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TOPIC | BERLIN Julian Rosefeldt Manifesto
함부르거 반호프-게젠바르트뮤지엄(2.10~7.10)에서 열린 율리안 로제펠트(Julian Rosefeldt, 1965~)의 개인전 전시명은 ‘개인이나 단체가 대중에 대하여 확고한 정치적 의도와 견해를 밝히는 것’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 ‘매니페스토(Manifesto)’로 명명됐다. 프롤로그 포함 13개의 스크린에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배우 케이트 블란쳇(Cate Blanchett)이 각각 분장을 달리해 아방가르디스트와 사상가의 발언을 연설조로 늘어놓는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이를 통해 로제펠트가 제시하는 “예술가가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도”는 무엇인지 살펴보자.
안녕하십니까? 모든 예술은 속임수입니다”
최정미 전시기획
전시를 기획한 안나 카타리나 게버르스와 우도 키텔만은 보도자료를 일레인 스터트번트를 인용해 “To give visible action to words”로 시작했다. 관람객으로 미어터지는 오프닝 그리고 일레인 스터트번트의 알 듯 모를 듯한 문구로 전시에 대한 궁금증은 증폭되었다. 긴 기다림 끝에 들어간 전시장은 어두웠고, 총 12개 프로젝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과 그 사이로 불안하게 움직이는 먼지 그리고 음향의 혼합 때문에 도망치듯 전시장 제일 뒤편에 설치된 스크린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완벽한 웨이브의 빨간 머리와 임플란트보다도 더 완벽해 보이는 가짜 이빨을 낀 듯한 케이트 블란쳇(이하 블란쳇)이 뉴스앵커와 리포터로 1인2역을 하고 있다. CNN뉴스 진행자 같은 발음과 억양으로 솔 르윗, 아드리안 파이퍼 그리고 일레인 스터트번트의 매니페스토에서 편집한 텍스트 “Good evening ladies and gentlemen, all current art is fake”를 외치고 있다. 리포터로 분한 또 다른 블란쳇은 억수같이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공격적이며 영웅다워 보이는 앵커 블란쳇을 받아주고 있다.
맞은편 벽에는 미국 남부 정통 보수파 어머니로 분신한 그녀가 점심 식탁에 둘러앉은 남편과 아들들을 위해 기도하는 형식을 빌려 다음과 같은 독백을 늘어놓는다. “I am for an art that is political-erotical-mystical that does something other than sit on its ass in a museum.” 청소년기 전으로 보이는 남자아이 셋은 눈을 뜨지도 감지도 않은 어정쩡한 모습으로 기도하는 듯한 자세다. 남편은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아내의 중압감을 이겨내려는 듯 두 손을 모은 채 참고 있는 듯하다. 단지 식탁 앞에 조각상처럼 앉아 있는 개만 무념무상한 듯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있을 뿐이다. 다른 한 영상에서는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주식투자상담사가 “The iron network of speedy communications which envelops the earth”라고 외친다. 유가 하락, 주가 폭락, 중국 경제위기 등 마치 현재 세계경제를 예언한 듯하다. 베를린 중심에 있으며 단체 관광객의 핫스팟이기도 한 프리드리히스타트팔라스트 극장에서 러시안 악센트가 강한 안무가로 변신한 블란쳇은 외계인과 새를 합성한 듯한 복장 차림의 한 무용수들에게 마치 영웅처럼 “I demand the total mobilization of all artistic forces”라고 명령한다. 그녀의 과도한 연기는 거의 코미디에 가까운 수준이어서 관객은 실소하다가 시원하게 웃고 있다. 이렇듯 각 매니페스토 영상이미지는 설명하는 듯, 웃기거나, 역설적이거나 아니면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있다.
총 12편(프롤로그 1편)의 영상작품에서 교사, 펑크족, 퍼펫티어, 주식투자상담사, 노숙자, 매니저, 과학자, 장례식 주관자, 생산 근로자, 안무가 등으로 분한 블란쳇은 각 역에 맞는 연기력과 현란한 비주얼로 전시장을 꽉 채우고 있다. 할리우드도 울고 갈 완벽한 세트, 때로는 6시간 이상 걸렸다는 분장, 버즈 아이 뷰, 로 앵글, 클로즈 업 등 현란한 영화적 촬영 구도와 기법을 사용했지만,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성격과 분위기를 연출했다. 때로는 영상 촬영 장면을 그대로 보여주며 보이는 실제와 또 다른 실제를 부담 가지 않을 정도로 적절하게 섞어 놓았다.
율리안 로제펠트는 〈매니페스토전〉을 위해 지난 170년간 발표된 예술, 창작인의 매니페스토를 최대한 수집했다. 시인인 트리스탄 차라와 앙드레 브르통, 작가인 카지미르 말레비치, 클래스 올덴버그, 솔 르윗, 무용가 이본 레이너,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 그리고 영화감독 짐 자무시 등 60여 개 매니페스토를 모을 수 있었고 이를 12편의 연설문 형식이 아닌 연기할 수 있는 텍스트로 줄이고, 편집했다고 한다. 작가는 창작하지 않았고 단지 콜라주했을 뿐이라고 한다. 이렇게 재구성된 텍스트는 각 에피소드에서 역설적이며, 아름답고, 그로테스크한 형식으로 드러난다. 사조는 다다이즘부터 미래주의, 초현실주의, 플럭서스, 팝아트,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공산주의적 사고까지 총망라했다.
매니페스토는 과거 남성 전유물이었으며 주로 예술, 정치 분야에서 사용되었다. 이렇게 확실한 의도와 목적을 가진 매니페스토를 여성인 블란쳇에게 주었다. 그렇다면 율리안 로제펠트(이하 로제펠트)에게 예술인의 매니페스토란 어떠한 의미를 담고 있는가. 2014년 후원자 중 하나이기도 한 바이리셔 룬드풍크 방송국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술인의 매니페스토는 예술계를 변화시키려는 것뿐만 아니라 세계를 변형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 이를 위해 매니페스토의 시조라 할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부터 짐 쟈무시의 《영화를 만드는 규칙》까지 정리했다.” 또 한 인터뷰에서는 “예술가의 매니페스토를 통하여 행위 실험적인 에너지(performative Energie von Kunstlermanifesten)를 구현하려 했다. 또한 그 안에서 사고의 아름다움과 시적인 사유를 찾았다. 또한 그녀의 퍼포먼스를 통하여 인기도 없고 잘 읽히지 않는 매니페스토가 사람들에게 좀 더 다가오기를 바랐다”고 했다.
1965년 뮌헨에서 출생한 로제펠트는 건축을 전공했으며 현재 베를린에서 활동하고 있다. 2011년부터는 뮌헨 미술아카데미 영상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호프만 컬렉션, 쿤스트무제움 본, 쿤스트무제움 볼프스부르그, 올브리히트 컬렉션, DZ 컬렉션, MoMA, CAC 말라가, 버거 컬렉션 홍콩 등 세계 유수 미술관과 컬렉터들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매니페스토〉 는 ACMI, 뉴사우스 웨일스 아트 갤러리, 함부르거반호프, 스프렝겔미술관 후원을 받았으며 2016년에는 함부르거 반호프 외에 스프렝겔미술관, 한오버 그리고 루르트리날레에서 순회전이 열린다.
그러고 보니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블란쳇 같은 여배우와 로제펠트의 협업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약 6년 전 블란쳇이 베를린에 방문했을 때, 베를린 소재 샤우뷰네 연극장의 극단장인 토마스 오버마이어와 함께 베를린니셔 갤러리에서 열린 로제펠트의 전시를 방문했다고 한다. 이때 이들은 우연히 만나게 됐고 로제펠트의 작품에 감동한 그녀가 작가에게 즉흥적으로 재능을 기부하겠다고 했다. 로제펠트는 이후 작품 콘셉트를 준비했고 이들은 작가와 영화배우로서의 단순한 기능적인 측면이 아닌 예술인으로서 아이디어를 긴밀히 교환하는 등 협업 형태로 일을 진행했다고 한다. 배우와 리서처로 융합된 블란쳇은 하루에 전혀 다른 두 역을 연기해야 하는 강행군에도 불구하고 모든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했다고 한다. 촬영은 2014년 베를린에서 12일간 매일 이루어졌으며 작가와 여배우는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촬영했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이 시리즈는 매니페스토 뿐만 아니라 블란쳇의 오마주(homage)이기도 하다고 전했다.
작가와 영화배우의 협업은 미디어아트 분야에서는 종종 이루어졌다. 하지만 연예인으로서 배우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여 콘셉트가 이를 덮어쓰고 예술작품으로서 완벽하게 융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배우가 작품 제작 과정에 깊이 연관된다거나 아이디어를 공유, 교환하는 일은 더울 드물 것이다. 〈매니페스토〉에서는 이러한 전례와 우려를 한 방에 날려준다. 각 영상작품 분량은 전시장에서 소화하기 쉽지 않은 약 10분 정도이다. 모든 작품을 다 감상하려면 약 두 시간 가량 소요된다. 관객은 영화관의 푹신한 의자가 아닌 등받이도 없는 딱딱한 전시장 나무의자나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있거나 벽에 비스듬히 서 있다. 음향도 겹친다. 그러나 놀랍게도 상당수의 관객은 각 매니페스토를 마치 책을 숙독하듯 하나하나 읽어 나갔다. 〈매니페스토〉는 크지 않은 공간에 이들을 약 두 시간 정도 잡아두는 데 성공한다. 작가가 말하는 ‘사고의 아름다움과 시적인 사유’가 전해지는 모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