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FACE 2015 유한숙

“유한숙 작가는 이를 진지하지만 심각하지 않게, 유머러스한 텍스트와 이미지를 병치한 작품으로 승화시키며 “나만 좌절하고 불안한 건 아니잖아요?”라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동의를 구하고 있다.”
– 김윤영 큐레이터

내겐 너무 뒤늦은 그 말

한 여성의 뒷모습이 보인다. 뒷모습의 그녀와 너무나 닮은 한 여인이 마주보고 서서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그리고 그들 위에 한마디 글귀가 떠오른다. “그래 넌 성공하겠다.” 또 다른 여인이 있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에서는 눈물이 도로로 흐르는 순정만화의 여주인공 같은 모습이다. 그녀의 머리 위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한마디의 말이 적혀 있다. “아마 난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말 거야.”
작가 유한숙의 작품은 허를 찌르는 사회 풍자적 한마디와 만화적인 인물 표현, 그리고 어린 시절 학교에서 한번쯤 그려봤을 ‘포스터’형식을 차용해 어수룩한 매력을 뽐낸다. 누군가에게는 공감 가는 한마디로 작용하고, 또 다른 이에게는 일상 속 흘러가는 뻔한 이야기로 보일 수 있다. 그녀의 그림에 등장하는 텍스트의 의미는 세대의 공감을 자아내는 힘을 갖는다. 텍스트에 얽힌 스토리와 무관하게 말은 무겁지 않게 다가온다. 누구나 일상에서 쉽게 내뱉는 어구와 포스터 형식 덕분일 것이다. 작가가 처음부터 포스터를 차용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려던 것은 아니다. 유한숙은 작업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고민했다. 오히려 하지 말아야 한다고 쉬쉬하는 것을 해보고 싶은 청개구리 심보가 발동한 셈이다. “만화의 형식을 취하지 말라”는 한 교수님의 조언은 지극히 만화요소가 다분한 인물 표현과 그의 눈에 욕설을 적은 ‘개년미술’작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인물의 눈동자 안에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담기에는 자리가 부족했다. 보다 긴 텍스트 표현이 가능한 포스터 형식을 택한 이유다.
유한숙은 말수가 적다. 목소리도 작고 유난히 차분하다. 그렇다보니 누군가를 만났을 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채 다 풀어내지 못하고 뒤돌아서서 상황을 되새기며 전했어야 하는 말, 하고 싶었던 말을 떠올리며 아쉬워했다. 뒤늦게 떠오른 적절한 표현이 그의 작업에 등장한다. 지인들과의 대화, 인터넷상의 끊없는 대화와 발언 등 일상 속 매 순간 쏟아지는 말들이 그에게는 윌리엄 텔의 화살처럼 대뇌에 꽂혀 잊히지 않는다.
사실 그녀가 적은 가볍지만 풍자적인 문장은 SNS를 뜨겁게 달구며 최근 책으로도 출간된 하상욱의 《서울 시》나 최대호의 《읽어보시집》을 떠올리게 한다. 트위터라는 공간에 두어 줄의 짧은 시를 써 많은 이에게 공감과 웃음을 주는 이들 시의 형식은 문학적 수사가 아름답거나 표현력이 뛰어난 일반적인 시와는 미감이 다르다. 생활 속 툭툭 내뱉는 말을 짧게 압축해 적어 둔 “일상의 말”을 하나의 주제로 묶는 식이다. 이 키치한 방식의 글은 유한숙의 어수룩한 포스터와 묘하게 일치하는 점이 있다. SNS상에서는 무겁고 긴 글 보다는 싫지만 단순하면서도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무릎을 탁 치며 공감할 만한 내용이 환영 받는다. 포스터는 최고의 프로파간다 수단이다. 이미지와 텍스트가 하나의 캔버스에 압축돼 메시지를 전달한다. 한눈에 내용을 알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한번 보면 쉽게 잊히지 않는 “강렬한 한 방”이 필요하다. 유한숙의 작업은 단순히 그 세대가 공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유사한 문화를 공유하는 많은 이에게 공감을 사는 요소가 있어 주목받고 응원을 받고 있는 듯하다.
전시장에 걸린 그녀의 작업은 생각 많은 작가의 복잡한 머릿속을 살펴본다는 관음증적 자극을 준다. 하지만 일방적 선언이라기보다 대화를 시도한다. 심각한 내용을 가볍게 표현한 방식은 전시장에서는 실소를 자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돌아서서 한참이 지나도 이미지와 텍스트가 머릿속에 맴돈다. 관객과의 간접적인 대화를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하지 말아야 할 것”에서 공감을 찾아낸 작가는 최근 고민이 깊어졌다. 주변에서 만류하던 형식을 취해 하던 작업을 오래하다보니 작업의 형식이 반복되기 시작한 것이다. 과연 또 다른 금기를 찾아낸 작업으로 공감을 자아낼 수 있을까. 말을 곱씹는 작가의 머리에는 오늘도 수많은 말과 고민이 스치운다.
임승현 기자

유한숙은 1982년 태어났다. 서울과학기술대 조형예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2012년 조선화랑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총 3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2월 27일부터 6월 5일까지 하이트컬렉션에서 열리는 〈두렵지만 황홀한전〉에 참여한다.

〈시집이나 갈까〉 캔버스에 아크릴 60×60cm 2012

〈시집이나 갈까〉 캔버스에 아크릴 60×60cm 2012

 

NEW FACE 2015 이은새

“이은새는 프레임(인식의 창) 밖에서 일어나는 현실적 풍경을 대하고 자신만의 감각적 레이어로 그 현상들을 쪼개어 파장이 증폭되는 순간들을 포착해낸다. 일상에서 다양한 층위로 몸을 이동하듯 일렁이는 현상을 목격한다. 다른 회화 작가들의 장면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긴 하지만, 그런 상황을 만들어내는 풍경은 쉽게 번역될 수 없고 예측할 수도 없는 연속성을 띤다.”
– 이관훈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큐레이터

불안정한 순간의 기록

작가 이은새의 회화는 뚜렷한 내러티브가 있는 것도 아니고 분명한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유난히 정체를 알 수 없는 형태, 균열을 일으키며 터져 나오는 것, 구멍이 뚫린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때로는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바닥에 무엇을 덮은 검은 천을 바라보거나 거대한 구덩이를 지켜본다.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무기력한 모습이다. 하지만 보는 이의 마음을 계속 비집고 들어오고, 때로는 가슴 깊숙한 어느 부분이 툭 터져버리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은새는 변화가 발생하는 불안정한 순간을 탐구한다. 자신의 실제 경험이나 신문기사, 인터넷 사진, 영화 등 다양한 이미지들이 분류되지 않은 채 작업의 원천이 된다. 하지만 그녀가 탐구하는 변화의 순간은 눈으로 지각할 수 있는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다. 구체적인 의식보다는 현실 속에서 감각적으로 언뜻언뜻 인식하게 되는, 결코 이성적인 순간도 아니다. 이은새는 “변화가 일어나고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모든 것이 흔들리고 뒤집힐 수 있는 파장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이것은 대다수 심리적인 풍경에 가깝다. 일상에는 이러한 크고 작은 파장이 수없이 발생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변화에 곧 무뎌지고 파장이 자신에게 남긴 상처나 타인의 고통에 무심해진다.
작가는 이런 현실을 안타까워 한다. “요즘 제가 느끼는 세상은 엉터리로 둘러싸였지만 그것들이 단단한 벽처럼 굳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굳어진 상태에서 가끔 터져 나오는 부분들이 결국 금방 다시 굳어 단단해진다고 해도 그때의 작은 움직임을 의도적으로 의식하고 붙잡아두고 싶습니다.” 이은새는 무력함 때문에 모든 것을 놓아버리기보다는 그런 상태를 먼저 솔직하게 인정한다. 그리고 굳이 잡아내지 않으면 금방 잊히거나 아예 인식조차 할 수 없는 순간들을 계속해서 찾아내고 기록하는 것이 자신의 몫이라고 여긴다.
최근 그녀는 첫 번째 개인전을 야심차게 선보였다. 갤러리 조선에서 열린 <틈; 간섭; 목격자>(1.23~2.3)와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개최한 <틈; 간섭; 목격자들>(2.1~13)이 그것. 전시 제목에서 미묘하게 드러나지만 작가는 다른 콘셉트로 두 개의 전시를 구성했다. 갤러리 조선에서 전시한 작품이 작가 자신이 일상 체험에서 발견한 이미지들을 파편적으로 보여준 것이라면 서교예술실험센터에 설치된 대형작품은 복수의 인물이 등장해 일종의 상황극을 보여준다. 변화하는 순간은 주체적인 관점에서 자발적으로 발생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외부 힘에 의해 불쑥 나타나기도 한다. “저만의 시각에서 벗어나 그런 변화의 순간을 목격하는 사람들, 같이 경험하고 느끼는 사람들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여기에는 다양한 인물이 존재하고 그들의 역할이 고정되지 않고 유동적이죠.”
긴장된 순간, 어떤 사건들이 변화하는 순간을 담아낸 작업은 과도한 색상이나 반전된 색상을 통해 실제의 감각을 벗어나 다른 감각이 뒤섞여 나오는 시각적 뒤틀린 효과를 드러낸다. 그러다 보니 일상적인 색의 조합과는 거리가 멀다. 때로는 비슷한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전혀 다른 색으로, 다른 분위기로 변주된다. 그 순간들이 매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작가는 그에 대한 회화적인 표현 자체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은새가 표현하는 세계는 불안정하고 무기력한 세계인 동시에 언제 어디서라도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의 세계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각자의 일상에서 정체를 알 수 없게 숨어있던 하나의 단서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매체를 회화에 한정해 작업했지만 앞으로는 계속 변화하는 상황을 움직이는 조형물로 구현해보고 싶단다. 한 젊은 작가의 변화무쌍한 실험과 탐구가 기대된다.
이슬비 기자

이은새는 1987년 출생했다.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과정 조형예술학과를 졸업했다. <무겁고 깊고 검은>(이목화랑), <오늘의 살롱>(커먼센터), <Unfamiliar air>(스페이스BM) 등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캔버스에 유채193.9×260.6 2014

<떨어지는 물 앞의 사람들> 캔버스에 유채193.9×260.6 2014

 

SPECIAL FEATURE 이슬람미술의 역사

전완경 (1)-누끼

〈Page of Nasta‘liq Calligraphy〉 Opaque watercolour, ink, gold on paper 42.3×28.8cm Burhanpur, India(Historic Hindustan)1631~1632 1659년 다라 쉬코우 왕자의 사인이 있다 사진제공 Aga khan museum

전완경 부산외국어대 아랍어과 명예교수

622년 공식적으로 이슬람이 출현하기 이전에 아랍인은 예술이라고 부를 만한 그 어떤 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아름다운 장식으로 사용되는 아랍문자 이외에는 미술에 공헌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비록 문자를 가지고 있던 까닭에 비문이 세워지기도 했지만, 책이나 문헌을 만든 것 같지는 않다. 사실 아랍인 대부분이
유목민이었으므로 기념비적인 예술을 만들 환경을 가질 수도 없었다. 이슬람은 초기의 기독교와 달리 시각예술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슬람이 출현하고 예언자 무함마드와 이후 정통 칼리파 시대(632~661)의 지도자들은 메디나가 이슬람 중심지로 확고히 자리 잡도록 노력했으며, 아라비아 이외의 지역으로 이슬람을 전파하는 데 바빠 다른 일에는 신경 쓸 여념이 없었다. 때문에 이슬람 공동체의 확대와 더불어 건축물의 건립과 장식에 필요한 자원을 제공한 사람은 비잔틴, 콥트, 사산, 중앙아시아인 등 정복지의 숙련된 장인과 예술가들이었다. 당시 예술가들은 다양한 국적을 갖고 있었으며, 반드시 이슬람 신자였던 것은 아니다.
초기의 이슬람미술가들은 고유의 회화 전통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비잔틴제국과 사산제국 등 정복지역의 문화가 제공하는 모델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점차 비잔틴제국이나 페르시아 회화가 아닌 그들 자신의 예술로 만들어갔다. 즉 이슬람문명에 공헌한 모든 문화의 전통을 새롭게 결합한 것이다.
우마이야 왕조(661~750) 시대에 비로소 이슬람건축양식이 확립됐다. 이슬람 초창기부터 비교적 단순한 구조를 갖고 있던 사원(모스크)에 이슬람의 상징물이 다수 소개됐다. 안뜰, 첨탑(미나렛), 설교단, 벽감(미흐랍), 분수대, 마끄수라(VIP Room), 돔 축을 이루는 본당 회중석 등이 이슬람 사원의 특징물로 자리 잡았다. 특히 기독교 신자들이 사는 지역에서는 그들을 압도하기 위해서 모스크를 더욱 큰 규모로 지었다.
건축학적으로 볼 때 모스크에는 기독교 교회나 성당과는 판이한 특징적인 요소들이 있다. 모든 모스크는 메카의 카바 신전을 향해서 세워졌다. 무슬림들은 메카를 향해 어깨를 나란히 하고 횡대를 이루어 길게 도열해 예배 의식을 거행한다. 이러한 배치는 메카를 향해 벽면에 가깝게 자리 잡으려는 욕구의 반영이며, 이슬람에서 절대적으로 지향하는 평등성에도 부합하는 행위이다. 자연적으로 모스크는 가로가 길고 세로는 짧은 구조의 형태로 만들어졌다. 이 같은 건축 분야와는 달리 금속 세공, 직물 직조, 필사본 채색 등 장식미술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거나 빈약하다. 이슬람 시대에 처음 등장하는 회화는 의학 논문, 동물에 관한 책 그리고 서정시집 몇 권 등 제한된 범위 내에서 그려진 삽화들뿐이다. 그나마 이것도 이런 특정한 주제에 삽화가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의학 같은 과학서적에는 이해를 돕기 위한 그림이 삽입돼야 했다.
무슬림 종교 그림은 14세기 초가 돼서야 출현했다. 최고의 완성품이자 오리지널 그림은 1330년부터 1550년 사이에 등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8세기부터 13세기 동안 이슬람 세계에서 회화가 걸어온 운명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예언자 언행록에서 그림을 금지하고 혐오하는 내용이 많이 전해져 내려왔고 또 이슬람 신학자 대부분이 인간과 동물의 재현은 신神만의 특권이며, 그것을 그리거나 만드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생물의 상을 만든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미술가가 오직 신만이 가능한 창조행위를 빼앗는 일이 된다. 왜냐하면 생물에 영혼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은 신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언자를 포함해 그 어떤 사람과 동물, 심지어 신이나 천사의 형상을 그린 그림이나 조각도 일절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화가들은 이슬람 초기부터 우상숭배 전통과 전쟁을 벌인 사상가와 문인들과는 달리 고상한 지위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회화의 전통은 이슬람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믿는 화가들에 의해 유지된 것이 분명하다.
대신 무슬림은 기하학, 식물, 자연경치, 서예 등을 이용한 장식으로 눈을 즐겁게 하는 미술을 발전시켰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타지마할의 벽면은 여러 가지 색깔의 보석을 사용해서 대리석에 기하학적 문양과 꽃문양을 새겨 넣은 아라베스크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실례이다. 건축 장식, 조각된 나무와 돌 표면, 색칠한 표면과 도기, 유리, 금속공예, 제본, 도서 채색, 이슬람 카펫 등 다양한 장식에서 아라베스크가 발견된다.
필사자는 당시 이슬람 신자에게 아주 명예로운 직업이었다. 특히 코란의 필사본은 무척이나 신중한 계획 아래 작성되었고, 선 하나하나에도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8세기에 발생하여 가장 칭송받는 예술이 된 서예는 예루살렘에 있는 바위의 돔 사원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것은 비문碑文의 형태이긴 하지만 분명히 장식적인 기능을 보여준다. 이처럼 장식적인 아랍어 명문을 만드는 전통은 이슬람 초기 건축물은 물론 후대의 수많은 건축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모스크에서 아랍어 문자는 일반적으로 돔 아래나 벽감 주변 또는 출입구 주위에서 발견된다. 이 서예야말로 오롯이 이슬람적인 예술이며, 이슬람회화에 끼친 영향도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무슬림은 인간과 동물의 재현을 통해 표현할 수 없는 미학을 나타낼 경로로 서예를 선택했다. 아마도 서예가 단 하나의 순수 아랍예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아랍어 글자는 장식적 디자인에 크게 한몫 차지하면서 이슬람미술에 하나의 강력한 모티프가 되었으며, 심지어 종교적인 상징이 되기도 했다.
압바스 왕조(750~1258) 시대는 이슬람문명의
전성기였다. 이 시기에 지어진 것 중 이슬람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물을 살펴보면, 장식이 무척 화려했음을 알 수 있다. 터키 이스탄불의 사원과 궁전의 내부는 마치 화려한 색채의 꽃으로 꾸며진 화원과도 같다. 톱카프 궁전 타일의 장식 도구에도 꽃문양이 많이 쓰였다. 14세기 중후반에 완성된 스페인 그라나다 지역의 알함브라 궁전은 외부에 비해 내부를 지나치게 호화롭게 장식했다. 궁전의 벽은 타일과 치장벽토 세공의 조화를 보여주는데, 이곳을 본 사람은 누구나 그 복잡성에 놀라게 된다. 내부는 추상적인 선線 요소 그리고 아라베스크(포도나무 덩굴손 등 고대의 잎사귀 디자인을 채택하고, 이것을 아라베스크라는 새로운 형태의 장식으로 발전시킨 사람들이 바로 아랍인들이다. 한마디로 아라베스크는 이슬람세계의 예술과 밀접히 연관된 무슬림 예술의 형태이며, 이슬람 장식미술의 진수라고 할 수 있다.)와 아랍어가 결합된 장식적인 형태의 커다란 아랍어 서체로 치장됐으며 아울러 기하학적 형태의 타일도 함께 볼 수 있다.
고대부터 장식 디자인과 색채 전문가로 인정받는 페르시아인들은 이 시대에 이슬람의 산업공예가 높은 우수성을 자랑할 수 있도록 발전시킨 주인공이었다. 이 시대에는 특히 카펫이 크게 발전했다. 본질적으로 이슬람미술에 속하는 카펫의 디자인으로는 사냥하는 모습과 정원 풍경이 선호됐으며, 염색에는 명반이 사용됐다. 이와 같은 동양풍의 카펫은 르네상스 이후부터 유럽의 회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흔히 파랑, 초록, 빨강, 노랑 중 두 가지 색조를 선택해 채색하고, 중앙은 기하학적 문양으로, 가장자리는 아랍어 서체로 장식했다.
한편 기하학적 문양 이외에도 인간의 형태나 동식물을 그려 넣은 세라믹이 장식적 스타일의 아름다움을 획득했다. 또 페르시아로부터 다마스쿠스에 소개된 타일은 전통적인 꽃문양으로 꾸며져 건물 내/외부 장식에 쓰였고, 모자이크와 함께 큰 인기를 끌었다.
유리와 도기 등 공예분야는 이 시대에 특히 페르시아, 이집트 그리고 시리아를 중심으로 최고조에 이르면서 일상생활 도구를 창의적이고 아름다운 예술작품으로 만들어갔다.
은이나 금으로 만든 그릇을 성당 예식에 사용한 기독교사회와는 달리, 이슬람사회의 사원에서는 그런 물건이 필요하지 않았다. 때문에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공예품은 모두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던 사치품들이다. 이슬람의 도공들은 다른 분야의 장인들과 마찬가지로 색과 질과 문양 같은 외형적 장식을 선호했다. 이처럼 정교한 외형에 대한 선호는 이슬람미술을 특징짓는 불변의 요소 중 하나이다.
13세기는 이슬람 역사의 분수령이었다. 몽골인이 이슬람 세계를 침공해서 예술의 중심지들을 약탈하고 파괴했으나 그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이슬람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이들을 통해 주제의 처리, 여러 색으로 칠한 불사조, 정교하게 그린 나무와 꽃 그리고 물 등 분명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극동의 사상과 예술이 이슬람 세계로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카이로의 맘루크 시대에는 금속 공예품의 생산이 증가하고 상감 세공기술의 발달도 두드러졌는데, 아랍어 서체와 문장 화법이 주요 장식 테마로 이용되었다. 카펫 중에는 특히 적색 바탕에 별, 삼각형, 팔각형 등 기하학적 문양을 넣은 디자인이 발달했다. 맘루크 술탄들의 후원하에 만들어진 세밀화는 대단히 아름다웠고, 이는 14세기 후반까지 이어졌다. 세밀화 속 인물들은 일반적으로 인형 같고, 그림은 해설적이라기보다는 눈에 띄게 장식적이다.
세밀화 부분에서도 새로운 양식이 나타났다. 페르시아와 중국의 화가들이 양식과 기술을 교환하면서 양측이 모두 좋은 결실을 얻은 것이다. 이때부터 다양하고 깨끗한 채색이 무슬림의 그림에 도입되었고, 극동의 요소가 가미되어 풍경, 특히 바위・나무・구름 등이 혼합됐다. 그래서 15세기와 16세기에 제작된 세밀화는 티무르 왕실의 옥외문화를 고증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5세기 후반기에 가장 특징적인 사건을 들자면 몇몇 화가가 처음으로 작품에 서명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5세기에 들어서면서 이슬람 세계에서 세력을 확장한 오스만인은 지중해와 중동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했다. 특히 이 시대에 여전히 최고의 예술로 평가받은 서예와 세밀화 분야에서 큰 진전이 있었다. 오스만제국의 그림에 보이는 독특한 사실주의는 사실주의적인 화풍으로 발전했고 초상화에 커다란 관심을 보인 무굴제국의 그림과 경쟁 구도에 놓였다.
16세기 중반에 터키와 페르시아, 양쪽 모두에서 필사본 서적을 후원하는 위대한 시대가 도래했다. 그러나 17세기 중반 이후 이슬람 세계의 회화는 분명히 쇠퇴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금속공예, 직물, 타일, 유리병, 비단, 카펫 산업이 발전한 것과는 다른 점이다.
17세기 이전 페르시아 회화는 유럽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러한 영향은 17세기 중반 유럽인과 페르시아 화가들이 직접 접촉하면서부터 한층 강화됐다. 그러나 이는 결국 페르시아 회화에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다. 페르시아 화가들이 빛과 음영을 적용한 유럽의 원근법과 입체 표현을 시도했지만,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림 속 인물들은 옛 페르시아 세밀화보다 커 보이지만 생생한 느낌을 주지 못했으며, 함께 먹고 마시는 사람들의 모습도 마치 긴장한 듯 어색해졌다.
당시 오스만 화가 중 한 사람인 레브니는 술탄의 딸 결혼 축제행사를 묘사한 걸작을 남겼다. 그러나 유럽 화단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기에 결국 오스만 회화의 특성을 완전히 파괴하는 등 진통이 이어졌다. 이처럼 이슬람미술을 만들어낸 가치들은 이슬람 세계의 다른 영역과 마찬가지로 점차 사라지고, 서구의 개념과 기법에 압도되었다. ●

알 하산 이반 알 아라브샤 (Al-Hassan Ibn al-Arabshah) ‘카산의 메이단 모스크의 미흐랍 (Mihrab of the Meidan mosque in Kashan)’ Glazed and painted Listre ceramics 1226 Staatliche Museen Beriln 소장

알 하산 이반 알 아라브샤(Al-Hassan Ibn al-Arabshah ‘카산의 메이단 모스크의 미흐랍 (Mihrab of the Meidan mosque in Kashan)’ Glazed and painted Listre ceramics 1226 Staatliche Museen Beriln 소장

 

KIM SHIN’S DESIGN ESSAY 8

원형 복원과 파괴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사람은 누구나 중고 제품보다 새 제품을 더 좋아하게 되어 있다. 새것은 누구의 손때도 묻지 않은 순수한 것이고 고장 나거나 망가질 가능성도 낮기 때문이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누군가 앉아서 오랫동안 썼고, 그래서 낡고 부실해진 의자나 조명이 ‘빈티지’라는 이름으로 사랑을 받기도 한다. 어떤 경우엔 같은 모델의 최신 제품보다 값이 더 나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찰스와 레이 임스 부부가 디자인한 합판 의자의 경우 1950년대에 생산된 오리지널 빈티지 제품은 상당히 비싸다. 물론 이 제품들이 지금 나오는 것보다 품질이 더 좋은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오리지널, 또는 진본에 대한 가치는 세월을 뛰어넘을 뿐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높아진다. 세상에 오직 하나만 존재하는 예술작품뿐 아니라 대량 생산되는 공업제품에서도 오리지널은 사람들을 유혹한다. 오리지널이 낡았다고 새로운 부품으로 수선하거나 개선하지 않는다. 그러면 왠지 오리지널이라는 품위에 흠집을 내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세월의 때가 묻어나는 예스러운 나무의 질감에 반짝거리는 새 나사가 박혀 있다면 얼마나 이질적으로 보일 것인가? 오리지널은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 원형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세월의 흔적, 자연의 힘에 굴복하는 자국을 남긴다. 표면은 변질되고 외부에서 침입한 이물질이 원래의 맑은 색을 탁하게 만든다. 오래된 것 같은 그 느낌은 미학적 쾌감을 주기도 한다. 반드시 낡아야 오리지널은 아니지만, 오리지널들은 대개 세월 때문에 반드시 낡아지고 고색창연古色蒼然해지기 마련이다.
19세기에 활동한 영국의 장인이자 디자이너인 윌리엄 모리스는 당시 영국에서 일어난 고딕 건축 복원운동에 반대했다. 19세기 영국에서는 고딕부흥운동이 맹렬하게 일어났다. 길버트 스콧이라는 건축가는 오래된 건물들을 과거 고딕의 원형대로 복원한다는 명분 아래 건물에 남은 수많은 세월의 흔적을 모조리 없애고 옛날 양식을 만든다는 계획과 실행으로 큰돈을 벌고 있었다. 이런 원형 복원은 오히려 원형을 파괴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윌리엄 모리스에게 “옛날 건물이란 낡아가는 것”이고, 낡아감이야말로 건물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그는 고건축보호협회를 만들고 이렇게 호소했다. “오래된 기념비적 건물을 감시하고, 비바람을 막는 것 이상의 모든 ‘복원’에 저항하며 건물들을 보호하자.” 원형 복원은 또한 건물의 기능과 아무 관련 없는 겉모습만 바꾸는 것으로, 예술을 내용이 아닌 껍데기로만 보는 건축 장사꾼들의 무지한 짓이었다. 모리스는 당대 예술비평가인 존 러스킨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해 고건축 보호의 명분으로 삼았다. “그들의 노동으로 지은 것을 우리가 허물 권리는 없다.… 그들이 남긴 것을 사용할 권리가 우리에게만 주어진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후손 모두의 것이다.”
최근 문화재청이 사직단社稷壇의 복원 계획을 발표했다. 현재 사직공원으로 알려진 종로구 사직동의 사직단은 원래 조선시대 국가의 안녕과 풍년을 위해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그러나 일제가 이곳을 공원으로 만들고 그 역사적 의미를 거세해버려 이를 다시 복원하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원형 그대로’ 복원하려면 종로도서관, 시립어린이도서관과 같은 주변의 주민생활시설들을 철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오래된 과거를 복원하고자 최근의 역사, 현재의 생활을 파괴하겠다는 것과 같다. 종로도서관이나 시립어린이도서관 역시 가까운 역사의 원형이고 문화적 의미를 지니는 건물들이다. 더구나 현재 주민의 사랑을 받는 꼭 필요한 시설이다. 반면 사직단을 복원한들 옛날처럼 제사를 지낼 것도 아니다. 그냥 박제화된 역사적 유적이고 관광지가 될 것이다.
만약 주변 시설을 침범하지 않고 복원한다면야 누군들 그런 문화적 사업을 말리겠는가! 역사를 기억하고 유적을 보존하여 후세에 알리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유적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거나 복원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변화해서 현재에 존재하는 것 역시 우리에게 소중하기 때문이다. 변화해 지금에 이른 것 역시 우리 마음대로 허물 권리가 없으며 후손에게 넘겨줘야 하는 것이다. 자연적 흐름을 거스르는 원형 복원주의는 생활의 파괴를 동반한다. ●

CRITIC 젊은모색 2014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2014.12.16~3.29

“우리가 이 때문에 이전의 삶을 버리고 사막에 오게 되었다. 우리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삶이 [적어도] 이야기의 소재가 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Douglas Coupland, 《Generation X: Tales for an Accelerated Culture》, New York: St. Martin’s Press, 1991, p.8.)
쿠플랜드의 《제너레이션 X》는 전쟁 직후 유럽의 젊은이나 1990년대 일본에서의 신인류가 그러했듯이 무기력한 현실에서 그저 자신들의 도피처인 환상과 같은 설화(Tale)에 빠져버린 회의주의적이고 자기폐쇄적인 미국 젊은이들을 가리킨다. 2015년 새해 벽두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젊은모색2014전> 이라는 ‘일상의 잔혹동화’도 한국 젊은 세대들이 사회로부터 격리되었다고 여기거나 격리되고자 스스로 원하면서 만들어낸 개인적인 상징과 이야기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필자는 이제까지의 <젊은 모색전>이 대부분 ‘젊은 작가’라는 모호한 기준하에 다양한 매체를 다루는 작가들을 분배하듯이 선정해온 것에 비해 이번 전시가 우리 사회 청년들의 상황을 보다 전면적으로 부각시킬 수 있는 주제 위주로 꾸려졌다는 점이 반가웠다. 하지만 우리 사회 청년문제가 결국 전체 사회구조적 문제임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청년들의 문제가 잔혹동화나 88만원 세대 정도의 주제로 축약, 분리될 수는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잔혹동화의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인 특징은 젊은 세대의 소극적이고 무책임한 태도만 부각시킬 수 있다. 덕분에 필자는 젊은 세대 작가들과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동화가 아니라 잔혹성에 대항하는 연대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비평적 연대에 대해 절실하게 느끼게 된 것은 참여한 작가들의 고민이 지나치게 우회적으로 표현돼 있으며 그 고민의 출발점도 피상적이거나 모호했기 때문이다. 노상호는 작가가 만들어낸 설화의 이미지들을 관객이 랜턴을 비추면서 재구성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정작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로 구성된 동네에 대한 ‘설화’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우리 시대에 억압돼서 재발굴되어야 하는 사회적 진실을 말하고 있으며, 빛을 비추는 관객의 행위와 연관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유추해 내기 위해서는 관객들의 엄청난 상상력이 요구되었다. 오민이 말하는, 인간을 억압하는 족쇄와 같은 규칙들이 깔끔한 실내 영상을 통해 관객들에게 절실하게 전달될지도 의문이었다. 조송의 박제화된 동물들 이미지와 설치가 작가 개인적으로 느끼는 암울한 정서적 상태가 아니라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특정한 비판적 이슈를 전달하고 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물론 이들은 직접화법이나 투쟁적 자세를 지양하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자기폐쇄적인 상태에 놓여야만 했던 젊은 작가들의 고민을 관객이 공유하게 하려면 비평의 쟁점을 명확하게 전달해야 한다. 오히려 전시에서는 암울하고 답답하면서도 가벼운 일종의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외형들만이 강조돼 보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21세기 한국 젊은 작가들이 사막에서 방향성을 잃고 자신들만의 이야기나 만들어가면서 만족해야 한다면 이들이 처한 정서적, 사회적, 미학적 난관들을 피상적으로 묻어둘 것이 아니라 다각적으로 세분화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야 관객은 왜 이들의 대응전략이 개인적인 상징이나 동화의 형태를 띠어야 하는지에 대해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관객은 작가 개개인의 내러티브보다는 이러한 전략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달리 이야기할 방도를 찾을 수 없는 한국 젊은 작가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더 궁금해 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담론을 이끌어내는 것은 전시에 참여한 작가뿐 아니라 기획자의 몫이기도 하다.
고동연 미술사

오민  영상, 3채널 비디오, 6채널 오디오 가변크기 2014

오민 <마리나, 루카스, 그리고 나> 영상, 3채널 비디오, 6채널 오디오 가변크기 2014

 

CRITIC 2015 랜덤 액서스

백남준아트센터 1.29~5.31

이번 <랜덤 액세스전>은 백남준아트센터의 큐레이터 5인이 각각 2인/팀씩 추천한 작가들로 구성됐다. 전시 제목이 암시하듯, 예술사 최초의 관객 참여적 사운드 설치작품이라 할 수 있는 백남준의 〈랜덤 액세스〉(1963)의 미적 의의와 실험성에 반응하는 동시대 예술작품을 선보인다. 그들 작품이 미래를 향해 내뿜는 에너지의 현실적 순환을 모색하기 위해서다. 전시 전체를 압도할 특정 개념의 부제를 내세우지 않으며, 전시장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위치를 허락하지 않는 물리적 환경에서 작품들은 각자의 전시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게다가 일부는 백남준의 작품들과 경계 없이 관객 동선을 공유한다. 이러한 큐레토리얼 특성들을 고려해, 이번 전시에 대한 필자의 짧은 비평적 시도를 다음 질문들로 시작하고자 한다. 전시 자체가 어쩔 수 없이 가지는 ‘백남준’이라는 기원과 그것에서 희구되는 예술성에 대한 긴 궁리가 전개되는가? 말 그대로 “임의적 접속”의 가치화를 구체적으로 성취하는 데 필요한 지적 자극이 성공적으로 운집되어 있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전시 작품 자체의 창의적 깊이를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특히 이 전시가 고양된 전위적 시각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논리성을 높이 평가해 선정한 동시대 예술작품에 기반을 둔 것이라면, 현실에서의 궁핍함과 부조리함의 대질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50여 년 전 백남준이 제시한 모종의 미래적 전망에 대한 예감을 전하는 작품들의 생명력을 파악해야 한다. 관객의 신체 운동을 권하고 그 몸짓들을 모니터를 통해 즉각적으로 이미지화하는 박승원의 〈멜랑콜리아 1악장과 2악장 합주곡〉, 호기심을 자아내는 낯선 덩어리들로 구획된 공간 연출에 식상하면서도 답하기 난해한 질문을 결합함으로써 관객들의 움직임에 무덤덤한 고민을 얹는 이세옥의 〈미래의 방〉, 세계 대상에 잠복된 모듈의 관계성을 끄집어내어 다시 세계의 모호한 집적을 들추는 오민의 영상작품 등은 백남준의 〈랜덤 액세스〉의 본질론, 아니 어쩌면 그 효용론에 가까워보인다. 과장과 무모함을 허용하고 동작과 사물과 소리의 세속적 경계를 리듬으로 혼란시키는 것은 백남준 예술이 후세에 권한, 모험해야 할 미궁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양정욱의 〈노인이 많은 병원, 302호> 연작은 요언(妖言)이 난무한 이 시절에 둔중한 조형물의 이합운동으로 관객의 미세한 세부를 찌르는 듯한 이야기를 펼친다. 김웅용의 영상작품 역시 영화 미디어에서의 말과 그림의 존재적 궁지를 해결할 표현을 찾아 나선다. 물론 이러한 단문들로 이 전시에 참여한 젊은 예술가들이 미디어사회를 곡진하게 살피기 위해 제시한 감각의 문법들이 쉬 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의 예술 기획에서 시대적 허기와 예술가의 허약함을 극복하려는 백남준 정신에 대한 그리움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결국 이 전시가 부제를 숨긴 이유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임산 동덕여대 교수

CRITIC 우주생활

일민미술관 2.6~5.17

지금과 달리 정보가 많지 않던 시절, 골방에 앉아서 신문에 실린 기사 한 줄, 잡지에 나온 사진 한 장에 심장을 두근거리며 우주를 상상하는 아이를 생각해보자. 갈 수는 있을까, 어떻게 가능하지, 외계인은 있을까, 무섭게 생겼으면 어떡하지 등등. 기획자 이영준이 말하는 ‘표상으로 하는 우주생활’이란 다른 게 아니다. 사진 논문 기사 등 간접적 정보는 있으나 직접 확인할 수 없으니, 머리로만 생각할 수밖에. 이것은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모습이었다. 몸이 있는 곳은 지구나, 바라보는 곳은 우주인 그때 그 시절의 우리. 이러한 심성은 서문에도 ‘엉뚱한 형태’로 등장한다. “마트계산대에서 이 쿠폰이 왜 할인적용이 안 되냐고 따질 때의 호기와 논리력으로 우주 관련 데이터가 정말 가능한 일인지 따져보는 것이 ‘우주생활’이다.” 몽상과 일상의 기묘한 조합이자 즐거운 아이러니다.
이것은 전시에 고스란히 투영된다. 전시는 미 항공우주국(NASA)이 공개한 자료가 뼈대를 이룬다. 우주선 설계도, 실험 사진, 발사 장면, 관객 반응, 각종 기계장치와 여러 은하계 행성 등 NASA가 몇 십 년 동안 축적한 우주 관련 사진자료가 전시장 곳곳을 가득 채운다. 우주생활을 음미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양과 강도다. 그리고 감각의 확장을 약속하면서 작업들이 이러한 현실에 구멍을 판다. 현실의 인장이 진하게 찍힌 ‘스트레이트’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전시’입니다” 눙치는 것처럼 마냥 말이다. 방식도 다양하다. 인식의 한계를 정당하게 성찰하는 회화(김지원), 대상을 바꾸어 기술적 숭고를 그대로 반영하는 사진(조춘만), 과학의 이면을 무의미하게 정밀한 예술로 역추적한 작업(김홍석), 우주생활을 반(反)-반(半)기계적인 나무 인공위성으로 눙치는 설치(김나영・마스) 등. 물론, 종류만 다를 뿐 하나같이 ‘농담’인 것은 마찬가지다. 농담 같은 현실, 아니 농담이 섞인 현실, 어쨌든 현실을 돌파하는 방식들이며, 그때마다 우주는 오랫동안 다양한 형태로 질료를 제공했다. 하지만 지금은.
SF 번역가 박상준의 지적대로 현재 ‘우주’는 한물갔다. 과학과 인문학 양쪽에서 상상력의 엔진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냉전이 치열하던 1980년대 ‘별들의 전쟁’ 때까지는 부정적이어도 어쨌든 ‘우주’가 기술문명의 상상력을 끌었지만, 지금은 ‘디지털’에 자리를 내준 지 오래다. 과학소설의 최근 경향도 이러한 현상을 증명한다. 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클라크, 로버트 하이라인 등 우주과학 일변도의 초기 하드 SF에서 과도기를 거쳐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1984) 같은 사이버펑키 장르로 전환된 것도 그때다. 상상력의 장소도 크기도 축소된 것이다. 그래서 이 전시가 반가웠다. 조금은 망각된 상상력의 원천을 다시 끄집어내는 것이니까. “우주시대를 달리는 고성능 휘발유! 국내 유일한 호남정유의 슈프림.” 그랬기 때문인지, 우주인 내조자의 인터뷰기사들과 신문 한 면을 정확히 반분하여, 주유기를 들었지만 미래형 복장을 한 여성 우주인이 등장하는 광고를 보면 슬그머니 웃음이 날 수밖에. 소박하지만 정직하게 상상하는 태도, 진지하게 하는 농담, (층위가 다르긴 하겠지만) 내게는 그게 더 알레고리 같았다.
김상우 미학

CRITIC 불협화음의 하모니

아트선재센터 2.7~3.29

우리가 ‘아시아’를 얘기할 때, 식민과 냉전이라는 사회정치적, 역사적 경험들을 들어내고 판타지로서의 이미지로만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 장소와 문맥의 위아래로 지구화의 현재적 흐름들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현실 속에서 서구에 의한 타자로서의 ‘아시아’와 아시아에 의한 ‘아시아’는 어떻게 상상되고 있는가. 이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시도하는 전시 <불협화음의 하모니>는 그런 측면에서 ‘아시아 상상’에 대한 새로운 모색과 희망을 제안한다.
독일문화원이 주최하는 이 전시는 한국, 중국, 일본, 대만 출신 큐레이터 김선정, 황젠헝, 가미야 유키에, 캐롤 잉화 루가 공동 기획했다. 네 명의 큐레이터는 ‘아시아에 대한 상상을 성찰’하면서 ‘조화’의 개념과 관련해 각자의 입장을 정교하게 드러내는 각국의 작가 12명을 한데 모았다. 이들이 ‘조화’의 개념을 선택한 이유는 유럽연합(EU)과 같은 아시아연대나 아시아연합 등의 최근 아시아 내부에서 상상하는 정치적 전략적 유토피아적 시도에서 비롯된다. 큐레이터들은 서문에 “아시아를 통일된 공동체로 보는 만연된 가정과 피상적 오해”가 조화라는 개념을 전제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이러한 상상을 동요시키는 것을 전시 프로젝트의 목표로 삼았음을 선언했다. 결국, 이 전시는 동일성보다는 차이의 인정이, 개념이나 이미지로서가 아닌 삶으로서의 정직한 조화임을 역설한다.
문자로 ‘한자’를 공유하는 한국, 중국, 일본, 대만은 각기 다른 식민의 시대와 냉전의 시대를 경험했고 포스트 식민 이후 전지구화의 현실 역시 문자인 ‘한자’처럼 동일하거나 이미지로서의 조화와는 거리가 있다. 그래서 큐레이터들이 선택한 작업들은 각 국가의 정치적 기원과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역사적 조건의 차이와 불일치를 섬세하게 성찰한다.
특히, 홍콩 출신 작가 랑즈워의 <이야기적 사건>(2006)이나 중국 출신 작가 류딩의 <2013년의 카를 마르크스>(2014), 저우자오의 <중국어는 언어가 아닙니다! 존 핸슨 끼어들다>(2015) 등에서 집약돼 보이는 ‘언어’와 이를 둘러싼 말하기, 읽기라는 삶의 지형은 문자의 동일한 판타지적 이미지 차원에서 단순화 할 수 없음을 환기시킨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를 함께 경험한 바 있는 아시아에서 언어와 번역의 문제는 각기 다른 형태의 식민과 포스트 식민, 냉전과 탈냉전 시대를 경유하면서 열전의 시대 안에 놓여 왔다. 아시아의 공용어 ‘한자’라는 권력이 일본어의 ‘한자 번역어’에서 세계 공용어 ‘영어’로 위계 이동하는 상황 등도 그래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한편, 백인종이지만 그 정체성 규정에서 배제 혹은 소외된 자폐증환자, 게이, 레즈비언적, 퀴어적 관심사 등 주변성의 미학을 강조해 온 중국계 미국인 작가 우창의 작업 <In My Language>(2014) 역시 이러한 개념적 이미지적 정체성 규정의 위험을 슬쩍 경계하고, 차이가 동반하는 생생한 분열과 갈등, 불일치를 노출한다.
그렇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전시의 출발 지점에서 관객이 만나는 작품은 협업 작업인 일본 작가 다나카 고키의 <피아니스트 다섯이 한 번에 연주하는 피아노(첫번째 시도)>(2012)와 <도예가 다섯이 한 번에 만든 도자기(조용한 시도)>(2013)이다. 작가는, 각기 다른 개인 여럿을 특정한 하나의 집단으로 구성해 서로 다른 이들이 어떻게 ‘연대’하고 ‘협력’하여 조화를 이루는지를 시도하였다.
사실, 세계 공용어 ‘영어’를 기초로 한 영상설치, 퍼포먼스 비디오 작업이 다수인 이번 전시에서 큐레이터들의 기획의도를, 취미로서 시각예술을 기대하는 일반 관람객이 읽어내기란 그렇게 쉽지 않아 보인다.
2년간 계속될 프로젝트의 첫 시작이라는 이 전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이에 통용되고 보편화된 ‘아시아’ 담론들 사이에서 혹은 그 내부에서 이제껏 간과돼 온 장소와 목소리를 감지하게 한다. 더불어 우리가 상상하던 조화로운 ‘아시아’라는 개념의 기원과 성격, 그리고 불일치한 차이를 지닌 ‘아시아 상상’을 새롭게 희망하는 우리의 의견과 태도를 요청하고 있다.
김주원 미학

CRITIC 천성명 부조리한 덩어리

스페이스K 과천 1.19~2.27

필자의 기억에 조각가 천성명은 2005년 겨울 갤러리 상에서 열린 개인전을 통해 알게 된 이름이다. 그리고 2007년 선컨템포러리에서 개인의 내면적인 서사를 구상조각으로 표현한 <그림자를 삼키다>가 기억에 또렷하다. 그러나 스페이스K 과천에서 선보인 <부조리한 덩어리전>은 이러한 필자의 개인적 기억과 어긋나 있었다.
가령 “당당하고 순수해 보이는 빛나는 달에 다다르기를” 갈망하는 개인의 욕망(<달빛 아래 서성이다>)이나 “망각의 기억을 담고 있는 몸뚱이”(<그림자를 삼키다>)의 분열된 자아를 기억하고 있던 필자에게 목재 패널과 평면성이 묻어나는 페인팅 마감의 ‘덩어리들’은 당혹스러웠다. 사실 기억은 이미지가 투쟁하는 분열의 장이다. 거기엔 진실이나 진리보다 서정과 아이러니함이 제격이다. 그것은 늘 배반하고 어깃장을 놓는다.
초기의 조각작품들이 회색의, 경계와 아픔의 거처를 알 수 없는 과거와 그 기억들과 투쟁하는 한 작가의 서정시였다고 한다면 2011년 갤러리 스케이프 전시 이후 그의 작품들은 점점 주변적이고 관계적인 기억으로 나아간다고 할 수 있겠다.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기억까지는 아니더라도 주변적이고 사회적인 기억으로 말이다. 이러한 기억은 앞서 말한 개인적 분열과 심하게 어긋난다.
그 부조리함의 표현 형식일까? 스페이스K 과천의 유리와 철강 소재 건물의 차가움과 효율성은 천성명의 날것의 표현들과 많이 어긋난다. 분홍색 목재 합판과 각목으로 지지된 횃불을 든 손목, 땅에 떨어진 확성기는 기념비 조각이 갖는 전통성을 버렸다. 프로파간다로서 기능은 없고 평면성과 이질감이 강조된다. 양감과 무게감은 사라지고 가벼움과 개념이 자리했다.
벽면에 걸린 신체의 장기들과 그 아래에서 겉도는 푸른 사각형의 인물들은 규모와 형식에서 매우 이질적이다. 2012년 송은아트스페이스에서 떨어져 나옴직한 여성의 얼굴은 세 개의 학교 의자가 떠받친다. 중앙 홀에 영구 설치된 사이보그 메탈 인물 작품들과는 이질적인, 철판 위에 분홍으로 채색한 사자 작품은 몇 개의 나무 좌대와 유리 케이스 안에 안치돼 있다. 직원들이 많이 다니는 복도에 설치된 이 작품은 군이나 읍면의 경계에 들어설 때 보는 지역 표지이거나 라이온스클럽의 조각을 패러디한다. 2층의 <열병>은 2011년 갤러리 스케이프에서 보인 여성상의 평면 버전인 것처럼 보인다. 몸에 붉은 반점이 난 부조 입상은 이전보다 상황성은 사라지고 동작이나 표정이 무덤덤하다.
앞서 그의 변화된 작품 앞에서 당혹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천성명의 부조리와 익명성이라는 화두에는 사실 변함이 없어 보인다. 실제로 수원의 동탄 목리에서부터 고민해 온 점에서 이번 전시의 변화는 오래전부터 있어 온 것이라 하겠다. 다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눈치 채지 못했을 뿐 그는 변하지 않게 변해 온 것이다.
정형탁 예술학

CRETIC 장현주 숲, 깊어지다

갤러리 조선 2.5~26

풍경화에는 화가의 세계와 자연에 대한 사유가 오롯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서양에서, 신화 속 영웅들을 화면 곳곳에 그린 풍경화에는 그 영웅에 대한 화가의 동경이 드러나며, 햇살의 명암과 색채를 포착한 인상주의 풍경화는 화가의 자유로운 시선의 해방을 의미한다. 또한 한국에서, 신선산수에는 신선의 경지에 이르기를 바라는 화가의 염원이 담겨있고, 진경산수에는 화가의 조선 산천에 대한 긍지가 그려진다. 오랜 시간 풍경화 또는 산수화는 화가가 체험하고 관념화한 자연 그리고 자연과 화가 자신의 관계를 담아왔다.
장현주의 개인전 <숲-깊어지다>는 장지에 먹과 목탄, 분채로 그린 모노톤의 추상에 가까운 풍경화 연작을 소개한다. 작가는 전작에서 보이던 꽃과 나뭇가지를 단순하게나마 형상화해야 한다는 회화적 부담감을 내려놓는다. 바탕을 먹으로 거칠게 처리한 후 그 위에 목탄으로 낙서에 가까운 선을 그려 검은 면의 흔적들만을 남긴다. <Woods-작품번호>라는 제목을 읽을 때에야 비로소 관객은 이 대담한 회화들이 실은 풍경화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풍경들은 무엇이든 되어가게 가만히 둔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이번 연작들은 어느 순간 존재했고 스쳐지나간 자연 속 대상들의 흔적을 종이 위에 사색하듯 표현한다.
“몇 해 전부터 나의 작업은 조금씩 밖에서 안으로 내밀한 내 이야기와 상처를 건드리며 들어왔다. 의미있게 바라보고 풍경을 묘사하기보다는 그 풍경이 나에게 주는 심리적 효과와 장소감을 이미지 안으로 끌어들이고 이러한 풍경을 내면화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내밀한 상처와 상실감은 쉽사리 쓸려가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옅은 흔적으로 쌓이는 것이기에, 숲에서 나는 긴 여행을 떠난다.”
_ 작가노트에서
장현주가 첫 개인전 <지우개로 그린 풍경>을 연 2007년은 작가가 서양화 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한 지 20년이 지난 해였다. 작가는 이 기간을 ‘한 남자의 아내, 그리고 세 아이의 엄마로서의 삶이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순간들이었고, 스스로 생각의 출구를 찾지 못할 때’였다고 속내를 밝힌다. 가족의 일상들이 저마다의 속도로 굴러갈수록, 장현주는 자신에게 집중하는 삶을 완주하고 싶은 생각이 강해졌다 말한다. 정형화된 가족관계는 작가에게 의지, 독립, 일에 몰두할 자유에 대한 갈망을 극대화시켰을지 모른다. 분명 이 고독의 시간은 장현주가 다시 그림을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장현주의 소재는 유년기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보고 자란 시골의 산과 들, 숲, 그리고 현재 자신이 거주하는 아파트를 둘러싼 산과 같은 자연이다. 장현주의 자연은 분명한 형태를 섬세하게 구축하거나 특정한 서사성을 명료하게 전달하기보다는, 자유롭고 다양한 층위의 이미지들이 공존하는 상태이다. 작가가 선을 그으면 그 선은 자기 의지대로 자라나 나무가 되기도 하고 숲이 되기도 한다. 작품 속 세계에서 각 개체는 존재의 무게를 덜어낸 채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자유롭게 부유한다.
자연을 관찰하고 연구하고 기록하는 방식에서 여성과 남성은 그 출발점이 다르다. 여성 동물학자 제인 구달은 남성 동물학자들이 실험실에 가둬놓고 연구하던 침팬지를 다시 자연으로 불러냈다. 장현주는 여성적 시선으로 자연을 바라본다. 그에게 자연은 도상화된 수단이 아닌 체화된 자신의 일부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생태여성주의를 표방한다거나 <인형의 집>의 노라처럼 자아를 발견한 극적 순간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남보다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내면화된 자연을 그릴 뿐.
양지윤 코너아트스페이스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