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자본주의-신자유주의 그리고 예술의 딜레마

헬조선의 예술가

박은선 작가, 리슨투더시티 멤버

동료 작가들을 만나면 다들 밥은 어떻게 먹고 사는지가 초미의 관심사이다. 아르바이트는 무엇을 해야하는지, 월세는 얼마 내는지, 어느 동네의 작업실 임대료가 가장 싼지, 이제 생존 자체가 어떤 작업을 할지보다 더 큰 문제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미술계가 비교적 호황이었다는 10년 전쯤에도 나는 가난했고, 아마 앞으로 10년 후에도 가난하게 살 개연이 높다.
아무리 경제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리슨투더시티 활동을 한다면 아마 10년 후에도 나는 여전히 가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술가, 디자이너 모임인 리슨투더시티는 보통 구체적인 사회문제들을 다루고 그것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 자체를 예술로 생각하기 때문에 결과물이 팔 수 있는 물질적 형태로 나온 적이 거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작업 방법을 바꾸어야 하는 것일까?

신자유주의와 예술주체
2008년 이전 한창 미술품이 잘 팔리던 시절이 있었다. 소위 블루칩 작가들의 작품은 주식과 같이 여겨졌고,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그러나 이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로 경기가 침체됨에 따라 예술품 경기도 거품이 빠지기 시작했다. 심상용은 《아트버블》(2016)에서 ‘결국 사람들은 시장이 예술화될 것이라 기대했으나 결국 예술의 시장화로 결말났다’고 말한다. 미술시장의 활기는 예전 같지 않지만 여전히 아트바젤(Art Basel)과 같은 주요 아트페어와 경매는 전 세계 미술시장과 예술에서 ‘가치’를 가늠하는 거의 절대적인 척도가 되었다. 바젤이 만들어내는 가격=가치의 등식이 이제는 고착되어 상관관계의 고리를 쉽게 끊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는 그 세계적 가격=가치체계에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그 세계에 편입되기 위해 갤러리나 작가들이 해외 아트페어에 활발히 참여 할 수 있게 돕는 길을 선택했다. 2015년부터 “미술품 해외시장 개척지원 사업”을 시작했는데, 이는 곧 미술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는 극소수의 작가를 배양하기 위해 많은 돈을 쓰기 시작한 셈이다.
그런데 가격이 곧 가치가 되는 문제는 비단 오늘의 일만은 아니거니와 자본주의 초기부터 늘 문제되던 가치체계이다. 특히 신자유주의의 특징은 모든 사회적 관계마저 자본으로 인식한다는 점에 있다. 인간의 고유한 가치라고 생각했던 가족관계마저 미국 사회학자들은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으로 치환한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모든 비물질적인 것을 경제로 환원시키는 것이 미국식 신자유주의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푸코는 《생명 관리 장치의 탄생》에서 신자유주의와 자유주의의 차이점을 짚어냈다. “생명정치(Vitalpoitik)는 각 개인이 다름 아닌 기업의 형식을 가진 골격을 구성하는 것이다.”
즉 신자유주의는 인간을 시장이라는 게임에 참여할 수 있는 하나의 기업(enterprise)적 주체로 만드는 셈이다. 경쟁이 내재된 개인들의 집합, 그것이 신자유주의 사회의 본질이다. 예술가도 예외일수는 없다. 미술가가 하나의 기업체적 주체가 되어 스스로를 시장에서 관리하려는 행위는 전혀 어색한 일이 아니며, 아트바젤에서 고가로 작품을 판매할 수 있는 작가들은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의 적통자가 되는 셈이다. 문제는 그 적통자는 1% 미만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우리 예술 교육과 정책은 왜 늘 1%만을 장려하는가? 예술 정책은 1%의 스타 작가군을 2~3%로 늘리자가 아니라, 99%가 각기 다른 가치를 실험하고 상상하는 행위를 보조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한 사회의 예술가들이 단일한 가치를 상상할 때 그 예술계는 부패한다(1950년대 이후 소비에트미술을 보라). 그러한 장면들을 미술에서 수없이 보았다. 우리나라 예술가들이 가난한 것은 기본 복지 시스템이 엉망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정적 원인은 해외 아트페어에서 팔릴 법한 작품들로 미술계의 취향을 단일화하는 데 있다. 권력 기관의 취향에 대해 질문하고, 다른 형식과 통치방법을 상상하는 일이 그나마 헬조선에서 예술가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아닐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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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시대 미술계 핫이슈

“예술의 가치가 사라진 시대”

지난 3월 3일 문화체육관광부가 3년마다 시행하는 ‘문화예술인 실태조사’ 2015년 결과를 발표했다. 자료에 따르면 미술 분야 응답자 총 39,393명 가운데 창작 활동으로 벌어들인 수입이 전혀 없는 경우가 54.4%, 혹은 있다 하더라도 연 500만원 미만인 경우가 15%에 달해 지난 1년간 예술활동 평균 수입이 614만 원에 불과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를 월 평균으로 환산하면 약 50만 원 정도로 2015년 기준 1인가구 한 달 최저생계비 61만7,281원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또한 예술 경력이 단절되는 사유로 56.4%가 예술활동 수입 부족을 꼽았다. 이처럼 미술계에서는 현재 부업 없이 창작활동만으로는 기본적인 생계를 꾸려나가기 힘들 정도로 작가들의 생활이 어려운 실정이다.
사실 이 실태 조사는 조사 대상이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예술활동증명을 신청한 예술인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사업 수혜 예술인, 문화예술 관련 협회·단체 회원으로 가입된 예술인으로 한정되어 미술계 실태 전체를 정확하게 반영한다고 보기 어렵다. 더욱이 이 조사는 구조적인 문제상 예술가가 왜 빈곤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본질적인 원인을 규명하기보다 예술가 개인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는 차원에서 한계가 있다.(물론 미술 생태계를 파악할 수 있는 하나의 지표가 되는 표본조사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을 것이다.)
최근 몇 년 전부터 예술가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창작활동을 증진시키기 위해 예술가를 위한 복지 정책의 중요성이 끊임없이 부각되었으며, 이와 관련해 시각예술분야 표준계약서를 비롯해 아티스트 피 관련 이슈들이 화두가 되었다. 이에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국문화관광연구원에 연구용역을 의뢰해 2015년 시각예술 분야의 매매, 전시, 대여, 신작 제작 등 5종의 표준계약서(안)를 개발했으며, 지난해 12월 공개 토론회를 통해 시각예술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수정 보완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올 상반기 공정거래위원회 협의를 거쳐서 최종 확정하고 이후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을 통해서 홍보, 보급할 예정이다. 이와는 별개로 오는 5월부터 개정 예술인복지법이 발표되면서 문화ㆍ예술활동과 관련된 계약의 당사자는 서면계약 체결이 의무화된다. 법 시행일에 맞춰 예술인복지법 시행령 개정을 준비 중이다. 여기에는 실효성 담보를 위해 과태료 부과 등의 제재 사항이 포함되어 있다.
아티스트 피의 경우 2014년 12월 아티스트 피 연구 및 개발을 위한 착수보고회가 열렸고, 지난해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을 통해 국내외 실태 및 현황 관련 연구보고서가 발간된 상태다. 현재 현장의 의견 수렴을 거치는 과정에 있으며, 올해 국립현대미술관과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와 201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창작산실 공모사업’ 중 전시지원, 공간지원에 시범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아티스트 피와 표준계약서는 예술가의 창작 행위 자체에 대한 보상과 예술가의 권익 보호를 위해 꼭 필요한 제도지만 이러한 제도적 정착이 오히려 제약이 될 뿐 아니라 예술에 대한 미학적 사회학적 논의 없이 권리와 의무로만 다뤄진다면 부작용이 클 것이라는 미술계 내부의 우려가 있다. 관련 전문가들도 이 같은 제도 정착은 10년 이상 장기적으로 봐야 할 일이기 때문에 단숨에 해결 가능한 문제는 아니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한편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 안에서 ‘지성의 산실’을 추구하던 대학은 원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경쟁과 수치적 목표를 최우선으로 삼는 취업 준비장이 되어버렸다. 몇 년 전 정부의 대학평가(부실대학 선정) 및 구조조정에서 부실대학 선정 낙인이 뜨거운 감자로 불거진 데 이어 지난해부터 정부는 학사 구조를 대규모로 개편하고 정원을 조정하면 각 학교당 최대 300억 원을 3년간 지원하는 ‘프라임사업(산업연계 교육활성화 선도대학 사업)’을 밀어붙이고 있다. 그리고 이에 맞서 반대 여론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프라임 사업의 본질은 취업 시장에서 ‘먹히는’ 학과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경쟁력이 낮은 학과, 비인기 학과가 통폐합 대상이 되고 있는데 특히, 취업률이 저조한 예술관련 학과와 인문관련 학과가 제1순위로 거론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중앙대, 동의대 등은 프라임 사업에 선정되기 위해 예술대학을 포함한 일부 학과의 통폐합 구조 개편을 추진하기로 발표했으며, 몇몇 대학에서는 폐과를 검토했다가 학생들의 반대에 부딪혀 철회를 표명하기도 했다.
대학구조조정 (2)이에 맞서 해당 학과 학생들을 비롯해 대학연합 학생 단체 측은 “대학은 기업의 하청업체가 아니다” 등의 문구를 내걸고 대규모 반대 시위를 진행했다. 문제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정부가 청년세대의 저조한 취업률 문제를 사회 구조적인 차원에서 근원적으로 해결하기보다 기존 대학 교육의 문제로 떠넘기는 식 정책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대학 또한 일단 재정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지원금을 받기 위해 교직원 및 학생들과 제대로 된 소통 없이 학과 통폐합을 일방적으로 결정해 학생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이슬비 기자

SPECIAL FEATURE 자본주의-신자유주의 그리고 예술의 딜레마

전복하지 않는 싸움: 신자유주의 시대의 예술가들

안소현 독립 큐레이터

최근 예술인복지법, 작가 사례비, 표준계약서 문제 등을 둘러싸고 본격화된 예술과 노동, 경제적 가치에 관한 논의들은 미술계 안팎의 여러 균열을 드러냈는데, 그중에는 젊은 예술인들과 그들을 우려하는 예술인들(문제가 없진 않지만 편의상 기성 예술인이라고 부르겠다) 사이의 논란도 있었다. 예술인들이 기관들과 견해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야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지만 생존과 관련하여 예술인들 사이에서 불거진 이런 ‘세대갈등’은 약간 의외였다. 물론 기성 예술인 중에도 작가 사례비나 계약제도의 정착을 주장해온 경우가 있기에 이런 이원적 구분을 일반화할 수는 없고,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이 대부분 기성세대이다 보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때로 젊은 작가들의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온 선배 작가들이나 이론가들에게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는데, 그것은 바로 젊은 예술가들이 자본 혹은 자본주의를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지적이었다.
기성 예술인에게 “미술생산자”나 “예술노동”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형용모순이었다. 그것은 생활인으로서는 자본주의를 벗어날 수 없고 예술시장에서 자유롭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예술이라는 행위는 생산이나 노동 같은 경제적 개념과 분리되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반면 요즘의 젊은 예술가들은 예술을 엄연히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전개되는 활동으로 보고 오히려 경제활동과 적극적으로 연결시키려 하였다. 작가 사례비를 요구하고, 예술노동자가 될 것을 자처하며, 미술시장에 진입하고 싶다는 욕구를 작업에서 공공연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이런 변화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단순히 자본에 대한 인식의 부족일까, 아니면 그들이 근본적 가치관의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어떤 환경에 속해 있는 것일까?
아주 넓은 의미에서 자본주의의 일반적 이미지는 확실히 달라진 것 같다. 기성 예술인들에게 자본주의는 제어할 수 없는 탐욕, 무한 축적의 관성, 수시로 축적의 전략을 바꾸는 용의주도함, 자기 파멸을 향해 치닫는 모순 등 하나의 ‘괴물’로 묘사되곤 했다. 1990년대 초 국가체제로서의 사회주의가 무너진 이후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젊은 예술가들은 체제를 선택하거나 정당화하는 문제를 특별히 고민하지 않으며, 기성세대의 그런 태도를 낡은 것으로 생각하고, 공기처럼 당연해진 자본주의에 대해 특별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지 않는 경우가 많다. 더 나아가 이들은 기성 예술가들 역시 생계를 유지해왔고 오히려 자신들보다 쉽게 미술시장에 진입하였기 때문에 기성세대의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이 ‘고상한 척하는 위선’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런 변화는 근본적으로 젊은 예술가들이 기성세대가 겪은 자본주의와는 ‘다른’ 자본주의의 시대를 살아내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런 변화들은 작가 사례비에 관한 공개토론이나 예술노동을 주제로 한 전시, 그리고 SNS 논쟁 등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났는데, 가장 두드러진 징후는 역시 <굿-즈 2015>(이하 <굿-즈>)였다.
이 행사는 통칭 “신생공간”을 중심으로 젊은 작가들이 저렴한 작품을 제작하여 판매하도록 기획된 자리였는데, 모든 참여자가 자본주의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가졌다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현대미술 장터를 연다는 말에 펄쩍 뛰며 걱정부터 하거나 혀를 끌끌 차는 세대와는 분명 다른 가치관을 보여주었다. <굿-즈>에는 일반적인 미술시장에서 보기 힘든 작품/상품들이 등장했다. 포장에 사진작품을 프린트한 휴지, 페트병을 잘라 만든 나무, 원하는 대로 잘라 파는 그림, 관객에게 구걸을 하는 걸인 퍼포먼스 등이 그것이었다. 사람들은 예술작품의 희소성이나 물질적 지속성은 물론 디자인의 유용성과도 거리가 먼 이런 작품들을 즐기고 또 구매했다. 심지어 기본적인 시장 질서를 비웃듯 거지는 1000원짜리 휴지를 가져와 구겨놓고 두 배의 가격에 팔았고, 또 다른 작가는 그것을 가져다 더 큰 이윤을 남기고 팔았다. 다시 말해 이들의 동력은 주로 기존 미술시장의 속성을 거스르는 재미와 관련이 있었다. 그래서 이 행사는 기존 미술시장의 높은 장벽에 대한 풍자로도 읽히고, 또 대안적 미술시장의 모델로도 읽혔다. 그 결과 비록 각 개인에게 큰 경제적 이익을 남긴 것은 아니지만 작가들은 관객들에게 자신의 색깔을 각인시키며 상징자본을 얻었고 관객들은 그들의 ‘엉뚱함’을 즐기거나 소유하기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했다.
그런데 젊은 예술가와 관객들의 일견 순수해 보이는, 다시 말해 자본친화적이긴 하지만 기존 미술시장에 저항하는 위와 같은 태도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볼 수도 있는데, 그것을 신자유주의의 인지자본이라는 맥락 안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1978년과 79년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연에서 신자유주의는 국가로부터 보호받는 주체가 아니라 스스로 ‘경영’하는 주체인 호모에코노미쿠스를 등장시켰다고 했다(《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신자유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어온 자본주의가 최근 들어 취한 축적의 한 전략인데, 국가가 시장의 움직임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이 자신이 능력, 기술 등을 스스로 관리하고 경영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을 인적자본 혹은 인지자본이라 하는데, 그것은 마르크스가 고려한 노동시간으로 환산 가능한 노동력과는 달리 지식, 정보, 상징 등 복합적이고 질적인 노동과 관계된다. 인적자본체제에서 (1)노동생산물은 비물질적이며, (2)노동생산물은 노동 과정과 분리되지 않으며, (3)각 개인이 기업처럼 자기계발을 통해 경쟁하며, 그에 따라 (4)자본 역시 비물질적이고 상징적인 형태를 띤다. 이러한 인적자본의 성격들은 <굿-즈>에서 만족을 준 요소와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 관객들은 비물질적인 퍼포먼스를 구매하고, 작품을 자르고 나누는 과정을 즐기면서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조각들을 구입하며, 작가들은 각자의 개성으로 약간의 판매 수익과 더불어 이름을 알린다.
물론 이것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등장한 모든 노동에 해당하는 성격이지만 오늘날의 예술만큼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도 없으며, 예술가들이 도시 젠트리피케이션의 첨병이 되는 상황이야말로 이 현실을 고스란히 압축한다. 때문에 인적자본론에서는 신자유주의가 예술을 비롯한 비물질노동을 모델로 삼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마우리치오 라자라토 같은 학자들은 예술이 비물질노동의 폐단에서 벗어날 원동력을 가지고 있다고 반박하긴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예술을 상품화하고 상품은 예술화한다는 비판은 하나의 정설이 되었고, 디자인 시장의 전례없는 팽창과 상품화된 예술의 전형인 ‘굿즈’의 유행은 그런 주장들을 부인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리고 원하든 원치 않든 예술가들은 그런 시스템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젊은 예술가들의 생존 전략
젊은 예술가들의 이런 태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기존의 미술시장에 대안을 제시하려 하지만 오히려 더 힘들어진 자본주의의 형태, 즉 신자유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상징자본에 매달리며 끊임없이 스스로 생존전략을 세워야 하는 상황에 대해 비판해야 할까? 그들이 추구하는 당장의 재미와 만족이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매서운 각성을 유도해야 할까? 그러나 자본주의를 벗어나면 어떤 대안이 가능한 지 제시하지도 않으면서 무작정 자본주의에서 벗어나 혁명을 일으키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젊은이들이 자본주의를 전복할 생각은 안하고 자기 행복만 추구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어느 쪽도 대안이 못된다. 정치철학자 조정환은 아방가르드 예술의 “모든 사람은 예술가다”라는 주장이 인지자본주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인정하지만 예술이 신자유주의의 잔혹한 경쟁 시스템에서 벗어나게 할 동력을 가지고 있다고 굳게 믿으며, 그 힘을 푸코가 말한 “자기 배려(souci de soi)” 개념에서 찾는다. (조정환, 《예술인간의 탄생》, 갈무리, 2015). 푸코의 자기 배려란 개인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기계발에 매달리거나 외부의 기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규칙을 만드는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상태이다. 조정환은 이러한 자기 배려의 상태를 위한 예술가 공동체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삶의 태도는 구체적인 대안이나 생존전략이 되기에는 여전히 너무 포괄적이고 이상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젊은 예술가들이 자본주의 내부에서 추구하는 가벼운 재미와 만족은 거센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아무런 자발적 동력 없이 떠내려감으로써 얻은 것은 아니다. 최근 들어 급격히 늘어난 신생공간이나 <굿-즈> 같은 움직임은 이미 어느 정도 취향과 정서를 공유하는 집단을 중심으로 조직된 것이었기 때문에 작가들은 수요자들의 성향과 만족의 지점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 구도에 놓인 개인의 위험을 줄일 수 있는 집단적 대안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신자유주의 연구자들이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예외 없이 모든 삶에 적용되며 삶 전반을 바꾸어놓을 만큼 강력한 자본주의의 전략이라는 점, 또한 젊은이들의 고달픈 삶이 반드시 자신의 노력 부족에 의한 것이 아니며, 그런 경쟁이 역사적으로 언제나 당연했던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사실에 대한 인식은 그 자체로 예술을 둘러싼 많은 착각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신자유주의 미술시장에서 성공한 작가가 모두 상업적 성공을 목표로 예술성을 포기했던 것은 아니며, 예술의 상품화가 극단화되면 전통적 작품의 속성(물질성, 지속성 등)과 멀어진 작품이 오히려 더 높은 가격에 판매될 수도 있다. 반대로 미술시장에서 성공한 작가들은 반드시 높은 예술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 다만 신자유주의 시장의 속성을 재빨리 간파하여 그에 맞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작품을 공장처럼 ‘생산’했을 수도 있다. 그들은 아마도 놀라운 자기계발과 소통 능력을 지니고 스스로 그 경쟁 시스템에서 살아남도록 노력했겠지만, 시스템의 본성상 그들은 극소수일 수밖에 없다. 간단히 말하면 성공을 위해 일방적으로 예술성을 포기할 필요는 없으며, 죽도록 경쟁하여 살아남는다 해도 그것이 예술성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상업성과 예술성의 이분법을 벗어난 작가들은 그들이 구성한 집단 안에서 서로의 생존을 도와주며 불평등을 벗어나기 위한 전략들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설사 젊은 예술가들이 자본주의의 전략을 날카롭게 파악하거나 신자유주의를 벗어나기 위해 혁명적 시도를 하지 못한다고 해도 각자는 불평등에 대한 구체적인 감각을 가지고 그것과 싸우는 중이다. 우리가 그토록 열광했던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도 말하지 않았던가. 부(富)의 분배는 모든 사람의 관심사이며 다행스럽게도 민주주의는 전문가들의 공화국으로 대체되지 않는다고. 즐겁게 살아남아준 모든 것이 감사한 세월, 젊은 예술가들의 생존감각에 작은 기대를 걸어본다. ●

ARTIST REVIEW 박영숙

092 2003 화폐개혁프로젝트

위 <화폐개혁 프로젝트> 중 <#2 허난설헌> 디지털 프린트 170×120cm 2003 아래 <화폐개혁 프로젝트> 중 <#3 소현세자 부인 강씨>

박영숙은 사진작가라기보다는 오히려 한국의 여성주의 문화운동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런 가운데 올해 5월, 천안 아라리오갤러리에서 박영숙의 대규모 개인전이 열릴 예정이다. 이를 계기로 사진작가로서 박영숙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박영숙의 작품세계를 크게 ‘구성사진’, ‘사진가와 피사체의 관계’, ‘사진의 형식적 특징’이라는 세 측면에서 분석한다.

여성적 사진 찍기-그녀가 그녀를 찍다

문혜진 미술이론

박영숙의 사진과 마주쳤을 때 불현듯 어렴풋한 기억 속 엘렌 식수(Helene cixous)의 글이 떠올랐다. 글쓰기가 어떻게 남성중심주의와 동질의 것일 수밖에 없는지, 그 속에서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이 어떻게 필연적 소외로 이어지는지를 설파한 그 글은 ‘여성적 글쓰기’의 격동적 가능성을 아름답게 노래했다. 지금으로부터 십 수 년 전에 읽은 그 글이 망각의 심연에서 부상한 것은 실상 우연이 아니다. 박영숙이 사진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식수가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무기인 카메라로, 이미지로 실천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전 작업은 ‘여성적 사진 찍기’를 향한 끝없는 탐색이자 구애다. 하지만 여태까지 박영숙의 작업에 대한 이해는 다분히 표면을 훑는 정도에 그친 듯하다. ‘미친년’이라는 센 어감이 저널리즘적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메시지(내용)에 주목해 여성주의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해석되거나 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사진’을 다시 보고자 한다. 사진가가 여성이고 피사체도 여성인 이 사진이 남성의 사진과 어떻게 다른지, 그녀가 그녀를 찍는다는 것이 매체로서 사진의 구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짚어볼 것이다. 다시 말해 이 글은 그녀의 사진이 여성적 사진 찍기를 어떻게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한 추적이다. 지면 관계상 핵심적인 부분만 소략하기로 한다.
구성 사진 다큐멘터리 사진이 대세였던 1960~70년대 한국 사진계의 풍토에서, 박영숙 역시 여느 사진가들처럼 스트레이트 사진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그녀는 보도사진 기자로 오래 일한 전력이 있다.) 그녀의 초기 작업은 별다른 변형을 가하지 않은 흑백 스트레이트 사진으로, 1966년 열린 첫 개인전을 비롯해 각성의 계기가 된 유방암 수술 후의 대표작 <36인의 포트레이트>(1981) 역시 별다른 변형을 가하지 않은 흑백 초상 사진이었다. 하지만 여성주의 의식이 확립되고 문화운동을 본격화한 1990년대 이후 그녀의 사진은 모두 구성 사진(constructed photography)으로 전환된다. 다큐멘터리 사진 및 작가주의 사진의 원칙인 흑백 스트레이트 사진의 퇴조가 작가의 사상적 재탄생과 시기상으로 일치하는 것은 주목해야한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는 스트레이트 사진의 전제는 페미니즘 사진의 이념적 지향과 근본적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젠더나 섹슈얼리티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었음을 강조하는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사진 이미지는 구성된 것이고 작가와 관객은 모두 의미 작용의 생산과 해독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참여자다. 그런 점에서 사진을 ‘세계에 대한 투명한 창’으로 바라보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개념은 여성주의 사진에 부적합하다. 여성주의적 각성 이후 박영숙의 사진이 연출되거나 구성된 사진으로 전회한 것은 표방하는 메시지에 부합하는 사진 형식에 대한 추구로 정합적이자 필연적인 행보였다.
1999년 이후 현재까지 9개의 시리즈로 이어지고 있는 <미친년 프로젝트>는 박영숙의 연출 사진의 다양한 면모가 포괄된 방대한 작업이다. 여기서 만들어진 사진은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인물 및 여타의 사물 이미지를 합성한 포토몽타주와, 인공적 합성 사진은 아니지만 가상의 무대에 특정 상황을 재현한 연출 사진이 그것이다. 전자의 경우 주로 목적이 분명한 외부 전시 출품작인 경우가 많은데, 헤이리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제작한 <헤이리 여신 우매드>(2004)와 돈이라는 주제에 따라 가상의 한국 여성 위인의 화폐 이미지를 구현한 <화폐개혁 프로젝트>(2003)가 대표적이다. 명백히 인위적 구성과 상징이 두드러지는 포토몽타주와 달리, 실내나 야외에서 상황을 재구성하는 연출 사진은 특정 장면을 설정할 뿐 촬영 자체는 조작 없이 이루어진다.
<미친 년 프로젝트>를 대표하는 주요 이미지들이 대개 이 부류에 속하는데, <갇힌 몸 정처 없는 마음>(2002), <오사카와 도쿄의 페미니스트들>(2004), <꽃이 그녀를 흔들다>(2005)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때 연출의 정도는 인위적 연극성이 두드러지는 것부터 일상 속 한 장면 같은 자연스러운 연출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일견 스냅사진 같은 가장 일상적인 사진일지라도 관객은 그것이 연출 사진임을 인지한다. 피사체가 사진 찍힘을 주지하고 있고 나아가 주체적으로 상황을 연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133 2004 Mad Women Tokyo

<미친년 프로젝트> 중 < Feminists in Tokyo #6 >디지털 프린트 120×120cm 2004

139 2005 A flower shakes Her

<미친년 프로젝트> 중 < A Flower Shakes Her #2 > 디지털 프린트 120×120cm 2005

사진가와 피사체의 연대 일반적으로 사진가는 촬영의 절대적 권력자다. 사진기를 총에 비유한 수전 손택의 유명한 말이 아니더라도, 피사체는 찍히는 대상이요 사진가는 찍는 자라는 엄연한 구분은 촬영의 역학을 지배한다. 박영숙의 사진이 남성 사진가들의 사진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곳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녀의 촬영에서 인물들은 수동적 피사체에 머물지 않는다. 박영숙의 사진에서 피사체 여성들은 촬영의 협업자이자 설정한 상황을 스스로 해석하는 연기자다. 작가가 각 상황을 설정하고 구체적 소품과 장소, 인물의 행위를 계획하는 것은 여느 사진가들과 동일하지만, 피사체에게 부여되는 자유의지의 정도가 다른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 박영숙의 사진이 피사체와의 공감대 형성을 전제 조건으로 설정하고 있기에 가능하다. 고등어를 토막 내다가, 화단에 물을 주다가, 아이를 돌보다가 문득 넋이 나가버린 그녀들의 심정에 피사체가 동조해야만 사진이 만들어 질 수 있다. 여기서 박영숙의 사진 속 인물들이 왜 모두 사진가의 지인이자 나아가 오랫동안 교류해온 페미니스트 동지들일 수밖에 없는지가 드러난다. 작가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스스로의 경험을 이입해 그녀들을 살아있는 존재로 육화하려면, 피사체가 같은 고충을 공유하고 분투해온 이력이 필수적인 것이다. 이에 따라 박영숙의 피사체-협업자들은 사진가가 고안한 일상의 시공간들을 제 것으로 풀어낸다. 각자의 방식으로 한 상황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일종의 이심동체라고 할 수 있는 이 몰입은 ‘여성으로 살아내기’라는 공동의 원체험에 대한 접속이다. 설정한 상황과 피사체의 실제 삶이 합치하지 않아도 무방한 것은 박영숙의 사진이 특정 인물의 개인사에 대한 다큐멘터리적인 기록이 아니라 ‘그녀들의 삶’이라는 보편적 지점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리되어 있으나 한 몸이기도 한 사진가와 피사체의 독특한 연대는 <미친년> 연작의 고유성이자 차별점이다. 사진가와 피사체가 완벽히 일치하는 낸 골딘의 자폐적 현실 공동체(그녀의 모든 사진은 자화상과 다를 바 없다)와 달리, 박영숙의 여성 공동체는 훨씬 넓고 열린 원형적인 장이다. 그 속에서 차이들은 녹아들어 다르고도 같은 상징적 유기체가 된다.
내용을 뒷받침하는 형식 사진가와 피사체가 함께 그려내는 여성적 시공간의 구현에는 내용을 뒷받침하는 정교한 형식적 지원이 자리한다. 우선 <미친년> 연작에는 구체적 상황을 설명하는 텍스트가 없다. 우리는 사진 속 그녀가 어떤 연유로 욕탕에서 물을 뒤집어썼는지, 자목련 꽃잎 위에 난데없이 왜 드러누워 있는지 모른다. 작업 설명도, 암시를 주는 표제도 없는 까닭이다. 어떤 이야기를 상정하고 있으면서도 구체적 설명을 피하는 것은 관객의 감정 이입을 제한하지 않으려는 의도다. 이미지의 모호성을 텍스트로 고정하면 자신의 방식으로 공감할 관객의 동조 가능성을 차단해버릴 수 있고, 이는 보다 넓은 연대를 추구하는 작가의 의도에 위배된다. 한편 클로즈업이나 반신상보다 인물의 전신상을 선호하는 것도 눈여겨볼 지점이다. 작가의 초점이 인물이 처한 심리적 억압에 있기에 중요한 것은 피사체의 묘사가 아니라 피사체와 공간이 맺는 심리적 관계다. 심리적 공간에서 인물이 어떻게 억눌려 있는지를 드러내야 하므로 공간 속에서 인물이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지가 중요하며, 상황을 몸으로 뿜어내는 인물의 육신 전체를 보여주여야 한다. 군상보다는 단독상이 다수인 것도 동화의 원리로 이해할 수 있다. 피사체나 관객이 해당 상황에 완전히 몰입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사진에 하나의 인물인 것이 유리하다. 그런 점에서 같은 설정 사진이어도 제프 월과 박영숙은 다르다. 월의 경우 인물은 설정한 상황을 연출하는 여러 장치 중 하나일 뿐, 공간 속 다른 소품과 위계상 차이가 없다. 반면 박영숙의 경우 인물은 사진의 절대적인 중심으로 사진가와 피사체, 관객을 하나로 묶어주는 축이다. 박영숙의 사진이 심리적 공간으로 배경을 중시하면서도 인물이 약화될 만큼 카메라를 뒤로 빼거나 배경의 비중을 늘리지 않는 것은 인물을 통한 공명이 그녀 사진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개별 이미지가 아닌 연작이라는 점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하나가 아니고 복수이기에 작업 또한 여럿이어야만 의미가 있다. 대형 인화되어 단단한 존재감을 갖춘 복수의 그녀에게 둘러싸인 관객들은 실제 인물들과 마주한 듯한 인상을 받는다. 각기 다른 복수의 관객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녀들과 대화하는 순간, 거기서 또 다른 들림/홀림이 발생하고 나눔의 장이 펼쳐지리라. ●

박 영 숙 Park Youngsook
1941년 태어났다. 숙명여대 사학과와 숙명여대 산업대학원 (사진전공)을 졸업했다. 1966년 첫 개인전 이후 지금까지 12회 개인전을 열었다. 2007년부터 트렁크갤러리를 운영하고 있으며, 올해 5월 천안 아라리오갤러리에서 개인전이 열릴 예정이다.

ARTIST REVIEW 윤진영

윤진영 (11)

< The Last Breath > Digital C Print 500×120cm(각, 총5점) 2013

생물학을 전공한 윤진영은 마치 실험실의 학자와 같이 사진작업을 한다. 그녀가 취한 대상은 근작인 곰팡이를 비롯해 생선의 내장, 돼지껍질 등 인간에게 그 가치와 효용이 크게 떨어진다고 인식되고 괴기미(그로테스크)를 지닌 것들이다. 하지만 비가시적인 그것들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존재의 부당성을 거부할 수 없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최근 중앙미술대전 대상과 일우사진상을 수상한 작가가 위와 같은 소재를 취하는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로테스크와 경계의 미학

박상우 중부대 교수

윤진영은 인간이 불필요하고 징그럽다고 느끼는 생명체인 생선 내장, 돼지껍질, 곰팡이 등을 작업의 모티프로 삼는다. 작가는 이 생명체를 변형한 후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하여 거기에서 새로운 의미를 탐색한다. 과학자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작가는 자연스럽게 생물학의 실험 대상들을 작품의 오브제로 삼았다. 윤진영은 예술에서 낯설고 거북스러운 이 과학적 오브제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할까? 작가는 사람들이 혐오스럽다고 인식하는 생명체를 새로운 차원의 오브제로 변형시켜 이를 통해 그로테스크의 ‘긍정성’ 혹은 ‘이면’을 드러내고자 한다. 작업의 출발점은 그로테스크이다. 하지만 작가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그로테스크한 생명체에 숨은 비가시적인 세계이다.
초기 작업인 <변형(metamorphosis)>(2006)에서 작가는 생선의 눈알, 내장, 머리를 ‘변형(재배열, 재구성)’하여 사진으로 촬영했다. 초현실주의 작가인 프레데릭 좀머(Frederick Sommer)의 <닭 해부학(Chicken Anatomy>(1939) 사진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좀머가 해부된 닭에서 “믿을 수 없는 개성과 감동”을 발견한 것처럼 윤진영도 생선의 핏빛 내장에서 알 수 없는 미묘한 흥분을 경험했다. 작가는 그로테스크한 생명에서 혐오와 매력을 동시에 느낀 것이다. 또한 작가는 일상적인 식재료(묵, 젓갈, 고추장, 검은 쌀)에 숨은 그로테스크의 속성을 발견하고 이를 사진 시리즈인 <먹을 수 있는 것들(The Edibles)>(2008)로 표현했다.
이후 윤진영은 또 다른 그로테스크 오브제인 닭발, 돼지껍질이라는 생명체의 파편을 찍은 <사후연상(Reminiscence after death)(2010)>을 제작한다. 작가는 돼지껍질 위에 빔 프로젝터로 문신 모양의 이미지를 투사해 사진으로 촬영한다.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문양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혐오스러운 돼지껍질이다. 이것은 그로테스크 미학의 기원에 충실한 작품이다. 왜냐하면 그로테스크의 기원인 로마 시대 장식은 멀리서 보면 식물의 아름다운 형태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식물, 동물, 인간 그리고 기괴한 생명체가 ‘그로테스크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작가는 그로테스크가 하나의 의미에 머물러 있지 않고 처음과는 정면 배치되는 새로운 의미로 변형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한 생명체는 하나로 고정되거나 불변하는 가치가 아니라 서로 모순적인 양면의 가치를 지닐 수 있음을 암시한다. 생선 내장과 돼지껍질은 추함과 아름다움, 혐오와 경외를 동시에 지니거나 혹은 이들의 ‘경계’에 있다.
윤진영은 최근 이 같은 경계의 미학을 또 다른 그로테스크 오브제인 곰팡이를 통해 발전시킨다. 작가는 미리 주문한 조형물(인간 및 동물 얼굴, 도자기, 병 등) 위에 곰팡이를 직접 입히고 키운다. 곰팡이가 자라면서 조형적으로 원하는 효과를 보일 때 이를 사진으로 기록한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나온 사진 시리즈가 <남은 것(The Remains)>(2012), <우월의 역행(Reversal of Dominance)>(2015)이다. 곰팡이는 작가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 그것은 이전 작업의 오브제처럼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아름다운 대상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해로운 ‘부패’이면서 동시에 유익한 ‘발효’이기도 한다. 그것은 또한 다가올 죽음을 상기시키면서도 힘차게 뻗어가는 생명력을 상징한다. 곰팡이는 작가가 추구하는 경계의 미학을 어쩌면 가장 충실하게 실천하는 대리인이다.

윤진영 (9)

< Reversal of Dominance 302 > Digital C Print 120×180cm 2015

윤진영 (3)

< His Will > 영상, 사운드 설치(8분4초) 2015

혐오의 대상을 미적 대상으로 인식하다
곰팡이를 이용한 작업 과정은 다른 재료를 사용한 것과 비교했을 때 매우 독특하다. 그것은 곰팡이가 작업 과정에서는 ‘살아있는’ 물감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화가가 물감을 사용하여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윤진영은 생명체의 물감으로 조형물의 표면에 ‘그린다’. 하지만 화가가 캔버스에 물감을 전부 칠하면 작품이 완성되지만 곰팡이로 ‘칠할’ 경우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이때부터 곰팡이 그림의 주체는 인간(작가)이 아니라 곰팡이 자신이다. 곰팡이는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자신의 이미지를 스스로 완성한다. 물론 인간은 과학 법칙에 따라 곰팡이의 성장을 통제한다. 하지만 곰팡이가 성장하는 과정에 항상 우연의 요소(배지 종류, 여러 곰팡이 혼합, 오염 등)가 개입하기 때문에 조형물에 입힌 곰팡이가 어떻게 성장해 나갈지를 작가는 완전히 예측할 수 없다. 결국 곰팡이 작업은 인간의 통제와 자연의 우연이라는 두 요소의 만남에서 이뤄진다. 그것은 필연과 우연, 인간과 자연, 과학과 생명의 결합 혹은 경계에 위치한다.
곰팡이는 사람들에게 혐오와 불편함의 대상으로 인식된다. 작가는 이 생명체에 대한 이런 부정적 인식을 완화하기 위해 그것의 조형 요소들(질감, 색채, 형태)을 미적으로 강조하거나 통제한다. 작가가 곰팡이의 질감을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다른 사물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함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 질감은 고대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처럼 응축된 역사와 시간을 보여준다. 또한 곰팡이에 사용된 차분한 색채는 원색을 사용했을 때 두드러지는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훨씬 완화한다. 게다가 곰팡이를 입힌 조형물의 형태와 배경도 곰팡이의 부정적 인상을 누그러뜨린다. 조형물을 둘러싼 검은 배경과 추상적인 형태를 통해 관객은 곰팡이의 존재를 잊고 혐오의 대상을 미적 대상으로 인식한다.
사진은 작가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 곰팡이를 입힌 조형물이 최종 작품은 아니다. 그것은 사진으로 찍히기 위한 중간 단계일 뿐이다. 최종 작품은 사진을 통해 완성된다. 작가가 사진을 매체로 택한 이유는 우선 사진이 그로테스크한 오브제를 어떤 매체보다도 실제처럼 재현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진은 조명을 통해 곰팡이를 실제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미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진은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많이 사용한 확대의 효과를 제공한다. 곰팡이는 촬영 과정에서 렌즈를 통해 확대되고 프린트 과정에서 대형 프린트를 통해 다시 한 번 확대된다. 사진은 또한 곰팡이처럼 불편한 대상을 마주할 때 느끼는 두려움을 완화하고 곰팡이의 최고의 모습만을 선명하게 확대하여 관객의 눈앞에 제시한다.
최근에 작가는 정지된 사진에서 보여주지 못한, 시간의 흐름에 따른 곰팡이의 변화를 보여주기 위해 영상 매체를 도입했다. 대표 작품이 시간의 압축기법인 타임랩스를 사용한 <인식의 역전(Reversal of Cognition)>(2015)과 시간의 확장기법인 초고속 촬영기법을 이용한 영상 <그의 의지(His Will)>(2015)이다. 이 두 영상을 통해 작가는 인간의 눈에 비가시적이고 비현실적인 시간성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 비현실적인 시간 속에서 곰팡이가 펼치는 낯선 풍경을 표현한다.
2006년부터 10년에 걸친 윤진영의 전체 작품을 관통하는 중심축은 무엇일까? 그것은 현대예술의 핵심 경향인 ‘경계의 미학’이다. 작가는 그로테스크에서 출발하지만 결코 그 테두리 안에 머물지 않는다. 작가는 대신 그로테스크의 다른 면을 들춰내고자 한다. 작가는 서로 모순되는 대립항의 공존과 경계에 환희한다. 기괴함과 평범함, 추함과 아름다움, 부패와 발효, 불쾌와 쾌, 죽음과 삶의 공존과 경계에 열광한다. 이를 통해 작가는 그로테스크에 대한 ‘인식의 전환’ 혹은 ‘우월의 역전’을 촉구한다. 그것은 결국 가치의 변화무쌍함과 인식의 확장을 의미한다.
하지만 윤진영이 그로테스크를 통해 추구하는 것은 ‘인식의 확장’보다 훨씬 근원적인 주제이다. 작가는 그로테스크에서 인간의 죽음의 징후를 보고 인간의 유한성을 재확인한다. 인간의 운명적인 한계를 자각한 작가의 시선은 인간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 혹은 미지의 세계인 ‘초월’의 세계를 향한다. 그리고 그 세계에 존재하는 무한한 것, 절대적인 것, 혹은 신앙심을 지닌 작가의 표현대로 ‘그[신]의 의지’를 추구한다. 결국 윤진영의 작품세계는 현대예술에서 중심 화두인 경계의 미학, 모호함의 미학, 비가시의 미학, 초월의 미학이 서로 교차하는 ‘그곳에’ 존재한다.

윤진영 (6)

< Reversal of Dominance 101 > Digital C Print 187×150cm 2015

윤 진 영 Yoon Jinyoung
1969년 태어났다. 연세대 생물학과와 홍익대 대학원 사진디자인과, 애리조나 주립대 사진학과, 홍익대 대학원 사진학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지금까지 총7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한국을 비롯 미국 등지에서 열린 다수의 기획전과 그룹전에 참여했다. 제37회 중앙미술대전 대상(2015), 제7회 일우사진상(2016)을 수상했다. 현재 백석대 디자인영상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며, 서울에서 작업하고 있다.

EXHIBITION & THEME 〈Under My Skin〉& 〈누구에게나 시선은 열려있다〉

젊은 작가로 구성된 그룹전이 비슷한 시기에 열리고 있다. 하이트컬렉션에서 계속되는 〈Under My Skin〉(2.26~5.21)과 아트센터 화이트블럭에서 열리는 〈누구에게나 시선은 열려있다〉(3.4~5.15). 이 두 전시는 작가 뿐 아니라 기획자의 개성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인다. 《월간미술》은 이 전시를 기획한 이성휘(하이트컬렉션 큐레이터)와 이관훈(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큐레이터)을 만나 각 기획의 초점을 짚어보았다. 또한 그들이 추구하는 큐레이팅과 젊은 작가들에 대한 인상을 들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다른 듯, 닮은 두 기획자의 분위기가 어렴풋이 드러난다.

미술현장에서 살아남기

이성휘 각자 큐레이터로서 현장 경험과 전시 방향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관훈 저는 미술사나 미학, 예술학 등의 미술이론 전공자가 아녜요. 큐레이터로서 첫걸음은 1990년대 초 미술현장 밑바닥에서부터 내디뎠어요. 처음에는 막막했죠. 전시기획의 의미도 모르고 몸을 막 던지면서 겁 없이 행동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그렇다 보니 백지에 글을 쓰듯, 현장에서 만나고 교우하는 작가들 하나하나가 기획을 구상하는 뼈대 역할을 했어요. 그 위에 책, 잡지, 영화, 인터넷 등에서 얻은 지식과 자연체험을 통한 감성을 올려서 자연스레 직관이 생겨난 거죠. 동아갤러리에서 8년,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이하 사루비아다방)에서 18년을 보냈네요. 생리 구조가 너무나 상반된, 표정 없는 냉정한 화이트 큐브와 표정 많은 날것의 시멘트 공간을 모두 경험하면서 환경의 변화에 따라 삶의 형태를 변모시켰고, 큐레이터로서 폭넓은 경험을 갖게 됐어요. 하지만 작가를 대하는 태도는 크게 변하지 않았죠. 그들과 작업실에서, 길거리에서, 뒤풀이와 카페에서 그리고 전시장에서 거침없는 대화와 논쟁, 삶의 에피소드를 나누고 공감하며 수많은 시간을 보냈네요. 그 속에서 작가들의 감성언어를 배웠고, 무질서와 혼돈 속에서 진실한 아름다움을 찾았어요. 조형의 낱낱이 어떻게 언어화되는지, 드로잉적인 사고와 사유로 작가적 태도를 견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당위성을 깨달았지요. 그리고 수없는 시행착오를 겪으며, 나만의 기획과 연출방식을 체득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제가 하는 기획의 모토는 기성 작가들의 성향과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는 젊은 작가들의 창작 흐름을 주시하며, 내 성향에 맞는 ‘관계 짓기’를 하는 거예요. 그 속에 여러 가지 현상이 얽히고 설킨 ‘태’의 모습을 들여다보는데, 이는 텍스트보다 직관으로서 이미지를 그려낸다고 볼 수 있어요.
이성휘 전 제 기획의 방법론을 논할 만큼 경력이 오래지 않아요. 하이트컬렉션에서 3년 반, 그전에 사무소에서 1년 남짓 근무했으니 전시기획 경력이 겨우 5년 정도 됩니다.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후 미술이론을 공부하고 늦게 미술계에 입문했지만 중간에 휴식기가 있었기 때문에 동년배 기획자에 비해 경력은 짧은 편이죠. 반면 저랑 비슷한 시기 현장에서 활동한 작가들과 비교하면 나이는 많아요. 어중간한 위치죠. 그렇다 보니 저는 아직까지 어느 세대를 대변할 만한 큐레이터는 아닙니다. 전시 기획 횟수도 많지 않으니 제 스스로 기획의 방향에 대해 말하기 어설프지만, 돌아보면 마음속에 뭉쳐있던 것(예컨대, 〈쭈뼛쭈뼛한 대화〉(2013)), 또는 크든 작든 어떤 반발심이 기획의 동력이었습니다. 마음이 내키는 걸 하는 편인데, 방법론까진 아니지만 전시 만들 때 취하는 태도입니다. 한편으로 바로 이해가 안 되는 작업이나 작가는 오래 지켜보는 편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답답할 정도로 생각만 하면서 시간을 끄는 편이에요. 아무튼 제게 별다른 방법론이 없기 때문에, 전시를 만들 때는 작가와 그들의 작업을 최우선에 두려 합니다. 그러나 연륜이 쌓이면 제가 어느 순간 오만해질 수도 있겠지요? 두렵습니다. 평생 초짜여야겠어요.
이관훈 작가의 움직임과 그들의 생각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곳에서 기획의 소스를 추출한다는 면에서 저와 비슷하네요.
이성휘 기획의 불씨는 제 안에서 지펴지는 편이지만, 전시를 만드는 단계에 들어서면 기획의 목소리보다 작가와 작업이 전면에 부각되길 원합니다. 그때부터 저는 뒤로 숨는 편이죠. 하지만 크게 보면 저도 (주변에서 접하는)작가의 움직임과 그들의 생각에서 기획의 소스를 뽑는 거지요. 기획 소스에 대한 말씀을 하셨으니, 이 선생님이 이번에 기획하신 〈누구에게나 시선은 열려있다전〉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사실 이 전시 참여 작가가 지난해 사루비아다방에서 진행해 공모 기획한 〈제3의 과제전〉에서 선보였던 작가와 겹치는 면이 있어서 그 프로젝트부터 이번 전시를 염두에 두신 것은 아닌지 궁금했어요.
이관훈 화이트블럭으로부터 전시기획 제안을 받고 2012년부터 3년간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멘토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만난 작가들, 사루비아다방에서 열린 2014년 〈지역네트워킹프로젝트-시선의 차이〉와 2015년 〈제3의 과제전〉에서 소개한 작가들을 떠올렸어요. 그리고 평소 관심 있게 본 작가들과 어떻게 엮을 지를 염두에 두었죠. 이들을 어떤 의미로 공간에 그려야 할지 고려할 때 공간 특성을 캔버스 혹은 생성소로 생각하고 주어진 공간의 크기, 부피, 재질, 동선의 흐름 등을 고민했지요. 머릿속에 작가들의 작품이 놓일 공간이 그려진 후 전시제목을 자연히 떠올렸어요. <누구에게나 시선을 열려있다>란 제목은 전시 주체인 작가와 타자인 관객의 시선이 엇갈릴 수밖에 없는 양면성을 ‘창(프레임)’이라는 개념에 비유한 거예요. 창은 인식을 전환시키는 경계지점으로 볼 수 있는데, 작가가 창작할 때 주어진 캔버스 앞에서 끊임없이 화두를 던지고, 관객은 그 결과물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지점이 인식의 창으로서 각각 자리한다고 여겼죠. 막연할 수 있지만, 저는 이런 시점의 다양성이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두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성휘 저희 전시는 하이트컬렉션에서 젊은 작가를 소개하는 전시예요. 올해 3회를 맞았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미술계를 바라보며 느낀, 1980년대 중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출생, 이른바 포스트 인터넷 세대 작가들에 대한 생각을 풀어보고자 했어요. 저는 우리 미술계가 종종 이들을 표피적인 세대로만 뭉뚱그려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들을 그렇게 단순하게 보고 싶지 않았어요. 물론 이러한 점을 정당화하면서 오히려 이용하는 작가도 있지만 이들이 모두 동색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저는 이미지를 표피, 살갗이라고 한다면, 그 밑에 있는 지방, 핏줄 등이 있겠다 생각했고, 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들을 보여줄 방법을 고민하다가 “스토리텔링”을 생각했어요. 내러티브와 구조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잖아요. 기성작가 중에서 스토리텔링에 탁월한 분들-김범, 김성환, 박진아, 양혜규, 함양아-에게 작가 추천을 부탁했어요. 그리고 그분들이 추천한 8명의 작가-양희아, 윤형민, 염지혜, 이동근, 이솝, 이혜인, 전혜림, 함혜경-는 이제껏 그랬듯이 무조건 수용하고 파악해야 했습니다.
이관훈 참여 작가를 추천받은 이후부터 모든 전시 연출은 이성휘 큐레이터의 몫 아닌가요?
이성휘 물론 연출은 작가와 상의해서 같이 했죠. 연출에 추천인은 일절 관여하지 않아요. 다만 추천인과 피추천인이 상하관계로 비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추천인에게 의무적으로 인터뷰나 리뷰 글을 부탁해요. 기성세대가 그들이 추천한 젊은 세대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를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죠. 그리고 젊은 세대도 기성세대를 이해하기 위한 소통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얼마 전 이번 전시를 만들며, 유명한 작가 5인의 이름을 큐레이터로서 너무 쉽게 가져가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을 들었어요. 작가 선정은 사실 큐레이터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냐는 거죠. 추천인들과 저는 위치와 역량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견해가 가능하죠. 그러나 작가들을 위해서는 추천제가 낫겠다 싶어요. 좀 더 멀리 내다봤을 때 작가들 간의 연결과 상호 이해도 중요하거든요. 예를 들어 김성환 작가는 이혜인 작가의 작업을 뉴욕에서 잠깐 봤을 뿐 아주 잘 알고 있었던 건 아녜요. 그러나 그 잠깐의 시간 동안 꿰뚫어본 것이 있었으니 저희 전시에 추천한 거죠. 아마 두 사람은 이번 전시를 통해서 서로에 대한 이해가 좀 더 깊어졌을 거예요. 다른 작가들도 마찬가지예요. 피추천 작가들이 지금은 신진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4~5년만 흐르면 선배 작가들과 같은 전시에서 동등하게 활동하게 되니까요.
이관훈 어떤 평자는 전시할 작가들을 추천받으면 기획자의 정체성이 결여될 수 있다고 보는데, 저는 좀 달라요. 넓은 의미에서 추천인들도 작가들과 같은 의미로 다가와요. 기획자가 그리는 큰 그림에서 형식이 다를 뿐, 결과적으로 주제는 기획자가 제시하고 추천된 작가들 전체적으로 작업을 들여다보며 논의하고, 연출하고, 글 쓰고, 진행하는 형식으로 이뤄지잖아요.
이성휘 그렇다면 선생님의 경우에는 전시 연출에 큐레이터의 자의식을 많이 반영하는 편인가요? 작가들이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전 작가에게 양보하고 제 자의식을 최대한 누르려는 편이거든요.
이관훈 꽤 많이 투영하는 편이라고 볼 수 있죠. 제1의 창작자인 작가는 작업실 안에서 빈 여백에 모든 에너지를 집결하여 응축시킨 창작물을 내어놓았다면, 제2의 창작자인 큐레이터는 제도 공간인 전시장에서 작가와 논의하여 또 하나의 캔버스를 만든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작품 선정도 작가와 논의해서 결정하는데 전체의 흐름을 그리고 있는 큐레이터 입장에서 주도한다고 봐요. 이런 의미에서 전시 연출은 기획의도 및 개념과 동일선상에 있으며, 전시라는 총체적인 방향에서 50% 정도 차지하죠. 현대미술이 1970년대 이후 전시사로 쓰인다고 하잖아요. 그렇게 보면 연출된 작품은 작가를 비평 혹은 평가하거나 담론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수단이 되는 거죠.

하이트 (4)

이동근 < Trace of Flight > 207×150cm 혼합재료 2015

하이트 (11)

양희아 <눈의 밤>(왼쪽) 종이에 수채 76×56cm(각) 2014

젊은 작가를 말하다
이성휘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큐레이터로서의 고민이 있었어요. 바로 ‘젊은 작가전’이라는 화두를 꺼내는 자체가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는 생각이에요. “과연 4번째 시리즈 전시를 이어갈 수 있을까”하는 회의감도 있었죠. 막상 전시를 오픈하니, 3회째 지속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체의 이야기가 생기더라고요. 결국 좀 더 반복하되 보완해야겠다고 다짐했죠. 젊은 작가라는 표현은 처음 이 시리즈 전시를 열 때 상대적으로 젊은 연령대의 작가를 통칭하기 위해 사용했던 말이에요. 상대적인 개념으로 정의 내렸지만 여전히 젊은 작가란 말을 모호하게 두어야 할지 고민됩니다. 단 이번 전시 참여 작가가 앞선 두 전시보다 연령이 높은 (30대 중반 이상이 다수)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고 봐요. 첫째는 추천을 의뢰받은 5명의 작가에게 더 어린 작가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일 수 있겠죠. 둘째는 20대에게 이야기를 구조화하고 풀어내는 것은 좀 더 시간이 필요할 수 있겠단 생각도 했어요.
이관훈 이성휘 큐레이터가 말한 것처럼 ‘젊은’, ‘신진’ ‘중견’작가라는 말에 회의감이 분명 있죠. 저도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서두에 ‘신진’, ‘젊은’ 등의 표현을 쓰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려요. ‘젊다’는 표현은 시대적인 문화 현상의 가치에 대해 피드백이 되어 생겨나오는 요소라고 생각해요. 1980년대, 1990년대에도 젊은 작가는 존재했어요. 제가 기획자로 활동하기 시작한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젊은 작가들과 늘 함께 활동해왔는데, 세월이 흐르며 저도 모르게 나이든 기획자가 되버렸네요. 미술계 현장은 시스템 측면에서 2000년대를 기점으로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 즈음인 1999년에 대안공간도 등장했지요. 1950~1960년대 즈음 미술계에 대략적인 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한 이래 50여 년간 변화한 내용보다 2000년 이후 10여 년간 일어난 변화가 훨씬 크고 급진적이죠. 거칠게 예를 들자면, 이전에는 작가들이 추상, 모던 등의 거대 담론이라는 프레임을 넘지 못할 미술사적 벽으로 바라본 측면도 있어요. 그러나 거대 담론에 대한 비판과 자의식으로 2000년대 이후 작가들은 ‘나’로부터 시작하는 내러티브적 요소에 관심이 많아졌어요. 여기서 중요한 키워드로 ‘기억, 사건, 현상’을 들고 싶어요. 덧붙여 변화의 주기가 더욱 가속화됐어요. 2000년대에 등장한 젊은 작가들과는 또 다른 변모로 2010년대에 등장하는 젊은 작가들이 번역되거든요. 이러한 변화로 다양성과 해체론이 계속 전개되는 것을 저는 긍정적으로 봐요.
이성휘 ‘젊은’ 작가만큼 ‘기성세대’의 위치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는 것 같아요. 이번 전시 추천인을 선정할 당시 ‘스토리텔링’이라 하면 일단 영상작업이 다수를 차지할 것 같았어요. 그러나 매체가 다양했으면 하는 마음에 추천인에 화가를 포함시키고자 했죠. 평소 스토리텔링 부분이 강점이라고 생각한 모 화가에게 먼저 부탁했어요. 그분이 처음에는 흔쾌히 응했지만 이후 다른 추천인 명단을 말했더니 부담스럽다고 사양하더라고요. 전 추천과 비추천인을 신·구세대 작가로 획일적으로 나누거나 경력을 계량하듯이 접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이나 경력이 그다지 중요치 않았는데 말이죠.
이관훈 최근 세대론이 대두되잖아요. 2000년대 세대라고 하면, 1980년대는 국내에서 대학을 다니고 유학 간 세대가 꽤 많았어요. 당시 유학에서 돌아온 이 젊은 세대가 대안공간의 출발점을 함께 했어요. 시간이 흘러 지금은 미술계에서 하나의 문화적인 지형을 이루는 작가가 되었죠. 2010년도가 되니 젊은 세대 중에 유럽을 중심으로 유학한 작가가 활발히 활동하는 듯 보여요. 2014년 사루비아다방의 운영체제 변환도 이 시기와 맞물리죠. 특히 작년 3월부터 황정인 큐레이터와 함께 하면서 젊은 작가, 비평가들의 네트워크가 생겼어요. 관객에도 변화가 있고요. 2011년 1월 전시공간을 인사동에서 창성동으로 옮긴 후에 유독 젊은 세대가 전시장을 많이 찾아요.
이성휘 저는 세대 간 불통이 심화되고 있는 지점이 자신의 위치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해요. 제 또래들은 자기가 먼저 작업을 하고 그 결과물로서 작가 또는 큐레이터로 인정을 받느냐 아니냐를 기다렸던 것 같아요. 반면 1980년대 후반 1990년대 초반생 작가나 큐레이터는 자기 정체성을 먼저 작가로 혹은 큐레이터로 규정한 상태에서 작업을 시작해요. 현 사회와 시대가 생존을 위해 버티려고 아등바등하게 만들고 있잖아요. 젊은 세대는 생존을 위해 자기 규정을 우선시하는 것 같아요. 물론 어떤 순서가 옳고 그르다고 말하는 것은 아녜요. 단지 이 시대가 자기에게 스스로 정체성을 부여해야 생존할 수 있는 사회이기 때문에 그런 길을 택하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이관훈 과거와 현재 세대가 가진 감성도 다르죠. 최근 미술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키워드가 ‘재생과 반복’이 아닐까 싶어요. 소비문화시대에서 답습되고 쌓인 내용이죠. 재생과 반복이란 면에서 완전한 창작의 자유로움도 새로운 창작도 없죠. 요즘 젊은 작가들이 이를 인식해서 수용하기보다 무의식적인 흐름에서 본인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것 같아요. 하지만 몇몇 작가에게서 비상적인 모습이 보이기도 하죠. 재생과 반복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저는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봐요.
이성휘 물론 모두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만 한편으로 젊은 작가들 또래에게는 ‘팬덤’이 존재하는 것 같아요. 아이돌에 열광하는 대중문화에 익숙한 세대가 가진 특징일 수도 있겠네요. 작가들 사이에서도 팬덤이 존재해서 맹목적으로 누군가를 좋아하고 호불호가 갈리는 현상은 조금 불안해 보이는 요소예요. 모든 개인이 각자의 판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휩쓸려가는 모습을 보면 아슬아슬하죠. 반면, 작가 혹은 큐레이터로서 자기 정체성을 먼저 부여하는 것에 의문을 품는 같은 또래 작가를 보기도 해요. 모든 것을 흑백으로 나눌 수 없겠죠.
이관훈 긍정적인 편견은 여러가지 양상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좋아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알고 있는 무엇인가를 이야기할 수 있는 몸짓까지 포함한다는 거죠.
이성휘 충분히 공감해요. 그럼에도 세대론으로 작품을 규정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또래 작가라고 해서 전부 공감가는 것은 아니거든요. 물론 세대들의 공통분모도 있지만 집단보다 개인으로 파고들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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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센터 화이트블럭 2층 복도에 설치된 류민지의 작업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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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센터 화이트블럭 전시 전경 최지원(왼쪽), 이은새(오른쪽)

큐레이터로 살아가기
이관훈 대안공간은 존재 자체가 당위성보다는 척탄병처럼 일선에서 움직여야 하는, 그래야만 가치와 역할이 생기죠. 그래서 저는 항상 촉수를 세우고 작가를 살피고 있어요.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는 것인데, 국내 미술계의 작가 및 전시 시스템은 매번 새로운 것을 보이고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은 어떤 정신적인 병리현상에 걸린 느낌이 강해요. 60세에 그동안 했던 작품들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첫 개인전을 연 작가 사례가 있었는데, 가슴 뭉클하게 하는 존경심이 자연스레 우러났어요. 현 시대적 속성인진 몰라도 작가들, 아니 미술현장의 시스템은 창작물을 너무도 빠르게 보여주려 해서 작가들의 작업실과 창고에 방치된 것이 너무 많아요. 시대가 지났다고 계속 새로운 것을 해야 하고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까요. 현 시대는 새로운 창작도 사고를 증폭시키는 전환의 계기로 삼지만, 예전의 기억 속으로 묻혀버린 존재도 다시 여기에서 재편집하여 좋은 전시를 엮을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많다고 봅니다. 저는 현시점에서 ‘기억과 낭만’이 예전보다 더 중요한 세대라고 생각해요. 시간이 흐를수록 작가와 작품은 쌓이고 있잖아요. 개인전을 다루더라도 재기획 차원에서 달라진 혹은 더해진 문화의 층위에서 재해석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작가의 담론과 재평가가 이뤄져야하지 않을까요. 시대가 지나면 다시 아이콘이 형성될 수 있어요. 비평·미술사적 측면에서 어떻게 편집할 것인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에요. 대중문화에서도 복고 열풍이 불어 기억에 대한 복원을 통해 희열과 감동을 느끼잖아요. 큐레이터들의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에요. 현장에서 보이는 것은 결국 작가들이 힘들게 가꿔온 영혼을 머금은 잔영물이죠. 큐레이터들은 나침반과 같이 작가들의 길잡이 역할을 해야 하며, 모든 사회관계 안에서 그들을 밖으로 연결해야 하는 네트워크로 작용해야 합니다. 네트워크는 정보의 흐름이며, 신뢰의 흐름이며, 자본의 흐름이며, 시스템의 흐름일 뿐 아니라 끊임없는 조력자의 역할을 지닙니다. 말하자면 무형의 존재인거죠.
이성휘 저는 전시의 여러 형식 중에서 개인전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개인전에서 작가만 보려는 것 같습니다만, 저는 개인전에도 큐레이터가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작가-큐레이터 간의 긴장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개인전이 작가의 역량도 고스란히 보이는 것이지만, 큐레이터의 역량도 고스란히 보인다고 보고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저는 큐레이터로서 잘 버텨야 앞으로 최장 10년이 한계일 거 같아요. 저는 대체로 허송세월하며 살아왔어요. 그러나 어릴 때부터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나이 먹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있어요. 그 10년을 위해 5년을, 또 그 5년을 위해 올해 1년을 잘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어요.
이관훈 ‘버티기’란 말이 인상적이네요. 지금 사회의 키워드가 아닐까 해요. 사회에 희망이 없으니 어떻게 하면 버틸까 하는 생존의 문제가 중요한 화두인 것 같아요. 작가도 공간도 큐레이터도 모두 마찬가지죠. 작가의 경우, 사실 어떻게 작가가 되느냐는 것은 막연하거든요. 버티는 게 답일까요?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이성휘 ‘잘’버텨야겠지요. 저는 유한한 시간 동안 잘 버티려고 노력하려해요.
진행 정리•임승현 기자

EXHIBITION TOPIC Пен Варле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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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쉬코토프스키> 에칭 49×91.4cm 1964 아래 <화가 표트르 포민의 초상>(맨 왼쪽) 캔버스에 유채 80×60cm 1973

냉전과 분단에 가려 제대로 조명조차 받지 못한 러시아 국적 한인 화가 변월룡(1916~1990)의 작품이 국내 첫선을 보였다.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변월룡의 삶과 예술을 입체적으로 조명한 대규모 회고전(3.3~5.8)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마련되었다. 연해주에서 태어나 러시아 미술계에서 활동했던 그는 1953년 북한을 방문해 북한 미술의 토대를 세웠지만 이후 정치적 이유로 입국이 거부됐고, 남쪽에선 그 존재조차 몰랐던 ‘숨은 거장’이다. 이번 전시에는 초상화와 풍경화, 드로잉 200여 점과 아카이브 70여 점이 소개되어 특정 이데올로기를 넘어 한 작가의 풍부한 작업세계를 선보인다.

향수(鄕愁)가 기억으로 : 변월룡의 특별한 귀향

조은정 미술비평

유화, 드로잉, 판화, 포스터 등 다양한 유형과 인물초상, 풍경, 정물, 역사화와 선전화 등의 작품은 리얼리즘이라는 축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변월룡은 도구와 감상, 의무와 창작의 경계를 넘나들며 그림 그 자체의 모습, 날것으로의 회화를 펼쳐낸다.
러시아의 한 전시실에서 한눈에 한국인의 그림임을 알아보고 변월룡이라는 화가의 존재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연구자 문영대의 저서 《러시아 한인화가 변월룡과 북한에서 온 편지》(2004)의 발간은 답보 상태에 있던 월북 미술인과 북한 미술계에 대한 연구에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이후 간간이 변월룡이 제작한 초상화 몇 점이 전시되곤 했고, 그때마다 그의 사실적인 묘사력은 대중의 관심을 붙잡아두기에 충분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미술 100년전>에 김용준, 이기영의 초상화가 소개되었고, 이 두 점의 그림은 광복 이후 북한 미술계의 형성을 파악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이후 2013년과 2014년에 전북도립미술관의 <한국의 초상미술, 기억을 넘어서전>에서 한상진, 원홍구, 이기영, 어부 한슈라 등의 초상화와 최승희 드로잉, 동판화 <북한 어부>가 소개되어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한 변월룡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변월룡의 작품 세계를 가늠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정보였다. 또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보레이(Borey)화랑에서 그의 딸 올가의 기획에 의해 성립된 전시마저 <펜 봐를렌 에칭전>이란 제목의 판화 전시였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변월룡의 작품세계 전모를 추정할 수 있는 최초의 대규모 전시이자 형상을 확정할 수는 없지만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한 그가 조국에 전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디아스포라의 미술인이 경험한 북한에서의 배신이 뼛속 깊었기에 생전에는 결코 잘 알 수 없었던 또 하나의 조국에 그가 작품이나마 돌아오는 상황을 그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카레이스키’라 불리는 이역에서 떠도는 한국인들, 그 쓸쓸한 연해주에서 태어나 미술인으로 살아간 변월룡의 생애는 한국 근현대사의 압축판이자 디아스포라의 삶 자체를 축약하여 보여준다. 그의 할아버지는 가솔을 이끌고 연해주로 이주하였고 변월룡은 그곳에서 태어났으므로 이주 3세대이다.
1916년 9월 29일 쉬코토프키구 유랑촌에서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의 미술 재능은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고향을 떠나 미술학교에 입학하는 데 기꺼이 마음과 돈을 보태게 하였다. 3년 과정의 미술학교를 마친 후 그의 뛰어난 실력을 알아본 교수는 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레핀미술대학 진학을 추진하였고, 레핀에서의 졸업작품 <조선의 어부들>로 그는 대학원 진학을 권유받았다. 1951년 예술학 박사학위 취득과 함께 모교인 레핀미술대학 데생과 교수가 되었으니 그는 소수민족 출신이라는 한계를 넘어섰던 것이다. 그리고 1953년 변월룡은 평양미술대학 고문 겸 학장으로 추대되어 커리큘럼을 재구성하고 교재를 손수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교수들도 지도하고 여러 화가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등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전후 북한 미술계가 그의 손에 의해 재편된 것이다.
1년 정도 평양에서 활동하던 그는 곧 평양을 다시 방문할 것이라 믿으며 부인이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는 북한에 귀화를 거부했고 연안파를 숙청한 북한은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던 변월룡에 대한 기억을 지워갔으며 그는 조국이라고 생각한 어떤 땅도 밟을 수 없었다. 그는 방학 때마다 연해주를 방문하여 풍광과 소나무를 그렸다. 농경지를 개간하고 삶의 자리를 구축했던 고려인들이 소련의 강제 이주정책에 의해 모두 떠난 황량한 곳이지만, 그곳은 그에게 조국의 대체장소였던 것이다. 연구자 문영대가 지적한 것처럼 그는 “74년이란 삶 중 단 1년 3개월 남짓의 고국생활을 제외하면, 소련 땅에서 그것도 온전히 냉전시대만을 겪다 생을 마감”하였다. 그에게 조국이란, 구체적인 장소로서의 국가가 아니었다. 정겨운 사람들의 움직임과 산천에 대한 그의 시선을 좇다 보면 마치 복숭아꽃이 만발한 무릉도원이 그런 것처럼 소나무가 위치한 언덕, 그곳에 조국이라는 이름의 이상향이 펼쳐지고 있다.

 캔버스에 유채 115×200cm 1955

<조선의 모내기> 캔버스에 유채 115×200cm 1955

기억되는 사람들, 환기되는 장소
4개의 공간으로 구성된 덕수궁미술관의 구조에 맞추어 전시는 ‘레닌그라드 파노라마’, ‘영혼을 담은 초상’, ‘평양기행’, ‘디아스포라의 풍경’의 4개 주제로 구성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구소련 명칭인 레닌그라드는 우리가 익히 아는 사회주의 프로파간다 작품들이 모습을 보이고 있음을 암시한다. 계급투쟁 혁명을 기반으로 한 사회에서 중요시하는 행복과 평등은 비참한 노동자와 농민의 모습과 대비된 환한 웃음으로 무장한 사람들 그리고 노동자 영웅으로 상징된다. 전형화한 포스터나 레닌을 주제로 한 일련의 판화는 그가 구소련에서 얼마나 활발히 활동한 작가였는지를 증명하는 듯하다.
위대한 예술가에서부터 학교 동료 교수에 이르기까지 그가 남긴 인물 초상화는 묘사력뿐만 아니라 그의 인물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사람의 앞모습을 보고 뒤통수를 그릴 수 있는 그의 데생실력은 인물에서 만개한다. 아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모자상의 현실적인 변주, 행복한 공간에 거주하는 소녀와 수많은 사회적 영웅은 그가 그린 집단 인물화들이 공공기관에 컬렉션된 이유를 알게 한다. 인물의 사회적 업무와 활동을 관계된 지물이나 그림 속 그림을 통하여 나타내는 아주 오래된 방식에 충실한 초상화는 그가 경직된 사회에서 활동하였음을 눈치 채게 한다. 그럼에도 작가의 다양한 변주는 인간 그 자체의 내면 표현에 집중한다. 예를 들어 《닥터 지바고》의 저자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책상 위에 손을 올려놓고 있는데 한 손은 글을 쓰던 펜과 종이 위에 그리고 다른 한 손은 책을 지시하고 있지만 표정에서 우리는 고뇌를 감지한다. 석고상을 배경으로 하거나 파레트와 붓을 든 인물은 화가들이지만 그들을 표현해내는 변월룡의 붓질은 다양하고 표면의 마티에르는 더 이상 대상 인물의 영역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눈길을 고정시키는 것은 휘슬러가 자신의 어머니를 그렇게 했던 것처럼 흰색 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힌 그의 어머니를 화면 한가득 위치시킨 화포이다. 그럼에도 발길을 붙들고 변월룡이라는 작가에 대해 집중하게 하는 것은 그가 만난 월북 문화인들의 초상화들이다. 서울에 있는 아들인 원병오 박사와 북방 쇠찌르레기를 통해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다는 조류학자 원홍구 박사는 박제된 새를 앞에 둔 채 다른 곳을 응시한다. 훈장을 주렁주렁 단 그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깊은 곳에서 쏟아져나오는 회한이 화포를 넘쳐 나온다. 무언가 말을 하고 있는 한설야, 생각에 잠긴 이기영, 한상진이나 이기영 모두 그 내면의 고독이 감지되는 것은 감상자의 센티멘털한 감성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월북한 화가들 또한 더불어 귀향하였다. 황금색 스카프를 두른 채 그림을 들어 보고 있는 유화 속 김용준과 드로잉 안에서 파이프를 문 배운성에 이르기까지 분단된 조국에서 한쪽에서는 숙청되고 한쪽에서는 잊힌 그들이 아카이브라는 이름으로 유리진열장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화가 변월룡의 귀향에는 진심으로 그를 존경했던, 근대 잊혀가던 화가들이 동행했다. 파편화한 미술사의 어느 부분의 봉합이 이루어지는 순간인 것이다. 그리고 변월룡이 그려낸 조국의 모습이 그저 조국이라는 환상적 어느 장소인 것처럼 그들 또한 그렇게 미의 세계를 헤매고 있었음을 확인한다. 넘치는 사진자료와 꼭꼭 눌러쓴 정갈한 편지지 사이 공간에서. ●

사진(노란색파일)_08

변월룡은 1916년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의 후손으로 연해주 쉬코토프스키에서 태어났다. 러시아 최고 미술교육기관인 레닌 예술아카데미를 거쳐 동 대학원을 졸업한 뒤 1951년부터 35년간 모교 교수로 재직했다. 1953년 북한을 방문해 15개월간 평양미술대학 학장 및 고문을 역임하며 북한 미술교육 체계의 초석을 다졌다. 북한에서 소련파가 숙청된 이후 다시 북한 땅을 밟지 못했으며, 1990년 레닌그라드에서 사망했다.

 

WORLD TOPIC | NEW YORK Anri Sala Answer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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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오래된 슬픔> Super 16mm film transferred to single-channel HD video, stereo sound, color; 12분57초 2005 동독 이주자들이 모여 살던 서베를린의 한 고층 아파트 꼭대기에 매달려 연주하는 프리재즈 색서폰 연주자 자밀 문닥의 얼굴이 보인다. ⓒ Anri Sala 아래 <대답해줘> 2008 Photo: Maris Hutchinson/ EPW Studio

알바니아 태생의 안리 살라(Anri Sala, 1974~). 이념의 충돌로 역사가 소용돌이 치던 유럽에서 성장기를 거친 작가는 자신이 겪은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작업하고 있다. 그의 작업을 모은 전시 <Answer me>(2.3~4.10)가 현재 뉴욕 뉴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다. 이 전시에서 안리 살라의 영상설치 작업 12점이 출품됐고 다양한 퍼포먼스가 라이브로 행해져 입체적인 전시였다는 평가다. ‘지역적 노마드’, ‘사상적 노마드’를 자처하는 그의 면모를 전시장을 거닐며 살펴보자.

에트랑제가 보는 세상

서상숙 미술사

안리 살라는 1974년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에서 태어났다. 당시 알바니아는 같은 공산주의 국가들과도 교류가 끓긴 고립된 나라였고 그의 어머니는 청소년들을 공산주의자로 무장시키기 위한 이념교육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가 15세 때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으며 17세가 되던 1991년, 알바니아 역시 민주화를 택했다. 알바니아의 국립미술대학으로 진학해 회화를 전공하던 살라는 22세 때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다.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접한 비디오와 필름, 다큐멘터리라는 새로운 미술매체와 장르는 “충격”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현재 베를린에 살며 작업하는 40대의 살라는 세계가 주목하는 중진작가로 부상했다. 이렇듯 유아기, 청소년기 그리고 청년기의 일부를 폐쇄된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보낸 작가가 21세기의 현대미술, 그리고 예술을 하는 방법은 어떤 것일까.
뉴욕 뉴뮤지엄의 2, 3, 4층 전관에서는 <안리 살라: 대답해(Anri Sala: Answer Me)전>이 지난 2월 3일 개막해 4월 10일까지 계속되며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유럽에서는 잘 알려져 있으나 미국에서는 다소 생소한 살라의 작품을 포괄적으로 한자리에 모은 첫 미술관 전시다. 12점의 비디오 설치작품과 더불어 조각과 드로잉도 함께 전시되고 있다.
이 전시에서 살라는 이 같은 물음에 뛰어난 미술적 해법을 제시한다. 사실, 어쩌면 진실까지도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비디오와 필름 매체의 다큐멘터리적 특성, 그리고 음악(소리)을 통해 그 특성을 최대한 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언어를 믿지 않는다”는 살라의 비디오작업은 ‘사운드 인스톨레이션’으로 불린다. 음악은 스크린의 이미지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표현매체이며 전시 및 촬영장소는 물론 인물 선정까지 표현의 수단으로 이용된다는 점을 고려한 총체적인 설치작업으로 ‘심포닉 인스톨레이션(Symphonic Installation)’이라고도 한다. <라벨 라벨(Ravel Ravel)>(2013)은 두개의 화면이 상하로 놓여 있고 이 두 개의 화면에는 각각 피아노 건반과 그 피아노를 치고 있는 손이 클로즈업되어 상영된다.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고 있음이 분명한 이 피아니스트는 한 손만으로 피아노를 치고 있다. 그 한 손이 왼손이라는 것은 다리 위에 놓여 있는 오른손이 화면에 떠오르면서 밝혀진다. 중간중간 휴지기가 오면 피아노를 치던 왼손은 오른손 위에 놓인다. 마치 피아노를 칠 수 없는 오른손을 가만히 위로하는 것처럼….
이 음악은 모리스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 D장조>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른팔을 잃은 오스트리아의 피아니스트 폴 비트겐슈타인(1887~1961)이 커미션하여 작곡된 작품이다. 철학자인 루드비그 비트겐슈타인의 형이기도 한 폴은 전쟁에서 돌아와 피아니스트로 활동하였으나 결국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여 왼손의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다. 살라는 이 곡이 서로 어긋나도록 템포를 변형하여 두 명의 피아니스트가 이미 녹음된 오케스트라를 들으며 연주하도록 하여 이 작품을 만들었다.
<언라벨(Unravel)>(2013)은 디스크 재키가 음반을 돌리며 이 템포를 원래대로 돌려 놓으려고 하는 모습과 그 소리를 담은 작품이다. 뉴뮤지엄은 이 작품의 전시를 위해 3층 전시장을 막아 천장과 벽에 방음처리를 하여 문이 없는 극장을 만들었는데 16개의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의 조화가 음악회 못지않게 뛰어나다.
살라는 2012년 파리 퐁피두센터 전시, 특히 201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라벨 라벨 언라벨>을 발표하면서 국제적으로 그 인지도를 높혔다. 당시 프랑스를 대표했던 살라는 프랑스관이 아닌 보수와 파괴, 재건축 등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독일관을 전시장으로 선택함으로써 전시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독일 작품은 프랑스관에 전시되었다. 유럽에서 숙적 관계에 있던 프랑스와 독일의 역사적인 상처, 그리고 무엇보다 독일 나치정권에 의해 쫓겨난 피아니스트 폴 비트겐슈타인을 독일로 다시 불러들인다는 상징적 제스처는 사이트 스페시픽 인스톨레이션 장르의 특성을 기가 막히게 살렸다는 점에서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이처럼 어긋나는 역사, 그 역사가 남긴 상처들, 그리고 그 역사에 갇힌 사람들과 그들의 삶을 기억하며 그것을 회복하려는 노력은 살라의 전 작품에 흐르는 주제이다.
<현재의 순간(The Present Moment)>(2014)에 쓰인 음악, <정화된 밤>을 작곡한 아르놀트 쇤베르크(1874~1951)는 오스트리아인으로 1933년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유대인이다. 현대음악의 특징인 무조음악을 창시하고 12음계를 정립한 위대한 쇤베르크는 나치하에서 ‘타락한(degenerated)’ 예술가의 명단에 올랐었다, 무명 작곡가로서 유명한 작곡가의 딸을 사랑하던 25세의 쇤베르크가 독일의 시인 리하르트 데멜이 쓴 정열적인 연애시 <정화된 밤(Verklarte Nacht)>에서 영감을 얻어 같은 제목의 낭만적인 현악 6중주곡을 작곡했다. 살라는 이 곡을 ‘B?플랫’과 ‘D’ 등 한 음만을 연주하도록 변형하고 그 연주자들의 모습을 필름에 담았다. 천장에 설치된 19개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더불어 두 개의 화면에는 연주자들의 손가락, 팔, 목, 얼굴 등을 클로즈업한 장면이 보인다. 연주를 하는 동안 오랜 연습으로 훈련된 근육의 움직임, 그리고 그들이 아는 악보가 아닌 어긋난 음악을 연주하려는 심각한 표정이 함께 보인다. 이 작품은 나치가 ‘위대한 미술’이라고 부른 작품들을 전시하기 위해 나치건축의 원칙에 따라 뮌헨에 지어진 건물(Haus der Kunst)에서 찍은 것이다.
비디오나 필름을 찍는 ‘장소’는 살라에게 매우 중요한 작품 구성의 요건이다.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해 장소를 정하고 음악을 선정한다.
그의 초기작 중 하나인 <색깔을 달라(Dammi I Colori)>(2003)는 황폐한 그의 고향, 티라나의 희망을 말하는 작품이다. 작가의 친구이며 미술가로서 (파리에서 살라와 룸메이트였다) 티라나 시장에 당선됨으로써 정치인으로 변신한 에디 라마(Edi Rama)와 택시를 타고 시내를 돌며 직접 찍은 비디오 작품이다.

AnriSala CreatingSpace INSTALL VIEW 9 사본

이번 전시에는 비디오사운드 인스털레이션과 함께 드로잉 작품들도 선보였다. Photo: Maris Hutchinson/EPW Studio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각
현재 알바니아의 수상인 라마는 당시 낡은 티라나의 빌딩을 화려한 색으로 채색함으로써 주민들에게 유토피아적 희망을 주고 싶다는 계획을 역설한다. 그는 “동네 술집에서 색깔을 논의하는 곳은 전 세계에서 티라나 한 곳뿐일 것”이라며 “티라나 주민들에게 색깔은 옷이 아니라 (몸속의) 내장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색깔을 달라’는 제목은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의 남자 주인공의 아리아에서 따온 것이다. 이밖에 사라예보에서 찍은<붉은색이 없이 산 1395일(1395 Days without Red)>(2011), 나치 시대의 아파트를 부순 잔재들을 쌓아 생긴 언덕 위에 지어졌으며 한때 동독을 감시는 장소로 쓰인 ‘악마의 산(Teufelsberg)’에서 제작한 <대답해(Answer Me)>(2008), 동독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아파트단지에서 찍었으며 그 단지를 부르던 이름을 딴 <오래된 슬픔(Long Sorrow)>(2005) 등 살라의 작품은 모두 아픈 역사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그의 첫 작품인 <인터비스타(Intervista-Finding the Words)>(1998)는 그의 집 다락에서 찾아낸 필름이었다. 1970년대 후반 그의 어머니가 알바니아의 노동당회의에서 연설하는 장면으로 소리가 나지 않아 농아학교 학생들에게 입술을 읽어달라고 부탁해 그 연설 내용을 복원하였다. 어린 시절 바이올린을 오랫동안 배운 안리 살라는 클래식 음악뿐만 아니라 재즈 등 다른 장르의 음악도 폭넓게 이용하고 있다. 현재 뉴뮤지엄 전시에서도 색서폰 연주자인 안드레 비다(Andre Vida)가 전시기간 동안 비디오 <오래된 슬픔>의 주변을 돌며 라이브 연주로 비디오 속에서 아파트 꼭대기의 창문에 몸을 내민 채 연주하는 재즈음악가 제밀 문닥과 듀엣을 이루는 퍼포먼스 <3-2-1>(2011)이 벌어지고 있다.
현재 파리와 베를린, 그리고 티라나를 오가며 작업하는 살라는 지역적인 노마드일 뿐만 아니라 공산권에서 태어나고 자라 서구에서 살고 있으며 유럽에서는 보기 드문, 이슬람 국가인 알바니아에 가족을 둔 사상적인 노마드이기도 하다.
전시장에서 만난 큐레이터 막시밀리아노 지오니(뉴뮤지엄 아티스틱 디렉터)는 “살라는 알바니아의 전통적인 화가 교육을 받은 작가로 음악을 사운드 효과로 쓰는 비디오작업에서도 그런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면서 “인물들 개인의 역사를 보여주는 손, 얼굴, 머리카락, 근육 등을 클로즈업하는 디테일이 음악과 어우러져 작가가 인간에 대해 가지고 있는 따뜻한 시각을 느낄 수 있다”고 밝힌다.
그의 작업은 예술이 사회에 참여할 때 작품이 어떻게 예술로서의 기능을 잃지 않고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가, 더 나아가 어떻게 자신의 운명과 그 운명이 가르쳐준 사회, 정치, 역사적 메시지를 예술로서 승화시킬 수 있는지를 훌륭하게 보여준다.●

WORLD REPORT | VADUZ TeleGen : Kunst und Fernsehen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있는 아주 작은 나라 리히텐슈타인 공국(公國) 파두츠미술관(Kunstmuseum Liechtenstein, Vaduz)에서 2월 19일부터 5월 16일까지 〈텔레젠:아트와 텔레비전(TeleGen:Kunst und Kernsehen), 이하 ‘텔레젠’〉이 열리고 있다. 이 전시는 동시대 시각예술에서 텔레비전이 가지는 의미를 역사적으로 고찰하고, 텔레비전과 예술 간의 다양하고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다.

텔레비전의 과거와 미래, ‘텔레비주얼’의 얼굴

김희영 국민대 교수, 미술사

이 전시는 독일 라이프치히 미술대학 (Academy of Visual Arts(HGB), Leipzig) 미술사-미디어이론학과 교수인 디터 다니엘스(Dieter Daniels)이 기획했다. 다니엘스는 예술과 음악의 관계에 관심을 갖고 미디어 역사와 미디어 아트를 연구해 온 인물로, 1984년 <본 비디오날레(Videonale Bonn)>의 창설자이며 ZKM(Zentrum fur Kunst und Medientechnologie)의 비디오소장 기획자로 일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미디어 아트 분야의 권위자인 다니엘스가 기획한 이 전시의 취지는 동시대의 다양한 예술적 실행 안에서 텔레비전과 예술 간의 유기적인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본 쿤스트뮤지엄(Kunstmuseum, Bonn) (2015.10.1~1.17) 전시의 순회전이기도 한 <텔레젠>은 텔레비전이 대중매체로 자리를 잡은 1964년의 상황에서 출발해 TV 형태와 채널이 다양해진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살핀다.
이 전시는 크게 역사적 부문과 현재 부문으로 나뉜다. 역사적 부문은 1960년대에 텔레비전 이미지 혹은 텔레비전 세트 자체를 오브제나 기록물로 다룬 작품들, 즉 비디오아트 출현 이전의 회화, 조각, 설치, 사진, 영화에서 보이는 텔레비주얼(televisual)한 양상을 다룬 작업들을 포괄한다. 현재 부문은 한때 지배적이었던 텔레비전 매체가 1960년대 초반부터 현재에 이르는 디지털화, 변종화, 매체융합의 시기를 거치면서 해체되는 징후를 다룬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텔레비전은 기술적인 대중매체일 뿐 아니라, 세계를 구축하는 도구로 이해될 수 있다. 즉, 사색을 위한 공간, 사회적 의미를 창출하는 방법으로 이해된다.
또한 <텔레젠>은 텔레비전과 시각문화 간의 관계가 격변해 온 과정을 예술가들의 반응과 연계하여 보여준다. 역사적인 자료와 현재의 작업이 서로 연결되면서 전개되는 7개의 장으로 구성된 다양한 작가들의 작업을 보여준다.
텔레비전의 이미지와 메커니즘을 다루기 시작한 1960년대의 자료와 작품을 보여주는 첫 번째 방은 ‘Once upon a time’의 주제로 제시된다. <텔레젠>이 마련된 미술관 2층 전시장에 들어서면 계단이 끝나는 벽 전면에 투사된 브루스 코너(Bruce Conner)의 〈Report〉(1963~1967)가 관람객을 맞는다. 이 작업은 텔레비전에 보도되는 사건을 다양하게 편집하는 초기 단계의 양식을 보여준다. 코너는 1963년 11월 22일 댈러스 시내에서 자동차 퍼레이드 중 암살당한 존 F 케네디(JFK) 대통령 암살 사건을 다뤘다. 그는 이 사건을 보도하는 TV 화면에서 이미지들과 소리들을 녹화하고 편집하여 실제 암살 장면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사건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독자적인 양식 실험을 제시하였다. 이 작업에 이어서 배우이자 작가 데니스 호퍼(Dennis Hopper)의 〈JFK Funeral Suite〉가 전시된다. 호퍼 역시 1963년 11월 JFK 암살 뉴스에 충격을 받고 텔레비전 화면으로 보도된 JFK 장례식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기록하였다.
한편 군터 웨커(Gunther Uecker)의 〈TV〉는 프랑크푸르트의 갤러리에서 그가 구입한 TV 수상기에 못을 박아 현대인의 소비와 텔레비전 청취 행태를 도전적으로 비판한 사건을 보여준다. 이처럼 텔레비전이 지배하는 문화를 거부하는 입장은 볼프 보스텔(Wolf Vostell)이 해프닝을 융합한 작업에서도 강하게 드러난다. 그가 텔레비전 수상기와 일상에서 수집한 철조망, 자동차부품, 신문 등의 오브제로 구성한 아상블라주 작업 〈Deutscher Ausblick〉(1958~1959)이 전시되었다. 보스텔은 이 작업을 대중매체의 소음을 분절시킨다는 의미에서 데콜라주(De-coll/age)라고 칭했다. 전원을 켠 텔레비전 수상기를 아상블라주에 포함시키는 작업을 처음 시작하였고, 이 작업의 파괴적인 요소는 이후 1963년 뉴저지에서 실행된 해프닝에서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는 텔레비전 수상기를 땅에 묻는 상징적인 작업인 〈TV-Burying〉으로 이어졌다.
이와 함께 1960년대 실험작을 소개하는 중요한 장이었던 부버탈(Wuppertal)의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1963년 3월에 전시되었던 백남준의 〈Exposition of Music: Electronic Television〉의 일부인 다음 네 작품을 <텔레젠>의 첫 번째 방에서 볼 수 있다. 〈Magnet TV〉(1965/1995), 〈Zen for TV〉(1963/1995), 〈TV Experiment(Mixed Microphones)〉(1969/1995), 〈Sound Wave Input on Two TV Sets(vertical/horizontal)〉(1963/1995)는 1960년대 초반 백남준의 선도적인 실험을 보여준다.
이 작업과 함께 전시된 〈Study I-Mayor Lindsay〉(1965)는 그가 1965년 뉴욕으로 이주한 직후에 홈비디오 녹화기(Sony CV-2000/TCV-2010)를 사용해 제작한 것으로, 텔레비전 방송을 직접 녹화한 이미지로 작업한 것을 텔레비전 스크린에서 다시 보여준 최초의 실험이다. 이 작업은 코너와 보스텔이 텔레비전에서 상영된 이미지를 필름에 녹화하여 편집한 이미지를 투사하는 방식과 구분되는 ‘랜덤 액세스(random access)’ 비디오 작업이다.
백남준 작업과 인접하여 전시된 존 케이지(John Cage)의 〈Water Walk〉 (1959)는 케이지가 텔레비전 토크쇼에 출연하여 실연한 퍼포먼스를 통해 소리에 대한 자신의 실험적인 접근을 대중에게 소개한 것으로 1960년대 전후 텔레비전을 통한 전위적인 실험을 대중적으로 공유하려는 보여준다. 이외에도 1960년대에 텔레비전 수상기나 텔레비전 화면을 다루는 폴 텍(Paul Thek), 톰 웨셀만(Tom Wesselmann), 파비오 마우리(Fabio Mauri)의 회화작품도 소개된다.
역사적인 실험 작품들로 구성된 첫 번째 방을 지나면 1960년대 이후 현재까지 텔레비전과 예술의 관계를 다각도로 살펴보는 작업이 펼쳐진다.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뉴스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언급, 과장된 사건 보도, 방송의 형식을 차용한 예술가의 입장 표명(크리스티앙 얀코브스키(Christian Jankowski), 〈Discourse News〉(2012)), 방송국의 권위에 대한 역설적인 발언(Caroline Hake, 〈Monitor〉(1998~2002)), 드라마의 인물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특정한 감정적인 동작(줄리앙 로즈펠트(Julian Rosefeldt), 〈Soap Sample〉(2000~2001)), 방송매체에 의해 조작된 이미지가 집단의 기억에 미치는 힘에 대한 발언(토마스 데만트(Thomas Demand), 〈Studio〉(1997)), 파편적인 텔레비전 광고이미지로 제시된 보통 사람의 일상(하룬 파로키(Harun Farocki, 〈Ein Tag im Leben der Endverbraucher〉(1993)), 텔레비전 수상기의 진화가 가져온 이미지의 변화 (사이먼 데니(Simon Denny), 〈Deep Sea Vaudeo〉(2009)), 인터넷을 통한 이미지 정보 수용을 다루는 작업(로버트 사크로브스키(Robert Sakrowski), 〈Analog Switch-Off〉(2015)) 등이다.
<텔레젠>은 1960년대 이후 텔레비전 매체가 발전하고 보급되면서 현대인의 시각문화에 미친 영향과 텔레비전 매체의 특정한 내용에 대하여 예술적으로 고찰한다. 향후 텔레비전 매체가 나아갈 방향과 형태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거울과 같은 기회를 제시한다. 이 전시는 협의의 텔레비전-비디오-아트 작업을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회화, 조각, 사진, 설치, 퍼포먼스, 비디오, 인터넷을 포괄하는 다양한 장르에 걸친 ‘텔레비주얼’의 의미를 통시적, 공시적으로 재고한 진지한 노력으로 평가된다. ●

위 Christoph Draeger & Reynold Reynolds <The Last News> 2002 MiniDV, transferred to DVD, color, sound, 13’00” Courtesy of the artists, Lokal30, Warsaw and Galerie Zink, Berlin

WORLD REPORT | LONDON Dislocations Remapping Art Histories

지난해 말, 영국 테이트모던에서 열린 <Dislocations: Remapping Art Histories>는 근현대 아시아 미술사를 탈서구적 시각에서 보고자 기획됐다. 모더니즘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현실적인 대안, 즉 다차원적 아시아 미술의 양상을 들여다보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총3부로 구성된 이 컨퍼런스의 토론 현장을 정리했다.

아시아 미술사 쓰기, 뒤집어보기, 연대하기

지가은 런던 골드스미스대학 비주얼 컬처 박사과정

서도호는 자신이 살던 집을 실물 크기의 천으로 본떠 모기장처럼 접어 가방에 넣고 세계 곳곳을 옮겨다닌다. 그의 서울집, 뉴욕집, LA집, 베를린집은 새로운 공간을 만나 매번 다시 지어진다. 때로는 복도나 통로를 따라 서울집과 뉴욕집 두 채가 나란히 이어지는가 하면, 한 집 안에 다른 한 집, 그 안에 또 다른 한 집이 들어앉아,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이 되기도 한다. 어린 시절을 보낸 한옥집, 유학 기간 생활하던 아파트, 해외 활동으로 머물던 스튜디오는 본래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와 전혀 다른 시공간의 지점에 안착하거나 연결된다. 반투명한 천으로 직조되어 집의 안과 밖을 구분해주는 경계와 조건들도 희미해진다. 이들은 집주인의 지극히 구체적이고 내면적인 기억으로부터 시작된 사적인 공간이면서, 새로 안착한 지점의 특수한 사회적, 역사적 맥락과의 관계 맺음과 대화를 촉발하는 상호적 공간이 된다. 또, 이를 마주하는 관객에게는 각자의 집에 대한 경험과 기억이 투영될 수 있는 보편적 공간으로 전치된다. 말하자면, 서도호의 이동하는 집들은 과거와 현재, 내부와 외부,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 문화와 문화, 나와 타자가 연결되고 교차하며, 그 안에 겹겹이 자리 한 무수한 이야기를 모두 담아내는 공간인 것이다.
지난 2015년 12월 3, 4 양일간 런던 테이트모던에서 열린 <전치: 미술사 지형도 다시 그리기(Dislocations: Remapping Art Histories)> 콘퍼런스는 서도호가 자신이 옮겨다니는 집 속의 집의 여정을 소개하는 것으로 그 포문을 열었다. 바로 이 여정이 본 콘퍼런스에서 풀어놓고자 하는 이슈들의 실마리를 꿰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안과 밖, 중심과 주변이라는 이분법적 경계를 허물고 이를 뒤집어보는 일, 전치된 시공간의 이질적 요소들과 수평적인 관계 맺기를 시도하고 그 안에서 나 스스로의 이야기와 본질을 찾아가는 일, 한 공간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겹겹의 개인적, 공동체적 기억과 역사의 이야기 망들을 연결해 보는 일이다. 핵심은 근현대 아시아 미술사의 복합적이고 다차원적인 양상을 탈서구중심적인 시각으로 접근하고, 미술사 쓰기와 실천의 수평적인 연대를 고민해보는 데에 있었다. 총 3부로 구성된 프로그램은 (1)퍼포먼스: 확장된 영역(Performance: An Expanded Field), (2)아시아가 만나는 지점: 중심부의 탈식민화(Where Asias meet: Decolonising Centres), (3)동시대 미술과 사회(Contemporary Art and the Social)로 진행되었다. 특히, 20세기 아시아 지역의 퍼포먼스와 사회참여적 미술 흐름을 집중 조명하는 사례 발표가 이어졌다.
20세기 아시아 국가들은 지역마다 특수한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전통과 환경 속에서 급격한 변화를 거쳤거나,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변화의 소용돌이를 통과하고 있다. 전쟁과 식민의 역사와 잔재,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경제 이데올로기의 충돌, 독재정권과 민주화의 갈등 등 저마다 다른 조건에서 전개된 아시아의 근대화 과정과 근대성의 개념은 단일한 형식이나 범주로 묶어 설명하거나 서술할 수 없다. 영국의 피터 오스본(Peter Osborne) 박사는 《시간의 정치학(The Politics of Time)》(1995)에서 근대성과 근대화 담론을 규정하는 시간성을 설명하면서, 연대기적으로는 같은 시간대를 공유한다고 하더라도 지리적으로 차별적인 공간에서 나타나는 비동시성을 지적한 바 있다. 각 지역의 다양한 문화적 토양과 형태에 따른 시간성의 국면에는 어떤 질적인 차이가 있는지, 이를 역사화하는 관점과 서술 방식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비서구권인 아시아가 서구권의 후발 주자로서 근대화되었다는 인식, 문화적 우위를 점한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그 영향력이 옮아간다고 보는 인식, 식민지와 피식민지라는 관계 설정 안에서만 전자의 역사 서술이 가능하다는 논리는 기본적으로 동질성과 지속성에 기반을 둔 역사적 시간과 서술 구조를 가정하는 것이다. 이는 미술사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그래서 예술의 중심부로서의 서구권과 주변부로서의 아시아라는 관계도를 탈피하고, 인과관계의 동질성이 아니라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 지역과 미술의 생태적 관계도를 그리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이러한 위치 재편의 과정은 다층적인 아시아 미술 지형도의 파편적, 구체적인 편린들을 모아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콘퍼런스에서 다뤄진 사례들은 주로 구체적인 지역적 움직임들을 풀어놓았다. 1부 <퍼포먼스: 확장된 영역(Performance: An Expanded Field)>에서는 전후 아시아에서 일어난 사회 비판적 어조의 퍼포먼스 미술 동향을 살펴보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 이그나시오 아드리아솔라(Ignacio Adriasola) 교수는 아라카와 슈사쿠(Arakawa Shusaku)의 활동을 중심으로 1960년대 일본의 퍼포먼스 미술을 소개하면서, 초현실주의의 ‘objet’ 개념이 아닌, 적극적인 관객 참여와 각성을 주도했던 ‘obuje’의 사회정치적 의미를 분석했다. 미시간 대학 티나 리(Tina Lee)는 계엄령이 선포되기 직전의 1970년대 필리핀 미술계가 처했던 억압적 사회 분위기와 이에 도전한 필리핀문화센터의 개관 기념 해프닝 <Cassettes 100>의 기록을 추적했다. 뒤이어, 뉴욕 대학 리 앰브로지(Lee Ambrozy)는 2000년대 이전 중국 퍼포먼스 미술의 흐름이 정부 검열과 통제 속에서 어떻게 타지역과 다른 개념적 행보를 보였는지 그 독자성에 주목했다. 퍼포먼스 미술은 현장 에너지의 즉각적이고 융합적인 특징 때문에, 보다 능동적인 공론화의 장을 생성하는 힘이 있다. 각기 다른 특수성을 지닌 지역 사회의 변혁을 위한 목소리와 행위를 담아내는 직간접적인 그릇과 도구로써, 퍼포먼스 미술의 수행성을 조명하는 것은 어쩌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그 사회의 내부에서부터 일어난 예술적 실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와 더불어 무엇을 할 수 있었는지를 들여다보는 일 말이다.
이어진 2부 <아시아가 만나는 지점: 중심지의 탈식민화(Where Asias meet: Decolonising Centres)>는 특히, 20세기 유럽중심주의적 관점과 거리를 둔 아시아 미술사 읽기와 쓰기의 자생적인 담론 형성과 방법론에 대한 고민을 촉발시켰다. SOAS대학의 파멜라 코리(Pamela N. Corey) 교수는 캄보디아가 식민, 전쟁, 독재, 민주화 등 지난한 역사를 통과하는 동안 프놈펜이라는 도시가 겪어야 했던 무차별적인 서구식 근대화의 흔적, 이에 따라 파괴된 시민들의 삶과 도시환경을 기록한 사진들에 주목했다. 그 안에 스며든 집단적 기억을 소환하는 사진의 역할과 매체성도 함께 짚어보았다. 그다음은 인도로 이동한다. 워싱턴 대학의 소날 쿨라(Sonal Khullar) 교수는 인도에서도 전통적 성향이 가장 강한 도시인 봄베이를 중심으로 활동한 1960~70년대 화가와 시인들의 관심사가 도시 거리 자체의 풍경과 일상으로 옮겨간 현상을 포착했다. 후기식민지 사회의 이러한 변화는 당시 예술가들의 빈번한 교류에 따른 결과물이었고, 본래 지역사회의 일상적 면면으로부터 새로운 형식의 주체성과 공동체 의식이 발현된 중요한 계기였다고 해석했다. 한편, 칼턴 대학 밍 티암포(Ming Tiampo) 교수는 전후 시기 파리를 교류와 통로의 공간으로 보았다. 그는 파리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던 이주 아시아 예술가들이 어떻게 일방적인 오리엔탈리즘을 해체하고, 역으로 파리 미술계에 영향력을 미치며 새로운 추상세계를 구축했는지를 세계 지도의 확장된 지면 위에서 추적했다. 이들의 행보 속에서 초국가적인 지역주의를 가늠할 수 있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선두주자와 후발주자라는 위계에서 비롯된 타자화된 담론 대신에, 아시아 미술 서사들의 비동시성에 귀를 기울이고 이 다성적인 이야기들의 교차 지점을 연결해보는 ‘매핑(mapping)’을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자생적이고 대안적인 담론들을 이끌어내보자는 것이다. 콘퍼런스의 컨비너 중 한 사람인 미시간대 조안 기(Joan Kee) 교수는 관성화된 양자 구도의 지형도에서 벗어난 도시와 도시 사이의 ‘이웃’ 맺기라는 연대 의식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는 서구와 비서구권 간의 상호 교류를 전제한 수평적 관계뿐만 아니라, 아시아 내 이웃한 미술 서사들 간의 교류와 연대를 포함하는 것이다. 내외부를 오가는 미술사 연구의 서로 다른 층위들을 병치하고 공유하는 기회 속에서 비로소 새로운 차원의 아시아 근현대 미술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매핑을 가시화하는 노력은, 끝으로 3부 <동시대 미술과 사회(Contemporary Art and the Social)>에서도 이어졌다. 중국 본토와 대만의 사회참여적 미술의 미묘한 관계와 차이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독립 큐레이터 쑤웨이(Su Wei)는 중국 정부의 정치적 검열 안에서 미술비평의 자기성찰과 참여의 의미란 무엇인가에 대해, 대만의 미술비평가이자 큐레이터인 루페이이(Lu Pei-yi)는 후기산업화와 민주화 시기 대만의 사회정치적 기후를 비롯해, 2000년 이후의 중국-대만 관계를 반영하는 사회참여적 미술의 특징적 면모에 대해 설명했다. 한편, 홍콩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 쩡보(Zheng Bo)는 중국 공산당의 정치적 이념극 무대와 오늘날 중화권의 사회참여적 미술의 연계성에 대해 성찰하고 그 형식과 내용의 동시대적 의미를 되물었다.
여러 지역과 주제, 작품을 아우른 이번 콘퍼런스의 목적은 20세기 미술사 서술에서 고착화된 중심부와 주변부의 의미와 개념을 전치시켜보는 것이었다. 이어진 패널 토론에서도 무엇보다 아시아 미술을 바라보는 미시적, 거시적 관점과 방법론을 한자리에 모아 새로운 연결고리로 맺어보는 이러한 시도가 지속돼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결국 이러한 연대는 서구 중심의 모더니즘 담론을 뒤집어 볼 수 있는 아시아 미술의 전통과 정체성이 무엇인가, 탈서구화된 담론의 실천이 가능한가라는 난제에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일 것이다. 지역 단위의 작은 이야기들이 이웃한 또 다른 이야기들을 만나고, 지리적 경계를 옮겨다니면서 아시아 미술을 재맥락화하는 움직임이 가시화되려면, 매개체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매개체는 도시 사이를 활발히 오가는 연구자들의 활동이 될 수도 있고 이들을 이어주는 플랫폼이 될 수도 있다. 콘퍼런스를 주관한 테이트 아시아 리서치 센터(Tate Asia Research Centre)는 2012년에 설립되었다. 이후 이숙경 리서치 큐레이터를 필두로, 한국, 중국,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의 근현대 미술 연구와 교류 활동에 주력해왔다. 올해부터는 ‘아시아-태평양 리서치 센터’에서 ‘아시아 리서치 센터’로 공식 명칭을 바꾸고, 서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지역까지 그 활동 범위를 확대해 나갈 방침이다. 센터가 지정학적 공동체라는 아시아 개념을 넘어 다양한 지역, 시기, 주제, 현상, 방법론에 대한 확장된 연구과 연대를 매개하는 주요 채널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

NEW FACE 2016 신정균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찾아서

“군대 전역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군대를 소재로 작업하냐?” 한국의 분단 현실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온 작가 신정균은 지인들에게 종종 이런 핀잔을 듣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전역 이후에도 1년에 한 번 예비군 훈련을 받고, 몇 년 전에는 훈련장에서 누군가 옆 사람을 총으로 쏴버려 큰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운이 좋아 다행이지 죽은 사람이 작가 자신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었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 중에서 분단 현실에서 자유로운 이가 누가 있을까?
첫 번째 개인전 <발견된 행적들>은 사회적 맥락과 과거의 교육 속에서 자연스럽게 내 안에 자리 잡은 이념의 실체를 직접 찾아보려는 시도였다. 아트스페이스 오에서 열린 두 번째 개인전 <알 수 없는 일>(2.12~27)은 자신에서 확장해 주변 사람들과 함께 일상에 작동하는 이데올로기를 찾아보는 과정에 해당한다. “제가 속한 세대는 윗세대처럼 6?25전쟁이나 민주화운동을 직접 겪지 않고 피상적으로 접했습니다. 그래서 뚜렷한 이념이 없는 것 같지만 일상과 주변에서 목격되는 일련의 사건들과 결코 동떨어있는 것은 아니죠.”
이번 전시에서는 간첩 식별요령을 토대로 작가가 만든 ‘작업 매뉴얼’이 전체적인 틀이 되었다. 작가는 매뉴얼대로 행하면서 남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고, 남들도 그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지만 사실 하나하나 뜯어보면 특별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전시장 한 켠에 설치된 방 <Numbers Station>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나열된 물건들은 일상에서 마음만 먹으면 구할 수 있는 것으로 특별한 개연성 없이 한곳에 모아놓은 것이지만 마치 간첩으로 추정되는 누군가의 은신처처럼 보인다.
작가는 한국 사회에서 금기시된 것과 아닌 것이 사실은 한 끗 차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그의 작업은 작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인식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오해를 받거나 불편한 지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작가는 이데올로기를 찾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를 몸소 체험한 셈이다. 작가는 특유의 재치로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경계를 교묘하게 넘나듦으로써 그 실체를 드러낸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재)번역된 시)>에서는 한국과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그대로 표출한 리창식의 시가 프랑스어로 번역되고 한국어로 재번역되는 과정을 거치며, 몽환적인 영상과 함께 프랑스 여인의 낭만적인 목소리로 전환돼 원래의 선동적인 문구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자아냈다.
전시가 열린 당시 때마침 북한의 핵 개발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인해 남북의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경색 국면을 치닫고 있었다. 작가는 졸업전 때는 연평도 포격 사건이 터졌고, 첫 개인전 때는 통합진보당 이석기 사건이 일어났다며 어찌 보면 한국 사회에서 늘 있는 일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일상의 풍경을 작업으로 다루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단다. “제가 하는 작업이 때로는 오해를 사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제가 이 작업을 계속하는 이유는 불안감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전쟁은 곧바로 그 정체를 드러내진 않지만 일상 속에 늘 내재되어 있어요. 그런 것들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도 없지만 잊고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슬비 기자

신정균
1986년 태어났다.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2013년 송은아트큐브에서 <발견된 행적들>을 시작으로 2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스페이스 K,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단체전과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 <유타국제다큐멘터리페스티벌> 등에 참여했다. 2014 일현 트레블 그랜트 특별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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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최전방> HD 비디오, 3분40초 2015 <(재)번역된 시> 텍스트에 시트지, 가변설치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