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공주에서 생활하며 작업하는 작가 임동식은 우리 화단에서 아주 각별한 존재다. 일찍이 1980년대부터 야외 현장에서 자연에 반응하거나 교감하는 설치와 퍼포먼스 작업을 하면서 “서구 모더니즘의 형식주의에 동아시아의 사유체계를 투영시킨 급진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10년간의 독일 유학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온 임동식은 보다 진지하게 자신이 살아온, 그리고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곱씹으며 회화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한국 미술계의 어떤 범주에 속하거나 얽매이지 않은 채 묵묵히 홀로 자신의 인생관과 예술관을 탐구하는 수행의 길을 가고 있다. 작가 임동식의 과거와 현재의 여정을 살펴본다.
뫼비우스의 띠 같은 화가
이윤희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임동식은 1945년생, 올해 일흔이 되는 화가로, 그 자신의 현재를 ‘후기 사춘기’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하고 학습의 과정을 거치던 ‘초기 사춘기’를 지나, 1970년대 중반부터 사변적인 미술에 몰두하여 주로 야외에서 개념적인 작업을 하거나 각종 프로젝트를 조직하던 ‘중기 사춘기’를 거쳐, 2000년대 들어 다시 붓을 잡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후기 사춘기’를 지나고 있다는 것이다. 1
임동식의 자신의 삶에 대한 이러한 의미 부여에 한편 웃음이 나면서도 다른 한편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5년 전 임동식을 포함한 다섯 작가의 그룹전(<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대전시립미술관, 2009)을 기획하면서 공주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수시로 드나들 때의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다시 붓을 들고 본격적으로 유화를 그려 온 수년간 화면 속의 여러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제야 가속도가 붙은 것 같은 기분을 이야기하다가 그는 “앞으로도 이렇게 나가면 몇 년 후에는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이 두고두고 나의 마음에 남았다. (이제 세상을 조금 알 것 같은 나머지, 남은 인생 동안 더 새로운 것을 만날 가능성이 없이 이대로 살아야 할 것 같은, 어딘지 지치고 조로(早老)했던 당시의 나에게 이 말의 울림은 상당히 컸다) 그가 자신의 삶의 여정을 지속적인 사춘기로 말하는 것은, 작업을 통한 스스로의 변화 가능성을 늘 열어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와 비슷한 연배 작가들의 작품에서, 혹은 그보다 훨씬 젊은 작가들의 경우에도, 이유가 무엇이든(미술시장의 요구이든, 안정된 생활의 반영이든, 혹은 포기이든) ‘한때’ 훌륭했던 자신의 작품에 대한 복제와 반복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을 숱하게 보아왔기에, 또한 미술사에 남은 수많은 화가의 작품이 인생을 따라 그리는 하향곡선을 보아왔기에, 이대로 시간이 더 가면 훌륭한 화가가 될 것 같다는, 노년으로 접어든 화가의 발언은, 충분히 놀라운 것이었다.
그의 말이 단지 소박한 겸양이 아닌 것은, 그가 당시에 펼쳐놓던 작품들의 양상이 스스로 증명했다. 과거에 야외 현장에서 행했던 퍼포먼스를 회고하여 캔버스에 옮기는 작업들, 미술과는 전혀 관계없는 동네 친구 우평남 씨가 소개하는 좋은 풍경들을 그리는 <친구가 권유한 풍경> 연작, 자신의 과거 기억을 더듬으며 지금은 사라진 금강변의 지난 풍경을 그리는 작업들, 게다가 새로이 막 시작했던, 동양 비단문화의 흥망성쇠를 통해 동서양의 문화 접변 현상에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대하 서사 <비단장사 왕서방> 연작까지, 그는 당시 새로운 작품들을 무한 생성 중이었다.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떠오르는 새로운 연작의 아이디어와, 특히 비단장사 왕서방의 인생 과정에 중간 중간 개입해 들어가는 세부적인 방계의 이야기들까지, 그가 현재 하고 있는 작품들과 향후 계획하는 작품들이 모두 실현되려면 앞으로 10년 넘어 20년은 족히 걸릴 것으로 보였다. 나는 당시 임동식이, 만물이 색을 입으며 움트는 봄날과 같은 생성의 에너지를 보유하고 있다고 느꼈다. 말하자면 이것이 사춘기와 같은 것이 아니면 무엇이랴.
그로부터 5년 후, 2014년 6월의 임동식은 과거에 진행하던 연작에 추가하는 작품들뿐 아니라, 어김없이 처음 보는 새로운 연작의 작품들을 펼쳐놓고 있었다. 작업실의 한 켠에는, 큰 줄기의 서사에 하루가 다르게 작은 이야기들이 끼어들어 언제 마무리 될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던 <비단장사 왕서방> 연작의 마무리 작업이 <도심의 밤에 불빛되어 퍼지다>라는 제목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과거 야외에서 행했던 설치미술과 퍼포먼스를 캔버스에 옮겨 담는 작업 중 새로이 시작된 것으로는, 난생처음 발을 디딘 바닷가인 안면도 꽃지해수욕장에서 커다란 알의 형상들을 해변에 흩어 놓은 자신의 설치작업을 그린 작품(비가 막 내리기 시작했을 때 카메라를 가진 이에게 “나 한 장 찍어줘!”라고 멀리서 손을 흔들며 뛰어오는 임동식 자신의 자화상과 알 형상 설치작품이 그려진 그림)과 故 전국광의 설치작업을 회고하여 그린 작품(안면도의 해변에서 보이는 작은 섬에 수평선을 연장하는 듯한 흰 띠를 두른 전국광의 설치작업. 사진을 필름으로 찍어 인화하던 시절 이 장면을 찍었지만 실패로 돌아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현장을 본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그리고 있다) 등이 시작 단계에 있었다.
다른 한편, 과거 자신에게 풍경을 그리기를 권했던 동네 친구 우평남 씨를 모델로 임동식 자신의 자화상과 더불어 2인 초상을 그린 것으로 시작된 <자연예술가와 화가>의 후속 작품 여러 점, 그가 공주 원골에서 기획했던 ‘예술과 마을’ 프로젝트에서의 여러 면면들이 새로이 그림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또한 새로운 형식의 작품으로, 과거 대학시절부터의 드로잉들을 다시 끄집어내 캔버스의 한쪽 면에 과거 드로잉을 붙이고 다른 쪽 면에 그 드로잉을 재해석하는 100점의 연작 <그 시절을 그리다>를 위해 100점의 과거 드로잉이 선별되어 100개의 캔버스에 차곡차곡 놓여 있었다.
전혀 새로운 내용의 작업으로는 <선생님을 그리다> 연작이 있었는데, 이는 임동식의 고등학교 시절 미술선생님의 일대기에 관한 것이다. 지리선생님과 미술선생님을 겸하던, 어린 임동식에게 끊임없이 스케치를 하라고 권했던, 이미 40년 전에 작고한 과거의 선생님은 살아생전에 자신을 그려달라고 청했었고, 이를 잊지 않은 제자 임동식은 이제 선생님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선생님을 그리다> 시리즈의 하이라이트는, 그림 속에서 상상으로 선생님을 세계여행 시켜 드리는 작품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았던 시절 세계를 돌아다니는 여행가를 무척 부러워했던 선생님을 기억하며, 이를테면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 서 있는 선생님, 에펠탑을 구경하는 선생님의 모습 등을 상상으로 그려낼 예정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들에서 그의 작품을 형성하는 두 개의 큰 축인 서사성과 서정성이 극도로 아름답게 결합될 것 같아서, 완성된 작품을 보기도 전에 생각만으로도 벌써 마음이 움직인다.
<비단장사 왕서방-그림과 모델> 캔버스에 유채 130×162cm 2009
서정적이고 서사적인 완결판
임동식의 작품에서 서정적인 특성은 주로 자연을 대상으로 할 때 두드러져 보인다. 예컨대 계란을 헤드폰처럼 귀에 대고 ‘생명의 음’을 듣는 작업, 꽃봉오리가 활짝 피어나는 과정을 두 손을 오무렸다 폄으로써 모방하는 작업, 소나무 묘목의 가지에 자신의 수염을 매어 식물과 교감을 시도한 작업 등 초기의 퍼포먼스 작업들에서부터, 캔버스에 그린 풍경화들에 이르기까지 자연과 마주했을 때 일어나는 미세한 정조들을 최대한 정밀하게 담아내려는 그의 의도를 볼 수 있다. 그의 풍경화에는 땅 위에 무질서하게 솟아 있는 풀잎 하나, 나무에서 뻗어나가는 잔가지 하나도 아무렇게나 그려지는 법이 없다. 또한 풍경을 바라보는 당시의 마음을 더 가까이 표현하기 위해, 그의 화면은 처음에는 햇살이 비치는 풍경으로 그려졌던 것이 다음 날에는 보슬거리는 비가 내리기를 거듭하고, 눈 덮인 겨울 풍경으로 시작했던 것이 어느덧 봄 풍경으로 마무리되는 일이 허다한 것이다. 화가인 자신이 선택한 풍경이 아니라 자연과 더 친밀하게 살아온 친구의 권유를 받아들여 친구의 눈과 감성으로 본 풍경을 그리는 방식에서도, 자연 앞에서 한없이 자신을 낮추어 가까이 다가가려는 그의 태도를 볼 수 있다. 따라서 그의 풍경이 보여주는 실재감, 박진감은 사물을 사진처럼 리얼하게 그리는 방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자신이 그리는 대상과 최대한 정서적 교감을 하는 태도에서 배어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 임동식은 소년 시절부터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서사적 특성의 그림을 그려왔다. 마치 영화의 스틸 장면들을 엮어놓은 듯한, 혹은 만화처럼 프레임에 담은 그림들과 그것을 설명하는 문장들이 결합되어 있는,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서사적 그림 연작이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초기 사춘기’부터 드러난 이러한 특성은 개념적 작업을 주로 했던 ‘중기 사춘기’에도 이어져 갱지나 자투리 종이들에 그린 수많은 드로잉에 상투를 튼 남자와 한복을 입은 여자, 사랑에 빠진 동네 처녀, 마을을 돌아다니는 엿장수 아이, 혹은 심청이와 심봉사 같은 이야기를 담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캔버스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한 ‘후기 사춘기’의 수많은 풍경화와 인물화들에서도 이러한 특성은 여전히 보이는데, 자신의 과거 경험을 회고하여 그리는 연작은 물론, 단편의 그림들에서도 길든 짧든 완결된 이야기 구조를 볼 수 있다. 예컨대 <고개 숙인 꽃과 마주한 인사>는 수선화 밭을 지나며 한 방향으로 숙여진 꽃들이 모두 자신을 향해 인사를 하는 것처럼 느껴져 자신도 모자를 벗고 꽃들을 향해 머리 숙여 인사했던 과거의 강렬했던 경험의 ‘이야기’가 담긴 것이고, 그저 나무를 그린 풍경처럼 보이는 <친구가 권유한 방흥리 할아버지 고목나무 – 여덟 방향>은 사방팔방으로 가지를 뻗은 몸집 큰 나무를 하나의 방향에서 보지 않고 여덟 방향에서 관찰하여 그린 것으로 하나의 나무가 보여주는 각기 다른 측면들에 주목해 면면의 속성들을 완결된 하나의 작품으로 엮은 것이다. 친구와 자신의 이인초상인 <자연예술가와 화가>에서는 이보다 더 적극적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네 계절에 두 사람의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를 대입해, 소년기부터 장년기까지 서로 다른 인생 여정을 살아오다 노년기에 이르러 서로 비슷한 지점에서 만나는 이야기를 유장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서사성의 완결판은, 그 자신이 지어낸 스토리를 그린 <비단장사 왕서방> 연작이라 여겨진다. 그런데 <선생님을 그리다>는 과거의 현실과 더불어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못한 상상의 이야기들이 결합되는, 또 다른 경지의 서사성이 개입되는 것이다. 물론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서사적 특성과 서정적 특성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서로 구분할 수 없이 맞물려 있다.
그림에 한정해서 보자면, 그의 서정적이고 서사적인 작품 상당수가 자신의 과거와 연결점을 갖는다는 것도 눈여겨볼 만한 특성으로 보인다. 과거의 드로잉을 개작하는 작업(과거 드로잉의 개작은 현재 시도하는 캔버스 작업들 이전부터 다른 방식으로 행해져왔다. 예컨대 대학 시절 수업시간에 했던 누드 드로잉들에 옷을 입히거나 다른 인물을 첨가하는 작업 등 다소 서투른 솜씨로 그려진 과거 작업들에 다시 손을 대는 ‘덧그리기’ 작업들이 그것이다)과, 과거의 강렬했던 자연 속 체험을 회고하여 더 강렬하게 그려내는 작업, 자신과 친구의 과거지사들을 떠올려 그리는 작업, 더 까마득한 과거의 선생님을 그리는 작업 등은 모두 과거를 현재에 다시 불러내는 작업들이다.
그는 자신의 과거 기억을 이미지에 담아 생생하게 소환할 뿐 아니라, 기억 속의 자잘한 아쉬움이나 모순들을 수정하고 재구성한다. 세계 여행을 떠나지 못했던 선생님의 인생을 그림 속에서 바꾸고, 과거의 드로잉들을 바라보며 자신이 옛 시절에 가졌던 생각들을 되돌이킴과 동시에 과거와 달라진 현재를 그 속에 반영하며, 늘상 결별로 마감된 지난 프로젝트들의 좋았던 모습을 부각시켜 새로운 현재적 기억으로 마감하는 일, 그것은 과거를 소환하여 재구성하는 것일 뿐 아니라 과거의 기억들과 화해하는 그의 방식인 것이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살아가고 있는 과정과 삶을 바라보는 태도를 통해 예술이 의미를 얻게 됨을 보여준다. 그의 과거적 소재 지향은 흘러가는 시간을 붙들어 현재에 매어놓으려는 시도가 아니라, 과거로부터의 존재인 자신의 기억을 재구성함으로써 현재를 활동시키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서정성과 서사성을 따로 떼어 구분하기 어렵듯이, 과거와 현재의 경계 역시 명확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딱 한 번 있었던 과거의 일을 떠올려 현재의 캔버스에 붓을 대는 그 순간, 과거와 현재의 경계는 무너지는 것이다. 따라서 언제든 현재화할 수 있는 그의 과거에 대한 회고에는, 회한의 감정이나 자기연민이 개입되지 않는다. 한때 나는 그의 과거 지향성을 나르시시즘적 취향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 보았으나, 그보다는 오히려 그가 가진 시간 그 자체에 대한 독특한 관점과 감각의 소산인 것 같다.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시간에 대한 관점은 달리 말하면, 그의 인생관이고 예술관이다. ●
임동식은 1945년 충남 연기에서 태어났다. 공주 중・고등학교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독일 국립 함부르크미술대학 자유미술학과를 졸업했다. 1967년 공주문화원에서의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5회 개인전과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작가 임동식의 작업실 외관과 내부 모습. 친구가 마련해준 낡은 집을 수년간 손수 고치고 다듬어서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건물의 안팎을 황토로 마감했고, 여러 칸으로 나뉜 작은 방에선 각기 다른 시리즈 작업을 동시에 진행한다.
특히 기와 지붕에 구멍을 뚫어 자연광이 내부로 비치게 한 것이 돋보인다. 이렇게 함으로써 물감 본연의 색에 좀더 가까운 색감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친구가 권유한 방흥리 할아버지 고목나무-여덟 방향> 캔버스에 유채 80×100cm(각) 2010 2010년 스페이스 공명에서 열린 개인전 전시 광경
<고개 숙인 꽃에 대한 인사> 캔버스에 유채 181.8×227.3cm 2005
이 그림의 내용은 1986년 함부르크에서의 행한 야외작업의 모습을 담고 있다.
주
1 임동식의 작업 여정을 그의 오랜 지음(知音)인 홍명섭은 2005년에 다음과 같이 구분하였다. (모던한 평면작업을 하던 홍대 졸업 전후를 제외하고) 야외미술의 시절, 자연미술의 시절, 공동체미술의 시절, 원초미술의 시절(<임동식>전 카탈로그 서문, 아르코 미술관, 2005).
임동식은 1975년 안면도에서 ‘청년작가회 야외작품 발표회’에 참가한 이후 야외 현장에서 자연에 반응하거나 교감하는 설치와 퍼포먼스 작업을 하면서 동시에 여러 프로젝트를 기획해왔다. 1980년의 금강현대미술제와 1981년에서 1998년까지 지속되었던 야투(野投), 1980년대 독일에서 10년 유학 후 돌아와 1991년에 시작한 <금강국제자연미술전> 등이 그것이다. 한편 1993년부터 2001년까지 ‘예술과 마을’이라는 명칭으로 공주 원골에서 진행한 프로젝트는 농민들과 예술가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방식으로 농민들의 작업과 예술가들의 작업이 구분 없이 보여진, 새로운 형태의 전시이자 나아가 새로운 공동체의 실험으로 기록될 만하다. 임동식의 지난 작업과 프로젝트들은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역사에서 독보적 위상을 가지며, 특히 1993년 겨울에 시작했던 ‘예술과 마을’ 프로젝트는, 서양에서 1990년대에 그 맹아가 시작되고 우리나라에서 2000년대 이후 현재까지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새로운 장르의 공공미술(New Genre Public Art)’의 세계적 선구 사례라 평가받을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