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귀성과 변신술:
소용돌이,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카프카
안진국 미술비평
2월 특집기사 ③

2025년 월간미술대상 비평부분 수상자 안진국은 김범의 작업 세계를 ‘재귀성’, ‘보아뱀’, ‘변신술’이라는 세 키워드를 중심으로 읽어낸다. 그는 김범 작업에서 나타나는 재귀성이 처음과 끝이 미세하게 이탈하며 수직적으로 증폭하는 입체적이고 창발적인 구조임을 밝혀낸다. ‘보아뱀’을 통해 안과 밖의 인식 문제를 드러내고, 이어지는 김범식 ‘변신술’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소용돌이를 만드는지 추적한다.
예술은 창(窓)이며, 거울이다. 내 안을 벗어나 세계로 향하는 장(場)인 동시에 모방(미메시스)의 언어이며 자신을 비추는 자기 반영적 추동(推動)이다. 특히 사각형 양식이 통상적인 회화는 창과 거울 은유에 들어맞는다. 알베르티는 『회화론』(1435)에서 회화를 ‘열린 창’으로 은유했고, 파노프스키는 『서구미술의 르네상스와 르네상스들(Renaissance and Renascences in Western Art)』(1960)에서 “객관적으로 2차원인 회화 표면은 […] 우리가 밖을 바라보는 창문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플라톤은 예술가의 이미지를 사물의 현상을 반사하는 거울(모방)에 비유했다. 미술에서 ‘재현(representation)’은 원형의 거울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거울은 개인의 정체성과 자기 인식의 출현과도 관계 깊다. 자크 라캉은 어린아이가 거울 속 반사를 통해 자신의 주체성과 어머니로부터의 분리성을 자각한다고 말했다. 예술 작품에는 예술가의 정체성과 인식이 투사된다. 이런 면에서 예술을 거울로도 볼 수 있다.
김범의 작업은 창이라기보다는 거울에 가깝다. 창으로서 예술이 감탄의 응시를 자아낸다면, 거울로서 예술은 응시를 되돌려준다. 응시하는 자를 응시하는 구조를 만든다. 김범의 예술은 미지를 향해 선형적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의문을 불러일으켜 그 시선을 관람자 자신에게 향하게 함으로써 의미를 증폭시킨다. 작가는 미술의 중핵인 ‘재현(거울상)’을 중층화하며, 재현의 재귀성을 활용함으로써 다성적이고 개별화된 ‘이미저리(imagery)’를 경험하게 한다. 나는 확인과 이해의 반복, 즉 재귀성이 김범 작업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소용돌이: 재귀성
‘재귀’ 운동은 원형이 아니라 나선형이다.1 그래서 재귀성은 단순 반복이 아니라 창발성의 토대가 된다. 김범 작업은 기본적으로 외적 재귀와 내적 재귀 운동 사이에 존재한다. 그의 작품은 외부 현상에 대한 미메시스, 즉 외부 현상의 거울상이라 할 수 있다. 작품을 보는 순간 우리는 현상을 떠올리게 된다(현상으로 되돌아간다). 이것이 외적 재귀다. 하지만 미메시스는 원본일 수 없으므로, 원본과의 차이가 존재한다. 그 사이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원본 과의 차이는 새로운 좌표(다른 현상)로 돌아오는 재귀 운동을 일으키는데, 그 차이가 클수록 다른 의미를 불러온다. 김범은 자신의 꼬리를 문 우로보로스와 같은 재귀성을 미메시스에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 낸다. 예를 들어, 개먹이 과자로 개의 이미지를 만들거나(〈개 먹이 개〉(1993)), 닭의 형상을 달걀 껍데기(〈계란껍질 통닭〉(1993)) 혹은 닭장의 철조망으로 만든다(〈철망 통닭 #1〉(1993)). 자기 몸을 뜯어 먹고 있는 개 이미지와 뜯긴 캔버스를 표현하거나(〈무제〉(1991)), 말이 말을 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말 타는 말(머이브리지에 의한)〉(2008)), 도망가는 개의 이미지를 캔버스에 꿰매어 붙잡아 놓기도 한다(〈무제〉(1993)). 캔버스에 곡식으로 지시문을 쓴 작품은 새들이 곡식을 쪼아 먹는 것을 방치함으로써 결국 지시문 상실을 부추긴다(〈허수아비〉(1995)). 이러한 일련의 작업은 부조리를 통해 원형 과 미메시스의 관계 속, 그 사이를 왕복하는 재귀 운동을 일으킨다.
내적 재귀는 작품이 응시자(관람자)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되면서 작동한다. 라캉이 말했듯 거울은 자기 인식의 출현과 밀접한데, 김범의 작품을 응시하는 순간 우리는 곧 자신의 심상(mental imagery)을 응시하게 된다. 우리가 보는 것은 그의 작품이지만, 그 응시가 도달하는 지점은 작품에 부딪혀 되돌아온 감정이 각자의 경험/기억과 결합해 생성한 ‘이미저리’다. 응시는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심상은 관람자마다 다르므로 김범 작업의 이미지는 개별화된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텍스트 작품에서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지시(instruction)’ 회화인 〈풍경 #1〉(1995)2을 통해 각자의 풍경을, 〈파란 그림〉(1995)3을 통해 각자의 파란색으로 칠해진 그림을 떠올리게 된다. ‘글’이라는 형식을 전면에 내세운 아티스트 북 『변신술』(1996),『고향』(1998), 『눈치』(2009)에서는 문학 작품이 그러하듯 글을 읽으며 각자가 자신만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주목할 부분은 그의 작품에서 내적 재귀가 소용돌이치듯 여러 번 진행된다는 점이다. 텍스트 작업은 글을 읽는 시간 속에서 ‘읽기(작품)-이해(관람자)’가 왕복을 거듭한다. 시각적 형상을 지닌 작업도 마찬가지다. 김범 작품은 처음 볼 때, 그 의미 파악이 쉽지 않고, 곱씹을 때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곱씹는 행위 자체가 곧 ‘재귀’ 아닌가). 의미에 이르기까지의 지연 속에서 관람자는 확인과 이해의 재조정 사이를 수차례 왕복한다. 예를 들어 소묘를 공간에 입체적으로 설치한 〈두려움 없는 두려움〉(1991)은 구멍 난 벽(이미지)과 구멍 나지 않은 벽(실제), 구멍 난 벽의 잔해들(이미지)과 종잇조각들(실제)의 중첩을 보여줌으로써 관람자는 실제와 이미지,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끊임없이 왕복하게 한다. 바닥에 놓인 〈서 있는 개 #2〉(1994)는 개의 네 발바닥 형태를 잘라 다시 꿰매어 움푹 꺼지게 해놓았는데, 관람자는 이 상황을 거듭 확인하며 개의 무게와 중력, 개의 존재와 사라짐 등 개에 관한 사유를 확장해 나간다.
이러한 재귀성은 김범 작업 전반에서 작동하는 강력한 힘이다. ‘현상(원형)-이미지/텍스트(작품)-심상(관람자)’은 외부와 내부의 중층적 재귀를 일으키며 의미를 발생, 증폭시키고, 동시에 개별화한다. 재귀는 되돌아옴의 반복으로 나선형적 흐름을 형성하며 사유의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소용돌이는 정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의 축과 흐름의 힘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 따라서 작업에 대한 이해는 매 순간 갱신된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겉모양과 내부
김범 작업을 재차 확인하는 과정(재귀성)을 통해 우리는 관습적 사고를 경계하게 된다. 그의 작업은 대부분 관습적 사고의 전환을 끌어내는데, 특히 검은색 실루엣 작품들4과 ‘청사진과 조감도’ 연작5, 〈무제(제조 #1 내부/외부)〉(2002), 〈라디오 모양의 다리미, 다리미 모양의 주전자, 주전자 모양의 라디오〉(2002), 로르샤흐 잉크 반점 검사를 떠오르게 하는 ‘무제(이것을 보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연작(2006) 등은 이를 명증한다. 이러한 작품들은 『어린왕자』에 등장하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서사와 맞닿아 있다.
익히 알려졌듯 『어린왕자』에서 보아뱀 서사는 보이는 겉모양과 보이지 않는 내부의 불일치, 관습적 사고로 굳어진 어른과 순수한 어린왕자의 시각과 이해의 차이를 드러낸다. 즉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 관습에 젖어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충고가 스며 있다. 이러한 불일치, 차이의 서사는 재귀성 구조를 지닌 김범 작업의 전반적 기조인데, 앞서 예로 들었던 작품들은 이 보아뱀 서사와 놀랄 만큼 높은 싱크로율을 보인다. 건축물이나 구조물, 산 능선처럼 보이는 검은 실루엣은 제목과 함께 다시 볼 때 실루엣 내부 이미지가 떠오르고(검은색 실루엣 작업), 구름이나 일반 건물, 탑으로 보이던 조감도는 그 내부 설계도와 대조했을 때 다른 의미를 인식하게 되고(‘청사진과 조감도’ 연작, 〈무제(제조 #1 내부/외부)〉), 라디오, 다리미, 주전자의 형상과 그 쓰임이 어긋날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라디오 모양의 다리미, 다리미 모양의 주전자, 주전자 모양의 라디오〉). 그는 로르샤흐 검사6처럼 통닭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얼룩 이미지를 제시함으로써 마치 다른 가능성이 있는 듯 관람자를 망설이게 한다(‘무제(이것을 보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연작). 이러한 작품들은 겉모양에 의존해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관습적 사고에 균열을 내며, 사유의 유연성을 요청한다.
카프카: 변신술
결국 김범의 작업은 변신으로 귀결된다. 그의 작업을 거듭 확인하고 이해를 재조정하는 것(재귀성)은 작업이 관습적 둘레를 벗어나 이미 변신해 있거나 변신 중이기 때문이다. 김범은『변신술』을 통해 ‘변신’이 작업의 핵심임을 명확히 한다. 이 작업이 아니더라도 그의 작업 전반에는 변신의 기조가 스며 있다. 이는 보아뱀 서사와 일치하는 작품들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열쇠나 신체가 산 능선이나 구조물로 변신해 있고, 조감도와는 다른, 내부(설계도)를 통해 건 축물의 변신이 드러나며, 라디오나 다리미, 주전자의 다른 쓰임새를 통해 사물의 변신을 보여 준다. 로르샤흐 잉크 반점 검사를 연상시키는 작업은 고착과 유동성 사이에서 변신의 예감을 심어 준다.
변신이라 하면 카프카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김범의 변신은 카프카와 다르다. 인간이 동식물이나 다른 개체로 변신할 뿐만 아니라, 사물과 동물이 다른 존재로 변신하거나 의인화된다. 인간 변신의 초기 징후는 자신의 네 발을 내려다보는 것을 개의 시점(〈서 있는 개#1〉, 1992)과 소의 시점(〈무제〉(1995))으로 그린 그림에서 읽힌다. 이 그림은 개 혹은 소가 아니고서는 볼 수 없는 시점이라는 점에서 변신의 전조라 할 수 있다. 이후 사람이 나무, 풀, 바위, 사다리, 에어컨 등으로 변신할 수 있는 지침서인 『변신술』로 인간의 변신에 관한 서사를 가시화한다. 동물의 속성을 바꿔 권력의 도치를 드러내는 변신도 있다. 소가 사자를 뜯어 먹는 〈무제〉(1995), 영양이 치타를 추적하는 〈볼거리〉(2010)가 그 예이다. 가장 역동적인 변신은 동물과 사물의 의인화다. ‘진화’ 연작(1993~1994)에는 토기가 인간으로 진화하는 과정(〈계통도〉(1993)), 성냥개비 하나가 승려로 진화하는 과정(〈무제〉(1994)), 다리미가 생물 같은 신체 기관을 지닌 듯 그린 해부도(〈다리미의 신체 기관〉(1994)) 등을 작가는 선보였다. 그의 작업에서 망치는 임신하고(〈임신한 망치(1995)), 칼은 뇌를 가지고 있으며(〈접는 칼〉(1996)), 헤어드라이어와 시계, 라디오 같은 사물들이 생명을 잃고 부패한다(〈생명을 잃은 사물들〉(2008)). 통닭은 기도하고(〈기도하는 통닭〉(1994)) 사람처럼 잠들며(〈잠자는 통닭(브로콜리를 곁들인)〉(2006)), 말이 사람처럼 말을 탄다(〈말 타는 말(머이브리지에 의한)〉). ‘교육된 사물들’ 연작(2010)7에서는 사물을 사람처럼 가르친다. 김범의 세계에서는 인간, 사물, 동물이 변신한다.
작은 바람의 소용돌이가 커지면 마침내 태풍이 된다. 김범은 작품과 우리 사이에 작은 사유의 소용돌이를 만든다. 그 소용돌이는 우리의 내면에서 증폭되어 때로 태풍처럼 거대하고 강력해진다.
1 ‘재귀’는 ‘본래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옴’을 의미한다. 그런데 본래 있던 곳은 예전의 그곳이 아니다. 2차원적으로는 원운동처럼 보여 동일한 곳에 다시 돌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 축을 더한 3차원에서는 재귀가 나선 운동임을 알 수 있다. 즉 X와 Y축 좌표는 동일해도, 시간 축인 Z축 좌표는 다르므로 동일한
좌표는 아니다. 쉽게 말해서 어릴 적 고향을 떠나 성년이 되어 다시 고향에 돌아왔을 때(재귀했을 때), 그 고향은 어릴 적 고향과는 다르다.
2 “이 푸른 하늘을 보시오, 이 나무들을 잘 보시오, 여기 흐르는 강을 보시오.”라는 세 개의 지시문만으로 구성된 캔버스 작품.
3 “이 캔버스를 파란 물감으로 부분마다 나누어 칠해라”라는 지시문이 있고, 배경에 “파란 차”, “파란 가방”, “파란 하늘” 등 ‘파란’이 수식하는 명사들이 작은 글씨로 곳곳에 적힌 작품
4 〈승마〉(1995), 〈서 있는 여인〉 연작(1999), 〈열쇠〉 연작(2000 2001), 〈누드 #2〉(2001),〈일광욕하는 여인〉(2007),〈무제(책상에서 일하는 남자)〉연작(2016) 등
5 〈환각성 흉악범과 공격성 맹수의 합치건물 설계안〉(2002),〈첩보선〉(2004), 〈폭군을 위한 안전가옥 설계안〉(2009),〈전도(顚倒) 학교 설계안〉(2009),〈단절된 강저터널 개요도〉(2016) 등
6 스위스 정신과 의사 헤르만 로르샤흐가 1921년 개발한 성격검사. 형태가 불분명한 좌우 대칭 이미지를 보고 연상되는 것을 말하게 하여 피험자의 심리상태를 확인하는 방법이다. 편집자 주
7 〈정지용의 시를 배운 돌〉(2010),〈자신이 새라고 배운 돌〉(2010),〈자신이 도구에 불과하다고 배우는 사물들〉(2010), 〈바다가 없다고 배운 배〉(2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