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Artist] 손동현

전통의 현대적 계승!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이렇게 낡고 철 지난 슬로건을 들먹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 손동현의 작품에선 자의건 타의건 여전히 이 화두가 유효하다. 작가는 지극히 전통적인 제작방식을 고수하며 동시대 대중문화의 아이콘을 다룬다. 그의 작품은 일견 가벼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각도로 진지하게 해석되는 매우 흥미로운 작업이다. 10월 24일부터 11월 13일까지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 <소나무>라는 타이틀로 그의 개인전이 열린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손동현의 작품세계를 살펴본다.

손동현과 그의 ‘동양화 친구들’

함영준  커먼센터 멤버

손동현은 크게 두 개의 키워드를 가진 미술가다. 동양화와 대중문화. 손동현은 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러나 너무 뻔하게 곡해될 소지가 다분한 만남을 거의 10년 동안 밀어붙였다. 일견 단순한 작업 논리로 인해 손동현의 작업은 꽤 접근하기 쉬운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는 동양화가 가진 특유의 공예적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재현의 대상으로 선택하는 소재가 접근하기 수월한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1980년생인 그가 또래보다 빠른 시기인 2006년에 첫 번째 개인전을 열고, 미술계 호황의 끝자락에 잠시나마 걸터앉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이후 미술이 대중과의 만남을 자처하는 제스처를 취할 때 주로 이용하는 많은 기획에 참여하게 되었다. 현대미술은 난해한 것이고 동양화는 고고한 정신세계를 담은 것이라는 대중의 추측과는 반대로 슈렉이나 맥도날드 아저씨 같은, 아이들이나 반길 캐릭터를 장지에 옮겼기 때문이다. 만화와 미술의 만남이랄지, 본래의 발랄한 느낌이 많이 퇴색한 한국의 ‘팝아트’ 기획에서 주요 작가로 그림을 걸었다. ‘젊음’이나 ‘상상력’ 같은 단어에 어울릴 법한 행보였다.
이는 소위 ‘포스트-모던’한 행보로 독해되곤 했다. 1990년대를 전후해서 ‘포스트-모던’이 한국으로 유입되면서 문화의 다원주의라는 맥락은 문자 그대로 당대의 문화를 이해하는 키워드가 되었다. 만화라는 맥락을 화이트 큐브에 거는 ‘작품’으로 승격시킨 서구의 많은 작가가 주로 1960년대를 전후해서 탄생한 것과 비교해보면, 한국에서 ‘팝아트’란 1980년대의 3고(高) 호황에 따라 해외의 문화를 마치 제 것인양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세대를 통해 가능했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용어로 채택된 셈이다. 더 이상 현대미술의 재료는 진지하고 심각한 정치적, 사회적 혹은 개인의 도 닦기식 미학적 전통이 아니었다.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는데, 주변의 모든 사물이 대중자본주의로부터 발췌된 문화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손동현이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낼 당시는 아마도 일본 만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이해했던 소위 ‘오타쿠 문화’가 상륙한 시절이었을 것이다. 하드코어하게 망가와 아니메에 미쳐있지 않더라도 한국에서 자란 소년 소녀들에게 ‘만화영화’는 또래끼리 이해하고 즐기는 문화의 한 종류가 된 시점. 5시30분에 오후 방송을 시작하던 공중파 티브이는 7시 언저리까지 계속해서 일본 만화영화를 방영했고, 일요일 아침마다 방송국은 오래된 미국 만화영화를 틀었다. 이는 주로 원산지가 불분명하게 번안되어 권선징악의 간단한 스토리를 반복했다. 대부분이 톤이 선명한 원색의 유니폼을 입은 소년 소녀가 회색톤의 유니폼을 챙겨 입고 기괴한 체격을 한 악당을 물리치는 이야기였으므로, 나중에는 착용한 옷의 색깔과 주인공의 외양만 보더라도 그가 어떤 행동을 일삼을 지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한편,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손동현은 동양화에서 이야기하는 ‘진경’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을 두고 고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겸재를 비롯 무수한 한국의 동양화가에게 영감을 준 혁명적인 아이디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을 그림으로 옮기면서도, 동시에 그리는 이의 정신성을 반영한다는 수도사적 면모를 겸비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이러한 교육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행보였을 것이다. 현대라는 환경, 어쩔 수 없이 서구화가 진행되어 온 세계의 도시들이 엇비슷한 모양을 갖췄을 때, 과연 풍경화란 무엇인가. 영웅이나 스타로 추앙받는 인물이 부재했을 때 초상화의 소재가 될 수 있는 모습을 갖춘 대상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청년의 특권인 반항심이 결합되면서 손동현의 동양화는 동양화과라는 특이한 미술학제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의 미술교육 제도, 혹은 여전히 철옹성을 자랑하며 변화를 거부하는 전통이라는 이름과 현대미술 작가로서의 개인이 어떻게 조응하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품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손동현은 가장 가까운 곳부터 해결하고자 했다. 우선 자신의 유년을 살피고, 그리고 계속 유예되어 온 청춘을 대표하는 이미지를 장지에 옮겼는데, 그것은 바로 대중문화에서 즐기던 이미지였던 셈이다. 그것은 초상이라는 소위, ‘전신사조’라는 철옹성 같은 방법론을 스스로에게 맞춰버린 결과였다. 첫 번째 개인전에서 그는 특히 3D 애니메이션 캐릭터에 주목하는데, 이는 순전히 눈에 보이는 형체를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산술적 데이터의 산물이었으므로, 유독 대상의 정신성을 드러내야 한다고 믿어지던 동양화의 초상에 가장 잘 어울리는 대상이기도 했다. 게다가 무의미한 한자어로 음차해서 작품 제목을 정한 것은 단순한 언어유희를 넘어서 대중문화가 가진 ‘껍데기뿐인’ 혐의를 역이용하는 재기발랄한 시도였다.
그의 시도가 대중문화의 맥락을 좀더 세심하게 이용한 것은 현재까지 대표작으로 불리는 마이클 잭슨 연작이다. 총 40점으로 구성된 호기로운 초상화 시리즈인데, 마이클 잭슨이 팝이라는 대중문화의 큰 부분을 좌지우지했던 시절을 초상으로 점검함으로써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초상화라는 인터페이스를 연구함과 동시에, 현재를 아우르는 대중문화의 작은 역사를 작품의 흐름 속에서 포착할 수 있게 해두었다. 그리고 이후에 작업했던 <빌란(Villian)> 시리즈 역시 007이라는 대중 영화의 아이콘에서 묘사된 악당을 시대 순으로 감상할 수 있게 해서,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미국 중심의 대중문화가 과연 어떤 존재를 악당으로 설정해왔는지 살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후 약 3년간의 공백을 마무리하면서 이번에 윌링앤딜링에서 열린 전시는 <PINE TREE>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그런데 기존과는 꽤 많이 달라진 모양이다. 마치 이전까지의 작업세계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작업으로 도약하려는 듯, 강한 의지가 엿보이는 호기로운 전시다. 총 8점의 작품이 걸려 있고, 전시마다 그렸던 문자도 1점과 드로잉처럼 작게 그린 족자 3점을 부록이라고 치면 전시장 정면에 걸린 커다란 초상 4점이 이 전시의 전부다. 이 초상들은 동양화에서 소나무를 이용하는 방식을 네 가지로 정리한 뒤에 각각의 방식의 대표성을 딘 것이다. <Pine the Great>는 창덕궁 옥좌 뒤에 있었던 <일월오봉도>(작가 미상)를 레퍼런스 삼아 군주의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는 소나무다. 그리고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등장하는 화법과 소나무는 <Mister High Fidelity>라는 이름으로 표현되었다. <Shaman the Evergreen>은 악귀를 쫓는 주술적 의미로 그려지던 ‘까치호랑이’ 민화에서 차용한 작품이고, <Master Knotty Needles>라는 작품에서는 ‘십장생도’에서 장수의 상징으로 표현되어온 소나무를 참고했다.

 한지에 수묵채색 194×130cm 2009

Portrait of the King (30) 한지에 수묵채색 194×130cm 2009 한지에 수묵채색 194×130cm 2009

손동현Donghyun_Son_영웅수파만선생상The_Portrait_of_Hero_Mr.Superman_~

영웅수파만선생상(英雄守破慢先生像) 한지에 수묵채색 190×130cm 2007

문자도-코카콜라  한지에 수묵채색 130x320cm 2006

문자도-코카콜라 한지에 수묵채색 130x320cm 2006

21세기 초상화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다. 기존의 손동현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던 대상이나, 혹은 마치 이 시대의 영웅으로 추앙했던 ‘팝 아이콘’을 동양화의 화풍으로 옮기는 작업을 해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역으로 접근해, 대중문화에서 차용한 이미지가 아니라, 유명한 작품으로 전해져 오는 동양화의 대표적인 작품과 스타일을 차용해서 유사 대중문화의 캐릭터를 창조했다.
헌데 이러한 접근은 마치 원래의 텍스트를 재료 삼아 만들어지는 ‘동인’ 문화라는 서브컬처를 연상하게 한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등장한 이러한 문화는 기준이 되는 원래의 작품을 놓고, 그 작품의 팬들이 캐릭터를 다시 배열하면서 새로운 스토리를 창출하고 서로 공유하는, 소위 ‘2차 창작’ 행위를 그 기본으로 삼는다. 각 캐릭터의 특징 중에 유독 팬들의 지지를 받는 부분을 과장해서 표현해 적극적으로 스토리 요소에 첨가함으로써, 원래의 텍스트는 단지 캐릭터를 제공하는 수준으로 받아들여지고, 특별히 독특한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을 분리해서 집중적으로 감상하게끔 하는 문화다.
이러한 ‘선택과 집중’의 방법 중에 대표적인 것은 ‘모에 의인화’다. 이는 간단히 설명해, 사물에 캐릭터를 부여해서 마치 인간처럼 보이게끔 묘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에 의인화’의 대상은 단순히 동물이나 주변에 존재하는 사물뿐 아니라, 건축물이나 심지어는 눈에 잡히지 않는 시스템까지 포괄한다. 토끼라는 동물이 있다면 온순하고 겁이 많은 빨간 눈과 긴 귀를 가졌다는 점에 착안해서 비교적 단순하고 알기 쉬운 상징을 섞어 인물을 만들어낸다거나, 아파트라는 주거 시스템이 있다면 편리하고 깨끗하지만 아파트가 상징하는 경제적 의미를 눈치챌 수 있게끔 인체나 의상의 특징을 뒤섞어 인물을 만드는 행위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손동현의 작품을 순전히 ‘모에 의인화’를 거친 ‘동양화 동인지’라고 단정 짓기에는 여러 가지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 우선 ‘모에 의인화’가 집중하는 부분이 원본이 가진 캐릭터의 특성을 데이터베이스화해서 팬끼리 서로 알아보는 것을 재미로 삼고, 어떤 특이한 부분을 참신하게 선택해서 표현하느냐에 성패를 두고 있다면, 손동현의 <소나무> 시리즈는 오히려 동양화라는 전통적이고 공예적인 매체가 기나긴 역사 동안 집중했던 ‘정신성’, 즉 화폭에 표현되는 모든 사물이 그리는 이의 ‘정신성(혹은 캐릭터)’을 표현해야 한다는 법칙을 대중문화의 방법에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성패가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동양화에 실린 소나무가 비단 식물의 한 종류일 뿐만 아니라, 군주의 권위나 잡귀를 쫓는 주술성, 탈속을 꿈꾸는 선비의 고고한 성정, 인간 본연의 욕망인 장수 등의 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때, 손동현은 캐릭터를 등장시켜 초상화를 표현할 때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할 표정이나 근육, 포즈를 통해 그러한 의미를 대표하게끔 설계한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동안 (맨해튼이 파괴되는 디스토피아를 병풍으로 그린 <섬> 시리즈를 제외하고는) 인물화의 양식적 맥락을 고민해 왔던 작가가 드디어 동양화의 가장 큰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산수화에 대한 대중문화적 언급을 통해 한동안 시도할 수 있는 방법론을 제시했다는 데에 있다. 앞서 간단히 언급한 대로 동양화란 중국의 영향으로 유독 동아시아에만 전해져 내려오는 특별한 공예 양식 중 하나이자 불가피하게 미술대학에 속한 묘한 영역인데, 그동안 동양화가로서 훈련받은 손동현이 가장 염두에 두었을 법한 ‘산수’에 대한 저만의 해석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자신의 작품세계를 점검하기 위해 동양화라는 넓은 바다에 다시 뛰어드는 용기를 드러냄은 물론, 동양화 전체를 아우르는 화려한 준법의 난도 높은 기교를 마음껏 뽐낼 수 있는 계기도 될 터이니, 중견 작가로 접어든 작가의 의미심장한 한 수인 셈. 마치 자신의 앞날을 스스로 점치기라도 하듯이 손동현은 이번 전시에 부록처럼 걸린 (마치 미국 코믹스의 표지를 연상케 하는) 족자에 그려진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동양화라는 시스템에 대한 나름의 재해석을 예고하고 있다. ●

손동현은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2006년 아트스페이스 휴에서 첫 개인전 <파압아익혼(波狎芽益混)>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7회 개인전을 열었다. <메이드 인 팝랜드>(국립현대미술관), <애니마믹 비엔날레>(대구미술관) 등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쌈지스페이스 레지던시(2006~2007)와 몽인아트스페이스 레지던시(2013~2014)에서 작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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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4일부터 11월 13일까지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 열리는 손동현의 일곱 번째 개인전 전시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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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갤러리2에서 열린 개인전 <villain전> 전시광경

 

 

[Artist Review] 정현

정현의 작품에는 인간에 대한 애정, 연민이 서려있다. 강렬한 표현으로 인간의 본질적인 면을 드러내는 정현이 10월 15일부터 11월 9일까지 학고재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다. 이번 전시에서는 재료가 가진 특성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조각과 드로잉 신작을 함께 선보인다. 인간이 근원적으로 짊어진 무게와 오랜 시간이 걸려 완성되는 ‘아픔 후의 성숙’이 그의 작업에 어떻게 반영됐을까.

소진된 물질들의 에코그래피

강수미  미학, 동덕여대 교수

6톤의 무쇠로 무지막지하게 만든 검은공과 1g이 채 안 되는 콜타르 용액은 어디서 만나는가? 몸체 전체가 쩍쩍 갈라져 그 틈새마다 검은 기름때로 눅진한 낡은 침목(枕木)과 바늘 한 점 꽂을 데 없이 단단한 흑색 석탄덩어리는 또 어디서 접점을 갖는가? 그것들 모두가 여타 소소한 사물들보다 자체의 강력한 물질적 속성을 외관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아니면 그것을 마주한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그로부터 제각각 다르지만 지각의 강도 면에서는 강렬하고 자극적인 질량, 밀도, 부피, 색채, 형태를 보게 된다는 점에서? 관점에 따라 다양한 관계를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 정현의 경우에 한정하면 그것들은 조각의 지평에서 만난다. 그리고 그 넘치는 강렬함과 표현성을 내장한 물질들은 정현의 창작세계에서 ‘인간’이라는 근원적이고 현실적인 예술 주제   (기의)를 가시화하는 모티프(기표)로써 접점을 형성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조각에서 인간의 몸을 보려 하지 않는다. 그의 드로잉에서 인간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는 쪽 또한 나이다. 여기 감상자로서 나는 그의 작품들이 내뿜는 막대한 물질적 존재감, 언어를 희박하게 만드는 시각적 표현력, 관객과의 즉물적(literal) 조우를 유도하는 설치의 힘을 인간적인 의미나 맥락으로 약화시키고 싶지 않다. 이를테면 국내 굴지의 철강회사에서 만들어 사용한 일명 ‘파쇄공’이 10여 년 간 25m 높이에서 수직 낙하돼 쇠의 불순물을 정제하는 동안 16톤에서 8톤으로 소진된 과정을 인간 시련의 역사와 유비시키고 싶지 않은 것이다. 또 수십 년간 기차 하중을 고스란히 온몸으로 견뎌온 선로의 버팀목을 삶의 무게에 짓눌릴 수밖에 없는 인간 운명에 대한 존재론적 비유로 해석하거나, 검붉게 녹슨 철근들이 얽히고설킨 형상을 인생의 신산(辛酸)한 속성과 유비시켜 논하기를 원치 않는다. 통상 그런 해석이나 논리는 여차하면 센티멘털리즘으로 변질돼 사람들에게 상투적 위로만 남기기 때문에.
그런데 이런 나의 비평 방향과는 상관없이, 혹은 그런 차원에 앞서서 작가는 애초부터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작품을 했을 수 있다. 다르게는, 인간과 인간형상의 면대면 관계 및 교감에 자기 작업의 가치를 설정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작가는 오래전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이 시대의 실존상, 뻥 뚫리고 찢겨지고 일그러진 절박한 인간의 순간순간에 보다 가까이 다가서려고 한다.” 1992년《  월간미술》에 기고한 작가의 글에서 발췌한 이 문장은 조각가 정현이 둔중한 진흙덩이를 각목으로 퍽퍽 쳐내고, 딱딱한 석탄덩이를 끌로 깍깍 파 들어가고, 찐득한 콜타르를 종이 위에 쫙쫙 그어나가는 촉각적 표현법으로 무엇을 가시화하고, 어디에 도달하고자 했는지를 말해주는 것 같다. 그것은 문맥상 여지가 없듯, 인간의 실존적 고통을 시각적으로 수사(修辭)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휴머니즘적 미술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니 질척거리는 감상주의가 두려워 그의 미술에서 인간을 피하려 한 나는 틀렸다.
물질과 인간의 정밀 조영(照影/造營)
그런데 정현의 조각이 인간을 은유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좋다고 느낀 것일까? 그의 작품들이 감상자의 휴머니즘적 정서를 어루만지므로 감동적인 것인가? 둘 다 맞다 해도, 그것으로 충분한가? 이제까지 작가 자신은 물론 여러 논자들이 그의 작업에서 거의 예외 없이 인간을 향한 가치를 발견했거나, 반대로 인간적 가치를 통해 그의 미적 세계를 정의했다. 하지만 결코 감추거나 위축시킬 수 없는 정현 조각의 어떤 면모는 그 같은 순환논법과 순치된 인문주의로는 밝혀낼 수 없어 보인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유는 사물/대상의 존재(objecthood) 자체, 행위(performance) 자체, 사물의 질서(order of thing) 자체가 정현의 미술을 결정화하는 절대적 속성 중 하나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인간중심주의의 의미망으로 포착할 수 없는 객체다. 어떻게 우리가 아스팔트 길닦이에 쓰는 아스콘의 질적 상태를, 기찻길 침목들에 가해진 압력의 강도를, 녹슬고 삭고 붉은 부스럼을 일으키는 금속의 시간과 생태를 인간적으로 전유할 수 있겠는가. 비록 그 물질들이 정현이라는 미술가의 개입을 통해 산맥처럼 강인한 인간 육체의 누운 모습을 연상시키는 조각이 되고, 대지 위에 두 다리로 버티고 선 인간 군상을 암시하는 설치작품이 되고, 자코메티의 그것처럼 바짝 마른 남자 입상을 환기시키더라도 말이다.
물론 이런 논의는 작가의 미술이 그간 어떻게 전개돼왔는지를 살펴봐야 균형을 이룰 것이다. 2006년 국립현대미술관은 정현을      ‘올해의 작가’로 선정하고 개인전 개최와 함께 도록을 발간했다. 거기 글을 쓴 학예사 박수진은 작가의 작업세계에 대해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는 인체의 역동성이 표현상의 중심을 이루었다면, 1990년대 중반부터는 재료와 도구가 중심이 되면서 제작과정상의 우연성이 드러난다. 특히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는 재료의 물질성이 더욱 부각되는 시기”라고 설명한다. 나는 이러한 시기 구분에 동의한다. 하지만 2014년 현재 작가의 최근작을 고려하면, 그 변화의 핵심을 좀 더 구체적으로 추출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정현은 마닐라삼에 석고를 묻혀 골조를 만들고 그 위에 콜타르를 착색한 인체 조각에 매진하던 초기, 예술의 이름 아래 질료를 통치해 인간을 형상화한 것이 맞다. 하지만 점차 물질들의 본래 성질과 우연하고 가변적인 외적 조건에 자신의 예술적 의도와 표현 방식을 반향(echo)해가는 식으로 이행했다. 즉 작가의 조형적 목적에 물질들을 종속시켜 시각적으로든 의미상으로든 인간과 닮은 형상을 빚어내는 데서, 물질 자체가 발산하는 특성 및 주변 맥락에 작가의 의식과 감각이 메아리치듯 반응하는 식의 작업으로 나아간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얼마 전 17번째 개인전에 내놓은 ‘8톤의 파쇄공’에 이르러 정현의 조각은 한 사물의 존재부터 주어진 질서까지, 물   (物) 자체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제시하는 미술의 완성형에 거의 도달한 것 같다. 인간 형태적으로(anthropomorphic) 전유되거나 인간중심적 의미로 해석되기 전에 물질이 가진 자체의 속성과 외관, 그리고 그 물질이 온몸으로 겪은 전(全)역사를 긍정하는 미술이 그것이다. 이 미술은 그럼 비인간적인가? 이 미술에는 인간이 부재한가? 그렇지는 않다. 인간의 몸을 닮은 그의 1980~90년대 조각은 물론 격렬한 감정의 인간 얼굴을 연상시키는 요 근래의 드로잉들과 마찬가지로, 정현의 최근 조각에 인간은 근본 축으로 내재한다. 예컨대 파쇄공 조각처럼 물 자체인 작품에도 말이다. 다만 관계의 방식이 달라졌다.
이전 작품들이 말하자면 물질의 물질성을 녹여내 인간이라는 의미를 상징하고 표현하고 추상하는 데 창작 의의를 둔 것이라면, 현재의 작품은 물질에 대한 인간의 즉각적이면서 즉물적인 반향을 목표로 한다. 이때 반향의 첫 인간은 그 물질과 조우하고 거기서 예술의 가능성을 발견한 작가 자신이다. 하지만 그 물질이 일종의 ‘발견된 오브제’로서 미술작품으로 전시되었을 때 불특정 다수의 감상자가 얼마든지 그 인간에 해당할 수 있다. 그/녀는 거대한 크기와 무게감, 단단함, 그러면서도 긴 세월 강물에 잘 깎인 조약돌처럼 매끈함과 군더더기 없음을 갖춘 검은 파쇄공과 대면해 그 객체가 발현하는 객체성에 신경감응하며 특정한 상을 그리게 된다. 그 상을 우리는 감상자 주체의 주관에 따라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는 것이라 단정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예컨대 10년간 셀 수 없이 많은 횟수로 공중 낙하하면서 물리적으로 마모된 거대한 무쇠 공은 사람들에게 범접할 수 없는 위엄과 동시에 간단히 말로 할 수 없는 응축된 통증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상상력을 발휘해 의미를 그렇게 각색하는 것이 아니라(우리는 그렇게 착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는 그 쇠공의 지금 여기 상태에 감상자가 감응해서 부지불식간에 드는 판단이다. 그 판단의 근거는 보는 이의 주관과 심리에 있지 않고 대상의 질적, 물리적 상태로부터 발현돼, 보는 이의 지각과 의식에 현상되는 것이다. 그 점에서 나는 정현의 몇몇 조각에 에코그래피(echography, 照影)라는 용어를 적용하고 싶다.
에코그래피는 의학에서 ‘초음파 검사법’ 또는 ‘초음파 조영술’ 등으로 불리는 진단법인데, 쉬운 예로 태아의 초음파 사진처럼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신체 내부의 상태를 고주파를 이용한 반향그래프(echo-graph)로 알아내는 방식이다. 데리다는 이를 철학적 논쟁에 도입해 인간과 텔레비전 사이의 상호작용을 내재적으로 분석한 바 있다. 그와 비슷하게 나는 에코그래피의 방식이 우선 작가 정현과 그가 주목한 현실의 물질들 사이에 작동했고, 나아가 잠재적 관객의 미적 경험과 물 자체로 제시된 그 물질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유추해본다. 작가가 절반으로 마멸된 파쇄공, 해체된 침목, 부러진 철근 마디를 두고 “잘 겪은 시련은 아름답다”고 말할 때, 그러니까 그 아름다움은 의인화된 것이 아니라 정현이라는 인간의 눈과 피부에 투영된 물질의 질적, 외형적 상태다. 그것은 우리 앞에 일시적인 것으로 나타나지만 고유의 내력으로 그렇게 존재하게 된 것이며, 우리가 그렇게 여기는 것 같아도 사실은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느끼게 하고 생각하게 한다. 미의 주체와 객체 관계를 이렇게 역전시키고 복합화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정현의 최근 작업은 ‘인간’을 다른 지각의 조영술로 새롭게 조영(造營)하는 중이라는 비평이 개시될 수 있을 것이다. ●

정현은 1956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조소과와 파리국립미술대 조소과를 졸업했다. 1992년 원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연 후 서울, 도쿄, 베이징, 프랑스 등에서  17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그룹전 및 기획전에 참여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금호미술관 외 다수의 기관에 작품이 소장돼 있으며 2014년 제28회 김세중조각상 본상을 수상한 바 있다. 현재 홍익대 미술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브론즈 316×92×62cm 2013(오른쪽)

<무제> 브론즈 316×92×62cm 2013(오른쪽)

 

[Artist Review] 박영남

 

붓 대신 손가락으로 색과 빛을 겹겹이 쌓았다. 손가락의 촉각성이 나타나는 추상회화로 널리 알려진 박영남이 금호미술관에서 개인전 <Self Replica>(10.16~11.9)를 연다. 이번 전시를 통해 그는 원시적인 방법으로 디지털적인 빛의 미감을 만들어냈다. 무한한 자기복제와 변주로 열린 시각을 제시하는 그의 작품세계를 살펴본다.

복제(Replica)와 복수화(Re-pli)

강태성  미술비평, 국민대 교수

작가 박영남은 ‘self replica’라는 주제로 금호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그는 이 전시에서 세 가지 유형의 작품을 선보인다. 첫째 유형은 다채로운 사각형을 연결한 작품이고, 둘째 유형은 흑백 사각형 위에 사선과 흔적들이 있는 작품, 셋째 유형은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이다. 전시장 1층 정면에는 10호 캔버스 21개를 길게 붙인 작품을 제시한다. 작가가 “색상이 형태가 되길 원한다”고 언급했듯이, 실제로 다양한 색상은 4각 형태를 만들며 다양한 리듬감을 표현한다. 이 공간은 2층의 공간과 대조된다. 2층 전시장은 완전한 흑백의 공간을 이루면서 무게감 있는 거대한 크기로 관람객의 동선을 압도한다. 흑백과 유채-무채색의 대조와 함께 손끝으로 검은 얼룩, 회색 얼룩을 이뤄내어 일종의 낙서의 자유로움처럼 지우고 덫칠하는 행위들을 표시한다.
3층의 좌측 공간에는 1층의 색채와 연관된 작품들이 전시되고 우측공간에는 2층의 흑백 작품들이 전시되어 대조를 이룬다. 특히, 3층에는 색채들이 손끝으로 화면을 더듬듯이 그려져 따뜻한 느낌을 갖게 한다. 손의 자취들은 촘촘하거나 듬성듬성하게, 정적이거나 동적으로 화면에 올라와 있다. 때로는 가로선이 세로선, 사선들과 만나며 조형적인 질감 표현과 행위의 의미들을 제시한다. 손끝으로 작게 찍어낸 물감의 느낌은 조용한 숨결처럼 담담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이와 달리, 사선은 좀 단호한 자세로 소리 지르는 것같이 심상(image of mind)을 나타낸다. 그래서 작품은 단순한 추상이 아니라 심상의 재현도 포함한다. 인덱스(검지)와 같은 손가락은 구체적인 인덱스 없이 행위를 제시한다. 이 촉각적인 터치들이 이뤄낸 선들의 뭉개짐과 퍼짐은 추상표현주의적인 공간들과 연관된다.
이번 전시는 벽에 걸어 놓은 작품부터 벽에 기대어 놓은 작품까지 연출되고 심지어 비계까지 한데 놓여있어 전시장이면서도 작업실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러한 연출에서 ‘과정 중’이라는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비계의 형태들을 추상작품에서 만나게 된다. 이 형태적 만남은 작품과 세계가 ‘연속’된다는 것을 연상하게 한다. 그의 작품은 순수한 추상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다. 즉 현재의 물체들이 빛 속에서 새로운 구체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실제 추상주의자들은 어떤 사물성도 부정하며 색 자체이기를 강조하는 데 반해 그는 이러한 사물과의 연상성을 추상성에 포함시킨다.
지하 전시공간에서도 조형적 대조가 두드러진다. 좌측 공간에는 같은 크기의 10호를 다양하게 조합하여 4점의 회화작품을 제시하는데 이는 우측 공간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과 대조된다. 좌측 공간은 하나의 요소가 다양하게 변주되어 각기 다른 작품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가변적이고 정하지 않은 부정은 우측의 미리 정해놓은 조형성과 대조된다. 색채적으로도 안료의 색과 빛의 색이 대조된다. 또한 스테인드글라스의 색은 평면 위에 놓여있기보다 그 근원이 전시장 너머, 세상 너머의 초월적인 ‘광원’을 느끼게 해준다는 점에서 다르다. 작가는 이러한 흑백과 색조의 대조, 미리 정해진 작품과 정하지 않은 부정의 작품의 대조를 제시한다. 그는 이 대조를 통해서 관람객이 리듬의 강약처럼 이질적 공간을 여행하게 한다.
만짐과 부정
우선 그의 작품은 손으로 그렸는데도 마치 나이프나 다른 기구들을 사용한 것처럼 매우 다양한 기법을 보여준다. 손끝으로 찍어낸 듯한 그림, 손날로 빠르게 칠한 그림은 붓으로 그려낸 것과는 달리 좀 더 직접적이다. 손으로 만져내는 물질은 다른 도구보다 육체적으로 감각화된다. 작가는 손으로 다양한 색을 바르고 다시 그 위에 물감을 흘리고 미끄러뜨려 자취들을 만들어낸다. 신체의 움직임은 몸의 기록이자 자취로서의 움직임이다. 여러 색을 겹쳐 놓은 자취가 있는 추상의 형태(색채)들은 단순히 불투명한 덧칠이 아니라, 실제 색면이 있는 흔적(trace)이다. 이것은 색층 사이에 이야기가 있고 단순하게 밑의 색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흔적이 남아있는 부정이다. 즉, 과거가 공존하는 부정이다. 이는 차연(differance)으로서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부정하는 것이다. 손으로 그린 그림은 촉각적인 공간을 열어놓아 직접적으로 몸과 인접된다. 즉 캔버스와 물감(객체) 사이를 작가가 ‘만지고’ ‘만져지는’ 관계들을 제시한다. 메를로 퐁티의 ‘만지기’를 통해 주체와 객체 사이의 이분법을 부정한다. 만지기는 만져지기를 통해서 이뤄지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의 이러한 행위는 손끝에서 행해지기 때문에 ‘제스처’라는 의미들을 형상화한다. 이는 “감성적인 유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물감의 유출처럼, 손끝에 의해서 빠르게 밀려나 흰색을 남기면서도 밑의 색을 드러내 순간적이며 시간적인 존재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시간은 직접적이고 분출적인 마음과 물감의 유동성을 이뤄낸다. 이렇게 직접적인 촉각은 이성이기보다는 ‘욕망’과 같은 상징적인 동인들을 생각하게 하는데 이는 시각에 의존한 회화보다 회화의 육체화란 의미를 강조한다. 이러한 손의 직접성은 회화의 본질을 언어나 생각, 개념 이전의 상태로 바꾸어 놓는다. 롤랑 바르트의 표현처럼 박영남에게도 손은 욕망으로서 억제하는 합리성의 의미를 넘어서고 있음을 발견한다. 손의 욕망은 무수히 반복되는 손장난이나 낙서와 같은 자유로운 선들로 나타나기도 한다. 아울러, 작가는 물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손바닥으로 빠르게 긁어내는 행동, 뿌리는 행동, 그리는 행동, 찍어내는 행동 등으로 욕망을 다양하게 제시한다.
그렇다고 작가가 손의 욕망만을 형상화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살펴본 다양한 대조는 시각과 촉각 사이의 대조로도 나타난다. 사실 그의 회화는 거리를 두고 볼 때 강력한 조형적 구성이 존재한다. 시각은 생각과 관념, 본질 등과 어원적(idein-idea-ideology, eidos)으로 연관되는 것으로 명백함, 사유, 상상력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작가는 촉각적인 공간의 의미와 함께 이러한 시각적인 의미들을 용인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작가는 부정들이 공존하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의 부정의 몸짓은 차연을 포함하여 두 가지의 또 다른 부정을 제시한다. 하나는 부정(不正, 否正)하기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不定)의 부정이다. 마르셀 뒤샹이 제시한 ‘정하지 않은 부정’의 의미를 그에게도 연관시킬 수 있을 것이다. 박영남은 작품의 완성이 그 제시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작품의 완성이란 전시될 작품 한 단위의 완성이다. 이미 한정되고 결정된, 완성된 회화이기보다는 계속 변화하는 열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부정의 작품은 완성되었으나 역설적으로 진행 중이다. 그래서 그 작품의 외연은 열려있는 것이다. 그리고 작품을 조직하는 요소들도 열려있어서 ‘가능태’와도 같다. 이 ‘열린 작품’은 크기와 구성이 경우마다 다를 수 있는 가능성을 갖는다. 그것은 정하지 않은 부정이다. 아울러 이 개인전에서 작가는 <replica> 이외에 다른 작품 제목이나 제작 시기를 관람객에게 제시하지 않는다. 이 점 역시 ‘과정 중의 작품’처럼 한정하지 않고 열어놓는 개방적인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정하지 않은 부정(不定)으로서 작품의 일반적인 의미를 부정하며 열린 공간으로 관람객을 초대하는 것이다.
사각에 대해 작가는 ‘대지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 설명한다. 작가는 여기서 수직과 수평의 격자를 추론했고 마치 수학에서 x와 y처럼 공간을 구성하는 기준으로 삼는다. 이러한 시각은 현대회화나 조각,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시각적 요소인 그리드, 곧 격자와 같다. 그의 격자는 현대미술의 메커니즘, 추상성의 격자와 같은 시대성을 갖는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과거 추상작가들처럼 닫혀서 굳어진 형태를 띠지 않는다. 때에 따라서 두 개의 캔버스로 형성된 작품은 제작시기에 결정되었기보다는 완성 후에 다른 화면과 연합되기도 하고 또 다른 작품과 바뀌기도 한다. 특히, 이번 사각형의 연작을 통해 작기 복제라는 의미가 드러나는데 10호 단위에서 시작해 다른 작품들과 이웃하며 놓여진 것이다.
실제로, 그가 지난 한 해 동안 준비한 10호 작품은 모두 200점인데 이번 개인전에 70점을 사용하였다. 23개짜리 작품, 2개로 떨어진 연작, 24개짜리 작품 등으로 구성된다. 때로는 10호 9개의 같은 수의 캔버스가 다른 형태로 연출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웃하기는 실제로는 작품으로서 그 외곽의 모양을 완성시보다는 캔버스들을 이웃시키며 ‘형성’하는 과정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그에게 ‘이웃하기’는 ‘하나’의 작품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사각의 확대는 우선 10호 내에 가로, 세로 각 3줄로 사각형 9개를 만들어내며 이것이 여러 개의 10호로 놓이면서 사각형은 여러 개로 증식한다(repliaca, replicare). 색의 단위로 구성하고 그 면을 9면의 사각형으로 나누어 색조를 조합하고 이것을 병렬로 제시하여 색면의 숫자를 늘려나간다. 이는 ‘자기복제’이고 ‘증식’이다. 즉, 복제(replica)는 다시 보면 “다시 주름잡기(re-pli)”인데 그는 화면을 1에서 9로 미시적으로 구분하면서 동시에 가장자리(repli)에 이웃시켜(竝列) 복수화한다(replicare). 이 어원(replicare)처럼 그는 화면을 뒤로 접어들어가거나 빛을 반사하는 행위들을 포함시킨다. 이는 무한으로 확장될 작품의 증식이다. 작가는 그 요소들(형태소 또는 의미소)처럼 단위를 형성한다. 이렇게 증식해나가는 작품 수는 색을 통해 형태를 전개해가는 ‘이야기’를 더 길게 하여 마치 장편영화처럼 늘려 놓는다. 이러한 수적, 양적인 팽창은 순수한 조형성의 이야기를 드라마처럼 늘리는 것이고 이때 전혀 다른 미술만의 ‘조형 이야기’가 형성된다. 또한 이때 사각은 디지털 세계의 링크되는 논리처럼 상호 연관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하는 구조를 갖는다. 이러한 박영남의 사각(텍스트)은 마치 실제가 있는 하이퍼텍스트의 기능을 수행한다. ●

박영남은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서양화과와 뉴욕시립대 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그는 1979년 고려화랑의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제3회 김수근미술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아라리오갤러리 등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국민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캔버스에 아크릴 253×600cm 1999(왼쪽) 금호미술관 전시광경

<달의 노래> 캔버스에 아크릴 253×600cm 1999(왼쪽) 금호미술관 전시광경

 

[Artist Review] 정영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적멸의 화가, 정영렬전>(8.14~11.2)이 열렸다. 전후 앵포르멜에서 전통적인 한지작업까지, 추상화가 故 정영렬(1934~1988)의 30여 년 작업세계를 대표하는 60여 점이 소개됐다. 이번 전시는 단색화를 중심으로 인식되어 온 한국의 전후 추상미술 흐름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정영렬의 회화 그 진면목을 살펴볼 수 있다.

청년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

김영호  미술 비평, 중앙대 교수

지난 8월 14일부터 11월 2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에서 정영렬 회고전이 열렸다. 53세, 지천명의 나이에 아쉽게 생을 마감한 지 26년 만에 열리는 국립 기관에서의 첫 개인전이다. 이곳 덕수궁 전시관을 찾은 신세대 관객들은 이 낯선 화백의 그림 앞에서 세 번 놀란다. 1960년대 전반에 제작된 비정형적 추상미술이 주는 질료의 강렬한 힘에 한 번 놀라고, 그 에너지를 명상의 세계로 급속히 전환시켜 ‘적멸의 세계’로 귀의한 1970년대의 작품 앞에서 다시 한 번 놀라는 것이다. 이윽고 캔버스의 틀을 벗어나 재료로서 한지 자체에 주목하면서 ‘종이조형’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한 1980년대의 작품 앞에 서면 변혁의 시간을 살았던 작가의 치열한 삶에 고개 숙여 감복하게 된다. 그러나 전시회를 둘러본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는데 미술사가로서 한국 전후 추상미술의 현장을 그대로  반영하는 화백의 작품 발굴과 조명 노력이 미미했다는 자책 때문이다. 정영렬 화백이 운명을 달리한 1988년 이후 워커힐미술관의 <정영렬 유작전>(1995)과 타계 10주년을 맞아 광주시립미술관이 기획한 <정영렬-침묵의 빛>(1998)이 있었음에도 그의 예술은 여전히 대중에게 회자되지 못했다.
한국의 전후 추상미술 영역에서 ‘단색화’가 핵심적 경향의 하나로 정착된 지도 오래다. 그리고 반세기가 흐른 지금도 그 영향력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특정한 미술경향이 화단 현장에서 오랫동안 맥을 유지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전후 한국 추상미술의 맥을 잇는 새로운 경향이 등장하지 못하는 현실은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한국 전후 추상미술의 세포분열을 위한 에너지가 모더니즘과 함께 고갈된 것일까? 주변을 보면 추상의 영역에서 새로운 형식의 개발과 매체실험을 묵묵히 전개하는 신세대 작가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추상화 경향이 하나의 미술양식으로 정착되지 못하는 현실을 포스트모던의 기후 탓으로만 돌려야 할 것인가? 한국의 추상미술은 단색화에서 시작해 단색화로 끝나야 하는 것일까? 화려한 색채와 거친 질료의 실험들은 언제까지 단색화의 행로를 위한 수레바퀴로만 존재해야만 하는가? 전시장을 찾은 신세대 작가들에게 정영렬 화백은 자신의 분신인 작품을 통해 말한다. 모더니즘의 핵심 경향으로서 서구 앵포르멜 추상회화가 이 땅에 유입된 이래 자성(自省)과 비판(批判)의 과정을 거치며 펼쳐온 치열한 실험정신은 오늘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그리고 다시 묻는다 : 청년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

정영렬, 적멸78-3, 1978, 캔버스에유채, 132x163,국립현대미술관

<적멸78-3> 캔버스에 유채 132×163cm 1978

정영렬과 동시대 한국미술의 맥락
정영렬 화백은 한국 현대미술의 도입(導入)과 모색(摸索) 그리고 정착(定着)의 시기인 195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후반에 이르는 30여 년의 기간 동안 화단의 중심부에서 활동하면서 미술계의 변화와 단절의 마디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뿌리를 선불교의 적멸사상에 접목시킴으로써 독자적인 세계를 정립했다.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정영렬 화백의 위상은 그가 남긴 예술적 성과와 국제전 참가 경력 그리고 전위적 그룹 활동을 통해 확인된다. 미술평론가 이일 선생은 그를 한국현대회화 12인의 한 사람으로 주목했으며, 동시대 평단을 주도한 평론가 유준상, 김인환 등과 미술사가 정병관 교수 역시 현대미술을 둘러싼 단절과 지속의 관계항 속에서 왕성한 활동을 전개해 온 정영렬 화백의 노정에 대해 합당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정영렬 화백은 격변하는 1960년대, 국내외 문화적 상황에 부응하여 한국미술이 국제화단에 진출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화가의 한 사람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유럽과 남미 그리고 인도와 일본 등지에서 개최되는 유수 비엔날레와 국제미술제에 연속적으로 작품을 선보이며 한국 현대미술을 국제적 네트워크에 접속시키는 데 기여했다. 1965년에 열린 <제4회 파리비엔날레>를 서두로 1967년의 <제9회 상파울루비엔날레>, 그리고 1970, 1975, 1977년에 열린 <제2회, 제7회, 제9회 카뉴국제회화전>에 출품했으며, 1975년에 열린 <제3회 인도트리엔날레>에 참여한 것이 이를 반증한다. 정영렬 화백이 차지하는 위상은 전후 한국미술의 전위적 그룹 활동에서도 드러나는데 1962년에 창립동인으로 참여한 미술단체 <악튀엘>의 위상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그밖에도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현대작가초대전>과 <앙데팡당>, <서울현대미술제>, <에콜 드 서울>과 같은 실험미술 단체를 자신의 예술적 산실로 삼고 있었다.
이상에서 보듯 정영렬 화백의 위상과 예술적 성과는 급변하는 한국 현대 추상미술의 전개 양상과 발걸음을 같이했다. 세속과 타협하기를 싫어했던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인 정영렬 화백에게 작품이란 삶을 둘러싼 존재의 조건과 투쟁의 방식 그 자체였다. 작품의 미적 자율성이나 경제적 가치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만큼 그는 생전에 개인전에 대해 무심했다. 1969년 화백의 고향인 광주에서의 첫 개인전에 즈음해 가진 일간지와의 대담에서 그는 개인전 자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생각을 말한바 있다. “아마 내 개인전은 이것으로 끝날 것 같습니다.” 그 발언은 그 후 10여 년간 유효했고 1980년에 한국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열기까지 지속되었다. 공공미술관이 아닌 국내 화랑에서의 개인전은 1983년 동산방화랑 전시가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유일한 것이었다. 작품을 상품으로 여기지 않은 외곬의 성격 탓에 화백의 작품이 화랑이나 미술시장의 네트워크를 통해 소통되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작품 제작에 치밀하면서도 열정적인 화가였고 많은 양의 작품을 생산했으며 편집광적인 작업의 결실들은 고스란히 유족의 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정영렬 화백의 작품은 캔버스와 종이작업으로 구분된다. 매체를 넘어 시대별로 전개되는 표현형식의 차이로 작품세계를 정리하면  ‘비정형적 추상의 시기’(1959~1974), ‘기하학적 추상의 시기’(1974~1978), ‘종이조형의 시기’(1978~1988)로 나눌 수 있다.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인 1959년 <현대작가초대전>에 출품한 것을 데뷔시점으로 삼는다면 이후 전개되는 작가로서의 화력은 30여 년간의 노정으로 마감된다. 이 예술적 노정은 제3공화국 출범 이후 격변의 시기에 전개되었던 외래미술의 수용(受容)과 정착(定着) 그리고 극복(克復)이라는 한국 현대미술의 전개양상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정영렬 화백의 예술적 노정 30여 년은 명확한 마디와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전위적 예술가로서 그의 족적은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점을 재차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정영렬 화백은 동시대의 동료들에 비해 덜 알려져 있으나 결코 전위미술의 주변부에 속해 있지 않았다.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실험적 경향들이 미술시장과 타협하고 새로운 제도권미술로 정착한 이후에도 변방의 첨병 역할을 고집했던 그야말로 당대의 진정한 전위적 미술가였다.
이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정영렬 회고전의 의미는 우선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로 대변되는 전후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의 비정형적 추상회화의 발아와 성장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역사의 흔적으로서 현대미술의 모색과 정착의 시기로 불리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이르는 그의 작품에서 ‘단색화’에서 ‘종이조형’으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미술사의 단면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 회고전을 통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예술가의 극명한 예술의지와 선명한 작가정신을 발견하고, 추상회화가 지닌 항구적인 가치가 아직도 우리 화단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새로운 형식논리로 시대정신을 담아낼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정영렬 화백은 지적인 풍모와 보스적 기질이 넘치는 화단의 리더였다. 한국적 형상과 빛깔에 대한 탐구와 동양사상의 전통을 예술의 언어로 담아내기 위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작품 제작에 헌신했던 치열한 정신의 작가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열풍과 함께 불어닥친 평면회화에 대한 도전과 예술의 위기상황에도 불구하고 예술충동의 한 본령으로서 추상미술은 오늘도 굳건히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정영렬 화백의 실험정신이 추상회화의 창작과 비평 원리로서 ‘평면에 대한 인식과 페인팅 자체의 프로세스 그리고 질료의 물성’에 대한 재해석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에너지가 될 수 있기를 삼가 바란다.●

故정영렬은 1934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1969년 광주 Y싸롱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6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1988년 작고 이후 워커힐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에서 회고전이 열렸다. 1962년부터 1986년까지 중앙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 1976년 카뉴국제회화전 커미셔너, 광주현대미술제 운영위원, Ecole de Séoul 운영위원 등을 역임했다. 1968년 문예상(문교부)을 수상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 전시광경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 전시광경

 

 

[Special Artist] 정복수

작가 정복수의 그림은 인간의 육체에서 시작해 육체로 끝난다. 그가 그린 인간의 모습은 벌거숭이다. 심지어 몸 속 머리속까지 보인다. 그의 그림에 나타난 얼굴과 몸은 생물학적 인간의 형상인 동시에 정신과 내면의 초상이다. 지난 40여 년간 한 가지 테마, 즉 인간의 육체에 몰입해 온 정복수의 ‘그림 그리기’는 수행자의 몸짓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이 시대 인간의 비망록이다. 인간의 본질과 원형을 탐구하며 자의식의 심연을 드러내는 작가 정복수의 작품세계를 살펴본다.

욕망의 탈주선을 따라 그린 욕망지도, 몸 지도

고충환  미술비평

느끼는 사람에게 삶은 비극이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삶은 희극이라고 했다. 느낌으로 사는 사람에게 삶은 순간순간이 고통의 연속이고, 생각으로 사는 사람에게 삶은 우습지도 않을 만큼 우습다는 얘기다. 느낌으로 산다는 것, 그것은 삶에 밀착된 삶이며 몸으로 산다는 것이다. 생각으로 산다는 것, 그것은 삶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남의 집 불구경 하듯 관망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이 세계를 읽는 코드는 원체는 다중채널이지만, 그 채널은 크게 정신코드와 몸코드로 구분되고 모아진다. 당연히 상대적이지만, 정신코드로 사는 사람이 있고, 몸코드로 사는 사람이 있다. 정신코드가 발달한 사람이 있고, 몸코드가 발달한 사람이 있다.
정복수는 몸으로 사는 사람 같다. 달면 삼키고 쓰면 내뱉는 사람 같다. 겉과 속이 같아서 속이 없는 사람을 생속이라고 한다. 작가는 그런 생속 같다.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믿는 사람 같다. 심성이 투명해서 그럴 일도 없겠지만, 상대에 대한 배려 때문에 속에 없는 말을 하지도 않고 할 줄도 모르는, 그런 사람 같다. 그런 사람은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믿는다고 했다. 그럼, 표면만 보고 표면을 믿는다는 말인가. 너나 할 것 없이 이미지의 정치학이 대세인 시대에, 그리고 그렇게 저마다 이미지로 자신을 포장하기에 급급한 시대에 표면만큼 의심스러운 것도 없음을 다들 안다. 그래서 행간읽기와 이면읽기가 중요한 거다. 그럼 다시, 작가는 표면만 보고 표면을 믿는 사람인가.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정반대다. 그런 사람의 감각촉수는 거의 동물적이기 때문에 우회를 모른다. 대상 자체를 직접 겨냥하고 사물 자체를 직접 향한다. 그래서 행간읽기며 이면읽기랄 것도 없이, 사물대상 자체를 바로 꿰뚫어본다. 뭐 직관이며 혜안이랄 것까지는 없을 것 같고, 생속(속이 따로 없는)이 생속(사물대상의 진상)을 알아보고, 투명한 것이 투명한 것을 알아채는 것,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정복수는 그렇게 몸으로 살고 몸으로 그린다. 그리고 그렇게 몸을 그린다. 그러므로 그의 몸 그림은 어느 정도는 자기 자신을 그린 것이기도 하거니와, 다른 사람들을 그린 것이기도 하고, 인간일반을 그린 것이기도 하다. 그림 속 사람들은 꼭 누구를 그렸다기보다는, 그저 익명적 주체들을 그린 것이고, 심지어 성기가 아니라면 남녀 구별조차 없는, 그런 그림이다.
다시, 작가는 몸을 그린다. 성기가 노출된 것으로도 알겠지만, 발가벗은 몸을 그린다. 창자와 같은 장기가 적나라한 것으로 보아 거듭 벗겨진 몸을 그린다. 옷을 벗기고 살 껍질을 벗겨낸, 그런 몸을 그린다. 무슨 말인가. 작가는 몸속 장기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몸을 그린다. 투명한 몸? 투명한 사물이 유행이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시계, 투명가전, 투명액세서리가 유행이다. 그 자체가 시대양식 내지 모드로 볼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불신시대를 증언해주는 알레고리처럼 읽히는 것은 왜일까. 표면만 봐선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시대, 온통 정체를 까발리기에 급급하고 연연해하는 시대, 그래서 더 이상 숨을 수도 숨을 데도 없는 시대에 대한 증거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와는 정반대로 온통 이런 이데올로기며 저런 이념, 이런 가치관이며 저런 세계관, 이런 진리며 저런 진실, 이런 상식이며 저런 합리로 첩첩이 중무장한, 그리고 그렇게 중무장 뒤에 숨는 사람들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복수가 그린 투명인간은 바로 이런 시대적 증언으로 인해 비로소 그 의미를 획득한다. 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사람들의 옷을 벗긴다. 특히 자본주의 시대에 옷은 계급과 신분의 기호다. 그렇게 계급과 신분으로 사람들을 포장해주는 위선의 옷을 벗어던지라고 주문하는 것이다. 옷은 그렇다 치고, 살 껍질은 또 왜 벗기는가. 살 껍질은 문명이 만들어준, 또 다른 옷이다. 인간을 인간이게 해주는, 인본주의와 휴머니즘의 이름으로 유통되는, 이성과 상식과 합리라고 새겨진 레테르를 무슨 장신구처럼 치렁치렁 매달고 있는, 도덕과 윤리로 중무장된, 그런 옷이다. 그 옷을 벗겨내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인간이 자연에서 문명으로, 문맹에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억압된 것들이 귀환한다. 야생과 야성, 본성과 본능, 동물성과 식물성, 무의식과 잠재의식, 폭력욕망과 살해욕망, 마술과 주술과 같은 어둠의 자식들이 줄줄이 되돌아온다. 작가는 사람들의 옷을 벗겨 그렇게 귀환한 탕아들을 보고 싶고, 맞이하고 싶고, 방기(방출?)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진인(문명화 이전의 본연의 인간)의 도래며 회복을 보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되돌아오는 것들이 줄줄이 잇지만, 그것들은 크게 욕망과 욕구로 모아진다. 욕망과 욕구는 하나같이 억압된 것이란 점에서 같지만, 욕망이 영원한 결핍으로 조건 지워진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이란 점에서, 그리고 욕구가 근본적으로 해소될 수 있는 생물학적이고 생리적인 현상이란 점에서 다르다. 흥미로운 것은 욕망과 욕구가 반비례한다는 점이다. 욕구가 해소되면 꼭 그만큼 욕망이 억압된다. 욕구를 좇으면 꼭 그만큼 욕망이 허해진다. 욕구가 없으면 덩달아 욕망도 없어지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해소되거나 덜어졌다는 착각을 줄 수는 있다. 불완전하지만, 금욕주의가 의미를 갖는 이유로 봐도 되겠다. 게다가 자본주의 시대에 욕망은 또 다른 의미기능을 수행한다. 자본주의가 약속하는 욕망은 사실은 또 다른 욕망 아님 더 큰 욕망을 불러들이기 위한 계기로서 작동하며, 따라서 욕망 자체는 결코 채워지지도 해소되지도 않는다. 애당초 욕망은 해소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욕망은 존재론적 결핍 아님 존재론적 원형 같은 것으로서 주체가 세계의 맨살과 대면하는 일(현상학적 에포케와 불교의 면벽수행이 겨냥하는)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 실체를 알기도 붙잡기도 어렵다. 생물현상과 유리된 것은 아니지만, 생물현상에 기인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작가는 욕망하는 인간을 그리는가, 아니면 욕구하는 인간을 그리는가. 표면적으로 작가는 욕구하는 인간을 그리고, 생리적 인간을 그리고, 허기진 인간을 그리고, 실존적 인간을 그리고, 지금 여기의 긴박한 인간을 그리는 것 같다. 그리고 욕구로 나타난 그 생리적 현상은 욕망이라는, 보다 근원적이고 존재론적인 뿌리의식에 연동되고, 이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것 같다. 작가는 무엇보다도 지금 여기의 긴박한 인간을 그린다고 했다. 말하자면 작가가 일종의 투시도법을 적용해 그린, 엑스레이필름 기법을 적용해 그려서 보여주는 신체의 부분들, 이를테면 성기와 창자, 눈과 입술은 사실은 이 신체부위들로 대리되는 인간시장의 탐욕과 권력다툼을, 그리고 건전한(건강한?) 욕망의 표출을 그린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마구 남근을 휘두르고 싶다. 죽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법의 입법자가 되고 싶고, 질서의 집행자가 되고 싶고, 권력의 주체가 되고 싶다. 그리고 나는 출세를 위해서라면 누구라도 기꺼이 빨아줄 용의가 있다. 모든 것이 상품으로 심지어 인간마저 상품으로, 통용되는 이 천민자본주의 시대에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나는 기꺼이 너를 밟아줄 준비가 돼 있다. 작가는 그런, 상대를 향해 날름거리는 세 치 혓바닥을 그리고, 상대를 유혹하는 고혹적인 입술을 그리고, 전시만으로도 상대의 기를 죽이기에 충분한 단단한 놈을 그린다. 그리고 건강한 성욕과 건전한 식욕을, 축복처럼 터지는 성기의 환희와 절정을 그리고 창자의 추억을 그린다.

 나무에 유채 110.4×89.5×6.5cm 2004~2010

<존재의 집> 나무에 유채 110.4×89.5×6.5cm 2004~2010

 캔버스에 유채, 오브제 259.1×193.9×6.5cm(입체 143×40×20cm) 2008~2011

<꽃이 떨어지는 시간> 캔버스에 유채, 오브제 259.1×193.9×6.5cm(입체 143×40×20cm) 2008~2011

존재의 비망록
창자의 추억? 작가는 몸으로 살고 몸으로 그린다고 했다. 여기에 작가는 몸으로 보고 몸으로 생각하고 몸으로 느끼고 몸으로 욕망한다. 작가는 말하자면 온몸으로 본다. 그래서 몸 전체에 눈이 달려있다. 작가는 또한 온몸으로 욕망한다. 그래서 몸 전체가 성기다. 무슨 말인가. 작가에게 욕망의 지점들은 특정의 신체부위에 연루되지도 한정되지도 않는다. 욕망의 탈주선을 따라 욕망의 성분들은 몸 바깥쪽으로 확장되고, 몸 안쪽으로 연장되며, 의식 너머로 범람하고, 무의식을 파고든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신체 부위는 더 이상 전체와 부분과의 유기적인 관계에 예속되지 않고, 오로지 욕망의 성분들에 연동될 뿐이다. 무슨 말인가. 작가는 신체를 고정된 실체로 보지 않는다. 대신 욕망의 성분 여하에 따라서 항상적으로 이행 중인 대상, 자유자재로 재편되고 재구성되고 재구조화되는 대상으로 본다. 여기서 대상은 곧 몸에 해당하고 주체에 해당한다.
다시, 무슨 말인가. 작가의 자의식은 포스트 모더니즘적이다. 모더니스트와 포스트모더니스트는 어떻게 갈리는가. 모더니스트는 세계가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로서 구조화돼 있고, 주체 역시 그 전체를 한눈에 조망하는 총체적 인식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에 반해 포스트모더니스트는 이런 세계의 형이며 주체의 꼴이 사실은 신념 내지 욕망일 수는 있어도 그 자체 사실이 아니라고 본다. 말하자면 그에게 세계는 파편화돼 있고, 주체 역시 조각나 있다. 그래서 겨우 부분인식만을, 그러므로 불완전인식만을 할 수가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맥락 속의 사유가 가능할 뿐이다. 맥락 밖에는 아무것도 없고, 텍스트 밖에도 아무것도 없다. 그저 이런 맥락 아님 저런 맥락 속에서 저마다의 세계를 짓고 공 굴릴 뿐. 거대담론과 대서사와 같은 거시적인 비전이 흘러간 옛 노래로 치부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바로 이런 연유에서다. 작가의 그림에서 신체가 마구 절단되고 자유자재로 결합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저 신체를 그린 것이라기보다는, 바로 욕망의 탈주선을 따라, 욕망지도를 그린 것이고 몸 지도를 그린 것이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창자 끝에 매달린 성기를, 허벅지 안쪽에 숨어 있는 입술을, 가슴 위에 정박한 입술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작가는 이런 그림이 지겹다. 허구한 날 욕망을 직시해야 하고, 항상 의식의 성기(레이더?)를 곧추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지긋지긋한 자기 그림을 밟아달라고 주문한다. 그렇게 밟아서 그림이 더럽혀질 때 비로소 그림은 완성된다고 보고, 최소한 그림이 의미를 획득한다고 본다. 무슨 말인가. 작가가 그린 그림을 밟는다는 것은 작가를 밟는다는 것이다. 마조히즘인가? 마조히스트인가? 맞다. 그러나 그 마조히스트는 감각적 쾌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인식을 향하고 존재인식을 겨냥한다는 점이 다르다. 욕망을 외화하고, 욕망을 직시하고, 욕망을 죽여라. 그러면 비로소 욕망(불교에서의 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을 것이다. 다만, 죽음을 담보할 때만이 그렇다는 전제를 기억할 일이다. 조르주 바타유 식으로 말하자면 마조히스트는 작은 죽음이고 예비적인 죽음이다(바타유는 에로스를 작은 죽음이라고 했다).
작가는 리어카에 화구를 싣고 전국을 주유하면서 오로지 그림만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한편으로 그림이 지겹다면서, 다른 한편으론 오로지 그림만을 그리고 싶단다. 이 무슨 모순화법이고 이율배반인가.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볼 일은 아니다. 지겹기 때문에 그려야 하고, 지겹기 때문에 살아야 한다. 할 줄 아는 것이 그림밖에 없고,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그림밖에 없고, 세상에 복수할 수 있는 무기가 그림밖에 없기 때문이다. 니체는 미학이 아닌 그 무엇으로도 이 삶은 정당화될 수가 없다고 했다. 태어난 이유를 해명해주는 것으로 치자면 오로지 미학밖에는 없다는 말이다. 쥐가 궁지에 몰리면 내면으로 숨는다고도 했다. 내면 말고 따로 숨을 데도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내면과 미학은 하나로 통한다. 그러므로 니체에게 미학은 더 이상 삶을 아름답게 해주고 삶을 의미 있게 해주는 휘황찬란한 무엇, 의미심장한 무엇이 아니었다. 미학이란 자기 내면을 파고들고, 삶을 직시하는 것을 의미했다.●

정복수는 1955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 1985년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했다. 1979년 청년작가회관에서 첫 개인전 <바닥畵-밟아주세요>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20회 여회 개인전과 <한국미술 -인간 동물 기계전>(국립현대미술관 1997), <1980년대 리얼리즘과 그 시대>(가나아트센터, 2001) <다시보는 1970-80년대 한국미술>(서울시립미술관, 2012) 등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현재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작업실에서 작업한다.

20

<하늘로의 여행> 캔버스에 유채 72.7×90cm 2008~2011

 

[World Topic]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512 Hours>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c)를 어떤 작가로 정의해야 할까? 퍼포먼스 아트의 대모? 전위의 여전사? 특정한 정의를 떠올리기 힘들 만큼 그녀의 작업세계는 극적이다. 그녀의 새로운 퍼포먼스 <512 Hours>(6.11~8.25)가 실연된 서펜타인 갤러리(Serpentine Gallery) 앞은 그녀와 함께 퍼포먼스에 참여하고 싶은 관람객들로 장사진을 이뤘다고 한다. 이 퍼포먼스에 직접 참여한 본지 통신원의 전언을 싣는다.

지가은  골드스미스 대학 비주얼 컬처 박사과정

올해 68세를 맞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c)는 런던 서펜타인갤러리의 아담한 전시 공간에서 관객들을 맞이한다. 작가는 62일 동안 갤러리가 오픈하는 주 6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총 512시간 동안 오로지 작가 자신과 관객이 만들어가는 퍼포먼스를 마련했다. 직접 갤러리의 문을 열고 밖에 길게 줄지어 선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벼운 아침 인사와 악수로 환대한다. ‘빈 몸으로 오라’는 작가의 요구에 따라 관객은 가방, 시계, 휴대전화, 카메라 등 모든 소지품을 전시장 밖에 내려놓아야만 그녀가 준비한 ‘빈 공간’ 안으로 들어설 수 있다. 입구에서 건네 받은 헤드폰을 쓰면 주변의 소리가 차단된다.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눈감은 채 앉아 있거나 벽을 보고 서서 부동자세이다. 더러는 눈을 가리고 한걸음씩 천천히 내디디며 소리와 손끝의 감각에만 의지한 채 갤러리 공간을 보행 중이다. 모든 것이 슬로 모션이다. 마치 엄숙한 제의에 참여하듯 관객들은 진지하고 행동 하나하나가 정성스럽다.
관객들은 아브라모비치가 지시한 미션을 수행 중이다. 갤러리 안에는 몇 가지 소품이 준비되어 있지만 미리 정해진 계획이나 스크립트는 없다. 작가는 이제 막 이 의식에 참여해 방황하는 낯선 관객에게 다가가 눈을 마주치고, 손을 이끌어 데려간 곳에서 귓속말을 속삭인다. 발을 맞추어 걷기도 하고, 등에 손을 가만히 얹고 체온을 느끼며 함께 한참을 서있기도 한다. 그녀뿐만 아니라 관객을 이끄는 안내자 퍼포머들도 이에 동참한다. 이들은 의자에 앉아 있던 관객의 손을 붙잡고 중앙에 자리한 낮은 단상 위에 올라 서서 함께 명상을 하기도 하고, 간이침대들이 마련된 방으로 데려가 이불을 덮어주며 편히 쉬라고 권하기도 한다. 물론 관객 스스로 자신이 원하는 행위에 몰입할 수 있다. 머무르고 싶은 만큼 머무르다가 언제든 떠날 수 있다.
걷고, 서고, 앉고, 자고, 생각하는 평범한 행위와 일상이 이 안에서는 중차대한 임무가 된다. 모든 디지털 기기와 시계마저 반납하고 시간 감각을 잊은 채 반복적으로 자신의 몸짓과 공간 속에 몰입해가는 과정은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훈련이 필요하며 계기가 주어져야 한다. 여기에는 참여자 스스로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기를 독려하는 작가의 메시지와 의지가 담겨있다. 퍼포머와 관객의 친밀한 관계와 교감을 바탕으로 하는 512시간의 여정을 통해 아브라모비치는 내면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는 안내자 역할을 자청하는 것이다. 그녀가 참여한 개개인의 내면의 문을 두드리는 것은 어떤 연유일까.
‘퍼포먼스아트의 대모’라 불리는 아브라모비치의 1970년대 초기 퍼포먼스는 꽤나 과격했다. 퍼포머와 관객의 관계 탐색도 지금보다 훨씬 과격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대표적인 초기작으로는 <리듬 0(Rhythm 0)>(1974)이 있다. 관객은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빗, 음식, 총, 장미, 채찍, 립스틱과 같은 72개의 각기 다른 물건을 자유자재로 작가의 몸에 사용할 수 있고, 작가는 어떠한 반응도 없이 6시간 동안 관객에게 몸을 내맡겼다. 처음엔 머뭇거리며 행동을 주저하던 관객들도 시간이 갈수록 점점 과감해졌다. 옷을 벗기는가 하면 장미 가시로 몸에 상처를 내는 등 적극적으로 행위에 가담했고, 급기야 한 관객은 그녀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기도 했다. 아브라모비치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위험한 상황에 자신을 몰아넣고 신체적 취약성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퍼포먼스를 해왔다. 그녀의 작품에서는 신체 자체가 도구이자 매체이고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연결 통로가 되었다. 이에 관객들을 목격자로, 행위자로 참여시켜 직접적이고 직설적으로 소통하는 방식을 취한다. 목소리가 안 나올 때까지 소리 지르기, 고통을 느끼지 못할 때까지 자신의 몸에 채찍질하기, 몸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키거나 극도로 흥분하게 만드는 향정신성 약제 투여하기 등 때로는 육체와 정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가학적인 퍼포먼스도 서슴지 않았다. 작가는 이러한 고통의 감내에 대해 신체적 한계 너머에 있는 의식의 영역에서 다른 차원의 자신과 그 내면을 바라보고자 하는 의지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여기에는 아브라모비치의 어린 시절 기억과 문화적 뿌리가 깊게 자리한다. 1946년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Belgrade) 태생인 아브라모비치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르티잔(Partisan) (일명 빨치산)으로 구 유고슬라비아 건국에 앞장선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유고연방의 티토(Josip Broz Tito) 대통령 정부에서 요직에 오른 부모님 덕에 유복했지만, 공산주의와 동방정교회 전통의 엄격한 생활방식과 어머니의 강박적인 훈육 방식으로 억압된 유년기를 보냈다. 유고연방이 붕괴된 이후에도 발칸반도는 다양한 민족과 종교, 이념의 혼재로 갈등과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크로아티아 전쟁(1991-1995), 보스니아 내전(1992-1995), 코소보 사태(1993-1999)를 겪으면서 여러 민족국가로 분리되었다. 아브라모비치는 조국의 내란과 민족분열, 전쟁과 학살이라는 비극적 역사를 목격하면서 폭력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몸으로 치열하게 표현하는 제의적이고 상징적인 퍼포먼스에 몰입하게 된다. <토마스의 입술(Lips of Thomas)>(1975/2005)에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상징인 붉은 별을 자신의 배 위에 한 줄씩 면도날로 새겨 상처를 내고, 피를 흘리며 얼음으로 된 십자가 위에 알몸으로 누워 고통을 견뎌내다가 얼어붙은 자신의 등에 사정없이 채찍을 내려치는 그녀의 모습은 자신의 조국과 민족이 자행한 일에 대한 처절한 책임 의식을 지고 단죄를 거행하는 여전사이다. 같은 맥락에서 <발칸 바로크(Balkan Baroque)>(1997)에서는 소뼈 더미 위에 앉아 유고슬라비아 민요를 부르며 4일 6시간씩 피를 닦아냈다. 이 퍼포먼스로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깨어있는 한 개인이자 예술가의 목소리와 역할이 어떻게 현실을 적나라하게 직시하게 하는지, 또 어떻게 타인의 의식에 강렬한 울림을 줄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Marco Anelli Marina Abramovic Photograph © 2014 Marco Anelli

Marco Anelli Marina Abramovic Photograph © 2014 Marco Anelli

개인의 의식과 내면을 깨우다
아브라모비치는 신체적 고통과 위험을 감수하는 극단적인 퍼포먼스에서 점차 행위가 일어나는 시간성과 지속성, 여기에 참여하는 관객들과 맺는 관계의 과정에 더 집중하게 된다. 부드럽고 조용하지만 힘있고 따뜻하게 관객과 교류하고 퍼포먼스에 참여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 2010년 뉴욕 모마(MOMA)에서 열린 회고전 <예술가가 여기에 있다(The Artist is Present)>에서 아브라모비치가 보여준 소통의 방식이다. 하루 8시간씩 총 736시간 동안 침묵 속에 관객과 마주 앉아 눈빛으로만 소통하는 퍼포먼스에 뉴욕 시민들은 뜨거운 반응을 보냈다. 전시 기간 누적 관객 850만 명이 다녀갔다. 긴 기다림 끝에 그녀 앞에 앉은 사람들은 생전 처음 만나는 한 예술가에게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비밀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조용히 눈물을 훔치며 일어나기도 했다. 작가는 그저 아무 말없이 이를 들어주고 눈빛으로 화답할뿐이다. 조건 없는 만남이고 응시이고 경청이다. 관객들은 역시나 자신이 원하는 시간만큼 작가와 침묵의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마음 깊숙한 곳을 파고드는 그녀의 눈빛과 에너지 앞에 마음의 빗장이 풀리는 것일까. 아브라모비치의 옛 연인이자 동료인 울라이(Ulay)의 깜짝 등장으로 퍼포먼스의 여운은 더 진하게 남았다. 울라이라는 예명으로 더 잘 알려진 이 서독의 퍼포먼스 아티스트 우베 라이지펜(Frank Uwe Laysiepen)과 아브라모비치는 1976년부터 1988년까지 ‘다른 사람들(the others)’이라는 그룹명으로 활동하면서 공동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둘은 12년간의 공동 행보를 뒤로하고, 90일 동안 중국 만리장성의 양 끝에서 걸어와 중간에서 만나 포옹하고 각자의 길을 떠나는 퍼포먼스 <연인들(The Lovers)>을 끝으로 이별했다. 모마에서 두 사람은 30년 만에 재회한 것이다. 퍼포먼스 내내 담담했던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고 테이블 위에서 울라이와 손을 맞잡았다. 1분 남짓한 이 장면은 많은 사람의 마음에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모마에서의 퍼포먼스는 얼마나 많은 이가 이런 애정어린 응시와 공감을 원하는지를 증명한 사건이었다. 이후 3년 만에 런던에서 열린 <512시간전>은 어떠한 방해 요소없이 가장 간결한 환경에서 관객과 조우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순수한 에너지의 상호 전이이다. 아브라모비치는 지난 25년간 자신의 퍼포먼스들이 이러한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표현했다. 그간의 퍼포먼스들과는 달리, 매순간 즉흥적으로 진행되는 <512시간>의 대장정은 시간의 흐름을 시계가 아니라 몸으로 느끼면서 점진적으로 지금, 여기 나의 의식의 세계에 오롯이 집중하는 것, ‘가득 찬 빈 공간’에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존재하는 에너지를 스스로의 몸짓으로 일깨우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물론 내면의 반항이 뒤따른다. 필자 역시 첫 방문에는 도무지 이 상황 자체에 녹아들기가 어려워,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시늉만 하다가 어색한 몸사위와 더딘 시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일찍 자리를 피했다. 다시 찾아간 두 번째 방문에서는 갤러리로 이르는 길에서부터, 입장하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에도 자발적인 참여자가 될 마음의 준비를 시작했다. 그렇게 완전히 준비된 몸과 마음으로 작가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묵직한 존재감과 카리스마에 압도되었다가도 이내 온기 찬 진심을 전달 받았다. 차차 다른 참여자들과 함께 공간의 기류를 나누고 있다는 촉각, 후각적 교감이 일어나고, 타인을 의식하는 단계를 지나면 오롯이 내 자신과 시간의 흐름만이 남는다. 기다림의 시간과 행위 자체에 몰입하는 일련의 과정이 모두 퍼포먼스의 일부가 된다.
스마트폰, SNS와 메신저가 손에서 떨어질 날이 없는 현대인은 얼굴을 마주하고 있어도 외로운 사람들이다. 타인과 직접적인 촉감 소통을 하거나,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할애하는 데에는 인색하다. 타인의 아픔이나 고통에 무관심한 ‘공감’ 능력 상실의 시대에 사는 우리는 이미 자폐적 소통에 익숙한지도 모르겠다. 목적과 명분을 잃어버린 전쟁과 인종갈등은 여전히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고, 재난의 뒤편에 드리워진 무력감의 생채기도 현재진행중이다. 아브라모비치는 개개인의 의식과 내면이 깨어있는 순간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신호탄이자 강력한 에너지가 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 의식들의 상호 연대가 이루어질 때 진정한 공감이 일어나고 소통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상황을 방관하는 관찰자가 될 것인가 변화를 주도하는 참여자가 될 것인가는 결국 스스로의 선택이고 자각이다. <512시간>에서 그녀가 관객과 함께 이루고자 하는 지점은 바로 이렇게 스스로의 정신을 끊임없이 단련해가는 내면의 회복이고, 공감의 회복이다.●

Marina Abramovic  퍼포먼스 장면 Serpentine Gallery, London (11 June–25 August 2014) © 2014 Marco Anelli

Marina Abramovic 퍼포먼스 장면 Serpentine Gallery, London (11 June–25 August 2014) © 2014 Marco Anelli

 

[New Face 2014] 추미림

디지털 시대의 향수

픽셀아티스트, 시각예술가, 디자이너 등 추미림을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유독많다.  그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연관검색어는 픽셀아티스트다.  이 표현은 한 매체에서  작가를 소개하면서부터 시작되었지만 사실 작가가 이 단어를 언급한 적은 없다. 처음엔 마치  픽셀만을 작업의 중심으로 삼는 듯한 어감을 주는 픽셀아티스트란 꼬리표에 거부감을 느끼기도 했다. 픽셀이란 컴퓨터 화면의 이미지를 구성하는데 기본이 되는 단위이다. 조각조각 쪼개진 이 작은 단위를 반복시켜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는 자신의 일상이다.
사람들이 정보를 검색 및 공유할 수 있는 정보 공간을 뜻하는 ‘웹’ 혹은 ‘인터넷’과 그녀의 생활공간인 ‘도시’가 그녀의 일상무대다. 이 두 장소는 가상과 현실을 넘어 차가운 매체로서 이해되고 해석되곤 한다. 그러나 도시에 성장기반을 둔 젊은 세대에게 어린 시절의 추억은 도시 내부에서 나타났고, 아련하고 아름다운 향수는 도시 속에서 벌어진 해프닝들로 가득찼다. 자연은 자연스럽지 않다. 그들에겐 오히려 길게 늘어선 아파트, 높은 빌딩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스카이라인, 그 사이로 뻗어나오는 야경이 일상속 자연스러운 생활공간이다.
웹 또한 마찬가지다. 어린 시절부터 인터넷 세상에서 궁금증을 찾아 헤매고 많은 사람과 소통하는 매개 역할을 해온 세대, 이들에게 웹공간은 차갑고 건조한 매체가 아니다. 웹은 나와 나를 둘러싼 환경으로 가상과 현실 속의 나 사이를 끊임없이 이어준다. 작가는 디지털 환경에서 발생하는 향수에 주목했다. 시뮬라크르의 세계를 시뮬라시옹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작가의 목표는 아니다. 웹은 복제시대의 원본성을 잃은 무미건조한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디지털 세대는 웹상에서 자신을 투영하며 살아간다. 개인의 감성을 반영하고 다수의 감정이 오고간다. 심지어 오프라인의 물리적 감각이 웹에서 구현된 자아에 전이되기도 한다.  그리고 온라인상에서 감정표현은 오프라인상의 ‘나’에게 다시 반영된다.
10월 1일부터 21까지 윌링앤딜링에서 열리는 개인전에서 선보이는 작품은 이런 감정교차가 두드러진다. 어느 날 작가는 자신이 거주했던 파리 베르사유 지역을 인터넷 지도로 검색했다. 부감으로 찍힌 위성사진 속 도시는 자신이 유학생으로서 느낀 외로움과 고독이 깃든 공간이 아니었다. 화면 속에 비친 위성사진을 보면서 작가는 아름다운 기억들이 가득한 베르사유를 떠올렸다. 가상현실 속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감성, 왜곡되고 선택되는 기억을 작가는 가장 단순한 단위인 픽셀로 재탄생시켰다. 기억을 재조합하듯 지도는 자신의 흔적을 재확인시키고 재배열했다.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추미림은 디자인과 순수미술 사이의 경계에서 고민했다. 영화 포스터회사, 게임 회사에서 근무하기도 했던 그녀는 기존의 카테고리 안으로 밀어넣어 작가를 정의하려는 환경에서 갈등했다. 새로운 길을 찾고자 프랑스로 유학을 간 그녀는 장르 간 활발한 교차를 당연시하는 프랑스 교육과정에서 무수히 나눠지고 교차 및 집합하는 아이덴티티의 가능성을 엿보았다. 현재 작가는 미술전시 외에도 다양한 상업장르와의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하고 있다. 각종 패션 및 뷰티 제품과의 협업이 대표적이다. 작가로서의 정체성이 흐려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을법한데 작가는 “기존의 제품과 내 작업 사이의 콜라보레이션보다 둘 사이의 유기적이고 창조적인 제3의 무엇인가를 만들 수 있는 협업을 해보고 싶다”며 오히려 협업 자체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방식의 아쉬움을 토로한다.
추미림은 특정 범주로 구분되기를 거부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는 지극히 일상적인 주변 환경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우리에게 함께 나누기를 제안한다는 점이다.
임승현 기자

추미림은198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단국대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베르사유 보자르에서 수학했다. 서울의 픽셀스페이스, 한국디자인공예문화진흥원 윈도우 갤러리, 싱가폴의 갤러리 스테프에서 두차례 개인전을 가졌다. 2012년부터 K-SWISS, LG 생활건강 등과 다양한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하고 있다.

 혼합재료 50x50cm 2014

<양평동> 혼합재료 50x50cm 2014

 

[New Face 2014] 조은주

함께 있는 외로움

흔히 작가 조은주를 ‘카페를 그리는 동양화가’로 인식하기 쉽다. 하지만 작가는 카페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의 관계를 표현한다고 강조한다. 한 공간에 있는 사람들의 관계를 담아내기 위해 다양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 자연스럽게 사람이 모이고 흩어지는 공간으로서 카페를 선택하게 된 것이다. 같은 테이블이라도 어떤 사람들이 앉아 있느냐에 따라 다른 풍경이 된다. 카페마다 인테리어가 다르고 그 속에 각기 다른 사람들을 담아내면서 그녀의 그림은 다양한 변주가 가능해진다.
조은주는 인간의 다양한 감정과 복잡한 심리 상태 중에서도 특히 친밀해 보이지만 결코 친밀하지 않은 상태를 표현한다. 외로움은 혼자 있을 때보다 누군가 곁에 있지만 제대로 소통이 되지 않을 때 극대화된다. 그녀는 그 과정에서 느끼는 아쉬움이나 우울함이 바로 현대인의 일상적인 감정이라고 말한다. “카페에서 사람들을 자세히 관찰하다보면 연인인데도 생각보다 눈을 마주치고 있는 시간보다 딴 행동을 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어요. 같은 공간에서 함께 있어도 완벽하게 교감이 이루어지지는 않죠. 어쩌면 현대인은 항상 외로움을 느끼는 것 아닐까요?”
심지어 카페에 혼자 온 사람들조차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경우는 드물다. “휴대전화로 다른 사람과 끊임없이 메시지를 주고받거나, DMB를 통해 영상을 본다거나 계속해서 누군가와, 무엇인가와 소통하기를 원하죠. 실제로 그런 광경을 볼 때면 ‘사실은 혼자 있고 싶지 않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사회적으로 수많은 사람과 연결된 것 같지만 정작 삶은 헛헛하기만 하다. 그녀의 그림 속 인물들은 먼지 입자처럼 건조하고 영혼이 없는 것처럼 공허해 보인다.
조은주의 작업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비현실적으로 강렬한 색감이다. 다양한 색을 활용하던 그녀는 최근 더 케이갤러리에서 열린 네 번째 개인전 <개인적 공간>(9.3~16)에서부터 색을 절제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한 화면에 많은 것을 담기보다 하고 싶은 말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전시를 했을 때 어떤 분이 저에게 ‘굉장히 따뜻한 색을 썼는데 차갑네요’라고 말했는데 굉장히 기분이 좋았어요. 제가 표현하고 싶은 지점이 바로 그거거든요.” 조은주는 장지에 아크릴로 채색할 때 물감을 섞지 않는다. 대신 아주 묽게 칠하기 시작해 원색 그 자체가 두드러지도록 배경색의 경우 30번 이상 쌓아 올린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처럼, 물감과 물감의 관계 역시 결코 융합되지 않은 모습 그 자체를 표현하기 위해서다.
언젠가부터 조은주는 자신의 작업을 풍속화라고 표현하기 시작했다. “풍속화란 당시 사람이 어느 장소에서 무엇을 하는지를 표현한 그림이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를 은밀하게 관통하는 풍속화를 그려 나만의 언어를 느낄 수 있는 흥미로운 작업을 만들고 싶어요. 그런 점에서 커피 한잔을 사고 잠시 머무르며 사람들이 관계 맺는 방식이 흥미로워요.” 하지만 그녀는 지금 다른 공간도 열심히 물색 중이다. 일단 사람이 모이는 장소는 모두 관심의 대상이다. 그중에서도 호텔 로비나, 공항, 기내 등은 무료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잠시 빌린다는 개념때문에  특히 매력적이라고 말한다.
이슬비 기자

조은주는 198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덕성여대 동양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현재 양주시립 777미술창작스튜디오 입주 작가로 활동 중이다. 네 번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포천아트밸리, 갤러리 이레, 성남아트센터 등에서 열린 그룹전에 참여했다.

조은주 (3)

더 케이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개인적공간> 광경<어떤, 기다림>(오른쪽 벽면 가운데) 장지에 채색 130.3×162cm 2014

 

 

[Exhibition Topic] 올해의 작가상 2014

 

 

국립현대미술관과 SBS문화재단 공동 주최로 한국 현대미술의 역량 있는 작가들을 지원하고 그들의 신작을 선보이는 <올해의 작가상  2014전>(8.5~11.9)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다. ‘2014 올해의 작가’ 후보 작가로 구동희, 김신일, 노순택, 장지아가 선정돼 동시대 삶과 예술을 바라보는 뚜렷한 주제의식과 각자의 고민이 반영된 작품을 펼쳐보인다.
취재・인터뷰 이슬비 기자

 

구동희 | 재생길 Way of Replay

구동희 (8)

“다의적으로 체험하는 시간”

이번 작품의 제목인 ‘재생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의적으로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체감시간을 뜻하며, 다시 유쾌하거나 불편하거나 놀아보는 공간적 성격, 지시하는 말 그대로 되풀이되는 방법 자체를 전시현장에서 물질적으로 구현하면서 이 제목을 사용하게 되었다.
형광 노랑색 천으로 짜인 구조물은 한눈에 들어오지 않고, 높낮이도 다양하게 만들어졌는데 관객의 어떤 공간 체험을 유도하고 싶었는가? 형광색은 작업시기가 무더운 피서철과 겹치면서 작업의 외양이 전시장 층고 대비 위아래로 꽉 차 인공적으로 부풀거나 과장돼 보이는 측면이 재미있을 것 같아 택하였다. 관람자의 체험이 이 작업의 완결성을 담보로 한 절대적 조건이나 콘셉트는 아니지만, 이왕이면 상상컨대 각각의 신체가 전시물에 안전하게 적응하는 스스로의 움직임과 무엇을 보았는가 하는 인식의 시차를 의도적으로 분리해 전후 상황을 조합하는 기회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서울대공원의 인상과 경험은 작품에 어떻게 반영됐는가? 전시장이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이보다 더 기억이 나는 장소는 개장 후 대학교 재학 시까지 방문하던 서울랜드였다. 현장 가까이 있기 때문에 전시 준비 차 기구 탑승자 관점을 촬영하여 당시에는 뭐가 될지도 모르는 전체 작업의 배후 풍경이나 트랙 내 보행 시 시야를 간섭하는 요소로 사용하고자 했다. 산 중턱 전시장으로 향하는 도로 또한 이러한 기구들을 연상케 했다. 형광색 구조 중 커브 값이 커서 자세가 바뀌거나 전체 형태 조감 시 곡선이 부각되는 세 군데에 각기 다른 종류의 투 채널 트랙 운동 영상들이 들어가 있고 벽 투사용 영상에는 운동축이 다른 기구, ‘도깨비 바람’ 하나가 있다.
당신의 작업에 회전이나 나선형 구조가 자주 등장한다. 이 같은 운동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가? 롤러코스터는 원래 제자리로 돌아오는 운동이지만 <재생길>은 마지막에 점프라는 수직운동을 통해서 지면에 착지한다. 관람객의 동선을 어떻게 고려했나? 앞에 언급한 형상들은 운동의 궤적이나 패턴을 관찰하게 하거나 발생학적인 단서로서의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의도치 않게 전작들에 겹쳐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외양상 이러한 모습은 확실히 시작점과 끝점의 경로를 연상케 하고 시간성을 주입하고 거리대비 속도 등을 시각적으로 표상하여 상태변화를 왜곡하기에도 편리한 측면이 있다. 놀이동산의 운동기구도 제자리로 돌아오고 <재생길>의 운동주체도 별일 없다면 결국 돌아올 것이다. 다만 설치 전 도면제작 과정 중 관람객의 동선은 꼭 출입구 쪽 트랙에서 시작하여 막다른 벽을 마주하게 한 후 트램폴린에 낙하하게 한다는 강박적 관람 매뉴얼은 없었고 커다랗게 노출된 형광색 구조를 시각적 가이드라인으로 잡고 이의 안과 밖에 관람객의 적극적 판단 개입을 통해 위치나 경로를 취사선택하게끔 하는 분기점을 배치해 놓았다. 전시장 내 사회적 거리만 서로 지킨다면 무언가 볼거리를 찾아 급히 돌아다녀야 할 이유도 없으며 가만히 앉아 딴 생각을 하여도 무방하다.
관객이 직접 구조물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안전모를 쓰고 관람객 안전수칙 동의서에 사인을 해야 한다. 미술관이라는 제도권과 당신이 상상한 작품의 이상적인 경험 사이에서 어떤 고민을 했는가? 작업 구상 단계부터 안전모와 안전수칙 동의서를 전시장 관람을 전제로 관객에게 요구할 생각은 없었다. 불특정 다수인 관람자 보호와 작품 보존의 두 가지 기능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미술관 제도의 행정적 측면과 창작과정의 확장성에 주로 가담하는 작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관람객의 범주는 큰 편차가 있다는 것을 전시 설치과정 중에 발견했다. 물론 양측 모두 안전에 대한 이슈가 가장 민감한 현안이라는 인식을 공유했으나 이 내용을 전시 현실에 적용하는 방법은 다소 달랐다. 최대다수의 최저 사고발생률을 염두에 두는 공공기관과 현장에서 작업의 질적 변화를 꾀하는 나의 입장이 서로 달라 작품 제작과정에 갈등, 협상, 타협이 개입되면서 최종 결과물이 도출되는 데도 영향을 끼쳤다. 공적제도는 무사안녕과 안전을, 나는 모험과 자율성을 지지하는 묘한 입장차의 대상 자체가 작품과 가상의 관람객 간 물리적 충돌이라는 상황적 조건이었고, 이는 전시작 <재생길> 전체의 서브텍스트로 또한 적용되었다. 어찌 보면 현실을 마주하는 나의 무의식이 제안할 때 제작과정에서 이미(?) 예측된 우연의 결과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의 이상은 미술관 내 관람객의 신체에 제도적 부가장치나 작업의 연장으로서의 어색한 관객 참여형 매뉴얼을 아무리 덧대는 지원 혹은 통제시스템을 마련하더라도 경계에 대한 관람객의 공간 지각적 판단과 시각경험은 앞으로도 절대적으로 수동적 위치에 놓이면 안 된다는 입장이다.
전시장 곳곳에 설치된 물잔과 ‘손 있는 날’이란 문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 담긴 와인잔은 관람자의 위치표지이자 전시 작품의 일부이다. 즉 전시 기간 중 불완전한 관계를 보여주는 매개물이다. ‘손 있는 날’은 말 그대로 음력기준으로 이삿날을 정할 때 운수와 방위를 예측하는 방법이다. 여기서 ‘손’은 손님 혹은 마가 끼어 운수 없음을 뜻하며 전시를 위해 공간을 가로지르는 유동적인 영역표시이자 대물 대인 간 상호 충돌 시 언제라도 뒤집힐 수 있는 경계면으로 사용하였다.
미술과 경쟁, 수상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누군가를 걸러내야만 하는 경쟁을 피할 수 없는 현실에 살고 있다. 미술 내 경쟁 또한 현실의 일부이더라도 미술 존재 자체에는 큰 의미가 없다. 수상제도는 인간이 고안해낸 성찬의 기념이지만 그 변별력이 모호해지면 가끔 예술가의 근시안적 보험이나 적립불가의 할인 포인트제도 같기도 하다.
당신이 생각하는 작가적 태도란 무엇인가? 잘 모르겠다.앞으로의 계획은? 집을 치우고 가을 개인전을 준비해야 한다.

구동희는 197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조소과와 예일대 미술대학원 조소과를 졸업했다. 서울, 슈투트가르트, 뉴욕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2012 미디어시티 비엔날레>, <애니미즘>(일민미술관) 등에 참여했다.

 

김신일 | 이미 알고 있는 Ready-known

김신일 (7)

“예술은 결국 마음에 대한 이야기”

작품에 문자가 많이 등장하는데 어떤 의미인가? 문자들이 겹쳐져 있어서 읽기 어렵지만 자세히 보면 읽을 수 있다. 어떤 생각을 반영한 것인가? 문자는 이성의 대표적 시각물이다. 우리는 언어, 문자를 수단으로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고 타인과 소통하려 한다. 그러나 우리가 예술 활동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남과 소통하려 함은 아마도 언어적 요소만으로는 그 표현에 한계가 있음을 반증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여전히 문자, 언어가 가진 힘과 작용에 많은 장점이 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언어적 소통과 예술적 소통을 합하려 노력한다. 어쩌면 사회적 약속으로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문자는 예술의 한 기능인 소통과도 통하므로 문자를 예술에 끌어들여서 좋지 않을 것이 없다.
문자는 우리가 경험하는 수많은 형상을 우리 식으로 단정하는 데 사용된다. 그것이 장점도 있지만 이미 내려진 정의 내에 사고가 갇힐 수 있는, 현상을 이해하거나 서술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놓은 것이 오히려 현상에서 멀어진 정의 자체만 난무하게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할 수 있다. 이미 정해진 정보 내에서 파악되고 소통되어 정의된 것 이상으로 벗어나기 힘든 문자의 틀은 hot-media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런 hot-media를 cool-media로 바꾸는 작업이 문자 겹침이라 할 수 있겠다. 읽기 어려운 문자를 통해 적극적 참여를 유도하고 이성적으로 읽어서 파악되는 문자가 아닌 보다 직관적으로 파악되길 바란다. 마치 시가 언어적 요소로 표현되지만 언어의 한계를 넘나드는 것과 같이 문자작품을 통해 시와 같은 역할을 해보려 한다.
‘이미 알고 있는(Ready-known)’이라는 이번 전시 주제와 전시를 위해 선택한 세 단어, ‘마음’과 ‘믿음’과 ‘이념’의 관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음이 어떤 것일까?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가만히 보면 마음에 따라 선과 악이 나누어지고 때로는 대립이 때로는 화합이 나오기도,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술도 결국 크게 보거나 작게 보면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게 아닌가 싶다. 어떤 출발점이 되는 마음을 알아야 더 자유로운 생각과 표현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스스로에게 물어봐도 마음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는 없었다. 상황마다 다르게 정의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정의를 내리기보다는 마음의 작용을 살피려 한다. 작용 없는 정의는 정의에만 머물기에 여전히 허공에 떠있는 구름을 잡는 듯한 생각이 들어서다. 마음의 작용을 생각하다가 다양함이 ‘있는 그대로’ 있는 ‘마음’, 그 다양함이 투명막으로 만든 벽에 갇히게 되면 ‘믿음’, 그 투명막이 콘크리트 벽으로 바뀌면 ‘이념’이 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마음에서 출발한 세 가지 단계, 인간 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단계를 대표하는 단어들을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믿음은 과거에, 마음은 현재에, 이념은 미래에 가까운 것 같아 세 단어가 시공을 포용하는 어떤 것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Ready-known’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지성적인 면의 ‘이미 알고 있는’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수많은 정의에 의해 파악되는 정의가 앞서는 앎이고, 그 앎 이면에 이를 포괄하면서도 보다 직관적인 ‘이미 알고 있는’의 측면이 있고 그것이 예술을 가능하게 하지 않나 싶다. 전자는 문자적 측면이고 후자는 문자의 배열이 달라지고 다른 요소가 문자와 합하여 관객에게 다가오는 어떤 것 이라 할 수 있다. 둘 다 마음에서 만들어진다는 측면에서 마음의 작용에 대한 세 단어를 사용했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 확실히 알게 그대로 문자적으로 드러내서, 보다 직관적인 앎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다. 문자조각의 내용을 알고 나면 더 이상 이를 이해하려는 이성의 역할은 줄어들고 보다 직관적인 앎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백색의 견고한 조각에 비디오 프로젝션을 통해 빛을 투사하는 방식은 언어에 대한 어떤 고민을 반영한 것인가? 언어, 문자로 파악되는 현상은 이들이 만든 여러 정의로 인해 분절적으로 파악된다는 의미에서 비디오 이미지가 문자에 의해 깨지는 모습을 보인다. 이상적인 면에서는 문자의 이러한 속성에 단점을 제기할 수 있으나, 우리가 만들어놓은 습관이나 문화적인 측면에서 장점을 보면 문자는 또 다른 다양함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쪼갬과 동시에 수많은 다양한 빛의 변화를 포용하는 문자라는 시각적 느낌을 나타내려 했다.
마을 풍경과 자연 풍경 사진을 픽셀이 드러날 때까지 확대한 뒤 교차시킨 영상 <42000초의 대화>는 어떤 작품인가?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북한산에 올라가 먼 곳과 가까운 곳의 이미지, 누구나 촬영했을법한 두 장의 상반된 사진으로 만든 영상이다. 두 장의 사진은 달리 보면 상반된 모습만 보이고 또 어찌 보면 공통된 요소를 볼 수 있는 도시와 자연의 사진이다. 사회적 대립의 느낌이 강한 이념적 이미지로 작업하려다가 방향이 전환되어 나온 이미지다. 우리가 흔히 대립의 극치라 보는 상반된 두 가지 이념도 모두 인간의 마음에서 왔기에 어쩌면 공통된 부분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마음가짐에 따라 다르게만 보면 다르고, 같다고 보면 같은 요소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지 않나. 다른 것은 인정하고 그 공통의 부분에서 화해의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시각화하기 위해 두 이미지의 물리적 공통지점을 찾으려 했다. 서로 다른 이미지인데도 픽셀로 되었을 때는 화면상 같은 면이 있다. 이 교차지점에서 두 이미지 A와 B의 자리를 바꿔도 자연스러워 보이는 면을 보였다. 그리고 픽셀을 강조하는 이유 중엔 실제 있는 픽셀인데 우리의 물리적, 인식적 한계로 보지 못하는 세상을 그대로 드러내고자 하는 면도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Ready-known’이란 마음이 미술과 생활에 끼치는 당연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보려는 주제다. 앞으로 이에 대해 지속적인 생각하고 실천할 것이다.

김신일은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뉴욕 스쿨오브비주얼아트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서울, 히로시마, 싱가포르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아르코미술관, 백남준아트센터, 국립현대미술관 등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했다.

 

노순택 | 무능한 풍경의 젊은 뱀
Sneaky Snakes in Scenes of in Competence

노순택 (4)

“분단 풍경 속에 사진은 교활하다”

이번 전시장에서 공간 구성 콘셉트는 무엇인가? 크게 두 부분이다. ‘무능한 풍경’의 장면과 ‘젊은 뱀’의 장면이 공간적으로 구분되면서도 내용적으로는 서로 넘나들게 구성했다. ‘무능한 풍경’은 지난 10여 년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군 사회적 갈등과 충돌, 참사의 장면을 담고 있다. 예컨대 대추리 강제이주, 용산참사, 쌍용차 살인해고, 밀양 송전탑 건설을 둘러싼 갈등, 강정마을 해군기지 문제, 천안함 침몰, 연평도 포격사태, 세월호 참사 등이다. 이러한 사건 속 풍경은 참혹하다. 잔인한 풍경이라 부를까? 아니, 지극히 무능한 풍경이었다.
‘젊은 뱀’은 이러한 사건들 속에서 목격과 기록 혹은 개입의 역할을 수행한 ‘사진’이라는 매체의 작동 풍경을 담고 있다. 사진은 다양한 시각예술의 역사에서 발명시점을 꼭 짚을 수 있는 젊은 매체다. 태어난 지 175년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 사진은 대중미디어의 영역에서도, 예술의 영역에서도, 그리고 우리의 평범한 삶에서도 떼려야 뗄 수 없는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빠르다. 유능하다. 사실적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능한 풍경 속에서 작동할 때, 그 유능이 무능의 반대말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사진은 정직하기보다는 교활하다.
그동안의 작업은 일종의 분단 목격담이라 할 수 있다. 한국사회의 다양한 문제거리 중에서 특히 분단이라는 이슈에 매달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사회가 품은 복잡다단한 문제를 가로지르는 한 단어를 꼽으라면 ‘분단’을 말할 것이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은 물론이거니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분단’이라는 필터를 통해 보면 납득이 된다. 하지만 동의할 수는 없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분단모순만으로 설명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지만, 분단모순을 빼놓고 설명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우리 사회의 문제적 현장들 앞에 나와 카메라를 위치시키면서 늘 품어온 의문들, 합리의 결핍과 후안무치의 만행들이 어디에 기대고 있는지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분단’은 중요한 열쇳말이 되어주었다.
심지어 세월호 참사와 같은 재난 앞에서도 분단의 논리와 무논리는 작동한다. 유가족의 신상을 털어 사상을 검증하는 짓은 지금 우리가 분단체제에서 살고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분단은 그냥 작동하지 않는다. 오(誤)작동으로써 작동한다. 나는 그 오작동의 장면들에 눈길이 간다.
이번 전시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사진이라는 매체에 대한 고민, 오히려 사진에 대한 경계가 두드러진 것 같다. 사진은 재빠르고 사실적이며 유능하다. 언뜻 투명해 보임으로써 자신의 불투명함을 잘도 감춘다. 그러하기에 대중매체도, 시위대도, 경찰도, 그리고 예술도 그토록 사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오늘날 사회 갈등의 현장에서 카메라는 진압경찰의 방패와 진압봉만큼이나, 시위대의 구호와 바리케이드만큼이나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사진은 분명 ‘있는 사실’에 기초한다. 허나 프레임 안만을 보여줄 뿐 프레임 밖을 보여주지 않으며, 특정한 시점을 보여줄 뿐 사건의 전후 시점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일 것이다. ‘카메라가 나의 무기가 되어줄 것’이라는 저마다의 믿음들, 혹은 착각들.
사진의 힘을 믿지 않지만 그럼에도 사진을 계속 찍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을 계속 찍을 수밖에 없는 이유’란 없다. 사진의 힘을 맹신했다면 진즉 사진을 그만뒀을 것 같다. 사진은 힘이 없다. 정작 힘은 대상에 있다. ‘대상의존적’이라는 사진의 가냘픈 속성이, 그러면서도 야비한 속성이 좋다. ‘장면의 중계’가 어디까지 가능하고 어느 지점부터 불가능한지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데, 그 고민을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일단 ‘현장에’, ‘나와’, ‘카메라를’ 위치시키는 일을 계속해야 할 것 같다.
현장을 찍는 다큐멘터리 사진과 작가로서 작업 사이에서 갈등은 없는가? 갈등이 있고, 갈등이 해소될 것 같지도 않다. 갈등이 있을 법한 경계에서 작업하면서 해소를 바라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지금의 한국 현실이 ‘무능한 상황’이라면 사진은 현상의 표피를 훑는 ‘젊은 뱀’으로 표현했다. 이때 텍스트의 역할은 무엇인가? 대부분 짧은 글을, 가끔은 긴 글을 꾸준히 써왔다. 어떤 경우에도 사진을 설명하거나 납득시키려는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내가 쓴 글이 사진을 ‘보완’하기보다는, 생각을 어지럽히거나 확장시키는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
미술에서 경쟁과 상이라는 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미술에서 경쟁과 상이라는 제도는 근본적으로 쓸모없는 짓이지만, 불행히도 미술은 ‘쓸모없는 짓’을 용인하고 때론 장려한다. 아이러니는 미술뿐만 아니라 우리 삶을 구성하는 성분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해 온 작업을 다시 보고, 분류하고, 재배치하는 와중에도 거리와 작업실을 쉴 새 없이 들락날락하는 일을 이어가려 한다. 무계획의 계획이랄까. 발신안테나보다 수신안테나를 예민하게 세워두려 한다.

노순택은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건국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 산미대학원 사진디자인과를 중퇴했다. 서울, 슈투트가르트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2012 광주비엔날레>, <2013 Real DMZ>, <2013 에르메스미술상전> 등에 작품을 출품했다.

 

장지아 | 금기는 숨겨진 욕망을 자극한다
Taboos Stimulate Hidden Desire

장지아  (1)

“고통과 쾌락의 경계, 해체되는 순간까지”

최근 신체에 물리적 고통을 가하는 고문을 주제로 작업을 하면서 동시에 쾌락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동안 <아름다운 도구들> 시리즈를 선보였는데, 그 연장선상에서 신작 <아름다운 도구들3-브레이킹 휠>은 어떤 도구에 착안한 것인가? 신작에 대한 소개 부탁한다. <아름다운 도구들>은 2009년부터 제작해온 고문을 모티프로 한 시리즈 작업이다. 실제로 존재했던 고문의 방식과 전혀 연결되지 않는 감정이나 상황, 의미들을 한 지점에 교차시키는 시도들을 해왔다. 신작 <아름다운 도구들3-브레이킹 휠>은 5년 전 구상한 작업인데 당시 준비하던 개인전에서 예산 문제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올해의 작가상 같은 기회가 주어져 예산과 공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면 드로잉으로만 남았을 작업이다. 전시장 중앙에는 종교적 성소 같은 흰색의 원형 천막이 설치되고 내부에는 ‘아름다운 도구들3-브레이킹 휠’이 배치되며 퍼포먼스가 진행된다.
‘Breaking wheel’은 중세의 대표적 고문 도구로 공포의 상징이었다. 당시 죄수를 마차 바퀴에 묶어 원 밖으로 나온 신체를 절단하거나 뼈를 부러뜨리는 고문을 했는데 기구의 특성보다는 바퀴라는 일상적 사물이 신체를 재단하는 도구로 탈바꿈되는 상황에 공포가 가중되었을 것이다. 1950년대 사용된 마차, 전차의 바퀴들을 수집해 높이 2.5m의 새로운 기구 12개를 만들었다. 이 기구는 바퀴에 새의 털이 달려있고 구조물에 올라가 바퀴를 굴리면 바퀴둘레에 장식된 깃털이 퍼포머의 음부를 스치게 고안 되었다.
육중한 무게의 바퀴를 굴리기 위해 기구 위의 여성들은 힘을 내기 위한 노동요를 부른다. 바퀴를 힘껏 굴려 속도가 높아질수록 육체적 노동은 심해지나 육체를 둘러싼 성적욕망은 실현된다. 개막일에 여성들이 고통과 쾌락의 지점을 오가며 바퀴를 굴리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는데 12개의 기구가 원형으로 배치되어 지극히 사적인 순간을 서로가 확인하고 노래로 응원하며 공유하는 일탈의 장을 만들고자 했다.
개막식날 선보인 퍼포먼스에 대해서 말해달라. 퍼포머들이 부르는 노래도 인상적이다. 퍼포머들은 충청도 북부 지역에서 전해오는 디딜방아 노동요의 가사에 교회에서 탐욕적 음계라며 금지했던 화성법으로 작곡된 그레고리안 방식의 성가를 붙여 부르며 노동의 고통과 성적 환희의 순간을 공유하게 된다. 12명의 퍼포머는 중세 갑옷 속에 입은 철망의 조직모양대로 짜여진 니트를 입고 시골 처녀, 성녀, 요부의 캐릭터를 섞어 놓은 가상의 인물을 설정하고 돌림노래를 부른다. 이 노래는 방아를 찧을 때 부르는 노동요로 바퀴를 굴리는 행위나 방아를 찧는 행위적 유사함 외에도 상황에 의해 가사가 은유적인 성적 메타포를 갖게 된다. 이 돌림노래는 바퀴를 천천히 굴리는 걸로 시작해 마지막 클라이막스로 치닫는 단계에선 바퀴를 굴리는 속도와 노래를 부르는 속도가 최대치로 빨라져 퍼포머들의 숨이 차오고 노래의 가사와 멜로디가 다 해체되어버리는 순간까지 몰고 가고자 했다.
데뷔작이 <작가가 되기 위한 신체적 조건>(2000)이다. ‘몸’의 문제가 문화적이라면, ‘신체’는 보다 구체적인 감각의 영역인 것 같다. 이에 대해 설명 부탁한다. 경계로 구분된 감각보다는 감각을 넘어서서 서로 다른 오감이 동원되거나 혼용되는 상태로 문화, 체계, 정치, 규율, 관습, 전통 등을 드러내거나 신체적 감각과 상반된 감정이 중첩된 상태로 현실을 은유적으로 또는 미학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2004년부터 몸의 구멍에서 나오는 액체들, 침, 오줌, 피 등에 관심을 가졌다. 신체의 분비물을 다루는 이유는 무엇인가? 액체분비물은 각 기관을 통해 나온 수분으로 이루어졌으며 각기 다른 이름과 기능, 그리고 연결될 수 있는 다른 감정들이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이들 모두 얇은 막(피부)을 벗어나면 그 순간 다른 가치가 부여되고 만다. 땀이 가지고 있는 시큼함과 에로틱함, 눈물의 짠맛과 슬픔, 환희. 침의 거품과 질긴 장력, 게걸스러움 이런 것들이다. 그것은 아브젝트적(abject) 성격의 무의미함, 버려지는 것들, 기피대상 등의 개념을 넘어 하드하고 치밀한 모든 조직을 흔들어 놓는 유동적인 파장으로 작업에 등장하길 바란다.
작업에 등장하는 아브젝트적 요소들은 사적이고 미시적인 결과물, 행위들 안에 등장하면서 오히려 위기의 요소로, 스펙터클한 상황으로, 관객들 경험의 확장된 순간으로 전복된 위치를 가지길 원한다.
미술에서 경쟁과 상이라는 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미술에 대한 하이어라키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먼저인 것 같다. 그렇다면 yes. 하지만 하이어라키의 계층구조가 어떠한 모양새인지 알 수 없다. 다들 동의하는 같은 내용도 아닐테고, 그것이 피라미드인지, 고정되어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어떠한 것들이 그 모양새를 움직이는지 미술제도 안의 구성만이 아닌 변화무쌍한 디테일이 개입하는 것. 그것이 미술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첨예하게 미술이, 작품이, 현 시점의 화두가 다시금 언급되는 것이 미술제도의 상이 가진 순기능이고 그 역할에 대해 긍정적이다. 작업에서 경쟁 대상은 외부에 있지 않다. 밖에서 볼 때는 치열한 경쟁으로 진행될 것 같지만 정작 작가는 본인의 작업을 진행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녹초가 된 상태라 다른 작가를 신경 쓸 여유가 없다. 그런 불필요한 소모가 작업을 좋게 한다면야 얼마든지 하겠지만…
앞으로의 계획은? 당분간 쉬겠다는 결심이다. 내 몸에 대해 참 모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3년정도 제대로 쉬질 못했다. 몸이 약해지니 이상한 불안증이 생긴다. 신작으로 준비하는 전시가 올해 하반기에 열릴 예정이고 다음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다. 개인전은 정확히 언제, 어디서 할 것인지 정하지 않았고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구체화하고 있다.

장지아는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추계예대 동양화과,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 전문사 과정을 마쳤다. 대안공간 루프, 갤러리 정미소, 가인갤러리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아르코미술관, ZKM 미디어갤러리 등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했다.

 

[New Face 2014] 이미래

物性 고민의 실험장

작가 이미래의 작업은 물리적 공정에 의해 시작되고 결정된다. 그녀는 사전에 스토리를 면밀히 짜고 리서치를 기본으로 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회에 대한 거대담론을 논하거나, 인간내면의 감정을 드라마틱하게 표출하는 형식을 띠지도 않는다. 다만 작업의 공정에서 발생하는 충돌에 천착한다. 그는 자신의 ‘정신성이 순수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나 자신을 믿지 않는다’고 스스로 평하지만 그의 작업은 물성 자체에 대한 당위성을 찾아 꾸밈없이 순수하게 나아간다. 작가는 각 작업 본연의 기능을 극대화할 뿐 그 이상의 방향성을 제시하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재료와 형태 자체가 가진 본질이 각각의 작업에서 그대로 드러나며 이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현재 인사미술공간에서 진행 중인 이미래의 세 번째 개인전 <낭만쟁취>(8.14~9.14)는 작업 간 유기적 관계가 돋보인다. <수석장>은 이번 전시에 선보인 <청개구리 엄마무덤> 작업 과정에 발생한 시멘트 폐기물들을 모아 조각으로 만든 것, 길거리에서 줍거나 혹은 지인에게서 받은 크고 작은 물체들을 마치 전시장에 진열하듯 정돈해 두었다. 이전 작업인 <일본식 꽃꽂이>에서 선보인 이미지와 함께 다양한 조각이 나열되어 있다. 본래 작업실에서 물성실험을 즐겨 하며 사이즈, 부피, 탄성을 고려해 이리저리 배열하고 배합해 보던 작가의 습관이 반영된 작품이다. 죽어있는 매체들이 모여 있는 쇼케이스와 같은 수석장은 나란히 배열된 그녀의 조각을 연상케 한다.
반면 함께 전시된 <청개구리 엄마무덤>과 <청개구리 엄마무덤을 위한 비, 천둥, 번개 구조물>에선 이미래의 이미지에 대한 또 다른 고민을 엿볼 수 있다. 이 작업은 우화의 신파적 이야기 전개과정, 거친 날것의 재료와 단순한 움직임 장치 그리고 치밀하게 짜인 각 작업 간의 구성이 혼재되어 있다. 사실 <청개구리 엄마무덤>은 올해 초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연 전시 <앞에서 본 누락>(2.19~3.9)에서 선보인바 있는 동명의 작품에 다양한 요소를 더해 복합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천둥 효과에 육중한 무게를 주기 위해 시멘트 틀을 제작하여 볼링공을 굴리는 것이 눈에 띄는 변화다. 또 한 가지 변화는 웹투니스트 이자혜의 단편만화 <금덤판>을 협업형식으로 제작해 함께 설치한 점이다. 자신의 작업에 동시대 사회적 연결고리를 더하고 싶었던 작가는 이야기 전달에 가장 적합한 매체로 만화를 선택했다. 이와 같이 그녀의 작업은 면밀하고 명백하게 그 역할과 기능을 갖는다. 그리고 이들은 이전작업 혹은 함께 설치되는 작업 간 ‘얼기설기’ 엮어져서 서로 유동한다. 그렇지만 “청소를 하는 기분으로 정리정돈을 하면서 평면적이고 담백한 마음으로 작업을 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그녀의 작업은 시각적으로 다분히 정제되어 있다.  작가 이미래의 작업은 이제 시작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여러 함의가 담긴 행복이란 단어에 뒤엉킨 무수한 이해관계의 조합 속에서 ‘낭만’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는 단순하지만 이 시대에 참으로 얻기 힘든 낭만을 마치 작업이 가진 그 속성과 일치한다고 보았다. 이에 무한히 새로운 조형을 만들어내고,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근래의 조각이 디자인에 가까운 디스플레이를 하는 경향이 있다고 짚으며, “오랜 기간 지켜볼 수 있을 만큼 조형적 의미가 깊은, 고전주의적 숭고미를 느낄 수 있는 스펙터클한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조각을 다루는 젊은 작가의 고민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녀가 포착할 물성의 조형적 변주가 기대된다.

임승현 기자

이미래는198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미대 조소과를 전공하고 영상연합매체를 복수 전공했다. 2013년 <문래3가에서 빛으로 가는 길>을 시작으로 3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그 외에 2011년부터 지금까지 10회의 그룹전 및 프로젝트 결과전에 참여했다.

이미래

<청개구리 엄마 무덤> 시멘트, 볼링공, 워터펌프, 스트로보, 마이크 대, 믹서,헤드폰 외 가변설치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