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세계 미술현장의 새 지형도 서울

미술시장 변화가 인사동을 어떻게 변화시켰을까?
황석권  본지 수석기자

최근 10년 동안 서울의 미술현장은 지리적으로 이합집산 현상이 벌어졌다. 오랫동안 다양화되었다. 그간 우리 미술판의 터줏대감으로 인정받았던 인사동은 주축을 이루던 갤러리가 주변 사간동이나 통의동으로 이전하면서 그 지위를 잃었다. 반면 여타 신생 갤러리와 대안공간 등이 홍대 주변 그리고 청담동과 신사동 등 강남지역에서 개관해 예술 거리가 형성됐다. 따라서 미술현장의 중심은 와해되고 분화되는 양상으로 흘러갔다.
인사동은 근래까지 100여 년간 서울의 갤러리가를 대표하던 곳이다. 최열 인물미술사학회 회장은 “인사동은 1930년대 이래 1990년대 중반까지 서화골동을 아우르는 미술시장의 중심지였다. 대한제국기인 1897년 이래 1910년대 식민지 시절 북촌 양반가에서 쏟아져 나오는 서화골동품을 광통교나 19세기에 성행하던 남대문 밖 자기전磁器廛에 보내지 않고 별도의 거간居間을 통해 안국동이나 관인방(인사동)에서 매매하였던 까닭이 바로 그 장소의 차별화와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이미 차별화된 신분 계급에 맞춰 예술품에도 가치의 차별성을 부각하려는 의도가 개입됐다”고 설명했다. 그만큼 인사동 갤러리가의 역사는 짧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나 1990년 이후 서울의 갤러리가는 점차 분화되고 주변으로 확장되기에 이른다.
최근 가장 각광 받는 미술거리라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들어선 사간동과 삼청동 등 북촌 일대다. 서울관은 2008년 건립계획이 발표됐고 2013년 11월에 개관했는데 이를 계기로 이 일대의 유동인구가 급격히 증가했고 갤러리도 속속 들어섰다. 그중 눈에 띄는 곳이 바로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갤러리 스케이프 등이다. 또한 이곳과 경복궁을 사이에 두고 있는 통의동에도 갤러리가 꾸준히 들어섰다. 팔레 드 서울을 비롯해 인사동에 있던 아트사이드, 신사동에 있던 갤러리 시몬이 이곳으로 이전했다. 대구의 유력 갤러리인 리안갤러리도 이곳에 분점을 냈다. 소규모 공간도 들어섰다. 사진 전문 갤러리 류가헌이 그 대표적인 곳이다. 또한 이와 가까운 곳에 복합문화공간에무도 개관했다.
강남지역은 2008년 우리 미술시장이 정점을 찍을 무렵을 전후해 갤러리가 들어서기 시작해 그 수가 증가했다. 2005년 청담동에 건립된 네이처포엠 빌딩이 대표적인 예다. 많은 갤러리가 이곳에 입점해 운영에 들어갔다. 이외에 신사동도 가로수길과 도산공원 등을 중심으로 갤러리가가 형성됐다.  또한 스페이스 K, 송은아트센터, 갤러리 로얄, 코리아나미술관 스페이스 씨 등 기업체가 설립한 갤러리와 미술관이 속속 들어섰다. 이제 서울의 미술거리는 인사동이 전부가 아닌 것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먼저 우리 미술시장과 미술문화를 수용하는 태도의 변화와 궤를 같이한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서진수 강남대 교수는 “미술품을 매매하는, 이른바 미술품 유통시장은 역사적, 문화적으로 유서 깊은 인사동과 황학동과 신흥시장인 강남 지역을 들 수 있다. 전자는 공급자가 다수 모여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도시 재개발로 인해 구매력 있는 수요자가 몰려있는 강남지역 등으로 중심이 다변화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서울은 인사동을 중심으로 주로 강북에 갤러리가가 형성되었다가 강남의 신수요층, 즉 미술품을 소장할 수 있는 여력이 있는 부자 동네에 갤러리가 생겨나면서 지역적 분화가 시작됐다.
그렇다면 인사동이 예전 같지 않은 분위기를 자아내며 미술품 거래에서 한발 밀려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는 시장의 속성과 연결된다. 서 교수는 “갤러리가 밀집해 있으면 마케팅에 도움이 되고, 또한 그곳을 방문한 고객이 발품을 많이 팔지 않아도 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근래 인사동은 입지여건이 변화했다. 전통적인 미술거리나 갤러리가라기 보다는 관광지로 변한 것이다”라며 “입지조건이 관광객을 상대하는 업종에 유리하게 변화한 것이 지금의 인사동 쇠락을 야기했다”고 진단했다. 이런 현상은 중국의 798예술구도 마찬가지라고.
편익을 중요시하는 고객의 성향도 한 원인이다. 서 교수는 “인사동은 현재 주차문제를 비롯해 다른 지역과 비교했을 때 고객의 편익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이다. 고객은 편하게 전시를 관람하고 작품을 구매할 수 있는 지역을 선호하게 마련”이라며 갤러리가가 분화된 원인을 분석했다. 고객의 편익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쇠락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입지의 패러다임이 변화했음을 의미한다. 비슷한 업종이 몰려있을 때 작용하는 ‘집적의 경제’ 효과가 당장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경쟁은 더 치열해진다.
작품의 생산자인 작가를 프로모션하여 판매로 연결하는 갤러리 문화가 정착되지 못한 것도 인사동의 쇠락을 가져온 계기라고 서 교수는 지적한다. “대관전이라는 기형적인 갤러리 문화가 부동산 임대업과 무엇이 다른가?” 반문하는 서 교수는 “수없이 많은 비평, 자본의 투입, 마케팅을 동원해 궁극적으로 미술사에 남게 하여 리세일을 할 능력을 가진 곳이라야 온전한 갤러리라 부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갤러리 운영 패러다임의 변화는 개인화된 삶의 패턴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최근 활발한 1인 창업은 우리 사회가 시스템이 개인을 움직이던 시대를 벗어나 역전이 시작됐다는 방증이라고. 이전에는 갤러리를 운영하는 데 꽤 많은 자본과 인력이 소요되었지만 지금은 그것을 아웃소싱할 수 있는 다양한 여건이 구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운영과 관리 등은 비용을 지불하면 얼마든지 외부에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서 교수는 “현재 젊은 세대는 IT와 컬처테크놀로지가 결합한 이른바 ICT분야에 매우 관심이 많다. 공학에 문화를 합쳐놓으니 즐거움과 품위는 물론 경제적인 이득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갤러리 운영 방식의 변화는 세상의 변화와 맞물려 있는 셈”이라며 현상를 분석했다. 또한 서 교수는 젊은 컬렉터들에 대해 “정보력을 갖추고 교육받은 안목으로 작품 구매에 대한 신뢰를 구축하는 층”이라며 “이들은 갤러리의 위치에 대해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 여기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변화한 시장 분위기와는 상관없이 최근 우리 미술계에서는 특정한 장소에 모여 집단을 이루던 과거와는 다른 면모를 보이는 비상업 공간도 생겨나고 있다. 상봉동의 반지하, 교역소, 영등포의 커먼센터, 통의동의 시청각 등이 그곳이다. 이들에게 전시를 보려 찾아오는 관람객의 접근성이나 번듯한 시설이 주는 안락함 등은 심각한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물론 대부분 공간은 현실적인 문제로 비교적 임대료가 저렴한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이 공간들은 대부분 지향하는 목표를 강한 어조로 공표하고 있지 않다. 다만 개인의 만족감에 더 집중하는 듯 보인다.  함영준 커먼센터 멤버는 “이전에도 담론을 생산하는 공간은 집결해 있지 않았다”며 “그저 형편에 맞춰 운영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기존 논리에 포섭되는 활동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상봉동의 반지하 돈선필 ‘관리자’는 “젊은 작가들이 접근할 공간이 부재하다는 점이 이곳에 온 이유”라며 “이곳은 내가 운영하는 곳이 아니라 작가가 제안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가는 공간”이라고 밝혔다. 또한 “특정한 사명감은 없다”며 “소비되는 공간이라면 폐쇄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들의 실험이 어떻게 전개될지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다만 “젊은 기획자와 작가들의 열정과 실험은 중요하지만, 결국 제도와 자본에 대한 또 다른 신자유의적 연착륙 전략이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 공간의 역량은 기획만큼 운영의 대안이 없다면 결국 국가자본과 개인자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에 더욱 그러하다”라는 항간의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다. ●

 

SPECIAL FEATURE 세계 미술현장의 새 지형도 London

영국 (6)

영국 (7)

SLAM 페캄 투어 현장_보스앤바움갤러리BOSSE AND BAUM(왼쪽)_credits Bethany Lloyd, 한나배리 갤러리HANNAH BARRY _credits Bethany Lloyd

전통 중심지의 해체 위기
지가은  골드스미스 대학 비주얼 컬처 박사과정

런던 미술계의 공간적 지형도는 크게 세 지역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런던 시내의 서부지역West End과 동부지역 East End 그리고 남부 지역South이다. 이 세 지역을 중심으로 한 미술계 움직임은 영국의 정치, 경제, 사회적 환경 변화를 반영하면서 각 지역의 특성에 부응하는 예술문화를 형성했다.
먼저, 전통적으로 화랑가가 형성돼 있던 중심가는 서부지역의 메이페어Mayfair이다. 런던의 도심에 해당하는  이 지역은 국제적인 대기업의 본사들과 각국 대사관을 비롯해 각종 명품 브랜드 매장이 즐비한 번화한 상업지구 중 하나이다. 코크 스트릿Cork Street에서 듀크 스트릿Duke Street, 알버메르 스트릿Albemarle Street, 본드 스트릿Bond Street까지, 주로 부유한 개인 대표가 운영하는 상업 갤러리들이 일찍이 둥지를 틀었고, 오랜 기간 이름난 딜러와 컬렉터들의 주무대였다. 1925년 개관해 코크 스트릿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메이어 갤러리The Mayor Gallery나 말보로 갤러리Marlborough Fine Art Gallery와 같은 터주대감 격 갤러리들과 티모시 테일러 갤러리Timothy Taylor Gallery, 가고시안Gagosian, 화이트 큐브White Cube, 하우저 앤 워스Hauser & Wirth, 블레인 서던Blain Southern 등 뉴욕, 베를린, 홍콩 등지에도 지점을 둔 국제적 규모의 갤러리들도 모여 있다. 더불어 이 지역은 현대미술뿐만 아니라 유럽 올드마스터 회화나 조각작품을 집중적으로 거래하는 역사가 유구한 갤러리도 많은데, 콜나기Colnaghi나 애그뉴Agnew처럼 대를 이어 가족 사업으로 운영되는 곳이 대표적이다.
서부지역과 달리 동부지역은 런던에서 가장 낙후한 빈민가였다. 산업혁명 이후 도심의 일자리를 찾아온 이주 노동자들과 각국의 이민자들로 이 지역은 인구 과밀 상태에 이르렀고, 19세기 말까지 가난과 범죄로 악명 높았다. 영국 정부는 이러한 지역 간 빈부 격차와 문화적 불균형을 해소하는 지역재생사업에 착수했고, 그 일환으로 1901년 화이트채플 갤러리Whitechapel Gallery를 설립했다. 갤러리는 특히 1940~1960년대 유럽과 미국의 새로운 미술을 영국으로 유입하는 진보적인 통로가 되었고, 동부지역의 다문화적 배경과 공생하는 전시 및 교육 프로그램 기획에 힘쓰면서 대표적인 공립미술관으로 자리매김했다. 1970년대에 이르러 독dock이 폐쇄되고 여러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쇠퇴한 동부지역에는 점차 임대료가 저렴하고 공간이 넓은 작업실을 원하던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서부지역의 주류 갤러리들이 주도하는 미술의 고급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혹스톤Hoxton 지역을 중심으로 쇼디치Shoreditch, 마일 엔드Mile End 그리고 해크니Hackney까지 자신들만의 독특한 사회 비판적, 반항적 문화를 형성했다. 이후 실험적 시도를 하는 프로젝트 공간이나 신생 갤러리들도 속속 생겨났다. 이러한 변화는 지역 경제 자체에도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지금은 미술뿐만 아니라 음악, 디자인, 건축 등 다양한 분야 예술가들이 밀집한 덕분에 관련 사무실과 상점이 들어서면서 상권이 팽창했다.  이 지역의 대표적인 갤러리로는 빅토리아 미로Victoria Miro,  매츠 갤러리Matt’s Gallery, 다문화 시각예술연구소 이니바INIVA 및 비영리 사진예술단체 오토그라프Authograph ABP의 터전인 리빙톤 플레이스Rivington Place, 치젠해일 갤러리Chisenhale Gallery, 셀 프로젝트 스페이스Cell Project Space 등이 있다.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와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 사라 루카스Sarah Lucas 등 일명 ‘yBaYoung British Artists’라 불리는 스타 군단의 에너지가 배태된 곳도 이 동부지역이다. 긴축재정으로 영국의 경기침체를 극복한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가 장기 집권하면서 예술 분야에 대한 정책적, 재정적 지원이 현저하게 떨어진 시기, 이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소개할 자구책을 적극적으로 모색했다.  창고를 빌려 전시회를 개최하고 사기업의 후원과 대중매체 친화적인 태도로 자발적인 홍보에 임한 이들은 충격적인 형식과 내용의 작품으로 변두리에 있던 영국 현대미술을 국제 무대로 옮기는데에 큰 역할을 했다.
이렇게 동부에서 정점을 찍은 현대미술의 실험성과 열기는 남쪽으로 이어졌다. 테이트 모던Tate Modern과 헤이워드 갤러리Hayward Gallery에서 시작하는 템스강 이남 지역은 특히 골드스미스 대학Goldsmiths College과 캠버웰 미술대학 Camberwell College of Arts을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2000년 뱅크사이드Bankside의 테이트 개관을 신호탄으로 남동부 지역의 계획적인 재개발 착수는 동부의 예술적 분위기와 에너지를 버몬지Bermondsey, 페캄Peckam, 데포드Deptford, 그리니치Greenwich로 이끌었다. 이 지역에는 가스웍스Gasworks, 사우스 런던 갤러리South London Gallery, 한나 배리 갤러리Hanna Berry Gallery, 플랫 타임 하우스Flat Time House 등 다양한 성격의 레지던시 및 전시 공간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고, 대학가를 중심으로 신진 작가와 큐레이터들이 기획한 크고 작은 전시와 관련 이벤트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곳 갤러리들은 보다 효과적으로, 조직적으로 관객의 발길을 남쪽으로 돌리기 위해 2010년 ‘사우스 런던 아트맵South London Art Map (이하 SLAM)’이라는 네트워크를 발족했다. 주요 갤러리 위치를 안내하는 온라인 지도 서비스를 운영하며 서로 긴밀한 협력 관계 아래 전시 개막일이나 행사 날짜를 조정하고 권역별로 잘 알려지지 않은 전시 공간을 소개하는 투어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SLAM이 본격 가동되면서 이 지역 갤러리 수가 2배 이상 증가했고 새로운 미술 중심지로서의 활기에 가속도가 붙었다. 주목할 만한 변화 중 하나는 동부의 최전성기를 함께했던 화이트 큐브가 10년 넘게 자리를 지켜온 혹스턴 스퀘어를 떠나 2011년 버몬지 길목으로 옮겨갔다는 점이다. 동부지역이 상권 팽창으로 진부해져 예전같지 않자 새로운 기운이 움트는 남부지역으로 눈길을 돌렸다는 뜻이다. 한때 갤러리 밀집가로 많은 사람이 찾았던 동부의 바이너 스트릿Vyner Street은 대부분의 갤러리들이 빠져나가 한창때의 열기가 식었고, 예술가들과 영세 갤러리들은 지속적으로 오르는 임대료 시세를 피해 좀 더 깊숙한 동쪽으로, 남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해 최근 또 하나의 흥미로운 변화는 오히려 갤러리들이 동부에서 서부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30년 넘게 올드 스트릿Old Street에서 입지를 굳힌 빅토리아 미로도 얼마전 메이페어에 따로 지점을 열었고, 터너 프라이즈 우승자를 배출하는 등 동부에서 성장해 명성을 얻은 MOT 인터내셔널MOT International도 뉴 본드 스트릿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는 바쁜 시간을 쪼개어 런던에 들렀다 작품을 구매하고 바로 떠나는 컬렉터들의 발길을 잡기 위한 갤러리들의 선택과 집중 전략이기도 하다. 이들이 동부지역까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 뉴욕을 주무대로 활동하는 갤러리 세 곳, 데이비드 즈위르너David Zwirner와 마이클 워너Michael Werner, 페이스 갤러리Pace Gallery가 모두 2012년 메이페어에 새 지점을 열었다. 다시금 예전의 서부지역 부흥기를 연상시키는 움직임이다. 그러나 그 양상은 조금 다르다. 서부지역의 핵심가였던 코크 스트릿마저 거대 외국 자본의 부동산 투자 개발 압박에 못이겨 많은 갤러리가 떠났고, 대신 이미 포화상태에 이른 메이페어보다 근처 피츠로비아Fitzrovia 지역을 선택하는 갤러리가 늘어나고 있다. 2008년 이후 이 곳에 생긴 갤러리는 30곳이 넘는다. 서부의 전통적인 미술 중심지는 해체될 위기에 처한 반면 근접한 지역에서 새로운 움직임으로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서로 다른 지역성을 가진 런던의 각 미술 중심지는 이렇게 시기에 따라 주도권을 주고받으며 변화의 역사를 거듭했다. 이러한 변화에는 지역 간 빈부 및 문화 격차, 정부 차원의 문화예술 정책 등 여러 요인이 얽혀 있겠지만, 서부에서 동부로, 동부에서 남부로 이동하는 런던 미술 지형도의 움직임에도 어김없이 상업 자본의 흐름이 두드러지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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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줄리아 알바레즈는 아트 딜러이자 큐레이터. 2001년 골드스미스 대학을 졸업하고 2005년부터 런던 남부지역의 데포드 하이 스트릿Deptford High Street에 위치한 베어스페이스Bearspace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 남부지역의 미술 협력 네트워크인 ‘사우스 런던 아트맵South London Art Map’과 그 전신인 ‘데포드 아트맵Deptford Art Map’의 창립자이자 디렉터이다.
사우스 런던 아트맵 www.southlondonartmap.com
베어스페이스 www.bearspace.co.uk

영국 (3)줄리아 알바레즈Julia Alvarez
사우스 런던 아트맵(South London Art Map – SLAM) 디렉터

“런던 남부의 미술지형도가 변화하고 있다”

SLAM의 전신인 ‘데포드 아트맵Deptford Art Map’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이를 SLAM으로 확장하게 된 과정은?
데포드 지역 갤러리 대표들에게 보다 많은 관객 유치를 목표로 서로 협력해 아트맵을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일단 데포드 지역 갤러리들의 연대를 바탕으로 아트맵 서비스를 시작했는데 반응이 아주 좋았고, 관객들도 몰렸다. 지역 갤러리들이 저녁 늦게까지 전시를 오픈하는 ‘데포드의 밤Deptford Lates’을 진행하는 등 공동의 프로그램이 효과를 본 것이다. 《타임아웃TimeOut》, 《가디언Guardian》 같은 주요 매체에서도 아트맵에 주목했다. 그제서야 예술위원회 측이 이를 남부지역 전체로 확장해보자는 제안을 역으로 해왔다. 그래서 뱅크사이드와 페캄의 주요 갤러리 및 스튜디오까지 참여하게 되었고 지금은 버몬지와 그리니치까지 아우르게 되었다. 처음 70곳 남짓했던 참여 갤러리가 4년 사이 180곳으로 늘었다.

갤러리는 10년, SLAM은 4년차 운영에 접어들었는데 그간 남부지역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
일차적으로 갤러리 수와 관객 수가 늘었고 거주 예술가 수도 마찬가지다. 10년 전 함께 일한 작가가 모두 동부 지역에 살았다면 지금은 대부분 남부에서 작업한다. 남부에도 ACME나 ASC 같은 대형 스튜디오 건물이 많이 생기면서부터다. 그러나 여전히 갤러리와 아트맵 운영에 여러모로 지원과 생존전략이 필요하다. 이에 따라 남부는 앞으로 새로운 문화적 정체성을 띠게 될텐데, 여기에는 긍정적, 부정적 측면이 모두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그리니치 지역의 대규모 주택 개발에 투자한 중국계 업체는 단지 내 갤러리를 신설하고 SLAM의 그리니치 아트맵 확장을 지원했다. 단순히 지역 내 예술 인프라를 이용하기보다 이에 능동적으로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지역에 유입되는 자금의 흐름이 남부의 아트맵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

새로운 예술 허브로서 남부지역의 강점은 무엇인가? 남부지역만의 예술적 특색도 머지않아 동부지역처럼 상권에 밀려나지 않을까 하는 염려는 없나?
동부지역의 미술 지형도는 화이트 큐브나 데이비드 리즐리David Risley 같은 개인의 영향력을 중심으로 성장한 측면이 많다. 이들이 떠나면 그 영향력도 줄어든다. 5년 전까지만 해도 남부 지역에 이런 규모의 미술 네트워크가 생길 것이라고 예상치 못했다. 이 네트워크 뒤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다. 사람과 지역 공동체, 예술 사이에 진정한 교감이 이루어지고 있고 서로에 대한 일종의 책임감도 있다. 이러한 상호 협력이 이 지역의 중요한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남부가 앞으로 어떤 변화를 겪으며 성장할지 기대도 된다. 다만, 우리가 지금까지 다져놓은 SLAM이라는 토대가 보다 장기적으로 지속성을 가지고 변화에 대처할 수 있기를 바란다.
런던=지가은 통신원

 

 

SPECIAL FEATURE 세계 미술현장의 새 지형도 Paris

프랑스 (7)

페로탱갤러리Galerie Perrotin 본관

파리 갤러리, 수면 아래 백조의 발
심은록  미술비평

오랫동안 여행을 다녀와도 파리는 변하지 않고 늘 그대로인 것 같다. 서울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파리의 갤러리들도 호수 수면에서 유유자적 노니는 백조처럼 그렇게 고상하고 느긋하게 움직이는 것 같다. 적어도 겉모습만이라도 그렇게 보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 파리의 갤러리들은 수면 아래 백조의 발처럼 거칠고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패션만 유행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루이비통, 에르메스, BMW 아트카 등의 모드에 일조하는 슈퍼스타 아티스트의 동의어가 ‘브랜드 아티스트’라는 것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첨단적 감각을 미처 쫓아가지 못하면, 비록 단단했던 갤러리일지라도 문을 닫아야 한다. 이는 파리 갤러리만이 아니라 전 세계 갤러리의 대부분 상황이기도 하다. 불과 5년 전후로 프랑스의 현대미술 갤러리 지형도가 다시 그려진다. 우선 프랑스 전체의 갤러리 지형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2013년 6월, 프랑스 문화부에서 발표한 통계(《Culture Etudes》)에 따르면, 2012년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현대미술 갤러리는 총 2191개이다. 그중에 1000개가 넘는 갤러리(48%)가 파리에 집중되어 있다. 갤러리들은 파리의  20개 구區 중에서 대부분 3구, 6구, 8구에 위치해 있다. 예술구로 유명한 3구에는 퐁피두센터(국립현대미술관)와 마레지역이 있다. 이곳에는 206개의 현대미술 갤러리가 있으며 젊은 갤러리도 많다. 갤러리의 연평균 매상고는 115만 유로이며, 역사는 평균 16년 정도 되었다. 6구에는 189개의 갤러리가 생제르망 데 프레Saint-Germain-des-Prés, 생쉴피스Saint-Sulpice, 케 데 그랑조귀스탱quai des Grands-Augustins의 전통적인 삼각지대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는 국립미술대학과 2차 세계대전 이후 갤러리 덕분에 유명해진 거리들(뤼드 센, 뤼드 생페르, 뤼드게네고 등)이 있다. 이곳 갤러리들의 연평균 매상고는 190만 유로이며, 이 지역의 갤러리는 평균 23년 정도 되었다. 8구에는 152개의 갤러리가 있다. 이곳에는 특히 고가품 부티크이 많이 들어서 있다. FIAC과 아트 파리Art Paris가 열리는 그랑팔레, 세계적으로 중요한 옥션인 크리스티, 소더비, 아르퀴리알 등도 이곳에 있다. 이곳 갤러리들의 연평균 매상고는 107만 유로이며, 갤러리 역사는 평균 22년이다.
파리의 갤러리들은 프랑스 전체 매상의 86%를 담당하고 있으며, 4분의 3정도(72%)의 갤러리가 1차시장(작품이 갤러리를 통해 처음으로 공개 및 거래)에 관여하고, 나머지 4분의 1정도의 갤러리가 2차시장(경매와 같은 재거래 시장)에 참여한다.

주요 갤러리의 확장 혹은 소멸
프랑스는 2010년 이래, 갤러리 지형도가 많이 바뀌었다. 2010년 미술계 최대 관심사 중 하나는 래리 가고시안의 파리 입성이었다. 파리에는 이미 많은 외국 갤러리가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기에, 또 다른 미국 갤러리가 지점을 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래리 가고시안은 ‘미술계 최대 거상’이자 ‘미술계 파워 1인자’로 그 영향력이 지대하며, 제프 쿤스, 리처드 프린스, 데미안 허스트 등과 같은 현대 블루칩 작가들을 발굴하는 데 일조했다. 가고시안갤러리(Gagosian Gallery, 4, rue de Ponthieu, 파리 8구)는 프랑스의 중요한 미술 이벤트 중의 하나인 FIAC의 오프닝과 같은 날인 10월 20일 파리 샹젤리제 지척에, 그것도 크리스티 옥션 바로 옆에 갤러리를 개관했다. 그로부터 정확히 2년 뒤, 2012년 10월 FIAC 기간에 미술계의 두 가지 커다란 이벤트가 있었다. 가고시안갤러리와 타데우스 로팍Thaddaeus Ropac 갤러리가 각각 지점을 낸 것이다. 새로운 두 지점에는 공교롭게도 여러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두 지점은 비슷한 시기에, 같은 파리 외곽 93지역(Seine-Saint-Denis)에서 개관하고 첫 초대작가로 안젤름 키퍼를 초청했다. 로팍은 4,700㎡의 새로운 갤러리를 팡탱 (Galerie Thaddaeus Ropac Pantin, 69, av du Général Leclerc, Pantin)에, 가고시안 갤러리는 1,650㎡의 갤러리를 르부르제(Galerie Gagosian, 800, av de l’Europe, Le Bourget)에 열었다. 이 두 지점은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국제공항인 샤를 드골 공항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특히 가고시안은 FIAC이나 중요한 행사를 위해 외국에서 오는 슈퍼리치 컬렉터 전용기들이 이용하는 사설공항인 르 부르제에 있다. 바쁜 컬렉터들은 그들의 전용기로 르 부르제 공항에 착륙해 파리까지 들어갈 필요 없이 작품만 보고 바로 이륙할 수 있다.
물론 평범한 일반 관람객이 자동차 없이 이곳을 방문하기란 쉽지 않다. 가고시안과 로팍의 새로운 두 지점은 파리 본점보다 훨씬 거대하기에 규모가 큰 스케일의 작품들을 선보일 수 있으며, 웬만한 미술관을 능가하는 좋은 전시가 이뤄지고 있다. 이러한 큰 규모의 작품을 살 수 있는 컬렉터는 슈퍼리치 컬렉터, 미술관, 부자 재단들이다. 최근 바젤 아트페어에서는 갤러리 부스가 있는 메인 섹터를 좀 더 줄이고, 대신 거대한 설치작업을 보여주는 ‘언리미티드Unlimited’ 전시가 주목 받고 있다. 갤러리의 역할이 중요한 아트페어의 언리미티드 전시나 파리 외곽의 거대한 갤러리들은 대형 작품을 구입할 수 있는 중국이나 아랍 미술관들, 슈퍼리치 컬렉터들을 겨냥하고 있다.
‘프랑스의 가고시안’이라고 불리는 에마뉘엘 페로탱은 17세부터 갤러리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는 파리에 세 개의 갤러리를 소유한 것을 비롯해 뉴욕, 홍콩에 각각 갤러리를 가지고 있다. 무라카미 다카시나 마우리치오 카텔란과 같은 국제적인 작가를 세계적으로 알렸으며 소피 칼, 장 미셀 오토니엘 등이 이 갤러리에 속해 있다. 가고시안이나 로팍과 달리 페로탱 갤러리는 올해 5월, 두 번째 지점(60 rue de Turenne, 파리 3구)을 본점과 지척인 곳에 열었다. 프랑스 대중매체는 이 오프닝 전시 <GIRL>의 참여 작가보다 큐레이터에 관심을 집중했다. 미국 대중가수 퍼렐 윌리엄스가 특별 큐레이터였고, 신디 셔먼,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소피 칼, 무라카미 다카시 등이 참여 작가였다. 카멜 므누르Kamel Mennour도 본갤러리 지척에 지점(47, rue Saint-André-des-Arts et 60, rue Mazarine, 파리 6구, 2007년 오픈)을 냈다. 아니시 카푸어, 다니엘 뷔랑, 이우환 등 역시 국제적인 작가들이 이 갤러리에 속해 있다.
이처럼 확장을 거듭하는 갤러리도 있지만, 문을 닫는 곳도 있다. 이본 랑베르는 19세에 베니스에서 자신의 갤러리를 처음 열고, 1977년 파리 퐁피두센터 지척에 갤러리(108, rue Vieille-du-Temple, 파리 3구)를 오픈하여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 전파에 주력했다. 60여 년간 갤러리스트로 일한 이본 랑베르는 2014년 12월, 아델 압데세메드Adel Abdessemed의 전시를 끝으로 은퇴한다. 이본 랑베르는 은퇴하는 형식을 취했기에 아쉬움은 있어도 커다란 반향은 없었다. 하지만, 1년 전, 젊고 잘나가던 제롬 드 누아몽 갤러리(Galerie Jérôme de Noirmont, 38, avenue Matignon, 파리 8구)가 문을 닫을 때는 미술계에 충격을 주었다. 제롬 드 누아몽과 에마누엘 드 누아몽 부부는 “갤러리를 운영하기에는 오늘날 프랑스의 정치, 경제, 사회적 배경이 열악하다”고 한탄했다. 일례로 프랑스 현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가 그의 대선공약을 지켜 2012년 5월부터 부유세(연간 100만 유로 수익의 고소득자에게 수입의 75%를 과세)를 시행했다. 이에 따라 많은 부자가 부유세 압력을 피해 가까운 외국으로 국적을 옮기는 리치노마드 현상이 가속화되었다. 부유세가 시행된 2012년, 벨기에 국적을 신청한 프랑스인 수는 4만7000명에 달했다.
<아트바젤> 디렉터를 역임한 사무엘 켈러는 “예술은 자본이 있는 곳에서 발전한다”고 말한 바 있다. 컬렉터들이 있는 곳으로 갤러리가 이전하거나 분점을 내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다니엘 템플랑 갤러리스트(30, rue Beaubourg, 파리 3구)의 부인 나탈리 오바디아 갤러리스트는 1993년 그의 갤러리를 파리에 열고, 2003년 퐁피두 지척에 분점(3, rue du Clotre-Saint-Merri, 파리 4구)을 낸 데 이어 2008년 브뤼셀에 지점을 냈다. 이처럼 프랑스 갤러리 다수가 브뤼셀에 지점을 내거나, 아니면 아예 브뤼셀로 옮겨간다. 프랑스 미술시장은 항상 세계 10대 주요 시장에 속하면서도, 정치경제적으로 복합적인 요소가 예민하게 작용하기에, 그 크기나 전통에 비하면 프랑스 현대미술의 판도는 약한 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루이비통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벨기에 국적취득을 취소한 것과 프랑수아 피노(프랑스 국적)가 여전히 프랑스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프랑스 현대미술의 든든한   양 축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현재 퐁피두센터는  제프 쿤스의 회고전(2014.11.26~4.27)을 개최하고 있음에도, “재정적인 문제 때문에 그의 작품을 한 점도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고 관장 베르나르 블리스텐Bernard Blistène은 말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중요 미술관, 뜻있는 갤러리, 훌륭한 예술가가 아니라, 슈퍼리치 컬렉터나 상업적 갤러리가 예술의 축이 되는 것은 프랑스뿐만 세계 전반적인 안타까운 현실이다. ●

퐁피두센터 앞에서 벌어진 거리 공연

퐁피두센터 앞에서 벌어진 거리 공연

 

 

SPECIAL FEATURE 세계 미술현장의 새 지형도 Wien

 

Skulpturen im öffentlichen Raum, Viertel 2, 1020 Wien

마르코 룰리치Marko Lulic <토털 리빙Total Living> (사진 뒤) 2012 Courtesy: Gabriele Senn Galerie, Vienna과 한스 바이간트Hans Weigand의 <파도막이 Wellenbrecher> 2013 Courtesy: Gabriele Senn Galerie, Vienna. 가브리엘레 젠 화랑과 부동산 개발업자 미하엘 그리즈마이어 Michael Griesmayr가 빈 제2구역의 경제・문화환경 및 공공공간 삶의 질 개선이라는 주제로 협력한 <피어텔 츠바이Viertel Zwei> 조각공원 프로젝트에 출품된 작품들

오픈 스튜디오 데이 2014년 열린 빈 아트 위크 페스티벌 중에서 작가들이 화랑이나 개인 아틀리에에서 직접 관객들을 만나 전시를 하거나 작품을 설명하는 모습. Photos: Florian Rainer. Courtesy: Vienna Art Week 2014

오픈 스튜디오 데이 2014년 열린 빈 아트 위크 페스티벌 중에서 작가들이 화랑이나 개인 아틀리에에서 직접 관객들을 만나 전시를 하거나 작품을 설명하는 모습. Photos: Florian Rainer. Courtesy: Vienna Art Week 2014

고로古老파 화랑과 신세대 화랑이 공존하는 현대미술 그린하우스
박진아  미술사

지난 4, 5년 간 빈은 런던, 파리, 로마에 이어 세계인에게 인기 있는 관광도시로 떠올랐을 뿐만 아니라, 영국 시사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매년 선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10위’ 랭킹 최상위를 놓치지 않을 만큼 ‘삶의 질이 높은 도시’이다. 그 같은 정평에 걸맞게 빈 도심 핵심권의 부동산 가격은 부르는게 값이 됐을 만큼 천정부지로 뛰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내벽을 드러낸 채 방치되었던 역사주의풍 고건축물들은 오늘날 말끔히 복원되고 산뜻하게 도장돼 시민들과 관광객들을 반기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빈을 찾은 해외 관광객이나 문화 순례자는 음악회와 무대공연 극장은 즐겨 찾지만 화랑가를 찾는 일은 별로 없다. 화랑가라고 부를 만한 거리나 구역도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일찍이 근대기 이전 합스부르크 황실 시절부터 빈은 고전음악과 무대예술의 중심도시인 반면, 시각미술 분야는 그에 비해 덜 주목받았던 것이 그 이유다. 그러나 최근 빈의 미술계는 그 어떤 문화영역보다 큰 순풍을 받고 앞으로 항해 중이다. 예컨대 2003년 발족한 디파처departure 예술후원에이전시를 비롯해, 2009년 창설돼 빈 시정부와 은행이 후원하고 디파처가 조직하는 연례 화랑계 페스티벌인 큐레이티드 바이 빈curate by_vienna, 빈 갤러리 주말Vienna Gallery Weekend, 빈 아트 위크Vienna Art Week, 빈페어 현대미술 박람회Viennafair 같은 행사들을 통해 빈 시는 시각미술 분야에 취약한 도시라는 과거 인식을 불식하고 앞선 현대미술 도시라는 인상을 널리 알리려는 노력에 한창이다. 그 결과 특히 1960~1970년 빈의 화랑들은 근현대 미술사조와 문화정책 변천과 더불어 외양적 변화를 거쳤다. 제2차 세계대전 패망 직후 빈에서 문을 연 최초의 아방가르드 화랑은 갤러리 넥스트 상크트 슈테판Galerie nächt St. Stephan이다. 이는 전설적인 화랑업자 오토 니렌슈타인이 개업한 노이에 갤러리(1923년)의 후신 격으로 오토 마우어Otto Mauer가 1954년에 설립했다. 빈 최초의 여성화랑주이자 근대 빈 화랑계의 대모인 로제마리에 슈바르츠벨더Rosemarie Schwarzwälder가 지금도 운영하고 있는데 이 화랑은 종전 직후 유럽 앵포르멜계 회화와 빈 행위주의 퍼포먼스에 주력한다.
빈 도심의 이른바 ‘제1구역 빈 화랑계’는 1970년대 초 소수의 선구적 화랑이 개업하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를 거치면서 현재까지 도시 전체에 약 70군데가 운영 중이다. 1971년, 빈 화랑계의 여족장 우르술라 크린칭어가 크린칭어 화랑Galerie Krinzinger을 정부부처 건물들이 앞뒤로 들어차 있는 도심 제1구역 남서쪽과 빈 응용미술대학 사이 자일러슈테테Seilerstätte 거리 16번지 건물 2층에 차렸다. 역시 빈 화랑계의 선두주자로 꼽히는 엘리자벳 & 클라우스 토만 화랑Galerie Elisabeth & Klaus Thoman(본점 인스브루크)은 같은 거리 7번지에, 그리타 인삼 화랑Galerie Grita Insam이 암 호프 거리에 둥지를 틀었고 이어서 1976년 마이어 카이너Meyer Kainer 화랑이 개업했다. 이 두 화랑 주변과 사이사이로 난 골목에 크로바트 갤러리Galerie Krobath, 갤러리 슈타이넥Galerie Steinek, 갤러리 메차닌Galerie Mezzanin, 갤러리 카림Galerie Charim,  갤러리 힐거Galerie Ernst Hilger, 갤러리 후베르트 빈터Galerie Hubert Winter(7구역으로 이전) 등이 차례로 들어섰다.
1998년, 자유 큐레이터 겸 기획자로 일하던 4인방이 기존 자일러슈테테 화랑판과 차별화하자는 뜻에서 의기투합해 새 화랑가 구축을 선언했다. 게오르크 카르글Galerie Georg Kargl, 크리스티네 쾨니히Galerie Christine König, 젠Galerie Gabriele Senn, 엥홀름Galerie Kirstin Engholm 네 곳 화랑이 개업하자 이 거리서 50년 넘게 장사해 온 안첸그루버 카페Café Anzengruber는 미술인, 작가, 지성인들이 모여 차와 대화를 나누는 예술가 아지트로 유명해졌다. 나슈마르크트 재래시장과 세세션Seccession 미술관 근처 한산한 제4구역에 허름하던 슐라이프뮐Schleifmühl 이 거리는 오늘날 레스토랑, 카페, 바, 부티크들이 들어선 ‘트렌디’한 거리가 되었다.
2000년 슐라이프뮐 거리의 탄생과 국제현대미술 붐이 본격화하자 제1구역 자일러슈테테 거리를 중심축으로 흩어져있던 기존 화랑들은 저마다 재편성 전략에 바빠졌다. 자일러슈테테파 화랑들은 슐라이프뮐 거리 새 화랑가로 대거 이주하기보다는 저마다 색다른 아이덴티티 전략을 취했는데,  그 전략은 대략 3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본래 화랑 자리를 그대로 유지한 채 다른 구역에 프로젝트 전시 용도로 분관 공간(7구역)을 차리는 전략인데, 크린칭어 프로예테, 힐거넥스트와 힐거브롯쿤스트할레(10구역)가 그런 예다. 둘째는 본래 자일러슈테테 거리 인근 화랑 자리를 버리고 새 자리로 이동하되 원 화랑 위치와 슐라이프뮐 거리 중간의 절충 지점(1구역과 7구역 경계)인 에센바흐 거리로 이전한 전략으로 슈타이넥, 메차닌, 크로바트가 그런 예다. 셋째는 제1구역 선구화랑의 본산지로서 자일러슈테테의 브랜드를 활용해 자일러슈테테 인접 골목으로 이전한 경우로 그리타 인삼, 마리오 마우로너Mario Mauroner Contemporary(본점 잘츠부르크)나 에마뉘엘 라이르Emanuel Layr 화랑이 그러하다.
이렇게 21세기 글로벌 시대에 맞춰 지난 10년 사이 이합집산을 거친 빈의 화랑가는 뉴욕의 어퍼 이스트 사이드나 소호, 런던의 메이페어나 세인트 제임스 화랑구역 같은 집중된 영미식 화랑가에 비하면 느슨하고 비상업적인 인상을 준다. 종전 직후 화랑은 국립미술관, 컬렉터, 국가급 대표인사들의 문화적 동반자 겸 협력자 역할을 담당했고, 전시 기획 및 작가 후원에 정책을 반영하는 일이 이윤추구보다 급선무였다. 정부 차원에서 현대미술을 제도적으로 지원하게된 후 빈의 미술계는 많이 달라졌다. 지난 2010년 8월호 독일의 월간 《아트Art》는 “빈은 새로운 베를린?”이라는 제하에 오스트리아 수도의 미술계를 진단하는 기사를 실었다. 실제로 오스트리아 연방정부와 빈 시정부는 2000년대 초엽부터 빈 미술계의 세계화와 역동성을 장려하기 위해 현대미술가 지원책을 펴왔다. 부동산 개발업자 겸 미술컬렉터인 마르틴 레니쿠스 같은 인물은 아예 정부부처나 일부 화랑과 협력해 미술인용 공동거주 아파트를 지어 저가에 제공하고 있고, 빈 쿤스트할레는 5년에 한 번씩 <빈에서 살며 작업하기Lebt und arbeitet in Wien전>(2000년 10월, 2005년 5월, 2010년 3월, 2015년 예정)을 기획해 국제 수준의 현대미술 창조 도시로서 빈을 점검해왔다. 과거 빈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와 국경이 인접한 동유럽권 국가에서 온 미술가가 많았으나, 최근에는 스위스, 러시아, 불가리아, 터키, 미국 출신 작가 수도 증가하는 추세다.
빈의 화랑계는 경쟁적인 실험주의 분위기로 미술가들을 압박하는 베를린과도, 그렇다 해서 냉철한 돈의 원리가 지배하는 상업지상주의적 뉴욕이나 런던과도 다르다. 빈의 미술시장은 소규모인데다가 오스트리아에서 거래되는 미술작품 수의 80%는 해외 기성 작가 작품들이 차지한다. 반면에 신진 작가들이 화랑의 높은 문턱을 넘어 전시 기회를 얻기란 여전히 쉽질 않다. 한시바삐 전시 경력을 쌓아야 할 젊은 미술가들은 클럽, 창고, 지하실 같은 버려진 공간서 게릴라 전시회나 아틀리에 오픈하우스를 연다. 그만큼 그들의 마음은 조급하다. 이 모두 아랑곳없이 예나 지금이나 빈 미술계와 화랑가는 언제나 그랬듯 느긋하고 한산하다.
빈은 유럽 근대기 프로이트 심리분석학의 고향이다.  미술 창조의 동기와 결과물로서의 작품은 억압된 인간의 무의식세계가 시각화돼 외부로 표출된 인간의 몸부림이며,  그 같은 미술은 하루아침에 성취되지 않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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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마르틴 프리츠는 법학을 전공하고 빈에서 활동하고 있는 큐레이터, 문필가, 미술 컨설턴트다. 본래 1980년대에 빈의 무대공연예술 제작 활동을 시작했으나 시각미술 분야로 관심을 전향해 미술관 및 정부부처 미술기관과의 협력으로 다수의 공공 미술프로젝트 조직 운영을 담당했다. 뉴욕 MOMA P.S.1 재개관 운영부 디렉터, 2000년 독일 하노버 엑스포 아트 프로젝트, 2002년 마니페스타 유럽 현대미술 비엔날레,  빈 퀸스틀러하우스에서 미술과 미술제도권을 비평적으로 조망한 전시를 운영했다. 마니페스타 조직 상임위원회(2001~2007), 버외스터라이히 지역 페스티벌Festival of Regions 디렉터(2004~2009)를 역임했으며, 현재 빈 쿤스트할레 감사위원과 빈포헤WienWoche 이사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현대미술시장에 대한 이모저모를 분석비평하는 ‘causeries du lundi’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마르틴 프리츠Martin Fritz와의 인터뷰

“빈 미술계는 국가가 주도적으로 운영”

전 세계 대표적인 미술 중심 도시의 화랑계와 비교할 때 미술 도시로서 빈의 특징이라면?
글로벌화라는 배경에서 볼 때 글로컬적 빈 화랑계는 이 도시의 지리적 배경과 연관이 깊다. 첫째,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시대를 거치면서 빈은 근대기 빈 문화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유대계 문화인사들을 잃는 막대한 문화적 상실을 겪었다. 둘째, 빈의 미술계는 시장주도적이기보다는 국가주도적이라는 구조적 특성을 지녔다. 국가 차원의 예술가 후원제도patronage는 일찍이 합스부르크 왕정 시대부터 이어져온 전통으로 과거 음악과 무대예술 분야에 치중되었으나 20세기 종전 이후부터 오스트리아 정부는 시각미술 분야를 집중적으로 후원하는 정책으로 전환했다. 1980~1990년에 빈에서는 뮤지움스쿼르티에MuseumsQuartier 같은 공공 종합 미술관 단지가 개설되어 지역적 차원에서 미술붐이 일기 시작해 오늘날 빈 미술에 대한 대외인지도가 향상되었다고 본다.

당신은 1980년대부터 줄곧 빈 화랑계와 미술계를 관찰해왔는데 20세기를 거쳐 문화의 글로벌화・세계화가 만연한 현재에 이르기까지 빈 화랑계의 특징이라면?
빈의 화랑계는 종전 직후 빈 제1구역에서 로제마리에 슈바르츠벨더의 갤러리 넥스트 상크트 슈테판을 초대 화랑으로 해 크린칭어, 마이어 카이너, 페터 파케시 같은 몇몇 선구적인 미술딜러가 주축이 돼 형성되었다. 특히 지난 10여 년 사이 제4구역 슐라이프뮐 거리가 생겼고 인근 구역에 여러 화랑이 들어섰다다가 사라지는 과정을 거쳐 오늘날 국제급 수준으로 자리잡은 빈 화랑은 15~20군데로 꼽는다. 제1구역에 선구적으로 개업한 설립자들이 지금도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고 그렇다보니 빈 화랑계의 중심 세력은 변함없이 제1구역에 집결되어 있다.

지난 몇 년 큐레이티드 바이 빈, 빈 갤러리 주말, 빈페어 등 오스트리아 연방정부와 빈 시정부가 유독 시각예술, 특히 현대미술을 국가적 차원에서 활발하게 후원하는 목적은? 21세기 국제관광업, 도시환경 개발사업 같은 경제적 의도도 있는가?
전통적으로 오스트리아 정부가 문화예산을 할당하여 거행되는 미술행사들은 시민의 의식수준을 높인다는 교육적인 목적과 사회 공공문화 수준 개선이라는 공리적인 목적이 우선이다. 물론 리처드 플로리다식 창조도시론 선상에서 도시 미술을 통해 정체된 도시 일부 지역이나 거리를 활성화하려는 노력은 지난 몇 년간 제2구역(전통적으로 유대인 게토 구역이었다)과 최근 제10구역(전통적으로 공장이 많아서 육체노동자들과 이민자들이 모여 살던 구역)에서 시도된 바 있다.

최근 베를린 화랑계가 주춤하면서 빈을 새로운 현대미술 중심지로 보고 잠재력을 평가하기도 하는데?
베를린과 빈을 오가며 ‘이중생활’을 하는 미술인은 일찍부터 많았다. 특히 여행이 쉽고 값싸진 요즘, 임대료가 싸고 박진감 있는 도시 환경에서 영감을 받아 베를린과 빈을 오가며 작업하는 미술인이 많다. 베를린은 최근 급속한 젠트리피케이션을 겪은 반면, 빈은 그 같은 무자비한 부동산 개발과 그로 인한 임대료 상승 현상이 덜하고 일반적인 생활환경이 안정적이다. 창조활동을 위해서 도시환경적 충돌과 자극적 영감도 필요하지만 안정성이 중요하다.

한국을 비롯해 최근 전 세계 여러 국가에서 창조산업 및 창조경제론을 국가 및 도시 핵심정책으로 내세워 추진하고 있다. 빈의 경우는 어떠한가?
오스트리아 연방정부와 빈 시정부 차원 미술후원제의 65%는 여전히 합스부르크 황실부터 해 오던 전통적 국가주도식 후원체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창조산업 분야 후원을 위해 2003년 발족한 빈 시립 디파처 에이전시는 지난 몇 년간 지속해온 부터 미술과 디자인 분야 비영리 단체 후원을 그만두고 그 대신 우수한 예술적 창조력과 상업적 잠재력을 겸비한 미술가 혹은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전략으로 방향선회했다. 최근 국제 미술시장 붐에 힘입어 빈 화랑계도 국가 후원을 받는다. 그 결과, 빈의 화랑계 현황은 ‘강한 제도권 대 미약한 시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대다수 인구가 미술 구매자가 아니다보니 빈페어 현대미술박람회의 경우 이 행사만의 독특한 틈새시장을 개척했으나 출품작들은 여전히 저가대가 주를 이룬다.

미래 빈의 화랑계, 더 나아가 빈과 국제 미술시장에 대한 당신의 전망은?
고가와 저가 미술의 가격 차이가 한층 더 벌어질 것이라고 본다. 현재 국제 현대미술시장 전개 양상을 보건대 현대미술의 상품화에 따라 고급화/고가화된 인기 미술품과 이른바 예술지향적/콘셉트 및 지성지향적 미술품은 초저 가격대를 형성하며 극과극 가격대를 이룰 것이라 본다. 물론 오늘날 저가 현대미술품이 훗날 값진 미술품으로 인정받아 초고가 대열로 지위 전환할 수 있겠으나 미래 스타를 미리 점치기는 매우 어렵다. 미술품 가격대의 양극화 현상은 화랑계에 던져진 결정적인 도전거리가 될 것이다.
빈=박진아 통신원

 

SPECIAL FEATURE 세계 미술현장의 새 지형도 Berlin

독일 (4)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전경. 예전에 베를린 장벽이 있었던 곳이다

신데렐라 베를린
최정미  독립 큐레이터, 디스쿠어스 베를린 대표

‘자고 일어났더니 유명해졌다’가 아니고 ‘자고 일어났더니 독일이 통일되었더라.’ 1990년 하룻밤 사이에 베를린은 전 세계의 주목, 감동을 주는 동시에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1994년 수도가 본에서 다시 베를린으로 옮겨졌는데 정치인뿐만 아니라 문화예술 관련 산업도 점점 베를린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발터 벤야민, 테오도어 아도르노, 위르겐 하버마스 등 철학 대가들의 저서를 출간하던 주어캄프Suhrkamp가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으로 이주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베를리너 모겐포스트Berliner Morgenpost는 2014년 11월 현재 베를린에 약 350만 명이 살고 있으며 통독 후 270만 명이 베를린을 떠났고 290만 명 정도가 새 수도로 이주했다고 보도했다.
독일인 외에 덴마크, 스페인, 이스라엘,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고 미국에서 온 젊은이들이 새로운 이민자 물결을 만들었다. 뉴베를리너 중 미술인 외에 창작업에 종사하는 영화인, 음악가, 건축가, 패션디자이너들이 그 주축을 이루며 이들은 부유한 서베를린 대신 비교적 낙후한 동베를린 미테Mitte, 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 프레드리히스하인
Friedrichshain 지구에 커뮤니티를 형성했다. 당시 이 지구에는 공산정권 때 돌보지 않아 낡고 우중충한 건물이 넘쳐났다. 내부공사로 수리하기에는 경제적 부담이 크고 매매하기에는 적절한 시기가 아닌 이 건물들은 주인장에게는 뜨거운 감자 같은 존재였다. 늘 그렇듯 건축물 용도가 어정쩡할 때 예술은 만병통치약처럼 쓰인다. 건물주는 우선 예술가와 갤러리스트에게 싼 월세 혹은 공과금만 내게 하고 건물을 빌려줬다. 곧 덥수룩한 수염조차 멋스러운 젊은이, 눈이 초롱초롱한 모델 같은 여자들이 들락날락하는 곳이 되고 동네 거리 곳곳에는 슬슬 공사표지판이 세워졌다.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이 시작된 것이다. 지금은 비싼 동네가 된 미테 지구의 브루는스트라세Brunnenstrasse가 그렇고 중앙역 근처 콘도 개발지역이 된 하이데스트라세Heidestrasse가 한 예이다.

역시 베를린 미테
시 중심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어 미테(중앙)라 불린다. 여행책자에 나오는 관광명소와 미술관, 박물관 외에 블루칩 갤러리가 가장 많이 밀집해있다. 미테에는 지면이 모자랄 정도로 흥미로운  전시공간과 화랑들이 밀집해 있는데 이중 가장 유명한 거리는 아우구스트스트라세, 코흐스트라세, 루디-둣츠케-스트라세, 린덴스트라세Auguststraße, Kochstraße, Rudi-Dutschke-Straße, Lindenstraße일 것이다. 아우구스트스트라세에는 베를린비엔날레를 주관하는 카붸(KW Institute for Contemporary Art in Berlin), 신라이프치히 화파의 대표적 작가가 적을 둔 아이겐+아트Galerie Eigen+Art 그리고 괴짜 컬렉터 토마스 올브리히트Thomas Olbricht가 설립한 미 컬렉터스 룸Me Collectors Room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카붸 건너편에 나치와 동독정권을 모질게 겪고 1996년 폐쇄된 전 유대인 여학교Ehemalige Judischen Madchenschule는 정성스러운 공사 후 2012년에 럭셔리한 예술공간으로 회생했다. 미술인과 컬렉터의 레스토랑 파울리 잘Pauly Saal 외에 미하엘 푹스 갤러리Michael Fuchs Galerie, 아이겐+아트 랩, CWC 갤러리 등이 유명하다. 미테는 아트바젤위원회 심사단을 맡았던 노이게림슈나이더Galerie neugerriemschneider, 노든하케Nordenhake, 마이어 리거Gallery Meyer Riegger 그리고 스프루트 마거스Spruth Magers, 콘라드 피셔Konrad Fischer Galerie 같은 글로벌 플레이어의 서식지이며 당분간 그 위상을 유지할 것이다.

총천연색 크로이츠베르크
미테처럼 시크하다기보다는 얼터너티브한 성격이 강한 크로이츠베르크는 벌집처럼 항상 분주하다. 데모, 전시, 파티를 밥 먹듯이 하는 곳이며 모슬렘 여인의 차도르, 힙스터, 영화인, 한량 그리고 예술인이 섞여 묘한 균형을 이루는 현장이다. 젊은 유럽인 관광객 외에 예술인을 바다의 모래처럼 볼 수 있는 동네이기도 하다. 콧부써 토어Kottbusser Tor, 모리츠플라츠Moritzplatz 역 주위에는 바, 식당, 미술관, 대안공간, 젊고 실험적인 성격이 강한 화랑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또한, 미술인의 로망인 미술용품가게 모둘러Modulor,
강한 네트워크를 자랑하는 레지던시 베타니엔 쿤스틀러하우스Künstlerhaus Bethanien, 대표적인 대안공간 쿤스트라움 크로이츠베르크Kunstraum Kreuzberg, NGBK 쿤스트 퍼아인 등이 있다. 갤러리 중에는 파티를 예술처럼 여기는 갤러리스트 마틴 콰데Martin Kwade가 운영하는 콰드랏KWADRAT, 독일 미술계의 로열패밀리 쾨니히 아들 요한 쾨니히Johann König의 갤러리를 들 수 있다. 물품을 보관 수송하던 하역 역사 스테이션-베를린에서는 아트페어ABC(Art Berlin Contemporary)가 매년 9월에 열린다.

디즈니랜드 프레드리히스하인
슈프레Spree강을 끼고 크로이츠베르크와 프레드리히스하인 중간에 위치해 동서독의 경계이기도 했던 오버바움 다리Oberbaumbrücke는 20~40대 관광객의 성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주말에는 오버바움 다리와 예전 베를린장벽이 있었던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를 중심으로 젊은이들이 그야말로 떼거리로 몰려다닌다. 이 근처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클럽 베르그하인 외에 종류와 성격이 가지각색인 클럽들이 무수히 몰려 있다. <해머링 맨>으로 유명한 조나선 보로프스키Jonathan Borofsky의 <Molecule Men>은 슈프레 강에 설치되었는데 오버바움 다리와 함께 프레드리히스하인의 상징물이다.  블루칩 갤러리 카피탄 펫즐Capitain Petzel 그리고 대안공간 아우토센터Autocenter의 디렉터 마이크 시얼로Maik Schierloh가 운영하는 코즈메틱잘롱 바베테Kosmetiksalon Babette가 동독의 대표적인 거리였던 카를 막스 알레Karl-Marx-Allee에 자리 잡고 있다. 프레드리히스하인은 화랑 집중 지역이기보다는 작가 집중 지역이라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크로이츠베르크에는 모슬렘, 흑인, 백인이 두루뭉술하게 섞여 있는 반면 프레드리히스하인에는 주로 유럽과 미국계 백인이 몰려 있다.
홍등가로 유명한 서베를린 포츠다머슈트라세Potsdamer Straße, 쿠어퓨어스튼슈트라세Kurfürstenstraße에는 미테의 비싼 월세를 못 이기고 옮겨온 신진 갤러리들이 자리를 잡았다. 블레인 서던 갤러리Blain Southern Gallery, 갤러리 탄야 바그너
Galerie Tanja Wagner, 마티아스 아른트Matthias Arndt 등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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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통일 후 베를린 미술현장의 변화를 치열하게 경험한 얀 카게를 그의 전시공간인 샤우펜스터Schau Fenster에서 만났다. 스스로 ‘이상주의자’라고 주장하는 그는 1997년에 베를린으로 이주했으며 ‘야넥Yaneq’이라는 예명으로 유명하다. 2009년부터 Flux FM 라디오에서 <Radio Arty>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2010년부터 크로이츠베르크 지구에서 샤우펜스터를 운영한다. 질문하기도 전에 야넥은 예술의 기본은 ‘태도Haltung’이며 독재주의에 가깝다고 외친다.

독일 (2)얀 카게Jan Kage
샤우펜스터 디렉터, 큐레이터, 저널리스트

“지역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로서의 미술”

대안공간 샤우펜스터는 재정적으로 어떻게 운영되는가?
지원금이나 스폰서링에 매달리고 싶지 않다. 오프닝과 전시 기간에 바를 운영하며 이 수익금으로 운영한다. 약간의 수익이 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적자를 면할 정도이다. 대신 아트페어에 참여해 수익을 올린다. 베를린에 약 1만 명의 작가가 있다는데 컬렉터 층이 아직은 척박하다. 그래서 전문 미술지 《쿤스트마가진》과 함께 ‘컬렉터와의 대화’를 미테에 위치한 ‘바1000’에서 정기적으로 진행한다. 딱딱할 수도 있는 행사가 바에서 열려 비교적 편하고 자유스러운 분위기가 형성된다. 컬렉터 있는 곳에 갤러리스트가 모이고 이 두 그룹이 모이는 곳에 작가들도 온다.

베를린식 젠트리피케이션이란?
동독인은 변화를 뼈저리게 느꼈다. 사회주의에서 성장한 동베를리너는 통일이 되면서 갑자기 일자리를 잃어버렸다. 반면 전에 특정계층의 전유물이거나 사기 어렵던 제품들, 가령 벤츠, 바나나, 누텔라 등이 갑자기 넘쳐나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술가, 히피, 펑크족, 문신족 등 과거 문제그룹으로 여겼던 이들이 미테, 프리드리히스하인 등 자기 동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따라서 월세도 서서히 상승했다. 토박이들은 점점 외곽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이 이방인 그룹도 경제적으로 풍요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정신의 소유자들이다. 결국, 주민 반 이상이 바뀌었다. 2013년에는 국민성이 가장 평온하고 조용하다고 알려진 뉴질랜드인, 캐나다인 누가 먼저 노이쾰른 지구에 자리를 잡았냐는 다소 격렬한 토론이 오갔다. 10년 전만 해도 노이쾰른은 가난한 유학생조차도 꺼리는 지역이었다. 이념문제는 없었지만, 뉴욕도 비슷한 상황을 겪었고 젊은 예술가들과 화랑인들이 본의 아니게도 집값 올리는 데 일조를 했다. 베를린 또한 이 길을 걷고 있다. 이런 현상은 미테, 프란츠라우어베르크 지구에서 크로이츠베르크, 프레드리히스하인 지구로, 현재는 노이쾰른과 베딩Wedding 지구까지 확장되고 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베를린은 빠른 것과 수퍼리치에 대해 별 감흥이 없다. 백만장자 컬렉터도 자전거 타고 일하러 가고 국제적으로 왕성히 활동하는 작가, 큐레이터들도 바로 옆 후미진 바 한구석에서 열렬히 토론을 한다. ‘cool&easy’ 그리고 ‘섹시한 베를린’에 대해 앞으로도 국제현대미술계는 많은 이야기를 들을 것이다.
베를린=최정미 통신원

SPECIAL FEATURE 세계 미술현장의 새 지형도 New York

뉴욕 (5)

윌리엄스버그는 브룩클린에서 가장 오래된 화랑가다. 많은 작가들과 화랑들이 다리건너 브룩클린로 옮기면서 최근에는 인접지역인 그린포인트, 브쉬익까지 넓혀가고 있다

 

지난해 10월에 브룩클린 윌리엄스버그에 완성된 에두아르도 코브라의 벽화. 사진작가 마이클 할스번드가 앤디 워홀과 바스키아를 모델로 한 유명한 사진을 변형한 것으로 ‘스트리트 아트를 위해 싸우자’란 글이 적혀있다

지난해 10월에 브룩클린 윌리엄스버그에 완성된 에두아르도 코브라의 벽화. 사진작가 마이클 할스번드가 앤디 워홀과 바스키아를 모델로 한 유명한 사진을 변형한 것으로 ‘스트리트 아트를 위해 싸우자’란 글이 적혀있다

젠트리피케이션의 대표지역
서상숙 미술사

뉴욕시에 화랑이 모여있는 대표적인 지역은 모두 5군데다.
맨해튼의 어퍼 이스트 사이드Upper East Side, UES, 소호SoHo, 첼시Chelsea, 로어 이스트 사이드Lower East Side, LES 그리고 브루클린Brooklyn 등이 바로 그곳이다.
맨해튼 동쪽을 흐르는 이스트 리버 건너편에 위치한 브루클린에는 윌리엄스버그Williamsburg, 덤보D.U.M.B.O, 그린 포인트Greenpoint, 부시윅Bushwick 등지에 화랑가가 형성되어 있다.
시티인덱스에 의하면 뉴욕에는 500여 개의 화랑이 있다. 그중 절반에 가까운 200여 개가 첼시에 몰려 있으며 LES에 100여 개, 브룩클린에 100여 개, 그리고 57가를 비롯한 UES에 50여 개, 소호와 나머지 지역인 롱아일랜드 시티, 트라이베카, 미트패킹 디스트릭에 50여 개가 산재한다.
지난 50여 년간 뉴욕 화랑가에 일어난 변화 중 네 가지를 꼽자면 (1)세계적 화랑가였던 소호의 붕괴 (2)‘뉴소호’로 부상한 첼시의 유명 화랑들이 대형화되는 반면 작은 화랑들은 문을 닫거나 새로운 장소를 찾아 떠나고 있다는 것 (3)LES가 뉴뮤지엄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미술구로 관심을 끌면서 그에 따른 관광화, 상업화가 급격히 진행되고 있다는 것 (4)브시윅 등 브루클린 화랑가의 확장 등이다.
이 같은 뉴욕 화랑가의 끊임없는 이동과 확장은 도시화 하는 현대에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의 대표적인 예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은 빈민가 혹은 낙후된 지역이 재개발을 통해 중상류층 주거지나 상업지역으로 변화하면서 경제적, 정치적 힘이 없는 기존 거주자들을 몰아낸다는 이론이다.
공장과 창고 건물이 대부분이고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가난한 동네였던 소호는 전설적인 미술상 파울라 쿠퍼가 1968년 갤러리를 처음 오픈한 이후 20여 년 동안 미국의 현대미술, 나아가 세계 현대미술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패션 부티크, 고급 레스토랑 등이 앞다투어 들어서는 고급 상업구로 변신하면서 급격히 올라간 집세를 견디지 못한 소호의 화랑들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첼시로 대거 이동했다.
1970, 1980년대에는 300여 곳의 갤러리가 몰려 있었으나 현재 소호에는 디아 미술재단Dia Art Foundation, 아티스트 스페이스Artists Space, 드로잉센터Drawing Center 등 비영리단체의 전시공간과 피터 블룸Peter Blum, 팀 갤러리Team Gallery 등 몇몇 화랑만이 남아 과거의 명성을 되새기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디아의 프로젝트 갤러리 두 곳이 월터 데 마리아Walter De Maria의 두 작품을 30년 이상 같은 자리에 전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상업적인 소호 거리에 조용한 경종을 울리는 동시에 미술에 관심 있는 사람은 반드시 한번은 봐야 하는 인식을 심어줬다.
또 지난해 스프링 스트리트에 위치한 도널드 저드
Donald Judd(1968~1994)의 작업실과 집이 수리를 거쳐 공공미술관으로 개관했다. 그리고 인접한 LES가 최근 새로운 미술구로 부상하면서 그 여파에 힘입어 아직까지 집세가 낮은 소호 남동쪽 지역의 LES와 연결되는 지역에 몇몇 갤러리가 들어서는 추세여서 변화를 기대하게 한다.
가고시언, 페이스, 파울라 쿠퍼, 메리안 보에스키, 메리 분, 바바라 글래스톤, 데이빗 즈워너 등 미국은 물론 세계적 화상들의 갤러리를 포함, 200여 화랑이 몰려 있는 곳은 첼시의 서쪽지역인 웨스트 첼시다.
1996년 10여 개의 화랑뿐이었던 첼시가 절정을 이루었던 때는 2008년으로 350여 개의 화랑이 성황을 이루었다. 이후 하향세로 접어들어 2011년에는 250여 개로, 현재는 다시 200여 개로 줄었다.
소호의 갤러리 중 가장 먼저 첼시로 이동한 곳은 매튜 막스로 1994년이었다. 이어 건물주와 맺은 계약기간이 끝나면서 오르는 집세를 견디지 못한 파울라 쿠퍼, 팻 헌, 아메리칸 파인아트, 폴 모리스, 바바라 글래스톤, 매트로 픽처스 등이 뒤따랐는데 이들을 일컬어 첼시 화랑가의 “오리지널 7인의 정착민들Original 7 Homesteaders”이라 한다.
첼시에는 디아 파운데이션이 1987년 22가에 4층짜리 창고 건물을 보수해 지은 미술관이 있었으며 1985년에 가고시언갤러리가 잠시 둥지를 틀긴 했으나 대부분 건물이 자동차 정비공장과 물품창고로 쓰였다.
이곳이 갤러리를 열기에 적합했던 요소라면 낮은 부동산 가격과 화랑에 적합한, 기둥이 없는 넓찍한 공간을 들 수 있다. 1층짜리 창고 건물들이어서 복수층 빌딩보다 가격이 낮았고 또 천장을 통해 자연광을 들여올 수 있었다는 것도 큰 매력이었다.
건물 용도를 규정하는 조닝zoning도 상품 보관 창고에 쇼룸을 낼 수 있도록 허용했기 때문에 화랑을 내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 것도 큰 역할을 했다. 이곳에는 비영리 갤러리로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두산, 그리고 국제화랑에서 운영하는 티나 킴 갤러리 등 한국인이 운영하는 갤러리가 위치해 있다.
최근 급격한 화랑 증가세가 주춤하고 주요 갤러리들이 첼시에만 두세 개 혹은 그이상의 갤러리를 확보하고 있고 또 갤러리 크기를 대형화하는 반면 소규모 갤러리들이 문을 닫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어 소호의 전철을 밟을 시기를 맞은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또 미술공원인 하이라인이 조성되었고 올해 휘트니 미술관이 업타운에서 첼시에 완공되는 새 건물로 이사할 계획이어서 그에 따른 인구 이동과 상업화가 필수적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소호와 첼시 화랑의 큰 차이점은 초기 소호의 화랑들이 집세에 밀려 쫓겨나다시피한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해 많은 첼시의 화랑은 건물을 빌리지 않고 매입했다는 것이다. 취약점은 지하철 등 공공 교통수단이 가까이에 없다는 것인데 그것은 오히려 지나친 상업화를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LES는 요즘 뉴욕의 가장 ‘핫한’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차이나타운과 리틀이태리를 경계로 하는 LES는 전통적으로 이민자 거주지역이었으며 마약중독자, 홈리스, 높은 범죄율 등으로 위험한 지역으로 소문난 곳이었다. 그러나 2007년 뉴뮤지엄이 보어리 스트리트Bowery St.에 개관하면서 갤러리가 앞다투어 들어섰고 그에 따라 개성있는 패션, 레스토랑, 액세서리 가게 등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다.
2002년 뉴뮤지엄 건축계획이 발표된 직후인 2003년 미술관 근처에 2개의 갤러리가 문을 열었고 공사를 시작한 2007년 뉴뮤지엄이 개관하면서 14개로 늘었다. 현재 100여 개의 갤러리가 뉴뮤지엄 주변에 몰려 있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또 첼시의 하이라인 파크를 벤치마킹해 폐쇄되었던 윌리엄스버그 트롤리 터미널에 세계에서 처음으로 지하공원인 로라인 파크 조성 계획이 이루어지고 있어 LES는 당분간 지속 발전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작은 평수의 아파트 빌딩들 그리고 맘앤팝 스타일의 동네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던 곳이어서 화랑 공간이 작다는 점에서 첼시와 비교된다.
몇몇 갤러리가 벽을 허물고 유리로 대체하는 등 세련된 화랑의 면모를 갖추려 시도하고 있지만 아직 정육점 간판을 떼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거나 칠을 하지 않아 외벽에 낙서가 그대로 남아있고 작은 출입문에 간판도 달지 않아 갤러리인지 모르고 지나칠 정도로 무심한 것이 오히려 신선함을 느끼게 한다. 집세가 낮은 데서 얻는 경제적인 자유로움과 뉴뮤지엄의 존재 자체의 문화적 장소로서의 당위성이 증명된 LES는 젊은 갤러리스트들이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취재 중 만난 신갤러리의 신홍규 씨는 미국에서 교육받은 20대 후반의 젊은 컬렉터로 지난해 그랜드 스트리트에 첫 화랑을 냈다. 무명의 한국 작가들을 소개해 좋은 반응을 얻었고 곧 두 개의 화랑을 더 열 계획이라고 한다.
브루클린에는 윌리엄스버그에 20여 년에 걸쳐 꾸준히 화랑가가 형성되었으나 최근 덤보(맨해튼에서 이스트 리버를 건너 브루클린으로 넘어오는 맨해튼 브리지 아래 지역을 이르는 Down Under the Manhattan Bridge Overpass의 줄임말), 그린포인트, 부시윅까지 확장되고 있다.
맨해튼에서 다리만 건너면 도착하는 브루클린은 오랫동안 맨해튼보다 싼 월세로 작업실과 아파트를 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뉴욕 무명 작가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최근에는 100여 개의 화랑이 있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으며 유명한 영화배우, 모델들까지 이사를 오면서 소위 ‘힙한’ 지역으로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부시윅은 56보가트Bogart 빌딩을 중심으로 화랑이 급격히 늘고 있어 맨해튼의 화랑가가 소호에서 첼시 그리고 LES로 확장된 것처럼 새로운 커팅에이지 아트허브가 조성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있다.
첼시처럼 창고 건물들이 몰려 있던 덤보는 다리 위로 수시로 지하철이 지나가 소음이 상당하지만 맨해튼이 가깝고 싼 월세로 큰 공간을 얻을 수 있어 관심을 끌면서 현재 40여 개의 갤러리가 들어서 있다. 다만 브루클린은 맨해튼의 ‘강건너 마을’이라는 심리적인 약점이 빠른 발전을 막고 있다.
윌리엄스버그에는 20여 년 전에 오픈한 원조화랑 피로기Pierogi가 꿋꿋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뿐 아니라 제2 갤러리를 오픈하는 등 그 전성기를 맞고 있다. 피로기 화랑이 장수하는 비결 중 하나는 화랑주며 작가인 조 에메린이 화랑건물을 소유하고 있어 오르는 집세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화랑에 들어서면 큰 파일 캐비닛이 제일 먼저 눈에 띄는데 이것은 로컬 작가들의 작품을 파일로 만들어 직접 보여주거나 인터넷으로 볼 수 있도록 해 판매하는 플랫 파일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2000년 신개념주의 작가 마크 롬바디가 자신의 모든 작품을 피로기화랑에 옮겨다 놓고 같은 날 자살했는데 이 사건도 피로기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어퍼 이스트 사이드UES의 화랑가는 1906년 하스갤러리가 오픈한 후 맨해튼의 센트럴파크 동쪽 메디슨 애비뉴를 중심으로 60가에서 90가까지, 3번 애비뉴와 5번 애비뉴 사이에 200여 개의 갤러리가 퍼져 있다. UES에는 전성기였던 1950년대 200여 개의 화랑이 존재했으나 현재는 50여 개의 갤러리가 남아 있다.
특히 57가의 메디슨 애비뉴와 5번 애비뉴 사이에 가장 많은 갤러리가 몰려 있어 이곳을 따로 복도 중심으로 양옆에 죽 늘어서 있는 방을 일컫는 ‘57가 회랑57th street corridor’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어퍼 이스트 사이드는 뉴욕시의 전통적인 부촌으로 록펠러, 휘트니, 케네디, 아스토어, 최근에 뉴욕시장을 지낸 블룸버그 등 이름만 들어도 아는 미국의 상류층이 사는 곳이다. 이들을 고객으로 마스터들의 작품과 이미 검증된 현대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판매하는 안정적인 화랑가가 형성돼 있다. 또 최근에는 첼시와 LES에 화랑이 넘치면서 화상들이 다시 UES로 눈을 돌리고 있어 흥미롭다. ●

 

THEME FEATURE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부리부리한 눈의 자화상으로 잘 알려진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
그는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 겸재謙齋 정선鄭歚(1676~1759)과 함께 조선의 삼재로 불린다.
또한 뛰어난 화가이자 시와 문학, 실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인물이다. 윤두서 서거 300주년을 맞아 국립광주박물관(2014.10.21~1.18)에서 특별전을 마련했다. 이번 전시는 윤두서와 후대 작가들의 서화를 함께 전시해 18세기 조선의 인식변화를 이끈 그의 실학적 탐구와 정신을 재조명했다. 뿐만 아니라 공재를 넘어 아들 낙서駱西 윤덕희尹德熙(1685~1766), 손자 청고靑皐 윤용尹愹(1708~1740)으로 이어지는 회화세계를 살펴본다. 《월간미술》은 전시소개와 더불어 현시점에서 공재 윤두서를 다시 바라보려 한다. 르네상스인으로서의 공재 윤두서의 모습을 소개하고 그가 당대와 후대에 끼친 역사적 영향력을 고찰한다.
장소와 세대를 넘어 교감할 수 있는 윤두서의 열린 세계관을 살펴본다. 특별히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회화사료 세 가지(윤두서의 중국지도, 윤덕희의 단양 바위글씨, 윤위의 <구택규 초상>)를 소개한다. 이를 통해 윤두서 일가의 예술적 자취를 폭넓게 바라보자.

시대의 변혁을 꿈꾼 예술가, 공재 윤두서
이내옥 | 미술사

조선왕조와 같이 하나의 국가가 오백 년 동안 지속된 사례는 세계 역사상 흔치 않다. 조선은 유교를 국가 지배이념으로 삼고, 그를 통한 이상국가 실현을 지향했다. 그 근본 기저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흔들렸지만, 조선 멸망에 이르기까지 강고해져갔다. 주자학 이념은 국가와 사회 그리고 개인의 전반적인 규범과 사고를 조직하고 제어했다. 형刑이 아닌 예禮로써 국가를 운영하려 했던 조선의 이상적인 시도가 오백 년 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사실은 인류 역사상 높이 평가될 수 있다.
조선을 시대 구분하는 데에는 몇 가지 기준이 있지만, 크게는 임진왜란을 기준점으로 전, 후기로 구분할 수 있다. 사상적인 면에서 보자면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독존獨尊의 지배이념이었던 주자학에 균열이 생겼다. 그에 대한 대응은 두 갈래로 나타났다. 주자학의 배타성을 더욱 강조하려는 경향과, 청淸의 새로운 학문적 조류를 흡수하면서 보다 다양하고 유연한 학문적 경향을 추구하는 이른바 실사구시實事求是 이념에 입각한 실학이 그것이다. 임진왜란이 수습된 지 한 세기에 접어들면서 조선은 서서히 국력을 회복하고 경제적 안정을 이루는 가운데, 주자학과 실학이라는 두 가지 학문적 경향이 공존한 시기가 바로 숙종대(1674~1720)였다.
조선 후기의 사회적 변화는 숙종대에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농업에서 이앙법 등의 기술 혁신으로 광작廣作 운동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부농층이 대거 발생했다. 조선은 또 청일 간의 중개무역을 맡고, 일본에 인삼을 수출해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였다. 이러한 경제적인 부의 축적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윤택해지고 사치와 문화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졌다.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던 사찰 3백여 개가 중창되고, 분원分院에서 사사로이 제작된 호화로운 자기들이 대량으로 시장에 보급되었다. 나라 안에 돈이 돌면서 여행의 풍조도 서서히 고조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리면서 회화부문에서도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바로 새로운 장르로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와 풍속화風俗畵가 등장하고, 사대부의 고상한 정서를 표현하는 문인화文人畵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의 회화적 경향에 비한다면, 조선 후기의 이러한 변화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진경산수화, 풍속화, 문인화의 등장 배경은 무엇인가? 그리고 의미는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이야말로 회화사는 물론 조선시대 예술사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화두話頭라고 할 수 있다.

윤두서 〈윤씨가보尹氏家寶〉 25면 〈나물 캐기〉 모시에 먹 30.4×25cm 조선 17세기 말~18세기 초

윤두서 〈윤씨가보尹氏家寶〉 25면 〈나물 캐기〉 모시에 먹 30.4×25cm 조선 17세기 말~18세기 초

르네상스인, 공재 윤두서
조선 후기 회화사의 새로운 경향의 대두에 대한 해명 작업이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다. 단순히 실학이라 추정하기도 하고, 문화적 자존의식의 발로라고 하기도 했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점은 진경산수화와 풍속화를 창조하고 문인화를 수용한 최초의 인물이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공재에 대한 연구 없이는 그에 대한 설명 자체가 관념적이고 공허할 수밖에 없다.
공재는 1701년 실경의 <금강산도>를 두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토론했으며, <산골의 봄>과 <백포별서도> 등 2점의 진경산수화를 남겼다. 그리고 <나물 캐기> <짚신 삼기> <목기 깎기> <돌 깨기> 등 4점의 풍속화가 전하고 있다. 4점의 풍속화 모두 노동하는 인간을 그렸다는 점이 특징적이며, <나물 캐기>는 여성을 그림의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공재는 당쟁에 회의를 느껴 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면서 학문과 예술에 매진했는데, 선비로서 강한 자부심을 갖고 세상일을 자기 책임으로 인식하는 정서를 문인화로 표현했다. 원말사대가元末四大家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많은 문인화를 그린 것이다.
공재의 이러한 창조적 시도가 초창의 미숙성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의 모색은 영·정조대를 거치면서 계승, 발전해 나갔다. 진경산수화에서 겸재 정선, 풍속화에서 단원 김홍도, 문인화에서 추사 김정희가 출현해 황금기를 연출했다. 따라서 겸재, 단원, 추사는 공재의 예술적 키즈였다. 당시 추사는 공재를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했다. “우리나라에서 옛그림을 배우려면 진정 공재에서 시작해야 한다. 정선이나 심사정이 모두 이름을 떨치고 있지만, 전하는 바의 권첩이란 한낱 안목만 어지럽게 할 뿐이니 결코 들춰보아서는 안 된다.” 문인화가 전공이었던 추사의 입장이 드러난 말이지만,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공재의 위치에 대한 적절한 평가라고 하겠다.
공재는 회화적 표현 역량 또한 탁월했다.
그의 <자화상>(국보 제 240호)은 동양 전신傳神의 최고 수준의 작품이다. 말을 지극히 사랑한 그의 <유하백마도>는 문기와 사실성이 결합된 동아시아 최고의 작품이라 평가할 수 있다. 공재의 예술에서 비교적 덜 알려진 부분도 많다. 서양의 음영법을 채용한 조선 최초의 정물화를 그리기도 했고, 전각예술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그가 그린 조선지도는 정상기와 김정호 지도의 선구였고, 그의 일본지도는 정밀하기 이를 데 없다. 그는 또한 조선을 석권했던 한석봉체의 거칠고 투박한 서예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하여 동국진체東國眞體 창안의 중심에 섰다. 이렇게 다양한 방면에 뚜렷한 창조적 업적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공재는 진정 조선의 르네상스인이었다.

윤두서 〈윤씨가보〉 11,12면 〈유하백마도柳下白馬圖〉 비단에 엷은 색 32.2×40cm 조선 17세기 말~18세기 초

윤두서〈윤씨가보〉 11,12면〈유하백마도柳下白馬圖〉비단에 엷은 색 32.2×40cm 조선 17세기 말~18세기 초

공재 윤두서, 시대를 꿰뚫어 보다
공재는 다양한 학문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예술에 대해서도 남다른 신념이 있었다. 앞선 시대의 예술적 경향을 반성하고 다가올 미래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였다. 공재는 해남윤씨海南尹氏 가문의 종손으로 윤선도尹善道의 증손자이다. 공재는 윤선도의 가풍을 이어 교육을 받았으며, 같은 남인南人인 성호星湖 이익李瀷 형제들과 학문적으로 매우 밀접하게 교유했다. 이들이 두 집안에 소장하고 있던 중국과 서양 서적을 비롯한 수천 권의 도서를 열람하고 토론하는 과정이 조선 후기 새로운 사상과 학문 그리고 예술의 탄생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공재의 학문은 증조부인 윤선도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윤선도는 예론을 비롯해 천문, 음양, 지리, 의약, 복서, 음악 등에 걸쳐 박학했다. 이러한 학문적 경향은 그의 새로운 인식론에 바탕을 둔 것으로, 주자학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공재는 윤선도의 이러한 학문적 경향을 가학家學으로 전수받았다. 공재의 인식론은 천하의 만사 만물이 각각 다르므로 그 속성을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궁구하여 그 경험적 지식을 축적하고 체계화하는 분석적 방법론이다. 이러한 인식론에 기반을 둔다면, 외계 사물을 실사實事에 비추어 증험함으로써 실득實得을 추구하고,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성리학과 예론은 물론 천문, 지리, 의약, 음악, 패관소설, 병서, 공장, 기교 등 다방면에 걸쳐 박학할 수밖에 없다. 조선 후기의 실학도 바로 이러한 인식론에 근거하고 있다.
인식론의 변화는 예술에서도 새로운 변화를 일으켰다. 이제 주위의 호박, 참외와 같은 하찮은 미물들이 그림의 대상으로 등장했다. 동양의 오랜 전통적인 관점은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파악하고, 그 자연과 동화될 때 이상적인 경지에 다다른다는 이른바 인간과 자연을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이상화된 자연으로 표현된 것이 관념산수화였다. 그렇지만 각각의 사물에 별도의 이理가 존재한다고 보는 것은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여 상대적으로 보는 시각이다. 예컨대 이러한 시각에서 산을 그린다면 그 산들은 각각 독자적인 차별상을 가지고 표현될 것이고, 금강산, 인왕산 등 개개의 이름을 가지는 개성적인 산으로서의 진경산수화가 출현하는 것이다. 풍속화의 대두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공재 이전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관념적인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단일한 주체, 즉 사대부였다. 그러나 인간들을 독자적인 차별상으로 표현할 때에 그 대상은 폭넓게 확대되어 상인, 농부, 하인, 공인, 여인네 등으로 넓어진다. 그 표현이 조선 후기의 풍속화였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예술적 변화의 근원에 공재가 위치한 것이다.
공재의 외증손인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은, 공재를 성현의 재질과 호걸의 뜻을 갖춘 분이기에 남긴 글과 유묵도 그러하나, 시대를 잘못 만나 애석하다고 했다. 공재가 지닌 역량이나 시대를 보는 안목 그리고 후대에 미친 영향에 비한다면, 지금까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저평가된 것이 사실이다. 예술가는 예민한 촉각과 감관을 가지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공재는 다가올 시대를 예견하고, 그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정통 주자학을 신봉했던 주위 인물들은, 당시 공재의 학문과 예술에 대해 우려하고 비판했다. 그러나 공재가 창조하고 개척한 예술은 조선 후기 문예부흥의 토대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공재야말로 새로운 시대를 연 진정한 선구자였다. ●

윤두서 《가전보회家傳寶繪》 19면 20면 〈송함망양도松檻望洋圖〉 종이에 먹 23×61.4cm 조선 1707년

윤두서 《가전보회家傳寶繪》 19면 20면 〈송함망양도松檻望洋圖〉 종이에 먹 23×61.4cm 조선 1707년

 

THEME FEATURE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공재와 마주하기: 국립광주박물관 <공재 윤두서전>을 가다
임승현 | 기자

“모든 사람들이 한쪽에 치우쳐서 두루 잘하지 못하거나 어떤 이는 두루 잘하나 공교하지 못했으니 요컨대 모두 작가라 할 수 없다. 그 모든 사람들의 것을 모두 집대성한 자는 오직 윤두서뿐이구나!” 한국미술사에서 중요한 회화비평집을 저술한 남태응南泰膺(1687~1740)이 《청죽만록聽竹謾錄》 중 ‘화사畵史’에서 윤두서를 평한 글 중 일부다. 윤두서 회화의 정교하고 공교로운 맛은 오랫동안 높게 평가 받았음을 엿볼 수 있다.
윤두서 서거 300주년을 맞아 국립광주박물관에서 공재 윤두서와 그 일가의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최초의 전시 <공재 윤두서>(2014. 10.21~10.18) 열렸다. 이번 전시의 중심은 공재를 조선 후기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연 선구자이자 르네상스인으로 보고 다가가는 데 있다. 이 기조 하에 그의 회화와 학문적 성과를 다각적 시선으로 살펴보고 그 일가와 후대 화가들의 그림을 함께 소개한다. 특별히 녹우당綠雨堂(사적 제167호)에서 소장한 공재 윤두서 일가의 책과 글씨, 그림이 최초로 외부에 선보여 전시를 더욱 풍요롭게 했다. 녹우당은 해남윤씨 어초은공파漁樵隱公派의 종가로서 우리나라 가사문학에 획을 그은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 고택으로 익히 알려진 곳이다. 전시된 녹우당 소장품 중 단연 주목되는 작품은 <자화상>이다. 정면을 응시하는 통찰력 있는 눈동자와 매서운 눈매, 정교한 필선의 사실적인 수염이 보는 이를 압도하는 전신傳神의 절정인 이 작품은 미술에 무관심한 이들에게도 익숙한 명작이다. 바로 공재 윤두서의 명작이다. 이번 전시는 그와 그의 일가에 수준높은 작품을 실견할 수 있는 자리로 기대가 크지만 유물을 소개하는 방식도 눈길을 끈다. <자화상>을 그릴 당시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거울을 함께 배치한 방식을 일례로 들 수 있다. 이 거울에 대해 국립광주박물관 박해훈 학예연구관은 “그동안 해남윤씨 집안에서 대대로 사용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번 전시를 위해 거울 뒷면을 조사하면서 17세기 후반경에 제작된 일본 거울임이 밝혀졌다”고 전했다. 또한 전시 말미에 <자화상>을 둘러싸고 제기된 다양한 미술사적 해석을 더해 관객이 각기 나름의 해석을 해볼 여지를 뒀다. 전시가 단순히 유물을 선보이는 것을 넘어 오랜조사와 학술적 연구의 결과를 펼치는 장임을 증명한 대목이다.
<자화상> 한편에는 옥동玉洞 이서李敍(1662~1723)가 쓴 녹우당 현판이 전시돼 있다. 옥동 이서는 윤두서와 둘도 없는 친구였다. 사실 이서가 쓴 현판이 자화상과 함께 배치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17~18세기는 서예에 있어 전서篆書와 예서隸書가 새롭게 주목받은 때다. 이서와 윤두서는, 학계의 논란이 있는 용어이기는 하나 ‘동국진체’라는 새로운 서체를 개발하고 구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기에 이서가 쓴 이 현판 글씨는 곧 윤두서의 서예 미감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유물인 셈이다.
녹우당을 나와 박물관으로 나들이한 작품 중 주목할 만한 것으로 윤덕희가 윤두서 사후에 윤두서의 그림과 글씨 중 좋은 작품을 모아 엮은 서화첩 《윤씨가보尹氏家寶》와 《가전보회家傳寶繪》가 있다. 화첩 특성상 수록된 모든 작품을 한번에 볼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만큼 화첩의 모든 작품은 뛰어난 회화미를 자랑한다. 이 화첩은 공재가 《고씨화보》 《당시화보》 등 중국에서 수입한 화보를 임모臨摹하며 습득한 남종화풍, 더불어 사실주의적 태도와 사의를 중시하는 그의 회화관을 볼 수 있다. 《윤씨가보》에는 말 그림, 산수화 등과 함께 <짚신삼기> <나물 캐기> 등 윤두서가 그린 조선 후기 풍속화가 포함돼 있다. 윤두서의 풍속화는 그의 일가를 넘어 조영석 강희언 등 후대 선비화가들이 풍속화를 그리는 기반이 되었다. 그러므로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 윤두서뿐 아니라 아들 윤덕희와 손자 윤용의 산수화, 인물화, 말 그림을 다수 선보이는 제2,3부 전시실은 윤씨 일가의 뛰어난 회화적 역량이 결집된 장이다.
이번 전시는 조선 후기의 화단뿐 아니라, 실학적인 측면을 강조하며 변혁적인 인간관을 제시한 윤두서를 다시 주목했다. 현재 호남화단의 뿌리로까지 해석을 확대한, 윤두서를 재평가할 수 있는 장이다. ●

 

왼쪽 위 해남 녹우당과 옥동 이서가 쓴 현판©국립광주박물관

 해남 녹우당과 옥동 이서가 쓴 현판©국립광주박물관

 

THEME FEATURE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새로이 발굴한 공재 윤두서 일가의 회화사료 세 가지
이태호 | 명지대 교수, 문화예술대학원장

공재 윤두서는 자화상으로 유명한 문인화가이다. 그의 탁월한 묘사기량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손에 꼽을 만하다. 국립광주박물관은 서거 300주기를 추모하여 대규모의 도록 발간과 함께 <공재 윤두서전> 을 마련하였다. 윤두서와 관련한 조선후기 서화와 문학, 그리고 학예를 망라하는 빅 이벤트였다. 해남윤씨 집안의 자랑인 녹우당綠雨堂의 대표가 가사문학의 효시 ‘고산 윤선도’에서 그의 증손자 ‘공재 윤두서’로 바뀌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윤두서의 예술세계를 재평가하는 좋은 기회였다.
이 글에서는 내가 새롭게 만난 윤두서 일가의 세 가지 회화사료를 살펴보겠다. 첫 사례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천하지도>로, 이 지도가 윤두서의 중국지도임을 검토한 것이다. 둘째는 단양 하선암 바위글씨에서 발견된, 윤두서의 아들 ‘윤덕희’이다. 셋째는 윤두서의 손자 윤위가 그린 <구택규 초상>으로, 요근래 세상에 나온 그림이다. 이들도 <공재 윤두서전>에 함께 했으면 좋았을 텐데, 필자의 게으름 탓에 이제야 소개하게 되었다.

이태호 (1)-1

윤두서 추정 〈천하지도天下地圖〉 종이에 수묵담채 128.2×156.7cm 18세기 초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윤두서의 중국지도, <천하지도>
<천하지도>는 조선 닥종이에 수묵담채로 그린 18세기초의 대작인즉, <천하대총일람지도天下大摠一覽之圖>라는 명칭으로 진작에 알려져 있었다. 조선총독부 도서관이 1929년 박봉수에게 당시로는 엄청 고가인 3000원에 구입했던 지도이다. 필자는 최근 학술심포지엄에서 이 지도에 대해 윤두서 제작설을 제기한 적이 있다.(이태호, <조선후기회화의 사실정신과 지도, 그리고 대동여지도>, <김정호의 꿈, 대동여지도의 탄생>, -대동여지도간행 15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 국립중앙도서관, 2011) 접힌 소책자 형태가 현재 녹우당에 소장된 윤두서의 조선지도나 일본지도와 흡사하여 그렇게 주장한 것이다.
국화무늬 능화판으로 찍은 <천하지도>의 표지에는 활자식 명조체로 ‘천하지도, 부 조선 류구국天下地圖 付 朝鮮 琉球國’이라는 묵서가 씌어 있다. 현재의 장황은 19세기 말 이후 다시 꾸민 상태이다. 제목과 같은 글씨체의 ‘천하대총일람지도’를 별지에 써서 지도 위에 덧붙였고, ‘조선국’ ‘류구국’ 등을 써 넣었다. 뒷면에서 음각의 ‘德’자와 그 아래에 붙은 양각의 ‘弼’자를 배치한, 2cm가량의 붉은 인장으로 찍은 전서체 ‘덕필’이 눈에 띈다. 위치로 보아 소장자가 찍은 것이다. 이는 재표구하면서 본래 지도 뒷면에 있던 도장을 오려다 붙인 듯하다. ‘덕필’은 윤두서의 조카뻘인 윤덕필(1723~1793)로 생각된다. 윤덕필은 해남윤씨 어초은파 중시조인 윤효정의 넷째 아들 윤부尹復의 6대손으로 강진에서 종택을 이루었다. 언제 윤덕필의 소유로 넘어갔는지 모르나, <천하지도>가 윤두서의 작품일 개연성을 높여주는 소장인이다.
윤덕희는 윤두서가 중국지도·조선지도·일본지도를 그렸다고 밝혀 놓았다.(<恭齋公行狀>) 현재 녹우당에는 윤두서의 조선지도인 <동국여지지도東國輿地之圖>와 일본지도인 <일본여도日本與圖>만이 전해져, 이 <천하지도>가 윤두서의 중국지도임을 점쳐본다. 조선과 류구를 함께 그려 넣고 ‘천하지도’라고 표제가 바뀌었지만, 당시 중국을 중심으로 세계를 인식했던 점에 비추어 볼 때 중국지도라 이를 만하다. 붉은색 선묘의 도로표시, 같은 색 외곽선과 노랑이나 파란색 바탕에 지명을 써놓은 방식, 약간 길쭉한 지명의 행서체, 그리고 <천하지도>의 필치와 회화적 분위기가 윤두서의 조선지도나 일본지도와 근사하다. 특히 전체적으로 사막, 만리장성, 산악, 강과 호수, 바다 표현과 색채감이 한 폭의 그림다운 맛을 돋운다. <천하지도>의 제작시기 또한 윤두서가 두 지도를 그린 1710년대와 멀지 않다.
기존 연구에 의하면, <천하지도>는 북경·남경의 양경兩京과 13성省의 명나라 행정체계를 바탕으로 삼았고, 만주지역의 영고탑寧古塔과 오라烏喇, 그리고 심양審陽을 승격시킨 성경盛京 등 청나라 초기의 새 지명이 공존하는 지도이다. 이를 통해 청조가 대륙을 완전히 장악하기 이전의 정황을 읽어내기도 한다.(오상학, 《조선시대 세계지도와 세계인식》 창비 2011) 일본의 위치를 글로만 써놓고 류구국을 크게 강조한 것도 이 지도의 특징이다. 또 일반적인 류구지도와 달리 상하가 뒤집혀 있는 점도 눈에 띈다. 조선에서 내려본 시점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중국과 동아시아 지도가 16~18세기 조선에서 유행한 가운데, 이 <천하지도>는 조선을 가장 자세히 그린 사례이다. 경도京都와 함흥, 평양, 해주, 원주, 공주, 전주, 대구, 제주 등 8도 소재지의 원이나 네모 표식과 더불어 주요 지명과 강·산·섬의 이름이 가득하다. 1680년대에 등장하는 무산茂山이나 순흥順興 등의 지명이 있고, 1712년 5월 15일 조선과 청의 국경협약에 따라 백두산에 세운 임진정계비壬辰定界碑가 보이지 않음은 이 지도의 제작시기를 1680년대 후반~1712년 이전으로 짐작게 한다. <천하지도>가 백두산정계비를 표시한 녹우당의 <동국여지지도>보다 앞서 그려졌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산맥의 흐름보다 농담으로 주요 산들을 독립해 강조한 표현이나 바다의 파도형 물결무늬는 고식으로,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인촌기념관 소장)를 비롯한 16~17세기 중국지도의 유형이 잔존한 증거이다. 윤두서는 1712~15년경 <동국여지지도>를 그리면서, 왜곡이 심하던 <천하지도>의 조선 영토 남쪽과 제주도·대마도를 상당히 수정하게 된다.
<천하지도>를 포함한 윤두서의 조선지도나 일본지도에 대하여, 한국지리학 연구의 중추이자 권위인 이기봉 박사는 “창조적이지는 않지만, 앞 시기의 사례를 정성스레 베낀 지도들이다. <천하지도>의 경우 중국 간행본을 모사하면서 제작자의 식견에 따라 조선 부분에 당시 지명을 충실히 반영했다”고 평가한다.
윤두서는 자화상을 치밀하게 그렸듯, 땅의 초상 또한 세세하게 지도로 제작했다. 그가 지도를 베낀 큰 이유는 병법을 연구하고 무기를 제작하는 등 병류兵流, 곧 군사학에 관심이 컸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장수나 호걸형의 자화상 이미지에 걸맞는, 사내다운 취미이다. 동시에 그는 천문학이나 수학에도 전문성을 지녔다. 1706년 12월에 송나라 수학자 양휘의 《양휘산법楊輝算法》을 필사했다고 본다. 청나라 황정黃鼎이 저술한 백과전서 《관규집요管竅輯要》(80권 25책)를 여럿이 필사하면서 직접 삽도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윤두서가 중국의 과학서적을 모사하던 이 시절, 1706년경 전후에 중국지도인 <천하지도>도 제작했을 법하다.

이태호 (8)

윤덕희 〈도담절경도島潭絶景圖〉 비단에 수묵 27.8×17.1cm 1763 녹우당 소장

윤덕희의 단양 바위글씨와 <도담절경도>
이번에 윤덕희의 <도담절경도>를 대하면서, 언젠가 충청북도 단양을 답사할 때 발견한 하선암의 바위글씨가 떠올랐다. 단양팔경의 시작인 제1곡 하선암下仙巖
큰 바위 아래의 조각바위에 오른쪽부터 ‘윤덕희尹德熙’, ‘윤덕후尹德煦’, ‘윤덕염尹德廉’, ‘권엄權儼’이라고 새긴 네 사람의 이름이 나란하다. 바위글씨들은 약간 비뚤하고 고졸한 행서체이다. 윤덕희의 서풍은 아니니, 나머지 셋 중의 한 명이 썼겠다. 이렇게 명승고적에 새져진 바위글씨는 훌륭한 사료가 된다. 포항 내연산 폭포의 ‘겸재 정선’, 삼척 무릉계곡 용추폭포의 ‘정선과 이병연’, 단양 사인암의 ‘이인상과 이윤영’, 양산 통도사의 ‘김홍도와 김응환’ 예처럼, 바위글씨에서 유명인사의 이름이나 시같은 필치를 만날 때 반갑기 그지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연옹連翁 윤덕희(1685~1766)는 윤두서의 9남3녀 중 장남으로, 아버지를 따라 문인화가의 길을 걸었다. 82세로 장수하면서 집안을 건사했다. 윤두서가 세상을 떠났을 때, 막내인 윤덕증(1714~1778)이 돌 지난 해였으니 윤덕희는 대가족의 맏형으로 아버지의 역할마저 해야 했다. 윤덕희의 단양 유람에 동참한 윤덕후(1696~1750)는 윤두서의 넷째 아들이고, 윤덕염(1702~1754)은 여섯째이다. 윤덕희는 1746년 6월 남쪽으로 가는 윤덕후에게 애정이 서린 이별의 징표로 <선면산수도>(홍익대학교박물관 소장) 그림부채를 선물한 적도 있었다.
섭서葉西 권엄(1729~1801)은 관찰사, 대사간, 판서 등을 두루 지낸 문신文臣이다. 세 형제의 여행에 나이 어린 권엄이 왜 참가했는지 궁금해서 해남 윤씨 족보를 뒤지니, 윤두서의 둘째인 윤덕겸(1687~1733)의 사위로 나온다. 권엄은 나이로 보아 윤덕겸의 늦둥이 딸과 결혼했다. 윤덕겸의 사후인 1745년 전후에 맏형 윤덕희가 챙겼을 혼사이다. 이들 네 명의 생졸년과 행적으로 미루어 볼 때, 윤덕희가 1747년 3~4월 금강산을 여행(《금강유상록》)하기 이전인 1745년 전후에 단양팔경을 다녀간 듯하다.
윤덕희의 노년 필치로 어눌하게 그린 비단그림 <도담절경도>는 1763년에 그린 <송월농현도松月弄鉉圖>와 마주하여 서화첩 《보장寶藏》(녹우당 소장)에 들어 있다. 단양을 유람한 지 근 20년 뒤 실경을 추억해서 그렸을 수묵화이다. 중경에 도담島潭 세 봉우리를 우뚝하게 과장해 배치하고, 멀리는 치악산경이다. 화면의 왼편 구멍이 뚫린 봉우리는 도담삼봉의 맞은편 북쪽 강언덕의 석문石門이다. 이 그림처럼 석문과 삼봉이 한 화면에 담길 시점을 실제 현장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 윤덕희가 단양의 명소 도담 풍광을 그렇게 기억해 구성했을 것 같다. 또 윤덕후에게 그려준 <선면산수도> 역시 강변의 험준한 벼랑과 산세에서 단양풍경을 연상케 한다. 윤덕희의 기억에 따른 합성과 변형방식은 조선후기 진경산수화 형식을 완성한 겸재 정선(1676~1759)의 화법과도 유사하여 흥미롭다.

이태호 (11)

윤위 〈구택규 초상〉 비단에 수묵채색 58.7×42.3cm 18세기 중엽 서울옥션 125회 출품작

윤두서의 손자, 윤위의 <구택규 초상>
윤위의 <구택규 초상>은 관복차림의 문신 흉상이다. 2012년 가을, 프랑스에서 국내로 반입돼 옥션에 출품되었다.(제125회 서울옥션 미술품경매 도록, Lot.414, 2012, 9) 족자로 꾸민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림에는 이름이 없으나, 초상화의 아랫단에 ‘1760년 7월(음력) 피눈물을 흘리며 썼다’는 단정한 예서체의 글에서 초상화의 주인공이 확인된다. 글쓴이는 병조판서를 지낸 구윤옥具允鈺 (1720~1792)이다. 그가 떠올린 ‘중년 이후의 아버지’, 곧 초상인물은 한성부판윤을 지낸 존재存齋 구택규具宅奎(1693~1754)이다. 1750년경 초상화를 그린 화가는 범재泛齋 윤위尹愇(1725~56)라고 밝혀 놓았다.
윤위는 윤두서의 일곱째 아들인 윤덕현尹德顯 (1705~72)의 장남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시와 문장으로 유명했다. 32세에 세상을 떠났으나 《범재집》이 전하고, 서문을 윤두서의 외증손자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지었다. 윤위의 아들 남고南皐 윤규범尹奎範(1752~1821)이 요청한 서문에서, 정약용은 절친인 윤규범의 천재성 못지않은 윤위의 문학세계를 서성書聖 왕휘지·왕헌지 부자에 빗대서 칭송했을 정도이다. 윤위가 그린 초상화의 출현으로, 윤두서 집안에서 삼대에 걸쳐 배출된 문인화가는 3명에서 4명으로 늘어난 셈이다.
<구택규 초상>은 50대 사대부 문관의 고집스러운 품위가 가득한 비단그림이다. 오사모에 분홍색 단령포 차림으로 전형적인 조선후기 관복 초상화 방식을 보여준다. 구불구불 세심한 선묘의 희끗희끗한 수염이나 붉은색 입술, 음영을 살짝 넣은 기법은 <윤두서 자화상>에서 배웠을 법하다. 이마와 눈가 주름, 코와 안면의 검버섯 같은 피부병 묘사까지 사실감이 서늘하다. 어깨선의 수정 흔적이나 몇 가닥 옷주름에 보이는 조심스러운 붓자욱은 문인화가의 담백한 감성을 물씬 풍긴다. <구택규 초상>은 소품의 흉상이지만 단아한 명작이다. 윤두서의 뛰어난 소묘력 유전인자가 기존에 알려진 연옹 윤덕희-청고 윤용 부자보다 윤위에게 내려진 모양이다. ●
 

SPECIAL ARTIST 안창홍

A218

위  캔버스에 유채 114×194cm 2014 아래  캔버스에 유채 114×194cm 2014

위 <맨드라미 예찬> 캔버스에 유채 114×194cm 2014 아래 <비바람 이후> 캔버스에 유채 114×194cm 2014

작가 안창홍의 세상을 향한 날카로운 시선과 화면을 압도하는 특유의 회화적 어법은 한국 현대미술에서 각별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지난 30여 년간 그가 보여준 예술적 성취와 첨예한 작가의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도발적인 인간형상으로 시대정신을 그려왔던 안창홍이 이번에는 꽃을 그렸다. 아름다움을 넘어 기괴하고 처연하게 보이는 꽃은 안창홍의 또 다른 심상풍경이다. 2014년 11월 28일부터 12월 28일까지 더 페이지 갤러리에서 열린 작가의 29번째 개인전 을 계기로 그의 작품세계를 탐구한다.

고통으로 기록한 처절한 아름다움
최태만 국민대 교수

안창홍의 작품을 보면서 나는 도록 뒤쪽의 여백에 ‘맨드라미의 꽃봉오리는 검붉은 물감덩어리이자 짓이겨진 육질이고, 폭발하는 장기臟器이다’라고 적었다. 29번째 개인전 개막을 앞둔 11월 15일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작가노트에서 “내 눈에 의해 관찰된 맨드라미는 느낌이 식물이라기보다는 동물에 가깝다. 마치 정육점 진열장의 붉은 조명등 아래 놓인 살코기 같은 느낌! 꽃의 형태 대부분이 좌우가 비대칭이고 괴이한 데다 원초적 느낌의 현란하고 강렬한 붉은 빛, 질긴 생명력이 느껴지는 다양한 모양의 억센 줄기와 다양한 색의 잎들. 온 몸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듯이 시들어갈 때의 처연함. 망연자실, 꽃이긴 한데 꽃이 아닌 듯한 느낌”이라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그림 속의 꽃들은 실핏줄처럼 엉겨있는 줄기와 가지 위로 솟구치는 에너지가 응고된 곳에서 요염하면서도 강인하게 몽우리를 피우고 있다. 선명한 원색의 물감덩어리가 도도하게 짓이겨진 꽃은 화려하면서 처연하다. 그래서 대지에 낭자하게 뿌려진 선홍빛 피가 그대로 굳어버린 듯한 그의 그림은 처절한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것이다. 그의 그림이 불러일으키는 정서적 긴장, 즉 처절한 아름다움은 그가 단지 자연을 재현한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식물을 동물로, 붉디붉은 빛깔의 꽃을 살코기로 표현한 것은 모두 죽음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그의 그림은 죽음의 비유이자 환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화려하게 만개했지만 왠지 쓸쓸하거나 혹은 아예 시들어 말라버린 안창홍의 꽃밭은 풍경이라기보다 정물에 가깝다. 서구미술에서 정물화는 ‘여전히 살아있는still-life’이란 뜻을 지니고 있으나 동시에 ‘죽은 자연natura morta’이란 의미도 담고 있다. 특히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발전한 정물화 속의 활짝 핀 꽃은 언젠가는 시들기 마련이고 자신을 태우며 어둠을 밝히는 촛불도 곧 꺼져버릴 운명이며, 투명한 유리잔도 깨질 것이고 거품은 허공으로 사라질 것이므로 부귀영화와 같은 세속적 욕망은 물론이거니와 삶조차 덧없음vanitas을 상징한다. 대체로 이 그림들은 이러한 대상들을 통해 삶의 허망함을 일깨움으로써 ‘죽음이 항상 네 옆에 있으니 기억하라memento-mori’란 교훈을 담고 있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자면 삶에의 욕망eros과 죽음의 충동tanathos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한짝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안창홍도 죽음 자체만을 강조하기 위해 이렇게 농염한 개화의 절정을 그린 것일까? 이번 전시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은 그 길이만 10m가 넘는 세 개의 꽃밭 풍경을 연결한 작품이다. 화려하고 농염한 빛깔을 자랑하는 다른 그림과 비교해 볼 때 이 작품은 꽃밭에서 일어나는 생명의 생성과 소멸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삶의 순환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 앞에 놓인 보라색의 커다란 두상은 그의 작품이 단지 삶의 덧없음에 대한 경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함의를 지니고 있음을 일깨우고 있다. 그는 이 입체작품의 제목을 사람의 피를 먹고사는 좀비 세상을 다룬 영화제목에서 따와 <눈먼 자들의 도시>라고 붙였다. 물론 전시장이나 도록에서 그 제목을 발견할 수는 없지만 꽃밭으로 둘러싸인 이 보라색 두상은 그의 작품에 담긴 수수께끼와도 같은 의미를 푸는 열쇠구실을 하고 있다.

A234

<내 이름은 맨드라미> 캔버스에 유채 91×71.5cm 2014

정물같은 풍경
안창홍은 새로운 작업을 시작할 때마다 어김없이 나를 호출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소환장을 받은 사람처럼 그의 작업실로 출두한다. 덕분에 나는 이 꽃밭작업의 시작부터 볼 수 있었다. 그것도 부족한지 내가 작업실을 다녀온 후에도 그는 SNS 문자메시지를 통해 작업과정을 사진과 함께 꼭 보고 한다. 2014년에 보낸 문자를 보자. 4월 2일 그는 ‘안창홍의 정원’이라 이름 붙인 첫 작품을 보내왔다. 그리고 작업에 대한 글보다 한국사회를 고통에 빠뜨린 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의 문자는 대체로 침몰한 세월호에 대한 정보나 심경을 토로한 짧은 글로 채워졌다. 그리고 한동안 작업에 대해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더니 6월 20일에는 210호 크기의 유화 <검은비>를 완성했다고 알렸다. 7월 20일에는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을 생각하며 그린 작품과 함께 풍경과의 오버랩이 쉽지 않다는 글을 보냈으나 7월 30일에는 드디어 이 작품을 완성했음을 알렸다. 그리고 이 작품을 꼭 봐야한다며 작업실 방문을 독촉했다. 그의 출두명령을 받고 간 작업실에서 한 무더기 맨드라미가 뒤엉긴 그 작품을 봤다. 좌우에 평행으로 맨드라미가 두 그루씩 쓰러져 있고 화면의 중심에는 맨드라미 군락이 한 몸처럼 뒤엉겨있는 이 작품은 그 구조에서나 분위기에서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을 떠올리게 했다. 전면으로 돌출된 꽃에 비해 평면으로 처리하여 원근을 파괴한 배경은 작품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훗날 전시를 개막할 즈음 《조선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그것에 대해 ‘구도의 도발’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의도적인 구도 해체는 안창홍이 정물 같은 풍경을 위한 연출 즉, 연극이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미장센mis-en-scene이란 점에서 작품에 담긴 비유와 환유, 그리고 상징을 감추면서 드러내는 수사이기도 하다. 나는 고야가 그린 <1808년 5월 3일>에 대해서 미술사 서적보다 홋타 요시에堀田善衛가 방대한 자료 조사와 소설가의 상상력을 동원해 쓴 고야 평전 번역본을 통해 더 재미있게 읽은 것으로 기억한다. 고야는 이 작품을 사건이 일어난 지 6년 후인 1814년에 그렸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통합한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나폴레옹이 보낸 프랑스군에 맞선 마드리드 시민들의 봉기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경비병부대가 봉기에 참가했거나 검문 중 조그만 칼이라도 소지한 사람이라면 모조리 잡아다가 프린시페 피오 언덕에서 처형하는 장면을 그린 이 작품은 겉으로 볼 때 선과 악이 분명하게 나뉘어 있다. 잔인한 처형 앞에 무기력한 시민들과 비교할 때 표정을 감춘 프랑스 경비병들은 살인기계로 표현돼 있다. 더욱이 화면 속 흰색 셔츠를 입고 두 손을 치켜든 남자의 손에 못자국과 같은 상처가 드러나 있다는 점에서 그를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예수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야는 이 그림과 함께 5월 2일에 일어난 스페인 시민들의 봉기도 그렸다. 마드리드 시민들이 프랑스군에 소속된 이집트인 지휘관이 이끄는 용병부대와 뒤엉겨 싸우고 있는 이 작품에는 선악의 경계도, 위대한 영웅도 없다. 혼란스럽고 산만한 구도는 이 혈전의 잔인함만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사실 대부분의 전쟁화는 전투에서 승리한 자의 용맹을 과시하기 위해 전투의 끔찍함을 왜곡한다. 고야는 불과 하루 사이에 일어난 두 사건을 왜 이토록 다르게 그렸을까. 고야는 5월 3일의 사건을 목격하지 않았고 훗날 다른 사람들의 증언을 참고해 <1808년 5월 3일>을 그렸다. 그 뒤에는 누구보다 생존본능이 강했던 고야의 정치적 고려도 작용했지만 또 한편으로 당시 유럽과 스페인의 복잡한 정치에 대한 그의 의식도 작용하고 있다. 그때까지 스페인에는 종교재판이 존재했고, 나폴레옹이 그것을 금지하자 스페인 교회는 스페인인들로 하여금 나폴레옹에 반대해 봉기할 것을 사주했다. 반면에 왕정과 교회의 무능과 억압에 지친 스페인인들은 프랑스가 혁명의 이념을 전파해줄 것으로 기대했다. 결과적으로 스페인인들은 프랑스군이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임을 깨닫고 저항했다. 이러한 복잡한 정치 구조 속에서 고야는 프랑스군이 떠나고 페르디난도 7세가 복권한 후인 1814년 의회에 청원하여 왕의 재정지원을 받아 작품을 제작했다. 고야는 <1808년 5월 3일>에서 희생자를 순교자로 표현하고 있으나 스페인왕정은 자취도 없고, 교회조차 더 이상 시민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상황을 포착했다. 따라서 그림 속에서 전통적인 기독교미술의 구원이나 부활의 상징을 발견할 수는 없고 잔혹한 살육만 강조돼고 있다. 고야의 작품에서 강조된 야만과 폭력의 섬뜩함이 안창홍의 작품에서 맨드라미의 핏빛으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내가 작업실을 다녀간 후인 8월 23일 그는 90% 완성했다는 소식과 함께 시들어가는 맨드라미 꽃밭을 통해 가깝게는 우리나라, 멀게는 지구촌의 절망과 슬픔을 이야기한 <안창홍의 뜰, 개 같은 여름>이란 작품의 이미지를 보내왔다.(도록에는 이 제목들이 모두 빠졌고 단지 ‘뜰’이란 애매하고 중성적인 제목만 붙어있다.) 다시 안창홍의 작업노트로 돌아가 보자. “2014년은 나에게 가혹한 해였다.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의 무차별적인 학살, 여객기 피격으로 사망한 259명의 사람들, 이라크 내전, 슬픈 아프리카 빈국들의 끝없는 전쟁과 살육, 에볼라로 사망한 5000여 명의 사람들, 전 세계를 수렁으로 내몰고 있는 이 모두가 피도 눈물도 없는 약육강식의 경제논리가 모든 가치의 우위에 있는 광기와 탐욕의 결과물들이 아닌가! 그리고 잊혀질까 두려운 세월호 사건.” 그렇다. 4월 16일 이후 한국은 깊은 절망의 수렁 속에 잠겨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여름이 지나갔지만 진전은 없었고, 10월 말 생일을 맞은 황지현 양의 시신이 인양되었다. 그러므로 안창홍의 풍경 같은 정물은 죽음이 네 옆에 있을지니 항상 그것을 기억하란 보편적인 경구가 아니라 죽음 앞에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와 고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안창홍은 이년 전부터 작업실 앞마당에 작은 꽃밭을 일구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꽃을 통해 자연과 투쟁하며 살아남기 위해 생존의 몸부림을 치는 인간의 삶을 표현하고 싶어 했다. 그것은 어쩌면 안창홍 자신의 모습을 꽃을 통해 투영하려는 욕망의 발로일 것이다. 그러다 그는 자신의 뜰에서 맨드라미를 발견했다. 돌담 밑이나 장독대 부근에서 흔히 볼 수 있던 그 꽃이다. 맨드라미의 학명은 셀로시아 크리스타타Celosia cristata로서 린네가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셀로시아는 그리스어로 불타오르다는 의미를 지닌 ‘켈로스κηλος’에서 파생한 것으로서 꽃봉오리 모양이 불꽃처럼 보이기 때문에 붙여졌다. 그래서 맨드라미의 꽃말도 ‘불타오르는 사랑’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안창홍의 맨드라미는 죽은 자연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분노를 불태우며 부활하는 살아있는 자연은 아닐까. 그는 “예술은 규범과 단정의 부산물이 아니라 모호함과 불안함과 갈등의 긴장 속에서 피어나는 꽃이라야 더욱 아름답다”고 했다. 그래선지 그의 작품이 나에게는 처절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

 캔버스에 유채 97×194cm 2014

<검은비> 캔버스에 유채 97×194cm 2014, 더 페이지 갤러리 개인전 전시광경

 IMG_0421안 창 홍 Ahn Changhong
1953년 태어났다. 부산 동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지금까지 개인전 29회와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2013년 제25회 이중섭미술상, 2006년 제1회 부일미술대상, 1998년 부산봉생문화상, 1989년 프랑스 카뉴국제회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 현재 경기도 양평에서 작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