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od in Art History
서양미술사에서 음식은 주제나 소재, 매체 때론 개념적 의미 등 다양한 측면에서 다뤄졌다. 음식물이 자주 등장하는 17~18세기 네덜란드 정물화는 다양한 알레고리와 상징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성스러운 ‘일용할 양식’에서, ‘관계’를 맺는 도구의 매개체로 자리 잡기까지 미술과 음식의 ‘맛있는’ 만남의 과정을 살펴본다.
미각의 반격
이주은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식사는 식욕의 결과일 뿐 아니라, 몸과 정신을 지탱하는 살과 피가 되므로 삶의 주된 동력원(動力源)이다. 먹은 음식과 남은 음식은 곧 소화되거나 부패할 것이므로 소멸과 죽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알레고리적인 그림이나 종교적인 도상 속에 나타난 날것의 식재료나 조리된 음식은 삶의 유한함을 명심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의 의미뿐 아니라 인간의 희로애락을 포함한 삶의 다양한 층위들을 드러낸다.
미각의 관능성
프로이트는 식욕과 성욕을 비슷한 본능적 욕구로 보았다. 구강 만족과 성적 만족 사이에는 끊어질 수 없는 연관성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먹는 것과 섹슈얼리티의 관련성은 ‘미각(味覺)’을 의인화한 그림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정물화가는 인간의 본성을 알레고리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오감을 풀이하는 그림을 자주 그렸다. 오감이란 사람이 세상을 받아들이는 인식의 통로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본능의 충동에 빠지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얀 브뤼헐의 오감 연작은 오감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여 그린 예이다. 이중 〈미각〉은 식탁 에 앉은 여인이 그리스로마신화 속 반인반수이자 성적 방종의 소유자 사투르누스가 따라주는 포도주를 받으면서 음식을 맛보고 있다. 화면의 앞쪽에는 고기가 될, 사냥한 온갖 날짐승들이 무질서하게 널려있고, 식탁 위에는 사치스러운 연회에 주로 등장하는 백조와 공작고기로 만든 파이, 석화, 그리고 생선과 과일이 풍성하게 차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미각은 풍요 가운데 리비도가 넘실대는 이미지다.
미각은 후각과 더불어 오감의 체계 중 가장 하위의 감각으로 치부되어 왔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각과 청각을 이성적이고 남성적인 감각으로 여긴 반면, 후각과 미각은 촉각과 한데 묶어 동물적이고 여성적인 감각으로 여겼다. 후각과 미각, 촉각은 육체의 쾌락과 고통에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명료한 생각의 작동을 방해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특히 식탐은 성욕에의 탐닉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언제나 이성의 통제를 받아야 하며, 엄격하게 다루어져야 할 절제의 대상이었다.
교회는 식욕과 성욕을 절제해야 하는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 일정 기간 동안 느슨하게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축제를 제도적으로 허용하기도 했는데, 그것이 바로 카니발이다. 카니발의 기원은 고대 로마의 사투르누스 제의라고 말해지는데, 사투르누스 제의는 축제 대부분이 그러하듯 무질서와 과잉이 특징이다. 교회에서 카니발은 사순절 기간에는 특히 육류 고기를 먹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이전에 술과 고기를 과하도록 먹어두는 관행으로 정착하였다.
카니발 중에는 마음껏 먹어 몸에 기름을 넘치게 한 후 토하거나 배설하여 깨끗이 비워내고, 억압된 본능의 찌꺼기까지 모두 발산하여 몸과 영혼을 단정하게 준비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이는 사순절로 들어가기 위한 통과의례라고 할 수 있는데, 엄격한 교회가 무질서한 카니발을 제도적으로 허용한 것은 욕망을 모두 발산하여 비워내게 하기 위해서였다. 카니발 기간의 ‘기름진 식탁’과 사순절 동안의 ‘마른 식탁’의 대비는 미술작품의 좋은 소재가 되었다. 특히 카니발에 즐겨먹는 소시지와 사순절에 먹는 절인 청어의 다툼 장면은 사람들이 식탐과 성욕을 이겨내기 위해 분투하는 것을 풍자한 이미지로서 중세 유럽의 민담에서 기원하였다. 가장 잘 알려진 〈카니발과 사순절의 전투〉로는 피터르 브뤼헐의 작품을 들 수 있다. ‘카니발’은 고기를 꼬치에 꿰어 창처럼 들고, 머리에는 파이를 얹었으며, 둥그런 맥주통에 걸터앉은 배불뚝이 남자로 형상화되어 있는 반면, ‘사순절’은 꿀벌통 왕관을 쓴 깡마른 수사로 형상화되어 청어 굽는 석쇠를 무기로 들고 있다. 이들은 꼬치구이와 청어라는 각각 육욕과 절제를 대표하는 음식을 무기삼아 상대방을 겨누고 있다.
그리스로마신화 속에서도 축제의 신은 절제하지 않고 실컷 먹고 마신다. 바로 술과 축제의 신 바쿠스(디오니소스)인데, 그는 이성의 통제에서 벗어나 충동에 따라 사는 존재이다. 화가들은 바쿠스를 한껏 감각적으로 표현한다. 카라바조(Caravaggio)는 〈바쿠스〉를 청년의 모습으로 그렸는데, 이 청년은 오감을 묘사한 그림들 못지않게 감각적인 요소들로 형상화되어 있다. 청년의 게슴츠레 쳐다보는 눈빛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자기 앞에 앉으라고 유혹하는 듯하며, 잔을 들어 한잔 하고 가라고 권하는 듯하다. 살이 적당히 붙은 그의 피부는 만져보고 싶을 만큼 촉각적이며, 잔에 가득 채워진 포도주는 후각을 자극하여 취하게 만들 뿐 아니라, 혀끝의 미각을 마취하는 것 같다. 〈바쿠스〉의 섹슈얼리티는 보는 이의 오감을 자극함으로써 감각의 통로를 열게 하고, 막혀있던 리비도가 그림 속 인물과 관람자 사이에 흐르게 한다.
얀 브뤼겔, 피터 폴 루벤스 〈미각(Allegory of Taste)〉 나무에 유채 64×108cm 1618 (프라도 미술관 소장)
피터 브뤼겔 〈카니발과 사순절의 전투〉 목판에 유채 118×164.5cm 1559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
음식을 통한 관계맺기
그리스도교 문화를 그 뿌리로 하는 유럽사회에서 가장 의미 있는 식사의 이미지를 꼽으라면 〈최후의 만찬〉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성서에서 빵과 포도주는 몸과 피의 나눔이고, 이로써 하나의 공동체가 되는 계약을 맺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베푸는 최후의 만찬이란 구약에서 제시된 피의 희생을 통한 구원의 의식을 몸소 실행하는 식사이다. 〈최후의 만찬〉 도상은 로마식 연회의 이미지와 유사하다. 로마식 연회 이미지는 초기기독교 시기 지하묘지인 카타콤 벽화나 석관에 새긴 부조에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고인의 죽음을 추모하여 고인과 더불어 먹고 마시면서 일체감을 경험하려는 로마인의 장례 및 추모 풍습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 이미지들은 후에 그리스도교적인 도상으로 흡수되어 성스러운 만찬으로 표현된다.
실제로 요리를 나누어 먹는 만찬이 미술관에 등장한 것은 20세기이다. 예를 들어 태국의 리크리트 티라바니자는 1990년 첫 개인전 〈팟타이〉를 필두로 음식 접대하기 시리즈를 선보였다. 예술가가 직접 요리해서 관람객이라면 누구에게나 음식을 대접했고 전시기간 내내 화랑은 식사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전시장에는 음식 냄새는 물론 가스통, 요리기구, 갖가지 식재료와 소스, 술병 등이 어지럽게 널렸고, 먹다 흘린 음식물과 설거지가 안 된 그릇들과 요리하다 튄 얼룩까지 보였다. 아무리 미술관 측의 허락을 받았어도, 조리와 식사를 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반항적인 행위였다. 미술관은 항온항습과 무향무취, 그리고 새하얀 벽과 묵언이라는 엄숙한 금기들을 모두에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티라바니자의 작품은 개별화된 관람이라는 기존의 관행을 깨고, 사람들에게 연회나 축제에서처럼 음식을 통한 관계 맺기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었다.
음식을 요리하는 과정에서 식재료는 다듬어 썰어지고 양념에 절여지고 불에 익혀지면서 물질적으로 변성하게 된다. 사람의 몸 역시 그 요리를 먹는 행위를 통해, 음식을 잘게 부수고 삼키며 소화시키는 동안 물질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먹는 몸’은 미하일 바흐친이 말하는 ‘몸의 그로테스크 이미지(the grotesque image of the body)’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1
먹는 행위는 신체가 그 자체의 한계를 넘도록 침범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삼키고 토하고 세상을 물어뜯고, 즉 세상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나서 풍요해지고 성장하게 된다. 인간이 세상과 만나는 일은 자르고 조각내고 씹는 벌어진 입 속에서 일어나는데, 이는 인간의 생각과 이미지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것이다. 인간은 세상을 맛보고 그것을 자신의 몸속에 집어넣어 일부로 만든다.2
즉 연회에서 먹는 행위는 입이라고 하는 열린 구멍을 통해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먹고 마시는 육체는 열려 있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닫혀있고 단절된 개별 육체는 소통 가능한 육체로 변성한다. 닫힌 몸은 그저 하나의 양태로서만 존재할 뿐이고, 그 육체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이 단일한 의미만을 획득할 뿐이다. 가령 죽음은 죽음일 뿐, 탄생과 연결되지도 않고 탄생을 도와주지도 않는다.3그러나 열린 몸은 자신의 한계를 침범하고 능가할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닌다. 열리고 축축한 구멍들을 통해 신체와 세상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몸과 몸이 밀접하게 연결되면서 함께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한다. 시작과 끝, 새것과 옛것, 탄생과 죽음이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동시성으로 이해되는 것이다.4
미술작품에 등장하는 요리는 구성원끼리의 감정과 갈등, 상호작용과 그것의 사회적인 맥락들을 식재료로 한다. 예술가들은 요리를 통해 감각적이고 감정적이며 육체적인 것을 전면에 부각시킴으로써 정신과 관념 중심의 경직된 것들에 대해 저항하는 입장에 선다. 음식체험은 오감에 작용하여 인간의 감각적인 요소들을 열고 확장시켜 몸과 마음을 소통 가능한 열린 상태로 만든다. 즉 음식체험을 통해 미술은 인간과 인간을 연결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구속하는 비인간적인 원칙들에 저항하는 잠재적 파워를 갖게 되는 것이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 회벽에 유채, 템페라 460×880cm 1494~1499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밀라노)
1 몸의 그로테스크 이미지는 바흐친의 논문 5장을 참조할 것. Mikhail Bakhtin, trans. Helene Iswolsky, 《Rablais and
His World》 (Bloomington: Indiana Univ. Press, 1984), pp. 303~367.
2 Mikhail Bakhtin, p. 281.
3 미하일 바흐친, 이덕형 외 역,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 아카넷: 2001, p. 733. 바흐친에 대한 이덕형의 해설에 의하면, 카니발에는 인간 사이의 진정한 관계를 회복시키는 요소가 있다. 현실은 비현실 속에서 뒤얽히고, 육체들은 자유롭게 뒤섞이며, 육체들이 외부 세계의 사물과 자유롭게 상호 교감하게 된다. 하나의 육체 속에 두 개의 육체가 존재하고, 죽어가는 육체 속에 탄생하는 육체가 존재하게 된다.
4 Mikhail Bakhtin, p. 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