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rtrait in Jazz 11 – 비극으로 장식한 장엄한 복고주의

1990년 뉴욕 존스 비치 극장. 그날 마지막 출연자로, 이제 삶을 대략 1년 밖에 남기지 않은 재즈계의 황제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가 무대 위에 오르자 음악팬들 그리고 그를 존경하는 뮤지션들은 무대 앞을 메우기 시작했다. 마일스는 힙합 비트에 록의 강렬한 디스토션 사운드를 깔고 그 위에서 즉흥연주를 시작했다. 그의 최신음악이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음악을 더 이상 재즈라고 칭하지 않았으며 단지 ‘흑인음악(Black Music)’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무대 뒤편. 야외로 이어진 코트에는 농구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한 청년이 그곳에서 홀로 집중하며 자유투를 연습 하고 있었다. 마일스보다 먼저 무대에 올랐던 이 스물아홉 살의 청년은 오로지 농구공을 림 안으로 넣는 것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를 본 한 기자가 물었다. 모두들 마일스의 새로운 음악을 궁금해 하는데 당신은 궁금하지 않으냐고. 그러자 이 청년, 윈턴 마살리스는 여전히 림만을 응시한 채 대답했다. “저런 음악엔 관심 없어요.”
마일스의 퓨전 음악에 대한 윈턴의 이러한 냉소는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이미 9년 전 약관 20세에 자신의 첫 음반을 발표하던 당시부터 이 당돌한 청년은 자신의 아버지뻘인 ‘살아있는 재즈의 역사’ 마일스 데이비스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 물론 마일스에 대한 비판은 그가 재즈-록으로 급선회한 1969년부터 동년배의 뮤지션, 평론가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재즈의 배신자로 모두들 마일스를 지목했다. 하지만 여전히 정력적이었던 마일스에 비해 인공호흡기를 차고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채 침상 위에 누워있는 ‘정통’ 재즈의 실상은 그들의 비판을 한낱 푸념 내지는 질투로 들리게 만들었다. 1970년대가 끝나갈 무렵 기존의 재즈는 더욱 노쇠했고 그래서 그 진영에서 이탈한 연주자들도 슬금슬금 전기 사운드와 펑크(funk) 비트를 빌려 쓸 수밖에 없었으며 더욱이 그들이 일제히 비난하던 마일스가 건강상의 문제로 일선에서 종적을 감추자 퓨전에 대한 비판은 기력도, 상대방도 모두 잃은 상태였다.
하지만 퓨전과 전통주의의 격돌은 재점화되었다. 1981년 마일스가 5년 만에 재즈계로 복귀했을 때 그 반대편의 대변인은 자신을 “위대한 전통에서 왔다”고 천명한 샛별 윈턴이었다. 그는 하드밥의 ‘사관학교’였던 아트 블레이키(Art Blakey)의 재즈 메신저스에서 이미 두각을 나타냈으며, 퓨전과 정통을 오가며 활동하던 허비 핸콕(Herbie Hancock)은 자신의 어쿠스틱 사중주단에서 윈턴을 간판 주자로 내세웠다. 윈턴은 최근 10여 년간 사람들에게 들려지던 재즈는 모두 사기며 가짜라고 말하면서 아방가르드 재즈와 퓨전재즈를 모두 재즈의 영토에서 몰아낼 것을 주장했다. 동시에 그는 세기가 바뀔 무렵 뉴올리언스에서 시작된 초기 재즈에서부터 1950년대 후반까지의 역사를 재즈의 본령으로 삼고 그 전통을 되살리자는 ‘왕정복고운동’(재즈 평론가 뤼시엥 말송의 표현)을 전개했다. 이 느닷없는 복고주의는 그의 빛나는 재능을 통해 설득력을 얻었다. 1984년 그는 관현악이 함께한 발라드 음반〈 환락가의 꽃들 (Hot House Flowers)〉(컬럼비아)과 레이먼드 레퍼드가 지휘하는 내셔널 필하모닉과 함께 하이든 트럼펫 협주곡(CBS 마스터워크스)을 동시에 발표해 클래시컬과 재즈 양 부문에서 한꺼번에 그래미를 손에 쥐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세움으로써 자신의 전통주의에 강력한 권위를 부여했다.
특히 과거의 스탠더드 넘버만 연주한다는 세간의 비판(그 대표적인 논객은 피아니스트 키스 자렛(Keith Jarrett)이었다)에 대한 응답으로 자신의 오리지널 작품만으로 채운〈 장엄한 블루스〉는 뉴올리언스의 전통적인 장례음악을 끌어와 퓨전음악의 재즈에 대한 시해(弑害)를 알렸던 장송곡 <재즈의 죽음 (The Death of Jazz)>을 통해 전통주의의 논리를 비극적으로 연출했으며 음반표지에는 앙리 마티스의 연작〈 재즈〉중의 대표작인 <이카루스>를 실어 속절없이 추락하는 재즈의 비운을 상징했다.
이 비극은 영리한 연출이었다. 이미 윈턴은 자신의 열렬한 추종자들을 이끌고 있었으며 이때 성장한 소위 ‘영 라이언’(주로 1960~70년대 출생한 전통주의 재즈 뮤지션)들은 적어도 20세기가 저물 때까지 20년간 재즈계를 지배했다. 하지만 이제 중년이 된 이들은 전 세기의 지위를 잃은 채 다양한 재즈 분파의 하나로 물러났다. 이 복고왕정을 퇴위시킨 것은 더욱 냉혹해진 21세기 재즈의 상업주의였다. 그러니까 진짜 비극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황덕호 재즈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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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턴 마살리스
<장엄한 블루스 The Majesty of the Blues> (Columbia/ CK45091)
윈턴 마살리스 6중주단: 윈턴 마살리스(트럼펫), 토드 윌리엄스 (소프라노, 테너 색소폰), 웨스 앤더슨(알토 색소폰), 마커스 로버스(피아노), 레지널드 빌(베이스), 헐린 라일리(드럼)/ 게스트 뮤지션: 테드 라일리(트럼펫), 프레디 론조(트롬본), 마이클 화이트(클라리넷), 대니 바커(벤조) 1988년 녹음

[반이정 미술비평] 2009년. 동조성과 성역에 갇힌 비평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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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순택  2009

노순택 <그날의 남일당> 2009

 

여기 사람이 있다.

2009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 사고 가운데에는 부조리한 갑을관계나 비평과 언론이 제 기능을 상실해서 초래한 재난이 많았다. 재개발 문제가 낳은 용산 참사, 성상납을 폭로한 여성 연기자 장자연 씨의 자살, (2014년 현재까지 20명 넘는 연쇄 자살을 낳은) 쌍용차 평택공장 정리해고, MBC 뉴스데스크 앵커 신경민의 하차,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등이 모두 그렇다. 이명박 정부는 100일 이상 지속된 도심 촛불집회로 부담을 안은 채 집권 첫해를 보냈다. 이듬해 1월20일 출근 시간대,
재개발 사업 문제로 정부와 대치하던 철거민 시위자들이 상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 특공대 과잉 진압과정에서 철거민들이 점거 농성하던 망루에 불이 붙어서 철거민 5명과 경찰 특공대원 1명이 불에 타서 사망한 것이다. 당소 사고를 중계하던 인터넷 방송 진행자는 “어, 어, 저기 사람이 있어요!”라고 외쳤다.
참사 직후 남일당 건물 주변을 점거한 유가족과 시민운동가들이 경찰과 대치하며 한 해가 지나가는 사이 언론과 정치비평은 제 기능을 할 수 없었다. 장례가 무기한 연기되면서 희생자들의 시신을 병원에 안치하는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 소식을 접한 파견 미술가 이윤엽은 사고 당시 방송 진행자가 외친 ‘저기 사람이 있어요!’를 차용해서 <여기 사람이 있다>는 제목을 단 목판화1 두 점을 제작해서 팔았다. 기금 마련을 위해 한 점당 3만 원에 총 6백점을 내놓았는데 판화는 3일 동안 모두 판매되어 시신 안치 비용으로 쓰였다. 정상 기능을 상실한 언론과 정치 비평은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없었다.

비평가들의 그룹 전시회

볼거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시각정보를 해독하는 미술비평은 침묵하는 대상에게 해석을 달아주는 점에서, 시인 김춘수가 <꽃>에서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무엇을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로 만드는 이름 불러주기에 비유할 만하다. 말 없는 대상에게 말을 건네는 비평의 재능은 견제 받지않는 권한이기 쉽고 따라서 무분별하게 남용될 수도 있다. 비평이 지니는 고유한 역할 때문에 화단에서 작가와 비평가는 공생관계를 표방하지만 비평가에게서 작가로 향하는 일방향성이 훨씬 강하다. 공식적인 관계에서 작가와 비평가는 논평의 대상과 주체로 나뉘어 만난다. 비평가가 논평 대상이 되는 때는 ‘비평의 위기’ 같은 익숙한 화두가 논제로 떠오를 때에 국한되는데, 이때마저 이 주제를 논하는 주체는 바로 비평가들이다. “(출품작가) 10명 중 반이정을 제외한 9인은 대학에서 미술 실기를 전공했다. 이건 한국 미술계의 기반이 얼마나 취약한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전의 미술비평들이 이해불가한 비문과 비약으로 채워진 경우가 적지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김민경 기자.《 주간동아》 678호)
《 주간동아》가 리뷰로 다룬 일민미술관의 기획 그룹전《 비평의 지평》은 현장에서 활동하는 미술비평가와 기획자 10인(강수미 류병학 고충환 반이정 장동광 최금수 서진석 임근준 유진상 심상용)을 작품 출품자로 초대한 역발상 기획물이다. 참신한 발상의 전시였지만, 큰 화제가 되진 않았다. 출품작의 평균적인 완성도 때문일 수도 있고, 이론과잉으로 치달은 평균적 기성 비평의 경직된 인상 때문일 수도 있으리라. 진정성을 상실한 레토릭이 된 ‘비평위기’의 원인으로 조직 동조성의 반복을 지목할 수 있다. 소속된 조직과 조화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일치시키려는 경향이 동조성이다. 규범을 따름으로써 자신의 소속감을 확인시키는 거다. 의복 동조성(Clothing Conformity)이란 조직 생활의 심리적 압박이 의복을 통해 표출되는 현상인데, 비평가 집단의 동조성은 평균적인 비평의 문체와 어투를 따라 하는 것으로 실행되곤 한다.
“《 프리즈 Freeze》의 기사들은 전체적으로 직접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미술전문용어를 피하며, 미술사적 지식이나 이론적 배경 없이도 이해할 수 있게 쉽게 쓰인 것이 특징이자 목표다. (중략) 최근 미술사가 이론과 결합하여, 정신분석학·(후기)구조주의 분석학·해체학 등을 통해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그다지 반갑지 않다. 특히 작품을 보지도 않고 작가의 정신분석에 임하는 일이나, 또 이론을 제대로 읽지 않고 어설픈 방법으로 분석을 모 방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작가들마저 이론에 작품을 맞추는 경향이 강한데, 이는 그들의 작품세계를 제한하는 일이라고 본다.” (제임스 로버츠《 프리즈》 편집장 인터뷰《 월간미술》 2001년 4월)
“또한 비평이 자칫 공허한 이론의 언설에 빠질 수 있는 미학을 좀 더 현실 속에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미학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어떠한 이론적인 잣대로 무장하기보다 숨겨진 진주를 찾을 수 있는 비평가의 직관이 필요하다고 본다.” (유근택《 월간미술》 특집 ‘작가가 본 미술비평’ 2003년 2월)
“어떤 진술은 내 작업을 너무 거창하게 포스트모던 빅 뉴스에 몰아넣어서, 작업에 깃들인 실제 내면 풍경이 지워지기도 하였다. 그럴때 작업이나 작품은 ‘선험적’ 이론들을 입증하는 사물에 지나지 않게 되고, 급기야 지워지기 까지 한다. 어떤 비평가는 ‘안목’이 없다. 부지런히 터득한 지식과 이론으로 작품과 작업과 미술판을 줄줄 엮어 나가기는 하는데, 도무지 속 없다. 모던 혹은 포스트모던 포장지로 멋지게 말아놓기는 했는데, 풀어 보니 빈 곽 안에 물음표밖에 없는 꼴. 듣기 싫겠지만, 옛적 문인 화론에서 하던 말을 빌리면, ‘기운생동(氣韻生動)’하지 않는다는 말.” (김학량 《 월간미술》 특집 ‘작가가 본 미술비평’ 2003년 2월)
어설픈 학식을 드러내기 위해 기성 비평이 범하는 잦은 개념적 오류나 불투명한 글귀를 둘러싼 주변의 지적과 내부의 자성에도 불구하고, 개선이 더딘 이유는 비평문화의 동조성 때문일 것이다. 현대미술이 다른 예술 장르에 비해 훨씬 고상한 담론을 담보한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하지만 대중예술과 견주어 전문 영역이 강한 건 분명할 게다. 바로 이 점이 비문과 허세에 찬 지식을 남발하게 만든다.

슈퍼스타K. 독설의 중독성

<슈퍼스타K>2는 케이블 채널 Mnet이 제작한 국내 최초의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2009년 7월 첫 방송을 타고 그해 마지막 방송 전국 시청률이 8.4%까지 치솟았다. 예상 못한 시청률 덕에 매년 시즌을 이어가며 스테디셀러로 자리를 굳혔다. “슈퍼스타K는 14.6%라는 케이블 채널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경이로운 시청률”을 기록했고 이로 인해 “그 뒤 우후죽순 오디션 프로그램이 생겨났다. 오디션 프로그램에 소극적이던 공중파 방송도 앞을 다투어 경쟁에 합류했다.”고 언론은 평가한다(고재열 기자《 시사인》230호). 대중 엔터테인먼트의 심사위원들이 보인 자세로부터 기성 비평의 빈틈 두 가지를 읽을 수 있다. 하나는 독설에 대한 사유이고, 다른 하나는 인품에 대한 자성이다.
숨은 신예의 발굴이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본래 취지보다 오디션 방송에서 큰 볼거리를 만드는 건 심사위원의 거침없는 독설이다. “최악인데?” “할 말이 없다.” “이건 시작에 불과해요.” 심사위원 이승철이 미숙한 도전자들에게 날린 직설화술의 일부를 인용하면 이렇다. 도전자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심사위원의 독설에 시청자가 열광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까? 폐부를 찌르는 비평이 실종된 시대에 비평의 드라마성을 엔터테인먼트와 결합시켰기 때문에 중독성이 강한 걸 테다. 기성미술비평이 이같이 중독성 강한 독설을 본받아야 하는 건 아닐 거다. 그렇지만 완곡 화법에 길들어져 야성을 상실한 점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할 거다. 한국 근대기 미술평론가 김복진은 제4회 조선미전에 관해 쓴 평문《( 개벽》1926년 6월)에서 동양화가 노수현의 출품작 <일완>을 평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칭찬이 아닌 평문은 쓰지 않는 게 좋다’고 일본 어떤 문인은 말하였다마는 나는 뒤바꾸어 욕이 아닌 비평을 쓸 까닭이 없다고 한다. 칭찬하려면 쓸 것도 없이 입만 딱 닫는 것이 제일 날 것이 아니냐.”
한편 후속 오디션 프로그램에 가세한 SBS 의 심사위원 가수 보아가 밝힌 심사기준은 놀랍게도 인성(人性)이다. 보아가 인성을 심사 기준으로 댄 이유는 “인성은 한 사람의 기본이고 인성에 따라 앞으로 미래에 대한 의지나 노력, 가능성도 좌지우지된다고 생각한다.”란다. 미학을 윤리학과 연관시킨 거다. 이는 예술가보다 비평가에게 더 요청되는 기준일 것이다. 직업을 불문하고 개인이 내놓은 성과물은 결국 그 개인으로 구성된다. 개인이 성과를 만들고 성과는 개인을 이룬다. 특히 성과물을 ‘언어’로 내놓는 직종이라면 성과물과 인성 사이의 연관성은 더 깊으리라. 허구적 이야기꾼이 아닌 사실의 언어로 기술하고 평가하고 판단하는 비평가라면 그의 성품은 더욱 투명하게 글에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 이해관계에 종속된 비평은 평가절하된 자신의 인품을 투영하고야 만다. 비평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윤리를 실천한 귀감을 선대에서 쉽게 찾을 수 있을까?

2009년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에 출품된 필자의 작품

2009년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비평의 지평전>에 출품된 필자의 작품

선배 비평가라는 성역

“사실 미술비평은 그 출생 이후 언제나 주어진 사회의 존속에 관여하는 세력의 부산물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담당하는 자들은 그 세력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보조를 받고 그러한 세력 을 방조하는 무리에 지나지 않았다.” 아놀드 하우저의 극단적 자조 문구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미술과 미술비평의 체질은 상류문화를 지향한다. 그 안에 몸담고 있는 사람의 체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한국사회라면 그 비중은 실로 크다.
2009년 11월 26일. 미술평론가 석남 이경성 선생이 미국에서 타계했다. 한국 1세대 미술평론가라는 상징성만큼 이경성은 그가 남긴 평문보다 그가 두루 역임한 무수한 문화계 요직들로 인해 성역시되는 면이 분명히 있다. 무수한 요직과 더불어 현역으로 활동하는 또 다른 1세대 비평가가 있다. 2010년 2월 문화체육 관광방송통신위원회 국회 업무보고 자리에 2명의 문예위원장이 나타나는 바람에 업무보고가 연기되었다. 문화부(유인촌 장관)에 의해 해임된 김정헌 전임 위원장이 해임무효확인 청구소송 1심에서 승소해서 국회에 나타나 오광수 위원장과 나란히 앉은 것이다. 김정헌 전임 위원장의 소송 건에 대해 이후 2심 승소에 이어 2010년 대법원도 “해임처분을 취소하라”는 원심을 확정한다. 전임 위원장의 해임이 부당했다는 1,2심과 대법원이 판단한 사건의 진위를 비평가 출신 오광수는 후임에 위촉되기 전에 공감할 수 없었을까?
1세대 미술평론가 오광수 위원장이 논란 속에 퇴출된 자리에 재위촉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8년 민중미술 이론가 배경이 있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장 최민이 광주비엔날레 전시총감독 자리에서 전격 해촉되어 미술계 안팎에서 비난이 일 때도, 후임 총감독에 위촉된 바 있다. 나이주의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원로라는 신분은 견제와 비난으로부터 무한히 자유롭다. 비평의 위기는 견제받지않는 위치에 있을 때 현실이 된다. 비평에 위아래를 두려는 자세는 비평의 직업정신과도 상호 모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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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폰, 국내 지각 출시

11월 28일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아이폰 론칭쇼’3에 예약 고객들이 줄을 섰다. 출시 전 예약자만 4만~6만 명에 달했고, 예약 사이트가 마비될 만큼 소비자가 몰렸다. 출시 3일 동안 4만 대 가까운 판매 실적을 올렸는데, 이는 출시 후 한 달간 7만 대를 판매한 경쟁사 삼성의 옴니아 II를 훨씬 앞서는 수치다. 컴퓨터 회사 애플이 내놓은 첫 휴대전화 아이폰은 2007년 1월 처음 출시되었지만, 이동통신사의 지배구조가 강한 한국에서는 데이터 통신 수입 감소를 우려한 이동통신사(KT)와 애플 사이의 협상이 지연되면서 “다음 달에는 꼭 출시된다.”는 헛소문이 돌고 이로 인해 ‘담달폰’이라는 오명을 안은 채 1년 10개월 만에 지각 출시되었다. 하지만 아이폰의 국내 출시는 완전한 경쟁시장에서 구도를 바꿔놓았다. 아이폰 국내 출시를 앞두고 삼성의 옴니아 II는 가격을 반토막 냈고, 경쟁사 SK텔레콤은 가입비 30% 절감을 발표했다. 견제받지 않는 미디어도 망한다.

연말. 이재용 김정은의 후계구도

이명박 정부는 12월 31일자로 이건희 전 삼성 그룹 회장의 단독 특별사면을 심의 의결한다고 발표한다. 이에 앞서 12월 5일 삼성은 사장단 회의에서 이건희 회장의 아들 이재용 전무를 삼성전자 부사장으로 승진시켜 핵심 요직인 최고운영책임자(COO)를 맡겼다. 이번 인사로 승진한 10명의 다른 사장 평균 연령이 50대 초반인 점도 이재용 후계구도를 위한 포석으로 해석되었다. 같은 해 12월 2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아들 김정은의 생일을 ‘국가적 명절’로 지정하고 경축한다는 내부 지시를 전당과 전군에 내려 보낸 북한은 이미 김정은의 후계 사실을 그해 중순께 당·군·정에 공식 통보했고 해외 공관에도 통보했다. 남과 북에서 같은 시기에 이행된 후계구도는 내용은 달라도 같은 형식으로 반복되었다. 견제받지 못할 때, 당사자가 위기를 의식하지 못할 때, 위기의 폐해가 당사자보다 공동체와 연결될 때, 위기는 이미 한창 진행 중인 거다. ●

 

[section_title]2009 시대상[/section_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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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김대중 서거

박연차 정관계 로비 사건을 수사하던 검찰이 전직 대통령 노무현까지 소환조사하기에 이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더 이상 노무현은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미 민주주의, 진보, 정의, 이런 말을 할 자격을 잃어버렸습니다. 저는 이미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수렁에 함께 빠져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라는 글을 올리고 1달이 지난 5월 23일 투신자살한다. 정부의 반대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서 추도사를 할 수 없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7월 입원하여 투병 끝에 8월 18일 사망한다. 그리하여 지난 10년의 짧은 정권 교체의 상징적 인물 둘이 연달아 세상을 등졌다. 세상의 변화는 이렇게 체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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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연 성상납 폭로 자살

여배우 장자연의 자살은 연예계의 낡은 관행인 갑을관계의 악용을 보여준다. 성상납을 요구받았다고 밝힌 이른바 장자연 문건은 국회대정부질문에서 이종걸 민주당 의원에 의해 “장자연 문건에 따르면 ‘당시 《조선일보》 방사장을 술자리를 만들어 모셨고, 그 후로 며칠 뒤에 《스포츠조선》 방사장이 방문했습니다’라는 글귀가 있다. 보고 받았냐”고 되물어 공론화되었다. 경찰청의 중간 수사결과 발표에도 《조선일보》 고위 임원, 《조선일보》 고위임원 아들, 인터넷 언론사 대표가 수사 대상자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문건에 명시된 인물들이 처벌받은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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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확정 발표

1월15일 문화예술인 신년인사회에서 “종로구 1월 15일 문화예술인 신년인사회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종로구 소격동 국군기무사령부 부지를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2011년 1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전문가 설명회’에서 있었던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서울관의 기본 계획이 수립된 건 2006년 11월이다. 2012년 완공 예정이라는 문화부의 당초 발표와는 달리 사망자 4명을 포함해 20명이 넘는 사상자를 낸 대형화재 사고 등의 악재가 끼면서 서울관은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2013년 말에 개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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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민의 마지막 클로징 멘트

인지도와 경력에 가려 엄기영을 한국 최상의 앵커인줄 믿고 살았다. 신경민 앵커가 브라운관에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뉴스가 끝나는 순간 남기는 클로징 멘트로 유명세를 탄 신경민 앵커는 이명박 정부와 MBC 모두에 부담이 되었다. 앵커에서 하차한 후 그는 2012년 민주통합당 대변인으로 변신해야 했다. 2009년 4월 13일 신경민 앵커의 마지막 클로징 멘트는 이렇다. “회사 결정에 따라서 저는 오늘자로 물러납니다. 지난 1년여 제가 지닌 원칙은 자유, 민주, 힘에 대한 견제, 약자 배려 그리고 안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언론의 비판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서 답답하고 암울했습니다. 구석구석과 매일매일 문제가 도사리고 있어 밝은 메시지를 전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희망을 품은 내일이 언젠가 올 것을 믿습니다. 할 말은 많지만 저의 클로징 멘트를 여기로 클로징하겠습니다.”

유러피안 재즈의 독립선언문

황덕호│재즈 칼럼니스트

에버하르트 베버 〈클로에의 색깔(The Colours of Chloë)〉 (ECM 1042)

에버하르트 베버
〈클로에의 색깔(The Colours of Chloë)〉 (ECM 1042)

전기 사운드와 록 비트가 뒤섞인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의 1969년 문제작 <마녀들의 연금술 (Bitches Brew)>이 거의 완성되자 프로듀서 티오 마세로(Teo Macero)는 그때까지 마일스에게 대단히 우호적이었던 평론가 랠프 글리즌에게 홍보용 테이프를 들려주었다. 음악을 듣고 글리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재즈가 죽었다는 것은 이제 분명하군요. 바로 당신 같은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은 단지 글리즌만의 느낌은 아니었다. 기존의 재즈팬은 재즈의 아이콘이던 마일스의 변모에 적지 않게 당황했으며 서슴없이 재즈의 죽음을 이야기했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말대로 그것은 음악에서 벌어진 친부살해였다. “아들인 록이 아버지인 재즈를 살해한 것이다.”

하지만 <마녀들의 연금술>에 대한 글리즌의 반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이미 록과 솔(soul) 음악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었고 1967년부터 그가 주관해오던 몬터레이 재즈 페스티벌에 블루스, 록, 소울 음악인들을 초대하고 있었다. 글리즌의 취향 변화는 그의 세대(1917년생) 안에서는 그리 흔한 것이 아니었다(이러한 취향 변화로 그는 몬터레이 페스티벌의 공동 설립자인 지미 라이언스 (Jimmy Lyons)와 갈등을 빚었다). 사조의 흐름에 민감했던 글리즌은 아들 세대(1940년대 생)의 취향으로 옮겨갔으며 그가 라이너노트(음반 안에 삽입된 해설문)를 쓴 마일스의 <마녀들의 연금술>은 단번에 50만 장이 팔려나갔다. 이는 재즈음반으로서 전무했던 기록이었다.
그런데 재즈의 이러한 변화를 진정으로 기쁘게 바라본 것은 예상 외로 유럽의 재즈뮤지션이었다. 1930년대부터 자생적인 재즈 음악인을 배출하기 시작한 유럽은 1960년대가 저물 때까지 어떻게 하면 아프리카계 미국 음악인들처럼 연주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블루스와 스윙의 느낌을 제대로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1950년대 말 모든 형식을 거부한 프리재즈가 등장하고 10년 뒤에는 재즈가 다른 음악들과 뒤섞이게 되자 유럽 재즈 음악인들은 재즈가 기존의 단일한 모습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들은 재즈를 위한 다른 재료들을 찾기 시작했다. 색소폰 주자 얀 가바렉(Jan Garbarek)의 말대로 자신들은 블루스를 제대로 연주 할 수 없었기에 자신들만의 음악적 전통을 찾아 나섰다. 그러한 흐름을 가장 예민하게 포착한 프로듀서 만프레드 아이어(Manfred Eicher)는 1969년 독일 뮌헨에 자신의 음반사 ECM을 설립했다.
슈투트가르트 태생의 베이스 주자 에버하르트 베버는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미국 재즈의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1973년 ECM 레이블을 통해 자신의 첫 음반 <클로에의 색깔 (The Colours of Chloë)>을 발표했을 때 그 음악은 미국 재즈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독특한 색채를 지녔다. 그것은 유러피언 재즈의 완성된 독립선언문이었다. 과거에는 정통 비바퍼(bebopper)였지만 새로운 음악을 찾아 일본을 경유해 독일로 들어온 색소폰 주자 찰리 마리아노(Charlie Mariano)를 영입해 1975년에 결성한 베버의 그룹 컬러즈는 1977년 작 <조용한 발>을 통해 그 선언문의 마지막 구두점을 찍었다. 이제 재즈는 연기 자욱한 음습한 지하클럽에서 나와 넓은 지평선의 대지 위로 나왔고 널따랗게 펼쳐진 음의 여백은 그 대지를 감싼 하늘같았다. 재즈는 이제 한 폭의 수채화가 되었고 에버하르트의 아내 마야 베버(Maja Weber)가 늘 그렸던 커버 그림들은 이를 시각적으로 구현해주었다. 그것은 유럽이라는 지역의 감수성이자 당시 프로그레시브 록을 통해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한 세대의 감수성이었다.
베버는 지난 2007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현재 연주 일선에서 물러나 있다. 그래서 2012년에 발표된 베버의 최근작 <이력서(Resume)>는 1990년부터 2007년까지의 실황녹음들을 모아 놨는데 부클릿에는 마야가 그린 몇 점의 그림과 함께 그녀가 2011년 세상을 떠났음을 전하고 있다. 영원히 젊었던 베이비부머 세대 혹은 68세대가 어느덧 작별의 인사를 건네고 있다. ●

[재즈의 초상] 마일스의 마지막 연대기를 여는 자화상

contents 2014.2. portrait in jazz 9 | 마일스의 마지막 연대기를 여는 자화상
황덕호│재즈 칼럼니스트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는 1952년, 그러니까 그의 나이 26세 때를 회고하면서 당시 “나도 이제 늙은이가 된 것이 아닌가?”하고 느꼈다고 했다. 그만큼 당시 뉴욕의 재즈동네는 치열한 경쟁의 격전장이었다. 하루가 멀다고 탁월한 기량의 신예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사조는 빠르게 변해갔다. 여기에 당시 미국의 예술계에 범람했던 약물은 재즈 음악인들을 깊은 수렁에 빠뜨리고 있었다. 마일스의 선배 혹은 동료였던 찰리 파커(Charlie Parker)와 버드 파월(Bud Powell)은 이미 헤로인 중독으로 젊은 나이에 전성기에서 가파르게 내려오고 있었으니까.
그런 와중에서도 마일스는 당시 가장 창의적인 젊은 연주자였고 끊임없이 지속되었던 그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재즈의 변천사 그 자체였다. 이미 1940년대 후반 9중주 편성으로 쿨 사운드의 원형을 만들어냈던 그는 1955년 그가 구사하는 트럼펫의 시적인 절제미와 논리적이면서도 들끓는 에너지를 지닌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의 테너 색소폰을 대칭시킨 자신의 첫 5중주단을 결성했고 이후에 피아니스트 빌 에번스(Bill Evans)와 교감을 통해 모드(mode)를 통한 즉흥연주를 추구했다. 1960년대 중반 웨인 쇼터(Wayne Shorter), 허비 핸콕(Herbie Hancock), 론 카터(Ron Carter), 토니 윌리엄스(Tony
Williams)와 가장 진취적인 즉흥연주의 5중주단을 결성했던 그는 1960년대 말 전기 사운드와 록 비트를 전폭적으로 끌어들인 퓨전 사운드로 재즈의 방향을 급선회시켰다. 그는 좋았던 과거 시절에 대한 회상에 빠지는 것을 싫어했으며 늘 최전선에 있기를 원했고 그래서 새롭고 젊은 음악에 탐닉했다
하지만 1975년, 마흔 아홉의 나이에 그는 자신이 이미 중년을 훌쩍 넘겼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젊은 음악팬들은 자신보다 허비 핸콕의 음악에 더 열광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으며 재즈계의 경쟁에서 늘 앞서가야 한다는, 더 나아가서는 록과 소울의 태풍 속에서 재즈 음악인으로서 생존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그로 하여금 점차 더 알코올과 약물에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위궤양과 폐렴, 불면증 여기에 엉덩이뼈의 습관적인 탈골은 중년의 마일스를 위기 상태로 몰고 갔으며 전처 아이린은 자녀 양육 문제로 마일스에게 거액의 소송을 제기했다. 1975년 여름 순회공연 중 마일스는 결국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음악 활동을 멈추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그는 자신이 음악을 다시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아무런 확신이 없었다.
은퇴 시기 마일스의 삶은 더 깊은 어둠으로 빠져들었다. 기존의 거의 모든 사람들과의 연락을 끊었으며 알코올과 약물에 대한 의존, 무절제한 성생활은 더욱 심각해졌다. 그러던 중에 시슬리 타이슨(Cicely Tyson)이라는 새로운 여인이 마일스를 돌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일스의 모든 악습을 끊게 만들었고 그에게 그림을 그려보라고 권유했다. 음악계로 복귀하기 전 마일스는 하루 종일 즉흥적인 스케치에 탐닉했으며 시슬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림은 내 인생의 마지막 중독이야.”
그러한 칩거에도 불구하고 재즈계가 마일스를 그냥 놔둘 리 없었다. 1978년부터 컬럼비아 레코드의 재즈 부서장 조지 버틀러(George Butler)는 마일스를 끈질기게, 하지만 조심스럽게 설득했고 결국 심신의 병마에서 벗어난 마일스는 6년의 공백을 깨고 1981년 음악계에 복귀했다. 당시 마일스는 탁월한 드러머 앨 포스터(Al Foster)와 기민하게 반응하는 퍼커셔니스트 미노 시넬루(Mino Cinelu)를 통해 입체적인 리듬파트를 만들었고 그 위에 악곡 전체를 역동적으로 해석해 내는 베이시스트 마커스 밀러(Marcus Miller), 여기에 깊은 블루스를 연주할 줄 아는 두 기타리스트 존 스코필드(John Scofield)와 마이크 스턴(Mike Stern)을 배치함으로써 그의 음악인생의 마지막 장(章)을 향한 시동을 걸었다. 비록 음반에서는 그 존재감이 축소되었지만 늘 그렇듯이 그의 트럼펫과 대조를 이룰 수 있는 탁월한 색소포니스트 빌 에번스(피아니스트와는 동명이인)가 필요했던 것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복귀 후 세 번째 음반인 <스타피플>은 어두운 터널을 뚫고 나온 그의 흔적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거칠게 스케치한 그의 그림이 자화상처럼 표지를 장식했다. 열거한 이름들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마일스 밴드의 멤버들은 현재 재즈계의 중심인물로 활동하고 있으며 당연히 이 천재가 남긴 유산 속에서 보물을 찾아내고자 고군 분투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