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함경아 <오데사의 계단>(왼쪽)나무, 폐기물 오브제 가변설치 2007 (경기도미술관 소장) 아래 ‘이면의 도시’섹션 전시장 전경
사회 속 미술 : 행복의 나라
ART IN SOCIETY : Land of Happiness
민중미술을 키워드로 풀어낸 <사회 속 미술: 행복의 나라전>이 5월 10일부터 7월 6일까지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계속된다. 이번 전시는 당대의 사회·정치적 이슈를 민감한 시각으로 잡아낸 민중미술 1세대 작가부터 2000년대 이후 활발히 활동하는 이른바 3세대 작가들의 작업을 한곳에 모아 주목받고 있다. 더불어 전시 타이틀에서 알 수 있듯 ‘민중미술’, ‘포스트민중미술’이란 용어를 제거하고 사회·문화적 시각에서 작품 간의 공통적 맥락을 이끌어내고 있다. 현장을 벗어나 미술관에서 ‘사회 속 예술’이란 이름으로 묶인 이 작업들은 과연 비평의 다양성을 어디까지 확장시켜나갈 수 있을까?
이중적 상징투쟁으로서의 민중미술
김동일 대구가톨릭대 교수
나에게 민중미술은 흡사 유령 같았다. 1980년대 말 집회에서 처음 접한 민중미술은 독재에 대한 저항으로 무섭게 타올랐다. 그 화염은 독재가 타도되었다던 1990년대 초 갑자기 사그라져버렸다. 민중의 시대가 왔다는데 민중미술은 오히려 꺼져버린 것이다. 그 민중의 시대가 이른바 문민정부라는 기괴한 가면 아래 위장된 것이었음이 밝혀진 후에도 그 불길은 다시 타오르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 민중미술은 더 유령 같았다. 누가 민중미술가이고 뭐가 민중미술인지 구별되지 않은 상태에서 ‘풍경화’가 민중미술의 지배양식이 되었다. 제주 바다, 금강산, 오대산, 설악의 자연은 독재에 대한 과거의 투쟁이 화랑에서 환전되는 가장 무난한 방식이 되었다. 화랑에서 성공한 (극)소수 민중미술가의 전시회가 오픈하는 날이면 인사동은 더 스산해졌다. 한때 그들과 함께, 혹은 그들을 따라 민중미술의 화염을 가슴에 품었던 사람들의 좌절이 거리를 배회했다. 2000년대의 민중미술은 더 이상한 유령으로 나타났다. 사회와 예술의 무력함 속에서 더 이상의 나락을 찾을 수 없는 젊은 작가들의 용기가 되살아났다. 많은 사람이 그들에게서 이미 사그라져버린 민중미술의 가능성을 보았고, 이른바 ‘포스트민중미술’이란 호칭을 부여했다. 그들 역시 자신들이 포스트민중미술으로 범주화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1980년대를 계승하지도, 2000년대의 새로운 민중미술도 되지 못한 채 진부한 코미디를 반복하는 듯한 인상이다.
〈사회 속 미술: 행복의 나라전〉은 1980년대와 2000년대 민중미술 사이의 관계성을 복원한다.
그 시도만으로도 이 전시는 훌륭하다! 미학적 ‘사생아’였던 포스트민중미술에 ‘친부’를 찾아준 격이다. 세대를 건너뛴 민중미술가들의 가족사진은 생각보다 잘 어울린다. 리슨투더시티의 〈옥바라지골목〉(2016)과 플라잉시티의 〈파괴의 땅에서 할 만한 일〉(2002), 김동원의 〈상계동올림픽〉(1988)은 십 수 년을 사이에 두고 개발과 철거가 반복되는 자본의 논리를 보여준다. 그 어울림은 ‘역사는 반복된다’는 주제로 묶인다. 비슷한 어울림은 ‘이면의 도시’, ‘행복의 나라로’ 섹션에서도 훌륭하게 반복된다. 그러나 그 감동적인 어울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전시는 과거의 민중미술이 왜 소멸했는지, 포스트민중미술이 선배들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밝히지 않는다. 소멸된 이유도, 다시 호명되는 이유도 모른 채 소집된 민중미술에서 예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미학적 성과를 전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전시장은 1980년대 민중미술에서 늘 과도하게 주인공 대접을 받던 작가들의 진부함과 2000년대 이후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는 세대의 자기만족적인 시도들을 섞어놓았다는 인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혼합은 단순한 식상함을 넘어 이 전시가 문제 삼는 ‘사회 속의 예술’이라는 미학적 지평을 허물고 있다. 예술과 사회의 관계는 사회적 현실을 예술의 소재, 주제로 차용한다거나, 예술을 사회운동을 위한 선전선동의 도구로 삼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문제는 예술의 정치성, 혹은 정치의 예술성이다.
정치는 다양하게 정의된다. 카를 슈미트는 정치를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행위로 보았고, 탈코트 파슨스는 목적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자원을 효과적으로 배분하는 행위로 보았으며, 브뤼노 라투르는 네트워크의 재구성으로 보았다. 정치에 관한 서로 다른 서술은 궁극적으로 예술과 사회의 재구성으로 귀결된다. 예술이 사회의 조성을 바꾸고, 그 변화는 다시금 예술 개념의 확장으로 환류된다. 정치란 예술과 사회의 변화를 매개한다. 1980년대 민중미술의 불꽃이 절정에 달했을 때, 민중미술은 예술과 사회를 함께 변화시켰다. 1980년대 민중미술이 소멸한 이유는 민중미술의 지형이 제도권 편입에 성공한 소수의 스타와 정당한 미학적 평가를 거부한 채 민중의 삶 속에 스며들거나, 집회의 선전물로 휘발해버린 익명의 다수로 양극화하면서 예술과 사회의 환류가 깨졌기 때문이다. 민중미술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인정과 성과들을 독점했던 스타들의 ‘배신’과 그에 대한 대다수 민중미술가의 ‘증오’가 상호 작용하면서 민중미술은 거대한 허무의 텅 빈 공동(空洞)으로 황폐해져 갔던 것이다.
민중미술은 이중적 상징투쟁이다. 민중미술은 전시장을 중심으로 한 예술장 내부 투쟁과 이른바 현장으로 호명되는 사회공간에서의 외부 투쟁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그 결합을 통해 예술 개념은 진보했고, 또한 사회공간은 민주화라는 벅찬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민중미술의 제도권 내부 투쟁이 젊은 청년 미술가들의 외부 투쟁을 ‘배신’하고 외면했을 때, 민중미술은 실패했고, 학고재, 가나화랑, 가람화랑의 상품으로 전락해버렸다(난 아직도 그 도록들을 버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2000년대 이후 새롭게 등장한 포스트민중미술은 1980년대 민중미술의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다소간 회의적이다. 그것은 이 전시의 한계라기보다는 냉정하게 봤을 때, 포스트민중미술이 아직 예술에 대한 사회의 요구와 사회에 대한 예술의 대응을 담보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성장하지 못한 현실 때문이다. 믹스라이스, 리슨투더시티, 옥인콜렉티브, 노순택, 정윤석, 박찬경의 노고는 여전히 인상적이지만, 현장과 예술의 환류를 지탱하기엔 힘겨워 보인다. 고승욱, 김상돈, 홍성민, 조습의 재치와 유머 역시 후기민중미술의 중요한 성과임에 틀림없지만 주재환이나 오윤의 풍자에 비할 때 뭔가 새로워 보이지 않는다. 이들에게 사회공간의 폭력적 위계구조를 재구성하기 위한 예술의 확장보다는 사회 속에서 과잉 자각된 개별 작가의 자아가 더 도드라져 보인다. 그러한 자아의 확인이 민중미술의 역사에서 중요한 성취라는 데 이견이 없지만, 그 성취는 이른바 예술계가 부여하는 인정과 명예에 쉽게 도취되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들에게 사회 속으로 뛰어들어 사회의 구성을 바꾸는 빅뱅의 폭발점을 기대하기에는 그들의 내면이 여리고 약하고 섬세해 보인다. 그 섬세한 자아는 거친 삶의 현장보다는 전시장이라는 공간에서 더 편안해 보인다. 그들은 어렵게 얻은 인정과 도취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이쯤에서 솔직히 말하겠다. 그저 민중미술을 사랑하고 민중미술가들에게 더 많은 기대를 걸고 있는 평범한 관객으로서 나는 사실 이런 종류의 전시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과연 ‘전시장’이 그러한 미학과 사회공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예술가들의 가열찬 왕복운동을 포착하기에 적합한 그릇일까’ 하는 의문 때문이다. 적합하지 않은 그릇이 민중미술의 미학적 파괴력을 합당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이젠 도심보다 더 도심스러운 변두리 아파트 동네 한복판에 세워진 근사한 미술관에서 열리는 민중미술 전시라니. 전시장은 권력을 도입한다. 근사한 미술관의 근사한 전시장이 그렇게 근사해지기 위해서 권력과 자본을 필요로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전시장을 통해 틈입하는 권력과 자본은 실상 상계동에서, 옥바라지 골목에서 철거민들을 거리로 내몰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민중미술가들은 전시장 밖의 거대한 권력과 싸우면서도 정작 전시장을 통해 투영되는 권력 앞에서는 저항하지 못한다. 예술의 미학적 파괴력을 두려워하는 권력과 자본은 늘 그런 식으로 예술과 예술가들을 길들여왔고, 예술가들은 또 그렇게 자신들에 대한 요구를 배신해왔다. 그도 그럴 것이 1980년대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했던 미술가들이 그들이 원했던 민주화된 사회가 도래했을 때 발견한 것은 정작 헐벗고 가난한 상태로 내팽개쳐진 자신의 모습이었다.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미명 아래 정작 자기 자신은 예술가도 운동가도 아니었고, 자신들이 제작한 ‘찌라시’들은 투척된 돌멩이들과 함께 거리를 나뒹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시장으로부터의 호명은 얼마나 달콤했을까? 그들은 그렇게 무력화되어 간다. 예술가들이 그렇게 무력화되어 갈 때 사회를 변화시키는 예술의 힘은 소멸되어 간다. 이미 지난 몇 년간 사회참여형 예술가들이 〈올해의 작가상〉, 〈에르메스 미술상〉등을 수상할 정도로 우리 예술계의 지형이 변화했지만, 그 변화가 무색할 정도로 민중의 삶을 억압하는 권력과 자본의 힘은 커져가고, 예술가들은 돈 앞에 더 교활해져가고 있다. 사실 나는 최근의 이 ‘난데없는’ 민중미술 부흥의 배후가 지속적인 상품의 공급을 요구하는 미술시장과 그 수요를 지금까지 늘 저평가되었던 민중미술로 대응하려는 시장 세력들, 그리고 시장가치와 미학적 평가에 목말라 있는 민중미술가들의 욕망이 공모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물론 시장중심적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면서 그러한 공모를 반드시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날 새롭게 제기되는 예술과 사회의 환류 요구에 대처하는 정당한 방식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민중미술이라는 단어는 근본적으로 미학과 사회공간을 왕복하는 운동을 지칭한다. 민중미술은 그 왕복 운동 속에서 사회공간을 재구성하고 그렇게 재구성된 사회공간은 예술을 재규정한다. 민중미술은 예술과 사회 사이의 환류를 향한 끊임없는 자기 변화를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전시는 매우 제한적으로 읽혀야 한다. 이 전시는 ‘사회 속의 미술’을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그것도 전시장에 적응 가능한 형태만을 소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 점을 망각할 때 이 전시는 민중미술의 ‘무덤’ 혹은 ‘종말’이라고 회자된 〈민중미술 15년전〉(이하〈15년전〉)이라는 유령의 또 다른 버전에 불과할 수도 있다. 〈15년전〉은 아주 조금만 민중미술적이었던 것들, 혹은 전혀 민중미술적이지 않은 것들에 민중미술이라는 보편적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정작 다수 민중미술가에게서 민중미술을 빼앗아버렸다.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제도미술의 정점에서 행해진 〈15년전〉이 민중미술의 무덤이 되는 역설이 거기에 있다.
1980년대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사회를 변화시키고 예술의 정의를 재규정하고자 하는 많은 시도가 도처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 시도들은 공공미술, 뉴장르공공미술, 커뮤니티아트, 장소특정성미술, 예술행동주의, 상황주의, 스125202.jpg 등으로 개념화되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삶 속에서 권력과 자본의 작동을 관찰, 폭로, 경계하면서 사회 속에 침투해들어가고 있다. 중요한 것은 민중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수행되는 예술과 사회 사이의 운동, 그 운동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사회의 민주화와 예술개념의 진보를 적절하게 포착하는 비평적 지평을 확보하는 일이다. 민중미술의 선배와 후배세대를 아우르는 적지 않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전시를 매우 제한적인 범위에서만 인정하는 이유는 우리가 충분히 주목하지 못한 시도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1980년대의 ‘두렁’과 ‘광자협’은 여전히 방치되어 있다. 권력/자본과 대결했던 2005년 〈오아시스 프로젝트〉, 2012년 〈부평구 갈산동 421?1 콜트콜택전〉의 울림은 여전하다.
민중미술이란 어찌 보면 서로 반대편을 비추는 한 쌍의 거울인지도 모른다. 즉 미술을 통해 가능했던 사회의 민주화 그리고 민주화된 사회에서 가능해진 예술의 해방은 하나의 동전을 지탱하는 서로 다른 면들이다. 나는 이 전시를 그 두 면을 잇는 작업의 소중한 일부로서 이해하고 싶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사회 속 예술의 의미를 되묻고 민중미술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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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사회 속 미술 : 행복의 나라〉를 기획한 두 주역
기혜경(왼쪽) 북서울미술관 운영부장과 신은진 큐레이터
최근 민중미술계열 작가 개인전 및 단체전이 연속해서 열리고 있다. 일각에선 서울시립미술관이 ‘민중미술’을 주제로 전시를 열면서 미술시장의 흐름에 편승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이 시점에 민중미술 전시를 개최한 이유는 무엇일까?
기혜경 비슷한 시기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열린 〈가나아트 컬렉션 앤솔러지전〉(5.3~2017.7.31)과 연결해 이번 전시를 보는 시선이 있다. 그 전시는 2001년 가나아트 이호재 대표로부터 기증받은 200점의 컬렉션 안에서 작품을 선정해야 했다. 반면 〈사회 속 미술: 행복의 나라〉는 그 컬렉션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기획전으로서 전시에 부합하는 작업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민중미술이 시장과 국제 미술사 안에서 판을 만들어가는 상황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고민했다. 이번 전시는 시장과 연동한 전시가 절대 아니다. 그렇지만 그 동향과 전혀 무관하게 진행됐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적어도 시장에서 원치 않는 불편한 내용이 있는 작업이더라도 미술사에서,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를 미술관다운 방식으로 풀어내려 했다.
신은진 이번 전시에 출품된 70여 점 중 서울시립미술관 컬렉션이 37점, 그중 가나아트컬렉션은 10점 뿐이다. 미술계라는 프레임을 벗어나 전시를 바라보기를 원했다. 문화사회적인 부분에서 ‘민중미술’을 재조명한다면 건설적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번 전시 중 사회비판적 내용을 담은 ‘역사는 반복된다’ 섹션의 작품을 보면 동시대 뉴스 타블로이드에 나오는 사건 사고와 30년 전 이슈가 일치하는 지점이 많다. 세대론이 만연한 시점에서 세대를 넘어 공유하는 메시지가 있다는 점을 부각하고 싶었다. 이를 위해 연대순의 구성을 피했다. 현재 30대인 젊은 작가와 민중미술 1세대가 30대에 한 작업을 함께 전시했다.
이번 전시는 역사화 맥락을 배제한 의도가 돋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회 속 미술’이라는 거친 범주 안에서 일부 작가는 ‘사회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작가’로 묶기에 한계가 있지 않나?
기혜경 전시명 자체가 다소 거친 것은 사실이다. 민중미술이 작가의 태도 측면에서 지금까지 지속된다는 지점을 보기 위해 제목에서 ‘민중미술’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민중미술’이라는 무게감을 덜고자 했다. 그러면서 사회 속에서 사회에 대해 발언하고 간섭하고 틈을 벌리고 그로부터 새로운 대안을 생각하게 하는 미술의 태도를 묶으려 했다.
신은진 여기서 사회란 ‘시스템 비판’에 가깝다. 국가의 이데올로기에 스며든 무의식적인 권력과 시스템에 대해 발언하는 작가를 보여주고자 한 지점이 있다.
1980년대 활동한 1세대 민중미술 작가들은 거대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취한반면 요즘 30~40대 작가는 대부분 개인의 메시지에서 시작해 사회적 발언을 하고 있다. 이 두 태도가 한자리에 모여 맥락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기혜경 민중미술을 동시대의 흐름으로 보겠다고 했을 때 이러한 전시 구성은 기본적으로 갖는 한계이자 상황일 수 있겠다. 한편으로 1980년대와 1990년대 이후 세대의 작업적 특징을 따로 분리해서 보아야만 하는가? 선배 세대와 후배 세대 작가는 작업을 대하는 태도에 분명 유사점이 있다. 현재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1980년대 작업을 역으로 찾아갔다.
신은진 2004년 이영철 선생이 기획한 〈당신은 나의 태양전〉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다른 분야를 흡수 통합하고, 출구를 열어보려는 노력을 했던 것 같다. 각 섹션별 작가의 태도는 분명 다르다. 1990년대 이후 각자도생이 미술계 흐름이라고 하지만 주재환, 박이소는 집단의 흐름 속에 있는듯하면서도 본인만의 컬러를 보였다. 사사(SaSa)가 1년간 본인이 먹은 설렁탕 그릇 수를 세는 작업을 한다 해서 사회적 메시지를 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1990년대, 2000년대에 들어 작업의 중심이 작가 자신에게로 귀착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사회담론 속에서, 미학의 흐름에서 찾을 수 있다. 박이소, 사사, 양아치, 최정화의 작업을 한 공간에 두고 그들의 스토리 변화를 읽어내면 훨씬 재미있는 전시의 스펙트럼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현장의 작업을 보여 줄수 있는 부분은 최열의 아카이브, 동시대에서는 현장사진가-대자보식의 텍스트와 사진-의 자료로 현장성을 강화했다. 리슨투더시티가 작가인지 아닌지에 대한 고민들을 넘어서 옥바라지골목에 대한 내용은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 미술관으로 들어오는 것에 의의를 뒀다. 이처럼 여러 코드를 읽으려고 했다.
전시에서 신은진 큐레이터의 큐레이팅 색깔이 확실히 드러나는 것 같다. 이전에 기획한 〈서울바벨전〉과 이번 전시를 연결해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신은진 사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서울바벨〉의 ‘형아뻘’ 되는 전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젊은 작가들이 가진 고민이 지금은 지엽적이라고 생각되지만 선배세대 작가들이 가진 고민과 일맥상통하리라 보았다. 큐레이터로서 그들이 작업을 대하는 태도를 비슷한 시각으로 바라본 측면이 있다.
그렇다면 이번 전시의 중심을 사회적 발언을 하는 1~3세대 작가들의 만남으로 봐야겠다.
기혜경 민중미술 3세대까지의 작가를 함께 다루자고 했을 때 신은진 큐레이터가 이들의 연결고리를 ‘박이소’에서 찾는다고 했다. 박이소라는 키를 통해서 달라 보이지만 같은 작가의 태도를 한곳에 모을 수 있다는 점은 전시의 중심축이다.
신은진 1층에 최민화, 최원준, 노재운 박찬경의 작업이 놓인 곳 바로 위층에 박이소의 〈풀〉이 놓여있다. ‘대안공간 풀’과 ‘그냥 〈풀〉’의 만남. 이번 전시의 숨은 디테일이다.
임승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