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시징맨 시징의 세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5.27~8.2

이선영 미술비평

한중일 세 나라의 프로젝트 그룹 시징맨(西京人)(김홍석+천샤오슝+쓰요시 오자와)은 <시징의 세계전>에서 서쪽에 있다고 가정되는 도시(西京)에 대한 상상을 펼친다. 그들은 동경, 남경, 북경 등 방위를 지칭하는 수도가 현재까지 실재하는 반면, 시징은 사라지고 없다는 점에 주목한다. 왜 서쪽일까. 리처드 해리스는 《파라다이스》에서 파라다이스의 위치로 서쪽이 압도적으로 많이 설정된다고 한다. ‘해질 녘의 서쪽 하늘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데 반한 시인들은 서쪽을 빛과 영광의 세계로 본다’(불핀치)는 것이다. 그러나 지는 해 자체는 흥해야할 도시 명으로 어울리지 않기에 묻히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서쪽으로 떠나는 여행’은 중국 고전소설 《서유기》와도 관련되며, 서양에서 서쪽을 향한 여행기이기도 한 《오즈의 마법사》를 차용한 작품도 눈에 띈다. 시징은 없기 때문에 있는 유토피아의 토포스를 보여준다. 전시장 입구이자 가상 도시로 들어가는 관문에 걸린 뾰족한 돌출이 있는 국기와 오륜을 뒤죽박죽으로 섞은 시징 올림픽기는 미지의 도시에서 벌어질 게임이 얼마나 재미있을지에 대한 기대치를 높인다. 정교함과 부조리함이 공존하는 여러 형식의 작품에는 파타피직스(pataphysics)적 감각이 두드러진다. 이 이질적 규칙의 세계에서 완벽함과 모순은 함께 간다. 작품은 개막식부터 시상 무대까지 올림픽에 있어야 할 것들을 두루 갖췄다. 세 작가가 이 전시를 꾸리기 위해 모두가 인지하고 있는 게임규칙을 패러디하는 과정은 진지하면서도 장난스럽다. 장난도 끝까지 일관성을 유지하면 진지해진다. 그들의 작품은 국가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전면적인 풍자로 다가온다. 시징의 출입국사무소 직원이 입국 조건으로 요구하는 것은 춤과 노래, 또는 웃음과 미소다. 그럴듯한 세팅은 관객 역시 선수 못지않게 게임을 준수해야 하는 일원으로 변모시킨다. 이러한 공모를 통해 자연스러운 일상의 규칙들은 가상 도시의 우스꽝스러운 관례로 소격된다.
오랜 노력이 짧은 시간 안에 결판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주어지는 값진 열매는 금방 상하는 채소로 만들어진 메달이다. 노랑과 파랑으로 번갈아 칠해진 시상식 계단은 착시효과 때문에 어지럼증을 자아낸다. 물감을 바닥에 뿌리고 슬라이딩 하는 게임, 눈을 바닥에 뿌리고 바퀴 달린 여행 가방을 미끄러트리는 게임, 병뚜껑들로 만든 역도, 마구 엉켜 있는 자전거, 미술관 벽과 바닥에 그려진 골대 안의 수박 덩어리 등은 한 국가의 정치, 경제, 문화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게임 규칙들이 애들 장난처럼 자의적임을 폭로한다. 선수는 물론 온 국민이 울고 웃는 게임이 운동경기에만 해당될까. 작가들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의 총체적인 역량을 경쟁의 무대로 삼는 거대 행사가 일상의 미시적 권력 망에도 편재함을 보여준다. 침구나 의상에 박혀있는 국가의 로고나 노동자가 흘린 땀의 양을 계측하는 누런 수건 등이 그것이다. 역할극의 의상이나 꼭두각시 인형 등이 전시된 방은 인간 사회가 배후의 힘에 조종되는 연극 무대로 다가오게 한다. 소품, 의상, 공연 장면 등은 아카이브 같은 방식으로 배열되어 있으나, 작가들은 이러한 거시-미시 권력이 그때 그곳에만 관철되는 구조와 힘이 아님을 설득한다. 시징맨이 다루는 문제의식은 올림픽 게임에 한정되지 않고, 교육이나 예술 같은 전반적인 것으로 확장된다. 국내외 유명 작품들을 간장 제조용 면포 위에 간장으로 그린 쓰요시 오자와, 유명한 팝아트 작품을 우그러뜨리고 타인의 노동력을 구매해 제작된 단색화 156개를 비춰서 기이한 왜곡 상을 만들어낸 김홍석은 한 시대와 세대에게 익숙한 예술적 게임을 자신이 고안한 게임으로 변주한다. 나아가 천샤오슝은 지배자의 일방적 게임규칙에 저항하는 민중의 모습을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준다. 시징맨은 마지막 방에서 각자의 작품으로 돌아와 보편적으로 작동하는 지배적 게임규칙이 또 다른 규칙으로 변모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남긴다. 이러한 메시지는 매우 정치적이다.

위 시징맨 <시징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시징 올림픽 / 시징 동계올림픽> 혼합재료 2008/2014

CRITIC 함경아 Phantom Footsteps

국제갤러리 6.5~7.5

홍지석 단국대 연구교수

샹들리에가 등장하는 함경아의 큼지막한 자수 그림들의 제목은 “What you see is the unseen(당신이 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이다. 이 제목은 흥미로운데 왜냐하면 너무 당연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화가가 화면 위에 찍은 점 하나도 뭔가 다른 것을 지시(함축)하기 마련이다. 이렇게 무엇인가를 가시화함으로써 비가시적인(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드러내는 일이야말로 화가의 통상적인 작업이다. 물론 “What you see is what you see”를 외치며 그 ‘어떤 것’을 화면에서 축출하고 거의 사물에 가까운 작품을 제시하고자 했던 옛 시도들은 예외로 해야 할 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정작 “What you see is the unseen” 또는 “Needling Whisper, Needle country”로 명명된 함경아의 근작들에서 그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다. 작품 자체의 분석을 통해서 이 작품의 심층적인 의미를 해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말이다. 무엇보다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함축한다고 보기에 이 작품들은 너무 평평하고 얄팍하다. 그 한 땀 한 땀 수놓은 비단 자수, 알록달록하고 반짝반짝한 이미지들은 매혹적이지만 막상 그 이미지들로부터 화가가 공언한 ‘보이지 않는 것’을 읽어내는 일은 이미 시작 단계에서 난관에 봉착한다. 어쩌면 그 작품 안에는 “보이지 않은” 어떤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속 편할 것이다. 작가가 굳이 “What you see is the unseen”이라는 제목을 택한 데에는 사연이 있는 셈이다.
내가 보기에 작가가 공언한 ‘보이지 않는 것’은 작품 안이 아니라 작품 바깥에 있다. “수다스럽다” 또는 “과잉이다”라고 할 만한 많은 정보가 있다. 모두 작가가 직접 우리에게 전달한 것들이다. 그 정보들을 열거해보기로 하자. 1)이 작품들은 북한의 자수공예가들이 완성했다. 2)작가가 여기저기서 수집한 이미지와 텍스트들로 제작한 도안을 중간자를 통해 북한으로 보냈고 북한 공예가들이 그 도안을 자수로 구현했다. 3)작품 제작의 구체적인 절차, 경로는 밝힐 수 없지만 간혹 불가항력적인 이유로 작품이 압류되거나 실종된 적이 있다. 4)몇몇 작품은 문구(이를테면 Are you lonely?, Imagine!)가 숨어 있다. 이것들은 냉전시대 삐라를 예술적 메시지로 변용한 것이다. 북한 공예가들도 그 메시지를 접했을 것이다. 5)흔들리는 또는 추락한 샹들리에의 이미지는 권력, 이념, 담론의 불완전성을 나타낸 것이다. 등등
이 정보들을 종합하면 함경아는 작가적 실천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북한, 북한인민들, 북한의 공예가들-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기할 것은 우리(관객)뿐만 아니라 작가 자신도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유령과 같은 것인 까닭이다. 유령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 곁에 머물며 때때로 출몰하여 우리를 위협한다. 마치 북한처럼 말이다. 그 보이지 않는 유령의 흔적을 잡아내는(떠내는) 일이야말로 함경아의 근작들의 과제다. 그 근작들의 전시회 제목은 “유령 발자국(Phantom Footsteps)”이다. 이렇게 본다면 함경아는 상징(개념)의 수준에서가 아니라 지표(흔적)의 수준에서 보이지 않는 것(실재)에 관여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도래한 실재는 자못 생생하다. 전시장에서 연작 가운데 하나가 마치 설치작품처럼 공간 안쪽으로 들어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작품 뒷면과 만날 수 있다. 여기에는 유령, 아니 살아 숨 쉬는 인간 행위-맺고 당기고 밀고 누르는 행위들-의 궤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러니 작가가 공언한 ‘보이지 않는 것’은 작품 안도 작품 바깥도 아닌 작품 뒷면(배후)에 있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위 함경아 <당신이 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다섯 개의 도시를 위한 샹들리에> 북한 주민 손자수, 중개인, 걱정, 검열, 나무 프레임 등 2013~2015

CRITIC 유승호 머리채를 뒤흔들어

페리지갤러리 6.4~8.8

고동연 미술사

“이는 아무 목적이나 의미 없이, 무엇에 대해서도 여념이 없이 생각과 마음을 모두 비운 상태로 그저 멍하니 작업에 집중한다는 뜻이다.” (2015 개인전 도록 《머리채를 뒤흔들어》 중에서)
의식을 최대한 배제한 상태에서 창작이 가능한가? 1920-30년대 초현실주의자들부터 절제되지 않은 몸의 움직임에 따라 우연적으로 물감이 캔버스에 안착하기를 바랐던 폴록에 이르기까지 창작 과정에서 자신의 의식을 배제하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술가들은 각종 ‘잡념’에서 벗어나 최대한 다른 차원의 정신적 상태에 이르려는 강한 욕구를 갖게 마련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른 차원’이 반드시 초월적이거나 해탈의 경지일 필요는 없다. 실제로 우연적인 효과를 염원하는 작가들은 공통적으로 기존의 도덕적인 권위주의나 아름다움에 대한 선입관도 배제하고자 했다.
반복적인 행위를 통하여 ‘멍 때리는’ 상태에 도달하고자 한 유승호의 이번 개인전에서도 종교와 성이라는 테마가 부각되었다. <죽이도록 주기도문>에서와 같이 해탈의 경지에 해당하는 종교적 테마와 <머리채를 뒤흔들어>에서와 같이 강남의 뒷골목에 있는 ‘살롱’문화를 연상시키는 성적인 장면들이 조선시대 풍속화나 문인화를 연상시키는 수법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와 같이 종교나 성을 무의식의 상태와 연관시키는 것은 이성적인 인식의 간섭이 배제된 엑스터시(ecstasy) 상태가 종교적인 행위나 성적인 관계를 가질 때 인간이 경험하는 정서적인 상태와 유사하다는 추측에서 나온 듯하다.
전시에서도 종교와 성이라는 상반된 테마가 나란히 소개되었다. 유승호 특유의 낙서 산수화 수법으로 그려진 <죽이도록 주기도문>에서 관객은 무엇보다도 작가가 글씨를 반복적으로 쓰는 과정을 상상하게 되고 이어서 의미 없는 글자들로 그득 채워진 화면을 보면서 엑스터시의 경지에 이른 작가의 창작과정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주기도문을 반복적으로 외울 때 우리의 의식이 몽롱해지는 것과 유사하다. 반면에 <머리채를 뒤흔들어>에서 즉흥적으로 그려진 선들과 소재를 통하여 엑스터시의 상태를 상상해 볼 수도 있다. 즉 전자가 반복적인 과정에 의하여 유발되는 의식의 부재 상태를 노린 것이라면 후자는 결과로서의 ‘성’과 연관된 소재가 암시하는 이성과 도덕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쯤 되면 유승호의 작업에서 작가가 말하는 “멍 때리는 상태”가 어떻게 관객에게 전달되는지를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면 화면을 그득 메운 글씨들은 작가가 무의식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극도의 반복적인 행위를 기록한 결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객의 입장에서는 작가의 수고와 노력에 대하여 감탄하는 것 이외에 보다 적극적으로 작업과 지적인 교류를 하는 일이 쉽지 않다. 또한 관객이 원거리에서 본 풍경과 가까이서 본 글씨들 사이의 괴리를 깨닫게 되면서 일종의 희열을 경험할 수는 있으나 이 조차 반복적일 수밖에 없다. 유승호 작업의 메커니즘을 아는 관객에게 그 희열은 한시적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주기도문과 <머리채를 뒤흔들어> 시리즈에서 보여준 해학적인 요소들은 소재를 통하여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문제는 개인전의 작업들이 장식적으로 변하면서 실상 멍 때린다는 느낌보다는 이전 작업들에 비하여 훨씬 의식적이고 명확하게 작가의 미적 취향과 기술을 드러내는 점이다. 자칫 흥미로운 강남판 조선 풍속화 정도로 여겨질 위험도 있다. 따라서 작가 스스로 반복적인 행위나 해학의 미를 즐기는 것만큼이나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발할 수 있는 다양한 매체와 구현방법을 고안했으면 한다. 올드 보이의 귀환에 앞서 더 많은 변신과 고민을 기대해 본다.

위 유승호 <죽이도록 주기도문> 종이에 잉크, 금박 2015

CRITIC 이예승 Moving Movements

갤러리 조선 6.3~30

유은순 미학

2012년 <CAVE into the cave>부터 지금까지 이예승의 작업은 디지털미디어와 오브제, 빛과 그림자를 이용하여 실체와 환영, 현실과 가상이 혼재된 이미지를 제시함으로써 현실과 가상의 모호한 경계를 드러내왔다. 시각적 자극들과 정교하게 프로그램화된 이미지들에 우선적인 초점이 맞춰지다보니, 이예승의 작업은 주로 디지털미디어의 시각적 인식 문제를 중심으로 논의되었다. 그러나 갤러리조선에서 열린 최근의 개인전 <Moving Movements>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나듯이, 그녀는 시각 중심적으로 발전해온 디지털미디어에 대한 촉각적(신체적) 체험의 가능성을 꾸준히 제시해왔다(그 시작은 2009년 <BI LIE F>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특히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좁은 계단으로 내려가 높은 천고와 마주하게 되는 갤러리 공간의 특성을 활용하여 사람의 머리보다 높은 위치에 벽을 관통하는 듯한 원형의 스크린을 설치하고, 프로젝터와 컴퓨터가 켜켜이 쌓인 미디어탑을 제작하여 전시장 중앙에 놓았다. 2013년 <CAVE into the cave전>(쿤스트독), <xLoop전>(갤러리루프) 등에서 선보인 작업들에서는 관객이 스크린과 먼저 마주하고 그 다음에야 스크린을 투영시키는 프로젝터와 오브제들을 발견하는 구조였다면, <Moving Movements>는 미디어탑이라는 묵직한 물질성과 먼저 마주한 다음 스크린을 보도록 구축되어 있다. 원형의 스크린이 작품의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느슨한 기준이라고 볼 때, 이전에는 관객이 작품의 외부에 위치하여 스크린 주위를 돌며 작품을 감상하는 방식이었다면 이번 작업에서는 관객이 이미 작품의 내부에 위치해 있다.
<Moving Movements>는 관객이 허상과 실체를 직접 찾아보도록 디지털미디어라는 마술상자의 내부로 초대한다. 이 마술상자는 상자를 구성하는 재료들 –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컴퓨터프로그램, 메인파워와 시스템 전선, 공간을 구성하기 위해 사용된 장갑과 못까지 -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관객은 디지털미디어의 실체를 탐구하기 위해 마술상자 안에 발을 디딘 순간, 작품이 자신의 발걸음, 숨소리까지도 포착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관객들은 외부와 내부의 구분마저 모호한 아이러니한 상황과 마주하고 평소 감각하지 못했던 것을 지각하기 위해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 촉각 등 모든 감각을 불러들여 작품을 탐색하게 된다.
대부분의 뉴미디어아트는 미디어의 신기술을 활용하여 매혹적인 이미지를 선보이면서 시각에 의존하여 작품을 감상하도록 관객을 유도하고, 미디어아트의 최전선인 인터랙티브아트의 경우에도 완성된 프로세스대로만 움직이도록 관객을 수동적으로 작품에 참여시킴으로써 작품과 관객을 구분짓는다. 그에 반해 <Moving Movements>는 작품과 공간, 작품과 관객이라는 구분을 없애고 작품과 공간, 관객이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는 장을 제시한다. 이로써 관객은 온전히 독립적인 자아로서 대상과 자신을 분리시켜 작품을 감상하는 시각 중심적 주체가 아닌 주체와 대상이라는 이분법을 벗어나 작품 전체를 몸으로 체험하는 촉각적 주체로 거듭난다.

위 이예승 <Moving Movements> 인터랙티브 설치, 두랄루민 아크 스크린, 마이크로 컨트롤러, 적외선 센서, 디밍 조명, 웹캠, 나무, 모터 2015

CRITIC 신건우 All Saints

갤러리 구 6.11~7.9

홍이지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회화작업의 수직적인 과정과 행위는 잭슨 폴록이 캔버스를 이젤이 아닌 바닥에 내려놓고 드리핑(dripping: 흘리기 기법)한 이후 그 이상의 가능성을 맞이하게 되었고, 평론가 로젠버그가 그의 작품보다 작업 과정 즉, 행위(doing)에 주목한 이래 회화의 가능성과 해석의 지평은 확장되었다. 물감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팔과 손목을 움직이며 시선을 옮겨가는 회화작업 행위 자체에 대한 ‘연극성’에 기반을 둔 해석은 과정과 시간성이라는 중요한 지점에 대해 다시금 주목하게 된 것이다. “캔버스 프레임 위에 물감을 던져 조각한다”(작가 인터뷰 중)는 작가 신건우는 회화 즉, 평면작업과 부조 형태의 조각을 한 프레임 안에 배치하는 과정을 통해 일종의 반항적인 제스처와 전통적인 매체의 특성, 그 경계를 건드리며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대개 조각을 전공한 작가들은 ‘만들기’와 입체에 대한 갈망을 쉽게 놓지 못하는 듯 보인다. 이는 신건우의 작업 과정에서도 드러나 있는데 조각을 전공한 그는 부조라는 형식을 빌려 프레임 안에서 내용을 구성, 밑그림을 그려내고 부조 조각을 만들어 붙인 후 다시 채색의 과정을 거쳐 완성시킨다. 이 과정에는 회화의 그리기와 조각의 만들기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신건우의 작업이 흥미로운 것은 매체적 특성과 그 혼성적 작업 과정이 한 화면에서 구성된다는 점도 있겠지만 그의 작업에는 그 가능성 안에 이쪽도 저쪽도 아닌 불안정한 그 ‘사이’가 존재한다는 점에서다. ‘조각’과 ‘회화’의 방법을 한 화면에 배치하고, 종교적인 제단화나 삼단화 등의 형식을 차용하여 함께 섞이기 힘든 극단적 요소를 뒤섞어버림으로써 그의 작업은 미묘한 지점에 놓이게 된다.
이번 전시 <All Saints>에서 선보인 작품 <Hiatus(틈)>은 대칭적이고 이질적인 둘 사이에 균형을 맞추려고 애를 쓰는 본능을 보여주려는 동시에 가장 중요한 이야기의 중심을 과감하게 제거함으로써 그 균형은 무엇을 위한 노력이었고,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이야기를 읽어나가야 하는지, 애초에 그것은 존재했는지를 되묻게 된다. 최근 일어난 사건들에서 보이듯 근본적인 문제를 밝히려는 질문이 사실 그 대상이나 주체가 없는 허무한 메아리로 돌아온 아픈 기억을 떠올려 보면, 우리는 그가 작업의 주제로 삼은 사건과 이야기를 통해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을 건드리며 ‘개인’의 문제에서 ‘우리’의 문제로 만들어가는 순간과 그 과정을 통해 동시대성을 취득한다. 이 부분은 그의 작업 매체가 시간성을 담보로 동시대성을 띠는가 혹은 어떤 의미를 가졌는가라는 질문의 핵심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이번 전시는 부조작업만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부조 작업 외에도 기존에 진행해왔던 알루미늄 평면작업과 입체작업이 묵직하게 그 존재감을 드러내며 일련의 시간성과 새로운 공간성을 확보하고 관람객에게 보다 확장된 감상의 즐거움을 준다.
예술에 정답이 없고 우리의 삶이 흑백논리로 얘기할 수 없듯이 20세기 이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회화의 죽음과 위기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이제 새로운 해석과 그 다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마크 로스코가 스티브 잡스와 함께 소비되는 오늘, 신건우의 전시는 그 틈 사이에서 부유하며 개인의 이야기와 생경함이 만나는 순간을 제공한다.

위 신건우 <Sandymount shore 8pm> 혼합재료 2014

CRITIC 몽중애상-삼색도

자하미술관 6.5~7.12

김병수 미술비평

현대미술에서 정치미학이 작동하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다. 영어식 전시 제목이 넘쳐나는 시대에 한자어만으로 이루어진 전시를 만나러 자하미술관으로 가는 길은 역사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일대가 안평대군,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조선 왕조의 여러 인물과 연관돼서이기도 하지만 개인사적 소회가 있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대학원 시절 환기재단 이사장이셨던 조요한 선생님께서 <비교예술론> 강의를 환기미술관에서 진행하셨기에 매주 찾았었다. 도심에서 가까우면서도 한적하고 조용한 동네였다. 그 풍경은 조선시대에도 안목 있는 이들에게는 분명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미학은 예술을 규정하기도 하지만 그 입장 혹은 태도가 정치적이기도 하다. 그렇게 채택된 풍경 또한 미학적인 동시에 정치적이다. 조선시대 초기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그 자체가 정치적 풍경화인 것이다. 그래서 전시기획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 풍경은 가상일 수도 실체일 수도 있지만 회화적 구성과 재현 속에서 훨씬 풍부한 ‘의도’가 의미심장하게도 예술과 정치의 관계를 부각시킬 수도, 무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전시에 대하여 설명한다. “전시는 안평의 몽유와 애상 그리고 그것을 상징하는 삼색도를 주제화하여 펼쳐진다.” 이번에 기획된 전시가 특정한 작품이 아니라 한 인물과 연관한 역사적/정치적/미학적 상황에 대한 일종의 해석학이라는 의미이다.
서용선, 김영헌, 권기수, 강경구, 홍순명, 문봉선, 신태수, 김종구, 정광호, 유근택, 박방영. 다양한 작가들이 자신들의 스타일을 간직한 채 전시를 구성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치적 풍경으로서 전시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을까? 이 지점은 전통적 회화미학에 대한 비판으로서 현대미술을 위치시키듯이 좀 더 적극적인 개입과 해석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견주어 드러내는 직유보다는 어떤 흥취 혹은 분위기를 풍기는 은유를 채택하는 동아시아 미학의 전통으로 말미암아 정치적 판단을 스스로 숨기는 제스처를 취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다행스러운 것은 대개의 경우 그것이 망각이나 은폐로 스스로를 감추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것은 “산수에 대한 전통적 관념은 과연 심미적 상상의 힘만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현재 수준의 답변처럼 보인다.
정명(正名)사상에 의해 분할된 영역이 동등하게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정치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이 미학적 권력 관계에서 불평등했고 따라서 폭력적으로 행사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 해독으로서 미학과 전시는 새로운 기능을해야 한다. 상황 혹은 사건의 구성은 그 자체가 정본이 존재하지 않는다. 판단 자체가 정치적이고 미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正)의 원리로서 내러티브만이 아니라 장식성과 고유성을 동시에 풍부하게 하는 ‘기(奇)’의 차원이 좀 더 탐구되고 모색되지 못해 아쉬웠다. 자기 스타일로 자기의 스타일을 벗어나려는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음에도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김수영, <절망>) 보였기 때문이다.

문봉선 <무계동천>(왼쪽 유리장 안) 종이에 수묵담채 2015

CRITIC 눈에는 이, 이에는 눈

아트스페이스 풀 5.28~6.28

신현진 미술비평

아트스페이스 풀의 전시 <눈에는 이, 이에는 눈>은 ‘미술작품의 가치는 누가, 무엇으로, 어떻게 상정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평소 제도비판에 관심을 갖고 있던 필자에게는 여간 흥미로운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이어서 기획자는 질문에 왜 굳이 ‘상정’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지를 논하면서 현대미술의 현상이 상대적인 조건 아래에서 작동하는 것임을 그 이유로 제시했다. 그가 상대적인 현상에 주목한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모더니즘의 거대서사가 몰락한 이후의 예술은 사회화의 과정을 겪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예술은 초월적 관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체험세계를 반영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는 의미이다. 초월적 진리가 더 이상 예술에 규범을 제공할 수 없는 현 사회에서 이제 예술을 관찰하는 방법은 상대적 현상이 되거나 (그래서 소통의 정치로부터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에) 맥락을 함께 제시하는 것이 윤리적인 태도로 간주된다. 이제는 ‘예술이 무엇이다’를 밝히는 것이 개인으로서의 주체에게는 중요한 한편 그것이 진리라고 강제하는 메커니즘은 사라졌다. 단지 우리는 주어진 혹은 선택한 맥락에 따라 특정 예술이 존재하는 방식의 흔적을 따라갈 뿐이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예술에 대한 가치판단은 작가와 관객 등 개개인의 의무이자 권리이며 판단을 내리는 시공간인 미적 체험은 상대적 판단 기준자가 된다.
포스트 모더니즘과 함께 시작한 제도비판은 사회적 맥락이 개입된 예술의 현상에서 예술이 무엇인가를 정의하고 설득하려는 시도였다. 이정헌의 기획 또한 미적 체험을 제도비판의 방식으로 실험하는 시도로 보인다. 그는 예술작품의 가치생산 현상을 관찰하기 위해 전시를 일종의 실험장치로 전환했는데 작품 제작의 조건에서 자본, 교환 가치를 빼고, 작가-관객 사이의 소통을 작품의 가치 생산의 변수로 끌어들였다. 즉 관객은 작가에게 작품의 출발점이 될 선물을 주고 작가는 선물에 대한 답으로 작품을 제작한다. 기획자가 보기에 현대미술은 사회화된 현상에도 불구하고 “작가와 사회의 상호연관관계는 사라진”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그가 제시한 관객이라는 변수는 예술이 사회적으로 의미를 갖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아닐 수 없다. 예술작품이 보여지고 읽히는 소통의 사건과 내용은 후속 소통으로 연결될 때에만 사회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이를 위해 기획자가 고안한 장치는 ‘증여’다. 관객이 작가에게 선물을 증여함으로써 생기는 상호 의무관계는 능동적인 미적 체험을 야기하는 장치라는 점에서 제도비판적 실험이다.
미적 체험을 전시한다는 것. 안타깝지만 이 흥미로운 미적 체험의 제도비판은 실험 결과를 보여줄 수 없었다. 전시장에서 기획의도는 슬라이드 쇼를 통해 언어로만 제시되었고 관객이 증여한 선물이 알리바이로 놓여 있을 뿐 전시(작품이)라는 미적 체험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다. 증여라는 사회학 용어를 사용해서 암묵적인 상호호혜작용을 강제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작업 20점 정도씩을 걸어 놓은 것으로는 상호작용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관객과 작가의 관계가 작품의 가치 생산에 영향을 미치는가라는 실험의 결과는 가시화되지 않았다. 더구나 어느 작가는 ‘정확한 등가관계’의 교환을 강조했기 때문에 교환가치를 빼자는 의도를 이해하기나 했는지 의심이 갈 정도다. 다른 작가는 관객의 증여에 대하여 예술이 아닌 물질적인 보상을 약속했다. 그리고 나머지 작가는 참여관객이 말동무가 되어주기만을 바랐다. 작가의 작품세계가 관객이나 소비자에 의해 변화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 실험에서 관객과의 체험을 자신의 언어로 해석하거나 입장을 밝힐 필요는 있었다. 혹시, 이 작가들이 관객은 자신의 예술과는 무관하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위 이윤호 <Untitled>(맨 오른쪽) 잉크젯 프린트 2015

COLUMN

총체적 난국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의 공석상태가 장기화하면서 미술관 내외부에서 떠돌던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이제 괴소문 수준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작년 가을 전임 관장이 개인 비리로 직위해제된 뒤 자동적으로 임기가 만료되었다. 뒤늦게 신임 관장 선임 절차를 시작해 지난 3월 마지막 단계에서 2명의 후보자로 압축되었지만 웬일인지 두 달이 넘은 5월 하순 현재까지 최종 결정이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혹시라도 이 글이 활자화되어 출판되기 전에 관장이 임명된다 하더라도 시기를 놓친 김빠진 결정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관장 직무대행을 해오던 기획운영단장은 다른 국가기관으로 전보 발령되었고 새로 미술관에 발령된 운영단장은 오자마자 관장 직무대행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그뿐 아니라 이러한 어수선함 속에서 학예실장직을 수행하던 직원은 사표를 내고 지방미술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당면한 작금의 상황은 한마디로 총체적 난맥상이라고 할 것이다. 미술관장이 부재 중인 상황에서 기획운영단장과 학예실장이 다른 기관으로 가버리고, 새로 온 기획운영단장이 관장 직무대행을 하고 있는 상황은 누가 보아도 염려스러울 수밖에 없다.
오늘의 국립현대미술관 사태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물론 직접적으로는 특정 개인의 불법적 행위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겠지만, 큰 틀에서 볼 때 그 근원에는 제도의 경직성이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후기 산업사회를 넘어 신속한 정보사회로 전환된 우리 사회의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관료사회의 경직된 의식과 제도가 발목을 잡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문제점을 미술관 내부 문제와 외부 환경 문제로 나누어 들여다보자.
내부적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은 직원들의 전문성을 함양하는 데 소홀했다. 전문연구자로서 학예직원들이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평가제도도 없었기 때문에 일반 공무원으로서 복무규정에 어긋나지 않으면 계속 근무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학예직원에게 가장 중요한 연구실적이나 전시기획 성과는 진지하게 평가된 적이 없다. 그러니 긴장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노력을 기대하기 어려웠고 질좋은 성과도 도출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외부 환경도 그리 긍정적이지 못했다. 예술의 속성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창의성과 가변성 혹은 자율성이다. 따라서 국립현대미술관과 같은 예술기관의 운영은 이러한 속성을 가진 예술작품을 다루는 데에 걸맞은 전문성에 더하여 자율성과 창의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게다가 급속하게 변화하는 미술생태계에서 최근까지 유효하던 제도도 어느 순간 비효율적이고 거추장스런 것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따라서 미술관의 운영에는 가벼운 몸놀림과 신속한 의사결정이 필수적이며 이를 위해 제도의 유연성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하지만 우리 국립현대미술관을 움직이는 근거가 되는 법률과 규정은 전문성, 자율성, 창의성을 보장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을 규제하는 법과 규정이 미술관이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게 만드는 걸림돌인 셈이다. 다시 말해서 미술관의 운영 과정에서 중요한 결정을 신속하게 내리고 전문성을 발휘해야 하는 사람과 실제로 의사결정권을 가진 사람의 불일치가 문제의 근원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하고 둔한 움직임을 보이는 데에는 미술관 내부 인력들의 자기책임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실제적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을 통제하는 행정 관료들의 비문화적인 의식과 태도, 그리고 그들이 행동 기준을 구하고 있는 법률의 시대착오적인 규정과 시대적 비동시화(非同時化)에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오늘날 국립현대미술관이 처한 어지러운 상황의 원인은, 국립현대미술관을 운영하는 규정과 그 규정을 적용하는 인력에 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과거의 기준에 묶여서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데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국립현대미술관과 같은 문화예술기관은 경직된 사고로 이끌어 나아갈 수 없다. 과거 우리나라만큼 관료사회의 경직성이 새로운 시대로 가는 발목을 잡아왔다고 비난받은 일본의 예를 보자. 일본은 1980년대부터 ‘작은 정부’를 표방하며 정부기관을 축소하고 민영화하는 과정에서도 박물관과 미술관을 오히려 확대 강화시키고, 학예사들의 자질 향상을 위하여 교육과 연수를 충실히 하는 쪽으로 문화정책을 방향 전환했다. 이런 점은 우리 정부의 문화정책 운영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하계훈 미술비평

이태호 교수의 진경산수화 톺아보기 1

서울이 아름답다
필운대 언덕의 봄꽃 잔치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이 연재는 나로서는 조금 부담스럽고 색다른 시도이다.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현장을 다시 밟으며 나도 스케치해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미술사를 공부한 이후 줄곧 진경 작품과 그 실제 경치 찾기를 즐겨왔다. 그림의 실경을 카메라에 담을 때마다, 늘 옛 화가들을 따라서 스케치해보면 어떨까 했다. 그 생각을 이번 《월간미술》 연재를 통해 실현하게 된 셈이다.
나는 35년 이상 진경작품과 실경을 대조하여 ‘닮음과 닮지 않음’, 혹은 ‘기억으로 그리기와 사생하기’ 등 그 해석방식을 검토했고, 진경작품의 시대적 의미와 회화성을 짚어보았다. 이렇게 쌓인 진경산수 관련 글과 사진을 《옛 화가들은 우리 땅을 어떻게 그렸나》(2010)로 묶어내어 ‘우현(고유섭)학술상’을 받았으나, 출판사가 도산하였다. 다행히 이 책을 수정 보완하여 올해 같은 제목으로 재간하였다.(마로니에북스, 2015) 이번 작업은 앞 책의 연장선상에 놓인 셈이다. 그동안 실경과 그림을 비교하던 경험을 토대로, 새로이 스케치를 병행하며 옛 거장들의 눈과 생각에 가까이 다가가 재검토하고 싶다.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 톺아보기가 될 것이다. 실경그림의 현장 답사는 자연히 오늘의 모습과 비교하니, 또한 시간 여행이 되겠다. 그 사이, 곧 조선화에 담긴 옛사람들의 꿈과 변화한 현실 사이에서, 내가 그릴 진경을 떠올려 본다. 두렵고 흥분된다. 연재의 시작은 서울이다.

지금의 서울은 인간의 욕심을 한껏 드러낸 민낯 같다. 지난 백 년 동안 엄청나게 파헤치고 개발한 탓이다. 하지만 욕망의 상징이라할 빌딩숲 틈새나 그 너머로 보이는 산세와 물길은 유구하다. 오히려 현대물을 고스란히 감싸 안은 자연이 아직 넉넉한 편이다. 인간의 문명을 비웃기라도 하듯, 당찬 형상이 늠름하다. 화강암이 불거진 산세는 여전히 변함없고, 물길과 어울린 벼랑이나 계곡의 계절색이 조화롭다.
서울의 아름다움은 옛 문인의 시나 글, 화가의 진경작품에서 흔히 만난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을 비롯한 조선 후기 화가들의 진경산수화는 우리 산하의 자연미뿐만 아니라 선현들의 삶과 풍류를 확인케 해준다. 요즘 들어서는 한동안 잊고 살아오던 그 고전문화에 다시금 눈 뜨게 되면서, 고도(古都)의 모습을 새로이 만나려 야단이다. 최근 인왕산 아래 수성동(水聲洞) 계곡이 복원되는 등 여기저기 공원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현상을 예견하고 개발했더라면, 현재의 서울은 일찌감치 세계적인 명소로 자리잡혔을 법하다. 또 서울 관련 책들이 쏟아지고, 많은 이가 서울의 정취를 즐기려 북촌과 서촌, 삼청동, 부암동 자락에 몰려드는 것을 보아도 그러하다. 마치 옛 문인들이 백악사단(白岳詞壇), 탑골의 백탑시사(白塔詩社), 인왕산 옥류동의 옥계시사(玉溪詩社) 등을 조직하여 조선 후기 문예의 르네상스를 열었다고 평가되듯이, 그와 맞먹는 우리 시대 문예부흥으로 이어질지 조심스레 기대해본다.

한양은 선분홍의 꽃대궐, 무릉도원
올해도 서울의 봄은 어김없었다. 화사한 벚꽃과 목련, 그리고 개나리와 진달래 등이 온 천지를 덮었다. 특히, 근현대에 의도적으로 심은 하얀 벚꽃과 번식력이 왕성한 노란 개나리는 대지를 점령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옛 그림과 글, 그리고 토박이 노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본래 서울의 봄은 분홍 꽃들이 연녹색 이파리들과 어울려 사뭇 다른 색채감을 뽐냈던 모양이다. 이원수 선생의 〈고향의 봄〉(1923),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에 나오는 분홍빛 고운 꽃대궐은 비단 산골만이 아니라 서울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엔 인왕산과 백악 사이에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듯, 도성의 서북부 지역을 도화동이라 불렀다. 이는 백악의 서쪽 기슭 ‘쌍계동(雙溪洞)’의 ‘대은암(大隱岩)’ 골짜기에 새겨진 ‘도화동천(桃花洞天)’과 ‘무릉폭(武陵瀑)’이라는 바위글씨가 말해준다.(지금의 청운중학교 교문 맞은편) 담졸 강희언(澹拙 姜熙彦, 1738~1784년 이전)이 ‘늦은 봄(음력 3월) 도화동에 올라 인왕산을 바라보다[暮春 登桃花洞 望仁王山]’라고 화제를 써넣고 그린 〈인왕산도(仁王山圖)〉(개인 소장)는, 바로 이곳 도화동천에서 바라본 인왕산의 측면 풍경을 포착한 진경 작품이다.
‘무릉(武陵)’은 잘 알다시피 도가(道家)의 이상향이다. 흔히 경치가 수려한 풍광에 ‘무릉’을 붙여 무릉계곡, 무릉폭포, 무릉동 등으로 일컫는다. 또한 ‘도화동천’에 ‘무릉폭’을 곁들여 새김은 복숭아꽃이 아름다운,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무릉도원을 떠오르게 한다.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유토피아의 상징으로 그려진 세상 말이다.
세종 시절 1447년 4월 20일 밤에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이 도원을 탐승(探勝)하는 꿈을 꾸었고, 그 이야기를 따라 안견(安堅)이 3일 만에 그렸다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日本 天理大學 소장) 역시 도연명의 문예 경향과 연관된다 하겠다. 도화동길을 올라 북쭉으로 창의문(彰義門)을 나서면, 그 왼편 자락에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도원과 비슷하다고 여겨 마련했다는 무계정사(武溪精舍)가 그 터만 남아 있다. 현재 이곳에 새겨진 ‘무계동(武溪洞)’ 바위글씨가 안평대군의 필치라 전한다.
예부터 복숭아는 선과(仙果) 혹은 선약(仙藥)으로 신선세계의 식물이고, 300년 만에 열리는 복숭아는 천도(天桃)라 하여 장수를 상징한다. 복숭아나무는 귀신이 접근하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어 사당에는 심지 않았고, 제사상에도 복숭아를 올리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도화꽃은 성리학 이데올로기의 상징이기도 했다. 복숭아 도(桃)는 ‘길 도(道)’자와, 오얏나무 이(李)는 ‘다스릴 이(理)’자와 음이 같아 오얏나무와 복숭아나무의 도리원(桃李園)이 조성되거나 그려졌다. 도화꽃은 또 잉어 리(鯉)와 짝을 이루어, 물고기 그림 어해도(魚蟹圖)의 소재로 즐겨 그려지기도 했다. 모두 성리학을 추구한 사대부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도리(道理)’를 빗댄 셈이다. 생활 속에서는 복사꽃이 사주풀이에 등장한다. 일명 도화살(桃花煞)이다. 도화살이 낀 사람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호색으로 집안을 망하게 한다고 생각했었다. 최근에는 도화살이 예능 개념으로 재해석되며 매력적인 사주로 바뀌었다.
복사꽃은 1820년대 후반 순조 시절에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봄철의 〈동궐도(東闕圖)〉(국보 제249호, 고려대학교박물관, 동아대학교박물관 소장)에도 빠지지 않는다. 전각 사이사이의 후원과 산언덕에 핑크빛 봄꽃들이 온통 가득하다. 큰 가지의 나무는 도화꽃과 함께 살구꽃이나 자두꽃일 법하며, 솔밭의 낮은 분홍꽃 나무들은 진달래로 생각된다. 그야말로 꽃대궐이다. 도성 밖에도 복사골이 많았다. 혜화동 밖 사람들은 복숭아밭을 일구어 생계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한양의 봄꽃놀이 대상으로 성북동 복사꽃, ‘북촌도화(北村桃花)’가 꼽힐 정도였다. 복숭아밭이 얼마나 넓었던지 마포에는 도화동이라는 행정지명이 존재한다. 남산 기슭에도 도동(桃洞, 현 중구 남대문구로, 용산구 후암동·남영동)이 있었고, 한강 쪽 기슭도 봄이면 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여기서 복숭아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과수원의 복숭아가 아닌 개복숭아이다. 토종인 개복숭아는 아기 주먹만한 열매로 심장과 폐, 대장, 기관지 천식 등에 좋고, 기침을 멈추게 하는 효능으로 유명하다. 개복숭아 꽃차는 피부에 탄력을 주고 얼굴에 화색을 돌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겸재 정선의 봄나들이 〈필운대상춘〉
분홍색 꽃대궐, 한양에서 봄 풍류를 즐긴 최고의 공간은 인왕산 남쪽 자락의 필운대(弼雲臺)였다. 문인사대부에서 중인, 서민층까지 시와 음악을 나눈 명소였다. 필운대 부근은 살구꽃이 가득하여 ‘필운행화(弼雲杏花)’나 ‘행촌(杏村)’이라 불렸으며, 도화꽃과 더불어 춘심을 자극하는 다채로운 꽃들이 함께 했기에 ‘필운대 꽃놀이(弼雲賞花)’가 장안의 제일로 손꼽혔다. 필운대에서 육각현(六角峴) 고개를 거쳐 모암(帽巖)으로 올라가는 인왕산 동남쪽 능선은 서울의 봄꽃을 감상하기에 가장 좋은 상춘(賞春) 장소일 뿐만 아니라, 도성 안팎의 장쾌한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 구실을 한다. 남산이 품은 도성의 구석구석은 물론이거니와 한강 남쪽으로 전개된 남한산성에서 관악산까지 확 열리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많은 문인이 그러했듯이, 겸재 정선 또한 필운대에 올라가 서울의 춘경(春景)을 만끽하곤 했던 모양이다. 봄 향기를 가득 품은 〈필운대상춘(弼雲臺賞春)〉(개인 소장)이 그 좋은 사례이다. 한양을 꽃과 버드나무의 봄, ‘춘화류(春花柳)’라 노래했듯이, 화면의 필운대 아래 서촌마을과 도성 안에는 온통 연두색 봄버들과 분홍빛 꽃들이 만발해 있다. 옛 서울의 봄을 얘기할 때, 첫손 꼽히는 그림이다. 작품 사진이 먼저 알려지는 바람에 여기저기 소개되었지만, 실작품은 필자가 기획한 〈조선후기 산수화전〉을 통해서 대중에게 처음 선보였다. (이태호 엮음, 《조선후기 산수화전-옛 그림에 담긴 봄 여름 가을 겨울》, 동산방화랑, 2011)〈필운대상춘〉은 필운대와 그 남쪽으로 펼쳐진 도성과 지세를 담은, 고운 비단에 세필의 깔끔한 수묵담채화 소품이다. 남산의 미점준(米點皴), 필운대 언덕의 피마준(披麻皴)과 태점(苔點)이 어울린 남종산수화법의 그림이다. 필운대의 소략한 산주름을 따라 그려진 농묵의 듬성한 ‘丁’자형 소나무들의 솔밭은 정선의 전형화된 진경화법을 보여준다. 비슷한 구도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간송미술관 소장)에 담긴 〈장안연우(長安烟雨)〉나 〈장안연월(長安烟月)〉과 마찬가지로 양천현령을 퇴임한 이후 1740년대 후반의 대표작으로 생각된다. 세심하면서도 시원한 화 구성과 성근 선묘가 70대 명작답다. 정선이 70대 그림에 주로 찍었던 장방형의 음각도장 ‘겸재(謙齋)’도 이를 뒷받침해준다.
광활한 풍경을 포착하는 정선의 시야는 역시 품이 큰 화가답다. 또 너른 풍광을 작은 화면에 압축하여 그린 정선의 축경화법(縮景畵法)은 〈필운대상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도성 안의 궁궐이나 관청, 그리고 마을들을 운무(雲霧)로 여백을 살리거나, 원근의 풍경을 합성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면 오른쪽으로 멀리 보이는 산세는 뾰족뾰족한 암산 능선의 관악산이다. 원경을 근경의 필운대와 동일화면에 담은 것은, 정선의 독특한 화면구성법이다. 원근의 풍경들을 모두 아우른 시점은 인왕산 북쪽 중턱 옥류동 언덕이나 창의문 근처쯤에 존재한다. 필운대에서 상당히 떨어진 거리이다. 푸른색 실루엣의 관악산 아래 그려진 오른쪽 이층 누각은 숭례문이다. 남산 정상엔 한 그루의 소나무가 또렷하다. 이는 정선의 〈목멱산(木覓山)〉(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에도 보이며, 애국가에 등장하는 ‘남산 위의 저 소나무’이다. 이 노송은 6·25전쟁 때 폭격으로 사라졌다. 남산 아래 언덕은 지금의 명동성당이 자리한 종현(鍾峴)이다. 화면의 왼편 미점준에 싸인 희미한 돌기둥은 경회루(慶會樓) 터이니, 임진왜란 이후 폐허화된 경복궁임을 알려준다. 필운대 너머 인왕산 남쪽 자락 솔밭과 바위벼랑 사이에는 황학정(黃鶴亭)과 사직단(社稷壇) 풍경이 전개되어 있다.
오른쪽 가장자리 솔밭 위 필운대 언덕은 선비들의 봄놀이 터이다. 도성 풍광을 감상하며 시를 나누는 계모임 광경이다. 화면의 오른편 필운대 언덕에는 두 문인을 중심으로 다섯 명이 서있거나 앉아 있다. 그 아래로 동자를 대동하고 지팡이를 짚은 뒤늦은 참석자도 등장한다. 가운데 두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유난히 큰 인물상으로 좌장(座長) 격이다. 상당한 스승이거나 지체 높은 문인관료인 모양이다. 필운대 언덕 아래 두 그루의 노송 그늘에는 두 사람이 타고 온 듯 두 필의 말과 마부가 보인다.
언덕 아래 다섯 그루의 소나무가 있는 곳이 이항복(白沙 李恒福, 1556~1618)의 글씨 ‘필운대’가 새겨진 바위벼랑 위치이다. 그 아래로 화류(花柳)가 만발한 초가마을은 조선 후기 중서층(中庶層)들이 주로 살면서 달동네라는 의미의 ‘여항(閭巷)’ 문학을 발달시킨 ‘웃대’로 여겨진다. 지금의 누상동·누하동이다. ‘누각동은 연산군 때 지은 누각(樓閣)이 있어 생긴 동명으로, 사대층보다 하급관료인 서리들이 주로 모여 살았다’고 한다.(柳本藝, 《漢京識略》) 헌데 필운대는 선조 시절, 권율 장군과 그 사위인 이항복이 살았으니 본래 사대부층의 공간이었을 터이다. 조선 후기 들어 이곳에 서리를 비롯한 중인이나 서민층 마을이 조성되며 ‘웃대’라는 별명을 갖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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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의문 언덕에서 본 필운대 남산 관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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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악의 서쪽자락 대은암 쌍계동 골짜기 ‘무릉폭’과 함께 새겨진 바위글씨 ‘도화동천’ (<한양사람들의 멋과 풍류, 바위글씨전> 서울역사박물관 2004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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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겸재 정선 <필운대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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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왕산 남쪽자락의 봄, 필운대에서 육각현을 지나 모암까지는 도성의 최고 전망대이다. ⓒ이태호

송월헌 임득명의 필운대 꽃 감상 〈등고상화〉
조선 후기 웃대의 중인문학을 중흥시킨 대표 계모임은 18세기 후반에 결성된 옥계시사이다. 1786년 7월 16일 옥계시사의 첫 모임을 기록한 《옥계사첩(玉溪社帖)》(삼성출판박물관 소장)과 1791년의 《옥계사시첩(玉溪社詩帖)》(영국 브리티시 도서관 소장)은 당대 여항인의 문학적 진면목을 담아낸 것으로 평가된다. 모임의 연장자인 오옥재 최창규(五玉齎 崔昌圭)가 소장했던 《옥계사첩》은 〈옥계사십이승(玉溪社十二勝)〉이라 하여 한양의 12명승을 계절에 따라 즐기는 시회(詩會)를 기념하여 제작된 서화첩이다. 모임의 스승이자 좌장 격인 송석원 천수경(松石園 千壽慶) 구장의 《옥계사시첩》은 인왕산 아래 열 곳의 승경(勝景)을 노래한 결과물이다. 이 모임에는 장혼(張混), 김낙서(金洛瑞) 등 당대 내로라하는 여항시인들이 참여했다. 옥계시사의 계원인 송월헌 임득명(松月軒 林得明, 1767~1822)이 두 첩에 그림들을 곁들였다.
한양의 아름다움을 순서대로 설정한 십이승(十二勝) 가운데, 세 번째인 〈등고상화(登高賞華)〉는 《옥계사첩》의 네 그림 중 음력 2월 중춘(仲春)의 ‘꽃구경[賞春]’을 담아내었다. ‘높은 곳에 오른(登高)’장소는 옥계문인들의 시에 밝혀져 있듯이 필운대이다. 필운대 언덕에서 벌인 봄의 꽃잔치, 시잔치 장면을 그린 실경화이다. 음력 2월인 점을 감안하면 아직 복사꽃이 피기 이전이니, 그림에 가득 담긴 분홍빛은 ‘필운행화(弼雲杏花)’의 살구꽃일 것이다. 그림 속의 살구나무들은 버드나무와 함께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 이들은 대부분 벚꽃이나 목련으로 대체되었다. 필운대가 있는 배화여고와 배화여대 교정에 겨우 두세 그루만 남아 있는 실정이니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든다.
임득명이 정선을 공부했던 만큼 화면의 짙은 농묵 미점과 소나무 표현은 정선 스타일이다. 마을의 화사한 분홍꽃과 버드나무를 묘사한 필치 역시 마찬가지이다. 표현 기량이 덜 익었지만, 그 미숙함이 도리어 봄맛과 잘 어우러져 있어 좋은 그림이다. 대지의 싱그러운 봄기운을 전해주는, 담먹과 담청색 넓은 붓 바림과 번짐은 정선이나 기존의 산수준법을 탈피해 돋보인다. 임득명의 참신한 회화미로 현대감마저 물씬 든다. 그동안 옥계사 모임을 가진 시기 1786년에 의존하여 임득명이 20대 초반에 그린 초기 작품으로 보아왔다. 그러나 개성적 화풍이 뚜렷하고 거칠게 그린 분방한 솜씨로 미루어 볼 때, 40~50대에 그려 《옥계사첩》을 꾸미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또한 임득명의 〈등고상화〉는 앞서 살펴본 정선의 〈필운대상춘(弼雲臺賞春)〉과 달리 필운대 언덕과 그 아래 마을만 포착한 구성을 보여준다. 원경의 남산과 관악산, 그리고 도성 내부의 풍경이 생략되어 있다. 두 작품을 비교하자면, 정선은 멀리 위치한 남산을 담기 위해 제3의 시점을 설정하거나 부감하여 그린 반면, 임득명은 남산과 원경을 빼고 아래서 바라본 시선대로 필운대 언덕 능선을 살려 그렸다. 눈에 보이는 대로의 봄볕 가득한 풍경을 그린 셈이다. 오른편 능선은 필운대 언덕의 실제 풍경처럼 보이지만, 왼편의 능선은 실경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선의 화면 구성상 일부러 좌우를 맞추어 놓은 듯하다. 필운대 언덕 위에는 일곱 명의 시인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서있고 여섯 명이 앉아 있으나, 정선 그림처럼 좌장을 중심으로 집중된 표정들이 아니어서 재미나다. 모두 갓을 쓰지 않은 점과 더불어, 여항문학을 선도한 중인층의 자유스러움이 묻어나는 듯해 눈길을 끈다. 영조 시절 문인사대부층의 경직된 모습을 읽게 해주는 정선의 〈필운대상춘〉에 비하여, 임득명의 〈등고상화〉에는 정조 시절 부상한 중인이나 서민층의 문예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18세기 영·정조의 시대 변화상을 읽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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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계사첩》(삼성출판박물관 소장) 중 송월헌 임득명 <등고상화(필운대)> 종이에 수묵담채 24.2×18.9cm 18세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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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필운대 봄꽃 ⓒ이태호

노란 종이배를 타고 신도원의 꿈에 들다
올봄, 나는 틈날 때마다 인왕산을 찾았다. 산중턱에 살아남은 개복숭아꽃을 만나려고 3월 말부터 드나들었다. 4월 중순이 되자 드디어 여기저기서 복사꽃 꽃망울이 터졌다. 옥류동에서 인왕산 중턱으로 오르며, 양지바른 비탈에서 복숭아나무 10여 그루를 발견하곤 반가웠다. 몇 그루의 죽은 고목 밑둥치에서 새순이 돋고 새 가지에 꽃피는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웠다. 여린 가지에 새싹과 함께 핀 선홍빛의 〈개복숭아꽃〉 한 가지를 스케치했다. 이 개복숭아꽃에서 그야말로 자연이 지닌 생명력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의 손길을 타지 않은 채 현재의 인왕산 숲을 그대로 놔둔다면, 언젠가 복사꽃 만발한 도화동천이 도래할 거라 상상하며 황홀했다. 신도원(新桃源)의 꿈을 떠올렸다.
이번에 그린 필자의 그림 〈신도원의 꿈〉은 정선의 〈필운대상춘〉 방식으로 화면을 잡아 보았다. 근경에 필운대를 배치하고, 수묵으로 표현한 원경의 남산과 관악산 아래 빌딩숲, 그리고 경복궁은 필운대 위쪽에서 내 눈에 든 모습 그대로이다. 현재 필운대 언덕에는 근래 세워진 정자가 덩그러니 있고, 그 옆에 두 면의 테니스코트가 들어서 있다. 수백 명의 시인들이 모여 봄노래를 읊었다는 언덕이 그렇게 변했다. 테니스 치는 모습은 그릴 자신이 없어 생략하였고, 신도원에도 필요할 정자만 살려 보았다. 필운대와 빌딩숲 사이, 옛 도성 안을 복사꽃으로 가득 채워 넣었다. 금년 필운대와 인왕산을 답사하며 봄꽃을 찍을 때, 그 너머의 광장에서는 세월호 1주기를 맞아 추모 인파가 오열하고 갈등하였다. 우리 시대의 신도원은 그 아픔을 안고 꾸는 꿈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필운대 아래에 노란 종이배를 띄웠다.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인적 없이 정박한 빈 배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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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호 <개복숭아꽃> 종이에 채색 20.3×33cm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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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호 <신도원의 꿈> 종이에 수묵담채 37.8×56.5cm 2015

 

 

COLUMN 강수미의 공론장 3

새로운 관계미학, 미술정치학의 문제

마를렌 뒤마는 2012년 네덜란드 정부가 수여하는 요하네스 페르메르 상(Johannes Vermeer Award)을 받았다. 당시 작가의 수상 소감이 특히 화제가 됐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이고 암스테르담을 기반으로 활동해온 이 작가는 인종 갈등, 약자와 불평등, 반테러리즘 등 무거운 사회적 의제를 감각적인 필체로 그려내 평단으로부터 자신만의 회화예술을 인정받았다. 동시에 현대미술 시장의 가장 확실한 블루칩으로 꼽힌다. 그런 그녀가 상을 받는 자리에서 그즈음 긴축 재정에 들어간 네덜란드 문화예술계에 대한 후원, 이민법 개혁, 미술시장에 대한 창작과 비평의 생산적 견제를 호소했다. 나아가 상금으로 받은 10만 유로를 자신이 강의하던 아트 인스티튜트 드 아틀리에(De Ateliers)에 쾌척하며 스스로 실천하는 모습을 보였다.1 뒤마의 이 같은 언행에 언론과 미술계의 박수는 당연하다. 그런데 우리가 더 가치를 부여할 지점은 그 말과 행동을 통해 미술이 사회와 관계 맺는 접점, 의사소통하는 질(質)적 순간이 부각됐다는 점이다. 나아가 많은 이가 새삼 미술을 사회적으로 존중할 분야로서 인정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미술이 현실사회와 대중을 향해 구사할 수 있는 세련된 정치학이란 이런 것일 것이다.
한국 미술계에는 그 같은 멋진 담화가 있는가, 저처럼 존경할 만한 작가의 대의적 행위를 통해 미술의 사회적 존재와 역할이 조명된 순간이 언제인가, 생각해본다. 분명 어딘가에서 빈번히 일어났겠지만 과문한 내게 퍼뜩 떠오르는 일화는 드물다. 하지만 한 화가의 그림이 아시아 미술품 경매에서 예상치를 뛰어넘은 높은 가격에 낙찰됐다는 소식, 한 사진작가가 큰 상금이 부상으로 주어지는 상을 받았다는 소식, 한 설치미술가의 전시와 한 사회비판적 작업을 하는 작가의 영상작품이 다양한 사회적/공적 후원을 받아 이뤄질 수 있었다는 소식은 줄줄이 기억난다. 지난 10여 년을 되짚어봐도 많은 사례를 들 수 있고, 최근 사례로도 꽤나 많다. 2007년 리먼브라더스 사태로 경색됐던 한국미술시장이 바야흐로 ‘호황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오늘의 뉴스에 인용된 젊은 작가의 작품 낙찰가는 기본이 수천만 원이다. ‘단색화’라는 이름 아래 제2의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는 원로들의 추상화는 사상 최고가에도 구하기 어려워 국내든 국외든 아트 딜러들이 애태운다는 뉴스가 ‘한국 미술계에 부는 한류’라는 수사학에 실려 떠돈다. 그 와중에 젊은 자신부터 앞길이 막막한 후배들을 위해 아주 작은 기여라도 하겠다고 나서는 ‘잘나가는 영 아티스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제 한 몸 서 있기도 만만찮은 현실이니). 한국미술계의 기성/원로세대로서 다음 미술세대를 위해 국가 예술정책에 고언을 던지거나, 사회에서 미술이 존중받을 만한 일을 도모하는 미술계 웃어른들의 행보도 별로 접할 수 없다(자칫 잘못 나섰다가 젊은이들로부터 핀잔이나 듣고, 안하무인 싸움에 말릴 수도 있으며, 그전에 무엇보다 내 삶의 절박함에 쫓긴다면). 대신 국공립미술관의 ‘젊은 작가전’에서, 사립미술관의 ‘동시대 회화 주제전’에서 뒤마의 그림과 스타일이나 분위기 면에서 거의 동일한, 한국의 20~30대 여성 작가들 그림은 심심찮게 마주친다. 또 대신에 명분과 역량은 어쨌든, 힘 있는 자리나 배타적 이익을 챙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는 미술인들(세대나 분야에 상관없이)의 이기적인 행보를 직간접적으로 보고 듣고 겪게 된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미술을 하는 이유는 자유롭고자 함이고, 미술계의 근원 동력 또한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며 창조적인 사고와 행위에 있다. 그런 만큼 지금 여기 어느 미술인이, 어떤 동기와 목적 아래 활동을 하고,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에 대해 타인이 왈가왈부할 수 없다. 게다가 이 영역의 특성상 절대적으로 옳은 기준이나, 객관적으로 명석하게 판명한 가치판단, 보편적으로 동의할 도덕과 윤리라는 것도 설정하기 어렵다. 그러니 개인적 차원에서든 한국 사회 내 ‘미술계’라는 집단으로서든 무엇을 원하고, 말하고, 행하고, 외부에 내보이고, 스스로를 정립할 것인지는 결정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 모른다. 극단적인 예로, 어떤 작가가 작품을 팔아 큰 부를 축적했는데 더 악착같이 사적 이해득실에 몰두한다 해서 누구도 나무랄 수 없다. 한국미술 전체의 현재와 미래를 고려할 때 정말 올바르고 능력 있으며 그릇이 큰 인사가 필요한 자리에 악성 루머가 무성하고 일부에서는 패권 다툼이 일어난다 한들, 그래서 대외적으로 한국미술계의 질적 수준과 구성원의 가치가 의심받는다 한들 막을 도리도 명시적 근거도 없다.
그러나 우리, 이를테면 심리적으로 ‘미술계’라는 동일한 준거집단에 있고, 정도 차(差)는 있을망정 물리적으로 그 집단과 결부된 행위를 통해 살아가는 우리에게 우리를 둘러싼 사회 전체, 또는 현실의 여러 집단 및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할 것인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 관계란 특정 작품이나 전시, 미술 이론이나 비평이 사람들의 감각과 인식에 영향을 미치는 데서부터 미술계가 외부로부터 듣는 인정과 평판에 이르기까지 추상적이면서도 단순하다. 또 미술계의 관대함, 세련됨, 진보성, 혁신, 보편성 등에 기초해 한국의 문화행정과 예술경영 전략이 발전하는 데까지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무엇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금 우리의 미술계 활동과 처신, 미술인으로서 밖으로 드러내는 사고와 행위, 그리고 그 결과물은 사적 관심에 국한되지 않는 공공성과 정치학적 의식이 수반돼야 한다. 명문화된 공공성이 아니며, 직업 정치인의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2014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을 받은 장민승은 수상 소감으로 ‘세월호 참사’를 언급하며 우리의 집합적 기억회로에 비극적 온기를 불어넣었는데, 바로 그런 행위 속에 공공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 말들이 회자되는 데 미술의 정치학적 차원이 열렸어야 했다(어느 언론도, 어느 SNS 사용자도 정작 그 말을 전달하지 않았는데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사회의 미술에 대한 관심 범위, 소통의 정치학적 경로가 이렇게 편벽하다). 본심이라든지 마음 깊숙한 곳의 진정성에 기댄 공공성이 아니어도 좋다. 거짓의 공공성도 무방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잴 수 없고 나누기도 힘든 공공성보다 미술의 구조적 특성과 지각경험 가능성에 기초한 공공성이 정치학적으로 필요하다는 뜻이다. 정연두는 얼마 전 한 대기업이 주재한 소규모 세미나에서 자신의 최근 프로젝트 작품이 시각장애인을 사회적 약자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신체적 조건에 근거해 세계에 대한 독특한 이미지를 산출하는 존재임을 깨닫게(작가부터 그 장애인과의 관계를 통해 귀한 깨달음을 얻었던) 하는 장치라고 역설했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작가의 경험담에 흥미를 느꼈고, 부쩍 한국현대미술에 대한 후원 폭을 넓혀가고 있는 그 대기업의 관계자들 또한 그의 말과 작품에서 새삼 현대미술의 다양한 역할과 가치를 봤을 것이다. 그 맥락에서는 사회 참여적 미술의 진실을 의심하거나, 프로젝트에 관여한 장애인의 행위와 사고가 결국 작가의 것이 되는 모순을 지적하는 언변이 적절하지도 의미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바로 그런 작품과 함께, 또 작가의 실행력과 사후 의견에 공감하며, 사람들은 사회에서 피상적으로 작동하는 정치적 올바름을 넘어서 한 명의 미적 주체로서 누군가(장애인/비장애인이 아닌 바로 그/녀)의 세상 경험과 감수성을 수용해 나갈 것이다. 나는 이런 식의 순환, 이와 같은 새로운 관계와 의미의 작용이 미술이 구사할 수 있는 독특한 정치학이라 생각한다.
최근 4~5년 사이 한국 작가들과 이론가들이 부쩍 많이 참조한 니콜라 부리요의 관계의 미학(Relational Aesthetics)에서 관계는 인간들의 상호작용 및 예술과 현실의 사회적 맥락(context)을 뜻한다. 이는 19세기 말 이후 서구 아방가르드 예술이론에 비춰볼 때 혁신적인 논변이 아니다. 하지만 부리요는 1990년대 길릭, 티라바니자, 곤잘레스 토레스 같은 작가들이 전시를 “순간적인 공동체성이 만들어지는 특권적 장소”로 개방했다고 비평하고, 거기에 “현대예술의 아우라는 자유로운 연합”2이라는 미학적-정치학적 논설을 부가함으로써 당대 미술의 매력을 증강시킬 수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훨씬 더 나아가야 한다. 즉 한정된 작가, 특정 경향과 매너의 작품을 비평적으로, 전시 공학적으로 옹호하고 부각시켜 미술 내부를 다양화하는 관계미학에서 멈추지 않고, 여기 미술계 구성원의 의식이 현실 사회와의 정치학적 관계 속에서 새로 마름질되고 구축되는 장(場)을 열어야 한다. 장 뤽 고다르와 장 피에르 고랭이 1968년 ‘지가 베르토프 그룹(Groupe Dziga Vertov)’을 창설하면서 슬로건으로 삼은 말을 갖다 쓰자면, ‘문제는 정치적 미술[영화]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미술[영화]을 정치적으로 만드는 것이다.’3
강수미 동덕여대 교수

1 요하네스 페르메르 상 홈페이지 www.johannesvermeerprijs.nl
2 니꼴라 부리요, 현지연 역, 《관계의 미학》, 미진사, 2011, p.28. p.109.
3 Colin McCabe, 《Godard: Image, Sound, Politics》, Macmillan, 1980, p.19. 꺽쇠 안이 원문이다.

(위)장민승 <검은 나무여> 싱글 채널 흑백영상, 멀티 채널 사운드 약 25분 2014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만든 이 작품은 최소한의 단어 구성으로 감정을 절제한 시구를 수화로 번역해 팽목항에서 녹음된 사운드와 함께 하나의 추상적인 손짓으로 관람자에게 전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