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ARTIST 김명숙
평소 자신의 개인전에 얼굴조차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한 작가 김명숙. 작가는 오직 작품으로 말한다는 은둔 예술가의 전형인 김명숙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묵묵히 땀을 흘리며 일하는 밀레의 농부그림처럼 그녀의 작품 역시 숱한 노동의 흔적을 드러내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 치열한 작가 정신으로 회화의 깊이를 끝없이 추구하는 그녀의 작품세계를 조용히 들여다본다.
객체라는 불가능한 기획
고충환 미술비평
자살을 하려고 욕실에 들어갔다가 참으로 오랜만에 나를 봤다. 거울 속의 내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던 것. 참으로 오랜만에? 사실 자살을 실행에 옮기기로 마음먹기 훨씬 전부터, 처음으로 자살을 생각하기 훨씬 전부터 나는 나를 보지 못했다. 오랫동안 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렇게 생각에 빠져있는 내내 나는 나를 볼 수가 없었다. 나는 나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마도 보려고 본 게 아니라, 불현듯 보였을 것이다. 혹 마지막으로 얼굴이나 한번 보는 것으로 삶에 방점을 찍고 싶었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죽는 순간에마저 자기를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작가는 거울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자신을 그렸다. 그리고 그렇게 그린 그림들이 국립현대미술관 <무제전>에 걸렸다. 원래 제목은 <시시포스 공부>였다. 그리고 금세 그림이 시시포스에 못 미친다는 생각에 제목을 정하지 못한 채 둔 것이 그대로 무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림이 시시포스에 못 미친다? 그렇다면 작가는 시시포스가 뭘 의미하는지, 그 의미가 요구하는 기준이 뭔지 알고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시시포스는 산꼭대기까지 돌을 굴려 올리는 천형을 받았다. 만약 시시포스가 천형을 거부한다면 무슨 일이 생기는가. 철저하게 무용한, 무익한, 무의미한 노동이야말로 삶의 유일한 의미이며, 그 노동을 통해서만 삶이 유의미해질 수 있다는(적어도 노동을 하는 순간에만큼은 삶의 의미를 잊을 수 있다는) 아이러니한 현실을 사람들에게 주지시키는 일이 물 건너가고 만다. 그렇게 물 건너가면 사람들은 여전히 노동이 삶에 의미를 가져다줄 수 있으리라는 착각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게 될 것이다(신성한 노동신화는 청교도주의와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일 수 있다). 철저하게 무용한, 무익한, 무의미한 것이야말로 노동의 본질이다. 그럼에도 노동을 통해서만 삶이 유의미해질 수 있다. 그래도 삶은 의미가 있다는, 아니 삶은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시시포스 신화가 주는 교훈은 이처럼 무용하고 무익하고 무의미한 노동이라는 천형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비극에 있고, 그럼에도 결코 삶의 의미는 주어지지 않는다는(혹 처음부터 삶에 의미 같은 것은 없었다는), 어쩜 이보다 더 궁극적인 비극에 있다.
그 비극에서 비장미가 유래한다. 비록 실패한 혹은 포기한 혹은 극적으로 구출된, 자살 직전에 그린, 자살에 이르기까지 밀어붙여진 것들이 응축된, 아마도 강도로 치자면 정점에 해당할, 어떤 비장미가 작가의 그림에서 느껴지는가. 이 비장미는 숭고의 감정과 통한다. 나의 감정의 용량을 초과하는 것에 맞닥뜨릴 때 오는 감정이다. 그러므로 숭고는 어쩜 나의 감정이 아니고, 나에게 속한 감정이 아니다. 그래서 낯설고 이질적이고 두렵고, 미지의 세계를 어쩜 비의를 슬쩍 엿본 것 같은 호기심과 감각적 쾌감을 동반한다. 그렇게 작가는 호기심과 감각적 쾌감을 동반하는, 낯설고 이질적이고 두려운 것들을 그린다. 그게 뭔가. 거울 속에서 자기를 응시하는 자기와 같은, 바로 그 자기를 그린다. 그래서 내면풍경이고, 심연에로의 하강이며, 미노타우루스이며, 심장이고, 레퀴엠이다. 하나같이 영적 세계(아니면 존재론적 조건 혹은 한계상황)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내면이 그렇고 심연이 그렇고 미로(미노타우루스가 미로 속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로 치자면 자기내면 말고는 없다)가 그렇고 심장이 그렇고 진혼(죽음에 바치는 오마주)이 그렇다.
그렇게 작가는 영적 존재들과 더불어 산다. 청주 산막리에 있는 아랫마을과 윗마을을 오가며 작업실을 차렸는데, 아랫마을에 있을 때는 오랫동안 비어있던 소 외양간을 개조한 작업실에 살았다. 실제로는 비어있었지만 작업실에 있는 내내 작가는 서성이는 소들과 더불어 살았고, 그 소들을 그렸다(<미노타우루스 공부>). 바로 옆 농원에는 알래스카 숫사슴이 있었는데, 곧잘 소나무 가지처럼 웃자란 뿔이 잘려나간 빈 마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작가는 작업실 내내 그 숫사슴과 절망을 함께했다. 흔한 말로 상상력의 비약이나 수사적 표현 운운하겠지만, 작가의 경우에는 실제로 그랬다. 수사적 표현으로 치자면, 작가는 타자의 상처에 감정이입하는, 타자의 절망을 자기의 절망으로 동일시하는 탁월한, 천부적인, 그리고 무엇보다도 따뜻한 심성을 타고났고, 그 심성으로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윗마을로 작업실을 옮긴 지 한참 지나서, 그 터를 자기에게 팔고 서울 아들네로 이사 간 할머니가 자살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할머니의 영정을 그렸다(레퀴엠). 할머니의 그리움이 조금이라도 해소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영정이라고 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작가의 작업실을 찾은 날, 비도 내리고 습했다. 그래서 그런지 작업실 안쪽 벽면 여기저기에 붙여둔 자료들이 모조리 영정처럼 보였다. 알 만한 사람으로 치자면 니체가 있었던 것 같고, 이외에 이러저런 사람들의 초상이며 기사가 있었던 것 같다. 작가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미친 사람 아니면 눈먼 사람도 있었다. 아마도 죽은 사람들일 것이다. 자기 생각에 빠져 있는 사람, 아니면 감각이 고도로 발달한(혹은 감각마비로 인해 오히려 예민한 내면을 갖게 된) 사람들일 수도 있겠다.
그 초상이며 기사들은 하나같이 빛바래고 곰팡내 나는 고문서를 연상시켰고, 먼지와 시간, 빛과 어둠을 재료로 빚어진 영적 존재를 환기시켰다. 그렇게 그들은 미처 그림으로 옮겨지기도 전에 이미 살아있는 것 같았고, 작가는 바로 그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그렸다.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 자기의 자기다움이, 하이데거 식으론 존재의 존재다움이 오롯해지는 느낌? 그 느낌의 대상 혹은 실체는 알고 보면 내면이 외화된 것이어서 감각적 닮은꼴을 넘어서고, 일관된 서사를 넘어서고, 논리의 지향 내지 정향성을 넘어선다. 그래서 작가의 그림은 구축되고 있는 재현으로서보다는 해체되고 있는 재현을 보는 것 같고, 특정의 서사를 지목하기보다는 상호간 이질적이고 무분별한 서사의 다발들을 불러들인다. 어쩌면 작가는 존재란 이처럼 이질적이고 무분별한 서사 다발들의 총체라고 보고, 그걸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참다운 존재다움을 찾아서
그렇게 그려진 작가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 의미가 고정된 결정적인 지점으로서보다는 어떤 과정이 느껴지고, 여기서 저기로의 이행이 느껴지고, 정적인 가운데 모종의 불안감이며 불온성을 응축하고 있는 것 같은 긴장감이 감지된다. 불온성? 문명이 변방으로 밀어낸 것들, 이를테면 이성의 관점에서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것들, 경제의 관점에서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인 것들, 에너지의 관점에서 활성과 위험(어쩜 무분별한 생명력?)을 잠재하고 있는 것들, 자연성과 본성, 야성과 야생, 제의와 비의 같은 존재의 원형에 해당하는 것들이 자기를 주장하는 기운이다. 여전히 문명화되지 않은 채 살아남은 숲이 품고 있는 기운이다. 그래서 작가의 그림엔 유독 나무가 많고 숲이 많다. 바로 순례자를 문명화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의미화 이전의 다의적이고 다성적인 원초적 소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무는 숲이다.
그렇게 작가는 사람을 그리고 나무를 그리고 숲을 그리고 동물들을 그린다. 그리고 그렇게 존재를 그리고 사물대상을 그리면서 사실은 외피를 벗겨낸다.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을 벗겨낸다. 무분별하게 흘러내리다 멈춘 물감자국이며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비정형의 얼룩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물대상의 형태를 정의하면서 해체하는 무수한 세선이 바로 이처럼 그리면서 벗겨내는 과정에서 유래한 형식논리를 증언해준다. 벗겨낸다? 그건, 부정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그래서 아닌 것을 벗겨내다 보면 뭐가 보이고 무엇에 이르는가. 자기로 치자면 진아(眞我)가 보이고 진아에 이른다. 존재로 치자면 존재의 존재다움이 보이고 존재의 존재다움에 이른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진아며 존재다움이 거하는 공간으로 치자면 내면 말고는 없다. 그리고 피상적으로만 봐도 외면(혹은 외피)을 벗겨야 내면을 볼 수도 내면에 이를 수도 있을 일이 아닌가. 그렇게 작가는 사물대상과 관련한 고정된 지점들, 이를테면 선입견과 편견, 합리와 상식의 외피를 벗겨낸다. 그리고 감각적 닮은꼴의 외피마저도. 그리고 그렇게 벗겨내다 보면 실제로 내면을 볼 수도 내면에 이를 수도 있는가. 그러나 알다시피 내면은 내면일 뿐, 형태도 색깔도 없다. 다만 공과 허와 무와 적(절대고요)이 있을 뿐. 아니면 온갖 헛된 망상의 아수라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경우이건 그것들은 여하튼 알고 보면 모조리 나에게서 건너간 것이고, 내 쪽에서 이입된 것들이다(色卽示空 空卽示色). 그렇게 작가는 타자를 그리면서 사실은 자기를 그리고 있었다. 어쩌면 주체와 객체가 한 몸인, 상호 연장된 우주적 살(메를로 퐁티)을 그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객체라고 하는 불가능한 기획을 그리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
김 명 숙 Kim Myungsook
1955년 태어났다. 이화여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88년 미국 휴스턴 시립대 미술대학원을 수료했다. 사비나미술관, 금호미술관, 스페이스 몸 등에서 17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서울, 베를린, 시카고 등지에서 열린 그룹전에 참여했다. 현재 청주에 거주하며 작업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