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리뷰] 김인배-몸으로 눈을 보다

이선영│미술비평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열리는 김인배의 <점 선 면을 제거하라 전>은 근대의 시각중심주의 문화에 대한 몸의 반란이라 할 만하다. 이 전시에서는 눈이 몸을 보기 보다는, 몸이 눈을 보는 역전이 일어 나기 때문이다. 점 선 면은 인간의 시각적 관념 속에만 존재할 뿐, 자 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을 점적 사건들의 연속이 아니라고 간주하는 메를로 퐁티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현실의 시공간은 점이나 선을 지니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고에서 ‘a=a’일 뿐인 근원적인 이성의 진리, 그 동일률은 사라지고, 모든 지 각은 운동으로 간주된다. 김인배에게도 선은 하나의 매체이며, 점 은 힘들의 중심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의 오감 중 가장 관념적이 고 추상적인 감각인 시각은 점 선 면이라는 기하학적 요소를 좌표축 으로 설정하곤 한다. 이러한 좌표축이 사변철학의 바탕이다. 사변 철학은 ‘우리 경험의 모든 요소를 해석해낼 수 있는, 일반적 관념들 의 정합적이고 논리적이며 필연적인 체계를 축조하려는 시도'(화 이트헤드)이다. 변화에 무력한 사변철학은 다원론적 실재들을 거 부하며, ‘유일한 가능성일 뿐인 필연성'(메를로 퐁티)을 신봉한다. 김인배의 작품에서 관념에 의해 고정된 시각을 교란하고 상대화 하는 몸은 코드화할 수 없는 자연의 대표로 호출되었다. 그의 작품 에서 몸은 대우주의 질서를 반향하는 소우주가 아니라, 뫼비우스 띠처럼 유동하는 피부 또는 살이다. 반인반수의 존재를 표현한 (2001~2011)나 남근적 여성상을 표 현한 (2009~2011) 등에 나타나듯이, 약간의 변형을 가해서 종(種)과 성(性)이 불확실해지는 존재는 김인배의 작품에서 자주 발견된다. 몸은 태어난 본질 그대로 고정되지 않으며, 매번 다른 힘 이 관철되고 다른 규칙에 의해 배치되는 계열일 뿐이다. 그는 “분류, 이해, 논리는 정지시키기 위한 음모이다”(작가노트 중, 2011)라고 말한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의 정점에 놓인 얼굴은 침해될 수 없는 신성한 질서가 아니라, 몸의 연장으로 간주되며 변화무쌍하게 취급 된다. 몸으로 대변되는 자연은 정지되어 있지 않고 시간의 흐름을 타는 불확정적인 요소로 가득하다. 그러나 관념과 시각의 반대편에 놓여 있는 몸이라고 해서, 경계를 넘나드는 살이나 체액들, 또는 사 물화와 파편화가 만연한 무정부주의적 향연과는 거리가 있다.
그의 작품은 점 선 면으로 대표되는 관념적 시각을 해체하지만, 제의적인 공간이 연상될 만큼 엄격하고 정적이다. 어둑한 공간 속에 제단처럼 배치된 조상들은 관객을 바라보고 있지만, 자신의 얼굴 (정체)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여러 방향에서 관객을 주시하는 눈 없 는 얼굴들은 편재하는 신처럼 두려움과 경외감을 자아낸다. 어떤 강 력한 힘에 의해 늘어나고 갑작스레 잘린 조상들은 장기판의 말처럼 배치된다. 작품들은 어떤 조합에 의해 다양한 서사와 상상이 가능한 전략적 배열을 취한다. 인체라는 조각의 가장 기본적인 틀을 벗어나 지 않는 그의 작품에는 정지 속에 움직임이, 정렬 속에 어긋나는 질 서들이 잠재한다. 첫 개인전 <차원의 경계에 서라>(2006)는 물론, <진심으로 이동하라>(2007)에도 드로잉과 조각 간의 호환성이 활 발했고, 드로잉을 조각화할 때 그 차원의 간격 속에서 많은 부분이 달라진다. 2010년 뉴욕과 2011년 천안에서 발표한 처럼, 금속선으로 연속 동작 중의 인물들을 표현한 선조는 공간에 드로잉을 하는 셈이다. 이번 전시에서 조각적 중간 과정 없 이 발포수지를 직접 쏘아 만든 하얀 조상 역시 회화적이다.
점 선 면을 제거한다고 하지만, 김인배의 작품들에 그것들이 없 지는 않다. 반(反)종교가 종교의 연장이듯, 금기의 위반이 성스러움 의 또 다른 측면이듯, 기하학적 공리로부터의 탈주는 또 다른 규칙 으로 대치될 뿐이다. 지하 전시장은 중심에 군림하는 거대한 좌상 좌우로 안면이 잘린 날카로운 상들이, 맨 앞쪽에는 얼굴 한가운데 모서리가 있는 상이 배치된다. 쨍하게 갈라진 이 ‘얼굴’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요소는 낯선 각도뿐이다. 인간에게 가장 친숙한 부위에 가해진 변형이 충격적이다. 여기에서는 일상적 차원에서는 들릴 수 없는 소리도 들려오는 듯하다. 날카롭게 변형된 머리가 두드러지는 이번 전시에서 가장 큰 작품은 거대한 집게처럼 가로로 죽 눌린 얼 굴의 조상이다. 그것의 양 손목은 잘린 채 둥근 구(球)가 대신한다. 전시장 한켠에 놓인 무채색 톤의 둥근 구들이 시계를 상징함을 염 두에 둘 때, 손 부위의 구는 불구라기보다는 시간을 지배하는 전능 한 존재자의 표시에 가깝다.

(사진 앞) FRP 가변설치 2013 (사진 뒤 왼쪽부터) 황동 0214

<빛>(사진 앞) FRP 가변설치 2013 <무거운 빛은 가볍다–폐허, 왕관, 기둥>(사진 뒤 왼쪽부터) 황동 0214

시선과 응시의 분열

죽음 같은 정지 속에도 분명한 시간성은 작가로 하여금 잠재적인 움직임을 보유한 도상(=구)을 끌어들이게 했다. 작가가 좋아한다 는 영상이나 음악은 그 자체가 시간성을 향유한다. 고전적 조각으 로부터 현대조각으로의 추이에서 주요 요소인 시간성은 2011년 천 안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열린 <요동치는 정각에 만나요(Turbulent O’clock)전>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났다. 이 전시에서는 작품 처럼 투수의 연속 동작을 하나의 포즈에 압축시 키는가 하면, 작품 처럼 국부가 점점 붉어지는 발광체의 모 습으로 남성 토르소들을 정렬시키기도 했다. 시간의 축을 타고 벌 어지는 사건은 다름 아닌 변형이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인간적(그 래서 신적)인 두 부분인 얼굴과 손이 상상을 초월하는 형태로 변형 된다. 거칠게 만들어진 거대한 몸뚱이는 가장 민감한 인간의 경계 를 폭력적으로 환기시킨다. 날을 드러내는 위협적인 상들 사이에 놓인 작은 황동 인체 한 쌍은 빛과 어둠을 대비시킨다. 어두운 공간 속 검은 조상들은 무의식의 풍경 같다. 이 깊은 암흑의 공간에서 황 동 빛은 흔들리는 작은 촛불 같은 위상을 가질 뿐이다. 무의식의 세 계에서 인간 이성은 극도로 상대화된다.
김인배의 작품은 정적이다. 그러나 작가는 스케일이나 밝기에 급 격한 차이를 두어 잠재적인 운동감을 부여한다. 어둠의 조상들에 둘러싸인 작은 황동색 인체들이나, 황동색 조상들의 따가운 시선에 검은 점으로 녹아버리는 듯한 인체가 그 예다. 후자에서, 머리와 팔 이 없는 인체는 크기가 매우 작아 침대가 거대하게 보인다. 침대 맞 은편에 놓인 황동색 두상들은 3위 일체를 이룬다. 왕관 모양의 머리 를 중심으로 들쑥날쑥한 기암괴석을 이고 있는 듯한 양쪽의 조상들 은 성스러운 색채와 숫자, 배치에도ㅁ불구하고 어떤 기관은 없고 어떤 기관은 과도하게 많은 괴물이다. 빛의 현현이기도 한 황동색 조상들은 머리 위 과도한 무게에 짓눌려, 흡사 무질서한 폐허 같다. 그러나 이 빛나는 괴물 트리오에는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언어적 상징 같은 성스러운 질서의 면모가 있다. 검은 우주 속에 갇힌 작은 인간은, 위협적으로 쏟아지는 빛의 세례 때문에 공포와 성스러움이 공존하는 이 존재의 본모습은 수수께끼에 싸여있다. 눈이 없는 그 조상들은 보이기만 할 뿐 보지는 않는다. 심술궂은 이성과도 닮은 이 맹목적 시선은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소원한 존재가 된 인간을 암흑 속의 작은 얼룩, 또는 <절대적인 소(素, prime)>(화이트헤드), 즉 점으로 축소시키려 한다.
마치 태양처럼, 인간에 앞서 존재하는 기호들의 스크린은 점 선 면처럼 인간의 관점을 앞서 규정한다. 인간은 이 외재적인 것들에 의해 결정되는 의미의 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황동 조 상들과 검은 인체의 만남은 응시(gaze)와 시선의 분열을 표현한다. 작가가 만들어낸 배열은 응시를 유도하는 빛줄기 속에서 대상을 명 확히 바라볼 수 없게 되어 있다. 자크 라캉은《시선의 응시와 분열》 에서 응시가 시선에 앞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라캉에 의하면 응시 는 시야에서 우리가 발견할 것을 상징하며, 신비로운 우연의 형태 로 갑작스럽게 접하게 되는 경험이다. 세계가 응시를 촉발시키는 그 순간 생소함 역시 시작된다. 나는 한곳만을 바라보지만 나는 모 든 방향에서 보인다. 시선과 응시의 분열에 의해 시각의 영역에 충 동이 나타난다. 환상에 불과한 궁극적인 응시의 지점들은 끝없는 욕망을 일으킨다. 전체적으로 수직과 수평이 교차하는 정적인 구도 속에서, 또 다른 황동 빛 인체상은 특정 종교의 도상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입방체 모양의 두상에 벌린 양팔의 손목은 절단된 채 바 비 인형의 작은 손으로 대체되었고, 남성의 성기는 다리 뒤로 빠져 있는 상태다. 눈이 없음, 팔목 잘림, 남근의 은폐 등은 거세를 연상시 킨다.
이 전시 속의 인체들은 다양하게 변주되어 있지만, 불완전하다 못해 치명적으로 손상된 인간(=남성)은 기본적으로 가부장적 질 서, 이성, 시각 등을 문제 삼는다. 그것들을 대변하는 점 선 면 같은 공리적 체계는 자연의 법칙이라기보다는 인간의 규칙이다. 규칙인 한 그것은 변형될 수 있고 변형되어야만 한다. 한시적 진리인 형식 적 체계는 절대적인 자기충족성을 주장하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는 논증될 수 없는 불확실한 것이다. 불확실성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인간의 시각은 주체와 대상을 분리시키곤 한다. 이러한 추상적 분 리에서 요동치는 육안의 차이와 다양한 시각성의 작동은 억제된다. 몸으로부터 분리된, 몸을 초월하는 시각적 인식론은 르네상스 시대 의 원근법부터 카메라의 시점까지 이어지며, 기계 눈의 시점이 일 반화된 현재에 이른다. 조너선 크래리는《 시각의 근대화》에서 이러 한 시각이 세계를 체계화된 불변적 상수들에 따라 구성하며, 또 그 러한 약호들로부터 어떤 불일치나 불규칙성도 축출한다고 지적한 다. 독특한 인체상을 통해서 몸의 명시적, 잠재적 움직임을 강조하 는 김인배의 작품들은 눈 없이, 또는 몸으로 본다. 몸이라는 불투명 한 층은 시각성에 내재된 가상적 투명성을 변형시킨다. 이 작품들 이 가지는 미술사적 의미는 ‘탈신체화된 시각성에 반대하여, 시각 적인 것을 육체화하려는'(로잘린드 크라우스) 현대조각의 흐름과 함께하는 것에 있다.●

왼쪽· 황동 Brass 60×16×45(h)cm 2014 오른쪽· FRP 130×75×138(h)cm 2013

왼쪽·<당기지 마시오> 황동 Brass 60×16×45(h)cm 2014 오른쪽·<겐다로크(Gendarloake)> FRP 130×75×138(h)cm 2013

김인배는

197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조소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6년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지금까지 총5회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또한 미국과 영국 등지에서 열린 다수의 기획전과 그룹전체 출품했다. 현재 서울에서 작업하고 있다.

[뉴 페이스 2014] 김덕영-겉과 속, 표면과 이면

뉴 페이스 2014 김덕영 겉과 속, 표면과 이면_황석권

뉴 페이스 2014
김덕영
겉과 속, 표면과 이면_황석권

벽지가 떨어진 벽, 그 이면의 검은 테이프 마감, 전시장 가벽에 수없이 박힌 망치, 마치 후면에서 자동차가 들이받고 쳐들어온 사고 현장과도 같은 공간, 벽 모서리에 세워진 기둥 사이의 균열 등. 김덕영이 그간 , , , , , <색각검사표 작업> 등에서 보여준 바다. 일견 충격적이지만, 작가는 강렬함 속에 디테일을 감춰놓았다. 마치 자동차의 상향등 불빛에 일시적으로 시력이 마비돼 놓친 바를 다시 한 번 찾아보라는 식이다. 그의 초기작 <검은 파도> 연작은 이면에 숨은 그 무엇에 관심을 가진 그의 태도를 발견할 수 있는 첫 번째 단서를 제공한다. 그러나 작가는 여기서 한걸음 나아간다. “나의 작업은 대상의 겉과 속, 표면과 이면, 껍데기와 알맹이와 같은 양면적 가치가 공존하는 상황에 관한 이야기이다. “(작가 노트 중) 그러한 태도는 지난 호《 월간미술》의 표지를 장식한 에서도 드러나는 바다. 언뜻 김덕영의 작업은 결과로서 존재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는 결과가 아닌 망치가 벽에 박히는 과정에 있다. “망치는 도구(tool)죠. 무엇을 만드는 것이에요. 그 망치가 벽면에 박히는 것은 어떤 이미지를 찾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처음 이 작업을 생각했을 때는 망치를 관객이 직접 벽에 박거나 박힌 망치를 관객이 빼서 집어가는 이야기를 생각했다고. 이를 통해 일반적으로 보이는 것보다 나만이 갖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려 했다고 한다. “벽체를 모티프로 하는 작업은 부서지고 변형되어 있지요. 그 안의 것이 ‘어떤 것’이라는 점이 결과로서 드러나게 한 작업입니다.” 그러니 연작은 힘을 가하는 ‘행위’에 집중하고 <Pang! Defensive Sffensive Space>는 그 결과물인 셈이다.
최근 끝난 <EX_AIR: 경험의 공기전>(창동창작센터, 1.24~2.14)에 출품했고, 지금은 작업의 모티프로 사용하는 ‘색약검사표’이지만 사실은 김덕영 작가에게 좌절감을 안겨주어 한 동안 방황(?)하게 만든 핸디캡이었다. 그런데 이전 김덕영의 작업과 맥락적으로 닿아있지 않을 것 같은 이 작업은 그의 말대로 “조금 다른 시선”이다. 작가는 ‘규정된 약점’을 ‘나의 시선이 갖는 차이’로 풀어낸 셈이다. 김덕영에게 인생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을 묻자 “지금 어떤 일이 제게 일어나는 이 순간입니다”라고 담담하게 답한다. 작가는 앞으로 1년간 독일 쿤스틀러하우스 베타니엔 창작센터에서 레지던스 프로 그램에 참여하게 된다. “일단 현재 진행하고 있는 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집중할 예정입니다.” 김덕영에게 앞으로도 ‘지금’이 가장 소중한 시간이길.

황석권 수석기자

[뉴 페이스 2014] 이화평-우울한 유토피아

〈파리맨〉 종이 위에 잉크 62x34cm 2013

〈파리맨〉 종이 위에 잉크 62x34cm 2013

세상을 이분법적 사고로 정의 내리면 그릇된 딜레마에 빠지기 쉽다. 그렇다고 변증법적 정의가 반드시 파라다이스로 가는 길은 아니다. 연약하지만 강하고 억세지만 여린 생명이 숨 쉬는 곳. 유토피아도 디스토피아도 아닌 세계. 나와 너를 시원하게 인정한 ‘A+B’의 공간은 어떤 모습을 취할까. 현실과 관념, 기억과 경험 사이 어디쯤에 젊은 작가 이화평이 이야기하는 세상이 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어느 한쪽으로 분류하는 것을 거부한다.
스토리텔링을 작업의 중심으로 삼는 이화평은 예술가와 연출가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의 스토리는 종이 위에 펼쳐진다. 여느 매체보다 작업과 보존과정에 공을 들여야 하는 종이의 연약함은 작가에게 ‘보호본능’을 일으켰다. 종이에 담은 이야기는 ‘물’이다. 이 테마는 그가 대학 재학 때부터 줄곧 다룬 주제다. 현대사회에서 물의 흐름과 멈춤은 수도꼭지로 손쉽게 조절된다. 그러나 그는 열악한 환경의 거주지에서 침수 상황을 겪으면서 개인이 조정할 수 없는 자연으로서의 물을 느꼈다. 생활 속에 침투한 물은 피부로 다가왔고 피하고 제거하려 해도 공기 중에 퍼져나가 공간을 잠식했다. 그곳에서 생겨난 벌레와 곰팡이는 액체가 낳은 생명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제주도에 위치한 감귤농장에서 마주한 물(빗물)은 탐스러운 과실을 생산했다. 이러한 기억과 경험의 조화가〈과일농장드로잉 시리즈〉에 온전히 나타나는데 이 작품은 그로테스크하면서 활기찬 생명력을 동시에 보여준다. 작품 속 주렁주렁 달린 열매는 싱싱한 생명력을 품고 있지 않다. 풍요로움과 어둠이 혼재한다. 이런 표현에는 성인을 위한 잔혹동화에 대한 작가의 관심도 분명 영향을 미쳤다.
젊은 작가이기 때문일까. 기자가 만난 작가는 앞으로의 활동에 대해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파인아트의 고립성에서 탈피해 미술 장르의 무한한 파생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타 장르와의 접목을 고민하는 작가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으로 읽을 수 있는 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마치 판타지 영화 속 주인공이 공간을 자유로이 이동하듯 터치로 자신이 구현한 세상을 여행할 수 있는 방법을 구상 중이다. 마치 물이 자연히 흐르듯 작가의 세계도 끊임없이 흐른다. 그런데 그 모습이 비단 작가만의 경험일까.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세대의 언어이며 위치는 아닐까.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모두를 부정했다면 그가 현실을 회피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택일하는 사고 자체를 부정하고 양자를 조합한 세계를 그려냈다면? 선택을 강요하는 그 자체가 부조리이며 막힌 사고로 여길 수 있다. 어쩌면 작가 이화평이 그린 세상은 ‘빛 좋은 개살구’인지 모르겠다.

임승현 기자

 

[화제의 전시] 애니미즘들을 다시 움직이기

50여 점의 필름, 비디오 및 각종 사진과 회화자료들을 포괄하는 방대한 그룹전 <애니미즘전>의 테마는 제목이 시사하듯 ‘움직임’이다. 처음으로 떠오르는 움직임은 민속학과 신화학에서 말하는 애니미즘이 뜻하는 움직임, 즉 자연과 문명의 사물들에 깃들어 있는 영혼의 움직임이다. 그러나 애니미즘과 동일한 어원을 갖는 ‘애니메이션(animation)’이라는 기법에 착안해보면 운동의 외연은 확장된다. 사물과 인간의 운동은 그 자체로는 파악되지 않는다. 운동은 재현되고 나아가 생산된다. 시각매체의 역사는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을 구분하고, 운동을 가시화하고, 정지된 것에 운동을 불어넣은 과정들의 역사다. 이렇게 보면 ‘애니메이션’은 셀(cel)이나 인형 등의 재료에 근거한 특정한 무빙 이미지 예술의 장르적 경계를 넘어선다. 대신 ‘애니메이션’은 움직임에 매혹되어 그 찰나적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고안된 회화와 사진의 기법들, 기계적 자동장치를 이용해 정지 이미지를 운동의 환영으로 변환시키는 영화의 본성, 그리고 전자적 신호와 컴퓨터 알고리즘이라는 새로운 자동장치들이 생산하는 포스트-영화시대의 다양한 운동들을 포괄한다. <애니미즘전>은 이러한 미디어들을 아우르는 운동의 역사에 대한 조망이다. 나아가 이 전시는 이러한 운동들이 서구적 근대성의 다양한 국면과 맺어 온 관계의 계보들을 비선형적으로 배치한다. 그 관계들이란 근대성이 형성하고 지탱해 온 다양한 구분을 말한다. 식민주의와 과학적 이성의 양날개를 달고 비행한 서구적 근대성은 주체와 객체, 자연과 문화, 인간과 비인간, 문명과 야만, 이성과 맹신 사이에 명징한 경계선을 그어왔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미디어 이미지들이 구현해 온 애니미즘은 19세기 이후 사회와 주체성의 생산을 지탱해 온 이러한 경계선을 드러내는 동시에 이를 문제 삼는다. <애니미즘전>은 애니미즘의 이러한 이중성에 대한 전시다. 기획자인 안젤름 프랑케가 말하듯 이는 “애니미즘을 보여주기 위한 전시이자 이를 파괴하기 위한 전시다.” 비록 프랑케가 “이 전시는 과학적 상상력과 예술 형태들로 표현된 애니미즘에 대한 것이며 민속학이나 신화학에서 말하는 애니미즘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이 전시 관람자들을 일차적으로 유인하는 작품들은 마술적 믿음, 토착적 신앙, 이국적이고 원시적인 문화, 영혼이 스며든 사물, 생명으로 충만한 자연 등을 소재로 한 것들이다. 이 모든 것은 근대적 세계관이 전근대적인 것의 이름으로 배제하거나 대상화한 타자들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애니미즘은 근대성의 이원론적 위계들이 설정한 타자들의 귀환이다. 시 각미디어는 이러한 귀환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시각미디어가 세계와 주체 사이에 자리 잡으며 운동을 생산할 때, 그 운동은 주체와 객체, 영혼과 사물, 자연과 문명의 은밀한 소통 그 자체를 체현하는 매개물이 되기 때문이다(그래서 Medium이라는 단어는 ‘매체’와 ‘영매’를 모두 뜻한다). 이에 화답하듯 <애니미즘전>의 몇몇 작품은 애니미즘적 주체와 인식, 현상들을 전근대적 타자들로 규정하는 근대적 지식과 지각의 체계를 노출하거나, 그러한 체계를 넘어서 애니미즘의 역동성을 담아내고 탐구하기 위한 시각미디어의 대안적 사용법들(즉 시각미디어를 일종의 영매처럼 활용하는 방법들)을 보여준다.
수잔 슈플리의 <태양도 거짓말을 할 수 있는가(Can the Sun Lie?,2013)>는 태양의 위치 변화와 기후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에스키 모들의 세계관이 지구온난화에 대한 오늘날의 과학적 지식체계에서 기각되는 과정을 민속지적 영상과 디지털 데이터 영상, 사진 이미지의 병치를 통해 다층적으로 분석한 에세이 다큐멘터리다. 다큐멘터리의 다양한 양식들은 타자성의 불가해한 매혹들이 지배하는 세계를 드러내는 데 유용하게 사용돼왔다. 범신론적 믿음이 지배하는 나바호족의 세계를 포착한 <용감무쌍한 그림자들 (Intrepid Shadows, 알 클라(Al Clah), 1966/69)>에서 자유분방하게 가속화된 탈중심적 카메라는 보이지 않는 영혼이 자연을 변화시키고 무생물(정체불명의 금속 고리)을 활성화시키는 과정 자체를 체현함으로써 민속학적 다큐멘터리의 관찰자적 거리두기를 극복한다. 자크라왈 닐탐롱(Jakrawal Nilthamrong)의 <비현실의 숲(Unreal Forest, 2010)> 은 잠비아 현지 제작진과 함께 한 제작 과정을 그대로 노출하는 반영적 양식을 통해 영적 세계의 경계에 대한 질문을 허구와 현실의 경계에 대한 질문으로 연장시킨다. 다큐멘터리 양식들의 반대편에는 애니미즘의 역량을 빌려 이미지와 시각적 지각의 경계를 확장한 실험영화들이 있다. 일본 아방가르드 영화의 중요 인물인 쿠사마 야요이(Yayoi Kusama)는 16mm영화 <쿠사마의 자 기-삭제(Kusama’s Self-Obliteration, 1967)>에서 불연속적 편집과 자유분방한 카메라워크를 통해 일본 전통신앙의 정령적 존재와 서구 사이키델릭 문화 사이의 현란한 소통을 추구한다. 서구적 정신주의와 토착적 애니미즘 사이의 결연은 초기 수작업 추상 애니메이션의 선구자 렌 라이(Len Lye)에게서도 드러난다. 그의 첫 작품 <투살리바(Tusaliva, 1929)>는 추상회화의 기하학적 형태들을 사모아족의 원시적 형상들로 역동적으로 변형시키는 자동기법(automatism) 의 모범 사례다.

습득영상, 사진적 이미지의 유령성

애니미즘을 다루는 이러한 다양한 방식들은 시각미디어 자체를 구성하는 유령성(spectrality)의 존재를 암시한다. 사진과 영화가 특히 유령적이다. 롤랑 바르트가 말하듯 사진이 관람자의 감각에 호소하는 내밀한 지점은 과거에 존재했으나 현재는 부재한 대상과 사건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익숙하고도 낯선 (그리고 현전과 부재가 공존하는) 과거의 흔적이 가진 유령성은 영화를 통해 새로운 차원을 얻는다. 영화 이미지의 자동운동은 셀룰로이드를 이루는 무수한 프레임 사이의 빈 공간, 그리고 프레임이 본원적으로 가진 사진적 이미지의 정지 상태에서 비롯된 환영적 운동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진과 영화는 자크 데리다가 《에코그라피》에서 말한 유령의 논리, “볼 수 있 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을 초과하는” 유령의 논리에 사로잡혀 있다.
습득영상(found footage) 제작은 바로 이러한 사진과 영화의 유령성을 탐구한다. 기존에 만들어진 이미지의 전유와 변형, 재배열로 이루어진 작품을 뜻하는 습득영상은 2차대전 후 실험영화를 통해 풍부히 발전했으며 1990년대 이후 영화적 비디오 설치작품(cinematic video installation)의 한 경향으로 자리 잡앗다. 습득영상 제작에서 사진적 이미지의 유령성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는 기법은 일종의 비정상적 운동들, 정지와 감속의 운동들이다. 이 운동들은 지속적으로 교체되는 영화 이미지의 흐름들을 일시적으로 지연시킴으로써 이미지의 형식적, 수사적 전략들을 드러내고 이미 지에 기입된 과거의 흔적들을 관람자의 현재에 강렬하게 남기기 때 문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 습득영상 실험영화를 지속적으로 탐구 해 온 켄 제이콥스(Ken Jacobs)의 <자본주의: 노예(Capitalism:Slavery, 2007)>는 19세기 미국 목화농장 노동자들의 입체사진 이미지를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통해 살아 움직이게 한다. 미세하게 다른 두 개의 이미지를 번갈아 보여주는 디지털 자동기법은 원래의 입체사진이 잠재적인 수준으로 나타냈던 3차원적 몰입의 황홀경을 현실화한다. 이 황홀경의 환영적인 면모는 이미지들 사이의 간극에서 비롯되는 플리커 효과(flicker effect)들로 인해 지속적으로 해체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체적인 충동은 식민자본주의가 노동자들을 착취하면서 그들의 육체에 부과한 피로의 제스처들을 강렬하게 확대하기도 한다. <자본주의: 노예>에서 정지를 수반한 역설적인 애니미즘은 이탈리아 습득영상 제작의 거장들인 여반트 기니키안과 안젤라 리치 루치(Yervant Gianikian & Angela Ricci Lucchi) 가 사용하는 감속의 기법과 호응한다. <다이아나의 거울(Diana’s Looking Glass, 1996)>은 로마 남부의 신비스러운 한 호수가 무솔리니의 제국주의적 파시즘에 의해 개발되는 과정에 대한 기록영상들을 소재로 삼는다. 호수에 가라앉은 것으로 추정된 로마 시기의 거대한 배를 끌어올리기 위해 동원된 노동자들의 지친 눈빛과 몸짓들은 슬로 모션으로 관람자에게 다가온다. 이 두 편의 습득영상 작품은 과거의 파편들이 현재의 인식과 만나는 깨달음의 불꽃을 지피고 사진적 이미지의 본원적인 유령성에 도달하기 위해 기존의 이미지들에 새로운 운동을 부여한다. 여기서 애니미즘은 다시 움직인다(re-animated).
시각미디어가 근대 이후부터 구현한 다양한 형태의 애니미즘들 은 주체의 경험과 정서, 사유를 재현하고 조직해왔다. 이러한 과정은 기술이 근대성의 지식체계 및 제도들이 이루는 네트워크 내에서 작동해왔음을 말해준다. 전시의 참고자료로 제시된 샤르코의 히스테리 환자들에 대한 사진, 메스머의 전기최면 시술에 대한 드로잉, 그리고 에티인 쥘르-마레가 움직이는 물체와 활동하는 육체의 운동을 과학적으로 탐구하기 위해 개발한 연속사진(chronophotography)은 시각미디어들이 인간의 지각과 생리적, 심리적 과정들을 형성한 사회적 장치(apparatus)로 기능을 했음을 말해준다. 이 모든 사례에서 운동은 주체의 내적 자아 안에 있는 불가해한 신경생리적 차원과 무의식의 지대들을 가시화하고(샤르코, 메스머), 주체의 외적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분석하는 데 복무했기 때문이다 (마레). 사진과 영화에 드러나는 다양한 애니미즘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생체권력(biopower)의 작동양식은 전자적 신호, 컴퓨터 재현체계 및 인터페이스가 비물질노동(immaterial labor)을 활성화함으로써 사용자의 지각과 정서를 규정하는 오늘날의 미디어 경관에도 적용된다(그래서 이 전시에 비물질노동 개념을 제안한 이탈리아 철학자 마우리치오 라자라토(Maurizio Lazzarato)가 참여한 것은 당연한 귀결로 보인다).
전시장의 3층에서 찾아볼 수 있는 두 개의 작품은 미디어 애니미즘이 주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에 대한 비판적 논증들을 펼치는 비디오 에세이의 형태를 취한다.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의 <평행(Parallel, 2012)>은 오늘날 현실을 사진적 이미지와 가깝게 시뮬레이션하는 컴퓨터 게임의 풍경 이미지들(바람, 바다, 나무)을 탐구하고 그것들을 카메라의 기록에 근거한 영화적 풍경의 이미지들과 대비시킨다. 이러한 대비 전략을 통해 파로키는 컴퓨터 이미지의 하이퍼리얼리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두 가지 방식으로 유도한다. 하나는 컴퓨터 이미지가 현실로부터 추상화된 수학적 기호들의 알고리즘적 연산에 근거한다는 점, 다른 하나는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 컴퓨터 이미지는 아무리 모방적이라도 물리적 현실로부터 일정 부분 추상화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재현과 시각적 인식에 대한 비판적인 계보학적 탐색은 톰 홀러트(Tom Holert)의 <광택의 노동(The Labours of Shine, 2012)>에서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대중영화의 매혹적인 스타 이미지와 광택을 내는 구두닦이의 노동 과정에 대한 습득영상, 그리고 브랑쿠시의 광나는 청동 조각상을 병치시킨 이 작품은 겉으로는 무관해 보이는 예술과 노동, 대중문화 사이의 연결고리를 광택이 가진 의미에서 찾아낸다. 광택은 빛의 물리학을 넘어 일상적 대상을 예술작품으로 변환시키고, 재화에 교환가치를 부여하며, 이미지에 물신적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미학적, 정치적 현상인 것이다. 이 두 작품이 공통적으로 채택하는 2채널 비디오는 시간적인 순차성에 근거한 영화적 몽타주를 공간적인 동시성으로 치환한다. 이러한 공간적 몽타주는 멀리 떨어진 이미지들을 새로운 맥락과 의미망에 배치한다는 점에서 다시 움직이기(re-animation)의 또 다른 양식이다. ●

애덤 아비카이넨 (오른쪽) 2013과 임흥순 〈비념〉(왼쪽) 2012

애덤 아비카이넨 <천연자원 관리국의 범죄현장 조사서>(오른쪽) 2013과 임흥순 〈비념〉(왼쪽) 2012

 

[section_title]베를린 세계 문화의 집 시각예술분과 수석 큐레이터 안젤름 프랑케(anselm franke)[/section_title]

애니미즘 파괴의 연속을 보여주는 전시다

e01_4당신이 기획한 전시는 최근 비엔날레, 대규모 미술 행사를 중심으로 스펙터클한 작품 선정과 디스플레이를 추구하는 전시공학과는 동떨어져 보인다. 특히 이번 전시는 상당히 많은 양의 아카이브와 텍스트로 구성되어 관람객이 그것을 자세히 살펴봐야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당신이 의도한 전시 디스플레이의 방향에 대해 설명해달라.
이번 전시는 예술을 통해 개념, 상상력 및 미디어 테크놀로지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고, 모더니티의 논리와 증상에 대한 연구에 관해 관객들의 관심을 유도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보는 것과 생각하는 것을 연결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이 전시는 매우 넓은 의미에서 미디어의 역사에 관한 전시이다. 또한 전시라는 매체, 형태 그리고 전시의 역사가 삶 또는 살아있음과 관련된다는 것에 대한 연구이자 반영을 의미한다. 난 항상 ‘애니미즘’이라는 용어 자체를 어떻게 이해하든 회화나 도자기처럼 전시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제의적인 춤과 박물관 전시 사이의 간극을 떠올린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스펙터클한 전시와 자본주의 문화는 이 간극을 위장한다. 그러한 전시는 모든 애니메이션(animation, 생명력을 불러일으키는 효과)이 전시될 수 있고 소비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애니미즘은 매우 복잡한 것이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문화’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 신중하게 획득되고 유지되어야 하지만, 실제로도 매우 큰 개념이다.
이 전시는 관객이 기대하는 바와 다르게 애니미즘이 아니라 뮤지엄과 죽은 물질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박물관과 모더니티의 관계는 애니미즘 파괴의 역사이다. 뮤지엄에 대한 소외 효과를 만들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뮤지엄은 무엇을 보고 물건을 신중하게 연구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이다. 전시장 입구에 설치된 지미 더럼(Jimmie Durham)의 작품인 유리 진열장 속의 돌들은 관객들이 보기에 유머러스할 것이다. 우리는 자연사 박물관에서 나비를 고정시켜 놓듯이 애니미즘을 고정시킬 수 없다. 애니미즘은 항상 영적인 것의 과정과 관련 있으며, 믿음 또는 절대적인 지식 또는 진리와 같은 독단적인 유형과는 관련이 없다. 애니미즘은 마음의 상태에 관한 것, 살아있게 혹은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전시에서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구조적인 상상력을 주장함으로써 변증법의 형태를 통해서 가능하다. 이번 전시에서 박물관 진열용 유리 케이스 다음으로 중요한 요소는 영화와 영화의 역사를 소개한 것이다.
<애니미즘전>은 순회하면서 작업이 추가되거나 빠지기도 하는데, 이번 전시에는 한국 작가들의 작업이 몇 점 추가됐다. 이들 작업에서 보이는 애니미즘적 요소에 관해 어떻게 느꼈는지, 그리고 나라별로 당신이 전시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점 중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애니미즘은 모더니티의 역사와 같은 ‘보편적인 역사’의 부정적인 면과 유사한 지점이 있다. 국가마다 다른 문맥이 있지만 그것은 진정한 글로벌 차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유럽에서는 무엇보다 애니미즘을 과학과 이성에 반대되는 허구, 미신 등의 개념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식민주의적 사고의 단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이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고 애니미즘을 말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한 도전이었다. 그리고 어떤 지역에서는 역사적 과정이 이 전시의 맥락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중국의 선전(深圳)같은 도시에서는 제국주의, 국수주의적 전통, 급속한 근대화와 같은 20세기 충격으로 기억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혼동 과정 없이 ‘모더니티’와 ‘애니미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대단히 어려웠다. 한국에서는 ‘토속신앙’ 문화는 수백 년에 걸쳐 제국과 가부장적인 문화에 대한 잠재적인 저항을 유지하고 있다.
이 전시는 애니미즘의 ‘귀환’ 그 자체에 관심을 둔 것 같지는 않다.
이번 전시는 애니미즘의 파괴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비판적이지만 애니미즘의 ‘귀환’에 관해서는 회의적이다. 근대 국가와 자본주의의 조건하에서 이 귀환은 본질과 전통의 귀환으로 오인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종종 문제를 일으키는데 근대 국가의 논리 자체가 이러한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안티-애니미즘도 결국은 애니미즘의 한 형태로 애니미즘 외부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애니미즘의 다양한 형태와 이와 관련된 힘, 집합체, 그리고 이야기들의 관계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음을 제안하는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상상력을 실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역사적인 전시를 뮤지엄 속에 서 구현하는 일을 예술가들과 함께 지속적으로 하고 싶다. 그리고 웃음에 관한 장기적인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다.

이슬비 기자

지미 더햄 〈롯의 아내도 이해했으니, 과거를 회상하기만 하면 화석화와 퇴적작용이 일어날거야〉 돌 종이 칼 스푼 접시 1998

지미 더햄 〈롯의 아내도 이해했으니, 과거를 회상하기만 하면 화석화와 퇴적작용이 일어날거야〉 돌 종이 칼 스푼 접시 1998

[Review] 미래가 끝났을 때

김실비  단채널 HD영상 9분16초/컬러영상과 사운드 13분55초 2013

김실비 <M을 위한 노래> 단채널 HD영상 9분16초/컬러영상과 사운드 13분55초 2013

미래가 끝났을 때
하이트컬렉션 2.7~5.10

영문학자 시엔 느가이(Sienne Ngai)는 현대문학과 다른 예술분야에서 관객들이 하찮고 작은 것들에 관심을 지니는 계기를 이론화했다. 느가이에 따르면 귀엽고 수동적이며 하찮은 것들은 일차적으로는 동정심을 유발하지만 동시에 극도의 쓸모없음과 마주치게 될 때 관객들은 보다 복잡한 감정을 갖게 된다. 즉 수동적이고 단순하며 귀여운 것들이 반대로 비평적, 저항적, 공격적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다. 하이트컬렉션에서 열린 신진작가전, <미래가 끝났을 때>는 이른바 ‘삼포세대'(연애, 결혼, 출산 포기)에 속하는 젊은 작가들의 자기 풍자와 자기 연민의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느가이가 주장하는 수동적이고 일상적이며 하찮은 것들이 현대미술에서 보여주는 가능성과 문제점을 동시에 시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기성 작가들이자 선생님들이 직접 젊은 작가들을 뽑고 추천해서 전시를 꾸린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아카데미 전시회를 연상시킨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기성세대의 사회적 관심사나 미술계 상황과 대비되는 젊은 세대의 고민이 더욱 부각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작업이 흔히 말하는 88만원 세대, 혹은 삼포세대라고 불리는, 고도의 산업화된 사회에서 나타나는 약자로서 젊은이들의 상황을 주제로 하고 있다. 강정석의 <야간행>에서 작가는 시네마 베리테 스타일로 친구들과의 추억여행을 다룬다. 언뜻 로맨틱하게 들리지만 그들이 언급하는 학업, 아르바이트, 군대, 연애의 경험 중에서 딱히 성공적인 것은 없어 보인다. 이뿐만 아니라 그들의 몸에 달린 카메라가 어둠 속의 눈길을 매우 산만하게 편파적으로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들이 헤쳐 나가는 인생의 길 또한 예측불허다. 아울러 얼마 전 편의점에 취직한 작가의 친구를 모델로 한 작업에서 친구의 얼굴이 변하는 모습이 타자의 시선과 사회의 규율을 내재화하는 과정에 해당한다는 가설은 웃프기 그지없다. 코믹하기도 하지만 친구의 보수화 과정을 물리적으로 재현함으로써 무엇인가 저항적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작가의 시도가 궁극적으로 부질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작업들은 대부분 정리된 방식이 아니라 여기 저기 섬처럼 흩어져 있다. 바닥의 먼지를 이용해서 자신의 사인을 남긴 작업, 다이소에서 파는 스티커를 관객들이 직접 전시장 곳곳에 붙이도록 유도한 작업, 전시가 끝난 후에 통상적으로 남게 되는 벽면의 흔적을 그대로 재현한 작업들은 과연 하찮은 상태와 하찮은 것들이 어떻게 관객을 자극하고 젊은 작가들의 상황을 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고민하게 만든다. 특히 전시장 입구 바닥에 먼지로 만들어진 로와정의 사인과 외국 생활 중에 모아놓은 두루마리 심지로 만들어진 설치작업은 먼지처럼 가볍고 가변적인 작가의 존재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사용한 화장실 두루마리의 심지를 모아서 만든 작업은 가변적인 작가 자신의 존재감을 매일 스스로에게 인지시키고 사수하려는 시도로도 보인다.
또한 서보경은 <여름휴가>에서 사강의 소설을 연상시키는 프랑스의 여름휴가 장면을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한다. 자연 광경 속에 놓여 있는 작가는 어색하게 쏟아지는 물과 바람에 맞선다. 갑자기 닥치는 폭우와 광풍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뜨지 않고 견뎌내는 작가의 모습에서 로와정의 경우에서와 같이 자기 풍자와 자기 연민을 함께 엿볼 수 있다. 정승일의 덜 스펙터클해 보이는 유리로 만들어진 입방체, 삼각형의 뿔, 최윤의 다이소 스티커를 이용한 작업과 아마추어식 풍경화 <국민 매니페스토>, 이양정아의 월세 300에 보증금 20으로 구할 수 있는 집 리서치 프로젝트 등은 자신들이 처한 물리적, 미학적, 경제적 환경들을 솔직하게 다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양정아는 자신이 제시한 조건의 집을 서울에서 구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아예 300만 원으로 살수 있는 바닥의 면적을 사진작업으로 전시한다. 즉 자기 풍자적인 미학 이 저항이나 자기보존 본능과 연결되는 중요한 지점이다.
하지만 이들의 작업이 지닌 비평적인 쟁점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관객에게 전달될지를 걱정해 보아야 한다. 결국 자기 풍자를 통해서 비평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태도는 극도의 지적인 사고에서 유래한 것이기는 하지만 (비평의 대상을 모호하게 함으로써 각종 비평적 오류로부터 벗어나려는) 동시에 그 때문에 더 자기 과시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자신들을 풍자함으로써 자기보존 본능을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세련된 저항 방법일 수도 있지만 가장 비효율적인 현실변화의 수단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드러낸 솔직한 현실의 문제들은 너무 그럴싸한 화랑에서 열린 전시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절절하게 다가왔다. 삼포세대 중에서도 삼포세대,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사회에서 후세대 작가들이 처한 정치적, 경제적 상황은 과연 무엇이며 혹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고동연・미술사

[Review] 서혜영-사물의 공간

 미송 무늬목 MDF 자석 2014

미송 무늬목 MDF 자석 2014

서혜영-사물의 공간
갤러리 조선 2.12~3.5

뒤샹 이후의 현대예술은 일상의 평범한 사물을 미술제도의 문맥 속으로 옮겨 놓고 예술의 지위를 부여했다. 평범한 사물(事物)이 예술제도를 거쳐 평범하지 않은 작품의 지위로 격상된다. 한편에서는, 미술관 내에서 박제되는 미술에 대한 반발로 예술을 미술관, 갤러리가 아닌 일상의 공간 속에서 제작, 전시, 감상하려는 움직임 또한 활발하다. 대자연 속에서, 거리에서, 지하철, 공원, 식당 등 여러 ‘일상의 공간’ 속에 예술작품을 적극적으로 침투시키려는 노력이 진행 중이다. 일상 사물을 예술로 만들기 위한 노력과 예술을 평범한 공간 속으로 데려오려는 노력이 동시에 진행된다는 것은 그만큼 예술과 일상의 공간이 서로 먼 곳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갤러리와 미술관에서의 설치 및 드로잉 작업과 함께 대형 건물의 로비나 사무실, 상업 공간 등에 작품을 설치해온 서혜영의 활동은 일상과 미술제도 사이를 오가는 현대미술의 상황을 잘 드러내준다. 갤러리 조선에서 열린 이번 개인전 <사물(私物)의 공간(空間)>에서 작가는 ‘예술 작업의 결과물인 작품이 일상의 한 부분이 되는 상상에서 시작했다’고 말한다. 우측에는 천장까지 이어진 높은 기둥이 서 있고, 꺾어진 벽면에는 나무와 철제 조립물들이 섞여 있다. 좌측에는 두 개의 작은 조명이 내려와 있고 그 아래 중간에 나무 조형물들이 놓여 있다. 삼각형을 조립해서 만든 오브제는 작가가 이전에 즐겨 사용하던 모티프인 ‘벽돌’ 모양으로 구멍이 나있다. 그 구멍을 통해 빛이 새어나와 전구를 넣으면 조명 기능을 할 수 있는 형태이지만, 조명이 들어가지 않은 경우에는 감상용 오브제로 존재한다. 나무상자들은 여성사미술관에서의 공공미술 프로젝트에서의 의자와 등받이를 연상시킨다. 작가의 기대대로 누군가의 사적 공간 속에 들어가게 된다면, 몇 개는 의자가 되고, 몇 개는 조명이 되고, 또 몇 개는 특별한 기능 없이 존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블록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몇 개의 블록만으로 세계와 온갖 사물들을 만들어내며, 그것을 아끼고 행복해하듯이, 서혜영의 오브제들은 어른을 위한 블록이 될 수 있다. 조명의 유무에 따라 기능을 넣을 수도,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사물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이번 개인전에서 서혜영의 ‘사물’ 혹은 ‘작품’은 화이트 큐브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듯 잘 배치된 오브제들은 손댈 수 없을 듯 보였다. 즉 사적인 공간에서 어떻게 사용될 수 있을지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기보다는 예술작품의 아우라를 가진 오브제를 보여주는 완벽한 전시 공간으로 기능하였기 때문에 블록을 만난 아이들과 같은 기분을 느끼기는 다소 어려웠다 하겠다.
하지만 작가의 취지와 기대에는 공감할 수 있었다. 우리 대부분은 거의 똑같이 찍어낸 듯한 디자인의 가구와 조명기구, 미학적 고려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환경 속에서 먹고, 일하고, 잠을 잔다. 가격이 저렴하다는 이유로 선택된 사무가구들을 사용하고, 아파트 평수에 맞게 제시되는 좁은 선택지 속에서 물품들을 선택’당’한다. 주어진 규칙과 ‘정상’의 범위 속에서 살아가도록 권고받듯이 말이다. 서혜영은 자신의 미적, 기능적 선택에 따라 환경을 구축해보자고, 그럴 때 우리의 삶을 둘러싼 사물들은 그저 그런 사물이 아니라, 더 특별한 사물이 되고, 나아가 우리의 삶도 더 특별하고 의미 있게 만들어줄 거라고 말한다.

이수정・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Review] 한 Q-사물은 초즈의 치즈를 골랐다

한 Q-사물은 초즈의 치즈를 골랐다
아트스페이스 휴휴2.7~3.7

지난 1월 흥미로운 사건 하나가 발생했다. 윤진섭 크리큐라티스트(cricurartist)의 작품과 이광기 작가의 <통신3사 새끼들아, 요금 좀 내 려봐라>의 합작에 대한 사전 협의 문제가 불거진 것. 이광기 작가는 오래 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통신3사 새끼들아 요금 좀 내려봐라’라는 문구가 적힌 테이프를 윤진섭 크리큐라티스트에게 보냈는데 그는 이를 하나의 개념적 오브제로 간주하여 자신의 작품에 차용했다. 그런데 개념적 오브제로 사용하더라도 이광기 작가와 사전 협의가 있었어야 하지 않느냐는 문제가 작가들 중심으로 제기된 것이다. 다행히 전시 오픈식에 이광기 작가가 참석하고 전시 개념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오해는 풀렸고 테이프 작업을 현장에 설치하면서 전시는 더욱 풍성해졌다. 사실 이번 일은 자그마한 해프닝에 불과했지만 이를 통해 개념적 오브제의 존재를 새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이 쉽게 풀린 것은 이번 전시가 교환가치를 거부하는 개념적 오브제들의 향연이었기 때문이다.
<사물은 초즈의 치즈를 골랐다>라는 제목의 이번 전시는 작가 본인이 그동안 집에 모아 두었던 물건들로 대부분 구성되었다.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이 오브제들은 애초에 교환가치가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다지 주목받을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윤진섭 개인의 역사와 궤적을 같이하는 순간 자본의 속성과는 무관하게 빛을 발하게 된다. 이는 예술 행위에 의해 작품에 의미가 부여되는 현대미술의 메커니즘과도 맥이 닿아 있지만 우리 삶에서도 그러한 지평은 열리곤 한다. 특히 개인의 추억을 되새기는 사진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보존적 가치를 지닌다.
사실 삶의 주름을 촘촘히 들여다보면 자본의 가치를 뛰어넘는 보존적 가치가 꽤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성공이라는 이름 뒤에 도사린 자본의 막강한 힘에 모종의 복종을 맹세함으로써 이러한 보존적 가치들을 망각하거나 상실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특히 예술작품의 경우 예술시장에서 가격이 책정되고 일정한 금액으로 거래되는 순간 그 예술작품의 가치는 오로지 교환가치에 근거해서 판단된다. 기존의 보존가치가 강조되는 개념적 작품이라 할지라도 돈으로 환원되는 순간 가치의 기준이 순식간에 전치되어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이 자본에 잠식되지 않거나 저항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교환가치를 훼손하는 수밖에 없다. 이 전시가 흥미로운 건 자본에 대한 예술적 저항을 등장하는 모든 오브제가 온몸을 바쳐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시가 진행되면서 전시장의 오브제가 지속적으로 변하도록 설정한 행위 역시 자본에 포섭되지 않으려는 예술 수행의 전략이다. 또한 한 큐(韓 Q), 왕치(王治,Wangzie), 윤진섭을 비롯해 20여 개의 예명을 사용하는 것도 예술가의 명성이 작품의 교환가치를 높이는 예술계의 섭리에 포섭되지 않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이토록 자본에 저항하는 예술 행위를 수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온전한 삶의 가치를 보존하고픈 희망 때문이 아닐까. 50년 이상 정신병원에서 생활하는 이종누이의 삶(사진)과 자신의 피(혈당 체크 후 남은 피 묻은 솜들)를 병치한 작품은 이종누이의 혹독한 삶을 자신의 아픔으로 애도하기 위한 것이지 관례적인 예술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과는 무관하다. 이번 전시는 자본으로 환원되길 거부하고 삶의 역사를 빌려 예술의 가치를 발현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유의미성을 가진다. 그러나 관례를 떨쳐버리는 전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일쑤다. 과연 사물은 초즈의 치즈를 고를 수 있을까.

김재환・경남도립미술관 학예연구사

[Review] 허구영-불사조는 재로부터 나올 것인가?

허구영-불사조는 재로부터 나올 것인가?

쿤스트독갤러리 2.7~2.20

‘사별삼일(士別三日)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어서일까? 필자가 2012년 서울 사이아트갤러리에서 열린 <불사조는 재로부터 나올 것인가?>란 동일한 제목의 전시를 봤기 때문일까? 이번 전시를 보기 전부터 작가 허구영의 전시는 나름대로 기대를 가지게 했다. 더욱이 1990년 초반에 그가 보여준 일련의 그룹전 기획과 그를 통한 여러 가지 담론들은 필자에게 적지 않은 신선함과 미술을 대하는 반문(反問)들을 가지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준 바, 그의 태도를 존경해왔으며 언제나 그의 행보가 궁금했다.
분명 필자는 더 좋은 전시를 기대한 것이 아니라 작가 작업의 문맥(context)을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왜 아직도 그러한 담론에 매달려야 하는지? 한 부분에 대한 미련이 그의 전체에 집착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너무 많은 상념이 그의 작업을 정체(停滯)하게 하고 타자와의 관계를 무디게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가 말한 ‘갸우뚱한 균형’은 주체 안에 내제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타자 사이에 있는 것은 아닌가? 쿨하게 ‘작업은 개인적인 차원이다’라고만 말하고 전시를 통해 수정된 항해의 과정들이 전혀 없다면, 관계하지 않는 타자를 상정해 놓았다면 왜 전시를 하여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사견을 피력하려는 것인지? 이러한 의문점에서 그를 움직이지 않는 그로 볼 수밖에 없다.
왜 필자는 이렇게 비관적이어야 했을까? 그것은 전시장에서 2014년의 허구영을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전시장에는 캡션이 없는 작품들이 때 묻고 허름한 전시장 벽체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전시되어 있었는데 서로 어울리기보다는 작품을 구분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불친절이 의도된 것이라면 그 배후를 알아차릴 때 쾌감이 있을 진대, 이번 전시에서는 놓인 것이 없는 잔칫상을 보고 주인의 배려를 책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아니 그가 파놓은 함정에 누구도 빠지지않고 ‘이것은 무엇인가?’라는 푸념만 늘어놓는 뻘줌한 광경만 노출되고 있는 것 같았다.
짜증이 나는 것은 그가 작업실에서 만들어낸 그의 의도(언어로서)들을 네오룩과 갤러리 홈피에서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아니다. 그런 것 없이 전시현장에서 그의 생각들이 요해(了解)되지 못함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의 생각이 뒤틀어지고 비껴가는, 그렇게 사고에서 도주하는 작업들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필자는 그러한 단서조차 찾지 못했다. 함정에 안 빠지고서 그의 작업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것조차 전적으로 관람자의 몫이라고 하는 말조차 삼가는 그의 작업, 이번 전시만큼은 무거운 발걸음을 돌리게 한다.
전시는 그 현장에서 보여주어야만 한다. 작업실의 수많은 고민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죽지도 않고 다시 환생하지도 않는다. 전시장이라는 현장에서 무엇을 기획하고 무엇을 제공해야 한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것을 제공해야 한다. 그로 인해 자신의 사고와 거리두기, 자신과 작품의 거리두기, 작품과 관객의 거리두기에서 그의 입장은 오해되고 그의 욕망은 희석되고 관객은 그의 가르침에서 멀어질 수 있지 않을까?
ps. 닷새를 고민한 이 치기어린 후배의 보챔은 그가 만든 함정인가?

윤제・포천아트밸리 예술감독

[Review] 배종헌-별 헤는 밤

배종헌-별 헤는 밤
갤러리 분도 2.12~3.8

이거 참. 별이라니. 도대체 언제였던가. 우두커니 별을 올려다보며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던 그때가 말이다. 솔직히 말하겠다. 나는 여전히 종종 그렇게 한다. 다만 나는 내가 가끔 밤하늘을 올려다본다는 사실을 숨길뿐이다. 나는 소년이 아니니까. 별을 꿈꾸기보다 안정된 삶을 감당해야하는 어른이어야 하니까 말이다. 대구에서 배종헌이 별을 말하고 있다.
그는 갑자기 소년이라도 되어버린 걸까? 시선을 떨구고 어눌한 어조로 천천히 무언가 말을 할 때 배종헌은 영락없는 소년이다. 소년의 감성으로 바라본 별은 어떠할까. 여기서 갑자기 그는 훌쩍 커버린다. 그는 증거를 수집하는 감식가의 냉정한 시선으로 우리에게 과연 별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되묻고, 그것을 시각화한다. 그는 미학적 인류학자가 되어 별의 사회적 활용을 이야기한다. 그가 담담하게 털어 놓은 천공(天空)의 이야기는 자못 충격적이다. 우리는 모두 스스로 별이 되고자 욕망하고 있던 것이다. 그 욕망은 끊임없이 부추겨지고, 그럴수록 그 욕망의 실현은 멀어진다. 정작 충격적인 것은 별 헤는 소년의 감성으로 세상을 가로지르는 인류학자로서 배종헌이 들이대는 증거물들이다.
별의 욕망과 그 욕망의 불가능한 실현 사이의 간극을 도처에서 출현한 수많은 별이 메우고 있는 것이다. 이미 수많은 별이 하늘에서 내려와 아주 익숙하고 구체적인 일상의 사물들로 육화되어 있다(<운석> ). 세개의 별(삼성)이 울리는 알람이 아침을 깨운다. 일곱 개의 별(칠성사이다)이 목마름을 채운다. 별 관(冠)을 쓴 초록의 여신(스타벅스)이 감성을 달래주고, 삿포로에 취해 잠이 든다. 이미 거대한 별들이 하늘을 날고(보잉), 별이 빛나는 은행(국민은행)에서 재산을 불린다. 또 별이 되고픈 아이들을 응원하며 별이 되지 못한 좌절을 보상받는다(K팝스타). 오리온의 성좌는 이미 혀 위에서 달콤하게 녹아든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배종헌이 끌어모은 별의 증거들이 하찮은 쓰레기 더미의 몰골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별에 대한 욕망을 실현하지 못한다. 별이 될 수 없으므로 더 별을 소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쓰레기 더미들은 착취당한 욕망의 흔적일 뿐이다. 배종헌은 지극히 실증주의적인 태도로서 우리 사회에서 별이 활용되는 방식들에 접근한다. 그렇다고 배종헌이 별이 오늘날 소비자본주의 시대 이윤추구의 수단일 뿐이라는 뻔한 결론에 도달하는 것만은 아니다. 배종헌의 작업에서 읽어야 할 것은 자신의 예술을 성찰하는 방식이다. 예술은 별이 되려는 욕망을 실현하는 궁극적 형태였다. 반 고흐는 평생의 가난과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별이 되었다. 배종헌이 에어캡(뽁뽁이) 속에 별사탕을 끼워넣는 하찮은 방식을 취하는 이유는 별이 되려는 자신의 욕망과 투쟁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별 헤는 밤>이란 별에 대한 욕망과 이윤을 맞바꾸는 동시대 자본주의 체제를 미학적으로 탐험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예술을 재규정하는 시간이다. 그의 성찰이 그리는 궤적이 어떠할까를 예상하기란 쉽지 않다. 그 또한 이미 예술계에서 별이 되기를 강요받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만들어가는 길 위에서 한 발 한 발 자신의 걸음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동일・대구가톨릭대 교수

[Review] 박문희-미지의 생명체들

박문희-미지의 생명체들
송은아트큐브 1.16~2.22

전시장에는 구체적인 어떤 오브제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모든 것은 천으로 덮여있거나 걸레, 인조 머리카락, 인조 잔디 등으로 뒤덮여 있다. 우리는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상상하거나 추측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들추어서 그 실체를 확인 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강아지나 낙타 등등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 내에서 연결고리를 찾는 일뿐이다. 작가는 이렇게 전시된 것들을 ‘미지의 생명체들’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러한 미지의 생명체들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존재인 미지의 것과 접촉한다는 것은 우리의 인식에 큰 자극을 발생시킨다. 그것은 호기심이나 두려움이 이내 폭력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서로에게 긴장이 감도는 시간이다. 그러나 이내 익숙하게 되면 서로를 관찰하고 자신들이 알고 있는 지식들과 상식으로 미지의 것들을 분석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 과정에서 수많은 오해와 갈등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러한 오해와 갈등은 항해술의 발달로 신대륙을 발견한 유럽인들이 기술한 신대륙 원주민에 대한 탐험기와 선교사들의 책이나 인류학자들의 연구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이는 비단 과거만의 산물이 아닌 현재 인간 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갈등들의 원인이기도 하다.
박문희의 작품으로 다시 돌아와 보면 에서는 검은 얼룩이 진 천으로 덮인 무엇인가가 있다. 이것은 정말 단순한 형태를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 제목과 그 얼룩으로 자연스럽게 젖소 같은 동물이 생각난다. 심지어는 처럼 숨은 저녁이라는 제목이 붙어있고 테이블 다리가 보임에도 불구하고 낙타라고 생각해버리게 된다. 는 강아지를 연상하게 하고, , 는 인조 모발로 덮여 있지만 여성과 아이의 모습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그렇게만 바라볼 수는 없다. 이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그 모습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작품들 안에서 머리가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단순한 위장과 포장으로 인하여 우리는 순식간에 새로운 생명체들과 조우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상 이것이 정말 생명체인지도 알 수 없다. 그만큼 미지의 것을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도 이러한 간단한 장치만으로도 쉽게 우리의 인식에 혼란을 주는 언캐니한 상황을 만드는 것이 작가의 의도일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하나의 공식을 걸어 놓았다. 그 공식은 symbol(상징)+meaning(의미)+definition(정의)을 correlation(상관관계)분에 validity(타당성)로 계산하고 beauty(아름다움)를 제곱하는 것이다. 이렇게 박문희는 자신만의 공식을 찾고 우리들에게 ‘제가 찾은 답은 이것인 것 같은데 당신들의 생각은 어떤가요?’ 라고 자신의 공식을 받아들일 것을 종용한다. 만약 우리가 작가의 공식을 인정한다면 미지의 생명체는 더 이상 미지의 생명체가 아닐 것이다. 반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미지의 생명체를 파악하는 우리만의 공식을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작가가 만들어놓은 미지의 생명체를 마주하는 순간부터 작가가 만들어놓은 패러독스에 빠져버리게 된다. 아마도 이것이 박문희가 만들어내는 작업들의 흥미로운 지점일 것이다.

신승오・페리지갤러리 전시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