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SHIN'S DESIGN ESSAY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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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즐거운 나의 집>(2014.12.12~2.15) 전시광경

즐겁고 행복한 나의 집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옛날에는 일단 아파트 한 채 사두면 곧바로 집값이 올라 그 집을 팔고 더 비싼 집으로 옮겨가곤 했다. 그런 부동산 거품 시대가 지난 지금 아파트 소유는 더 이상 재테크의 수단이 아니다. 은행 이자 내는 만큼 집값이 오르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요즘에는 집을 사는 게 손해라는 말도 있다. 집을 팔려는 사람이 많아졌다. 우리나라 사람들, 특히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집은 그저 부의 가치로만 측정되는 거 같다. 집 사기가 옛날보다 쉬워져도, 집을 소유한 사람이 많아져도, 집값이 옛날보다 떨어져도 여전히 한국인들은 2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닌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도 며칠이 멀다하고 이사 트럭과 사다리차가 와서 짐을 내리고 싣기를 반복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난민 아닌 난민이다.
아르코미술관에서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전시를 보았다. 첫 전시장은 거실이다. 테이블 위에 잡동사니들이 눈에 들어왔다. 크리스털 잔과 크리스털 재떨이, 섹시하게 생긴 장식용 용기들, 각종 트로피, 액자에 끼워진 상장, 봉황을 새겨 한껏 권위를 부린 유리 재질의 감사패, 가짜 앤틱 전화기와 이국적인 무늬가 수놓인 전화기 받침대, 모조 고려청자, 중국 여행에서 가져온 듯한 도자기, 사람 모양 인삼이 들어있는 병, 바둑판과 바둑돌, 야구공, 에펠탑 기념품, 지구본, 미니어처 범선, 위스키 로얄살루트 병, 타자기, 이제는 볼 수 없는 검정색의 다이얼식 전화기, 손잡이가 달린 카세트 겸 라디오, 레이스 달린 천 커버를 씌운 티슈통… 우리나라 어느 집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물건들이다. 하나하나 보면 결코 미술관에 들어올 만한 그런 고상하고 수준 높은 것들이 아니다.
집주인은 이런 것들을 거실 테이블에 올려놓고 장식장에 넣어두고 벽에 걸어둔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둘씩 가짓수가 늘어난다. 이것들은 집주인이 이룬 사회적 성취의 증거이고 취향과 기호의 표현이며 여행지에서 가져온 기념품의 과시다. 집이란 이런 잡동사니들의 집합소이고, 한 가족의 역사와 기억을 진열한 전시장이다. 어느 것 하나 사연 없는 것이 없을 것이다. 가족이 겪는 경험과 시간의 흐름으로 한국의 천편일률적인 아파트도 그 주인에 따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주 특별하고 소중한 집이 된다.
최근에 출간된 송미경의 단편 동화 <아빠의 집으로>를 읽었다. 고아원에서 살던 한 소년이 친부모를 만나 진짜 자기 집으로 향한다. 두 살 때 친부모가 아이를 잃어버려서 소년은 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그는 앵벌이, 그 뒤 낡은 고아원에 수용된 고아로 갖은 고생을 하며 자랐다. 그는 늘 깨끗한 집, 맛있는 음식, 친절한 가족을 꿈꿨다. 그리고 그 꿈이 정말로 실현되었다. 그러나 꿈이 실현되자 소년은 진짜 친부모가 어색하고 불편하기만 하다. 깨끗한 집 역시 더러운 자신을 더욱 초라하고 주눅 들게 만든다. 그가 꿈꾸던 집은 실제로는 그를 위축시키고 긴장시키기만 한다. 소년은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딱 하루, 오늘 하룻밤이라도 천우와 함께 지내던 낡고 비좁은 방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휘청거리던 이층침대와 낡은 누비이불 틈으로 몸을 밀어넣고 싶다. 나는 진짜 엄마와 아빠가 살고 있는 이 깨끗하고 밝은 집을 벗어나 내 마음대로 발가락을 까딱거리거나 다리를 떨며, 천우와 동전 따먹기를 하다가 잠들고 싶다. 오늘 하룻밤만이라도.” 이 소년의 간절한 마음은 집이란 개념을 다시 생각게 한다. 집이란 자기와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그곳은 익숙한 사물들로 채워져 있으며 그것마다 사연이 있다.
이사하는 날, 모든 짐을 빼내 텅 비어버린 집 안을 볼 때 밀려오는 이상한 기분, 섭섭한 마음을 누구나 경험할 것이다. 나에게 익숙한 것들이 사라지는 순간 집의 가장 중요한 기능, 즉 따뜻함도 공중으로 사라진다. 건축과 디자인, 인테리어 책과 잡지는 순수한 아름다움을 눈부시게 보여준다. 위대한 건축가들이 지은 명성 높은 집은 결국 사람 사는 공간이 아닌 그 자체가 미술관이 된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 집은 늘 부동산의 가치로 평가되며 그것으로 매매와 이사가 반복된다. 전시 <즐거운 나의 집>과 동화 <아빠의 집으로>는 우리에게 집의 가치에 대해 다시 묻게 만든다. 집은 아름다움이나 부동산이 아니라 가족과, 또는 익숙한 사람들과 함께 한 시간과 기억으로 가치가 높아진다. 집은 ‘내 집’이어야 하는 것이다. ●

CRITIC 응답하라 작가들

오뉴월 2014.11.28~2014.12.21

2층 전시장을 잇는 계단에서 ‘작가피…’ 라는 문구를 발견한 순간 필자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하. 잠깐만. 이 문구가 웃으라는 말장난이었을까? 어쩌면 작가피(fee)는 진정 작가의 피(血)인지도 모르지 않는가. 이 전시는 오뉴월에서 열린 고동연 기획의 <응답하라, 작가들>이다. 노동자로서의 예술가, 미술계 사람들의 관계, 그리고 그들의 생계를 고민하는 이 전시는 우리 시대 순수 시각예술인이 겪는 고군분투기가 그려진 작업과 이들의 생존을 위한 자료들로 채워진 예술계의 비하인드스토리를 제공했다. 그리고 기획자가 인터뷰로 얻어낸 비하인드스토리는 곧 출판될 예정이다. 꼭 필요한 전시였고 방대한 양의 자료가 제공되었지만 작가의 주제 범위가 방대해서 제도 비평에 관심이 없는 일반인이 전시 자체의 통일성을 꿰뚫어보기 힘들었으리라는 판단이다.
덕분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필자가 ‘작가피’라는 문구를 보고 웃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작가피가 작가의 연수입에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으리라는 추측에서 비롯한 듯하다. 작품 가격이란 으레 백만, 천만 원대에 이르는데 10만 원대의 작가피가 뭔가 대수라고 ‘피’ 운운한단 말인가? 작가피를 이렇게까지 굳이 받아내려는 의지가 작가에게는, 특히나 팔리지 않고 전시에 초대만 될 법한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에게 작가피란 생계 수단으로 여겨지기 때문인 듯하다. 더구나 공공미술, 프로젝트성 작품과 같이 과정만이 강조되는 예술 실천이 비대해진 오늘날의 예술 현장을 고려해보면 연간 기관이 지출하는 작가피 또한 상당하겠지 싶다. 단, 그들이 작가피를 지급한다면 말이다.

예술계가 작동하는 방식
기획의 주체가 자신이 초대한 이가 할애하게 될 시간에 대해 보상하는 것은 당연할진대 ‘선한, 공공’ 기관이 작가피를 지급하지 않는다는 걸까? 왜? 이는 기존 예술계의 관습에서 야기된 문제라고 본다. 작가는 언젠가는 정통에서 인정받는 거장이 되어 미술관과 화랑이 자신과 자신의 작품을 모셔가게 될 날을 고대하며 장인적 기술과 숭고한 정신을 연마한다. 따라서 자신의 천재성을 인정할 공식기관인 미술관과 화랑의 권세를 감내하는 것이 기존의 미술계 풍조였기 때문에 작가와 인증기관의 관계는 동종 업계의 동료 관계를 포함하고 있다. 화랑과 미술관 또한 작가가 거장이 된 후에는 작품 가격이라는 금전적 보상이 뒤따르기 때문에 동료인 작가가 굳이 작가피를 받겠다고 고집한다면 찌질하게 볼 수 있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 김아영 또한 예술계 안의 사회적 관계를 주목했고 이를 댄스 스텝으로 도식화한 <바빌론 댄스>를 선보였다. 바빌론 댄스에서는 공모, 대안공간, 화랑을 선택하거나 미술을 포기하는 4개의 장단 중 하나에 맞추어 춤을 추도록 그려져 있다. 그러나 동료 관계가 항상 평등하지는 않다. 박준범의 <비디오 아트의 유통기한>은 예술계에서 벌어지는 기관의 횡포를 고발한다. 작가는 어느 날 스위스 바젤에 위치한 팅겔리 미술관(The Tinguely Museum)이 자신의 비디오를 파스칼 반회케 화랑(Galerie Pascal Vanhoecke)으로부터 받아 무단으로 전시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작가는 해당기관들과 서신을 교환했고 그 내용을 우스꽝스럽게 번역, 전시했는데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을 짜깁기해서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작가님아
미술관이 너네 화랑이랑 연락이 안 된다고 우기잖아. 그래서 우리가 네 데모 DVD를 미술관에게 줬다? 네가 화난 건 알겠는데 미술관 전시도 하고 좋잖아, 화 풀어. 빠리의 비디오계에서 우리가 얼마나 파워 있고 빠삭한 화랑인지 모르냐? 미술계 바닥에서 나쁜 소문 돌아봤자 둘 다 뭐 좋겠어? 네가 CUBE에서 전시한 것도 다 내 덕인 줄도 다 까먹고 배은망덕하게…

작가피를 지급하지 않는 데 대해 참을 만한 병폐로 여기던 기존 미술계의 관습은 지금도 유지되는 반면 미술계의 구조는 크게 바뀌었다. 개념미술, 포스트-스튜디오라는 용어와 함께 발전한, 작품 판매와는 무관한 활동으로 구성된 예술영역은 상대적으로 커졌으며 이제 예술계는 더 이상 작품 가격으로는 보상을 약속할 수 없는 구조로 전환되었다. 이런 구조는 작가피로 상징되는 예술가의 노동의 소외를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예를 들면, 작가들은 작품 생산 외에 토론회, 레지던시 등에서 관객과 함께 하는 교육 등의 활동, 이를 위한 사이트의 리서치 및 글쓰기, 스폰서 확보, 설치 용역 및 장비 제공, 디자인, 운송 및 교통비 확보와 같은 활동을 추가적으로 (그리고 현재는 대부분을 무상으로) 수행하게 되었다. 여기에 할애되는 시간만 고려해도 그 비용이 작가에겐 크나큰 타격이다. 그래서인지 이번 전시에 초대된 작가들은 신진도 아니고 그렇다고 잘 팔리는 블루칩 작가도 아닌, 어디서 이름은 자주 들어본 비교적 안정된 작가들인데 그럼에도 예술과 자본이 만나는 접점에서 약자로 살면서 예술계의 병폐를 메우느라 세컨드 잡으로 고생한다. 예를 들어 김재범의 <출근 기록 드로잉 하기>는 작가로 행세하기 위한 비용을 벌려고 택한 세컨드 잡의 출근부 도장으로 로고를 만들었다. 오늘날 예술의 생산-소비구조에서 작가피가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데 작가들은 아직도 궁핍하다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이 전시에서 제시하는 ‘피’의 문제는 미술계가 해결해야 하는 업계 윤리 혹은 작가가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되는 인간 존엄성 침해의 문제이다.

예술 실천은 노동인가
지난해 11월 말, 서울 시청에서는 ‘노동하는 예술가, 예술 환경의 조건’이라는 제목 아래 심포지엄이 열렸고 12월에는 <응답하라, 작가들전>의 연계 행사로 토론회도 열렸다. 필자는 이 두 행사가 예술가와 노동의 문제를 다룬다면 ‘예술가를 과연 노동자로 불러야 할 것인가’와 같은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논의를 포함하리라 상상했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적어도 두 행사에 참여한 관객들은 자신이 노동자로 불리는 것에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그렇지만 예술이 소명이라는 개념이 팽배한 만큼 아직까지 ‘예술가’와 ‘노동’이라는 단어의 조합은 뜨거운 감자이다. 예술이 소명이라는 감성은 <응답하라, 작가들전>에서도 소개됐다. 함혜경은 <거짓말하는 애인>이라는 스니커즈 디자인으로 생계를 꾸려가려다 예술을 해버리고 만, 그래서 마진이 남지 않게 된 어느 작가의 업무일지를 비디오로 만든다. 예술이 아니라 직업을 갖겠다는 것이 애인이 말하는 거짓말의 실체는 아니었을까? 전통적인 미학에서는 자본으로부터 비평적 거리를 두기 위해 예술가를 노동자로 규정하지 않는다. 예술가를 노동자로 규정하면 예술이 자본이나 정치, 사회로부터 비평적 거리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조건에서 생산은 자율적인 창조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론적인 입장과는 달리 예술가를 노동자로 구분하는 논리는 유물론에서 나온다. 마르크스가 “저자는 아이디어를 생산하는 한 생산적인 노동자이나 그의 작품을 출판하는 출판사의 배를 부르게 하는 한 자본주의의 임금노동자이다”1라고 했다던데 필자는 그의 언급이 마치 ‘예술로 돈을 벌면 순수하지 않다’로 들린다. 오히려 모든 정신활동을 경제적 토대에 묶느라 정신의 순수성을 강조하게 돼버린 관념론으로 들린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예술가가 자본과 사회로부터 완벽하게 분리된 적이 있기나 할까? 미켈란젤로도 보상을 받았을 텐데 그렇다고 그의 예술성이 교황의 것이 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전통적 예술계는 상거래를 하면서 자율성을 위반하고 유물론은 정신을 강조하면서 자율성을 옹호한다. 이렇게 고전의 논리에서부터 이미 이율배반을 포함하는 개념이 자율성인데다가 학자들은 예술계가 사회적 관계망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지켜야 할 자율성은 이미 없다고 하는데 작가들은 아직도 자발적으로 궁핍을 받아들인다. 지금의 미술계 구조가 소외하는 노동의 양이 엄청난데도 눈감아주고 자신의 작업과 관련된 노동이 아니라 기획 주체가 감당해야 하는 노동까지 감수한다면, 그 결과는 기존 예술계 구조의 유지이다.
두 행사 모두에서 작가피에 해당하는 용어를 ‘사례비’라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참가비’나 ‘작품 대여료’라고 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 논의가 벌어졌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사례비는 자선을 베푸는 것 같아 싫다’는 의견이 중론이었는데 이는 ‘나의 노동을 인정하지 않으면 배고파요’로 들렸다. 지금까지 국공립 기관의 예산에서 작가피는 아예 제외되어 왔다. 지원금으로 운영되는 행사의 경우 지원금에서의 작가피 지출이 금지되어 있어 기획자가 작가에게 사례비를 지급하려면 스스로의 재원에서 지출해야 한다. 즉, 작가피는 기획 주체의 정의로운 마음이나 자선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 지금의 여건이다. 정부는 고용되지 않은 기간 동안 겪는 전업 작가의 어려운 사정에 공감한다는 차원에서 복지 재단을 만들 당시 작가들에게 자신을 자영업 노동자로 생각하라는 사고의 전환을 요구했다. 원칙적으로 미술계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정부의 의도는 선도적인 것이었으며 감사하다. 그런데 위의 사례에서 보듯이 작가에게는 경제논리를 수용하라고 요구하는 반면 노동의 대가를 지급받도록 하는 시스템 형성은 규제하는 셈이므로 정부 정책은 모순된다. 때문에 재단의 이름에 달린 ‘복지’가 함의하는 바와 같이 예술가들에게는 자선만이 허락되는 셈이다. 여기서 승자는 사회적 관계망에 의존해 온 ‘기존’ 예술계의 보상구조이다. 그러나 희망의 메시지도 들린다. 지난 1월 22일 정부는 미술작가의 창작활동에 대해 정당한 비용을 지급하는 ‘작가보수제’를 올해 하반기부터 적용하기로 발표했다. 이제 지원금 지출 정책이 바뀌고 사립 및 상업기관만 작가피를 지급하도록 하면 된다.

예술가가 노동자라 불려도 괜찮다면
‘사례비’와 ‘작가피’ 중 어느 단어를 사용할 것인가의 차이는 기존 미술계의 보상 및 독점구조에 순응할 것인가 아닌가의 입장 차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희생을 줄이면서 예술을 보전하려는 입장에 서는 동시에 업계 윤리의 개선을 요구하는 자세다.
예술가를 노동자로 불러도 괜찮다는 이들 중 아트리크, 웨이지라는 단체는 기존의 예술계 구조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이들이다. 아트리크(artleak.org)는 작가피를 지급하지 않는 예술기관을 고발하는 게시판 역할을 자처하고 미국의 WAGE라는 그룹(wageforwork.com)과 캐나다의 CARFAC(Canadian Artists’Representation)는 예술가가 받아야 하는 구체적인 사례비 기준자를 만들어 소개했다. 한스 애빙 또한 기존 예술계가 보장했던 보상의 메커니즘에서 벗어나 경제논리를 한껏 활용하자는 의지를 보여주는 경제학자이자 작가이다. 애빙은 미술작품의 원본이 가진 허세의 혹은 상징적인 가치와 별도로 저렴한 가격으로 예술을 보급하거나 혹은 포스터와 같은 복제품의 판로를 활성화하여 기존 예술작품의 원본이 가졌던 아우라를 제거하자고 제안한다. 결국 산업화된 대중음악계와 유사한 대중미술계를 상상해보자는 그의 요지 중 하나였는데 이번 전시에 포함된 박재영의 작업은 마치 이에 대한 화답처럼 보인다. 그는 Butter Cutter라는, 디자이너였다가 순수예술로 전향하거나 순수예술을 하다가 세컨드 잡이었던 디자인의 길로 들어선 이들로 구성된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전시에는 이전에 수행했던 상대적으로 저렴한 예술상품을 만든 셈인 간이매점용 음식, 디자이너 상품처럼 보이는 순수예술 조형물의 기록과 함께 도록디자인 샘플을 보여주는 ‘자영업자’의 홍보부스가 선보여졌다.
현시점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작가들을 생각하면 예술계의 구조조정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다만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예술가를 노동자라 부르는 방향으로의 구조조정은 경제논리를 패러다임으로 적용하는 입장이라는 사실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신현진 미술비평

김재범 (왼쪽 벽면) 시네마그래피 및 혼합매체2014

김재범 <출퇴근기로 드로잉하기>(왼쪽 벽면) 시네마그래피 및 혼합매체2014

1 Bryan-Wilson, Julia, Art Workers: Radical Practice in the Vietnam War Era, (Berkeley, Los Angeles, Londo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9). P. 27에서 재인용. 원문은 “A writer is a productive laborer in so far as he produces ideas, but in so far as he enriches the publisher who publishes his works, he is a wage laborer for the capitalist.”
크리스 맨슈어. <예술의 노동점유: 줄리아 브라이언 윌슨과의 인터뷰>, 《00도큐멘트3 : 다들 만들고 계십니까》, 미디어버스, 2014 참고.

CRITIC 홍경택 Green Green Grass

페리지갤러리 2014.12.5~1.31

삶의 허무를 주제로 한 17세기 네델란드의 ‘바니타스 정물화’에서 보이는 것처럼 성스럽고 속된 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존재한다. 홍경택은 그간 성배, 촛대, 연필, 볼펜, 서재, 해골, 화초, 올빼미, 대중문화 스타 등 현대인의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이미지들을 강렬한 색상과 더불어 다양한 패턴과 함께 정물의 형식으로 다뤄왔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큰 변화의 지점은 골프장과 에베레스트 산처럼 풍경을 배경으로 사용했다는 점인데, 이들 풍경은 순수한 자연처럼 보이지만 실은 지극히 짜여있고 계획된 인공적인 공간이다. 가지면 가질수록 커져만 가는 사람의 욕망은 하나로 몰릴 때 큰 문제를 만든다. 특히 한국에서 골프장은 값비싼 비용을 내야 하는 욕망의 공간이고, 심지어 골프장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을 가진 곳은 같은 단지라 하더라도 그렇지 못한 곳과 시세에 큰 차이가 있다고 한다. 에베레스트 산 역시 신성한 자연이 아닌 올라가 봐야 하고 정복해야 할 욕망의 대상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풍경의 형식을 끌어들였지만 예전에 다루던 일회용 플라스틱 같은 오브제의 정물에서 느껴지는 독특한 질감과 찰나적인 화려함 뒤에 숨은 허무함을 일관되게 보여준다. 또한 신작 <반추>에서는 그의 대표작인 <연필> 시리즈처럼 골프채를 꽃다발처럼 표현하는데, 반복적이고 구심점에서 무수히 많은 선들로 확장하는 구도의 작품이다. 그는 골프채의 조합을 마치 우주 속 행성처럼 아름답게 보이도록 했지만 특이하게도 자세히 보면 골프채의 헤드 부분에 작업실에서의 작가 모습이 담겨 있어 보는 이에 따라서는 거부감이 느껴질 수 있도록 의도했다. 이는 시간성을 도입하려는 시도이자 몰입을 일부러 방해하는 소격효과처럼 변화된 그의 작업에 대한 스스로의 선언이자 성찰처럼 느껴진다. 신작 <연필그림-여섯 개의 하늘>은 여러 개의 하늘들을 중첩시키고 거기에 하늘을 가로지르며 다이빙하는 것 같은 남자의 이미지를 그려놓은 작품이다. 개인전에서 열린 작가와의 대화에서 그는 인간이 죽었을 때 다른 차원의 세계로 이동한다는 교황의 언급에 공감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앞으로의 그의 창작 방향을 예상할 수 있게 하는 작품이었는데, 동일한 시간과 공간에 거주하지만 각각 다른 차원에서 살고 있거나 여러 차원의 동시적 공존에 대해 표현하고 있다. TV중계에서 보는 다이빙 선수들의 모습은 멀리서는 유려한 몸짓으로 포장돼 있지만 클로즈업된 모습들은 짧은 순간 높은 속도로 도약하고 균형을 잡기 위해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있다. 이처럼 그림 속의 다이빙하는 남자의 이미지는 독자적인 개체성을 가지고 공존하는 하늘을 뚫고 추락하는 다른 체계의 죽음과 유한성을 상징하며, 긴장감 있게 한 화면에 담은 것이다.
홍경택의 작품은 화려하지만 불편한 구석이 있다. 그것은 경계에 있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평단뿐만 아니라 시장에서도 환영 받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오브제와 풍경 이면에 감춰진 인간의 욕망에 대해 전하는 메시지를 시간성의 도입, 초현실주의적 접근 등으로 창작의 방향과 사유를 확장하는 그의 균형감각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전동휘 예술학

CRITIC 그만의 방: 한국과 중동의 남성성

아트선재센터 2014.12.19~1.25

한국의 현대작가가 남성의 존재에 주목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조선시대 회화에서는 미인화나 풍속화에 더러 여성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려지는 대상은 대체로 남성이다. 단적인 예가 초상화로, 관복이나 학창의(鶴氅衣) 차림의 남성 초상화들은 그들의 우월한 사회적 지위를 드러낸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상황이 역전되어, 여성 이미지가 회화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국민화가’로 불리는 박수근의 그림을 보면, 여성들은 좌판을 벌이거나 머리에 무엇인가를 인 채 바삐 움직이고 있으며, 때로는 절구질이나 빨래를 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반면 남성들은 우두커니 앉아있거나 아예 ‘그림틀 밖’에 존재한다. 현대작가가 남성이나 남성성에 주목한 것은 최근의 일인데, 그 시선은 전통사회와 사뭇 다르다.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그만의 방: 한국과 중동의 남성성(A Room of His Own: Masculinities in Korea and the Middle East)전>은 영상, 설치, 퍼포먼스 등 다양한 장르로 구성됐다. 한국작가 외에 터키, 이라크, 오만, 레바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등 중동지역 작가들이 참여한 이 전시는 남성의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그간 한국의 현대미술 담론에서 여성이나 여성성, 혹은 여성의 인권에 대한 문제는 자주 거론된 반면, 남성이나 남성성, 혹은 남성의 인권문제는 거의 주목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전시가 내건 ‘남성성’은 이색적이다. 게다가 한국과 중동이라는, 피부색과 지역, 종교, 문화가 전혀 다른 두 지역의 미술을 묶어냈다는 사실 또한 흥미롭다.
한국과 중동은 지역과 인종, 문화가 전혀 다르지만, 비서구권이면서 장남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라는 점 등에서 얼마간의 공통점이 있는데, 전시 기획자는 이 두 사회에서 나타나는 남성의 이미지와 남성성의 문제에 주목했다. 그러나 남성중심사회의 전형이라 할 두 지역에 살고 있는 남성들의 모습은 우리의 선입관을 여지없이 깨뜨린다. 가부장적 전통사회에서 권위를 부여받은 동시에 가족을 부양해야 할 책임을 진 남성의 모습은 이동용의 <아버지>(2014)에서 드러난다. ‘아버지’는 작품 제목이지만 실제로는 ‘사진 바깥’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박수근의 작품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아버지>에서 강조하는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희생이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진짜 힘들었거든예”라고 하던 장남 덕수의 자괴적 읊조림이 공감을 얻는 것도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문화는 다르지만, 태미 고 로빈슨의 <크라잉 미-임>(2014)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또한 <언덕의 왕들>(2003)에서처럼 아무런 소득 없이 무모한 노동이나 놀이를 즐기는 중동 남성들이나, <우리가 깨어났을 때 본 것>(2006)에서 보이는, 무너질 기미가 전혀 없는 벽을 넘어뜨리기 위해 애쓰는 남성들은 강하고 진취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게 아니라 무모하고 앞을 예측하지 못하는 존재로 표현된다. 이는 여성과는 다른 차원에서, 규율, 전통, 타인의 시선에 갇혀 있는 피해자로서의 남성 이미지이다. 또한 외모와 패션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 남성들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아카이브 작업들은 ‘남성성’에 대한 허구를 폭로함과 동시에 남성들의 자기인식이 변화된 현실을 드러낸다. 이처럼 <그만의 방전>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성은 여성 못지않게 사회적 규율에 의한 희생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남성과 여성을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분법적인 틀로 바라보는 시선을 해체할 뿐만 아니라, 남성성 역시 여성성만큼이나 허구라는 사실을 폭로한다.
전시 기획자인 이혜원 교수는 ‘남성 문제’를 오랫동안 생각해왔고, 중동지역에 머물면서 리서치를 하는 한편 중동 미술에 대한 연구논문을 발표한 적도 있다. 물론, 한국에 살고 있는 여성 기획자이다보니 중동의 남성을 다룬 작품 해석에 일정 정도 2차 자료에 기댈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겠지만, 기획의 참신한 시선이 우리의 인식을 확장시키는 기회가 된 것은 분명하다. 이를 계기로 한국 미술계에서도 ‘남성문제’와 ‘남성 이미지’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길 기대해본다.
김이순 홍익대 교수

CRITIC 노상익 {blog: surgical diary}

스페이스 22 2014.12.22~1.22

노상익은 사진가이기 전에 외과전문의다. 그의 신분을 밝혀야만 하는 이유는 이 대목이 그의 최근 전시 <블로그: 수술일지>에서 중요한 관전 포인트가 되기 때문이다. 1인 2역의 모노드라마처럼 의사와 사진가의 시선이 교차하는데 두 시선의 팽팽한 짜임새는 노상익의 특수성을 돋보이게 한다.
작업은 한해 200여 차례의 암수술을 집도하는 외과의로서 그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일기 형식으로 기록해 나간 임상 일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수기로 써내려간 진단서를 비롯 환자의 심장박동 그래프, 수술 장면 및 몸에서 떼어낸 암세포 등 치료 과정부터 사망시까지의 도큐먼트가 공개된다. 이것들은 환자 대부분의 환자의 치료와 연구를 위해 의사 노상익이 수집한 데이터들이다. 사람의 장기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진도 그가 찍은 것이 아니라 수술 당시 기록 조수나 수술대 위의 카메라가 자동으로 촬영한 것들이다. 비전문가에게는 해독 불가능한 암호코드나 불편할 만큼 적나라한 해부도처럼 보이는 이 자료들은 언뜻 암의 불가해함과 맞서는 실험실에 들어선 기분이 들게도 한다.
이 의학적이고 차가운 기호의 씨줄 위에 다시 두 갈래의 날줄이 얽히는데, 하나는 환자 개개인에 관한 아카이브이고, 다른 하나는 사진기를 든 노상익이 기록한 환자들의 모습이다. 환자와 가족들이 작가에게 제공한 앨범 사진 등에서는 암의 발병 요인을 유추해볼 수 있는 직업, 사는 곳 등의 사회학적 지표는 물론이고 암을 겪은 개인의 삶의 궤적이 담긴다. 특히 그가 근무하는 보훈병원의 특성상 환자의 상당수는 전쟁터에서 외상을 당한 이들이기도 하다. 노상익은 그런 그들의 병실에서의 모습, 퇴원 후 집에서의 일상 등을 스스럼없이 사진으로 기록한다. 대개는 치료 과정에서 더 많은 이야기와 정서적 교감을 나눈 환우들이다. 어느 환우의 집에서 찍은 듯한 물고기와 부엉이, 햇살 아래 잡풀 더미에서 걸어 나오는 중년 사내 등의 사진은 우리로 하여금 암이라는 묵직한 질병 너머 존재의 한순간을 바라보게 만든다. 따뜻하면서도 슬픈, 한껏 서정적인 이 사진들은 각자의 죽음의 경험과 맞물린 푼크툼이 되기도 하고, 의사가 아닌 인간 노상익이 겪은 상실감의 징표처럼 보이기도 한다.
암도, 이미지도, 생도 복잡성을 벗어날 수 없듯, 암을 둘러싼 다양한 층위의 사진들은 노상익의 전시에서 낯설게 충돌하면서도 정교하게 맞물린다. 사망자의 3분의 1이 암으로 세상을 등지는 시대, 암은 정복하고 싶은 질병이자 한편으로 그것은 생에 대한 욕망과 죽음의 공포를 경험케 하는 복잡한 감정의 지표다. 노상익의 전시는 건조하고 의학적인 이미지 사이를 헤집고 이미 세상을 떠난 이의 과거 한 때로 우리들의 마음을 잡아끈다.
송수정 사진비평

CRITIC 데비한 To See What Eyes Cannot See

트렁크갤러리 1.8~2.3

2012년 성곡미술관의 개인전을 끝으로 8년 동안의 한국생활을 접고 LA의 집으로 돌아간 재미교포 작가 데비 한(Debbie Han)의 행보가 자못 궁금했다. 뉴욕에 전속화랑이 생겼다는 소식은 들었고, 트렁크갤러리의 새해 첫 전시에서 근작 <Color Graces>를 보았다. 작가의 ‘번개머리’는 여전한데, 작품은 많이 변했다. 2013년 LA에서 시작한 <Color Graces>는 흑백사진 연작 <Graces(여신들)>의 후속작으로, 서양의 고전적 여신상들의 두상과 현실을 살아가는 다양한 인종의 여성의 몸의 혼성적 결합이 주축을 이룬다. 여기에 인종 구분의 표지인 피부색으로서 “유색”과 이를 재현하는 장치로써 컬러 사진, 즉 문화와 기술이란 두 개 층위의 “Color”를 도입하면서 외형적으로나 개념적으로 큰 전환점을 맞았다.
데비 한에게 한국 생활은 내부자이자 외부자라는 이중적인 시선으로 문화적 충격과 문화 간의 차이를 성찰하며,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를 통합하는 혼성문화의 어법을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글로벌한 도시 LA에서 다인종과 다문화적 삶을 일상적으로 마주하며 작가의 관심은 문화적 차이, 성별, 피부색을 넘어서는 인간으로서 공통점, 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진지한 철학적 문답으로 넘어갔다. 전시 작품 중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에서 이런 사유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서양에 잘 알려진 동양의 “세 마리 원숭이” 도상에서 각각 눈, 귀, 입을 가린 자세를 차용하고 그 금언의 의미를 확대한 이 작품은, 외형이 아닌 내면세계의 가치에 집중할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감정을 사계절에 비유한 <희로애락>의 일부인 <존재의 계절 IV(Season of Being IV)>와 <여기 지금(Here and Now)> 역시 다양한 차이를 뛰어넘어, 인간의 슬픔이나 고통의 공유와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공감의 순간을 포착했다. 지구화 이후 전쟁터가 되어버린 인간 생존의 척박한 삶의 현실 속에서 작가는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인간에게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서로 다른 인간들이 어떻게 교감하며 소통할 수 있는지를 질문하며, 그 사유의 장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그러나 이전의 작품들이 종종 한국사회에 대한 비판이라는 오해와 불편을 일으킨 것처럼, 미국에서 제작된 신작들이 한국의 맥락에서 다르게 해석될 소지를 배제할 수 없는데, 이 같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작품을 더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동안 사진, 조각, 오브제, 설치 및 청자와 백자, 옻칠과 자개를 이용한 상감기법까지 다양한 매체와 기법을 섭렵하며 꼼꼼하고 고된 수작업에 집중했던 그녀가 17년 만에 회화를 다시 시작했고 한다. 회화작품을 다시 잡게 된 것은 인간과 삶의 본질에 대한 근자의 사유와 무관하지 않다. 회화 신작들은 6월에 전속 화랑인 뉴욕의 리코 마리스카 화랑(Ricco Maresca Gallery)에서 첫선을 보일 예정이라니 궁금해도 기다려 볼 수밖에.
김현주 추계예대 교수

CRITIC 문승현 Watercolor

조선일보미술관 1.7~13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언제나 자기만의 독특한 떨림을 지닌다. 그 떨림이 이어지고 느껴지는 것. 그것이 바로 대상에 대한 앎의 시작일 것이다. 그 떨림은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동시에 정신에 자신만의 떨림을 깊이 새긴다. 따라서 우리는 눈을 감아도 그 떨림으로 대상을 추상해낼 수 있다. 그렇게 우리의 모든 감각은 외부의 떨림에 곤두서 있다. 그것이 바로 눈을 감으면 더 산만해 지고 귀를 막으면 더 시끄러워지는 이유다. 대상과의 첫 만남. 그 떨림을 느끼려 가만히 들여다보기. 응시다. 문승현의 작품은 그렇게 우리에게 응시하기를 요구한다. 흡사 어느 따사로운 여름날 물 위로 튀어나온 바위턱에 앉아 한없이 바라보던 물속에 움찔 이끌리듯 그의 조형적 언어를 이끄는 소재이며 생명의 근원인 물은 우리의 시선과 정신을 움찔거리게 만든다.
생명의 근원으로서 물은 스스로 생명이면서 다른 많은 생명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다른 생명들의 바탕이기도 하다. 따라서 작가 문승현이 수채를 고집하는 이유가 표현 기법이나 재료의 의미를 넘어 어쩌면 생명에 대한 작가의 철학적 사유를 관철하려는 데 있는 것은 아닐까. 물속에 비치는 돌은, 다른 의미로 물과 함께 지구의 역사를 간직하고 고증하는 또 하나의 생명이다. 이러한 생명에 대한 작가의 천착은 그 생명과 생명 사이를 잇고 있는 작은 물고기들에게도 시선을 이끈다. 물고기들의 움직임을 좇다보면 작가의 화면 구성과 그 이면에 비치는 돌들의 도식적인 조형언어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이는 생명, 나아가 자연 전체를 바라보는 문승현의 정신세계의 시각적 표현이며 메시지다.
물속에 어른어른 놓인 돌들과 점점 그 형상이 사라지고 움직임만 남은 물고기들의 관계를 천천히 지켜보면서 순간 어린시절 눈 뜨자마자 친구들과 함께 뛰쳐나갔던 개울가가 떠오른다. 발바닥이 아파 뒤뚱거리며 물장구치던 유년의 어느 개울가에 부서지던 햇살과 그 햇살로 부신 눈을 찌푸리며 발을 담갔을 때 전해지던 물속의 차가우면서 매끄러운 느낌. 그렇게 물은 언제나 우리에게 생명의 소중함과 근원에 대해 지치지 않고 이야기하고 있었음을 다시 한 번 느낀다. 서서히 떠오르는 유년의 아련한 기억들이 가져다주는 행복만큼이나 생명으로부터 시작되는 작가의 다음 메시지는 무엇일까 자못 기대된다.
임대식 아터테인 대표

CRITIC 임선이 걸어가는 도시-흔들리는 풍경_SUSPECT

갤러리 잔다리 2014.12.23~1.16

크리스마스가 시작되기 이틀 전, 홍익대 인근 갤러리 잔다리에서 작가 임선이의 개인전 <걸어가는 도시-흔들리는 풍경_SUSPECT> 가 열렸다. 홍대 앞의 들썩거리는 분위기와는 달리 푸른색과 흰색 안개가 감도는 전시장은 차분했다. 이번 전시 작품들은 2007년 전시 <부조리한 여행>에서 선보인 <붉은 눈으로 본 산수> 시리즈의 연장선상에 있다. 전작에서 보여준 붉은 인왕산은 차가운 푸른빛을 띤 남산으로 이어져 돌아왔다. 남산은, 일찍이 우리 선조들이 목멱대왕 산신을 모셔 두고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던 곳이다. 그래서 목멱산(木覓山)이라 불렸다. 그러나 평안을 기원했던 그곳은 일제강점기부터 훼손되기 시작하여 공원이 조성되고, 광복 후엔 케이블카가 설치됐다. 1975년에 남산타워(현 N타워)가 세워졌으며 심지어 호텔까지 들어섰다. 작가는 이렇게 우리들의 손에 의해 서서히 깨어져가는 자연과, 그와 상반되게 인공적으로 재탄생하는 도시의 모습을 남산을 통해 보여준다. 관람객이 남산의 자연스러운 능선을 따라 걷다 보면 갑자기 허리가 뚝 잘린 낭떠러지가 등장한다. 긴장되는 순간이다. 그 자리에서 고개를 들어 먼 산을 올려다보면 차갑게 냉각된 남산타워가 우뚝 서 있다. 하얀 서리에 덮인, 딱딱한 스테인리스의 거대한 남산타워는 높은 산 위에 서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 도시의 뜨거운 불빛들을 냉소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듯하다. 지하 1층 전시장을 가득 메운 사진 연작 <극점>에는 기호화된 푸른 지형도로 이루어진 남산이 짙은 운무에 둘러싸여 있다. 저 운무 속에 과연 무엇이 감추어져 있을까? 운무가 걷히면 우리는 그 실체를 알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우리 스스로 그 장막을 드리웠는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빠르고 높게 올리며, 새로운 세상을 지향하는 현대사회에서 작가 임선이의 작업은 역행한다. 천천히 한 장 한 장의 지형도를 자르고 쌓아올리는 노동집약적인 과정을 통해 작가는 그 안에서 멈추지 않고 꾸준히 내면을 다져나간다. 그래서 임선이의 전시는 자주 접하기 어렵다. 산의 형태에 집중하다보니 산 자체에 집중하게 되고 그제야 비로소 그 주변에 있는 집도 길도 보였다고 작가는 말한다. 다음에 작가가 몰입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어디일까? 설레는 마음으로 임선이 작가가 안내할 다음 길을 기다려 본다.
정창미 미술사

CRITIC 디지털 트라이앵글 : 한․중․일 미디어 아트의 오늘

대안공간 루프 2014.12.30~1.31

최근 한국, 중국, 일본은 새로운 긴장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3국 정부의 우경화와 더불어 각국 간 정치적 관계도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 하지만 고대 이래로 줄곧 경제적, 문화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3국은 현재 문화계를 비롯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등 서로 닮은 듯 다르게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야스쿠니 신사 참배, 독도 영유권 문제 등 갈등 요인으로 반일, 반한 감정을 고조시키는 여론이 일기도 하고 중요한 정보를 공유하는 군사협정을 맺으려 하는 등 문화계와는 사뭇 다른 관계를 보여준다. 영토 분쟁과 관련하여 중국과 일본은 센카쿠/댜오위다오 영유권을 놓고 긴장관계가 고조되다 지난해 11월 합의를 통해 관계를 개선했다. 영토 분쟁과 각국의 경제정책, 북한과의 관계, 핵문제, 자연재해 등 갖가지 갈등 요인들이 동아시아에 존재하며 분쟁을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한중일의 미디어아트 지형도를 볼 수 있는 전시 <Digital Triangle>은 의미 있다 하겠다.
각국의 참여 작가들은 고도화된 신자유주의하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생활상, 혹은 도시 풍경에 주목한 작업을 선보인다. 미디어 자체에 대한 실험을 하는 작가들도 있지만 주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작업들이 두드러진다. 작가 이경호는 시골마을 버스정류장과 시골길을 걷는 작가의 모습, 잘못 지은 듯 삐딱하게 서있는 건물의 철거 전 모습을 보여주는 작업과 10원짜리 동전을 크게 확대한 영상과 더불어 실제 동전을 매달고 ‘Meaningless(의미 없음)’ 이라는 제목을 붙인 작업을 선보였다. 거의 쓸모가 없어진 10원짜리 동전은 예술작품이 되어 그 의미를 다시금 묻는 것이다. 스마트폰의 GPS를 이용해 지도에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한 양치안(Yang Qian)은 이미 많은 이가 시도한 방식으로 작업했지만 그가 <Mountain/Cultural Sqaure>에서 보여주는 공원의 풍경과 공원에 나와 노는 아이들을 돌보는 나이든 보모 혹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혼자 하릴없이 공원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노인들의 모습은 산업화된 중국의 일상을 드러낸다. 한중일과 더불어 동아시아의 독특한 구성원인 북한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은 왕궈펑(Wang Guofeng)의 작업은 잘 정돈된 교실과 긴장한 듯 보이는 북한 어린이들의 모습을 통해 동아시아의 관계에서 북한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고전에 대한 언급을 통해 인간 군상을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주는 먀오샤오춘(Miao Xiaochun)의 작업은 커다란 화면 속에서 현대인의 삶이 어떠한지 질문하는 듯하다. 도미나가 요시히데(Tominaga Yoshihide)의 작업 <세계평화>는 세계평화라는 한자어가 쓰인 판화를 만드는 퍼포먼스와 그 결과물을 보여준다. 아스팔트를 깔 때 쓰이는 마카담 롤러(Macadam Roller)로 세계평화를 짓눌러 찍어내는 작업은 어릴 적 학교에서 배우고 거의 모든 만화영화의 주제였던 ‘세계평화’를 만들어낸다. ‘세계평화’라는 한편으로는 당연하고 한편으로는 낭만적인 이 단어는 유효한 것일까? 과연 세계는 현재 평화로운지 아닌지 생각하게 만든다. 고전미술에 대한 언급과 다양한 미디어적 실험을 작업과 더불어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업들은 현재 한중일의 관계와 상황, 그리고 앞으로의 관계가 어떻게 되어야 할지 생각하게 만든다. 나아가 정치・경제・군사적 상황을 넘어 예술은,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게 만든다.
서준호 오뉴월 대표

CRITIC 손몽주 표-류-로

홍티아트센터 2014.12.15.~1.30

손몽주는 합성고무밴드를 이용해 공간을 횡단하는 일종의 띠 작업을 지속적으로 진행해왔다. 이 작업들은 ‘공간의 변형과 확장’이라는 주제를 구현하며 지난 10여 년 동안 800km에 달하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이제는 손몽주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버린 이 작업들은 공간의 문제뿐 아니라 빛의 효과와 관객 참여적 의미를 더해가며 다양한 형태로 진화해왔다. 손몽주의 작업, 특히 공간을 띠로 나누는 아이디어는 무척 신선하고 다양한 확장 가능성을 가진 듯 보인다. 공간에 대한 제약이 없고 어떤 상황에서도 작품 설치가 가능한 매우 유용한 설치방식을 적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업의 여러 양상에도 불구하고 손몽주의 작업은 공간에 지나치게 형식주의적인 관점으로 접근한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미학적 순수주의 혹은 형식주의를 넘어서려 한 설치미술을 하면서도 그의 작업은 여전히 그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아이러니 같은 것. 다시 말해 캔버스를 공간으로 확장한 정도의 실험으로만 느껴졌다. 물론 특정한 장소에서 이루어지고 다양한 개념들이 교차하는 설치미술의 기본적인 특징을 가지고는 있지만 공간은 여전히 중성적인 배경, 즉 삶이나 존재가 가지고 있는 무게가 탈각된 공간이었다.
최근 작가는 “표류로”라는 주제의 전시를 열었다. ‘표류’의 미래적 가치를 담기 위한 제목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이번 전시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작가의 작업이 내용과 형식에서 커다란 변화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모티프는 단순하다. 대마도를 방문하면서 그곳에서 표류해온 고사목을 우연하게 발견하게 된다. 무심하게 떠내려 온 표류목을 통해 작가는 ‘시간’ 혹은 ‘삶의 의지나 지향’과 같은 의미들을 사유한다. 작가가 생각하는 것처럼 “표류”의 의미는 어쩌면 삶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특징일지도 모른다.
다대포 홍티아트센터 레지던시에 참여하고 있는 작가는 그곳에서 표류목을 구해 이번 전시를 진행했다. 무중력의 공간을 부유하는 듯 한 표류목들은 작가의 작품에서는 ‘장소’와 ‘사물’을 상징하는 오브제들이다. 이러한 표류목의 등장은 중성적인 혹은 배경으로서의 공간을 ‘의미’와 ‘해석’의 장소로 전환시킨다. 시간의 결이 켜켜이 새겨진 표류목과 작가 특유의 띠 작업이 만나 정서적 반응을 호출하는 공간을 연출했다. 형식주의의 버릇을 온전히 벗어나진 못했지만 이번 전시는 새로운 시작의 단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흘러가는 것의 무게에 대한 자각, 이것이 손몽주의 ‘표류로’ 전시에 대한 긍정의 이유다.
이영준 김해문화의전당 전시교육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