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Face 2014] 인세인 박

모든 것은 이미지다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하루에도 수백만 개의 이미지를 접하는 이미지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듯 언제부턴가 작가들이 이미지를 생산하기보다 기존의 이미지를 수집하고 편집해 작업으로 선보이고 있다. 그중에서도 이러한 방식을 작업 전면에 내세우는 작가가 있다. 인세인 박은 미디어를 통해 수없이 생산되는 이미지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차용해 재편집한다. 아라리오갤러리 서울(7.17~8.24)에서 3년 만에 개인전을 연 그는 전시 제목으로 ‘디렉터스 컷’을 내세웠다. 그는 마치 영화감독처럼 영화, 동영상, 인터넷에서 떠도는 이미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연출했다.
인세인 박은 작업실에서 작업하는 것보다 TV나 컴퓨터 앞에서 뉴스, 컬트영화, 광고, 인터넷 이미지나 댓글, 포르노 무비 등을 보며 이미지를 수집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그는 수많은 이미지를 흡수하면서 전혀 관련 없는 이미지들을 뒤섞어 합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어느 날 북핵 뉴스를 접하고 나서 어느 영화사의 횃불을 든 여신상 로고를 보면서 핵이 폭발하는 이미지가 머릿속에 겹쳐졌다고 한다. 이 장면이 바로 <Nuclear>로 만들어졌다.
이번 전시에서 인세인 박은 이미지를 편집하는 방식 그 자체를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 그는 “이미지를 편집하는 데 작가의 의도를 주입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거의 모든 작업에서 뭉개짐(Blur)이나 망점 확대(Pixelate)와 같은 포토샵 기능이 전시를 통해 구현되었다. 이미지 확대는 프레임의 크기 변화로, 흐리기 효과는 반투명한 유리를 덧씌워 보여준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출품된 사진들이 작가가 수집한 것이면서 동시에 그가 직접 찍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수집한 이미지를 컴퓨터 모니터 화면에 띄우고 촬영하다 보니 사진 이미지에 플래시가 터진 모습도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그는 이러한 과정이 “사진의 피사체가 하나의 화면인지, 무한히 바뀌는 이미지인지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그의 작업에서 피사체의 의미는 모호해지고 이미지만 둥둥 떠다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세인 박은 개념미술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작가들이 자신의 작업에 과도하게 의미 부여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고 설명했다. 스스로 작업에서 의미를 버리는 데 2년이 걸렸단다. 몇 해 전 만해도 그는 작업을 통해 매스미디어가 정보를 조작하는 데 비판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는 지금 그러한 작업 태도에 대해 식상하다고 말한다. 물론 하루에도 생각이 수없이 바뀌듯이 자신의 작업관도 언제든 바뀔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동안 매스미디어의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다뤘지만 이미지를 대하는 태도는 계속 변화했다”며 “전시장 1층의 영상작업은 짜깁기지만 언젠가 실제 이미지를  촬영하는 작업도 해보고 싶다”고 밝혔다.
인세인 박은 오는 10월 초 ‘2013 에트로상’ 수상을 기념해 개인전을 앞두고 있다. 그는 무리해서라도 신작을 발표할 예정이다. 이번에는 오랜만에 인물 이미지를 표현한 케이블 작업을 선보인단다. 그동안 케이블을 이용한 작품엔 ‘미디어가 인간을 조종하고 있다’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그가 작품에서 의미를 덜어내고 어떤 방식으로 연출할지 주목해볼만 하다.

이슬비 기자

인세인 박(본명 박영덕)은 1980년에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났다. 경기대학교 서양화학과를 졸업했다. 2009년 신한갤러리에서 열린 <Raid on Media>를 시작으로 4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경기도미술관, 세네갈비엔날레 등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했다. 영은미술창작스튜디오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으며 2013년 제2회 에트로미술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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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rint 36×36cm(9점) 2014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전시광경

 

 

[Special Artist] 황규태

 

 

사진작가 황규태는 전통적인 사진어법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형식과 내용의 작품을 선보여 왔다.
지난 40여 년 동안 추구해 온 전위적인 작업여정을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7월 1일부터 9월 14일까지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열리는 <황규태 개인전-사진 이후의 사진(Photography after Photography)>이 바로 그것. 이 전시에는 1960년대 초기작부터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대표작이 총망라되어 출품됐다.

탐미적 아방가르드 작가

박상우  중부대 사진영상학과 교수

지난 40여 년 동안 제작된 황규태 사진 아카이브는 형식과 내용 측면에서 다양하고 복잡하다. 그럼에도 그의 수많은 이질적 사진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하나의 축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과거의 인습(因習)과 현재의 안주(安住)를 넘어서려는 끈질긴 ‘아방가르드(avant-garde)’ 정신이다. 아방가르드는 사상, 예술, 과학, 기술 분야에서 과거의 인습과 단절하고 혁신 혹은 새로움을 추구하는 정신이다. ‘혁신’ 혹은 ‘넘어섬’은 그가 스스로 고백하듯이 1960년대 사진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부터 현재까지 자신의 사진예술에서 줄기차게 추구해온 문제의식이다: “사진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어느 범위를 넘으면 사진이 아니라고 할까. 사진은 사진이어야만 되는 것일까. 그 시절의 의문들은 지금까지도 나를 괴롭히는 DNA 분자들이다.”1
황규태도 1960년대에는 다른 사진가들처럼 스트레이트 사진 혹은 다큐멘터리 사진의 스타일을 채택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선택한 사진 스타일의 ‘한계’를 스스로에게 질문했으며 이것을 어떤 식으로든 ‘넘어서고자’ 했다. 그에게 기존 사진의 근본적 한계는 사진의 존재론적 특성(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그것이 존재했음’) 자체에서 비롯된다. 사진은 회화 및 언어와 달리 기호가 가리키는 대상(지시체)이 촬영순간에 임의적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카메라 앞에 존재해야 한다.2 사진의 이 같은 피할 수 없는 속성 때문에 사진가는 문학가나 화가와는 다른 예술적 태도를 보여야 한다. 사진가는 카메라 앞에 있는 대상이 자신에게 ‘강요’하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해야 한다. 사진은 실재(피사체)에 종속된 매우 독특한 매체이기 때문이다.
황규태는 사진의 이 같은 본질적 속성을 이용하면서 동시에 거부한다. ‘그것이 존재했음’이 자신의 예술적 상상력을 펼치는 데 오히려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그는 사진매체를 사용하지만 사진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이 때문에 그는 사진의 근본적 속성을 벗어난 사진, 즉 시공간이 다른 곳에 위치했던 두 피사체를 한 장의 사진에 합성한 몽타주 사진 등 다양한 실험사진 혹은 메이킹(making) 포토를 시작했다: “메이킹 포토는 찍힐 대상이 있어야 하는 사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궁여지책이다.”3 황규태에게 예술은 결국 실재의 ‘복제’가 아니라 실재의 ‘변형’인 셈이다. 황규태의 예술론은 다음과 같은 그의 말에 응축되어 있다: “사실과 실체를 훼손해놓고, 그것을 예술이라고 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번 전시 제목인 <사진이후의 사진>은 작가가 기존의 사진 경향(‘앞의’ 사진)과 구별하여 자신의 사진(‘뒤의’ 사진)에 부여한 정체성 혹은 이름이다.
황규태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영향을 받은 사진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는 서양미술사에서 시각언어가 가장 풍요롭게 탄생한 1920~30년대 유럽 아방가르드 미술(다다이즘, 초현실주의, 구축주의)의 정신을 직접 이어받았다. 그 정신이란 기존 전통예술의 극복, 전위적 예술 추구, 과학과 테크놀로지에 대한 관심,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 허물기, 예술과 삶의 일치 등이다. 그는 더 직접적으로 당시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이 새로운 미술언어를 창조하기 위해 실험했던 다양한 사진기법 – 포토몽타주, 이중노출, 필름 태우기(버닝), 차용, 왜곡, 과학사진(현미경사진, 천체사진, 항공사진, 엑스레이사진) 등 – 을 자신의 사진에 도입했다.
컴퓨터 모니터, TV 화면에 사진을 띄워놓고 확대 촬영한 황규태의 ‘픽셀 시리즈’는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이 경탄했던 현미경사진의 일종이다. 무한히 작은 것(혹은 무한히 큰 것)에 다가가려는 황규태의 욕망은 인간 눈의 지각능력을 넘어선다. 따라서 그는 다양한 확대 도구(접사렌즈, 포토샵 등)를 이용하여 생리학적 시각도구로는 다다를 수 없는 미시세계를 탐구한다. 이를 통해 무한히 작은 세계가 감추고 있는 또 다른 차원의 미적 세계(색, 형태, 패턴)의 비밀을 드러낸다. 황규태의 픽셀 사진은 심오한 철학 얘기 – 사진의 본질은 점 혹은 픽셀이라는 존재론적 담론 – 를 담고 있지 않다. 그는 대신 확대의 즐거움, 즉 가벼운 마음으로 무심코 무언가를 확대했을 때 그곳에서 예상치 못하게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작은’ 즐거움을 추구한다. 그것은 작가의 표현대로 그냥 ‘비트 놀이’ 혹은 ‘장난’이다. 문방구에서 구입한 점(點) 스티커를 크게 확대한 이미지가 모니터의 픽셀과 유사한 패턴을 보일 때 그는 거기에서 발견의 기쁨을 느낀다. 관객은 자신 앞에 걸려있는 질서정연하고 품격 있는 커다란 추상화가 사실은 작고 하찮은 스티커를 확대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작은 충격을 받는다. ‘그냥 보는 것’과 ‘알고 보는 것(지식의 개입)’ 사이에 나타나는 괴리가 주는 매력이 황규태가 노리는 점이다.
필름을 태워 만든 버노그래피(burnography)는 황규태가 1960년대 미국 할리우드의 슬라이드 현상소에서 일할 때부터 지금까지 해온 실험사진의 하나이다. 이 기법은 미술사에서 1930년대 초현실주의 화가인 라울 위박(Raoul Ubac)이 처음으로 사용했다. 위박에 따르면 필름에 열을 가하면 필름이 변형되는데 이 변형은 예측을 불허하기 때문에 최종이미지는 초현실주의가 선호하는 우연의 미(위박의 표현대로 ‘신의 우연’)를 달성할 수 있다. 황규태는 위박의 존재를 몰랐다고 필자에게 말했다.4 자신 앞에 누가 있는 줄 모르고 새로운 사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던 그는 우연히도 미술사, 사진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아방가르드 실험사진의 한 기법을 발견했다. 그는 필름 태우기 기법을 초현실주의 맥락과 완전히 다르게 우주적인 묵시록(녹아 흘러내리는 태양), 인류의 재앙과 종말(지진, 원자탄 투하, 비행기 추락) 등 자신의 방식대로 다소 우울한 시선에 연결시킨다.
두 장 이상의 사진에서 필요한 부분을 오려 한 장의 사진에 붙이거나(포토몽타주), 두 장 이상의 필름을 겹쳐서 인화하는 방법(이중인화, 다중노출)은 황규태 사진에 가장 많이 나타난 기법이다. 이것의 기원 역시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사조에서 비롯되었다. 포토몽타주5 기법은 각 아방가르드 사조의 미학적 의도에 따라 제각각 다르게 사용되었다. 다다이즘은 포토몽타주를 기존 예술가치의 비판/전복의 도구로, 구축주의는 건설과 생산의 도구로, 초현실주의는 무의식의 표현적 도구로 사용했다. 황규태의 포토몽타주는 전반적으로 초현실주의적 경향에 가장 가깝다. 1660년대 미국 초현실주의 사진(특히 제리 율스만)에 직접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황규태의 초기 몽타주를 보면 초현실주의 사진과 초현실주의 회화(르네 마그리트)의 특성이 뚜렷이 나타난다. 예컨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물들의 병치(마천루와 인간의 눈, 자동차 안의 두 눈, 대도시와 호모 에렉투스), 사물들의 크기의 역전(마천루보다 더 큰 인간의 눈, 해변에 떠 있는 거대한 입술)은 정확히 1930년대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즐겨 쓰던 기법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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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후 사진’의 증거
황규태는 사진을 직접 촬영하지만 타인의 사진을 차용한 경우도 많다. 만 레이의 키키 사진(예술사진), 마더 테레사의 임종 사진(보도사진), 태아 사진(과학사진), 바닷속 태아 사진(주인이 누군지 모르는 사진) 등, 그는 소위 예술/비예술 분야에서 나온 모든 영역의 사진을 작품의 소재로 사용한다. 차용, 인용, 모방, 패러디 전략은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특징이다. 하지만 이 기법들은 20세기 초 다다이즘의 전형적인 예술 전략이고 현대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들이 다시 사용한 것이다. 예컨대 1919년 이미 존재한 사진(모나리자 엽서사진)을 그대로 가져다 쓴 뒤샹의 전략은 차용 기법의 본보기이다. 황규태는 “나의 인용, 레디메이드 기법은 뒤샹에게서 직접 영향을 받았다”며 다다이즘에 빚지고 있음을 필자에게 언급한 적이 있다. 이처럼 아방가르드 사조에 발을 굳게 디디고 있는 그는 “[남의 사진의] 카피와 [내가 직접] 찍음의 차이를 구분함이 무의미하다”6며 자신의 ‘카피’ 전략에 대해 명확히 밝혔다.
황규태의 아방가르드 정신은 이처럼 그가 전위적인 실험기법을 채택했다는 사실에만 있지 않다. 아방가르드 예술은 미술사에서 자신이 발 딛고 서있는 사회, 시대, 삶과 유리되지 않고 그것에 대해 항상 발언을 해왔다. 황규태도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해 수많은 질문을 제기하고 이를 사진 이미지로 시각화했다. 환경 문제(달과 물고기 뼈, 성조기 위의 플라스틱 폐기물), 핵문제(원자탄이 떨어진 도시), 생명공학 문제(공장에서 대량 복제된 아이와 여자, 눈 코 입을 바꿀 수 있는 성형기술, 어둠 속에서 부유하는 유전자, 염기서열, 변이생명체) 등 그는 우리 시대의 키워드에 대해 줄곧 작품으로 응답해왔다.
황규태 사진은 이처럼 아방가르드적 태도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 태도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아방가르드는 원래 전통적인 미학범주(아름다움, 조화, 질서, 균형)를 전복하고자 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반(反)미학적이다. 하지만 황규태 사진은 철저히 ‘탐미적’이다. 그는 다른 아방가르드 작가들처럼 새로운 형식의 사진을 끊임없이 실험해왔지만 그가 진정으로 주목한 것은 사진의 실험보다도 사진이 제공하는 시각적 ‘즐거움’이다. 한 장의 사진이 내용의 관점에서 아무리 새롭고 흥미로울지라도 시각적으로 ‘와 닿지’ 않으면 그에게 큰 의미가 없다. 예컨대 과학사진/현미경사진의 코드를 이용한 그의 픽셀사진에서 핵심은 미시세계의 들춰냄(이것은 과학자의 욕망)이 아니라 미시세계의 아름다움, 그의 표현대로 ‘컬러의 하모니’7 혹은 ‘컬러의 놀이’이다. 그는 또한 루페(확대경)로 들여다 본 TV 화면에 나타난 픽셀의 현란한 색의 잔치에 감탄하기도 한다.8 세계 만국기 200여장을 섞어 놓은 <멀팅 팟>에서도 작가는 지구촌, 다문화 현상의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지만 그가 더 관심을 둔 것은 만국기를 섞어놓았을 때 “예상 못했던 현란한 색들의 파편[의] 난무”9이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철저한 ‘탐미적 아방가르드’ 작가라 할 수 있다.
환경문제, 인류의 종말, 우주의 묵시록 등 어두운 주제를 다룬 작품들에서도 사진 이미지 자체는 시각적으로 매력적이다. 단순한 형태와 두세 가지 색만을 사용한 미니멀리즘적인 경향(검정색 바탕에 녹아내리는 빨간 태양)은 우주의 종말이라는 암울한 내용과 상관없이 보는 이에게 시각적인 즐거움을 준다. 이 같은 탐미적 경향은 한강을 초망원렌즈로 촬영한 다음 수많은 조각사진으로 몽타주한 <한강컬렉션>, 그리고 꽃들의 잔치를 펼쳐놓은 <꽃 시리즈>에서 더욱 강화된다. 이 작품들은 인류의 재앙을 다뤘던 동일한 작가가 제작한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전위적인 동시에 탐미적인 황규태 사진은 더 나아가 ‘감성적’이기도 하다. 해변에서 아버지가 딸에게 키스하는 역광 사진에서 그는 “[당시] 나는 역광사진에 매료되었다. 개념이나 이론보다는 감성에 빠져있었다”10며 사진에 대한 자신의 정서적 태도를 밝힌다. 작가는 또한 자신의 사진에 자주 등장하는, 떠오르거나 지는 거대한 붉은 태양을 마주하면 걷잡을 수 없이 흥분되거나 가슴이 벅차올라 거의 카타르시스 상태에 빠진다고 말한다. 나아가 그는 심지어 환경유해물 생산 공장과 같은 ‘차가운’ 소재를 마주할 때도 지성보다는 감성으로 접근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일생 전체가 ‘안타까움 자체’라고 고백하기도 한다.
황규태 사진에 숨어있는 복잡한 의미의 지층들을 드러내려는 작업은 언제나 녹록지 않다. 그의 사진들 안에는 서로 충돌하는 다양한 이질적 범주들 – 과학기술, 실험정신, 미래, 전위, 암울함, 시각적 즐거움, 놀이, 장난, 그리고 감상적 태도 – 이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황규태의 정체성을 규정하자면 ‘탐미적 아방가르드 작가’ 혹은 ‘유쾌한 아방가르드 작가’이지 않을까. 왜냐면 그의 사진은 언제나 즐거움, 미, 실험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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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규태, 《황규태》, 열화당, 2005, p. 18
2 Roland Barthes, La chambre claire : Note sur la photographie, Gallimard, Seuil, 1980, p. 120
3 황규태, 앞의 책
4 황규태는 자신의 이 독특한 기법이 사진 역사에서 “내가 처음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황규태, 앞의 책, p. 30
5 이중인화, 다중노출도 넓은 의미에서 포토몽타주에 속한다
6 황규태, 앞의 책, p. 134
7 <비트 놀이>(1999)에 대한 작가의 작품 해설
8 “나는 궁금증이 많다. 필름을 확대해서 들여다보는 루페로 TV화면을 들여다보니 픽셀이 질서정연한 원자 알갱이처럼 현란한 색을 이루고 있다.” <티 비 픽셀 오-화이트>(2010) 작품 해설
9 <픽셀 픽시>(2010) 작품 해설
10 황규태, 앞의 책, p. 70

황규태는 1938년 충남 예산에서 출생했다. 동국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경향신문 사진기자(1963~1965), 미주동아일보 대표(1984~1992)를 역임했다. 1973년 프레스센터에서 첫 개인전 이후 15회 개인전을 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한미사진미술관, 한국민속촌미술관, 워커힐미술관, 아트선재아트센터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Artist Review] 김선형

블루수묵화, 감각으로 밀고 나가기

지천명의 나이를 갓 넘긴 작가의 51번째 개인전이라 하면 누구든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김선형의 푸르디푸른 화면을 직접 본다면 그의 “두서없는 이미지들은 작가의 변화무쌍한 심정의 전환에 따라 나타나는 심상”이라는 평가에 동의할 것이고, 그것이 왕성한 작품 제작의 바탕임을 수긍할 것이다. 김선형의 파란 정원에서 동양의 수묵과 서구 현대미술의 조우를 목도한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

김선형은 수묵 대신에 청색 안료와 미디엄을 구사해 단색조로 이루어진 그림을 그린다. 여전히 모필과 물의 농담에 의한 변화를 극대화해서 수묵의 맛을 유지하는데 먹 대신 쓰인 청색 안료는 청화백자 같은 그 푸르른 맛을 가득 껴안고 있다. <Garden Blue>이란 제목이 언급하듯 화면은 자연, 숲의 한 풍경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를 선사한다. 결국 그는 수묵화와 산수화, 서예(선) 등을 결합해내고 한편으로는 청화백자의 미감과 선비들의 문기(文氣) 짙은 취향과 격을 끌어안으면서 그러한 전통과의 깊은 교호나 공감을 지향하는 ‘현대적인’ 그림을 시도하고자 한다. 그런데 그는 이전 스승, 선배 작가들과는 다른 문화적 체험을 한 세대다. 그야말로 울트라모던, 포스트모던의 세례를 받은 감각의 소유자이다. 따라서 이 두 개의 층이 교접하고 엇갈리면서 표출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기이한 청색 수묵화이자 감각적인 수묵 추상작업이며 기의를 상실한 초서적인 추상에 가깝다. 이른바 한국의 전통미술 혹은 문화를 자기의 감각으로 번역하는 작업이다. 그것은 전통의 정신과 격을 존중하나 그 문화적 실체감은 부재한 상황에서 빚어지는 불가피한, 감각적으로 근접하는 전통문화의 오마주에 해당한다.
한국의 근현대미술은 예외 없이 ‘현대와 전통’ 사이에서 끊임없이 현재적 정체성의 의미를 모색해왔다. 이는 현재적 자기정체성에 대한 전통적 환원이라는 방법론에 기초해 이루어져왔다. 그러나 여기에는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만남과 결합을 매끄럽게 파악하고 있다는 단점이 자리한다. 과연 그러한 만남과 조화는 가능할까? 사실 ‘전통’이란 현재의 관점에서 해석되고 평가된 과거(전통이란 현재의 산물)이기에 전통과 현재가 만난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전통이란 것이 정신이나 영혼, 민족성 같은 허깨비가 아니라 박물관, 교육제도, 평가, 역사기술의 제도 등의 ‘물리적이고 현실적인 제도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음을 상기해보면 현재라는 시간을 메우고 있는 그 제도들 밖에서 전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알다시피 전통이란 보존되고 전승된 어떤 것이 아니라 고안된 어떤 것이다. 그러니까 전통이란 이 시대의 여러 가치관 중 하나일 뿐이며 그것은 현재가 과거에 대해 덧씌운 프레임이다. 과거는 전적으로 현재의 산물이란 얘기다. 따라서 문제는 현재의 관점에서 그 전통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느냐이다. 그간 우리의 동양화는 전통과 서구에서 받아들인 현대미술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도모해야 하는 운명을 외면하기 어려웠다고 본다. 그 사이에서 모종의 틈과 가능성, 균열을 모색했던 것이 오늘날 한국 현대미술의 초상일 것이다. 김선형의 그림 역시 전통과 현대의 연결, 접목과 해석이란 과제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해 보인다. 그리고 그는 조선 문인들의 멋과 격을 동경하고 고미술에 담긴 절묘함과 소박미도 헤아리고 있다. 동시에 수묵화의 당위성에 타피에스나 황창배, 나아가 동시대 미술의 다양한 경향과 스타일을 두루 체득하면서 이 모두를 결합해낸 자신만의 회화를 만들고자 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게 <Garden Blue>이다. 내 생각에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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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기(文氣) 흐르는 추상의 시도
그래서 그는 자연/숲(생명)을 소재로 그린다. 청화백자의 꽃문양이나 민화를 차용한다. 그 기운을 어떻게 동양화의 전통적인 재료체험과 물성을 통해 드러낼 것인지를 고민한다. 한지와 천, 안료와 물, 붓의 사용은 당연하지만 검정의 먹 대신 감각적인 블루 색을 대신했다. 여기에는 문인화적 멋과 운치, 그리고 한국적인 그림, 전통에 대한 고민이 묻어있다. <Garden Blue>의 경우, 유기체로서의 자연이 지닌 생명력과 기운을 푸른 색감과 자유로운 필획으로 표현하고자 하는데 그것은 구체적인 숲을 그린 것이 아니라, 숲으로 대변되는 존재를 개념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숲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 떠오르는 숲, 그 숲의 이미지를 그렸다.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자연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정신적 흐름인데 이는 자기의 뜻을 자연물에 의탁하는 문인화적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다. 또한 형태와 닮음을 구하지 않고 생동하는 기운을 찾는다. 만물은 영기(靈氣)의 화신이므로, 만물이 영기를 발산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는 화가의 몫이다.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자신만의 필법, 골법을 만든다.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론은 다음과 같다. 그는 아크릴, 안료와 석채, 미디엄을 섞고 이를 물과 함께 해 인위적으로 마름을 조절한다. 선묘처리를 한 바탕 위에 스프레이로 물을 뿌린 뒤 촉촉한 상태에서 스퀴즈로 물기를 밀어내는 방법 등을 구사하는데 이때 물이 밀려나가면서 다른 부분과 접촉점을 갖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전체적으로 비슷한 톤을 유지하게 된다. 김선형은 동양화의 수묵화를 이루는 재료들, 매재적 속성을 최대한 순리에 따라 화면 위에 얹혀놓았다. 자연에 따른다는 것은 순리와 이치에 따르는 것이다. 동양화는 침윤하기 쉬운 먹과 색을 부드러운 모필을 먹여서 침윤하기 좋은 종이 위에다 그리는 것이므로 지극히 우연적인 수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인위로, 작위로 이루어지기 어렵다. 우연히 가져오는 기법을 필연으로 이용해서 그리는 게 동양화 수법의 전통이다. 그림 역시 인위적이며 작위적인 것이 아니라 무위적인 것이다. 그는 한지의 물성에 꾸준한 관심을 보여왔다. 한지는 무엇보다도 그 흡수성 때문에 평면에서도 깊이와 부피를 포용하는 신축성 있는 재료이다. 먹이 번진 한지는 2차원도 3차원도 아닌 이를테면 소수 차원의 프랙탈 공간이며 생성하고 변화하는 차원을 보여준다. 이는 무척 동양적인 세계관, 우주관을 가시화한다. 물의 순리를 따르지 않으면 그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동양의 먹그림이란 결국 물의 흔적, 자취, 경로, 흐름 등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수묵은 필법에 묵법으로, 궁극적으로는 수법(물의 법칙)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몇 가지 안료를 섞어 만든 푸른색의 물감을 장봉에 묻혀 한지 위로 직입하는 그의 작업은 붓을 대는 장력과 화선지의 반발, 그리고 물감의 물성이 순간적인 필획으로 만나 묶여버리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붓 자체, 선이나 색, 물, 종이의 물성을 만나는 일”(강선학)이다. 무엇보다도 화면은 필획의 흔적들로 이루어졌다. 가장 기본적인 그리기, 붓의 놀림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이 자동기술적인 선은 직관적으로 나아간다. 그는 대충 생각하고 곧바로 그림을 그려나간다고 한다. “그의 두서없는 이미지들은 작가의 변화무쌍한 심정의 전환에 따라 나타나는 심상”(김백균)이라는 얘기인데 그러나 장식적인 선, 몇  가지 도상이 반복해서 출몰한다. 거의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붓놀림의 흔적이고 그것으로 충족한 화면이면서도 유사한 패턴들로 마감되는 장식이 있다. 어떤 것을 그리고 나타내려고 한 것이기보다 순수한 선과 점의 자동적인 기술의 흔적에 불과한 듯 보인다. 그러나 그 선들은 나무와 풀, 꽃과 새, 그리고 상징적인 도상의 꼴을 암시한다. 그래서 그의 붓질은 구상과 추상 사이, 선과 도상 사이에서 진동한다. 붓질, 붓의 놀림들만이 전면적으로 화면에 가득하다. 그것은 전적으로 필력에 의존한 것이다. 가장 근원적인 그 붓질, 선은 무척 골법적이다. 골법이란 형체의 기본형 및 그 형체 안에 갖추고 있는 감정을 뜻한다. 그런데 형체의 근원이자 형체를 지탱하는 것은 결국 기(氣)다. 이 붓질은 자연풍경을 암시하는 듯하면서도 기의 표출이고 흔적이 된다. 한편 붓질이란 다름 아닌 작가의 신체적 행위의 기록인 셈이다. 붓을 통해 자기 자신의 신체의 굴곡과 이동, 움직임, 호흡, 떨림 같은 것들을 보여준다. 그는 수묵화의 뼈대인 필을 통해 수묵의 정신을 육화해내는 조형적 실험을 전개하고 있으며 이 같은 작업을 통해 서구 현대미술을 동양화 재료와 정신으로 접목하고자 한다.
화면은 온통 푸른색으로 가득하다. 종이 안에서 이루어지는 물과 먹/청색 안료의 운용만이 보일 뿐이다. 여기서 청색의 의미는 아침이 시작될 때의 푸르름으로 여명, 시종의 상징적 색이자 윤회의 색이다. 그리고 어둠과 밤 사이에 있는 색, 공기의 색이기도 하다. 더불어 청색물감은 먹보다는 물성이 적극적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청색은 청화백자의 푸른 빛깔을 연상시킨다. 맑고 청아하다.
“슬픔과 희망의 빛을 함축한 푸른색의 선을 긋고 점을 찍어 나가는 나의 그리기는 내 안의 모든 감정으로부터 나를 정리하는 동시에 나를 정화한다. 기쁨을 채우고 묵은 슬픔을 지워나가며 내 삶을 그려낸다…. 내게 있어서 시공의 경계적이고 인생의 시작이며 끝점의 색…. 생멸 자연의 근본색이며 인간 삶의 운용을 다스리는 기운의 색이다”(작가노트)
김선형은 이른바 문기에서 나오는 추상을 시도하고자 한다. 이는 동양화가 현대회화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이란 인식 아래 가능하다. 그러한 인식은 해방 이후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고암이나 산정, 남천 등이 그러한 길을 걸어왔다고 여겨진다. 이처럼 그는 한국적인 정서, 한국인으로서의 그림을 의식적으로 추구한다. 동양화가 해낼 수 있는 여러 가능성과 매력, 의미를 열어놓고자 한다. 특히나 조선이 가졌던 문인의 소박하고 담백하며 격이 있던 미감, 우아하고 점잖은 문화를 추구하는 그는 문인적 모습을 동경하며 긋고 찍고 툭툭 던지듯이 그린다. 김선형의 그림은 문인화에서 볼 수 있는 고도의 간결과 절제의 정신적인 격조를 띤 것, 선묘 자체가 생동하는 기능을 지닌 그림의 동경으로 보인다. 동양화 고유의 표현기법을 회복시키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감각’으로 밀고 나가고자 한다. 문제는 그 감각이 얼마만큼 지속적이며 정체되지 않고 밀고 나가 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아울러 문기 있는 그림의 실현이란 과연 어떤 것이냐 하는 점도 문제다. 심정적인 공감이나 코스튬으로는 가능하지 않을 텐데, 더구나 지금 우리는 그 문화로부터 너무 멀리 벗어나 있기에 어떠한 체득이 가능할지는 무척 곤혹스러운 문제다. 그것을 감각으로 내포하기에는 어림없는 일이기에 그렇다.●

김선형은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동양화과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8년 첫 개인전을 시작하여 국내외에서 51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다수의 기획전과 그룹전에 참여했다. 현재 국립경인교대 미술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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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Review] 염성순

미로화된 욕망의 회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유동하는 것들. 그러나 미묘하고 조심스러운 움직임의 차이.이는 작가 염성순의 작품에 보이는 세계이다. 최근 갤러리 담에서 열린 작가의 전시 〈털〉(7.9~22)은 털끝만큼의 미세한 차이의 경계를 넘는 작가만의 방법을 보여준다. 여성과 남성의 몸을 통해 주체를 탐구하며 반복되는 경계넘기를 시도하는 작가를 지금 만나보자.

이선영  미술비평

염성순의 최근 전시 <털-심층의 표면에서 생긴 일>은 본질과 현상, 내부와 외부, 정신과 물질 등으로 구별되지 않는 하나의 실재로서의 몸과 거기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표현한다. 복잡 미묘한 과정에서 생성된 풍부한 색감, 그것에 실린 유동적이고 유기체적인 형태는 염성순 그림의 특징이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신체의 일부인 ‘털(hair)’을 특정하고, 남성과 여성의 성기관이 등장하는 등 보다 구체적인 접근을 꾀한다. 붓과 자신을 일체화한 삶 이래, 모호하고 추상적이기보다는 더 분명하고 특수한 양상을 띠는 작품에서 진정한 진보를 발견한다. 그것은 선택된 일부에도 전체를 담을 수 있는 역량이며, 반복 속에 차이를 주는 방식이다. 어떤 경계를 뚫고 나오는 털은 유연하면서도 강력하다. 털은 때가 되어 경계를 파열하는 필연적인 힘이지만, 그 목적과 방향이 확실한 것은 아니다. 붓의 털끝에서 나오는 이 산물은 생명은 물론 작업의 기제를 알려준다. 작가는 생명을 이루는 이런저런 물질에서 생명체로의 도약, 작업을 이루는 이런저런 요소에서 작품으로의 도약을 촉구하고 그것을 기다린다. 경계란 곧장 경계 넘기를 예기한다. 경계 넘기가 가능한 힘은 말 그대로 털끝만큼의 미세한 차이일 수 있다. 필생의 업으로 그림 그리기를 선택한 이에게도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 매순간의 도전과 그 도전의 연속이 바로 작품이다.
작업이란 늘상 작업자를 어떤 경계까지 몰아붙이는 흥미진진하고도 위험한 게임임을 염두에 둘 때, 털은 피상적인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포괄하고 내포하는 바는 풍부하다. 이 전시에서 털은 인간의 특징인 머리털을 제외한 체모로, 인간보다 더 근저에 있는 동물성과 닿아있다. 작품〈   털〉은 방향을 달리하면 대지 안팎에서 일어나는 생명의 과정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엉덩이 라인은 둔덕이 되고 털은 식물이 되며 그 바깥은 노을 지는 하늘처럼 말이다. 몸은 화면 가득 펼쳐진 풍경(bodyscape)이 된다. 움푹 패이고 텅 빈 부분이 있는 등, 밀도와 강도는 부분마다 다르다. 동식물을 구별할 수 없는 형태에 생기다만 것들, 막 생긴 것들, 밖으로 터져 나가는 것들이 공존하며, 이러한 시간성에 의해 정지된 화면은 잠재적인 움직임으로 가득하다. 작품〈  털이 좋아〉는 알 속의 상황인데 이미 유동체를 넘어서 털로 뒤덮인 단계에 이르렀지만, 바깥을 두려워하는 표정과 몸짓이 역력하다. 알을 깨고 나갈 두려움 때문에 모체 속의 아이는 이미 폭삭 늙어버렸다. 〈  털이 좋아〉와 같은 크기의 짝으로 제작된 〈   알에서 나오다〉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결국 바깥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과정이다. 행복이든 불행이든 삶은 냉혹하게 시작된다. 〈   알에서 나오다〉는 모호한 형상에 의해 시간과 그에 따른 인과적 순서가 교란된다.
엉덩이로 추정되는 선 사이의 형상은 태아보다는 남근을 닮았다. 화면 왼쪽 아래에 아이 머리를 한 형상이 육체의 심연 속에서 바깥을 향해 떠있으며, 나오는 중인지 들어가는 중인지 불확실한 상황이 그런 추정을 가능케 한다. 안과 밖의 경계가 느슨한 채 출렁거리는 모체는 점점이 뿌려진 색채의 입자와 더불어 생명의 율동으로 충전된다. 성(性)은 모호하지만, 비교적 명확한 해부학적 형태 위에 뭉침이나 확산 같은 힘의 분포가 두드러진 작품〈   몸〉과〈  엉덩이〉는 물질과 에너지의 상호교환이 활발하다. 뭉쳐진 피톨이나 예민한 신경망의 밀집은 심신을 동시에 활성화한다. 작품〈   끓는 남자〉, 〈    통증〉, 〈  우는 남자〉, 〈    쓸쓸한 남자〉에는 남성이 분명히 드러난다. 털이 남성에게 좀 더 많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털 전>은 여성의 관점으로 본 (남성적) 욕망의 모습이 상당 부분 차지한다. 여기에서 남성의 곧추 선 욕망에 가득한 고독과 고통은 숨길 수 없다. 그림 속의 남근은 지배적 질서에 군림하는 위풍당당한 기표(Phallus)로서의 위상을 잃었다. 거기에는 거듭 좌절될 수밖에 없는 출구 없는 욕망의 드라마가 있을 뿐이다. 〈   숲〉과〈  꽃숲〉으로 나타나는 여성화된 풍경은 하나의 성 기관에 밀집된 욕망이 아니라, 다형적(polymorpho usly)이다. 다형적 성은 성도착자의 성이기보다는 유아에게 보편적이며 여성적인 성욕으로 알려져 있다.
타자가 된 주체
작품〈  여성 속 남자〉는 거세된 존재로서 부재나 결핍으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양성을 포괄하는 존재로서의 여성이며, 같은 크기의 작품〈  초록색 털〉은 모체 속 개체를 초록빛 자연과 일치시킨다. 모든 욕망이 충족되는 전능한 모체 속에서 바깥을 두려워하는 작품〈  털이 좋아〉는 털 자체는 명확히 보이지 않지만 부드러운 보호막으로서의 모체를 연상시킨다. 이 모태적 시공 속에는 생멸하는 존재들이 똬리를 틀고 있다. 자궁으로부터 집까지 여성의 영역은 육체적, 물질적, 심리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장소이다. 그러나 모성천국에 대한 생각은 일방적일 수 있다. 품고 보살펴야 하는 존재는 고달프다. 여성은 모성을 단지 아이를 안고 있는 무성(無性)의 천사 같은 존재로만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권력관계로 점철된 인간사의 사회적 모순을 편리하게 해결하는 방식 중의 하나가 한쪽 성에 자연적 조화와 통일을 기대하면서 영원한 휴식처를 갈구하는 것이다. 비역사적 타자로서의 그녀는 선천적으로 갖추어야 할 미덕이 기대되지만, 이러한 숭고한 가치는 곧잘 아전인수적으로 왜곡된다. 여성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인류를 낳는 존재이기에 굳이 예술이나 과학을 비롯한 창조 활동을 할 필요가 없다는 편협한 생각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 꼭 필요한 것을 생산하는 이에게 적반하장으로 가해지는 불리한 조건은 여성, 예술가, 노동자의 존재에서 선명하다.
그들은 다수이면서도 소수자의 위치에 있다. 다수적 소수자임에도 불구하고 창조하고 생산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아름답다기보다는 기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의식이라는 주체 내부의 타자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여전히 성(욕)을 남성 중심적으로 이해했던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거세된 듯 보이는 여성의 성 기관, 나아가 여성의 공간으로 간주된 집을 기괴함(unheimliche)의 원천으로 여겼다. (여성적)기괴함은 섬뜩하면서도 매력적이라는 양가감정을 일으킨다. 가장 일상적인 것 속에서 발견되는 비일상적인 감정은 경계 위에 있는 것이며, 금기와 위반, 정상과 이상, 성스러움과 혐오스러움 같은 상반되는 가치를 넘나든다. 그것은 크리스테바가 개념화한 ‘탈중심화된 주체(decentered subject)’와 ‘이행 대상(transi- tional object)’과 밀접하다. 경계를 뚫고 흘러내리는 것들은 육체적 차원에서든 심리적 차원에서든 제어되어야 할 금기지만, 동시에 카타르시스와 희열을 준다. 한계를 뚫고 터져 나오는 체액들은 오염과 정화를 동시에 야기한다. 가로질러지기 위해서만 설정된 경계 위에서 털은 다양한 은유로 확장된다. ‘어브젝션(abjection)에 관한 에세이’라는 부제를 가진 크리스테바의《  공포의 힘》에 의하면, 비체(abjection, 卑體)는 경계상에 있는 것, 경계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비체는 애매모호하며, 어중간하며, 복합적이다.
비체는 본질적인 특성이 아니라, 경계와의 관계이며 경계지역 밖으로 내던져진 것이다. 그것은 구분 자체를 위협함으로써 정체성을 교란시킨다. 원형적 비체의 체험은 출생, 즉 염성순의 작품에도 선명한 출산의 이미지이다. 인간은 배설물 사이에서 태어난다. 배설물은 깨끗함과 더러움을 구별하는 질서에 의해 분류되고 관리되지만, 여전히 위협적이다. 가령 모성적 용기(容器)는 개체를 다시 빨아들일 수도 있는 두려운 것이다. 주체화 과정을 시작하기 위해, 아이는 어머니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독립되지 못하면 비체에 삼켜진다. 염성순의 작품〈  여성 속의 남자〉에도 욕망과 삼키는 것의 관계가 나타난다. 탄생과 양육과 보호를 암시하는 자궁은 동시에 탐욕스러운 육식성 질(carnivorous vagina)이기도 하다. 욕망과 죽음은 한 몸의 두 얼굴일 것이다. 작품〈   알에서 나오다〉에서 몸의 실루엣과 체내의 상황이 공존하는데, 여기에는 어머니와의 태곳적 관계를 떠오르게 하는 태반의 이미지가 발견된다. 제 몸에 타자를 품을 수 있도록 하는 이 기관은 창조활동에 대한 오랜 비유의 터전이었다. 모체로부터의 분리는 육체적인 것을 넘어 정신적(상징적) 차원으로 이어진다.
모태로부터의 분리와 부성적 상징의 일체화로 압축될 수 있는 개체화(주체화) 과정은 소외의 연속이며 험난한 과정이다. 막 나온 태아보다는 남근처럼 보이는 모호한 형상은 나온 곳으로 들어가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것은 (성적) 욕망과 죽음의 관계를 떠오르게 한다. 예술적 창조 역시 늘 가까이에 있는 죽음과 더불어 채울 수 없는 욕망을 갈구하는 행위일 것이다. 염성순의 작품에 줄곧 나타나는 부글거리고 뭉글거리며 생성 소멸하는 유동적 형태는 경계를 넘기 위해서만 경계를 설정하며, ‘털’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직선적 요소는 2008년에 이상과 서정주의 시(詩)세계를 주제로 한 개인전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다가 이번 전시에서도〈  여성 속 남자〉와〈  초록색 털〉에서 발견되지만, 여전히 곡선적 요소가 압도적이다. 곡선적 요소는 계속 출렁거리면서 무엇이 되든 자연발생적인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염성순을 뛰어난 색채화가라고 규정해도 될 법한 이름붙일 수 없는 색채의 구사 역시 같은 맥락이다. 작업 과정에서의 이러한 예측불가성은 환희이자 고통이다. 양자는 서로에게 속해 있다. 예술은 자신으로부터 나왔음에도 낯설다. 작품이란 동일자의 복제도 분신도 아니다. 그것은 타자이다. 아무런 거부반응 없이 자신 속에 타자를 품는 모성처럼 그렇게 타자와 조우하는 것이다. 무엇이 생겨날지 가늠할 수 없는 화폭은 타자를 품고 있는 모체에 근접한다.
이성적이며 합리적이고 자유의지를 가진 자율적 개인이라는 인본주의적 이상만큼 염성순의 작품과 멀리 떨어진 것은 없다. 몸 자체가 동일자적 이성에 의해 타자로 간주되어왔다. 몸은 계층적으로 잘 질서 지워진 조직화된 유기체가 아니다. 그것은 ‘속도와 강도로서의 표면’, 즉 ‘기관 없는 몸’(들뢰즈와 가타리)이다. 염성순의 작품은 발생하는 배아의 이미지로 가득한데, 기관 없는 몸의 대표적인 예는 기능으로 성충이 되기 이전의 알(卵)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  천개의 고원》에서 인간을 가장 직접적으로 구속하는 세 개의 지층으로 유기체, 의미생성, 주체화를 든다. 저자들에 의하면 기관 없는 몸으로 유기체를 해체하는 것은 탈영토화를 향해 몸체를 여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몸과 예술은 ‘욕망들의 연결접속, 흐름들의 접합접속, 강렬함들의 연속체’로서 진정한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물론 이번 전시는 그 어느때보다도 기관이 명확하게 드러나지만, 비율과 맥락과 의미가 불확실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몸체에 충전된 강렬함은 계층화된 모든 형식을 변형시킨다. 유동적인 색채와 형태는 바로 끝없이 변신 중인 주체를 표현하기에 적합하다. 패임이나 구멍, 흩뿌려짐 등으로 나타난 수수께끼 같은 공간 역시 주체 내부의 거대한 미지의 공간들을 암시한다. 이곳에 타자가 또는 타자와 접속할 수 있는 장이다. 예술이란 결코 변할 수 없는 자신만의 진실을 표현하거나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 없이는 결코 고정시킬 수 없는 끝없는 변화의 흐름을 순간적이나마 기념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

염성순은 1961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다. 조선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베르사유 미대에서 수학했다. 1994년 경인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을 시작으로 10회의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고 일민미술관, 제주항 여객터미널,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갤러리 담 개인전 광경.  왼쪽·〈알에서 나오다〉 캔버스에 아크릴162×162cm 2014 오른쪽·〈털이 좋아〉 캔버스에 아크릴 162×162cm 2014

갤러리 담 개인전 광경. 왼쪽·〈알에서 나오다〉 캔버스에 아크릴162×162cm 2014 오른쪽·〈털이 좋아〉 캔버스에 아크릴 162×162cm 2014

 

 

[New Face 2014] 강호성

어린아이, 세상으로 나오다

작가 강호성은 스스로를 ‘알전구’ 같다고 표현했다. 알전구는 둥근 곡선과 유리의 매끄러운 질감 때문에 만지면 차갑다. 하지만 전구를 등에 끼우는 순간,  온기를 갖고 투명했던 유리에선 빛이 밝아온다.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라  차갑다는 말을 듣지만 그의 내면의 온기를 온전히 담은 작품은 맑고 밝다.
강호성은 대학교 4학년 때 제1회 아시아프에 출품한 <음유동자> 시리즈가 주목받으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는 <요지연도(瑤池宴圖)>를 떠올리며 아이들을 동자로서 불러들였다. 천진난만한 아이가 말 위에 올라타 악기를 다루는 모습은 보는 사람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를 머금게 했다. 바로 이 솜사탕같이 포근한 아이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수많은 갤러리로 부터 러브콜을 받은 그는 대학교 졸업 직전 첫 개인전을 열며 성공적으로 미술계에 데뷔했다. 그러나 이때 작가는 물밀듯 들어오는 상업화랑의 러브콜 때문에 그림이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을까 경계하며 작업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세계에서 연주하던 동자들을 자신의 일상 속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음유동자> 시리즈에서 등장인물 의 캐릭터를 선보였다면, 그 이후 작업에선 그들의 공간, 스토리가  체계적으로 잡혀갔다. <산책>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벤치에 앉아있거나 화단으로 나온 동화 속 주인공들이 돋보인다. 때로는 공작 깃털 초대장을 받아들고 다리를 건너가 마주하게 되는 동화 속 세상을 나타내기도 했다(<우리시대의 동화>). 2013년 전시한 <롤 플레이>는 여러 시도를 한 작품이었다. 역할극을 주제로 어린아이 얼굴의 특징을 끄집어내어 가면을 만들었다. 작가 스스로 ‘못난이 시리즈’라고 부르는 이 작품은 아이들에게 감각적인 부분이 필요한 역할을 부여하고 이를 담당하는 모습을 담았다. 또 한 가지는 가면의 제의성에 주목한 ‘서낭당’이다. 도깨비 가면 자체가 하나의 권력을 갖는다고 상정하고 권력에 종속되어 안정감을 느끼는 인간의 속성을 가면 앞에서 아이들이 장난치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강호성의 모든 작품에는 스토리가 살아있다. 그러나 저마다의 스토리가 유기적이지는 않다. 혹자는 시리즈마다 바뀌는 서사에 당혹스러울 수 있지만 한편으로 매 전시마다 그 당시에 느끼는 감정이 담긴 이야기를 모색하는 작가의 뛰어난 스토리 구성능력이 눈에 띈다. 각 스토리는 아이가 등장하고, 소리가 표현된 공통점도 있다. 작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절대적인 미가 있다고 믿는다. 이를 나타내기 위한 소재로 음악과 아이를 택했다”며 자신의 미학적 견해를 밝혔다. 작가는 어두운 내용을 주제로 삼더라도 아름답고 따뜻하고 맑게 표현하고자 한다. 장지보다 비단에 채색을 선호하는 이유도 맑은 이미지를 보다 영롱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다.  비단이라는 특성상 철저하고 꼼꼼하게 구상한 후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번 노암갤러리(8.27~9.3) 전시에 선보일 작품에선 눈에 띄는 변화가 감지된다. 물론 여전히 비단에 스며든 은은한 빛과 아이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10대 후반으로 훌쩍 자랐고 서사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보다 아이들 개개인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예민한 청소년기 아이들을 표현한 ‘이상(理想)감각’에서 감각적이고 여린 아이들의 오감을 행동으로 표현했다. <사다리 위의 신사>라는 제목으로 준비 중인 전시는  <롤 플레이>와도 연결지점이 있다. 사다리를 개개인의 모습으로 상정하고 그 위의 신사들은 하나의 권력자로 보았다. 사실적인 상황과 연결되어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변화는 지난 4월에 발생한 세월호 침몰 사건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고등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꾸준히 해온 작가에게 큰 우울감을 주었다고 한다.
비단을 선택한 작가가 표현하는 우리 시대의 모습에는 맑고 따뜻함이 스며들어 있다. 고독하거나 끔찍한 세상일지라고 그의 붓을 거치면 생그럽게 태어난다. “추에서 미를 찾는 것은 나의 소명이 아니다”라는 작가의 한마디가 그의 작품을 가장 잘 설명하는 단서가 아닐까.

임승현 기자

강호성은 서울대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2009년부터 5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정부미술은행, 영은미술관, 분당서울대학교병원 등에 작품이 소장되었다. 현재 양주시립 미술창작 스튜디오 777레지던스 입주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강호성작품 (5)

〈다감〉 비단에 채색 54×158cm 2014

 

[New Face 2014] 정효영

기억은 움직이는 거야

최근 설치작가 정효영의 작업은 변모하고 있다. 그녀의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거실 한가운데는 한창 제작 중인 신작이 놓여 있었다. 아직 구체적인 스케줄이 정해지진 않았지만 다음 전시에 선보일 예정이라며 작가는 작품이 앞으로 더 커지고 풍성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2013년 노암갤러리에서 2번째 개인전을 열기까지 정효영은 설치작업에만 매달렸다. “어느 순간 방에서 바느질하고 있었다”고 말할 만큼 그녀는 작업 자체에 과도한 의미를 두지 않는다.  삶과 작업이 너무나도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년시절의 기억과 경험이 투영된 그녀의 작업은 피부 톤의 인조가죽으로 감싼 형태들이 타이머에 맞춰 움직이는 조각으로 다소 그로테스크하게 보이기도 한다.
정효영은 “그동안 작업이 너무 내 얘기만 한 것 같다”며 요즘은 좀 더 보편성을 갖기 위해 물리학 공부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 제작하고 있는 작업은 기억에 대한 기존의 맥락을 유지하면서 지하실이라는 모티프를 중심으로 다양한 사물들이 서로 얽히고 설키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낼 예정이란다. “예전 작품이 사물을 온통 가죽으로 싸서  못 알아보게끔 만들었다면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집 같기도 하고. 벗겨낼 건 자연스럽게 놓아두고자 한다.” 그녀의 작업에서 사물과 사물이 엮이는 방식이 변화하면서 바느질의 스타일이나 의미적인 측면도 변했다. 그녀에게 바느질은 기억을 엮어나가는 수단이자 삶의 일부다.
실제로 설치작업 전체가 손바느질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작업량이 상당하고 제작하는 데 시간도 오래 걸린다. 그리고 정효영은 작품을 움직이게 하는 기계장치도 직접 제작하고 구동시킨다. 그녀의 작업에서 움직임은 매우 중요하다. “조각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매스도 중요하지만 작품이 움직일 때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이 다 들어 있다. 기억도 구조적으로 한 부분만 움직이는 것이 맞닿은 주변이 함께 움직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모든 것이 생성되고 소멸되는 순환과정을 그림자로 표현하고 싶다. 기억은 실체가 사라지면 한 순간 함께 사라져버리는 그림자와 비슷하다. 그림자를 통해 기억 속 요소들이 증식되고 사라지면서 또 다른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어질 수 있다.”
정효영은 개인작업뿐 아니라 문학을 전공한 언니 정무진, 사진을 전공한 동생 정영돈과 함께 ‘무진형제’ 라는 이름으로 영상작업에도 매진하고 있다. 언니는 시나리오, 정효영은 미술관련 소도구와 설치물 제작, 남동생은 촬영으로 역할이 분담되어 있지만 모든 것을 치열하게 토론하면서 한 편의 작업으로 완성시킨다. “개인 작업이 자꾸 나의 내부로 들어가려고 한다면 공동작업은 나를 부단히 깨는 과정이며 자꾸 바깥으로 빼내는 계기가 된다. 그런 점에서 큰 도움을 받는다.” 무진형제는 11월부터 12월까지 경기문화재단 지원으로 파주에서 공공미술을 선보인다. 결과물은 파주 논밭예술학교에서 기존의 영상작업과 함께 선보일 예정이다.

이슬비 기자

정효영은 198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11년 신한갤러리에서 열린 <Encore! mist age>를 시작으로 2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2013 평창비엔날레 국민 공모전 대상을 수상했다.

 종이에 연필 색연필 오일 파스텔 78×54cm 2014

 

[Special Artist] 임동식

충남 공주에서 생활하며 작업하는 작가 임동식은 우리 화단에서 아주 각별한 존재다. 일찍이 1980년대부터 야외 현장에서 자연에 반응하거나 교감하는 설치와 퍼포먼스 작업을 하면서 “서구 모더니즘의 형식주의에 동아시아의 사유체계를 투영시킨 급진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10년간의 독일 유학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온 임동식은 보다 진지하게 자신이 살아온, 그리고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곱씹으며 회화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한국 미술계의 어떤 범주에 속하거나 얽매이지 않은 채 묵묵히 홀로 자신의 인생관과 예술관을 탐구하는 수행의 길을 가고 있다. 작가 임동식의 과거와 현재의 여정을 살펴본다.

뫼비우스의 띠 같은 화가

이윤희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임동식은 1945년생, 올해 일흔이 되는 화가로, 그 자신의 현재를 ‘후기 사춘기’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하고 학습의 과정을 거치던 ‘초기 사춘기’를 지나, 1970년대 중반부터 사변적인 미술에 몰두하여 주로 야외에서 개념적인 작업을 하거나 각종 프로젝트를 조직하던 ‘중기 사춘기’를 거쳐, 2000년대 들어 다시 붓을 잡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후기 사춘기’를 지나고 있다는 것이다. 1
임동식의 자신의 삶에 대한 이러한 의미 부여에 한편 웃음이 나면서도 다른 한편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5년 전 임동식을 포함한 다섯 작가의 그룹전(<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대전시립미술관, 2009)을 기획하면서 공주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수시로 드나들 때의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다시 붓을 들고 본격적으로 유화를 그려 온 수년간 화면 속의 여러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제야 가속도가 붙은 것 같은 기분을 이야기하다가 그는 “앞으로도 이렇게 나가면 몇 년 후에는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이 두고두고 나의 마음에 남았다. (이제 세상을 조금 알 것 같은 나머지, 남은 인생 동안 더 새로운 것을 만날 가능성이 없이 이대로 살아야 할 것 같은, 어딘지 지치고 조로(早老)했던 당시의 나에게 이 말의 울림은 상당히 컸다) 그가 자신의 삶의 여정을 지속적인 사춘기로 말하는 것은, 작업을 통한 스스로의 변화 가능성을 늘 열어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와 비슷한 연배 작가들의 작품에서, 혹은 그보다 훨씬 젊은 작가들의 경우에도, 이유가 무엇이든(미술시장의 요구이든, 안정된 생활의 반영이든, 혹은 포기이든) ‘한때’ 훌륭했던 자신의 작품에 대한 복제와 반복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을 숱하게 보아왔기에, 또한 미술사에 남은 수많은 화가의 작품이 인생을 따라 그리는 하향곡선을 보아왔기에, 이대로 시간이 더 가면 훌륭한 화가가 될 것 같다는, 노년으로 접어든 화가의 발언은, 충분히 놀라운 것이었다.
그의 말이 단지 소박한 겸양이 아닌 것은, 그가 당시에 펼쳐놓던 작품들의 양상이 스스로 증명했다. 과거에 야외 현장에서 행했던 퍼포먼스를 회고하여 캔버스에 옮기는 작업들, 미술과는 전혀 관계없는 동네 친구 우평남 씨가 소개하는 좋은 풍경들을 그리는 <친구가 권유한 풍경> 연작, 자신의 과거 기억을 더듬으며 지금은 사라진 금강변의 지난 풍경을 그리는 작업들, 게다가 새로이 막 시작했던, 동양 비단문화의 흥망성쇠를 통해 동서양의 문화 접변 현상에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대하 서사 <비단장사 왕서방> 연작까지, 그는 당시 새로운 작품들을 무한 생성 중이었다.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떠오르는 새로운 연작의 아이디어와, 특히 비단장사 왕서방의 인생 과정에 중간 중간 개입해 들어가는 세부적인 방계의 이야기들까지, 그가 현재 하고 있는 작품들과 향후 계획하는 작품들이 모두 실현되려면 앞으로 10년 넘어 20년은 족히 걸릴 것으로 보였다. 나는 당시 임동식이, 만물이 색을 입으며 움트는 봄날과 같은 생성의 에너지를 보유하고 있다고 느꼈다. 말하자면 이것이 사춘기와 같은 것이 아니면 무엇이랴.
그로부터 5년 후, 2014년 6월의 임동식은 과거에 진행하던 연작에 추가하는 작품들뿐 아니라, 어김없이 처음 보는 새로운 연작의 작품들을 펼쳐놓고 있었다. 작업실의 한 켠에는, 큰 줄기의 서사에 하루가 다르게 작은 이야기들이 끼어들어 언제 마무리 될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던 <비단장사 왕서방> 연작의 마무리 작업이 <도심의 밤에 불빛되어 퍼지다>라는 제목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과거 야외에서 행했던 설치미술과 퍼포먼스를 캔버스에 옮겨 담는 작업 중 새로이 시작된 것으로는, 난생처음 발을 디딘 바닷가인 안면도 꽃지해수욕장에서 커다란 알의 형상들을 해변에 흩어 놓은 자신의 설치작업을 그린 작품(비가 막 내리기 시작했을 때 카메라를 가진 이에게 “나 한 장 찍어줘!”라고 멀리서 손을 흔들며 뛰어오는 임동식 자신의 자화상과 알 형상 설치작품이 그려진 그림)과 故 전국광의 설치작업을 회고하여 그린 작품(안면도의 해변에서 보이는 작은 섬에 수평선을 연장하는 듯한 흰 띠를 두른 전국광의 설치작업. 사진을 필름으로 찍어 인화하던 시절 이 장면을 찍었지만 실패로 돌아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현장을 본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그리고 있다) 등이 시작 단계에 있었다.
다른 한편, 과거 자신에게 풍경을 그리기를 권했던 동네 친구 우평남 씨를 모델로 임동식 자신의 자화상과 더불어 2인 초상을 그린 것으로 시작된 <자연예술가와 화가>의 후속 작품 여러 점, 그가 공주 원골에서 기획했던 ‘예술과 마을’ 프로젝트에서의 여러 면면들이 새로이 그림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또한 새로운 형식의 작품으로, 과거 대학시절부터의 드로잉들을 다시 끄집어내 캔버스의 한쪽 면에 과거 드로잉을 붙이고 다른 쪽 면에 그 드로잉을 재해석하는 100점의 연작 <그 시절을 그리다>를 위해 100점의 과거 드로잉이 선별되어 100개의 캔버스에 차곡차곡 놓여 있었다.
전혀 새로운 내용의 작업으로는 <선생님을 그리다> 연작이 있었는데, 이는 임동식의 고등학교 시절 미술선생님의 일대기에 관한 것이다. 지리선생님과 미술선생님을 겸하던, 어린 임동식에게 끊임없이 스케치를 하라고 권했던, 이미 40년 전에 작고한 과거의 선생님은 살아생전에 자신을 그려달라고 청했었고, 이를 잊지 않은 제자 임동식은 이제 선생님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선생님을 그리다> 시리즈의 하이라이트는, 그림 속에서 상상으로 선생님을 세계여행 시켜 드리는 작품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았던 시절 세계를 돌아다니는 여행가를 무척 부러워했던 선생님을 기억하며, 이를테면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 서 있는 선생님, 에펠탑을 구경하는 선생님의 모습 등을 상상으로 그려낼 예정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들에서 그의 작품을 형성하는 두 개의 큰 축인 서사성과 서정성이 극도로 아름답게 결합될 것 같아서, 완성된 작품을 보기도 전에 생각만으로도 벌써 마음이 움직인다.

비단장사 왕서방 - 그림과 모델 130 x162cm oil on canvas 2009

<비단장사 왕서방-그림과 모델> 캔버스에 유채 130×162cm 2009

서정적이고 서사적인 완결판
임동식의 작품에서 서정적인 특성은 주로 자연을 대상으로 할 때 두드러져 보인다. 예컨대 계란을 헤드폰처럼 귀에 대고 ‘생명의 음’을 듣는 작업, 꽃봉오리가 활짝 피어나는 과정을 두 손을 오무렸다 폄으로써 모방하는 작업, 소나무 묘목의 가지에 자신의 수염을 매어 식물과 교감을 시도한 작업 등 초기의 퍼포먼스 작업들에서부터, 캔버스에 그린 풍경화들에 이르기까지 자연과 마주했을 때 일어나는 미세한 정조들을 최대한 정밀하게 담아내려는 그의 의도를 볼 수 있다. 그의 풍경화에는 땅 위에 무질서하게 솟아 있는 풀잎 하나, 나무에서 뻗어나가는 잔가지 하나도 아무렇게나 그려지는 법이 없다. 또한 풍경을 바라보는 당시의 마음을 더 가까이 표현하기 위해, 그의 화면은 처음에는 햇살이 비치는 풍경으로 그려졌던 것이 다음 날에는 보슬거리는 비가 내리기를 거듭하고, 눈 덮인 겨울 풍경으로 시작했던 것이 어느덧 봄 풍경으로 마무리되는 일이 허다한 것이다. 화가인 자신이 선택한 풍경이 아니라 자연과 더 친밀하게 살아온 친구의 권유를 받아들여 친구의 눈과 감성으로 본 풍경을 그리는 방식에서도, 자연 앞에서 한없이 자신을 낮추어 가까이 다가가려는 그의 태도를 볼 수 있다. 따라서 그의 풍경이 보여주는 실재감, 박진감은 사물을 사진처럼 리얼하게 그리는 방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자신이 그리는 대상과 최대한 정서적 교감을 하는 태도에서 배어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 임동식은 소년 시절부터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서사적 특성의 그림을 그려왔다. 마치 영화의 스틸 장면들을 엮어놓은 듯한, 혹은 만화처럼 프레임에 담은 그림들과 그것을 설명하는 문장들이 결합되어 있는,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서사적 그림 연작이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초기 사춘기’부터 드러난 이러한 특성은 개념적 작업을 주로 했던 ‘중기 사춘기’에도 이어져 갱지나 자투리 종이들에 그린 수많은 드로잉에 상투를 튼 남자와 한복을 입은 여자, 사랑에 빠진 동네 처녀, 마을을 돌아다니는 엿장수 아이, 혹은 심청이와 심봉사 같은 이야기를 담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캔버스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한 ‘후기 사춘기’의 수많은 풍경화와 인물화들에서도 이러한 특성은 여전히 보이는데, 자신의 과거 경험을 회고하여 그리는 연작은 물론, 단편의 그림들에서도 길든 짧든 완결된 이야기 구조를 볼 수 있다. 예컨대 <고개 숙인 꽃과 마주한 인사>는 수선화 밭을 지나며 한 방향으로 숙여진 꽃들이 모두 자신을 향해 인사를 하는 것처럼 느껴져 자신도 모자를 벗고 꽃들을 향해 머리 숙여 인사했던 과거의 강렬했던 경험의 ‘이야기’가 담긴 것이고, 그저 나무를 그린 풍경처럼 보이는 <친구가 권유한 방흥리 할아버지 고목나무 – 여덟 방향>은 사방팔방으로 가지를 뻗은 몸집 큰 나무를 하나의 방향에서 보지 않고 여덟 방향에서 관찰하여 그린 것으로 하나의 나무가 보여주는 각기 다른 측면들에 주목해 면면의 속성들을 완결된 하나의 작품으로 엮은 것이다. 친구와 자신의 이인초상인 <자연예술가와 화가>에서는 이보다 더 적극적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네 계절에 두 사람의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를 대입해, 소년기부터 장년기까지 서로 다른 인생 여정을 살아오다 노년기에 이르러 서로 비슷한 지점에서 만나는 이야기를 유장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서사성의 완결판은, 그 자신이 지어낸 스토리를 그린 <비단장사 왕서방> 연작이라 여겨진다. 그런데 <선생님을 그리다>는 과거의 현실과 더불어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못한 상상의 이야기들이 결합되는, 또 다른 경지의 서사성이 개입되는 것이다. 물론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서사적 특성과 서정적 특성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서로 구분할 수 없이 맞물려 있다.
그림에 한정해서 보자면, 그의 서정적이고 서사적인 작품 상당수가 자신의 과거와 연결점을 갖는다는 것도 눈여겨볼 만한 특성으로 보인다. 과거의 드로잉을 개작하는 작업(과거 드로잉의 개작은 현재 시도하는 캔버스 작업들 이전부터 다른 방식으로 행해져왔다. 예컨대 대학 시절 수업시간에 했던 누드 드로잉들에 옷을 입히거나 다른 인물을 첨가하는 작업 등 다소 서투른 솜씨로 그려진 과거 작업들에 다시 손을 대는 ‘덧그리기’ 작업들이 그것이다)과, 과거의 강렬했던 자연 속 체험을 회고하여 더 강렬하게 그려내는 작업, 자신과 친구의 과거지사들을 떠올려 그리는 작업, 더 까마득한 과거의 선생님을 그리는 작업 등은 모두 과거를 현재에 다시 불러내는 작업들이다.
그는 자신의 과거 기억을 이미지에 담아 생생하게 소환할 뿐 아니라, 기억 속의 자잘한 아쉬움이나 모순들을 수정하고 재구성한다. 세계 여행을 떠나지 못했던 선생님의 인생을 그림 속에서 바꾸고, 과거의 드로잉들을 바라보며 자신이 옛 시절에 가졌던 생각들을 되돌이킴과 동시에 과거와 달라진 현재를 그 속에 반영하며, 늘상 결별로 마감된 지난 프로젝트들의 좋았던 모습을 부각시켜 새로운 현재적 기억으로 마감하는 일, 그것은 과거를 소환하여 재구성하는 것일 뿐 아니라 과거의 기억들과 화해하는 그의 방식인 것이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살아가고 있는 과정과 삶을 바라보는 태도를 통해 예술이 의미를 얻게 됨을 보여준다. 그의 과거적 소재 지향은 흘러가는 시간을 붙들어 현재에 매어놓으려는 시도가 아니라, 과거로부터의 존재인 자신의 기억을 재구성함으로써 현재를 활동시키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서정성과 서사성을 따로 떼어 구분하기 어렵듯이, 과거와 현재의 경계 역시 명확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딱 한 번 있었던 과거의 일을 떠올려 현재의 캔버스에 붓을 대는 그 순간, 과거와 현재의 경계는 무너지는 것이다. 따라서 언제든 현재화할 수 있는 그의 과거에 대한 회고에는, 회한의 감정이나 자기연민이 개입되지 않는다. 한때 나는 그의 과거 지향성을 나르시시즘적 취향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 보았으나, 그보다는 오히려 그가 가진 시간 그 자체에 대한 독특한 관점과 감각의 소산인 것 같다.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시간에 대한 관점은 달리 말하면, 그의 인생관이고 예술관이다. ●

임동식은 1945년 충남 연기에서 태어났다. 공주 중・고등학교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독일 국립 함부르크미술대학 자유미술학과를 졸업했다. 1967년 공주문화원에서의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5회 개인전과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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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임동식의 작업실 외관과 내부 모습. 친구가 마련해준 낡은 집을 수년간 손수 고치고 다듬어서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건물의 안팎을 황토로 마감했고, 여러 칸으로 나뉜 작은 방에선 각기 다른 시리즈 작업을 동시에 진행한다.
특히 기와 지붕에 구멍을 뚫어 자연광이 내부로 비치게 한 것이 돋보인다. 이렇게 함으로써 물감 본연의 색에 좀더 가까운 색감을 볼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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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권유한 방흥리 할아버지 고목나무-여덟 방향> 캔버스에 유채 80×100cm(각) 2010 2010년 스페이스 공명에서 열린 개인전 전시 광경

고개숙인 꽃과의 인사 Oil on canvas 2005

<고개 숙인 꽃에 대한 인사> 캔버스에 유채 181.8×227.3cm 2005
이 그림의 내용은 1986년 함부르크에서의 행한 야외작업의 모습을 담고 있다.


1  임동식의 작업 여정을 그의 오랜 지음(知音)인 홍명섭은 2005년에 다음과 같이 구분하였다. (모던한 평면작업을 하던 홍대 졸업 전후를 제외하고) 야외미술의 시절, 자연미술의 시절, 공동체미술의 시절, 원초미술의 시절(<임동식>전 카탈로그 서문, 아르코 미술관, 2005).
임동식은 1975년 안면도에서 ‘청년작가회 야외작품 발표회’에 참가한 이후 야외 현장에서 자연에 반응하거나 교감하는 설치와 퍼포먼스 작업을 하면서 동시에 여러 프로젝트를 기획해왔다. 1980년의 금강현대미술제와 1981년에서 1998년까지 지속되었던 야투(野投), 1980년대 독일에서 10년 유학 후 돌아와 1991년에 시작한 <금강국제자연미술전> 등이 그것이다. 한편 1993년부터 2001년까지 ‘예술과 마을’이라는 명칭으로 공주 원골에서 진행한 프로젝트는 농민들과 예술가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방식으로 농민들의 작업과 예술가들의 작업이 구분 없이 보여진, 새로운 형태의 전시이자 나아가 새로운 공동체의 실험으로 기록될 만하다. 임동식의 지난 작업과 프로젝트들은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역사에서 독보적 위상을 가지며, 특히 1993년 겨울에 시작했던 ‘예술과 마을’ 프로젝트는, 서양에서 1990년대에 그 맹아가 시작되고 우리나라에서 2000년대 이후 현재까지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새로운 장르의 공공미술(New Genre Public Art)’의 세계적 선구 사례라 평가받을 만하다.

[Artist Review] 최인선

성(聖)과 속(俗), 그리고 미술관

캔버스 앞에서 다양한 형식적 실험을 거듭해온 화가 최인선의 25년간의 작품세계를 조망한 전시가 지하 4층에서 3층에 이르는 아라아트센터의 전관에서 열렸다. <최인선의 미학오디세이 25년>(6.5~8.5)이 그것.
초기에 선보인 단색화에서 다양한 색을 끌어들인 근작에 이르기까지 총 40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한 예술가의 예술적 고민뿐 아니라 삶의 고뇌까지 엿볼 수 있는 자리이다.

양은희  미술사

한 화가의 역사를 보는 일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과 같다. 아직 살아있는 화가의 그림을 통해 25년이라는 시간을 보는 일은 각각의 화폭에 구현된 이미지를 통해 아직 결말에 도달하지 않은 진행형의 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개인사의 세부를 다 파악할 수는 없지만 그림 속의 여러 풍경, 인물, 정물을 통해 그의 시선을 추측하고, 안료, 색채, 질감을 통해 성격을 보며, 드로잉이나 스케치와 같은 흔적을 통해 그의 사고를 들여다볼 수 있다.
아라아트센터의 전층에 걸쳐 전시되고 있는 <최인선의 미학오디세이 25년전>은 작가가 직접 수백 점을 디스플레이하면서 플롯을 만들고, 연도순이 아니라, 작가가 설정한 개연성을 따라 극적 긴장과 이완을 담은 전시이다. 이 전시는 캔버스 앞에서 25년 이상의 시간을 보냈을 작가의 성과를 보여준다는 목적에 맞게 물질, 질료, 색채, 점, 선, 면, 추상, 구상과 같은 회화의 고유한 요소와 특성이 한 예술가의 정신과 육체를 거쳐 승화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세계를 보여주는 진행형의 영화처럼 보인다. 한 인터뷰에서 그가 “예술을 위한 예술”에 지나치게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한다고 말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마치 숙명처럼 받아들인 사각형의 평면에 충직하게, 그리고 고독하게 지난 수십 년간 전개된 다양한 형식적 실험을 통해 이미지, 사고, 언어의 삼각관계를 보여준다.
이 전시에는 버려진, 거친 물질로 만든 초기 작업에서부터 은은하게 반짝이면서 세련된 표면을 뽐내는 대형 회화작업, 그리고 빨강, 노랑, 흰색 등 원색의 물감을 쌓아 올린 최근의 회화작업까지, 광범위한 작업이 소개되고 있다. 또한 눈이 부실 만큼 다채로운 색채로 채운 회화가 무수히 걸린 전시장 한쪽에 그의 개인적 사색의 흔적이 담긴 종이들도 수줍게 걸려 있다. 최인선의 지난 25년은 치열한 싸움, 예술과의 싸움이었음을 보여준다.
1990년대 초반 나온 <영원한 질료> 시리즈는 물감에 이물질을 섞고, 캔버스 위에 종이를 붙이는가 하면 물감을 두텁게 이겨 바르거나, 때로는 맑은 수채화 물감처럼 흐르게 둔 채 질료의 성격과 가능성을 다루면서 다양한 기법과 양식을 담아내  구체적 이미지를 거부하고 흔적, 움직임에 대한 사고를 통해 회화의 근본을 보여준다. 그 탐색의 과정에서 어떤 목적을 이루어야 하는 의지와 그 의지를 향한 열망을 표명하듯 거칠면서도 감정적으로 물질을 다루고 있다. 그의 작업은 199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보다 정돈된 사고를 보여준다.    <생산되어진 흰색>과 같이 흰색과 회색조의 단색을 주로 사용한 작업들은 은색, 흰색 등 단색의 범위 내에서 미묘한 변화를 포착하는 동시에 추상의 언어를 사색의 공간으로 끌어갔다. 선은 가늘어지고, 작은 흔적 하나도 그의 생각의 파편을 반영하기 시작한다. <움직이는 구조>(1999)를 보면 미니멀한 바탕에 선으로 묘사된 원과 이어진 선들이 나열된 회화로 선들은 마치 그의 머릿속에서 오고가는 사고의 지도를 그린 듯 구역을 나눈 자유분방한 선과 그 위에 시간의 질서를 이식한 것 같은 수평의 직선들이 배치되어 있다.
2000년대 이후 주목할 만한 그의 회화는 스스로 “명제”라고 부르는 <미술관 실내>, <날것의 빛> 시리즈이다. 이 두 시리즈는 아마도 최근에 가장 잘 알려진 작업으로 빛과 물체가 만날 때 그가 얻는 모든 색과 형태를 포착한 작업이다. 이 두 시리즈는 사실 제목만 다를 뿐 소파, 식탁, 싱크대처럼 중산층 가정의 실내를 온갖 점, 선, 면으로 해체한 그림들로서 내용은 거의 대동소이하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제목은 직접적인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중시하는 주제의 표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의 미술관은 작가가 바라보는 물건이나 풍경을 화폭으로 옮길 때 그의 지각과 사고를 거쳐 비자연적인 색채를 통해 점, 선, 면으로 번역하면서 나온 결과물이다. 다양한 형태와 물감의 영토, 사색을 거쳐 나온 기호의 영역, 바로 그곳이 그의 미술관이다.
그러나 이 전시는 예술가가 예술만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는 것도 보여준다. 그는 예술과의 싸움 이상의 것, 삶을 살아야 하는 실존적 인간의 고뇌와 그 삶 속에서 자신에게 소중한 가치들을 지키기 위한 싸움도 보여준다. 전시된 수백 점의 작업에는 물질과 재료, 형식과 양식에 대한 고민도 들어있지만 유학생활의 소회, 가족에 대한 사랑과 책임, 사랑하는 이들과 살아가는 공간,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경배하는 절대자에 대한 생각까지 모두 드러난다.
<로젠달에서 오다>(1996)는 미니멀한 평면에 집, 길, 초원을 시사하는 몇 개의 선과 면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로젠달은 아마도 그가 유학시절 접했던 지역, 뉴욕 주의 로젠데일을 일컫는 것 같다. 뉴욕 주의 한 동네를 사색적으로 표현한 이 그림은 그가 질료와 형식에만 몰두하지 않고 자신이 지나간 공간에 대한 개인적 인상도 소중히 거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상-수평, 수직 속의 집>(2007)은 두 개의 색을 기초로 쌍을 이룬 색면이 표현적인 붓자국으로 처리되었으나 여전히 수평, 수직의 격자무늬 구조를 유지하면서 거대한 집, 혹은 아파트와 같은 건축물을 연상시키고 다시 그 격자무늬 위에 붓질을 하면서 3차원적 집이라는 환영을 파기하고 2차원적 회화로 환원시킨다. 격자무늬의 색면구조들은 그가 빈번하게 사용하는 것이지만 가정을 지키는 ‘집’에 대한 생각을 풀어가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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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되어진 흰색> 캔버스에 유채 2000 설치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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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실내–빛의 들판>(오른쪽) 368×456cm 2011~2013

예술가의 싸움
사색은 예술과 철학이 만나는 지점이다. 이미지와 존재에 대한 그의 사색은 “Formation of thinking,” 또는 “Names of my family make beautiful bridge”와 같은 문장으로 나타난다. 그는 이런 문장을 스탬프로 만들어 그림의 한쪽에 찍는다거나 직접 연필로 써넣어 시적인 화면을 구성한다. 그의 드로잉과 메모에는 “Some where a painting starts”, “malevich bedroom”, “회화= Language”와 같은 문구가 적혀있는데 회화와 언어에 대한 그의 생각의 흔적들이다. 실제로 그는 ‘생각의 형태화’(2000년 9월)라는 메모에서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사고의 파편들에 주목하면서 “나는 아주 예민하고 섬세한 손끝으로 사고의 파편들을 화면으로 낚아 올린다”고 썼다. 그는 그렇게 포착된 개인적 사고의 파편들이 그의 회화를 통해 누군가에게 읽힐 “가변적 텍스트”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또한 그는 자신에 사고의 힘에만 의지하는 무모한 현대인이 아니라 속도와 변화의 세계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절대자를 숭배하는 겸허한 존재라는 것도 보여준다. 전시장의 가장 큰 벽에는 성경에서 따온 문구를 넣은 수많은 캔버스가 모여 마치 대형 제단화처럼 걸려있다. 거대한 벽면을 채운 각각의 캔버스에는 “I LOVE YOU O LORD MY STRENGTH”,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와 같은 문구가 삽입되어 있고, 중간 중간에 검은 사각형 추상회화와 거실, 침실의 모습을 보여주는 구상회화가 나란히 배열되어 전시장은 마치 그가 ‘날것’이라고 부르는 세속의 것과 ‘미술관’이라고 부르는 예술적인 것, 그리고 ‘LORD’의 신성함이 공존하는 혼성의 공간을 이루고 있다. 이 혼성의 공간에서 그가 소개하는 절대자의 세계는 쌍을 이룬 직사각형의 색면이 격자무늬로 배열된 위에 고딕체와 같이 강직한 문체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성경의 구절들은 그의 신앙의 얼굴이자 세속의 것, 그의 삶을 지키는 로고스로서 그가 흔들리는 세상을 극복하고 회화를 통해 순수한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구현하려는 열망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
그의 전시에서 검은 사각형, “malevich bedroom” 그리고 위의 제단화를 보고 필자는 질문했다. “선생님에게 말레비치는 어떤 존재입니까?” 그는 답했다. “아, ‘말레비치의 방’ 말이군요. 알아두셔야 할 것이 저의 작업에 보이는 단색은 이전의 단색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저의 개인적인 고민… 환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말레비치를 본 것이 아니라 그의 방을 본 것 같은 것이죠.”
말레비치의 비유는 우연한 것이 아니며, 최인선을 이해하는 창문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최인선은 말레비치처럼 추상과 구상을 오고가며, 말레비치처럼 개인적인 삶과 초월적 존재를 회화에 반영한다. 말레비치가 100년 전 검은 사각형으로 재현을 탈피했다는 미술사적 의의를 본 것이 아니라 그가 비대상성의 표현으로서 결국 자신의 종교관, 즉 신의 존재를 표현했다는 겸허함을 본 것 같다. 사실 기호로서의 회화에 도달했던 말레비치는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후에 구상으로 돌아갔지만 검은 사각형은 그의 정신의 핵심이었다. 말레비치는 생전에 검은 사각형의 의미에 대해 질문이 반복되자 결국 그는 “검은 사각형은 나의 죽음의 기호”라고 인정한 바 있다. 1935년경 병석에 눕게 되자 그의 침실은 찾아오는 예술가와 학생들을 맞는 살롱으로 변했다. 자신의 추상과 구상 그림이 잔뜩 걸린 이곳에서 그는 동료 예술가의 시를 듣기도 하고, 자신의 사망 이후에 벌어질 일을 정리하곤 했지만 결국 같은 해 사망했다. 이때 침대 머리맡에 걸려 있던 그림이 바로 검은 사각형이었다. 추상을 개인적인 영역으로 환원시킨 말레비치는 예술가에게 ‘예술과의 싸움’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최인선은 1963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고, 뉴욕 주립대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1989년 관훈미술관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44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중앙미술대전 대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하종현 미술상, 세오 중진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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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것의 빛>(사진 왼쪽) 캔버스에 유채 200×800cm 2008~2014

[Artist Review] 차계남

선(線)과 선(禪)이 조우하는 장소와 시간

작가 차계남의 작품은 눈으로만 봐선 알 수 없다. 손으로 만지고 더듬으며 촉감의 세계를 경험해야 한다. 최소한의 컬러와 단순한 구조로 구성된 작품은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들며 시공간의 울림을 전한다. 재료가 지닌 고유한 물성의 특성을 극대화하며 존재감을 드러낸 입체작품이 이를 대변한다. 6월 17일부터 29일까지 대구 동원화랑과 봉산문화회관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작가는 한지를 이용한 신작을 선보였다. 흑과 백의 단순한 색과 노동집약적인 결과물인 신작은 작가의 새로운 미래를 보여준다.

김옥렬  현대미술연구소&아트스페이스펄 대표

작가 차계남의 전시가 대구미술관 3전시실(2014. 5.27~8.31 <기억의 풍경 7인전)>과 봉산문화회관 1전시실, 그리고 동원화랑(6.17~29) 초대 개인전에서 동시에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가 주목받는 것은 작가가 6년간의 침묵을 깨고 발표하는 대형 전시라는 이유도 있지만, 전혀 다른 재료와 기법에도 불구하고 이전 작품과의 연속성을 통해 그만의 독자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일본에서 첫 개인전 후 30년 이상을 한국과 일본 그리고 프랑스와 독일을 무대로 활발히 활동 해오다 긴 침묵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6년 동안 면벽수행하듯 지내던 시간을 담아 신작을 발표했다. 오랜 세월 왕성한 활동을 하다가 마음을 가다듬고 기나긴 침묵 속에서 나온 작품은 어떤 것일까? 이러한 의문의 답은 개인전 오픈에 참석한 많은 사람의 면면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6년간의 공백, 그것은 긴 시간동안 몰입한 작업을 반추하는 숙성의 시간이자 새로운 도전이 담긴 창작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깊은 침묵 속에서 발견한 작은 생명이 발아할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다해 개간한 창작의 경작지에 작은 홀씨 하나 심어 놓은 기분일 것이다. 홀씨는 다른 것과 합체하는 일 없이 단독으로 발아하여 새 개체가 된다고 한다. 씨줄과 날줄로 엮어 만든 직물이 아니라, 부드럽고 질긴 ‘사이잘삼’1 실이 가진 일차적인 물성만으로 선을 면으로 면을 다시 입체로 만들어가는 과정처럼, 차계남의 이번 신작은 선과 면이 2차원의 공간을 따라 3차원의 공간으로 확장되는 연속성을 가진다.
이를테면, 차계남은 물성 그 자체의 고유한 요소를 부각시킨다. 그래서 작가는 재료의 물성이 갖는 일차적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 씨줄과 날줄로 크로스(cross)되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이 부분은 그의 작품이 어떤 상징이나 기호 혹은 은유가 아닌, 다만 물성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통한 작가적인 수행의 과정이 담겨 있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조용한 울림이다. 전시장에 걸린 대작들을 보면서 점이 선으로 그리고 선은 면으로 이어져 공간을 따라 무한히 확장되고 있음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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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한 물성과 선(線 혹은 禪)
대부분의 사람은 명상을 하거나 기도를 하면서 눈을 감는다. 눈을 감는 행위는 명상과 참선 혹은 기도를 위한 일차적인 의식과도 같다. 그 이유는 눈에 보이는 세계에 현혹되지 않고, 고요하고 평정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내 속에 있는 나 자신을 보기 위해 눈을 감는 것은 눈을 뜨고 보는 것과는 그 의미와 목표가 다르다. 그것은 낮과 밤만큼 다르거나 몸과 마음만큼의 차이를 가진다. 그 경계를 넘을 수 있는 것은 잠시나마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순간, 바로 눈을 감고 나를 보는 순간일 것이다.
눈을 감고 깊은 심연과도 같은 어둠 속에서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눈을 뜨고 보는 ‘나의 밖’에 있는 ‘나’가 아니라, ‘나의 안’에 있는 ‘나’일 것이다. ‘나의 안’을 보고자 면벽과도 같은 의식적인 행위를 하는 것은 눈을 감고 잠에 빠진 사람이 꿈을 꾸는 것과 구별된다. 눈을 감고 명상이나 기도를 하는 것은 삶의 깊이를 뚫고 들어가 내 ‘안’에 있는 ‘나’를 만나는 숭고한 의식이다. 이러한 의식을 통해 이전과 다른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다면, 눈을 뜨고서도 ‘나’를 보거나 또 나의 ‘밖’과도 만날 수 있는 경지가 아닐까.
안과 밖을 연결하는 선(線)을 차계남은 사이잘삼이라는 끈, 즉 실을 겹치고 겹쳐 검은색의 입체조형에 투영한다. 그렇게 투영된 작가의 설치물은 하나의 존재, 즉 선에서 면이 되고 또 입체가 되는 과정을 통해 존재의 벽, 벽 너머의 존재가 되는 선(禪)일 것이다. 이렇듯  실(線) 따라 선(禪)에 가 닿을 때, 눈을 뜨고 벽 앞에서 보는 것은 벽 너머에 펼쳐있는 새로운 풍경, 즉 내 속에 있는 ‘나’가 투영된 또 다른 ‘나’를 보는 것이다.
차계남은 밧줄이나 노끈을 만드는 섬유재료로 ‘부드러운 조각(The Soft Sculpture)’을 만드는 것에 30년 동안 집중했다. 무엇보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물성이 주는 사이잘삼의 매력에 끌려 견고한 조각과도 같은 작품을 조형함으로써 섬유예술의 새로운 장을 열어 놓았다. 섬세하면서도 부드러운 실(線), 그 실들이 겹치고 겹쳐지면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立體), 즉 구조적인 풍경은 하나의 장소에서 그만의 존재감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선입관을 버리고 세 곳의 전시를 두 번씩 보았다. 그렇게 하고서야 새롭게 발표한 작품이 이전의 작품과 어떻게 다르고 또 같은지를 작가로부터 듣고 싶어졌다. 내가 본 것과 작가가 의도한 동일성과 차이가 무엇이고 어떤 것인지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몸도 마음도 바쁜 작가를 만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작가의 초기작은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배운 형염(型染)을 활용해 염색된 실과 실을 겹쳐 선명하고 강한 입체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선명하게 염색된 사이잘삼의 입방체로 한글을 활용한 자음조형이 탄생했다. 소재가 갖는 속성에 몰입하는 동안 색을 받아들이는 섬유의 특성을 실험하는 단계를 지나 이후, 작가는 모든 색을 포함하고 침묵하는 깊은 심연과도 같은 검은색의 섬유조각을 시도한다. 그의 섬유조각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빛을 품고 자신의 존재감을 가장 잘 드러낸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가장 심오하고 지배력이 있고 과묵하며 또한 더할 바 없이 웅변적인 색을 소재에 입혀서 그 소재가 되살아나기를 기다린 것처럼, 검은색을 선택했다.”
흔히 섬유는 씨실과 날실이 교차하면서 직물로 태어난다. 그러나 차계남의 거대한 ‘섬유작업(The Fiber Work)’은 경사와 위사로 짠 직물이 아니라, 재료 자체가 갖는 물성을 강조하는 것에 있다. 무 (無)에 가까운 침묵하는 색, 어떤 의미나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아서 좋아한다는 검은색, 트레이드마크가 된 그녀의 검정색 패션은 일상 속에서도 집요하게 작품에 몰두하는 태도가 엿보인다.
대구미술관 3전시실에는 밖으로 난 창이 있다. 이 창을 배경으로 10m에 가까운 차계남의 작품 <Untitled 5347-I>이 설치되어 있는데, 거대한 섬유조형물 사이사이로 풍경이 비쳐 자연과 인공의 대비, 그 대비가 빚어내는 미묘한 조화가 눈앞을 가득 채운다. 검정의 간결한 기둥, 그 사이를 곡선으로 연결해가는 구조적 형태는 마치 자연을 품은 그림 같기도 하고 빛의 그림자를 조형해 놓은 것처럼, 안과 밖이 하나로 연결되는 구조가 된다. 확실히 선(線)과 선(禪)이 조우하는 시간, 눈을 뜨고 보는 ‘나의 안’과 ‘나의 밖’이 만나는 장소가 되고 있다.
모든 색을 합치면 검은색이 된다. 하나이면서 동시에 모두를 담고 있는 색이 검정인 이유다. 빳빳하게 풀을 먹여 검은색으로 물들인 거대한 섬유조형 앞에서 관객은 눈을 뜨고도 검은 벽을 본다. 그 검은 벽 혹은 덩어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람과 공기가 흐르고 빛과 그림자가 피고 지며 살아 숨 쉰다. 이 심연과도 같은 검은 입체조형에서 한 발 두 발 뒤로 물러서면  간결하게 정리된 사각의 입체와 곡선이 결합된 섬유조형물 사이, 작품이 놓인 장소와 공간이 그렇게 서로를 채우고 있다. 사각의 간결한 형태는 설치되는 장소에 따라 그 장소의 시간과 공간을 나누어 가지며 상호 침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검정이 모든 색을 품은 것처럼, 침묵은 삶과 사랑 그리고 욕망과 증오마저 품는다. 깊은 골짜기에서 솟아나는 생명의 젖줄이 낮은 곳으로 흐르고 흘러 바다가 되듯이 검은빛은 낮과 밤, 사랑과 증오, 희망과 절망, 삶과 죽음을 모두 품고 심연의 바다처럼 침묵한다. 이렇듯 깊고 푸른 침묵과도 같은 색에 심취해 있던 작가는 한지를 길게 잘라 만든 한 가닥의 실(線)을 화면 가득 세로로 길게 붙여 한지 끈을 만들어 전면을 선으로 채운 신작을 선보이고 있다.
그 침묵의 시간 속에서 작가는 붓글씨를 쓰고 사군자를 치면서 한지가 먹을 받아들이고 품는 것을 보고 느낀다. 그렇게 쓰고 그린 수천 장의 한지를 1cm의 폭으로 잘라 한 가닥 한 가닥씩 꼬았다. 꼬아진 한지 가닥은 수백 수천의 글과 그림이 지나간 흔적을 품은 채 실  (線)이 된다.  인간에게는 말을 배우고 신으로부터는 침묵을 배우듯, 쓰고 그리는 행위를 통해 말과 침묵 사이에 흐르는 긴장, 그 속에서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알아간다. 누가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라고 했는가. 그것은 말이 곧 언어이고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기에 책임질 수 없는 말보다 침묵하는 것이 미덕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일상 속에서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그런 순간이 있기나 한 것일까? 아니면 항상 몸과 마음은 당연히 하나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누구나 한 번씩 가져보는 질문이다. 이러한 의문에 작가는 깊은 침묵과도 같은 검정과 무위(無爲)의 흰색을 통해 몸과 마음처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는 작업을 시도한다. 그러한 시도는 먹으로 쓴 글과 그림이 그려진 한지가 실이 되면서 한지의 흰 부분과 검은 부분이 그만의 역할을 가지는 거대한 추상, 점과 선과 면이 우연과 필연 속에서 어우러지는 말과 침묵 사이, 빛과 그림자가 흐르는 풍경이 된다. 이 풍경은 점과 선 그리고 면의 연속성으로 이어져 여럿이 하나이고, 영원과 찰나가 교차하는 장소, 즉 선(線)과 선(禪)이 조우하는 시간일 것이다. ●

차계남은 1953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효성여대 미술과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대학원 중퇴 후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 시립 예술대학 대학원 염색과를 졸업했다. 대구 카톨릭대학교 예술학과에서 미학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84년 일본 교토 마로니에갤러리에서 첫 개인전 이후 국내외에서 30여 회 개인전과 단체전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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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7일부터 8월 31일까지 대구미술관에서 열리는 <대구미술:기억의 풍경전>에 출품된 <무제 5347-1> 사이잘삼 200×9500×100cm 2000(오른쪽)과 <무제 5360-2> 한지에 먹 244×491×7cm 2013


1  Sisal hemp,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 원산지인 용설란과의 여러해살이풀. 용설란과 비슷하게 생겼으나 줄기가 짧고 가시가 없다. 사이잘삼이라는 이름은 멕시코 시살(Sisal)만에서 수출한 데서 유래. 열대와 아열대지방에서 많이 재배하고 건조에 강하기 때문에 다른 작물을 재배할 수 없는 곳에서도 잘 자라는 열대성 풀이라 질긴 잎이 있으며, 이 잎에서 섬유를 채취한다. 마닐라 마에 다음가는 마 원료인데 내수성이 떨어진다는 결점이 있다. 색은 흰색·노랑·담록색 등이 있으며 흰색의 것이 상질. 잎에서 채취한 섬유는 실내장식용 재료나, 어업·선박·포장 따위의 밧줄을 만드는 재료로 쓴다.《패션전문자료사전》 1997

 

 

[Artist Review] 심영철

그날 에덴동산에선 무슨 일이 있었나

미디어 작가 심영철의 작품은 단순히 빛을 조작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녀는 종교적 내러티브를 바탕으로 예술적 상상력을 더해 존재와 존재 사이를 무한 반영시킨다. 그녀의 예술적 자취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준 회고적 성격의 전시 <춤추는 정원>(6.14~8.22)이 제주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초기작인 <빗>시리즈부터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변화를 거듭하는 <가든> 시리즈 까지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무한반영’의 변주를 살펴보자.

고충환  미술비평

1990년 아니면 91년으로 기억된다. 당시 필자는 한 화랑에 기숙하고 있었다. 그때 심영철 작가의 전시며 작품을 처음으로 접할 수 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전인가 아님 이후 근처에 있는 한 갤러리에서 작품을 본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둠 속에서 은근한 빛을 발하는 네온이 장착된 조형작업이었다. 가시나무와 어우러진 둥근 형태의 네온이 발하는 빛은 아마도 예수가 머리에 썼던 가시관을 형상화한 것이리라. 이 네온조형작업을 전후로 열린 전시에서 작가는 성경책을 피라미드 형태로 쌓았고, 공간에는 가시철망이 둘러쳐져 있었고, 박제된 사슴의 뿔에서 불꽃이 일었던 것 같다. 작가는 전시기간 중 전시장을 찾은 사람들에게 성경책을 나눠주었다. 성경책을 피라미드로 쌓은 것은 아마도 애급에서의 엑소더스를 상징할 것이고, 가시철망 속에서 불을 뿜는 사슴의 뿔은 가시덤불을 태우지 않으면서 불꽃으로 화한 신의 현현을 상징할 것이다. 이후 작가의 다른 작업에서 신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화신하기도 했다. 애급에서의 엑소더스 내내 찌는 듯한 더위와 살을 에는 추위로부터 자신의 선민을 보호하기 위해 신이 각각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현신한 것이다. 그렇게 신은 자신의 선민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알다시피 그 지상낙원에 흐르는 젖과 꿀은 다름 아닌 석유인 것으로 밝혀졌고, 역사의 아이러니랄 것이 그곳은 정작 낙원이 아닌, 세상에서 가장 첨예한 분쟁지역으로 남아있다. 전에도 그랬고 이후로도 오랫동안 작가는 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메신저였다. 다르게는 무당이랄 수도 있겠다. 그리고 알다시피 산 자와 죽은 자의 영역을 넘나들고, 특히 의미와 무의미를 중재하는 현대판 무당은 예술과 관련이 깊다. 제주현대미술관 개관 7주년을 기념해 열린, 작가 개인적으론 작업을 시작한 지 30년에 이른 그동안의 작업 성과를 회고해보는, 사실상의 준(準) 회고전 형식으로 열린 이번 전시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작가는 대개 설치와 퍼포먼스를 병행하는데, 이번 전시에서도 퍼포먼스로 전시를 열었다. 기독교의 창세신화 중 원죄의식을 다룬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원죄의식이 최초로 싹튼 에덴동산으로 데려간다. 그리고 알다시피 이 극장에는 신과 사탄, 그리고 아담과 이브가 각각 출연한다. 지혜의 나무로 알려진 선악과를 매개로 뱀(사탄)이 이브를 유혹하고, 이브는 아담을 유혹한다. 그리고 욕망을 책망하는 신의 목소리가 배경음으로 깔린다(작가 자신이 직접 허밍으로 처리함).
대충 이런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 일말의 의문이 든다. 애초에 선악과가 없었더라면 욕망도 유혹도 처벌도 원죄의식도 없었을 것이다. 금지가 욕망을 부르고 욕망이 위반을 부르는, 그리고 위반이 처벌을 위한 당위성을 제공한다는 논리 그대로가 아닌가. 그러므로 어쩌면 금지는 처음부터 처벌을 전제로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어쩌면 원죄의식 내러티브는 신과 사탄의 싸움에 인간을 끌어들인 것일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사탄을 자기 아래 두려는 신의 의지(사탄은 유혹하고 신은 처벌하는)와 여자를 자기에게 종속시키려는 남자의 이해관계(여자는 유혹하고 남자는 책망하는)가 부합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창세신화도 원죄의식도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만든 것이라는 페미니즘의 입장을 대변해본 것이지만, 분명한 것은 욕망이 금지와 함께 태어났다는 태생적 왜곡을 주지시키는 것이리라(금지는 없는 욕망도 만들어낸다. 그리고 모든 신화에는 거의 어김없이 이런 금지와 위반이 등장한다). 따라서 신의 말씀(로고스와 로직, 이성과 논리)대로 되었다는 창세신화는 사실은 각본대로 되었다는 전복적 읽기로 대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상낙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 하늘에선 그 일이 낱낱이 기록되고 반영된다. 무슨 말이냐면, 작가는 근작의 메인 콘셉트에 해당하는 <매트릭스가든> 시리즈에서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의 원형을 도입한다. 그리고 똑같은 소재와 재질과 크기의 원형을 상하좌우로 겹겹이 병렬시켜 공중에 매단다. 사실상 무한 병렬되는 것을 임의적으로 한정한 경우로 보면 되겠다. 여기서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의 구(球)는 매끄러운 표면으로 인해 이미지를 반영하는 거울 구실을 한다. 낙원에서 일어나는 일, 곧 원죄의식이 막 생성되는  (조작되고 만들어지는?) 극적인 순간이며 사건을 반영하고 퍼트려 서로의 무의식에 아로새긴다. 나는 너의 반영이고, 너는 나의 거울이다. 나는 너의 원죄의식을 반영하는 분신이고, 너는 나의 원죄의식을 되비치는 타자이다.

심영철 (81)

<매트릭스 가든-비상>이 설치된 제주현대미술관 전시실에서 퍼포먼스를 하는 작가

매트리스 속 거울의 존재
불교에선 존재가 존재를 되비치는, 그리고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무한 반영되는 유리구슬로 엮인 그물을 인드라망이라고 한다. 나는 너의 업(業)이고, 너는 나의 연(緣)이다. 나는 너의 원인이고, 너는 나의 결과이다. 그래서 나는 나이면서 동시에 너이기도 하다. 존재와 존재의 무한반영이자 무한연쇄를 의미하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지도 모를 연기설과도 통하는 개념이다. 작가의 <매트릭스 가든>은 바로 그런 존재의 그물망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매트릭스는 우주의 자궁을 의미한다. 혹자는 카오스라고도 하고, 혹자는 블랙홀 아님 화이트홀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이미지를 무한반영하는 만화경에 비유하기도 한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상(이미지)인가. 무엇이 실재이고 무엇이 그림자인가. 존재의 실체는 어디에 있는가. 이런 차이 나는 의미들이며 의문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개념(푸코 식으로 치자면 유사와 비교되는 상사가 되겠고, 들뢰즈 식으로 치자면 리좀을 파생시키는 뿌리의 뿌리에 해당하는) 정도로 보면 되겠다.
그렇게 작가는 <매트릭스 가든>을 통해 나는 너를 반영하고 너는 나를 반영하는, 그리고 그렇게 존재와 존재가 무한반영되는, 마치 만화경 속 정경과도 같은 존재의 거울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여기서 신은 사탄을 반영하고 사탄은 신을 반영한다면, 남자는 여자를 반영하고 여자는 남자를 반영한다면(여자는 남자의 미래) 지나친 논리의 비약일까. 선은 악을 잠재하고 악은 선을 품고 있다는 존재의 양가성을 들이댄다면 지나친 상상력의 비약일까. 그렇게 작가의 <매트릭스 가든>은 우주의 자궁으로 열리고 존재의 만화경을 열어 보인다. 어쩌면 보들리야르의 진단, 곧 우리는 이미 가상현실을 현실로 살고 있다는 진단은 진실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다만 반영과 반영(반영하는 것과 반영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작가의 <매트릭스 가든>은 에덴동산의 반영이었고, 지상낙원의 반영이었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된 땅의 반영이었고, 유토피아의 반영이었다. <매트릭스 가든>은 <일렉트로닉 가든>의 반영이었고, <일렉트로닉 가든>은 <모뉴멘탈 가든>의 반영이었고, <모뉴멘탈 가든>은 <시크릿 가든>의 반영이었고,      <시크릿 가든>은 에덴동산의 반영이었다(여기서 에덴동산의 반영이 <시크릿 가든>이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왜 시크릿인가. 에덴에는 무슨 말 못할 사정이나 사연이라도 숨기고 있었는가. 에덴에는 동산과 함께 동쪽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일이다). 그렇다면 반영의 원형은 어디에 있는가. 애초에 원형이라고 부를 만한 실체가 있었는가. 혹 그것은 다만 스테레오타입 아님 도돌이표의 반복변주는 아니었을까.
돌이켜보면 작가의 작업은 온통 반영이었다. 홀로그램이 그렇고, 플라스마가 그렇고, 영상이 그렇고, 거울이 그렇고,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의 무한반복되는 구슬이 그렇다. 작가의 작업 어디에도 정작 손에 잡히는 실체는 없었다. 다만 반영하고 반영되는 무한반영이 있을 뿐. 그리고 그렇게 약속된 땅에서, 원형 없는 반영의 땅에서, 밑도 끝도 없이 반영하고 반영되는 만화경 속에서 아담은 불현듯     (어쩜 악몽과도 같은) 잠을 깬다. 작가의 작업 표면이 종교적 내러티브라고 한다면, 그 표층을 뚫고 작업의 밑바닥 내지 무의식의 지층에 면면히 흐르는 이런 무한반영되는(어쩜 실체 없는 것을 좇는) 놀이 내지 유희에 주목할 일이다. 어쩜 작가의 작업의 묘미는 종교적 신념 내지 믿음처럼 센 것과 실체 없는 것들이며 희박한 것들이 하나로 만나게 되는 이율배반적인 지점에 모아질지도 모르겠다.●

심영철은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성신여대 조소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OTIS Parson’s, U.C.L.A에서 수학, Golden State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3년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서 열린 첫 개인전 <빗(빛)의 단계적 표상>을 시작으로 다수의 개인전을 열고  단체전에 참여했다. 성신미술상, 최우수 예술가상, 토탈미술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수원대 조형예술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심영철 (43)

<일렉트로닉 가든>,<모뉴멘탈 가든>, <시크릿 가든>(네온, 스테인리스 스틸, 홀로그램, 조명, 자갈)이 제주현대미술관 본관 전체공간을 따라 설치되었다. 네온조명과 홀로그램이 결합된 작품으로 바닥에는 제주 현무암이 놓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