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FOCUS 김종학 컬렉션, 창작의 열쇠

선명하고 화려한 원색으로 상상 속의 자연을 표현하는 작가 김종학은 우리 옛 물건에 대한 수집벽으로 유명하다. 1989년 그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280여 점의 목가구만으로도 그의 열정을 알 수 있다. 그의 컬렉션 중 전통 목기, 석물, 농기구 등 일상생활용물품을 한데 모은 〈김종학 컬렉션-창작의 열쇠전〉(6.9~8.16)이 구 벨기에영사관을 리모델링한 서울시립 남서울생활미술관에서 계속된다. 김종학의 작품과 우리 옛 물건에 나타난 질박하고 구수한 맛과 심플하고 시크한 현대적 조형미를 동시에 느껴보자.

수집과 창착의 관계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
한국 현대미술가들 중에는 손꼽히는 고미술 수집가들이 있다. 도상봉, 김환기, 김영학, 권옥연, 김종학, 이우환, 박대성 등은 알아주는 골동수집가이자 뛰어난 감식안을 지닌 작가들이다. 자연스레 이들은 자신의 수집품을 통해 미의식과 조형감각을 익혔을 것이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것이 작품에 자연스레 수렴되었을 것이다. 김환기와 김종학이 대표적인 예라고 생각한다. 공들여 수집한 ‘옛 물건’을 통해 미와 조형의 의미와 격을 깨달은 김환기와 김종학은 한결같이 소박하고 ‘심플’하기 그지없는 목가구, 백자 그리고 자연스러움과 해학미가 넘치는 다양한 공예품들에서 아름다움의 비밀을 알아차린 이들이다. 그리고 이를 적절하게 가공해 자신의 개성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물론 이 두 작가 외에도(수집가는 아니더라도) 우리 전통미술을 보는 안목, 이해하는 안목이 대단히 높은 이도 많고 그것을 작품에 원용하는 경우도 무척 많다고 본다. 대표적으로 김종영이 그렇다. 김종영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그러한 깨달음 속에서 나온 것인 듯하다. “돌이 있으면 그 돌의 생김새대로 하고 나무가 있으면 그 나무모양이 파악될 때까지 기다리다가 불필요한 부분만 떼어낸다. 본래부터 그렇게 있었던 것처럼 만들어내는데 어떤 것은 전혀 만들었다는 흔적이 없어서 조각인지 물건인지 몰라보겠다는 것들이 있다.”
많은 작가가 소박미를 한국미의 원형으로 보았고 따라서 “자연으로의 끝없는 동화, 문명 이미지의 자연 회귀, 민족의 문화적 원형과 시원성의 탐구”(이영학)는 한국 작가 대부분의 공통된 과제였다. 그래서 한국 작가들은 물질을 생명체로 다루고자 한다. 이 물활론적이며 자연을 영성스러운 존재로 인식하는 태도는 여전히 한국미술의 독특하고 중요한 지점이라는 생각이다.
서울시립 남서울생활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김종학 컬렉션-창작의 열쇠전〉은 나에게 형언하기 어려운 감동을 안겨주었다. 나 역시 현대미술 작품을 보는 시간만큼이나 골동품 가게를 헤매고 다니면서 틈나는 대로 수집에 열을 올리는 형편에서 그의 수준 높은 안목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가 구입한 옛것들은 기가 막히게 좋은 것들이라, 그가 부러운 안목과 빼어난 눈썰미, 탁월한 심미관의 소유자임을 새삼 느낀다. 특히 남서울시립미술관 공간 전체에 적절히 배치된 유물들은 그 존재 가치가 한층 높아 보였다. 그만큼 공간 연출이 뛰어났다. 입구에 늘어놓은 석물에서 시작해 전시장 방마다 절묘하게 배치된 고미술품들은 김종학이 평생 수집한 목가구, 목안, 조각보, 베갯모, 등잔, 농기구, 토기 그리고 온갖 연장들이다. 이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그의 기증품들을 익히 보아왔지만 이번에 선보인 ‘물건’들은 그야말로 무심하고 소박하고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것들이다. 비로소 그의 천진난만한 풍경화가 이것들로부터 비롯되었음을 깨닫는다.

김종학 (7)

김종학의 그림과 항아리가 함께 놓여있다

김종학 (23)

다양한 색채의 보자기가 있는 전시장 전경

질박한 미의 재구성
앞서 언급했듯이 김종학은 골동품 컬렉터로서 유명하다. 목기를 비롯하여 자수, 석상 등을 수집하는 그의 빼어난 안목은 오래전부터 정평이 나 있었다. 골동품에 대한 애정과 그로부터 받은 영감은 그의 작업에도 유감없이 드러난다. 우리 선조들이 자연을 관찰하고 소화하여 표현한 질박하면서도 화려하고, 엉성한 듯하면서도 섬세한 작품들로부터 작가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은 듯하다. 그 결과 서툰 듯, 혹은 과장된 그의 표현방식은 오히려 좀 더 자유롭게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림 보는 즐거움을 안긴다. 그가 우리 전통미술로부터 깨달아 추구하는 것은 결국 기운생동의 세계이자, 신명(神明)의 세계이다.
이번 전시에 나온 것들은 모두 옛사람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던 물건들이다. 선비들의 사랑방, 아녀자들의 규방, 그리고 농부들이 노동 현장에서 사용하던 것들이다. 우리 조상들의 생활공간을 치장해주던 소박한 도구들이자 일상에서 쓰이던 연장이자 우리의 체취에 친밀하게 와 닿는 것들이다. 또한 그것들은 기억이 간직된 형태의 생명물질이다. 너무나도 자연에 가깝고 또 단순한 오브제이기에 소박하고 투박하면서도 우리에게 그 어떤 원초적인 삶을 일깨워주는 강인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특히나 이름 없는 한 농부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 만든 연장이나 도구들은 한국인의 전통문화 속에 간직된 사물관, 자연관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우리 조상들의 그러한 미감과 재료에 대한 태도는 현대미술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물론 그러한 매력을 깨달은 자들의 경우에만 말이다. 따라서 한국 미술가들은 재료에 대한 인위적인 가공과 기교를 극도로 제한하고 물질 그 자체가 자연스럽게 ‘스스로 형성된 삶’을 드러내고자 했다. 특정 물질에 일련의 행위를 가함으로써 작가와 사물의 관계를 시각적인 차원에서 인식하게 하는 일이 작업이 되었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모종의 이미지를 구현하거나 무엇을 표현하기보다는 물질 그 자체를 최대한 활성화하려 한다.
김종학은 자신이 수집한 목가구, 민화, 농기구와 연장, 보자기 등에서 그림의 묘미를 응용해낸 자다. 여기에 설악산의 자연이 덧붙여졌다. 설악산으로 들어간 이후에 그가 그린 그림은 대부분 자연에서 받은 감흥을 표현주의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는 자연물에 내재하는 생명의 힘과 에너지를 구상과 추상, 감정의 표출과 절제, 대상의 생략과 강조 등 이중적이면서도 다층적인 언어로 표현해왔다. 또한 대상에 대한 감정의 절박함을 이른바 구상적인 묘사와 표현주의적인 색채, 서예적 제스처로 전달하고 있다. 모두 그가 수집한 물건들에서 유래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대상을 재현하기보다는 상상해서 그린다. 눈을 통해 전달된 시각정보를 그만의 감성으로 거른 후 재구성한다. 작품의 소재 자체는 구상적이지만 작품의 의도는 대상의 재현에 있는 게 아니라 ‘실제 대상이 갖고 있는 형태 중 비본질적이라고 여겨지는 부분들을 추상화해서 대상을 양식화하고자 하며 이를 통해 작가의 정신 자체를 그 추상화된 구체적 대상의 양식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이러한 기법을 사용하는 회화를 일반적으로 표현주의적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작가가 그리는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풍경이 아니라 작가의 손끝에서 치밀하게 재구성된 풍경이며 이는 원초적이고 야생적인 생명력이 느껴지는 선명하고 화려한 원색으로 재현된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체화한 후 이를 자신의 심상 속에서 형상화한다. 속도감 넘치는 대담한 원색의 붓질로 자연의 강렬한 리얼리티를 포착하는 자신의 작업을 두고 그는 “추상에 기초를 둔 새로운 구상회화”라고 정의한다. 추상과 구상의 경계에서 화려한 색채와 민화적인 구성으로 자연의 풍경을 생동감 있게 담아내는 비기교적인 그의 회화적 방법은 무엇보다도 조선시대 민화의 아마추어리즘과 닮아 있다. 멋대로의 형태미와 화려한 색채미, 그리고 자연의 순리와 조화를 보여주는 민화에서 큰 영향을 받은 그림이다. 특히나 원색의 색상은 탁월한데 따라서 그는 민족 고유의 색채정서를 현대에 재창조하고 발현해 놓았다고 평가된다. 사실 민화를 직접적으로 원용하거나 차용한다기보다는 ‘회화에 대한 옛사람들의 순후한 사유의 방식을 현대에 되살리고 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해 보인다. 하여간 그는 민화를 비롯해 우리 선조들의 온갖 유물이 지닌 빼어난 조형미로부터 자기 그림의 구도와 색채, 해학과 생동감을 견인해온 이다. 목가구와 농기구의 조형성, 전통자수의 생생한 색감 등을 자신의 의식과 몸 안에 녹여서 자연풍경을 그려내는 것이다. 언젠가 그는 “자연을 열심히 보지 않는 작가는 좋은 작가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 고미술이 지닌 조형의 비밀을 아는 자만이 좋은 작업을 할 수 있다고 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