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FACE 2016 박지나

현실에 드러난 불가능한 존재

작품과 시(詩)의 교집합을 찾으라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겠지만 박지나 작가라면 그 둘을 온전히 작업의 모티프로서, 도구로서, 매체로서 작용하는 것이라 말할지도 모르겠다. 조소와 사진을 전공하고, 시를 쓴다. 그래서 박 작가의 작업은 조각과 사진, 그리고 시적 언어의 상징성과 압축 등 다양한 층위를 보여주는 듯하다.
<다섯 개의 비와 강>(2012)은 못과 방울을 붙여 제작한 오브제를 한강을 배경으로 촬영한 사진작품이다. 그녀의 작업에 등장하는 ‘못’과 ‘방울’은 매우 일상적인 사물이며 그 형태와 용도, 성질이 공고하여 그것들이 작업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이에 대해 박 작가가 말한바는 이렇다. “못은 확실한 것, 그것의 끝에 ‘결합’한 방울 형태는 ‘허공’”이라고 하고, 이 둘을 ‘확실한 것과 불확실한 것, 단단한 것과 부드러운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서로 대비되는 이 둘이 ‘결합하여’ 자신의 의미를 지우기도 하지만, 지워도 흔적으로 올라오기도 한다”고. 좀 더 구체적인 의미를 물었다. “이원 시인이 서문을 빌어 해주신 말씀이었어요. 이에 덧붙여 제 작업은 ‘극단적인, 그러니까 가장 먼 것 두 개를 닿게 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 가장 먼 둘이 이어지는 데도 이분법적이지 않다’고 말이죠.” 그러니 작가는 못의 다른 의미를 제시한다기보다는 그저 그 둘이 어떻게 있는 지를 봐주는 것, 그것을 관람객에게 주문하고 있을지도. “그래서 그 다른 성질의 두 사물이 같은 재료와 색으로 이뤄져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는 거죠.” 대립과 무화. 만남 그 자체를 발견한 작가는 이것이 마치 ‘비(雨)’와 같이 쏟아지는 경험을 했고 그것을 작품으로 표현한 것이라 고백했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하게 된 계기는 ‘시’를 쓰면서 찾아왔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유난히 언어에 민감한 것으로 보인다. 인터뷰를 하면서 몇 번이고 자신이 생각하는 ‘적확한’ 단어를 사용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자신 속에 자기가 아닌 것을 품고 불가능성을 드러내면서 존재한다는 것이 제 작업의 내용입니다. 그렇게 불가능성으로 존재할 때 사물은 사물 이상이 되고, 사물들이 서로에게 열어주는 공간에서 무엇이 발생하는 지 어떤 낯선 사건을 일으키는 지 관찰하고 발견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박 작가의 작업은 적확한 언어 사용을 요구했던 것과는 반대로 오히려 세계의 명확한 규정이 아닌 것으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하긴 언어라는 도구가 언제 견고하고 명확한 의미의 테두리를 만들었던가? 이는 미술사에 남은 수많은 작품이 언어의 불완전성을 근간부터 흔들었던 바에서도 입증된다. 그 사이의 간격은 상징이나 은유 등이 메운다. “시나 작품 모두 대상을 하나의 고정된 것으로 규정짓지 않죠. 어떤 대상을 지식의 대상으로 소유하지도 않고요.” 동의하는 제스처로 보였지만 다음의 말을 이어갔다.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는 것은 제가 그때그때 얘기하고자 하는 것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택하기 위해서예요. 보여주고자 하는 세상의 모습은 존재가 기댈 수 있는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것이고요. 불가능성에 대한 방어가 아닙니다.”
그 불가능성을 시각화한 근작은 <계단을 세모로 만들기 시작할 때>(2015)가 아니냐고 묻자 “오르내리기 불가능한 계단을 설치하고 이와 병렬로 사진 촬영한 같은 형태의 계단 사이에는 ‘불가능의 견고함’ 혹은 ‘불안정한 견고함이 존재합니다.” 그 어느 하나의 요소만이 완벽하게 존재하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현재 4월 8일부터 29일까지 최정아갤러리에서 열릴 개인전 준비에 한창인 박 작가는 여전히 “자신 안에 타자를 품고 존재하는 방식”을 화두로 삼고 있단다. 그래서 ‘시’를 쓴다. 그것이 사진으로 혹은 조각설치로 드러날지도 모르겠다.
황석권 수석기자

박지나
1978년 태어났다. 홍익대 미술대학 조소과와 Brooks Institute of Photography, Digital Imaging, 홍익대 대학원 조소과를 졸업하고 현재 박사과정 중이다. 2014년 SPACE22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지금까지 총2회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또한 다수의 그룹전과 기획전에 참여했다.

 피그먼트 프린트 100×150cm 2012

<다섯 개의 비와 강> 피그먼트 프린트 100×150cm 2012

 

NEW FACE 2016 박여주

공간 너머의 공간

공간은 인간의 삶을 담는 그릇과 같다. 공간은 특정한 방식으로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고 조직하지만 우리는 새로운 인식을 통해 공간을 확장할 수 있다. 박여주는 지속적으로 공간 설치작업을 선보인다. 작업의 형태는 기본적으로 미니멀한 기하학적 구조물에 가깝다. 작가는 개선문, 리알토 다리 등 사적인 공간이 아니라 종교적이거나 역사적인 공간에서 작업의 모티프를 가져왔다. 기존의 형태는 유지하면서도 작업에 어떤 내용을 삽입하기보다 소거하는 방식으로 공간과 그 형태에 집중한다. 그리고 인간적인 스케일의 새로운 공간으로 치환시켜 관람객의 낯선 경험을 유도한다. 작업은 일상의 공간 속에서 문득 마주하게 되는,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입구를 의미하는 하나의 메타포로 작용한다. 작업 자체가 일상의 공간과 가상의 공간을 연결하는 하나의 통로 구실을 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 자체를 환기시키는 것이다.
특히 박여주는 문, 계단 등 내부와 외부가 구분되지 않는 경계의 공간을 탐닉한다. 작가는 이 공간을 강조함으로써 마치 이 공간을 넘어가면 다른 세계로 갈 것 같은 환상을 선사한다. 최근 문화역서울 284와 재능아트센터에서 선보인 신작은 설치 구조물 대신 기존 건물, 특히 계단에 조명을 설치해 낮과 밤 사이의 시공간을 의미하는 새로운 차원의 공간을 제안했다. 그녀의 작업에서 조명이 등장한 것은 2013년 사루비아다방 개인전부터다. 구조물 설치만으로는 작가가 전달하고 싶은 요소가 제한적이고, 관람객의 몰입도가 약했기 때문이다. 이때 조명은 내·외부의 경계를 허물며,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연출하기 위한 장치이자 공간을 새로운 차원으로 치환시키는 역할을 한다.
현재 북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구사구용(九思九容)전>(1.19~2.28) 출품작 <수태고지 Ⅱ> 는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 잉태 사실을 알리는 프라 안젤리코의 그림 배경이 되는 건축 구조물에서 착안했다. 작가는 이 구조물에 홍등가 특유의 붉은색 조명을 설치했다. 종교적으로 가장 성스러운 순간에 가장 세속적인 공간을 결합하며 박여주는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자연스럽게 이야기한다. “유학 이후 한국 사회가 여전히 가부장적이고 여성에게 많은 희생을 강요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죠. 그렇다고 제가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30대 한국 여성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부분을 이야기하고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어요.”
지금까지 박여주의 작업은 서구적인 건축 양식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 대부분이다. 최근 국내 활동을 하면서 한국적 공간에 관심을 갖게 됐는지 묻자 작가는 유학을 하기도 했지만 사실 일상에서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동양적인 공간의 요소가 드문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서구식 공간에서 생활하는 우리에게 전통적인 한옥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서 활동한다고 해서 작가가 한국적 공간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 오히려 강박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박여주는 요즘 문래동 철공소의 오래되어 빛바랜 철문이 아름답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앞으로 그녀는 회화에 다시 주목하며 새로운 시도를 이어갈 계획이다.
이슬비 기자

박여주
1982년 태어났다. 서울여자대학교 서양화과와 2010년 슬레이드 예술대학(The Slade School of Fine Art, UCL)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2013년 프로젝트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에서 열린 <夜想>을 시작으로 2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경기도미술관, 서울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했다.

창문과 조명에 라디언트 라이트 필름 2015 재능아트센터 설치 장면

< Magic Hour >창문과 조명에 라디언트 라이트 필름 2015 재능아트센터 설치 장면

NEW FACE 2016 박광수

선(先) 긋고, 선(線) 채우기

“선을 긋다”는 관용구는 어떤 인물이나 단체의 경계를 확실히 지을 때 사용한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 박광수의 드로잉은 ‘선을 긋기’보다 ‘선을 그리는’ 혹은 ‘선을 만드는’ 행위에 가깝다. 그의 작업은 가늘거나 굵고, 짧거나 긴 선의 움직임이 모여 하나의 모호한 공간을 이뤄낸다. 각 선은 그들이 캔버스라는 제한된 공간에 놓이는 순간, 저마다의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선의 역할은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오히려 눈을 감은채 부분 부분을 더듬으며 형태를 찾아가듯 작가는 밑그림 없이 선을 그려간다. 선을 그리고, 그 선을 수습하기 위해 또 다른 선을 더한다. 적재적소에 균일한 선이 위치하지만 일관된 선의 반복이 지겹고 심심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리듬감 있는 표현과 구성을 위해 작가가 직접 제작한 도구가 한몫을 한다. 스펀지로 삼각형태의 펜촉을 만들고 이를 각목에 붙여 덧칠할 수 있는 다양한 굵기의 펜을 고안했다. 펜 제작은 드로잉의 스케일이 커지면서 구체화됐다. 주로 수첩이나 작은 종이에 드로잉을 해온 작가는 2012년을 기해 몸의 부피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회화의 크기 확대는 자연히 공간과 배경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드로잉을 작업의 중심으로 삼아 평면작업을 이어가는 작가는 많지 않다. 그런데 작가 박광수는 왜 드로잉을 고집할까? 선은 분명 표현에 한계가 있다. 그러나 작가는 “선은 해낼 수 있는 역할이 많다. 기호처럼 단순한 묘사가 가능한 기본단위가 선이다. 면보다 선이 이야기 전달에 효과적이다. 공간을 모두 장악하지 않지만 가득 메울 수 있는 점이 좋다”고 이야기한다. 캔버스, 펜, 색의 한정을 조건으로 걸고 그 안에서 변주해 나가는 과정 자체를 유희로서 즐기는 듯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양한 드로잉의 활용을 통해 드로잉의 범주를 확장하려는 노력을 한다. 작년 신한갤러리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에 선보인 〈검은바람, 모닥불 그리고 북소리〉의 경우 음악을 함께한 애니메이션 영상을 선보이기도 했다. 애니메이션은 시간의 흐름이 나타나, 드로잉보다 구체적인 상황 묘사가 가능하고, 내러티브도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종이 위에서 못다펴낸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을 통해 풀어낸 것이다. 물론 그의 드로잉은 그 자체로서 충분한 이야기를 뿜어낸다. 그는 이야기를 굳이 숨기지 않지만 대놓고 드러내지도 않는다. 새, 나무, 숲 등 익숙한 자연의 소재를 배치하여 비일상적인 공간을 구성해냄으로써 이질적인 공간을 만든다. 여기에는 다각의 시점이 공존하며, 현재성을 뒤흔들며, 새로운 차원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선이 채워낸 구상적이지만 추상적인 〈좀 더 어두운 숲〉으로, 긴장감 넘치는 흑백의 비현실적 〈빈 허공〉으로 이끌어간다. 그리고 관객은 그 안에 서있는 또 하나의 ‘선’이 된다.
임승현 기자

박광수
1984년 태어났다. 서울과학기술대 조형예술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11년 갤러리 비원에서 열린 첫 개인전 〈2001: A SPACE COLONY〉 이후 4번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이후 다수의 그룹전과 협업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현재 금천예술공장 입주 작가로 활동 중이며, ‘금호영아티스’로 선정되어 1월 8일부터 2월 24일까지 금호미술관에서 전시를 이어간다.

 〈검은바람, 모닥불 그리고 북소리〉 전시광경

〈검은바람, 모닥불 그리고 북소리〉 전시광경

SPECIAL ARTIST 박불똥

 

 1996

<정치하는 것들한테 국민 여러분께서 주시는 선물> 1996

2016년 새해 첫 작가론으로 작가 박불똥을 소개한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박불똥을 호명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김동일 교수의 말처럼, 지금 우리에게 박불똥의 작품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박불똥은 일찍이 1980년대부터 기존 화단에 팽배한 순수미술의 이념을 거부하고 극복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대중매체 시대의 예술이라는 명제가 주는 실천적 의미에서 포토콜라주 작업을 비롯해 이땅의 불편한 현실과 모순을 독특한 조형어법으로 들춰냈다. 30년 넘게 그의 보여준 행보는 ‘시각이미지 생산자’로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실천적 예술가의 한 표상이다.

 

박불똥, 혹은 ‘불’과 ‘똥’ 사이

김동일 대구가톨릭대 사회학과 교수

박불똥은 누구일까?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박불똥을 호명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2000년대도 십수년이 지난 지금 박불똥은 사라지길 거부하는 1980년대 미술의 망령일까? 혹은 새로운 세상을 거부하는 철없는 돈키호테일까? 그것도 아니면 혹여 1980년대와 동시대미술 이론과 실천 사이의 공백을 채워줄 소중한 퍼즐의 한 조각은 아닐까? 평자에게 박불똥은 언제나 하나의 수수께끼이자 도전이었다. 박불똥이 작품에서 보여준 파격과 신화가 생산해낸 신비한 아방가르드적 인상은 의외로 박불똥을 둘러싼 사회 현실과 당대 한국 미학장의 구조, 그리고 이 두 개의 구조 사이에서 맹렬히 균열하는 박불똥 미술의 극복되지 않는 모순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치장에 불과했다. 박불똥은 미술장과 사회구조라는 서로 다른 조각들이 맞물려 들어가는 이음새에 해당한다.
박불똥은 불이다. 우리 미술사에서 여전히 민중미술이라는 이름으로 타올랐던 불꽃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 하나는 분명히 박불똥일 것이다. 그 불은 가장 먼저, 가장 화려하게 타올랐고, 또 가장 오랫동안 꺼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박불똥은 민중미술이 민미협으로 조직화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한국미술, 20대의 힘>전(1985, 아랍미술관)을 통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시작부터 민중미술과 함께 한 셈이다. 자신의 젊음을 민중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미술사에 각인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미술가로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민중미술가라는 자격은 평생 그의 삶을 짓누른 멍에이기도 했다. 그는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소위 민중미술 전성기에 그 이름의 시장가치를 누리면서 적당히 민중미술가를 포기하지 못했다. 그때 그는 너무 젊었다. 그의 눈빛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이른바 문민정부라는 위장된 민주주의 아래에서 민중미술이 이른바 풍경화라는 형태로 무장해제될 때조차 시들지 못했다. 그의 불이 가장 젊고, 강렬하게 타올랐을 때, 그의 붓은 칼이 되었다. “스스로 ‘나는 살아 있다’라고 외치며 삶에 대한 애착으로 충만한, 진정한 예술가이기를 원한다면 그는 갈고 닦은바, 무기인 붓으로 시대의 압제자들에게 달려들어 가당찮은 수염과 계급장과 발톱을, 이빨을 뽑고 떼어내고 불태우는 투혼을 발휘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붓으로 압제자들의 목을 찔러 피라도 맛보는 열사적 분노까지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1 물론 박불똥의 폭력은 미학적 은유와 풍자로 나타났다. 예컨대 박불똥이라는 이름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킨 <코화카염콜병라>(1988)은 당대 대한민국의 모순의 기저에 있는 미국의 존재와 미국적 자본주의의 심장에 화염병을 투척하려는 시도였다. 흥미로운 것은 그 화염병이 미국과 미국적 자본주의의 시각적 상징인 성조기와 코카콜라병을 재료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상대방의 칼을 빌려 상대를 공격한다는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를 기도하는 미학적 전복인 셈이다. 칼이 된 박불똥의 붓은 가장 효과적으로 적을 공략한다. 그가 위장된 권위와 힘을 능멸하는 데에 필요했던 것은 지퍼 사이로 내민 검지손가락 하나면 충분했던 것이다(<실수>, 1996). 박불똥이 붓을 칼 삼아 휘두를 때, 그의 미학적 실천의 주된 방법론은 이른바 포토콜라주였고, 그가 채집한 대중매체의 시각이미지를 자르고 붙일 때 칼은 붓을 대신했다(그의 작업실은 자본주의가 산출해낸 시각이미지들이 분해되고 분류되고 실험되고 재조직되는 정갈한 실험실을 닮아있다).
박불똥은 지독했다. 박불똥의 지독함은 그의 미학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였다. 성완경은 이를 정확히 간파하고 다음과 같이 썼다. “박불똥의 작품에는 무언가 치열하고도 지독한 것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경이로움의 원천이다. 특히 포토콜라주 작품에서 ‘만든 자’와 ‘보는 자’를 함께 감전시키는 그 놀라운 ‘눈뜸’의 비밀은 바로 이 지독한 돌격, 치열한 장악, 공격적 이성에 의해서만 결국 획득되는 이미지와 이미지의 신선하고도 풍요로운 충돌이라는 것을 빼놓고서는 달리 얘기될 수 없을 것이다.”2 그의 지독함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1980년대 그의 지독함이 칼이 되었다면, 1990년대의 그것은 편집증적 관찰욕으로 나타났다. 그는 이윤과 자본의 논리에 흥건하게 젖어버린 욕망을 탐닉했다. 그에게 욕망은 동시대 자본주의가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새롭게 포섭하는 통로였다. 자본에 의해 감전된 육체는 이윤을 생산하고 축적하는 도구로 전락한다. 자본은 육체를 통해 욕망을 부추기고, 그렇게 부추겨진 욕망은 상품의 소비를 유도한다. 그러나 그러한 소비는 달력 속의 벌거벗은 육체를 향한자위와도 같은 것이다. 자본주의가 욕망을 호출하는 이유는 결코 충족되지 않는 결핍을 강제함으로써 더 큰 소비를 유도하기 위해서다. 1990년대 남한 사회의 급격한 소비자본주의로의 이행은 분단이라는 기존의 모순과 결합했다. 그 결합 속에서 욕망의 대상으로 재구성된 여성의 육체는 지배권력에 의해 정치적 체제경쟁의 도구로 이용된다. <대북삐라>(1992)는 반라의 여배우가 “녹음의 계절, 의거월남의 가장 좋은 기회”라는 문구와 함께 등장한다. 이때 여배우의 육체는 이중적으로 재구성된다. 첫째 그것은 이윤 획득을 위해 상품으로 구성된 자본주의적 육체인 동시에 둘째 남북의 정치적 대립 상황에서 이데올로기적 무기로 또다시 재구성된 육체였다. 이처럼 박불똥이 1990년대 보여준 편집증적 관찰자로서의 지독함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상 속에서 분단과 자본이 한국사회를 재구축하는 과정을 인류학적 참여관찰과 유사한 방식으로 채집해냈다. 1980년대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1990)가 거시적인 전체 속에서 재구성되는 일상을 드러내고자 했다면, <칼스호프>(1992), <개밥에 도토리>(1996), <시집간포르노테이프>(1996) 연작은 일상의 작은 편린을 통해 거시적인 사회구조를 드러내는 방식을 취했다.

2012 못쓸것-Road3

< 못-쓸-것 Road #2 > 112×300cm 2012

박불똥은 똥이다. 그의 지독함은 1980년대의 칼로도, 1990년대의 편집광적 채집으로도 충족되지 않았다. 2000년대 박불똥은 사회공간의 모순을 자신의 삶을 통해 극단적으로 체험한다. 그것이 자의건 타의건 박불똥은 참기 어려운 빈곤 속에 자신을 놓는다. 그는 기꺼이 ‘쓰레기’가 되는 삶을 선택한다. “백번이라도 부인하고 싶지만 나는 인생과 예술 양면 모두 패색이 완연한 ‘루저’이다. 신용불량자, 국세고액장기체납자, 파산자, 연이은 대인관계의 실패로 낙인된 성격파탄자, 철지난 민중미술의 갑옷을 여태 걸치고 다니는 지진아 아阿큐Q… 하여 스스로 나는 나를 가차 없이 쓰레기라 치부한다.”3 박불똥은 쓰레기가 된 삶 속에서 기꺼이 자신의 예술 또한 ‘똥’이 되는 것을 받아들인다(“그리하여 나는 완존히 똥 되야부렀다”.4 중요한 것은 그 속에서 박불똥이 자신의 삶과 예술을 쓰레기-똥으로 만드는 힘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경로는 어떠한지를 추적했다는 점이다. 그 힘이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숫자로, 돈으로, 은행계좌로, 카드를 통해 박불똥의 삶을 유린하고 있다는 점이다(<데스노트>, 2011). 우리 삶을 겁박하는 악마는 바로 “무시무시한 금융자본주의”5라는 외양으로 나타난다. 더 중요한 것은 박불똥이 자신과 자신의 삶을 쓰레기-똥으로 전락시키는 사회적 힘들에 자신의 예술을 통해 맞서고 있다는 점이다. 박불똥은 최근 작업에 예술의 이름으로 자신의 주변에서 쓰레기가 된 것들 하나하나를 호명해내고 있다. 박불똥의 2000년 이후 작업들은 쓰레기가 된 자신의 삶과 효용을 잃어버린 사물들을 보듬어 안고자 하는 시도였다.
불과 똥 사이. 그러나 박불똥은 맹목적인 불도, 자폐적 똥도 아니었다. 이 점은 박불똥을 정말 이해하기 어렵게 하는 점이기도 하다. 그토록 맹렬했던 불은 어느새 똥이 되어 있고, 그 똥은 또다시 맹렬하게 화염을 내뿜는 불로 변해 있다.6 그는 불과 똥 사이를 왕복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박불똥은 미학적 방식으로 불과 똥을 변환한다. 박불똥을 이해한다는 것은 박불똥이라는 동전의 앞뒷면을 이루는 불과 똥을 본다는 것이 아니라, 불과 똥 사이의 미학적 변환을 탐지해내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변환 과정에서 오히려 똥은 불보다 더 맹렬하게 타오른다. 실제로 <된장1>(2006)은 자신의 똥을 칼로 삼아, 독재자와 지도자를 구별할 줄 모르는 우리 자신의 우둔한 분별력을 난도(亂刀)한다. 분명한 것은 박불똥은 그 자신이 민중의 한 사람이자 예술가로서 이 사회의 ‘더러운’ 시절들을 헤쳐나가고 있다는 점이며, 나아가 박불똥이 세상과 그의 삶을 헤쳐나가는 방식은 잔혹하리만큼 치열한 현실 문제의식과 미학적 실천이라는 점이다. 이때 박불똥의 ‘불’과 ‘똥’은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는 미학적 방법론의 두 극점을 보여준다.●

1 박불똥, “칼이 필요한 현실과 칼이 되어야 하는 붓.”(1987) 『민족미술 영인본 1986~1994.』 민족미술협의회 편, 도서출판 발언. 1994. 87쪽
2 성완경(1986). “탁월한 형상화 이미지와 이미지의 신선하고도 풍요로운 충돌.” 서울미술관 ’85 문제작가전 추천평론
3 박불똥 <못-쓸-것>(2012, 트렁크갤러리) 작업노트 중에서
4 박불똥은 <일상의 연금술전>(국립현대미술관, 2004) 전시장에서 실수로 무너지고 으깨진 연탄을 그대로 전시하면서(<파고다-작품에 손대지 마시오-b>) 그 상황을 유쾌하고도 풍자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삶에 비유했다. “아무튼, 화단 활동 20년 만에 처음 발 들여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그리하여 나는 ‘완존히 똥 되야부렀다.’ 미필적 고의로?.” 박불똥 외. (2014.) 《박불똥 모순 속에서 살아남기》 현실문화연구. 209쪽
5 박불똥, <시>의 일부. 박불똥 외. (2014.) 『박불똥 모순 속에서 살아남기.』 현실문화연구. 337쪽
6 대체로 그의 초기작에 해당하는 <눈빛>(관훈갤러리, 1985), <졸작>(그림마당 민, 1987), <결사반대>(그림마당 민, 1989),
<관능의 불구에 대한 자백>(금호미술관, 1992), <박불똥의 좔>(갤러리자인제노, 2011), 최근 <퀑, Bang!>(나무화랑, 2014)이 불에 해당한다면 <사유재산>(사비나 미술관, 2001), <토끼와 거북>(갤러리아츠윌, 2011), <박불똥의 형이하 악>(관훈갤러리, 2011), <못-쓸-것>(트렁크갤러리, 2012)은 똥에 해당한다.

박 불 똥 Park Bulddong
1956년 태어났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1985년 첫 개인전 <눈빛>(관훈미술관)을 시작으로 <졸작>(그림마당 민, 1987) <결사반대>(그림마당 민, 1989) <관능의 불구에 대한 자백>(금호미술관, 1992) <사유재산>(사비나갤러리, 1999) 등 11번의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현재 민족예술인총연합회, 민족미술협회 회원이며, 경기도 남양주 마석에서 작업하고 있다.

ARTIST REVIEW 강홍구

강홍구의 작업 장르를 한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작업을 설명하는데 필수적으로 함께 하는 단어는‘회화’와 ‘사진’. 사진 위에 그려진 그의 그림은 생경함보다는 독특한 감각을 자아낸다. 2015년 11월 27일부터 12월 23일까지 원앤제이갤러리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 〈언더프린트: 참새와 짜장면〉은 이러한 두 평면의 만남이 독특하게 조화를 이룬 작업으로 주목받았다. 필자는 그의 작업이 “뷰파인더와 피사체의 포획 관계를 넘어, 형상의 구축(image constructing)과 ‘그림을 서서히 드러나게 하는 운동을 주도하는 것’으로서 ‘모티프’라는 회화 실천적 관계를 고려하도록 요청하는 작업이다”라고 이야기한다.

강홍구의 평면 각뜨기와 양생

강수미 동덕여대 교수

대부분의 사람에게 세계는 지극히 세속적인 사실 무더기인 동시에 그 사실들이 대강대강(凡) 통속적인(俗) 상태로 지각되는 곳이다. 사실의 무차별적 집합, 흔해빠진 지각 경험이 그렇게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퍼져있는 양태, 그것이 곧 우리가 말하는 ‘일상’의 실체다. 물론 이때 무차별성과 범속함은 아이러니하지만 우리가 지긋지긋하다고 말하는 실생활을 평생 질리지 않고 살게 하는, 우리가 평범하다며 무시하기도 하는 현실을 상도(常度)에 어긋남 없이 이어나가게 하는 강력하고도 기본적인 힘이다. 하지만 특별한 인식 및 감각능력을 갖고 있고 그 힘을 제대로 발현시킬 표현 매체 및 방법론을 지닌 예술가는 대강대강과 듬성듬성의 세계를 끊임없이 세공하고 밀도를 채운다. 또 통속적 경험과 덩어리진 지각을 평면적인 틀에서 해방시켜 다양한 지점과 층위로 횡단, 분할, 이접, 중층화, 복수화, 변형, 변질, 변성시킨다. 그렇게 해서 일상의 무차별성으로부터는 비범한 차이를, 실재로부터는 풋내와 핏물을 제거하고 아주 작은 미적 가치라도 구해낸다. 그럴 때의 예술가는 “두께 없는 칼날이 틈이 있는 뼈마디로 들어가”1 정확하고 군더더기 없이, 어떤 남용도 잉여도 범하지 않고 소의 살과 뼈를 발라냈던 중국 문혜군 시절의 요리사처럼 도(道)로써 일한다. 요컨대 포정의 소 각뜨기(?丁解牛).
강홍구는 이를테면 내가 생각하는 한국 현대미술계의 탁월한 ‘예술가-포정’ 중 하나다. 이 작가만큼 신물 나는 일상 현실로부터-아니 사실은 절대적으로 바로 그것으로부터만-비범하면서도 결코 젠체하지 않는 이미지를 떠내는 이가 없다는 뜻에서다. 또한 이 작가만큼 겉보기에 힘들이지 않고, 대단한 각오나 철두철미 심각함도 자랑하지 않으면서 날것의 현실로부터 즐거운 것, 기분 좋은 것, 감상할 만한 것 그러나 송곳 같은 의표가 있고 영양가 높은 비판성이 담긴 무엇을 발라내기 어렵다는 뜻에서다. 요컨대, 작가가 말하는 “시시한 것”으로부터 미학적 용어로 ‘미적인/감각 지각적인 것(the aesthetic/aisthetikos)’ 각뜨기.
비린내를 풍기며 아무렇게나 엉켜있는 듯하고, 무더기져 뭐가 뭔지 모르겠는 리얼리티 내부에도 분명 나름의 결이 있고 틈이 있다. 또 가치와 의미의 마디들이 존재한다. 작가 강홍구는 먼저 바로 그 결을 따라, 어떤 틈 안으로 카메라 렌즈를 들이밀어서 생짜 원초적 이미지를 포획(capture)한다. 그런 다음 그 원초적 이미지 무리를 현실의 피상성2에 내버려두지 않고, 스스로 “B급”이라 낮춰 부르는 자신의 예술 역량에 따라 자르고 접붙인다. 이때 ‘자르기’와 ‘접붙이기’는 현실에 내속된 동종 혹은 이질의 마디들, 결절들로 침투해 의도를 갖고 혼합 편집하는 실천법인 만큼 무차별로부터 비판적 인식의 거리를 확보하고, 예술인문적 실체를 증가시키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이런 작업 과정 및 창작의 방법론은 강홍구의 초기 전시에 속하는 《강홍구》(1992)와 《위치, 속물, 가짜》(1999)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드라마 세트》(2003) 《오쇠리 풍경》(2004) 《풍경과 놀다》(2006)로 이어졌고, 《사라지다-은평 뉴타운에 대한 어떤 기록》(2009)과 《사람의 집-프로세믹스 부산》(2013)을 통해 하나의 정점을 이뤘다.
여기까지 한 후, 강홍구는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궤도 하나를 발명해낸다. 이 작가의 원래 전공 분야인 ‘회화’와 지난 20여 년간 자기 작업의 주 무대였던 ‘사진’이 상호 중층결정 작용을 하는 평면이 그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그 집》(2010), 《녹색연구》(2012), 그리고 《언더프린트: 참새와 짜장면》(2015)에서 구현한 평면인데, 쉽게 말해 ‘사진 위의 그림’이다. 별것 아닌 것처럼 들리는 이 사진 위의 그림이 내가 강홍구의 작업을 ‘예술사진’이든 ‘사진예술’이든 간에 결코 사진에 한정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는 근거다. 이를테면 그의 예술은 사진과 인화지/전자기기 모니터의 관계 구도로 파악해서는 핵심을 놓친다. 대신 이미지 일반과 평면의 관계 속에서 이해될 때 가치가 솟아나고 즐김이 증폭될 것이다. 나아가 뷰파인더와 피사체의 포획 관계를 넘어, 형상의 구축(image constructing)과 “그림을 서서히 드러나게 하는 운동을 주도하는 것”으로서 “모티프”3라는 회화 실천적 관계를 고려하도록 요청하는 작업이다.

코끼리

〈코끼리〉 사진 위에 아크릴 35×100cm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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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전경

평면의 위와 아래로 운동
매체학자 플루서는 ‘피상성’과 ‘평면’을 실제 현상, 그림, 사진, 비디오, 컴퓨터그래픽 등 대상을 가리지 않고 광의적으로 사용하는데4, 이는 논쟁이 필요하다. 그도 알다시피 피상성, 가시적 표면, 평면이라는 범주에는 인간의 의도, 행위, 제작, 장치, 환경, 역사 등이 작용하는 방식과 정도 차에 따라 매우 상이한 이미지 종(種)이 포함될 수 있고, 그런 만큼 각각에게는 공통성보다는 분별 가능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1996년 강홍구가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저수지의 개들’ 스틸을 차용해 자신의 얼굴과 합성한 디지털 자화상 〈나는 누구인가〉는, 2015년 아스팔트바닥을 딛고 서 있는 자신의 두 발부리를 찍고 그 사진 위에 아크릴물감으로 생선 대가리와 꼬리를 그려 넣은 〈고등어〉와 피상성 과/또는 평면이라는 이슈에서 동일시될 수 없다. 전자가 통속과 기성의 이미지를 가져다 이리저리 비틀어 가짜와 거짓을 보여준다 한들, 그것이 사진인 한 〈나는 누구인가〉는 실재의 지표(index)인 동시에 그 실재의 피상성 파편들이 꿰매진 피부다. 또 인화지에 현상되든 전자 모니터에 띄워지든 간에 그것은 결코 아무것도 없는 데서부터 출현하기란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이미지다(뭔가가 찍혀야 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 인화지나 모니터는 사진영상의 역사가 얼마가 됐든 새로 생산되는 모든 이미지가 언제나 제로 그라운드에서 실재의 조각들로부터 얻어내야만 하는 것이다(심지어 그것이 다른 이의 사진을 표절, 차용, 변조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반면 후자 〈고등어〉는 미학적으로 그다지 대단할 것 없어 보여도 실재의 객관적 존재와 작가의 주관적 행위가 중층결정 작용한 결과다. 이를테면 고등어 머리와 꼬리를 우둘투둘한 질감의 터치로 그린 것은 작가가 그 회화적 표현 아래 이미 각인돼 있는(언더-프린트) 아스팔트평면의 물질성을 감각적으로 모티프에 투입한 결과이며, 또 그 역작용의 결과인 것이다. 메를로 퐁티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림을 나타나게 하는 운동의 견인체로서 아스팔트바닥이라는 모티프의 영향관계.
이런 맥락에서 최근 강홍구의 ‘사진 위의 그림’ 작업은 지표나 실재의 피상성 같은 기준 대신, 사물/모티프의 물리학적이고 위상학적인 운동 및 평면이라는 특수 환경(하나의 차원이자 회화예술의 역사적 현존으로서)의 조직화에 초점을 맞춰 비평해야 한다. 요컨대 이런 것이다. 초기 이 작가의 사진합성작업들은 포정의 소 각뜨기처럼 삶의 피상성으로부터 어떻게 군더더기 없이 정확하고 날선 이미지를 해체해낼 것인지에 맞춰져 있었다. 골계미를 뽑아내는 창작 말이다. 그런데 현재 그의 사진 위 그림 작업들은 평면과 평면 사이로, 평면의 위와 아래로 ‘강홍구’라는 주체의 주관성(subjectivity)을 집어넣는 양생(養生)과 양화(+)의 미술이다. 그렇게 해서 리얼리티의 무서운 구멍, 삶의 냉혹한 벽, 일상의 강압적 틈에, 모티프의 결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상실한 소망이미지와 범속한 자유의 이미지를 메워 넣는 것이다. 플루서는 평면은 곧 ‘표면’이고 ‘피부’라고 봤지만5, 이미지의 세계에서 진짜로 빚어지는 사태는 그렇지 않다. 평면은 사물/사태에 대한 정확한 틈입, 해체, 구축의 일들이 중층결정되는 공간이고, 그런 한 단순한 표면이나 피부가 아니다. 그것은 2차원과 3차원과 4차원의 한가운데서 두께 및 부피가 쉬 바뀌지 않는 독특하고 강한 몸이다. 현재 강홍구가 《언더프린트: 참새와 짜장면》에서 보인 ‘찍은 평면’으로서 벽과 담, 그 위에 ‘그린 평면’으로서 짜장면 다섯 그릇, 토끼 인형, 벽돌 위 참새, 세잔의 〈사과와 오렌지가 있는 정물〉 등이 구축하고 있는 몸이 바로 그 현현이다.●

쿠르베

〈쿠르베〉 사진 위에 아크릴 100×170cm 2015

1 장자, 오강남 풀이, 《장자》, 현암사, 1999, pp. 146-154. “동양에서는 엄격히 따져 궁술, 검술, 유술 등 ‘술(術)’의 연마를 목표로 하는 훈련과 궁도, 검도, 유도 등 궁극적으로 ‘도(道)’와 하나가 되어 자연의 움직임과 합일하려는 수련을 구별했다. 말하자면 여기서 포정은 ‘해우술’이 아니라 ‘해우도’를 터득한 것이다.”(p. 152)
2 여기서 ‘피상성’은 말 그대로 가시적 표면으로 나타난 형상적 속성을 가리킨다.
3 Maurice Merleau-Ponty, Sens et non-sens, 권혁면 역, 《의미와 무의미》 중 “세잔느의 회의”, 서광사, 1985, p. 27.
4 Vilem Flusser, Lob der Oberflachlichkeit, 김성재 역,《피상성 예찬》, 커뮤니케이션북스, 2006, pp. 2-5 및 45-49 참조.
5 같은 책, p. 57.

강 홍 구 Kang Honggoo
1956년 태어났다. 목포교육대를 졸업하고 홍익대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2년 갤러리 사각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15회 이상의 개인전과 그룹전에 참여했다. 《미술관 밖에서 만나는 미술이야기1,2》 《앤디 워홀:거울을 가진 미술사의 신화》《시시한 것들의 아름다움: 우리시대 일상 속의 시각문화 읽기》 등의 저서가 있다.

ARTIST REVIEW 진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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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자유의 전사> 레진 실리콘 혼합재료 90×140×90cm(높이, 각) 2015 아래 < UFO의 공격을 받은 슈퍼신의 광장> 혼합재료 360×165×50cm 2015 <UFO의 공격을 받은 슈퍼신의 광장>(벽면 설치작업, 부분) 3D그래픽 랜티큘러 79×140cm(각) 2015

5년만에 열린 진기종의 개인전은 <무신론보고서>(갤러리 현대, 2015.12.4~1.3)라는 부제를 달았다. 매스미디어가 전달하는 정보에 불신 가득한 시선을 보냈던 그가 이번 전시에는 한 치 앞 운명도 예견할 수 없는 인간이 현재 놓인 상황을 집요한 작업방식으로 펼쳐보인다. 그의 작가 노트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다. “과연 신은 존재할까? 그 신이 지명했다는 대리자의 말 또한 진실일까? 인간은 왜 신을 믿을까?” 이 연속되는 질문에 작가가 스스로 한 대답을 들어보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보고서

류한승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진기종이 <CNN>을 발표한 것은 2006년이다. <CNN>은 자타가 인정하는 그의 초기 대표작. 플라스틱 거품 사이를 빙빙 도는 비행기, 그리고 엉성한 자막과 CNN 로고. 이어서 그는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을 다룬 <Discovery>와 자연 다큐멘터리의 촬영 과정을 폭로한 <National Geographic>을 연달아 선보인다. 카메라, 모터, 조명, 장난감 등으로 만든 장면이 TV 모니터를 통해 중계되는 구조인데, 관객은 그 기발함과 재치에 절로 미소 짓게 되지만 그가 다루는 주제의 무거움을 알아차리는 순간 웃음기는 싹 사라진다. 완벽한 데뷔.
그의 초기 작업에서는 크게 두 가지의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첫째, 진기종은 카메라 렌즈를 통해 어떤 상황을 포착했지만, 오히려 그는 카메라 렌즈 밖의 세상에 관심이 더 많았다는 것이다. 카메라 앵글 안에서 벌어지는 통제되고 편집된 상황을 끄집어내기 위해 그는 과감히 카메라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둘째, 그는 오브제를 정교하게 만들지 않았다.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드라마 세트장을 꾸밀 때 너무 잘 만들 필요가 없다. 그저 카메라 렌즈가 소화할 정도로 대상을 재현하면 된다. 어느 수준만 넘어가면 그것들은 진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진기종의 TV 모니터에서도 그럴싸한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그의 오브제를 바라보면, 그것들이 얼마나 허술하고 단순한 것인지를 금방 알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소소한 재미가 있다. 오밀조밀한 것들이 하이테크가 아닌 로테크에 의해 귀엽게(?) 움직이고 있으니까.
이처럼 진기종은 소형 카메라, TV 모니터 등 전자 장비를 활용하여 현대사회의 매스미디어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느냐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더불어 카메라 앵글 안의 이미지는 언제든 조작될 수 있는데, 그런 조작은 누가, 왜, 어떻게 하며, 또 그것이 누구를 위해 봉사하는지를 다루는 것이 그의 작업이다. 이는 사회에 내재한 여러 미시적 힘의 관계를 드러내는 일종의 ‘계보학적’ 접근과 닮아 있다.
카메라를 통해 렌즈 밖 세계를 바라보던 진기종의 작업은 다소 변화를 맞이한다. 그가 카메라의 렌즈가 아닌 맨눈으로 어떤 상황을 바라본 것이다. 그것이 바로 ‘디오라마’ 연작이다. 디오라마는 역사적 사건을 미니어처로 재현하는 것에서 유래했다. <CNN>의 경우 역사적 사건을 작은 오브제로 만들었기에 넓게 보아 디오라마로 칭할 수도 있다. 하여튼 디오라마 작업에는 카메라와 모니터가 없다. 그렇지만 디오라마 시리즈에서도 어떤 한 장면을 선택하고 그 장면이 왜 벌어졌는지를 추적한다는 측면에서 앞의 작품과 같은 맥락이다. 단지 카메라와 모니터가 없기 때문에 미디어 비판이 사라졌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었기에 도리어 사건 자체에 더 집중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디오라마 연작이 처음 소개된 것이 2010년 <지구 보고서> 개인전이다. 작가는 미국 뉴스 방송사 <CNN>과 아랍계 위성방송 뉴스채널 <알자지라>에서 영감을 받아 주로 석유, 전쟁, 환경 등을 다루었다.
이번 개인전 소재는 ‘신’과 ‘종교’이며 전시제목은 “무신론 보고서”이다. 과거 카메라 렌즈로 볼 수 없는 영역을 보고자 했듯이, 계속해서 그는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역을 보고자 한다. 그의 신(종교)에 대한 보고서는 대략 세 갈래인 것 같다.

 미니어처보트 PVC필름 영상설치 가변설치 2011

<항해> 미니어처보트 PVC필름 영상설치 가변설치 2011

여행의 종착점은 결국, 인간
첫 번째는 ‘종교와 개인’의 문제이다. 그와 관련된 작업은 <염주와 기도>이며 영상과 입체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니터에는 조계사에 다니는 한 할머니가 등장하고, 그 앞에는 큼직한 염주와 손이 설치되어 있다. 작가는 절에서 염주를 돌리며 기도하는 할머니들이 도대체 어떤 내용을 기도하는지가 궁금했다고 한다. 대략적으로 예상할 수 있듯이, 할머니가 기원한 것은 심오한 불교 교리도 아니고, 국가와 세계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식들이 잘되라는 정도이다. 이는 아마도 교회를 다니거나 성당을 다니는 평범한 어르신들의 기도와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성직자가 아닌 이상, 평범한 사람이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어떤 절대적·형이상학적 신을 믿기보다는 자신에게 필요한 신을 스스로 구성하는 게 아닐까.
두 번째는 ‘종교와 종교’의 문제이다.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하려는 미국의 특수부대원과 빈 라덴을 지키려는 알카에다 부대원이 서로 마주보며 각자가 믿는 신에게 기도하는 것이 <자유의 전사>이다. 이 두 군인은 모두 실물 사이즈로 재현되었고, 이들이 지닌 각종 무기, 장비, 군복 등도 대부분 실물이라고 한다. 단 총은 한국의 사정상 모조품. 첨단장비로 무장한 미군은 오른손에 묵주를 들고 자신이 믿는 하느님에게 기도하고 있다. 반면 재래식 무기를 가진 알카에다 부대원은 오른손에 수브하(이슬람교에서 사용되는 묵주)를 들고 자신이 믿는 알라에게 기도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종교는 한 뿌리에서 나왔다고 일컬어진다. 그러면 결국 같은 신에게 기도하는 셈인데, 혹시 이들이 믿는 신은 인간이 스스로 구성한 게 아닐까.
세 번째는 ‘종교와 외계인’이다.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할 수 있지만, 작가는 지구상의 종교들은 대체로, 일부 사이비 종교를 제외하고, 외계의 존재를 부정한다고 이야기한다. 보통 종교의 절대자는 하늘에 있는 것으로 상정되는데, 그 하늘 너머에 있는 외계인은 그들에게 당황스러운 존재였을 것이다. 하지만 드넓은 우주에 생명체가 지구에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내용을 다루는 게 이른바 ‘슈퍼신’ 시리즈이다. 진기종은 이슬람교, 천주교, 기독교(개신교), 불교, 유대교 등을 혼합하여 가상의 신종 종교를 만들었다. 외계인이 지구에 왔는데, 이 신흥 종교의 사제들이 외계인을 공격하고 있다. 아마도 자신들의 교리를 주장하기 위해 외계인을 적대시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 외계인들이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있다. 분명 지구까지 올 정도면 고등생명체일 텐데 이들은 힘이 없다. 지구라는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한 듯. 어쩌면 그들은 지구인을 배척할 생각이 애당초 없었을지도 모른다.
한편 이번 전시를 보다 보면 반복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 ‘구슬’이다. 그것을 가톨릭에서는 묵주라고 하고 불교에서는 염주라고 하는데, 사실 이슬람교, 힌두교, 그리스정교에서도 이와 비슷한 것들이 있고 그 용도도 비슷하다. 전시에서 이 구슬은 일종의 ‘라임(rhyme)’으로서 전시에 시각적 악센트를 주는 동시에 여러 종교를 하나로 묶는 매개체로도 작동한다. <신을 향한 항해>에서 세계 5대 종교의 사제 5명이 한 배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그런데 사제들의 육체는 없고 휘황찬란한 금빛 사제복만 남아 있다. 금빛. 작가는 대다수의 종교가 금으로 무언가를 장식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작가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의외로 종교들은 서로 공통점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전시명은 ‘무신론 보고서’이지만, 그렇다고 진기종이 신을 부정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바라보는 지점은 우리가 신 그 자체에 다가가기보다는, 우리가 생각하는 범위 내에서 자신만의 신을 만드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물론 그것이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음).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로 환원되는 듯하다. 이번 전시에서 진기종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찾아 여행을 떠났지만, 결국 그의 종착역은 우리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진 기 종 Zin Kijong
1981년 태어났다. 경원대 환경조각과를 졸업했다. 2008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국내는 물론 타이완, 독일 뒤셀도르프 등지에서 8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한국과 독일, 브라질, 터키,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열린 다수의 기획전과 그룹전에 출품했다. 현재 몽인아트스페이스레지던지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NEW FACE 2016 김지영

내가 할 수 있는 말, 예술에 대한 믿음

2014년 4월 세월호 침몰 사건은 전 국민을 충격의 도가니에 빠트렸으며, 많은 예술가 역시 이 자장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당시 작가들은 현실이 이러한데 예술은 사치라며 회의감에 빠지기도 했고, 작업에 이 사건을 언급하기도 언급하지 않기도 어려운 상황이라며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작가 김지영 역시 같은 고민을 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 사건과 자신의 거리를 조율하며 이를 주제로 꾸준한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최근 성북동 한옥을 개조한 오뉴월 이주헌(利宙軒)에서 열린 개인전 <기울어진 땅 평평한 바람>(2015.11.19~2015.12.10)에서 작가는 원래 평평한 전시장 시멘트 바닥을 기울어진 마룻바닥으로 변모시켰다. 이외에도 심장박동과 유사한 북소리,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 푸른색 조명, 깨진 화분 속 말라 비틀어진 식물들, 작가와 지인의 자는 모습을 그린 그림 등 전시장 곳곳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특정한 상황을 떠올리는 은유적인 장치가 된다. 관람객이 전시장을 들어서면 거대한 파도 앞에, 혹은 배 안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작가는 “전시장 자체가 각자의 호흡으로 사유하는 장소가 되었으면 한다”고 설명했다.
김지영은 이 사건 발생 후 광화문 시위현장, 안산 분향소를 찾아갔지만 직접 팽목항에 내려간 것은 지난해 10월이 처음이었다. 정작 내려가서 보니 그냥 평범한 바다여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동안 팽목항 앞바다에 막연한 공포를 가졌던 것이다. 그때 작가는 사람들이 세월호 사건을 그 자체로 바라보지 못하고 공포와 두려움으로 스스로 거리감을 만들고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 그런 공포심을 조성하는 사회구조가 땅을 기울어지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이때 전시 제목의 ‘평평한 바람’은 죽음이 이 땅 위에 공존함을 암시한다. “타인의 고통, 이들의 죽음을 공동의 사건으로 인식하고 각자의 거리를 인정하며 공감할 때 연대의 가능성이 만들어집니다. 많은 사람의 공감이 깊어질 때 사회가 변할 수 있는거죠.”
김지영은 과거 작업에서 삶의 이면에 도사린 폭력성에 관심을 가지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을 시도했다. 작가는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내가 감히 무엇을 말해도 되냐보다 어떻게 말하는지가 더 중요함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내가 오히려 미술의 힘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 가능성을 의심하고 스스로 제한을 두고 검열한 것은 아닌지 질문하게 된 것이죠.” 그런 고민 끝에 나온 작업이 사무소 차고에서 선보인 <선할 수 없는 노래>였다. 그리고 각자의 거리감 자체를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 2014년 4월부터 1년간 진도 바다의 풍속을 비트로 변환시킨 북소리를 듣고 그날의 파도를 상상해서 그린 <4월에서 3월으로>를 선보였다. 세월호 사건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것처럼 작가는 앞으로 변주를 계속하며 자신의 방식으로 이 사건을 말할 예정이다. 예술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들여다보고 몰두하게 하는 힘을 가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슬비 기자

김지영
1987년 태어났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전문사 과정을 마쳤다. 반지하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교역소, 사무소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아트스페이스 풀, 아마도예술공간 등에서 열린 그룹전에 참여했다.

 종이에 아크릴 20점 각 38×33cm 2015

<수면> 종이에 아크릴 20점 각 38×33cm 2015

 

NEW FACE 2016 이지연

기억하나 헤매고, 그리고 발견하다

‘기억’은 사실 부정확하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이다. 또한 기억의 맥락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만 취사선택한 결과물이 기억이다. 이지연 작가가 벽면을 통해 제시하는 공간이 ‘기억’에 근거한 것이라는 말에 기자는 그 부정확함을 먼저 떠올렸다. “평면작업 <기억을 그리다-reminiscent> 연작은 기억 속 장소인 외가가 대상이에요. 2003년 돌아가신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붙잡고 싶어서 그 장소를 그렸지요.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외가 친척들도 아무도 그림에 나오지 않고 어떤 상황이 나타나지 않는데 처음부터 그릴 이유도, 그리고 싶은 것도 없이 공간만 그리게 되었죠. ‘기억’을 이야기하려면 늘 이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 최근의 공간작업들은 그런 기억이라기보다는 공간 자체와 그 안의 놀이로 가려 해요.” 작가에게 그래서 ‘기억’이란 “공간을 지각하고 인지하는 방식의 배경”으로 정의된다. 그래서 작가가 제시하는 공간은 필연적으로 관람객의 ‘헤매임’을 요구하는 것 같다. 누군가의 철저히 사적인 기억의 결과물인 작업 앞에서 관람객은 어쩔 수 없이 ‘타인’이기 때문이다. “관람객에게 ‘어딘가?’를 상상하게 하는 것이 출발점이었어요. 전에 어떤 관람객이 53점으로 구성된 <5월의 일지를 들춰보다part4>(2009)를 보며 ‘추리소설의 장면’이 생각난다고 한 적이 있어요. 작가로서 굉장히 반갑고 신나는 경험이었죠. 그 헤매임 자체를 즐겼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관람객의 그러한 ‘즐김’은 선 이외의 벽면 공간을 상상력으로 채워넣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이 작가의 작품은 월페인팅, 캔버스 작업, 그리고 조각작업으로 나뉜다. 그런데 대부분 작업은 평면에서 구현되는 입체에 대한 고전적 해석, 즉 환영을 구축하는 과정으로 읽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맥락이라면 <호기심 상자_소파에 누워 천정을 걸었다>(2014)는 이례적이다. 작업이 대부분 관람객의 정상적 직립 자세에서 자연스럽게 시선을 보내는 행위에서 발견되는 것이라면, 이 작업은 위를 보기 위해 고개를 들어야 하거나 누워야 하는 수고를 요하기 때문이다.
“<호기심상자_소파에 누워 천정을 걸었다>는 전시장소가 큰 영향을 주었죠. 클레이아크미술관의 세라믹창작센터 입주 작가 전시였는데 입주해 있는 동안 미술관을 많이 돌아다녔어요. 제목의 ‘소파에 누워서 천정을 걸었다’라는 말 자체가 제가 어릴 적 놀던 방식이에요. 바로 외가의 가옥 구조가 그랬습니다. 집 안 구석구석 안 보이는 곳이나 벽 너머, 계단 뒤나 문 사이사이에 새로운 공간에 대한 상상을 하였지요. 말씀하신 ‘특별한 차별성’이라고 하면, 다른 작업들이 ‘제가 떠올리는 방식’의 ‘이미지’를 보도록 했다면, 이 작업은 ‘제가 바라보던 방식’에 가까운 ‘시선 또는 자세’를 요청-요구한 점일까요?”
장소와의 상호 교감이 작업에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이에 대해 이 작가는 “평면작업이든, 벽면 작업이든 전시장을 필연적으로 고민하게 된다”고 털어놨다. “입체적인 설치가 아닌 경우에도, 공간을 자주 살피려 하는데, 벽면 설치작업의 경우는 공간의 구조나 규모가 이미지의 구상에 영향을 줍니다.” 최근 문래동에서 7&1/2의 기획으로 작업한 <존재하지 않은 경계>는 작가의 공간에 대한 고려가 십분 발휘된 작업이다. 이 작가의 작업은 시공을 초월하여 관람객이 상상력을 발휘해 각자의 ‘놀이방식’을 찾았으면 한다는 바람을 드러남이다. 그 ‘놀이방식’은 현재 부산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녀의 이력에는 근 5년간 전국 각지 레지던시프로그램에 참여한 경력이 빼곡이 적혀있다. 스스로 한 곳에 정주하기를 거부하는 작가의 근본적 습성이 지금의 작업을 낳은 것 같다. 지금 놓인 ‘상황’ 그 자체가 작업의 동력이라는 이지연 작가의 또 다른 ‘기억’과 ‘상황’은 무엇일까?
황석권 수석기자

이지연
1980년 태어났다. 이화여대 조형예술대 회화판화 전공과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9년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지금까지 8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또한 다수의 기획전과 그룹전에 출품했다. 현재 부산 예술지구P 레지던시프로그램 입주작가이다.

 가변설치 2015

<존재하지 않는 경계> 가변설치 2015

 

NEW FACE 2016 강신대

동시대의 이미지를 박제하다

하루 동안 스쳐가는 이미지는 셀 수 없이 많다. 그중 대다수는 다음 날이면 기억에서 사라진다. 이 경우 이미지는 내러티브를 잃고 이미지 그 자체로 떠다니는 껍데기일 뿐이다. 인터넷에 부유하는 수많은 이미지는 그 생산·유포자의 의도 및 상태는 상실된채 본래 의도와 무관하게 추상화되어 소비자의 구미에 맞게 요리된다.
작가 강신대의 관심은 ‘이미지’에 있다. 미술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이미지의 정의를 넘어 작가는 “총체적 방식의 이미지”를 다루려 한다. 이에 따르면 시각적으로 보이지 않는 추상적 개념도 이미지로서 형상화할 수 있다. 물신주의적 관점으로 형상 자체를 추적하고 풀어나가는 것이 그가 집중하는 ‘이미지 이론’이다. 작가는 “미술관 안에 전시된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를 넘어 일상을 지배하는 이미지의 논리, 형상화의 과정 표현방법을 고민 중”이다.
2015년 여름 강원도 철원군 동송에서 열린 ‘리얼 DMZ 프로젝트’에서 선보인 <#DMZ>는 ‘DMZ’란 키워드를 물질화하여 이미지로 치환하는 작업이다. 작가는 웹상에 ‘DMZ’란 키워드를 입력한 후 검색되는 이미지들을 ‘이미지 수집 프로그램’ 과 ‘영상 처리 프로그램’을 통해 수집하고 축적했다. 같은 시각 동네의 한 통신사 상점에 설치한 TV에 실시간으로 수집되는 영상을 볼 수 있도록 했다. 코드화된 이미지는 단어의 의미와 깊은 유대를 갖는 경우도 있지만 연예인, 상업광고, 주식시장 등 개념어로 제시한 단어의 뜻과 전혀 무관한 형상인 경우도 많았다. 수집되는 속도에 따라 이미지는 때로는 눈 깜짝할 사이 흘러갔다. 작가는 주관적 판단 과정을 통해 이미지 선별하기를 거부하고, 컴퓨터가 수집한 코드화된 이미지를 통해 일상적으로 유통·소비되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렇게 모인 이미지가 전시 마지막에는 약 4000만 개에 달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이미지를 저장할 수는 없다. 마치 CCTV 화면처럼 프로그램은 계속해서 구동하지만 저장 공간에 한계에 부딪쳐 이미지가 쌓여갈수록 오래된 파일은 사라진다. 결국 이미지는 허상이다. 저장되지 않고 사라지고 흩어질 수밖에 없는 이미지에 물성은 없다. 또한 이미지 수집에서 작가의 주관성이 전적으로 배제될 수 없다. 작가는 주관적인 의도를 갖고 키워드를 선택하고 입력한다. 그리고 컴퓨터는 키워드의 조종에 따른다. 작가는 ‘기계’ 사용을 일종의 위장술로 취함으로써 이미지가 가볍게 소비되면서도 동시에 생각을 지배하는 정치적 측면에 주목한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가치로 미술을 평가했을 때 “쓸모없음”으로 구분한다. 하지만 작가는 이 지점에서 ‘미술에서 정치적인 것’이 지닌 가능성을 보았다. 정치적인 매개의 논의가 발화하는 유일한 곳이 미술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다. 시각미술이 이를 소재로 휘발시키기보다는 논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때 메시지는 허상의 이미지가 지닌 유일한 내러티브의 매개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임승현 기자

강신대
1988년 태어났다. 계원예대 현대예술창작&기획과를 졸업하고 현재 성공회대 사회과학부에 재학 중이다. 갤러리27에서 열린〈태도상정〉이후 〈사유하고, 사유하라〉, 〈리얼 디엠지 프로젝트 2015〉에 참여했다.

 < #DMZ >(실시간 이미지 수집 프로그램, 실시간 영상처리 프로그램 2015) 나래 정보통신에 설치된 전시 전경 ⓒ김태동

< #DMZ >(실시간 이미지 수집 프로그램, 실시간 영상처리 프로그램 2015) 나래 정보통신에 설치된 전시 전경 ⓒ김태동

SPECIAL ARTIST 김명숙

평소 자신의 개인전에 얼굴조차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한 작가 김명숙. 작가는 오직 작품으로 말한다는 은둔 예술가의 전형인 김명숙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묵묵히 땀을 흘리며 일하는 밀레의 농부그림처럼 그녀의 작품 역시 숱한 노동의 흔적을 드러내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 치열한 작가 정신으로 회화의 깊이를 끝없이 추구하는 그녀의 작품세계를 조용히 들여다본다.

객체라는 불가능한 기획

고충환 미술비평

자살을 하려고 욕실에 들어갔다가 참으로 오랜만에 나를 봤다. 거울 속의 내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던 것. 참으로 오랜만에? 사실 자살을 실행에 옮기기로 마음먹기 훨씬 전부터, 처음으로 자살을 생각하기 훨씬 전부터 나는 나를 보지 못했다. 오랫동안 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렇게 생각에 빠져있는 내내 나는 나를 볼 수가 없었다. 나는 나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마도 보려고 본 게 아니라, 불현듯 보였을 것이다. 혹 마지막으로 얼굴이나 한번 보는 것으로 삶에 방점을 찍고 싶었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죽는 순간에마저 자기를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작가는 거울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자신을 그렸다. 그리고 그렇게 그린 그림들이 국립현대미술관 <무제전>에 걸렸다. 원래 제목은 <시시포스 공부>였다. 그리고 금세 그림이 시시포스에 못 미친다는 생각에 제목을 정하지 못한 채 둔 것이 그대로 무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림이 시시포스에 못 미친다? 그렇다면 작가는 시시포스가 뭘 의미하는지, 그 의미가 요구하는 기준이 뭔지 알고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시시포스는 산꼭대기까지 돌을 굴려 올리는 천형을 받았다. 만약 시시포스가 천형을 거부한다면 무슨 일이 생기는가. 철저하게 무용한, 무익한, 무의미한 노동이야말로 삶의 유일한 의미이며, 그 노동을 통해서만 삶이 유의미해질 수 있다는(적어도 노동을 하는 순간에만큼은 삶의 의미를 잊을 수 있다는) 아이러니한 현실을 사람들에게 주지시키는 일이 물 건너가고 만다. 그렇게 물 건너가면 사람들은 여전히 노동이 삶에 의미를 가져다줄 수 있으리라는 착각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게 될 것이다(신성한 노동신화는 청교도주의와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일 수 있다). 철저하게 무용한, 무익한, 무의미한 것이야말로 노동의 본질이다. 그럼에도 노동을 통해서만 삶이 유의미해질 수 있다. 그래도 삶은 의미가 있다는, 아니 삶은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시시포스 신화가 주는 교훈은 이처럼 무용하고 무익하고 무의미한 노동이라는 천형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비극에 있고, 그럼에도 결코 삶의 의미는 주어지지 않는다는(혹 처음부터 삶에 의미 같은 것은 없었다는), 어쩜 이보다 더 궁극적인 비극에 있다.
그 비극에서 비장미가 유래한다. 비록 실패한 혹은 포기한 혹은 극적으로 구출된, 자살 직전에 그린, 자살에 이르기까지 밀어붙여진 것들이 응축된, 아마도 강도로 치자면 정점에 해당할, 어떤 비장미가 작가의 그림에서 느껴지는가. 이 비장미는 숭고의 감정과 통한다. 나의 감정의 용량을 초과하는 것에 맞닥뜨릴 때 오는 감정이다. 그러므로 숭고는 어쩜 나의 감정이 아니고, 나에게 속한 감정이 아니다. 그래서 낯설고 이질적이고 두렵고, 미지의 세계를 어쩜 비의를 슬쩍 엿본 것 같은 호기심과 감각적 쾌감을 동반한다. 그렇게 작가는 호기심과 감각적 쾌감을 동반하는, 낯설고 이질적이고 두려운 것들을 그린다. 그게 뭔가. 거울 속에서 자기를 응시하는 자기와 같은, 바로 그 자기를 그린다. 그래서 내면풍경이고, 심연에로의 하강이며, 미노타우루스이며, 심장이고, 레퀴엠이다. 하나같이 영적 세계(아니면 존재론적 조건 혹은 한계상황)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내면이 그렇고 심연이 그렇고 미로(미노타우루스가 미로 속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로 치자면 자기내면 말고는 없다)가 그렇고 심장이 그렇고 진혼(죽음에 바치는 오마주)이 그렇다.
그렇게 작가는 영적 존재들과 더불어 산다. 청주 산막리에 있는 아랫마을과 윗마을을 오가며 작업실을 차렸는데, 아랫마을에 있을 때는 오랫동안 비어있던 소 외양간을 개조한 작업실에 살았다. 실제로는 비어있었지만 작업실에 있는 내내 작가는 서성이는 소들과 더불어 살았고, 그 소들을 그렸다(<미노타우루스 공부>). 바로 옆 농원에는 알래스카 숫사슴이 있었는데, 곧잘 소나무 가지처럼 웃자란 뿔이 잘려나간 빈 마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작가는 작업실 내내 그 숫사슴과 절망을 함께했다. 흔한 말로 상상력의 비약이나 수사적 표현 운운하겠지만, 작가의 경우에는 실제로 그랬다. 수사적 표현으로 치자면, 작가는 타자의 상처에 감정이입하는, 타자의 절망을 자기의 절망으로 동일시하는 탁월한, 천부적인, 그리고 무엇보다도 따뜻한 심성을 타고났고, 그 심성으로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윗마을로 작업실을 옮긴 지 한참 지나서, 그 터를 자기에게 팔고 서울 아들네로 이사 간 할머니가 자살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할머니의 영정을 그렸다(레퀴엠). 할머니의 그리움이 조금이라도 해소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영정이라고 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작가의 작업실을 찾은 날, 비도 내리고 습했다. 그래서 그런지 작업실 안쪽 벽면 여기저기에 붙여둔 자료들이 모조리 영정처럼 보였다. 알 만한 사람으로 치자면 니체가 있었던 것 같고, 이외에 이러저런 사람들의 초상이며 기사가 있었던 것 같다. 작가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미친 사람 아니면 눈먼 사람도 있었다. 아마도 죽은 사람들일 것이다. 자기 생각에 빠져 있는 사람, 아니면 감각이 고도로 발달한(혹은 감각마비로 인해 오히려 예민한 내면을 갖게 된) 사람들일 수도 있겠다.
그 초상이며 기사들은 하나같이 빛바래고 곰팡내 나는 고문서를 연상시켰고, 먼지와 시간, 빛과 어둠을 재료로 빚어진 영적 존재를 환기시켰다. 그렇게 그들은 미처 그림으로 옮겨지기도 전에 이미 살아있는 것 같았고, 작가는 바로 그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그렸다.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 자기의 자기다움이, 하이데거 식으론 존재의 존재다움이 오롯해지는 느낌? 그 느낌의 대상 혹은 실체는 알고 보면 내면이 외화된 것이어서 감각적 닮은꼴을 넘어서고, 일관된 서사를 넘어서고, 논리의 지향 내지 정향성을 넘어선다. 그래서 작가의 그림은 구축되고 있는 재현으로서보다는 해체되고 있는 재현을 보는 것 같고, 특정의 서사를 지목하기보다는 상호간 이질적이고 무분별한 서사의 다발들을 불러들인다. 어쩌면 작가는 존재란 이처럼 이질적이고 무분별한 서사 다발들의 총체라고 보고, 그걸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Touching the light  300x210cm

< Touch the Ligh t> 종이에 혼합재료 210×320cm 1998

07

1996년 동경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90년대의 한국미술> 전시광경

참다운 존재다움을 찾아서
그렇게 그려진 작가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 의미가 고정된 결정적인 지점으로서보다는 어떤 과정이 느껴지고, 여기서 저기로의 이행이 느껴지고, 정적인 가운데 모종의 불안감이며 불온성을 응축하고 있는 것 같은 긴장감이 감지된다. 불온성? 문명이 변방으로 밀어낸 것들, 이를테면 이성의 관점에서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것들, 경제의 관점에서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인 것들, 에너지의 관점에서 활성과 위험(어쩜 무분별한 생명력?)을 잠재하고 있는 것들, 자연성과 본성, 야성과 야생, 제의와 비의 같은 존재의 원형에 해당하는 것들이 자기를 주장하는 기운이다. 여전히 문명화되지 않은 채 살아남은 숲이 품고 있는 기운이다. 그래서 작가의 그림엔 유독 나무가 많고 숲이 많다. 바로 순례자를 문명화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의미화 이전의 다의적이고 다성적인 원초적 소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무는 숲이다.
그렇게 작가는 사람을 그리고 나무를 그리고 숲을 그리고 동물들을 그린다. 그리고 그렇게 존재를 그리고 사물대상을 그리면서 사실은 외피를 벗겨낸다.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을 벗겨낸다. 무분별하게 흘러내리다 멈춘 물감자국이며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비정형의 얼룩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물대상의 형태를 정의하면서 해체하는 무수한 세선이 바로 이처럼 그리면서 벗겨내는 과정에서 유래한 형식논리를 증언해준다. 벗겨낸다? 그건, 부정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그래서 아닌 것을 벗겨내다 보면 뭐가 보이고 무엇에 이르는가. 자기로 치자면 진아(眞我)가 보이고 진아에 이른다. 존재로 치자면 존재의 존재다움이 보이고 존재의 존재다움에 이른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진아며 존재다움이 거하는 공간으로 치자면 내면 말고는 없다. 그리고 피상적으로만 봐도 외면(혹은 외피)을 벗겨야 내면을 볼 수도 내면에 이를 수도 있을 일이 아닌가. 그렇게 작가는 사물대상과 관련한 고정된 지점들, 이를테면 선입견과 편견, 합리와 상식의 외피를 벗겨낸다. 그리고 감각적 닮은꼴의 외피마저도. 그리고 그렇게 벗겨내다 보면 실제로 내면을 볼 수도 내면에 이를 수도 있는가. 그러나 알다시피 내면은 내면일 뿐, 형태도 색깔도 없다. 다만 공과 허와 무와 적(절대고요)이 있을 뿐. 아니면 온갖 헛된 망상의 아수라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경우이건 그것들은 여하튼 알고 보면 모조리 나에게서 건너간 것이고, 내 쪽에서 이입된 것들이다(色卽示空 空卽示色). 그렇게 작가는 타자를 그리면서 사실은 자기를 그리고 있었다. 어쩌면 주체와 객체가 한 몸인, 상호 연장된 우주적 살(메를로 퐁티)을 그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객체라고 하는 불가능한 기획을 그리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

김 명 숙 Kim Myungsook
1955년 태어났다. 이화여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88년 미국 휴스턴 시립대 미술대학원을 수료했다. 사비나미술관, 금호미술관, 스페이스 몸 등에서 17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서울, 베를린, 시카고 등지에서 열린 그룹전에 참여했다. 현재 청주에 거주하며 작업 활동 중이다.

소년_종이위에 먹물 95x75cm 2013

<무제 1> 종이에 혼합재료 95×75cm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