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작가소개 

[SPECIAL ARTIST] 이호인

좋은 그림, 좋은 화가의 진가와 덕목은 ‘손’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손’보다 ‘눈’이 더 중요하다. ‘손재주’ 보다 세상을 바라보는 화가의 ‘시선’이 바로 좋은 그림의 실체다. 이런 명제라면 이호인의 그림은 좋다. 따라서 그는 좋은 눈을 가진 화가다. 과잉된 미술형식과 이미지가 범람하는 디지털 시대, 풍경화로 표출되는 이호인의 그림에 담긴 ‘힘’의 원천을 추적해 본다.

[ARTIST REVIEW] 유현경

작가 유현경이 보내온 포트폴리오 PPT 파일에는 총 571장의 작품 사진이 있다. 그녀의 시선은 늘 ‘사람’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작가에게 그들은 단지 재현의 대상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모델과 대면하면서 발생하는 다양한 감정선에 집중한다. 그래서 유현경의 그림은 ‘그 사람’에서 출발하지만 언제나 ‘ 유현경 ‘ 에게 도착하면서 끝이 난다.

권순영 || 사진 : 박홍순

[SPECIAL ARTIST ] 권순영

작가 권순영의 그림은 이중적이다. 순수와 잔혹, 아름다움과 추함, 유년과 성년, 현실과 판타지, 웃음과 눈물, 폭력과 희생, 이성과 감성의 이미지가 혼재되어 있다. 순수의 잔혹함이 반영된 그의 그림은 사회와 인간 내면의 이율배반적 상황을 적나라하게 표출한다.

[ARTIST RIVIEW] 이수경

이수경 | 사진 박홍순 

이 수 경

1969년 출생했다. 덕성여대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고 동대학원 불문학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2010년 프랑스 국립아트센터 L’H du Siège에서 열린 개인전을 시작으로 다수의 개인전 및 그룹전에 참여했다. 프랑스 카르게넥 성(Domaine de Kerguéhennec)(2015) 등의 레지던시에 있었다. 현재 프랑스와 벨기에, 한국을 오가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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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문과에 재학 당시 “시의 상징적이며 순결한 언어”가 좋았다는 이수경. 작가가 된 그녀는 이제 펜이 아닌 붓과 물감으로 캔버스를 노트 삼아 時를 쓴다. 밝고 선명한 색채로 명징하게 칠해진 표면에 쌓인 수많은 선들은 색면 추상회화인 동시에 모종의 공간을 형성한다. 세련미가 돋보이는 색채의 배치, 리드미컬하게 나뉘어진 색면에서 작가의 예술적 감각이 한껏 느껴진다. 장소에 관계없이 자신만의 세계로 전시장을 변주하는 작가의 작품을 만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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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라 인코그니타’로 가는 여정
글 : 박영택 | 경기대 교수

프랑스 Châteaugiron 3 CHA Contemporary Art Space에서 열린 개인전 〈A claire-Voice〉(2016.9.16~2016.11.19)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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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경의 회화는 캔버스의 평면을 채우는 선명하고 밝으며 쾌적한 색채들과 명료한 선들로 이루어져 있다. 납작한 표면에 물감/색채와 선으로만 이루어진 전형적인 추상회화다. 여기서 선은 붓질의 궤적을 품고 있고 일정한 방향성만을 지시하며 선이자 색면의 역할을 한다. 또한 바탕 면과 그 위에 올려진 선/그려진 부분은 내·외부의 구분이 없이 혼재되어 상호 겹치고 얽혀있다. 따라서 전경과 후경, 그려진 부분과 배경의 차이와 위계는 무너진다. 색채로 물든 배경 위로 유영하는 선, 그물망 같기도 한 것들은 가장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그리기, 선긋기, 칠하기의 욕망을 막막하게 펼쳐 보인다. 특정 형태를 지니지 못하고 다만 선으로만 자족하고 색채로만 빛을 낸다. 그런 의미에서 이수경의 이 그림은 거의 생득적이고 본능적인 차원에서 작동하는 그림으로 다가온다. 그래선지 작가는 자신의 이번 전시 제목을 ‘테라 인코그니타(Terra Incognita)’라고 기명했다. 이는 아직 개척되지 않은 미지의 땅, 아무도 밟지 않은 땅을 뜻하는 라틴어라고 한다. 그러니까 작가는 자신의 그림 그리기, 그러니까 백지상태의 캔버스 위에 붓질의 흔적을 남기는 행위를 다름아니라 자신만의 테라 인코그니타를 찾아가는 것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모든 그림은 구상이든 추상이든 무의 공간에서 다소 막막하게 출발한다. 작가들은 저마다 자기 앞에 자리한 그 공포 같은 화면을 무엇으로 채워나갈지 고민하게 되고 결국 그 공간을 힘겹게 채워나가면서 무엇인가를 표현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결과를 예측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저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림 그리는 일은 삶과도 같다. 내 앞에 펼쳐진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것들을 순간순간 겪어나가면서 이를 다만 필연적으로 끌어안고 지내는 것이 삶이듯 그림 역시 매 순간, 순간 우연에 기대어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

 

추상회화란 주어진 화면에 외부세계를 연상시키는 구체적인 이미지가 사상된 것을 말한다. 아울러 그것은 주어진 회화의 존재론적 조건만을 탐구하기도 한다. 이른바 모더니즘 회화가 그것일 것이다. 현대회화는 (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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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월간미술 > vol.402 | 2018.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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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천민정

 

천민정(Mina Cheon)과 볼티모어미술관(Baltimore Museum of Art)에 전시 중인 천민정의 작품〈Happy North Korean Children〉과〈Happy North Korean Girl〉 (Photo credit: Justin Tsucalas, copyright Plaid Photo)

예술에 표현의 성역은 없다고 하지만 우리에게 북한은 예외였다. 그렇기에 ‘한국 작가’보다는 좀 더 자유로운 위치에서, ‘김일순’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북한을 주제로 한 ‘폴리팝’을 선보여온 한국계 미국인 작가 천민정의 위치는 독보적이다. 그의 작품은 정치와 이념을 넘어 북한사람의 삶과 권리를 이야기하며 평화와 한반도 통일에 대한 대안적 해법으로 ‘어머니의 사랑’을 제안한다.이처럼 천민정은 모든 예술이 정치적이지만 사실 예술이 정치보다 언제나 앞서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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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너머 출렁이는 폴리팝의 달콤함
최금수 | 전시기획자, 이미지올로기연구소 소장⠀⠀⠀⠀⠀⠀⠀⠀⠀⠀⠀⠀⠀⠀⠀⠀⠀⠀⠀⠀⠀⠀⠀⠀

 

섬이다. 한반도의 반쪽을 차지하는 대한민국은 3면이 바다에 둘러싸이고 북쪽은 비무장지대로 가로막힌 이념 절벽이라 안타깝지만 참말로 섬이 맞다. 물론 깊은 원한이 맺혀있기에 사람들은 그 절벽을 너무나 아파하고 원망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냉전의 결과인 분단이 장기화하면서 서로에 대한 미움은 미성숙한 국가의 내부통치를 위해 이용되었다. 그 결과 남과 북이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법적으로 금기시하고 대치 상황은 일상적인 위기감으로 변절되었다. 그리고 근 7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 섬나라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익숙해진 불안감을 즐기며 너무나 평온한 일상을 살아간다. 기나긴 적응의 세월 탓에 북에 대한 이질감은 무관심으로 변했으며 구체적이지 않은 막연한 두려움만 출렁일 뿐이다.

천민정 〈Umma Rises: Towards Global Peace〉 Yves Klein Blue Dip painting, on archival digital print on canvas, 30×40 inches, 2017

지난겨울 이후 한반도 상황은 남북 교류를 모색하며 분단의 위기와 긴장이 해소될 거라는 낭만적 기대에 부풀어 있다. 이제 섬나라를 벗어나 대륙을 누빌 철도를 준비하기도 하며 예전 ‘낭만적 통일론자’들의 어눌한 발언이 무색할 정도로 무지갯빛 급류를 타고 있다. 정치적 통일이야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국가들이 풀어야 할 과제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몇 년 새 냉전의 기억을 추스르는, 민족분단을 주제로 하는 예술가들의 작품 발표가 잦아지던 차에 한국현대미술에서도 작금의 해빙 분위기는 심상치 않다. 국가적 통일이야 쉽지 않겠지만 종전협정 체결 또는 민간교류의 물꼬가 조만간 트일 듯한 조짐이 체감되기에 예술가들의 ‘분단 해소’를 위한 노력들이 부각되고 있음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코리안 아메리칸 미디어아티스트 천민정의 작품에서도 기나긴 분단이 결과한 오해와 폭로의 함성이 가득하다. 미술사적 양식에서 보자면 사회주의권 선전화(宣傳畵)와 현란한 팝아트를 섞은 당당한 형상과 선명한 색상들 덕분인지 천민정의 프로파간다는 무척 힘이 있고 감각적으로 밝다. 그리고 섬나라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환경을 넘어선 입장이라서 그런지 그의 상상력은 매우 자유분방하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미지들이 과감하게 등장하는 그의 작업은 섬나라 관람자의 입장에서는 결코 편안한 그림은 아니다. 더구나 두 개의 이질적인 나라가 지루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어느 쪽인가를 선택하려는 습관에 젖어있는 섬나라 사람들에게 천민정의 작품은 다소 공포심을 일으키기도 한다.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전체주의 또는 민족주의적 상징 풍경들은 예술의 영역을 벗어나 정치적 선전물로 가치관을 교정하려는 작업의 일환처럼 사명감 또는 부담스러움을 조장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천민정은 이 부담스러움을 해결하기 위해 달콤한 롤리팝을 끌어들였다. 무지갯빛 회오리를 담은 미끈미끈한 롤리팝은 미디어아티스트 천민정에 의해 폴리팝(POLIPOP ; Political Pop Art)으로 변환된다. 그 달콤함으로 중화시킨 이념적 이미지들은 곧바로 몽환적인 천민정의 이미지 세계로 들어오라고 재촉한다. 이미 알고 있지만 천민정은 정치인이 아닌 예술가임을 다시금 확인시키는 절차인 것이다. 이제야 두 개의 나라 어느 편도 아닌 예술의 영역에서 차분히 작품을 감상할 여유가 생긴 셈이다.

이탠 코헨 갤러리(Ethan Cohen Gallery) 뉴욕에서 열린 천민정 개인전 〈UMMA : MASS GAMES – Motherly Love North Korea〉 전시 광경 Ⓒ Ethan Cohen Gallery and the artist

 

‘김일순 교수’가 전파하는 어머니의 사랑

그리고 김일순. 낯설지만 익숙한 이름의 김일순은 천민정이 고안해낸 가상의 인물이다. 그의 직업은 ‘화가, 해군사령관, 농부, 학자, 교수, 두 아이의 어머니이며 하나의 인간’이다. 때때로 천민정은 김일순이 되어 “세상은 북한의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파한다. 김일순의 등장과 함께 구비된 선물들은 층층히 쌓인 1만 개의 초코파이와 미술사 강연을 동영상으로 저장한 USB이다. 마치 북한에 살포하기 위해 날리는 비닐풍선에 넣어졌던 내용물들처럼 북한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전해지는 달달함과 호기심을 담고 있다. 그렇지만 김일순의 그간의 행보를 보자면 체제 풍자꾼이라기보다는 인간애를 바탕으로 한 평화주의자에 가깝다. 그 달달함과 호기심의 범위가 북한이라는 특정지역으로 좁혀진 것은 사실이나 최근에는 ‘모성애’라는 지도자적 품성에 더 심취해 있는 것을 볼 때 김일순은 민족분단 때문에 잊고 살아온 ‘촌스럽지만 당당한 어머니’로 좀 더 건강한 미래에 대한 생각들을 설파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역시 천민정의 예술세계에서 가상활동으로 실재의 행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천민정 〈김 교수의 미술사 수업 시리즈〉 8’12” 영상 스틸 컷 2017

더구나 작품 속에서 가상인물 김일순의 아들 ‘김시운’과 딸 ‘김시아’가 북한 어린이로 등장하는데 이들 또한 수고롭게 직접 분장한 천민정의 친자녀다. 이 해맑은 어린이들은 끊임없이 ‘행복’에 대해 되묻게 하는데 이는 굳이 한반도에 국한할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천민정은 이에 대해 “그림 속에 보이는 행복한 얼굴은 각 나라마다 행복의 정의가 다를 수 있고 딱 한 가지 방식으로 정의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 면에서 천민정의 작품 배경이 되는 풍경들도 북한의 달력 사진이나 선전화 등에서 따온 것인데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천민정 〈김 교수의 미술사 수업 시리즈〉 8’12” 영상 스틸 컷 2017

최근 김일순 교수는 북한 주민과 어린이를 위한 10회의 미술사 강연 동영상을 제작하여 USB에 담았다. 그 강의의 주제는 ‘미술과 인생’, ‘미술과 음식’, ‘미술과 돈과 권력’, ‘추상미술과 꿈’, ‘페미니즘, 우리는 평등한가’, ‘미술, 삶의 문제, 그리고 사회정의’, ‘리믹스와 차용미술’, ‘미술과 기술’, ‘미술과 침묵’, ‘미술과 환경’ 등이다. 제목만 보아도 인간의 삶에 대한 철학적 문제를 짚는 내용이다. 더구나 미디어아티스트 천민정의 발랄함이 더해지면서 캐릭터와 영상의 짜임이 유명 유튜버 수준을 넘고 있다. 얼핏 무거운 주제들인데 밝은 미래를 생각하는 김일순 교수의 섬세함이 느껴진다.

천민정 〈김 교수의 미술사 수업 시리즈〉 8’12” 영상 스틸 컷 2017

2017년 이텐 코헨 갤러리 뉴욕에서 열린 〈엄마: 매스게임-어머니의 사랑으로 북한을(UMMA: MASS GAMES – Motherly Love North Korea)〉 (2017.10.20~1.11)을 보면 천민정은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더욱 명료해지도록 노력하는 것 같다. 특히 ‘엄마 UMMA’라는 이미지를 빌려 한반도를 넘어 세상의 모든 자식을 끌어안으려는 시도인데 그가 염두에 둔 실천적 미술행동에 좀 더 다가서는 느낌이다. 단기간 소모되는 정치적 예술이라기보다는 인류애를 바탕으로 한 예술영역에서의 정치적 발언인 셈인데 김일순의 품성으로 보아 충분한 현명함을 지녔을 것이라 짐작된다. 단지 걱정되는 것은 아직도 존재하는 섬나라 사람들의 어설픈 편견이다.

〈UMMA : MASS GAMES – Motherly Love North Korea〉 전시에 선보인 〈김 교수의 미술사 수업 시리즈〉 설치 전경 Ⓒ Ethan Cohen Gallery and the artist

몇 달 전만 해도 막막했던 남북관계가 개선되고 있음을 반기면서 예술가로서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21세기 들어 세계 예술에서 무수한 다양성을 확보한 것은 실로 고무적인 일이다. 한국현대미술계의 환경 또한 많이 넓어진 것이 사실이다. 어차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모든 예술은 정치적이다.’라는 해석을 내릴 수도 있겠으나 분명 예술과 정치의 다름을 느낀다. 때때로 예술보다 정치의 속도가 너무 느림을 한탄하기도 하지만 인간의 사회적 삶에 서 반성의 계기를 만드는 예술이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으리라는 신뢰는 여전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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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민 정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화여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메릴랜드 미술대학 이미징&디지털 아트 석사, 스위스 유럽대학 대학원 연계과정(EUFIS)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철학 박사를 받았다. 인사아트센터(2005), C. Grimaldis 갤러리(볼티모어 2008), 성곡미술관(2012), 트렁크갤러리(2014)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국내외에서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현재 미국 메릴랜드 미술대학(Maryland Institute College of Art) 교수로 재직하며 이탠 코헨 갤러리 소속 작가로 한국과 미국에서 활동 중이다. 올해 9월에 열리는 〈2018부산비엔날레〉에 참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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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미술 >⠀Vol.401 | 2018. 6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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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ARTIST] 김호득

 
작가 김호득은 한국 회화사의 지평을 넓혀온 인물이다. 지필묵이라는 전통을 바탕으로 설치에 이르기까지 형식의 영역을 확장시켰고, 내용면에서도 ‘폭포’로 대표되는 자연을 모티프로 한 그림을 통해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그의 그림은 자연의 본질을 꿰뚫는 혜안과 원숙한 감각의 결정체를 보여주는 특유의 필력으로 ‘현대적 동양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동양회화의 동시대성과 추상성을 동시에 획득한 김호득의 작품세계를 탐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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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과 환영을 빨아들이는 공간

박영택 | 경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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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득 〈계곡〉(오른쪽) 광목에 먹 119×251cm(각) 2017

나는 김호득이 1990년대 초반에 자연을 소재로 그린 일련의 그림을 제일 좋아한다. 산과 계곡, 풀들의 형태를 슬쩍 빌려 그 생명체들이 마냥 뒤척이는 기미, 격렬한 떨림과 동세를 전달하는 그림이었다. 그것을 가능한 한 온전히 전하려는 붓과 먹, 간간이 개입한 채색은 대단한 테크닉과 통감각적인 맛을 안겨주는 것이어서 눈이 번쩍 뜨였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그의 그림 소재는 줄곧 자연이었다. 그는 결코 자신을 둘러싼 외부세계, 즉 자연을 떠난 적이 없다. 좁게는 산, 계곡, 물, 폭포, 들, 풀, 꽃에서 받은 인상인데 단지 형태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퍼드덕거리는 떨림이나 기미를 낚아채는 그리기로서, 일종의 비시각적인 것의 가시화란 난제를 필획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였다고 본다. 사실 모든 그림이란 궁극적으로 가시성의 세계를 매개로 비가시성의 세계를 암시하는 것이지 않은가? 작가는 이후 바람, 빛, 속도와 시간, 문자, 혹은 움직임과 같은 세계로 적극 옮겨갔지만 이는 자연의 구체적인 형태를 매개로 하는 작업과 항시 반복되고 있다. 사실 이 둘 사이의 경계는 좀 애매한 편이다. 왜냐하면 그가 즐겨 그리는 <폭포>를 예로 들면 그것이 자연을 대상으로 한다 해도 결국 그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형(形)으로부터 애초에 떠나 있는 것이자 그것이 목적은 아니기에 그렇다. 그렇다고 이른바 모더니즘에 입각한 추상은 아니다. 그가 평면성이나 물성, 극도로 환원적인 성격의 회화를 지향한 적은 없다. 극소의 필흔과 온통 먹으로만 채워진 종이나 수조작업 역시 자연현상을 환기하거나 보이지 않는 자연의 미세한 기운과 관자의 신체를 상통하게 하려는 배려이기에 그렇다.

김호득 〈흔들림 – 문득〉 가변설치 2018 〈산산물물〉이란 타이틀로 열린 갤러리분도 개인전 설치광경

초기에 그의 작품의 모티프는 자연풍경이지만 결국 화면 위에 남는 것은 선과 먹의 흔적이고 그것들이 요동치면서 자연의 한 순간의 생동함을 펄떡거리는 생선처럼 안기는 그림이었다. 폭포와 계곡, 세차게 흐르는  물, 시커먼 바위, 산과 나무, 풀과 꽃이었다. 그리고 구름과 바람, 먼지와 열기 같은 것들로 나아갔다. 그림 속에 구체적인 이미지는 뚜렷하지 않은데 작가는 하나의 물체를 표현함에 있어서 군더더기가 없는 최소한의 요약을 추구하며, 좁게 끌어안으면서 그 본질을 건드리고자 했다. 그래서 자연을 보는 시점을 극단화하면서 관자의 눈과 몸을 대상의 내부로 ‘확’ 끌고 들어가는 편이었다. 매우 미시적인 접근이다. 그래서인지 그림에 무서운 속도감이 있고 세찬 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바람이 불고 나무와 풀들이 뒤척이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물이 흐르고 꽃이 피어나는 소리, 벌레들이 윙윙거리는 소리, 자연계의 모든 살아있는 것이 부산스럽게 피어오르고 흔들리고 살아나는 그런 소리, 모종의 기미와 운동과 호흡과 떨어댐을 작가는 몸으로 따라간다. 결코 고정시킬 수 없는, 지속적인 흐름 속에서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세계의 안타까운, 조바심 나는 현전이다. 그림은 결국 한 작가의 몸의 더듬이가 포착한 세계상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예민한 감성과 몸, 신경으로 포착하고 떠낸 세계를 표현해내는 데, 기술하는 데 먹과 붓을 사용하고 그 재료가 더없이 그 표현을 용이하게 해주거나 효과적이라고 보는 이다. 그리고 그 붓과 먹을 쓰되 좀 재미있게 질리지 않게 상투적으로 고정되거나 관습화되지 않게 변화를 거듭해온 이기도 하다. 이 점이 그의 돌올한 존재감이다. 동양화란 결국 선의 예술이다. 그 선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있다. 단지 사물의 외형을 지시하거나 표현하는 데 결코 머무르지 않는 그 선은 묘사를 뛰어넘어 어떤 기품의 경지로 내달린다. 보여줄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근원을 향해 마구 질주하는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먹이 붓에 의해 한지/광목의 표면(내부)으로 잠식해 들어가면서 멈춘 어떤 상황성을 안기는데 그게 흡사 자연에서 받은 인상이 되고 자연과 생명현상의 장엄하고 신비하며 뜨거운 어떤 순간을 목도케 한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보는 이의 감성을 자극하고 정신적 활력을 건드려서 고양된 정서와 쾌감을 준다. 그림이 표면이 아니라 그로부터 떨어져 나와 어디론가 활달한 정신적 비약을 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전통적인 동양화가 지닌 궁극의 지향점이었다고 본다. 그림은 매개가 되고 고리가 되어 관자들은 이를 징검다리 삼아 저 세계로 비약하는 정신적 활력을 갖는 것, 따라서 그림은 망막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것, 마음 안에서 요동치는 것 말이다.

김호득 〈문득 – 폭포 ㄱㄴ〉 캔버스에 먹 130×162cm 2011

그는 동양화 재료를 확장시킨 대표적인 작가로 기억되지만 여전히 지필묵이 중심이다. 먹의 깊은 어두움과 붓 내지는 먹과 물을 실어 나르는 여러 재료(일부러 망가트린 붓과 딱딱한 종이의 단면, 콩테, 손가락 등)를 가지고 한지, 광목천, 갱지나 캔버스 천 위에 생생하고 격렬하게 더러 침잠되고 더없이 고요하게 흔적을 남긴다. 생천에 아교 칠을 하거나 아예 그 천 자체에 직접 시술하기도 한다. 특히 무엇보다도 입자가 성글고 평평한, 이미 포근한 색 자체가 깃든 광목을 즐겨 사용한다. 광목은 일정한 두께를 지닌, 바탕 면 자체가 오브제로 가설되어 필과 먹의 얹힘을 종이와는 달리 보여준다. 광목은 흡수하기보다는 뱉어내는 편인데 그것이 신체의 감각을 필선으로 전달하는 데 용이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나아가 한지를 뭉친 종이죽에서 먹을 머금은 한지를 구겨서 뭉쳐놓은 것, 종이죽을 계속 칼로 이겨서 도마 위에 찰떡처럼 붙여놓은 오브제나 먹물 묻은 종이를 구겨 응고시키고 나무판에 붙여놓아 수묵을 오브제화하기도 한다. 이것은 그리기보다 훨씬 촉각적이고 생생한 손의 감각을 구체적으로 전달한다. 그러니까 손가락과 손바닥의 힘이 묘하게 조절되면서, 예측할 수 없는 우연적인 상황 아래 기기묘묘한 형태를 지닌 것들이 불쑥불쑥 나온다. 이후 공간으로 나아가 시각과 촉각의 공감각성을 극대화하게 되는데 2009년부터 본격화되는 입체와 설치작업이 그것이다. 사실 이 시기부터 그는 ‘측량할 길 없는 근원적 생명’이란 주제의 작업을 공간으로 확장시키고자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이나 마음의 흔들림, 그리고 우주의 기운과 삶을 관계 짓는 사이, 우연히 떠오른 생각 혹은 찰나적 깨달음 등을 어떻게 가시화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고 보는데 이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의 그림에 반영되었지만 이 시기에는 그것이 공간에 설치화, 오브제화되고 있다는 점이 특별해 보인다. 일정한 크기의 광목이나 한지를 빨래처럼 널고 그 아래쪽에 먹물을 풀어놓은 수조를 만들어놓는 식이다. 잔잔히 흐르는 물, 현재라는 시간의 흐름을 보는 이들에게 고요히 목도하게 하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의 결을 느끼게 하는 등 주어진 공간에 있는 관중의 몸을 감싸는 환경에 예민하게 반응하게 하는 작업이다. 그것은 지금, 현재라는 그 찰나의 시간에 잠기게 하는 것이다. 이를 지바 시게오는 “한지, 물, 먹 따위 한없이 비물질화되기 쉬운 재료를 써서 공간의 움직임, 흔들림, 혼돈을 억제하려 시도한다.”고 평한다. 관자의 신체가 공간에 투여되고 여기에 놓인 오브제들과 공모관계로 엮이는 상황 설정이 작가의 의도인 셈이다. 이는 결국 물질과 비물질,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경계를 넘나드는 체험을 겪게 한다. 그것은 모든 것의 가능태로서의 공간, 생성태로서의 활성적 공간, 무한한 잠재성으로 들끓는 공간 연출이다. 지극히 얇고 어둡고 몇 개의 단서 같은 붓질이 던져진 것들 사이에서 마구 피어나는 활력의 미세한 흐름을 감지하게 하는 것이 그의 그림이었음을 상기해보면 이 설치가 그의 그림과 같은 어법 아래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김호득 〈겹 – 사이〉 광목에 먹 74×121cm 2013

묘사를 뛰어넘은 선(線)의 경지 이번 갤러리분도에 전시된 작업은 2014년 전시와 거의 동일해 보인다.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을 이용해서 그려낸 산수화의 변형된 그림은 흡사 겸재의 금강산 그림을 연상시키는데 화면 가득 필세만이 차있다. 평면작업과 설치작업이 함께 선보이고 광목에 힘찬 필선 몇 개로 그려진 그의 대표작 <폭포>도 빠짐이 없다. 지바 시게오의 표현대로 “폭포의 형태가 아니라 폭포가 있는 공간 전체를 표현”한 그림으로서 “어떤 형태가 되려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이 움직이는 사물이 되고 있다.” 작가는 광목 위에 검은 먹과 붓질 그리고 물을 가지고 모종의 행위를 수행하고 있고 그 행위가 화면에 모종의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그것은 외부세계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계와 무관한 상도 아니다. 광목천의 표면에 응고되고 스며들고 들러붙은 얼룩들이 그대로 매력적인 상황, 사건을 만들어낸다. 우리들은 기꺼이 누런 광목천 위에 먹물이 문질러지고 스며들고 번져나가거나 튕겨진 자취를 통해 모종의 상황을 연상할 수 있다. <폭포>라는 제목을 달았기에 이를 통해 무서운 기세로 쏟아지는 물줄기와 그 굉음, 부서지는 물보라, 그로 인해 움찔하는 내 몸이 감각들, 주변의 자연공간의 떨림을 추체험하게 된다. 화면은 무한한 생성과정을 가장 간소한 꼴로 보존하며 일종의 역동적 이미지로서 무한한 풍부 그 자체를 보여준다. 이는 일부분만 보여주는 전략이다. 나머지는 관람자로 하여금 상상하게 한다. 보여주는 것보다 상상하게 하는 것이 그 대상을 좀 더 잘 보게 하는 일이다. 그림을 바라보는 이들로 하여금 기억을 반추시키고 꿈꾸게 하고 회상과 여운 속에서 사물과 대상을 추려내게 하는 것이다. 망막으로 모든 것을 보고자 하는 시(視)욕망을 짐짓 억누르고 망막 이외에 몸이 지닌 다양한 감각기관과 정신적 활력을 통해 상상하고 지각하게 한다. 나는 이 폭포 그림과 같은 것이 그가 제일 잘하는 영역이라고 본다. 사실 그는 이를 무한히 반복하고 있다. 그래서 이전에 윤규홍의 지적처럼 그는 “자신의 패턴으로부터 진화되어 나온 새로운 패턴이라는 역설”을 시도하는 작가다.

김호득 〈폭포〉 광목에 먹 120×81cm 2017

우리 화단에서 많은 이가 김호득을 “한국 동양화계가 처해있는 난관을 헤쳐 나갈 남다른 처방전을 가지고 있는 작가”(박춘호)로 인식하고 있다. 동양화를 동시대의 현대미술로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욕망이 큰 그는 그런 시도를 지속해왔고 일정한 성과를 내왔다. 그러나 새삼 그의 1990년대 초 이후 작업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그의 현란한 여러 시도가 동시대 현대미술과의 여러 유사성 아래 풀려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독자성은 자연에서 받은 감흥을 그만의 필력으로 전달하는 데서 나오는 감각인데 그것이 이후 동시대 현대미술에서 엿보이는 유사한 설치, 연출 작업들과의 친연성 아래 풀려나오는 것은 다소 아쉽다. 전통적인 동양화 재료를 통해 이미 익숙해진 타 장르와 엇비슷한 것을 시도한다고 해서 그것이 동양화작업의 현대화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한 ‘동양화의 현대적 작업’ 이란 과제 같은 것도 지나치게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고 본다. 하여간 그래서인지 그는 여전히 그의 득의작이라고 여기는 <폭포>( 구체적인 자연이미지를 매개로 한)를 빼놓지 않고 선보인다. 나는 그 <폭포>가 시간이 지나고 무르익을 대로 익어서 아주 곤죽이 될 때까지 나아가는, 현기증 나는 경지를 만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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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호 득 

1950년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6년 관훈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40여회 개인전을 열었다. 제22회 금복문화상, 제15회 이중섭미술상, 제2회 토탈미술상, 제4회 김수근문화상을 수상했다. 영남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교수를 정년퇴직하고 현재 경기도 여주에서 작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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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ARTIST] 박재철

 
동양화가 박재철의 그림에 담긴 시선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해서 사회로 확장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소소한 일상에서 길어 올린 박재철의 사유는 특유의 회화적 형식을 거쳐 독보적인 형상회화로 완성된다. 박재철은 광주은행에서 제정한 〈제2회 광주화루〉에서 대상작가로 선정됐다. 이를 계기로 작가 박재철의 과거 작품세계와 현재 모습을 살펴본다. 4월 11일부터 5월 7일까지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문화창조원 복합6관)에서 열리는 〈제2회 광주화루〉10인의 작가전에서 박재철의 작품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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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철의 서사회화

김최은영 | 미학, 경희대 겸임교수

박재철 〈비천한 길Ⅰ, Ⅱ〉 한지에 먹, 채색 162×130cm(각)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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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무엇이냐?’ 물었다. 원론을 묻는 것 외에 ‘당신, 동화작가이기도 하지요?’ 라는 속내가 포함된 질문이다.

박재철의 시각예술작품과 동화책 양쪽 모두를 좋아하는 필자에게 작가론을 쓰는 것은 내심 부담스러운 일이다. ‘좋아한다.’라는 개인적 취향 때문에 객관성을 잃으면 어쩌나 하는 점도 적지 않은 고민이지만, 더욱 큰 문제는 감정을 무장 해제시키는 박재철의 글쓰기를 익히 알고 있다는 데 있다. 시각예술을 문자언어와 음성언어로 옮기면서 미학적 살을 붙이는 것이 필자의 직업이다. 간혹 이론으로 중무장한 작가를 만나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리 당혹스러운 일은 아니다. 오히려 작정하지 않은 진솔함으로, 허술한 말솜씨로 전달되는 진심을 목격할 때 곤혹스러운 글쓰기가 되리라 직감하게 된다.

요즘 미술계에 흔한 단어인 ‘일상’이란 낱말 없이 그려진 박재철의 1998년 작품 〈박이야〉, 〈마셔〉, 〈난 나비야〉를 다시 본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박재철 개인전, 서남미술전시관, 1999) 회화적 장식 없이 그려진 수묵의 손 위에 작은 박이 심어진 화분이 놓였다. 화면 위에 흐릿하게 글을 적었다. ‘박이야’, ‘고마워’. 뻗은 두 손 위엔 소박한 박 바가지에 수묵과 대조적으로 파란색 물이 시원하게 담겼다. 화면 귀퉁이, 말풍선에 작은 글이 적혔다. ‘마셔’. 활짝 핀 박꽃의 수분을 돕는 붓질을 하는 작가는 ‘난 나비야’라는 상상과 현실을 화면에 동시에 담았다. 동양화에 대한 새로운 담론과 현대적 계승으로 미술계에 온갖 실험이 득실거릴 때 박재철은 화면에 달랑 손 하나, 화분 하나, 그야말로 소소한 일상을 담았다. 이데올로기도 없고 시대적 담론도 없다. 화자(話者)의 시선은 온전히 일상 안에 있었고, 그 일상의 작은 것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기존에 학습한 필법과 각종 규칙을 버리는 것으로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박재철이다. 방법을 버린 후 남는 감성에 대해 깊이 고민한 작가는 서양철학과 미학, 사회학 등의 강좌를 돌다 가장 하찮은 행위의 하나인 그림을 소박하게 하기로 마음먹고 일상을 마주했다. 각각의 화면으로도 읽히는 이야기는 작품을 연이어 보면 서사구조가 더욱 도드라진다. 먹과 물(水墨)만으로 그려낸 박과 인물은 화려하고 윤기 나는 장식 없이도 감정이 살아 있고, 새싹인 박과 꽃을 피우는 박, 바가지가 된 모습까지 연속성을 담고 있지만 소박한 구성이 억지스럽지 않고 편안하다. 동아시아 미학 중 의경(意境)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직접적이면서도 간접적이고, 확정적이면서도 불확정적이며, 형상적이면서도 상상적이라는 데에 있다. 1 박재철의 작품은 특정한 형상의 직접성, 확정성, 감수성을 지니면서도, 상상의 유동성, 개방성을 지니고 있다. “사물의 의미를 빌려 살아가면서 겪는 삶의 의문을 얘기해보는 방식을 취한다.” – 박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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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철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책 《봄이의 동네 관찰일기》와 《팥이 영감과 우르르 산토끼》(길벗 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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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철은 회화뿐 아니라 동화작가로서의 역할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풀어간다. 구전동화를 재해석한 〈팥이 영감과 우르르 토끼〉는 읽는 이에 따라 선악의 구조가 바뀔 수 있다. 나쁘고 좋은 것으로 양분된 흑백논리가 아닌 나쁜 것과 더 나쁜 것을 고르거나 입장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이야기가 된다. 〈행복한 봉숭아〉는 관찰이란 단순히 어떤 대상을 보고 기록하는 일이 아니라 대상의 본질을 꿰뚫는 연습을 하는 일로 풀어내준다. 생각하게 하는 글과 그림인 셈이다. 작가는 고백처럼 생계형(?) 동화작가라 말하지만 필자는 동화 역시 그림과 마찬가지로 박재철의 생각을 담아내는 하나의 채널로 보인다. 그림으로 표현한 문학은 그의 그림 속 서사와 많이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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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철 〈나비 물을 만나다〉 화선지에 먹, 채색 91×116cm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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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철의 그림 속 서사는 〈15년 만에 숨을 쉬는 남자〉와 〈울지 못하는 남자 1, 2〉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아물지 않은상처〉 박재철 개인전, 갤러리 H, 2016) 이제 그는 일상을 소재로 그리고 있지만 단순히 일상 자체가 주제인 작품이 아니다. 대표적으로 비교될 만한 작품은 〈울지 못하는 남자 1, 2〉와 첫 번째 개인전의 〈스위티를 맛있게 먹다〉이다. 공원의 벤치 위에 앉은 남성은 화면 구조에서 다분히 유사성을 갖는다. 젊은 그는 정면을 바라보며 웃고 있다.(〈스위티를 맛있게 먹다〉) 여백이라 불릴 만한 화면처리는 주변보다 인물 자체에 집중한 표현으로 읽힌다. 밝은 표정과 손과 옷의 꼼꼼한 붓질은 작가가 주목하여 공들인 대상이 그 자신에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중년의 그는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보고, 벌거벗은 몸은 허술하기만 하다.(〈울지 못하는 남자〉) 남자와 벤치 주변에는 공원용 꽃나무가 잘 정리되어 있고, 보도블록마저 장식으로 꼼꼼하게 채워졌다. 콜라주처럼 구성된 화면 곳곳에는 깨진 액자 속 결혼사진, 움켜쥔 천 원짜리 지폐 등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짐작 가능한 요소들이 산재한다. 이 요소들은 특정한 감정과 연상을 유도하며 줄거리를 엿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 몇몇은 화면 전체의 분위기를 퍼뜨리고 성격을 만들어낸다. 다시 말하자면 공원의 벤치, 남성, 꽃나무 등의 형상은 그대로인데 작가의 마음에 따라 화면에서 전혀 다른 기능을 수행한다. 이러한 화면 요소는 대부분 함축적 의미가 포함된 환경과 줄거리, 세부 묘사, 표정, 눈빛, 손짓 등 언어를 갖추고 있다. 형상은 뜻에 따라 변하고 뜻은 감정의 발산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보는 동아시아 화론으로 읽어도 무방하겠다. 2 여기서 박재철 회화의 간단한 표현 방식을 아이처럼 그리기로 읽어내는 오류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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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철 〈울지 못하는 남자Ⅰ〉 화선지에 먹, 채색 130×162cm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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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철 〈15년 만에 숨을 쉬는 남자〉 화선지에 먹, 채색 91×116cm 2016

 

〈스위티를 맛있게 먹다〉의 청년에서 〈울지 못하는 남자〉가 되어버린 중년 작가의 시선은 개인에서 사회로, 개별에서 보편으로 확장된다. 특히 〈비천한 길〉 연작은 상징과 서사가 공존하는 새로운 국면의 채널을 동시에 보여주는 박재철의 신작들이다. 공공의 공원, 아파트 단지 내의 그곳은 여전하다. 이제 주인공은 울지 못하는 남자가 아닌, 공원을 장식하는 나무들과 환경들이다.
아파트 단지에 조경해놓은 나무는 가지와 뿌리가 절단되고 심어진다. 아마도 운반의 편리와 아름답게 보일 목적으로 다듬어졌을 것이다. 아이러니한 건 이렇게 상처 낸 나무를 다시 살아나게 하려고 천을 감고 쓰러지지 않게 버팀목을지지하고 영양제를 꽂아 놓는 일이다. 아이러니로 서있는 이런 나무에서 작가는 강요된 삶을 살을 살아온 자신을 보았다고 고백한다. 3 박재철은 이 연작에 등장하는 소재에 대한 해석도 서슴지 않는다. 의자는 쉬는 것, 지폐는 자본, 보도블록은 길 등 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추어 본 개체들을 잘리고, 꺾이고, 상처 입은 후의 모습으로 재현하면서 전혀 다른 감상과 생각을 제시한다. 일상이 모아지고 축적되어 형성되는 삶의 태도나 관념에 대해 서술한다. 사회적 약속과 규범들, 공공(혹은 가족)을 위한 개인의 희생 등 시각예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생각이 깊이로 인해 추상화된 사유의 작용들을 말이다.

 

박재철 〈이 나비는 무엇을 쫓는 걸까?〉 화선지에 먹, 채색 91×116cm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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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붓질은 작가가 긴 세월 숙련을 통해 얻은 동양화 필법을 버리기 위해 시작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복잡해진 화면은 서사적 구조로 풀어야 할 작가의 목소리다. 복잡해진 화면은 아주 많은 대상을 포함하기 때문에 이미 여러 겹과 여러 가지의 표상이 서로 짜여서 하나로 엮이게 된다. 대상들은 화면에 직접 병치되거나 대비되면서 시각적으로 공간성과 예술성을 부여하기도 하고, 다층적이고 다각적인 사색을 제공하기도 한다.

박재철의 이러한 서사공간이 회화이든 글이든 그만의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창작자가 선택할 수 있는 우월한 경우의 수를 여러 개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박재철의 시각예술은 창작의 공간을 마련하고 동화라 불리는 그의 글들은 두 가지 이상의 장면을 연결해서 깊은 생각을 일으킨다. 시각적 공간과 깊은 생각은 사실 글과 그림 양쪽 모두에 해당하니 필자의 창작 폭은 박재철의 그것보다 작음에 틀림없다.

‘그림은 무엇이냐?’ 물었다. 필자의 우문에 박재철 작가는 현답을 준다. ‘나의 존재감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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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재 철

1968년 태어났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첫 개인전은 1999년 서남미술전시관에서 열었고, 두 번째 개인전은 2016년 갤러리 H에서 열었다. 쓰고 그린 어린이 책으로 《봄이의 동네 관찰 일기》, 《행복한 봉숭아》가 있고, 그린책으로 《통일의 싹이 자라는 숲》, 《연습학교》, 《옛날에 여우가 메추리를 잡았는데》 등이 있다. 현재 경기도 김포에서 작업하고있다.


1 푸전위안, 《동아시아 미학의 거울 의경》,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13. p.117.
2 形勢豈有窮相, 觸則無窮. 심종건, 《개주학화편芥舟學畵編》권1.
〈산수山水〉 중 〈용필用筆〉
3 박재철 작가노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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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ARTIST] 김세진

 
미디어 아티스트 김세진은 거대담론과 미시세계 사이를 오간다. 자본주의 사회의 심화 단계에 진입한 동시대 신자유주의 환경 속에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개인의 내밀한 모습을 포착한다. 공공영역의 이면에 존재하는 엄중한 역사적 현실에 감추어진 개인의 일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고있다. 그가 영상으로 포착한 이미지는 영화적 표현과 다큐멘터리의 객관적 시선이 혼합되어 있다. 독특한 영상언어와 스크리닝으로 자신이 주장하고자하는 메시지를 선명하게 전달하는 김세진의 작품세계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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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피에 관한 연대기(Chronology about the bad blood)〉 싱글 채널 HD 비디오, 5.1 채널 서라운드 사운드, 12분 50초 2017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는 〈신여성 도착하다〉에 출품된 작품과 작가 김세진 | 사진 : 박홍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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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피의 연대기〉, 불리거나 사라짐의 통로

이단지 | 독립 큐레이터

〈나쁜 피에 관한 연대기(Chronology about the bad blood)〉 2017 스틸 컷

 

〈나쁜 피에 관한 연대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출발해 보자. 가방을 들고 길을 떠나는 여자의 뒷모습. 저 멀리 명랑한 달빛이 잔잔한 바다의 파도를 비춘다. 카메라는 서서히 뒤로 빠진다. 배우의 모습 너머로 배경 스크린에 그려진 붉은 바다가, 마이크가, 촬영용 모니터가, 카메라 레일이 등장한다. 덕수궁미술관 〈신여성 도착하다〉 전시에서 소개된 작품의 실제 주인공이 1951년에 사망한(사망했다고 추정되는) 한국 최초의 여성 소설가 ‘김명순’이라는 사실은 이 비디오를 김세진의 작업 중 가장 ‘영화’적인 것으로 만든다. (1896년 평양에서 출생한 김명순은 진명여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동경 국정여학교에서 1년 수학하고 귀국하여 숙명여학교에 편입, 1917년에 졸업하였다. 동경음악학교 재학 등의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1951년 4월 일본 청산(아오야마) 뇌병원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소설로 〈조모의 묘전에〉, 〈처녀의 가는 길〉, 〈꿈 묻는 날밤〉, 〈돌아다볼 때〉등 15편이 있다. 1925년 한성도서에서 출간한 창작집《생명의 과실》이 있다.)

(모든) 영화는 우리에게 재현 가능한 것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그것이 어떤 시대이든 인물이든, 어디까지가 재현 가능한 것인지, 한계 지점에는 무엇이 있는지, 한계에 닿았을 때 드러나는 것, 혹은 한계를 통해 사라지는 것은 무엇인지, 혹은 그 곳에서만 발생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같은 질문들을 말이다. 더구나 영화가, ‘아직 우리에게 당도하지 않은 대상에 대해 질문한다는 것은 어떠한가. ‘당도하지 않은’ 것은 비단 미래나 과거에 대한 상상일 뿐 아니라 알지 못하는 현재에 대한 기대를 포함한다. 사실 나에게 ‘움직이는 이미지’는 늘 -혹은 대부분의 동시대적 예술 경험이란 늘- 그런 것이다. 재생되는 순간부터 예측하지 못하는 다음 장면을 기다리는 응시의 연속이며 동시에, 채 종결되지 않은 과거의 순간을 다시 확인하려고 애쓰는 현재를 느끼는 일 말이다. 오늘의 글은 〈나쁜 피에 관한 연대기〉를 중심으로 김세진의 영화를 구성하는 대상과 (비)재현을 위한 영화라는 물질성에 대해 적어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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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파크(Victoria Park)〉 2 채널 비디오, 3분 53초 2008

높은 집세에 지낼 곳이 없어 주말 낮 시간을 공원에서 보내는 홍콩의 어린 식모(〈빅토리아 파크_ 2006〉), 좁은 의자에서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는 고속도로 톨게이트 징수원과 건물 경비원(〈야간 근로자_ 2009〉), 잘 정리된 미술관의 한 켠에서 공간을 응시한 채 서있는 전시장 지킴이(〈도시 은둔자_ 2016〉)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김세진은 인물에 기대어 어떤 시간들을 담아낸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유령들. ‘제7의 인간’에서 존 버거가 이야기하듯, 그들은 태어나지도 않으며 양육되지도 않고 나이 먹지도 않으며 지치지도, 죽지도 않는다. 실존에 대한 김세진의 다큐멘터리들은 시스템의 선택과 망각된 익명, 그 사이를 부유하는 실존에 주목함으로써 근대 이후 ‘개인’이라는 개념이 순간적이고 미시적인 ‘상태’로 전환되는 지점을 보여준다. 미술관에서 찍은 〈도시 은둔자〉에서 잠시 스쳐간 사물들을 떠올려본다. 세제통과 걸레처럼 창고 안의 어딘가로 들어가 있어야만 하는 건조한 대상들 말이다.

이제는 사라진 한 소설가, 어림잡아 1967년 전에 작고한(1951년에 사망했다고 추정되는) 인물을 우리는 어떻게 만날 수 있나? 사라진 망자를 호명하는 영화들을 상기해 볼 때 흔히 배우의 모습이나 목소리는 인물의 실재성을 보강해줄 수 있으리라는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기실 이러한 방식은 허구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 뿐이다. 영화는 심지어 우리가 그것을 보는 동안에도 지워지고 사라진다. 〈나쁜 피의 연대기〉는 (그러한 성격을 보여주는) 좋은 예인데, 왜냐하면 실존했던 소설가에 대한 재현의 조건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은 (반대로) 부재한다는 것을 보여줄 뿐, 또는 영화는 단지 재현된 것만이 아니라 재현 가능성 자체를 다루기 때문이다.

비디오의 주인공 김명순은 근대 시기 기생의 딸로, 외군 장교에게 강간당한 어린 여학생으로, 여성 소설가로, 자유연애에 대한 스스로의 생각으로 인해, 탄생과 사망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자신의 자리에서 추방당한 여성이다. 김세진은 오직 스스로가 남긴 글 안에서만 살아 있는 소설가를 위해 배우의 연기와 화면의 쇼트, 서사를 암시하는 듯한 오리지널 사운드, 내레이션 등, 지극히 영화적인 문법으로 인물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영화는 현실을 보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허구임을 영.화.화하는 것이다. 작가의 카메라는 존재의 은밀함을 파괴하는 일이며 대상이 망각될 권리를 부정할 수밖에 없다는 패러독스 위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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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근로자(Night Worker)〉 2 채널 HD 비디오, 6분 58초 2009

뒷모습과 목소리

나는 〈나쁜 피에 관한 연대기〉를 두 번 봤는데, 첫 번째는 덕수궁미술관의 전시장에서 봤고 그다음 번은 작가에게받은 비디오 링크를 모니터에 띄워 놓고 헤드폰을 낀 채 봤다. 두 번의 경험 안에서 영화는 영상/비디오 트랙과 사운드/오디오 트랙, 두 개의 중심으로 확연히 분리되었다.

김세진은 〈밤을 위한 낮〉, 〈도시 은둔자〉 등 대부분 작업에서 대사나 내레이션 없이 정적과 공백의 흐름으로 서사를 만들어 왔다. 스크린은 하나의 화면을 반사하는 분할된 면들과 분절된 싱크로 흩어지며 관람자의 동선을 만들어낸다. 무빙 이미지, 편집, 프레임, 현장의 스크린 싱크 플레이, 공간의 조명설치 등으로 전달하던 ‘시각적 서사’에 비하면 이번 작업은 ‘낭독 영화’라 말할 수 있을 만큼 매우 청각적이다.

무엇이 ‘시각적 서사’를 청각적 서사로 이동하게 했을까. 소설가 김명순이 1951년에 죽지 않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어딘가에 생존하여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완성한다는 가정하에서 시작된 〈나쁜 피에 관한 연대기〉는 그녀가 남긴 시, 소설, 희곡 그리고 에세이에서 발췌한문단들과 단어들로 지극히 개인적인 내적 욕망, 이상, 좌절, 외로움, 희망, 고립감에 대한 고백적 텍스트의 조각으로 구성된다. 라디오 드라마를 연상시키는 오리지널 사운드, 김명순의 시를 낭독하는 목소리, 배우의 목소리, 주인공을 비난하는 남성들의 목소리, 숲에서 녹음된 필드 레코딩, 파운드 푸티지, 중창으로 얽혀드는 불협화의 목소리, 서로가 서로를 침범하는 소리들은 일련의 추상적인 드로잉이 된다. 목소리의 떨림은 보이지 않는 인물을 성립시키는 듯한 암시가 된다. 조너선 스턴 〈청취의 과거: 청각적 근대성의 시원〉에는 근대 축음기의 발명 목적 중에 하나가 ‘가족 구성원이 자기 목소리로 직접 대화, 회고담, 유언을 녹음하는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즉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의 목소리를 언제든지 현재로 불러오는 능력, ‘사라진 것의 소환술’로 망자의 음성을 부활시키는 것이다. (녹음된) 목소리는 실존이면서 동시에 주술적인 존재 상태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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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은둔자(Urban Hermit)〉 2 채널 HD 비디오, 6분 25초 2016

〈나쁜 피에 관한 연대기〉의 첫 장면은 어린 범네와 특실이의 이별이다. 두 소녀는 손을 동그랗게 모아 입에 대고 이쪽과 저쪽으로 멀어져가는 서로를 향해 이름을 부르며 이별 인사를 나눈다. 영화의 시간은 스토리를 이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아니라, 타자에게 다가가는(혹은 떠나가는) 시간이자 실존을 향해가는 시간이 그 본질에 속하는 것이다. 경험할 수 있는 것의 한계에서, 현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의 시간 위에서, 경험 속에서 고정되거나 공통적으로 붙들 수 없는 것, 즉 불리는 형식이거나 사라짐의 형식. 호명과 이별의 사이로 지나가는 것이 어쩌면 영화의 정의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다시 〈도시 은둔자〉의 장면을 기억해 본다. 유리창과 복도엔 티끌도 없다. 미술관의 곳곳을 조용히 걸어 다니며 걸레를 훔치던 미화원의 뒷모습, 김세진은 그 장면을, 촬영한 비디오를 뒤로 감아 잠시 시간이 거꾸로 돌아가는 모습으로 남겨둔다. 감각을 낚아채는 이미지는 인물의 뒷모습이다. 〈밤을 위한 낮〉, 들판에 서서 손에 든 핸드폰 불빛을 밝히던 소녀,〈잠자는 태양〉, 〈일시적 방문자〉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뒷모습. 침묵의 순간이다. 김세진은 뒷모습에 대해 ‘익명성이 함축된 이미지’로 설명한다. 어느 곳을 바라보는지 알 수 없는, 군중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듯한 장면은 우리에게 실존에 대한 집중력을 요구한다. 가방을 들고 길을 떠나는 〈나쁜 피에 관한 연대기〉의 여자. 이제 그 뒷모습들은 우리가 무엇을 보았는지 묻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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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세 진
1971년 출생했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와 서강대학교 영상대학원 영상미디어과 석사, 영국 슬레이드 스쿨 오브 파인아트 석사를 졸업했다. 2005년 인사미술공간에서 열린 〈이상사회〉를 시작으로 금호미술관, 브레인 팩토리, 미디어극장 아이공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제4회 다음작가상’(2005), ‘블름버그 뉴 컨템퍼리즈’(2011), ‘Henry Tonks Prize’(2011), ‘송은미술대상’(2017)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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