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강수미의 공론장 1

세대 미학, 미술주체의 문제

지금부터 내가 다루려는 최근(2013~2014년, 그리고 현재) 한국 미술계의 특정 현상은 분명 차이, 변화, 단절, 대립의 계기로서 ‘세대’ 문제를 품고 있고, 누군가 어떤 의도로든 촉발만 시키면 논쟁과 갈등이 확 불붙을 폭발력을 가졌다. 아직은 잠복 상태거나 미결정 상태라는 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행 추이를 보자면 일단 사건의 불씨는 점화됐으며 어느 쪽으론가 양상이 몰리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도 어렵다. 해서 우리 앞에는 그 잠복 혹은 미결정의 상태가 내부에 어떤 속성을 갖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형태로 마름되어야 할지, 혹은 어떤 방향과 가치를 좇아 바로 잡히고 정교해져야 하는지 고민할 과제가 놓였다. 요컨대 사회 어느 영역이나 마찬가지 듯 미술계에도 새로운 세대가 출현하고, 그 세대의 새로운 일과 자리와 존재가치가 필수적으로 요구되는데, 그것이 기성세대 및 체제와 어떻게 관계 설정을 하고, 제 위치를 잡으며, 어떤 기제들과 더불어 스스로의 정체성을 정립하는가 하는 문제다. 이 지면에서 나는 그 문제를 크게 ‘세대 미학’이라 명명하고, 앞으로 몇 차례의 글쓰기를 통해 미술주체, 미술경향, 미술정치학, 미술제도, 미술비평 등 세부 논제에 따라 짚어보고자 한다. 우선 여기서는 미술의 주체가 관건이다.
요 근래 한두 달 사이 한국 미술계의 특정 지점에서 세대 갈등이 살살 불 지펴지는 모양새다. 앞서 지나가듯 언급했지만 사실은 좀 수상스러운 상태다. 그 양상이 세대 간 삶의 지향적 차이나 미학적 충돌로써가 아니라, 일부의 사람들 사이에서, 어딘가 배타적인 방식으로, 묘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때문에 일정 규모 이상의 사회 집단을 상정하게 되는 ‘세대’,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물리적・심리적 마찰이 떠오르는 ‘갈등’이라는 단어를 쓰기가 주저되기는 한다. 일단 갈등이라고 해도, 그 직접적 원인이나 소기의 목적이 분명치 않으며, 구도가 명확히 설정돼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대 갈등이라면 익은/기성세대와 젊은/신진세대, 이 두 진영의 당사자들 간 대립과 쟁투가 문제일 텐데 실제로 일의 전개는 전자가 후자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이슈를 주도하고 행동을 자극한 데서 시작됐다. 그 점에서 전도(顚倒)의 징후도 보인다. ‘청년’의 이름을 내세워 정작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는 ‘기성’이라고나 할까.
미술의 역사에서 가장 고전적이면서 언제나 이미 급진적인 세대 갈등의 양상은 아방가르드의 친부 살해, 즉 전복의 의도를 가진 신참자가 반미학・반미술의 저항을 통해 기존의 미술을 폐위시키고 새로운 미술의 시작을 요구하는 식이다. 그에 비춰볼 때 지금 여기의 양상은 관계가 묘하게 꼬여있고, 제기하는 내용이 빈약하며, 요구사항은 보수적이거나 소시민적이다. 팩트 체크를 하자면, 지난 해 말 SNS 상에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일명 ‘청년관’을 신설하라는 요구가 미술세대 간 갈등의 이슈로 제기됐는데, 이를 처음 제기한 이는 기성 미술계에 자리를 잡은 선배세대 중 한 명인 비평가 임근준이다. 나아가 그는 온오프라인을 이용해 그 이슈를 붐업 시켰다(좌담회 ‘안녕 2014, 2015 안녕?’, 《한겨레21》 2015. 1.9). 그리고 한겨레 기자 노형석이 이를 이어 받았다.
즉 대안공간 루프 디렉터 서진석, <청춘과 잉여전>(커먼센터 2014.11.20~2014.12.31) 기획자 안대웅, 대안공간 이포 디렉터 박지원을 초대한 대담에서 그들의 주된 논의가 “자생성을 고민한 창작활동”(박지원), “여기를 발판으로 제도권에 들어가자, 작가 키우자는 식의 목표는 없다”(안대웅), “청년관 얘기는 숲보다 나무만 보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서진석) 등으로 이루어졌음에도 기사 제목을 “국공립미술관에 ‘청년작가들의 공간’을 허하라”(한겨레, 2015.1.18)로 뽑음으로써 논점을 선정적으로 좁힌 것이다. 그들은 제도권 내 청년 공간의 확보라는 이슈를 후배세대가 지금 여기서 풀고 획득해야 할 최우선 욕망의 과제로 설정해줌으로써 기성세대 vs. 신진세대, 기득권미술제도 vs. 청년작가의 갈등 구도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실제로 그에 동조하는 측은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의 한 필자가 쓴 것처럼 “팬덤층이 아닐까 의심”(배세은, indienbob.tistory.com/914)이 들 만큼 젊은 미술인 중 일부이며 사회적 집단성보다는 배타성을 가진 이들이다. 대담에서 안대웅이나 서진석이 각자의 뜻으로 말한 ‘미술계의 88만원세대’ 대다수가 아니라, 예컨대 트위터의 ‘팔로우’나 페이스북의 ‘좋아요’를 통해 서로 물고 물려 있는 그룹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현재 이슈 속의 ‘청년작가들’은 기성세대 미술을 낡고 진부한 것으로 격하시켜버릴 만한 어떤 전위적이거나 혁신적인 작품을 보유하고 있는가? 혹은 상상컨대 국가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청년관을 어느 날 떡하니 개설해주면 당당히 거기 들어갈, 그간 자신들의 은밀한 그룹 안에서 비아냥거렸던 기성작가들의 미술을 부끄럽게 할 만한, 독자적인 예술 실험을 하고 있는 중인가? 혹시 선배가 제시해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청년관 신설’이라는 이슈를 복창하면서 정작 미술은 손 놓고 있지 않은가? 이를테면 이 형국은 아들(딸, 청년, 청춘, 젊은, 신진 등 그 지시어가 무엇이든)이 자신의 의지 대신 아버지(어머니, 중년, 노년, 늙은, 중견, 원로, 기득권 등등)의 욕망에 이끌려 아버지의 목을 치는 체 하면서 아버지의 사랑 받는 옆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노파심에서 부연하건대, 여기서 아버지는 라캉의 ‘대타자’ 혹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개념과 같다). 현재 한국 미술계에서 미술의 새로운 주체가 되고자 하는 이들은 사회에서 말하는 의미의 잉여가 전혀 아니다. 그런 자기 욕망의 당사자 말고, 정작 발화도, 행동도, 무엇보다 세대 너머 체재를 전복할만한 야심 찬 작업도 직접 수행하지 못한 채 이슈로 서로를 묶는 이들이 잉여 상태에 빠져 보인다. 게다가 그런 이들은 정작 자신이 속한 세대의 대다수 구성원들과 공감 및 연대는 고사하고 말하자면 스스로를/ 그들을 ‘왕따’ 시킴으로써 세대교체의 동력조차 없애버린 것 같다. 이를테면 특정 미술대학 출신이 아니고, 미술계의 누구와 어디가 영향력이 있는지 뒤쫓는 것보다 우선 미술을 계속할 것인가부터 해결이 안 나 고민이며, SNS 상에서마저 제 목소리를 낼 틈을 못 찾고 있고, 특정 취향 그룹의 크고 작은 위세를 고스란히 스트레스로 떠안고 있는 대다수 침묵하는 예비/무명/주변 미술가들이 진짜 청년세대의 실체다. 유행하는 퍼포먼스아트나 리서치 기반 미술과는 거리가 멀고, 요즘 대세인 협업을 하려 해도 스타일 좋은 디자이너 친구도 수완 좋은 기획자 친구도 없는 전국 곳곳에 박힌 미대 졸업생들이 우리가 고려해야 할 청년세대 전체다. 그 청년세대 구성원들의 진정한 욕망이 평소 튀는 언변과 취향의 동년배 일부가 모창 하듯 따라 외치고 있는 “그럴듯한 기회와 장소”(《한겨레21》 위와 같음)는 아닐 것이다.
처음부터 상황이 이렇게 흘렀던 것 같지는 않다. 우리가 넓은 의미에서 한국 현대미술 지형과 지세에 어떤 변화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느낀 2013년경으로 시계를 돌려보면 분명 새로운 주체가, 자신들의 목소리로, 자신들의 사고, 감각, 취향, 판단에 따라 만든 자신들의 환경에서 새로운 미술을 시도했다. 예컨대 ‘시청각’과 ‘커먼센터’는 기성미술제도에 편입하는 대신 독립된 전시공간을 꾸려 자신들의 미적 지향 및 취향에 부합하는 미술을 기획전 형태로 제시했다. ‘문래동창작예술촌’이나 ‘남서울예술인마을’은 문화예술의 핫스팟 대신 공장지대나 변두리동네 안에 자리 잡은 채 삶과 예술의 실증적 공존가능성을 보여줬다. 일군의 아티스트, 큐레이터, 디자이너, 엔지니어 등이 공동 창업하고, 공간을 공유하며 다원적이고 집합적으로 창작-생활하는 형식으로서 그 사례들은 청년미술세대의 특성과 성과를 예표 하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청년미술세대의 실체는 자신들이 나서서 미완/미생으로 평가 절하하거나, 제도권 미술관의 구성원 또는 “한국 미술계를 빛낸” 인물 등으로 전이하면서 보다 현실적인 목표가 설정됐다. 그것이 앞서 살핀 바 기성미술제도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서 일정 지분(쿼터)을 얻어낸다는 것이다. 불과 2년이 채 안 되는 이전에, 리슨투더시티의 작가 박은선은 다음 인용문처럼 당당하게 독립적 창작 시스템을 제시했다. 그런데 어떻게 분명 이 작가와 같은 세대에 속하는 젊은 세대의 일부는 오늘 여기서 시니컬하게 자신을 ‘잉여’라고 부르며, 공적 제도에 자신을 의탁하려 하는 것일까.
“독립적인 기금의 구축은, 국가와 기업의 패러다임에 휘말리지 않는 방법은 가능한가를 묻는 존재론적 실험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실험은 개인의 우수함보다 집단적으로, 지역을 기반으로 실험해야 한다. 설사 그 방법과 규모가 보잘 것 없이 작다 하더라도 국가내부의 담론 안에 안주하는 큰 기관보다 다양하고 단단한 기반을 다질 수 있다.”-리슨투더시티 박은선, <미술 독립기금 구축하기>, 《미술생산자 모임 자료집》, 2013, p.49
강수미 동덕여대 교수

CRITIC 청춘과 잉여

커먼센터 2014.11.20~2014.12.31

얼마 전까지 힙스터가 해야 할 일 중에 하나가 ‘아이맥스’ 영화관에서 <인터스텔라>를 보면서 ‘허니버터칩’을 먹는 거란 말이 있었다는데, 굼뜬 일상인지라 하나도 이룬 게 없었는데 얼마전 허니버터칩을 맛볼 기회가 있었다. 기존 감자칩과 다른 새로운 시도로 짭짤함과 달콤함을 동시에 추구한다는 허니버터칩에 대한 소문과 기사 때문인지 신문물을 앞에 두고 조금의 기대와 긴장을 하고 먹었는데. 내 맛도 니 맛도 아님을 알고 난 후 과자 하나를 앞에 두고 여러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청춘과 잉여전>은 젊은 기획자 듀오 ‘유능사(안대웅, 최정윤)’의 입봉 전시이기에 작가 박찬경의 말처럼 어설픈 지도 그리기도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필자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시도 자체로 보기에 <청춘과 잉여>는 지나치게 야심 찬 기획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이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그리고 2010년대를 관통하는 한국 사회의 주제로 아시아, 이야기, 유토피아, 매체 그리고 어떤 주체(?)의 5개를 제시했다. 계보와 위치 짓기를 시도하는 기획에서 그 기준의 근거가 적확하지 않다면 기획의 의도나 의미를 공감하기 어려운데, 아무리 꿰어 보아도 왜 5개의 주제인가, 각각의 주제가 어떤 관계인가 알기 어려웠다. 송상희-이자혜 작가를 묶는 주제는 정리되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
‘청춘’과 ‘잉여’ 의 대표 주자처럼 짝을 이룬 작가들은 (박찬경-이완, 안규철-김영글, 정연두-백정기, 박미나-이상훈, 송상희-이자혜) 이미 작업 맥락이 뚜렷한, 제도적으로 연착륙한 작가들이라 전시의 재료로써 작업은 보장된다. 그렇다면, 전시의 관건은 젊은 기획자로서 미술계에 이러한 이슈를 제기하고 주제에 맞게 작업들을 어떠한 맥락에 놓는가에 달려있다 할 것이다. 기획자는 장소 특정적 성격이 강한 전시에 공간 자체의 아우라보단 작품이 드러나도록 노력했다고 이야기했지만, 공간 배치에서 특정 소주제와 몇몇 작가에 집중해 최소한의 균형이 부족했고, 1층부터 4층까지 22개의 작업을 보는 과정은 분절적이고 부자연스러웠다.
한국사회에서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그리고 2010년대 초반은 20여 년에 불과하지만,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급진적이고 다층적 맥락을 지닌다. 그렇기에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전시 배경과 내용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준 기획자의 현학적 수사에 비해 주제 정리와 배치 과정에 대한 느슨함이 더욱 아쉽다. 차라리 역사화에 대한 힘을 빼고 분명하지 않고 중첩된 5개의 주제와 <댄싱 위드 더 스타>와 같은 작가 짝짓기 형식을 조금 줄여 집중했다면 잘 꿰어진 보배가 되지 않았을까.
<청춘과 잉여전>은 최근 20여 년의 한국 사회와 미술의 궤적에 대한 짭짤하고 달콤함을 뒤섞은 위치 짓기의 시도였다. 어쩌면 전시 자체의 의도나 기획의 역량은 거기까지였을 수도 있는데, 미술계의 과대 혹은 과소 비평과 감상이 있을 뿐이다. 첫 전시가 좋든 나쁘든 오르내렸으니 더할 나위 없는 성과이자 앞으로 행보가 주목받게 된 것도 힘이 될 것이다.
2010년부터 제도권에 등장한 젊은 기획자들의 자기조직화 방법 중에 동시대미술에 대한 계보학적 위치 짓기, 감각적 네이밍와 출판은 나름의 전략일 수 있고 대체로 효과를 발휘했다. 젊은 기획자의 야심 찬 기획과 전략의 방법론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1:8의 세상에서 예술의 가능성은 작아지지만 책임은 무거워지는 상황에서 기획자의 정신승리를 위한 시도에만 기대는 것은 조금 단순하고 순진한 마무리일 수 있다. 공공영역의 실험적이고 대안적인 활동이 축소되는 상황에서 젊은 기획자들이 귀한 자산이 되어야 하기에 조금 느리더라도 깊이 성찰하고 정진해주길 바란다면 요즘 실정 모르는 기성세대라고 할까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하고 부탁하고 싶다.
채은영 우민아트센터 학예실장

CRITIC 이광호 그림 풍경

국제갤러리 2014.12.16~1.25

환한 빛이 가득한 1층 두 방에서, 그리고 어둠으로 차 있는 2층에서 곶자왈을 만났다. 지나간 시간들이 말라비틀어진 덩굴식물의 줄기와 나뭇가지들이 덤불 속에서 폐부를 찌르듯 쏟아져 나왔다. 눈앞의 잡목 뒤에 어떤 세계가 펼쳐져 있을지 가늠할 수 없었던 그때의 낯섦은 무한한 원시림을 상상하게 했는데, 세월이 지나 갑작스레 화면 속에서 마주한 곶자왈에서도 그 너머의 산길은 가늠할 수 없었다. 기시감을 넘어선 실재의 공간, 곶자왈은 꿈속에서 만난 풍경이자 잠시 머물렀던 지나간 시간이며 무한히 펼쳐내는 환상적 공간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곶자왈은 내게는 아르카디아이나 작가 이광호에게는 매료된 특정 장소이자 자연을 사색하는 공간이다. 남자 차장이 버스 몸통을 두드리며 외친다. “곶자왈! 곶자왈 내립서.” 외지인인 나의 뇌리에는 제주도의 소리 “곶자왈”이 각인돼 있다. 창밖 어둠 속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던 그곳을 다시 지나던 낮에, 여전히 버스 몸통을 탕탕 두드리는 남자 차장의 비음과 함께 차는 출발하고 창밖으로 엄청나게 큰 고사리잎으로 뒤덮인 산길 입구가 열려 있었다. 5.16도로에 감사하며 버스 운행시간에 맞추어 제주도의 남쪽과 북쪽을 오간 이들에게 ‘곶자왈’은 그렇게 사전적 의미로 설명되지 않는 어떤 장소이고 어디서나 만나는 동네 숲길이다.
이광호의 화면 속에 존재하는 곶자왈은 눈이 덮여 있을 때조차 봄으로 보인다. 연중 상온을 유지하는 제주에서 눈은 그저 차가운 수분일 뿐이다. 눈 아래 놓인 푸르름과 달리 덤불은 눈을 넘어 공간으로 뻗어 오른다. 그 날카롭고 뻣뻣한 나뭇가지 혹은 메마른 줄기들은 바늘의 예리함으로 화면을 뚫고 나와 속살을 드러낸다. 푸르름이 가득한 봄 풍경과 물기가 말라들어 바삭해진 가을 풍경 모두 발려진 물감층을 뚫고 비집고 나온 풀이나 잡목처럼 그렇게 생명력을 드러낸다. 그것은 바로 예리한 바늘의 리듬감 있는 그리기, 결국 표면의 상처를 통해 형상화된 빈 공간이다.
화면 속 곶자왈의 밤은 깊고 무겁다. 부드럽고 가늠할 수 없는 깊이로 인해 상상력의 골이 무한히 깊어지는 공간을 체험케 한다. 그림의 표면은 균질하고 싱싱하다. 밤을 울리는 벌레 소리와 잎이 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 부드러운 생명의 현장이 흔들거림 혹은 진동하는 에너지의 축처럼, 가는 떨림이 가득한 평면에 다름 아님을 알게 될 때, 이 작가의 놀라운 테크닉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단지 탄력 있는 고무붓의 경쾌한 리듬과 탄성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진동하는 에너지의 형상화를 보게 되는 것이다. 숲에 이르러 보지 못하게 되는 숲이 아니라, 가까이 들여다보아 사라지는 나무가 아니라 생명성 자체를 경험하는 일, 그림 속 곶자왈을 만나는 것은 각인된 시간의 여행, 원시적 생명성에의 경외를 경험하는 일이다.
조은정 미술비평

CRITIC 자연 대 자연 송창&유근영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2014.10.17~2014.12.14

송창과 유근영의 <자연 대 자연>은 철학자들이(혹은 인류가) 자연을 인식하고 사유해 온 두 개의 신화적 사건을 배치한 것으로 읽힌다. 신화의 탄생지에서 신의 실체는 대체로 무수한 대자연의 사건과 인간의 사건들 사이에서 빛을 발한다. 엄청난 스펙터클의 자연적 사건들은(축복보다는 재앙의 경우가 더 많다) 나약한 인간으로부터 신의 절대성을 상승시키고, 반면 전쟁과 사냥에서 벌어진 인간적 사건들은 영웅을 탄생시켰다. 신의 절대성과 영웅이 혼합되고 묶이면서 ‘신화(神話)’라는 초현실적 서사는 민족지학의 방대한 뿌리가 되었다. 뿌리가 되면서 스펙터클의 자연적 사건들과 인간적 사건들은 둘로 구분할 수 없는 상태로 뒤섞였고, 자연이라는 ‘존재’가 인간의 사건을 초래하거나 인간이 스스로 자연의 사건을 생각하며 자연과 인간의 신화를 엮어내기도 했다. 아마도 바로 그즈음에서 인류는 ‘퓌지스(Physis)’라는 철학적 대상으로서 자연을 갖게 되었는지 모른다. 자연으로부터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사유’를 묻게 된 것이다. 자연철학은 그렇게 탄생했다.
송창이 그리는 자연은 무수한 인간의 역사적 서사를 함축하는 자연이다. 그의 자연은 오래전부터 우리 눈앞에 스스럼없이 현존해 온 본래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 심지어 생래적이고 본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그의 화면에서는 미학적 의문을 제기한다. 저렇듯 아름답고 생기에 찬 자연이야말로 ‘스스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라는. 그리고 더 은유적으로는 저렇듯 아름다운 자연은 자연이 아니라 어떤 것들의 어두운 그림자일 수 있다는. 그렇다면 그 의문의 실체는 무엇일까? 우리는 우선 그가 그리는 풍경의 대상지가 한반도의 허리를 자르고 있는 비무장지대 접경지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소나무 숲이고 들녘이며 하늘이 아니라 한 국가의 분단을 ‘실체적으로’ 인식시키는 장소들에서 맞닥뜨리는 숲이고 들녘이며 하늘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므로 그의 숲들은 해방 이후 그어진 38선과 6・25전쟁이라는 냉전의 제노사이드가 남긴 유령들일 수 있다. 그러니까 그는 한반도의 냉전 사건으로부터 자연과 인간의 존재사유를 묻는 ‘풍경화’를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1982년에 창립한 ‘임술년’ 멤버로 참여하면서 탄생시킨 자연은 단 한 번도 그러한 냉전신화의 자연으로부터 한 발짝 비켜선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냉전신화의 상징이라는 역사성을 더 구체화하는 쪽으로 작업의 방향을 옮겨왔다. 다시 말해 그가 최근에 그리는 자연들은 접경지의 풍경이라는 구체성을 더 좁혀서 실제적 사건들의 장소들을 찾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자연철학이 궁극적으로 밝히고자 하는 존재론의 문제를 푸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유근영의 자연은 무엇일까? 그의 자연은 송창이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쪽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연철학자들이 사유했던 것처럼 자연을 자연으로서 본다. 이때 ‘자연으로서’라는 표현은 그가 ‘인간으로서’ 자연을 보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자연의 내부에서, 자연의 바깥에서 그는 한 존재자의 시각으로 자연을 톺아보는 순수의지를 발현시킨다. 즉 그가 마주하는 자연은 스펙터클한 자연적 사건은 아니지만, 자연이 스스로 현존하는 것에 대한 사건을 보여줌으로써 자연이 가진 미학적 숨결들을 화면에 배치하고자 한다. 그런데 유근영의 작품들이 우리를 매료시키는 것은 작품 속 자연이 구체적인 현실 속 자연의 안팎이 아니라 유근영이라는 한 작가의 내면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자연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평생 자신의 내부에 회화적 자연이라는 정원을 가꾸어왔다. 물론 그것들은 우리 눈앞에 현존해 온 자연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작품 앞에 섰을 때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이질성이 아니라 이국적인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유근영의 내부에서 화면으로 옮겨 온 그것들은 분명히 어딘가에 현존하는 자연으로 읽히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미학적 실체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자연 신화는 실재계가 아니라 상상계와 상징계를 혼합한 신화라는 것을. 송창이 실재계와 상상계를 혼합해서 상징계라는 미학적 화면을 구성했다면, 유근영은 상상계와 상징계를 혼합해서 오직 그만의 실재계를 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실재계는 어쩌면 인류가 시나브로 상실했거나 파괴해 온 퓌지스의 존재사유일지 모른다.
자연철학자 김진에 따르면 퓌지스는 물질적인 존재들을 존재하게 하는 존재의 근거와 원인들에 관여하기도 한다. 자연은 우리의 존재사유를 밝히는 가장 근원적인 철학적 명제이지 않은가! 송창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인간 존재를 묻는 자연을 그리고 있다면, 유근영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자연 존재를 묻는 심연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 둘 모두 서로 다르면서 동일하게 이어지는 지점은 자연철학이 던지는 존재사유의 질문이다.
김종길 미술비평

[kim shin’s design essay 4]

장식이 된 근육

김신  디자인 칼럼리스트

예전에는, 그러니까 199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 남자배우 몸이 지금처럼 근사하지 않았다. 스크린에서 남자배우가 옷을 벗었을 때 시각적으로 즐거움을 얻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옷을 많이 벗지도 않았던 거 같다. 반면에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남자 배우들이 얼굴은 물론 몸매에서도 눈부신 아름다움을 과시했다. 내가 대학생 때, 그러니까 1980년대 말쯤에 본 <탑건>이란 영화에서는 전투기 조종사로 분한 남자 배우들이 웃통을 벗고 비치발리볼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톰 크루즈를 비롯한 남자들이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근육질 몸매로 배구를 하는 역동적인 모습을 슬로모션으로, 그리고 잘게 편집된 화면으로 보여준다. 이 장면은 사실 영화의 줄거리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아예 사라져도 아무 상관없는 장면이다. 순전히 관객에게 눈요깃거리를 제공할 뿐이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의 수영복 심사처럼 순수하게 예쁜 남자 몸 감상하는 시간인 거다. 그렇지만 이 장면은 굉음을 내는 전투기들의 화려한 공중전만큼이나 강렬한 인상으로 머릿속에 남아 있다. 1980년대뿐만 아니라 더 거슬러 올라가도 할리우드 남자배우의 몸은 늘 근사했던 거 같다. 어릴 때는 미국 남자들 몸이 다 그런 줄 알았다. 남자 몸이 그렇게 근육질의 광택이 나게 하려면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건 남자인 나 자신이 커가면서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우리나라도 남자, 보통 사람 말고 미디어에 노출되는 젊은 연예인이라면 근육질 몸매를 가져야 하는 게 기본이 된 거 같다. 배우는 당연하고 가수, 이른바 아이돌 스타들, 심지어는 개그맨까지 빨래판 복근 자랑하는 걸 TV나 잡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이제 한국 영화에서도 남자들이 웃통 벗는 장면을 예사로 볼 수 있다. 톰 크루즈 부럽지 않은 시대가 된 거다. 사실 젊은 남자 배우들이 죄다 조각 같은 몸을 자랑하는 건 영화의 리얼리티에 흠집을 낸다. 바둑을 소재로 한 영화 <신의 한수> 예고편을 보았다. 고수 두 명이 얼음창고에서 웃옷을 벗고 바둑을 두는 장면은 현실성이 너무 떨어져서 영화를 보고 싶단 마음이 달아나게 할 정도다. 옷 벗고 얼음창고에서 목숨 걸고 바둑 둔다는 설정보다 고수들의 몸매가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져서다. 조훈현, 서봉수, 이창호, 이세돌, 내가 아는 바둑 고수들을 떠올려보면 그들의 이미지는 몸매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바둑은 가슴을 처지게 하고 배를 나오게 할 수는 있어도 근육을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관객의 시각적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 리얼리티의 결함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흥행이 먼저 아니겠는가.
영화와 TV, 잡지에 근사한 몸을 가진 사람들이 자꾸 노출되는 건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거 같다. 보통 사람들도 그런 몸매를 갖고자 노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은 물론 40~50대, 심지어는 60~70대 할아버지들까지 복근 자랑하는 시대가 되었다. 미디어는 이들을 자꾸 노출시키고 이들의 자기 관리와 절제, 의지력을 칭찬한다. 마치 한국 사람 전반이 미학적으로 업그레이드되는 거 같은 분위기다. 체육관에서 몸을 단련한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TV에 나와 어떻게 그런 몸매를 갖게 되었는지 증언한다. 그런 몸이 화면에 등장하면 방청객들이 ‘우와’ 하고 탄성을 지르는 건 이제 진부한 장면이다.
나는 남자들의 아름다운 몸을 대할 때마다 그게 장식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의 몸은 노동으로 단련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사냥이나 전투와 같은 기능을 위해 자연스럽게 근육질 몸이 되었다. 대부분 사무실 의자에 가만히 앉아서 일하는 현대인은 바둑의 고수만큼이나 건강하고 보기 좋은 몸을 만들 기회가 없다. 그런 몸을 가지려면 억지로 시간을 내서 체육관에 가야 한다. 돈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얻은 탄탄한 가슴과 복근은 쓸 일이 거의 없다. 다시 말해 애써 단련한 근육의 힘으로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는다. 대신 다른 용도가 생겼다. 남들 눈에 보여주는 거다. 그냥 보여주는 게 아니라 과시다. 굳이 맨몸이 아니더라도 잘 단련된 몸은 옷을 입었을 때 맵시가 나게 만든다. 이건 무슨 뜻인가? 근육은 그 기능에서 해방돼 순수한 장식이 된 거다. 아이에게 젖을 주지 않는, 즉 수유 기능을 제거하고 미적 감상만을 남긴 여자의 가슴과 똑같다. 한마디로 근육은 더 이상 어떠한 기능도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예술이 되었다.
이 예술품을 만드는 데는 노력이 필요하다. 혹독한 훈련을 해야 한다. 따라서 이 예술품은 단지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과정에서 건강을 덤으로 준다. 그런 혜택을 알지만 대다수 사람은 박약한 의지와 바쁜 일정으로 중도에 포기하고 만다. 그런 몸을 얻은 사람들이 위대해 보이고 미디어의 각광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각광을 받는가? 첫 번째는 연예인. 몸이 재산인 직업인이다. 두 번째는 좀 연세가 든 분들. 이 분들은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다. 세 번째는 돈 많은 여성들. (요즘은 여자들도 근육을 단련한다.) 이들이 근육을 얻는 데 필요한 핵심 요소는 의지보다는 돈이다. 개인 트레이너를 살 수 있는 돈이 있어야 박약한 의지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미디어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몸이란 기능과 무관한 장식이며, 의지보다는 돈의 결실이다.●

속옷광고

속옷 광고 속 남자 모델의 근육은 노동의 의미를 제거하고 순수한 장식적 아름다움을 과시하도록 연출된다.
맨즈헬스

《맨즈헬스》와 같은 남성 잡지는 아름다운 몸매를 단련하고 과시하는 것이 현대 남성의 라이프스타일이 되었음을 반영한다

위·최수앙 <Condition for Ordinary–colonization> Oil on Resin, steel 45×52×103cm 2013

 

kim shin’s design essay 3

싼값에 사서 버릴 때는 쓰레기 폐기하듯 냉정하게

김신  디자인 칼럼리스트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가구 브랜드 이케아가 드디어 12월에 한국에 상륙한다. 이케아란 원래 차를 몰고 거대한 매장에 가서 물건을 산 뒤 차에 싣고 집에 와서 직접 조립해 구매를 완성하는 브랜드다. 국내에서는 지금까지 매장이 없었다. 한국 소비자는 대개 수입상들이 개설한 온라인 쇼핑몰에서 물건을 산 뒤 배달을 받았다. 원래 이케아는 상품을 배달해주지 않는다. 배달이라는 서비스를 하지 않는 만큼 물건값을 내려준다는 게 이케아의 전략이다. 소비자는 싸게 구입한 대신 차 기름값과 조립이라는 노동력을 지불하지만, 싼값에 현혹돼 그런 건 계산하지 못한다. 아무튼 이케아뿐만 아니라 이른바 저렴하지만 세련된 브랜드들이 마구 들어오고 있다. 자라 홈, H&M 홈 등이 그것이다. 자라나 H&M은 패션 브랜드지만, 그 브랜드 파워를 이용해 리빙 분야로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이들 브랜드의 특징은 저가의 상품을 만들면서 교묘하게 젊고 세련된 이미지를 구축했다는 점이다.
이제 리빙 브랜드에 관심이 많아진 건가? 한국인의 관심이 패션에서 리빙으로 확대되는 것은 바람직하다. 패션이란 자랑거리지만 가구와 같은 집안의 물건은 자랑보다는 자기만족과 가족을 위한 것이다. 이 분야가 그동안 낙후된 것은 소비자의 관심이 적었기 때문이다. 이케아를 비롯해 자라 홈, H&M 홈이 한국에 진출한다는 건 그만큼 한국의 리빙시장이 커지고 있음을 반영한다. 최근 미술관에서 가구 전시가 많아지고 흥행도 된 것은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흐름 속에서 가장 먼저 한국에 관심을 보인 브랜드가 아주 대중적인 브랜드인 것은 당연해 보인다. 몰테니 같은 최고급 가구 브랜드는 샤넬이나 루이비통처럼 대중화될 수 없고, 어차피 한국에서도 최고 부자들은 수입을 통해 이미 구매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대중의 인식이다. 한국 대중에게 인식된 가구 브랜드는 한샘, 카사미아, 보르네오 같은 브랜드다. 이들과 견주어 이케아의 상품은 질이 훨씬 떨어진다. 튼튼하지 않을 뿐 아니라 직접 운반하고 조립해야 하는 부담까지 안아야 한다. 디자인은 유명 디자이너의 가구를 흉내 낸 것이 많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케아는 실제 상품의 품질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케아는 스웨덴 브랜드다. 스웨덴이라는 훌륭한 복지국가의 좋은 이미지를 등에 업고 있다. 이케아는 심지어 환경친화적인 이미지까지 있다. 막대한 홍보활동 덕이다. 이케아는 가구의 민주주의를 이루었다고 주장한다. 이 말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저렴하지만 세련된 디자인의 이케아를 전 세계 수많은 사람이 구매함으로써 이케아는 가난한 이들에게도 세련된 디자인이라는 세례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전 세계 가정 실내환경의 하향 평준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비싸고 뛰어난 가구를 살 수 있는 사람들도 이케아를 사기 때문이다.
이케아의 핵심 가치는 사실 쉽게 버릴 수 있는 상품을 창조했다는 데 있다. 올해 한국에서도 개봉된 영화 <그녀>를 감독한 스파이크 존즈 감독이 만든 이케아의 광고가 있다. 한 여성이 테이블 램프를 쓰레기와 함께 집밖에 버린다. 램프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양이어서 원래부터 처량해 보이는데, 비바람 치는 밖에 놓이고 밤이 되자 더욱 불쌍해 보인다. 게다가 아주 슬픈 음악이 흐르면서 방 안의 새로운 램프와 버려져 비를 맞는 램프를 교차 편집으로 보여주어 보는 이의 연민을 더욱 자극한다. 이 영상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생각을 갖게 된다. “어서 누가 저 가엾은 램프를 좀 구해주면 좋을 텐데.” 그때 한 남자가 나타나 램프 앞에서 말을 시작한다. “여러분 중 많은 이가 이 램프에 대해 슬픔을 느꼈죠. 미친 거예요. 램프는 감정이 없어요. 새것이 훨씬 좋아요.” 1분밖에 안 되는 시간 동안 사람의 마음을 이토록 슬프게 하고 끝에 반전을 이끌어내는 걸 보니 역시 영화 연출자는 다르다. 이 짧은 광고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램프에, 넓게는 물건에 깊은 애정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거다. 폐기하고 더 좋은 상품을 사라는 것이다. 현대사회의 소비주의를 이토록 짧고 강하게 연출하다니. 자사 제품을 만드는 노동자에게 인색한 이케아는 광고를 만드는 데는 엄청난 돈을 투입한다. 그게 이미지를 구축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카탈로그와 영상 속 이케아는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이 광고에서 나타난 이케아의 본질, 질은 낮지만 세련된 디자인   (물론 B급 세련이지만), 싼값, 쉬운 폐기, 이런 것들은 우리 사회를 정확히 반영한다. 이케아의 소비주의는 물건을 대하는 태도뿐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모든 것을 소모품으로 보는 거다. 사람과 물건은 최대한 부려먹은 뒤 버릴 때는 냉정하게 버린다. 싼값에 구매했다는 사실이 어떠한 연민이나 죄책감도 차단해준다. 물건을 정성 들여 만들지 않듯이 사람 역시 쉽게 쓰고 쉽게 내친다. 기업에 고용된 사람 역시 소모품이다. 우리가 쓰다 버린 물건은 바로 우리 자신인 거다.●

 

ikea

이케아 카탈로그 이미지

위·홍인숙 <잘 보이는 마음과 잘 보이지 않는 마음> 혼합재료 113.5×153×60.5cm 2009
홍인숙은 “싼값에 사서 버릴 때는 쓰레기 폐기하듯 냉정”하지 않다. 버려진 자개장을 분리하고 새로 틀을 만들어 가구로 제작했다.
 

[강성원의 인문학미술觀] 정체성

한국 근현대미술, 정체성의 갈등 현장

미술이란 인간의 삶을 담는 그릇이다. 필자는 100여 년이라는 한국 근현대미술의 시공간 속에서 예술가들의 문제의식과 고민을 주제별로 살펴보고 그것이 작품에 어떻게 표현되는지 살펴보는 데 이 글의 목적이 있다고 밝혔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미술사적 접근보다는 인문학적 접근에 가깝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작가 개인의 정체성과 시대적 요구 사이의 갈등 관계 속에서 작가들이 예술가이자, 사회 구성원으로 그들의 경험을 어떻게 작품에 반영했는지 주목한다.

강성원  미학

이 글은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의식’과 ‘고민’이 ‘작업’에 나타나는 바를 주제별로 살피고자 한다. 사실 이러한 관심은 어찌 보면 비평가들이 해 온 비평방식의 전제이거나 주제가 있는 기획전에서도 보이는 문제이긴 하다. 하지만 주제로 작품을 파악하는 방식이 관행적이 되면서 놓쳐버린 매우 중요한 지점들이 있다고 여겨지기에 한국미술 전체를 대상으로 주제별로 다시 읽는 문제를 제기하게 되었다.
작가가 작업에서 표현하는 미적, 일상적 경험과 판단들은 저마다의 가치관에 따른다. 성장 문화와 구가하고 지향하는 생활도 작가별로 다양하다. 새로운 비전을 향한 계기도 나름대로 특별하다. 이런 다양성과 차이들은 새로운 미적 차원에서 작가의식이나 주제의식으로 전환되고 응축된다. 작가마다 공유하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 같은 시대라도 다른 시대상황인식을 보일 수 있거나 가족관이나 성(性)정체성, 역사관이나 문화관, 민족관 등에서 다른 마음과 생각을 내비칠 수 있다. 여기서는 작가의식이 펼쳐지고 전개되는 작업상 ‘문제의식’의 지평과 비전에 대해 생각해볼 만한 주제들과 얽힌 맥락들을 드러내고 그 내용을 다시 지난 100여 년의 시공간이라는 위상적 퍼스펙티브로 수렴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그림’에 대해 얘기해보려고 한다.
매체가 ‘행위’든 ‘설치’든 또는 ‘평면’이든 작품주제가 창작방법을 통해 드러나는 ‘의미의 차원’이야말로 작품의 ‘진정한 예술적 가치’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작품주제가 작가나 평론가의 전시서문 글 속에서나 작품제목 정도로만 인지되거나 상품가치 인증을 위한 문화적, 기술적 참조 곧 배경 정도로만 문제시되고 있다. 물건 혹은 상품인 ‘작품 자체’의 이미지보다 가치 있는 것, 진정한 의미에서의 콘텐츠는 작품이 말하려고 하는바 ‘내용’이자 내용을 작품으로 만드는 ‘창작방법’이라는 점을 새삼스레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근대미술 도입부터 지금까지 작가들이 작품의 주제와 소재, 매체와 방법을 고민하던 문제의식의 큰 흐름이나 구체적 사례 혹은 연관성을 보려고 한다. 암암리에 혹은 의도적으로 상업적인 요소를 포함할지라도 작가는 자신의   ‘콘텐츠’를 소중히 여기며 자신의 정체성과 동일시한다. 삶을 어떻게 대상화 하는지, 공공에 말 거는 방식을 어떻게 구축하는지, 그리고 작업에 임해 자연과 사회에 대한 느끼는바 내용–이런 태도와 방식이 공공가치인데–을 어떻게 가시화할 것인지에 대한 ‘고투’, 작가적 정체성이 담긴 내용과 형식에 대한 작가의 고유한 가치론이 작품을 예술의 차원에 진입시키며 예술을 인문학적 정신의 산물로 만든다.
한국 미술사의 표상은 작가나 작품의 연대기가 아니라 작품에 깃든 생과 사, 인간과 문명과 자연에 대한 문제의식의 차원에서 나와야 한다. 작품이 지닌 결과적인 내용의 예술적 가치가 ‘미적 차원’이고, 결과가 나오기까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작가의 마음이 ‘미적 문화’인데, ‘미적 차원’ 속의, ‘미적 문화’ 상의 작가적 고심(苦心)이야말로 무엇보다 가치 있고 그래서 미술사와 미술의 ‘문화적 콘텐츠’와 ‘미술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다.
작품이라는 ‘물건’은 이러한 콘텐츠를 담는 그릇이다. 물건인 ‘작품’은 일종의 하드웨어이다. 하나의 작품은 하나의 물건 그 자체로 하나의 특별한 미술관이다. 작가는 자신의 개별 작품, 곧 개별적인 특별한 미술관의 연속 생성을 통해 자신만의 미적 콘텐츠를 연구하며 생성시켜나간다. 그 결과가 작업의 진정한 콘텐츠인 작품의 ‘내용’과 ‘형식’이다. 작가가 주제와 창작방법으로 해 온 일들의 성격을 사회적 차원에서 보면 프로젝트나 프로그램 혹은 엔터프라이즈(기업충동)의 기획성을 띤다. 이번 시도는 이런 ‘일’, 곧 작품이라는 미술관에 ‘사회적 차원’의 내용을 자신만의 전시연출 방법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기획의 미적 차원과 미적 문화를 서로 매개하고 맥락화할 수 있게끔 길을 열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작가들이 행한 기획의 전체상을 ‘작품 주제’라는 연결고리로 매개해보려는 것이다. 필자는 작품 주제들 가운데서도 특히, 여기서 한국 근현대미술사 아카이브의 새로운 정립방법을 논하는 것이 아니기에, 본인이 선호하는 주제들을 선별했다. 주제 범주들은 사실상 서로 연결된 문제여서 편의상 큰 틀의 분류를 가능하면 유지하되 필자의 관심에 우선하는 주제영역만을 살펴볼 것이다 .
작업에는 작가의 몸과 마음 문화의 특별한 역사와 방향성이 표현된다. 그러면서도 한편 생활의 진실을 은폐하거나 이데올로기적 교육의 틀에 갇혀 있거나 체화되지 않은 사회적, 정치적 반향을 담기도 한다. 어쨌든 작가는 그야말로 무언가를 공공화하기 위해, 가치를 얻기 위해, 가치론을 인정받기 위해 이전 생의 전 역사와 이후 생의 전 계획을 투여한다. 게다가 모든 작업은 비참하고 비굴한 사회에 대한 나름의 엄중한 저항이다.
작가의 작업에 대한 이런 이해를 전제로 다룰 주제 범주는 크게 1) 개인적 조건이나 지역적, 시대적 요구가 반영된 작가의식, 그리고  공동체의 정체성 문제의식과  2) 인간과 자연, 사회와 문화, 사건이나 사물의 체계 혹은 상태에 대한 작가의 개인적 태도, 마지막으로 3) 예술과 가상의 문제 등 예술적 소통과 예술의 사회적 가치 등이다.  이 같은 주제들을 따라가기 위해 작가의 진술을 우선적 자료로 검토할 것이다. 작가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의미화하려 했던 부분, 곧 작가 자신의 특수한 표현이자 그가 속한 사회 전체의 특수한 표현으로 볼 것이다. 그리고 생활관계와 생활요구의 측면에서 이 내러티브들을 파악할 것이다. ‘작업’과 ‘진술’을 매개해 작업이 생산되기까지의 미적 문화에 놓인 생(生)의 발로(發露)의 내적, 외적 계기들과 지향성이 그려내는 그림을 볼 것이다.
지향에서 표현되는 정체성이란 본래 이중적 기능을 지닌 개념이다. 정체성은 주어진 역할과 기대에 자기를 동일화하는 동일시의 개념인 동시에 이러한 동일화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다른 비전을 바라보는 개인과 사회의 저항적 자의식이기도 하다. 정체성은 고착적이거나 불온하다. 특히 우리처럼 전통에서 현대로의 이행이 제국주의적 식민지 시기와 겹치고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렀으며, 민족 분단과 냉전적 이념대결을 겪고 있는 사회의 개인은 정체성 인식이 선명히 이중적이고 분열적이다. 개인은 혼란과 불안, 긴장 속에서 사회생활을 유지한다.
이 장(章)에서는 작가 개인의 작가적 정체성 문제를 주제로 작가의식과 시대의 요구가 맞물려 갈등하는 지점들을 살펴볼 것이다. 정체성 개념의 이중적 기능에 대한 작가의식은 특히 미술작품에선 명료하게 드러나고 근대초기 이후 거의 모든 작업의 근본적 문제의식 혹은 기본적 태도로 나타난다. 따라서 맨 먼저 이 문제를 관통해나가야 전체 주제들이 역사적으로 제대로 맥락화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체성, 동일시와 저항 의식
요즈음 포스트콜로니얼 담론 같은 다양한 이슈들에서는 마치 유목적 이주 개념이 탈근대성의 마지막 대안처럼 제시되면서 민족과 국가의 개념이 점차 무의미해지고 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실상은 어느 때보다 전 지구적으로 민족적, 문화적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이런 사실은 차치하고 보더라도 지구상의 어느 누구도 국경을 벗어날 때 국가적 아이텐티티를 보증하는 도규멘트 없이 갈 수 없는 것이 현재 인류의 생활세계이다. 근대적 국경이 확정된 이후 그럴 수 있었던 적이 없었다. 한 개인의 사회적 존재를 공인해주는 국가와 사회의 시스템, 그 시스템에서 증명하는 개인의 자기동일성 증서를 요구하지 않는 생활세계, 진공의 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권 없는 도경(渡境)은 밀입국이요 범죄이다.
한 국가 내에서도 소위 주민증이나 시민증 없이는 생활을 할 수가 없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주민증이나 시민증 없는 개인이 하는 모든 ‘행위’는 실체적 존재의 행위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게다가 알다시피 우리 시대는 어떤 시대보다 체계적이고 통합적으로 아이덴티티 도규멘트를 관리한다. 이러한 의미의 정체성 아이덴티티는 개인이라는  ‘사회적 존재’의 근본 귀속, 특정 사회의 구성원의 자격을 표시한다. 정체성 아이덴티티 없는 개인은 ‘자연상태’의 인류에 불과하다. 아이덴티티 표지가 없는 자는 법에서 규정하는 의무와 권리의 규제를 받지 않는다. 해당 공동체 윤리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
만일 누군가가 이러한 상황에 대해, 가정과 학교와 사회에서 개인의 아이덴티티를 규정하는 데 저항한다면, 그는 스스로 추구하는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인간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또한 대개 민족적 정체성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 한편 자신의 국가를 선택할 여지는 있으나, 지배 정권과 체제의 존속과 번영이라는 이해관계에서 반체제적이라고 규정될 때 그는 불온한 ‘개성’이 된다. 주어진 국가적 정체성 자체를 부정한다면 내국에서는 체제전복자요 외국에서는 망명자이거나 무국적자로 누구도 그의 생명을 보호할 공적 필요가 없다. 체제 내의 생존이란 한 개인의 생존의 시작이자 끝이다. 생의 성취와 비전의 모든 전망은 체제 내에서만 전개가 가능하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었고, 더군다나 민족문화는 피의 계보 문제 같은 것이어서 민족적 정체성의 새로운 기획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 민족문화는 인류에게 생명의 기원이나 원죄 같은 것이다. 혹 어느 옛날 북구 유럽의 전설적 숲, 중국의 태산, 동화 속 지하 동굴 세계, 무지개 너머 인류의 마지막 땅이 있거나, 아직 어떤 인류도 발 딛지 않은 지구 같은 별이 있어 수천 년의 세월에 걸쳐 모세의 탈애급에서처럼 새로운 공동체를 꿈꿀 수 있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지구에서 국가 영토가 아닌 곳은 없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전쟁과 침략 등 제국주의적 식민화로만 다른 국가의 영토를 침탈할 수 있다. 변할 수 있다. 수호지의 양산박은 이제는 불가능하다. 일본은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서구 제국주의적 자본주의 이식으로 아시아의 제패를 노렸다. 본토인과 내지인이라는 새로운 정체성 기제를 작동시키려 했다. 국가적, 민족적 정체성과는 별도의 정체성 규정개념이었다. 강대국의 꿈은 일찍이 일본의 근대적 기획의 큰 틀이었다. 내지(內地) 작가들은 일제 식민체제하에 동화되어야 했다. 근대적인, 자유와 평등의 개인에 대해 알자마자 내지인 정체성과 근대 가정과 사회구성원 정체성, 동시에 전통의 계승자이자 민족해방을 위한 독립투사의 정체성을 자신 안에,  자의식 안에 공존시켜야 했다.
한국은 식민지배에서 벗어나면서 강대국을 향한 근대화 발전을 추구했다. 부국강병과 체제이념 확립을 향한 정권의 국가 정체성 구축 요구는 서구 강대국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이념을 빠르게 삶의 지표로 끌어들였다. 미국의 제3세계 근대화 발전모델을 바탕으로 미국식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독립국가 국민으로 새로운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해야 했고 현대문화뿐만 아니라 민족문화도 부국강병과 자주적 주체성 확립을 위한 민족적, 역사적 정당성 토대로 생활세계에 접목됐다. 이후 거센 민주화운동 물결 속에 민족문화의 민중적 정체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움직임, 나아가 199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티 담론의 홍수 속에서 결국 작가들은 ‘작가적 정체성 갈등’ 자체를 그림의 시작으로, 주제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최진욱의 <그림의 시작>과 박재철의 <난 나비야> 혹은 원성연의 <Piling Yes-terday>나 김광열의 ‘분홍색 그림’ 시리즈에서처럼 작가들은 스스로 작품을 통해 자가 치유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의 작업에선 인물, 물체 등을 어떤 특정한 배경/풍경 속에 배치시켜 어떤 감정들을 이끌어내는 데 관심이 있었다. 작업의 스타일을 바꾸게 된 배경 중의 하나는 그동안 해오던 서술적인 방식에서 벗어나고 싶은 데에 있다. 동시에, 나 자신의 현실, 나와 내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의 관계, 거기에서 생기는 갈등, 감정을 넘어서 더 깊은 순수한 내면의 세계로 가고 싶은 필요가 새로운 그림을 시작하게 한 것 같다.” (김광열)
작가들은, 아니 작가들만이 내 정체성이 왜 그래야 되는지를 물을 수 있다. 묻는 일을 ‘일’로 할 수 있다. 예술의 특권이자 정체성이기도 하다. 아니면 이러한 정체성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세계시민’이 되는 길뿐일 것이다. 코스모폴리타니즘(사해동포주의)은 세계시민권자의 정체성으로만 작동된다. 세계시민권자의 영토는 문화적 영토이다. 한국 작가로서는 백남준이 대표적으로 세계시민의 문화권 특권을 얻었다 할 수 있다. 그의 발언과 태도들은 이런 특권을 누리는 자의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자유로웠지만, 실제 그의 생활은 세계시민의 문화적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떠돌아야 했고, 세계시민으로서 동·서양 문화의 다양한 정체성을 이종교배하는 작업을 그만두지 못했다. 자신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외국인이 보거나 한국인이 보거나 그는 한국인이자 외국인이었지만, 백남준 자신은 스스로를 한국인이자 세계시민으로 여겼을 것이다. 떠돌면서 지독히 공허하기도 했을 것이다. 지난 100여 년간 우리 작가들의 작가의식에 은폐된, 거대하고 조용하나 미세한 자기분열을 계속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정체성 강요는, 체제 순응적이든 파괴적이든, 이러한 정체성 갈등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작가들의 작업기제로 작동하며 이들의 모든 작업을 둘러싸고 있다.

박재철 난나비야!
박재철 <난 나비야> 한지에 수묵채색 70×70cm 1998

한국 미술가들의 민족·문화적 고민
일제 식민지시대 시작과 거의 동시에 우리 미술가들도 서구적 미술가로서의 작가의식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드러내기’ 시작한다는 것은 유학과 독서 등 매체를 통해 서구문물을 접하면서 갑작스레 서구적 작가의식이 생겨났다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기 때문이다. 서구적 작가의식이란 예술의 자율성과 예술가의 창조성, 개성을 예술의 근본으로 여기는 태도 등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런 의식은 동양 예술가에게도 전통적으로  요구됐던 사항이다. 개성이 뛰어나고 상상력이 풍부한 그림을 좋은 그림으로 치는 기준은 동양화론에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미 일정 정도로는 지금의 서양식 작가관이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식이 어느 정도로는 존재했지만, 그래도 새삼스레 ‘드러났다’는 것은 서양적 대상 선택과 대상의 재현 방법, 서양식 재료의 장인적 마스터가 예술가가 그려낸 ‘미적 차원’이 생활세계를 뛰어넘은 인간 정체성의 ‘진실한’ 무엇이라고 보는 예술을 위한 예술관의 일정한 태도와 접목되면서 동시대의 근대적 예술관으로, 당시의 공적인 서구적 작가의식으로 일컬어지기 시작했다는 뜻에서다. 근대 초 우리 작가들의 서구적 작가의식이란 결국 전적으로 새로운 예술관의 이식이나 수용의 차원이 아니라 새로운 문명의식으로 달구어진 작가의식이다. 하지만 바로 이래서 당시의 작품들은 습작에 가까워 장인적 기량에서나 자신의 가치관과 취향을 창작방법으로 체계화하고 전수하는 차원에서, 세계의 거장들이라 평가받는 작품들과 동등하게 견주기는 힘들다. 우리 역사에서도 그렇지만 서구 역사에서도 20세기는 사회생활의 전 분야에 혁명적 변화가 시작된 시대였다. 모진 격랑의 시대였다. 더군다나 제1, 2차 세계대전 사이의 기간은 도처에서 전쟁과 파괴, 학살이 자행되고, 작가들은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한 잿빛 산문의 세계에 대응해 새로운 기법들이 나타나는 가운데 대상을 주관적으로 바라보는 작업을 넘어 리얼한 현실세계를 대상에서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우리 화단에 인상주의, 표현주의, 상징주의적 작풍과 유사한 작업이 많았다는 것은, 이들이 바로 이런 화풍을 일본에서 보고 배운 것이라 그렇기도 하지만, 인상주의나 상징주의, 표현주의 화풍이 주관적 시선에서 인물과 정물, 풍경을 스케치풍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유화에 익숙하지 않은 작가들이 인물이나 실내 정경, 집, 길 등을 스케치풍으로 그려내기가 수월했기 때문에도 그렇다고 보인다. 이 시기는 근대미술 발전도상의 첫 신(scene)으로 작가의 정체성 혼란이 작품 생산의 질을 넘어 짓누르던 때였다.
작가들은 일본 식민지체제의 내지인으로 오랜 기간 장인적 기술의 연마나 연구, 오랜 공을 들인 기념비적 대작을 생산할 방법은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 문화의 정체성만은 간직하고 싶었겠으나 일제는 지방색 차원에서는 이를 허용하되 민족적 주체성 차원에서는 반체제적이라고 탄압했다. 민족주의자들은 친일파가 되겠다는 것이냐고 따져 묻고, 좌파 진영에서는 반민중적이라 비판하는 가운데, 작가 대다수는, 실제로 당시 제국주의적 친일 관피아가 아니라면, 이른바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을 찬양하는 홍보전시에 작품을 출품하고 싶지 않아도 대개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면 마찬가지로 좌파 문화예술계의 활동에 굳이 참여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추측일 뿐이지만 이런 시대에 전업 작가의 삶이란 불가능했을 것이며 그나마 작가로서의 명맥을 이어갈라치면 관전에라도 출품하거나 주류매체에 삽화라도 그리면서 작업을 이어갈 수 있었을 뿐이었을 것이다. 이들의 이상은 원대하고 자유로웠으나 실제는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인데, 바로 그만큼 이들의 작품은 정물이나 실내, 소녀, 부인상 혹은 가로변이나 풍경 스케치 등을 위주로 한 소품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이런 배경에서 박수근이나 이중섭, 김환기나 장욱진의 작품들이 천재적 장인정신 화가군의 반열을 형성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970년대 들어서는 결국 백남준이나 이우환 등 해외에서 그들의 지적문화 수준에서 함께 어울리고 성장한 작가들이 우리 미술계의 최고봉으로 자리매김하는 현실이 생겨나고, 이 상황은 현재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하지만 이들의 고민도 국내 작가들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해외에서 자신의 민족적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작품의 핵심에 언제나 자리 잡고 있다. 물론 이렇다고 해서 우리 미술의 역사가 초라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근현대 미술의 역사는 우리 작가들의 피와 땀과 생활에의 의지, 자기보존의 논리, 그로부터 피어난 치열한 삶의 궤적이자 문화요, 우리가 소중히 보존하고 이어나가야 할 우리 정체성의 보루이다.

분노(sc)_합성
백윤문 <분노> 비단에 채색 191×151cm 1935

정체성과  예술가의 역활
백윤문의 작품 <분노>를 보면, 그것이 그림 속 일본인의 분노이건 조선인의 분노이건 상관없이, 당시로서는 드문 작가의식을 담아낸다. 우리 근대화단의 친일 작가로 분류되는 작가들도 작품 속에 일본인을 등장시키지는 않았다. 그런데 백윤문은 일본화풍의 감각에 조선 풍속화의 모티프를 앉히고 일본인과 조선인이 일상에서 어떻게 보면 투정 어린 싸움을 하는 장면을 그리면서 ‘분노’라는 제목을 붙였다. 백윤문도 국화(國畵)의 발전방향을 모색했던 것이 분명한 것 같고, 전통의 계승과 외래 화풍인 일본화풍의 접목을 시도했던 것으로 읽힌다. 그러면서 식민지체제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이 이 그림에서처럼 내지인 본토인 하면서 깊이 얽혀 살며 사소한 문제들에서도 부딪혔을 실제 생활모습을 그렸다.
대부분의 근대 작가들은 향토성(민족적 정체성)을 화두로 삼을 때 우리끼리의 생활모습, 그중에서도 시골풍경과 조선 사람들을 주제로 한다. 아니면 구본웅의 주장에서처럼(구본웅의 1934년 조선미전 전시회평) ‘조선인의 생활의 모던화’에서 향토성을 파악한다. 올바른 우리식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길을 발달한 근대조선의 거리모습, 서구식 실내정경과 정물표현에서 보았다. 그런데 실제 구본웅 작품의 정수는 친구이던 이상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화에서 볼 수 있는데, 그의 작품들은 대개 이 작품에서처럼, 그림 공부를 위한 유학이 작가의 개성을 죽일 수도 있다고 하면서 작가의 예술적 개성을 살리기 위해 굳이 유학을 갈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 이인성의 예술관에 가깝다. 이 문제는 구본웅의 개인 처지(신체상의)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인물화 속 이상의 태도나 모습에 작가 말대로 생활의 모던화가 표현됐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당시 우리 작가들 작품 중에서 우수한 것은 구본웅의 이 작품처럼 이인성의 예술관에 가까운 것이 많다. 나혜석의 작품들이야말로 구본웅의 주장에 해당된다고 보이지만, 그녀의 작업에 엿보이는 ‘생활의 모던화’ 표현은 피상적인 인상의 문제일 뿐이다.
“이 사람의 목적은 단순합니다. 양행(洋行)할 심산도 있으나 양행한 결과에 자기 작품대성(大成)의 표가 생길는지요? 이것도 중대한 문제의 하나로 생각하며 양행은 현대 인간의 간판이라고도 생각합니다마는 나는 그렇게 양행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도리어 자기 예술상 개성을 죽이지 않는가 하는 위험한 길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자기 향토를 영원히 떠나서는 도리어 실망성이 생기리라고 생각됩니다. 근본적 색채는 어머님의 뱃속에서 타고 나온다” (이인성, <조선화단의 X광선>,《   신동아》, 제39호, 1935)
이인성이 이런 의도하에 야심 찬 대작으로 준비한 것이 <경주의 산곡에서>이다. 그런데 사실 이인성의 <경주의 산곡에서>는 강한 지역적 토속성을 띠면서 일제가 민족성이라는 개념 대신 강제하던 ‘지방색’이 많이 묻어난다. 그리고 구본웅이 ‘조선인의 생활의 모던화’라고 했던 주장에 걸맞은 작업들은 이인성의 작품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인성과 구본웅, 나혜석의 작품에는 공통적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강한 예술적 성취의 욕망을 지니면서, 유학을 통해서건 국내에서 습득한 것이건 예술로 개인의 개별성을 고양시키고자 하는 의지이다. 예술을 매개로 멋진 근대적 세계시민의 대열에 들어서기 위한 정서로 충만돼 있다는 점에서다.
아래 글은 당숙 구본웅에 관한 구광모 씨의 기록이다. 그가 직접 목격한 상황은 아니요, 구본웅의 생각이라는 부분도 구광모 씨가 개연적인 상황으로 붙인 것 같지만, 구본웅과 나혜석, 이상의 사고방식이 잘 드러나 있다. 실제 나혜석과 구본웅, 이상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예술가적 자의식의 면모는 이 광경에서의 대화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월(나혜석) 선생님은 그림으로 나타내는 자아와 글로 나타내는 자아가 서로 다르신 것 같아요. 그림으로 보면 매우 서정적인 분 같으신데, 글로 보면 매우 투사적이세요. 그렇죠? 정월은 대답 대신에 그렇다고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이상은 말을 이어갔다. 저는 요즘 시를 열심히 쓰고 있어요. 물론 습작이지요. 그런데 선생님. 조선어로만 글을 써야 될까요? 일본어나 영어나 불어로도 쓸 수 있으면 더 좋지. 정월의 이러한 답변에 구본웅은 이의를 달았다. 조선에서 일어로 시와 소설을 쓰면 현재는 물론 후세에까지 친일파 문인으로 몰릴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정월의 생각은 달랐다. 그것은 가설일 수 있겠지만 편협한 생각이야. 편협한 여론에 밀려 창작력을 소실하면 안되지. 우리가 조선 사람만을 위해, 또는 조선 사람에게만 보이려고 예술을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예술은 영원한 것이고 국가나 사회라는 벽을 뚫고 갈 보편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야. … 정월의 힘있는 조언에 이상은 크게 고무되었다. … 그러나 구본웅은 이상과 정월의 정정서가 이해되지 않았다. 언젠가는 해방될 것이다. 그럴 때 그들이 남긴 일본어 작품에 어떤 평가가 내려질 것인가? 친일 문학인으로 낙인찍힐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편견과 몰이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미 이상의 시공간은 식민지 시대에 태어난 일부 반일 민족주의 지식인들이 그들의 생명이 마감될 때까지 완고하게 지켜간 시간적인 편견과 조선반도라는 지역적인 편협성을 뛰어넘고 있었기 때문이다.”(구광모, <友人像과 女人像, 구본웅 이상 나혜석의 우정과 예술>,《   신동아 논픽션》, 통권 518호, 2002)
향토성 문제를 둘러싼 당시의 상황을 두고 김복진은 “조선의 미술이 이민 미술과 대립하며 항쟁하는 데에 가장 많이 그 힘을 의촉(依囑)하고 자부하였던 향토성은 자본주의 문형으로 하여 지역선(地域線)이 무너지며 이민 취미로 말미암아 개변되어 가는 도정에 서 있다. 조선미술의 유일한 무기는 이와 같이 하여 나날이 좀이 먹어가는 것”이라고 한 바 있다. (김복진, <조선역사 그대로의 반영인 조선미술의 윤곽>,《   개벽》, 1926.1)

5. 구본웅 우인
구본웅 <우인상>캔버스에 유채 65×53cm 1935

식민지 시기 최초의 개인전을 연 사진작가 정해창도 “나도 한때 허탕한 남자로 자처하고 일생을 방종하게 지내보겠다던 청춘도 있었으나 그것도 전생에서 팔자를 타고나야 되는 모양으로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발길을 돌린다는 것이 새삼스럽기도 하고 싱거운 노력 같기도 하나, 갈 길이 이뿐이므로 아니 갈 수도 없는 것이라 내 발이 닿은 곳마다 기왕 지나온 노중(路中)에서 묻고 붙은 여러 가지 흙덩이가 사방에 떨어지니 새 친구는 반갑게 보아주지 않는 것이다. 묵은 친구들은 비웃고 있는 것이다”(정해창, <여인의 행색과 매화장, 사조>,《   무허 정해창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작품집》, 1958, pp.15~16)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정해창도 역시 과거와 현재 사이에 걸쳐진 자신의 예술적 정체성을 두고 고민했다. <정물>은 작가의 정체성 확립의 문제를 두고 고민한 그만의 방식을 드러낸다. 스스로의 고민을  ‘정물적(靜物的)’ 인 관조의 대상으로 끌어들인다. 여인의 인물 사진이든 풍경사진이든 그의 거의 모든 작품사진에서  대상과 소재, 주제는 사진 속 세계에 갇혀 영원히 고착된, 잃어버린 이야기의 고향이듯 고색창연한 미학적 구도 속 대상들로 정물화 (靜物化)된다. 장면들은 식민지 지식인의 애잔하고 불안한 정조(情調)로 물든다. 그는 이 애상(哀想)을 근대적 풍경을 구성하는 세련된  정취의 미학으로 포착한다.
“정해창의 정물사진에 나오는 소재는 … 근대화된 일상을 보여주는 소품과 장승과 한복을 입은 목각인형처럼 조선적인 정취를 자아내는 소재로 나눌 수 있다. 후경에 램프와 석고상, 전경에 파이프케이스와 파이프, 영문서적을 펼쳐놓아 구성한 사진은 … 서구화된 … 정해창 자신의 표현이기도 하다. 한편 두가지 소재들이 서로 뒤섞여 한 화면을 구성하기도 했는데, 이런 현상은 근대화된 삶을 살면서도 작품에서는 전근대적인 소재를 통해 향토색을 추구했던 근대 화가들에게서 쉽게 발견되는 분열상이기도 하다. 정해창의 사진에서 장승과 한복을 입은 인형은 조선색을 강화하기 위해 등장한 소재라기보다는 알레고리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유지현, <정해창의 예술사진>,《   무허 정해창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작품집》(무허 정해창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회 편), 2007)
여기서의 알레고리는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상징의 의미일 것이다. 비빔밥 정신이 아닐진대, 알레고리를 통해서나마 정체성의 위상학을 획책해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비빔밥 정신’이란 표현은 백남준이 멀티미디어의 특성을 정의하면서 빗댄 말이다. 게다가 ‘한국인은 복잡한 상황을 적당히 말아서 잘 지탱하는 법을 안다, 그 복잡한 상황이 비빔밥이고 우리나라에 비빔밥 정신이 있는 한 멀티미디어 세계에서 뒤지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사실 백남준은 6·25전쟁 중 벌어진 비참한 일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자신이 어느 편인지 알 수 없게 된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면서 모든 것에 대해 판단유보하게 됐다고도 한 적이 있는데, 그럼에도 스스로의 정체성 확보를 위해서는 불굴의 비빔밥 정신이 필요했던 것 같다. 초기 퍼포먼스에서도 그가 벌인 ‘행위’와 ‘사건’은 그 자신이 직접 겪은 이주적, 이민자적 복합적인 문화적 상황들을 비빔밥적(?)으로 동·서양의 문화를 관통해나가고자 하는 의지의 수행과정이었고, 특히 1970년대 이후 백남준의 작업들은 거의 예외 없이 비빔밥 정신으로 동·서양이 혼합돼있다.
이에 반해 김환기는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 같지만, 그리고 김환기의 작품은 가장 한국적인 것을 담아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그 또한 세계에 참여할 수 있는 것으로서 자신의 작업의 정체성, 한국미술의 위상이 가장 고민에 찬 부분이었다. 그도 자신이 선택한 결론을 믿고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김병기는 말한다. “우리들 현실의 면모    (面貌)는 부단히 변모(變貌)해 가고 있다. 때로는 애절하게 때로는 슬기롭게 몸부림치는 현실의 모습에서 우리들은 잠시도 떠날 수가 없다. 나의 작품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 중의 하나는 이러한 현실성과의 연관이었다. 그러나 지난 20년간의 저 광야와도 같은 환경 속의 나의 현실성은  나로 하여금 보다 내부에로의 침잠을 가져왔고 또 어떤 의미에서 나에게는 필요한 자기 성찰의 과정이었다. 그러나 이제 닫혀있던 창문이 밖을 향해 열린 느낌이다. 나는 밖으로 나와야 했고 우리들이 당면한 현실과 부딪쳐야 했다.”
정체성 갈등을 구체적으로 다시 보면 특정 사회의 구성원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지구상 모든 개인의 사회적 운명(?)에 관한 문제이다. 곧 개인이 오로지 한 개성으로서 세상에 취할 수 있는 권리, 곧 자유를 온전히 누리고자 하느냐, 아니면 사회구성원인 개인에게 사회가 부여한 역할, 곧 의무를 이행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런 요구가 ‘나의 정체성’의 문제에 연관돼 있다. 예술가에 대한 국가적, 민족적 정체성, 의무 요구는 그의 자유로운 영혼을 향한 정체성 요구에 배치된다. 개인이 공동체에서의 모든 의무에서 자유롭기를 원한다면, 그 권리를 주장한다면, 그래서 그가 사회적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를 도외시한다면, 그의 권리는 파렴치해지고 만다. 그는 어떻게든 ‘역할’을 맡음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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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창 <정물> 193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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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TV 부처> 혼합재료 1974/2002 Ⓒ Nam June Paik Estate

강성원은 1955년 출생했다. 서강대 사학과, 서울대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했고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 철학과를 수학했다. 그림마당 민 기획실장, 도서출판 재원 기획실장, 일민미술관 기획의원, 인문학박물관 학예실장, 사무소 기획실장 등을 역임했다. 199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에 당선됐으며, 1999년 월간미술대상 학술평론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한국 여성미학의 사회사》(사계절), 《시선의 정치》(시지락), 《미학이란 무엇인가》(사계절) 등을 펴냈다.

[강우방의 民畵이야기] 백호. 그 고귀한 상징-中

 

‘강우방의 民畵이야기’ 첫 회에 이어 호랑이 그림을 통해 풍부한 상징의 숲, 민화를 조명해본다. 원초적인 미감을 다룬 민화는 일반적인 조형원리를 과감히 탈피함으로써 흔히 잘 그리지 못한 그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필자는 민화가 현실이 아닌 이상세계, 즉 영화된 세계를 그린 것이라고 강조한다. 호랑이 그림은 영기문의 집합체로서 ‘생명이 생성되는 과정’을 표현한 것이다. 특히 호랑이는 고대부터 산을 숭배했던 한국문화에서 전 국민적 경배의 대상이었으며, 산신(山神)의 위상을 차지했다.

호랑이는 산신(山神), 나라의 수호신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호랑이는 우주의 기운이 응집된 영화된 존재들인 사신(四神) 가운데 백호(白虎)임을 조형분석을 통해서 밝혀보았으나, 이 문제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고 인식의 문제이므로 좀 더 다루어보려 합니다. 이에 앞서 한국문화에서 호랑이가 차지하는 위상을 회복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바보 호랑이’로까지 폄하된 산신(山神)의 위상을 되찾아야 합니다.
지난 회에 호랑이가 아기 호랑이들을 거느리는 도상을 다루었지만, 그 상징은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어미 호랑이와 아기 호랑이들이 장난치며 노는 정도로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식물모양 영기문(靈氣文)이 끊임없이 생명생성의 과정을 보여주듯이, 고대 조형에서 청룡이나 백호나 봉황 등이 항상 아기들과 함께 있음으로써 생명생성 과정의 상징을 형이상학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대 작품들에서 흔히 만나볼 수 있으나 그 형이상학적 의미를 설명한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용생구자설(龍生九子說)이 그 대표적 예입니다. 용과 마찬가지로 백호도  위대한 생명력을 무한히 낳습니다.
경상남도 진주 지방에 많다고 하여 <진주 호랑이>라고 부르는 도상과 흡사한 민화가 또 있지만 양식은 전혀 다릅니다. 일본 시즈오카 세리자와케이스케(靜岡市立美術館) 미술관 소장 <호랑이 가족>(상단 이미지) 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나지만 그 상징적 표현은 매우 뛰어납니다. 즉 우선 눈을 보면 둥근 눈 안의 동공(瞳孔)이 다른 그림과 달리 3중(重)의 동심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무량보주를 웅변하는 것입니다. 눈으로부터 무량한 보주가 발산합니다. 여러 글에서 무량보주를 나타낸 용의 눈을 다루어온 것처럼 용의 속성을 지닌 백호의 눈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의 줄무늬 영기문, 턱 밑의 보주와 파동, 견갑골 부근에 밀집한 보주들과 줄무늬 영기문, 무릎의 제1영기싹 영기문, 꼬리 끝의 무량보주 등 마치 지난 회 수록  작품들을 보고 흉내 낸 것 같지만, 어미 백호와 아기 백호들이 영기문의 집합체임을 더욱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독창적입니다. 이 그림에는 소나무에 까치가 없습니다. 다른 호랑이 그림들에는 까치가 한 마리, 혹은 두 마리, 심지어 다섯 마리가 있거나 한 마리도 없는 경우도 있으므로 까치는 기쁜 소식 전해준다는 원래의 뜻만이 겨우 남아있을 뿐 필요불가결의 요소는 아닙니다. 오히려 호랑이와 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소나무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글씨로 보아 부적(符籍)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도 2-1. 리움 미술관

민화를 흔히 그림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잘못 그린 그림이라고 합니다. 원근법의 무시, 대소(大小)의 극적인 대비, 불합리한 구도 등 조형의 원리를 무시한 그림입니다. 거기에서 생기는 익살, 대담한 구도, 동심 어린 표현 등 긍정적 평가도 따릅니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자세한 서술이 따라야 합니다. 지난 회 수록 작품은 잘못된 그림이 아니라 원근법을 무시하고 대소 대비도 무시한 대담한 양식의 비현실적 그림으로 새로운 장르를 열어 보이는  ‘민화양식’이라 부르려 합니다. 그 개념은 연재하는 동안 정립될 것입니다. 민화는 현실을 잘못 그린 것도 아니고 현실을 익살스럽게 그린 것도 아닙니다. 민화는 첫 회에 분석한 것처럼 현실을 표현한 것도 아니고 현실을 도피한 것도 아닙니다. 고구려 무덤 벽화에서처럼 일체의 표현원리를 무시하고 그린, 현실이 아닌 영화된 세계를 그린 것입니다. ‘영화된 세계’란 이상적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무릇 이상세계 표현에는 불교회화에서처럼 일반적 표현원리를 과감히 탈피함으로써 현실세계가 아니란 것을 나타내려는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고구려 무덤벽화나 불교회화나 민화를 통틀어서 다루고 있는 만큼 ‘민화양식’이라 일단 부르려 합니다. 그러므로 민화양식이란 사대부나 화원의 그림과는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민화양식은 매우 풍성한 상징의 숲입니다. 그러나 사대부나 화원의 그림은 역사적으로 축적된 상징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무덤벽화나 불교회화와 민화는 숭고한 상징의 숲이어서 앞으로 우리는 그 신선하고 아름다운, 그러면서 충격적인 상징의 숲을 거닐며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조형미술의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호랑이 가족을 보고 흔히 ‘자손번창’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영화된 조형이므로 ‘생명생성의 과정’을 표현한 숭고한 조형의 세계입니다.
이 어린이 그림 같은 호랑이 가족은 누가 그렸을까요? 어수룩해서 호랑이가 전혀 무섭지 않고 웃음이 절로 나옵니다. 자세히 보면 못 그린 그림입니다. 그러나 세부를 살펴보면 앞에서 분석하며 설명한 그림보다 훨씬 더 영화시킨 그림임을 알게 되고 오히려 경이를 느낄 것입니다. 우리나라 호랑이 그림 가운데 유일하게 눈을 무량보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그림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 영화(靈化)의 방법을 철저히 파악하고 그렸을까요? 누구에게 배웠을까요? 어느 전문화가가 그린 것을 보고 흉내 내었을까요? 놀라운 것은 언뜻 비슷해 보여도 독창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동심(童心)의 세계에서 유전적으로 인간에게 잠재하는, 근원적인 진리의 표현이 무의식적으로 발현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고구려 벽화에서 느끼는 경이를 민화들에서도 똑같이 느낍니다. 그러므로 민화를 연구하려면 고구려 벽화 연구가 선행돼야 합니다. 그러나 종래의 연구 성과로는 풀리지 않고 내가 해독한 고구려 벽화의 조형언어를 익혀야 합니다. 학교의 ‘교육과정’이란, 상상력을 상실하는 과정이고 무의식의 세계를 의식의 좁은 테두리 안에 가두어버리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이루어진 조형미술의 올바른 연구는 인간의 무의식계를 넓히는 과정이고 영성(靈性)을 되찾는 과정의 작업들입니다. 그 근원적 조형정신이 화려하게 부활한 민화의 연구가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호랑이는 산신(山神)입니다. 악마를 물리치는 위대한 신입니다. 석가모니나 예수가 악마를 퇴치하듯 호랑이는 악마를 물리칩니다. 그러나 세속적이 되어 잡귀를 쫓는 현세이익적 벽사의 기능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호랑이, 영기의 집합체
일본 구라시키민예관(倉敷民藝館) 소장 <눈이 네 개인 호랑이>(그림 5) 작품은 호랑이의 신격화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매우 훌륭한 그림으로 한국회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 합니다. 순수한 민화양식입니다. 놀랍게도 눈이 네 개이고 눈동자는 둥근 보주로 나타냈습니다. 눈이 네 개인 것은 중국 한대(漢代)에 방

상씨(方相氏)란 사람이 장례 때 악귀를 쫓았으므로 후에 가면(假面)으로 만들되 눈을 각각 두 개씩 네 개를 뚫었는데 그 까닭은 알 수 없습니다. 입은 가능한 한 크게 벌렸는데 긴 혀를 강조하기 위하여 용의 입과 모양 같게 했습니다. 가슴에는 영기문이 있는데 채색분석 결과 붉은색으로 칠했습니다. 장례식 때 방상씨가 궁궐에서 왕릉까지 가는 길에 제일 앞에 서서 악귀나 잡귀를 쫓기도 하고, 왕릉에 도착해서는 관을 땅에 묻기 전에 먼저 흙을 파놓은 광에 들어가서 방상씨가 가진 창으로 네 귀퉁이를 쳐서 광 속 시신이 들어갈 자리의 악귀를 제거하기도 합니다. 그런 벽사의 강력한 조형을 호랑이의 조형에 응용한 것은 기발한 착상입니다. 그림은 기품이 있고 구도가 훌륭합니다. 반차도에 의하면 방상씨는 붉게 칠한 가면을 쓰는데 황금으로 4개의 눈을 만들고 검은색 옷과 붉은색 치마를 입고 곰 가죽을 걸친 채 창을 잡고 방패를 치켜들고 다닙니다.
그러면 호랑이의 실체를 살펴볼까요? 산악숭배 신앙에서는 우주의 중심이 곧 산입니다. 한국은 산이 많은 자연환경으로 인해 일찍부터 산과 산신을 숭배하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산에 있으면서 산을 지키고 담당하는 신령(神靈) 그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연물에는 그것을 지배하는 정령이 있다는 애니미즘(animism) 신앙에서 비롯된 것으로, 일종의 ‘산의 정령’입니다. ‘숲의 정령’이기도 합니다. 신체(神體)는 호랑이 또는 신선(神仙)의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한국에서 산신신앙은 수렵문화 단계에 이미 출현했으며 이때 산신은 산의 일체를 관장하는 ‘자연의 주인’으로 인식했으므로, 신체인 호랑이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산신 할아버지와 호랑이는 둘이 아닙니다. 일본 도쿄민예관(東京民藝館) 소장 <산신도>(그림 6)를 보면, 호랑이 몸에서 의인화(擬人化)한 산신이 생겨나고 백호에서 산신이 생겨나는, 산신과 호랑이가 하나인 멋진 그림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호랑이는 불화에서 신선 같은 존재 옆에 얌전히 앉아있는데 사신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신선 같은 산신이 바로 곧 호랑이, 즉 영화된 백호입니다. 고대로부터 우리나라 국가제사의 대상 대부분이 산신이었습니다.《  후한서》〈   동이전〉에 “그 풍속은 산천을 존중하고 호랑이에게 제사 드리며 그것을 신으로 섬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원래 고대의 산악숭배 신앙은 집단, 즉 국가·부족·마을 단위 형태의 신앙이었으나 조선 중기 이후로는 개인과 마을 단위의 신앙으로 변모해 호랑이가 전 국민적 경배의 대상이 되어 마침내 사찰에서 산신각이 멀리 떨어져 있다가 점점 감히 대웅전 옆에까지 다가갑니다. 마을마다 산신당, 산왕당, 서낭당, 성황당 등을 만들어 산신을 숭배하게 되어 우주 최고의 신이 마을의 수호신이 되었습니다. 최남선은 중국의 용, 인도의 코끼리, 이집트의 사자, 로마의 이리처럼 조선에서 신성한 동물의 으뜸은 호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호랑이는 조선 최대의 동물이며 조선인의 생활에 끼친 영향이 크니 그중 신화, 전설, 동화를 통하여 나타난 호랑이 이야기들은 설화세계 최고이며 호랑이 및 호랑이 설화에 대한 민족적 숭앙 또는 기호는 어느 틈에 다른 모든 이야기를 밀어내버렸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리하여 한갓 벽사의 염원으로 축소되어 호랑이가 삼재부적에 나타나서 품격이 현세 이익적이 되어버려 맹수로서의 용맹성이 부각되었을 뿐 고차원으로 승화된 백호의 이미지를 상실해버린 것입니다만 민화에서 이처럼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다음 회에서는 백호와 청룡의 관계를 다룰 것입니다. ●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까치 호랑이> 채색분석(밑그림 및 채색분석–강우방)

채색분석할 때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하여
눈=보주는 적색으로 영기싹은 생명의
싹이므로 연두색으로 칠하려고 노력한다.
① 처음으로 눈을 보주(寶珠)로 표현한다.
② 동공양쪽으로 면으로된 제2영기싹이 절대의
진리를 눈으로 표현한다.
보주에서 양쪽으로 발산하는 영기.
백호가 만물의 근원
두 눈 사이의 보주가 여래의 이마처럼 크다.
③ 수염. 보통 호랑이의 수염이 아니다.
④ 긴 혀 → 영기문
⑤ 얼굴과 가슴에 보주를 부여. 표범의 둥근 점이 아니다. 표범의 둥근 점이 보주가 되다.
⑥                    만물 생성의 근원
⑦ 꼬리 끝에서 시작하여 몸으로 얼굴로 차례로 화생(化生)
⑧ 동양에는 서양에서처럼 사조가 없다? 오로지 법고창신(法古創新)!
⑨ 온몸에 영기문을 부여한다.
⑩ 발가락과 발톱은 연꽃잎처럼 아름다운 영기문. 붉은 색조의 반구형은?
⑪ 갖가지 영기문의 집합체(集合體) ‹ 집적(集積) 보주·제2영기싹·제1영기싹(면·선)
연꽃잎 모양 영기문 …

3 <까치 호랑이> 종이에 채색 53×87cm 조선시대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까치 호랑이> 채색분석(밑그림 및 채색분석–강우방)

① 이마의 큰 보주. 그 보주에서 발산하는 영기문이 뚜렷하다.
② 이마의 대보주에서 무량한 작은 보주가 생긴다.
③ 두 눈=두 보주에서도 영기문이 발산, 파동을 이루며 발산하기도 한다.
④ 이마의 곡선                 일종의 파상문
⑤ 코, 콧구멍도 보주
⑥ 입은 앞에서 본 모양과 옆에서 본 모양과 함께 표현한다.
⑦ 입가에서도 용에서처럼 줄무늬 영기문을 발산한다.
⑧ 양 입가의 곡선에 맞게 같은 형태의 영기문이 파동을 이룬다.
⑨ 몸에도 줄무늬 유려한 영기문을 부여한다.
⑩ 빨간 보주들을 부여한다.
⑪ 호랑이와 표범의 무늬는 영기화(靈氣化), 다른 차원으로 승화된다.
⑫ 호랑이의 분노상: 영기가 극에 달하면 분노상을 띈다.
⑬ 채색분석에 의해 해석도 올바르게 하고 호랑이를
영기화생(靈氣化生)시킨다.

4 <까치 호랑이> 종이에 채색 19세기 (개인 소장)

5 <눈이 네 개인 호랑이> 종이에 채색 116×80cm (구라시키민예관 소장)

구라시키민예관 소장 <눈이 네 개인 호랑이> 채색분석(밑그림 및 채색분석–강우방)

① 혀를 길게 내밀 수 없으므로 입을 가능한 한
길고 크게 과장하여 변형시켜서 혀가 길게
보이게 했다.
② 왜 눈이 넷인가?
③ 혀를 길게 강조했다.
④ 용의 입과 백호의 입
⑤ 몸의 영기문

6 <산신도> 종이에 채색 103×71cm 19세기 후반 (일본 민예관 소장)

 

강우방의 民畵이야기 1 에 보이는 백호. 그 고귀한 상징-上

호랑이의 장엄한 영화(靈化)가 새해를 영화시킨다

민화는 그동안 촘촘한 포위 막에 둘러싸여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미술작품은 어느 경우든 고차원의 정신세계이므로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의 정신적 성숙도와 함수관계(函數關係)를 갖습니다. 필자가 민화를 보고 경이를 느낀 것은 30대 초반 경주에서 조자용 선생을 만나면서부터였으며 지금까지 40여 년 동안 민화 전시장을 빠지지 않고 다니며 자료를 모아왔습니다. 15년 전부터 필자는 고구려 벽화의 ‘영기문(靈氣文)’이란 조형언어를 처음으로 해독했습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우주에 충만한 영기(靈氣)라는 것은 우주의 대기운의 대순환을 뜻하며, 그 보이지 않는 영기를 다양한 조형으로 표현한 무늬를 ‘영기문(靈氣文)’이라 하며 그 다양한 영기문에서 만물이 탄생하는 광경을 보고 ‘영기화생 (靈氣化生)’이란 용어를 만들어 쓰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조형이어서 사람들은 눈으로 볼 수 없었고 따라서 명칭도 없었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필자는 전공인 조각은 물론 회화, 금속공예, 도자공예, 건축, 복식 등 조형미술의 모든 장르에 걸쳐 새로운 시각으로 심층적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미술에 한하지 않고 동양미술, 즉 일본, 중국, 인도미술은 물론 나아가 서양의 미술도 연구하며 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도 계속 민화작품들을 살펴왔으며 학문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난 요즈음, 비로소 민화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을 냈습니다. 그 마음은 단지 우리나라 미술사에서 민화를 올바로 자리매김 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뿐만 아니라, 세계미술사를 조감하였기에 생긴 것입니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세계미술의 조형언어들을 해독하면서 마침내 필자의 이론의 보편성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비로소 우리나라 민화가 보이기 시작하여 얼마나 위대한 그림인지 깨달았습니다.
아직도 필자는 세계미술 내지 인류의 미술을 해독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방대한 이론인 ‘영기화생론(靈氣化生論)’을 정립해 나아가는 과정에 있습니다.1 이제는 민화에 대한 글을 쓰면서, 백척간두에서 한발 나아가야겠다는 서원을 세운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의 심정으로 감히 연재를 하려는 것입니다. 민화는 단지 우리나라 조선후기, 18~20세기에 걸친 서민들의 불가사의한 그림이 아니라, 인류 공통의 본성, 인간의 무의식세계를 기적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임을 알았습니다. 즉 영기화생론으로 인류의 조형미술을 새로이 밝히는 과정에서 마침내 민화가 보였고, 우리가 원래 갖추었던 인간의 무의식을 무한히 확대할 수 있음을 확신하였습니다.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고 말했지만, 바로 그 불가사의한 세계를 하나하나 밝히려 합니다. 그러므로 미술사학은 물론, 민속학, 사상사, 심리학 등 인문학점 관점에서 민화에 널리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민화는 모든 화목(畵目)에 걸쳐 있으나 ‘세화(歲畵)’부터 시작하려 합니다. 원래 임금이 새해를 맞이하여 신하들에게 내리기도 하고 신하가 임금에게 바치기도 하는 그림이지만, 서민들 사이에도 그런 풍속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세화 가운데 하나인 ‘까치 호랑이(虎鵲圖)’에서도 그림 솜씨에 따라 궁궐 그림 내지 사대부 그림과 민화는 구별해야 할 것입니다. 세화라고 해서 무조건 모두 민화로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민화를 공부하면서 필자가 절실히 느낀 것은 바로 ‘민화양식(民畵樣式)’ 개념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민화양식을 완벽히 표현한 것이라면 한국회화사에서 마땅히 큰 비중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민화양식’은 앞으로 연재를 하면서 자연히 정립될 것입니다. 세화를 둘러싼 여러 설명은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므로 이 글에서는 반복하지 않습니다. 바로 작품으로 다가가 영기화생론으로 풀어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분류와 상징 추구를 이미 수없이 시도해 왔던 조자용, 김호연, 윤열수, 이명구, 정병모 등 선학들의 추구와 자료 집성이 없었다면 민화에 새로운 접근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아마도 필자의 글을 처음 대하는 독자들은 당황할지 모르지만 인내를 가지고 정독하고 그림 분석을 꼼꼼히 따라가다 보면 어떤 의도로 연재를 하는지 차차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kang8이른바 <진주 호랑이>라고 불리는 호랑이의 조형에 대해 채색분석해보기로 합니다. 신재현(申在鉉)이라는 화가가 그린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진주 호랑이>를 나름의 채색분석법에 따라 새로이 채색하면서 독자 여러분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려 합니다. ‘채색분석법(彩色分析法)’이란 필자가 조형해석학(造形解釋學)이란 방법론을 창시하면서 영기화생론을 나름의 조형원리에 따라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채색하여 보여 드리는 것입니다. <진주 호랑이> 그림은 현재 4점 정도 남아 있다고 합니다.2 무늬들을 선으로 그려보면 매우 유려하고 역동적입니다. 필자가 찾아낸 제1 영기싹 영기문을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시켜 그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기문’이란 생명의 생성 과정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조형으로 ‘식물모양 영기문’이 있고 ‘동물모양 영기문’이 있는데 동물모양 영기문은 조형적으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생성과정을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줄무늬는 물론 호랑이의 줄무늬에서 유래하지만 그 무늬를 추상적이고 도식적으로 다른 고차원의 영기문으로 변형시켜 호랑이를 영화하는 동시에 호랑이라는 영수(靈獸)를 화생시키고 있습니다. 즉 그 다양한 영기문에서 호랑이가 영기화생(靈氣化生)하고 있습니다. ‘화생(化生)이란 말은 종교적으로 초자연적 탄생을 뜻합니다. 우선 꼬리 끝을 보면 동심원이 있는데 이것은 무량보주(無量寶珠)를 나타내며 간단히 말하면 가장 강력한 대 생명력을 함축하고 있는 영기문입니다. 보주는 보석이 아니고 영기가 충만한 우주를 압축한 것입니다. 즉 이 그림에서 호랑이는 바로 꼬리의 맨 끝의 무량보주에서 화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꼬리와 몸에 걸쳐 공간에 따라 길고 짧은 추상적이고 도식적인 갖가지 다른 영기문이 감싸고 있습니다. 앞의 오른 다리 어깨에는 제1영기싹이 있어서 마치 태극무늬 같으며 그 주변에 빨간 색으로 칠한 짧은 영기문과 동심원의 무량보주들이 밀집하여 있는데, 이것은 영기를 힘껏 밀집시켜 다리를 화생시키려 함입니다.

kang6
그런 원리는 이미 고구려 벽화에서 밝혀냈기에 이런 해석이 가능한 것입니다. 앞의 왼쪽 다리 어깨는 보이지 않으나 마찬가지로 갖가지 영기문이 밀집하여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네 다리의 발가락들은 모양이 ‘붕긋붕긋’합니다. 이런 형태 역시 사물을 영화시키는 한 방법입니다. 발이 이렇게 뭉게구름처럼 표현된 것은 그려진 호랑이는 호랑이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호랑이의 조형을 ‘영기문의 집적(集積)’으로 표현하여 만물생성의 근원적인 존재로 영화시켰다는 것을 지방 화가는 놀랍게도 정확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뒤의 왼쪽 다리 무릎에도 제1 영기싹 영기문과 짧은 면으로 된 제1 영기싹 영기문이 밀집하여 다리가 화생하고 발은 역시 붕긋붕긋한 구름모양 영기문으로 영화시키고 있습니다. 얼굴은 포악대소상(暴惡大笑相)입니다. 큰 눈은 보주를 상징합니다. 눈썹에는 잘디잔 보주들이 보일 듯 말듯 하고 털이 강력하게 뻗쳐 있는데 보주에서 발산하는 영기입니다. 둥근 콧구멍도 보주입니다. 그 코에서 같은 간격으로 영기문들이 발산하며 등 뒤로 넘어갑니다. 코 양쪽으로 긴 수염이 날카롭게 뻗쳐나가 있는데 이 역시 영기가 힘차게 발산하는 모습입니다. 크게 벌린 입을 보면 날카로운 송곳니가 위아래로 솟구쳐 있는데 역시 제1 영기싹 영기문입니다. 용의 입모양은 바로 호랑이의 입에서 빌린 것입니다. 혀는 짧지만 역시 제1 영기싹 영기문을 입체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런데 턱 아래의 빨간색 작은 보주가 중요합니다. 그 보주에서 제1 영기싹 영기문들이 파동을 치며 양쪽으로 퍼져 갑니다. 가슴이 유난히 둥글게 튀어나왔지요? 이 역시 가슴에 영기를 힘껏 불어넣은 것을 나타냅니다. 이렇게 보면 이 호랑이는 제1 영기싹의 온갖 변형과 보주로 이루어진 형태들의 집적으로서 영기문에서 호랑이가 화생하는 형상인데, 만물생성의 근원을 상징합니다.3 동물모양의 생성 과정은 꼬리부터 시작하여 머리에서 끝납니다.

호랑이, 영기문으로 이루어진 조형

또 다른 <진주 호랑이> 그림을 살펴볼까요? 김세종 씨 소장 진주 호랑이 그림은, 똑같은 민화양식으로 그린 리움 소장 호랑이 그림의 제발에 쓰인 화가 신재현이 그린 것입니다. 제발(題跋)은 다음과 같습니다. 호랑이 머리 바로 옆에 ‘風聲聞於千里 吼蒼崖而石裂(호랑이의 바람소리 멀리 천리에 이르고, 드높은 절벽을 만나 으르렁 대니 절벽이 깨어져 열리네)’이란 글귀가 오른쪽에 조그맣게 있고, 왼쪽 구석에 ‘虎嘯南山 鳥鵲都會’ (호랑이가 으르렁 대면 까치무리가 모두 모여든다. 리움 소장품에는 鳥鵲 대신에 群鵲이라 쓰여 있다.)가 역시 까치 뒤에 조그맣게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 다룬 리움 소장 호랑이 그림에도 같은 제발이 있는데 반갑게도 ‘甲戌 元旦 申在鉉寫’라는 제발이 오른쪽 맨 위에 쓰여 있으나 도장은 없습니다. 즉 두 그림은 모두 신재현이라는 작가가 그린 것임을 알 수 있고 그 화가는 다른 화가와 달리 독창적인 화풍을 확립하였음을 알 수 있어 비교해 보면 흥미가 있습니다. 그는 19세기에 전라도 지방에서 활약한 화가라고 합니다.4 부분적으로 다르지만 똑같은 양식입니다. 귀는 더욱 뚜렷한 영기문으로 표현했고, 보주인 눈 위아래에서 면으로 된 제2 영기싹 영기문이 발산하고 있으며, 턱밑의 보주, 앞다리 어깨와 뒷다리 무릎에 밀집하여 다리들을 화생시키고 있는 제1 영기싹 영기문과 무량보주들, 그리고 뭉게구름 같은 발들을 보면, 호랑이는 호랑이가 아니요, 영기문의 집적임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꼬리는 실제 호랑이의 것보다 훨씬 길게 변형시켜 꼬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선 이 호랑이 줄무늬의 정체는 어디에서 비롯한 것일까요? 우리는 고구려 삼실총(三室塚)과 강서대묘(江西大墓)에서 사신(四神) 가운데 백호가 영기화생하는 조형을 살펴보고 민화의 호랑이와 같은 조형정신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실총의 천장에 그려진 작은 백호는 비록 작은 도상이지만, 백호가 청룡의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호랑이가 현실의 동물이라면 상상의 산물인 용처럼 가늘고 길 수 없습니다. 역시 다리 네 군데에 영기문이 있고 등에는 줄무늬가 있는데, 그 줄무늬는 이미 현실의 호랑이의 줄무늬가 영화해서 영기문이 된 것이어서 불화의 조형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이 작은 백호의 이마에 빨간 보주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즉 호랑이는 용의 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호랑이도 보주와 관계가 깊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민화 호랑이에도 몸에 보주가 많이 표현되어 있는 것을 이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호랑이의 줄무늬와 표범의 둥근 무늬가 차원을 달리하여 모두 영기문과 보주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강서대묘의 백호를 보면 네 다리에 연이은 빨간 색의 제1 영기싹 영기문에서 다리가 화생하는 것을 볼 수 있고 다시 다리에서 녹색의 털 같은 영기문이 발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결코 휘날리는 털이 아닙니다. 등에는 간략하게 줄무늬를 넣었습니다. 앞다리의 양 어깨 부분에 강력한 영기문이 밀집하여 있는 것은 다리를 제외한 몸을 화생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kang9그러므로 <까치 호랑이>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호랑이이며 그 호랑이의 조형적 성격과 상징은 시대를 거슬러서 고구려 벽화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백호의 백색은 다만 오행사상에 따른 관념적인 것일 뿐, 실은 고구려 벽화에서 호랑이를 흰색으로 채색한 예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까치 호랑이 그림에 나타나는 호랑이는 현실의 호랑이가 아니요, 이미 고구려 시대부터 영화시킨 비현실적인 초자연적 존재로서 백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야 청룡도 반드시 청색으로 칠하지 않더라도 초자연적 존재와 같은 가치를 지니며 서로 대응할 수 있습니다. 즉 세화의 호랑이는 신령스러운 백호이고 용은 신령스러운 청룡입니다. 사신 가운데의 백호와 청룡입니다. 사신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며 우주에 충만한 영기를 구상화한 것이지 사방의 수호신이 아닙니다.
새해 첫날에 역시 만물생성의 근원인 용과 함께 대문을 장엄했다면 참으로 의미 깊은 그림입니다. 새로운 해의 탄생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고차원의 영적(靈的)인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기원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면, 새해가 생명력으로 가득 찬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그렸다면, 민화가 새로이 보일 것입니다. 조형을 분석해보면 단지 집의 수호신이나 벽사의 역할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명하지 않은 무명화가, 실제로 이름을 남긴 화가도 있습니다만, 그 고차원의 조형 세계를 어떻게 알았을까요? 어떻게 고구려 벽화에 나타났던 조형들이 조선후기에 눈부시게 부활하는 것일까요? 과연 민화양식이란 무엇일까요? 왜 호랑이는 분노상을 띠는 것일까요? 학계에서는 왜 호랑이와 표범을 구별하지 않는가요?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1 필자가 정립하고 있는 ‘영기화생론(靈氣化生論)’이라는 미술사학 내지 문화 전반에 걸친 방법론에 대하여는 다음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강우방, <제5장 영기화생론과 조형언어>, 《수월관음의 탄생》, 글항아리, 2013, pp.74~90.
2 이러한 화풍의 그림을 진주 지방의 화가 신재현이 여러 점 그려서 ‘진주 호랑이’라 부른다. 윤열수, 《민화 이야기》, 디자인하우스, 1995, p.24.
3 제1 영기싹, 제2 영기싹, 제3 영기싹 등이나 보주와의 관계 등 낮선 용어들이나 그 조형들이 지니는 엄청난 상징들은 충분히 파악하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필자의 책이나 두 해 동안 신문에 연재한 ‘틀린 용어 바로잡기’를 필자의 홈페이지 www.kangwoobang.or.kr에서 자세히 보실 수 있으므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강우방, 《한국미술의 탄생》, 솔, 2007. 이 저서는 모든 장르에 걸친 작품들을 영기-영기문-영기화생으로 풀어내므로 함께 읽으면 좋을 것이다.
4 이명구, 《文字圖》, Leedia, 2005, p.164. 신재현은 19세기에 전라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화가라고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甲戌년이면 1874년과 1814년이 떠오른다. 나이를 고려하면 1814년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Korean Beauty – 민간신앙에 녹아있는 도교

<바다 위의 신선들> 비단에 채색 각 150.3×51.5cm 조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서왕모가 요지에서 개최하는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신선들이 바다를 건너는 장면으로 중국의 유명한 고사에 나온 도상이다. 화면 중앙에 노자가 소를 타고 도덕경을 읽고 있는 모습이 특징적이다.

도교는 유교, 불교와 함께 우리 문화의 근간을 이룬다. 지금까지도 세시풍속과 민간신앙, 예술, 대중문화, 건강 수련 등 우리 생활 각 분야에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도교문화를 종합적으로 정리한 전시 <한국의 도교문화–행복으로 가는 길>(2013.12.10~3.2)이 열렸다. 필자는 특히 도교와 민간신앙의 연결관계에 주목해 한국인의 삶에 녹아있는 도교의 다양한 면모를 살펴본다.

우리 생활문화 속 도교적인 이미지는 도처에 산재하는 복합문화로 공존하지만, 다른 문화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분야이다. 광범위한 도교의 실체는 우리 기층문화인 무속과 민간신앙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행복으로 가는 길 한국의 도교문화전>은 매우 체계적으로 전시되어 생활 속 도교를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본다.
도교는 불사약 복용이나 심신수련, 온갖 신에 대한 기도 등을 통해 불로장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부와 명예 같은 현세적 이익을 추구하는 중국의 토착 종교이다. 도교가 교리와 조직을 제대로 갖춘 것은 4세기 북위시대부터이며, 이후 많은 종파가 생겨났지만, 그 기원을 살펴보면 신선설과 민간신앙을 핵심으로 하여 음양, 오행, 주역 등의 설과 의학, 도가 철학 등을 보태고, 여기에다 불교와 유교의 성분까지 받아들여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도교에서 받드는 신들은 매우 잡다(雜多)할 뿐 아니라 시대에 따라서 그것은 새로이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가장 널리 제사 지내는 신에는 원시천존(元始天尊) 또는 옥황상제(玉皇上帝)가 있고 이는 다시 무형천존(無形天尊)·무시천존(無始天尊)·범형천존(梵形天尊)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그리고 교조인 노자, 곧 노군(老君)을 원시천존의 화신(化身)이라고 믿는다. 그 밖에도 현천상제(玄天上帝:北極星)·문창제군(文昌帝君)·후토(后土)·성황신(城隍神) 등 수많은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왼쪽・(오른쪽) 조선 (경남 문화재자료 제214호, 개인 소장)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전시광경   오른쪽・김진여  비단에 채색 31×61.7cm 139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공자가 제자인 남궁경숙과 더불어 주나라에 건너가서 당시 주왕실의 도서관 사서로 있던 노자에게서 예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는 고사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그러나 노자와 공자의 만남은 그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는다.

왼쪽・<밀양 성황신 손긍훈 상>(오른쪽) 조선 (경남 문화재자료 제214호, 개인 소장)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한국의 도교문화> 전시광경 오른쪽・김진여 <공자가 노자에게 예를 묻다> 비단에 채색 31×61.7cm 139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공자가 제자인 남궁경숙과 더불어 주나라에 건너가서 당시 주왕실의 도서관 사서로 있던 노자에게서 예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는 고사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그러나 노자와 공자의 만남은 그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는다.

 

또한 도교에서는 장생불사(長生不死)를 염원하면서 이를 이룰 수 있다는 여러 가지 방법을 실천하는데, 전적으로 연단술(鍊丹術)만을 닦는 것이 아니라 적덕행선(積德行善)하고 계율을 지켜야 진선(眞仙)이 된다고 하여 도덕적 측면을 강조하기도 했다.
도교는 7세기 고구려 때 우리나라에 공식 전래되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미 그 이전부터 도교적인 문화요소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도교는 종교로서보다는 문화요소로서 존재하면서, 불교 또는 민간신앙과 혼합되거나, 동학과 같은 신흥종교에 영향을 주었으며, 문학과 회화 등 예술작품의 주제나 소재로 활용되었다. 또한 복숭아나 신선, 십장생 같은 도교적 상징들은 장수와 행복을 가져오는 길상의 의미만 남아 공예품이나 장식화 등의 소재로 민간생활 속에 깊숙이 녹아있었다.

도교가 공식적으로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래된 것은 624년 당 고조가 고구려 영류왕에게 천존상과 도법을 보내온 기록이 최초이다. 신라와 백제에도 비슷한 시기에 전래되었으나, 도교신앙은 고구려에서만 성행했다. 그것은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천제(天祭)·무속 (巫俗)·산악(山岳) 신앙 등 종교적 의식이 강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책적으로 국가에서 수용을 적극적으로 권장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백제와 신라에서는 종교적 신앙보다는 노자(老子), 장자(莊子)의 서적을 통해 무위자연(無爲自然)사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자체사상과 융합하면서 선도(仙道)·선풍(仙風) 의식을 심화시켜 나가는 양상을 보였다.
통일신라 시기에는 당(唐)나라 유학을 하고 돌아온 사람들 중에 양생(養生) 보진(葆眞)을 도모하는 사람이 있어 단학(丹學)의 성격을 가지는 수련(修鍊)도교 양상을 드러내는 현상도 나타났다.
도교가 가장 성행했던 시기는 고려시대라고 할 수 있다. 중세에 해당하는 고려시대는 신앙의 시대, 종교의 시대라고 할 만큼 신(神) 중심의 나라였다. 불교가 그 중심 종교이기는 했지만 귀신·영성(靈星)·토지신 그리고 무속(巫俗)과 더불어 도참(圖讖)사상이 병존하면서 모든 것이 기복(祈福)종교의 현상을 띠는 것이 이 시대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도교 역시 여러 민간신앙과 섞이면서 불교 도참사상과 함께 하여 현세이익(現世利益)을 희구하는 양재기복(禳災祈福)의 기축(祈祝)행사가 성해, 그 풍습이 민간생활에까지 뿌리를 내렸다.
국가적으로는 호국연기(護國延基)를 바라는 재초(齋醮:도교식 제사)행사가 크게 행해졌으며, 특히 예종(睿宗:1105~1130)은 복원궁(福源宮)이라는 도관(道觀:도교 사원)을 건립하는 등 도교를 크게 진작시켜 불교보다 더 중시하기도 했다. 이러한 도교의 성행은 민간에 수경신(守庚申)이라는 도교습속(道敎習俗)까지 낳게 하여 그 풍습이 오늘에 이른다.
조선시대로 넘어온 이후에도 재초 중심의 도교는 그대로 이어졌으나 중종(中宗:1506~1544) 때에 이르러서 조광조(趙光祖:1482~1519) 등의 유학 선비들의 상소로 소격서(昭格署:재초 등 도교행사를 관장하던 관청)가 혁파(革罷)되는 등 점차 위축되어갔으며, 임진왜란(1592) 이후에 초제를 행하는 의식도교의 모습은 완전히 없어졌다.
그러나 궁중이나 민간에 뿌리내린 수경신 등의 도교풍습은 그대로 존속해 내려 왔고 지식인층에서는 노자·장자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 더불어 양생 보진의 수련도교에 종사하는가 하면 참동계(參同契) 용호비결(龍虎秘訣) 등의 도서(道書)를 주해 및 연구 저술하는 사람들이 있어 도교의 사상적 측면은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도교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이후 크게 의식도교와 수련도교의 두 맥을 이루면서 종교사상은 물론 문학·예술 등 생활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끼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도교, 한국 문화의 뿌리

도교의 신들 중에는 중국 토착 신앙에서 유래한 것이 많은데 그중에는 우리나라 고유의 토착 신들과 상통하는 것이 적지 않았다. 밤하늘의 별자리를 관찰하고 숭배하며, 삶의 터전이 되는 대지와 강, 산과 나무 등을 신성시하고, 마을이나 성곽, 가정을 지키는 신령이 있다고 믿는 종교관념은 한국인들 역시 일찍부터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두칠성에서 유래한 칠성신이나, 성곽이나 마을을 수호하는 성황신, 불을 수호하는 조왕신, 해와 달을 상징하는 일월신장, 동서남북과 중앙의 터를 지키는 오방신장과 같은 도교의 신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토착 민간신앙과 무리 없이 어우러지면서 점차 그 일부가 생활화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무신도와 함께 민화, 부적, 당사주 등의 기층문화를 이루는 상당부분이 도교에 근간을 두고 있었다.

 종이에 채색 102×75cm (가회민화박물관 소장)

<적토마 관운장> 종이에 채색 102×75cm (가회민화박물관 소장)

그중에서도 중국의 관우신앙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다. 중국 고대의 무장 관우는 원래 중국에서 모셔지던 민간의 재물신이었다. 이 신앙이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사들에 의해 우리나라에 전파되었다. 관우의 신령 덕에 왜적을 물리쳤다고 믿어 전국에 관왕묘를 건립하였고, 이후 숙종이 관왕묘에 배례하는 등 왕권 강화의 상징으로 활용하면서 그 위상이 높아졌다. 이러한 양상이 점차 민간으로 퍼지면서 무속에서도 관우신을 받아들여 관우신앙이 무속화 (巫俗化)하는 양상을 보였는데, 무속화를 살펴보면 적토마를 탄 장수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19세기 후반 고종대에는 왕권 강화를 위해 관우신앙에 대한 한글 전적들이 간행되었고, 서울을 비롯한 전국 도처에 관우 사당이 새로 건립되기도 하였으나, 20세기 들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관우신앙은 점차 쇠퇴해갔다.
한편 중국 무속에서 유래한 도교의 점복과 부적문화 역시 복을 구하고 액을 피하려는 도교에 바탕을 둔 민간신앙의 일종이다. 삼재를 막아준다고 하는 머리 셋 달린 매와 액을 물리치는 뜻의 글귀가 새겨진 부적을 목판에 새긴 것은, 목판으로 찍어서 대량으로 인쇄해야 할 만큼 부적이 널리 사용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도 불길한 일이 있거나 간절히 바라는 일이 있을 때 부적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다.
당사주는 당나라 때 도사로 알려진 이허중(李虛中)이 하늘에 있다고 하는 12성을 인간의 생년월일시와 관련시켜 인간의 길흉을 판단하는 방법을 쓴 책이다. 글과 그림이 같이 있는 형태로 글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림으로 그 뜻을 바로 알 수 있도록 그려졌다. 근대까지도 당사주를 이용하여 길흉화복을 점치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생활문화 가운데 하나로 도교에 근간을 두고 있다.
사회가 어지러운 혼란기일 때 삶이 팍팍할수록 위안을 찾으려는 믿음과 기원은 인간이 갖는 자연스러운 속성일 것이다. 도교문화의 현대적 의미를 해석해내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이다.
가령 도교가 현재 우리가 직면한 모든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답인 듯 호들갑을 떠는 것도, 도교를 미신과 동일시하며 과격하게 부정하는 것도 적절한 시선은 아니기 때문이다.
삼교의 하나로서 도교가 유교, 불교와 함께 한국과 중국의 사상과 문화의 뿌리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토대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도교문화의 깊고도 넓은 영향력을 역사와 문화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우리 역사에 도교가 존재했다는 사실 그 자체와 도교문화가 세시풍속이나 민간신앙 등으로 남아서 우리의 삶에 지금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많은 부분 우리 삶에 유용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우리 문화의 깊은 연원들, 그리고 그 안에 녹아있는 다양한 삶의 방식들을 들여다보는 매개체로서 자리매김되길 희망한다.●

윤열수 가회민화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