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페이스 2014] 박영진 – 관계를 정의하기

관계를 정의하기

탁자 중앙에 끼워진 가로막은 나무로 만들어진 창살, 거울, 빈 나무프레임, 그림, 얼굴모양으로 깎여 있는 등 다양하게 제시되어 있다. 어떤 프레임을 끼고 대화를 하든 안하든 상관없다. 그저 이편과 저편에 누군가 앉아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행위는 이른바 내 앞에 앉아있는 그 누구와의 ‘관계’를 새롭게 인식하는 과정일 뿐이다.
그렇다. 박영진의 이 <마주하기로>의 핵심 키워드는 바로 ‘관계’다. 그런데 그는 그 ‘관계’에 대한 정의내리기에 주저했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관계는 주변의 모든 환경에 영향을 받고, 다양한 확률 속에서 이루어지기 마련입니다. 때문에 어느 한 ‘관계’도 그 정의가 겹치기가 어렵지요.” 그러나 정의되어 있지 않은 관계는 없다. 홀로 살 수 없는 ‘관계’의 연속에서 사는 우리에게는 그렇다. 그렇기에 누군가와의 관계는 일상의 주된 내용이 된다. 하지만 이른바 ‘양방향성’을 근간으로 하는 관계맺기에서 우리는 항상 자신의 주관에 따라 관계를 정의한다. 박영진의 작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접근한다. 그것은 서로의 관계를 좀 더 지속해 보고자 하는 새로운 방법 혹은 새로운 틀을 고민한 것일 수도 있겠고, 지금 우리의 관계에 대한 일종의 작명(作名)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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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비해 연작에는 상황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작가적 개입이 보인다. 그리고 작가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간다. 얼마 전 막을 내린 문화역서울284의 <온(溫)·기(技)전>에 출품한 <커피짐 (Coffeegym)>에서 앞서 언급한 <마주하기로>와 연작을 통해 보여줬던 ‘관계’에 대한 고민을 적극적인 프로세스로 이어갔다는 점에서 그렇다. “<커피짐>은 정말 적극적이고 제가 재밌어하는 표현인 ‘착한 작업’입니다. 누구나 너무 쉽게 다가올 수 있는 카페를 이용해서 한번 대화를 해보는 것이지요. 다음 프로젝트를 물었다. “소박한 목표는 이루어졌어요. 앞으로는 적극적인 관계 형성이 중요하다기보다 어떤 관계인가, 어떤 형식이어야 할까 등등 고민해야 될 문제가 많습니다.”
현재 박영진은 스터디 모임에 열심이다. 전공에 대한 거리가 아닌 다양한 사유의 깊이를 얻을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한단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활을 책임져야 할 사회인으로서의 활동도 하고 있다. “직장 동료들의 삶을 내 삶과 비교해가면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릅니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면서 감기에 들기보다 건강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고민되는 바는 언제 월급쟁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같은 월급쟁이이면서 기자에게 이렇게 되묻는 박영진은 “제가 문을 두드린다고 활짝 열어줄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가 바라는 미술판은 끊임없는 기회의 연속인 곳이면 좋겠다”며 희망을 놓지 않는다.

황석권 수석기자

[뉴 페이스 2014] 정지현 – 도시의 기억상실증에 대한 보고서

도시의 기억상실증에 대한 보고서

지금도 대한민국 국토 곳곳에서는 도시 재생이라는 명목으로 개발이 범람하고 있다. 한국은 이른바 ‘아파트 공화국’으로 명명되지 않던가? 정지현의 사진작업은 재개발에 감상적으로 접근하기보다 철거가 진행되는 과정 그 자체에 집중한다. 그는 “재개발지역에서 살았던 경험 때문인지 철거민을 바라보는 연민 어린 시선을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피해자와 수혜자의 입장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재개발의 피해자인 것처럼 말하던 사람도 보상을 많이 받으면 어느새 승자가 되어버린다.
서울 토박이인 정지현은 아파트촌인 잠실에서 자랐다. 그는 잠실 일대가 아파트 재개발지역으로 선정되면서 20년 넘게 살던 곳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경험을 했다. 하지만 주위 친구들조차 어릴 적 추억이 담긴 공간에 대해 어떤 얘기도 없이 그저 우리 동네가 좋아진다, 땅값이 오른다는 이슈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그때부터 정지현은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 속에서 일상의 공간이 얼마나 힘없이 부서져버리는지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의 첫 작업도 2005년 당시 철거를 눈앞에 둔 1세대 아파트들을 기록한 것이다. “저는 사진가이지만 사진이라는 매체를 쓰는 데 분명한 당위성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사라지는 것의 리얼리티를 담아내는 것이 사진만이 할 수 있는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3월 1일부터 31일까지 KT&G 상상마당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데몰리션 사이트>에 선보인 작업은 2011년부터 인천 루원시티와 안양 덕천지구의 변모상을 담은 것이다. 그는 한밤중에 감시망을 피해 곧 철거될 건물에 잠입해 내부 방 하나를 온통 빨갛게 칠했다. 이 같은 퍼포먼스는 철거로 처참하게 무너진 누군가의 삶의 공간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장치다. 그리고 철거가 진행되면 그는 매일 현장을 찾아가 빨간 방이 사라지는 과정을 기록했다. 빨간 방이 해체된 광경은 마치 건물의 으스러진 심장 혹은 건물이 흘린 피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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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현의 사진은 종종 ‘도시화’, ‘재개발’이라는 키워드로 읽히지만 무엇보다 그의 관심은 파편화된 도시 공간에 있다. 집 옆 공터도 접근 불가능하게 철판으로 가려놓으면 그곳은 어느새 없는 공간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는 개인의 삶이 녹아있는 공간과 도시의 재개발 사이의 단절을 어떻게 연결시킬지에 관해 집중한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재개발 현장에 주목하는 작업 방향에 대해 고민이 많다. “도시에는 분명 다양한 문제들이 있는데 제가 재개발이란 이슈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은 아닌지 그런 답답함이 있습니다.” 딜레마에 빠지지 않기 위해 그는 3년 전부터 강원도 태백의 지역성에 관한 작업을 해오고 있다.

이슬비 기자

[스페셜아티스트] 임상빈-달콤한 풍경의 씁쓸함, 씁쓸한 예술의 달콤함

 람다프린트 177.8×152.4cm 2009

<서양 조각-메트로폴리탄미술관> 람다프린트 177.8×152.4cm 2009

 람다프린트 177.8×152.4cm 2011

<한강> 람다프린트 177.8×152.4cm 2011

 람다프린트 68.6×177.8cm 2010

<페인팅-마리아> 람다프린트 68.6×177.8cm 2010

 람다프린트 152.4×203.2cm 2013

<하와이2> 람다프린트 152.4×203.2cm 2013

왼쪽 람다프린트 128.3×237.4cm 2012  오른쪽 람다프린트 121.9×190.5cm 2011

왼쪽<루브르 박물관 2> 람다프린트 128.3×237.4cm 2012
오른쪽<브루클린 미술관> 람다프린트 121.9×190.5cm 2011

류한승│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임상빈의 주요 작업은 사진 형태를 띠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의 작업은 일반적인 사진과는 상당히 달라 보인다. 화면에는 배경과 어 울리지 않는 커다란 안경이 등장하거나 위아래로 지나치게 늘어난 건물이 우뚝 솟아있으며, 커다란 벽면에는 무수히 많은 미술품이 걸 리기도 한다. 또 원근법에서 벗어난 어색한 구도라든지 광각렌즈로 본 것 같이 가장자리가 휜 구도라든지 사람의 시야를 비웃기라도 하 듯 좌우로 펼쳐진 파노라마 구도가 드러나며, 때론 화면이 인위적으 로 위아래 혹은 좌우로 구획되기도 한다. 더불어 작품에 등장하는 어 떤 사물과 풍경은 그림을 그린 것 같이 부드러운 질감과 테두리를 가 지고 있다. 분명 그는 우리에게 친숙한 풍경을 작업의 소재로 선택하 지만, 그의 작업은 어딘지 어색하고 엉뚱하며, 심지어 초현실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의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본다는 것’이다. 무언 가를 보려면 당연히 무언가가 있어야 하고, 그 무언가를 보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임상빈은 그 무언가와 그것을 보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위치’도 주목한다. 사실 그 위치는 작가의 위치이다. 일찍이 시선과 관점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보는 이의 위치를 암시할 수 있는 특정사물을 종종 작업에 포함시켰다. 백미러와 와이퍼를 통해 그가 차 안에 있다는 것을, 난간을 통해 그가 어딘가에 올라가 있다는 것 을 짐작할 수 있었다. 또한 왜곡된 도로, 인도, 축대 등을 통해서도 작 가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었다. 이는 멀리 있는 피사체에 초점을 맞 췄을 때 가까이 있는 사물이 왜곡되어 곡선처럼 보이는 현상을 활용 한 것이다.
게다가 임상빈은 한 위치에서 바라본 다양한 광경을 한 화면에 넣 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작가가 2층에 있다면, 화면 아랫부분에는 부 감법처럼 2층에서 1층을 내려다본 광경을 묘사하고, 화면 중간에는 평원법처럼 2층에서 정면을 바라본 광경을 배치한다. 화면 윗부분 에는 고원법처럼 2층에서 천장을 올려다본 광경을 표현했다. 그 결 과 각도의 시점이 결합된 스펙터클한 광경이 펼쳐지고, 그로 인해 그 광경이 주인공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광경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과 위치가 더 핵심적이다. 이처럼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구조로 광대하고 역동적인 광경을 만들어내며 관찰자와 사물의 관계를 부 각시킨다. 이것은 사물(풍경)을 인식하는 것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 사물(풍경)을 인식하는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는 것을 드러낸다. 계속해서 임상빈은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과 위치에 사람들의 욕 망과 심리를 담고자 했다. 그런 의도가 반영된 작품이 바로 시리즈이다. 이 연작의 소재는 맨해튼이다. 그런데 맨해튼 내부에서 맨해튼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강 너머에서 맨해튼을 바라 본 것이다. 그래서 맨해튼은 물 위에 떠 있는 환상의 섬처럼 보인다. 강 너머에서 맨해튼을 바라본 시선에는 맨해튼을 동경하고 갈망하 는 마음이 들어 있다. 이는 맨해튼에 속하지 못한 타자의 시선을 의 미한다. 비록 같은 미국인이더라도 맨해튼에 진정으로 소속된 사람 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그리고 이 시선은 동양인으로서 미국 주류 사회를 갈망한 작가의 것이기도 하다.
이 연작에서 임상빈은 어떤 한곳에서 맨해튼을 바라본 것이 아니 었다. 맨해튼의 어떤 지점을 타깃으로 설정한 후, 마치 타자의 시선 이 여러 개임을 암시하듯, 맨해튼 외부에서 자리를 옮겨가며 수많은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 이미지를 합성하여 스펙터클한 맨해튼의 이미지를 구축한 것이다. 맨해튼의 빌딩은 비교적 일정한 형태를 유 지하고 있었지만, 유동적인 강물과 하늘은 조금씩 달랐다고 한다. 즉 건물이 딱딱하고 기하학적인 형태를 가진다면, 자연은 유동적이고 유기적이었다. 그런 자연의 특성을 시각화하기 위해 임상빈은 ‘회화 적 텍스처’를 도입한다. 하늘을 표현할 경우, 먼저 카메라로 하늘을 찍고 이어서 하늘의 느낌을 주는 그림을 그린 다음 그것을 촬영한다. 이후 이 두 종류의 이미지를 컴퓨터에서 혼합하여 독창적인 하늘의 이미지를 고안한다. 사물의 윤곽을 표현함에 있어 회화적 텍스처로 부터 나오는 ‘soft edge’는 사물을 부드럽게 만드는 데 비해, 사진으 로부터 나오는 ‘hard edge’는 사물을 차갑고 딱딱하게 만든다. 그는 이 두 요소를 다각도로 활용하여 섬세하고 미묘한 뉘앙스를 연출한 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작업은 일반적인 사진과는 사뭇 다르다. 다분 히 회화가 포함된 사진이다.
서울이라는 도시에 대한 탐구는 미국 생활 이후에 비로소 진행되 었다. 작가의 고향이 서울이지만, 외국에 살다보니 서울에 있을 때 모르던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특히 서울은 맨해튼에 비해 문화유 적이 많은데, 고층빌딩에 둘러싸인 한국의 고궁이 매우 왜소하게 느 껴졌다고 한다. 이 건축물이 세워질 땐 대단히 웅장했을 것이다. 그 런데 현대의 눈 또는 서구의 눈에 이 건물들은 작고 초라하게 보일 수 있다. 즉 스펙터클은 상대적이다. 그리하여 그는 스펙터클을 보완 하기 위해 건물을 상하로 늘인다. 이것이 이른바 연작 이다. 흥미롭게도 이 아이디어는 인터넷에서 취한 것이다. 예전에는 인터넷에서 화면을 아래로 스크롤하면 이미지가 쭉 늘어날 때가 가 끔 있었는데, 이는 데이터 전송량이 적어서 순간적으로 디지털 시그 널에 에러가 났기 때문이다.
임상빈의 작업은 대부분 컴퓨터에서 완성된다. 하지만 그는 1990 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컴퓨터와는 거리가 꽤 멀던 사람이었다. 서양화를 전공한 그는 군대에서 컴퓨터를 배웠고, 제대 후 본격적으 로 디지털 이미지를 다루기 시작했다. 컴퓨터에서 이미지의 변형· 배치·구축은 회화에서보다 훨씬 용이하였다. 당시 그는 아날로그 와 디지털의 접목·변환·관계를 집중적으로 탐구했지만, 그렇다 고 그가 디지털 신봉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디지털의 한계를 경계하며 그 가능성을 다각도로 고민했다.
이미지의 왜곡과 변형은 이후 연작에서 잘 드러난다. 임상빈은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을 모두 카메라에 담고 그것을 한 화 면에 배치했다. 예컨대 메트로폴리탄의 모던아트 섹션에 있는 모든 작품을 사진 찍고, 실제보다 훨씬 긴 벽과 마루에 모든 작품을 배열 한다. 현실에선 불가능하지만 이렇게 하면 한눈에 모든 컬렉션을 조 망할 수 있다. 미술관은 이 작품들을 소장해서 유명해졌다고 볼 수 있지만, 반대로 미술관이 소장했기 때문에 이 작품들이 가치를 가졌 을 수도 있다. 하여튼 미술관은 이 미술품으로 인해 사람들과 자본을 끌어 모으며 문화권력을 형성했을 것이다. 그런 제반의 사정을 알면 이 작품들을 그저 감상적으로만 보기가 힘들다. 너무 아름답지만 그 이면에는 씁쓸한 측면이 있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그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 도시의 문화체육 시설(공원, 운동경기장, 도서관, 미술관 등)을 작업의 소재로 끌어들 인다. 이곳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 지만, 거꾸로 사람들의 루트와 행태를 분석하고 그곳에 이런 것을 지 어놓으면 사람들이 저절로 모일 수밖에 없다.(이렇게 사람들이 모이 면 그 광경 또한 스펙터클하게 보임)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사람들 이 모여 사는 곳이 도시이지만, 도시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사람들이 그곳에 모인다. 이처럼 도시는 다양한 사람들이 만나고 관계하고 충 돌하면서 만들어지며, 작가 역시 사람들과 만나고 관계하고 충돌하 면서 작품을 제작한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단순한 도시 풍경이 아니 라 미시적 힘들이 꿈틀대는 도시 풍경이다.

 람다프린트 177.8×101.6cm 2009

<강남> 람다프린트 177.8×101.6cm 2009

 2014 인기 아이돌 그룹이 소속된 연예기획사 담벼락에 어지럽게 씌여진 이름을 하나씩 읽어가는 작업이다.

<벽화 프로젝트> 2014 인기 아이돌 그룹이 소속된 연예기획사 담벼락에 어지럽게 씌여진 이름을 하나씩 읽어가는 작업이다.

이미지의 왜곡과 변형을 통한 실재의 표현

최근 임상빈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를 찍고 있다. 이과수폭포, 와이키키, 칸쿤, 발리 등. 그는 어딘가를 가보고 거기의 에너지를 경 험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그곳에 대해 말해주고자 한다.(그의 이야기 를 들어보면 거기엔 달콤함과 씁쓸함이 공존) 그중 이과수폭포 작업 을 보면, 그는 다양한 지점에서 사진을 찍고 재구축하여 스펙터클한 광경을 연출했다. 사실 이과수폭포 같은 광대한 자연과 에너지를 한 지점에서 포착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다. 더불어 그는 화면 에 카약, 행글라이더, 물안경을 등장시키며 화자 중심의 이야기를 생 성해낸다. 마치 그가 카약을 타고 폭포를 뛰어내린 것처럼, 마치 행 글라이더를 타고 폭포 위를 날아다닌 것처럼, 마치 스노클링을 하며 물속을 헤엄쳐 다닌 것처럼. 물론 그가 실제로 이런 행위를 한 것은 아니다. 어딘가에 가서 직접 무언가를 했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자부 심과 우월의식을 심어준다. 그것이 역사적 사건이건 개인적 성취이 건 유명한 관광지이건, 자신의 경험이 최고인 양, 그 경험에 자신의 해석을 첨가하여 자신만의 버전을 구성한다. 이런 얼토당토않은 과 장이 때론 공감을 주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그가 그곳에서 무엇을 보 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의 이야기를 통해 그 사람의 내면과 심 리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2013년 말 시작된 남극 프로젝트도 이와 비슷하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남극은 탐험가가 아니면 갈 수 없는 미지의 땅이었다. 그 런데 요즘에는 돈만 있으면 누구라도 남극을 방문하여 안전하게 자 연의 숭고미를 느낄 수 있다. 이제 남극에까지 자본주의가 침투한 것 이다. 작가는 작은 나무보트를 타고 이곳을 모험한 것처럼 자신을 그 려내고 있다. 역시 실제로는 그렇게 못 했어도. 남극을 둘러싼 이권 과 온난화로 빙하가 녹는 것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남극 풍경은 이미 우리에게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는다.
한편 임상빈은 싱글채널 비디오와 사운드 설치작업 등도 병행하 고 있다. 한숨을 쉬며 인생의 답답함을 토로하는 <한숨 프로젝트>, 누 군가가 계속 작가의 이름을 부르는 <구애 프로젝트>, 연예기획사 담 장에 낙서를 읽는 <벽화 프로젝트>, 물/불/숲/바람 등 기본 요소를 그린 <창조 프로젝트>, 관객을 최면에 거는 <최면 프로젝트> 등이 해 당된다. 모두 미공개 작업으로 예술의 의미와 역할을 물으며 예술가 로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작업이다.
비록 이전 작품과 형태는 다소 다르지만, 그가 예술 활동을 하며 겪었던 예술가의 기대, 욕망, 허영, 좌절, 자기만족, 자기최면 등을 솔 직하게 나타낸 것이다. 그가 말하는 예술가는 교과서에 나오는 이상 적이고 완벽한 예술가가 아니다. 여러 사람과 만나고 관계하고 충돌 하는 예술가이다. 그의 작품처럼 어떤 때는 달콤하지만 어떤 때는 씁 쓸하다. ●

 2람다프린트 101.6×152.4cm 2014 실제 남극에서 촬영한 여러장의 빙하사진을 합성한 작품이다.

<남극-빙하 1> 2람다프린트 101.6×152.4cm 2014
실제 남극에서 촬영한 여러장의 빙하사진을 합성한 작품이다.

[작가리뷰] 박민준-디테일, 보고 읽는 회화를 위하여

 종이에 잉크, 수채물감, 금박 51×42cm(액자크기) 2013

종이에 잉크, 수채물감, 금박 51×42cm(액자크기) 2013

신혜영│미술비평

“그림을 본다”는 것은 “글을 읽는다”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말이 되었다. 그러나 이미지-시각성과 텍스트-서사성이 자연스럽게 짝 을 이루게 된 것은 사실상 근대 이후의 일이다. 그 전까지는 호라티 우스의 ‘시는 회화와 같이’라는 말이 대변하듯, 시를 비롯한 문학에 서는 눈앞에 ‘보이듯’ 풍부한 회화적 묘사가 즐비하였고, 회화를 비 롯한 미술에는 ‘읽어내야’ 할 수많은 우의와 상징이 가득하였다. 그 러나 18세기 ‘순수예술’ 체제가 성립된 이후 20세기 중엽까지 모더 니즘 예술이 진보의 역사를 거듭하는 동안 미술은 문학과 철저히 멀어졌다.1재현, 서사, 참조 등 미술 본유의 것이 아닌 이른바 문학적 특 징들은 모더니즘 회화에서 모두 철저히 배제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 한 미술의 비본유적 특징들은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보란듯이 부활 하여 오늘날 이미지를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게 되었다. 많은 작가들이 관객이 시각 외에 여러 다양한 감각으로 작품을 경험하고 나름의 기준으로 받아들여, 여러 겹의 숨은 의미를 읽어내고 자유롭 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박민준은 ‘볼거리’ 뿐 아니라 ‘읽을거리’가 있는 그림을 그린다. 그 의 그림에는 모더니즘 이후 회화에서 배제되어 온 대상의 구체적인 재현과 사건의 서사, 미술사의 참조가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서 양의 고전주의(classism) 회화가2 있다. 작가는 전통적인 서양의 재 현회화 방식을 빌려와 그 안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넓은 의 미에서 고전주의 회화는 세밀하고 매끈한 붓질과 형태들의 질서 있 는 배치와 구성, 각 요소들 간의 균형과 통일감을 형식적 특징으로 하며, 내용적으로는 신화, 성서, 역사 등과 관련된 이야기를 상징 (emblem)과 우의(allegory)를 통해 함축적으로 담아내는 것을 특 징으로 한다. 박민준 역시 형식과 내용 면에서 어느 정도 이러한 고 전주의 회화의 틀을 따르고 있다.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여러 요소들 이 작가의 철저한 계획 하에 최대한 매끈하게 올라가 있는 그의 그림 에는 아르고, 올림포스, 세이렌, 아누비스, 아리아드네, 이카로스, 크 로노스 등 고대 신화의 소재가 자주 사용되고 사자, 호랑이, 새, 도마 뱀, 당나귀 등의 동물을 통한 우의적 표현과 날개, 저울, 기둥, 휘장, 창, 후광, 고대 조각상 등의 도상이 흔히 등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소 재들은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를 중층적으로 함의할 수 있 게 하기 위해 선택될 뿐, 고정된 전통적 의미의 상징과 우의가 우선 시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작가는 <아누비스>(2009)에서 자신 의 지식과 세계가 전부인양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그들을 바라보는 절대적 존재가 곁에 있음을 말하고자, 죽은 자를 판단하는 고 대 이집트의 신 아누비스를 가져온다. 그러나 자칼의 머리에 인간의 몸을 가진 모습으로 전해지는 아누비스는 작가의 손을 거치며 동물 의 머리털과 날개를 달고 사후 재판을 집행하기 위한 지팡이와 ‘진리 의 저울’이 손에 들려있는 모습으로 세심하게 변형되었다. 아누비스 의 신화가 그림의 이야기를 보다 풍성하게 하지만, 신화를 모르는 사 람들도 빛을 받은 채 공중에 떠 있는 비현실적 존재와 자신만의 세계 에 갇혀 있는 지상의 한 인간의 모습을 통해 그림의 주제를 어느 정 도 파악할 수 있다. 최근 개인전에 소개된 드로잉 중 <벌거벗은 임금 님을 위한 드로잉> (2013)에서 작가는 왕좌에 오른 한 마리의 침팬지 와 그 주위에서 왕을 향해 온갖 짓을 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묘사하였 다. 작가는 이 그림을 통해 스타 예술가와 그를 떠받치고 있는 예술 계의 풍토를 비판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림의 함의는 중층적이다. 동 화 『 벌거벗은 임금님』을 아는 대다수 사람들이 파악하는 그림의 표면적 이야기부터 유럽 회화에서 전통적으로 원숭이가 화가를 뜻하는 것3을 아는 사람들이 짐작할 수 있는 작가가 말하려는 이야기와 미국의 부시 대통령을 닮은 침팬지의 얼굴에서 전혀 다른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까지 그야말로 제각기 다른 독해가 가능한 것 이다.
이렇듯 박민준에게 고전주의 회화란 따라야 할 본질적인 강령을 담은 하나의 사조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예술에 근접하기 위한 하 나의 방편이자 기준점이 된다. 작은 차이들이 모여 결국 큰 차이를 만드는 예술을 지향하는 그에게 ‘고전(classic)’이란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모범이 될 만한 가장 기본적인 예술이라는 의미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하나의 사조가 지닌 형식을 고수하기 보다 는 필요에 따라 계속해서 조금씩 변화된 형식을 취해 왔다. 초기 작 업에는 극단적인 명암대비로 극적인 효과를 높이는 카라바조의 테 너브리즘(tenebrism)이 중심이 되었다. 당시 그림들에는 마치 암 흑의 무대에서 조명을 받으며 등장하듯 인물의 동작 및 표정과 서사 를 위한 중요한 사물들이 주로 부각되었다. 그러나 이후 작가는 전체 적으로 명암의 대비를 줄이고 배경과 주변 사물들까지 보다 세밀하 게 묘사하는데 힘을 기울인다. 이전에 암흑으로 처리했던 배경은 고 전적인 양식의 계단과 창문, 패턴이 있는 천장과 바닥 등의 건축적 요소로 일일이 묘사하고, 인물 외에도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는 보다 많은 형태적 요소들을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화면 전체에 관람자의 시선을 고루 분산시킨 것이다. 예를 들어 일곱 개의 타로 점궤를 인물 과 함께 표현한 회화 연작 (2010)와 그 일곱 점의 회화를 한 사 람의 여인과 함께 다시 하나의 회화에 재현한 (2010)가 대 표적이다. 세밀하게 재현된 그림들을 또 다른 그림 안에서 더욱 세밀 하게 재현하는 이 일련의 작업에서 작가는 풍부한 기호적 의미를 이끌 어내며 작품들 간의 상호텍스트성 또한 제시하고 있다. 유화만이 아니 다. 드로잉에서 그 세밀함은 또 다른 모습으로 빛을 발한다. 르네상스 시대 은필화(silverpoint)와 금박(gold leaf)기법을 비롯, 연필, 수채 물감, 오래된 다양한 펜촉에 찍은 잉크까지 여러 전통 재료와 기법을 사용해 종이에 그린 드로잉들은 가늘고 정밀한 선들과 그 선들이 만 들어 낸 전체적으로 가벼워진 화면으로부터 유화와는 또 다른 느낌 을 전한다. 문설주에 새겨진 부조의 작은 인물형상이나 사람의 머리 카락과 동물의 털까지 재현해낸 묘사력은 감탄의 경지에 이른다. 레 오나르도 다 빈치가 책으로 묶어낸 수많은 스케치와 판화 형식의 삽 화들이 그렇듯, 이후 유화로 옮겨질 스케치들과 그 자체 완결된 소묘 작업들은 박민준의 작업 세계를 보다 풍요롭게 하는 동시에 그간 유 화에서 보여주던 완벽한 형식적 구성과 채색의 압박으로부터 숨통 을 트여준다.

 종이에 잉크, 수채물감, 금박 50×68cm(액자크기) 2013

종이에 잉크, 수채물감, 금박 50×68cm(액자크기) 2013

읽는 그림, 회화의 잠재력

이렇듯 점차 강화되어 온 ‘디테일’은 박민준 회화의 가장 두드러진 지점이자 고전주의 회화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흔히 고전주의 회화 의 특징으로 원근법을 비롯한 균형잡힌 화면 구성을 꼽지만, 어떤 면 에서 디테일은 전체적인 화면의 구성보다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의 결혼>에서 중앙에 걸린 작은 거울이 나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1533)에서 하단에 기울어진 해골처럼 그림 전반을 압도하는 고전주의 회화의 디테일의 사례들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디테일은 현대회화로 올수록 화면을 전체적 으로 감상할 수 없게 만드는 장식적인 요소이자 저속한 것으로 평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예술가의 탁월함을 묘사력에서 찾지 않 게 되면서 디테일은 점차 지양되어야 할 것으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앞서의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고서도, 디테일은 화가가 전통과 규범 을 어기며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부분이자, 보는 사람에게 더 풍 부한 의미와 더 큰 즐거움을 주는 부분으로 평가될 수 있다. 프랑스 미술사학자 다니엘 아라스는 자신의 저서『 디테일』4을 통해 서양의 재현회화에서 디테일이 갖는 의미와 가치를 다각도로 재조명한다. 아라스는 진정한 의미의 디테일은”그림 속에서 사건을 일으키며 강 력하게 시선을 붙들어 구성되어 있는 시선의 경로를 동요시키”며 ” 한 그림의 기쁨이 회화적 환희로 바뀌는 특권적 계기”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미지를 만드는 재현에 관련된 ‘도상적 디테일’과 재현과는 무관하게 회화의 현존을 나타내는 ‘회화적 디테일’을 구분한다. 그 두 가지 계기는 함께 작동하기도 하지만 구분되는 것으로, 디테일이 란 읽어낼 수 있는 기호의 의미를 만드는데 기여하는 동시에 보는 것 만으로도 즐거움을 주는 회화적 질료의 현존 자체로서의 가치를 지 닌다는 것이다. 따라서 재현회화에서의 디테일이야말로 회화가 사 진을 비롯한 다른 예술 매체들과 차별화되어 여전히 의미와 가치를 지닐 수 있는 매체임을 방증하는 지점인 셈이다.
박민준의 회화에서 역시 디테일은 도상적인 것과 회화적인 것의 계기 모두로 작동한다. 이야기의 중층적 의미와 그 자체 회화의 매체 적 특성이 디테일로부터 비롯되어, 그림을 보다 풍요롭게 읽게 해주 고 그 자체로 그림의 맛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작은 것’ 에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는 작가의 태도와 맞닿아 있을 것이다. 그가 고전주의 회화의 틀을 따르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역사는 죽 고 모든 것이 허용되었다”는 단토의 말이나 “세상에서 이제 양식적 인 개혁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제임슨의 말처럼, 오늘날 예술은 역사적 진보의 굴레에서 벗어나 지나간 모든 경향 및 사조를 자유롭 게 차용하고 전유할 수 있게 되었고, 예술가는 새로운 양식의 압박에 서 자유를 얻었기 때문이다. 표면적인 양식을 보는 사람에게 박민준 의 회화는 고전주의 회화의 답습일지 모른다. 그러나 작가가 무슨 이 야기를 하려 하는지 그 이야기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작은 디테 일을 읽어내려는 사람에게 그의 그림은 큰 기쁨을 줄 것이다. 그것은 모더니즘 회화 이후 우리가 잠시 망각했던, 보는 그림뿐 아니라 읽는 그림으로서 변하지 않은 회화의 잠재력을 드러내며 그 자체로 동시 대 예술의 또 다른 의미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

1독일의 비평가 레싱이 『라오콘 – 회화와 시의 경계에 관하여』(1776)에서 고대 그리스 조각상 라오콘을 통해 미술과 문학이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예술임을 역설한 이후, 모더니즘 미술 이론가 그린버그는 「더 새로운 라오콘을 향하여」(1940)에서 동일한 주제를 이어 받아 미술이 문학의 그늘로부터 벗어나 순수하게 시각성과 물질성을 추구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2 고전주의 미술은 흔히 18~19세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신(新)고전주의 미술을 지칭하지만, 여기에서는 빙켈만이 ‘고전 양식’으로 구분한 르네상스 회화와 이후 바로크 회화 및 신고전주의 회화까지를 포함한 광의의 의미로 사용하고자 한다.
3 화가-원숭이의 개념은 14세기 자연을 모방하는 화가의 능력에 찬사를 보내는 의미에서 사용된 ‘예술은 자연의 원숭이(Ars simia naturae)’라는 표현에서 비롯되었다.
4 다니엘 아라스, 『디테일-가까이에서 본 미술사를 위하여』, 이윤영 역, 숲,
2003.(Daniel Arasse, Le Détail-Pour une Histore Rapprochée de la Peinture,
Editions Flammarion, Paris, 1996)

[작가리뷰] 김인배-몸으로 눈을 보다

이선영│미술비평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열리는 김인배의 <점 선 면을 제거하라 전>은 근대의 시각중심주의 문화에 대한 몸의 반란이라 할 만하다. 이 전시에서는 눈이 몸을 보기 보다는, 몸이 눈을 보는 역전이 일어 나기 때문이다. 점 선 면은 인간의 시각적 관념 속에만 존재할 뿐, 자 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을 점적 사건들의 연속이 아니라고 간주하는 메를로 퐁티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현실의 시공간은 점이나 선을 지니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고에서 ‘a=a’일 뿐인 근원적인 이성의 진리, 그 동일률은 사라지고, 모든 지 각은 운동으로 간주된다. 김인배에게도 선은 하나의 매체이며, 점 은 힘들의 중심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의 오감 중 가장 관념적이 고 추상적인 감각인 시각은 점 선 면이라는 기하학적 요소를 좌표축 으로 설정하곤 한다. 이러한 좌표축이 사변철학의 바탕이다. 사변 철학은 ‘우리 경험의 모든 요소를 해석해낼 수 있는, 일반적 관념들 의 정합적이고 논리적이며 필연적인 체계를 축조하려는 시도'(화 이트헤드)이다. 변화에 무력한 사변철학은 다원론적 실재들을 거 부하며, ‘유일한 가능성일 뿐인 필연성'(메를로 퐁티)을 신봉한다. 김인배의 작품에서 관념에 의해 고정된 시각을 교란하고 상대화 하는 몸은 코드화할 수 없는 자연의 대표로 호출되었다. 그의 작품 에서 몸은 대우주의 질서를 반향하는 소우주가 아니라, 뫼비우스 띠처럼 유동하는 피부 또는 살이다. 반인반수의 존재를 표현한 (2001~2011)나 남근적 여성상을 표 현한 (2009~2011) 등에 나타나듯이, 약간의 변형을 가해서 종(種)과 성(性)이 불확실해지는 존재는 김인배의 작품에서 자주 발견된다. 몸은 태어난 본질 그대로 고정되지 않으며, 매번 다른 힘 이 관철되고 다른 규칙에 의해 배치되는 계열일 뿐이다. 그는 “분류, 이해, 논리는 정지시키기 위한 음모이다”(작가노트 중, 2011)라고 말한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의 정점에 놓인 얼굴은 침해될 수 없는 신성한 질서가 아니라, 몸의 연장으로 간주되며 변화무쌍하게 취급 된다. 몸으로 대변되는 자연은 정지되어 있지 않고 시간의 흐름을 타는 불확정적인 요소로 가득하다. 그러나 관념과 시각의 반대편에 놓여 있는 몸이라고 해서, 경계를 넘나드는 살이나 체액들, 또는 사 물화와 파편화가 만연한 무정부주의적 향연과는 거리가 있다.
그의 작품은 점 선 면으로 대표되는 관념적 시각을 해체하지만, 제의적인 공간이 연상될 만큼 엄격하고 정적이다. 어둑한 공간 속에 제단처럼 배치된 조상들은 관객을 바라보고 있지만, 자신의 얼굴 (정체)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여러 방향에서 관객을 주시하는 눈 없 는 얼굴들은 편재하는 신처럼 두려움과 경외감을 자아낸다. 어떤 강 력한 힘에 의해 늘어나고 갑작스레 잘린 조상들은 장기판의 말처럼 배치된다. 작품들은 어떤 조합에 의해 다양한 서사와 상상이 가능한 전략적 배열을 취한다. 인체라는 조각의 가장 기본적인 틀을 벗어나 지 않는 그의 작품에는 정지 속에 움직임이, 정렬 속에 어긋나는 질 서들이 잠재한다. 첫 개인전 <차원의 경계에 서라>(2006)는 물론, <진심으로 이동하라>(2007)에도 드로잉과 조각 간의 호환성이 활 발했고, 드로잉을 조각화할 때 그 차원의 간격 속에서 많은 부분이 달라진다. 2010년 뉴욕과 2011년 천안에서 발표한 처럼, 금속선으로 연속 동작 중의 인물들을 표현한 선조는 공간에 드로잉을 하는 셈이다. 이번 전시에서 조각적 중간 과정 없 이 발포수지를 직접 쏘아 만든 하얀 조상 역시 회화적이다.
점 선 면을 제거한다고 하지만, 김인배의 작품들에 그것들이 없 지는 않다. 반(反)종교가 종교의 연장이듯, 금기의 위반이 성스러움 의 또 다른 측면이듯, 기하학적 공리로부터의 탈주는 또 다른 규칙 으로 대치될 뿐이다. 지하 전시장은 중심에 군림하는 거대한 좌상 좌우로 안면이 잘린 날카로운 상들이, 맨 앞쪽에는 얼굴 한가운데 모서리가 있는 상이 배치된다. 쨍하게 갈라진 이 ‘얼굴’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요소는 낯선 각도뿐이다. 인간에게 가장 친숙한 부위에 가해진 변형이 충격적이다. 여기에서는 일상적 차원에서는 들릴 수 없는 소리도 들려오는 듯하다. 날카롭게 변형된 머리가 두드러지는 이번 전시에서 가장 큰 작품은 거대한 집게처럼 가로로 죽 눌린 얼 굴의 조상이다. 그것의 양 손목은 잘린 채 둥근 구(球)가 대신한다. 전시장 한켠에 놓인 무채색 톤의 둥근 구들이 시계를 상징함을 염 두에 둘 때, 손 부위의 구는 불구라기보다는 시간을 지배하는 전능 한 존재자의 표시에 가깝다.

(사진 앞) FRP 가변설치 2013 (사진 뒤 왼쪽부터) 황동 0214

<빛>(사진 앞) FRP 가변설치 2013 <무거운 빛은 가볍다–폐허, 왕관, 기둥>(사진 뒤 왼쪽부터) 황동 0214

시선과 응시의 분열

죽음 같은 정지 속에도 분명한 시간성은 작가로 하여금 잠재적인 움직임을 보유한 도상(=구)을 끌어들이게 했다. 작가가 좋아한다 는 영상이나 음악은 그 자체가 시간성을 향유한다. 고전적 조각으 로부터 현대조각으로의 추이에서 주요 요소인 시간성은 2011년 천 안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열린 <요동치는 정각에 만나요(Turbulent O’clock)전>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났다. 이 전시에서는 작품 처럼 투수의 연속 동작을 하나의 포즈에 압축시 키는가 하면, 작품 처럼 국부가 점점 붉어지는 발광체의 모 습으로 남성 토르소들을 정렬시키기도 했다. 시간의 축을 타고 벌 어지는 사건은 다름 아닌 변형이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인간적(그 래서 신적)인 두 부분인 얼굴과 손이 상상을 초월하는 형태로 변형 된다. 거칠게 만들어진 거대한 몸뚱이는 가장 민감한 인간의 경계 를 폭력적으로 환기시킨다. 날을 드러내는 위협적인 상들 사이에 놓인 작은 황동 인체 한 쌍은 빛과 어둠을 대비시킨다. 어두운 공간 속 검은 조상들은 무의식의 풍경 같다. 이 깊은 암흑의 공간에서 황 동 빛은 흔들리는 작은 촛불 같은 위상을 가질 뿐이다. 무의식의 세 계에서 인간 이성은 극도로 상대화된다.
김인배의 작품은 정적이다. 그러나 작가는 스케일이나 밝기에 급 격한 차이를 두어 잠재적인 운동감을 부여한다. 어둠의 조상들에 둘러싸인 작은 황동색 인체들이나, 황동색 조상들의 따가운 시선에 검은 점으로 녹아버리는 듯한 인체가 그 예다. 후자에서, 머리와 팔 이 없는 인체는 크기가 매우 작아 침대가 거대하게 보인다. 침대 맞 은편에 놓인 황동색 두상들은 3위 일체를 이룬다. 왕관 모양의 머리 를 중심으로 들쑥날쑥한 기암괴석을 이고 있는 듯한 양쪽의 조상들 은 성스러운 색채와 숫자, 배치에도ㅁ불구하고 어떤 기관은 없고 어떤 기관은 과도하게 많은 괴물이다. 빛의 현현이기도 한 황동색 조상들은 머리 위 과도한 무게에 짓눌려, 흡사 무질서한 폐허 같다. 그러나 이 빛나는 괴물 트리오에는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언어적 상징 같은 성스러운 질서의 면모가 있다. 검은 우주 속에 갇힌 작은 인간은, 위협적으로 쏟아지는 빛의 세례 때문에 공포와 성스러움이 공존하는 이 존재의 본모습은 수수께끼에 싸여있다. 눈이 없는 그 조상들은 보이기만 할 뿐 보지는 않는다. 심술궂은 이성과도 닮은 이 맹목적 시선은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소원한 존재가 된 인간을 암흑 속의 작은 얼룩, 또는 <절대적인 소(素, prime)>(화이트헤드), 즉 점으로 축소시키려 한다.
마치 태양처럼, 인간에 앞서 존재하는 기호들의 스크린은 점 선 면처럼 인간의 관점을 앞서 규정한다. 인간은 이 외재적인 것들에 의해 결정되는 의미의 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황동 조 상들과 검은 인체의 만남은 응시(gaze)와 시선의 분열을 표현한다. 작가가 만들어낸 배열은 응시를 유도하는 빛줄기 속에서 대상을 명 확히 바라볼 수 없게 되어 있다. 자크 라캉은《시선의 응시와 분열》 에서 응시가 시선에 앞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라캉에 의하면 응시 는 시야에서 우리가 발견할 것을 상징하며, 신비로운 우연의 형태 로 갑작스럽게 접하게 되는 경험이다. 세계가 응시를 촉발시키는 그 순간 생소함 역시 시작된다. 나는 한곳만을 바라보지만 나는 모 든 방향에서 보인다. 시선과 응시의 분열에 의해 시각의 영역에 충 동이 나타난다. 환상에 불과한 궁극적인 응시의 지점들은 끝없는 욕망을 일으킨다. 전체적으로 수직과 수평이 교차하는 정적인 구도 속에서, 또 다른 황동 빛 인체상은 특정 종교의 도상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입방체 모양의 두상에 벌린 양팔의 손목은 절단된 채 바 비 인형의 작은 손으로 대체되었고, 남성의 성기는 다리 뒤로 빠져 있는 상태다. 눈이 없음, 팔목 잘림, 남근의 은폐 등은 거세를 연상시 킨다.
이 전시 속의 인체들은 다양하게 변주되어 있지만, 불완전하다 못해 치명적으로 손상된 인간(=남성)은 기본적으로 가부장적 질 서, 이성, 시각 등을 문제 삼는다. 그것들을 대변하는 점 선 면 같은 공리적 체계는 자연의 법칙이라기보다는 인간의 규칙이다. 규칙인 한 그것은 변형될 수 있고 변형되어야만 한다. 한시적 진리인 형식 적 체계는 절대적인 자기충족성을 주장하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는 논증될 수 없는 불확실한 것이다. 불확실성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인간의 시각은 주체와 대상을 분리시키곤 한다. 이러한 추상적 분 리에서 요동치는 육안의 차이와 다양한 시각성의 작동은 억제된다. 몸으로부터 분리된, 몸을 초월하는 시각적 인식론은 르네상스 시대 의 원근법부터 카메라의 시점까지 이어지며, 기계 눈의 시점이 일 반화된 현재에 이른다. 조너선 크래리는《 시각의 근대화》에서 이러 한 시각이 세계를 체계화된 불변적 상수들에 따라 구성하며, 또 그 러한 약호들로부터 어떤 불일치나 불규칙성도 축출한다고 지적한 다. 독특한 인체상을 통해서 몸의 명시적, 잠재적 움직임을 강조하 는 김인배의 작품들은 눈 없이, 또는 몸으로 본다. 몸이라는 불투명 한 층은 시각성에 내재된 가상적 투명성을 변형시킨다. 이 작품들 이 가지는 미술사적 의미는 ‘탈신체화된 시각성에 반대하여, 시각 적인 것을 육체화하려는'(로잘린드 크라우스) 현대조각의 흐름과 함께하는 것에 있다.●

왼쪽· 황동 Brass 60×16×45(h)cm 2014 오른쪽· FRP 130×75×138(h)cm 2013

왼쪽·<당기지 마시오> 황동 Brass 60×16×45(h)cm 2014 오른쪽·<겐다로크(Gendarloake)> FRP 130×75×138(h)cm 2013

김인배는

197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조소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6년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지금까지 총5회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또한 미국과 영국 등지에서 열린 다수의 기획전과 그룹전체 출품했다. 현재 서울에서 작업하고 있다.

[뉴 페이스 2014] 김덕영-겉과 속, 표면과 이면

뉴 페이스 2014 김덕영 겉과 속, 표면과 이면_황석권

뉴 페이스 2014
김덕영
겉과 속, 표면과 이면_황석권

벽지가 떨어진 벽, 그 이면의 검은 테이프 마감, 전시장 가벽에 수없이 박힌 망치, 마치 후면에서 자동차가 들이받고 쳐들어온 사고 현장과도 같은 공간, 벽 모서리에 세워진 기둥 사이의 균열 등. 김덕영이 그간 , , , , , <색각검사표 작업> 등에서 보여준 바다. 일견 충격적이지만, 작가는 강렬함 속에 디테일을 감춰놓았다. 마치 자동차의 상향등 불빛에 일시적으로 시력이 마비돼 놓친 바를 다시 한 번 찾아보라는 식이다. 그의 초기작 <검은 파도> 연작은 이면에 숨은 그 무엇에 관심을 가진 그의 태도를 발견할 수 있는 첫 번째 단서를 제공한다. 그러나 작가는 여기서 한걸음 나아간다. “나의 작업은 대상의 겉과 속, 표면과 이면, 껍데기와 알맹이와 같은 양면적 가치가 공존하는 상황에 관한 이야기이다. “(작가 노트 중) 그러한 태도는 지난 호《 월간미술》의 표지를 장식한 에서도 드러나는 바다. 언뜻 김덕영의 작업은 결과로서 존재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는 결과가 아닌 망치가 벽에 박히는 과정에 있다. “망치는 도구(tool)죠. 무엇을 만드는 것이에요. 그 망치가 벽면에 박히는 것은 어떤 이미지를 찾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처음 이 작업을 생각했을 때는 망치를 관객이 직접 벽에 박거나 박힌 망치를 관객이 빼서 집어가는 이야기를 생각했다고. 이를 통해 일반적으로 보이는 것보다 나만이 갖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려 했다고 한다. “벽체를 모티프로 하는 작업은 부서지고 변형되어 있지요. 그 안의 것이 ‘어떤 것’이라는 점이 결과로서 드러나게 한 작업입니다.” 그러니 연작은 힘을 가하는 ‘행위’에 집중하고 <Pang! Defensive Sffensive Space>는 그 결과물인 셈이다.
최근 끝난 <EX_AIR: 경험의 공기전>(창동창작센터, 1.24~2.14)에 출품했고, 지금은 작업의 모티프로 사용하는 ‘색약검사표’이지만 사실은 김덕영 작가에게 좌절감을 안겨주어 한 동안 방황(?)하게 만든 핸디캡이었다. 그런데 이전 김덕영의 작업과 맥락적으로 닿아있지 않을 것 같은 이 작업은 그의 말대로 “조금 다른 시선”이다. 작가는 ‘규정된 약점’을 ‘나의 시선이 갖는 차이’로 풀어낸 셈이다. 김덕영에게 인생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을 묻자 “지금 어떤 일이 제게 일어나는 이 순간입니다”라고 담담하게 답한다. 작가는 앞으로 1년간 독일 쿤스틀러하우스 베타니엔 창작센터에서 레지던스 프로 그램에 참여하게 된다. “일단 현재 진행하고 있는 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집중할 예정입니다.” 김덕영에게 앞으로도 ‘지금’이 가장 소중한 시간이길.

황석권 수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