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잡지의 숙명?

청명한 가을하늘이 반가운 요즘이다. 대기도 뽀송뽀송, 상쾌한 기분을 부추긴다. 이런 계절 감각에 걸맞게 이번호는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만들었다. 앞선 7, 8월호가 국립현대미술관 문제나 광복 70주년처럼 첨예하고 시의성 있는 주제로 숨 가쁘게 내달렸다면, 이번 9월호는 숨 고르며 한 템포 쉬어가듯 완급을 조절하는 분위기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여느 때에 비해 내용이 부실하다거나 형식이 헐렁해진 건 아니다. 예컨대 은둔 생활을 하는 작가 김명숙과 요즘 보기 드물게 목판화 작업에 외길을 걸어온 정비파 작가의 작가론은 그들의 작품만큼이나 깊이 있는 글이다. 그리고 법고창신의 의미를 되새기게 되는 문봉선 교수의 개인전 소식과 국립현대미술관 <2015 올해의 작가상> 후보 4인 인터뷰, <都城圖>를 테마로 한 이태호 교수의 연재와 현장감 있는 구보다 시케코 추모 기사 등 무엇 하나 소홀히 지나칠 수 없다. 같은 맥락에서 특집 또한 신선한 시도로 봐주길 바란다. 미술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대중문화 현상을 참신하게 풀어낸 기획이라고 자평한다. 물론 마감직전까지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고 난관에 맞닥뜨리기도 했지만, 우리 편집부 막내 기자와 동갑내기 디자인 팀장이 의기투합해 만들어낸 기사다. 맛깔난 요리 한 접시를 독자들에게 대접하게 된 것 같아 기특하고 덩달아 흐뭇하다.
한편, 이번호는 광고 지면이 부쩍 늘었다. 솔직히 말해 이 대목에서 표정관리가 쉽지 않다. 회사 수익 면에서는 당연히 좋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그런 내색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왜냐면, 광고 많은 잡지를 싫어하는 독자가 적지 않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대부분 독자는 잡지에 광고가 많으면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갖는다. 상대적으로 책의 내용이 빈약하다거나 원치 않는 광고를 일방적으로 접하게 되는 상황을 불편해 한다. 나 역시도 한때 명품광고 일색인 멤버십 매거진이나 온갖 요란한 상업광고로 도배된 여성지를 보면서 짜증을 냈었다. 하지만 이제는 입장이 180도 바뀌었다. 다른 잡지나 신문, 방송을 보면서 광고가 많으면, ‘아~ 이 매체가 이렇게 인기 있고 영향력이 크구나!’라는 생각을 먼저 한다. 《ARTFORUM》 《Art in America》 《ART》 같은 외국 유명 미술전문지는 광고가 엄청나게 많다. 특히 《ARTFORUM》은 3분의 2 이상을 광고가 차지하기 일쑤다. 그럼에도 전 세계 독자는 이런 책에서 기사뿐 아니라 광고를 통해서도 많은 정보를 얻는다. 국내 미술계에서 《월간미술》은 광고주가 가장 선호하고 신뢰하는 매체다. 발행부수를 비롯해 영향력이나 파급력이 크다. 그러니 광고주 입장에선 당연히 효과적인 홍보수단으로 《월간미술》을 선호한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는 논쟁처럼, 회사 수익과 직결된 광고가 우선인지 책 본연의 목적인 기사가 우선인지는 처한 입장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 다만 편집장으로서 내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우리 편집부 기자들은 광고를 목적으로 책을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좋은 기사로 좋은 책을 만들면 광고는 자연스럽게 따라오기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월간미술》에서 광고와 관련된 업무는 편집부와 상관없이 전적으로 광고담당 부서에서 전담한다.
정리하자면, 《월간미술》은 비영리 공익기관이나 자선단체가 아니다. 엄연히 수익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출판기업이다. 따라서 광고 수주와 정기구독 유치를 통한 안정된 재정 조달이 회사존립의 최우선 전제 조건이다. 언젠가도 이 자리에서 밝혔듯이 《월간미술》은 모든 필자에게 소정의 원고료를 지급한다. 지금까지 단 한차례 지연되거나 빠트린 적이 없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이와 같은 배경엔 분명 광고료 수입이 큰 몫을 차지한다. 사정이 이러니 혹여라도 그동안 《월간미술》에 실린 광고를 무조건 미워(?)했거나 심지어 시기하고 질투했던 독자께 한 말씀 드리고 싶다. 앞으로는 이런 상황을 어쩔 수 없는 ‘잡지의 숙명’이라고 생각해 주시고, 기사 못지않게 광고 또한 정보취득을 위한 다양한 콘텐츠 가운데 하나로 여기고 관심 있게 봐주기 바란다고 말이다.
편집장 이준희 dam2@unitel.co.kr

COLUMN

역사적 자료의 중요성과 아카이브의 힘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우리에게 낯선 단어이던 ‘아카이브 (archive)’가 이제는 일반인도 알 정도로 친숙해졌다. 간단히 말해 기록된 자료를 의미하는 이 전문용어가 이처럼 친숙하게 된 이면에는 미술자료연구가 김달진의 노력이 크다. 물론 그 이전에도 예컨대 국립현대미술관 등 공공미술관들이 나름의 자료실을 갖추고 있었으나,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 순전히 아카이브 자료만의 전시로 발전한 것은 김달진미술자료 박물관에 이르러서이다.
최근 선보인 <한국미술 전시공간의 역사전>(7.24~10.24)은 순전히 전시 자료에 관한 전시이다. 이를 통해 그동안 말만 들었지 실물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없었던 희귀자료 250여 점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가 일상을 살면서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면 아마도 이런 것일 게다. 가령 개성부립박물관 신축공사 설계도 3호(1931, 국가기록원 소장)는 이 역사적인 건물이 지어질 당시의 모습을 상상하게 해준다. 더군다나 이 박물관의 위치가 지금은 갈 수 없는 북한 땅 개성에 있기 때문에 아쉬움이 더하다. 지금도 이 건물이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무슨 용도로 쓰이고 있는지 우리는 이 설계도면 하나를 앞에 놓고 갖가지 상상을 할 수 있다. 특히 이 박물관이 미술인에게 더욱 호소력 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고(故) 고유섭 선생 때문이다. 이 박물관은 1931년 개성의 유지들이 헌금을 모아 지은 것으로 고유섭 선생은 1933년에 이곳에 초대관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한국근대미학 및 미술사의 선구자 고유섭 선생의 업적에 대해 논하기에는 지면이 짧아 생략하거니와, 아무튼 이 한 장의 도면이 이처럼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만 밝혀두고자 한다. 이야말로 미술자료가 지닌 힘이 아닌가. 대한민국이 문화 국가임을 자부하고 나아가서 문화강국이 되고자 한다면 ‘아카이브’에 대해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또한 전시에는 조선총독부가 시정 5년을 기념하기 위해 개최한 조선물산공진회의 미술관 신축설계도(1915, 국가 기록원 소장)도 출품되었다. 오늘날의 엑스포에 해당하는 이 물산공진회는 일제가 조선을 강제 병합(1910)한 후 5년이 지난 시점에서 저간의 시정을 보여주려는 목적에서 꾸민 것이다. 말하자면 순전히 대국민 홍보용 전시로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의해 치밀하게 계획된 전시였다. 이 건물은 행사가 끝난 후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이 한 장의 설계도면은 1936년 일본인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헤이가 설계한 덕수궁미술관 입면도와 함께 1930년대 당시 일제에 의해 서양풍의 건물이 이 땅에 많이 지어졌음을 입증해주는 시각적 자료물이다. 따라서 이런 자료들은 서양의 근대가 일제를 통해 어떻게 이땅에 수입되고 어떤 문화적 갈등과 충돌을 일으켰으며, 또 부분적으로는 어떻게 토착화했는가 하는 첨예한 문제들를 풀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들인 것이다.
이번 전시는 비단 건축물의 설계도면에 그치지 않고 100여 년에 걸친 전시의 역사 속에서 한국미술이 어떤 도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가 하는 점을 구체적인 실증자료를 통해 입체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가령, 명동화랑에서 열린 전시 <한국 현대미술 1957~1972: 추상=상황 및 조형과 반조형> 도록은 당시 일개 상업화랑에 지나지 않은 명동화랑이 미술관이 담당해야 할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상업 활동에만 치중하는 현재의 국내 상업화랑들에 시사하는 바가 큰 자료이다. 명동화랑 사장이자 초대 한국화랑협회장을 역임한 고(故) 김문호 선생을 기리는 기념사업의 필요성을 이 한 장의 자료가 생생히 말해준다.
윤진섭 시드니대 명예교수

SIGHT & ISSUE 백남준 선생 곁으로 간 부인 구보타 시게코를 생각하며

아직도 구보타 시게코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백남준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 혼자서 외롭지 않냐고 묻자 “나는 항상 남준과 같이 있는데 왜 그런 질문을 하나?” 하면서 그와 항상 함께 있다고 단호히 말씀하시던 모습이 뇌리에 선명하다.
1984년, 백남준 선생이 35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을 때 당시 서울 가회동에 있는 한국미술관을 방문하셨고, 필자가 부인 구보타 시게코를 김윤순 관장께 소개하며 두 사람이 일본어로 대화 가능할 테니 서로 친구로 지내면 좋겠다고 소개한 것이 첫 인연이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 임창렬 당시 경기도지사가 경기도에 백남준미술관 건립을 추진했다. 추진위원이었던 김윤순 관장은 후보 부지 가운데 평소에 백남준 선생께서 큰 관심을 보이던 DMZ근처 초평도를 지지했으나 여러 여건상 현재의 용인시 자리로 결정됐다. 2006년 1월 29일 백남준 선생은 미술관 건립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해 봉은사에서 열린 49재 추모행사 참석자 명단에 부인 구보타 시게코가 없는 것을 보고 김 관장이 급히 미국에 연락해 추모행사에 참여하도록 하면서 구보타 시게코는 김 관장께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수시로 말씀하셨다. 2006년에는 필자 역시 미국 로드아일랜드에 거주하던 때라 구보타 시게코 여사가 한국 방문 후 미국으로 돌아오셨을 때에 찾아뵙고 위로해 드렸다. 백남준 선생 생전에 늘 함께 가셨다는 인근 식당에 가서 백 선생이 즐겨 드시던 음식을 시켜 같이 먹었다. 그는 선생과 함께 했던 흔적을 좇으면서 식당주인과 늘 주고받던 농담을 되 뇌이며 과거를 추억했다. 며칠 후 다시 구보타 시게코 여사로부터 전화연락이 왔다. 4월 26일 구겐하임에서 백남준 선생 추모식을 하니 꼭 오라고 하셨다. 백남준 선생 친구들의 회상 메시지와 오노 요코의 퍼포먼스가 이어지면서 구겐하임을 가득 메운 관객은 백남준을 추모했다.
한국미술관은 백남준 선생 추모 1주기 전시(2007.1.29)에 이용우 선생과 방송인 조영남을 모시고 구보타 시게코 여사와 토크 쇼를 진행했다. 2주기(2008.1.29)에는 무속인 김금화를 초대해 진혼굿을 했고, 3주기(2009.1.29)에는 백남준 문화 콘텐츠를 주제로 한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처럼 모든 행사에 구보타 시게코 여사가 참석했다. 당시 김문수 경기도지사와 면담도 하고, 용인시장으로부터 명예시민증도 받았다.
2012년 백남준 탄생 80주년 기념행사차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그사이 심해진 지병으로 걷지도 못하고 휠체어로 이동해야 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못하였다. 그는 백남준을 사랑하면서 남편의 나라 한국도 사랑했다. 지난 3월 초 뉴욕의 구보타 시게코 여사를 방문해서 내년 백남준 10주기 추모행사에 꼭 오시라고 하니 여사는 수술부위를 내보이며 이제 힘들어 더 이상 한국에 가지 못할 것 같다며 못내 아쉬워 하셨다.
몇 달 지나 6월 30일자 소인이 찍힌 구보타 시게코 여사의 편지가 김윤순 관장 앞으로 왔다. 한국미술관의 발전을 기원하고 김 관장과 나에게 감사하다는 내용이었다. 김 관장은 반가운 마음에 미국에 전화를 했는데 정작 구보타 시게코의 목소리가 힘이 없고 통증이 너무 심해서 병원에 입원했다는 말만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김 관장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감지했다. 과거에도 수시로 입원했다가도 몇 주 후 다시 연락되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통화한 경우가 많아 위안을 삼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7월 30일 오후 뉴욕은 폭우가 쏟아지면서 앞이 안보일 정도로 어두웠다. 필자는 백남준 선생의 집이 있는 머서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Greenwich Village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장례 시작 시간이 다가오자 유족과 하객들이 하나 둘 도착했다.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에 도예가 박영숙 선생께서 백자 유골함을 유족에게 드릴 선물로 주셨기에 장례위원에게 말씀 드리니 꺼내서 곁에 진열하자고 했다. 일본에서 큰언니 호소 게이코와 여동생 구보타 유코, 조카 호소 레이코 씨가 유족으로 참석했고, 백남준 선생 생전에 구보타 시게코 여사와 함께 선생의 작업을 돕고 우정을 쌓았던 친구들이 참석했다. 노먼 발라드와 요한 자우라커가 장례진행을 담당했고 Streaming Museum의 니나 콜로시, EAI의 노라, MoMA의 바바라 런던, 피아니스트 류이치 사카모토 등 유명 인사들이 저녁 6시에서 9시까지 이어진 장례식을 지켜봤다. 백 선생 곁으로 가는 시게코 여사의 표정은 더없이 평온해 보였다. 조문객들은 모두 구보타 시게코 여사의 얼굴을 보며 “이제 백남준 곁으로 가니 행복한가봐요. 그지없이 편안해 보이네요” 하며 그의 명복을 빌었다.
엿새 후 8월 5일 백남준아트센터와 한국미술관에서 구보타 시게코 여사 추모행사를 준비했다. 백남준아트센터에 마련된 빈소에서 각계 인사들의 조문사로 추도식을 갖고 뒤이어 한국미술관에서는 구보타 시게코 여사 관련 사진자료와 영상, 성우 고은정 선생이 직접 지으신 추모시 낭송이 있었다. 그리고 뉴욕에서 백남준 선생 부부와 인연을 맺고 끈끈한 정을 나누던 무용가 홍신자 선생께서 특별히 추모 퍼포먼스를 헌정했다.
한국미술관을 방문할 때마다 “여기 오면 집 같아. 마음도 몸도 편해지네” 하며 이런저런 생각들을 펼쳐 놓으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날도 분명 의자에 앉아 우리의 추모식을 지켜보고 계셨음에 틀림없다.
안연민 경기도 박물관협회 회장, 한국미술관 공동관장

8월 5일 저녁 한국미술관에서 백남준과 구보타 시게코와 특별한 인연을 맺은 현대무용가 홍신자의 추모 퍼포먼스가 진행됐다.

8월 5일 저녁 한국미술관에서 백남준과 구보타 시게코와 특별한 인연을 맺은 현대무용가 홍신자의 추모 퍼포먼스가 진행됐다.

 

HOT PEOPLE 김이삭 헬로우뮤지엄 관장

오유경, 움직이는 도시

아이들의 참여로 완성되는 작가 오유경의 〈움직이는 도시〉

“어린이에게 예술은 놀이다”

2007년 11월 국내 최초의 사립 어린이미술관으로 개관한 헬로우뮤지움. 이곳은 오직 어린이를 위한 공간으로 시각미술을 보고 경험하며 예술에 대한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미술관으로서 사랑받아왔다. 그로부터 약 8년이 흐른 올해 8월, ‘동네미술관’이란 친근한 이름으로 헬로우미술관이 서울 성동구 금호동에 새롭게 인사를 건넸다. ‘동네미술관’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관객은 어린이뿐 아니라 동네 주민으로 확장됐다. 개관전 〈놀이시작〉(8.8~9.30)에 참여한 오유경 작가는 종이 박스를 활용해 성동구 재개발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벽돌을 만들었다. 아이들이 직접 장난감 블록처럼 종이상자를 쌓으며 지역의 역사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지역민들의 삶이 오롯이 녹아 있어 ‘동네미술관’의 취지에 잘 부합된 모습이다. 이외에도 이번 개관전에는 강영민, 오유경, 홍순명, 홍장오가 참여했다.
기존 어린이미술관이 강남 역삼동에 위치해 다소 진입 문턱이 높다는 한계를 고민해온 김이삭 관장은 이를 뛰어넘기 위해 지역 문화기반 시설이 취약한 곳, 교육비 지출이 적고, 어린이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을 오랜 기간 조사한 끝에 성동구에 새로운 미술관을 세웠다. 지역의 문화적 갈증을 증명이라도 하듯 ‘동네미술관’ 개관 열흘 만에 1,000명이 넘는 관객이 몰리며 무더운 여름을 아이들의 열기로 더 뜨겁게 달궜다고 한다.
새로운 시도로 미술관 관객의 폭을 확장하고 미래의 관객을 이끌어내는 주인공인 김이삭 관장은 국내 국공립미술관 에듀케이터 직함을 받은 1호 에듀케이터이자 전시기획자다. 김 관장은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미술 매니지먼트를 전공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녀는 우연히 일하게 된 스미소니언 자연사미술관에서 주변의 권유로 ‘뮤지엄 에듀케이션’이라는 당시로서는 매우 생소한 미술관·박물관 부서에서 근무 하게 됐다. ‘에듀케이터’의 매력에 빠진 그녀는 전공을 미술관교육학으로 바꾸고 본격적인 ‘에듀케이터’의 길을 걷게 됐다.
국내에서는 국립중앙박물관 어린이박물관 개관 준비를 도우며 본격적으로 에듀케이터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어린이미술관에 대한 관심과 수요가 시발하던 시점이었기에 그는 시작단계의 많은 미술관에서 건립을 위한 제반 업무를 담당했다. 그녀의 발자취 하나하나가 지금의 그녀와 헬로우뮤지움을 있게한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대형 조직을 거느리는 기관의 특수성에서 오는 단점을 보완하고 자신이 직접 꾸린 창작적 콘텐츠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대안적인 공간 건립을 이끌어냈다. 김이삭 관장은 “헬로우뮤지움은 사립미술관으로 등록되어 있지만 ‘대안적 성격’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며 “문화적 권력을 보여주기 위한 공간으로 탄생한 박물관·미술관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할 대안적 공간”으로 나아가려는 ‘동네미술관’의 방향성을 내비쳤다. 미술 전문가가 만들고 모두가 쉽게 즐길 수 있는 다수를 위한 공간이 ‘동네미술관’의 지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김 관장은 “3~5년 안에 원하는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면 미술관을 접으려고 한다”고 이야기할 만큼 ‘동네미술관’ 운영에 열정과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거대자본 없이 소자본으로 개인이 미술관을 운영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현재 새로운 형태의 벤처기부펀드인 씨프로그램(C program)과 서울문화재단 등이 재정을 후원한다. 한편 ‘동네미술관’을 둘러싸고 체험프로그램 2만 원, 전시 관람료 5천 원이란 금액이 무리가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이에 대해서 김 관장은 “도서관처럼 무료로 와서 보고 빌려가는 공간이면 얼마나 좋겠나. 그러나 한편으로 문화는 무료가 아니기 때문에 유상의 콘텐츠라는 인식은 갖되 최대한 부담 없는 가격으로 즐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 중이다”라고 답했다.
‘동네미술관’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단계다. 아무리 좋은 영화도 미성년자는 관람불가한 영화가 있듯이 전시에서도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 방식과 접근이 필요하다고 믿는 김이삭 관장의 비전이 금호동을 넘어서 ‘동네미술관’이라는 고유한 형태의 전시공간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더 나아가 대안적 공간으로서의 모델을 제시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임승현 기자

김 이 삭 Kim Ysaac
1974년 태어났다. 이화여대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 교육대학원에서 미술관교육학을 전공했으며 이화여대 대학원 디자인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미국 스미소니언 자연사박물관, 미국 국립건축박물관 등에서 근무했으며 국립중앙박물관과 김종영미술관에서 근무했다. 2005년 헬로우뮤지움 어린이미술관을 개관하고 이끌어가고 있으며 올해 8월 헬로우뮤지움 동네미술관을 개관했다.

SIGHT & ISSUE 〈공간의 탐닉전〉 부천시 舊삼전동소각장 7.15~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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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강영민 <조는 하트 무지개>(풍선 작업) 애드벌룬, 현수막 400×400×30cm, 90×700cm 2015 이수진 (사진 앞) 사견막, 나무 프레임, 혼합재료 가변설치 2014  아래 한석경 <형상기억-부천> 소각장의 먼지, 풍선, 물 가변설치 2015

소각된 기억, 지역민과 함께 소생하다

부천 삼정동 쓰레기 소각장은 1995년 가동을 시작, 2010년까지 생활쓰레기를 소각 처리하던 곳이다. 환경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증대함에 따라 2010년 가동을 중단했으나 이후 재활용 방안을 놓고 주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을 거치며 철거를 미루고 빈 공간으로 남아있었다. 이곳에 산업단지 폐산업시설 문화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공간의 탐닉전>(7.15~8.17)이 열렸다.
이번 전시에는 20여 명(팀)의 작가가 참여, 공간의 역사와 주변 주거 생태와 관련한 작품을 출품했다. 대규모 플랜트 공간이었던 이곳은 소각 장비 등이 완전히 철거되지 않아 어수선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감도는 상태였다. 작가들은 바로 이러한 점을 고려, 이곳에서 발견한 재료와 사라진 것들을 주제로 작업을 진행했다.
관리동 지하에 설치된 조형섭의 <There was no Shelter>. 빗물이 고인 지하를 바다로 해석하여 나뭇배를 설치함으로써 사방이 막힌 음침한 공간이 확장되었다. 여여(如如)는 이곳의 마지막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냈으며, 박상덕의 <고물상, 고철나무>는 이곳에서 발견한 각종 재료를 이용하여 오브제 작업으로 풀어냈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한석경은 <형상기억-부천>을 출품했다. 김치앤칩스의 <Luna-01>은 소각 대상 폐기물이 쌓여 있던 대규모 벙커(높이 29.5m) 벽면을 활용하여 선보인 영상작업으로 앞으로 이 공간 쓰임새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또한 층고가 7m에 달하는 벙커 옆 반입실에 설치된 김기철의 사운드작업 <Mixed One>은 공간을 어떻게 연계해 사용할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시가 되었다.
이 전시를 기획한 이훈희 대안공간 아트포럼 리 디렉터는 “이곳에서 진행될 사업이 다른 폐산업시설 문화재생사업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관 주도로 진행되는 리모델링에 시민과 예술가들이 참여해 소통을 ‘프로세스화’ 한다는 것”이라며 “부천은 미술전시의 불모지라 할 수 있는데 지역 주민과 머리를 맞대고 벌인 이러한 사업을 통해 문화 향유에 대한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고 밝혔다.
한편 삼정동 소각장은 올해 말까지 리모델링 작업을 마치고 각종 예술장르의 융복합 문화 콘텐츠를 양산하면서, 지역민과 소통하는 공간으로 활용될 계획이다.
부천=황석권 수석기자

위 강영민 <조는 하트 무지개>(풍선 작업) 애드벌룬, 현수막 400×400×30cm, 90×700cm 2015
이수진 <The Deep Stay>(사진 앞) 사견막, 나무 프레임, 혼합재료 가변설치 2014
아래 왼쪽 한석경 <형상기억-부천>
소각장의 먼지, 풍선, 물 가변설치 2015
오른쪽 박상덕 <고물상(古物商) 고철나무(古鐵-)> 버려진 것들 가변설치 2015

왼쪽 김기철 <Mixed One> 음향장치, 종소리 583×400×400cm 2015
오른쪽 조형섭 <There was no shelter>

HOT ART SPACE

광복 70주년 특별전
서대문형무소/서울시청 시민청갤러리 8.1~23/8.11~30

광복 70주년을 맞아 서대문형무소와 서울시청 시민청갤러리에서는 뜻깊은 전시가 열렸다. <돌아온 이름들전>(위, 아래 왼쪽)과 <24시간전>이 바로 그것. 먼저 <돌아온 이름들전>은 잊혀진 여성독립운동가의 이름을 현재에 호출하는 퍼포먼스를 사운드 아트로 펼쳐냈다. 또한 <24시간전>은 광복 당일 라디오를 통해 퍼진 광복의 소리를 재생하여 당시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사운드 설치작업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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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엽 (2)

이동엽 개인전
학고재갤러리 7.17~8.30

최근 주목받고 있는 단색화의 1세대 작가로 평가받는 故 이동엽(1946~2013)의 개인전. 작가는 40여 년 화업을 이어가면서 흰색과 회색을 주로 이용한 작업을 진행했다. 이 전시는 타계 후 비교적 덜 부각된 작가와 작품세계를 재조명하는 데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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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페이지 (1)

최명영 개인전
더페이지갤러리 8.12~9.20

<평면조건-몸을 드리다>로 명명된 작가의 개인전은 40여 년에 이르는 그의 작업세계를 일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현재 홍익대 명예교수인 작가의 ‘평면’이라는 공간 탐구를 통해 단색화의 또 다른 영역을 확인할 수 있는 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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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스터디_사비나 (13)

컬러 스터디
사비나미술관 7.29~10.23

다양한 색에 대해 탐구하는 10명(팀)의 작가가 참여한 전시. 시각예술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인 색은 이 전시를 통해 그 자체로 조형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기존의 색에 대한 뿌리박힌 인식을 깨는 요소로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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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한점집_자하미술관 (2)

용한점집
자하미술관 8.13~9.20

한국인의 정신적 유산으로 샤머니즘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이 전시는 바로 우리 소통의 바탕에 샤머니즘이 내재해 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출발했다. 이는 단순한 종교나 미신으로서 샤머니즘의 비문명성을 극복하고 그 본질에 접근하려는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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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이브

곽이브 개인전
갤러리 조선 8.12~25

시스템과 환경에 대해 건축적인 해석을 해온 작가의 이번 개인전은 <평평한 것은 동시에 생긴다>로 명명됐다. 박스 작업과 관람객이 직접 참여하여 책을 절취하고 그것이 영상으로 보여지는 작업 등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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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영 (5)

김종영과 그의 빛
김종영미술관 8.6~28

김종영 탄신 100주년을 맞아 <불각의 아름다움, 조각가 김종영과 그 시대전>의 2부 격에 해당하는 전시다. 김종영의 조각세계가 후배들에게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그 양상을 살펴보는 전시로, 미술관이 주관하는 ‘김종영조각상’ 수상작가와 ‘오늘의 작가’ 선정 작가들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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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아트센터 (1)

유럽현대미술전
성남아트센터 큐브미술관 7.29~10.11

프랑스 현대작가를 중심으로 한 유럽 작품을 선보이는 이 전시는 니키 드 생팔, 오를랑 등 22명의 작가 작품을 소개한다.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역사와 문화를 바라보는 현대미술의 맥락을 살펴보는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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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산 (2)

허산 개인전
일주&선화갤러리 7.24~9.25

전시 타이틀 <벽을 깨다>가 암시하듯, 전시장을 실재와 환영이 공존하는 장소로 꾸민 전시. 건축적으로 매우 위험해 보이지만, 모두 작가가 만들어낸 허상이다. 또한 벽면 뒤에 숨어 있는 숲을 통해 상상으로 존재하는 또 다른 공간을 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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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양 (2)

실재와 가상의 틈: 한국_러시아 미디어아트의 오늘
우양미술관 7.25~9.30

한·러 수교 25주년을 기념하는 전시로 한국의 김영호 중앙대 교수와 러시아의 안드레이 마티노브 <모스크바비엔날레> 제너럴 디렉터가 아트디렉터를 맡았다. 한국에서는 뮌 박준범 유현미 이명호 천경우 한성필이, 러시아에서는 막심 코홀로디린, 라우프 마메도브, 블라드미르 마르티노브, 알렉산드라 미틀얀스카야, 비탈리 푸쉬니츠키, 레오니드 티슈코브가 총 53점을 출품했다. 전시 타이틀처럼 미디어작업이 주로 출품된 가운데 사진과 평면, 설치작업 등도 선보여 다양한 매체의 활용을 보여준다. 전시는 실재와 가상의 맥락을 함께 보여주면서 그것들이 조우하는 지점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파장을 살펴본다. 비교적 접하기 힘들었던 러시아 현대미술을 근거리에서 조망할 수 있는 전시.

SPECIAL FEATURE 먹고, 요리하고, 예술하라

Food in Art History
서양미술사에서 음식은 주제나 소재, 매체 때론 개념적 의미 등 다양한 측면에서 다뤄졌다. 음식물이 자주 등장하는 17~18세기 네덜란드 정물화는 다양한 알레고리와 상징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성스러운 ‘일용할 양식’에서, ‘관계’를 맺는 도구의 매개체로 자리 잡기까지 미술과 음식의 ‘맛있는’ 만남의 과정을 살펴본다.

미각의 반격

이주은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식사는 식욕의 결과일 뿐 아니라, 몸과 정신을 지탱하는 살과 피가 되므로 삶의 주된 동력원(動力源)이다. 먹은 음식과 남은 음식은 곧 소화되거나 부패할 것이므로 소멸과 죽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알레고리적인 그림이나 종교적인 도상 속에 나타난 날것의 식재료나 조리된 음식은 삶의 유한함을 명심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의 의미뿐 아니라 인간의 희로애락을 포함한 삶의 다양한 층위들을 드러낸다.

미각의 관능성
프로이트는 식욕과 성욕을 비슷한 본능적 욕구로 보았다. 구강 만족과 성적 만족 사이에는 끊어질 수 없는 연관성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먹는 것과 섹슈얼리티의 관련성은 ‘미각(味覺)’을 의인화한 그림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정물화가는 인간의 본성을 알레고리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오감을 풀이하는 그림을 자주 그렸다. 오감이란 사람이 세상을 받아들이는 인식의 통로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본능의 충동에 빠지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얀 브뤼헐의 오감 연작은 오감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여 그린 예이다. 이중 〈미각〉은 식탁 에 앉은 여인이 그리스로마신화 속 반인반수이자 성적 방종의 소유자 사투르누스가 따라주는 포도주를 받으면서 음식을 맛보고 있다. 화면의 앞쪽에는 고기가 될, 사냥한 온갖 날짐승들이 무질서하게 널려있고, 식탁 위에는 사치스러운 연회에 주로 등장하는 백조와 공작고기로 만든 파이, 석화, 그리고 생선과 과일이 풍성하게 차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미각은 풍요 가운데 리비도가 넘실대는 이미지다.
미각은 후각과 더불어 오감의 체계 중 가장 하위의 감각으로 치부되어 왔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각과 청각을 이성적이고 남성적인 감각으로 여긴 반면, 후각과 미각은 촉각과 한데 묶어 동물적이고 여성적인 감각으로 여겼다. 후각과 미각, 촉각은 육체의 쾌락과 고통에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명료한 생각의 작동을 방해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특히 식탐은 성욕에의 탐닉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언제나 이성의 통제를 받아야 하며, 엄격하게 다루어져야 할 절제의 대상이었다.
교회는 식욕과 성욕을 절제해야 하는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 일정 기간 동안 느슨하게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축제를 제도적으로 허용하기도 했는데, 그것이 바로 카니발이다. 카니발의 기원은 고대 로마의 사투르누스 제의라고 말해지는데, 사투르누스 제의는 축제 대부분이 그러하듯 무질서와 과잉이 특징이다. 교회에서 카니발은 사순절 기간에는 특히 육류 고기를 먹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이전에 술과 고기를 과하도록 먹어두는 관행으로 정착하였다.
카니발 중에는 마음껏 먹어 몸에 기름을 넘치게 한 후 토하거나 배설하여 깨끗이 비워내고, 억압된 본능의 찌꺼기까지 모두 발산하여 몸과 영혼을 단정하게 준비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이는 사순절로 들어가기 위한 통과의례라고 할 수 있는데, 엄격한 교회가 무질서한 카니발을 제도적으로 허용한 것은 욕망을 모두 발산하여 비워내게 하기 위해서였다. 카니발 기간의 ‘기름진 식탁’과 사순절 동안의 ‘마른 식탁’의 대비는 미술작품의 좋은 소재가 되었다. 특히 카니발에 즐겨먹는 소시지와 사순절에 먹는 절인 청어의 다툼 장면은 사람들이 식탐과 성욕을 이겨내기 위해 분투하는 것을 풍자한 이미지로서 중세 유럽의 민담에서 기원하였다. 가장 잘 알려진 〈카니발과 사순절의 전투〉로는 피터르 브뤼헐의 작품을 들 수 있다. ‘카니발’은 고기를 꼬치에 꿰어 창처럼 들고, 머리에는 파이를 얹었으며, 둥그런 맥주통에 걸터앉은 배불뚝이 남자로 형상화되어 있는 반면, ‘사순절’은 꿀벌통 왕관을 쓴 깡마른 수사로 형상화되어 청어 굽는 석쇠를 무기로 들고 있다. 이들은 꼬치구이와 청어라는 각각 육욕과 절제를 대표하는 음식을 무기삼아 상대방을 겨누고 있다.
그리스로마신화 속에서도 축제의 신은 절제하지 않고 실컷 먹고 마신다. 바로 술과 축제의 신 바쿠스(디오니소스)인데, 그는 이성의 통제에서 벗어나 충동에 따라 사는 존재이다. 화가들은 바쿠스를 한껏 감각적으로 표현한다. 카라바조(Caravaggio)는 〈바쿠스〉를 청년의 모습으로 그렸는데, 이 청년은 오감을 묘사한 그림들 못지않게 감각적인 요소들로 형상화되어 있다. 청년의 게슴츠레 쳐다보는 눈빛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자기 앞에 앉으라고 유혹하는 듯하며, 잔을 들어 한잔 하고 가라고 권하는 듯하다. 살이 적당히 붙은 그의 피부는 만져보고 싶을 만큼 촉각적이며, 잔에 가득 채워진 포도주는 후각을 자극하여 취하게 만들 뿐 아니라, 혀끝의 미각을 마취하는 것 같다. 〈바쿠스〉의 섹슈얼리티는 보는 이의 오감을 자극함으로써 감각의 통로를 열게 하고, 막혀있던 리비도가 그림 속 인물과 관람자 사이에 흐르게 한다.

Jan_Brueghel_I_&_Peter_Paul_Rubens_-_Taste_(Museo_del_Prado) 1미각

얀 브뤼겔, 피터 폴 루벤스 〈미각(Allegory of Taste)〉 나무에 유채 64×108cm 1618 (프라도 미술관 소장)

peter brueghel_ 2

피터 브뤼겔 〈카니발과 사순절의 전투〉 목판에 유채 118×164.5cm 1559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

음식을 통한 관계맺기
그리스도교 문화를 그 뿌리로 하는 유럽사회에서 가장 의미 있는 식사의 이미지를 꼽으라면 〈최후의 만찬〉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성서에서 빵과 포도주는 몸과 피의 나눔이고, 이로써 하나의 공동체가 되는 계약을 맺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베푸는 최후의 만찬이란 구약에서 제시된 피의 희생을 통한 구원의 의식을 몸소 실행하는 식사이다. 〈최후의 만찬〉 도상은 로마식 연회의 이미지와 유사하다. 로마식 연회 이미지는 초기기독교 시기 지하묘지인 카타콤 벽화나 석관에 새긴 부조에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고인의 죽음을 추모하여 고인과 더불어 먹고 마시면서 일체감을 경험하려는 로마인의 장례 및 추모 풍습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 이미지들은 후에 그리스도교적인 도상으로 흡수되어 성스러운 만찬으로 표현된다.
실제로 요리를 나누어 먹는 만찬이 미술관에 등장한 것은 20세기이다. 예를 들어 태국의 리크리트 티라바니자는 1990년 첫 개인전 〈팟타이〉를 필두로 음식 접대하기 시리즈를 선보였다. 예술가가 직접 요리해서 관람객이라면 누구에게나 음식을 대접했고 전시기간 내내 화랑은 식사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전시장에는 음식 냄새는 물론 가스통, 요리기구, 갖가지 식재료와 소스, 술병 등이 어지럽게 널렸고, 먹다 흘린 음식물과 설거지가 안 된 그릇들과 요리하다 튄 얼룩까지 보였다. 아무리 미술관 측의 허락을 받았어도, 조리와 식사를 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반항적인 행위였다. 미술관은 항온항습과 무향무취, 그리고 새하얀 벽과 묵언이라는 엄숙한 금기들을 모두에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티라바니자의 작품은 개별화된 관람이라는 기존의 관행을 깨고, 사람들에게 연회나 축제에서처럼 음식을 통한 관계 맺기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었다.
음식을 요리하는 과정에서 식재료는 다듬어 썰어지고 양념에 절여지고 불에 익혀지면서 물질적으로 변성하게 된다. 사람의 몸 역시 그 요리를 먹는 행위를 통해, 음식을 잘게 부수고 삼키며 소화시키는 동안 물질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먹는 몸’은 미하일 바흐친이 말하는 ‘몸의 그로테스크 이미지(the grotesque image of the body)’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1
먹는 행위는 신체가 그 자체의 한계를 넘도록 침범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삼키고 토하고 세상을 물어뜯고, 즉 세상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나서 풍요해지고 성장하게 된다. 인간이 세상과 만나는 일은 자르고 조각내고 씹는 벌어진 입 속에서 일어나는데, 이는 인간의 생각과 이미지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것이다. 인간은 세상을 맛보고 그것을 자신의 몸속에 집어넣어 일부로 만든다.2
즉 연회에서 먹는 행위는 입이라고 하는 열린 구멍을 통해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먹고 마시는 육체는 열려 있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닫혀있고 단절된 개별 육체는 소통 가능한 육체로 변성한다. 닫힌 몸은 그저 하나의 양태로서만 존재할 뿐이고, 그 육체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이 단일한 의미만을 획득할 뿐이다. 가령 죽음은 죽음일 뿐, 탄생과 연결되지도 않고 탄생을 도와주지도 않는다.3그러나 열린 몸은 자신의 한계를 침범하고 능가할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닌다. 열리고 축축한 구멍들을 통해 신체와 세상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몸과 몸이 밀접하게 연결되면서 함께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한다. 시작과 끝, 새것과 옛것, 탄생과 죽음이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동시성으로 이해되는 것이다.4
미술작품에 등장하는 요리는 구성원끼리의 감정과 갈등, 상호작용과 그것의 사회적인 맥락들을 식재료로 한다. 예술가들은 요리를 통해 감각적이고 감정적이며 육체적인 것을 전면에 부각시킴으로써 정신과 관념 중심의 경직된 것들에 대해 저항하는 입장에 선다. 음식체험은 오감에 작용하여 인간의 감각적인 요소들을 열고 확장시켜 몸과 마음을 소통 가능한 열린 상태로 만든다. 즉 음식체험을 통해 미술은 인간과 인간을 연결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구속하는 비인간적인 원칙들에 저항하는 잠재적 파워를 갖게 되는 것이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 회벽에 유채, 템페라 460×880cm 1494~1499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밀라노)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 회벽에 유채, 템페라 460×880cm 1494~1499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밀라노)

1 몸의 그로테스크 이미지는 바흐친의 논문 5장을 참조할 것. Mikhail Bakhtin, trans. Helene Iswolsky, 《Rablais and
His World》 (Bloomington: Indiana Univ. Press, 1984), pp. 303~367.
2 Mikhail Bakhtin, p. 281.
3 미하일 바흐친, 이덕형 외 역,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 아카넷: 2001, p. 733. 바흐친에 대한 이덕형의 해설에 의하면, 카니발에는 인간 사이의 진정한 관계를 회복시키는 요소가 있다. 현실은 비현실 속에서 뒤얽히고, 육체들은 자유롭게 뒤섞이며, 육체들이 외부 세계의 사물과 자유롭게 상호 교감하게 된다. 하나의 육체 속에 두 개의 육체가 존재하고, 죽어가는 육체 속에 탄생하는 육체가 존재하게 된다.
4 Mikhail Bakhtin, p. 317.

SPECIAL FEATURE 먹고, 요리하고, 예술하라

Delicious Dishes on TV
2015년 상반기 귓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 눈에 가시가 돋도록 보게 되는 영상이 있다. 바로 ‘쿡방’이다. 이제 음식 프로그램은 단순히 ‘먹는 모습’에서 ‘만드는 행위’의 시각화로 넘어갔다. 시청자는 혀끝을 대지 않아도 화면을 보면서 군침을 삼킨다. 음식과 요리에 대한 끝없는 집착의 과정을 영상매체 중 하나인 방송 프로그램의 흐름과 함께 짚어본다. ‘요리’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흐름 속에서 과연 우리의 밥상은 풍성해지고 있을까?

당신이 보는 것이 곧 당신이다

박성경 도서출판 따비 대표

음식이 미술의 주인공인 적은 드물지만 음식문화 연구자에게 미술은 음식문화를 연구하기 위한 또 하나의 문헌이다. 예를들어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서 인물보다 식탁 위에 무엇이 차려졌는지를 보고,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을 보면서 당시의 식탁문화를 읽기도 한다. 그렇다면 수프 통조림도 미술이 되는 현대를 읽기 위해 가장 유용한 시각매체는 무엇일까? 아마도 대중매체, 그중에서도 방송영상이 아닐까 한다.
요리사 아닌 요리사가 생전 라면도 안 끓여봤음직한 남자 연예인 넷에게 요리를 가르치는 〈집밥 백선생〉이 요즘 뜨겁다. 음식 칼럼니스트뿐 아니라 문화·사회학자까지 나서서 〈집밥 백선생〉의 주인공인 백종원 현상을 논한다. 지금 이 순간 미디어를 장악한 가장 핫한 주제가 바로 음식이다.
언제부터 우리는 음식에 열광하기 시작한 것일까? 1970년대까지 보릿고개를 겪은 한국에서, 음식은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1980년대 말, 고도경제성장을 이어온 한국에서 드디어 해외여행이 자유화되었고, 자가용을 가진 인구도 차츰 늘어났다. ‘맛집’이라는 말이 대중적으로 쓰이지는 않았지만 그 개념은 1990년대 초반 생겼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답사여행이라는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낸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전국의 유적뿐 아니라 답사지 인근의 식당도 소개했다. 이 책에서 소개한 식당 앞에 여행객이 줄을 서는 진풍경이 만들어졌다. 향토음식의 발견과 지역 맛집의 등장은 이처럼 먹고살 만해진 사회의 여가 활동이라는 사회·경제적인 변화에서 비롯됐다. (이런 현상은 서구에서도 마찬가지다. 세계적인 레스토랑 가이드북인 《미슐랭가이드》도 자동차의 보급과 여행의 활성화라는 배경에서 탄생했다. 오죽하면 타이어회사가 만들었겠는가.)
이 시기 ‘맛있는 집’을 소개하는 주체는 미식가를 자처하는 작가나 기자들이었고 책과 신문·잡지 등 전통적 미디어였다. 그러다 1990년대 중반, 음식에 대한 자신의 취향을 밝히고 소위 맛집 리스트를 정리하고 찾아다니는 개인들이 나타났다. 하이텔, 천리안 등 PC통신의 탄생과 맞물린 일이다. PC통신에 개설된 식도락 동호회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동호회 회원들은 자신들의 맛집을 소개하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부 동호회는 종종 유명식당과 주류회사들의 초대를 받기도 했다. 이 동호회에서 활동하던 일부 필력 좋은 이들 중 본격적으로 음식칼럼을 쓴 이도 있었고, 맛집 블로거로 유명세를 떨치는 이도 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일부러 멀리 있는 맛집을 찾아다니는 모습은 흔한 것이 아니고, 주변의 맛집을 기억하고 찾는 정도에 그쳤다.
대중이 본격적으로 맛집을 순례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들어 TV 교양·예능 프로그램의 소재로 음식과 식당이 등장하면서부터다. 2000년 5월에 방송을 시작한 KBS 〈VJ 특공대〉는 VJ(비디오 저널리스트)라 불리는 PD들이 소형 카메라를 들고 화제의 현장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다. 특색 있는 음식을 파는 식당에 찾아가 음식이 만들어지는 주방과 손님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화면은 맛집 소개의 전형을 만들어냈다. 전체 구성 중 맛집을 소개하는 에피소드의 시청률이 높았고 그 비중도 컸다. 화려한 불쇼 등으로 시각을 강하게 자극하는 화면은 시청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는데, 이는 방송의 장점을 잘 살리는 방식이었다. 훗날 등장한 SBS 〈생활의 달인〉도 식당만을 다루는 프로그램은 아니지만, 먹방으로 분류할 수 있는 에피소드의 인기가 가장 높았다는 점에서 〈VJ 특공대〉의 전형을 따랐다. 이런 프로그램이 맛집을 소개하는 먹방의 전형을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출연자는 식당 주인, 요리사와 손님 같은 일반인이었다. 이런 틀을 깬 프로그램이 2001년 11월 시작한 MBC 〈찾아라 맛있는 TV〉다. 이 프로그램은 처음으로 연예인을 출연시키며 본격 ‘음식 버라이어티 쇼’를 표방한다. 연예인의 단골집을 소개하는 ‘스타의 맛집’ 등 다양한 코너가 진행되었지만, 연예인이 직접 식당을 찾아가 음식 맛을 보고 평가한다는 포맷은 이어졌다. 그전까지는 화려한 볼거리와 청각효과로 시청자에게 ‘구경하는 재미’를 제공하는 게 먹방이었다면, 연예인들의 인기를 업고 단골이라는 신뢰도를 바탕으로 소개된 음식은 ‘맛있을 것이다’라는 믿음까지 끌어냈다.
먹방은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냈다. ‘TV에 나온 집’은 성공을 담보하는 보증서로 통했다. 연예인이 나와 ‘맛있다’라고 한 식당에는 모두가 열광하고, 자신이 느끼는 맛과 상관없이 줄을 서기에 이르렀다. 그때까지 TV 오락 프로그램을 보는 것으로 끝났다면 이제는 시청자가 지갑을 들고 집 밖으로 뛰쳐나가게 만든 것이다. 먹방의 시청자는 곧 맛집의 소비자가 된 것이다.
미디어의 맛집 열풍은 2000년대 중반 이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블로그와 SNS를 통해서 맛집을 접하기 시작했다. TV에서 정보를 얻은 시청자는 인터넷으로 그 경로를 옮겼고, 연예인이 보증하던 ‘맛’은 개인의 비평으로 무게 중심이 바뀌었다. 2010년을 넘어서면서 TV의 먹방은 블로그와 경쟁하는 처지가 되었다. TV에 소개되는 집은 이미 블로그 등에서 인기를 얻은 맛집의 뒷북에 지나지 않거나, 다큐멘터리 〈트루맛쇼〉에서 폭로된 것처럼 시청자의 지갑을 노린 외식업자와 방송이 조작한 ‘만들어진 맛집’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시청자는 TV의 먹방보다는 개인의 블로그를 더 신뢰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 TV의 주도권이 공중파에서 케이블로 넘어가는 것과 맞물려, 먹방의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포맷의 음식 프로그램이 등장하는데, 바로 쿡방이다. 요리사가 연예인의 냉장고 속 재료로 요리를 만들어 대결하는 JTBC〈냉장고를 부탁해〉, 새마을식당으로 알려진 백종원에게 요리를 배우는 tvN〈집밥 백선생〉, 신동엽과 성시경이 요리하는 〈오늘 뭐 먹지?〉 등이 마니아층을 넘어서 폭넓은 시청자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방송 직후에는 소개된 레시피, 요리사의 이름이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순위를 점령한다. 한마디로 쿡방이 대세이다.
그렇다면 시청자는 왜 쿡방에 열광할까? 한마디로, 오늘날의 쿡방은 기존의 예능을 대체하는 프로그램이다. 연예인 못지않은 예능감을 자랑하는 ‘셰프테이너’들의 박진감 넘치는 몸짓과 화려한 영상, 긴박감을 자아내는 시간제한과 대결 구도, 요리를 시식하는 연예인들의 호들갑에 가까운 감탄사는 교양 프로그램이 아닌 오락 프로그램임을 확인하게 한다. 국방은 〈무한도전〉이나 〈1박 2일〉을 대체하는 가족 오락 프로그램이다.
그렇다고 쿡방이 요리 강습의 요소를 버린 것은 아니다. 요리 과정을 보여주는 것은 요리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집밥 백선생〉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요리를 표방하면서 인기를 얻고 있다. 백종원의 가르침을 받는 남자 연예인들은 누가 봐도 어수룩하다. 그 모습은 시청자에게 나도 저만큼은 한다는 자신감을 심어준다. 여기에, 뭐든지 잘하는 남자 성시경과 요리 지진아 신동엽이 함께 요리하는 〈오늘은 뭐 먹지〉는 요리하는 남자와 요리를 배우려는 남자에게 호감을 갖는 요즘의 트렌드를 담아내고 있다. 백선생은 요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쉽지유? 빠르지유?” 요리할 줄 모르는 이는 ‘쉽지유?’가, 시간에 쫓겨 사는 이는 ‘빠르지유?’가 유혹한다. 요리할 줄 모르고 요리할 시간이 없는 이유는 저녁이 없는 빠듯한 삶을 사는 사람이 많음을 보여주고 백선생은 그 점을 너무나 잘 아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쿡방은 식품회사의 거대한 광고판이기도 하다. 〈집밥 백선생〉의 요리법은 가족이 모여 있는 집의 것이 아닌 대중식당의 것이다. 〈오늘 뭐 먹지?〉는 언뜻 보기에는 쿡방이지만, 두 진행자에게 요리법을 알려주는 이는 대중식당 주인이다. 대중식당의 레시피는 많은 사람의 입맛과 판매가격을 맞추기 위해 달고 매운 자극적인 양념과 MSG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면 현재 쿡방을 주도하는 tvN과 올리브채널 등을 소유한 CJ E&M의 모기업은 CJ다. CJ는 설탕과 다시다를 팔아 성장해온 기업이다. 이런 기업이 자신의 프로그램에 ‘슈가보이’라는 별명을 가진 외식 프랜차이즈 사업가를 출연시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증권가에서는 쿡방을 보면 주가를 알 수가 있다는 말까지 한다. 〈집밥 백선생〉이 방영된 다음 날 대형마트의 설탕 매출액이 4배 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1964년 미국의 상원의원 조지 맥거번은 미국의 식량원조 프로그램의 영향을 전망하면서 “제3세계의 수많은 이가 미국산 농산물에 맛을 들이는 곳에 미래의 거대 식품시장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대형 식품기업은 먹방과 쿡방에서 미래를 본 것일까?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포이에르바흐는 “네가 먹는 것이 곧 너다”라고 말했다. 오늘 우리가 보는 먹방과 쿡방이 곧 우리일 것이다. ●

110-129 9월호7110-129 9월호8

9월호 특집4

SPECIAL FEATURE 먹고, 요리하고, 예술하라

Cooking time in Contemporary Art
현대미술에서 요리가 ‘그림의 떡’을 벗어난 지 이미 오래다. 미술관 안팎에 먹을 것을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작가가 직접 장을 보고, 음식을 조리하고, 심지어 식당을 차리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작가와 시간을 보내며 작품에 참여하게 된다. 동행, 친구를 뜻하는 영어단어 ‘companion’의 어원이 ‘함께 빵을 먹는 사람’이라는 점만 보더라도 음식을 나누는 행위는 단순힌 ‘먹는’ 것을 넘어 새로운 장을 이끌어 냄을 알 수 있다. 이 섹션에서는 ‘요리’를 매개로 한 작가들의 작업을 소개한다. 이들의 작업은 미각적 체험을 넘어 타인과 경험을 공유하게 하며 새로운 삶과 예술의 관계항을 이끌어 낸다. ‘관계’를 중심에 둔 그들의 공통된 미학적 태도와 동시에 각각의 작가가 지향하는 다채로운 의도와 맥락을 살펴본다.

컨플릭트 키친
타인을 인식하는 시선

미국 피츠버그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그룹이다. 존 루빈(Jon Rubin)과 돈 웰레스키(Dawn Weleski)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의 그룹명이기도 한 〈컨플리트 키친(Conflict Kitchen)〉은 미국과 대척점에 있는 국가의 음식을 제공하는 레스토랑 시리즈 작업이다. 아프가니스탄, 팔레스타인, 북한 등의 음식점을 피츠버그에 차렸다. 북한 버전 〈컨플리트 키친〉을 열기 전 제4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에 참여해 〈이북 음식 가이드〉와 〈라이브 식탁〉 등 북한 음식에 관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남북한 평화를 추구하는 여성단체인 ‘조각보’를 만나 음식 조리법을 배우고, 북한이탈주민 인터뷰를 진행했다. 〈라이브 식탁〉은 화상전화를 통해 신청자를 모집해 피츠버그의 컴플리트 키친 스태프 뿐 아니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미국의 워싱턴 등 총 7곳에서 접속한 8팀이 참여해 공유한 조리법을 토대로 요리한 음식을 함께 먹는 프로젝트다. 작가는 “음식의 사회적 관계, 경제적 교류를 통해 국가, 문화 그리고 흔히 정치적으로 양극단에 있다고 말하는 국가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사람들에게 일반적인 논의의 기회”를 제공한다. conflictkitchen.org

이북음식가이드1

새터민에게서 만둣국과 두부밥 등 이북 음식의 조리법을 전수받는 〈이북 음식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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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음식을 판매하는 〈컨플릭트 키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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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연
영혼의 허기를 채우는 자체 제작 포장마차

정착하지 못하는 삶의 불안에서 시작된 유케아(UKEA)는 유목연의 브랜드다. 그가 직접 제작한 〈목연 포차〉는 슈퍼마켓 카트 위에 만들어진 작은 1인용 이동식 선술집이다. 작가는 서울 광주 군산 등에서 소주 한잔과 비엔나소시지를 나누며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다. 최근 철원에서 열린 〈리얼DMZ 프로젝트 2015 동송 세월〉에서는 〈통일 국수〉를 새롭게 선보였다. 장수를 의미하는 국수를 직접 만들어 관객에게 제공하며 통일에 대한 염원과 지역의 역사를 담았다. 오픈된 공간에서 열리는 그의 작업에는 예술계 내부의 유통을 넘어 불특정 다수가 참여하게 된다. 예술의 영역에 입장하지 않은 채 미술에, 혹은 작가와 관계하게 된 참여자는 미술의 영역을 줄타기하는 작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www.mokyon.com

목연포차 (4)

〈목연 포차〉 가변크기 2012~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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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나
지속적인 접촉을 통한 교감

〈FREE Flight〉와 〈봉지 속 상자〉는 전시 오프닝이라는 행사 자체를 작업으로 삼았다. 작가는 중요하지만 부차적인 오프닝 행사라는 조연에게 주연의 자리를 내준다. 〈봉지 속 상자〉는 전시 오프닝에 참석할 사람들에게 저녁 식사와 관련해 사전에 던진 질문지를 바탕으로 작가가 저녁 장을 보고 저마다의 저녁거리 식재료가 담긴 비닐봉지를 관객 손에 들려주는 작업이다. 질문지에는 저녁 먹는 시간, 함께 먹는 사람, 즐겨먹는 메뉴, 좋아하는 색상, 치아 상태 등을 묻는 20가지의 질문이 담겨있다. 오프닝 후 관객은 작가가 제공한 식재료로 저녁을 해먹을 수 있다. 한편 〈FREE Flight〉는 오프닝 행사를 위한 김밥과 테이블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후 이들의 제작과정을 책자로 만들어 보여준다. 박보나는 작가가 적극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과정을 통해 일시적 만남보다는 관계와 소통을 통한 ‘교감’을 이끌어낸다. www.bonapark.co.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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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 Flight전〉 오프닝에 사용한 테이블, 테이블보, 김밥 가변크기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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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식
지역 공동체와의 관계
현재 ‘무늬만커뮤니티’의 디렉터로 활동 중인 작가는 공동체의 관계성, 지역과 삶의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고찰한다. 2007년 선을 보인 〈다기조아 10호점〉은 치킨집 사장님과 함께 택한 키치적 미감의 오브제로 기념비를 세우고 미국 패스트푸드 치킨과 한국의 닭튀김이 섞인, 한국 맛도 미국 맛도 아닌 ‘다기조아’의 치킨을 전시장에 들여와 한국의 서구화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드러낸다. 올해 4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개최한 퍼포먼스 〈커뮤니티를 위한 모뉴멘트〉에서는 수원시 팔달구 지동에 거주하는 지역민과 예술가들과 함께 단기간 고도로 성장한 우리 근현대사를 열심히 살아온 ‘개인’에 대한 오마주를 담아냈다. 테이블 제작, 수타 자장면 퍼포먼스 등이 포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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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식 김기만 박기수 류승진 더나라 〈커뮤니티를 위한 모뉴멘트〉 퍼포먼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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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민
교환과 나눔을 통한 관계 맺기

〈밥 먹고 가세요〉시리즈는 인천 남구 숭의동에 위치한 수봉다방에서 진행한 프로젝트다. 작가는 음식 재료가 그려진 손바닥만한 크기의 캔버스 작품을 수봉다방에 전시했다. 관객은 그림에 해당하는 실제 음식재료를 들고 와 그림과 교환했다. 음식에 필요한 모든 재료를 모아 직접 요리하고 이를 관객과 함께 나눠 먹었다. 총 3회에 걸쳐 진행된 이 프로젝트는 〈밥 먹고 가세요 #1 부대찌개〉부터 〈#2 떡만두국〉, 〈#3 짜장면〉으로 이어졌다. 작가는 적극적인 참여자로 사람들과 관계한다. 관객과 음식을 나눠 먹으며 마을 사람들과 직접 관계 맺는 상호작용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기억을 공유한다. hparkart.com

〈밥 먹고 가세요〉 2015

〈밥 먹고 가세요〉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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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민자
먹을 것을 구하는 노동의 직접적인 행위

음식은 낯선 문화를 받아들이는 직접적인 경험이 된다. 작가는 〈정통의 맛〉에서 라면, 국수, 레토르트 카레 등의 포장지 이미지를 그대로 재현하고, 조리예에 따라 조리하는 과정을 영상으로 담고 음식을 직접 만들어 전시로 구현하는 방식을 취했다. 작가는 보기 위한 음식으로 디자인된 이미지의 가상성을 다시 실재화한다. 그리고 익숙한 이미지 속에서 실재의 낯섦을 발견한다. 한편 〈겨우-살이〉는 예술가의 노동과 음식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2011년 선감도의 경기창작센터에 머물 당시, 마을 사람들의 일을 돕고 김장 재료를 얻어 겨울을 나기 위한 김치를 담그고 이를 오픈스튜디오를 방문한 사람들에게 대접했다. 작가는 이 작업에서 “무언가 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생산적으로 보이지 않는 미술가로서의 직업, 일이 먹을 것을 구하는 행위와 일치하도록 하려 했다.” www.guminj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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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살이〉 가변설치 2010

SPECIAL FEATURE 먹고, 요리하고, 예술하라

Eating well with Artist
지금까지 음식과 시각미술을 둘러싼 다양한 조합을 살펴봤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내용은 작가의 밥그릇이다. ‘먹는다’는 말은 행위를 넘어 ‘삶’ 그 자체를 의미하고도 한다. 예술가는 어떤 방식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가. 사회는 예술가의 밥그릇을 들여다본 적 있는가. 작가의 목소리로 직접 들어보자.

화가의 ‘밥그릇을 부탁해!’

배종헌 작가

대학시절 친구 두 명과 함께 어느 초등학교 강당의 대형 입간판용으로 벽화작업을 한 적이 있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벽화 비용은 하루 만에 작업을 끝내야 하는 정도였다. 단시간에 작업을 하기 위해 미리 도안이며 재료를 준비해두고 작업 당일 아침 일찍부터 어둑해질 때까지 거의 쉼 없이 일했다. 일이 끝날 즈음, 교감선생님이 오셔서 벽화를 살피시며 한 마디 하셨다.
“칠이 벗겨지거나 하면 곤란한데 이거 얼마나 갈까?”
“글쎄요. 1, 2년은 갈 거예요.”
그 말을 들은 교감선생님은 더 오래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셨고, 우리는 고심 끝에 코팅을 하면 벽화가 좀 더 오래 보존될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교감선생님은 서비스로 내일 한 번 더 와서 그렇게 해달라고 하셨다. 우리는 추가로 발생하는 재료비며 우리 인건비는 추가 지급될지 여쭈었다. 그때 그 교감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십 수 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질 않는다. “예술을 한다는 학생들이 벌써부터 돈을 밝혀? 순수해야지. 예술 하면서 돈 생각하면 안 되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예술가의 밥그릇은 밥 없이 예술만으로 채워져야 옳고 예술가의 밥그릇에 밥을 담으면 그것이 순수하지 못한 것인지. 나는 나의 밥그릇을 한없이 들여다본 적이 있다. 내가 매일 끼니를 해결하는 그 평범하기 짝이 없는 밥그릇과 국그릇으로 이래저래 탐색을 해보았다. 밥그릇 위에 국그릇을 덮어씌워 밥그릇을 숨겨 보기도 하고, 몇몇 하찮은 측정도구로 밥그릇의 두께며 크기 등을 측정해보기도 하였으며, 밥알을 그릇 안쪽에 일렬로 붙여 밥그릇이 몇 밥알 크기인지 재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궁리를 하여도 예술가의 밥그릇은, 예술가의 국그릇은 내 뱃속에서 울리는 허기를 채워주는 데에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진짜 밥을 퍼서 밥그릇에 담아 내 목구멍으로 넣어야 비로소 배가 불러졌다.
서양미술사에서 음식이 작품의 주요 소재가 되었을 때, 거기엔 인간의 부질없는 탐욕을 경계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배웠다. 왜냐하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쉬이 부패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고야 말 덧없는 인생의 무상함을 상징함과 동시에 이를 바라보는 우리들에게 절제된 삶을 요구하는 작품들로 읽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상징성과 교훈적 메시지는 칼뱅이즘(Calvinism)이 주름잡던 17세기 네덜란드의 정물화에 담긴 전형화된 의미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당시 네덜란드인의 식탁은 비교적 풍성했으리라. 17세기 세계적 지위의 상징이던 동인도회사가 네덜란드를 거점으로 한 회사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 네덜란드는 무역을 통해 막대한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칼뱅이즘은 교회에서 성상 숭배를 금기시하였으니 화가들은 절제를 중시하는 당대의 종교적 입장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일상의 장면을 원하는 자본가의 눈높이에 맞는 그림을 그려 생존하였던 것이다. 당시 유행했던 음식정물화를 무상(無常)의 알레고리 정도로만 읽는 것은 작품 자체에 머문 감상적 이해의 차원에 머무는 것과 같다. 당시 화가들은 교회의 주문이 끊어진 것을 대체하기 위해, 다시 말해 먹고살기 위해 그와 같은 그림을 그렸다고 볼 수 있다. 그들에게 음식정물화는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대한민국. 오늘 우리의 TV프로그램들은 온통 ‘먹방’ 잔치다. 한국 기업들의 위기, 청년실업 문제, 은퇴 후 노후자금 문제 등 온통 생존의 위기의식이 뉴스를 장식하는 이때에 말이다. 그 틈바구니 속에는 분명 예술가들의 삶도 있다. 사실 예술가는 언제나 경제적 위기를 겪어왔다. 하지만 예술가의 굶주림을 빈곤으로 보지 않고 예술의 양분으로 치켜세웠기에, 빈곤한 예술가는 배고프다고 당당히 이야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예술가에게도 냉장고가 필요하고, 배를 채울 양식이 필요하다. 이것은 예술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대다수 예술가의 냉장고 속은 참으로 궁색하기만 하다. 어느 TV프로그램처럼, 이런 보잘것없는 예술가의 냉장고 속 재료들로라도 건강한 음식을 요리할 수 있는 레시피는 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TV에서 놀라운 기지를 발휘해서 능력을 과시하는 그런 셰프들처럼 예술가의 빈곤한 냉장고를 열어 감탄스러운 음식을 만들어줄 예술가의 셰프는 없단 말인가.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들처럼 스스로 변해야 하는 것일까. 졸업하면 작품 활동과는 무관한 전혀 다른 진로를 탐색하기에 여념이 없는 우리의 예비 예술가들을 나무랄 자격이 나에겐 없다. 새삼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속 감자가 목이 메게 절박하게 느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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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종헌 〈다 먹다〉 밥그릇 국그릇과 측정도구 1998

배종헌 〈밥_그릇〉 밥으로 만든 밥그릇 2001

배종헌 〈밥_그릇〉 밥으로 만든 밥그릇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