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은 Seeun Kim

김세은의 ‘핏 스탑’

노재민 기자

Up-and-Coming Artists

1989년생. 이화여대 서양화 학사 및 영국왕립예술대 회화 석사. 뮤지엄헤드, 두산 갤러리, 금호미술관, 원앤제이갤러리, 말보로갤러리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고 일민미술관, 국제갤러리, 휘슬, 학고재, 파이프갤러리, 미메미스미술관, 서울시립 미술관, 아트선재센터, 하이트컬렉션, 커먼센터 등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했다. 2020년 금호영아티스트 및 2017년 더발레리비스통프라이즈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2023년 뉴욕 레지던시 ISCP 프로그램, 2022년 서울시립미술관 난지창작스튜디오, 2021년 명륜동 작업실 캔파운데이션,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등 국내외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입주 작가로 참여한 바 있다.


김세은은 신도시에서 성장하며, 도시가 효율과 경제성을 우선순위로 공간을 다루는 방식과 그 결과로 생성되고 발생한 공간을 일상적으로 목격해 왔다. 그가 반복적으로 ‘자투리 공간’을 그려온 이유는 도시를 비판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이해되지 않는 공간과 관계 맺기 위해서였다. 흔히 지나치지만 설명되지 않는 구조물들, 터널 옆에 부속처럼 형성된 자리들, 계획의 논리로 존재하지만 감각적으로는 납득되지 않는 풍경들— 이러한 의문들이 회화를 요구했다.

작업의 시작은 이미지를 다시 찾는 순간이다. 다만 여기서 다시 찾는다는 것은 단순한 재현을 뜻하지 않는다. 도시에서 포착한 장면을 사진,드로잉, 메모 등으로 축적한 뒤, 그중 어떤 장면이 작가 자신의 내부에 쌓인 감각과 맞아떨어지는 순간에 비로소 사이트(site)가 결정된다. 그러나 그 사이트는 곧바로 화면의 설계로 번역되지 않는다. 오히려 김세은은 그 사이에 유예를 둔다. 형태를 성급히 고정하기보다, 어떤 정보는 밀어내고 어떤 결정은 늦춘 채, 재료가 섞이고 마르고 스며드는 시간 속에 자신을 머물게 한다. 그에게 회화는 즉각적인 응답이 아니라 지연(遲延)의 장치이며, 이 지연 속에서 소통을 위한 정보의 양이 조율된다. 이때 조율의 기준은 형식의 선택이 아니라, 전달하려는 정보의 성격에 가깝다. 김세은은 구상과 추상을 구분하거나 양자택일의 문제로 다루지 않는다. 그는 이를 정보 제공의 차이로 이해한다. 관객에게 특정한 출처—계획도, 청사진, 구조적 상황—가 읽히기를 원할 때는 보다 설명적인 형태를 택하고, 반대로 감각적 관계와 구조의 긴장을 전면화하고자 할 때는 추상화된 화면을 선택한다.

《형상 회로: 동아미술제와 그 시대》일민미술관 전시 전경 2025
사진: 스튜디오 오실로스코프  제공: 일민미술관

그의 그림은 주변 환경을 신체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이며,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는 언제나 몸의 퍼포먼스가 포함된다. 실제로 김세은의 작업에서 신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대상과의 거리를 끊임없이 조절하며 시선과 몸의 위치, 자세를 훈련한다. 대형 캔버스를 다룰 때에도 규격화된 호수에 의존하지 않고, 전시 공간의 규모와 운송 조건, 문과 엘리베이터의 크기까지 고려해 물리적 치수를 먼저 설정한다. 그 앞에서 팔과 상체의 움직임, 스트로크의 속도와 궤적, 때로는 사다리 위에서의 행위까지 모두 화면에 흔적으로 남는다.

또 다른 한편에는 ‘인지되는 몸’이 있다. 코로나 시기, 이동과 접촉이 제한되고 경험이 화면 너머로 간접화되던 상황 속에서 그는 신체 내부—엑스레이 이미지, 해부학적 구조, 인체 모형—를 하나의 메타포로 끌어온다. 정보는 넘치지만 내부로는 결코 들어갈 수 없는 인간의 몸은, 접근할 수 없으면서도 끝없이 매개되는 플랫폼 공간의 조건과 닮아있다. 이때 신체는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경험 방식의 전환을 드러내는 장치로 작동한다.

《Next Painting: As We Are》국제갤러리 전시 전경 2025
사진: 안천호 제공: 국제갤러리

신체 감각은 김세은이 굴과 터널을 다루는 방식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뮤지엄헤드 개인전 《타면 나타나는 굴 Pit Calls Wall》(2025)에서 굴과 터널은 단순한 이동 경로나 도시의 이면을 상징하는 배경이 아니라, 지각의 불안정성이 발생하는 장치로 제시된다. 터널은 시야가 한 점으로 수렴하는 공간이며, 원경과 근경의 감각이 뒤섞이고 위치와 시간의 인식이 흐려지는 통로다. 김세은이 묻는 것은 이러한 구조가 사람들의 신체 움직임과 위치 감각, 더 나아가 시각 언어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하는 문제다. 그의 회화는 도시 정책이나 개발 계획을 설명하지 않지만, 변화가 지나치게 빠르게 진행되어 개인의 감각이 관계를 맺기 전에 덮여버리는 상태를 집요하게 붙잡는다.

이쯤에서 그가 작업해 온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시선을 돌려볼 필요가 있다. 각 프레임은 흔히 회화의 제작 과정을 기록한 것으로 오해되기 쉽지만, 김세은은 이를 과정이 아니라 각각이 완결된 장면들의 연쇄로 이해한다. 하나의 화면 위에서 장면이 완결되고 덮이며, 다시 다른 장면이 얹히는 방식은 도시의 계획과 개발이 공간을 반복적으로 덮어버리는 시간의 단면과 리듬을 연상시킨다. 그는 변화의 속도를 시간 자체로 감각하게 만들기 위해 밝기와 속도를 조절하는데, 이때 영상은 회화를 보조하는 매체가 아니라 동일한 질문을 다른 시간성으로 밀어붙이는 또 하나의 회화적 언어로 작용한다.

〈타면 나타나는 굴 Pit Calls Wall〉 알루미늄 판재에 외부용 페인트, 스프레이, 마커 가변 크기 2025
《타면 
나타나는 굴 Pit Calls Wall》뮤지엄헤드 전시 전경 2025
사진: 이의록 제공: 작가

작업은 전시 공간에서 하나의 경험으로 완결된다. 그는 작품을 단순히 걸어두는 데 그치지 않고, 관람자의 신체적 경험을 적극적으로 설계한다. 직접 제작한 낮은 벤치, 작품 사이의 간격, 바닥의 재질과 반사, 조명의 색과 온도까지—이 모든 요소는 관람자가 서서 평균적인 시점으로만 그림을 읽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다. 이는 작가가 작업실에서 결정을 내렸던 높이와 거리, 몸의 상태를 관람자와 공유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핏 스탑(Pit Stop)’은 2022년 두산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제목으로, 카레이싱에서 정비를 위해 잠시 정차하는 시간과 공간을 의미한다. 이는 잠깐의 멈춤이자 다시 발진하기 위한 자가 진단의 순간이다. 김세은이 도시의 자투리 공간을 응시하는 방식은 바로 이 핏 스탑의 시간과 닮아있다. 변화는 멈추지 않고, 계획은 끊임없이 갱신되며, 개인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채 덮인다. 그럼에도 그는 유예된 결정을 통해 한 장면을 더 오래 바라보고 이해하려 한다. 김세은의 회화는 도시의 틈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속도 속에서 감각이 다시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일—지각을 위한 하나의 ‘핏 스탑’을 만들어내는 작업으로 보인다.

2026년 2월호 (VOL.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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