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광복 70주년, 한국미술 70년

zoom in
<북한프로젝트> 7.21~9.29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시각문화로 바라본 북한의 오늘

올해로 광복 70주년을 맞이한다. 그러나 분단의 현실 앞에서 광복은 미완의 상태이다. 오늘(2015년 7월 23일자) 뉴스 보도를 들으니 광복 70주년 남북 공동행사를 논의하기 위해 남북한 민간단체가 개성에서 사전접촉을 했다고 한다. 여러 갈등과 어려움이 예상되기에 구체적인 합의와 성과가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그럼에도 분단을 넘어서 남북한이 함께 광복을 기념하고자 논의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광복의 기쁨과 분단의 슬픔이 교차하는 이 땅에서 통일은 우리의 역사적 과제이다. 그리고 그 과제를 풀어갈 단서는 지속적인 교류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은 우리에게 가깝고도 먼 곳이다. 60년 이상 분단 상황이 계속되면서 남북한의 문화교류, 특히 미술과 관련된 교류는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다. 북한미술을 소개하는 국내 전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북한의 조선화가 주를 이루었고, 그것도 단편적으로 전시되었을 뿐이다.
제대로 된 전시 형태로 북한의 미술을 볼 기회가 적었던 터라 이번 서울시립미술관이 광복 70년 기념으로 개최하는 <북한프로젝트전> (7.21~9.29)은 무엇보다 반가운 전시이다. 북한의 미술과 문화를 종합적으로 조망하는 이번 전시는 흥미롭게도 ‘프로젝트’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전시를 담당한 여경환 학예사는 기획전 서문에서 “프로젝트의 일반적인 의미와 더불어 ‘앞으로 나아가(pro)’ ‘만들어가는(ject)’이라는 적극적인 실천의 행위에 방점을 둔 프로젝트의 의미를 강조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전체적인 전시 구성에서 이러한 프로젝트의 의미를 살리려고 한 노력이 여실히 엿보인다.
전시는 크게 세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북한 내에서 제작된 유화, 포스터, 우표 등이 전시된 곳은 북한의 시각문화를 그 자체로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다. 특히, 눈여겨볼 것은 북한 포스터이다. 포스터의 대부분은 북한의 체제를 선전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북한 미술의 조형성을 다각도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외국 작가 닉 댄지거, 에도 하트먼, 왕궈펑 등이 북한의 문화풍경을 담은 사진을 보여주는 전시 공간 또한 돋보인다. 작가들은 사진으로 북한의 문화풍경을 기록하는 것에서 나아가 예술적 감성으로 재현하고 있다. 그리고 국내 작가 강익중, 권하윤, 노순택, 박찬경, 이용백, 전소정, 탈북 작가 선무 등은 북한과 분단의 문제를 저마다의 고유한 시각으로 주제화하고 이를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여 보여주고 있다.
이번 <북한프로젝트전>은 북한의 미술과 문화를 내부, 외부 그리고 경계라는 세 가지 문화적 층위에서 조망하는 듯 보인다. 이는 북한 작가, 외국 작가 그리고 국내 작가의 작품으로 전시를 구성햇다는 점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전시를 기획하기란 실상 쉬운 일이 아니다. 기획 단계에서 자료 수집 그리고 작품을 선정하기까지 특별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고, 힘든 작업 또한 많았을 것이다. 물론 비판적 시각으로 볼 때, 전시 구성에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다. 앞서 언급한 세 가지 문화적 층위들이 다소 인위적으로 혹은 도식적으로 연결된 듯하고, 또한 너무 많은 이야기가 제시된 듯해서 약간 산만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북한의 미술과 문화를 시각문화의 관점에서 총체적으로 조망하고자 시도한 전시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아쉬움은 간단히 뒤로 밀려난다.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국에서 북한의 미술 및 문화와 관련된 전시가 해외 블록버스트 전시나 유명한 작가의 특별전보다 더 주목되어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분단은 우리의 구체적 현실이며, 통일은 우리의 풀어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미술의 한류, 경매, 세계화 등에도 관심을 두어야겠지만, 현재의 한국 미술계가 남북한의 미술문화 교류의 중요성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향후 북한의 미술과 문화에 대한 본격적인 ‘프로젝트’가 촉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
임성훈 미학, 미술비평

위 이용백 <우리에게 희망은 언제나 넘쳐나>알루미늄, 흙 350×200×120cm 2015

SPECIAL FEATURE 광복 70주년, 한국미술 70년

zoom in
<한국근현대미술특별전> 5.23~8.23 대전시립미술관

“예술과 역사의 동행, 거장들의 세기적 만남”

<광복 70주년 한국근현대미술특별전>이 대전시립미술관에서 5월 23일 개막해 8월 23일까지 계속된다. ‘예술과 역사의 동행, 거장들의 세기적 만남’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전시는 오원 장승업에서 최정화, 이불의 동시대미술에 이르기까지 시대마다 뚜렷한 흔적을 남긴 67명의 거장을 초대하여 격렬했던 20세기를 성찰하고, 이중섭, 박수근과 같은 잘 알려진 작품을 직접 감상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한 야심 찬 기획이다. 그간 주목할 만한 한국근현대미술 전시가 주로 서울에 집중되었던 것을 생각할 때 대전에서 마련된 이 대규모 특별전은 한국 근현대미술에 대한 관심을 확산시키는 의미 또한 깊다.
한국 근현대미술 전시의 작품 선별과 배치는 그 자체로 지난 20세기를 바라보는 시각과 서사를 만들어낸다. 이번 특별 전시회는 ‘계승과 혁신’, ‘이식과 증식’, ‘분단과 이산’, ‘추상과 개념’, ‘민중과 대중’ 이라는 5개 장으로 나뉘어, 앞의 2개 장은 근대기 전통화와의 변모와 서양화의 도입을 다루고 후자의 2개 장은 6·25전쟁 이후의 흐름을 보여준다. 근대 수묵화는 안중식을 거쳐 이상범의 풍경에서 토착화되었고, 박생광의 강렬한 채색화는 전통의 혁신으로 제시되었다. 고암 이응노의 사실주의, 김기창과 박래현의 파격적인 추상화는 한국미술이 격동의 역사에서도 단절 없이 창안되어 왔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한편 근대기 자아를 표현하고 세계를 인식하는 새로운 시각매체로 유입된 유화가 결국에는 한국의 서정을 구현해냈음을 오지호, 김환기, 박서보 등의 작품을 통해 증명해 보인다. 조각은 오롯이 김복진에게 초점을 맞춘 후 권진규의 테라코타에 집중하는데, 특히 김복진의 1935년 미륵불은 불교조각의 전통과 현대적 감각을 모두 갖춘 한국 근대미술의 정수로 특별한 조명을 받고 있다.
광복 70주년 특집이라는 전시 콘셉트에 비추어 볼 때, ‘전쟁과 이산’은 핵심이 되는 장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심혈을 기울였을 터, 재일조선인 화가 전화황의 1960년 작품 <낙오자>를 핵심으로 송영옥과 월북화가 배운성의 작품이 여럿 출품되었다. 배운성이 독일에서 그린 조선 풍속화 수점은 대작 <가족도>와 함께 관람객들의 큰 관심을 얻고 있는데, 북유럽 전통의 유입에 따른 도상의 특이함, 가족이라는 우리에게 각별한 주제 때문인 듯했다. 전쟁기 이별과 가난의 기억이 새겨진 이중섭, 박수근의 작은 그림에 우리가 한없이 몰입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편 이우환의 <조응>을 디아스포라의 공간에 배치한 점도 이전에 볼 수 없는 방식이다. 단색조 회화와의 형식적 유사성보다는 일본에서 모노하 미술가로 활동한 이우환의 역사적 위치를 먼저 헤아린 결과였다.
이러한 미묘한 변화는 전시 후반부에서도 드러나는데, 단색조 회화에 뒤이은 분방한 최욱경 작품의 배치라든지 민중미술의 시작을 홍성담의 <5·18 연작-새벽>으로 압도한 것 등이다. 이동훈과 임동식을 비중 있게 전시에 편입시킨 것은 충청지역 대표 미술관으로서의 역할을 고려한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이 모든 다채로움은 20세기 한국미술사의 정론을 넘으려는 대전시립미술관의 적극적인 시도가 가져온 즐거운 변주였다.
그렇다면 명작을 앞세워 대중성을 담보하고 새로운 서사로 한국미술사를 재편하려는 애초의 의도는 얼마나 달성된 것일까.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이식과 증식’, ‘민중과 대중’ 같은 반복적 대구(對句)가 혼성의 시공간이었을 역사를 이분법의 프레임에 가두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묵은 계승으로, 채색화는 혁신으로 본다거나, 한국 사회의 탈근대성을 민중에서 대중사회로의 진입으로 쉽게 치환해버리는 것 등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이식’이라는 용어는 근대미술을 자칫 모방의 역사로 깎아내리는 듯한 인상을 준다. 정작 전시는 근대기 양화를 신문화의 포용으로 열린 해석을 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잘못된 작명이 불러온 오해인 듯싶다.
사실 이 같은 시시콜콜한 지적은 전문가의 삐딱함의 산물일 뿐이다. 차분하면서도 알차게 마련된 근현대미술 걸작들은 가족을 동반한 시민들에게 큰 즐거움을 주고 있었다. 김달진자료박물관의 세심한 미술교과서 전시도 ‘추억 돋우는’ 코너였다. 그럼에도 ‘2%’ 부족한 것은, 이인성, 변관식, 김환기의 난만한 완숙기 작품이 빠진 것, 동시대 작가 이불이나 최정화 특유의 도발과 요란함을 받쳐줄 전시 스텍터클의 부재였다. 우리가 광복을 기념하는 벅찬 자리에 늘 미술을 빼놓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술은 외압과 내분으로 격렬했던 우리 근현대사의 산 증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민족국가를 세우기 위해서, 혹은 통일 논쟁으로 부딪혔던 열기마저 사그라져가는 요즈음 광복 70년을 기념하는 한국 근현대미술전람회는 한껏 소란하고 강렬해도 좋을 것이다. ●
김미정 미술사

위 박생광 <무당>(사진 맨 왼쪽) 1961 대전시립미술관 <한국근현대미술특별전> 전시광경

SPECIAL ARTIST 선무

선무라는 작가는 우리 미술계에 상징하는 바가 크다. 이는 탈북자 신분인 그의 개인적인 상황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남북 분단현실에서 그의 작업 하나하나가 갖는 의미가 오롯이 미학의 문법에 기반하여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올해는 광복 7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지만, 분단의 씨앗이 잉태된 지 7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의 또 하나의 이름 ‘선무(線無)’처럼 그의 작품이 어떤 테두리 없이 읽힐, 이 땅에 경계가 사라질 그날은 언제가 될까?

꺄악oil on canvas2010 60x72cm

<꺄악> 캔버스에 유채 60×72cm 2010

야구공1

야구공2

야구공에 유채로 남북한 국기의 요소를 표현했다

당대적 존재로서의 선무, 혹은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기

김동일 대구가톨릭대 사회학과 교수
10여 년 전 선무를 처음 만났을 때 이런 작가가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그가 겪은 탈북작가에 대한 편견에는 내가 마치 그가 된 것처럼 함께 분노했다. 그때 우리는 어리고 여렸으며 필요 없이 신경질적이고 또 독했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다시 만난 선무는 그때와 다르지 않았지만, 예술가로서는 더 과감하고 확신에 차 있었으며 인간적으로도 더 성장해 있었다. 나 역시 예술가들이 세상의 변화를 유도해야 한다는 확신은 그때보다 더 확고해져 있었다. 그 확신 속에서 선무는 이미 의미 있는 궤적을 그려가고 있었다. 선무는 예술을 통한 사회의 변화, 나아가 사회에 대한 변화의 요구를 예술이라는 통로와 수단을 통해 제기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예술에 대한 사회의 요구는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 요구에 응답할 수 있는 예술가란 매우 한정되어 있고 선무는 그 요구에 적합한 방식으로, 그것도 매우 자기화한 방식으로 응답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분단의 모순과 선무의 비극
선무에게 사회의 영향은 매우 개인적 비극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 비극은 조선 말의 혼란과 일제 식민지배, 그리고 끝내 6·25전쟁이라는,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간 민족의 모순과 분리되지 않는다. 선무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 비극의 연속된 전개의 한가운데에 서게 되었다. 그는 남과 북이 첨예하게 대치하는, 그것도 시대착오적 권력 세습과 불가해한 우상화가 강제되는 한반도의 북쪽에서 태어났다. 북한 사회의 모순을 더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을 때 그는 ‘탈북’이라는, 분단사회에서 한 행위자가 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행위로 대응했다. 선무는 자신과 가족에게 가해지는 굶주림과 정당성 없는 폭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또 다른 꿈을, 또 다른 열망을 품었다. 탈북은 그 꿈과 열망을 실현하기 위한 시도였다. 흥미로운 점은 선무가 예술을 통해 탈북자 선무 개인의 험난한 경험뿐 아니라 분단과 냉전, 이산으로 점철된 한반도와 세계 정치의 모순을 그대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선무에게 예술은 압도하는 사회적 모순에 대응하는 무기였던 것이다. 선무의 붓끝은 사회적 모순에 대한 미학적 대응의 가능성의 경계를 모색하고 있다. 당대 예술은 언제나 사회의 요구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예술 아닌 모든 것으로부터 이탈하고자 했던 모더니즘 예술의 경우에도 이 점은 예외가 아니었다. 예술의 자율성과 독자성은 산업화와 자본주의, 그리고 1,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사회적 변화의 결과였다(특히 우리의 경우 추상미술의 도입은 이른바 ‘미군의 군홧발’로 상징되는 광복 이후 정치경제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한 예술과 사회의 관계 속에서 이 지리멸렬한 한국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다면, 선무의 미학적 실천은 특별한 방식의 하나일 수 있다.

탈북자 대 예술가, 선무의 이중적 정체성
선무는 탈북자인 동시에 예술가이다. 이 점은 가장 분명하지만 가장 쉽게 잊혀지는 사실이기도 하다. 여기서 선무와 선무의 그림들에 관한 가장 흔한 오해와 혼란이 비롯된다. 즉 정치적 관점에서 그의 그림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가 탈북자인 것은 맞지만 그의 그림을 탈북자의 것으로만 치부하는 관점은 옳지 않다. 그의 그림들은 정치적 프로파간다(선동)를 뛰어넘는다. 선무는 예술가이며, 따라서 그의 그림은 당연히 예술로서 다루어지고 해석되어야 한다. 선무의 작품들이 예술로 해석되어야 하는 이유는 의외로 예술의 본질적 특성에서 기인한다. 예술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소망을 형상화하는 가장 의미 있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선무의 그림은 인간의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다. 그 소망은 그 자신만의 개인적인 소망일 뿐 아니라 통일을 기원하는, 한반도의 모든 사람의 소망이다. 나아가 북핵을 걱정하고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모든 사람의 간절한 소망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이 미국과 독일을 비롯한 세계인의 관심을 받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여기 남한 사람들보다 더 간절하고 순수하게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에 관심을 갖는지도 모른다(그의 작업들은 이미 슈피겔, 뉴스위크, 타임, BBC 등에 의해 심도 있게 소개된 바 있다). 정작 그의 작품을 민감하게 다루는 것은 한반도 내부의 상황이다. 그의 작품들이 전시장에서 철거되거나, 때로 관객보다 경찰이 전시장에 더 많은 경우는 1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냄
선무의 작업이 매우 특수한 미학적 실천인 또 다른 이유에 대해서는 보다 섬세한 비평적 분석이 요구된다. 선무는 오직 유능한 미학적 행위자들만 실천할 수 있는 정교한 미학적 방법론을 구사하고 있다. 이 미학적 방법론은 탈북자의 정치적 선동과는 명백히 구분된다. 선무가 구사하는 미학적 방법론의 핵심은 눈앞에 놓인 ‘기표’(記表, signifier)와 그가 부여하는 ‘기의’(記意, signified) 사이의 간극을 정교하게 재조직하는 작업이다. 예컨대 2007년 청와대 뒤편 부암동의 한 대안공간을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던 <조선의 신>은 겉보기에 위풍당당한 북한의 지도자(김정일)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이 작품은 그를 경찰에 신고한 주민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최고 존엄의 머리 위에 날카로운 별을 거꾸로 위치시킴으로써 시각적 비판을 가하려는 시도였다. 비슷한 상황은 2008년 부산비엔날레 전시장에서 철거되는 수모를 겪은 <조선의 태양>에서도 반복되었다. 겉으로는 김일성의 상반신을 북한식 선전화 방식으로 표현한 듯 보이지만 그 아래 놓인 꽃(김일성화)은 조용히 ‘NO’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김일성, 나아가 그가 수립한 북한정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단순히 화가라기보다는 시각적 기호학자로 볼 수 있다.

중의와 내포의 이중 해석학
그는 눈에 보이는 것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눈에 보이는 것에 완전히 상반되는 의미를 부여한다. 이런 방식은 그의 초기작에서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행복합니다>는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는 북한 어린이들의 기쁨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기쁨과 행복은 도무지 자연 상태의 어린이로서는 가능해 보이지 않으며, 역설적으로 그러한 불가사의한 기쁨을 ‘강요’하는 인위적이고 강압적인 사회체제를 드러내고 고발하는 효과를 갖는다. 드러나는 것을 통해 드러나지 않는 의미를 내포하는 미학적 방법은 팝아트 양식을 차용한 작품들에서도 발견된다. 나이키 운동복과 아디다스 운동화를 신고서 익살스럽게 미소짓는 북한 지도자의 모습에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 그리고 북한 동포 대부분을 가난과 굶주림으로 몰아넣은 폐쇄정책에 대한 비판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개방 요구를 동시에 내포한다. 그가 자신의 작품이나 전시 제목으로 사용하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세상에 부럼없어라” 등의 표현 역시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부러움 없이 행복한 세상에 대한 간절한 소망과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한반도의 상황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함축한다.

해방된 상상의 공간으로서의 예술과 소통
중의(重意)와 내포(內包)의 이중의미화(double signification)는 선무가 수행하는 미학적 실천을 단순한 정치적 수사로부터 분리한다. 선무가 분단과 탈북의 정치적 층위에 위치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보다 더 분명한 것은 그가 예술가이며, 이 점은 그의 그림을 이해하려 할 때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다. 오히려 화가로서 선무의 정체성은 탈북자로서의 그것보다 선행할 수 있다. 그는 탈북 이전에도 이미 화가였다. 예술가로서 선무는 선무를 선무이게 만드는 본질적 조건이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조국의 분단이 그에게 정치적 구속성을 행사한다면, 예술은 선무에게 그러한 정치적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예술은 본질적으로는 상상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정치적 구속성으로부터 자유롭다. 또한 해방된 상상의 공간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자유로운 소통을 가능케 한다. 정치적 맥락에서 선무는 이편 아니면 저편에 서야 한다. 이러한 상황은 북에서나 남에서나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이라는 해방된 상상력의 공간에서 그는 그 어느 일방을 옹호할 필요가 없다. 해방된 상상의 공간에서 선무는 민족의 통일과 행복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소망을 정치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방식으로 전달한다. 분단과 굶주림을 극복하고 행복한 한반도, 평화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선무의 요구는, 소중한 가족을 북에 두고 온 선무 자신의 개인적 소망일 뿐 아니라 남과 북을 막론하고 같은 소망을 갖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과 나눌 수 있는 보편적인 메시지가 된다.

광복 70년 그리고 선무
이러한 해방된 상상력과 자유로운 소통의 조건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려온 정치적 궤적과 미학적 궤적을 서로 교차하는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선무 자신의 성취라 할 수 있다. 선무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한국 현대미술의 현장 속에서 선무는 대단히 반가운 존재이다. 그의 비극은 그 자신에게는 형용할 수 없는 아픔이지만 그가 그 아픔을 형상화하고 극복해 나가는 과정은 예술과 사회의 관계라는 지평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 사실이다. ‘광복 70년’은 단순히 해방 이후 시간의 총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반도의 과거의 질곡을 극복하고 현재의 상황과 미래의 가능성을 전망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광복 70년의 시대적 요구에 예술이 대응해야 한다면, 그 가능성은 선무의 작업을 통하지 않고서는 유의미하게 논의되기 어렵다. 그만큼 선무라는 개인, 그리고 그의 미학적 대응은 모두 당대적 의미를 획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

선무 Sun Mu
선무는 1972년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미술대학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8년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한국을 비롯해 멜버른, 뉴욕, 베이징 등지에서 12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한국과 독일에서 열린 다수의 기획전과 그룹전에 참여했다. 현재 경기도에서 작업하고 있다.

DF2B4867

서울시립미술관 <북한프로젝트전> 전시광경 바닥 설치작업은 <평양의 자유>와 <우리 식대로> 나무판에 유채 30×25×2cm(각) 2011

[section_title][/section_title]

interview

“나 자신을 어떤 것에 가두고 싶지 않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묘사가 매우 직접적이다. 예컨대 정치 지도자가 그렇다. 그런데 그들이 등장하는 작품 메시지가 매우 직접적이라면 아이들이 등장하는 작업은 어떤 희망(예를 들면 통일된 세상이나 보다 나아진 남북관계, 정치적 상황 등)을 비유하고 있다고 본다. 한반도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 특히 북녘에 있는 지도자들을 보면서 오직 권력을 위해 백성의 삶은 안중에도 없는 통치를 일삼고 있으니 이는 분명히 잘못됐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아이들을 통해서 우리들의 미래를 이야기하려 한다. 작품에 무엇이 나오든지 간에 남과 북의 허무하고 쓸데없는 이념대결이 낳은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을 이야기하려 한다.
그야말로 남북이 처한 정치적 상황의 딱 중간, 경계에 서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작가로서, 정치적인 상황이 판이한 두 곳에서 생활해본 시민으로서 경계에 대한 생각과 느낌이 특별할 것이다. 몇 년 전에 재독동포 송두율 교수의 글을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분의 생각이 나랑 많이 비슷한 것 같더라. 나 역시 경계에서 이쪽과 저쪽을 바라보면서 무엇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상처가 되는지를 알기에 경계에서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경계, 중간에서 역할은 여러 가지가 있을 테지만 예술의 역할도 중요하다. 예술이야말로 경계에서 자유롭게 비판하고 구애받지 않고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이고 그 속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우리 미술판에서 작가 선무는 분단 현실의 상징적인 인물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분단 현실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남한에 정착하면서 생겨난 또 다른 종류의 한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쎄. 이 세상에서 선무라는 존재가 어떻게 불릴지는 더 두고 봐야겠다. 분명히 남과 북은 서로 다른 체제로 반세기 넘게 살아왔고 나라 이름도 서로 다르다. 하지만 외국 사람들은 좀 다른가 보다. ‘북코레아, 남코레아(north Korea, south Korea).’ 이게 다다. 여기에 조선은 뭐고 대한민국은 뭐냐 이거다. 이데올로기 전쟁으로 입은 상처는 남과 북이 고스란히 가지고 있고 치유되지도 못했는데. 랭전은 끝났다고 하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허무한 이념대립. 이런 것을 보고 듣고 느끼면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국경을 넘기 전 바라봤던 중국령 지역과 경계를 넘고 바라봤던 북한령 지역’을 떠올린 말은 가슴 저릿했다. <국경선>(2007), <두만강>(2007, 2008), <어디가 동쪽이냐>(2005) 등은 국경을 넘기 직전 작가의 상황을 잘 드러내는 작품으로 보인다. 가만히 앉아서 잡혀 죽느니 내 갈 길 가다가 죽어야 후회 없을 것이란 생각에 무작정 남쪽으로 가기 위해 노력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세상과 마주하니 두려울 것이 없었다.
탈북 후, 중국에서 이른바 ‘낭인(浪人)’처럼 지냈다고 했는데 그때 경험이 바탕이 된 작품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유가 있는가? 이유가 있다. 실제 인물들을 작품에 담기가 조심스러워서다. 지금도 나고자란 마을을 그리지 않는다. 혹시나 모를 이념 전쟁에 희생양이 되거나 불행해질 수도 있기에 아직은 미루고 있다. 물론 스케치는 생각나는 대로 해두었지만 나중을 기약하고 있다.
남쪽에 정착해 이런 저런 현상을 목격하면서 그간의 생각이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가장 많이 바뀐 생각은 무엇이며, 그것이 드러난 작품은 무엇인가? 가장 인상 깊은 사건은 광화문 초불(촛불)시위였는데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 현장을 직접 보고 느끼려고 광화문 네거리에 직접 나가 보았다. 광화문의 초불을 보고 김일성광장의 회불(횃불)을 떠올렸다. 많은 생각이 들었다. 가족이 나와 앉아서 평화적으로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는 광경은 참 아름답기까지 했다. 그래서 종이를 칼로 오려서 <초불>이라는 작품을 하기도 했다
작업은 정치 상황을 희화화(유머러스하거나)한 듯하다가도 분단의 엄혹한 현실이 섬뜩하게 드러나기도 하고, 현 상황에 대한 시사적인 내용이 직접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말 그대로 다채롭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뭘 모르니까. 보통 예술이라는 장에도 여러 방법, 방식이 있고 의도적으로 원하는 방법과 방식을 따라 할테지만 그런 저런 지식이 없으니 생각 나는 대로 막 할 수 있었고 그럴 수 있다고 본다. 나의 생각을 어떤 식으로 표현할지 생각하고 그냥 하는 것인데 주변에서 이것을 정리해 팝아트라 불러주더라. 하지만 이 또한 잘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다. 나 자신을 어떤 것에 가두고 싶지 않다.
“나는 끝까지 조선사람으로 남겠다”는 생각으로 남한행을 결심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작가로서 활동하면서 변화하는 남북관계에 따라 무엇인가 할 일, 이른바 소명(召命)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무엇일까? 남쪽에 와서 처음 전시를 시작하면서 어떤 사명감 같은것을 가지고 살았다. 그런데 그 사명감이 뭐냐. 어떤 철학교수가 말하기를 사명감 또한 이데올로기 아니냐고 하더라. 그래 나는 나로서 산다, 나는 누구냐, 뭘 하는 놈이냐, 내가 나로서 당당히 살아갈 때 가치가 있다. 이제는 조선 사람도 좋지만 지구인으로 살려한다. 조그만 지구에 살면서 서로 싸우고 죽이고 편 나누고 아주 그냥…,
앞으로 전시계획, 작업계획에 대해 알려달라. 올해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여는 분단에 관한 전시에 참여한다. 내년에는 홍대 주변에서 개인전을 열 생각이다. 작업은 계속 해서 사람 사는 세상과 한반도의 비극과 미래를 이야기하려 한다.
황석권 수석기자

EXHIBITION TOPIC 세밀가귀 細密可貴:한국미술의 품격

한국미술은 ‘여백의 미’만으로 정의할 수 없다.
삼성미술관 Leeum에서 열린 <세밀가귀細密可貴 : 한국미술의 품격전>(7.2~9.13)은 한국미술사에서 최고의 섬세함과 완성도를 추구한 작품을 총망라해 한국미술의 또 다른 면모를 집중 조명한다.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금속공예, 나전, 도자, 회화 등 전 분야의 국보・보물급 작품들이 세밀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현재 전 세계에 남아 있는 고려 나전 17점 중 8점이 공개되는 등 그동안 국내 전시에서 볼 수 없었던 명품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국미술의 화려한 스펙트럼을 자랑한다.

11 불상 (8)

<금동 천수관음보살 좌상> 71.5cm(높이) 고려~조선 초 (대한불교조계종 홍천사 소장)

2 금관 (4)

국보 138호 <금관> 11.5cm(높이) 가야 5~6세기 (삼성미술관 Leeum 소장)

세밀의 미, 한국미의 또 다른 아름다움

김홍남 이화여대 명예교수, 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전시 제목, <세밀가귀(細密可貴): 한국미술의 품격>에 등장한 ‘세밀가귀’란 표현은 다소 생소하게 들리겠지만 “세밀함이 가히 귀한 경지에 이르렀다”라는 뜻으로 1120년대 초 한국을 다녀간 중국사신 서긍(徐兢)(1091~1153)이 남긴 그의 견문록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 고려나전에 대해 남긴 기록을 인용한 것이다. 한국미술의 품격을 세밀함에서 찾아보고자 하는 전시기획의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는 제목이다.
전시는 “文문양: 정교함의 극치, 화려함의 정수,” “形형태: 손으로 빚어낸 섬세한 아름다움,” 그리고 “描묘사: 붓으로 이룬 세밀함”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고, 이 세 특징을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금속과 도자공예, 나전칠기공예, 불교미술, 회화작품 등에서 찾아보고자 하였다. 전시품들은 국보와 국보급 미술품들로서 자체 소장품에서는 50점만 엄선하고 국내 16곳, 해외 21곳에서 대여받은 80점을 합한 총 130점이 기획전시실 2개층을 메우고 있다. 전시 주제도 만만치 않은데다 해외 대여는 성사되기도 어렵고 또 막대한 예산이 들어 “과연 리움만이 가능한 전시”라는 감탄사를 자아낼 만하다.
1부에서는 백제금동대향로, 2부에서는 고려옻칠나전경함, 3부에서는 조선시대 초상화가 단연 돋보인다. 이 전시에서 풀기에 가장 어려웠을 것으로 추측되고 실상 비교적 취약한 부분이 3부, “描묘사: 붓으로 이룬 세밀함”이다. 유교국가 조선은, 세밀과 장엄의 미학이 일관성을 보인 불교국가 고려와 달리, 소박·담백의 유가적 미학이 부상하면서 기교미와 세밀미를 추구한 장인예술전통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중국은 9세기 말 이후부터 이미 철학, 사상, 종교 그리고 예술사조에서 이론적 사고가 직관적 사고로, 인위에서 무위자연으로, 기교에서 무기교로 점차 확산해 나갔다. 그 결과 정밀함이 지성사회에서나 순수예술세계에서 이탈하고 급기야는 퇴출되는 위기를 맞는다. 중국문화권인 한국에서도 조선시대부터 서서히 두 가치의 공존과 충돌이 일어난다. 이러한 미학적 이중구조 속에서 세밀가귀의 기획의도를 관철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3부 전시공간을 들어서면서 데자뷔(기시감)가 몰려왔다. 20여 년 전 미국 순회전 <18세기 한국미술>(1993년 뉴욕 Asia Society에서 시작) 준비과정에서 고민했던 일들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전시의 영문제목, “Korean Arts of 18th Century: Simplicity and Splendor”는 고심 끝에 두 가치의 공존을 인정하고 정면 돌파하는 해법을 택했음을 말해준다. 조선시대미술에 단순·소박미와 더불어 화려의 미가 산발적이 아닌 일관성을 띠고 민간, 궁궐, 종교미술(전시의 세 부분)에 보이며 이 예술혼을 살리고 주도해 온 궁궐미술이 조선시대미술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전시이다. <세밀가귀전>은, 깊은 곳에서 18세기전과 강렬한 연속성을 느끼게 하면서, 나아가 조선시대 필의 힘을 휘두른 유림 미학에 떠밀리고 폄하된 장인 예술과 그 공묘함에 초점을 맞추고자 했다. 따라서 초상화와 궁중기록화는 물론이고 두 가치의 경계를 넘나드는 수묵화도 세부묘사가 출중한 작품들을 끌어들였다.

6 나전 (6)

<나전 국당초문 경전함>(왼쪽) 24.8×47.2×25.8cm(높이) 고려 13세기 (보스턴미술관 소장)

16 일반 회화 (8) - 원본

보물 1493호 이명기 <오재순 초상>(오른쪽) 비단에 채색 152×88.9cm 조선 18세기 말~19세기 초 (삼성미술관 Leeum 소장)

한국미의 새로운 기준
지난 몇 년간 리움이 기획한 전시들, <조선화원대전> (2011)과 <금은보화: 한국전통공예의 미전> (2013), 그리고 올해의 <세밀가귀전>의 기획 의도에는 근대한국예술론과 미술사 서술의 편향성과 왜곡에 대한 질타와 수정주의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 편향성은 근대일본의 미학자이며 조선민예연구가인 야나기 무네요시로 더욱 공고해졌다. 그가 펼친 “질박과 무기교의 기교”야말로 한국미의 본질이라는 예술론은 오랫동안 “한국적인 것”을 규정하는 잣대로 적용되고 현대 한국인들마저 마치 집단최면에 걸린 양 이 ‘잠언’을 되뇌곤 한다. 그 결과 조선시대 예술의 총체적 이해는 물론이고 그 이전 시대 예술의 진면목을 이해하는 방향감과 균형감을 잃어버렸다.
이들 리움 전시에 더 큰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자면, 기교와 ‘순수예술’의 분리현상이 빚어낸 사태, 바로 근대 이전 중국·한국미술의 불완전성을 직시하고 바로잡으려는 노력이다. 이 분리 현상은 기교와 사실주의로 꽃피울 수 있었던 예술혼의 잠재성과 창의력을 죽이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가 무엇을 놓쳤는가는 서양미술의 발전사를 보면 더욱 자명해진다. 문제는 한중 양국이 이 불완전성을 극복하고 분리된 예술언어의 재통일을 시도하지도 못한 채 20세기 들어 세상이 바뀌고 서양문화의 물결에 휩쓸리고 만 것이다. 그 결과 우리의 문화사적, 미술사적 사고의 틀도 그 안에 갇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전시들은 이토록 오랜 세월 기교와 무기교로 분리된 예술언어를 중개하고 균형을 이루는 지점을 가리키려고 한다. 그리고 그 결의를 전시기획자 조지윤의 글에서 읽을 수 있다. “이 전시를 통해 세밀하고 정교한 표현이 우리 미술을 바라보는 새로운 해석의 기준이라고 제시함으로써… 지금껏 주목받지 못하였던 한국미술의 또 다른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이 전시가 “한국미술을 더욱 다각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삼성미술관 Leeum의 시각을 집대성한 전시이다”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누군가 말했다. “가장 원대한 비현실을 붙드는 사람만이 가장 원대한 현실을 창조해낼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이 전시에 들어 있는 미래의 잠재성이 아닐까 생각하며 깊은 사색에 빠져든다.
좋은 전시는 “놀랄 줄 아는 능력”을 잃어가는 현대인에게 느끼는 법을 되살리고 경이감을 되찾아준다. <세밀가귀전>이 주는 “아 우리에게도 이러한 섬세함이 있었구나!”하는 경이감은 자각과 반성을 유도한다. 한국인이 놓아버린 듯한 세밀의 정서와 기교의 미를 찾고 기억하게 하고자 하는 의도는 설치기술에 세심하게 배어 있다. 곳곳에 설치된 인터랙티브 디지털 영상의 세부확대기능은 시각적 한계를 극복하게 해준다. 이 전시는 느리게 움직여야 하는 전시이다. 작품 한 점 한 점에 집중하고 작은 세부까지 면밀하게 들여다보는 세심한 관찰력이 필요한 전시이다. ●

[section_title][/section_title]

zoom in

8 나전 (14)

<나전대모 국당초문 삼엽형합>10.2cm (지름), 4.1cm(높이)고려 12세기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

해외소재 고려나전 8점 한자리에

김홍남 이화여대 명예교수, 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특별공간이 주어진 고려나전은 이 전시의 화중왕(花中王)이다. ‘세밀가귀’가 고려나전을 향한 찬사였던 만큼 제목 값을 톡톡히 하고 있다. 대개 사진으로만 접하던 해외 소재 고려경함이 일본뿐 아니라 구미 각국의 소장품까지 포함해서 총 6점이나 집결했다. 앞으로 언제 또 이런 호사를 누릴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고려경함은 고려불화와 함께 세계적인 미술품 반열에 들어있고 세계미술시장에서 그 부문의 동아시아미술품 중 가장 고가로 거래된다. 2006년 가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나전칠기, 천년을 이어온 빛전>이 고려경함에 한해서는 일본 소장처에만 의존하여 관장으로서 못내 아쉬웠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이 전시가 그때의 한을 풀어주는 것 같아 감회가 깊다.
서긍은 중세중국의 문화최성기 북송 말의 예술가황제 휘종(徽宗, 재위 1100~1125)의 신하로 시·서·화에 능한 인물이었다. 휘종은 세밀화의 대가였고 그가 이끌던 한림도화원은 화조화, 영모화 등 세밀화 부문에서 걸출한 화가들을 배출하였다. 황실 관요는 청자와 백자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고 골동수집 열기도 뜨거웠던 때로 감식안이 고도로 발전하였다. 궁궐 밖에서는 소식(蘇軾)일파의 평담천진(平淡天眞)과 불속(不俗)의 사인(士人) 예술론이 중국예술의 미래 방향을 예견하고 있던 시절이었으나 궁궐과 화원의 기조는 정교한 기교의 장식성이었고 세밀함을 귀히 여긴 시대였다. 서긍이 휘종황제에게 올리는 보고서인 <고려도경>은 문화와 예술에 대한 관찰기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특히 공예에 대해 예리한 감식력을 보인다. 전시에 나온 경함 6점은 제작 시기가 모두 나전문양의 도안화가 가속된 13세기 이후임에도 불구하고 극히 정교하고 화려하다. 그러하니 서긍이 보았던 12세기 초의 고려나전은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이 궁금증을 다소나마 해소해주는 유물이 소품이긴 하나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과 보스턴미술관에서 온 삼엽형합(三葉形盒)과 화형합(花形盒) 2점이다. 이들 12세기 사례에서는 뛰어난 기형 제작은 물론이고 재료사용은 현미경으로나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약 0.3mm 정도의 얇은 자개절단기법과 석황과 진사로 뒷면을 채색한 대모복채기법 및 극세의 황동금속 꼬기기법 등을 혼합사용하여 화려하고 섬세한 결과를 낳았다. 12세기의 나전경함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게 하는 작품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포류수금문 나전향상이 있다. 이 시기의 명품 중 명품이나 현재 복원 불가능할 정도로 파손상태가 심하다. 재현이라도 되어 세상에 그 존재가 널리 알려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11세기에 고려왕실이 중국황실에 나전칠기를 선물했다는 《동국문헌비고》의 기록으로 보아 12세기 전부터 이미 고려나전공예가 자신감과 국제적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휘종황제 재임기까지 고려왕실의 화가와 공예가가 파견되어 휘종의 칭찬을 받기도 하고, 화원에 들어가 기예를 닦을 정도로 북송황실과 긴밀한 문화예술교류를 유지하고 있었다. 13~14세기 몽골이 지배하던 원대에는 화원이 쇠락하고 궁중예술이 전반적으로 침체되자 원황실은 고려조정에 불화와 경함을 공물로 요구할 정도였다. 실로 동아시아에서 고려의 불화와 나전칠기공예의 수준을 따라갈 나라는 없었다. ●

EXHIBITION FOCUS 김종학 컬렉션, 창작의 열쇠

선명하고 화려한 원색으로 상상 속의 자연을 표현하는 작가 김종학은 우리 옛 물건에 대한 수집벽으로 유명하다. 1989년 그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280여 점의 목가구만으로도 그의 열정을 알 수 있다. 그의 컬렉션 중 전통 목기, 석물, 농기구 등 일상생활용물품을 한데 모은 〈김종학 컬렉션-창작의 열쇠전〉(6.9~8.16)이 구 벨기에영사관을 리모델링한 서울시립 남서울생활미술관에서 계속된다. 김종학의 작품과 우리 옛 물건에 나타난 질박하고 구수한 맛과 심플하고 시크한 현대적 조형미를 동시에 느껴보자.

수집과 창착의 관계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
한국 현대미술가들 중에는 손꼽히는 고미술 수집가들이 있다. 도상봉, 김환기, 김영학, 권옥연, 김종학, 이우환, 박대성 등은 알아주는 골동수집가이자 뛰어난 감식안을 지닌 작가들이다. 자연스레 이들은 자신의 수집품을 통해 미의식과 조형감각을 익혔을 것이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것이 작품에 자연스레 수렴되었을 것이다. 김환기와 김종학이 대표적인 예라고 생각한다. 공들여 수집한 ‘옛 물건’을 통해 미와 조형의 의미와 격을 깨달은 김환기와 김종학은 한결같이 소박하고 ‘심플’하기 그지없는 목가구, 백자 그리고 자연스러움과 해학미가 넘치는 다양한 공예품들에서 아름다움의 비밀을 알아차린 이들이다. 그리고 이를 적절하게 가공해 자신의 개성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물론 이 두 작가 외에도(수집가는 아니더라도) 우리 전통미술을 보는 안목, 이해하는 안목이 대단히 높은 이도 많고 그것을 작품에 원용하는 경우도 무척 많다고 본다. 대표적으로 김종영이 그렇다. 김종영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그러한 깨달음 속에서 나온 것인 듯하다. “돌이 있으면 그 돌의 생김새대로 하고 나무가 있으면 그 나무모양이 파악될 때까지 기다리다가 불필요한 부분만 떼어낸다. 본래부터 그렇게 있었던 것처럼 만들어내는데 어떤 것은 전혀 만들었다는 흔적이 없어서 조각인지 물건인지 몰라보겠다는 것들이 있다.”
많은 작가가 소박미를 한국미의 원형으로 보았고 따라서 “자연으로의 끝없는 동화, 문명 이미지의 자연 회귀, 민족의 문화적 원형과 시원성의 탐구”(이영학)는 한국 작가 대부분의 공통된 과제였다. 그래서 한국 작가들은 물질을 생명체로 다루고자 한다. 이 물활론적이며 자연을 영성스러운 존재로 인식하는 태도는 여전히 한국미술의 독특하고 중요한 지점이라는 생각이다.
서울시립 남서울생활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김종학 컬렉션-창작의 열쇠전〉은 나에게 형언하기 어려운 감동을 안겨주었다. 나 역시 현대미술 작품을 보는 시간만큼이나 골동품 가게를 헤매고 다니면서 틈나는 대로 수집에 열을 올리는 형편에서 그의 수준 높은 안목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가 구입한 옛것들은 기가 막히게 좋은 것들이라, 그가 부러운 안목과 빼어난 눈썰미, 탁월한 심미관의 소유자임을 새삼 느낀다. 특히 남서울시립미술관 공간 전체에 적절히 배치된 유물들은 그 존재 가치가 한층 높아 보였다. 그만큼 공간 연출이 뛰어났다. 입구에 늘어놓은 석물에서 시작해 전시장 방마다 절묘하게 배치된 고미술품들은 김종학이 평생 수집한 목가구, 목안, 조각보, 베갯모, 등잔, 농기구, 토기 그리고 온갖 연장들이다. 이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그의 기증품들을 익히 보아왔지만 이번에 선보인 ‘물건’들은 그야말로 무심하고 소박하고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것들이다. 비로소 그의 천진난만한 풍경화가 이것들로부터 비롯되었음을 깨닫는다.

김종학 (7)

김종학의 그림과 항아리가 함께 놓여있다

김종학 (23)

다양한 색채의 보자기가 있는 전시장 전경

질박한 미의 재구성
앞서 언급했듯이 김종학은 골동품 컬렉터로서 유명하다. 목기를 비롯하여 자수, 석상 등을 수집하는 그의 빼어난 안목은 오래전부터 정평이 나 있었다. 골동품에 대한 애정과 그로부터 받은 영감은 그의 작업에도 유감없이 드러난다. 우리 선조들이 자연을 관찰하고 소화하여 표현한 질박하면서도 화려하고, 엉성한 듯하면서도 섬세한 작품들로부터 작가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은 듯하다. 그 결과 서툰 듯, 혹은 과장된 그의 표현방식은 오히려 좀 더 자유롭게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림 보는 즐거움을 안긴다. 그가 우리 전통미술로부터 깨달아 추구하는 것은 결국 기운생동의 세계이자, 신명(神明)의 세계이다.
이번 전시에 나온 것들은 모두 옛사람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던 물건들이다. 선비들의 사랑방, 아녀자들의 규방, 그리고 농부들이 노동 현장에서 사용하던 것들이다. 우리 조상들의 생활공간을 치장해주던 소박한 도구들이자 일상에서 쓰이던 연장이자 우리의 체취에 친밀하게 와 닿는 것들이다. 또한 그것들은 기억이 간직된 형태의 생명물질이다. 너무나도 자연에 가깝고 또 단순한 오브제이기에 소박하고 투박하면서도 우리에게 그 어떤 원초적인 삶을 일깨워주는 강인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특히나 이름 없는 한 농부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 만든 연장이나 도구들은 한국인의 전통문화 속에 간직된 사물관, 자연관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우리 조상들의 그러한 미감과 재료에 대한 태도는 현대미술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물론 그러한 매력을 깨달은 자들의 경우에만 말이다. 따라서 한국 미술가들은 재료에 대한 인위적인 가공과 기교를 극도로 제한하고 물질 그 자체가 자연스럽게 ‘스스로 형성된 삶’을 드러내고자 했다. 특정 물질에 일련의 행위를 가함으로써 작가와 사물의 관계를 시각적인 차원에서 인식하게 하는 일이 작업이 되었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모종의 이미지를 구현하거나 무엇을 표현하기보다는 물질 그 자체를 최대한 활성화하려 한다.
김종학은 자신이 수집한 목가구, 민화, 농기구와 연장, 보자기 등에서 그림의 묘미를 응용해낸 자다. 여기에 설악산의 자연이 덧붙여졌다. 설악산으로 들어간 이후에 그가 그린 그림은 대부분 자연에서 받은 감흥을 표현주의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는 자연물에 내재하는 생명의 힘과 에너지를 구상과 추상, 감정의 표출과 절제, 대상의 생략과 강조 등 이중적이면서도 다층적인 언어로 표현해왔다. 또한 대상에 대한 감정의 절박함을 이른바 구상적인 묘사와 표현주의적인 색채, 서예적 제스처로 전달하고 있다. 모두 그가 수집한 물건들에서 유래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대상을 재현하기보다는 상상해서 그린다. 눈을 통해 전달된 시각정보를 그만의 감성으로 거른 후 재구성한다. 작품의 소재 자체는 구상적이지만 작품의 의도는 대상의 재현에 있는 게 아니라 ‘실제 대상이 갖고 있는 형태 중 비본질적이라고 여겨지는 부분들을 추상화해서 대상을 양식화하고자 하며 이를 통해 작가의 정신 자체를 그 추상화된 구체적 대상의 양식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이러한 기법을 사용하는 회화를 일반적으로 표현주의적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작가가 그리는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풍경이 아니라 작가의 손끝에서 치밀하게 재구성된 풍경이며 이는 원초적이고 야생적인 생명력이 느껴지는 선명하고 화려한 원색으로 재현된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체화한 후 이를 자신의 심상 속에서 형상화한다. 속도감 넘치는 대담한 원색의 붓질로 자연의 강렬한 리얼리티를 포착하는 자신의 작업을 두고 그는 “추상에 기초를 둔 새로운 구상회화”라고 정의한다. 추상과 구상의 경계에서 화려한 색채와 민화적인 구성으로 자연의 풍경을 생동감 있게 담아내는 비기교적인 그의 회화적 방법은 무엇보다도 조선시대 민화의 아마추어리즘과 닮아 있다. 멋대로의 형태미와 화려한 색채미, 그리고 자연의 순리와 조화를 보여주는 민화에서 큰 영향을 받은 그림이다. 특히나 원색의 색상은 탁월한데 따라서 그는 민족 고유의 색채정서를 현대에 재창조하고 발현해 놓았다고 평가된다. 사실 민화를 직접적으로 원용하거나 차용한다기보다는 ‘회화에 대한 옛사람들의 순후한 사유의 방식을 현대에 되살리고 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해 보인다. 하여간 그는 민화를 비롯해 우리 선조들의 온갖 유물이 지닌 빼어난 조형미로부터 자기 그림의 구도와 색채, 해학과 생동감을 견인해온 이다. 목가구와 농기구의 조형성, 전통자수의 생생한 색감 등을 자신의 의식과 몸 안에 녹여서 자연풍경을 그려내는 것이다. 언젠가 그는 “자연을 열심히 보지 않는 작가는 좋은 작가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 고미술이 지닌 조형의 비밀을 아는 자만이 좋은 작업을 할 수 있다고 해야 한다. ●

EXHIBITION FOCUS Aéroport Mille Plateaux

이 자리는 당신 것일 수 없다

실제와 상상, 개인과 사회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끊임없이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아티스트 듀오, 엘름그린 & 드라그셋이 국내 첫 개인전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서울에서 열리는 개인전 〈천개의 플라토 공항〉 (7.23~10.18)에서 이들은 삼성미술관 플라토를 공항 터미널로 탈바꿈시켰다. 시간과 장소의 경계가 모호해진 〈천개의 플라토 공항〉에서 작가들을 직접 만나 ‘미지의 여행’을 함께했다.

엘름그린&드라그셋의 작업은 시적이고 은유적이다. 이들의 작업은 전시장에 놓인 개별 오브제의 디테일도 중요하지만, 공간의 정체성을 흔들어 새로운 장소로 탈바꿈한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 받고 있다. 미술관을 병원으로 만들고(〈Please keep quite!〉 2003), 사막 한가운데에 명품 매장을 세우고(〈Prada Marfa〉 2005), 수영장에 익사한 모형으로 컬렉터의 죽음을 알리고(〈The Collectors〉 2009) 미술관을 한 개인의 주택으로 전환(〈Tomorrow〉 2013)하는 등 장소의 규범을 깨는 작업을 선보여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미술관을 공항 터미널로 치환하는 시도를 감행했다. 그들이 해석한 공항은 ‘장소에서 장소로 이어지는’ 비-장소적인 공간이며 누구의 소유일 수 없다.

전시장 (4)

〈 Departure 〉(오른쪽) 혼합재료 200×300×15cm 2015

한국에서의 첫 개인전이다. 전시 준비기간은 어느정도 였는가. 그동안 홍콩 도쿄 등의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 적은 있지만 미술관 전시로는 이번 개인전이 아시아 최초다. 준비기간만 2년 이상 걸렸다. 2013년과 2014년 삼성미술관 플라토를 사전 답사했다. 공간을 둘러보자마자 공항을 떠올렸다.
무엇이 공항을 떠올리게 했나. 비행기 엔진 소리를 차단하기 위해 전면유리로 지은 공항 터미널처럼 투명유리로 된 건물, 비행기 동체의 포물선 같은 곡면 공간, 중앙이 비어있어 안쪽 전시장에서 반대편이 보이는 구조, 일반 전시장처럼 가벽으로 구획되지 않은 점이 신선했다. 갤러리 바로 앞에 위치한 공항버스 정류장도 공항을 떠올리는 데 한몫했다. 미술관과 공항은 어떤 목적지를 향해 찾아가는 장소라는 유사점이 있다. 관객/여행자가 공간을 스쳐가며 ‘이행(transition)’이 일어나는 일종의 ‘비구역’이다. 또한 공항은 가지 못하는 곳, 허락되지 않는 행동 등 상당한 제약이 따른다. 미술관 역시 다양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유연한 공간인 척해도 실상 많은 영역에서 통제를 가한다.
들뢰즈&가타리가 서술한 《천개의 고원: 자본주의와 분열증(Mille plateaux : capitalisme et schizophrenie)》과 이번 엘름그린&드라그셋이 꾸민 〈천개의 플라토 공항(Aéroport Mille Plateaux)〉 사이의 언어유희가 돋보인다.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보충설명 부탁한다. 언어유희로 완벽히 맞아떨어질 뿐 아니라, 우리가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 전달을 배가했다고 본다. 물질적인 생각에 기반을 두면서 그 속의 생각이 모여 한층 더 깊은 차원의 무언가를 찾아내는 과정으로 《천개의 고원》을 읽었다. 들뢰즈&가타리가 이 책에 대해 “결론을 제외하고 각 고원은 어느 정도 독립적으로 읽을 수 있다”고 밝힌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다. 우리 작업도 논리로부터 벗어나있다. 각 작업은 수많은 레퍼런스의 중첩으로 구성되어있다. 전시장에 있는 관객, 장소, 사물이 때로는 각각의 아이덴티티를 지니고 때로는 교집합을 이루며 리좀(rhizome)처럼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나간다. 무엇보다 공항의 기반시설과 미술관은 복합적이고 유동적인 리좀적 성격을 지닌다.
로댕의 〈지옥의 문〉이 중앙에 있어 전시 디자인하는 데 어렵지 않았나? 공간을 꾸미면서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은 무엇인가. 로댕의 〈지옥의 문〉이 있는 공항 터미널로부터 커미션을 받았다고 가정하고 나머지 전시장을 채워나갔다. 전시를 준비하며 ‘물리적 특성(physical feature)’을 우선적으로 생각했다. 우리 작업에서 중요한 부분 중 하나다. 우리는 전시환경에 맞게 기존에 선보였던 작업을 다시 설치함으로써 그 의미를 재맥락화해 매번 다른 감각을 이끌어낸다. 이번 전시에 설치된 〈모던 모세〉(2006), 〈미수취 수하물〉(2005) 등이 그 예로 건축과 상황에 대한 ‘혼동’을 표현했다. 여행가방을 X-ray로 투과해 내용물을 보인 〈2010년 1월 1일로서〉를 보면 생활용품 사이에 2010년 반입이 허가된 HIV(에이즈 바이러스)약이 있다. 세부적인 디테일에 정치적 표현을 담아 전시장 밖의 현실과 마주하게 했다. 결국 건축을 통해 물리적, 가상적 패쇄성의 환경이 인간의 행동을 어떻게 규제하는지를 고찰한 셈이다.
매우 디테일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서 동선을 만들어냈다. 영화 시나리오처럼 탄탄한 스토리 보드가 있는 것 같다. 실제 공항 터미널의 동선에 따르도록 했고, 전시장에는 공항에서 들리는 안내방송도 나온다. 그럼에도 공항의 리얼리티는 없다. ‘1960년대에 상상한 2015년의 공항’을 전제로 ‘과거에 상상한 미래의 판타지즘’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전시장은 1960년대와 현대의 디자인이 혼재하도록 꾸몄다. 대표적인 예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콩고드 여객기 의자다. 다양한 기다림이 존재하는 공항처럼 1960년대의 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기다리게 했다.
관객이 전시의 구성요소처럼 느껴진다. 관객의 역할은 무엇인가. 관객 없이는 어떤 작업도 성립할 수 없다. 때때로 관객이 작가보다 더 뛰어난 해석을 부여할 때도 있다. 결국 작업은 우리 둘(엘름그린과 드라그셋)사이, 관객과 작가의 대화를 통해 존재한다. 물리적 경험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현대인의 사회활동은 노트북 앞에서 이뤄진다. 현대미술가가 사람들에게 제안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지금 여기’ 와 ‘물리적 감각’이다.
사회 정치적 이슈에 대한 발언을 직접 드러내기보다 작업 내부에 은유적으로 숨기는 방식을 취하는것 같다. 숨겨서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파괴적이고 체제 전복적인 메시지를 담지 않는다. 작업에 있어서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즈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의 작업은 당대의 사회적 이슈를 격한 감정으로 표출한 편이다. 그가 살던 시대에 비해 우리는 열린 세상에 살고 있지만 아직까지 복잡한 문제를 끌어들일 때는 의도적으로 작품에 풍자와 유머를 더해 숨기거나 가리는 방식을 의도적으로 취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작가는 거대담론, 진정한 진리를 설파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왜?”라는 질문을 던질 뿐이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왜” 아티스트가 되기로 결심했는가. 모든 과정은 우연이었다. 시각미술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엘름그린은 시를 썼고, 나(드라그셋)는 연극을 하며 감정을 예술형식으로 표현해왔다. 1990년대 초반 코펜하겐의 미술계에선 젊은 작가들의 활동이 활발했다. 자유로운 실험과 표현이 가능한 점이 좋았다. 우리는 다른 장르간의 협업을 통해 생각을 공유하고 표현하고자 했다.
마지막으로 관객을 위한 관람팁을 부탁한다. 많은 관객이 전시를 관람할 때 오독 혹은 오판할까봐 두려워한다. 작품에 대한 이해를 바라지 않길 바란다. 개개인의 이야기와 감각을 곤두세우고 즐기는 것이 우리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임승현 본지기자 사진 박홍순

마이클 엘름그린(Michael Elmgreen) 은 1961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잉가 드라그셋(Ingar Dragset)은 1969년 노르웨이 트론드하임에서 태어났다. 엘름그린&드라그셋은 1995년부터 듀오로 협업하고 있다. 1997년 덴마크에서 첫 개인전을 연 이후 영국 독일 노르웨이 덴마크 등 다양한 국가에서 개인전과 그룹전을 열었다. 2012년 런던 트라팔가 광장의 4번째 좌대 〈Powerless Structures Fig 101〉를 설치하는 등 작업, 큐레이팅, 공공미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베를린과 런던을 기반으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내년 초 베이징의 UCCA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열 계획이다.

전시장 전경

전시장 전경

 

 

 

NEW FACE 2015 김원정

“김원정은 나름의 실험적 작업방식으로 자연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타버린 편지를 묘목과 함께 심었는데 이것은 하나의 의식이자 사적 행위였다. 또한 병을 수직으로 심고 그 안에 상추씨를 넣어 다른 참여 예술가들을 위해 상추를 키웠다. 이 모든 소규모 프로젝트들은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수작업이 아닌 “생활 속 예술”로서 또 다른 차원의 섬세한 작업이다.”
– 클라라 청 홍콩 C&C디렉터

세상에 쓸모없는 것이 어디 있으랴

어떤 대상이나 생각이 ‘쓸모있느냐 없느냐’의 기준은 제각각이고 판단은 ‘상대적’이다. “세상에 잡초라는 말은 없다”는 말을 곱씹어보면 보리밭에서 자라는 벼, 논에서 자라는 보리를 잡초로 보는 우리네 편견에 대한 일갈이다. 상대적 가치에 대한 판단을 통해 얻는 생의 깨달음을 장자(莊子)는 이미 인간세편(人間世篇)을 통해 설파한 바 있다. “쓸모없다고 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쓸모있는 것이 된다. 발상의 전환을 해보면 쓸모없음이란 없다. 우리는 쓸데있는 것의 쓰임을 알지만 쓸데없는 것의 쓰임을 알지 못한다.” 이 말은 19세기 서구 시인의 언어를 통해 재현됐다. “잡초란, 아직 그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식물이다.”(랄프 왈도 에머슨(Emerson, Ralph Waldo))
예술이란 바로 이러한 말의 궁극적 지점에 다가가 있는 것이 아닐까? 예술이 삶을 살아가는 데 유용한 가치로 기능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과의 거리를 측량하는 것이 진정으로 예술을 알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당장 내 밥상 위의 밥이 되지는 않지만 그 이면의 효용은 분명 존재한다.
김원정은 작업 태도와 방식에서 현인들의 언급을 실천하는 듯 보인다. “자꾸만 쓸모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이 과연 어떠한 결과를 가져 왔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 작가가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해온 작업이 바로 <무용지용(無用之用)> 연작이다. “어떤 작물이든 특정한 목적에 부합하지 못하면 가치 없는 잡초일 뿐이라는 말에서 잔인한 인상을 받았어요. 그 말을 풀어보면 본질이 무엇이든 간에 관점과 목적에 따라 모든 것이 잡초일 수도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 속에서 우리가 간과했거나 혹은 알아보지 못한 우리들 혹은 여러 존재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잡초에 비유하여 작품으로 표현하게 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잡초란 해당 경작지에 오롯이 자라야 하는 식물의 성장을 저해하는, 제거되어야 할 존재로 여겨진다. 하지만 몇몇 식물학자들은 뿌리가 깊이 박히지 못한 식물을 위해 이른바 잡초들이 토층 깊은 곳에서 양분을 끌어올려줘야 비로소 비옥한 땅이 된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잡초는 쓸모없는(無用) 것이 아니라 존재의 이유가 명확한 것이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유아독존의 삶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을 수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고 인정하기에 나 자신이라는 가치만 존재하는 삶은 그 어디에서도 의미가 없음을 안다. 그렇지만 이른바 ‘우(愚)’를 계속 범하는 이유는 나의 가치를 지키려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김 작가의 작업은 대부분 초록의 기운이 가득하다. 아마 그녀가 나고 자란 곳(경남 고성)에 대한 기억을 거부할 수 없었으리라.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작가는 갑작스러운 모친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고 그것을 극복하는 수단으로 꽃을 비롯한 식물을 수집하게 되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인생의 부침이 닥쳤을 때, 결국 작업이 그녀의 탈출구 구실을 했던 것. 그렇다면 김 작가는 잡초의 가치를 발견하면서 인생의 분기점을 마련한 셈이다. 그러한 여정에서 최근 참여한 <태화강 국제설치미술제>에 설치했던 <A Journey 상추 프로젝트 : 끝없는 항해>는 이전 작업의 맥락을 이으면서 언어적 유희성을 살린 새로운 갈림길로 접어든 작품으로 보인다. “상추라는 이름에 제가 지나온 시간을 투영하기 위해 생각 ‘상(想)’과 뽑을 ‘추(抽)’라는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고, 이 두 단어의 조합은 상추 작업의 개념이 되면서 동시에 관객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상추> 작업은 언어로 의미를 직접적으로 제시하기보다는 상상의 여지를 제공하는 수단으로 국한했다고 설명했다.
어쨌든 김 작가의 작업은 푸르름을 담는다. 그 색과 향취는 토양이 없이는 존재하거나 이룩될 수 없다. “총명하고 지혜롭지 못하기에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노력하는 편”이라며 겸양의 제스처를 취했지만 “생명을 담는 ‘화분’이 되고자 한다”는 작가의 말은 작업에 대한 야심찬 욕심으로 들렸다.
황석권 수석기자

김원정은 1981년 태어났다. 경남대 미술교육과와 Pratt Institute Master of Fine Arts를 졸업했다. 지금까지 총2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한국과 미국 등지에서 열린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했다. 현재 경남 고성에서 작업하고 있다.

 상추, 배, LED간판 가변설치 2015

< A Journey 상추 프로젝트 : 끝없는 항해 > 상추, 배, LED간판 가변설치 2015

 

NEW FACE 2015 박지희

“공간적 구조 변화에 대한 실험만이 아닌 그 공간 속에서의 삶의 방식과 패턴에 대한 실험은 작가의 관심이 그저 과학적인(물리적이고 화학적인) 공간 변화의 차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공간 속에서의 생활과 삶의 차원에까지 포함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 민병직 대안공간루프 바이스디렉터

비가시적 유기체의 생존실험

시큼털털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음식물 처리장을 방불케 하는 냄새에 이끌려 다가가면 동파이프에 꼬치처럼 꽂혀있는 과일을 마주하게 된다. 가공하지 않은 생과일은 시간이 흐르며 썩어간다. 썩은 과일은 동파이프와 화학작용을 일으키면서 에너지를 생성한다. 변해가는 과일과 낡은 동파이프가 만나 새로운 생명을 탄생하는 ‘기초전지’로 변모한다. 실험실에서 일어날 법한 이 작업은 박지희 작가의 〈과일 전지 시리즈〉 이야기다.
2012년부터 2년간 런던에 거주한 작가는, 에일스버리(Aylesbury)와 헤이게이트(Heygate) 공공지원주택 단지의 재개발 논쟁이 첨예한 런던 남부의 엘리펀트&캐슬에 거주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황폐화된 이 지역에는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사이에 브루털리즘(Brutalism) 양식으로 대규모 주거복합단지가 세워졌다. 일명 ‘콘크리트 왕국’으로 불리는 이곳의 노후한 공공지원주택건물을 둘러싸고 2009년 이후 정부와 거주민은 서로 개발과 유지보수 논리를 펴며 본격적으로 갈등을 드러냈다. 그 중심에서 작가는 짧은 시간이나마 해당지역에 거주하는 구성원이면서 동시에 맥락과 무관하게 콘크리트 건물 자체가 가진 압도적인 스케일에 경도되는 이방인이었다. 내부인이자 주변인. 박지희의 작업이 개인적인 감정의 동요를 최대한 배제한 채 실험구조를 선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가는 직접 경험한 장소를 주제로 삼지만, 사회·정치적 이슈에 대한 동감의 표현을 피하고 수치와 계산을 통해 객관화된 다이어그램으로 풀어낸다.
영국에서 첫선을 보인 〈과일 전지 시리즈〉는 건물 노후의 중심에 있는 배관시설인 동파이프와 그 지역 이주민이 즐겨먹어 쉽게 구할 수 있는 열대과일을 재료로 사용했다. 노스탤지어를 자극하거나, 현장의 모습을 그대로 담은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하기보다는, 그곳의 식문화와 거주문화를 조합해 재개발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한편 대안공간 루프에서 열린 그녀의 국내 첫 개인전 〈직사각형은 언제 평행사변형이 될까?〉에서는 논현동을 주제로 실험을 이어갔다. 작가가 오래 거주한 공간인 논현동은 재개발 이슈의 중심에서 비켜나 있다. 논현동 주민들은 경제적인 조건에 맞춰 이 지역을 선택했을 뿐, 이 지역만의 특정한 정체성은 없다. 작가가 자신이 속한 동네를 작업으로 끌어들이게 된 계기는 우연히 영화 홍보차 방한한 영화배우 윌 스미스가 주변에 있는 고급 호텔 스위트룸에서 관광지를 바라보는듯한 시선으로 찍은 논현동 다가구주택지역의 사진 한 장이었다. 작가는 이 사진에서 타자화된 시선을 통한 낯선 풍경과 맞딱드린다. 이를 시작으로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논현동 다가구주택 밀집지역의 공간을 실험이라는 도구를 통해 가시화하는 과학/미학적 치환을 시도했다. 논현동이라는 지역을 정의 내리기 위한 실험은 동네 원룸의 공기부피와 무게를 측정하고 이를 구로 만들어 논현고개의 경사각에 해당하는 곡선 구조물에서 굴리는 것이었다. 또 코너모양의 테이블을 만들어 지역에서 시각적으로 가장 많이 노출되어 있는 방수천의 녹색 안료가 되는 산화크롬을 발생시켜 공기 중으로 날려 물리적 이동량을 실험했다. 공간과 장소의 존재를 화학과 물리적 실험으로 풀어내는 시도다. 또한 과일과 함께 동네 편의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조리식품을 사용해 <과일 전지 시리즈>를 만들었다. 이러한 실험을 통해 이름없는 공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죽어있는 공간이 아닌 지속적 변화가 가능한 곳으로 변화한다.
이러한 실험적인 장치를 통해 작가는 가시적인 사실 저변에 깔려 있는 비가시적인 것을 이끌어낸다. 또한 정체성이 모호한 공간에 뚜렷한 명제와 정의를 제시한다. 작가가 평소 “인간의 삶은 전지와 같다”고 생각해서 일까. 숨을 쉬고 있어도 멈춰있는 현대인과 그들이 사는 공간을 건조한 방식으로 재가시화시키고, 에너지를 부여하는듯 하다. 임승현 기자

박지희는 1984년에 태어났다.
이화여대와 동 대학원에서 조소를 전공하고 영국 슬레이드 미술대학원을 졸업했다. 2013년 영국의 기업 레어드 PLC와 커미션 작업을 했고 2014년 영국 케니스 아미타지 재단으로부터 젊은 조각가상을 받았다. 같은 해 런던의 한미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현재 7월 9일부터 8월 2일까지 대안공간 루프에서 국내 첫 개인전이 열리며 서울과 청주에서 작업 중이다.

 

NEW FACE 2015 조혜진

“<한시적 열대展>은 열대식물이라는 외래종의 유입이 한국적 맥락에서 정착해가는 상황을 추적하며 이 과정에서 기형적으로 변형된 식물과 그 근저에 깔린 생활방식, 문화적 현상을 드러낸다. 작가에 의하면 열대를 경험하는 방식은 아파트 실내에 정원을 만들어 식물을 키우는 과정에서 접하게 되는데, 이러한 생활 방식 안에서 열대식물은 실내에 맞춰진 작은 형태로 변형되어 소비되는 과정을 거친다. 작업은 열대식물이 용도 면에서 제 목적을 다하고 바깥으로 나왔을 때 낯설게 보여지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 노해나 독립큐레이터

한국식 열대의 풍경

작가 조혜진은 사물에 관심이 많다. 아니 사람이 사물을 대하는 방식에 관심이 많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사물은 사회 속에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관계망 속에서 만들어지며, 인간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케이크갤러리에서 열린 세 번째 개인전 <한시적 열대>(5.30~6.28)의 전시장은 비교적 썰렁한 편이다. 하지만 조혜진의 작업은 보기보다 풍부한 맥락을 포함한다. 열대식물을 주요 키워드로 신문기사, 학술자료, 인터넷, 현장 리서치 등 다양한 참고자료를 활용해 시대를 거치면서 외국에서 들여온 열대식물이 한국적 상황에 정착하는 과정을 조명했다.
전시장에 설치된 <이용 가능한 나무>는 행운목, 고무나무 등 열대식물이 죽고 난 이후 버려진 것을 수거해 각목형태로 만든 것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아파트에서 살아온 작가는 원래 베란다에 키우는 식물을 특별히 열대식물이라고 의식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최근 이사간 아파트에서 사람들이 화단에 식물을 가꾸면서 겨울이 되어 죽으면 버리고, 또 새로운 식물을 키우는 반복의 과정을 2년여 관찰하다가 한국사회에 열대식물이 많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고 광범위한 리서치를 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가정집에서 기르는 이파리가 넓은 관엽 식물은 대부분 열대식물에 해당한다. 하지만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는 여름에는 온도와 습도가 열대지방과 비슷하지만 겨울이 되면 급격히 추워져 열대식물을 제대로 키우기가 쉽지 않다. 작가가 아카이브한 자료 중 1958년 한 기사에는 열대식물의 월동관리 방법에 대한 정보가 구체적으로 실려있다. 1969년에는 서울 중심부 길가에 기존의 향나무를 뽑고 68월남장병들이 보내준 종려나무를 가로수로 심어 이국적인 정취를 내기도 했다. 주택이나 아파트 실내에서 그리고 가로수에 열대식물이 가꿔지는 현상은 상황 그자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적 집단 무의식을 보여준다. 작가는 식물의 형태가 사회 안에서 규격화되고 패턴화되는 모습을 각목의 풍경으로 대체시켰다.
또 다른 모습은 전시장에 배치된 자료집 속에 들어 있다. 작가는 방대한 리서치를 토대로 <종려나무와 도시루 사이에서>라는 한 편의 보고서를 썼다. 열대식물이 화환업계에 공산품화되어 유통되는 과정을 포착한 것이다. 경조사 화환 가장자리 장식에 종려나무 잎이 사용되기도 하지만 1990년대 말 부산에서 종려나무 잎을 대체할 플라스틱 잎사귀인 ‘도시루’가 개발되었고, 이것이 화환업계를 장악하게 된다. 검소한 생활을 장려하는 정책에 따라 화환 자체의 수요가 줄었다가 1990년대 말 가정의례법이 폐지되고 이후 급격히 늘어난 수요를 감당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종려나무’에서 ‘도시루’로 전환되는 과정을 추적하면서 국가가 사회 문화를 통제하는 방식과 더불어 자본주의 시장 논리가 생활 전반에 반영되는 논리를 추출해냈다.
한편 열대에 대한 환상은 한국뿐 아니라 다른 국가에서도 엿볼 수 있는 사회적 현상이다. 애초에 관엽식물을 실내에서 키우는 것은 제국주의 시기 유럽에서 희귀 식물을 채집해 소개한 것에서 시작해 우리나라까지 오게 된 것이다. 전시장 다른 방에는 <우산으로 야자수를 만드는 방법>, <페트병으로 야자수 줄기를 만드는 방법>에 대한 매뉴얼과 그 모형이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다운받은 이미지를 스크랩해 열대 레시피를 선보였다. 여기에서 작가의 역할은 리서치, 스크랩과 매뉴얼 제작이다.
조혜진의 작업은 조소를 전공한 작가들이 일반적으로 새로운 형태를 생산하고 구현하는 것과 달리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사물과 관계 맺는 방식에 주목한다. 그녀는 “평범한 사람들, 예술가가 아닌 사람들이 무엇인가 만드는 행위야말로 실로 강력한 의사 표현이자 적극적인 행동”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일상의 사물은 더 이상 장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고, 산업에 의해 사물이 형태가 결정되고 상품화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일반인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행위가 흥미롭기만 하다.
이슬비 기자

조혜진은 1986년 태어났다. 이화여대 조소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12년 유중아트센터에서 열린 첫 개인전 <유용한 사물>을 시작으로 3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서교예술실험센터, 갤러리 팩토리, 복합문화공간 에무, 공간291 등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했다.

 

조혜진 (4)

<이용 가능한 나무> 수집한 열대식물을 각목으로 조각(행운목, 파키라, 녹보수, 고무나무) 가변설치 2015

 위 <우산으로 야자나무를 만드는 간단한 방법>(오른쪽) 설치와 매뉴얼 제작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