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798예술구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UCCA 전경, 아래 798예술구 골목 전경. 독일식 건물의 공장지대였던 이곳의 과거를 보여준다
명불허전名不虛傳 798예술구
권은영 예술학
중국 팔대 고도八大古都 중 하나인 베이징을 방문한 경험이 있다면, 외국인보다 절대 다수의 중국 내국인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자금성과 톈안먼 광장을 기억할 것이다. 국내총생산량(GDP)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지만, 14억 인구 다수를 구성하는 소시민에게 950만km2의 대륙을 횡단하여 ‘중국 꿈中國夢’의 도시, 베이징을 찾는 것은 여전히 버킷 리스트 중 하나이다. 중국인들이 과거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감흥에 심취하는 반면, 외국인에게는 오늘의 중국 역시 매력적인 호기심의 대상일 것이다. 그들의 발길은 자연스럽게 베이징 동북쪽에 위치한 798예술구로 향한다. 1960년대 ‘신중국 전자 공업의 요람’이라 불리던 국영 공업단지가 베이징을 대표하는 예술구이자 관광지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낡은 공장지대가 문화예술의 명소로 변신하는 것은 이미 예술계의 클리셰가 된 지 오래지만, 여전히 그 가치는 유효하며 지금도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는 일등 공신이다. 베이징 곳곳에 예술가들이 틔운 문화의 싹을 추적해보자.
30여 년의 중국 동시대미술 역사에서 베이징의 예술구는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작가 작업실 중심의 작가촌 개념의 예술구이며, 다른 하나는 전시공간 중심의 화랑가 개념의 예술구이다. 물론 전자와 후자 모두 작업실과 전시공간이 혼재해 발전하는 것이 다반사이며, 초지일관 하나의 특징으로 규정되는 지역은 드물다.
초기 중국 동시대미술 발전에 촉매제가 된 것은 ‘85 미술운동’으로 대표되는 전위예술운동이었다. 당시 이들이 폭발적인 양의 작업을 쏟아낼 수 있었던 것은 일정 지역에서 동고동락했기에 가능했다. 작가들의 생활 터전이자 작업실이 모여 있는 작가촌은 순간의 미학, 행위예술과 소규모 전시로 가득했기에 그곳이 곧 가장 뜨거운 미술현장이 되었다. 1990년을 전후해 비슷한 시기에 베이징의 동쪽과 서쪽 외곽에 각각 두 개의 작가촌이 형성된다. 하나는 다산쯔大山子 인근에 장환張洹, 마리우밍馬六明, 창씬蒼鑫 등 행위예술가를 주축으로 형성된 동촌, 다른 하나는 18세기 청나라 황실의 정원이었던 원명원 일대 푸루먼福綠門촌과 과이자둔挂甲屯을 중심으로 딩팡丁方, 팡리쥔方力鈞, 웨민쥔岳敏君 등 아방가르드 회화 작가들이 운집한 서촌이었다. 이들이 베이징의 동쪽과 서쪽 외곽지역에 모이게 된 것은 물론 당시 두 지역 모두 폐허나 다름 없었으며, 임대료가 저렴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중국의 특수한 상황에 주목하고자 한다. 신중국 건설 이후, 중국 정부는 엄격한 호적제도를 시행해, 출생지를 벗어나는 것이 출국 절차와 비견될 만큼 까다로웠다. 하지만 개혁ㆍ개방 이후 1986년 국무원이 발표한 <국영기업 실행 노동계약제 임시 시행 규정>과 1992년 노동부가 발표한 <전원 노동 계약제 확대 시행에 관한 통지> 등을 통한 노동자를 중심 인구의 이동을 점진적으로 개방하면서 작가들도 정치문화의 중심지로 흡수될 수 있었다. 폐허나 다름없던 지역이 동촌과 원명원 화가촌으로 발전하는 동안, 농민공을 비롯한 소외 계층도 모여들어 작가들은 작가촌과 슬럼의 경계에 서게 된다. 일찍이 들어왔던 팡리쥔 등 몇몇 작가가 안정된 작업 환경을 찾아, 1994년 베이징 퉁셴通县의 쑹좡宋庄으로 이주해 ‘쑹좡예술가촌’을 건설한다. 실제로 동촌과 원명원 화가촌뿐만 아니라, 당시 베이징 외곽 지역에 맹목적으로 상경한 농민공들로 구성된 저장浙江촌, 신장新疆촌 등이 형성되고 있었다. 정부는 1995년 가을, 베이징 일대 무허가 판자촌 정리에 들어가고, 결국 동촌과 원명원 화가촌도 해체된다.
1990년대 중반 방황하는 작가들을 흡수한 곳이 쑹좡과 718연합창 일대다. 오늘날 798예술구가 기타 예술구에 비해 성공적으로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미술 전문가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 718연합창과 멀지 않은 곳으로 이전하여 작가들을 끊임없이 공급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95년 중국 팔대 미술학원 중 하나인 중앙미술학원이 베이징 중심 왕푸징王府井에서 망경望京과 다산쯔 사이 화가디花家地로 이전을 시작하면서, 다산쯔 전자공장 부지에 1995~1998년까지 중앙미술학원 조소과 작업실이 꾸려지고, 당시 조소과 교수와 학생들이 모두 그곳에서 작업을 했다. 이전이 완료된 2000년, 중앙미술학원 조소과 교수 쑤젠궈隋建國를 시작으로 718연합창 공장지대로 속속 작가 작업실이 유입된다. 1990년대 말, 왕징 지역 아파트로 장샤오강張曉剛, 추즈제邱志杰, 쑹융훙宋永紅, 예융칭葉永青, 마리우밍, 잔왕展望 등이 작업실을 옮겼다. 이로서 왕징, 중앙미술학원, 718연합창에 이르는 베이징 동북부에 풍부한 인프라가 구축된다. 저렴한 임대료 외에도, 1950년대 동독의 설계로 지어진 바우하우스풍 공장들이 즐비한 718연합창은 작가들에게 넓은 작업공간을 제공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화랑에도 매력적인 전시공간이었다. 2002년 도쿄화랑의 프로젝트 공간인 BTAPBeijing Tokyo Art Projects 개막전은 718연합창이 798 예술구로 승화하는 전환점이 됐다. 2000년대 초반, 798예술구는 작가촌과 화랑가 두 가지 성격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발전한다. 낡은 공장지대가 문화예술 중심지로 재탄생한 798사례는 중국 정부가 주관하는 국제문화창조기업박람회에서 2006, 2007년 2회 연속 ‘중국 최고 창의적 공원中國最佳創意园區’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하지만 798예술구의 성장은 임대료의 상승을 불러왔고, 작가들의 엉덩이를 들썩이게 했다.
실제로 1990년대 말부터 798예술구 외곽에 작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으며 전략적인 예술구도 만들어졌다. 1999년 도예 디자이너 출신의 웨이강韋崗이 페이자费家촌 지역의 장아찌 공장을 개조한 ‘샹그리라香格里拉예술공사’ 작업실이 문을 열면서, 페이자촌에 자연적으로 작가 중심의 예술구가 형성된다. 반면 차오창디草場地 예술구는 2002년 ‘베이징 차오창디 문화예술센터’가 투자해서 건설한 계획 예술구이다. 이렇게 베이징에는 자연 발생적인 혹은 계획적인 예술구가 십수 개에 달한다. 경제 발전 속도만큼 빠르게 움직이는 베이징 미술계의 현장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두 전문가에게 들어봤다. 왕춘천 중앙미술학원 미술관 학술부 부장과 마쉐둥馬學東 예술시장분석연구센터(AMRC) 디렉터를 통해 중국 학술계와 시장의 시각을 비교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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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왕춘천王春晨
중앙미술학원 미술관 학술부 부장
(2013년 베니스비엔날레 중국관 큐레이터)
중국 동시대미술은 3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지난 30년간 베이징 미술현장의 중심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간단히 설명해달라.
1980년대 중국에는 현대적인 개념의 예술구가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진정한 의미의 개방이 이루어지지 않은 시기였으므로, ‘작가’들도 대부분 교편을 잡고 있었고, 보편적으로 자신의 집 혹은 직장에서 작업을 겸했을 뿐, 작업만을 위한 공간은 없었다. 현대적인 의미의 첫 예술구라면 둥춘東村을 꼽을 수 있다. 1990년대 둥춘을 시작으로 위안녕위안圆明园, 쑹좡宋庄에 작가들이 모여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이후에는 베이징 변두리 여기저기에 예술구들이 생겨난다. 베이징에 본격적으로 예술구들이 등장한 것은 2000년대에 들어서라고 할 수 있다. 798예술구를 비롯하여, 지우창酒廠, 추이거좡崔各庄, 페이자춘费家村, 이하오디一號地국제예술구 등이 비슷한 시기에 생겨났다. 이어서 헤이차오黑橋, 차오창디草場地, 다산쯔환태大山子環鐵국제예술성 지역에 예술구가 형성되었고, 비교적 최근에 스산링十三陵, 창핑昌平, 샤오탕싼小唐三 등지에 작가들이 모이고 있다. 작가들이 공간을 찾아 자유롭게 이동하고, 작가들이 모이는 곳에 자연스럽게 예술구가 형성되는 분위기이다. 대부분의 예술구가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에 반해, 정부가 주도하여 정책적으로 개발한 예술구도 있다. 베이징 남쪽에 위치한 관인당觀音堂 예술구가 대표적인데, 관인당 예술구는 실패했다고 본다. 작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예술구도 모두 성공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2010년 비교적 활발하게 움직이던 정양正陽 예술구는 정부 개발 정책에 의해 사라진 곳 중 하나다. 당시 몇몇 예술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정부의 도시관리정책하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2013년 가을, 몇몇 화랑이 798예술구를 떠나면서 매체에서 798예술구 상업화를 우려했다. 798예술구가 여전히 베이징을 대표하는 예술구라고 할 수 있나?
798예술구는 하루가 다르게 번화해졌고, 사람들로 붐볐지만 이곳을 꽉 채운 사람들이 모두 미술작품에 관심이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결국 화랑 입장에서 798이 번화해진다 해서 꼭 작품 판매량 증가와 연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반면 798 땅값은 오르고, 월세를 감당하기 어려운 화랑은 안정적 운영 안정을 위해 798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798의 주요 화랑들은 여전히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고, 몇몇 화랑의 이동이 798 전체 위상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본다. 결국 건강한 생태계를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예술구는 798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상하이로 몇몇 기관이 이동했지만, 여전히 주요 예술 관련 기구와 대표 예술가들은 비록 경쟁이 치열하지만 여전히 베이징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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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마쉐둥馬學東
AMRC 예술시장분석연구센터 디렉터
지난 30년 중국 동시대미술의 변화에서 예술구와 시장의 관계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달라.
베이징 최초의 예술구 개념은 예술가 집성촌에서 비롯되었다. 현재 예술구는 예술산업구 개념으로 화랑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작가 작업실과 기타 기관들도 공존한다. 하지만 문화 및 디자인 방면에 편중되어 있다. 전통 서화시장을 제외한다면, 대표적인 곳이 798예술구이다. 2013년 통계에 따르면 베이징에는 523개의 화랑이 있다. 그중 중국화 교역을 전문으로 하는 유리창에 255개 전통 화랑이 집중되어 있으며, 798예술구에 157개의 화랑이 모여 있다. 그리고 차오창디 예술구에 28개, 지우창예술구에 7개, 싼리둔三里屯 지역에 9개, 융허궁雍和宫 주변에 4개, 쑹좡에 37개, 22위안제22院街 예술구에 11개, 관인당에 15개 화랑이 운영되고 있다. 이러한 예술구 개념의 변화는 실제 예술환경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즉, 중국 예술산업 발전의 변화를 이른다. 예술시장이 발전한 지금의 예술구는 화랑가의 의미가 강하다. 작가 작업실도 공존하지만, 화랑이 중심이 되고 음식점, 카페, 예술 상품점, 디자인 전문점 등 창의적인 문화산업 기구들이 함께하면서 ‘산업’ 성격이 가미되었다.
현재 대륙 미술계 발전에 베이징 예술구가 어떤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까?
지난 12월 12일, 베이징에서 개최된 ‘제5회 중국 예술품시장 최고 논단’에서 베이징시 문화국 관위關宇 부국장은 베이징이 대륙에서 예술가, 화랑, 경매회사, 미술관, 박물관 등이 가장 많이 분포하는 문화예술의 도시라고 강조한 바 있다. 특히 베이징의 예술구는 대륙 미술현장의 중심으로서 중국 동시대미술 발전의 기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대륙 미술계를 선도하고 있다. AMRC 통계에 따르면, 현재 베이징시에는 총 520여 개의 화랑이 운영되고 있으며, 115개의 경매기관이 2013년 한 해 26만6957점을 거래했다. 동시에 21개의 예술품산업박람회(아트페어) 덕분에 베이징은 매달 풍성한 예술행사들로 가득하다. 더욱이 베이징시 한 해 경매 낙찰총액은 약 280억 위안(한화 4조9862억 원)으로, 전국 낙찰총액의 64%를 점유하고 있다. 여기에 각종 박람회, 화랑, 인터넷 거래량 등을 합산하면, 베이징시는 작년 한 해 미술품 거래액이 약 450억 위안(한화 8조136억 원)으로 산출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798예술구가 있다. 798예술구는 베이징 최대 규모를 자랑하고, 화랑, 작가 작업실, 비영리 기구 등을 갖춘 예술 환경이 매우 풍부한 단지이다. 대형 유명 화랑도 많을 뿐만 아니라, 유동 인구를 흡수하며, 동시대예술을 전파하는 기지로 그 영향력도 상당하다. 798예술구는 이미 베이징의 문화를 상징하는 명함과도 같은 존재이다. 베이징시 분포 화랑 중 30%에 해당하는 157개의 화랑이 798예술구에 집중되어 있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베이징=권은영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