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FOCUS YUN HYONG-KEUN 2

〈Burnt Umber& Ultramarine〉oil on linen 91.8×115.2cm 1981~1984 (Courtesy of 윤성렬and PKM Gallery)

한국 추상 회화의 거장 윤형근(1928~2007)의 개인전이 4월 15일부터 5월 17일까지 계속된다. 이번 전시는 PKM갤러리가 개관 14주년을 맞아 삼청동에 새 공간을 마련하고 연 첫 전시다. 군더더기 없는 전시공간과 사색의 깊은 울림을 주는 회화의 만남으로 주목 받고 있다. 개관전으로 윤형근의 회화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 고유의 표현양식과 예술세계를 집중적으로 주목하고자 한 것으로 읽힌다. 그의 회화를 최근 회자되는 ‘단색화’라는 개념을 넘어 ‘윤형근’이라는 인물을 집중 조명하여 살펴본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이루는 은은한 농담(濃淡)과 서정적 정취를 느껴보자.

윤형근 미술에 구현된 담(淡)의 정신

홍가이 문화비평

최근에 자생적 한국 현대화를 표방하는 전시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이 한국적 현대화를 ‘단색화’라 하는데, 이는 개념적 내용이 결여된 명명이라 하겠다. 인상파니 큐비즘이니 이런 이름들이 그냥 아파트 3동, 4동이라고 지칭하듯 지어진 것이 아니지 않은가. 언어철학에서는 이름 붙이는 것이 매우 중요한 철학적 문제로 20세기 후반의 천재 철학자 솔 크립키의 철학적 업적이 담긴 책 제목도 바로 《명명과 필연성(Naming and Necessity)》이다. 필자는 2013년 8월 싱가포르 ICA에서 개최된 <담화전(淡畵展)> 도록에서 단색화라는 용어에 대해 개념 없는 언어유희라고 지적한 바 있다. 여기서는 간략하게 요점만 정리하고자 한다.
인류 역사상 서양문명의 진행 속에서 역사적 단절이 처음으로 야기된 상황을 ‘현대성(modernity)’이라 칭할 때 모노크롬 회화로 명명되는 스타일의 회화는 예술분야에서 일련의 현대주의 또는 전위라는 이름의 양식적 유행의 하나로 나타났다 이 서양 모노크롬 회화(monochrome painting)의 출현은 서구 현대미술사의 역사 변증법적 행군 속에서 역사적 필연성의 논리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서양문명이 겪은-현대성(modernity)이라는-역사적 단절의 트라우마를 내부적으로 경험하지 못하고 외부 서양문물로부터 자극 받아 그것을 흉내 낸 서구화를 통해 비로소 현대화를 꾀하면서 서구와 똑같은 역사 변증법적 논리에 근거하려는 방법으로는 단색화의 필연성에 절대로 도달할 수 없다. 즉, 서구 현대미술에서는 결국 ‘예술의 죽음(End of Art)’을 향해 가차없이 진군하는 과정에서 모노크롬 회화가 임시방편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이지, 그것이 무슨 새로운 회화의 문법을 또는 새로운 예술세계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스탠리 카벨이 지적했듯이,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서구의 작가, 화가, 작곡가 등은 자기들이 계승한 예술행위를 지속하는 데 전제되어야 하는 사회적 규범 (또는 게임의 법칙, 또는 문법)이 붕괴되어, 더 이상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술행위인지를 규정해줄 판단의 잣대가 없어졌다고 믿었다. 어떤 문장이 문법에 맞는지 아닌지를 판단해 줄 형식적 규정이 없다면, 그 언어는 소통의 도구로서는 무용지물인 것인데, 19세기 중반 서구의 예술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그래서 카벨은 현대예술의 상황을 특정 짓는 것은 항상 산재한 사기의 가능성이라 했다. 19세기 중반부터 재현적 서구회화의 전통이 역사적으로 해체(historical deconstruction of representational painting)되기 시작하여 1960년대 중반 프랭크 스텔라의 셰이프트 캔버스(shaped canvas)로 귀결되면서 소위 미니멀아트라 칭해진 이 모노크롬 회화는 일련의 서구 현대미술사 속에서 재현적 회화의 역사적 해체 시기에 나온 양식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모노크롬 회화는 아무런 개념적 콘텐트가 전무한 것이 실체다.
한국에서 1970년대에 출현한 형상 없는 단순한 색상의 서양화만 단색화이며 전통 동양화의 수묵화는 단색화가 아닌가? 왜 한국 ‘서양화가’가 그리는 추상회화만 ‘단색화’란 말인가? 1970~1980년대엔 단색화 대신 ‘평면화’를 유행어 삼아 ‘한국적 현대추상’이라는 이론적으로 설득력 없는 담론이 펼쳐졌었다. 이 글의 주목적은 최근 ‘한국적 모노크롬 회화’로서의 ‘단색화’를 주제로 한 기획 전시마다 윤형근의 작품들이 포함됨으로써 윤형근의 작품세계가 자칫 편협하게 곡해되는 것을 우려하며 그 부당함을 바로잡고자 함이다. 이 점이 중요한 이유는 ‘단색화’라는 한국 미술용어의 개념 없는 분류의 카테고리에 윤형근을 가둬두기에는 그의 작품세계가 훨씬 깊고 독창적이며 현재 허무주의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서구 중심부의 현대예술 담론을 거부하는 동시에 지금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대안적 예술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윤형근 미술이 구현하는 통찰력 깊은 대안적 예술철학이 무엇이냐에 대해 국내 처음으로,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윤형근 예술세계를 여는 두 가지 명제
“우선 사람이 되어라.”
“내 그림은 추사 김정희의 쓰기에서 시작되었다.”
한국 예술계 종사자 대다수는 서구 중심부에서 흘러 내려오는 담론의 소화에 급급해서, 그 담론의 개념에 생소한 다른 패러다임의 아이디어를 새롭게 창출해낼 필요성을 못 느꼈고 사실상 그렇게 할 지적(知的) 여유도 없었다. 반면에 전통 동양화의 맥을 보전하는 예술 종사자들은 고답적이고 기술적인 전통 동양화론(論)의 디테일에 매몰되어 현대에도 전통에도 속하지 않은 새로운 예술의 경계를 그려내려는, 윤형근 같은 창의적인 작가의 예술세계를 이해하고 담론화하는 데 필요한 새로운 용어의 개발에 무기력했다. 이 글에서는 이 두 가지 명제를 시작으로 윤형근이 추구하는 예술 정신을 드러내보려고 한다. 그중 두 번째 명제인 “내 그림은 추사 김정희의 쓰기에서 시작되었다”에 대해서는 《월간미술》 2008년 3월호에서 상세하게 기술한 바 있어서, 본고에서는 주로 첫 번째 명제를 중심으로 윤형근의 예술세계를 풀어나가겠다.
“우선 사람이 되어라.” 윤형근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늘 이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말이 예술가가 되기 위한 선결 조건으로 제시된 것이라면, 여기에는 어떤 예술 철학이 암시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우선 이런 질문을 해야 된다. ‘사람이 되어라’가 무슨 말이냐? 먼저 이 질문에 대한 가설적 답변(hypothetical answer)을 제시하면서 가상의 예술철학 이론을 구축해가 보자. 그렇게 구축한 예술적 담론 구조가 설득력이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 설득력의 유무는 물론 독자들(동료학자, 예술인, 일반 독자 등등)의 판단에 맡기면 되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사람이 되어라’는 ‘너다운 사람이 되어라’의 준말이라고 가정하고 시작해 보련다.
참나(眞我)란 무엇일까? 우리는 일상 언어 생활 속에서 다른 사람에 대해 이런 논평을 자주 접할 수 있다. “참 그 사람답다” 라고. 그렇다면 혹시 그를 그 사람답게 만드는 그 무엇이 바로 숨겨진 참나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참나를 찾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일상에서 벗어나는 장소에서 홀로 조용히 반성하는 시간 없이는 참나를 발견할 다른 길은 없을 것이며, 이런 반성의 시간을 갖는 것이 바로 명상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머릿속은 수만 가지의 생각으로 혼탁해져 있다. 그러나 물결이 잔잔해지고 물위에 떠돌던 것들이 바닥에 가라앉게 되면, 수면은 맑고 투명해져서 바닥이 보이게 되듯이 명상은 이와 같은 이치인 것이다. 마음을 조용히 하여, 여러 일상의 잡다한 생각들과 감정을 가라앉히면 담담해진다. 그렇게 담담해진 상태가 되면 머리가 명료해지면서 자신의 상황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된다. 명상이란 생각을 내려놓는 연습을 하여 담담한 평정심을 찾는 방법이라고 보면 된다.

〈Ultramarine Umber〉oil on linen 259.5×181.5cm 1976 (Courtesy of 윤성렬and PKM Gallery)

〈Ultramarine Umber〉oil on linen 259.5×181.5cm 1976 (Courtesy of 윤성렬and PKM Gallery)

담(淡)의 조건
도대체 참나의 정체는 무엇일까? 먼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다운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만의 결을 찾아야 하는 데, 인간도 연꽃의 씨앗 같은 그만의 결을 확보해주는 DNA의 구조로 설명할 수 있을까. 육체적인 특성의 경우 그가 어떤 종류의 질병에 약한가 등의 정보까지 유전적 특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성품, 그다운 독특한 영혼의 소유자로서의 참나는 뇌 구조나 유전적 특성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20세기 후반의 인지 과학적 발견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인간의 언어 능력을 생물학적으로 설명한 노암 촘스키의 이론일 것이다. 그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우주의 원리를 내재적으로 습득한 채 태어난다. 하나의 돌도 우주의 역사를 관통한 그 돌의 역사에 의해 그만의 독특한 결이 결정지어지듯이, 한 인간 역시 그만의 유일한 잠재 능력을 갖고 태어났고, 명상 같은 담담함의 상태에 도달하여야 비로소 자신의 그 능력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참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부여받은 자아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언급했는데, 도대체 ‘자아를 내려놓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선 담담한 상태의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필자는 그것을 ‘담(淡)의 정신’이라 부르고자 한다. 담담(淡淡)함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마음을 비우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마음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음으로써 조용히 고요하게 하여 생각과 감정의 파고를 가라앉히는 상태를 말한다. 고요히 가라앉아서 담담하게 되면 명료함이 따르고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며 흐려졌던 눈과 마음과 귀가 밝아진다. 그렇다면 동양적 사유는 정녕 개념적으로 모호한 사유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하는가? 왜 동양적 인문학을 운운하는 식자층에서는 사려 깊게 탐색하지 않은 애매한 개념들을 마치 무슨 심오한 내용이라도 들어있는 것처럼 늘어놓는가? 그 한 예가 공(空)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 동양 지혜의 진수처럼 되어버린 채, 동양적 현대화(現代畫)를 표방하는 미술인들이 ‘여백의 미학’이라는 용어를 즐기며 작품 속에 심오한 예술철학이 담긴 것처럼 주장하고 대중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엄밀히 따지자면 미술용어로서의 ‘단색화’라는 명명작업처럼 이런 단어들도 무(無)개념의 단어들을 나열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현대 물리학은 절대 진공(vacuum) 상태를 부정한다. ‘마음을 비워’서 명상(冥想) 상태에 들어간다는 것은 마음을 공(空)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모든 소프트웨어가 지워진 상태에서는 그 컴퓨터의 재부팅이 불가능하듯이, 엄밀히 말하자면, 명상 상태에 들어간다함은 이미 설치된 여러 소프트웨어의 작동을 일시로 중단시켜 내려놓는다는 뜻이다. 작동이 중단됨으로써 잠재력(potential force) 또는 하나의 잠복상태(latency)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완전히 지워져서 없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언제나 재부팅의 가능성이 온전히 남아 있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명상의 상태는 공(空)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상념을 내려놓은 상태, 또는 가라앉힌 상태를 말한다. 그 상태를 가장 잘 표현하는 한국말이 바로 ‘담담(淡淡)함’이다. 세상과 인간사를 모두 하나 같이 담담하게 대할 수 있음을 바로 담(淡)의 정신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것이다. 윤형근의 지인들이 그를 ‘태산 ’같다고 말할 때 바로 그런 담(淡)의 정신에서 나오는 의연함을 일컫는 말이라고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담(淡)의 정신은 결국 명상 같은 수행을 통해 몸과 마음을 닦아서 세상과 인간사를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세계관이자 인생 철학으로서, 윤형근의 작품은 이러한 동양적 수행문화의 산물로 이해될 수 있겠다.
수(修)는 닦는다는 의미를 가진다. 서양철학은 몸과 정신 분리의 이분법을 전제로 하지만, 동북아 문화권에서는 몸을 닦으면 동시에 마음도 닦인다고 이해한다. 동·서 사유의 극명한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행(行)은 행한다, 실천한다는 뜻으로 수행(修行)은 닦고 행하여 자연의, 대우주의 순환 기류에 자연스럽게 조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수행이 잘 되려면 완전히 깨어 있으면서 동시에 완전히 쉬고 있어야 하며 바로 그런 상태가 ‘담담함’의 상태이다. 그러므로 담(淡) 정신은 궁극적으로 우주와의 합일을 추구하며 이 우주와의 합일이야 말로, 인간 정신성(human spirituality)의 발현인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만년의 이마누엘 칸트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우주와의 합일의 추구를 인간 정신성의 핵심이요, 그것에 대한 영원한 추구의 표현이 바로 인간의 예술성이라 강조했다.

전통과 혁신-동시대성과 보편적 가치
동양 전통서예에서 ‘쓰기’란 한지 위에 미리 선택해 놓은 특정 한자 또는 한자의 군(群)을 먹물 묻힌 붓으로 획 하나 하나를 그어 나가는 것이다. 한자의 여러 획이 어떤 상관관계로 구조를 이루고 그 안에 내재된 힘 또는 가상의 기세(virtual force or potential force)를 작가 자신이 몸으로 느끼게 됨으로써 이에 대한 자동적 반응으로 붓을 든 손이 움직이는 순간 바로 그 힘으로, 그 속도로 획을 긋는다. 즉, 미리 선택된 구도의 가상의 기세를 몸으로 읽고 작가 자신의 당시 기운에 따라 붓 운동으로 획을 그어 이미 잠재하는 그 가상의 기세를 한지 위에 구현해주는 것이다. 윤형근의 작품 역시 이러한 ‘쓰기’의 과정을 통해 잠재한 기운을 발현해낸 결과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가 택하는 모든 재료는 분명히 서구미술 규범 속에서 사용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윤형근은 자신이 그림에 대해 ‘그리는’ 것이 아니라 추사와 마찬가지로 ‘쓰기’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동양의 전통적 재료인 한지 위에 먹물을 갈아서 서예용 붓으로 획을 그어 작품을 만드는 대신, 캔버스와 오일컬러 및 브러시 등 서구의 현대적 재료들을 사용한다. 먹을 갈아 전통한지에 붓으로 획을 긋는 것과 유사한 효과를 낼 수 있도록 단순한 검정색이 아닌 갈색(umber)과 청색(ultra-marine blue) 물감을 섞고 테레핀에 희석시켜 표면처리 하지 않은 리넨 또는 면 화폭 위에 번지는 효과를 냄으로써 동시대인이 크게 공감할 수 있는, 수묵 빛깔과도 같이 한없이 깊은 그만의 독창적 팔레트를 만든 것이다. 이것은 기술적 차원에서 수묵과 서예의 예술행위를 서구적 재료인 캔버스 위로 옮겨와 이행한 것으로 동양 전통서예/수묵화의 문화적 경계 지형도를 넘어선, 가히 범세계적인 혁명적 쇄신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최근 한국 단색화 작가들에 대한 국내외 미술계의 반응이 뜨겁고 그중 윤형근에 대한 관심도 매우 커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다만 윤형근의 활동 시기가 다른 단색화 작가들과 겹치고 그의 작품 색상이 표면적으로 단순하다 하여 그를 단색화 작가 집단에 가둬두고 평가하는 것은 그의 담(淡)의 정신에 바탕한 삶과 예술에 대한 태도 및 그가 전통과 혁신을 한 화폭에서 아우르며 독창적이고 기운과 기품 넘치는 결과물을 탄생시킨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얕고 편협한 접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근거 없이 표피적이고 가벼움과 허무주의가 팽배한 작금의 세계적 미술 기류에서 오는 피로함 속에서 거대한 뿌리와 정신성을 계승하며 동시에 혁신성을 추구함으로써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윤형근의 작품은 충분히 21세기의 보편적이고 대안적인 미술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필자의 해석이 틀리지 않았다면 향후 20세기 후반부 미술을 재론할 때 윤형근은 세계 미술사 차원에서 재평가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EXHIBITION FOCUS YUN HYONG-KEUN

한국 추상 회화의 거장 윤형근(1928~2007)의 개인전이 4월 15일부터 5월 17일까지 계속된다. 이번 전시는 PKM갤러리가 개관 14주년을 맞아 삼청동에 새 공간을 마련하고 연 첫 전시다. 군더더기 없는 전시공간과 사색의 깊은 울림을 주는 회화의 만남으로 주목 받고 있다. 개관전으로 윤형근의 회화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 고유의 표현양식과 예술세계를 집중적으로 주목하고자 한 것으로 읽힌다. 그의 회화를 최근 회자되는 ‘단색화’라는 개념을 넘어 ‘윤형근’이라는 인물을 집중 조명하여 살펴본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이루는 은은한 농담(濃淡)과 서정적 정취를 느껴보자.

언제 보아도 물리지 않는 그림

류병학 미술비평

지난 4월 15일 PKM갤러리는 개관 14주년을 맞이하여 안국동에서 삼청동으로 이전하고 재개관 특별전으로 〈윤형근 개인전〉을 개막했다. 재개관 특별전으로 〈윤형근 개인전〉을 기획한 이유는 무엇일까? 갤러리 측은 보도자료를 통해 윤형근을 “한국 ‘단색화’의 거장”으로 불렀다. 그렇다면 이번 〈윤형근 개인전〉은 최근의 ‘단색화 열풍’을 타깃으로 삼은 전시란 말인가? 갤러리 측은 이번 전시를 “2007년 윤형근 화백이 작고한 이후 국내외에서 처음 개최하는 개인전”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이번 윤형근 개인전은 사후 첫 회고전이란 점에서 일종의 ‘유작전’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윤형근의 초기부터 말기까지 40여년에 걸친 작품세계를 망라하는 ‘회고전’은 지면(地面) 전시가 아닌 지면(紙面) 전시인 영문판 ‘윤형근 화집’에서 볼 수 있다. 물론 윤형근 8주년 회고전이 미술관이 아닌 상업갤러리에서 개최되었다는 점에서 아쉽지만 재조명 기회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윤형근과 스승 김환기
윤형근의 대표작 <다-청(茶-靑)> 회화는 흔히 ‘담백하면서도 웅대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그 담백함과 웅대함은 작가의 풍모와 기질을 담아낸 것으로 간주된다. 윤형근은 친구들 사이에서 ‘자이언트’로 불렸다고 한다. 물론 그는 큼직한 체구를 지녔다. 하지만 그가 ‘자이언트’로 불린 것은 체구보다는 대범한 성격 때문이다. 그의 대범성은 당대 현대미술의 거장인 김환기를 만나면서 빛을 발하게 된다. 1947년 윤형근은 서울대 미대에 입학하는데, 당시 그의 주임교수가 김환기 화백이었다. 1949년 그는 국가 반체제운동으로 중부경찰서에 42일간 구류되고 이 일로 서울미대를 휴학한다. 이후 복학을 희망했지만 거부당했고 당시 홍익대 미대로 자리를 옮긴 김환기 교수의 배려로 홍대 미대로 편입한다. 그는 홍대 미대 재학 중 김환기 교수의 장녀 김영숙을 만난다. 학교를 졸업한 다음 해인 1960년 청첩장을 받는데, 결혼 당사자가 다름 아닌 김영숙과 윤형근 자신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스승은 장인이 된다.
1966년 윤형근은 38세에 신문회관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연다. 1969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한국 측 커미셔너 이일이 그를 출품작가로 선정한다. 하지만 1960년대 윤형근의 그림은 스승 김환기의 영향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그는 1970년 한국미술대상전에 출품된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보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73년 명동화랑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연다. 당시 전시된 작품이 그의 대표작인 <다-청> 회화이다. 도대체 그는 <다-청> 회화를 어떻게 시작한 것일까? 1973년 그는 숙명여고 미술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당시 부정입학사건에 항의했다가 1달간 서대문교도소에서 옥살이를 한다. 출옥 후 수년간 근무했던 숙명여고 미술교사직을 그만두고 전업작가의 길을 택한다. 그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1973년도부터 내 그림이 확 달라진 것은 서대문교도소에서 나와 홧김에 한 것이 계기였지. 그전에는 색을 썼었는데 색채가 싫어졌고, 화려한 것이 싫어 그림이 검어진 것이지. 욕을 하면서 독기를 뿜어낸 것이지. 그림에는 내가 살아온 것이 배인 거야.”

윤형근pkm (6)

〈Umber〉(왼쪽) oil on linen 205×333.5cm 1988~1989

윤형근과 도널드 저드
1974년 윤형근의 스승이자 장인인 김환기 화백이 별세한다. 자신을 지탱해주던 거목이 쓰러진 심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스승에게 보답하기 위해 작업에 몰두한다. <다-청> 회화는 그의 성격처럼 더욱 담백해지고 스케일도 웅대해진다. 그리고 그의 활동도 활발해진다. 197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1976년 <제8회 까뉴국제회화제>, 1977년 <한국현대미술 단면전>(도쿄 센트럴미술관), 1978년 <제2회 파리국제현대미술제>와 <인도트리엔날레>, 1980년 <아시아현대미술전>(후쿠오카미술관), 1981년 <한국현대미술전>(교토미술관), 1983년 <한국현대미술전>(도쿄도 미술관) 등 다수의 해외전시에 초대받는다. 1984년 그는 경원대 미대 교수로 부임한다. 1990년 경원대 총장이 된다(화가가 대학 총장이 된 사례는 그가 최초가 아닐까).
만약 누군가 윤형근의 작품을 언급하고자 한다면 (지금은 윤형근처럼 모두 고인이 되신) 인공화랑 황현욱 대표와 도날드 저드를 관통해야만 할 것 같다. 1986년 윤형근은 대구 인공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당시 그는 인공갤러리 황현욱 대표의 미적 감각을 높게 평가하여 서울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주선한다. 1989년 황 대표는 윤형근의 지원으로 서울 대학로에 인공갤러리를 오픈한다. 1991년 황 대표는 이곳에서 도날드 저드 개인전을 개최한다. 저드는 당시 인공갤러리에 소장된 윤형근의 그림을 보고 황 대표에게 작가를 만나고 싶다고 하여, 윤형근과 저드가 만나게 된다. 저드는 윤형근의 작품에 대해 ‘구조적이고 담백하다’면서 극찬한다. 그들은 곧 친구가 되었고, 저드는 윤형근에게 자신의 뉴욕 파운데이션에서 개인전을 제안한다. 1993년 윤형근은 뉴욕 도널드 저드 파운데이션(Donald Judd Foundation)에서 개인전을 연다. 당시 미국 미술계 인사들은 윤형근의 작품을 극찬했고 저드는 윤형근에게 텍사스에 있는 자신의 또 다른 파운데이션에서 개인전을 제안한다. 그러나 그 다음 해인 1994년 저드가 사망한다. 저드는 임종 전에 텍사스 파운데이션의 윤형근 개인전 추진을 아내 마리안에게 당부하여, 1994년 윤형근은 텍사스 치나티 파운데이션(The Chinati Foundation)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윤형근은 당시 전시된 작품들 중에서 3점을 기증한다. 치나티 파운데이션은 윤형근의 기증 작품을 위한 파빌롱(Pavillon)을 칼 앙드레(Carl Andre) 파빌롱 옆에 만들어 영구 소장한다.
1993년 필자는 인공화랑 황현욱 대표의 주선으로 이우환과 윤형근을 만난다. 당시 이우환은 다음 해인 1994년 대대적인 전시회(국립현대미술관, 현대화랑, 인공화랑)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황 대표는 이우환 개인전을 위한 도록의 서문을 제안한다. 필자가 1년간 집필해서 발행한 단행본이 《이우환의 입장들》(1994)이다. 1995년 필자의 젊은 시절 작품을 거의 모두 소장하고 있는 독일의 구체미술을 위한 파운데이션(Stifuetung fuer Konkrete Kunst)의 반델(Bandel) 관장이 필자에게 개인전을 제안한다. 하지만 당시 필자는 이미 작품활동을 중단하고 평론과 기획을 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반델 관장에게 거꾸로 윤형근 개인전을 제안한다. 반델 관장은 필자에게 윤형근 작품에 대한 세미나를 요청하여, 그 세미나 준비를 위해 필자는 인공화랑 황 대표의 주선으로 윤형근의 작업실 겸 주거지인 서교동 자택을 방문하여 그동안 작업된 거의 모든 작품을 보고 긴 토론을 한다. 필자는 1년간 집필하여 세미나를 개최하고 그 자료를 모아 단행본 《윤형근의 다-청 회화》(1996)를 발행한다.
1996년 윤형근은 갤러리현대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그해 윤형근 가족과 박명자 갤러리현대 대표 그리고 이화익 실장(현재 이화익갤러리 대표)과 필자는 윤형근 파빌롱 오픈에 초대되어 텍사스 치나티 파운데이션을 방문한다. 1997년 윤형근은 독일 구체미술을 위한 파운데이션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당시 개막식에는 윤형근 가족과 갤러리현대 도형태 대표부부 그리고 김창열 화백 등 국내외 인사들이 참석했다.
1993년부터 2000년까지 필자가 만난 윤형근은 한마디로 ‘거목’이었다. 그는 필자에게 늘 지식보다 인간됨이 먼저임을 상기시켰다. 공자의 말을 빌리자면 ‘사람이 어질지 못하다면, 예(禮)는 무엇하겠는가. 사람이 어질지 못하다면 미술을 한들 무엇하겠는가.’ 따라서 윤형근의 대표작 <다-청> 회화는 작가의 꾸밈없는 담백함과 대범한 기질을 담아낸 웅대함으로 나타난다. 윤형근은 자신의 작품관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연은 언제 보아도 소박하고 신선해서 아름답다. 나의 일도 그 자연과 같이 소박하고 신선한 세계를 지닐 수 없을까. 그것은 어렵다. 안된다. 가령 그렇게 원한 대로 된다 하더라도 자연과 같이 언제 보아도 물리지 않는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다. 그것이 내가 바라는 것일 뿐.”●

NEW FACE 2015 유목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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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연의 작업이 미술계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던 까닭 중 하나는 무엇보다 타자 또는 소수 문화에 건네는 그의 시선에 있었다. 동시대미술은 어쩔 수 없이 주류 문화의 반대편으로부터 거슬러 가는 저항적 태도로부터 출현한 ‘변종의 미술’이다. 그러나 교육과 문화제도가 견고해지면서 이러한 비주류적 태도마저도 하나의 관습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문화적 현상에도 불구하고 유목연은 타자를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고 타자와 밀착된 시선을 통해 타인들, 다양한 개인들과 ‘접촉’하였기에 그의 작업은 으스대지 않고 자연스레 소통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 정현 미술비평

‘유케아’식 예술•생존•게임 가이드

최근 작가 유목연의 활약은 두드러진다. <목연포차>는 전국을 누비며 만남의 장을 펼쳤고 작가는 넘치는 아이디어를 쏟아내며 동시다발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각양각색의 형태를 띤 그의 작업은 전체적으로 ‘유케아(UKEA)’라는 자체 브랜드로 수렴된다. 이 콘셉트는 좋은 디자인과 싼 가격, 그리고 무엇보다 손수 조립할 수 있는 가구로 유명해진 스웨덴 가구 브랜드 ‘이케아(IKEA)’를 차용한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브랜드 ‘UKEA’에 대해 “끊임없이 이동하고 정착하지 못하는 삶의 방식에서 오는 불안함과 생존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트레이드 마크”라고 설명한다. 작가의 모든 작업은 쉬운 설명을 담은 소책자 형태의 지극히 개인적인 가이드북에서 시작한다. 벌써 25권이 발행됐다.
가이드북을 토대로 한 작업 방식은 드로잉, 설치, 소설, 영상, 퍼포먼스, 아카이브 등 다양하다. 사진을 전공해 동시대미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는 그는 마치 미술매체 완전정복을 꿈꾸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는 그만큼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고 작업 자체가 절실하다고 설명한다. 작업을 진행할 때마다 직관을 따르고 새로운 매체에 도전하다보니 결과적으로 다른 작가와 유사한 방식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깨닫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당혹스럽기 그지없다지만 일단 필이 꽂히면 돈키호테처럼 돌진하는 모습 자체가 유목연스럽다.
유목연 작업의 특징은 작업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생존 영역, 일상적 경험과 직접적으로 연동되며 예술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작가 역시 “아직도 내가 하는 것이 예술의 영역인가 아닌가에 대한 의문이 있다”고 토로한다. <도시유목서바이벌 가이드>의 경우 작가가 7년간의 회사 생활을 그만두고 실제 노숙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가이드 소책자에는 ‘진통제로 환각제 만들기’, ‘손쉬운 오토바이 훔치는 법’ 등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생존 노하우 등이 소개돼 있다.
슈퍼마켓 카트 위에 만들어진 작은 1인용 이동형 선술집인 <목연포차>는 유목연의 대표적인 작업이자 생계의 수단으로 실제 홍대, 안산 지방 각지를 돌면서 어묵꼬치를 팔고, 술을 파는 등의 상거래를 하며 새로운 만남을 유도했다. 작가는 음식을 팔고 술 한잔 따라줄 때 관람객이 즐거워하고 재밌어 하는 반응에 만족한다고 말한다. 사진이나 회화 같은 작업이 관람객에게 공허한 메시지를 던질 때 관람객과 자연스럽게 만나고 소소하게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는 접점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소중하다는 것이다.
<차 한잔 합시다>에서도 유사하게 이어지는 그의 작업 방식은 그렇다고 예술과 일상의 일회적이고 소박한 만남을 추구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홍대 거리, 이태원 펍(pub) 등 그 자신이 길바닥에서 작업의 영감을 얻은 것처럼 그의 작업은 예술이라는 권위를 앞세우기보다 일종의 오픈 소스로 다양한 사람과 교감하는 데 의미를 둔다. 게다가 <목연포차 창업 가이드북>은 누구나 포차를 만들어 작가 자신처럼 실질적인 생존에 도움을 얻을 수도 있는 실용성을 갖췄다.
한편 <더 아티스트 보드게임>은 작가가 공모에 지원하고 선정돼 레지던스, 미술관 전시 등에 참여하는 현상을 보드게임에 적용한 것이다. 국내편에서 해외편으로 확장되며 작가 생존의 현실적 문제와 제도적인 안착의 관계를 질문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그는 제도권 자체 혹은 제도권에 편승하는 태도를 직접적으로 비판하진 않는다. 대신 그 스스로 생존 게임판의 말이 되는 실험을 거친다.
욕심이 많은 그는 앞으로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도 많다. 사루비아다방에서 열리는 첫 개인전 <모험도감>(5.20~6.20)에서는 지난 4년간 도시 유목생활을 하면서 선보인 다양한 작업을 펼쳐보인다. 이뿐 아니라 앞으로 지금까지 벌려놓은 작업을 보다 깊이 있게 다룰 생각이다. 그리고 새로운 이야기는 가이드북 형태로 계속해서 출간할 예정이다.
이슬비 기자

유목연은 1978년 태어났다. 중앙대 사진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인사미술공간, 대구예술발전소, 경남도립미술관, 금호미술관 등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했다. 2014 중앙미술대전 우수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경기창작센터 입주 작가로 활동 중이다. 올해 7월부터 1년 간 삼성문화재단이 지원하는 파리국제예술공동체 레지던스 입주작가에 선정됐다.

 

NEW FACE 2015 이정형

이정형 인물 (1)

“작가의 작업이 노동의 부산물을 재구성하는 이유, 그래서 그 현장감을 생생하게 드러내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바로 세대의 현실을 예술에 곧바로 투사한 것이다. 지금까지 예술은 순수의식이어야 했고, 사회참여적이더라도 적어도 미감적 형식을 반영해왔다. 이정형 작가의 메타포는 상궤를 완전히 달리 하는 것이다.”
– 이진명 간송C&D 큐레이터

너와 나의 연결고리

영화 <인셉션>에서 수면상태로 들어간 주인공은 강한 물리적 충격을 받아 현실세계로 돌아온다. 영화에서는 이를 ‘킥’이라 한다. 영어로 ‘짜릿한 쾌감’을 뜻하기도 하는데 최근에는 TV에서 셰프가 자신만의 특별한 조리법을 ‘킥’이라 불러 귀에 익숙한 단어다. 이정형의 작업을 보고 있자면, ‘작가의 킥’이 궁금해진다. 순간을 사진으로 포착하는 작가의 조형적 미감은 투박하면서도 세련됐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노동의 중심에서 순간적 찰나를 놓치지 않고 작업으로 연결시키는 전환의 순간, 그 결정적 지점은 무엇일까.
이정형의 작업은 누구보다 일상과의 유착과 단절이 극명하다. 작가는 이른바 생계형 작업과 예술적 작업이라는 두 작업 경계의 묘한 줄타기를 시도한다. 생계를 위한 노동으로 작가는 ‘종합 설치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이곳은 작품의 디스플레이나 전시장 설치 등의 일을 하고 있다. 이정형은 20대 중반부터 유명 작가의 어시스턴트로 활동했다. 작업 설치를 돕다보니 점차 전시장 설치나 공간을 구성하는 일에 대한 도움요청이 잦아졌다. 이 활동은 분명한 노동이다. 전시장은 작품이 진열되고 보여지는 공간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공사 현장이다.
작가는 일터에서 틈나는 대로 사진을 찍는다. 노동하는 사람, 휴식을 취하는 노동자, 노동 이후의 잔재 등 현장에서 벌어지는 시시비비의 순간을 가감없이 담는다. 특별한 연출 없이 휴대전화로 찍은 사진은 기록물에 가깝다. 작가는 그렇게 찍은 사진을 모아 분류한다. 카테고리를 만들어 기록의 현장을 정리한다. 이중 전시할만한 작품을 선정하고 설치작업의 모티프를 삼기도 한다. 이정형의 작업은 날것 그대로의 모습에 가깝다. 이정형 작가는 지난해 아마도예술공장에서 진행한 제2회 〈아마도 애뉴얼날레_목하진행중〉에 참여했을 때 “작품의 뒷이야기가 매우 흥미롭다. 그러나 설명 없이 작품만 봤을 때는 전달이 부족하다”는 의견을 많이 들었다. 이번 윌링앤딜링에서 열리는 그의 첫 개인전 〈파인 워크〉(4.30~5.20)에서 선보일 작품은 그 의견을 반영하여 날것 그대로를 보여주기보다는 가공과 변주를 취하려고 노력했다. 작가는 ‘벽’을 큰 테마로 설정했다. 벽을 칠할 때 사용하는 페인트통을 모아둔 것을 표현한 <Painter>는 마치 작가의 팔레트를 연상케 한다. 또 벽을 칠할 때 사용하는 바퀴 달린 의자는 약간의 변용을 통해 움직이는 가벽의 모습을 갖췄다.
결국 전시가 열리면서 사라지는 사람들의 흔적과 노동의 공을 완성된 전시장에 다시 작품으로 소환한다. 크게 가공을 거치지 않은 날것의 느낌이 오히려 세련된 유머, 지적인 풍자로 다가온다. 그렇다고 그가 사회 비판적인 시각에 초점을 맞춘 작업은 아니다. 작가는 젊은 작가들이 노동과 예술을 병행하는 행위를 부조리게만 인식하지 않는다. 다만 이 둘 사이의 상응을 이끌어가는 교착지점을 찾으려 한다. 물론 2년 전까지만해도 노동과 예술 사이의 괴리감, 그 사이에서 예술가로서의 자신이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닌가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정형은 노동 현장을 예술로 끌어들이면서, 오히려 소재의 폭이 무궁무진하게 넓혔다. 작가는 “일은 작업이 되지만, 작업은 일이 될 수 없다”며 일터에서 얻는 많은 예술적 감각의 순간을 이야기했다.
일례로 공구를 구비하기 위해 자주 들르는 청계천 공구상가에서 나열된 공구들을 보고 어느 순간 영감을 얻는 식이다. 누군가의 눈에는 물건들이 뒤죽박죽 쌓여있는 듯 보이지만 그 속에 숨은 법칙이 있었다. 그걸 발견한 순간 작가는 작업의 룰을 생각해낸다. 한편 공사 현장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공구도 그에게는 특별한 스토리를 담은 예술오브제로서 읽힌다.
노동과 예술의 연결고리를 직접적으로 투사하고 물질적으로 드러내는 이정형의 표현 방식은 숭고한 아름다움의 표현은 아니다. 그러나 노동과 예술의 뫼비우스의 띠 자체가 예술적 숭고함은 아닐까. 그의 작업을 대면한 관객이 작품을 이해하는 ‘킥’이다.
임승현 기자

이정형은 1983년 태어났다. 홍익대 도예유리과와 동 대학원 조소과를 졸업했다. 2008년부터 수차례의 단체전과 세 차례의 공공미술프로젝트에 참가했다. 윌링앤딜링에서 4월 30일부터 5월 20일까지 첫 개인전 〈파인워크〉를 연다.

 

NEW FACE 2015 오완석

전시장 프로필

“나의 관심 주제는 ‘0과 1’, ‘+ -‘, ‘육체와 정신’, ‘직전과 경계’를 통해 바라본 있음과 없음 이다. 작업방식은 평면에서 형상을 오리거나, zero base 퍼포먼스를 하고, 타 작가의 다음 작품에 크기대로 케이스를 만들고, 포장된 상자를 뒤집어서 그것이 가진 외부를 포장한다.”
– 오완석

공간을 만들다, 사유하다 그리고 살피다

“작업은 장소를 만드는 것입니다.”
오완석 작가에게 작업에 대한 정의를 부탁하자 돌아온 대답이다. 대뜸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은 그의 작업이 개념미술의 문법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조형적 의미보다는 관람객이 전시장에서 작품의 요소 주변을 거닐면서 그 사이의 의미를 찾아 나서야 하기에 그랬다. 따라서 오 작가에게 관람객의 반응과 사유가 작품의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오 작가가 말을 이었다. “이는 지리적 위치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심리적 위치 같은 것입니다. 이 심리적 위치를 기본으로 하여 ‘있음’과 ‘없음’이라는 맥락으로 인식이 확장되는 환경을 만들면, 두 발로 서 있거나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이미지와 텍스트처럼 다양한 가능성으로 ‘생각을 만드는 장소’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전시장에 들어선 관객을 고려하는 것이 당연하다. “관객과 장소가 만나서 인식이 확장되는 환경을 작업합니다.”
오 작가의 작품을 대하는 관객의 반응이 궁금했다. 지각되는 공간과 그 안에 직접 들어섬으로써 새로이 생성되는 공간과 개념 사이에서 발생하는 난감함, 당황스러움 등이 예상됐다. “물론, 관객의 반응, 저도 그것이 궁금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말은 관객의 반응을 예상하거나 유도하려는 의도가 없음을 내비치는 것이다. “2012년 작, <중요한 생각만 하는 네모>의 경우 대전에 있는 대안공간 스페이스 씨에서 전시에 앞서 작가 9명을 대상으로 미리 실험을 했습니다. 전시장 바닥에 실을 네모모양으로 펼쳐 놓고 중요한 생각을 하는 곳으로 지정하고, 그곳에 들어가서 서 있는 것입니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나오죠. 실험은 한 시간 정도 진행했습니다.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들어가서 소리를 지르며 욕하는 사람, 등을 떠밀어도 들어가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며 화이트홀이라고 말하는 사람, 시덥지 않게 보는 사람, 들어갔다가 좋지 않은 기억이 생각났다며 실을 헝크러뜨린 사람 등 다양했습니다.” 작가 자신도 실험 대상이었는데 네모 안에 들어가 앉아있거나 왠지 모르게 그 위를 넘어가게 되지 않고 주위를 돌아가게 되었다고. 이 작업은 전시장에 들어온 관객이 전시공간과 유리된, 그러나 연약한 재료로 만들어진 경계를 넘어 완전히 다른 공간임을 인식할 때 벌어지는 현상을 경험하게끔 유도하는 것이다.
그는 작품 <case>를 대상으로 벽면에 “ __가(이) 작품을 만든다면 그 크기는 _×_×_cm이다.”라는 문구를 적어놓고 관객이 사이즈를 적어 내게 했다. 관객이 써낸 사이즈에 맞는 상자를 제작, 전시장에 설치하는 작업이었다. 대부분이 숫자였지만 가끔 “거짓말로 치수를 대답했다”, “난 글 쓰는 사람이다”, “인격을 담는다” 등의 대답도 있었다고. 미술에 대한 상상을 유도하고, 작품 제작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느끼게끔 하는 작업이다. 그래서 <case>를 보고 머릿속에 어떤 형상을 떠올린다는 의미는 새로운 무엇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비슷한, 존재하는 무엇을 떠올린다는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술에서 ‘창작’이, ‘관념의 형상화’가 바로 이러한 내용이 아닐까? 공감한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한 오 작가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래서인지 저 또한 이 작업을 두고 미술 그 자체의 시스템을 작업하는 것인가? 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사실 크기를 정확히 하는 것은 이 작업에서 중요하지 않은 작은 부분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작업으로 펼쳐놓는 작가에게 궁금한 것이 있다. 현실의 생활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것. “전시장에 작업이 올라가는 것 자체로 작품이 팔린 것으로 생각합니다. 전시를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 마음에 불안감이 듭니다.” 이 불안감은 현재 우리 미술시장과 문화예술 풍토에서 작가가 극복하기 결코 만만찮은 일이다. 올해 오완석 작가가 이 불안감을 극복하는 과정은 하반기에 대전 쉐마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등지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황석권 수석기자

오완석은 1983년 태어났다. 충남대 조소과를 졸업했다. 2013년 카페 안도르에서 첫 개인전 <0 + – -0>을 열었다. 또한 <닫힌 스튜디오>(스페이스 씨, 2012), <집 그리고 길>(대전시립미술관, 2013), <흔들리는 경계>(테미예술창작센터, 2014), <빛2014, 하정웅 청년작가초대전>(광주시립미술관, 2014) 등의 기획전과 그룹전에 참여했다. 2014 하정웅 청년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대전에서 작업하고 있다.

36.5 _ metronome sound, objet _ 영상설치 _ 2013

< 36.5 > metronome sound, objet 영상설치 2013

 

SPECIAL ARTIST 김주호

테라코타를 비롯해 나무와 돌, 그리고 단단한 철판에 이르기까지 조각가 김주호가 다루는 재료는 다양하다. 하지만 그 재료가 무엇이든 그가 작품에서 이야기하는 주제의식은 초지일관 뚜렷하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관찰과 사유로 포착한 세상의 표정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김주호의 작품은 내용과 형식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다. 작가정신과 표현방식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김주호의 작품세계를 탐구한다.

말하는 조각들

성완경 인하대 명예교수

김주호 작품의 출발점은 ‘지금 여기’이다. 가까운 곳에 눈길을 주면 세상이 돋보기로 보듯 새삼스럽게 보인다. 거리의 삐까 번쩍 요란하고 누추한 간판들도 새롭게 보인다. 소통은 그의 작업의 핵심이다. 돋보인다는 것은 혼자서 되는 일이 아니고 나와 상대방이 서로 궁합이 맞았을 때 가능하다. “내 삶에서 나에게 관심을 끌려는 어떤 것을 알아봐주는 것, 이것이 소통의 기본이다”라고 그는 생각한다. 꼼꼼히 보는 것, 일상 속을 걸으며 끊임없이 찬탄하는 것, 기어코 무언가 찾아내 무릎을 치고 사랑하고야 마는 것. 어쩌면 이것이 그의 작업의 민중적 지평이자 발견자로서의 전위미학의 핵심일지도 모르겠다. 요즘 막걸리엔 ‘생’자가 붙은 생막걸리가 대세인데 그 생막걸리병의 다양한 라벨들을 보며 그는 삶의 충동과 희열을 느낀다. 그리고 배운다. 발견을 하고 철학을 한다. 대중적 삶의 지혜와 이름 없는 인생들의 에너지에 관해. 그것은 사랑이다. 그에게 소통이란 이처럼 사랑과 발견에 기초한 것이다. 항상 눈 맞추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것. 이것이 김주호 작업의 출발이다. 그의 조각이 처음부터 끝까지 말하는 조각이기를 열망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말하는 조각이자 춤추는 조각, 사랑스럽게 몸을 뽐내는 조각, 타자의 시선을 받으며 행복을 뽐내는 신체들이다. 몸짓, 함박웃음 혹은 미소, 교환, 발화로서의 조형.
그의 조각 재료는 흙, 돌, 나무, 쇠, 발견된 오브제 등이다. 흙을 원통형으로 감아 쌓아 올린질구이(테라코타) 인물상들은 사랑으로 충만해 있다. 이 시기에 통나무에 작업한 나무 조각들도 재료만 바뀌었지 기본적으로는 통 형태의 질구이 작업과 유사한 세계를 보여준다. 따뜻하고 밝고 해학에 넘치는, 삶의 다양한 표정들을 뿜어내는 작품들이다. 불규칙한 나뭇가지들을 자유롭게 이용한 최근의 ‘책조각’들은 더 날렵하고 더 언어적이다.
2012년 6월 관훈미술관과 나무화랑 개인전 때 나무화랑 쪽에 설치된 나무에 채색한 소품 조각들을 말하는 것인데 이 조각들은 모두 책 모양으로 채색되고 글씨가 쓰여진 나무판자 위에 놓였는데 책 표지에 <그때 그 사람들-100년>, <너에게 침을 뱉어라>, <남북 왜 악수하기 힘들까>, <미국이라는 나라> 또는 <Folk Art in Korea>, <Sculptures from objects>, <Art in Nude> 같은 단어가 책 제목처럼(그리고 작품 제목처럼) 적혀 있는 작업이다. “책이 말을 한다/ 눈길을 끄는 표지/ 서서히 그들의/ 몸짓이 일어난다./ 손짓, 몸짓하며 나온다./ 광복 60년의 몸짓이/ Nude의 매혹적인 눈길도/ 책이 내 손길보다/ 먼저 와 있다.”(작가의 작업노트)
최근의 철판작업들은 드로잉 선을 따라 철판을 도려내어 그것들을 연결하고 구부려 공간 속에 펼치거나 세워놓은 작업인데 이 같은 발화의 새로운 실험을 보여준다.

2012년 관훈갤러리에서 열린 작가의 개인전  전시광경. 앞쪽에 보이는 작품 (MDF에 에나멜페인트 2008)는 부천천만화박물관에서 열린 에서 처음 선보인 작품으로 만화가 윤승운의 캐릭터를 응용했다

2012년 관훈갤러리에서 열린 작가의 개인전 <사람사이> 전시광경. 앞쪽에 보이는 작품 <룰루 하하>(MDF에 에나멜페인트 2008)는 부천천만화박물관에서 열린 <타임캡슐을 열다>에서 처음 선보인 작품으로 만화가 윤승운의 캐릭터를 응용했다

  64×21.5×16cm 혼합토(섭씨 1070도) 2015

<창문-2> 64×21.5×16cm 혼합토(섭씨 1070도) 2015

작가와 닮은 작품
김주호가 살고 있는 곳은 강화도다. 강화도에서도 아주 깊은 곳이다. 김주호는 강화도에 20년째 살고 있다. 강화도에서 지금은 퇴직한 직장(보성고등학교)이 있는 서울까지 두 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출퇴근했다고 한다. 최근 김주호는 생애 첫 레지던시를 인천아트플랫폼에서 했다. 흔치 않은 일이기도 하고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그의 나이를 생각할 때 특히 그러하다. 그러나 그에겐 뚜렷한 이유가 있었다. 그곳의 잘 갖추어진 철조작업장에서 작업할 수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이유였다. 플라스마 용접 절단기, 크레인 등 장비가 잘 갖춰진 그곳에서 그는 봄과 여름 6개월 동안 땀 흘리며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나는 그 결과물로서의 작업을 두 전시장에서 볼 수 있었다. 하나는 서울 북촌의 가회동 60, 다른 하나는 평창동의 김종영미술관이었다. 앞의 것은 개인전이지만 규모가 아주 조촐했고 뒤의 것은 5명을 초대한 기획전(<인간 그리고 실존전>)의 한 부분이지만 규모도 제법 컸고 작품수도 더 많았다. 작품은 모두 철판 용접 환조와 드로잉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드로잉은 빠르고, 날카롭고, 자유롭고, 도상학적으로 풍부하고 흥미로웠다. 철판조각은 바로 그 드로잉들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발화하는 조각, 녹아내리며 가스 방울이 되어 떠오르는 발포제 약과도 같은, 혹은 만화의 말풍선 같은, 혹은 만화의 그림 글자나 동작선 같은 그런 상태를 보여주는 조각들이다. 그 속에는 만화가 있고 언어가 있고 기호가 있고 연극이 있고 퍼포먼스가 있고 몸짓이 있고 패션이 있다. 풍물놀이의 도리깨질이나 목구멍을 튀어나온 밥풀이나 (만화의) 말풍선 같은 것들이 턱턱 들어가 있는 듯한 조형들이다.
김주호는 발견하는 사람이다. 김주호의 발견은 대개 우연한 일이 계기가 된다. 앞서 잠깐 얘기한, ‘생生’막걸리를 마시다가 ‘생生’자 들어간 막걸리가 많다는 걸 발견했다는 얘기로 잠시 돌아가 보자. 그 발견 후 2010년 봄부터 그는 생자 들어간 막걸리 통을 모았다. 국순당 생막걸리, 서울 生生막걸리, 生장수막걸리, 덕산 生막걸리강화, 쑥生막걸리, 생배다리막걸리 등…. 그러면서 김주호는 거기서 우리 시대의 맥을 읽을 수 있다는 발견을 한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생은 여러 분야에서 쓰여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생자가 붙은 단어를 좀 더 나열해 보면, 생비지, 생고기, 생금(치약), 생생우동, 얼큰 생라면, 순한 생라면, 생칼국수, 생짜장면, 생, 생머리, 생방송, 생생 정보통, 생생도시…. 결국 그는 생은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왔고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여기서 생자 바람이 막걸리에 집중되면서 더 확실히 맥을 잡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生을 이렇게저렇게 분석해보는 것은 작품 제작에 도움이 되어서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 다음 말이 중요하다. “작가는 자기 나름의 확신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을 자기 주변에서 찾을 때 더 실감나는 작품이 된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가 찾는 것은 생생세상, 생생풍경이다. 일상 속 지금, 지금 여기의 생생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다.
“생생한 옷매무새, /마음껏 자랑하는 당당한 포즈, /길거리 여기저기 /사람이 아름답다 /꽃보다” 바로 이것이 생생풍경이다. 그의 중립적으로 품위 있고 우아하고 당당하고 아름다운 질구이 인물상들이 뿜어내는 무척 섬세하고 편안하고 당대적인 아우라의 핵심이 이것이다. 흙의 터치, 사실과 과장, 포즈와 표정, 단순화, 장신구, 질구이의 질감을 관통하는 것은 그야말로 당당하고 편안한 당대의 미학이다. 놀라운 성취이다. 목조와 석조 작품에 대해서도 비슷한 얘기를 할 수 있다.
이 같은 성취의 바탕에는 삶의 진실과 소통에 대한 그의 소박하고도 질긴 믿음과 추구가 자리하고 있다. 그는 ‘어깨 두들기며 걱정 말라는 든든한 이웃’을, ‘(그들과) 함께 하는 흐뭇함’과 ‘따스한 이야기’를, 그리고 ‘어제가 좋아 보이고 내일이 괜찮을 것 같은 지금 여기’를 사랑하는 작가이며 답답한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과 사람에 대한 신뢰를, 그리고 전통적 삶에 대한 신뢰감을 갖고 있는 이웃이다. 본질적으로 그의 작업은 웃음과 사랑의 회복을 선사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서로 알아보며 “여기요!”라고 외칠 때 인간의 행복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작가. 그것이 김주호다.
2002년 <제4회 광주비엔날레>에서 김주호는 5·18 때 헌병대가 쓰던 건물에서 열린, 필자가 기획한 프로젝트3 <집행유예전>에 출품한 적이 있다. 그때 그는 사병휴게실에 천으로 만든 실물 크기의 인물상 5점을 자유롭게 배치하여 숨 막힐 듯 음울한 이 건물에 유머러스한 공간을 연출했다. 당시 이 작품 제작을 위한 현장 설명회에 참석하고 나서 그가 쓴 ‘친절하고 자세한 답사일기’에 이런 대목이 적혀 있다.
“자유관의 다큐감상. 5·18의 진실이 만천하에 밝혀져 반드시 정의가 승리할 것이라는 희망. 법정에 선 전직 대통령. 그 수뇌들. 모두 지금은 대접 받으며 잘살고 있다. 달라진 것 없잖아. 오, 이 깨끗한 역사. 하얀 브로크 벽면. 누군가 낙서를 할 만한 브로크 벽면인데도, 저 흰 칸. 칸. 칸. 아무도 손대지 않은 관심 밖. 그 옆 골프장에는 평일인데도 고급 승용차가 꽉 찬 것과 참 대조적이군. 깨끗한, 조용한 민주화의 현장. 권위와 폭력과 위선과 망각의 건축물을….조롱하자! 자유롭게, 그리고 즐겁게.”
얼마 전 내가 본, 김종영미술관의 <인간과 실존전>은 그때로부터 11년 후에 열린 전시인데 이 전시 카탈로그에 김주호는 <나는 본다>라는 제목으로 ‘작가의 말’을 기고했다. “외국 관광객이 제일 가보고 싶은 곳이 판문점이라 한다. 그럴 테지 선 그어놓고 넘어갔다 하면 못 돌아올 수도 있다는 게 희한하게 보일 게다. 세계가 하나다 하고 마음대로 왔다갔다 하는데 세상에 아직도 이런 곳이 남아 있다니. 이런 구경거리의 대상이 되고 있는 밑바탕에는 우리의 모순이 아무렇지 않게 자리 잡고 있다. 옆자리에 앉은 분이 갑자기 큰소리로 말한다. ‘… 아 글쎄 통 무슨 당인가 하는 거 뭐야 이 새끼 있잖아. 무기까지 있다 하잖아. 그 새끼 같은 놈이 아직 …’
재판도 받기 전에 국민재판에서 판결이 났다. 나는 그냥 듣고만 있다. 우리의 아픈 현실이 내 눈에 차츰 다가온다.” 김주호의 발견이 편안하고 행복한 것에만 머물지 않음을 이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분단 현실의 모순과 그것이 야기하는 불편함이나 낯섦을 우리 모두 비껴갈 수 없듯이 그의 시선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김주호의 집에 갔다. 그의 아내가 차려준 밥을 먹었다. 밥상은 그와 그의 아내의 인상만큼이나 정갈했다. 동네사람들하고 뚝딱뚝딱 지었다는 그의 집은 2개 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 겸 지하 공간이 그의 작업장이고 그 위층이 살림집이다. 마당 한켠에는 흡사 농가처럼 허름한 비닐하우스가 있고 그는 그곳에서도 작업을 하는데 겨울에는 주로 별채로 지은 작업장 안에서 한다고 한다. 살림집 아래층이나 별채 작업장 건물이나 모두 작품으로 가득 차 있다. 두 공간 모두 한 개인의 오랜 작업과 시간이 숨 쉬는, 작은 신전이나 성소를 보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작품은 마당에도 있는데, 그것들은 또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소박하게, 또는 태연하게 비바람과 햇빛에 온몸을 내놓고 있다.
김주호는 조용한 사람이다. 그는 욕심이 없고 성의를 다해 사람을 대하고 풍족하지 않은 삶이지만 창호지의 여백처럼 정갈한 여유가 몸에 밴 사람이다. 그의 작품들 중에서 입가의 밥풀 같은 미소가 절로 나오게 하는 작품들은 바로 그런 ‘정갈한 여유’에서 나오는 유머인지도 모르겠다. 바쁘거나 강파른 성정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유머 말이다. 그의 작품들은 호호호, 푸하하, 훗후후, 낄낄낄, 룰라하하, 갈갈갈 거리며 말을 건다. 그의 인물들은 정답다. 김주호의 유머는 혼자 즐기는 유머가 아니라,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의 유머다. 그의 다양하고 방대한 테라코타 작업들에서 보이는 인간군상의 표정과 몸짓이 바로 그런 종류의 유머인 셈이다. 그것들은 드로잉 철조에서 다시 새로운 표정을, 좀 더 낄낄대고 풍자적이고 날카로운 유머를 새롭게 펼쳐 보인다. 김주호는 ‘지금’, ‘바로 여기’의 작가다. 김주호야말로 그 자신이 생막걸리이고 생생작가다. ●

김종영미술관에서 열린  전시광경. (앞쪽) 스틸 패널116.5×39×8cm 2013,  종이에 아크릴 150×300cm 2013

김종영미술관에서 열린 <인간 그리고 실존> 전시광경. <휘날리다>(앞쪽) 스틸 패널116.5×39×8cm 2013, <금수강산> 종이에 아크릴 150×300cm 2013

* 이 글은 <2013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프로그램> 결과보고 및 전시도록에 실린 필자의 글을 재 수록한 것입니다.

 

ARTIST REVIEW 김종인

바우하우스 교장을 지낸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는 “건축가, 조각가, 화가, 우리 모두는 공예로 돌아가야 한다. … 예술가와 공예가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예술가는 고귀한 공예가이다…”라고 말했다. 작가 김종인은 도예가 혹은 공예가라는 제한한 타이틀로 규정지울 수 없다. 그의 작품은 실용성과 조형성, 그리고 실험성과 예술성을 한 몸에 지닌 확장된 개념의 공예조형예술품이기 때문이다. 공예(가) 본연의 정체성을 확고히 지키며 일상의 삶과 깊이 관계 맺고 있는 김종인의 작품세계를 소개한다.

살아 있는 도자기, 생각하는 작가

조혜영 2015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시감독

역사적으로 또는 미술사조적으로 볼 때 미술의 여러 장르에 걸쳐 다양한 성격의 작가들이 존재해왔다. 어떤 작가는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작품만 열심히 했다고 한다면, 의식과 사상을 바꾸는 것에 초점을 두고 새로운 흐름을 선동하는 작가들도 있었다. 작가 김종인은 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단지 작품만이 아닌 도자기분야와 공예분야 안에서 시대와 접목되는 새로운 시도를 지속적으로 해왔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 김종인은 자신을 포함해 한국의 여성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 김종인은 여성작가로만 구성된 도예그룹 ‘흙의 시나위’를 결성해 한국 여성의 사회적 위치-정신 등에 대한 고민을 작업을 통해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1990년대 후부터는 한국의 현대공예를 대중에게 알리고 좀 더 가까이 다가갈 방법들을 지속적으로 모색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마니미니재미 가게”이다. 마니미니재미는 ‘많이, 작게, 재미있게’를 뜻한다. 그런가 하면 김종인은 이 시기에 이미 인터넷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소설네트워크의 중요성을 강연을 통해 전파하고 있었다. 인터넷과 공예를 결합시켜 활성화하는 방법을 모색한 것이다. 2000년대에는 본인이 본보기가 되어 도자의 가치 제고 및 활용 방안에 대해 고민했고 서울여자대학교 미술대학 공예학과 교수로 부임한 후 후학들에게 현실적으로 생업에 필요한 교육을 해왔다. “세라믹 클라스Ceramic Class”라는 제목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개인전을 열었으며 전시 현장에서도 수업을 진행하는 등 살아있는 미술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제자들과 작가들에게 믿음을 주고 영향을 주면서 지금은 훌륭한 멘토로서 김종인만의 팔로잉following이 형성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2년 갤러리 세인에서 열린 에 선보인 인체 모티프 작품

2012년 갤러리 세인에서 열린 <세라믹 클라스Ⅱ>에 선보인 인체 모티프 작품

컵이나 접시처럼 일상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을 이용한 설치 작업을 선보인 2013년 아원갤러리 개인전 광경

컵이나 접시처럼 일상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을 이용한 설치 작업을 선보인 2013년 아원갤러리 개인전 광경

김종인을 생각하다
김종인하면 우선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한 여성의 모습이 그려진다. 독특한 모양의 안경을 착용하는 것이 취미이며 짧은 머리와 헐렁하지만 전체적으로 조화가 잘된 의상의 코디로 다소 중성적으로 느껴지는 외모는 작가로 살아 온 그녀의 경험들을 대변해준다. 필자는 1990년 중반 당시 최고의 한국 현대도자 행사 중 하나로 여겨졌던 <진로국제도예지명전>을 통해 김종인을 처음 만났다. 그때의 인상적인 모습이 지금까지 나의 뇌리에 남아 있다. 우선 김종인은 노력하는 사람이다. 어느 한 부분도 소월하게 넘어가는 법이 없다. 작업에 대한 열정, 후학들에 대한 애정, 한국 미술에 대한 작가로서의 책임 등 혼신을 다해 매일매일 노력한다. 그런 모습 뒤에는 아무도 모르는 인내와 노력의 시간들이 지지대처럼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을 것이다.
1990년대 한국의 현대도예는 조형적 표현에 집중했기 때문에 현대도예 작가로 활동하던 사람들은 모두 조형적 작업을 했다. 여기서 말하는 현대도예 작가란 대학에서 도자전공을 한 사람들을 말한다. 미국의 피터 볼커스Peter Voulkos의 영향을 받아 196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조형에 대한 추상적 표현 즉 쓰임이나 기능적인 도자가 아닌 흙이라는 재료적 물성을 이해하고 그것에 집중된 다양한 표현들이 1990년대 한국에서 시도되었다. 당시 한국의 현대도예는 미국의 로버트 아너슨Robert Arneson, 리처드 쇼Richard Shaw, 커크 맹거스Kirk Mangus와 같은 작가들의 추상 표현적 도예에 영향을 받았다. 도자를 공부하던 많은 학생이 조형적 도자의 본고장인 미국 서부의 대학들로 유학을 가던 시절이었다. 그런 흐름 안에서 김종인은 미국을 선택하기 보다는 영국으로 건너가서 공부를 했다. 당시에는 영국으로 미술공부를 하러 가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영국에서도 마찬가지로 미국의 영향을 받아 도자분야의 작가가 조형적 표현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만큼 흙이라는 매체로 거대한 작품을 만들지는 않았다. 1990년대 영국 조형적 도자분야의 대표 격인 질 크롤리Jill Crowley, 모 접Mo Jupp, 파멜라 룽Pamela Leung, 마틴 스미스Martin Smith가 활동하고 있었으며, 김종인은 당시 골드스미스 대학Goldsmiths, University of London에서 공부했다. 매체의 다양성 즉 흙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재료를 혼합해서 사용하게 된 김종인의 작품적인 시도는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골드스미스 대학은 미술분야에 자유롭고 열린 교육을 하기로 유명하다. 하고자 하는 개념과 생각만 뚜렷하면 진보적이고 실험적인 표현을 제재하지 않는 미술교육으로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스티브 매퀸Steve McQueen과 같은 훌륭한 작가들을 배출했다. 따라서 김종인의 많은 실험은 여기에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했을 것으로 예상한다. 골드스미스에서 공부를 마친 후 김종인은 도자로 잘 알려진 영국 웨일스 카디프 미술대학교Cardiff College of Art and Design, Metropolitan University에서 석사학위를 이수했다. 지금은 카디프 미술대학교 하면 도자분야로 이름이 알려져 있지만 당시에는 한국인이 많이 가지 않는 곳이었다.
영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김종인은 본인의 여성성에 대한 고민을 보여주는 여성 인체 작업을 주로 했으며 전시를 통해 선보였다. 설치미술 개념으로 여성의 인체와 관련된 사물found objects을 특정 공간에 배치하면서 한국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여성성을 표현하고자 했으며 같은 주제로 여러 번 전시하면서 생각이 정리 된 듯하다. 실제보다 더 큰 사이즈의 여성 인체를 제작하여 도자 고유의 장식기법인 투각기법으로 표면을 장식하기도 하고, 인체를 공중에 띄우기도 했다. 흙을 사용했으나 마치 나무처럼 보이기도 하고, 금속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작품은 마치 태고의 원형을 간직한 아프리카의 나무 조각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인체 작업을 하던 시기에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의미에서 본인의 가족사를 보여주는 설치 전시도 기획한 바가 있다. 사진과 다양한 사물 그리고 김종인 특유의 인체형상들로 전시가 이루어졌다.
그 외에 김종인은 실용성을 기반으로 하여 물레고 용기 형태들을 제작했다. 푸드스타일리스트와 협업해 식기세트를 제작했는데 이것은 당시 MBC 드라마 <궁>의 소품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IMF 외환위기 이후 조형적인 작업보다는 다시 실용적인 도자기로 돌아가는 흐름에서 맞추어 김종인은 갤러리 현대, 목금토木金土갤러리 등에서 실용적인 작품을 전시했다. 김종인은 색이 짙은 점토를 주로 사용하는데 특히 붉은 점토를 좋아한다. 발색이 효과적이어서 표면 장식을 하기에 적절한 점토이다. 영국에서 배운 색 사용 기법을 한국의 다양한 장식 기법에 접목시켜 화려하고 따듯한 느낌의 장식으로 애호가들의 눈길을 끌었다.
최근에는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다양한 사물found objects로 해학적인 얼굴표정과 인체를 만들어 군집을 이룬 설치작업을 한다. 마치 키스 해링Keith Haring 장 미셸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의 작업을 연상시키는 그라피티graffiti 작업과 유사한 표현을 입체적으로 시도한다. 미술 장르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현대에 김종인은 도예 또는 공예 작가로 정의 내리기보다는 다양성을 추구하고 새로운 표현을 시도하는 작가로 볼 수가 있다.
공예페어-마켓은 최근 우리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접할수 있는 행사이지만 1990년대 후 2000년대 초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김종인은 공예를 활성화하는 시도로 “마니미니재미 가게”를 진행했는데 처음에는 전시 개념으로 작게 시작한 것이 점차 규모를 키우고 공예분야를 전반적으로 다루면서 마켓 개념으로 브랜드화되었다. 이렇듯 현실적 접목을 시도하는 김종인은 공예인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있으며 생업이 중요한 젊은 작가들에게 하나의 돌파구를 보여주었다. “마니미니재미 가게”를 기획할 때마다 참여 인원이 증가하고 판매도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지금은 홍익대 주변이나 대학로 등 여러 장소에서 크고 작은 공예페어가 열리지만 10년 전만 해도 흔하지 않았다. 현재는 또 다른 모습으로 “마니미니재미 가게”를 선보이기 위한 구성을 하고 있으며, 시대에 맞는 새로운 모습이 기대된다.
도자기를 판매하고 상품화하는 작업은 작가들에게는 절박한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작가 김종인은 이러한 문제를 깊이 인식하고 작업에서 늘 현실과의 접목을 시도한다. 얼마 전 갤러리 세인에서 개최된 기획전시에는 ‘병Bottles’의 형태를 주제로 하여 화려하고 따듯한 장식이 돋보이는 작품을 선보였다. 상업성과 작품성이 물과 기름처럼 나눠지는 것이 아닌 시대의 흐름 또한 녹여낸 조화로운 모습을 선보였다.
작가 김종인의 작품에서는 늘 신선한 시도와 변화를 엿볼 수 있어, 애호가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던 한국의 도자기 분야를 포함한 예술분야를 보다 효과적이고 실질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는 시도들이 앞으로도 꾸준히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김종인은 만들고 가르치고 느끼기를 멈추지 않는 작가임이 분명하다. ●

2015년 2월 27일부터 3월 13일까지 갤러리 세인에서 열린 개인전 에 선보인 ‘병(Bottle)’ 시리즈 전시광경

2015년 2월 27일부터 3월 13일까지 갤러리 세인에서 열린 개인전 <세라믹 클라스Ⅴ>에 선보인 ‘병(Bottle)’ 시리즈 전시광경

김 종 인 Kim Jongin
1957년 태어났다. 서울여자대학교 공예학과와 University of London, Goldsmiths’ College, Postgraduate Diploma in Ceramics, South Glamorgan Institute Higher Education, MA in Ceramics를 졸업했다. 1990년 공간화랑에서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2회 개인전을 열었다. 2007년부터 <마니미니재미가게>를 기획했고, 현재 서울여자대학교 미술대학 공예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ARTIST REVIEW 박미화

2013년 갤러리 담에서 열린 개인전 전시광경

2013년 갤러리 담에서 열린 개인전 전시광경

작가 박미화는 자신의 작품을 ‘마음의 기록’이라고 설명한다. “내 작업에서는 다양한 물질(재료)이 등장한다. 흙, 모래, 시멘트, 종이, 스티로폼, 나무 등. 각 재료는 그만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다른 목소리들은 결국 한 가지 소리를 내게 된다. 그 소리는 다름 아닌 나의 ‘마음’이다. 따라서 어떤 재료를 사용하든 늘 한 가지 흐름을 가져가도록 노력하고 있다. 물질들이 내 마음과 만났을 때 내 작업은 관념이 아닌 살아있는 증거로 남게 된다. 다만 ‘물질’과 ‘관념’의 유혹에 너무 깊이 빠지지 않고, 내가 표현해야할 생명에 대한 예의를 지켜나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물질과 정신이 어우러진 박미화의 작품세계를 살펴본다.

물질에 새긴 마음의 기록

박영택 경기대 교수

흙은 질료덩어리다. 그것은 본래의 형체가 없다. 물의 농도에 따라 질퍽이고 물컹하다가도 단단해지는가 하면 말라버리며 균열을 일으키다 먼지로 흩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불을 받으면 더없이 단단해진다. 물과 불, 공기의 양에 따라 흙은 자유자재로 변화무쌍하다. 따라서 흙은 가변성이자 본래의 확고한 자기 정체성으로서의 물질에서 벗어나 있다. 그것은 여백 같은 물질이고 구멍과도 같다. 고형과 액체 사이에서 유동하는 물질이 흙이다. 흙의 이 수동성은 외부 환경을 자기 온몸으로 끌어안으며 수시로 몸을 바꾸는 넓고 깊은 포용성과 맞닿아 있다. 가연성을 지니며 더없이 활성적인 물질인 흙은 미술에서 가장 흥미롭고 매력적인 재료이다. 그것은 보는 이를 상상하게 하고 그 손길과 육신의 노동을 받아들이며 원하는 형상으로 마음껏 변할 순종의 마음으로 편하게 자리한다. 흙을 다루는 이들은 미지의 표정으로 질펀한 이 촉각적인 물질을 주무르고 쳐대고 굳혀서 원하는 상 하나를 만들어가는 체험, 신비스러운 유희에 빠진 이들이다. 그 체험은 흙으로부터 나와 그와는 전혀 다른 물질로 환생하는 기이한 경험이자 세계의 기원을 이룬 창조주의 능력에 근접한 매혹적인 행위, 놀이이다.

소녀상__조합토1220도산화소

<소녀상> 조합토, 1220도 산화소성 45×21×14cm 2015

흙과 불 그리고 형상
박미화의 작업은 흙(물질)으로부터 시작한다. 그에게 흙은 모든 상념과 상상력을 가능하게 해주고 그로부터 발아한 상을 받아내는 한편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작가는 흙에 숨을 불어넣고 자신의 온기를 밀어넣어 저 흙과 자신의 마음과 정신(관념)이 맞닿은 접점에서 파생한 결과물을 조심스레 건져 올린다. 그것은 작가의 계획된 의도나 목적에 부합하기보다는 흙 자체의 본성과 작가 자신의 성향이 손상되지 않는 지점에서 밀려나온 것들이다. 흙으로부터 출발하는 박미화의 작업은 흙의 본성과 느낌, 그 상태를 가능한 유지하면서 그로부터 발아되는 이미지를 따라가는 여정이다. 흙과 함께 다루어지는 모래, 시멘트, 종이, 스티로폼, 나무 등의 물질 또한 동일하다. 자신의 상황에 맞게 여러 물질을 매만지며 그 물질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밀어넣는다. 작업이란 결국 작가의 몸과 마음이 또 다른 물질에 기생해 나가는 일이고, 그 재료들을 자신만의 체온, 마음의 결, 음성을 드러내는 일이자 자신의 몸을 갖고 물질로 들어가는 일이다. 그는 자신의 삶의 반경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소박한 물질을 자신만의 감각으로 매만져 내놓는다. 희한하게도 그 모든 것은 흙의 맛을 물씬 풍기며 아득한 시간의 자취와 생명체에 대한 경의와 예의로 가득하다. 어떤 물질을 다루든 결국 흙의 색채, 질감, 맛이 나게 다룬다. 자신만의 감각, 색깔, 흐름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전시장 전체로 확산되는 작품 설치에서도 엿보인다. 역시 공간을 자신의 흐름으로 조율하고 있다. 이처럼 물질을 생명체처럼 다루며 그 위에 생명의 흔적, 기운을 절박하게 올려놓고자 하는 작가는 자신의 육체와 기억에 따라, 육체의 기억에 따라 그 물질을 인식한다. 작가는 의식하는 사람이자 물질로 사유하는 이다.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생명에 대한 예의”(작가노트)다. 삶에서 마주한 다양한 사연, 타인의 상황, 비극과 참상들 그리고 책(문장)과 사진에서 영감을 얻은 것들이 작업의 단서로 풀려나온다.
박미화의 작업은 채색 테라코타가 주가 된다. 그 외에 판(나무판, 종이, 스티로폼 등)에 채색을 입히고 긁고 파내는 기법을 통한 회화작업이 함께 한다. 근작에는 나무와 풀, 야생화, 손과 발, 사람의 얼굴, 숫자와 문자들이 오래된 느낌을 주는 물질의 표면에 새겨져있다. 사라진 생명체들, 세월호의 비극이 참혹하게 새겨져 있다. 소멸된 생명체에 바치는 진혼의 성격이 강한 작업이 주를 이룬다. 물질들이 작가의 심정을 반영하는 존재로 탈바꿈한다. 변신을 거듭한다. 한편 테라코타작업은 조합토로 성형된 형태에 화장토를 바르고 초벌한 후 다시 화장토를 발라 섭씨 1,200도에서 소성한 것이다. 뜨거운 불을 맞아 성형된 흙은 새로운 생명체로 탄생한다. 온기를 품은 흙이 사람과 동물, 식물의 형상이 되고 그 무엇인가를 연상시키는 오브제가 되었다. 색채에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시간의 흐름을 비벼 넣기 위해, 상처를 올려놓기 위해 화장토를 바르고 소성하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했으며 착색한 나무나 스티로폼의 표면에는 수없이 칼로 긁고 파내는 과정을 올려놓았다. 모두 오랜 시간이 경과하는, 지루하고 참을성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작가는 작업을 자신의 의도나 목적에 종속시키기보다는 재료 자체의 발언을 존중하고 이념이나 논리, 개념을 앞세우기보다는 재료와 자신이 만나 불가피하게 이루는 것을 용인해내고자 한다. 작업들은 암시적이며 지워진 듯, 미완성인 듯 혹은 인공과 자연의 경계가 지워진 상황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미감으로 가득하다. 모든 작업은 흙 자체가 지닌(혹은 흙의 느낌으로 가득한 맛) 소박하고 무심하게 주무르고 구워낸 흔적을 지문처럼 지녔다. 흙과 흙 이외의 물질을 다룬 입체나 부조, 평면작업 모두가 회화적인 분위기와 오래된 흔적을 두텁게 지니고 있다. 표면의 균열과 탈색되거나 희박한 색채로 인한 색감이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드리워준다. 무심한 제스처와 자연 그대로의 물성을 끌어내면서 수수께끼 같은 형상과 표정, 신비스러운 색채 역시 가득 안겨주고 있다. 흡사 오래된 흙벽에 난 알 수 없는 스크래치나 부분적으로 박락된 벽면의 느낌이 나기도 하고 성스러운 분위기도 풍겨 나온다.
특별한 목적이 배제된 상태에서 자신의 마음속에 간직한 상, 원형 같은 이미지를 반복해서 호출해내고 이를 자연스럽고 무심하게 빚고 불에 굽거나 표면 처리를 해서 가능한 한 오랜 시간, 낡고 퇴락하고 박락된 느낌으로 응고시킨 이미지, 물질들이다. 그것은 수백 년, 수천 년 땅속에 있다. 이제 갓 나와 핼쑥해진 얼굴로 우리를 맞이한다. 자신의 생애를 이루었던 시간의 결과 자기 몸이 기억해내는 모든 것을 호명해 이를 흙과 불로 이겨 만든 것들이다. 개별적인 형상들, 흙으로 구워낸 오브제들은 마치 특정 텍스트의 행간을 암시하는 낱말이나 부호들처럼 전시장 공간에 흩어져 있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거나 화산재를 맞거나 깊은 지층 속에 박혀있던 것들이 출토되어 햇살 아래 파리하게 자신의 몸을 드러내는 장면이고 특정한 성소에서 나름의 기능을 했던 이미지들이 이제는 사라져버린 옛 공간을 추억하며 졸고 있는 듯 하다. 작가는 “얼마나 많은 내가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의 삶이 쌓여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날의 심상心象에 따라 흙속에 그려지는 이미지다. 그 잔상이 사라지기 전에 흙 위에 손가락으로 형태를 그리고 나무칼로 흙을 잘라낸다. 수수께끼 가득한, 나도 알 수 없는 눈빛들,,.어설프고 모호한 상, 전혀 새로울 것도 없는 재료와 기법이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들을 불러올 수 있다면…” 이라고 말한다.

 조합토, 1220도 산화소성 43×19×11cm 2005

<서있는 어머니> 조합토, 1220도 산화소성 43×19×11cm 2005

박미화의 작업은 지워지고 희박해진, 문드러지고 떨어져나가고 뭉개진 얼굴과 몸체로 이루어졌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의 힘과 아득한 사연과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그 존재의 생애를 다만 희뿌옇게 어른거리게 해준다. 그것들은 더 이상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하다. 소멸과 부재의 자리를 아련하게 추억하게 해준다. 따라서 그가 만든 이 희박해진 상, 불가해한 표면은 결정적인 볼거리를 망막에 안기는 상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심안으로 보아야 하는 상이고 희미하고 사라져버리기 직전의 추억의 이미지들이다. 무엇인가의 잔해이고 죽은 것들이고 망실된 것들이자 도저히 잡히지 않고 포착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것은 흙이 섭씨 1,200도의 불을 맞은 자취이자 녹슬고 희미해지는 절묘한 색채를 피처럼, 녹처럼 뒤집어쓴 것이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기 직전의 마지막 불꽃 같은 것들이기도 하다. 또한 시간의 입김 아래 허물어지는 벽면이자 사물의 피부들이다. 그 위에 얹힌 흔적, 상처는 주술적이며 신비스러운 영감으로 가득하다. 명시성과 구체성에서 한 발짝 물러난 얼굴이고 몸이다. 머지않아 사라질 얼굴이고 몸들이다. 겨우 끄집어낸 형상들이고 마지못해 드러난 잔해들이다. 기억과 추억 속에서, 상처 속에 나온 것들은 모두 슬프거나 외롭거나 아련하다. 암시적인 덩어리, 모호한 상을 통해 보는 이들은 상상력을 증폭하고 자신이 보고자 하는 부분을 겹쳐놓게 된다. 사실 미술에서 완성이란 개념은 무의미하다. 완성은 있을 수 없고 가능하지도 않다. 흙 자체를 무심하게 다루고 불에 구워내 인간의 손길이 깃든 인공의 것인지 혹은 돌이나 나무 둥치 그대로인지 구분이 안가는 지극히 무심한 작업들이다. 작가는 인간과 동물의 구분도 없고, 자연과 인공의 경계도 지우고 전통과 현대의 갈등도 없고 죽음과 삶의 가늠, 혹은 물질과 마음의 분리도 더 이상 무의미한, 완성과 미완성을 넘어 자리하는 영속성, 신비한 종교성, 유한한 생애를 초월하는, 아니 포월하는 수수께끼 같은 표정(아우라) 하나를 불멸로 새겨놓고자 한다. 그것이 모든 생명이 짓는 유일한 표정이자 진실과도 같이 다가온다. ●

박 미 화 Park Mihwa
1957년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과(공예전공)과 미국 필라델피아 University City Art League, 미국 템플대학교 타일러 미술대학원에서 도자조각을 졸업했다. 1989년 미국 필라델피아 펜로즈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2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2015년 4월 1일부터 24일까지 인사동 갤러리3에서 13번째 개인전이 열린다.

(왼쪽) 조합토, 1220도 산화소성 54.5cm(지름) 2014 (오른쪽) 골판지 위에 목탄 60×50cm2014

<꽃을 바치다>(왼쪽) 조합토, 1220도 산화소성 54.5cm(지름) 2014 <선인장>(오른쪽) 골판지 위에 목탄 60×50cm2014

 

EXHIBITION & THEME 산수 & 여성을 위한 진혼4 정종미 개인전

여성, 전통, 자연 등 주류의 삶보다는 소외된 영역에 가치를 부여해온 작가 정종미의 20번째 개인전(2.27~4.12)이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열린다. 미술평론가 조은정과 대담을 통해 작가가 지난 30여 년간 펼쳐온 작업세계를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행보를 함께 고민해 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마이너의 삶을 위무하다

조은정 (이하 ‘조’) 이번 전시는 초기 작업부터 최근 작업을 아우르는 회고전이네요.
정종미 (이하 ‘정’) 수련기를 포함해 그림을 그린 지 40년 가까이 됩니다. 개인적으로 그동안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서 어느 방향으로 항해할 것인지 제 안에서 단서를 찾는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전시입니다.
선생님의 작품은 예전부터 꾸준히 봐왔는데요. 처음에는 평면작업을 주로 하시다가 최근 공간에 작품을 구현하는 데 관심을 두시는 것 같아요. 많은 작가가 평면이 가상현실이라면 그것이 실제공간에서 구체적으로 감각되기를 원해서 공간에 대한 탐구를 많이 하는데 선생님도 그런 경로인지, 전통이란 화두를 제대로 구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공간을 탐구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있죠. 제 안에 숨은 세계를 찾아가는 길과 한국 채색화의 뿌리를 찾아가는 길이 별개의 길이 아니고 같은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공동체 안의 나와 개인적인 내가 묘하게 밀착해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제외한 상태에서 다른 것이 의미를 갖는 일은 성립되지 않는 것 같아요.
한국화를 색으로 구분한다면 수묵화와 채색화 두 갈래가 있는데요. 선생님의 초기 작업이 색채는 있지만 사대부의 세계관을 반영한 산수의 이상향을 그려낸 것이라면, 이후로 채색화의 뿌리를 탐구하는 작업을 하셨는데 그 두 갈래의 동질성과 배반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제가 여성을 말하는 이유는 남성이 있기 때문이죠. 극과 극, 즉 상극은 상생과 묘하게 얽혀있어서 우리가 상극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상생의 의미도 달라집니다. 학창시절 저를 가르친 선생님 대부분이 광복 이후 수묵추상화 운동에 참여하신 분들이라 수묵화의 비중이 컸어요. 흔히 수묵을 남성 미학이라고 하는데요. 수묵은 조선시대 사회구조 속에서 당시 사대부의 독특한 신분에 의해 만들어졌고 기운을 한순간에 터뜨리는 일품화를 최고로 쳤지요. 동시대에 여성의 미학도 존재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보자기인데요. 강한 힘은 없지만 색채와 구성에 여성만이 해낼 수 있는 정서가 담겨있죠. 하지만 결국 색채 안에 먹의 세계가 포함되는 것이지 수묵과 채색이 대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구조적으로 사람들이 구분을 만들었을 뿐이지 근원적인 것은 다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수묵운동은 채색화를 왜색倭色 내지 일제 잔재로 간주해 이를 극복하고 타파할 대상으로 여겼는데 그분들 아래에서 교육을 받으신 선생님은 수묵과 채색을 조화로 생각하셨어요. 저는 이 부분이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남성적 이상세계와 색채를 통해 여성적인 감각을 하나로 통합하셨어요. 여기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이 <어부사시사>인데요. 분명히 사대부적 세계관과 이상적인 공간 경영에 관한 내용인데 이 부분을 색채로 표현한 점이 굉장한 흥미를 끌었어요. 방금 상생이라고 말씀하시니까 이해가 잘되네요.
제가 보기에 여성은 실제로 약자는 아니지만 사회적인 구조가 여성을 약자, 소수자로 만들었습니다. 채색화 역시 당시 마이너 영역이었어요. 교수님들이 수묵을 하라고 하는 이유가 마이너를 선택하지 말고 주류에 편승하고 대세에 따르라는 것이었지요. 유일하게 채색을 가르쳐주신 이종상 선생님이 10년간 강의하면서 채색화를 완성한 학생은 저밖에 없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정도로 당시 학생들은 채색화를 일절 그리지 않았어요. 저는 의문이 들었죠. 고구려 벽화, 고려 불화도 채색화고 조선시대 주요 그림에만 수묵이 득세했지 초상화, 영정, 민화가 채색화인데 왜 그걸 못하게 하느냐 그런 생각이 들었죠. 채색화의 문제가 여성의 문제와 굉장히 유사하게 느껴진거예요.
핍박받는 대상, 타자화된 대상이라는 점에서 말이죠. 미술계 내부의 권력관계를 삶의 권력관계와 유사하게 이해하고 그 안에서 내가 약자인 여성인데 주류에 편승하기 위해 나와는 정서와 맞지 않는 수묵을 굳이 택해야 하느냐 그런 고민을 하신거군요. 그런데 사실 우리가 여성이지만 젊은 나이에 여성의 문제를 인식하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여성적 삶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대학원 졸업 이후 채색화 작업을 하면서 여성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당시 뚜렷하게 여성의 문제를 다루어야지 그렇게 결심한 건 아닌데 어릴 때부터 주변 여성들의 삶을 통해서 저에게 내재된 그 무엇이 있었나봅니다. 나이가 들면서 확연히 풀어낼 수 있었을 뿐이죠. 저희 어머니는 근대기 여성의 삶이 대개 그렇듯 굉장히 인내하고 희생적인 삶을 사셨죠. 그리고 저에게 극적인 요소는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어머니를 대신해 저를 키워준 할머니의 삶입니다. 어릴 때는 따뜻한 품 정도로 생각했는데, 결혼 후 제가 마이너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할머니를 자꾸 떠올리게 되었어요.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로 계시다가 광복 후 한국에 돌아와 병든 채 길에 쓰러져 계신 걸 아버지가 모시고 와서 치료를 해드렸고 건강을 회복하신 후에 오갈 데가 없으셔서 저희 집에서 일을 도와주시다가 결국 운명하셨어요. 철이 들어 생각해보니, 지금 살아계시면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이 많은데 어린 나이에 보내드려 안타까움이 커요. 그분을 통해서 제가 느낀 건 여성의 위대한 모성입니다. 상상하기 힘든 고통의 삶을 사셨는데 어떻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저희를 그토록 따뜻하게 돌봐주실 수 있었는지 여성이란 정말 대단한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죠.
내 새끼만 아끼는 이기적인 모습이 아니라 내 새끼가 아니어도 돌보는 포용력과 생명을 살리는 여성의 사랑을 경험을 통해 파악하신 거군요.
네. 여성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굉장히 좋은 계기가 되었지요.
조 초창기 1990년대 작품을 보면 여성의 모습이 명확하지 않고 그저 이미지화되어 있는데 최근에 외면보다 구체적인 모습, 허왕후, 논개, 허난설헌, 명성왕후 등 구체적으로 명명하고 역사적으로 소환할 수 있는 여성, 기억하고 기념할 수 있는 형태로 그려집니다.
한국의 여성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처음에는 길에서 만난 애기 업은 촌부와 같은 익명의 여성을 그렸습니다. 당시에는 여성의 고통을 드러내는 데 집중했습니다. 한국이 식민지, 전쟁을 거쳐 여기까지 오는데 그 배경에는 여성의 힘이 크게 작용했는데도 여성에 대해 가치부여를 안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고발 또는 폭로하고 싶었어요. 이후 익명의 여성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실존하는 구체적인 여성을 담아보고 싶어서 작업이 바뀌게 됩니다. 그런데 작가가 인문적인 부분을 담아내는게 굉장히 버겁더라고요. 역사 속의 여성을 그리면 그 여성이 존재하던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역사도 공부해야 하고 당시 의복도 고증해야 합니다. 지난한 작업이었죠.
사실 현대를 살면서 근대를 쉽게 잊게 되는데 선생님은 식민지 여성으로서 고통스러운 삶을 사셨던 할머니, 전통적인 가부장적 제도에 희생하신 어머니를 통해, 선생님 스스로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한국 사회에서 일반적인 여성이 느끼는 억압적 상황을 경험하셨는데요. 이런 구체적인 경험들이 하나의 작품 안에 전통, 근대, 현대를 모두 담아낼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한 것 같아요. 흔히 페미니즘, 여성주의 문제는 관념화되기 쉽잖아요.
예전에 어떤 평론가가 제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상은 서구 페미니즘의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여성이 아니라 포용력있고 고전적인 면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저에게 페미니스트냐고 묻는데 페미니즘이다 아니다를 떠나 이것이 내 삶이고 한국 여성의 삶, 이것이 진실이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선생님의 여성상은 내 삶의 가치를 존중해달라는 웅변적인 요소보다는 선생님의 경험이라는 현재적 입장에서 그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성향이 더 강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남성을 극복하는 여성이 아니라 생명을 포용하는 자연과 같아요. 이런 측면에서 페미니즘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여성을 인정하고 가치부여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거죠. 결국 남성과 여성의 이야기도 인간의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어려운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조금 전에 언급된 <어부사시사>로 돌아가자면 윤선도가 쓴 <어부사시사>는 후렴구를 제외하고 본시는 한글로 쓰여졌습니다. 당시 한시로 쓰여지지 않으면 제대로 된 시 대접을 못 받았는데 한글로 한시 못지않게 깊이 있는 시 세계를 펼쳤기 때문에 국문학적으로 굉장한 의의가 있는 작품이죠. 지금은 한글이 한자와 비교할 수 없지만 영어에 비하면 마이너죠. 그런 식의 순환체계를 갖는 게 인간의 삶인데, 저는 어디까지나 마이너의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사회적인 조건으로 저를 마이너로 안 보지만 어릴 때부터 딸이라는 이유로 차별대우를 받으면서 자라왔지요. 그밖에 여러 상황을 봤을 때 제가 마이너가 아니라면 이런 작품을 할 이유가 없어요. 제 그림은 아픔이 있는 여성들에게 말을 거는 것이고 여성의 고통과 인내를 통해서 인간의 삶과 역사를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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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은 나의 힘
선생님은 일찍부터 전통 안료를 연구하셨고 전통적인 제작방식을 되살리는 데 일조하신 현장성 있는 작가입니다. 그런데 초기 작업과는 다르게 언제부터인가 선생님의 작품을 설명할 때 전통이라는 용어가 자주 거론됩니다. 선생님의 작품을 설명하는 전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전통에 대해 지금 사회적 분위기는 고리타분한 것, 크게 의미부여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미국에 잠시 체류한 적이 있는데 이때 일본 문화를 접하면서 전통에 관한 관점이 열린 것 같아요. 일본은 전통을 전략적으로 잘 보존 유지함으로써 얻은 것이 엄청납니다. 이에 비해 미국은 전통이 없는 국가이다보니 이에 대한 콤플렉스가 대단한 편이죠.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의 문화에 자부하지 못하고 미국 문화를 부러워하고 추종하기만 했어요.
작업에서 전통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 예를 들어 오방색 활용 같은 건데요. 미술은 내용과 형식인데, 오방색이 한국의 정신을 담아내기도 하지만 그것이 전통을 표상함으로써 동시에 족쇄가 되기도 합니다. 작가에게 그것 역시 고민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작업이 한국의 여성을 위무하고 여성성에 바치는 헌사인 만큼 우리 조상들의 어법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재료 기법을 연구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전통의 색채 개념을 접하게 되었고 전통의 색이 왜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는지 고민하게 되었죠. 일반적으로 일곱 가지 무지개색이란 표현을 많이 쓰는데 이건 서양식 개념이고 오색무지개가 전통적인 한국적 개념의 색채관이죠.
지금의 작가들 성향을 보면 현대라는 것에 지나치게 함몰돼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라도 그렇지 않아야 이 사회가 균형을 잡고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요. 첨단의 재료를 가지고 얼마든지 영혼에 호소하는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지만, 제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고요. 저의 정체성은 전통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일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적 다양성을 위해 전통을 선택하신 거군요.
그것은 2차적인 이유이고, 근본적인 이유를 말하자면 여성이란 주제를 말하는 데 여성성이 잘 드러나는 전통적인 자연 재료를 사용하는게 잘 맞았어요. 그리고 전통적인 재료를 쓰면서 저 스스로 굉장히 큰 힘을 얻었어요. 일종의 힐링이죠. 자연의 색을 얻으려면 굉장히 번거롭고 육체적 노동이 뒤따르지만 어느 순간 제 주위를 돌아보면 건강이 안 좋아지고 피폐해진 사람이 많은데 저는 이상하게 건강하더라고요.
여성성과 전통, 생명에 대한 관심이 깊이 연결되어 있군요. 선생님께서는 전통적인 색채를 연구하고 복원하는 데 일종의 모범 같은 것이 있나요.
숭례문 복구 때도 드러났지만 한국은 세계 10대 경제대국 안에 든다고 큰소리치지만 국보 1호도 제대로 수리하지 못했습니다. 경제만 선진국이지 문화적으로 굉장한 후진국인 셈이죠. 제가 전통재료를 연구하며 나름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보니 문화재를 복구하거나 복원할 때 관련 문화재 관계자만 참여하는 게 아니라 저 같은 사람도 정보를 제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던 차에 학교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색채연구소를 설립해 전통적인 색채관과 재료기법을 복원하고 개발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옛날에 사용한 천연재료를 똑같이 사용하는 건 어렵지요.
과거와 시스템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에 불가능하죠.
천연재료는 고가인데다 생산량도 감소했고 색채 자체도 다양하지 않아요. 전통적인 안료와 가장 유사한 색감을 지닌 현대 안료를 개발해야 화가들이 한국적인 색을 표현할 수 있어요. 한국의 색채 표준을 만들기 위해서는 굉장히 다각도의 연구가 선행돼야 합니다. 이를 위해 연구소를 설립한 것입니다.
미술사적으로도 의미있는 일이고 사회적으로도 정말 중요한 일인 것 같아요. 문화 원형적 측면에서 색은 나름의 상징이 있고 그것을 현실화하는 데 안료가 동반되어야 하죠. 색을 다루는 작가로서 사회 참여적으로 행동하시는 모습이 인상 깊습니다.
사실 전통은 드러나는 것뿐 아니라 무형적인 부분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는데요. 선생님 작업에서 전통의 문제가 여성, 오방색 등 유형학을 낳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역사 속의 다양한 여인이 등장하지만 어떻게 보면 하나의 모습으로 수렴되는 면도 있고요. 몇 백년 전의 여인과 동시대인이 공감하기에는 시간차가 많이 나는데요. 외형이 너무 옛날 것으로 고정되어 있다보면 그 막을 뚫고 정서적으로 감흥하기 어려운 점이 있어요. 그 여인들의 틈에 작가의 정서가 들어갈 여지가 별로 없는 거죠. 그리고 전통의 힘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면 오방색 말고 다른 면도 보여주셔야 할 것 같아요. 다음 작품에서 어떤 세계를 다루실지 자못 궁금해집니다.
제가 외국에 안나갔다면 이렇게 전통에 집착하지 않았을 거예요. 중요한 문제인데 우리에게 결핍되어 있다고 생각하다보니 그동안 집착한 것 같습니다. 저도 이번 전시를 통해 탈바꿈해야 하고, 그런 고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특히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느낀건데 정체성 없이 쏠린 경우도 많지만 예상외로 전통을 굉장히 고무적으로 받아들이고 탄력있게 수용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제가 느끼는 전통과 젊은 세대가 느끼는 반응에 차이가 큰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전통에 대한 생각의 지평을 넓힐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동안 저의 작업은 사라진 전통미감을 부활시키는데 전념했었는데 이제는 한걸음 나아가 한국적 미감을 승화시켜 새롭게 피어나는 현대성을 담을 생각입니다.
진행 정리・이슬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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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은 정 Cho Eunjung
1962년 태어났다. 이화여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제2회 구상조각회 조각평론상을 수상했다. 서울벤처정보대학원대 문화산업경영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인물미술사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 《한국조각미의 발견》, 《비평으로 본 한국미술》(공저), 《대한민국 제1공화국의 권력과 미술》,《김종영》 등이 있다.

정 종 미 Jung Jongmee
1957년 태어났다.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와 동 대학원 동양화과를 졸업했다. 뉴욕 파슨스 스쿨 디외 도네 페이퍼메이킹 스튜디오에서 수학했다. 1991년 백악미술관에서 열린 <자・연・인전>을 시작으로 20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제13회 이중섭미술상, 제13회 이인성미술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고려대 디자인 조형학부 교수 및 고려대부설 색채연구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우리그림의 색과 칠》이 있다.

NEW FACE 2015 박아람

“전시장에 놓인, 평면 혹은 입체의 작품들은 일곱 개의 형상이 거듭나는 절차, 그 일련의 기제에 의한 것들이다. 일단 이러한 기제를 이해하게 된다면 전시장에 전시된 작품들은 짐짓 태연해 보이지만, 사실은 작가에 의해 계산된 절차들을 품고 있음을 알게 된다.”
– 윤민화 전시기획

명확하지 않은 것에 대한 측량

박아람 작가를 만나 명함을 받았을 때 고개가 갸우뚱거렸다. 스스로를 ‘측량사surveyor’로 정의하고, 영문이름을 ‘Parc Rahm’으로 적시하고 있어서다. 작가의 설명은 이렇다. “도처에 산재한 이미지에 대해서, 이미지의 내적인 논리(내용과 의미의 차원으로 인도하는 인식/판별 가능한 사물이나 인물의 형태)를 따르지 않고, 사소한 색이나 명암 차이에 불과한 것을 따라가면서 이미지를 회膾 뜨는 행위를 반복하는데요. 저는 이것을 개인적으로 ‘이미지-측량’이라고 명명합니다.” 그러면서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벌인 퍼포먼스에 대해 설명했다. “<착륙 기념사진>은 ‘자석 올가미magnetic lasso 측량-뉴욕’ 기획하에 구상한 작업입니다.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을 참고로 한 이 퍼포먼스는, 구글 뉴욕 지도를 포토숍의 자석 올가미로 측량하고, 그것을 깃발에 프린팅한 후, 누구나 알고 있는 뉴욕을 마치 처음 발견한 양 센트럴파크의 쥐바위Rat Rock 위에서 천연덕스럽게 착륙 기념 촬영을 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프랑스어로 ‘parc’가 ‘공원’을 뜻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작업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3D프린트 가변크기 2014 케이크갤러리 전시광경

<운석들> 3D프린트 가변크기 2014 케이크갤러리 전시광경

학부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박 작가는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인 포토숍의 ‘마그네틱 라소툴’을 이용한 작업을 선보였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시각예술분야에서 어떤 장르건 간에 작가는 매체를 활용해 표현한다. 그런데 박 작가가 사용하는 매체는 좀 생소하기도 하고, 프로그래밍된 진부한 것이기도 하다. “이 시대에는 미술가 대부분이 작업 과정에 디지털 이미지와 그래픽 프로그램, 출력기를 이용하죠. 그래서 그것들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에는 별달리 특기할 점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저는 그래픽 프로그램의 툴과 그런 작업 내역들을 개념화하고 가시화한다는 점에서 변별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툴의 예정된 기능에서 무엇인가 다른 것을 도출하는 것은 오히려 더 지난한 과정일 것도 같다. 이는 작품에 스며든 ‘노동의 흔적’이 곧 작가의 미학적 특성이라는 등가관계에 어떻게 역행하느냐의 문제와 맞물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포토숍의 ‘자석 올가미’ 툴은 이미지를 명확하게 지정하거나 항상 같은 결과를 보여주지 않는다. 따라서 이 툴을 반복적으로 같은 이미지에 적용하는 행위는 일견 대상을 정확히 드러내는 것이거나, 아니면 그러한 행위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한 것임을 드러내는 것 같다. 이에 대해 작가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입력장치를 매개로 하는 제 손에 의한 무작위적인 개입에 의해 왜곡되어 결국 무의미한 궤적을 산출합니다. 실제로 측량한 형상들은 원본 이미지와 대조했을 때 별다른 연관성을 갖지 않아요. 저는 대상을 명확히 지정하거나 정의하는 일에 관심이 없으며, 오히려 참조 대상으로부터 막다른 것을 도출해내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해석의 과잉이나 오독을 경계하는 태도가 분명했다.
지금 작가는 일민미술관에서 열리는 <우주생활전>(2.6~5.17) 3층에 <운석들>이라는 작품을 설치했다. 최근 첨단 테크놀로지의 총아로 떠오른 3D프린터로 출력한 가공의 ‘운석’을 오렌지색 바탕에 깔았다. 45억 전 생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구에 불시착한 이방의 물체인 운석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기계 장치에 의해 ‘구현’되는 가공의 운석과 여러모로 닮아 있다.
당장은 근작인 운석 등을 크게 제작하고 싶다는 작가 박아람. 몇 번의 개인전이 열린 곳은 다분히 실험적인 작품이 선보였던 공간이다. 의도성은 없었지만 자연스러운 결과였을 것이다. 그래도 현실은 현실이다. 박 작가 말대로 “접시 물에 코 박고 죽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도 현재 큰 고민거리다. 그래서 최근 통영을 다녀왔고 “모니터 스크린만 보다가, 저 멀리 뻗어나가는 실제적인 거리감, 시야를 확보하는 경험을 오랜만에 했다”고 했다. 그곳에서 해수의 표면에 반사되어 산란하는 빛을 어떻게 봤을지, 그것이 어떻게 작업으로 ‘쌓일지’ 지켜볼 요량이다.
황석권 수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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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이 커팅 및 드로잉 21×29.5cm 2014

<유령-지도> 종이 커팅 및 드로잉 21×29.5cm 2014

박아람은 1986년 태어났다. 가천대 시각디자인과, 홍익대 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2014년 케이크갤러리에서 <자석 올가미 측량전>으로 명명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2012년부터 각종 기획전과 그룹전에 출품했다. 2012년 일현트래블그랜트에 선정됐다. 현재 서울에서 작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