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ARTIST 김명숙

평소 자신의 개인전에 얼굴조차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한 작가 김명숙. 작가는 오직 작품으로 말한다는 은둔 예술가의 전형인 김명숙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묵묵히 땀을 흘리며 일하는 밀레의 농부그림처럼 그녀의 작품 역시 숱한 노동의 흔적을 드러내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 치열한 작가 정신으로 회화의 깊이를 끝없이 추구하는 그녀의 작품세계를 조용히 들여다본다.

객체라는 불가능한 기획

고충환 미술비평

자살을 하려고 욕실에 들어갔다가 참으로 오랜만에 나를 봤다. 거울 속의 내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던 것. 참으로 오랜만에? 사실 자살을 실행에 옮기기로 마음먹기 훨씬 전부터, 처음으로 자살을 생각하기 훨씬 전부터 나는 나를 보지 못했다. 오랫동안 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렇게 생각에 빠져있는 내내 나는 나를 볼 수가 없었다. 나는 나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마도 보려고 본 게 아니라, 불현듯 보였을 것이다. 혹 마지막으로 얼굴이나 한번 보는 것으로 삶에 방점을 찍고 싶었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죽는 순간에마저 자기를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작가는 거울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자신을 그렸다. 그리고 그렇게 그린 그림들이 국립현대미술관 <무제전>에 걸렸다. 원래 제목은 <시시포스 공부>였다. 그리고 금세 그림이 시시포스에 못 미친다는 생각에 제목을 정하지 못한 채 둔 것이 그대로 무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림이 시시포스에 못 미친다? 그렇다면 작가는 시시포스가 뭘 의미하는지, 그 의미가 요구하는 기준이 뭔지 알고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시시포스는 산꼭대기까지 돌을 굴려 올리는 천형을 받았다. 만약 시시포스가 천형을 거부한다면 무슨 일이 생기는가. 철저하게 무용한, 무익한, 무의미한 노동이야말로 삶의 유일한 의미이며, 그 노동을 통해서만 삶이 유의미해질 수 있다는(적어도 노동을 하는 순간에만큼은 삶의 의미를 잊을 수 있다는) 아이러니한 현실을 사람들에게 주지시키는 일이 물 건너가고 만다. 그렇게 물 건너가면 사람들은 여전히 노동이 삶에 의미를 가져다줄 수 있으리라는 착각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게 될 것이다(신성한 노동신화는 청교도주의와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일 수 있다). 철저하게 무용한, 무익한, 무의미한 것이야말로 노동의 본질이다. 그럼에도 노동을 통해서만 삶이 유의미해질 수 있다. 그래도 삶은 의미가 있다는, 아니 삶은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시시포스 신화가 주는 교훈은 이처럼 무용하고 무익하고 무의미한 노동이라는 천형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비극에 있고, 그럼에도 결코 삶의 의미는 주어지지 않는다는(혹 처음부터 삶에 의미 같은 것은 없었다는), 어쩜 이보다 더 궁극적인 비극에 있다.
그 비극에서 비장미가 유래한다. 비록 실패한 혹은 포기한 혹은 극적으로 구출된, 자살 직전에 그린, 자살에 이르기까지 밀어붙여진 것들이 응축된, 아마도 강도로 치자면 정점에 해당할, 어떤 비장미가 작가의 그림에서 느껴지는가. 이 비장미는 숭고의 감정과 통한다. 나의 감정의 용량을 초과하는 것에 맞닥뜨릴 때 오는 감정이다. 그러므로 숭고는 어쩜 나의 감정이 아니고, 나에게 속한 감정이 아니다. 그래서 낯설고 이질적이고 두렵고, 미지의 세계를 어쩜 비의를 슬쩍 엿본 것 같은 호기심과 감각적 쾌감을 동반한다. 그렇게 작가는 호기심과 감각적 쾌감을 동반하는, 낯설고 이질적이고 두려운 것들을 그린다. 그게 뭔가. 거울 속에서 자기를 응시하는 자기와 같은, 바로 그 자기를 그린다. 그래서 내면풍경이고, 심연에로의 하강이며, 미노타우루스이며, 심장이고, 레퀴엠이다. 하나같이 영적 세계(아니면 존재론적 조건 혹은 한계상황)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내면이 그렇고 심연이 그렇고 미로(미노타우루스가 미로 속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로 치자면 자기내면 말고는 없다)가 그렇고 심장이 그렇고 진혼(죽음에 바치는 오마주)이 그렇다.
그렇게 작가는 영적 존재들과 더불어 산다. 청주 산막리에 있는 아랫마을과 윗마을을 오가며 작업실을 차렸는데, 아랫마을에 있을 때는 오랫동안 비어있던 소 외양간을 개조한 작업실에 살았다. 실제로는 비어있었지만 작업실에 있는 내내 작가는 서성이는 소들과 더불어 살았고, 그 소들을 그렸다(<미노타우루스 공부>). 바로 옆 농원에는 알래스카 숫사슴이 있었는데, 곧잘 소나무 가지처럼 웃자란 뿔이 잘려나간 빈 마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작가는 작업실 내내 그 숫사슴과 절망을 함께했다. 흔한 말로 상상력의 비약이나 수사적 표현 운운하겠지만, 작가의 경우에는 실제로 그랬다. 수사적 표현으로 치자면, 작가는 타자의 상처에 감정이입하는, 타자의 절망을 자기의 절망으로 동일시하는 탁월한, 천부적인, 그리고 무엇보다도 따뜻한 심성을 타고났고, 그 심성으로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윗마을로 작업실을 옮긴 지 한참 지나서, 그 터를 자기에게 팔고 서울 아들네로 이사 간 할머니가 자살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할머니의 영정을 그렸다(레퀴엠). 할머니의 그리움이 조금이라도 해소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영정이라고 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작가의 작업실을 찾은 날, 비도 내리고 습했다. 그래서 그런지 작업실 안쪽 벽면 여기저기에 붙여둔 자료들이 모조리 영정처럼 보였다. 알 만한 사람으로 치자면 니체가 있었던 것 같고, 이외에 이러저런 사람들의 초상이며 기사가 있었던 것 같다. 작가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미친 사람 아니면 눈먼 사람도 있었다. 아마도 죽은 사람들일 것이다. 자기 생각에 빠져 있는 사람, 아니면 감각이 고도로 발달한(혹은 감각마비로 인해 오히려 예민한 내면을 갖게 된) 사람들일 수도 있겠다.
그 초상이며 기사들은 하나같이 빛바래고 곰팡내 나는 고문서를 연상시켰고, 먼지와 시간, 빛과 어둠을 재료로 빚어진 영적 존재를 환기시켰다. 그렇게 그들은 미처 그림으로 옮겨지기도 전에 이미 살아있는 것 같았고, 작가는 바로 그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그렸다.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 자기의 자기다움이, 하이데거 식으론 존재의 존재다움이 오롯해지는 느낌? 그 느낌의 대상 혹은 실체는 알고 보면 내면이 외화된 것이어서 감각적 닮은꼴을 넘어서고, 일관된 서사를 넘어서고, 논리의 지향 내지 정향성을 넘어선다. 그래서 작가의 그림은 구축되고 있는 재현으로서보다는 해체되고 있는 재현을 보는 것 같고, 특정의 서사를 지목하기보다는 상호간 이질적이고 무분별한 서사의 다발들을 불러들인다. 어쩌면 작가는 존재란 이처럼 이질적이고 무분별한 서사 다발들의 총체라고 보고, 그걸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Touching the light  300x210cm

< Touch the Ligh t> 종이에 혼합재료 210×320cm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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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동경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90년대의 한국미술> 전시광경

참다운 존재다움을 찾아서
그렇게 그려진 작가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 의미가 고정된 결정적인 지점으로서보다는 어떤 과정이 느껴지고, 여기서 저기로의 이행이 느껴지고, 정적인 가운데 모종의 불안감이며 불온성을 응축하고 있는 것 같은 긴장감이 감지된다. 불온성? 문명이 변방으로 밀어낸 것들, 이를테면 이성의 관점에서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것들, 경제의 관점에서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인 것들, 에너지의 관점에서 활성과 위험(어쩜 무분별한 생명력?)을 잠재하고 있는 것들, 자연성과 본성, 야성과 야생, 제의와 비의 같은 존재의 원형에 해당하는 것들이 자기를 주장하는 기운이다. 여전히 문명화되지 않은 채 살아남은 숲이 품고 있는 기운이다. 그래서 작가의 그림엔 유독 나무가 많고 숲이 많다. 바로 순례자를 문명화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의미화 이전의 다의적이고 다성적인 원초적 소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무는 숲이다.
그렇게 작가는 사람을 그리고 나무를 그리고 숲을 그리고 동물들을 그린다. 그리고 그렇게 존재를 그리고 사물대상을 그리면서 사실은 외피를 벗겨낸다.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을 벗겨낸다. 무분별하게 흘러내리다 멈춘 물감자국이며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비정형의 얼룩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물대상의 형태를 정의하면서 해체하는 무수한 세선이 바로 이처럼 그리면서 벗겨내는 과정에서 유래한 형식논리를 증언해준다. 벗겨낸다? 그건, 부정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그래서 아닌 것을 벗겨내다 보면 뭐가 보이고 무엇에 이르는가. 자기로 치자면 진아(眞我)가 보이고 진아에 이른다. 존재로 치자면 존재의 존재다움이 보이고 존재의 존재다움에 이른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진아며 존재다움이 거하는 공간으로 치자면 내면 말고는 없다. 그리고 피상적으로만 봐도 외면(혹은 외피)을 벗겨야 내면을 볼 수도 내면에 이를 수도 있을 일이 아닌가. 그렇게 작가는 사물대상과 관련한 고정된 지점들, 이를테면 선입견과 편견, 합리와 상식의 외피를 벗겨낸다. 그리고 감각적 닮은꼴의 외피마저도. 그리고 그렇게 벗겨내다 보면 실제로 내면을 볼 수도 내면에 이를 수도 있는가. 그러나 알다시피 내면은 내면일 뿐, 형태도 색깔도 없다. 다만 공과 허와 무와 적(절대고요)이 있을 뿐. 아니면 온갖 헛된 망상의 아수라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경우이건 그것들은 여하튼 알고 보면 모조리 나에게서 건너간 것이고, 내 쪽에서 이입된 것들이다(色卽示空 空卽示色). 그렇게 작가는 타자를 그리면서 사실은 자기를 그리고 있었다. 어쩌면 주체와 객체가 한 몸인, 상호 연장된 우주적 살(메를로 퐁티)을 그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객체라고 하는 불가능한 기획을 그리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

김 명 숙 Kim Myungsook
1955년 태어났다. 이화여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88년 미국 휴스턴 시립대 미술대학원을 수료했다. 사비나미술관, 금호미술관, 스페이스 몸 등에서 17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서울, 베를린, 시카고 등지에서 열린 그룹전에 참여했다. 현재 청주에 거주하며 작업 활동 중이다.

소년_종이위에 먹물 95x75cm 2013

<무제 1> 종이에 혼합재료 95×75cm 2013

ARTIST REVIEW 정비파

판화를 일러 ‘칼로 그리는 그림’이라고 한다. 판면(版面)에 밑그림을 그리고, 깎고, 찍어내는 고단한 수고가 더해져야 비로소 완성된다. 정비파는 이러한 수고스러운 과정을 거쳐 우리 국토의 광경을 대형 판화작업을 통해 보여준다. 광복 70주년을 맞은 올해 그의 개인전 <국토>(7.15~8.20)를 통해 우리 땅의 장대한 면모를 확인하기 바란다.

국토미학-정비파 판화의 모국어

김종길 미술비평

시인 조태일은 《국토 서시》에서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는 것이 국토라고 노래했다. 시인만이 아니라 근대 이후의 우리 예술가들은 국토에서 미학적 모국어의 뿌리를 열망했다. 그것은 그들이 궁구하는 가장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세계어였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우리 근대미학의 체계와 정립을 위한 근대성의 탐색에서 혼란을 초래하는 이중구조는 일본을 통한 서구화와 식민지 강제체험일 것이다. 18세기 바움가르텐의 ‘미학’을 동아시아의 문자언어로 번역해 유포시킨 일본이라는 통로는 대동아공영권의 식민정책과 세계전쟁, 그리고 잔혹한 학살의 주범이라는 구조 속에서 동시에 살펴야만 제대로 보인다.
근대국가 형성기에 우리는 국가를 상실했고 해방된 뒤에는 미군정(남한)과 소군정(북한)으로 분할되더니 결국 두 개의 정부를 수립하고 이데올로기 전쟁을 벌여야 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으로 분단은 고착되었고, 한반도 내에서 완전한 독립국으로서의 통일 대한민국은 아직도 요원한 상태다. 이러한 역사의 비정상적인 분절과 분단은 ‘민족과 국가’에 대한 근대성의 인식을 완전히 다른 구조 속에 놓이게 했다.
유럽의 우파 정책과 정신이 보수적 관점에서 옹호하는 ‘민족’의 개념이 우리에게는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중앙아시아, 하와이, 쿠바 등 제3세계로 이어진 디아스포라의 상처로 인해 진보적 정신과 미의식으로 계승되었고, 예술가들에게 그것은 이념의 잣대를 극복하는 ‘저항의 신념’이자 심연의 깊은 뿌리로서 근대미학의 실체를 추궁하는 슬픈 단서이기도 했다.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총체적인 우리 민족의 근대미학과 근대성을 찾아 접근할 때 자주 민족미학의 본질과 마주하는 것은 이산과 이주와 분단이 그 내부에서 뜨겁게 부글거리면서 그려낸 예술이기 때문일 것이다.
2007년 민족문학작가회의는 한국작가회의로 개명하면서 ‘민족주의 담론을 넘어서자’고 했으나 그것은 한민족의 탈영토적 개념으로서의 ‘민족담론’을 남한에 고립시키는 영토적 개념으로 협소화시킨 것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민족주의 담론은 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가장 치열한 현실의제이면서 전 세계에 걸쳐서 흩어져 있는 민족의 디아스포라와 심지어는 해외 입양, 파견 노동을 포괄하는 문제이다.
광복 70주년(그것은 동시에 분단 70주년이기도 하다)을 맞아 기획된 정비파의 <국토>는 그런 상실의 카오스가 여전히 우리 삶을 뒤흔들고 있는 역사적 근대와, 꿋꿋하게 살아서 민족의 현재를 성취해낸 국토의 옹골찬 풍경을 형상화한 전시다. 그는 1994년 이십일세기 화랑에서 연 첫 <국토기행>을 시작으로 20여 년 동안 오롯이 ‘국토미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목판화를 새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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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사진 왼쪽) 한지에 다색목판화 140×600cm(각) 2015 <지리산 천왕봉>(사진 오른쪽) 한지에 다색목판화 140×310cm(각)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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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한국근대사>(사진 왼쪽) <국토-한국현대사> 한지에 다색목판화 180×366cm(각) 2015

참된 실재로서 국토의 의미
2004년 <우리 꽃 우리 그림 판화초대전> 이후 11년 만에 개최하는 이번 개인전은 그가 작품을 시작한 1980년대 초반의 문제의식을 정점으로 밀어 올리는 미의식의 강밀도를 보여준다. 그는 1983년 ‘인간’을 주제로 한 작품을 발표하며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이때의 ‘인간’은 1985년의 ‘지금 우리는’(<지금 우리는전>)과 1986년의 ‘여기는 한국’(<여기는 한국전>)이 지시하듯 당대 한국의 현실을 사는 민중의 모습이었다. <한국미술 85년전>(1985)과 <젊은 세대 신선한 발언전>(1986), <미술대동잔치>(1987), <민족미술 큰잔치>(1992)를 거치면서 그는 자신이 궁구해야 할 민족미학의 형식과 내용에 대해 깊게 고민했다.
그는 계명대에서 양화를 전공했으나 목판을 만난 뒤로 양화를 버리고 줄곧 목판에 매진했다. 목판에 대한 천착은 오래된 우리 미의식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되었으나 그것은 그에게 ‘몸이 받는’ 미적 형식이기도 했던 것 같다. 10년 전 경주 작업실을 찾았을 때 그는 “양화를 했지만 나와 맞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판각(板刻)’에 주목하게 되었고 “칼 맛, 칼의 선이 나와 맞다”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는 덧붙여서 양화로는 겸재 정선의 회화적 선의 느낌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붓을 놓고 칼을 들었다고도 했다.
전통적인 판각을 변용하되 그것을 현대적인 미감으로 창조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판각이라는 형식만 가지고는 해결할 수 없을 터. 그가 현대인의 자기정체성 상실을 다룬 인간 군상과 역사적 변동의 주체로서의 민중, 노동자, 농민의 삶터인 마을 부락을 주제 삼거나 석굴암의 뛰어난 부조 작품들-팔부신중(八部神衆), 인왕(仁王), 사천왕, 천부(天部), 보살, 나한(羅漢), 감불(龕佛)-을 목판화로 재해석하기, 전통화의 기법을 차용해서 지금 여기의 풍경을 새기기, 옛 지도의 산수지리 기호를 차용해 화면구도를 혁신하기 등은 미적 주제로 미적 형식을 실험하는 과정이었다. 그는 새로운 주제에 부합하는 판각의 기법과 구도, 양식, 색을 창조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른 정비파의 작품세계는 크게 세 갈래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첫째는 이미 언급했듯이 국토기행을 통한 ‘국토의 미학’이 그 하나다. 1994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 작업은 국토를 이루는 산하의 응축된 산세와 지세를 바탕으로 우리 국토의 빼어난 실경을 ‘덜어내기’의 판각미학으로 완성하고 있다. 시인 조태일이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했듯이 그는 발로 누빈 산하의 풍경을 판각으로 옮겨 ‘사(事)’의 현상에서 ‘이(理)’의 참된 실재를 찾는 목판화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이른바 ‘사형취상화(捨形取象化)’다.
산수에 있어 상과 형을 두고 중국의 옛 화가와 학자들은 다른 해석을 남겼다. 형호는 “산수의 상은 기세가 상생하는 것”이라 했고, 왕원기는 “기세를 좇아 위치를 정하는 것”이 좋은 그림이며, 종병은 “질박함이 있으면서 취령함”, 왕유는 “산수에서 먼저 기상을 살펴보고 나중에 청탁을 가리고 위치를 정한다”고 했다. 왕리는 그림이 비록 형상(形狀)으로 나타나지만 의가 중요하며, 의가 부족하면 이를 비형(非形)이라 함은 옳다고 했다. 의가 충일한 산수! 정비파의 국토는 그런 동아시아의 미학적 핵심에 민족미학 의제로서의 국토를 동시에 사유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가로 6m의 장대한 국토 <백두대간>을 보면 남한만이 아니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아니 그 너머의 바이칼 시원까지 가 닿는 굽이치듯 흐르는 산하의 힘찬 맥을 펼쳐내고 있다. 정비파가 사유한 참된 실재로서 국토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것이 산하에 새겨진 ‘역사의 궤적’이라고 생각한다. 민족미학의 관점에서 국토를 사유하는 것은 상실의 근대성을 회복하고 극복하는 새로운 민족해방의 상징투쟁일 것이다. <국토-한국 근대사>, <국토-한국 현대사>에서 그는 설악산 암봉(巖峰)을 주봉으로 활달하게 산세를 드넓게 펼쳐 놓은 뒤, 거대한 일곱 마리 흰꼬리수리가 하늘에서 다투는 장면을 놀랍도록 세밀하게 새겨 놓았다. 일곱 마리, 70년, 다툼, 투쟁….
둘째는 그 스스로 불교판화라고 부르는 불교 유적지의 풍경이다. 문경 봉암사 백운대, 운주사 천불 천탑, 경주 남산, 팔공산 선보사 갓바위, 서산 마애삼존불을 비롯한 여러 곳을 새겼다. 잡다한 풍경의 세목들을 덜어낸 자리에서 칼 맛의 간략한 선으로 남은 이 땅의 불국토는 명징하다. 10년 전 그가 대구에서 경주로 작업실을 옮긴 것은 천년 신라의 불국토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경주 남산 때문이었다. 그는 판각을 통해 시간을 초월하는 풍경의 미학을 곧잘 추궁하는데, 불교판화의 미감이 살아있는 작품으로 이번 전시의 <동해바다>, <서해바다>, <남해바다>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불상을 새기지 않고 풍경 하나만으로 불국토를 완성했다고 해야 할까? 그 세계는 하나의 풍경으로 이뤄진 세계이지만 현실과 초현실과 비현실이 오버랩된 듯한, 그러니까 정신으로서의 비경을 자아낸다. <태백산맥>(1994)과 <백두대간>이 우리 민족의 역사를 켜켜이 쌓아서 물결처럼 뻗어 올린 풍경이라면, ‘바다’ 연작은 봉우리 하나하나가 정신의 푯대로 선 듯한 풍경인 것이다.
셋째는 삶터의 일상에서 길어 올린 것들이다. 생태적 영성에 관한 인간과 자연의 이치를 사유한 시적 판화들이다. 그러나 그는 이번 전시를 위해서 세 번째와 두 번째의 구체적 실경들은 배제했다. 1956년생인 그는, 50대의 10년을 ‘국토미학의 고갱이’를 새기는 데 완전히 바침으로써 목판화가 성취할 수 있는 판각미학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작품의 크기에서, 그 풍경의 밀도에서, 산세와 지세를 드러내는 기법에서, 새와 나무와 산과 강을 동시에 표현하는 수묵의 미감에서, 그리고 시간 수행의 천착과 판화의 상징성과 근대사 및 현대사에 이르는 역사인식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러한 시도는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 모순의 근대성이 여전한 현실에서 모순 극복의 민족미학이라는 새 화두를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신세기를 횡단하는 디지털 아방가르드의 상대축에서 느린 목판화가 보여주는 이 아름다운 힘은 얼마나 황홀한가! ●

정 비 파 Jung Bipa
1956년 태어났다. 계명대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한국을 비롯 뉴욕 등지에서 총 14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국내외 다수의 그룹전과 기획전에 출품했다. 현재 경주에서 작업하고 있다.

 한지에 다색목판화 182×280cm 2015

<당산나무 위를 나는 까마귀> 한지에 다색목판화 182×280cm 2015

 

EXHIBITION & THEME 올해의 작가상 2015 김기라

한국 현대미술의 비전을 제시할 역량 있는 작가를 후원한다는 취지로 제정된 <올해의 작가상>이 올해 4회를 맞이했다. ‘2015 올해의 작가’ 후보 작가로 김기라, 나현, 오인환, 하태범이 선정돼 각자의 작업세계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프로젝트 전시를 밀도있게 선보인다. 전시는 8월 4일부터 11월 1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며 전시기간 중 최종 선정 작가 1인이 발표된다.  취재·인터뷰 이슬비 기자

김기라 | 떠다니는 마을 Floating Village

“예술이란 인간의 죽음 이후에 만나는 휴머니즘”

‘Floating Village’라는 전시 주제와 이번에 선보인 작품들의 관계가 궁금하다. 이번 프로젝트의 작품들은 ‘사유’, ‘공유’, ‘향유’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개인의 경험과 기억의 사적 영역인 ‘사유’, 사적인 문제들이 공론의 장으로 관입된 ‘공유’ 그리고 공적 공간으로 확대되어 재생산된 공동-공공의 ‘향유’이다. 이른바 ‘88만원 세대’로 불리며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는 젊은이들, 치솟는 전셋값에 언제 집을 비워주어야 할지 몰라 눈치 보는 서민들, 끊임없는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거대 자본력과 도시개발의 논리 아래 살 곳 없이 떠돌게 된 재개발 지역 원주민들, 자본의 권력 앞에 무너진 가장들, 역사의 수레바퀴 안에서 망가진 개인의 역사들, 실향민 등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실은 이처럼 떠다니는 사람을 무수히 양산해냈다.
‘플로팅 빌리지’는 이처럼 3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플로팅(떠다니다, 부유하다)’의 원의미처럼 문화적으로 개인의 상황, 역사, 정보, 이미지들이 사이버나 SNS의 공간과 현상에서 떠다니는 의미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으로 정치의 실종, 비정규직(쌍용차 문제, 정리해고), 집 없이 떠도는 전월세, 기러기아빠, 노동자 문제, 88만원 세대, 세월호 침몰, 자살처럼 사회현상으로 침착되지 못하고 개인의 전반들이 사회 문화적인 현상과 상황으로 떠다니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 하나는 부유하는 개인의 역사와 관계의 문제들이 이 시대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돌아보는 의미가 있다. 나는 유동적이고 불확실한 현대사회 즉 ‘플로팅 빌리지’ 속에서 살아가는 동시대인에게 보다 넓은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며, 현 상황에 대해 함께 고민해 보기를 제안한다.
그리고 전시장 공간에 대해 설명하자면 나에게 물리적으로 개념적으로 한정된 시간에 주어진 전시 공간이 아파트 40여 평 크기와 같다는 점에 착안해, 마치 40평형 아파트 모델하우스 같은 공간구조로 연출하고자 했다. 아파트의 형태는 공중에 떠있는 공동체 공간이라는 생각도 집어넣었다. 이 공동체의 공간 안에서 개인과 이념, 역사, 시간들이 포함되고 충돌하는 영상과 공간을 연출하고 싶었다. 그 장소를 통해 지금 이 시대의 담론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심미적 측면에서 은유적으로 보여주고자 하였다. 그래서 플로팅 빌리지의 40평 공간은 개인의 사적 영역의 이야기들이 모여 공유되는 공동의 장, 그리고 그 공동에서 발생한 담론의 장으로 묶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최근 ‘공동선’이라 믿고 있던 보편적 가치의 본질을 밝혀내는 데 매진하고 있는데 당신이 해석하는 ‘공동선’은 무엇인가? 여전히 자본주의 모순과 전체주의 모순은 나와 우리 앞에 있다. 그것이 때로는 이데올로기로, 때로는 문화와 정치로 변형되어 나를 괴롭힌다. 요즘은 이념의 무게와 공동선이라는 명제 아래 대한민국의 현실, 오늘의 역사, 이념, 정치, 종교, 세대, 지역, 노사, 남녀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대립, 충돌을 공부하고 조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다시 예술이라는 형식을 통해 개인의 위치나 경계, 배치의 순간들이 조우하도록 유도하고자 한다. 이 지점들은 서로 다른 시간의 차이들을 나타내는데, 특히 서로 다르게 편재하는 시간들을 재편하여 동시대성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 동시대성은 미래를 담보한다고 생각한다. 현재가 없이 미래가 없다는 가정 아래 미래의 시각에서 현재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현재의 상황은 어떠한지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내가 관심있게 연구하는 공동선과 이념의 무게는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흑과 백의 공산주의 대 민주주의의 좌와 우 방식의 변증법적 대치 갈등과 충돌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선험하는 것과 같다. 나의 고찰은 공동체 전체를 위한 가치인 공동선(common goods)이지만, 이 또한 일반적으로 듣고 판단하기엔 현실적으로 허울과 허구에 가까울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문제의 지점에서 갈등과 분노를 보여주기보다 불가능하지만 그 안에서 예술의 관점으로 인본으로써의 가치, 혹은 인간다움의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물음 같은 것이다. 이 관점에 관하여 철학자 지젝은 ‘윤리의 정치화’로 공동선을 재구축하자 했고, 권력의 약한 지점을 간파하는 ‘자유를 위한 공동투쟁’으로 공동선을 정의하기도 했다.

한국 사회에서 이념은 특정한 이념의 대립 문제로 각인되어 왔는데 당신이 말하는 ‘이념의 무게’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를 주제로 계속해서 시리즈 작품을 만드는 이유도 궁금하다. 공동이라는 이념은 늘 아름답지만 역사는 폭력적이라는 생각이다. 이념이라는 허울과 정치적 상황이 모두에게 유익하고 좋은 ‘공동선’을 향하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망령이 돼 인간을 옥죄며 욕망을 부추긴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에도 갈등, 분노, 대립, 충돌로 달아오른 대한민국은 감정적으로 덥다. 미디어를 통해 혹은 피부로 직접 만나는 정치, 자본, 종교, 역사, 남북, 노사, 지역 간의 갈등에다 개인 간의 싸움까지 그칠 줄 모른다. 내가 말하는 ‘이념’ 혹은 ‘공동’은 좌우 색깔론을 넘어, 이 같은 갈등 유발요인 모두가 공동을 위한 이념이다. 그래서 그 이념의 무게는 삶의 무게와 가깝다. 이념의 무게에 짓눌린 세상, 그래서 나는 슬프다. 조사에 따르면 한국이 이런 사회갈등으로 치르는 경제적 손실, 즉 ‘이념의 무게’에 대한 경제적 비용이 240조 원 이상이라고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27개 회원국 중 두 번째로 높다(1등은 터키다). 갈등에 대한 천문학적 사회비용과 물리적 낭비뿐만 아니라 공동선의 부재라는 현실에 나는 분노한다.
그리하여 요즘 나의 작업들은 그 물리적 비용을 가로지를 수 있는 방법과 내가 할 수 있는 실천을 향하고 있다. 갈등의 현장인 제주, 평택, 광화문, 백령도 등지를 돌아다니며 나는 공동선을 위한 이념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가벼이 할 방도를 찾고 있다. 이념의 무게로 타들어가듯 덥던 어느 날, 내가 책상 앞에 앉아 ‘수취인불명’의 편지를 쓰게 된 이유다. 물론 주제가 힘들고 무겁다. 그러나 난 이 작업에 앞서 문화와 역사, 삶을 공유하는 지금 여기 지역성을 넘어 개인의 삶과 한끼의 식사에 내 마음을 담았다. 더울 때 먹는 음식, 또 문화와 역사 민족을 공유할 수 있는 음식을 통해 나와 혹은 그 작업을 바라보는 이의 시간대에 공통의 언어 공통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지금 여기 우리가 직면한 상황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고 바라보길 원한다.

신작 <위재량의 노래>가 인상적이다. 위재량의 시에서 영감을 얻은 계기는 무엇인가? 힙합 뮤지션들과 협업해 음악을 만들게 된 배경에 대해 설명해달라.
2011년 난지창작스튜디오에서 레지던스를 할때 위재량이라는 소위 문학계와는 거리가 있는 삼류시인을 우연히 알게 되었고 시집 <가슴으로 우는 새>를 선물받아 밤새 눈물을 흘리며 읽은 기억이 있다. 시인 위재량은 9급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해 7급(서울시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재직 당시 위재량은 난지물재생센터에서 분뇨를 처리하는 기피업무를 하면서 시인으로 등단했다.)으로 정년 퇴임한 인물이니 감동이 더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분의 경험과 삶의 노래 앞에서 나는 내가 꿈꾸던 유명하고 훌륭한 예술가가 허상임을 깨달았다.
위재량의 노래(시)는 한 인간의 삶과 경험을 노래하고 세상을 향해 비통을, 사랑을 쏟아내고 사람다움을 외치고 있더라. 그래서 그분의 시를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신파적인 방식보다 좀 더 대중적이고 일반적인 언어를 기획했다. 그동안 무수히 많은 음악가를 찾아 다녔다. 위재량의 노래를 좀 더 다층적 시각으로 볼 수 있는 협업자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위재량의 시를 가장 돋보이게 할 수 있도록 하위문화의 정신인 랩과 답가와 공연 등 미술관에서 다른 형식과 발언으로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 궁극적인 의도였다.
위재량의 노래는 기본적으로 뮤지션들의 공감과 참여, 그리고 자본의 애완견이 된 대중가요에 대한 저항정신에 아직도 목말라 하던 MC메타를 비롯한 여러 힙합 뮤지션의 만남과 작곡자들의 조우로 이루어졌고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 프로젝트는 공동 제작으로 참여한 김형규 감독(뮤직비디오와 광고 감독)과 아이삭 스코브(힙합 뮤지션 및 음반 디렉터)를 만나면서 구체화될 수 있었다. 위재량의 노래는 그렇게 첫 번째 음반과 퍼포먼스 그리고 예술 뮤직비디오로 완성됐다.

이번 전시에서 위에서 언급한 작품 외에도 다양한 협업 작품들을 선보였다. 최근 협업에 강조점을 두는 이유는 무엇인가? 동시대를 사는 다양한 예술가와 전문가들, 그 삶의 사유들을 협업과 과정의 결과로 보여주어 더 큰 담론을 생산하는 것이 가장 큰 의미라 생각한다. 그 이유는 경험이 빠지고 참여가 빠진 예술은 그냥 예술의 형태를 띤 박제된 오브제에 불과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나의 경험이 이 세상의 전부일 수는 없다. 그래서 다른 누군가의 삶과 그들의 역사도 들여다보고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한 예술가의 특수한 경험과 현상의 분석은 일반적이며 보편적 언어들을 획득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이건 대중에게나 예술가에게도 쉽지 않은 과제고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술이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는 것만은 사실이다. 예술은 사회, 정치, 제도를 바꿀 순 없다지만 심미적으로는 가장 중요한 삶의 이유를 찾는 기폭제일 수 있다. 희망은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은 전체를 감동시키거나 제도와 구조는 바꾸지 못하지만 사람 사는 사회의 올바른 태도와 관점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방식이나 형식들을 바꾸고 탐구하고 있다.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이니까, 다른 실험과 협업 속에서 담론과 공유의 가능성과 담론의 형태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협업은 현대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의 방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일종의 다각도적 다층적 사유방식의 운동처럼 말이다.

김 기 라 Kim Kira
1974년에 태어났다. 경원대 회화과와 동 대학원 환경조각과를 졸업하고 골드스미스대 대학원 순수예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덕원갤러리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서울, 쾰른, 나고야 등지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열었다. 2009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미술부문을 수상했다.

김기라 작품 (3)

김기라 <마지막 잎새 #02_당신이 나를 원하는 것처럼>(왼쪽), <붉은 수레바퀴_당신은 나의 것>(오른쪽) 비디오 2015

 

EXHIBITION & THEME 올해의 작가상 2015 나현

한국 현대미술의 비전을 제시할 역량 있는 작가를 후원한다는 취지로 제정된 <올해의 작가상>이 올해 4회를 맞이했다. ‘2015 올해의 작가’ 후보 작가로 김기라, 나현, 오인환, 하태범이 선정돼 각자의 작업세계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프로젝트 전시를 밀도있게 선보인다. 전시는 8월 4일부터 11월 1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며 전시기간 중 최종 선정 작가 1인이 발표된다.  취재·인터뷰 이슬비 기자

나현 | 바벨탑 프로젝트-난지도 The Babel Tower Project-Nanjido

“공인된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는 저항정신”

이번 전시의 공간 구성에 대해서 설명해달라. 전시장은 2400여 년 전 바벨탑과 연결돼 있던 바빌론의 성문 이슈타르 문 외벽을 덮고 있는 푸른 벽돌색으로 채워졌다. 내부에는 바벨탑을 사이에 두고 군데군데 뚫린 구멍으로 탑을 볼 수 있는 둥근 벽과 맞은편에는 둥근 벽을 마주 볼 수 있도록 거울을 설치했다. 둥근 벽의 구멍들은 바벨탑을 바라보는 시점의 시작이자 전시장 내부를 지켜보는 일종의 파놉티콘(Panopticon)이며 맞은편 벽에 설치된 거울은 반대로 파놉티콘을 지켜볼 수 있는 시놉티콘(Synopticon)이자 공간의 한계로 축소된 바벨탑의 규모를 극대화하기 위한 현실적 고민의 결과이기도 하다. 기록에 근거해서 벽돌로 제작된 바벨탑 외부에는 난지도에서 현재 서식하고 있는 귀화식물과 같은 종들을 식재했다. 또 난지도에서 채록한 새소리가 간간이 들리는 상층에 설치된 우물에서는 이태원과 원곡동에 살고 있는 이주민들이 그들의 모국어로 인터뷰한 영상을 보여주고 있다. 좁은 문으로 연결되는 탑 내부에서는 해외로 이주한 한인과 그 후손들을 인터뷰한 영상과 함께 악마의 산과 난지도가 바벨탑의 유적임을 입증하는 자료와 문서를 모은 작가의 아카이빙 작업을 보여주고 있다.

<바벨탑> 프로젝트는 베를린 악마의 산과 서울 난지도를 바벨탑의 유적으로 추정하고 두 장소의 역사를 발굴한 결과다. 여기에서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 근거는 무엇인가? 먼저 두 장소의 역사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폐허가 된 베를린의 쓰레기가 모여 인공산이 된 악마의 산과 한국의 현대화, 산업화시대를 관통하며 서울의 쓰레기를 받아낸 또 하나의 인공산, 난지도. <바벨탑> 프로젝트에서 악마의 산과 난지도는 민족주의가 낳은 전체주의가 어떻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내부 구성원을 하나로 결속하고 그 힘을 극대화하기 위해 ‘민족’이라는 단어를 소환한 예는 역사에서 자주 등장한다. 독일 나치당(1919~1945)은 아리안민족의 혈통적 우월성을 내세우고 국민을 선동하며 정권을 차지한 후 세계대전을 일으켜 수백만의 무고한 민간인을 살해하는 인종청소를 자행했다. 광기어린 전쟁의 폭력은 독일국민뿐만 아니라 인류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나치 패망 후 악마의 산을 베를린에 만들어냈다.
서울의 난지도가 세워지던 당시(1977~1993) 군사정부는 쿠데타에 대한 국민의 저항을 막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경제발전이라는 슬로건과 함께 단일민족이라는 감성적 전체주의를 적극적으로 이끌어내어 국민의 정치적 다양성을 훼손하고, 인권과 민주화를 폭력으로 탄압하고 국민 개개인의 정신활동과 문화를 통제하려 했다. 그 결과로 단기간에 경제성장의 결실을 맛보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국가 경제위기(IMF사태)를 맞았으며 이후 중산층의 붕괴로 빈부의 격차가 극심하게 벌어졌다. 뿌리 깊은 지연, 혈연, 학연에 따른 배타성은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고 곳곳에 만연한 천민자본주의가 더 이상 이상해 보이지 않는 대한민국에는 생태가 복원되어 시민의 공간으로 재탄생했으나 여전히 불안성을 안고 있는 난지도가 있다. 악마의 산과 난지도의 역사는 바벨탑에 관한 기록들과 상당부분 닮아 보인다.

이번 작업에서 우물의 상징적 의미가 궁금하다. 나에게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다리 구실을 하는 우물은 켜켜이 쌓여있는 시간의 층을 밀봉하고 있는 중요한 보물 상자이다. 전시장의 우물에서는 서울의 이태원과 안산의 원곡동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과의 인터뷰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들은 주로 제3세계 국가에서 온 이주민들이다. 영상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나는 그들에게 어떻게 한국에 왔는지 그리고 한국에서의 생활에 대해 질문하고 그들에게는 각자의 모국어로 자유롭게 대답하기를 부탁했다. 따라서 작가도 그들이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대부분 알지 못한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다양한 민족이 한국에 공존하는 현재는 난지도가 세워지던 지난 시기와는 확실히 구분되는 풍경이다.

역사에 접근하는 작가 자신만의 태도가 분명한데 이에 대해 설명해달라. 전설, 신화적인 요소 역시 당신의 작업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어 보인다. 역사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은 통시적 관점이 배제되다 보니 관념적인 시간과 공간의 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따라서 작업의 ‘시작’ 과 ‘끝’이 애매모호할 수 있고 장소 간의 개연성도 부족해 보일 수 있으나 인식의 관념적 기본 틀을 벗어날 때 어쩌면 그 ‘대상’을 보다 입체적이며 성숙하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번 전시의 경우 전시장의 바벨탑은 바닥에서 약 40cm 높이를 유지하며 공중에 떠있도록 연출했다. 일반적으로 바벨탑은 과거나 전설 속의 판타지로만 인식한다. 그러나 내가 해석하는 바벨탑은, 떠 있는, 마치 부유하는 유기물처럼 시-공간의 경계에서 벗어나 인간 삶의 풍경에 항상 함께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왜 바벨탑 이야기들이 사라지지 않고 현재까지 전해지겠는가!

역사뿐 아니라 민족의 개념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해왔다. 민족을 바라보는 당신의 관점에 대해 설명 부탁한다. 사실 나는 ‘민족’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모호할 수 있는 ‘민족’이라는 단어를 이용하는 특정 개인(집단)의 속성을 드러내는 점에 중점을 둔다. ‘민족’이라는 단어는 매우 진중하고 호소력이 있어 보이는 반면에 피상적일 수 있어 개인(집단)의 이해에 따라 해석이 용이하고 상당히 선동적일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와 닮아있다. 내 경험을 고백하자면, 민족이 뭔지도 모를 어린 나이에 초등학교에 취학하자마자부터 민족에 대한 교육(세뇌?)을 받기 시작하였다. 선생님의 체벌이 무서운 어린아이는 뜻도 모른 채 국민교육헌장을 암기했다. 나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이라는 거대한 미션을 띠고 대한민국에 태어났다. 거기에 감히 부모님의 사랑이나 개인의 자아 따위를 거론할 자리는 없었다. 그리고 그 신성한 민족에는 ‘국가’와 ‘인종’이 함의되어 있었다. 내가 아는 한 ‘민족’과 ‘국가’와 ‘인종’은 분명 서로 다른 의미이다. 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우선 민족의 의미에서 ‘국가’와 ‘인종’을 구분했다. 그리고 남은 민족의 의미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았다. 흥미로운 점은 민족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 집단이나 개인은 주로 정치인과 과거 군사정권의 독재자들이었다는 것이다. 과거 독일의 경우도 그러했지만, 독재자는 야욕을 채우려 폭력을 정당화하고 국민에게 공포심을 불어넣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대한민국의 경우, 그것이 진정 민족을 위한 행동이었는지가 현재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민족’이라는 피상적일 수 있고 선동적인 구별 짓기를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었을까! 수많은 외침과 식민지의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는 한반도에서 분명 역사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기도 했을 것이나 그 점을 노리는 자들에 의한 부작용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담은 스스로를 외부로부터 보호할 수 있지만 너무 높은 담은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베를린 악마의 산과 서울 난지도뿐 아니라 지금까지 작업에서 영국 옥스퍼드와 독일 드레스덴, 독일 라인강과 한국의 4대강 등 두 지역의 과거와 현재 모습을 연결하는 방식을 자주 보여주었다. 이 같은 방법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작업을 진행하며 가장 어렵지만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하다. 역사적 사건이나 이슈를 단순히 기존의 관점이나 해석에 맞게 다시 시각화하거나 연출하는 것은 일종의 일러스트레이션에 가깝다. 작가는 기존의 관점을 자신의 언어로 재해석할 수 있어야 하고 재해석된 관점을 관철시키기 위해 어떻게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하며 어떤 결과를 내놓아야 하는지 신중하고 깊이 있게 생각해야 한다. 이 부분은 예술가로서 스스로를 시험대에 세우는 일이자 관객에게 작업을 평가받는 주요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물론 관객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도 중요하지만 말이다.
나는 작가와 관객이 가질 수 있는, 대상에 대한 선입관과 편견을 피하고 작가의 관점을 드러낼 수 있는 장치로서 다른 장소나 시간에 일어난 유사한 역사적 사건을 작업에 불러들이는 일종의 패러렐(Parallel) 방식과 은유적(Metaphor) 상징을 사용해왔다. 예를 들어 <로렐라이의 노래> 프로젝트에서는 독일의 라인 강과 한국의 4대강에서 유사하게 일어나고 있던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말뚝’이라는 은유적 경계선을 사용하여 보여주었으며, 바벨탑 프로젝트에서는 베를린과 서울의 쓰레기더미에서 자라는 토착식물과 귀화식물들을 단일민족과 다양한 이민족의 은유로써 표현했다.

아카이빙 자료는 당신의 작업에서 어떤 구실을 하는가? 뜬금없는 소리 같지만, 바야흐로 신뢰 상실의 시대이다. 과학과 기술의 훌륭한 발전은 사회, 문화 환경의 변화와 인식영역의 확장을 이끌어 기존의 질서와 체계가 상당부분 신뢰를 잃어가는 형세이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가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과도기임을 예증하기도 한다. 매력적이지만 불안하며 폭력적인 현재에 대한 나의 관심은 지금까지 어떻게 이 사회가 형성되어왔는지 그 과정을 보여주는 역사로 순조롭게 이어졌다. 그리고 불편한 의심이 시작되었다.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공인된 역사는 신뢰할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역사는 지금까지 진보해 왔는가! 나는 절대 진리(Absolute truth)의 역사가 탄생한 비밀의 원형질이자 각각의 역사에 권위와 신뢰를 부여하는 각종 기록문서와 다양한 자료들에 접근했다. 그리고 사적으로 선별하고 분류한 작업을 통해 내 방식으로 역사를 다시 해석했다. 역사학자가 아니기에 믿기 어려워 보이지만, 좀 더 풍부하고 공정할 수 있으며 자신의 해석이 절대 진리임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신뢰할 순 없지만 작가의 해석하기는 비밀스러움을 걷어내고 관객에게 의도를 투명하게 드러냄으로써 역사는 관점에 따라 망각되거나 세뇌될 수 있음을 환기하고자 했다. 작가에게 아카이빙 작업은 자체로서 하나의 결과물이자 수행적 퍼포먼스인 것이다.

나 현 Na Hyun
1970년에 태어났다. 홍익대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옥스퍼드대 인문학부 순수미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서울과 후쿠이, 런던 등지에서 15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프랑스 파리 시테, 쿠바 아바나, 베를린 쿤스트하우스 베타니엔 등 국내외 레지던스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나현 작품 (1)

나현 <바벨탑 프로젝트-난지도> 혼합재료 설치 2012~현재

 

EXHIBITION & THEME 올해의 작가상 2015 오인환

한국 현대미술의 비전을 제시할 역량 있는 작가를 후원한다는 취지로 제정된 <올해의 작가상>이 올해 4회를 맞이했다. ‘2015 올해의 작가’ 후보 작가로 김기라, 나현, 오인환, 하태범이 선정돼 각자의 작업세계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프로젝트 전시를 밀도있게 선보인다. 전시는 8월 4일부터 11월 1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며 전시기간 중 최종 선정 작가 1인이 발표된다.  취재·인터뷰 이슬비 기자

오인환 | 사각지대 찾기 Finding Blind Spot

“제도의 무게에서 벗어나 나를 찾는 방법”

전시장 폐쇄회로TV(CCTV) 화면에서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 분홍색 테이프를 붙여 이를 시각화했다. 생각보다 이 공간의 범위가 넓어 놀라웠다. 분홍색 테이프에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는가? 테이프는 탈부착이 용이하고 진행 과정을 잘 드러낸다는 점에서 과정 중심적인 작업의 성격과 부합하기 때문에 선택했다. 분홍색 테이프 자체는 재료로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의미가 있는 것은 사각지대를 찾아내고 그것을 시각화하는 과정이다.

문화적인 사각지대를 찾는 과정에서 군대 전역자들의 인터뷰를 담았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사각지대 중에서 특히 군대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문화적 사각지대’란 누구나 접근 가능한 곳은 아니다. 누구나 접근 가능하다면 그건 이미 사각지대가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에 다양한 사각지대가 있겠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직접 접근할 수 있는 사각지대는 제한되어 있다. 병영생활에서의 사각지대는 내가 경험했기 때문에 작업으로 다룰 수 있다고 판단했다. 미술가로서 나와 내 작업에 등장하는 사례들이나 주제가 서로 긴밀한 관계가 있는지 점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주체로서 미술가들은 타자의 삶에 대한 경험이 없이, 즉 ‘관찰자’로서 타자들을 재현하면서 끊임없이 대상화해왔다. 대상화를 지속하있는 미술 혹은 주류 미디어의 문제를 목격하고 있는 나로서는 대상화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나와 내 작업의 정당한 관계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호 감상 체계>라는 작품 제목에서 CCTV 하면 떠오르는 ‘감시’라는 단어 대신 ‘감상’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상호 감상 체계>는 감시라는 큰 주제를 전시장이라는 미술의 문맥에서 다루고자 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감시라는 사회적인 주제뿐만 아니라 미술을 시각적인 것으로만 제한하는 관습적인 미술 감상의 방식을 비판적으로 다루고자 했다. 그래서 CCTV 등 감시 장치들을 일방적으로 관찰하는 감시 도구에서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을 상호적으로 연결하는 미술(소통)의 도구로 전환시킬 때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상호 감상 체계>라는 제목을 선택했다.

한국 사회에서 ‘사각지대 찾기’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설명 부탁한다. 한국은 민족적인 단일성으로부터 혈연적인 순수성에 이르기까지 문화 전반에 걸쳐 순수성과 단일성을 내재화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다양성에 대한 요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러한 단일성이나 순수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허용된다. 이러한 문화구조는 자연스럽게 다른 것, 그리고 이질적인 것에 대해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 이성애만을 유일하게 합법화하는 것도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단일성이나 순수성에 기반을 둔 한국사회가 문화적인 배타성을 정당화하지 않기 위해서는 다양성이라는 가치를 강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내가 작품을 통해 언급하는 문화적인 사각지대는 이러한 배타적 단일성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다른 것들, 즉 다양성이 출몰하는 공간이다.

관객이 참여해 경험하고 느끼게 하는 작업을 많이 선보였다. 초기에는 참여자를 제한했는데 최근 작업은 모든 관람객이 참여할 수 있도록 연출하면서 좀 더 보편적인 방향으로 접근하는 것 같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 작업은 ‘참여’라기 보다는 ‘협업’의 방식에 보다 가깝다고 생각한다. 작업의 주제에 따라 협업자들을 선택한다. 협업자의 정체성이 곧 내 작업의 주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내 작업의 ‘관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 작업의 협업자는-관객과 같이-누구나가 될 수 없으며 각 작업 주제에 의해서 제한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경비원과 나>에서는 미술관 경비원이 내 작업의 협업자였고 이번 전시회에서 선보인 <나의 사각지대-도슨트>에서는 시각장애인 청년들이 협업자들이다. 참고로 시각장애인 도슨트의 안내를 받는 사람들은 관객이다. 이들 관객은 참여자와는 다르다고 본다. 내 프로젝트에서 협업자의 정체성과 작업의 주제를 연결시키는 방식은 지속되지만 매번 다른 협업자들과 협업을 시도하는 것이다. ‘누구나’ ‘모두’ ‘동일’하게 참여하는 방식은 매우 추상적이고 계몽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리를 두고 있다.

<사각지대 찾기>는 2014년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갤러리 팩토리에서 선보인 바 있다. 이번 전시의 차별점은 무엇이며 어떤 점을 강조했나? ‘사각지대 찾기’는 작품이 아니라 내가 최근에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이다. 다시 말해 <사각지대 찾기>라는 작품은 없다. 2014년 개인전과 “올해의 작가상 후보 전시회”는 ‘사각지대 찾기’라는 주제를 공유하지만 작업 구성에서는 매우 다르다. 예를 들어 <나의 사각지대-도슨트>와 <사각지대 찾아가기>는 이번 전시를 위한 신작이다. 반면 2014년 개인전에서는 <나의 사각지대-약도>가 전시되었다. 이들 전시회에서 공동으로 진행한 <상호 감상 체계>는 그 장소 특정적인 성격 때문에 각 전시회의 특성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구현될 수밖에 없었다. 2014년 개인전에서는 경리단길에 위치한 윌링앤딜링과 창성동에 위치한 갤러리 팩토리가 지리적으로 확실히 분리됐기 때문에 공간적인 분리를 강조하는 방식, 즉 팩토리에서는 스티로폼을 사용해서 3차원적인 설치를 했고, 윌링앤딜링에서는 페인트를 이용해서 보다 2차원적인 방식으로 진행했다. 반면 이번 전시에서는 미술관 내 두 개의 공간에서 진행했기 때문에 공간적인 분리보다는 공식적인 전시장(4전시실)과 전시장이 아닌 공간(멀티미디어홀 옆 복도)의 위계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접근했다. 즉 사각지대라는 개념을 강조함으로써 공식적인 전시장보다 비공식적인 전시장인 멀티미디어홀 옆 복도가 더 부각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방법적으로 공간의 차이를 부각시킬 필요가 없기 때문에 두 개의 공간에서 테이핑이라는 동일한 방식을 사용했다. 아울러 두 공간의 상호적인 연결성을 강조하기 위해 <나의 사각지대-도슨트>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사각지대 찾기>뿐 아니라 <유실물 보관소>, <이름 프로젝트> 등 ‘찾는다’는 행위에 집중한 작품이 많다. 오인환이라는 개인의 정체성과 작가로서의 정체성과도 맞닿아 있는 것인가? 작가의 정체성과 상관없이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주제들을 모두 자신의 미술로 다룰 수 있다는 것은 주체적인 미술의 전형이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이러한 주체적인 미술과는 다르게 타자의 미술은 개인의 정체성과 자신의 작품 주제나 방식의 구체적인 연결 관계가 확인될 때만 미술 작업이 가능하다고 전제한다.
나에게 ‘찾는다’는 것은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으로서의 ‘찾기’는 내 정체성과 관계가 있겠지만 보다 구체적으로 타자로서의 내 삶의 방식과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사회에서 타자의 삶이란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개인으로서, 그리고 미술가로서도 늘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서울은 타자들이 정착하기에 여전히 문화적으로 열악한 곳이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다수의 타자가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 삶의 속성은 임시적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찾기’라는 행위는 과정을 더욱 과정으로 만드는 것으로서 주체를 욕망하지 않는 타자로서의 내 삶을 미술의 방식으로 연결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미술가가 아니다/나는 미술가이다>(2015)는 미술을 전공했지만, 현재 미술 활동을 중단한 사람들의 인터뷰이다. 그런데 작가가 인터뷰어가 아니라 인터뷰이로 등장하는데 어떤 의도에서 만든 작품인지 설명해달라. 사실 작업을 중단하거나 그만둔 사람의 다수는 얼굴을 밝히면서 인터뷰하는 것을 썩 내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의 대역이 필요했고 그 역할을 내가 하기로 했다. 이러한 결정은 물론 작업의 주제 때문이다. 나는 “올해의 작가”라는 전시회의 중요한 주제는 작가, 즉 ‘작가는 어떻게 규정되며 나아가 작가는 누구인가’를 밝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차별화된 방식으로 작가라는 주제에 접근하고 싶었고 그것이 작가가 아닌 사람들과의 인터뷰이다. 인터뷰에서 나의 역할은 질문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수용하는 입장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인터뷰한 사람들의 대사 전체를 외웠고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면서 그들의 진술을 반복한 것이다. 사실 작업을 중단한 사람들의 진술에서 많은 부분은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과정은 결국 <올해의 작가상>이 소개하는 작가로서 오인환을 ‘작가가 아닌 사람’으로 재현한다. 그 결과 미술제도가 구분하는 작가와 작가가 아닌 사람이 중첩되면서 이분법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는 내 생각을 전달하는 방식이 되었다고 본다.

오 인 환 Oh Inhwan
1965년 태어났다. 서울대 조소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뉴욕시립대 헌터칼리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서울, 뉴욕, 시드니 등지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현재 서울대 서양화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오인환 작품 (4)

오인환 <상호 감상 체계> 공간 설치(제4전시실) 2015

 

EXHIBITION & THEME 올해의 작가상 2015 하태범

한국 현대미술의 비전을 제시할 역량 있는 작가를 후원한다는 취지로 제정된 <올해의 작가상>이 올해 4회를 맞이했다. ‘2015 올해의 작가’ 후보 작가로 김기라, 나현, 오인환, 하태범이 선정돼 각자의 작업세계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프로젝트 전시를 밀도있게 선보인다. 전시는 8월 4일부터 11월 1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며 전시기간 중 최종 선정 작가 1인이 발표된다.  취재·인터뷰 이슬비 기자

하태범 |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 Gaze on the Incident

“나 또한 공범자임을 자각하는 순간”

2008년부터 각종 미디어 보도사진에서 주관적인 요소를 제거한 <화이트> 시리즈를 진행하고 있다. 여기에서 ‘화이트’의 개념을 통해 강조하고 싶은 지점은 무엇인가? 백색은 보통 순결하고 깨끗한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는데 아무것도 없는 백지 상태의 의미로도 볼 수 있다. 색은 사물을 인지하는 데 중요한 작용을 하면서도 착시를 일으키는 요인이기도 하다. 같은 형태의 사물도 색에 따라 그 느낌이 달라지듯이 색은 시각에 많은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사건현장을 담은 사진 속에는 부서진 건물과 울부짖는 누군가의 일그러진 얼굴에 붉은색 핏자국이 드러나면서 현장의 참혹함을 더해준다. 이러한 사건을 바라볼 때 갖게 되는 슬픔과 연민 등 감정을 탈색시키고 하얀색으로만 표현된 현장의 모습은 아무것도 없는 무감각한 상태로 기억 속에 남아있는 어떤 사건의 기록 이미지를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미디어를 통해 접한 보도사진을 모형으로 제작해 다시 사진 또는 영상으로 완성하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당신의 조각과 사진 그리고 영상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야기해달라. 매체는 단지 표현의 수단으로 적절한 방법을 각각의 작업 특성에 맞게 사용했다. 사진작업의 경우 뉴스 미디어에서 보도사진을 대상으로 하면서 사진매체를 적용하였으며 영상작업의 경우 유튜브 등에서 실제 전투 장면을 담은 영상을 모티프로 작업했기에 그대로 영상매체를 사용했다. 조각작업은 약간 다른 의미로서 ‘모뉴멘트’가 갖는 의미를 차용하여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상징성을 말하고자 했다. 이 모든 매체는 방법에서 차이를 갖지만 어떤 대상(사건, 인물 등)을 극단적으로 타자화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미디어는 그 특성상 우리에게 공감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먼발치서 바라보는 방관적인 시각을 담고 있다. 참고로 사진과 영상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생산되는 모형작업은 표현을 위한 방법적인 과정이면서 사건을 분석하는 과정이라 보면 되겠다.

기존 작업에서 사건 사진 속에 등장하는 인물을 일부러 제거함으로써 사건 자체에 집중했다면 최근 작품에서는 인물이 메인으로 등장한다. 어떤 점에 초점을 맞춘 것인가? 기존 사진작업과 최근 작업 모두 사건 자체를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사진작업에서 인물을 제거하는 것은 색을 제거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감정을 자극하는 요인 중 인물이 갖는 범위가 크기에 그런 것이다. 반면 최근의 인물 작업은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을 다룬 기존 작업과는 다르게 공익광고에 노출되는 아이들의 모습이 어떤 식으로 소비되고 우리의 시각에 받아들여지는지를 말하고자 한 것이다.
인물작업의 경우 구호단체의 배너광고를 보면 그들의 슬픔과 처한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 때묻은 얼굴과 허름한 옷차림 그리고 연민을 자극하는 눈빛을 강조한다. 더욱이 그 아이들 옆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호소하는 짧은 문구가 강렬하게 반짝 거린다. 이 모든 요소를 제거하고 만들어진 작업에서 남은 아이들의 얼굴은 마치 천사를 표현한 고전 조각을 떠올린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 속의 신화처럼 말이다.

당신의 작업은 타인의 고통을 대상화하는 현상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작업이 계몽적이라는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일정 부분 계몽적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보다 미디어를 소비하는 나 자신의 얘기를 하는 것이기에 누군가의 생각과 관점을 비판하기보다 공감하는지 물어본다는 것이 적절한 대답이 될 것 같다.

작가 스스로 경계하는 한편 미디어에 무뎌지는 딜레마, 죄책감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앞으로 이같은 면을 어떻게 풀어나갈 생각인가? 계속해서 고민할 숙제가 될 것 같다. 작품으로 보여지는 것들은 여과되고 변형된 내면의 기억 속 이미지이지만 그것을 제작하기까지 수많은 사진과 영상을 수집하면서 끔찍한 장면들을 반복적으로 보게 된다. 그런 과정 속에서 감정이 무뎌져가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으나 가슴 한구석에 충격의 찌꺼기가 조금씩 쌓여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단지 미디어를 통해 바라본 사건사고의 뉴스를 소비하는 관람자의 자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재생산하는 또 한 사람으로서 갖는 딜레마에 따른 상처일 것이다.
여하튼 딜레마와 그에 따른 죄책감이 앞으로 작업을 계속 해나가는 데 크게 작용하는 고민이다. 다만 내 자신이 어떻게 물들고 무뎌지며 혹은 반성하면서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딜레마의 연속을 고민하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면 그것이 나뿐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모습을 단편적이나마 담아내지 않을까 기대해 볼 뿐이다. ‘우리 모두가 공범자’라는 말을 항상 되새기면서 말이다.

이번 전시에서 공간 구성과 동선에 신경을 많이 쓴 것 같다. 그리고 작업실 공간을 연출한 점이 인상적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지금까지 해온 작업을 통해 내가 어떤 얘기를 하고자 했는지 보여주는 데 중점을 두었다. 또한 어떠한 과정을 통해 작업들이 나왔는지 이해를 돕고자 했는데 그 방법으로 작업실의 일부를 재현했다. 전시 공간에 처음 들어서면 양쪽 벽면에 양각으로 돌출되어 있는 글씨를 볼 수 있다. 이는 사건사고를 다룬 기사 타이틀인데 우리가 뉴스를 볼 때 가장 먼저 ‘헤드라인’ 기사를 접하게 된다. 하루에도 수없이 떠오르는 기사 타이틀은 정작 사건의 심각성보다 얼마나 자극적으로 전달해 소비되게 할지 고민하듯이 우리에게 달려들고 있다. 그리고 이 통로의 끝에는 아프리카의 한 소년의 눈망울이 우리를 응시하고 있다. 그 조각상을 지나면 다시 통로가 있고 양쪽에 하얀색으로 제작된 50명의 인물 초상이 보인다. 모두 난민이거나 굶주림과 전쟁에 의해 괴로워하는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의 모습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지 않으면 하얀 판에 새겨진 이미지가 무엇인지 잘 파악할 수가 없다. 이 이미지를 지나면 또다시 한 소녀의 얼굴이 우릴 응시한다. ‘아프간 소녀’로 유명한 《내셔널지오그래픽》 표지사진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 다음 지금까지 해온 사진작업과 구호단체의 배너광고에 나온 아이들을 부조로 제작한 새 작업들을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꾸며진 작업실을 들어서면 자료를 수집하고 작업을 제작하는 과정의 일부를 엿볼 수 있으며 동시에 그동안 해온 영상작업도 볼 수 있다.
이를 보고 나면 사건사고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고 소비하는 나와 우리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되고 다시 돌아나오면서 지금까지의 작업들을 되돌아볼 수 있도록 한 것이 이번 전시 구성의 의도였으며 바람이다.

미디어의 범람으로 인해 사람들은 갈수록 리얼리티를 추구한다. 리얼리티쇼가 범람해 실제와 가짜의 경계가 모호해졌고, 아이러니하게도 가짜를 통해 더욱 강한 리얼리티를 느끼기도 하는데 이같은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본인이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한 리얼리티란 실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렇기에 리얼리티를 추구한다기보다 오히려 판타지를 꿈꾸고 있다고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미디어는 우리가 다양한 간접경험을 할 수 있게 하면서 동시에 더욱 많은 욕망을 생산해낸다. 실제로 겪을 수 없거나 시간적 혹은 물리적 한계로 경험하기 어려운 상황이나 장소를 미디어를 통해 보면서 ‘그것’ 혹은 ‘그곳’을 갈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경험’은 흥미롭지만 실천에 옮기는 데 따르는 ‘부담감’을 모르지 않는다. 그 부담이란 생명의 위험, 시간적인 한계 그리고 금전적인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안전하고 편안함을 인지할 수 있는 상태를 보장하는 범위에서 그런 욕망을 채우려 한다. 그러나 그 간접경험은 실제가 아니기에 현실에 가까운 경험을 느끼기 위해 더욱 자극적이고 강력한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반면 이런 강렬한 경험(?)과 비교했을 때 현실의 내 삶은 너무도 평범하고 지루하다. 그렇기에 더욱 강한 판타지를 꿈꾸고 그것이 현실인 것처럼 ‘착각’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 나의 안전은 보장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넘쳐나는 미디어의 정보는 우리에게 더 넓은 시야를 갖게 함과 동시에 우리 스스로의 한계를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한다.

하 태 범 Ha Taebum
1974년 태어났다. 중앙대 조소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슈투트가르트 국립 조형예술대학 조소학과를 졸업(MFA)했다. 2000년 서경갤러리에서 열린 <無=有>을 시작으로 서울, 베를린 등지에서 12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중앙미술대전 우수상, 송은미술대상 우수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하태범 작품 (1)

하태범 <헤드라인> 혼합재료 설치

 

EXHIBITION FOCUS 포스코미술관 개관 20주년 기념

작가 문봉선은 “전통을 확실히 배우지 않고서는 결코 전통을 넘어설 수 없다”고 말한다. 9월 1일부터 10월 6일까지 포스코미술관에서 열리는 <청풍고절(淸風高節)>은 작가의 23번째 개인전이다. 이 전시에는 대나무와 돌을 그린 수묵화 신작이 대거 선보인다. 그는 오래 전부터 구례와 하동 섬진강변을 비롯해 담양 영산상, 진주 남강, 울산 태화강 등 전국의 유명한 대숲을 두루 돌아다니며 대나무를 관찰하고 사생했다. 이와 같은 문봉선의 대나무 그림은 대나무의 생태적 특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여기에 다시 주관적 심회를 투사한 뒤, 묵죽 본연의 사의적(寫意的) 세계를 표출한다.

청풍고절 그리고 뭉툭한 돌 하나

류철하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수묵화운동이 배출한 기재(奇才)인 문봉선이 전 벽면을 대나무 그림으로 채워 서슬한 대숲으로 만들었다. 문봉선은 일찍이 중국화보를 일소하고 청신한 조선의 사군자를 그리고자 뜻을 세운 화가다. 문봉선이 여행과 사생으로 확인한 실제의 대나무와 국립박물관과 간송미술관에 있는 진적들을 비교확인한 후 자신이 그리고자 한 대나무가 무엇인지 고심한 것은 누구보다도 자주성 강한 화가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문봉선은 대나무를 직접 보고 기르며 계절과 날씨에 따른 참모습을 파악하는 화가로서 대나무에 대한 식견과 화가로서의 지향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오랫동안 대나무를 관찰하여 이미 눈과 마음에 대나무의 생태를 알고 있어야 하고, 손보다 마음이 앞서서 그림 속에 자신의 의지가 나타나야 하며 또한 화폭에 그려진 대나무는 더 이상 가슴속의 대나무나 손에 익숙한 자연 속의 대나무가 아닌 그림 즉 대나무도 묵죽화도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그림 속의 대나무(紙中之竹)’의 세계를 지향했다.”
눈과 손으로 대나무의 생태를 익히고 마음과 정신으로 대나무의 의지를 그리고자 한 것은 앞선 화가들의 지향이었으나 문봉선은 이보다 더 나아가 ‘그림 속의 대나무(紙中之竹)’를 지향한다고 말한다. 마음속의 대나무(胸中成竹)나 손안의 대나무(手中之竹)도 어려운 데 그림속 대나무라니…? 문봉선에게 대나무는 마음이라는 주관의 의지도 아니고 묵죽화(墨竹畵)라는 대상화도 아닌 독자적인 세계로서 감상되는 그림 자체를 의미한다. 이 점에서 문봉선은 과거와 절연했다고 말할 수 있다. 회화로서의 독립과 화가로서의 의지, 그리고 현대성에 대한 생각의 일단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石竹圖_비단에 수묵담채_143×368cm_2014

〈石竹圖〉비단에 수묵담채 143×368cm 2014

문봉선은 수묵으로 한정되는 특정한 과목으로서의 전통과 이념의 과잉이 아닌 수묵으로 표현되는 세계, 그 정경의 일단을 그린다. 수묵으로 표현 가능한 세계와 그 한계는 “반은 배우고 반은 버린다(學一半廢一半)”는 청대의 기걸(奇傑) 정판교(鄭板橋)의 말처럼 여하한 장점이라도 그 기질과 맞지 않으면 과감히 버리고 특단의 일점만을 취한다. 실제 강가의 풍죽을 관찰 참조하며 탄은(灘隱) 이정(李霆)의 풍죽(風竹)을 떠올린 것도, 눈이 그친 후 잎눈이 반쯤 가려진 설죽이 가장 보기가 좋다는 것도 이러한 참조의 결과이지만 이러한 실례들을 확인한 후 문봉선 식으로 바꾼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탄은의 풍격을 가졌으되 문봉선으로 해석된 “그림 속의 대나무”를 그린다는 점이 중요하다.
문봉선이 피하고자 하는 것은 회화적 고식(古式)과 관습의 일단이지만 서예가 갖고 있는 간고하고 깊은 먹의 운용과 서체의 힘은 문봉선에게 유효한 것으로 남아있다. 문봉선이 현대적 화면과 회화적 정경으로, 전체 화면을 운용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서체와 필법이 가지고 있는 기본 요소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비수(肥瘦) 장단(長短), 그리고 비백(飛白)에서 오는 조형과 필력은 문봉선 회화의 바탕을 이룬다. 서체로 단련된 필선과 적절한 감필(減筆), 먹과 먹을 부딪치는 과감한 번짐과 깨짐은 천연의 효과를 내며 생기를 더하고 있다.
<청풍고절淸風高節>은 문봉선 특유의 신속한 붓질과 장중한 먹, 강력한 기세의 힘을 느끼게 하는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고고한 대나무와 둔탁한 돌이 이루는 조화는 요란하거나 과장되어 있지 않지만 활물의 모습으로 느껴진다. 언젠가 보았음직한, 그리고 마주했던 산야의 돌과 대나무의 모습이다. 평범한 돌과 대나무가 그림이 되기 위해서는 강력한 상징이 필요하다. 문봉선은 고식인 주름과 그 표현법을 대신해 보다 현실감 있는 표현으로 주름지게하고 문지르며 바위를 과감하게 표현해낸다. 계절과 기상, 그리고 성정이 대나무와 바위에 함께 있어 우죽과 풍죽, 그리고 설죽의 모습이 생생하며 그윽하고, 맑고 화탕하며, 냉엄하고 적막하다.
확실히 사물을 활물의 정경으로 만드는 것은 특기이자 장점이지만 한편으로는 변하지 않는 어떤 이념이 떠오르는 것은 막강한 고법의 작용이 여전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비바람을 맞고 있는 듯한 돌의 표현적인 요소와 준법을 넘어선 파격적 바위표현과 비백(飛白)은 압도적인 것이지만 이념은 현상을 압도한다는 점을 상기할 때 문봉선에게는 여전히 요청되는 것이 있다.
정판교 가슴속에 10만 그루의 대나무가 있듯 문봉선도 그만한 뜻이 일어 대나무를 그렸을 것이다. 그러나 가슴속 대나무를 감당하는 바위 몇 점이 10만 그루의 대나무를 지탱하듯 전체 그림의 요체는 흉중의 일기(逸氣)와 대나무의 변상(變相), 그리고 그 뜻이다. 자연의 생태와 조건에 근접한 바위 주름과 양감의 표현이 강렬한 효과를 내기도 하지만 돌과 바위는 천고(千古)라는 시간의 축적이기도 하다. 문봉선의 그림이 그 자체로 회화적 공간감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지만 대나무라는 공간의 힘과 천고가 합친 시간의 축적이 대비되는 모습은 기대할 수 없었다. 문봉선은 그러한 수많은 생멸의 변상(變相)을 그리는 데 탁월한 기량을 발휘하고 있고 진보적이다. 그 변상의 일단을 볼 수 있는 것이 우죽도(雨竹圖)이다. 압도적 크기의 우죽도는 수직으로 내리는 비와 흘러넘치는 빗줄기, 희뿌연 대지의 이내(해 질 무렵 멀리 보이는 푸르스름하고 흐릿한 기운)와 안개 속에 홀연히 떠오른 댓잎 등이 실감나게 묘사된 파격적인 작품이다. 이러한 격정과 정취를 다른 그림에서 본 적이 없기에 문봉선은 여전히 다른 그림을 기대하게 만드는 작가이다.
현무암과 죽림이 그의 그림의 모태가 되었던 문봉선에게 대나무와 돌은 천생 탐구대상 일 수밖에 없다. 고법을 배우고 고법을 버린 결과 설죽은 유덕장을 닮았고 풍죽은 탄은의 소리를 낸다. 그러나 문봉선 식이다. 판교가 그랬듯 고법은 그의 스승이 아니다 그가 마주한 강변의 대숲과 바람이 그의 스승인 셈이다. 맑은 바람과 높은 뜻이 있으려면 뭉툭하고 장중한 돌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준법을 지우고 표현력을 가미한 문봉선의 돌은 아직 낯설다. 나에게서 돌은 천년이 한 살인 까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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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竹圖 VII〉(왼쪽) 비단에 수묵담채 143×369cm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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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竹圖〉 연작 한지에 수묵담채 191×96cm(각) 2014

 

WORLD TOPIC CODY CHOI. Culture Cuts

세계적 미술관 중 하나인 쿤스트할레 뒤셀도르프(Kunsthalle Dusseldorf) 에서 한국인 작가 최초로 코디 최 개인전(5.9~8.2)이 열렸다. <Culture Cuts>로 명명된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80점의 작품을 전관에 걸쳐 3구역으로 나눠 선보였다. 이 전시를 통해 코디 최는 익숙하지 않은 시스템에 속해 있어 이방인 같은 삶을 살았던 자신의 자아와 그것을 바탕으로 한 콘셉트가 주를 이루는 그간의 작업 활동을 드러내 관람객을 만났다.

쿤스트할레 뒤셀도르프에 초대된 고뇌하는 이방인

최정미 미술사

국적 불문하고 작가들의 로망인 쿤스트할레 뒤셀도르프에서 <Culture Cuts>라는 타이틀로 코디 최 회고전(5.9~8.2)이 열린다. 쿤스트할레 뒤셀도르프는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 작가 회고전을 열면서 대표작 외에 신작까지 포함하여 80점을 선보였다. 간간이 한국 작가를 소개하기는 했지만, 한 작가에게 미술관 전체를 내어주며 정성을 들인 것은 처음이다.
<CODY CHOI. Culture Cuts(CCCC)>, ‘C’가 네 번이다. ‘C’는 외국어나 라틴어에서 기원한 단어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철자로 독어에 그다지 많이 사용되는 알파벳이 아니다. CODY CHOI라는 작가 이름도 익숙하지 않고 전시 제목에는 ‘C’가 많고, 어쨌든 문화이질감은 아니더라도, 현지인에게 다소 생소한 것은 사실이다. 뒤셀도르프 시민은 높은 밀집도의 미술관, 쿤스트 아카데미 등을 통해 현대미술에 비교적 잘 적응하는 편이다. 그런데도 지나가다 미술관 입구에 설치된, 시뻘건 벼슬과 육수의 수탉을 배경으로 두건을 쓴 젊은 동양 남자가 무슨 병을 들고 있는 거대한 포스터를 힐끗 때로는 유심히 쳐다보기도 한다. 이 젊은 남자가 들고 있는 병은 펩토비스몰이다. 독일에는 펩토비스몰 같은 위장질환용 만병통치약은 없으며 독일인에게는 그저 어떤 핑크와 노란색 병일 뿐이다. 관람객은 전시를 보며 포스터가 내포한 의미에 대한 궁금증이 다소 풀렸다는 듯 미소 짓거나, 더욱 미궁에 빠지거나, 아니면 전시작품 중의 하나인 <The Thinker>처럼 고뇌하는 표정을 짓기도 한다.
전시장은 크게 3곳으로 나뉘어 있다. 천장이 높고 가장 큰 전시장인 메인 전시실은 공간 규모에 맞게 조형물이나, 설치·평면작업이 잘 어울리는 장소이다. 메인전시실 옆 공간은 회화나 드로잉 등 평면작품이 주로 전시되며 소규모의 개인전이 열리기도 한다. 위층 공간은 자체 공간 외에 메인 전시실을 내려다볼 수 있어 두 전시공간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메인 전시실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관람객은 거울에 반사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칸트, 후설, 하이데거 등 수많은 서양 철학자가 자기 반사(self-reflection)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거나 명제를 확립하고자 했다. 코디 최는 이민자, 동양인 그리고 작가로서 그들 시스템에 자아를 끊임없이 투영, 반사한다. 그의 시도는 역반사로 인해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철학적 질문에 이어 전시실 중앙에는 오귀스트 로댕부터 게르하르트 리히터까지 서구의 내로라하는 작가들을 한곳에 모아놓은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의 작품들이 설치되어 있다.

Cody Choi Installationsansicht [6]

< Culture Cuts > 전시광경. < The Thinker >(사진 가운데) 화장지, 펩토비스몰, 나무 110×90×277.5cm(높이) Photo: Katja Ill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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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dy’s Legend vs. Freud’s Shit Box > 브론즈, 나무, 철 96.5×96.5×264.2cm 1994~1995 Courtesy of PKM Gallery Photo: Katja Illner

상호 몰이해의 증거
특히 강렬한 핑크의 <The Thinker>가 마법처럼 발길을 당긴다. 주위에는 비교적 작은 조형물들이 크레이트 위나 군용담요처럼 보이는 천 위에 무심한 듯, 작정한 듯 설치되어 있다. 전시 포스터로 사용된 <Golden boy poster>는 다른 작업들에 비하여 크기는 작지만, 넓고 높은 전시장에서 여전히 그 포스를 내뿜고 있다. 펩토비스몰로 시작된 빨간색, 핑크, 노란색은 <The Thinker>와 따듯한 나무 크레이트 색을 통해 그 정점을 이루는 듯 보인다. <The Thinker>를 둘러싼 벽에는 회화, 사진, 드로잉 등 다양한 미디어뿐만 아니라 내용적인 면에서도 서로 다른 예술언어를 사용하고 있어 쉽게 연결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전시작품의 핵심을 관통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아마도 작가가 도미 시절 겪은 문화 충격과 적응, 정체성의 혼란 등 과정에 있지 않나 싶다. 코디 최는 한 독일 방송사 인터뷰에서 “우리는 서로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냥 서로 알고 있을 뿐이다. 마치 많은 음식을 섭취할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이 소화되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라고 밝혔다.
두 번째 전시실은 작가의 콘셉트가 극대화된 평면작품들이 설치되어 있다. 반 고흐의 <해바라기>, 마네의 <올랭피아>,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Abstraktes Bild> 를 연상하게 하는 작품들이 눈에 띈다. 2015년 초에 소더비 경매에서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Abstraktes Bild>가 41억 유로에 낙찰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래서일까, 피카소의 <우는 여자> 아래 찢어진 듯한 천에 ‘코니 아일랜드’라는 다소 냉소적인 문구가 더욱 마음에 와 닿는다. 다소 작은 벽에는 영어를 한국어로 풀어쓴 네온 사인 작품이 차가운 하얀색으로 발광하고 있다. 관장 그레고르 얀젠 씨는 필자에게 한국어 글귀가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물어보는데 네임택을 본 후에야 무슨 말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미술관 위층은 남근중심주의와 코디 최식 해체주의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보인다. <Cody’s Legend vs. Freud’s Shit Box>는 작가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모습으로 서 있는데 왼쪽 발은 큰 그릇에 담겨 있다. 이 작품 아래에는 작가의 두상이 어린이용 의자인 듯 보이는 구조물 위에 얹혀 있다. 그레고르 얀젠 씨는 인터뷰 후 함께 전시장을 둘러보며 <Cody’s Legend vs. Freud’s Shit Box>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성경에 나오는 다비드와 골리앗에서는 다비드가 약자로 간주된다. 미켈란젤로를 통해 다비드는 근육질 남자가 되어버렸는데 코디가 뉴욕에 와서 보니 다비드는 동성연애자의 상징이었다. 서양에 와서 정체성의 혼돈을 겪는 작가의 모습이 다비드에서 엿보였을 것이다. 코디는 다비드와 골리앗에서 다비드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Ego Shop>은 나무상자 여러 개를 마치 탑처럼 쌓고 노란 운반용 벨트로 묶어 놓았다. 각기 다른 크기의 페니스와 고환의 단면 형태 혹은 작은 원형으로 상자에 구멍을 뚫었다. 묶어 놓은 형태도 남근을 연상하게 하고 그 팔루스에는 성기가 들어갈 수 있는 남자 성기 모양의 구멍이 나 있다. 그야말로 반복, 해체 그리고 분산의 연속이다.
《짝퉁: 중국식 해체론(Shanzhai: Dekonstruktion auf Chinesisch)》에서 한병철 교수는 중국에서 위조(Shanzhai)는 또 다른 창조행위로 분류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한 예로 독일 함부르크 민족박물관에서 진시황릉의 병마용 순회전이 열렸었다. 전시 기간 중 이 중 8점이 복제품(?)으로 확인됐다. 독일 입장에서는 짝퉁이고 중국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진품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인에게는 전시된 병마용이 진품인 것이다. 한 현상에 대하여 다각도의 관점과 해석을 할 수 있다. 사회 전반에서 일어나는 현상, 특히 문화적 헤게모니, (탈)문화식민주의 현상과 괴리감에 대해 코디 최식 해체방법과 기호시스템을 이용하여 또 다른 질문을 제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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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gh Heel Neurosis: Study of Female Energy Balance against Gravity > 나무 91.2×37.5×65(높이)cm 1994~1995 Courtesy of PKM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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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코디의 작품세계 저변에는 심리학, 철학이 깔려있다”

코디 최와는 오래 알았나?
알고 지낸 지는 약 16년 정도 되었다. 그를 처음으로 알게 된 계기는 1996년 다이치 프로젝트(Jeffrey Deitch)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 작은 도록을 통해서였다. 당시 코디는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며 스타였다. 그러다 나는 2000년 5월부터 9월까지 개최된 대형 국제 프로젝트인 컨티넨탈 시프트(Continental Shift)에 참여해 한국, 일본을 맡았었다. 이 프로젝트는 독일의 아흔, 벨기에, 네덜란드 그리고 남아메리카에서 개최되었으며 당시 25명 작가와 함께 코디도 초대했다. 당시 그는 데이터/디지털 베이스 페인팅을 주로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독 국제교류 프로그램인 ‘트란스페어 한국 독일’ 때 한국을 수차례 방문했으며 이때 다시 만났다. 재밌던 것은 한국에 갔을 때 코디 최를 아느냐고 물어보면 사람들은 대부분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이름을 보여주었더니 “아, 최현주!”라며 알아봤다.
전시를 결정한 주요 동기는 무엇인가?
언젠가 한국 작가와 개인전 혹은 회고전을 한번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코디와 이불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불은 유럽에서도 워낙 유명한 작가고 도록도 수두룩하다. 독일에서는 코디 최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난 항상 코디와 그의 작품세계에 대하여 믿는 부분이 있었고 관심도 많았다. 또한, 1983년 미국에 이민 후 1986년 예술 전공 그리고 한국, 뉴욕, 로스앤젤레스를 거친 점 등 그의 삶의 여정도 흥미로웠다. 코디는 미국에서 ‘아시아 남자(Der Asiate)’ 였고 귀국 후 한국에서는 ‘미국인’이었다. 이름도 ‘최현주’이자 ‘코디 최’다. 이민 전까지 그에게 금발여자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런데 실제 미국에 가서 본 금발녀는 자존감이 상당해 보이는 데다 거구에 튼튼해 보였으며 음식도 그의 거의 두 배 정도 먹는 것을 보았다. 그러한 금발녀의 모습이 무서웠다고 한다. 그가 경험한 문화충격, 이방인, 정체성 찾기 등 공감이 가는 부분이 꽤 되었다. 회고전 기획에 약 2년이 걸렸으며, 본격적인 준비는 1년 전부터 했다. 마르셸 뒤샹, 미켈란젤로, 오귀스트 로댕 등 연관 작업이 많은데 난 게르하르트 리히터와의 연계성에 관심이 갔다.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뒤셀도르프와 깊은 인연이 있으며 코디와 쿤스트할레 뒤셀도르프와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약 20여 년 전 이우환 전이 열렸었으며 2012년에는 소규모의 구정아 개인전도 했으나 회고전은 없었다. 서울예술재단, PKM갤러리 등 한국 측에서 협조하고 경제적으로도 지원했다. 마이크 켈리 미술재단(Mike Kelley Foundation for the Arts)을 운영하는 로스앤젤레스에서 활동하는 큐레이터 존 웰치먼(John Welchman)은 작품 선정과 이해에 대하여 많은 도움을 줬다. 이 전시는 프랑스 마르세유에서도 열릴 예정이다.
코디 최의 작품세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쿤스트할레 뒤셀도르프는 신진 작가보다는 가령 토마스 루프, 쑹둥처럼 커리어 중반에 들어섰거나, 뒤셀도르프 시에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그리고 실험예술을 하는 작가들에게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코디는 이 두 가지 요소를 다 갖추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소화, 배설, 성에 관련된 주제가 많다. “Liebe geht durch den Magen.”(직역: 사랑은 위장을 통한다/ 필자 은역: 사랑하는 사람이 만든 맛있는 음식은 사랑도 강하게 한다)는 독일 속담이 있다. 코디의 경우 음식뿐만 아니라 문화예술도 위장을 통한다(Kultur geht durch den Magen) 자기 아들 태변을 한국산 종이에 포장 후 2년 동안 땅에 묻었다. 배내똥은 발효, 숙성되었으며 작품으로 승화해 이번 전시에서도 볼 수 있다. 코디의 작품세계 저변에는 심리학, 철학이 깔려있다. 지그문드 프로이트, 프리드리히 니체, 마르틴 하이데거 같은 서양 석학들의 명제를 중앙 유럽적 시각이 아닌 외각에서 관찰하는 그의 관점은 매우 흥미롭다. 가령 화장지가 기본 재료인 <The Thinker>, 펩토비스몰을 들고 있는 <Golden boy poster> 등을 들을 수 있다. 탈식민주의 이론과 문화의 차이와 정체성에 대하여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마이크 켈리와 생각을 공유하게 된다. 코디에게 마이크 켈리는 멘토이자 친구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이크 켈리 또한 뒤셀도르프에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코디는 마이크 켈리 작품과 공통점이 많다.
독일 현지 전시 반응은 어떤가?
언론 측 반응은 상당히 좋다. 코디 최는 독일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가다. 이 전시를 계기로 코디 최를 많이 알리고 싶다. 좋은 기사도 제법 많이 나오고 관람객들은 개념예술과 유머, 진실 등이 함축된 전시를 재밌어한다.
뒤셀도르프=최정미 통신원

DSC02566 jm그레고르 얀젠 쿤스트할레 뒤셀도르프 관장
그레고르 얀젠(Gregor Jansen, 1965)은 독일의 미술사가이자 큐레이터이다. RWTH 아헨에서 미술사, 건축사와 철학을 전공했으며 오이겐 쉐네벡(Eugen Schonebeck)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카를 스루에 시 Museum fur Neue Kunst의 관장으로 재직했다. 1998년에 한국, 일본 단체전 <Continental Shift>를 독일, 벨기에 등지에 소개하기도 했다. 2002년에는 <미디어시티 서울> 공동 큐레이터였다. 2010년부터 쿤스트 할레 뒤셀도르프의 관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CRITIC 신지도제작자

송원아트센터 8.5~26

채은영 독립큐레이터

현대미술에서 공간과 장소성에 관한 작업은 인간과 자연을 소재로 한 것만큼 흔하다. 도시 일상 공간의 규범과 제도를 일탈하고 표류하는 심리지도 방법론은 다른 장소성으로 우리의 실재를 재배치하며 재인식하는 데 유용하기 때문이다. <신지도제작자(New Cartographers)>는 이러한 방법론에 근거해 비가시적 영역과 관계들을 14명의 작가, 디자이너가 심리적 개인적 조형 방법론에 따라 가시적 매핑으로 엮은 전시다.
1층에는 세밀한 드로잉으로 여러 도시 지도를 중첩하여 새로운 지도를 만들고, 1880년에서 1960년대 세계지도를 재구성해 드로잉을 만든 줄리앙 코와네, 에코 세대의 통계를 다이어그램으로 보여준 옵티컬레이스(박재현, 김형재), 2차원의 지도를 잘라내 3차원 공간으로 만든 임선이, 도시의 공감각적 풍경을 소리지형도로 선보인 백정기, 정치사회경제 시스템을 매핑하는 카토그래피 작업을 하는 부로 데튜드, 사회의 불안, 공포 등의 흔적과 드로잉을 만든 유창창이 신지도 제작자로 소개된다. 1층 일부와 지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는 서구의 당대 사회와 욕망을 보여주는 옛지도와 관련 서적들이 지도 아카이브로 소개된다.
지하층에는 자신의 일상적 공간 기록을 지도로 만든 김정은, 한강을 따라 수집한 개인의 물건과 사연을 보여준 자우녕, 근현대 서울의 도시 변천사를 슬라이드 프로젝트로 보여준 전진열+안창모, 구룡마을과 송도신도시 등 여러 지역을 GPS로 찾아 만보객이 되어 읖조리는 비디오프로젝션을 선보인 린다 하벤슈타인, 자전거 공유시스템 데이터를 기반으로 매핑하는 심규하, 오래된 골목길의 색들을 색면들로 재구성한 김태현, 도시 공간의 자연-인공 사이 관계성을 설치와 드로잉으로 보여준 심윤선이 신지도제작자다.
전시는 작가, 디자이너, 도시 연구가들의 드로잉, 회화, 사진, 비디오, 사운드, 설치, 다이어그램 등 다양한 형태로 구성됐는데, 이점에서 작가 리서치를 폭넓게 한 기획자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기획자는 이렇듯 다양한 방법으로 기존 지도가 우리에게 강요했던 세계와 삶에 대한 인식틀을 벗어나, 우리가 알고 이해해야 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여주려 한다. 그리하여 삶정치를 회복하는 새로운 장소성을 위한 희망의 공간을 구축해가는 신지도제작자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앞서 이야기했듯 도시 일상 공간에 관련된 적잖은 작업과 전시가 심리지도 방법론의 만보객을 표피적으로 동어반복하며 일상성에 기대거나, 여러 방법론의 종합선물세트식 전시 구성에 기댄다면, 이번 전시는 그러한 전형성을 갖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무엇보다 비가시적 영역을 가시적으로 매핑하는 것보다 매핑의 과정을 통해 다른 맵을 만드는 지도제작자들에 주목한 것은 공간과 장소성에 대한 다른 관점을 제시하기 위해서다.
지도 제작자인 작가, 디자이너, 도시 연구가를 내세운 기획의 관점에 대한 기대에 비해 실제 전시는 왜 신지도제작자에 무게 중심을 두었는지에 대한 핵심 근거가 약간 모호하다. 다양한 제작자들이 각각의 방법론으로 다른 가시성의 지도를 제작하는 것은 개인적이고 심리적 방법론에 작업을 하는 예술가들에 있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제작자들을 내세운 기획의 킥이 구체적이지 않아 14명(팀)의 신지도제작자 사이의 관계와 매핑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생각해야 했는데, 최근 신지도제작자들의 유행(?)에 대한 기획자의 배경 설명이 있었다면 기획의 결이 좀 더 섬세하지 않았을까. 미술 쪽 작가와 달리, 디자이너와 도시 연구가의 참여 혹은 협력도 단순히 구성을 위한 수적 다양성의 방편일 것이라는 비판을 벗어나기 위해선 참여에 대한 기획의 근거가 좀 더 분명해야 한다. 물론 기획의 근거나 킥이 지나치게 현학적이거나 이론적일 필요도 없고 자신의 언어로 설명하면 되는데, ‘왜’라는 질문에 기획의 답이 열려있는 탓에 다소 전형적이거나 모호한 작업들은 기획에 힘을 주기엔 역부족이고, 상대적으로 서구 중심의 세계나 서울 중심적 매핑은 미시 영역을 자본과 제도로 내밀화화는 신자유주의적 상황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전시장의 공간적 제약 탓이겠지만 전시 구성은 언어화된 기획 글과 14개의 새로운 지도 그리고 지도 아카이브들을 물리적 공간에 매핑하기엔 조금 아쉽다. 현재 공간(전시 공간)에 여러 지도와 자료들의 시공간적 매핑들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장소성이 기획의 의도를 경험하게 하는데, 공간 제약과 많은 작가와 작업들을 우선적으로 고려한 배치가 작업들과 제작자들 사이의 관계성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 야심차게 준비했을 지도 아카이브는 1층 작업들 사이에 커다란 지도와 박물관 유리케이스 속 고서들처럼 놓여있고, 1층과 지하층 연결 계단에 아무런 설명없이 아트 포스터처럼 걸려 있어 세계의 가시성을 위한 다른 안내서라기보단, 앤틱한 지도 이미지로 비친다. 최근 여러 전시에서 간과하는 부분인, 외국어에 익숙하지 않은 관람객을 위한 최소한의 번역이나 설명은 공공기금을 받는 전시나 프로젝트에서 최대한 소통을 위한 시작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여 년간 상업갤러리에서 일한 기획자가 독립 큐레이터로서 공공 영역에서 여는 본격적 전시라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적잖은 기획자가 물리적인 자기 공간의 힘을 받아 이력과 네트워크를 쌓거나, 일반인이 공무원 시험에 붙거나 대기업 취직을 원하듯 공공기관에서 자본과 제도의 기반을 얻고자 한다. 그런 이유인지, 최근 기획전시는 공공미술관과 거대 상업갤러리의 기획전 그리고 정책적 의도와 자생적 시도가 맞물린 미술시장 관련 행사로 집중된다. 소규모 공간의 전시는 파편화와 자기복제 그리고 다른 공동체적 연대 속에 있다면, 자기 공간이 없이 재원 조성을 위한 시도를 통해 자본과 제도적 긴장을 조율하며 예술 기획을 하는 독립 큐레이터들을 만나기가 더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이것은 기획자 개인 의지나 욕망에 빗대어 탓할 현상은 아니다. 그보다는 이미 우리 미술계도 자본과 제도의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창작기획자들 그리고 공간들의 각자도생 속에 미술의 삶정치성 회복에 대한 기대를 갖기 힘든 탓이다. 이런 제도적 상황에서 건강한 자기조직화를 시도하며 자본과 제도 사이를, 중앙과 지역 사이를 넘나드는 독립 큐레이터들이 지치지 않고 오래 버틴다는 것이 심신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래서 전시에 대한 아쉬움은 다음 행보를 위한 조언의 의미이며, 전시를 준비하고 기획하고 진행하며 노력과 열정을 보여준 기획자에게 미술이 다른 희망의 공간을 안내하는 지도로써 의미를 회복하는 데 자산이 될 것이라 격려의 말과 함께 응원을 보낸다.

위 심윤선 <Constructed Island> 혼합재료 가변설치 2014

CRITIC p.2(전소정&안정주) 장미로 엮은 이 왕관

아뜰리에 에르메스 6.25~8.23

안경화 백남준아트센터 학예실장

안정주와 전소정의 공동 작업으로 구성된 <장미로 엮은 이 왕관전>은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한 작가와, 그녀의 일상을 촬영한 영상을 예술작품으로 만들어가는 두 명의 작가를 교차 편집한 <카메라를 든 여자>로 시작한다. 새로운 작업실을 둘러보고, 흙으로 무언가를 빚고, 카메라를 들고 낯선 도시를 기록하는 그녀의 행위는 “다 자르고 진짜 중요한 것만 남기자”거나 “그녀의 눈 말고 카메라의 눈으로 찍은 풍경들”을 넣자는 작가들의 대화 내용에 따라 갑자기 정지하고, 때로는 다음 장면으로 급격히 전환된다. 서로 간의 의견 교환을 통해 영상을 완성해가는 작가들의 대화와 카메라를 든 작가의 독백에는 안정주와 전소정이 p.2(두 번째 페이지)라는 이름으로 협업하기 이전부터 공유한 예술에 대한 생각이 들어있다. 무엇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하던, 지금보다 젊은 시절의 그들에게 예술작품을 제작하는 일은 “일상에 대한 기록과 수집, 그것들의 변형”이자 “남에게는 하찮지만 지금의 나를 이루는 것들”로 규정되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평가나 인정에 얽매이지 않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찾아”가야 한다고 다짐한 작가들은 두 번째 영상작업 <누드 모델>에서도 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한 고민과 함께 일상과 예술, 주체와 타자, 관습과 혁신 사이를 오가면서 예술에 대해 질문하고 답을 구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누드 모델들은 남녀의 신체적 특성을 과장되게 표현한 누드 옷을 입은 채, 서양미술사에서 미(美)의 기준으로 평가받는 옷을 벗은 인물들의 포즈를 자랑스럽게 모방한다. “아름다움은 꿈에서나 가능”하다고 울적해 하다가 “아름다움은 내 안에 있”다고 흐뭇해하는 누드 모델의 상반된 감정 표현은 지난한 작업 과정 중에서 희비(喜悲)를 오갈 수밖에 없는 예술가들의 숙명을 희화화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천박할 것도, 숭고할 것도 없는” 예술을 업으로 삼고자 노력하는 연습생들에게 감정을 몸짓으로 전달하는 행위(예술작품을 만드는 일)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지 않다. 등장인물들은 모델과 아티스트의 시각을 오가며 예술과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에 대한 각자의 견해를 펼쳐 나간다.
이 전시에 소개된 마지막 영상작품 <소리를 만드는 사람들>은 안정주의 영상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절대적인 존재와 개념에 대한 의문과, 전소정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실제와 허구를 넘나들며 포착한 사소하지만 소중한 삶의 모습이 결합된 작업이다. 전쟁과 재난처럼 인간이 초래한 사건들을 기록한 영상 자료를 기반으로 한 이 작업은 현실의 장면을 보여주는 영상과 그 장면에서 발생하는 소리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작업 과정을 기록한 영상, 그리고 소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춤으로 소개하는 영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극히 주관적으로 선택한 영상과 이와 연결된 춤과 소리는 인과관계를 명확히 밝혀내기 어려운 부조리한 현실을 은유적으로 제시하고, 다양한 시각으로 세상을 읽어내며 이를 다시 뒤집어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예술의 힘을 경험하도록 한다.
전시 제목인 ‘장미로 엮은 이 왕관’은 <누드 모델>의 대사인 동시에 예술가의 지위를 의미한다. 가시의 고통을 견뎌낸 자만이 쓸 수 있는 장미 왕관은 모든 예술가가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p. 2는 앞으로도 개별적으로 또는 협업을 하며 두 손의 모습을 형상화한 을 통해 현실의 이면을 바라보고, 이를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예술로 만들고자 노력할 것이다. 어쩌면 예술가에게는 상을 받거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것보다 이러한 과정 자체가 장미 왕관이 아닐까.

위 왼쪽 p.2 <소리를 만드는 사람들> 3채널 비디오 & 스트레오 사운드 16분 50초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