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 PEOPLE Daniel Buren

다니엘뷔랑 인물 (1)

 철, 프렉시글라스, 접착제 바른 하얀비닐, 거울 217.5×217.5cm 2015

< The grid with 49 squares in frame, work in situ, Seoul NO.6 > 철, 프렉시글라스, 접착제 바른 하얀비닐, 거울 217.5×217.5cm 2015

무한의 영역으로 ‘현장’을 바꾸다

‘인 시튜(in situ)’, 8.7cm로 정확히 구획된 흰색과 원색의 줄무늬. 이는 다니엘 뷔렝하면 떠오르는 일종의 ‘연관 검색어’다. 그의 약력을 보면 거주 및 작업 장소는 늘 ‘in situ’, 즉 현장이다. 70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늘 ‘현장’에 있는 그가 개인전을 위해 서울의 ‘현장’을 찾았다. 313아트프로젝트에서 열리는 〈VARIATIONS, 공간의 미학전〉(6.6~8.8)을 위해 내한한 다니엘 뷔렝을 만났다.

작업에서 공간이 지니는 의미가 중요하다. 이번 전시에서 공간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 점은 무엇인가?
313아트 프로젝트는 크게 두 공간으로 나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전면 유리가 있는 갤러리 앞쪽은 보도와 가까이 붙어 있다. 반면 갤러리의 내부는 전형적인 화이트큐브에 가깝다. 보통 작가들이 내·외부 공간을 철저히 구분해서 막는다든지 공간 내부만을 활용하는 데 비해, 나는 닫힌 내부공간을 막기보다 밖과의 소통을 위해 오히려 구멍을 뚫는 방식을 취한다. 그런데 313아트프로젝트는 건물 입구의 전면유리가 이미 그 구멍 역할을 했다. 그래서 정문에 있는 ‘인 시튜(in situ)’ 작업이 중요하다. 거울을 사용해서 길과 갤러리 안을 연결한다는 의미가 있다. 내부 작업도 거울을 많이 사용해 야외의 길이 내부에 비춰지도록 표현했다. 외부의 길이 갤러리 내부에 있다고 보았다.

‘인 시튜’는 전시기간이 지나면 해체되어 사라지는 현장 작업이다. 최근 인터넷을 통해 이미지만으로 작업을 보는 관객이 늘었다. 이러한 관람 자세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전부터 사진으로 작품을 보는 풍조는 있었다. 여행 할 여유가 없는 학생들이 사진을 통해 작품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잘못됐다. 사진 속 작품과 실제 작품을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사진 이미지로만 보면 아이디어를 얻기 위한 수단 이상은 될 수 없다.

관람객이 확장된 것은 사실 아닌가?
사진이나 영상을 통해 “실제로 가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사진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확산되는 것은 부정적인 결과다. 이미지로만 작품을 기억해서는 안된다. 덧붙여 빠른 속도로 이미지가 전파되는 현상에 대해 말하고 싶은데, 예전에는 나의 작품을 보고 몇 년이 흐른 뒤에 작품을 카피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인터넷에 사진이나 영상을 올린 지 1분만 지나도 영감을 얻거나 혹은 카피 할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실제 작업이 아니라 사진을 보고 카피했다는 점이다.

큐레이팅에 주체적으로 참여한다. 작가와 큐레이터 사이의 개연성에 대한 생각이 궁금하다.
사실 개인전의 경우는 예술가가 기획부터 작품 제작 전체에 관여하기 때문에 큐레이터가 필요 없다. 그러나 그룹전은 다양한 작가와 큐레이터 간의 조율이 중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1970년에 쓴 에세이 〈Fonction du Musée〉에 자세히 서술한 바 있다.

줄무늬에서 흰색과 함께 사용되는 원색을 전시하는 나라의 알파벳 순으로 배열한다고 들었다. 색 배열의 의미가 궁금하다.
50년간 항상 색과 함께 작업했다. 예술가는 ‘비주얼 아티스트’다. 색이야말로 예술가가 시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색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작품의 추함 혹은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색을 사용하지 않는다. 색은 유일하게 말로써 개념 설명이 불가한 구성요소다. 예를 들어 빨간색을 사과색과 자두색 사이 라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오히려 설명할수록 꼬인다. 하지만 생생하게 살아있는 사유를 담고 있는 것 또한 색이다. 어떤 작품이더라도 색은 그 자체만으로 살아있다. 나의 경우, 하나의 색을 사용할 때는 이전부터 어떤 사용체계를 전달하고자 하는 형태가 있다. 그러나 다수의 색을 사용하기 시작하면 이 색들이 새로운 하모니를 구성한다. 작품에 사용하는 색을 전시하는 나라 언어의 알파벳 순으로 나열함으로써 나의 취향을 철저히 배제한다. 같은 색을 쓰더라도 나라마다 다른 오더를 사용함으로써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전달된다. 색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스스로 이야기하고 나는 그것을 펼쳐놓을 뿐이다. 나의 선택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변 사람에게 색의 순서를 골라달라고 할 때도 있다.

당신의 작품은 모더니즘의 거부로 해석된다. 당신의 작업이 꾸준히 변화해왔다고 하지만 큰 그림 안에서는 여전히 이러한 생각이 유지되고 있는것 아닌가?
큰 틀에서 본다면 맞다. 작업을 하면서 더 나은 해결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이 이론을 이어가고 있다. 50년간 작업하면서 나는 특정 사조에 영향을 받았다기 보다 나만의 방식을 고집해왔다. 작업이 객관적으로 지속될 수 있는 이유다. 물론 객관적 지표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작업이 미술사적 연대기 안에 영향을 미쳐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99%의 작가가 근대미술이 추구해온 ‘자율성’을 지닌 작업을 한다. 어떤 화이트큐브에 걸어도 무관한 작업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율성’을 가진 작품은 폭력적일 수 있다. 미술이 ‘자율성’을 갖지 않는 이상 판매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내에서 당연한 순리이다. 나는 1% 속에서 작업한다. 물론 나 또한 작품을 판매하고 있지만 공간과 함께 존재했던 작품을 파는 것이기 때문에 그 감각은 더욱 무겁다. “한때의 그것이었던” 콘텍스트가 함께 이동하는 것이다.

임승현 기자

Daniel Buren 다니엘 뷔렝 프랑스 설치미술가
1938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1960년대 중반 반모더니즘 운동을 주도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1986년 베니스 비엔날레 프랑스관 전시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2005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고 10여 차례 베니스 비엔날레 및 카셀 도쿠멘타에 참가했다. 2012년 파리 그랑팔레 <모뉴멘타전> 2014년 스트라스부르 현대미술관 <Like Child’s Play, Works On-site> 등의 전시를 이어오며 꾸준한 활동을 하고 있다. 6월 10일부터 8월 8일까지 313아트프로젝트에서 개인전을 이어간다.

EXHIBITION TOPIC Yinka Shonibare MBE

< High Tea Ⅲ >(맨 왼쪽) 마네킹, 더치왁스, 패턴천 등 혼합재료 410×122×80cm 2015

나이지리아계 영국 작가 잉카 쇼니바레 MBE의 대규모 개인전 <찬란한 정원으로> (5.30~10.18)가 대구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그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역사를 풍자적으로 표현해 역사의 이중적인 측면과 문화의 혼종성을 드러낸다. 그의 작품은 일본 제국주의를 경험한 한국적 상황과 동시대성을 가지고 있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예술은 마술이자 연금술이다

이필 홍익대 미술대학원 교수

잉카 쇼니바레는 영국이 자랑하는 멀티미디어 작가로서 회화, 조각, 공예, 의상디자인, 사진, 연극, 오페라, 영화 등 다양한 예술 장르를 넘나드는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은 쇼니바레의 국제적인 명성과 작품세계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그가 단순히 영국을 대표하는 현대미술가가 아니라 나이지리아 태생 흑인이자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임을 인지하고서야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복잡한 이야기의 가닥이 풀린다. 작가 입문 시절 흑인이 왜 아프리카 미술을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당황했다. 변호사를 아버지로 둔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나 양질의 교육을 받고 강한 지적 호기심에 자존감도 강했지만, 영국사회에서 그에게는 나이지리아 출신 흑인 작가라는 주변적인 정체성이 부여되었다. 자신의 내면과 외부에서 규정하는 정체성의 불일치에 대해 고민하지만 그는 외부에서 부여하는 정체성을 거부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타협함으로써 예술적으로 승화시킨다.
자신에게 부여된 문화적 인종적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그는 아프리카 문화의 정체성을 작품에 담고자 ‘더치 왁스(Dutch-wax)’ 염색 직물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는 향후 그의 작품에 필수적인 주재료가 된다. 일명 ‘아프리카 천’이라고 불리는 이 직물은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 시장을 겨냥해 인도네시아에서 생산된 면직물인 바틱(Batik)과 유사하게 제조한 것으로 인도가 시장의 매력을 잃자 아프리카로 유입되어 크게 유행하게 되고 이제는 아프리카에서 자체 제작할 정도로 아프리카화한 유럽 제품이다. ‘아프리카 천’은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이라는 것이 허구적인 개념임을 드러내는 문화 혼종(混種)의 실제적인 예로서 문화적 혼종성을 예찬하는 쇼니바레에게는 더없이 적합한 재료이다. 그의 작품은 외부에서 요구하는 아프리카성을 재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규정하는 문화적 정체성의 실체가 얼마나 근원 없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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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Victoria philanthropist’s Parlour >(맨 오른쪽) 더치왁스 패턴천, 카펫, 가구 등 혼합재료 259×487×508cm 1996~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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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rash Willy >(오른쪽) 실물크기 마네킹, 더치왁스 패턴천 등 혼합재료 132×260×198cm 2009

분노? 그런 건 없습니다!
아시아에서 최초로 열리는 대규모 쇼니바레 개인전이라는 점에서 주목되는 이번 전시는 그의 작품이 제국주의를 비판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며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국이었던 한국의 역사적 경험이 그의 작품과 깊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의 작품이 제국주의와 인종차별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냐고 묻자 그는 자신이 분노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대답한다. 그는 과거 유럽의 제국주의가 현재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한 거부할 수 없는 역사임을 인정한다. 나아가 그는 제국주의가 양산한 문화의 혼종성을 진정으로 즐긴다. 그에게 제국주의는 인간의 역사에서 문화가 어떻게 뒤섞이게 되었는지를 탐구할 수 있는 흥미로운 역사적 사례이며, 자신의 성장 배경은 그러한 제국주의가 한 개인에게 적용된 과정이다. 그는 그 과정에서 형성된 문화적 혼종성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적극 수용한다. 제국주의가 양산해낸 문화의 혼종성 시대, 그리고 그것을 환영하는 (후기) 자본주의 시대는, 자신과 같은 흑인 장애인에게 예술의 날개를 달아주었다.
그는 제국주의의 문제에 대해서는 비판과 수용이라는 이중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지만 영국 미술계의 인종차별 문제에는 신랄하다. 1980년대에 그는 해체주의에 열광하고 데리다와 프란츠 파농을 공부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그의 작품 곳곳에 백인중심주의적 역사와 정치에 대한 비판이 들어있다. 그가 영국에서 학교를 다닐 당시 뼈저리게 경험한 ‘차별’은 흑인작가에게 전시와 활동 기회가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가 학교를 졸업하고 작가로서 첫발을 떼려 할 때, 중심무대에서의 활동은 요원해 보였다. 그는 많은 인터뷰에서 1990년대 초 그가 골드스미스를 졸업할 당시 단 한 명의 흑인 작가도 런던의 갤러리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이는 그가 성공을 거둔 후 작품만을 평가하여 작가에게 전시 기회를 주는 대안공간을 연 이유이기도 하다.
어떻게 흑인 작가로서 생계를 꾸려갈지 막막하던 그에게 모델이 된 것은 미국의 페미니즘 미술운동이었다. 그는 미술계의 소수집단인 여성들, 특히 미국 페미니스트들의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그는 페미니스트들의 활동을 모델로 하면서도 지나친 정치성이 예술의 근본적인 목적을 상실하는 경향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정치성을 배제할 수 없다면 예술의 정치적 표현은 형식적으로 아름다워야 한다. 이러한 그의 신념은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사고와 피상적인 문화적 인종적 정체성에 대한 정치적인 질문을 예술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킨 동력이었다. 예술성을 강조하는 그의 작품은 제국주의나 자본주의 같은 사회적 구조나 자신의 신체적 장애에 대한 저항이나 분노보다는 아름답다는 미적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예술가적 기질과 재능을 타고난 그는 모든 인터뷰에서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예술을 통한 재현의 정치학, 혹은 재현의 정치학에서 예술성의 확보임을 강조한다. 쇼니바레에 의하면 작품의 형식미는 관객과 소통하는 창구 구실을 한다. 아름다움을 가지고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인종차별에 대해 비판해야 관객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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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ary of a Victorian Dandy(19.00 Hours) > C 타입 프린트 183×229cm 1998

 필름 14분28초 2005

< Odile and Odette > 필름 14분28초 2005

엄숙한 역사의 무게 덜기
우리가 살고 있는 동시대의 문화적 혼종성의 근원인 제국주의적 역사에 대한 탐구와 비판적 재현은 쇼니바레 작업의 중요한 축이다. 그러나 그는 엄숙한 역사의 무게를 예술적 유머와 위트를 가미해 덜어낸다. 1962년생인 그는 자신을 68세대로 규정하면서 역사를 지나치게 심각하게 받아들인 세대라고 말한다. 그 무거운 역사를 가볍게 공중에 띄울 수 있는 것은 마술사이자 연금술사인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는 영국의 제국주의에서 시작된 영국과 나이지리아 문화의 충돌과 결합에서 잉태된 문화의 혼종성과 자본주의를 후기-식민주의 세대 특유의 거리두기와 유머와 위트로 표현한다. 그의 두 문화의 혼종성에 대한 역사적 인식과 개인적 체험은 광범위하게 전지구적인 관점에서 국가 간, 인종 간의 역학관계를 통찰하게 이끈다. 찰스 황태자로부터 MBE(Member of the Most Excellent Order of the British Empire)상을 기꺼이 받고 그 이후 자신의 이름을 ‘Yinka Shonibare MBE’로 쓰는 점도 문화의 혼종성을 수용함과 동시에 제국주의라는 역사의 엄숙주의를 예술로써 공중에 띄우는 그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의 위트는 관객과의 대화에서도 나타난다. 한 관객이 구체적인 작품 제작 방법을 묻자 쇼니바레는 마술사가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 알려주는 걸 봤냐면서 말해줄 수 없다고 재치 있게 답한다. 역사의 무게를 던 가벼움은 관객에게 오히려 역사의 실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대구미술관 기자회견장에서 본인이 가지고 있는 장애가 작품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쇼니바레는 직접적인 답을 피했다. 자신이 어떻게 팀을 운용하여 작품을 제작하는지 기술적인 문제만 간단히 언급했다. 하지만 수년전 인터뷰에서 같은 질문을 받은 그는 당당하게 본인의 모습을 닮은 목발 짚은 18세기 귀족의 상을 제작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흑인이라는 제약과 몸의 장애를 가지고 있는 그는 예술의 연금술을 통해 누구라도 되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일까. 현실을 넘어선 그 지점에서 예술이 시작된다는 믿음은 인간 쇼니바레의 신념이며 그를 지탱하는 힘이다. 그의 몸은 갈수록 약해지고 말의 속도마저 느려지고 있다. 그러나 몸이 약해질수록 그의 작품 규모는 커져가고, 쾌활한 유머와 위트를 가미한 그의 작품세계는 더욱 깊고 넓어진다. 그가 앞으로 마술과 연금술 같은 예술의 날개를 달고 현실의 제약을 벗어나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세계를 어떻게 시각화할지 더욱 기대된다. ●

SPECIAL ARTIST 김윤신

한원 (15)

아르헨티나의 자연을 담은 작가 김윤신은 80의 고령에도 청년작가보다 에너지가 넘친다. 전기톱으로 통나무를 잘라 조각하고, 햇살 머금은 빛깔로 캔버스를 가득 채운다. 오로지 조각의 재료에 매료되어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터를 잡고 오랜기간 작업해온 작가 김윤신의 화업 60년을 되짚어 보는 대규모 개인전이 6월 11일부터 7월8일까지 한원미술관에서 이어진다. 1세대 여성 조각가의 작품에 담긴 영혼의 울림에 귀를 귀울여 보자.

맑은 영혼이 엮은 생명의 얼개, 김윤신의 회화와 조각

최태만 국민대 교수

6월 11일부터 7월 8일까지 한원미술관에서 〈영혼의 노래·김윤신 화업 60년전〉이 열린다. 1980년부터 상명여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김윤신은 1983년 겨울 아르헨티나를 여행하면서 그곳의 자연과 문화, 사람에 매료돼 아예 학교를 사직하고 그곳에 정착했다. 그가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후 진화랑(1988), 현대갤러리(1990), 동아갤러리(1995), 박여숙화랑(2003) 등의 초대를 받아 국내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으나 2007년 국민일보갤러리에서 회화를 중심으로 개인전을 가진 이후로 보면 이번 개인전은 근 8년 만에 한국에서 개최하는 전시다. 그것도 팔순을 맞아 조각과 회화를 엄선하여 보여주는 전시라는 점에 각별한 의미가 있다. 전시 개막을 앞두고 부에노스아이레스 플로레스 지역에 있는 김윤신미술관의 김란 관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김윤신과 함께 연구실을 방문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한국현대조각사를 연구하며 1970년대 그의 나무 조각 자료를 수집한 바 있던 나는 그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리며 그를 만났다. 팔순의 원로작가임에도 활달한 그를 직접 대하였을 때 평생 작업에만 전념해온 한 예술가의 강한 아우라를 느꼈기 때문에 다른 분들은 김윤신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그중에서도 1988년 진화랑 개인전에 이일이 쓴 글이 인상적이었다. 이일은 1960년대 중반 파리에서 김윤신을 만났을 때를 회상하며 “단발머리에다 블루진 바지차림의 그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언뜻 분간하기 힘들었고 행동거지가 또한 그러했다”고 썼다. 과연 그러했다. 내가 만난 김윤신은 작업에 전념하다 방금 작업실에서 출발한 양 수수하다고 표현해도 과장이 아닐 차림이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해 말하면서 ‘어느 때부턴가 나는 작업을 시작하기 전 생각 속의 잡념을 모두 지워버리고 마음과 머릿속을 깨끗이 비우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문득 떠오르는 게 있다. 조각가 최종태 역시 어느 날 나에게 ‘이 나이가 되니 머릿속의 전쟁이 사라지고 생각이 투명해졌다’라고 말했다. 평균 수명이 늘어난 요즘이야 80의 나이가 무색하게 활발하게 활동하는 어르신을 일러 ‘노익장’이라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공자 때만 하더라도 나이 70에는 ‘마음먹은 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하여 종심(從心)이라 했으니 80쯤 되면 온갖 집착과 잡념에 얽매이지 않는 경지에 이르는 모양이다. 어쨌든 나에게 김윤신은 투명한 정신을 지닌 원로예술가로 비쳤다. 그런 맑은 영혼은 그의 회화작품에서 깨끗하고 밝은 원색으로 표현된다. 그의 회화에서 특징적인 이 원색의 향연은 팜파스 대평원의 녹색과 푸른 하늘, 광활한 자연에서 성장하는 다양한 나무와 풀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가 하면 그의 화면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지그재그의 선은 산수를 단순한 형태로 표현한 고구려 고분벽화를, 그리고 적·청·황·흑·백색은 한국의 전통 오방색을 연상하도록 유도한다. 이 색채와 형태들로 직조된 화면은 말 그대로 낙원의 이미지이자 마음의 풍경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자연에서 추출한 모티프가 분명하게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화면을 분할하는 면과 면을 연결하는 곡선의 율동은 이 작품들을 서정적인 색면추상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그러나 이 아름답고 우아한 회화는 그냥 순수한 추상화이거나 색채로 표현한 서정시가 아니라 작가의 신앙고백과도 같은 것임을 다음과 같은 작가노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나의 회화작품은, 창세기부터 하느님의 말씀으로 모든 만물의 생명이 잉태된 순간부터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까지, 영원한 삶의 나눔을(合과 分)주제로 하였다. 나눔의 본질은 사랑이며 그 깊은 내면에는 원초적 생명력이 뿌리 깊게 박혀있다. 그것을 향한 내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영혼의 노래, 그 영혼의 소리는 다양한 색상의 파장으로 선과 면을 이루어 사랑과 나눔을 표현하였다.”

어쨌든 나로서는 김윤신의 회화에서 볼 수 있는 특정한 형태를 입체로 표현하면 그의 조각이 될 것으로 믿는다. 단일한 것이 아니라 수평과 수직의 형태가 결합된 형태 속에 재료 자체가 지닌 결과 다른 결을 더 붙인 조각의 경우 회화와의 관련성이 더 높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조각이 앞선 시기에 제작된 경우가 많으므로 조각의 입체적 구조가 회화에서 평면적인 구성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추측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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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안〉알가로보 50×47×45cm 2014

아르헨티나에 정착하다
1959년 홍익대학교 조각과를 졸업하기 전해에 열린 제7회 국전에서 〈아침>으로 특선을 하며 조각가로서의 전도가 양양했던 그는 홍익대 미대 재학 중 구상인체조각을 추구하던 김경승으로부터 로댕의 조형을 터득했다는 평가를 받는가 하면 미국에서 철 용접기법을 배우고 돌아와 용접 실기실을 개설한 김정숙으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용접기법을 이용한 철조작업을 발표한 것은 학교를 졸업한 이후부터였으며 사진자료만 보더라도 한때 이 새로운 기법에 깊이 매료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철조작업보다 앞선 초기 작업이 민간신앙으로부터 영감을 받았음을 알 수 있는 반면 철조에서는 재료기법의 특성 때문인지 형태를 구축하려 했음이 두드러진다.
1964년 파리로 유학을 가서 파리국립미술학교를 다닐 때는 한국의 박을 이용한 부조와 판화에 전념했다. 귀국 후 1970년대부터 그의 작업은 목조에 집중된다. 특히 긴 통나무를 사용해 마치 돌탑처럼 표현한 조각에서는 토템을 현대조각의 논리로 소환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그가 민속적인 것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음을 십자가의 형태에 부적에서 볼 수 있는 조형적인 형태를 해체, 재구성하여 새긴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관심은 그가 파리 유학시절 제작한 판화에서도 나타난다. 자신의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구축할 즈음인 1973년 그는 권영우, 김구림, 김종학, 김창열, 송번수, 이우환, 정건모 등과 함께 제12회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참가했다. 당시로서는 작품만 출품했지만 이것이 남미에 대한 그의 관심을 자극했는지 모른다. 그로부터 10년 후 그는 아예 아르헨티나로 떠났다. 1974년에는 서울대 미대 출신인 이양자, 안성복 등과 의기투합하여 한국여류조각가회 창립에 앞장섰다. 여성조각가들의 활동무대가 상대적으로 제한적인 미술계에서 ‘한국미술의 발전을 도모하고 여류조각가의 권익을 옹호하며, 여류조각가의 국내외 활동과 상호간 활발한 협조를 증진’시키려는 목적으로 1974년 1월 12일에 창립한 이 단체는 그해 9월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33명의 창립회원이 출품한 작품들로 창립전을 개최했다. 당시 청주사범대학에 재직 중이던 김윤신은 초대 총무로 활동하며 한국 전통목조건축의 가구(架構)인 공포(栱包)를 연상시키는 작품을 출품했다. 같은 해에는 대학의 한 해 후배인 정관모가 회장으로 활동한 한국청년작가회도 창립했다. 이러한 단체에 왕성하게 활동하던 김윤신은 1983년 12월 학기말을 이용해 조카가 살고 있던 아르헨티나로 떠나 한 달간 여러 지역을 여행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기왕 아르헨티나를 방문하였으니 관광만 하지 않고 대표적인 미술관에서 전시를 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타진해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지에 도착하면서 그는 광활한 대지와 때 묻지 않은 자연 경관, 특히 유럽이나 미국에서 보지 못한 재료인 단단한 재질의 나무가 지천에 널려있음을 발견하고 아르헨티나에 흠뻑 매료되었다. 그래서 다짜고짜 주아르헨티나 한국대사관을 찾아간 그는 이복형 대사에게 아르헨티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대사와 공보관의 주선으로 로베르토 델 비자노(Roberto del Villano)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립미술관장을 만난 것은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김윤신으로부터 전시를 하고 싶다는 말을 들은 비나노 관장은 먼저 작품부터 보자고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의 빈민촌에 임시로 마련한 작업실을 방문한 비자노 관장이 부에노스아이레스식물원의 야외공간을 전시장소로 주선하여 시립미술관 초대로 1985년에 열린 전시가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자 그는 귀국을 포기하고 아예 아르헨티나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다. 그 후 그는 국립미술관(Palais de Glace)을 포함하여 아르헨티나의 여러 도시의 주요 미술관은 물론 멕시코의 국립예술의궁전 등에서 작품을 발표하며 한국에서 온 중남미의 여성조각가이자 화가로서 자기 위상을 구축했다.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후 김윤신은 한국에서는 구하기 힘든 알가로보, 팔로산토, 케브라쵸와 같은 나무를 재료로 한 조각을 제작했다. 팔로산토는 전기톱을 사용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단단한 재질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무겁고 단단한 나무를 자르고 켜는 과정이 마치 성직자의 수행과도 같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김윤신의 조각은 대체로 수직적인 것이 많다. 그것은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수직적으로 성장하는 나무의 생명력에 대한 그의 예찬이 추상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피안〉연작의 경우 축은 수직이지만 그것을 횡으로 감싸고 있는 고리와도 같은 형태가 많은 큐브로 구성돼 단순함 속의 복잡함, 질서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 규칙적이지만 그것을 단순 반복하지 않음으로써 작품에 운동과 리듬을 부여한다. 겉으로 드러난 형태(shape)가 작품의 옷이라면 그곳에 새겨진 요철과 빗금은 조각의 피부이자 혈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내부로 우리의 시선이 틈입할 수 있는 공간의 여유를 허락함으로써 그의 작품은 정중동(靜中動)을 획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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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노스아이레스 작업실에서 작업 중인 김윤신

성장하는 생명에의 예찬
1987년부터 브라질에서 구한 오닉스와 같은 준보석의 돌을 사용한 작품도 발표하고 있다. 톱으로 자른 표면의 무늬는 이 돌에 축적된 시간의 궤적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나무와 다른 정서, 즉 무한에의 동경, 대지의 알인 바위가 품고 있는 시간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나아가 그의 조각은 수직적이면서도 수평의 구조가 교차하고 있기 때문에 건축적으로 비치기도 한다. 수직으로 직립한 두 개의 나무를 세워놓은 작품은 당간지주를 연상시키고, 나무의 표면에 새긴 사선의 흔적은 대지의 주름을 연상시킨다. 회화에서 보여준 낙원에의 동경이 조각에서는 그 영토를 차지하고 있는 나무들로 향한 생명예찬으로 나타난 것이다. 단순하면서도 변화가 있는 형태와 재료의 질감을 존중하면서 작가의 의지가 깃들어있는 표면의 작업의 흔적은 그의 생각이 자연 너머의 절대자를 향하고 있음을 추측게 만든다. 그것은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초월을 향한 수행의 기록인지 모른다. 아마 그에게 노동에의 헌신은 기도의 또 다른 방법일 것이다. 잡념을 비우고 작업한다는 그의 말, 그것이 최근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한다. 그는 전기톱으로 나무의 표면에 상처를 내면서도 그것을 학대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와 일체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가 추구하는 ‘합이합일(合二合一)’은 그래서 왠지 불교의 불이(不二)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아가 장자의 만물여아위일(萬物與我爲一)의 경지를 추구한다고 할까. 그 궁극에 조물주를 향한 신앙고백이 있을 것이지만 나에게 그의 작품은 맑은 영혼이 엮은 생명의 얼개로 보인다.
불이(不二)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더 나아가면 장자의 만물여아위일(萬物與我爲一)의 경지를 추구한다고 할까. 그 궁극에 조물주로 향한 신앙고백이 있을 것이지만 나에게 그의 작품은 맑은 영혼이 엮은 생명의 얼개로 보인다. ●

김 윤 신 Kim Yunshin
1935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파리국립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1970년부터 14년간 홍익대 상명대 성신여대 등에 출강했다. 1984년 아르헨티나로 이민, 정착해서 활동하고 있고 2008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김윤신미술관을 개관했다. 아르헨티나와 서울 등지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열었고 단체전에 참여했다.

ARTIST REVIEW 김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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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 Break oneself > 182×102cm(각) 1988, < The spirit age・nsa1994607 > 180×88cm(각) 1994

사진은 재현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현실을 보는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며 현대미술의 중요한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김대수는 1980년대에 회화, 판화, 설치 등 타 매체를 적극 활용해 사진의 경계를 해체하는 작업을 선보여 한국 사진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끌었다. 6월 6일부터 8월 19일까지 고은컨템포러리사진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The New Wave in Korean Photography 1988-1998 DAE SOO KIM>을 통해 다양한 사진적 실험을 통해 내면 세계를 표현한 김대수의 초기 작업을 다시 만날 수 있다.

그 때를 아시나요?

최건수 사진비평

나보다 년식이 십년쯤 앞선 사람들은 영화 ‘국제 시장’을 보았다. 그리고 보신 분들은 눈물샘을 자극하는 영화의 이미지에 몸을 맡겼다. 오래 묵은 기억 속에 가라앉아 있는 전쟁과 가난이라는 유산은 그리 쉽게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영화는 관객의 눈물로 스스로 증명했다.나 같은 7080 초노는 영화 ‘세시봉’을 선택했다. 학교 수업을 빼먹고 명동 맥주집이나 하드 락카페를 전전했던 세대들이 선택한 영화들이다. 주말이면 통기타 하나 달랑 매고 교외선 기차에 의탁하여 일영이나 송추로 향했다. 거기서 봉두난발 장발을 휘날리며 미친 듯 고고와 트위스트를 췄다. 그 시절의 낭만이고 모던의 몸짓이었다.내가 낭만과 모던에 투신했을 때, 김대수는 미국으로 유학(1981)을 했고, 내가 1980년 내내 군사정권에 맞선 데모대 뒤꽁무니를 따라 다니며 반독재 구호를 외칠 때, 홀연히 귀국(1987)하여 대학 훈장(1988)이 됐다. 그리고 어느 날 한국 사진의 ‘새로운 물결’의 한 아이콘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게 1988년 워커힐 미술관에서 열린 <사진 새 시좌전>이다. 이 전시는 사진가 구본창이 기획했는데, 결과적으로 기존의 한국 사진을 근본부터 뒤흔들 정도로 파괴력이 컸다. 당시 이 전시장을 찾은 내 입장도 그랬다. ‘이것도 사진인가?’라는 의문으로 시작해서, 대체 유학을 가면 이런 사진을 배우는 것인가라는 생각에, 이제까지 보고 해온 사진을 전면적으로 점검해 볼 이유가 생긴 것이다. 여하튼 이 전시회에 참여했던 사진가들(구본창, 김대수, 이규철, 이주용, 임영균, 최광호, 하봉호, 한옥란)은 이후 승승장구하고 한국사진의 전위대 역할을 톡톡히 했던 것은 곱씹어 볼 일이다.(이규철은 작고)그 이후, <11월 한국사진의 수평전(1991/1992/1994)> 은 이 전시의 확대 재생산 성격이 더 강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1988년부터 1994년까지의 한국 사진에 밀려 온 새 물결은 무엇일까? 그게 ‘바람 찬 흥남부두’가 2015년에 ‘국제 시장’으로 환유되듯이 전통적 의미의 사진이라는 도그마에 환몰 되었던 족쇄가 비로소 풀리고 그것들을 일시에 뽕짝 수준으로 밀어낸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김대수의 초기작 같은 이미지에 충격을 받고 열광하는 사진가가 있다면 그 또한 아마 그 의식의 밑바닥에는 여전히 ‘국제 시장’ 언저리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한 증거이다. 오늘날은 지지고 볶는 것이 얼마나 현란한지. 또한 얼마나 빠르게 바뀌는지. 그 수준에서 다시 김대수의 초기 사진을 대하니, 어쩌랴 그만 영화 ‘세시봉’이 생각나고, 그의 사진을 ‘세시봉’과 등가의 위치로 자리매김하고 싶은 것이다.‘그 때를 모르시는 분’들은 의아해 할 것이다. 대체 무엇이 어쨌다는 것이야? 인화지 위에 오일 페인팅을 하고 그것을 다시 긁어내는 것이 뭐 그리 신기하다고? 동판 위에 사진을 인화하고 부식하여 보여주면 사진이 아니라고? 미술 판에서 성공 못하고 대접 받지 못하니까 사진판에 기웃 거린다고 비아냥거리는 사람이 있다면, 재현과 복제라는 미덕에 기댄 ‘바람찬 흥남부두’ 세대가 틀림없다.조금만 관심 기우려 세계 사진의 흐름을 살펴보면 변화는 당연한 것이다. 이런 사진의 경향은 소위 만드는(make) 사진이라고 알려져 있다. 기록과 재현 사진 반대 축에 진영에 속한다. 사진 초기부터 끊임없이 타진되었고 1980년대에 들어서 미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적으로 확산 되었다. 이 시기는 김대수를 비롯한 유학 1세대들의 유학 시기와 겹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변화 현장에서 그 흐름에 합류했던 것이다. ‘사진은 사진이다.’ 라는 구시대를 지나 ‘사진이 예술이 되고 이미지’가 되는 새 시대에 호응했다. 물론 만드는 사진도 표현 방법에 따라 구성 사진(Fabricated photography), 연출사진(staged photography), 손질된(Manipulated photography), 창조사진(Invention photography), 계획사진(set-up photography) 등, 다양한 이름을 얻게 된다. 변화는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순수한 모던사진은 지루해졌고, ‘라이프’ 혹은 ‘룩’같은 화보잡지의 폐간과 맞물려 다큐멘터리 사진은 용도 폐기 될 위험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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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생 이후・nba1990103 >(오른쪽) Archival pigment print 120×150cm 1990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기 위한 사진적 실험
이런 환경 변화에서 스스로 물어 볼 수밖에 없었던 질문이 ‘사진이 사진이어야 하는가?’일 것이고, 혼돈 속에서 사진가들은 스스로의 작품을 통해서 답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사진은 기계적 재현의 한계를 극복하고 예술적 표현의 도구로서 점검 받게 되었다. 사진의 역사 내내 꿈꾸어 왔던 세계가 실현 가능해 진 것이다. 기록의 용도로부터 벗어나 적극적인 표현 도구로 그 지평이 확장 된 것이다.김대수의 초기 사진은 이 지점에서 만날 수 있다. 1988년 귀국 후 첫 개인전이었던 <창조 그리고…>는 지금은 없어진 갤러리 한에서 열렸는데, 그 때 나는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던 것을 기억한다. “표현 방법이 새롭다. 그러나 더 궁금한 것은 이것이 보는 이로 하여금 어떻게 읽혀지기를 원하는가?” 그는 말했다. “자유롭게…, 아이들은 모두 부모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부모 생각대로 크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외적 요인 속에서 스스로 한 독립 된 인간으로 성장하게 된다.”작품은 작가가 만들었으나, 작품의 행로는 작품이 스스로 결정한다는 뜻으로 들었다. 이미지가 품은 다층적 발화의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이다. 귀국 후 초기 십년간은 세계 사진의 흐름 속에 있었다. <빛으로 탐구>(1983) 와 <창조 그리고…>(1985), <태초에>(1990), <탄생 이후>(1990), <영의 시대>(1994)> 그리고 <지혜의 땅>(1996)이 그것이다.이것들의 주제는 ‘생명’ 혹은 ‘죽음’ ‘영(靈)’ 같은 인간의 기본적 문제와 그가 몸담은 기독교적 관심에 천착하고 있었던 까닭에 묵직했다. 그는 이런 이미지를 만드는데, 찍는다는 사진적 행위 만에 의존하지 않았다. 물감을 바르고, 수없이 많은 선을 그어보고, 바른 물감을 걷어내는 예술 행위들의 흔적들을 작품 속에 고스란히 남길 수 있었다. 순간을 잡아내는 사진가의 모습이 아니고, 스스로 해야 할 예술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위해 몸의 예술을 사진에 녹여내는 것과 같았다. 그것은 기존의 사진이 미치지 못하는 지점을 언급한다는 측면에서 신선했다.<사진 새 시좌전> 이후 25년이 지났다. 오늘 날의 한국 사진은 거침이 없다. 좌고우면하면서 눈치 보지 않는다.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한다. 그 씨앗들은 뿌려 준 것이 세시봉 시대의 모던 사진가들의 형식실험이 밑거름이 아닌가 싶다.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그 시절의 대표아이콘인 김대수의 작품을 다시 보게 되어서 반갑고 즐거운 것이다. ●

김 대 수 Kim Daesoo
1955년 태어났다. 홍익대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하고 미국 파슨스 디자인학교 사진학과에서 학사, 프랫 인스티튜트대학원 사진학과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1983년 뉴욕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21회의 개인전과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현재 홍익대 미술대학원에서 사진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ARTIST REVIEW 방정아

2015__낯선고요

오른쪽 페이지 <낯선 고요> 캔버스에 아크릴 91×116.8cm 2015

2015_the Hal

< The Hall > 캔버스에 아크릴 181.8×259cm 2015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절묘하게 표현하는 작가 방정아가 부산 공간화랑에서 개인전 <기울어진 세계>(4.22~5.5)를 열었다. 작가는 하나의 스타일에 안주하지 않는다.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이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태도에 주목하고 삶의 리얼리즘을 여실히 드러낸다.

납작한 세계에 납작하게 매달리기

조선령 부산대 교수

방정아의 작업을 이야기할 때면 하나 하나의 작품을 개별적으로 보기보다 작가가 통과해온 시대의 두께들이 작품들과 공명하는 지점을 다소 거창하게 고찰하는 작업을 먼저 해야 할 것처럼 생각된다. 지금까지 작가의 작품을 지켜봐온 사람이 느끼는 개인적인 의무감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역사적 임무가 항상 비평적 임무에서 시작된다는 벤야민의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하나의 작품 속에서 ‘시대의 불씨’와 같은 것을 발견하는 것이 비평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단순히 작품을 시대의 반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작품이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시대의 공기를 예민하게 포착하고 그것을 가시화하는 지점을 포착하는 작업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방정아의 1993년작 <바다 끝에 선 여인들>과 2015년작 <The Hall>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시대의 ‘공기’와 관련된 지점에서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80년대’라는 명칭이 아직 낯설지 않을 무렵 그려진 <바다 끝에 선 여인들>은 첫눈에도 시퍼런 결기로 뭉쳐있다. 날카로운 선과 강한 붓자국, 신경질적이지만 적극적이고 다채로운 색채, 무게있는 볼륨감, 그리고 화면을 꽉 채운 채 당당하게 서 있는 인물들의 배치가 보인다. 마치 뒤러의 <네 사람의 사도>를 연상시키는 이 구도는 거친 삶을 살아온 익명의 여인들의 육체에 기념비적 엄숙성을 부여한다. 화면 중앙에 비어 있는 공간을 둠으로써 인물들을 좌우로 나누는 조형적 배려를 하고 있음에도 결국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인물들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인물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구심적인 에너지는 캔버스 틀 바깥으로 공간을 확장시킨다.
반면 이번 공간화랑 전시에 출품된 <The Hall>은 비어있는 공간이 없는데도 빈 공간이 무수히 발견된다. 아니 공간 그 자체가 스스로를 비워내는 것으로, 아니면 더 이상 공간이 아닌 어떤 것으로, 혹은 공간의 입체성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것으로 변화하는 순간을 포착하는 듯하다. 볼륨감은 극소화되고 세계는 납작해졌다. 선은 더 이상 강렬하지 않고 뭉그러지고 으깨진 채 어디론지 방향 모를 곳으로 흘러내린다. 인물들은 마치 인체 데셍의 기초를 무시하듯 삐뚤게 묘사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파스텔톤이라고 하는 중성적이고 온화한 색채를 사용했지만 아크릴 물감의 무딘 금속성 느낌이 극대화된 화면은 형상을 만들어내는 기능을 포기한 채 제멋대로 발라진 물감들로 인해 무기력한 둔중함으로 응고된다. 이 같은 변화는 같은 전시에 출품된 다른 작품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낯선 고요>에서 몇 개의 거친 붓질로 단순하게 나누어진 무의미한 면들은 역시 공간이 삭제된 납작한 세계를 보여준다. 박제된 사슴의 텅 빈 눈과 같은 쓸모없는 잡동사니들이 이 세계가 카드로 세워진 위장물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있다.
두 작품 사이의 차이는 회화라는 매체의 표현 가능성에 대한 작가의 실험이자 어쩌면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했을 어떤 이행의 과정이며, 시대의 공기를 포착하는 변화된 감수성의 차이일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오늘날 세계는 납작해졌다. 아감벤의 말처럼 더 이상 어떠한 가능성도 없는 이 극단적인 현실성의 사회는 단순하고 평면적이고 노골적이다. 모든 것은 제자리에 꽉 차 있어서 동시에 아무런 의미도 소유하지 못한다. “대체가능성”이 모든 잠재성의 공간을 차지했다. 앞뒤와 두께를 가진 풍경 대신 들어선 깊이 없고 비밀 없는 장면들, 생명을 상실한 듯한 비유기적인 인물들은 그대로 오늘날의 세계를 보여주는 징후들이다. 이 세계는 한편으로 사적인 것을 말소시켰지만 동시에 공동체 역시 삭제시켰다. <바다 끝에 선 여인들>에서 빈 공간은 인물들을 결합시키는 역할을 했지만, <The Hall>에서 그러한 결합은 없다. 인물은 원근법 법칙에 들어맞지 않게 제멋대로 배치되어 있으며, 일관된 크기도 없고, 적절한 장소도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 한 개의 공간이 아니라 여러 개의 오려붙인 공간, 아니 차라리 공간의 부재라고 해야 할 어떤 것이 발견된다.

〈아일러브커피〉(맨 오른쪽) 캔버스에 아크릴 97×130.3cm 2014

〈아일러브커피〉(맨 오른쪽) 캔버스에 아크릴 97×130.3cm 2014

중심이 비워지는 풍경
두 작품 사이에 있었던 작가의 전시들 중에서, 필자는 2008년 대안공간 풀에서 개최된 개인전 <세계>를 특별히 중요한 것으로 꼽고 싶다. 이 전시가 <바다 끝에 선 여인들>과 <The Hall>의 차이를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방정아는 정확한 원근법적 공간 혹은 널찍한 하나의 장소를 등장시켰는데, 이러한 공간의 제시는 단지 그 공간이 와해되는 지점을 포착하기 위한 것뿐이었다. 작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중심이 비워지는 풍경 혹은 공간이 스스로를 말소하는 지점의 다른 이름임을 이 전시에서 보여주었다. 작가는 언뜻 보기엔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 듯한, 그러나 한쪽 구석에서 발생한 보이지 않는 파국이 은밀하게 중심을 삼키고 있는 소름 끼치는 풍경들을 보여주었다. <재개발구역>에서 그것은 하수구에서 흘러나온 검은 액체로, <자연사>에서는 한쪽 구석에 널브러진 동물의 사체로, <안 보이는 사람>에서는 불길한 녹색 연기로, <세계3>에서는 땅을 잠식하는 보라색과 회색의 덩어리들로 표현되었다. 모래사장, 풀밭, 도로, 하수구, 연기 등의 형태를 띤, 그러나 사실은 더 이상 공간이나 형상이 아닌, 흘러내리면서 화면을 지우는 이 덩어리들은 방향과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입체적 공간을 지워버리면서 세계를 납작하게 만드는 어떤 산사태 같은 것으로 묘사된다.
우리는 그렇게 공간이 지워진 세계를 <기울어진 세계전>에서 만난다. <기울어진 세계전>의 작품들은 더 이상 그린다는 행위의 결과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작품들은 마치 캔버스 표면 위에 기름처럼 얹혀서 화면을 기울이면 한쪽으로 흘러내릴 듯한 미끌미끌한 껍데기 같다. 두께 없고 방향 없고 중심 없는 이 그림들은 시대의 납작함과 기묘한 방식으로 공명한다. 아니, 기묘한 방식으로 저항한다. 납작한 세계 속에서, 아니 세계에 ‘매달려’(납작한 세계 속에는 공간이 없기 때문에 그 속에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살기 위해서는 ‘납작 엎드리기’가 필요하다. <네…>와 같은 작품에서 보이는, 조롱하는 것 같기도 하고 체념하기도 하는 것 같기도 한 태도는 형식에서도 반향된다. 묘사가 필요없다는 듯이, 공간과 볼륨과 색채가 다 귀찮다는 듯이 납작 엎드려 있는 그림. 이러한 그림은 아감벤 말마따나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기”의 사례, 그리고 이러한 ‘비선택’이 가능하게 하는 역설적인 저항의 사례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

방 정 아 Bang Jeongah
1968년 태어났다. 홍익대 회화과와 동서대 디자인&IT 전문대학원 영상디자인과를 졸업했다. 1993년 갤러리 누보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19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2002년 부산청년작가상과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미술상을 수상했다. 현재 부산에서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ARTIST REVIEW 백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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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 기우제 > 점토 바세린 3.5×12m 2015

화면에 구축된 대상을 표현하는 재료는 바로 그 대상에서 추출했다. 열에서 전기, 다시 열로 변환하는 에너지의 순환을 통해 생명이 탄생한다. 수분을 상실하여 쩍쩍 갈라진 흙 사이는 바세린겔로 메워 더 이상의 건조를 막는다. 이렇듯 백정기가 구축한 작품은 비가시적인 운동의 기운을 구체적 장치와 행위로 보여준다. 모두 그의 개인전 <Mind Walk>(두산갤러리, 6.3~7.4)이 이야기하는바, 백정기가 작품에 녹여낸 ‘수행’의 과정을 살펴보자.

의사(擬似, 意思)적인 공감의 미술

민병직 대안공간루프 바이스디렉터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상대의 조건이 되고 그렇게 인연이 되어 서로에게 복잡, 미묘하게 영향을 끼치면서(연기론(緣起論)) 중층적으로 이어진다(중중무진(重重無盡))는, 불가(佛家)의 가르침처럼 이번 백정기 개인전도 우연하게도 가뭄이라는 지금의 심각한 자연재해를 떠올리게 해서 기묘한 느낌이 앞섰다. 가뭄으로 타들어가는 대지처럼 보이는 <기우제> 때문인 듯싶은데, 물론 작가가 이 작품을 지금의 현실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킨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런 마음을 담은 기우제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든 것이다.
전시와는 상관없어 보이는 바깥 현실과의 이러한 연결들은 사실 외적인 것이고, 개인적인 느낌에 불과한 근거 없는 것들이겠지만 세상사란 어쩌면 이렇게 근거 없는 것일지라도 마음의 동(動)함에 따라 현실에 특정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가뭄으로 세상이 타들어가니 자연 앞에 무력한 한낱 인간으로서 그 비과학적인 효능효과와 상관없이 기우제라도 지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고, 다시 말해 근거 없는 믿음이라도 가지고 싶은 심정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한 간절한 마음이 쌓여야 세상의 어떤 변화들이 생기는 법일 테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작업을 굳이 동양적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그 바탕에 서양의 이성 혹은 과학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혹은 그 한계에 대한 인식이 작동한다고 할 수는 있겠다. 물질과 정신, 인간과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구획, 분리하는 사유의 흐름들 말이다.
작가는 이러한 이항대립(binary opposition)의 설정들을 문제시하고, 그 분리 이전의 통합된 원형 상태를 지향한다. 곧 세상 만물이 서로 교류, 융합되어 있어 끊임없이 상호간에 영향을 끼치면서 돌고 도는, 혹은 주름 짓고 펼쳐지는 그런 사유체계에 대한 선호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작가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서구의 과학적인 방법론과 테크놀로지를 차용한다. 서구의 과학적 사유의 한계를 드러내고 비판하기 위해 다시 과학적인 방법론을 ‘전용(appropriation)’하는 셈인데, 그런 면에서 일종의 의사(擬似, pseudo)과학, 혹은 주술이나 연금술에 가깝고, 과학적 원리의 엄밀한 작동보다는 특정한 의미의 연결이나 발현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결국은 예술적 실험이나 행위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작가의 의중이 드러나는 작업이 <기우제>다. 전시장 한 벽면을 흙으로 바르고 흙과 함께 벽면에 접착시킨 물이 증발하면서 생겨난 균열된 틈을 바세린으로 메운 이 작업은 작가가 지향하는 바를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비가 오기를 소망하는 행위에 불과한 기우제는 인간의 어떤 행위나 물건들이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다는 (잘못된) 생각과 믿음으로, 그러한 힘을 이용해서 목적을 달성하려는 일종의 주술 행위이다. 비/반과학적 행위일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대지의 갈라진 틈을 메울 수 있도록 상징적 염원과 소망으로써, 대자연을 치유하고 순환케 하는 각별한 의미를 담아내는 행위인 것이다.
작가 역시 이러한 의미에 더해 자신의 작업 일반을 함축하는 (예술적) 대상의 갈라진 틈을 메우려 한다. 이때의 갈라진 틈은 실재 작업에서 갈라진 물리적 틈일 수도 있겠지만 대지와 자연의 갈라진 틈, 나아가서 물질과 정신,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적인 간극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이러한 간극과 틈을 메우려는 행위는 그렇기에 분리되고 구획된 것들을 연결 접속하고 봉합함으로써 대자연의 원리가 서로 순환하여 흐르도록 하는 근원적인 행위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자연 속 물의 역할처럼 말이다. 이런 이유로 작가의 작업에서 특히나 물을 소재로 한 작업이 많은데, 2008년 <Pray for Rain: Mhamid>는 사막화가 진행되는 모로코에서 작가 스스로 샤먼이 되어 한국의 전통 기우제의 요소를 접목한 퍼포먼스 작업이고, 2010년 <Sweet Rain>은 전시공간에 사카린을 섞어 단맛이 나도록 한, 이른바 단비가 내리게 한 관객 참여형 설치미술 작업이다. 이때의 작업들도 실재의 ‘비’라는 물리적인 현상보다는 대지를 순환케 하는 상징적 촉매재로, 물의 특정한 의미를 발현시키는 데 더 관심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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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화기: 촛불과 흙> 달걀, 초, 식물, 열전소자, 백열램프, 유리, 나무, 스틸, 혼합재료 가변설치 2014

의미의 확장과 공감의 전파
작가는 이처럼 어떤 현상의 물리적인 작동 자체보다는 그 물리적 작동과 연동되어 발생하는 의미의 발생과 구현에 더 비중을 둔다. 의미의 구동장치로 테크놀로지를 ‘활용’하고 ‘전용’한 셈이다. 이러한 의미의 발현은 다시 더 많은 의미로 연결, 확장되기도 하는데, 이번 전시에서 물 대신 바세린을 사용한 점은 물(바소르, wassor)과 기름(오레온, oleon)이라는 서로 다른 것들을 융합시키는 바세린의 어원상 의미도 있겠지만 화상으로 인해 신체적 고통을 치유해야 했던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과도 연결되는 식이다. 앞서 말한 의미들에 치유라는 의미가 더해지는 것이다. 2007년 <Vaseline Armour> 연작부터 사용한 바세린은 작가가 생각하는 치유의 의미를 잘 드러낸다. 바세린으로 장갑, 투구, 갑옷을 만들어 전신을 보호하는가 하면 건물의 갈라진 틈을 보수하려 했던 이 작업은 작가의 치유 개념이 개인적인 치유인 동시에 사회적인 치유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피부 보습제에 불과한 바세린을 상처를 치유하는 만병통치약으로 사용한 것은 ‘플라시보 효과’ 같은 비과학적인, 하지만 어떤 믿음 때문일 것이다. 주술일 수도 있겠다. 작가 역시 자신의 작업이 가진 이러한 주술적인 면모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이번 전시의 <접촉주술: 새싹, 개나리, 진달래, 영산홍> 연작과 <접촉주술: 16개의 보> 작업은 작품명 자체를 접촉(감염)주술(contagious magic)로 설정했으니 말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서로 연결 융합되어 있으니, 떨어진 후에라도 어떤 기운에 의해 서로 영향을 미치고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유감주술(homeopathic magic)’로 명명된 작업도 있는데, <유감주술: 매화>는 작가의 아버지와 함께 협업한 신작으로 예부터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매화를 전기가 통하는 전도성 먹으로 그리고 라디오 전파를 송출하게 안테나 구실을 하게 함으로써, 매화의 신묘한 기운을 도처에서 받을 수 있도록 한 작품이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그러한 기운과 에너지를 받느냐 못받느냐 아니라 그 기운을 확산시키려는 마음, 곧 공감(empathy)의 차원일 것이다. 믿음이나 소망 말이다.
유사한 것은 유사한 것을 발생시킨다는 유감(모방)주술은 사실 잘못된 미신이거나 그 자체로 과학적 타당성, 유효성도 없는 것이겠지만 그 기저에 깔려 있는 간절한 마음이나 선용(善用)의 차원이 더 중요하지 않나 싶다. 기우제 역시 마찬가지다. 비나 물을 바라는 마음을 습한 속성을 유지하게 하는 바세린으로 대체하여 의미를 확장시키고 안테나처럼 널리 전파되는 매화그림으로 매화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널리 공감시키려는 그러한 마음, 혹은 시도 자체가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다시 시도된 <무제: 부화기와 촛불> 작업도 마찬가지이다. 촛불의 열로 전기 에너지를 만들어 계란을 병아리로 부화시키는 가시적인 기계적 작동과 장치에 앞서, 간절한 염원을 상징하는 촛불로 밤의 불길한 기운을 몰아내고 새벽을 알리는 닭을 탄생케 하려는 그 (엉뚱하기만한) 의도가 의미를 갖는 것이다. 작가가 활용하는 과학이나 테크놀로지는 이처럼 마음을 경험하고, 가시화함으로써 이를 관객과 공감하려는 그저, 한낱 장치일 뿐이다. 그렇게 작가는 대립된 세상의 간극과 틈을 연결, 교류, 융합시키려는 엉뚱하지만 의미 있는 실험과 경험들을 통해 과학, 주술, 연금술과 비슷하지만 결국은 그 무엇도 아닌, 자신만의 의사(擬似, 意思)적인 공감의 미술을 펼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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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類感)주술: 매화> 한지, 전도성 잉크, 송신기, 라디오, 혼합재료 가변크기 2015 전파를 수신할 수 있는 잉크로 그린 그림을 안테나로 삼아 송신기에 연결하고 전시장 내부의 라디오에서 전파를 수신한다

백 정 기 Beak Jungki
1981년 태어났다. 국민대 입체미술과를 졸업했다. 영국 첼시 미술학교에서 순수미술을 수료하고, 영국 글래스고 미술학교 순수미술과(석사)를 졸업했다. 국내 및 슬로바키아 등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 국내외 다수의 기획전과 그룹전에 출품했다. 현재 서울에서 작업하고 있다.

 

EXHIBITION & THEME 허영만 – 창작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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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만의 <오! 한강>(1988, 왼쪽)과 허영만의 원작 <닭목을 비틀면 새벽은 안온다>를 오마주한 이동기의 <95_크래쉬>(1995, 오른쪽)

모든 것이 만화의 소재다

만화가 허영만의 40년 만화 인생을 조명한 전시 <허영만 – 창작의 비밀>이 4월 29일부터 7월 19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린다. 허영만은 15만 장의 원화와 5,000장이 넘는 드로잉을 그렸으며 <각시탈>, <날아라 슈퍼보드>, <비트>, <타짜>, <식객> 등 그의 작품 대다수가 영화, 애니메이션, 드라마로 제작돼 한국 대중문화의 대표적인 콘텐츠 크리에이터로 입지를 굳혔다. 이번 전시에서 오마주 작업을 선보인 작가 이동기와의 대담을 통해 만화와 미술의 경계를 떠나 문화의 보편적인 지점을 주목해본다.

이동기(이하 이) 어린 시절 이야기로 대담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여수 출신이시죠.
허영만(이하 허) 어릴 때 매일 바다만 보고 살았죠. 특별히 다른 애들과 다르게 논 기억은 없고, 장난감은 직접 만들었어요. 예를 들어 칼을 만들면 목재소에 가서 나무를 잘라다가 못질해서 칼집까지 제대로 만들었죠. 나무가 워낙 약해서 잘 부러졌지만 만드는 게 재미였죠. 서부영화에서 카우보이들이 들고 다니는 권총모양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도 하고, 팽이치기, 연날리기 등 남들 노는 거 다했어요. 초등학교 때 만화 <코주부삼국지>에 나오는 그림을 트레싱지로 열심히 따라 그렸던 게 생각나네요.
김용환 선생의 작품이죠.
네. 지금은 돌아가셨죠. 중학교 때 한 친구가 부산으로 이사를 갔다가 다시 여수로 왔는데 부산에 있는 동안 만화가에게 그림 수업을 제대로 받고 온 거예요. 그때까지만 해도 만화 그릴 때 먹을 직접 갈아서 그렸어요. 그 친구랑 가까이 지내면서 만화를 많이 그렸죠. 고등학교 때는 대학 가려고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2학년 때 아버지께서 사업을 실패하시는 바람에 대학진학이 어려워졌어요. 그날부터 입시공부는 그만두고 만화만 그렸죠. 미대에 가서 화가가 되려고 했는데 좌절되고 나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만화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1966년 1월 고등학교 졸업하고 그 다음 날 서울로 올라와서 박문윤 선생의 문하생으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선생의 작품 활동이 뜸해지자 화실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졌죠. 서울 온 지 6개월 되었을 때인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했어요. 그래도 선생이 내 실력을 인정해주셔서 한동안 선생과 하숙을 하며 둘이서 팀으로 일했는데, 하숙비도 제대로 못 버니까 저를 순정만화로 유명한 엄희자 선생에게 보내셨어요. 순정만화는 그리기 싫었는데 꽃도 그리고 여자 눈도 크고 반짝반짝 빛나게 그렸죠. 그렇게 8개월이 지났을 때 이향원 선생께서 자기 밑에서 일하라고 연락을 하셨어요. 그 분의 그림체는 마침 내가 원하는 스타일과 비슷했기 때문에 기꺼이 그쪽으로 옮겼죠. 자고로 좋아하는 그림 그리는 선생 밑으로 가야지 밥 먹여준다고 아무한테나 가면 안 돼요.
저도 어릴 때 이향원 선생의 만화를 많이 봤는데 동물이 등장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내가 그린 것도 많지요. 하루는 선생이 나보고 ‘훨씬 잘 그릴 수 있는데 왜 이것밖에 못 그리느냐. 네 마음대로 그려봐라’고 하더군요. 이후 내가 이향원 선생 작품의 주요 부분을 맡아서 그리게 되었어요. 그 당시에는 월급을 타면 명동에 있는 외국서적 파는 데 가서 일본 만화, 미국 마블 코믹스 등을 사서 열심히 연구했죠. 그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미국에서 출간된 전쟁 만화 시리즈가 있었는데 정말 뛰어난 작품이었어요.
스타일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미국이나 일본 만화 영향을 많이 받으셨나요?
일본 만화 영향은 많이 받았어요. 미국 만화는 그림 위주라서 일본 만화처럼 세심하게 연출하는 만화가 아니에요. 일본 만화는 이동기 선생도 <아토마우스>를 하셔서 잘 아시겠지만 데즈카 오사무, 지바 데쓰야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당시 국내에서는 지바 데쓰야의 <하리스의 회오리바람>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내가 작업을 하던 하숙집 옆방에 그 작품을 그대로 베껴서 주간지에 싣는 팀이 있었어요.
옛날에는 일본 만화를 그대로 베낀 만화가 많았죠.
네. 그랬어요. 옆방에 있다 보니 서로 왕래가 많았고, 덕분에 일본 만화를 많이 보게 되었죠. 이향원 선생과 작업한지 8년째 되는 해에 독립했습니다. 그런데 1970년대 만화판의 구조가 이상했어요. 1960년대부터 신촌 지역의 만화 출판사 7곳을 통합한 합동문화사가 전국의 대본소와 전속계약을 맺고 타 출판사의 책을 받지 못하게 해 만화시장을 독점했죠. 그에 대한 대항으로 1970년대 초반 한국일보사가 소년한국도서라는 자회사를 설립해 합동문화사의 독점시장에 진출했는데, 결과적으로 서로 연합해 만화시장을 반으로 나눠 독점한 거에요. 겉으로 보기에는 안정적인 시기인 것 같지만, 너무 안정적이다 보니 만화가들이 굳이 공들여 만화를 그릴 필요 없었죠. 대강 그려서 정해진 권수만 채워주면 규정된 부수가 유통되니까요. 그렇다 보니 만화가 재미없는 시절이었어요. 만화시장이 독점되면서 신인들이 등단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죠. 단 하나 유일하게 소년한국도서에서 주최하는 만화공모전이라는 게 있었죠. 저는 1974년 2회 수상자로 선정돼 만화가로 공식 데뷔를 했습니다. 데뷔 3개월 만에 <각시탈>을 발표했는데 그 작품이 큰 반응을 일으켜 인기작가가 되었어요. 하지만 원고료는 전혀 오르질 않아 막막하더라고요. 그런데 <각시탈>의 인기로 당시 <무쇠탈> <색시탈> 등의 아류작들이 많이 나왔어요.(웃음) 한창 <각시탈>을 연재하고 있는데 하루는 도서잡지윤리위원회에서 불러서 갔더니 <각시탈> 때문에 만화시장에 탈 투성이라면서 인제 그만 그리라고 하더라고요. 황당했죠. 하지만 당시에는 위원회의 심의필을 받아야 시중에 유통할 수 있었는데 심의를 내 주지 않으니 <각시탈>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죠. 그때 결혼해서 애가 둘이 있었어요. 당시 주변에 만화 잘 그리는 동료들은 전부 애니메이션 쪽으로 전향했죠.
그때가 우리나라가 일본 애니메이션의 하청작업을 주로 할 때였나요?
인건비가 싸니까 외국에서 일거리를 마구 들여왔죠. 나도 애니메이션 회사를 한 10개월간 다녔어요. 아침에는 내 만화를 그리고 점심 먹고 출근해 애니메이션 원화를 그렸죠. 주중에는 하루를 반으로 쪼개어 일하고 토요일, 일요일은 만화만 그렸어요.
쉬는 날도 없이 일주일 내내 일을 하셨네요.
요즘도 쉬는 날은 없어요. 근데 애니메이션 일을 하면서 제일 고민이었던 것이 내가 보기에는 납득할 수 없는 이상한 그림을 그대로 그려야 하는 거에요. 그보다 잘 그려도 안 되고 못 그려도 안 되고, 여러 사람이 함께 참여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통일된 그림이 나와야 하는 거죠. 어렵게 애니메이션을 병행하고 있는데, 1979년에 일본 만화 <캔디 캔디>가 국내에 불법 복제돼 엄청난 인기를 끌었죠. 만화가 인기가 있다 보니 여러 출판사에서 해적판을 동시에 마구잡이로 출간했어요. 그러다 <캔디 캔디> 한 작품만으로는 수익이 안 나니까 출판사들이 한국 만화가들에게 눈을 돌리게 된 겁니다. 그러면서 인기 있었던 작품을 재판(再版)하고 복간하게 된거죠. 이때부터 새로운 출판사도 생기기 시작했어요.
<캔디 캔디>의 인기를 계기로 정체되었던 한국 만화 출판시장이 순식간에 확장된 거군요.
그렇죠. 나도 더 이상 애니메이션 일을 할 필요가 없었어요. 이후 만화잡지 《어깨동무》 편집장의 요청으로 연재를 시작했는데 반응이 좋았죠. 연재를 하면서 동료 작가인 김영하, 고유성, 김철호 등을 잡지사에 소개했고, 함께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어깨동무》의 부록으로 연재되었던 <태양을 향해 달려라>를 너무 재미있게 봤습니다. 어린이 야구만화인데 세계선수권대회 나가서 우승하는 내용으로 끝이 났죠.
부록이 32페이지의 단행본 형식이었으니까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죠. 지금도 <태양을 향해 달려라>를 얘기하는 사람이 많아요.
저희 또래 사이에서 빅히트 작품이었습니다.
선생님 작품을 보면 다른 작가들과 비교해서 연출의 리듬감에 독특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연출방법에 1~5단계의 강도가 있다면 5단계는 절대 쓰지 말라고 말합니다. 5단계를 한번 써 버리면 그 다음을 이어갈 수가 없어요. 그리고 5단계가 계속되면 그것은 액센트가 아니죠. 예를 들어 어머니가 죽는 장면에서 주인공이 찢어지게 절규하지 않고 ‘어머니가 죽었다’ 한 줄 쓰고 아무 관계없는 배경을 그리고 그냥 덤덤하게 넘어가는 거죠. 주인공은 슬프지만, 독자들은 안 슬프거든요. 슬픔은 강요되지도 않고 강요해서도 안 돼요. 그게 절제이고 자제인 거죠. 그렇지 않으면 독자들의 몫이 없어지죠.
5~6년 전에 소설가 이윤기 선생과 연출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선생은 작가는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만 하면 되지 독자를 왜 이해시키려고 하는지, 독자의 몫을 왜 남겨두는지 묻더군요. 나는 그 의견에 반대해요. 낚시를 할 때 일정한 간격을 두고 물고기를 꼬여야 합니다. 낚싯바늘 따로 있고 물고기 따로 있으면 낚시가 되나요. 최소한 근접 거리에 가서 당겨야지 독자들이 따라오죠. 난 이 거리를 어느 정도로 두느냐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합니다. 그동안 수많은 연출을 해왔고 사람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한 방식을 반복하고 있을 거라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그리면서 이전에 그린 느낌이 들면 소름이 끼쳐요. 반복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선생님 작품의 리듬을 따라가 보면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실제로 영화를 많이 보시고 참고 하시는지요.
영화 많이 보죠. 연출할 때 영화를 많이 참고했습니다.

[이미지자료1]각시탈초판1권

<각시탈>(1974) 초판1권 속표지

[이미지자료2] 무당거미

<무당거미>(1980) 원화

새로운 환경에 맞춰 진화하는 허영만
제가 좋아하는 또 다른 작품이 <쇠퉁소> 인데요. 완성도가 굉장히 높은 작품이었어요.
<쇠퉁소>는 사실은 <각시탈>을 못 그리게 해서 나온 작품이었어요. <각시탈>과 도입부도 비슷하고 상황 설정도 비슷합니다. <각시탈>을 몇 년 뒤에 다시 그린 것이나 마찬가지죠.
<쇠퉁소>의 한 에피소드에서 늑대를 묘사한 장면이 너무 뛰어나 감탄하며 본 적이 있습니다. 저도 미술을 했지만 동물 그리기는 굉장히 어렵더라고요.
고등학교 3학년 때 서부만화를 보고 그림 연습을 많이 했어요. 총도 많이 그렸지만, 서부만화에는 말이 꼭 등장하죠. 그때 말 그리기 연습을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당시 토니 장이라 불리던 장경국 선생이 말을 굉장히 잘 그렸는데 그분의 그림을 밤새 베껴 그리는 날도 많았죠. 일단 네발 달린 짐승을 그릴 줄 알면 다리 부위만 조절하면 다 그릴 수 있어요.
같이 활동하셨던 다른 만화가들과 지금도 교류가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대본소 만화를 할 때는 자주 만났는데 신문, 잡지에 연재하면서 만날 시간이 없어졌어요. 그렇다 보니 지금은 유대가 거의 없어요. 노는 방법이 달라서 그런 것 같아요. 나는 대인관계 폭이 굉장히 넓은 편인데 지금은 등산, 헬스, 골프, 요트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죠. 이들이 언젠가는 꼭 도움을 줘요. 야구만화인 <태양을 향해 달려라>도 그렇게 나왔어요.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만화를 둘러싼 환경이 계속 변해왔는데요. 최근에는 웹툰이 활성화되었고요.
많이 변했죠. 만화 말고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뀐 것은 어마어마한 변화죠.
지금 전시되고 있는 영상을 보면 종이에 펜으로 그리지 않고 태블릿으로 그리시던데.
여전히 펜에 대한 향수가 있어요. 컴퓨터가 대세니까 태블릿으로 그리지만 나는 예쁘게 잘 안 그려지더라고요. 지금은 몇 개의 포털사이트에서 만화시장을 장악해 작가들에게는 사업해서 원고료를 나눠주고 독자에게 무료로 공개하는 구도죠. 그것이 옳은 것인지는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웹툰으로 괄목할 만한 히트작이 나온 게 윤태호의 <미생> 하나뿐이에요. 그래도 저변은 있으니까 윤태호 같은 만화가가 계속 나와줘야 소위 만화 붐이 일어날 수 있어요. 앞으로 그런 작가들이 나올 수 있도록 시장을 만드는 것이 포털사이트, 만화가 등이 해야 할 몫이죠.
요즘에는 만화가 드라마, 영화로도 많이 제작되는데요. 선생님의 작품도 여러 편이 영화화됐는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원작자로서 드라마나 영화가 잘되길 바라죠. 영화 <식객>도 제작자가 처음에는 10편까지 하겠다고 했는데 결국 2편으로 끝났어요. 그런 면은 아쉬움이 있죠.
작품 제작에도 긴밀하게 관여하시나요.
관여 안 해요. 딸 시집보내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일단 시집가면 그집 분위기에 맞춰서 살아야지 간섭하는 건 예의가 아니죠.
이번 전시를 보니 여행하시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많더라고요. 작가들이 여행을 하면 작품에 영향을 많이 받던데 선생님은 어떠신지요. 여행하시면서 생각이 바뀐 적도 있었나요.
몇 년 전 출판사에서 만화 <꼴>을 그려보라는 제안을 받았어요. 관상은 미신에 가까운 거라서 명확한 주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처음에는 거절했죠. 그런데 에베레스트 등반을 하다가 베이스캠프에서 갑자기 그 만화가 생각났어요. 재미있는 소재라면 뭐든지 해야지 미신이냐 아니냐가 무슨 상관있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다음 날 위성전화로 출판사에 바로 전화를 했죠.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곧바로 관상학 전문가인 신기원 선생을 찾아갔어요. 선생에게 “얼마나 공부를 해야 사람 얼굴이 보입니까”하고 물었더니 3년이 걸린다고 하는 거예요. 만화 그리는 데 3년 투자하는 건 무리인 것 같아 뭉그적거리니까 선생이 하시는 말씀이 “공부를 하든 안 하든 3년은 간다”는 거예요. 그 얘기를 듣고 그럼 해야겠다는 생각에 매주 금요일 7시부터 10시까지 3년 반을 공부했죠.
한 작업을 준비하는 데 3년 반을 투자하시다니 대단하시네요.
공부한지 2년됐을 때 연재하기 시작했어요. 데이터는 계속 쌓이니까요. 독자를 좀 더 내 곁에 끌어들이려면 내가 독자에게 뭔가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할 수밖에 없어요.
조금 전에는 연출하는 단계에 관해 얘기하셨는데, 독자와의 소통은 만화나 순수미술 등 장르 구분 없이 보편적으로 중요한 문제인 것 같네요. 그동안 하신 작품 중에서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 어떤 것을 꼽는지요.
출세작인 <각시탈>과 만화로 풀어내기 힘들었던 이데올로기 만화 <오! 한강>, 그리고 내가 제일 재미있게 그린 작품은 <망치>예요. 작가 스스로가 재미없으면 독자는 금방 눈치채요. 그리고 제일 열심히 작업한 <타짜>, <식객>. 워낙 작업을 많이 하다 보니 좋아하는 작품이 몇 개 됩니다.
그럼 아쉬움이 남는 작품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들깨 이빨>과 <무당거미>를 제대로 끝맺지 못해 아쉬움이 큽니다.
마지막으로 지금 계획하시는 작품은 어떤 것이 있나요.
지금 《중앙일보》에 <커피 한잔 할까요>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민이 요즘 젊은 사람들이 신문을 안 본다는 겁니다. 10여 년 전 <식객>을 연재할 때와 다르게 인지도가 영 떨어지네요.
30대가 종이신문을 거의 안 보죠.
문제는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다 보면 자기가 선호하는 것만 뽑아서 보니까 다른 분야는 전혀 모르게 되고 말죠. 문화 다양성이 떨어지고 있어요. 일단 연재를 시작했으니 열심히 마무리지을 생각입니다. 그리고 음식 만화를 했으니 앞으로는 돈 얘기를 해보고 싶어요. 돈 번 사람과 재산을 잃은 사람얘기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거죠. 그리고 3년 전부터 만화일기를 쓰고 있는데 계속할 거예요.
훗날 만화일기가 선생님의 작업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하고 방대한 자료가 될 것 같습니다. 앤디 워홀도 40대 후반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해서 병원에 실려가기 직전까지 쓴 일기가 책으로 묶였는데 전화번호부 두께 정도 됩니다. 그 작가를 이해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지요.
만화일기는 고은 선생의 《바람의 사상》이라는 책을 보고 시작했어요. 3년 동안 22권 그렸으니 앞으로 30년 그리면 200권 나오겠네요.

진행 정리・이슬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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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구단>(1985) 설치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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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발표한 허영만 만화를 총망라한 아카이브 설치광경. 이번 전시 총감독을 맡은 작가 한원석은 허영만의 ‘손’에서 영감을 받은 설치작품(왼쪽 아래)으로 전시장 도입부를 구성했다.

허 영 만 Huh Youngman
(본명 : 허형만) 1947년 출생했다. 1974년 소년한국도서 제2회 신인만화공모에서 <집을 찾아서>로 데뷔했다. <각시탈>(1974), <오! 한강>(1988), <날아라슈퍼보드>(1989), <비트>(1994), <타짜>(1999), <식객>(2003), <꼴>(2008) 등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으며, 현재 《중앙일보》에 <커피 한잔 할까요?>를 연재하고 있다.

이 동 기 Lee Dongi
1967년 출생했다. 홍익대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3년 온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일민미술관, 갤러리2, 현대갤러리 등에서 25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1994년 ‘아톰’과 ‘미키마우스’를 결합한 ‘아토마우스’를 처음 발표했으며 이후 대중문화 속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SPECIAL ARTIST 남춘모

작가 남춘모는 선 그 자체로 공간을 표현하기 위해 오랫동안 다양한 실험을 펼쳐왔다. 캔버스에 입체적인 선을 구현해 회화에 깊이 있는 리듬감을 부여하고, 점과 선을 입체적인 형태로 표현하기도 했다. 독일 쾰른과 한국 청도에 각각 작업실을 두고 활발한 활동을 선보이는 작가는 최근 리안갤러리 서울(5.7~6.20)을 비롯해 독일 갤러리 2곳에서 동시에 개인전을 개최한다. 반복적인 노동을 통해 한국적 손맛을 보여준 남춘모의 작품세계를 주목해본다.

2011년 대구미술관에서 열린 개관특별전 에 출품된 남춘모의 작품

2011년 대구미술관에서 열린 개관특별전 에 출품된 남춘모의 작품

제3의 ‘질(質)을 향하여

윤진섭 미술비평, 시드니대학교 미술대학 명예교수

바야흐로 한국의 ‘단색화(Dansaekhwa)’가 세계 미술계에 입성했다. 영국에서 발행되는 《Frieze》는 필자를 포함, 미시건 대학의 조앤기 교수, 작년에 단색화전을 기획한 바 있는 뉴욕 소재 알렉산더 그레이 어소시에이츠 갤러리의 공동 큐레이터인 샘과 틸(Sam & Till)의 논고가 실린 라운드 테이블을 특집으로 보도했다. 뿐만 아니라 대만에서 발행되는 중화권의 대표적인 미술잡지 《뎬짱(典藏:ARTCO)》은 단색화에 대한 필자의 글을 싣고 곁들여 한국 단색화 1세대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소개했다. 이 일련의 보도는 지난해 미국에서 발행되는 《Art Asia Pacific》의 단색화 특집에 이은 것으로 단색화에 대한 해외 언론의 높은 관심을 반영한다.
해외 미술언론의 이처럼 높은 관심과 열띤 취재 경쟁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단색화에 관한 국내 미술계의 태도이다. 단언하자면 현재 몇몇 화랑이 주도하는 단색화 붐은 그 초점이 주로 판매에만 국한돼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 없지 않다. 이는 일본의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유파인 ‘구타이 그룹’과 ‘모노파’가 세계미술사에 등재된 사실에 비춰볼 때, 한국의 단색화가 용의주도하게 전파되지 않는다면 등재 자체가 자칫 좌초될 수도 있다는 우려에 기인한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단색화에 대한 이론적 조명과 판매가 병행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또 한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자면 단색화의 조명이 김기린, 권영우, 박서보, 윤형근, 이우환, 정창섭, 하종현 등 주로 전기 단색화 작가들에 집중되고 있는 점이다. 국내의 메이저 화랑을 중심으로 일고 있는 이러한 편향적 움직임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단색화의 행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된다. 즉, 현재 한국의 미술계에서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후기 단색화 작가들의 활동에 대한 무관심은 모처럼 찾아온 단색화 열풍을 식혀 말 그대로 한때의 바람으로 그칠 수 있다는 우려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계승과 심화의 관점에서 보자면 화랑계의 관심과 더불어 단색화에 대한 비평계와 미술사학계의 학문적 접근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 바로 지금이 아닌가 한다.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왕성하게 활동하는 남춘모는 후기 단색화 작가군에서 대표적인 작가이다. 필자는 이미 수차에 걸쳐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 글을 쓴 바 있기 때문에 이번 논고에서는 그의 줄 이랑 작품의 의미를 소개하고 글의 후반부에서 작업의 방향을 대폭 전환한 근작에 대해 기술하고자 한다.
남춘모는 1970년대 단색화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세계를 펼쳐나가는 작가이다. 특히 그의 작업은 입체회화 내지는 부조회화라는 측면에서 방법적으로 여타의 작가들과 차별화된다. ‘ㄷ’자 형태의 나무틀에 천을 감싸 마치 주조하듯이 제작되는 남춘모의 작품은 가히 ‘부조 회화’라고 부를 만하다. 그것은 일정한 패턴과 골격을 지닌다. 캔버스의 프레임에 평행을 이루는 작품의 세로형 이랑들은 캔버스의 표면으로부터 도드라짐으로써 그림자를 생성한다. 2차원 평면을 부정하고 3차원 공간으로 촉수를 뻗는 이러한 형태의 작업 선례는 프랭크 스텔라의 릴리프 작업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남춘모의 경우는 제한된 프레임 안에서 ‘몸성’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보다 집중적인 미적 태도를 보여준다. 즉, 프랭크 스텔라의 초기 변형 캔버스 작품이 캔버스의 프레임을 따라 일정한 선을 반복적으로 그어 나간 반면(“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다”(“What you see is what you see”-Frank Stella)), 남춘모는 그러한 회화적 관례와는 별개의 선상에서 유미적(aesthetic) 차원으로 접근하고 있다.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서양인과 동양인이 서로 다를 수 있음은 바로 이러한 시각적 관습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는데, 가령 2012년 <한국의 단색화전>(국립현대미술관)을 위한 국제심포지엄에 참가한 《Art in America》의 편집장 리처드 바인의 견해와도 유사하다. 당시 발제에 나선 리처드 바인은 “한국의 단색화 작품들이 왜 이렇게 한결같이 아름다운가”고 질문을 던진 뒤, 이는 실험을 중시하는 서구 아방가르드 전통에 비춰볼 때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는 의견을 피력했던 것이다. 이처럼 문화적 배경이 서로 다른 평자들 간의 상이한 견해의 차이는 과연 어느 지점에서 화해를 이룰 것인가?

 2014년 부산 갤러리 604에서 열린 개인전 광경

2014년 부산 갤러리 604에서 열린 개인전 광경

물질과 마음이 맞닿은 어느 지점
필자는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단색화에 대한 국제적 논의가 바로 이러한 화해의 지점으로 나아가는 도정이라고 생각한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가치에 대한 탐구》의 저자인 로버트 M. 피어시그의 관점을 주목한다. 동양의 ‘미학적 요소(낭만적 유형)’와 서양의 ‘이론적 요소(고전적 유형)’, 소위 ‘합리적 이성’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감을 극복하고 이를 통합할 수 있는 제3의 ‘질’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는 논의의 중요한 근거로 과거에 한국에서 본 성벽을 예로 들었다. 그는 한국에서 본 성벽이 아름다웠던 이유는 그것이 기술공학에 의존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성벽을 쌓은 사람들의 ‘대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방식’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즉, 한국인의 ‘자기 초월의 마음 상태’와 그것을 유도하는 방식에 주목하고, 그 원인으로 ‘자신과 일을 분리하지 않는’ 마음의 자세를 들었던 것이다. 그는 마침내 “총체적인 해결책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고 단언하기에 이른다.
남춘모의 부조회화와 프랭크 스텔라의 초기 줄무늬 회화 사이의 차이점도 바로 이러한 동서양 간 사고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 곧 삶의 태도에서 빚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작화(作畵)를 둘러싼 전기 단색화 작가들의 일반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주지하듯이 남춘모의 캔버스 속 이랑들은 프랭크 스텔라의 초기 줄무늬 회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논리적이지 않다. 남춘모 작품의 날 선 이랑들은 마치 한국의 성벽을 구성하는 돌들이 푸근한 느낌을 주듯이, 천의 보푸라기들이 느껴질 만큼 불규칙적이며 푸근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이는 한국의 단색화 작가들 작품에서 느껴지는 보편적 특징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한국의 단색화에 내재된 어떤 특수한 ‘미적 질’이다.
남춘모는 최근에 단색의 원형과 줄 오브제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이는 그가 1990년대 이후 오랜 기간 추구해 온 줄 이랑 작품에서 벗어나 일련의 수제(手製) 오브제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일련의 작품들은 파편화된 사각 입방체의 조합 이후에 변모된 시각을 보여주는 것으로써 일단 캔버스 프레임을 떠났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남춘모가 시도하는 오브제 작품은 크게 두 종류로 구분된다. 하나는 원형의 것으로 이는 레진에 돌가루를 섞은 것이고, 로프를 연상시키는 오브제 작품은 굵은 철사에 석고가루를 천에 묻혀 바른 후 색을 입힌 것이다. 색은 청색, 적색, 흰색 등 극히 제한돼 있다.
원형의 작품이건 로프형의 작품이건 공통점은 기존의 남춘모 작품이 그렇듯이 모서리 부분이 정밀한 마감질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번 작품들에서도 역시 약간 거친 듯한 표면 질감이 두드러진다. 원형 또한 표면이 매끄러운 완벽한 원이 아니라 재료의 물질감이 돋보이는 거친 표면을 유지하고 있으며, 원반의 가장자리 또한 울퉁불퉁하게 조성돼 있다. 이 점은 로프 작업에서도 마찬가지로 두드러진 특징이다. 특히 로프 작업은 마치 로프를 둘둘 말아 벽에 걸어놓은 것처럼 우리 눈에 익숙한 자연스러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그것은 필경 우리의 삶 속에서 온 것처럼 보인다. 이 작업이 끝나는 지점은 과연 어디인가? 서양의 미니멀 작가들, 가령 프랭크 스텔라의 줄무늬 회화는 끝나는 지점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작도된 선을 따라 물감이 묻은 붓으로 칠할 때 칠을 다하면 끝이 난다. 그래서 예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남춘모의 작업의 끝은 물질과 마음이 맞닿게 될 시간의 어느 지점이다. 작가는 그 시간의 끝을 미리 추측할 수 없고 일과 정신이 만족할 만한 합일의 상태에 이르렀을 때 끝이 난다. 또한 이는 전기 단색화 작가들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보편적 특징이기도 하다.
로프를 연상시키는 남춘모의 작품은 플라스틱 파이프의 기계적이며 매끄러운 표면질감과는 판이한 느낌을 준다. 자세히 보면 매우 거칠고 울퉁불퉁한 표면 질감을 지닌 그것은 마치 탯줄처럼 자연의 상태에 가깝다. 그것은 자연을 지향하는 행위, 즉 자연을 향한 ‘마음’의 작용의 발로이다. 그래서 그것은 ‘마음’이 질료에 옮겨 붙어 물질도 정신도 아닌, 피어시그의 용어를 빌리면 제3의 ‘질’을 지향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언뜻 보면 남춘모의 작업은 한국 고유의 ‘대충주의’ 내지는 ‘적당주의’의 산물 같다. 한국인 특유의 독자적인 심성을 배태한 이 특유의 행동에는 그러나 그 속에 자연을 향한 ‘마음’이 담겨 있다. 남춘모는 왜 원반의 끝을 매끄러운 기계적 선으로 마감하지 않았는가? 왜 로프의 표면을 말끔하게 다듬지 않았는가? 나는 그의 마음 어딘가에서 이것에 대한 생래적인 거부가 일어났다고 본다. 합리적 이성과 동양적 직관 사이의 갈등을 넘어 양자를 통합하려는 미학적 의지가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 꿈틀댔다고 보고 싶다. 그리고 그것은 피어스그가 언급한 것처럼 ‘자기 초월의 마음의 상태’가 질료에 육화돼 나타난 모습 그대로인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남춘모의 작업에서 미래 한국 미술의 미학적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에 출품된 남춘모의 작품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의 단색화>에 출품된 남춘모의 작품

남 춘 모 Nam Tchunmo
1961년 출생했다. 계명대 미대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9년 대구 예맥화랑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39번째 개인전을 개최했다. 청도와 독일 쾰른을 오가며 활발한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현재 독일 본 갤러리 쿤스트라움21(4.17~5.29)과 베를린 안도 파인아트(4.30~6.19)에서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ARTIST REVIEW 김남표

〈Instant Landscape-Traveler#33〉 캔버스에 혼합재료 130.3×162.2cm 2014

〈Instant Landscape-Traveler#33〉 캔버스에 혼합재료 130.3×162.2cm 2014

마치 앨리스가 토끼를 쫓아 ‘이상한 나라’로 입장하듯, 김남표는 동물의 형상을 캔버스 전면에 내세워 관객에게 동물의 시선을 따라가게 한다. 그의 그림에서 우리는 초현실적 풍경과 마주하게 된다. 서울 논현동에 새로생긴 전시공간 에이루트 (ARouTe)에서 개인전(4.22~5.22)이 열리고 있다. 손끝의 촉감으로 즉물적인 형상을 구현해내는 작가 김남표의 작업에 담긴 이야기를 살펴보자.

손끝 풍경

최은경 미술이론

김남표는 2000년부터 2006년까지 ‘집단 막’을 결성하여 5명의 작가와 함께 공동작품,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집단 막’은 “과연 일상적인 재료로 일상적인 장소에서 미술을 실현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서 시작하여 실험적인 형태의 작업을 이끌어왔다. 예를 들어 〈재개발/재건축 프로젝트〉, 〈매봉터널 프로젝트〉, 〈비닐갤러리 프로젝트〉 등 이름만 들어도 한겨울의 찬바람이 살갗을 에는 듯 고생스러운 현장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작업이다. 김남표는 “젊은 시기의 대부분을 몇 명의 작가 동료와 함께했다. 일상적인 현장에 미술을 가지고 들어간 이때가 현재 개인 작업의 근간을 이룬 시기”라고 말한다.
김남표의 작품에는 초기(1990년대 중후반~)부터 캔버스에 여러 가지 재료를 ‘붙이는’ 형태의 모습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때로는 쇠 조각을 캔버스에 붙이고 때로는 캔버스 자체를 셰이프드 캔버스(shaped canvas)로 변형시키기도 한다.
미완성작으로 여겨질 정도의 흰 여백이나 작품의 맥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물질을 오브제로서 캔버스에 부착하는 것은 회화의 본질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한 작가의 질문이라고 볼 수 있다. 어찌 보면 이러한 작가의 태도는 모더니즘의 화두와 관련된 것으로서 새로운 접근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작가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 사회화 과정을 사회 전반에 깔려있는 모더니즘적인 방식의 결과물로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접근 방식은 김남표 작업의 시작이자, 창작 환경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든 아니면 부정하고 극복하든 그것은 작가 자신의 몫이다.
김남표의 작업실은 언제나 캔버스 아래에 인조털이 놓여있고, 목탄, 콘테 등에서 나온 가루가 날리고 바닥에 내려앉는다. 캔버스 위에 무엇을 표현하든 항상 재료의 일부분이 캔버스 아래 수북이 쌓인다. 더욱이 캔버스에 표현된 재료 역시 불안정하게 정착된다. ‘집단 막’에서 현장 작업을 중시하던 것이 습관이 되어 요즘의 개인 작업에도 드러난다. 캔버스를 둘러싼 주변부가 이와 같은 현장성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예를 들어 ‘집단 막’이 운영한 비닐갤러리에서 2005년 열린 김남표 개인 프로젝트 〈Stopping for a while전〉에서는 경제적 논리에 의해 유목민처럼 이주하는 현대인과 작가 자신의 모습을 재료의 불안정성과 표현의 순간성으로 드러냈다.
모든 표현을 붓 대신 손끝으로 직접 하다 보니 시커멓게 그으른 검은색 목탄자국과 붙이다 남은 인조털이 손끝에 늘 매달려 있다. 손끝의 인조털은 마치 붓 인 양 목탄을 캔버스에 옮기고 캔버스는 화가의 손끝을 반영한다. 즉, 김남표 작업에서 드러나는 현장성은 캔버스 주변뿐만 아니라 작가의 손끝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고착되지 않는 재료를 선택하고, 손끝에서 이루어지는 비계획적이고 순간적인 표현은 김남표 작품 전반의 제목인 순간적 풍경(Instant Landscape)의 개념을 이끌어낸다. 다시 말해서 순간적 풍경의 불안정성, 순간성, 그리고 직접성은 모더니즘에 반응하는 김남표의 작업태도이다.
한편 그의 작품은 캔버스 전체를 인조털로 감싼 작업과 흰 캔버스에 오브제로서 인조털을 사용한 작업으로 나눠진다. 첫 번째, 전면 털을 사용한 작업은 인조털의 결을 이용한다. 바늘이나 포크 같은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해 털을 누르고 세우기를 장시간 동안 반복하여 나타낸 음영으로 풍경을 표현한다. 고정된 작업이 아니기 때문에, 완성된 작업이라 하더라도 어떤 물리적인 압력이 가해지면 이미지는 사라진다. 어릴 때 담요의 결을 이용하여 무엇을 그리고 지우 던 방식을 차용한 것이다.
두 번째, 오브제로서 인조털을 사용한 작업은 우선 털을 임의로 캔버스에 부착한 후에 연상되는 이미지를 그려 나가거나 이미지를 그린 후에 인조털을 부착한다. 작은 점에서 무작위로 시작된 화면은 서서히 연결되고 그 결과 작품이 스스로 풍경이라는 구조 안에서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는 ‘의식의 흐름(flow of consciousness)’이라는 20세기 모더니즘 소설의 특징과도 연결될 수 있는데, 의식의 흐름을 차용한 기법은 구조적이기보다는 즉흥성을 더 강조한다. 지속성은 결여되지만 동시에 다양하면서도 복잡할 수 있는 수많은 아이디어와 마주할 기회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커피 잔에 커피가 아닌 폭포수가 떨어지고, 신발 안에 나무나 동물이 존재하는 공간이 나타남으로써 사물의 고유한 기능적 속성에서 벗어나 거대한 초현실적 풍경을 제공한다.
사물의 이상한 조합 –커피 잔에 신발을 올려놓는 비일상적인 상태 –을 기이한 사건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아름다운 풍경의 미적 사건으로 전환하고자 한다. 사물의 형태가 가지고 있는 기능적인 요소를 배제한 체, 하나의 미적 형태와 공간으로 인식했을 때 그 사물의 진정한 사물다움은 자유로운 상상의 공간 역할을 하며 보는 이를 몰입하게 한다. 사물다움이란 사물의 기능성과 용도에 의한 인식이 아니라, 그의 존재로부터 출발한다는 본질적인 깨달음이다.
또한 김남표 작품에는 동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 동물들은 소재적 측면보다는 작가에게 예술적 감흥을 일으키는 재료로 인식해야 한다. 왜냐하면 동물의 이미지를 ‘그린다’기보다는 동물을 손끝으로 ‘만지는’듯한 행위를 통해 작품을 구상하고 연상하기 때문이다. 손끝에 닿는 재료의 촉각을 통해 작품을 구상하고, 구상된 계획을 다시 손끝에서 실행한다.
화가가 무엇을 그릴 지를 결정하고 그에 맞는 방식의 기법과 재료를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인 논리라면, 김남표는 ‘무엇을 만지고 무엇을 느꼈을 때 무엇을 그릴 수 있을까’를 결정하는 독특한 과정을 취한다. 이를 통해 갇혀 있는 동물들의 함성을 손끝으로 들려주고, 일상의 재료 안에 갇혀 있는 사물다움을 손끝으로 어루만지는 것이다. 손끝 풍경은 이러한 이야기가 존재하는 현장이다. ●

5월 22일까지 ARouTe에서 열리는 개인전 광경. 〈Instant Landscape-androgynous#3〉(왼쪽) 〈Instant Landscape-corrugated cardboard#2〉(오른쪽)

5월 22일까지 ARouTe에서 열리는 개인전 광경. 〈Instant Landscape-androgynous#3〉(왼쪽) 〈Instant Landscape-corrugated cardboard#2〉(오른쪽)

김 남 표 Kim Nampyo
1970년 태어났다. 서울대 서양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9년 웅전갤러리에서 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서울 암스테르담 뉴욕 등지에서 여러차례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2000년 ‘집단 막’을 결성해 2004년까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5월 24일까지 갤러리 퍼플에서 〈TENT(김남표+윤두진)〉 2인전이 열린다.

ARTIST REVIEW 표영실

둥근구멍 2015 oil on canvas 112x145 cm

위 〈속살〉 캔버스에 유채 145×112 cm 2013 (오른쪽) 아래〈둥근구멍〉 캔버스에 유채 112×145cm 2015

작가 표영실의 회화는 반투명한 빛을 머금고 있다. 마치 따뜻한 봄기운을 알리는 연한 색 꽃잎처럼 은은하게 다가온다. 회화의 이미지들은 흐릿하고 모호한 듯 보이지만 이를 표현하는 터치는 겹겹이 쌓인 붓 터치 위에 존재한다. 표영실의 이미지는 큐브, 나무, 집, 풍선, 신체의 일부 등 일상생활 속 오브제의 표현이다. 스페이스비엠(3.27~4.30)에서 열린 개인전을 중심으로 표영실의 오묘하고 ‘반투명한’ 작품세계를 살펴본다.

살갗, 연약한 너무나 연약한

고충환 미술비평
반투명. 투명과 불투명 사이. 투명하지도 불투명하지도 않은. 반쯤만 보이는. 봐도 본 것이 아닌. 투명과 불투명에는 사이가 있다. 표영실의 그림은 불투명에서 투명 쪽으로 진화하고 있다. 진화한다기보다는 옮아가고 있다. 그래서 근작은 눈에 띄게 투명 쪽에 가깝다. 그렇다고 달라진 건 별반 없어 보인다. 불투명으로 시작 했을 때나 투명한 근작에서나 애매하기는 매한가지. 처음엔 뭔지 몰라서 막연했고, 뭘 어떻게 그려야 할지 막막했다. 그래서 불투명했다. 그런데 투명해진 근작에서도 여전히 막연하고 막막하다. 투명하면 또렷해져야 하는데, 적어도 불투명에 비해보면 그 실체가 어느 정도 손에 잡혀야 하는데, 반쯤만 투명한 탓이고, 절반만 보여주는 탓이고, 숨기면서 보여주는 까닭이다. 숨기면서 보여주는? 혹 보여주는데 보지 못하는? 자크 라캉은 의식과 함께 무의식이 말을 한다고 했고, 그래서 나는 내가 하는 말속에, 지금 여기에 없다고 했다. 반쯤은 작가의 몫이고 절반은 내 탓이다. 무슨 말인가.
여기에 살갗이 있다. 알다시피 살갗은 몸과 네가 맞닿는 경계다. 몸의 응시와 너의 시선이 부닥치는, 주저하는 몸과 너의 욕망이 충돌하는, 주체와 외계가 면해있는 관계의 최전선이며,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바로미터다. 그래서 부끄러우면 발갛게 달아오르고, 때로 분노로 파르르 떨기도 한다. 살갗 밑엔 감정이 있고, 그 감정이 살갗 위로 자기를 밀어올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다는 것은 몸을 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보는 것이며, 시선의 욕망은 사실 감정이 보고 싶은 것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저 눈빛의 의미는 뭔지, 나의 시선은 레이저가 돼 처음엔 꽤나 두꺼웠을 너의 살갗을 파고든다. 그래서 너의 살갗은 마치 허물을 벗듯 점점 더 얇아지고 점점 더 투명해진다.
그래서 감정이 보이는가. 시선의 욕망은 마침내 감정에 도달했는가. 살갗을 넘어, 감정을 넘어, 무의식을 파고드는 데 성공했는가. 그리고 그 다음엔? 당연히 아무것도 없다. 오직 심연이 기다리고 있을 뿐. 텅 빈. 공허 자체인. 어둠 자체인. 처음처럼 혼돈 자체인. 살갗은 어쩜 최후의 보루와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시선의 욕망이 살갗 너머를 엿보는 것이 문제였다. 시선은 살갗을 죽이고, 감정을 죽이고, 무의식을 죽이고서야 비로소 살갗을 넘고, 감정을 사고, 무의식을 사로잡을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본다는 것은 그저 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욕망이며, 그 이면에 죽음 충동을 숨겨놓은 욕망의 화신이며 죽음의 사신이다. 그렇게 너(시선)는 나(응시)를 본다. 그러면서 사실은 살갗이 벗겨져 허물어져 내린 나를 삼킨다. 그리고 종래에는 어둠 속에 빛나는 섬광처럼 사라지게 만든다.

스페이스비엠에서 열린 개인전 광경 〈경계〉(오른쪽) 캔버스에 유채 194×130 cm 2015

스페이스비엠에서 열린 개인전 광경 〈경계〉(오른쪽) 캔버스에 유채 194×130 cm 2015

무의식을 파고드는 감성
표영실은 이처럼 살갗을 그리고, 경계를 그리고, 관계를 그린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가 있고, 나와 너 사이에 경계(다만, 여기까지!)가 있고, 주체와 외계 사이에 살갗이 있다. 그러므로 어쩜 작가의 그림은 인간관계의 미학이며 사람사이에 대한 성찰로 보면 되겠다. 사회적 관계와 심리적 관계, 객관적 관계와 주관적 관계가 삼투되면서 상호작용하는 어떤 지점 아님 현상을 그린 그림으로 보면 되겠다. 그 관계의 양쪽 끝에 각각 내가 있고 네가 있다. 나의 응시가 있고 너의 시선이 있다. 나는 너의 시선(시선의 욕망)으로 인해 이중으로 분열된다(시선의 욕망이 다중적이면 주체도 덩달아 다중 분열된다. 그리고 그렇게 주체가 분열되는 것은 욕망에 연동된다). 페르소나와 아이덴티티로. 페르소나는 사회에 내어준 주체이며, 내가 보여주는 주체이며, 네가 보고 싶은 주체이다. 그리고 나는 그 페르소나 뒤에 숨는다. 그렇게 숨은 주체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으므로 너도 모르고, 때로 나 자신에게마저 낯설다(자기소외?).
그래서 어쩜 살갗이란 그런, 페르소나와 아이덴티티, 드러난 주체와 숨은 주체를 가름하는 경계와도 같은 것일지 모른다. 그렇게 너의 시선이 페르소나에 머물러 있었으면, 피상적인 웃음가면에 만족했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페르소나의 뒤편을 엿보고, 그 경계를 기웃거릴 때 문제는 배태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너는 나를 본다. 너의 시선이 나의 응시를 파고든다. 나의 속살을 파고들고, 나의 감정을 파고들고, 나의 무의식을 파고든다. 그렇게 파고들어봤자 아무것도 없다. 어쩜 당연하게도 거기엔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네가 뚫어놓은 공허한 두 구멍(둥근 구멍)이 있을 뿐. 다만 그 빈 구멍 너머로 보이는 어둠 자체가 있을 뿐.
작가는 이처럼 공허를 눈구멍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루이스 부르주아에게 공허는 목구멍으로 대리된다. 너의 욕망이 살갗을 넘어, 경계를 넘어, 금지를 넘어 뚫어놓은 구멍들이다. 본다는 것도 욕망에 연동되고 삼킨다는 것도 욕망에 연동된다. 작가는 눈구멍으로 그리고 부르주아는 목구멍으로 상처를 삼킨다. 그리고 그렇게 삼켜진 상처를 너는 결코 목격하지도, 그 어둠 자체에 도달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빈 눈구멍과 부르주아의 빈 목구멍은 똑같이 공허를 표상하고, 하나같이 욕망에 연동된 것이란 점에서 하나로 통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들자면, 작가가 그려놓은 얼굴그림(없는 얼굴)이 꼭 무슨 공허를 상연하는 무대 같고, 실재의 사막(슬라보예 지젝)이며 실재계(자크 라캉)를 상영하는 극장 같다. 암흑이며 어둠 자체, 막 섬광이 사라진 우주 아님 심연을 상영하는 그 극장에는 한편에 노란 커튼마저 드리워져 있어서 꽤나 그럴듯해 보이기조차 한다.
그리고 또 다른 그림이 증여를 암시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내민 손바닥 위로 꽃이 피어오르고(선택), 산딸기 같은 알갱이들이 소복하다(반복). 나는 너에게 꽃을 내밀고 산딸기를 선물한다. 그렇게 나는 너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선물이 상처가 돼 되돌아왔다. 꽃도 붉고, 산딸기도 붉고, 피도 붉다. 문화주의자 중 증여론자들이 있다. 증여가 문화를 생성시키고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증여는 곧 권력의 표상이었다. 내가 너에게 증여하면, 너는 나에게 더 큰 증여며 더 나은 증여로 되돌려줘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증여를 교환하는 행위가 반복되고, 그 과정에서 증여에 부수되는 선의는 다만 권력행위의 후광에 지나지 않는다.
꽃이면서 동시에 피기도 한, 산딸기면서 동시에 상처이기도 한 작가의 그림은 어쩜 이런 증여행위와 권력관계, 선의와 상처의 이율배반적인 관계, 진심과 오독이 뒤얽힌, 더 이상 풀 수 없게 꼬여버린 관계를 그려놓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너와 네가 도저히 통할 수 없는 불통의 관계를 그려놓은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상처에 민감한, 내 상처가 너무 커서 너의 선의마저 상처로 되돌려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살갗을 그려놓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살갗 너머를 엿보지 말 일이다. 그저 모자라도 차지 않아도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고 머물 일이다.
처음에 작가는 집이며 풍선이며 구름 같은 오브제를 그렸었다. 그리고 근작에서 사람을 그린다. 이처럼 소재상 사물로부터 사람으로 옮겨왔지만, 알고 보면 사물도 사람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감정이입된 사물의 살갗이 벗겨진 수위 아님 수면 아래로 속살이, 상처가, 감정이, 사람이 드러나 보인 점이 다르다. 감정을 각각 사물형상에게 그리고 사람형상에게 분유한 그림들이다. 그래서 사물도 사람처럼 보이는 그림들이다. ●

표 영 실 Pyo Youngsil
1974년 태어났다. 덕성여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1999년 관훈갤러리에서 열린 첫 개인전 <즐거운 각성제>를 시작으로 10차례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