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 아름답다
필운대 언덕의 봄꽃 잔치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이 연재는 나로서는 조금 부담스럽고 색다른 시도이다.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현장을 다시 밟으며 나도 스케치해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미술사를 공부한 이후 줄곧 진경 작품과 그 실제 경치 찾기를 즐겨왔다. 그림의 실경을 카메라에 담을 때마다, 늘 옛 화가들을 따라서 스케치해보면 어떨까 했다. 그 생각을 이번 《월간미술》 연재를 통해 실현하게 된 셈이다.
나는 35년 이상 진경작품과 실경을 대조하여 ‘닮음과 닮지 않음’, 혹은 ‘기억으로 그리기와 사생하기’ 등 그 해석방식을 검토했고, 진경작품의 시대적 의미와 회화성을 짚어보았다. 이렇게 쌓인 진경산수 관련 글과 사진을 《옛 화가들은 우리 땅을 어떻게 그렸나》(2010)로 묶어내어 ‘우현(고유섭)학술상’을 받았으나, 출판사가 도산하였다. 다행히 이 책을 수정 보완하여 올해 같은 제목으로 재간하였다.(마로니에북스, 2015) 이번 작업은 앞 책의 연장선상에 놓인 셈이다. 그동안 실경과 그림을 비교하던 경험을 토대로, 새로이 스케치를 병행하며 옛 거장들의 눈과 생각에 가까이 다가가 재검토하고 싶다.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 톺아보기가 될 것이다. 실경그림의 현장 답사는 자연히 오늘의 모습과 비교하니, 또한 시간 여행이 되겠다. 그 사이, 곧 조선화에 담긴 옛사람들의 꿈과 변화한 현실 사이에서, 내가 그릴 진경을 떠올려 본다. 두렵고 흥분된다. 연재의 시작은 서울이다.
지금의 서울은 인간의 욕심을 한껏 드러낸 민낯 같다. 지난 백 년 동안 엄청나게 파헤치고 개발한 탓이다. 하지만 욕망의 상징이라할 빌딩숲 틈새나 그 너머로 보이는 산세와 물길은 유구하다. 오히려 현대물을 고스란히 감싸 안은 자연이 아직 넉넉한 편이다. 인간의 문명을 비웃기라도 하듯, 당찬 형상이 늠름하다. 화강암이 불거진 산세는 여전히 변함없고, 물길과 어울린 벼랑이나 계곡의 계절색이 조화롭다.
서울의 아름다움은 옛 문인의 시나 글, 화가의 진경작품에서 흔히 만난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을 비롯한 조선 후기 화가들의 진경산수화는 우리 산하의 자연미뿐만 아니라 선현들의 삶과 풍류를 확인케 해준다. 요즘 들어서는 한동안 잊고 살아오던 그 고전문화에 다시금 눈 뜨게 되면서, 고도(古都)의 모습을 새로이 만나려 야단이다. 최근 인왕산 아래 수성동(水聲洞) 계곡이 복원되는 등 여기저기 공원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현상을 예견하고 개발했더라면, 현재의 서울은 일찌감치 세계적인 명소로 자리잡혔을 법하다. 또 서울 관련 책들이 쏟아지고, 많은 이가 서울의 정취를 즐기려 북촌과 서촌, 삼청동, 부암동 자락에 몰려드는 것을 보아도 그러하다. 마치 옛 문인들이 백악사단(白岳詞壇), 탑골의 백탑시사(白塔詩社), 인왕산 옥류동의 옥계시사(玉溪詩社) 등을 조직하여 조선 후기 문예의 르네상스를 열었다고 평가되듯이, 그와 맞먹는 우리 시대 문예부흥으로 이어질지 조심스레 기대해본다.
한양은 선분홍의 꽃대궐, 무릉도원
올해도 서울의 봄은 어김없었다. 화사한 벚꽃과 목련, 그리고 개나리와 진달래 등이 온 천지를 덮었다. 특히, 근현대에 의도적으로 심은 하얀 벚꽃과 번식력이 왕성한 노란 개나리는 대지를 점령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옛 그림과 글, 그리고 토박이 노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본래 서울의 봄은 분홍 꽃들이 연녹색 이파리들과 어울려 사뭇 다른 색채감을 뽐냈던 모양이다. 이원수 선생의 〈고향의 봄〉(1923),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에 나오는 분홍빛 고운 꽃대궐은 비단 산골만이 아니라 서울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엔 인왕산과 백악 사이에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듯, 도성의 서북부 지역을 도화동이라 불렀다. 이는 백악의 서쪽 기슭 ‘쌍계동(雙溪洞)’의 ‘대은암(大隱岩)’ 골짜기에 새겨진 ‘도화동천(桃花洞天)’과 ‘무릉폭(武陵瀑)’이라는 바위글씨가 말해준다.(지금의 청운중학교 교문 맞은편) 담졸 강희언(澹拙 姜熙彦, 1738~1784년 이전)이 ‘늦은 봄(음력 3월) 도화동에 올라 인왕산을 바라보다[暮春 登桃花洞 望仁王山]’라고 화제를 써넣고 그린 〈인왕산도(仁王山圖)〉(개인 소장)는, 바로 이곳 도화동천에서 바라본 인왕산의 측면 풍경을 포착한 진경 작품이다.
‘무릉(武陵)’은 잘 알다시피 도가(道家)의 이상향이다. 흔히 경치가 수려한 풍광에 ‘무릉’을 붙여 무릉계곡, 무릉폭포, 무릉동 등으로 일컫는다. 또한 ‘도화동천’에 ‘무릉폭’을 곁들여 새김은 복숭아꽃이 아름다운,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무릉도원을 떠오르게 한다.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유토피아의 상징으로 그려진 세상 말이다.
세종 시절 1447년 4월 20일 밤에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이 도원을 탐승(探勝)하는 꿈을 꾸었고, 그 이야기를 따라 안견(安堅)이 3일 만에 그렸다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日本 天理大學 소장) 역시 도연명의 문예 경향과 연관된다 하겠다. 도화동길을 올라 북쭉으로 창의문(彰義門)을 나서면, 그 왼편 자락에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도원과 비슷하다고 여겨 마련했다는 무계정사(武溪精舍)가 그 터만 남아 있다. 현재 이곳에 새겨진 ‘무계동(武溪洞)’ 바위글씨가 안평대군의 필치라 전한다.
예부터 복숭아는 선과(仙果) 혹은 선약(仙藥)으로 신선세계의 식물이고, 300년 만에 열리는 복숭아는 천도(天桃)라 하여 장수를 상징한다. 복숭아나무는 귀신이 접근하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어 사당에는 심지 않았고, 제사상에도 복숭아를 올리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도화꽃은 성리학 이데올로기의 상징이기도 했다. 복숭아 도(桃)는 ‘길 도(道)’자와, 오얏나무 이(李)는 ‘다스릴 이(理)’자와 음이 같아 오얏나무와 복숭아나무의 도리원(桃李園)이 조성되거나 그려졌다. 도화꽃은 또 잉어 리(鯉)와 짝을 이루어, 물고기 그림 어해도(魚蟹圖)의 소재로 즐겨 그려지기도 했다. 모두 성리학을 추구한 사대부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도리(道理)’를 빗댄 셈이다. 생활 속에서는 복사꽃이 사주풀이에 등장한다. 일명 도화살(桃花煞)이다. 도화살이 낀 사람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호색으로 집안을 망하게 한다고 생각했었다. 최근에는 도화살이 예능 개념으로 재해석되며 매력적인 사주로 바뀌었다.
복사꽃은 1820년대 후반 순조 시절에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봄철의 〈동궐도(東闕圖)〉(국보 제249호, 고려대학교박물관, 동아대학교박물관 소장)에도 빠지지 않는다. 전각 사이사이의 후원과 산언덕에 핑크빛 봄꽃들이 온통 가득하다. 큰 가지의 나무는 도화꽃과 함께 살구꽃이나 자두꽃일 법하며, 솔밭의 낮은 분홍꽃 나무들은 진달래로 생각된다. 그야말로 꽃대궐이다. 도성 밖에도 복사골이 많았다. 혜화동 밖 사람들은 복숭아밭을 일구어 생계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한양의 봄꽃놀이 대상으로 성북동 복사꽃, ‘북촌도화(北村桃花)’가 꼽힐 정도였다. 복숭아밭이 얼마나 넓었던지 마포에는 도화동이라는 행정지명이 존재한다. 남산 기슭에도 도동(桃洞, 현 중구 남대문구로, 용산구 후암동·남영동)이 있었고, 한강 쪽 기슭도 봄이면 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여기서 복숭아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과수원의 복숭아가 아닌 개복숭아이다. 토종인 개복숭아는 아기 주먹만한 열매로 심장과 폐, 대장, 기관지 천식 등에 좋고, 기침을 멈추게 하는 효능으로 유명하다. 개복숭아 꽃차는 피부에 탄력을 주고 얼굴에 화색을 돌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겸재 정선의 봄나들이 〈필운대상춘〉
분홍색 꽃대궐, 한양에서 봄 풍류를 즐긴 최고의 공간은 인왕산 남쪽 자락의 필운대(弼雲臺)였다. 문인사대부에서 중인, 서민층까지 시와 음악을 나눈 명소였다. 필운대 부근은 살구꽃이 가득하여 ‘필운행화(弼雲杏花)’나 ‘행촌(杏村)’이라 불렸으며, 도화꽃과 더불어 춘심을 자극하는 다채로운 꽃들이 함께 했기에 ‘필운대 꽃놀이(弼雲賞花)’가 장안의 제일로 손꼽혔다. 필운대에서 육각현(六角峴) 고개를 거쳐 모암(帽巖)으로 올라가는 인왕산 동남쪽 능선은 서울의 봄꽃을 감상하기에 가장 좋은 상춘(賞春) 장소일 뿐만 아니라, 도성 안팎의 장쾌한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 구실을 한다. 남산이 품은 도성의 구석구석은 물론이거니와 한강 남쪽으로 전개된 남한산성에서 관악산까지 확 열리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많은 문인이 그러했듯이, 겸재 정선 또한 필운대에 올라가 서울의 춘경(春景)을 만끽하곤 했던 모양이다. 봄 향기를 가득 품은 〈필운대상춘(弼雲臺賞春)〉(개인 소장)이 그 좋은 사례이다. 한양을 꽃과 버드나무의 봄, ‘춘화류(春花柳)’라 노래했듯이, 화면의 필운대 아래 서촌마을과 도성 안에는 온통 연두색 봄버들과 분홍빛 꽃들이 만발해 있다. 옛 서울의 봄을 얘기할 때, 첫손 꼽히는 그림이다. 작품 사진이 먼저 알려지는 바람에 여기저기 소개되었지만, 실작품은 필자가 기획한 〈조선후기 산수화전〉을 통해서 대중에게 처음 선보였다. (이태호 엮음, 《조선후기 산수화전-옛 그림에 담긴 봄 여름 가을 겨울》, 동산방화랑, 2011)〈필운대상춘〉은 필운대와 그 남쪽으로 펼쳐진 도성과 지세를 담은, 고운 비단에 세필의 깔끔한 수묵담채화 소품이다. 남산의 미점준(米點皴), 필운대 언덕의 피마준(披麻皴)과 태점(苔點)이 어울린 남종산수화법의 그림이다. 필운대의 소략한 산주름을 따라 그려진 농묵의 듬성한 ‘丁’자형 소나무들의 솔밭은 정선의 전형화된 진경화법을 보여준다. 비슷한 구도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간송미술관 소장)에 담긴 〈장안연우(長安烟雨)〉나 〈장안연월(長安烟月)〉과 마찬가지로 양천현령을 퇴임한 이후 1740년대 후반의 대표작으로 생각된다. 세심하면서도 시원한 화 구성과 성근 선묘가 70대 명작답다. 정선이 70대 그림에 주로 찍었던 장방형의 음각도장 ‘겸재(謙齋)’도 이를 뒷받침해준다.
광활한 풍경을 포착하는 정선의 시야는 역시 품이 큰 화가답다. 또 너른 풍광을 작은 화면에 압축하여 그린 정선의 축경화법(縮景畵法)은 〈필운대상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도성 안의 궁궐이나 관청, 그리고 마을들을 운무(雲霧)로 여백을 살리거나, 원근의 풍경을 합성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면 오른쪽으로 멀리 보이는 산세는 뾰족뾰족한 암산 능선의 관악산이다. 원경을 근경의 필운대와 동일화면에 담은 것은, 정선의 독특한 화면구성법이다. 원근의 풍경들을 모두 아우른 시점은 인왕산 북쪽 중턱 옥류동 언덕이나 창의문 근처쯤에 존재한다. 필운대에서 상당히 떨어진 거리이다. 푸른색 실루엣의 관악산 아래 그려진 오른쪽 이층 누각은 숭례문이다. 남산 정상엔 한 그루의 소나무가 또렷하다. 이는 정선의 〈목멱산(木覓山)〉(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에도 보이며, 애국가에 등장하는 ‘남산 위의 저 소나무’이다. 이 노송은 6·25전쟁 때 폭격으로 사라졌다. 남산 아래 언덕은 지금의 명동성당이 자리한 종현(鍾峴)이다. 화면의 왼편 미점준에 싸인 희미한 돌기둥은 경회루(慶會樓) 터이니, 임진왜란 이후 폐허화된 경복궁임을 알려준다. 필운대 너머 인왕산 남쪽 자락 솔밭과 바위벼랑 사이에는 황학정(黃鶴亭)과 사직단(社稷壇) 풍경이 전개되어 있다.
오른쪽 가장자리 솔밭 위 필운대 언덕은 선비들의 봄놀이 터이다. 도성 풍광을 감상하며 시를 나누는 계모임 광경이다. 화면의 오른편 필운대 언덕에는 두 문인을 중심으로 다섯 명이 서있거나 앉아 있다. 그 아래로 동자를 대동하고 지팡이를 짚은 뒤늦은 참석자도 등장한다. 가운데 두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유난히 큰 인물상으로 좌장(座長) 격이다. 상당한 스승이거나 지체 높은 문인관료인 모양이다. 필운대 언덕 아래 두 그루의 노송 그늘에는 두 사람이 타고 온 듯 두 필의 말과 마부가 보인다.
언덕 아래 다섯 그루의 소나무가 있는 곳이 이항복(白沙 李恒福, 1556~1618)의 글씨 ‘필운대’가 새겨진 바위벼랑 위치이다. 그 아래로 화류(花柳)가 만발한 초가마을은 조선 후기 중서층(中庶層)들이 주로 살면서 달동네라는 의미의 ‘여항(閭巷)’ 문학을 발달시킨 ‘웃대’로 여겨진다. 지금의 누상동·누하동이다. ‘누각동은 연산군 때 지은 누각(樓閣)이 있어 생긴 동명으로, 사대층보다 하급관료인 서리들이 주로 모여 살았다’고 한다.(柳本藝, 《漢京識略》) 헌데 필운대는 선조 시절, 권율 장군과 그 사위인 이항복이 살았으니 본래 사대부층의 공간이었을 터이다. 조선 후기 들어 이곳에 서리를 비롯한 중인이나 서민층 마을이 조성되며 ‘웃대’라는 별명을 갖게 된 것이다.
1 창의문 언덕에서 본 필운대 남산 관악산
2 백악의 서쪽자락 대은암 쌍계동 골짜기 ‘무릉폭’과 함께 새겨진 바위글씨 ‘도화동천’ (<한양사람들의 멋과 풍류, 바위글씨전> 서울역사박물관 2004 17쪽)
3 겸재 정선 <필운대상춘>
4 인왕산 남쪽자락의 봄, 필운대에서 육각현을 지나 모암까지는 도성의 최고 전망대이다. ⓒ이태호
송월헌 임득명의 필운대 꽃 감상 〈등고상화〉
조선 후기 웃대의 중인문학을 중흥시킨 대표 계모임은 18세기 후반에 결성된 옥계시사이다. 1786년 7월 16일 옥계시사의 첫 모임을 기록한 《옥계사첩(玉溪社帖)》(삼성출판박물관 소장)과 1791년의 《옥계사시첩(玉溪社詩帖)》(영국 브리티시 도서관 소장)은 당대 여항인의 문학적 진면목을 담아낸 것으로 평가된다. 모임의 연장자인 오옥재 최창규(五玉齎 崔昌圭)가 소장했던 《옥계사첩》은 〈옥계사십이승(玉溪社十二勝)〉이라 하여 한양의 12명승을 계절에 따라 즐기는 시회(詩會)를 기념하여 제작된 서화첩이다. 모임의 스승이자 좌장 격인 송석원 천수경(松石園 千壽慶) 구장의 《옥계사시첩》은 인왕산 아래 열 곳의 승경(勝景)을 노래한 결과물이다. 이 모임에는 장혼(張混), 김낙서(金洛瑞) 등 당대 내로라하는 여항시인들이 참여했다. 옥계시사의 계원인 송월헌 임득명(松月軒 林得明, 1767~1822)이 두 첩에 그림들을 곁들였다.
한양의 아름다움을 순서대로 설정한 십이승(十二勝) 가운데, 세 번째인 〈등고상화(登高賞華)〉는 《옥계사첩》의 네 그림 중 음력 2월 중춘(仲春)의 ‘꽃구경[賞春]’을 담아내었다. ‘높은 곳에 오른(登高)’장소는 옥계문인들의 시에 밝혀져 있듯이 필운대이다. 필운대 언덕에서 벌인 봄의 꽃잔치, 시잔치 장면을 그린 실경화이다. 음력 2월인 점을 감안하면 아직 복사꽃이 피기 이전이니, 그림에 가득 담긴 분홍빛은 ‘필운행화(弼雲杏花)’의 살구꽃일 것이다. 그림 속의 살구나무들은 버드나무와 함께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 이들은 대부분 벚꽃이나 목련으로 대체되었다. 필운대가 있는 배화여고와 배화여대 교정에 겨우 두세 그루만 남아 있는 실정이니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든다.
임득명이 정선을 공부했던 만큼 화면의 짙은 농묵 미점과 소나무 표현은 정선 스타일이다. 마을의 화사한 분홍꽃과 버드나무를 묘사한 필치 역시 마찬가지이다. 표현 기량이 덜 익었지만, 그 미숙함이 도리어 봄맛과 잘 어우러져 있어 좋은 그림이다. 대지의 싱그러운 봄기운을 전해주는, 담먹과 담청색 넓은 붓 바림과 번짐은 정선이나 기존의 산수준법을 탈피해 돋보인다. 임득명의 참신한 회화미로 현대감마저 물씬 든다. 그동안 옥계사 모임을 가진 시기 1786년에 의존하여 임득명이 20대 초반에 그린 초기 작품으로 보아왔다. 그러나 개성적 화풍이 뚜렷하고 거칠게 그린 분방한 솜씨로 미루어 볼 때, 40~50대에 그려 《옥계사첩》을 꾸미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또한 임득명의 〈등고상화〉는 앞서 살펴본 정선의 〈필운대상춘(弼雲臺賞春)〉과 달리 필운대 언덕과 그 아래 마을만 포착한 구성을 보여준다. 원경의 남산과 관악산, 그리고 도성 내부의 풍경이 생략되어 있다. 두 작품을 비교하자면, 정선은 멀리 위치한 남산을 담기 위해 제3의 시점을 설정하거나 부감하여 그린 반면, 임득명은 남산과 원경을 빼고 아래서 바라본 시선대로 필운대 언덕 능선을 살려 그렸다. 눈에 보이는 대로의 봄볕 가득한 풍경을 그린 셈이다. 오른편 능선은 필운대 언덕의 실제 풍경처럼 보이지만, 왼편의 능선은 실경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선의 화면 구성상 일부러 좌우를 맞추어 놓은 듯하다. 필운대 언덕 위에는 일곱 명의 시인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서있고 여섯 명이 앉아 있으나, 정선 그림처럼 좌장을 중심으로 집중된 표정들이 아니어서 재미나다. 모두 갓을 쓰지 않은 점과 더불어, 여항문학을 선도한 중인층의 자유스러움이 묻어나는 듯해 눈길을 끈다. 영조 시절 문인사대부층의 경직된 모습을 읽게 해주는 정선의 〈필운대상춘〉에 비하여, 임득명의 〈등고상화〉에는 정조 시절 부상한 중인이나 서민층의 문예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18세기 영·정조의 시대 변화상을 읽게 해준다.
《옥계사첩》(삼성출판박물관 소장) 중 송월헌 임득명 <등고상화(필운대)> 종이에 수묵담채 24.2×18.9cm 18세기말
오른쪽 필운대 봄꽃 ⓒ이태호
노란 종이배를 타고 신도원의 꿈에 들다
올봄, 나는 틈날 때마다 인왕산을 찾았다. 산중턱에 살아남은 개복숭아꽃을 만나려고 3월 말부터 드나들었다. 4월 중순이 되자 드디어 여기저기서 복사꽃 꽃망울이 터졌다. 옥류동에서 인왕산 중턱으로 오르며, 양지바른 비탈에서 복숭아나무 10여 그루를 발견하곤 반가웠다. 몇 그루의 죽은 고목 밑둥치에서 새순이 돋고 새 가지에 꽃피는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웠다. 여린 가지에 새싹과 함께 핀 선홍빛의 〈개복숭아꽃〉 한 가지를 스케치했다. 이 개복숭아꽃에서 그야말로 자연이 지닌 생명력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의 손길을 타지 않은 채 현재의 인왕산 숲을 그대로 놔둔다면, 언젠가 복사꽃 만발한 도화동천이 도래할 거라 상상하며 황홀했다. 신도원(新桃源)의 꿈을 떠올렸다.
이번에 그린 필자의 그림 〈신도원의 꿈〉은 정선의 〈필운대상춘〉 방식으로 화면을 잡아 보았다. 근경에 필운대를 배치하고, 수묵으로 표현한 원경의 남산과 관악산 아래 빌딩숲, 그리고 경복궁은 필운대 위쪽에서 내 눈에 든 모습 그대로이다. 현재 필운대 언덕에는 근래 세워진 정자가 덩그러니 있고, 그 옆에 두 면의 테니스코트가 들어서 있다. 수백 명의 시인들이 모여 봄노래를 읊었다는 언덕이 그렇게 변했다. 테니스 치는 모습은 그릴 자신이 없어 생략하였고, 신도원에도 필요할 정자만 살려 보았다. 필운대와 빌딩숲 사이, 옛 도성 안을 복사꽃으로 가득 채워 넣었다. 금년 필운대와 인왕산을 답사하며 봄꽃을 찍을 때, 그 너머의 광장에서는 세월호 1주기를 맞아 추모 인파가 오열하고 갈등하였다. 우리 시대의 신도원은 그 아픔을 안고 꾸는 꿈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필운대 아래에 노란 종이배를 띄웠다.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인적 없이 정박한 빈 배처럼. ●
이태호 <개복숭아꽃> 종이에 채색 20.3×33cm 2015
이태호 <신도원의 꿈> 종이에 수묵담채 37.8×56.5cm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