‘Parasite-Tactical Media Network’는 양아치를 시작으로
김장언의 합류로 본격화되었고, 이후 조충연, 최태윤, 유비호 등이 활동하였다.
그들의 선언문. 2004년 5월 5일

미디어와 사회를 잇는 실천은 작가의 직접 작업 외에 기획 프로젝트로도 이어진다. 2010년대 중후반 청년 작가들의 작업실 문제와 세운상가 젠트리피케이션 문제가 대두될 무렵, 양아치는 당시 싼 보증금으로 세운상가 일대에 생긴 신생공간(슬로우 슬로우 퀵퀵, 800/40, 300/20, 200/20 등)23과 연대하여 《비둘기 오디오 & 비디오 페스티벌》(2017)을 기획한다. 건물 전체를 작업실이자 극장으로 활용한 축제와도 같은 이 행사는 을지로 일대의 활동가와 해당 지역에 작업실을 지닌 작가, 도시재생사업을 연결시킨 것으로, “지금 여기의 현장에서 접근 가능한 매체로 할 수 있는 일을 한다”24는 전술적 미디어의 방법론에 충실하다. 2019년 홍콩 민주화 시위 현장에서 경찰 위치, 시위 장소, 시위 지지 및 반대 상점을 실시간 앱을 통해 공유하는 미디어 활동을 목격하고 양아치는 미디어가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사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재삼 숙고하며 전술적 미디어의 가치를 되새긴다.25

양아치는 자신의 작업이 “전기 전자가 배제된 미디어아트”이며, “미디어아트는 미디어 아티스트에 의해 실패한다”라는 말을 했다.26 누구보다 프로그래밍에 밝으며 한국의 1세대 웹아티스트의 입에서 나왔다기엔 의아해보이는 이 말은 전술적 미디어의 정의를 생각하면 전혀 모순적이지 않다. 전술적 미디어의 원칙은 유연한 대응, 다양한 연합체와의 협업, 본래의 동기를 잊지 않은 채 광활한 미디어풍경 속 서로 다른 개체들 사이를 이동하는 능력에 기반한다.27 그렇기에 전술이라는 목적에 부합하면 미디어는 인터넷이나 디지털 기반이 아니라도 전혀 무방하다. 전통적인 매체인 조각과 설치가 대거 등장해 양아치를 웹아티스트로 알던 사람들을 당황시켰던 〈미들 코리아〉가 작가 입장에서는 문제가 아닌 것도 이 때문이다.28 남도 북도 아닌 가상의 ‘미들 코리아’라는 공간을 형상화한 이 작업에서 작가는 웹이라는 물리적 가상성에서 대상의 가상성으로 이행했고, 실존하지 않는 대상을 형상화하는 역전의 기법을 사용했다.29 “전기 전자가 배제된 미디어아트”와 “미디어 아트는 미디어 아티스트에 의해 실패한다”는 매체에 발목이 잡히는 작가가 되고 싶지 않다는 자성의 결론이기도 하다.30 하지만 이런 매체의 다변화가 양아치의 전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여러 매체를 활용하지만 여전히 지향과 개념에서 철저히 미디어 작가다. 겉보기에 전형적 조각으로 보이는 〈사르트르, 외사시, 10개의 눈, 사물〉(2020)은 AI의 시대에 인간의 시각이 아닌 객체로서의 사물(thing)의 관점에 대한 기술적 사색의 산물이다. 더욱이 이 작업은 진행형으로, 작가는 궁극적으로 눈이 영사기가 되고 입이 축음기가 되는 미디어-사물 복합체를 꿈꾸고 있다.31 최근 그가 즐겨 사용하는 라이다 스캐닝 또한 시점의 문제와 결부된다. 한 번의 스캔에 최소 10만개에서 최대 1억개까지 점군을 형성하는 이 기술은, 각 점을 중심으로 회전시킬 경우 매번 다른 시점을 형성할 수 있다.32 이는 마치 라깡의 고등어 통조림처럼 전통적 시각체제를 뒤집어 피사체가 시점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건물 내부를 라이더로 스캔하면 내부를 통해 외부가 드러낸다. 내부가 외부의 외피를 결정하는 원리는 소스 코드가 디지털 이미지의 표면을 형성하는 이치와 상통한다. 이는 최근 작가가 생각하는 서버 박물관 개념과도 연결된다. 자신의 웹 작업을 보관할 아카이브이자 서버를 땅을 1평 사서 물리적으로 구축하려는 이 발상은 비물질 공간인 웹을 시간이 흐르는 장소로 보는 작가의 생각을 실체화하려는 계획이다. 양아치는 미디어의 표면에 매혹되는 것이 아니라 늘 이면의 원리를 바라보았다. 미디어를 통한 구조의 재배치는 사회 개혁이 되기도 하고, 발상의 전환이 되기도 하며, 새로운 미술을 만들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양아치의 작업이 기본 원리나 구조를 주제로 삼는 메타비평 같다고 평한 안규철의 지적은 핵심을 관통한다.33 양아치가 관심을 둔 것은 언제나 현상의 본질, 즉 데이터였고, 그것들이 맺는 관계(네트워크)와 이로 인해 형성되는 구조(시스템)였다. 그런 점에서 그는 한국 미디어아트사에서 꽤나 독특하고도 중요한 자리를 점유하는 작가가 아닐 수 없다.


1 이광석 『뉴아트행동주의: 포스트미디어, 횡단하는 문화실천』안그라픽스 2015 p.37
2 Geert Lovink “The ABC of Tactical Media” Nettime mailing list archives 1997 (https://www.nettime.org/Lists-Archives/nettime-l-9705/msg00096.html), David Garcia “The DEF of Tactical Media” Nettime mailing list archives 1999 (https://www.nettime.org/Lists-Archives/nettime-l-9902/msg00104.html)
3 위의 글
4 위의 글
5 한국 역시 예외는 아니다. 『월간미술』 목차를 살펴보면, 1996년부터 간간이 인터넷, 디지털에 대한 기사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고, 2000년대 초가 되면 디지털 관련 연재 기사가 거의 매달 실린다. 2000년 2월호부터 2001년 12월호까지 16회에 거쳐 연재된 우효기의 ‘디지털월드’ 시리즈, 2002년 1월부터 2002년 12월까지 9회에 걸쳐 연재된 ‘미술 속의 디지털’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이를 통해 한국 미술계에서 디지털에 대한 관심이 1990년대 말에서 시작해 2000~ 2002년에 정점을 이루고 이후 잦아들었음을 알 수 있다. 1990년대 말의 디지털 관련 기사는 다음과 같다. 이선아 「인터넷상의 미술, 어디 까지 왔나」 『월간미술』 1996년 9월호, 안인기 「컴퓨터 아트, 어디까지 왔나」 『월간미술』 1996년 12월호, 「특별기획: 한국의 디지털 아트」 『월간미술』 1999년 8월호 6 양아치 작가 인터뷰 2025. 3. 12, 양아치 「양아치의 다섯 가지 결정적인 순간」 『리:스펙트, 한국 미디어아트 2000년 이후』북코리아 2024 p.299
7 양아치 작가 인터뷰 2025. 12. 17
8 일주아트하우스의 프로그램 기획 및 운영은 (주) 아트컨설팅서울에서 담당했고, 박삼철과 이섭은 그 주역이다. 손세희 「1. 2000년대 이후 한국미디어아트 플랫폼 이야기」 『월간미술』 2020년 11월호 p.157
9 「2004년 일주아트하우스 지원작가 모집」 『월간미술』 2003년 12월호 p.187
10 양아치 작가 인터뷰 2025. 12. 17
11 최금수 「양아치展」 『월간미술』 2002년 3월호 p.124
12 위의 글
13 양아치 「양아치의 다섯 가지 결정적인 순간」 p.301
14 이 작업은 《웹레트로》(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2019)에서 복구되어 현재도 가동된다 www.egovernment.or.kr
15 현재는 디지털정의네트워크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6 양아치 작가 인터뷰 2025. 12. 17
17 디지털정의네트워크(https://act.jinbo.net)에 ‘양아치’ 키워드로 검색하면 해당 기고문을 읽어볼 수 있다
18 양아치 「양아치의 다섯 가지 결정적인 순간」 p.300
19 김장언 「Parasite Manifesto 1.0」 2004 https://neolook.com/archives/20040505b
20 Geert Lovink 앞의 글, David Garcia 앞의 글
21 아트스페이스 휴에서 열린 두 번째 전시는 남한 사회 인터페이스의 소프트웨어에 플러그 인/아웃할 수 있는 서비스 프로그램으로 작동 가능한 작업을 모은 것으로, 그룹의 멤버 외에 차혜림, 최태윤 등 외부 작가도 참여했다. https://neolook.com/archives/20060824b
22 http://www.yangachi.org/blog/archives/000237.html
23 공간 이름의 숫자는 보증금/월세를 뜻한다
24 Geert Lovink 앞의 글
25 양아치 「양아치의 다섯 가지 결정적인 순간」 pp.313~315
26 위의 글 p.303, 307
27 Geert Lovink 앞의 글
28 오해를 피하기 위해 첨언하면 실물과 비물질작업을 병행하는 양아치의 지향은 포스트인터넷이라 불리는 일련의 흐름과는 무관하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이미 미디어가 깊이 침투되어 있다는 인식은 둘 모두에게 공통되지만, 처음부터 예술로 인정받고자 했으며 미술운동으로 시작한 포스트인터넷은 미디어행동주의에 기반해 미디어와 사회의 연결을 중시하는 양아치의 지향과는 상충하는 지점이 있다
29 실물 작업으로의 전환은 스마트폰이 막 도입되던 시대 특수성도 무관하지 않다. 모바일 3G 시대는 과거와 달리 소스가 폐쇄되어 있어서 1G나 2G로 하던 방식으로 개입이 어려웠다
30 양아치 작가 인터뷰 2025.12.17
31 위의 인터뷰
32 양아치 「양아치의 다섯 가지 결정적인 순간」 p.318
33 안규철 「안규철+양아치, 내러티브가 시각화될 때」 『예술가들의 대화』 임영주, 김지연 엮음 아트북스 2010

2026년 1월호 (VOL.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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