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아라리오를 아시나요?

아라리오 김창일 회장의 어제와 오늘

배혜경 크리스티 한국사무소 대표

“I have a dream~” 그룹 아바Abba의 경쾌한 노래가 들리면 나는 항상 조건반사처럼 김창일 회장을 떠올린다. 그 노래는 아주 오랫동안 김창일 회장의 휴대전화 컬러링이었다. “나는 꿈이 있고 어두움을 헤치며 때가 되면 비상하리라”는 가사처럼 그는 늘 꿈을 품고 사는 ‘청년’이다.

# Dream
어린 시절 비 온 뒤 갠 하늘의 무지개를 보고 황홀경에 빠지던 소년이 있었다. 무지개는 소년에게 막연하지만 한 가지 꿈을 건넸다. 그 무지개처럼 누군가의 영혼을 정화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이었다. 소년 창일은 장년이 되어 미술관을 견학하고 미술품 수집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제 그 꿈을 멋지게 구체화했다. “LA 현대미술관 MOCA와 디아:비컨 Dia:Beacon을 보면서 나는 내가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미술관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느꼈다”는 그는 전 세계의 좋은 작품들을 수집해서 미술관을 통해 사람들을 문화적으로 풍요롭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2000년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천안에 미술관을 지을 생각에 가슴이 부풀어 있었고 외국의 건축가와 이미 설계를 진행한 상태였다. 김 회장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가장 놀라운 점은 평생을 간직해온 그의 화두인 꿈에 대한 놀라운 집중력과 자기 최면, 자기 암시이다. 보통 사람은 꿈을 꾸더라도 모든 일상이 일관되게 그 꿈을 향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와 이야기를 하면 끊임없이 “ 꿈, 운명, 아름다움, 예술” 이라는 단어가 반복된다. 그는 실제로 일상에서 잔가지와 군더더기는 다 쳐내고 매우 단순한 삶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꿈에 선택, 집중한다. 3년 전쯤부턴가 그의 휴대전화 컬러링은 들국화 전인권이 절규하듯 부르는 “하지만 후회 없어~ 찾아 헤맨 모든 꿈 , 그것만이 내 세상~”으로 바뀌었다. 그가 꿈꾸던 미술관이 가시적으로 풀리지 않았고 뉴욕 아라리오, 베이징 아라리오의 철수 등으로 인해 힘든 시절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지난해 소격동과 상하이에 갤러리를, 그리고 옛 공간사옥을 매입해 꾸민 뮤지엄 인 스페이스와 제주도에 세 개의 뮤지엄을 지속적으로 개관했지만 그 모든 것은 결코 하루아침에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지난 35년간 축적된 그의 땀과 노력이 이루어낸 꿈의 결실이라 하겠다.

# Destiny
김창일 회장은 본인이 유학 간 것도 아니고 미술 공부를 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그림을 그리고 컬렉션을 하게 된 것은 기적이고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그에게 예술은 곧 운명이다. 운명은 그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왔고 그중 하나가 공간사옥이다. 어느 날 그가 예고도 없이 우리 사무실에 들러 상기된 표정과 들뜬 목소리로 ‘정말 생각지도 않았던 공간사옥을 인수하게 됐다’는 소식을 전하던 기억이 난다. ‘낡고 침침하고 오밀조밀한 건물에 어떻게 미술관을?”이라는 세간의 우려가 적지 않았지만 그는 보란 듯이 멋진 미술관으로 공간사옥을 살려냈다. 역사성과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컬렉션을 직접 큐레이팅하여 전혀 새로운 형태의 현대 미술관을 만들어낸 것이다. 현대미술을 전시하기 쉽지 않은 공간 구조인데도 신디 셔먼, 바바라 크루거, 앤디 와홀, 마크 퀸, 트레이시 에민등과 백남준, 강형구, 최병소, 이동욱 , 수보드 굽타, 권오상 등의 작품들이 마치 ‘바로 여기가 내 자리야’라고 웅변하고 있는 듯한 미술관…. 참으로 진지한 컬렉션임에도 지루하지 않고 흥미진진하게 전시된 이 미술관이 있어 나는 요즘 외국 방문객이 와도 마음이 놓인다. 그들에게 한국 개인 컬렉터의 실험적인 현대 미술관을 자랑스럽게 보여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 passion
한 남자가 티셔츠에 갇혀 마구 버둥대고 있다. 한 팔을 소매에 끼었는데 다른 한 팔은 소매 구멍이 영 찾아지질 않는다. 너무 허둥대는 바람에 티셔츠는 더 엉키고 만다. 딱 학교에 지각한 소년 같은 이 사람은 바로 김창일 회장이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작품을 어떻게 만들지 아이디어가 머릿속에서 폭포처럼 쏟아져 나와 빨리 작업장으로 달려가려 서둘다가 벌어지는 풍경이다. 이처럼 그에게 창작은 간절한 소망이며 운명 같은 신내림이다. “나는 한때 죽을 만큼 어려운 시절을 겪은 사업가다. 그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꿈이 가득한 아름다운 세상을 나의 예술로 표현하겠노라, 결심했다.”
예전에 그를 보면 솔직히 뜬구름을 잡는 사람인 것만 같았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고 에너지가 지나치게 넘치는 무모한 사람. 나처럼 평범한 세상 사람의 잣대로 보기에 그의 열정은 왠지 부담스러웠고 그가 과연 꿈을 이룰 수 있을지 적잖이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난 16년간 그 어떤 전업 작가보다 더 치열하게, 더 많은 시간을 쏟으면서 다양한 기법과 주제의 실험을 통해 계속 발전된 그만의 독창적 작품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처음에 그가 작품을 한다고 했을 때 나는 속으로 ‘그러지 말았으면…’ 했다. 그냥 취미로 그림을 그리다가 괜히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것이 아닐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오랜 시간 가족과 떨어져 스스로 고독한 환경 속에 침잠하여 자신의 내면에서 솟구치는 열정을 작품에 쏟아 부었다. 그림을 그릴수록 자신이 왜 그림을 그려야 하는지 또 어떻게 그릴지 정신적으로 혼란스러워하며 고민했다는 그는 오늘도 하루의 반은 작품 구상과 작품을 만드는 데 보내고 있다. 그에게 누가 감히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누구보다 더 투철한 작가 정신으로 무장한 그다. 요즈음의 그를 보면 소년처럼 눈이 맑아진 느낌이 물씬하다. 15년 전에 느꼈던 사업가의 풍모보다는 예술가의 아우라가 더 강하다.

# Arario Brand, Collection Brand
“나는 내 가슴을 울리는 작품을 산다.” 김 회장이 컬렉션을 할 때 선택하는 기준은 그 자신의 ‘필feel’이다. 그의 컬렉션은 대부분 커팅에지cutting edge 작품들이다. 매우 실험적이고 이슈가 되는 작품들을 과감하게 컬렉션함으로써 아라리오만의 특별한 아이덴티티를 만들어냈다. 그에겐 시대를 앞서가는 그만의 직관과 필이 있다. 특히 영국의 yBa 작가들과 독일의 라이프치히 화파 작품을 그들이 글로벌 미술계에서 막 부상하기 시작할 때 수집했고, 나아가 아시아의 떠오르는 신진 작가들에 주목하고 컬렉션해왔다. 마크 퀸의 <셀프>나 채프먼 형제의 작품처럼 매우 충격적이고 엽기적인 작품들까지도 수용할 정도로 그는 열려있으며 또한 많은 한국의 동시대 작가도 후원해왔다. 그 동안 동시대 미술시장은 급성장을 했고 키스 해링, 시그마르 폴케, 라이프치히파 작가들, 신디 셔먼, 데미안 허스트, 마크 퀸, 채프먼 브라더즈, 안소니 곰리, 앤디 워홀, 바스키아, 장환 등 등 이미 국제 시장에서 거장의 반열에 오른 작가들의 작품을 일찌감치 수집해온 그의 안목은 결과적으로 아라리오 컬렉션의 정체성이 되었다.
용도 폐기되고 버려진 영화관과 바이크숍 그리고 모텔. 제주도에 있는 이 건물들을 미술관으로 만든다? 우리는 이 건물들이 헐리고 그 위에 번듯한 현대식 미술관 건물들이 우뚝 서게 될 줄만 알았다. 그런데 김 회장은 그 특유의 역설과 예측불허의 감성으로 건물의 많은 부분을 그대로 남겨둔 채 멋진 현대 미술관으로 재창조해냈다. 서구에서는 이미 용도폐기된 건물을 미술관이나 갤러리로 재창조한 경우가 많지만 이렇게 한국적 상황에 절묘하게 접목시킨 것은 그동안 해외의 여러 미술관을 견학하면서 머릿에서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거친 김 회장 개인의 내공에서 기인한다. 아라리오 제주 뮤지엄의 콘셉트는 죽은 도시를 재생시키고 활성화시키는 새로운 형태의 미술관이다. 이렇게 그는 서울의 뮤지엄 인 스페이스와 일관된 컨셉의 미술관으로 아라리오 뮤지엄만의 새로운 실험적인 브랜드 콘셉트를 만들어 냈고 이는 지역 문화의 가치 향상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와 같이 아라리오 김창일 회장은 아라리오 아이덴티티의 정점에 있다. 그는 사업가, 컬렉터, 예술가로서 아라리오란 브랜드에 스토리를 입히는 사람이다. 그중 어느 하나를 빼면 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듯이 그 셋은 삼각대처럼 김창일이라는 개인 브랜드의 균형을 잡아준다. 그가 회사명을 ‘아라리오”로 채택한 것도 재미있다. 한국적 고유성을 가지면서 외국인도 쉽게 발음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에서 “아라리오”란 참으로 기발한 이름을 추출해냈다. 이처럼 그는 매우 단순 명쾌하게 핵심에 집중한다. 그는 영원한 청년이다. “감사합니다”라는 인사가 입에 붙었고 꾸벅 인사도 잘하며 항상 배우는 학생처럼 스스로를 낮춘다. 그러한 젊은이의 기질은 그로 하여금 남과 다르게 세상을 보고 남과 다르게 세상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다. 매우 소탈하고 다혈질인 그는 만날 때마다 기발하고 격식에 얽매이지 않은 행동으로 주위를 무장해제시키며 행복바이러스Happy Virus도 전파한다. 하지만 겉으로 굉장히 외향적이고 사교적으로 보이는 그에게 실제로는 매우 내성적이며 예민하고 상처도 쉽게 받는 소년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인간 김창일의 매력이 아라리오에 색깔을 부여하는 근본 원인이 아닐까?
사람들은 김 회장의 승승장구를 보면서 ‘꿈을 실현한 행운아’라며 부러운 시선을 보낸다. 하지만 그에게도 동트기 전의 어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늘 성공은 그의 과거의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 경험의 산물이다. 특히 뉴욕 아라리오와 베이징 아라리오를 닫으면서 그는 많이 슬퍼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는 많이 배웠고 성장했고 단단해졌다. 성공이 너무 일찍 왔다면 그의 모습은 지금과 많이 다르지 않았을까?
그의 꿈은 실현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오늘도 내일도 그의 머릿속에는 무궁무진한 아이디어가 소용돌이치고 있을 것이기에 앞으로 아라리오가 가는 길에 또 어떤 의외와 역설이 튀어나올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우리는 한 시골 사업가의 꿈이 천안이라는 문화적 변방을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이 생동하는 풍요로운 문화도시로 변모시킨 이변을 보았다. 또 서울과 제주의 문화 지형도가 어떻게 바뀌어가고 있는지보고 있다. 앞으로 김 회장은 제주에 6개의 미술관을 더 만들어 그가 지난 35년간 모은 3700점의 컬렉션을 대중과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을 늘려나갈 계획이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그의 행보는 생각만 해도 기대가 된다. 그가 ‘그것만이 내 세상’을 외치면서 어떻게 세계적으로 한국 문화의 위상을 높여갈지는 그대로 의문형으로 열어놓기로 하자. ●

 

SPECIAL FEATURE 아라리오를 아시나요?

우리 미술계가 아라리오를 주목하는 이유

이규현 이앤아트 대표

세계 미술사의 변화 뒤에는 언제나 뛰어난 딜러와 컬렉터가 있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은 교회와 메디치 가문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19세기 파리의 인상파 미술은 폴 뒤랑-뤼엘이라는 딜러의 눈이 있었기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20세기 초반 파리에서 전위적 작가로 ‘실험 단계’에 있었던 피카소와 마티스는 이들을 일찍 알아본 거트루드와 레오 스타인 남매라는 컬렉터가 있어서 클 수 있었다. 20세 후반 미국에서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가 세기를 바꾼 새로운 예술로 자리 잡은 데에는 리오 카스텔리 같은 뛰어난 딜러가 있었다. 미국 현대미술작품의 값이 치솟은 뒷 배경에는 물론 자국의 미술품을 사는데 돈을 아끼지 않았던 미국의 부자 컬렉터들이 있다. 중국 현대미술이 지금처럼 세계적으로 각광 받는 위치에 오른 데에도 당연히 중국의 미술시장과 중국 컬렉터들의 힘이 있었다.
전 세계의 역사까지 거창하게 가지 않더라도, 한 나라의 한 시대에서 예술 트렌드를 만드는 데에 딜러와 컬렉터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21세기 현대미술계에서는 어떤 딜러, 컬렉터가 영향을 끼치고 있을까? 아라리오의 김창일 회장을 빼놓고는 이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2000년대 이후 우리나라 미술계가 변화해온 모습을 생각하면, 중요한 포인트마다 김창일 회장과 그의 ‘아라리오’가 있었다.
시외고속버스터미널, 백화점, 아라리오 갤러리가 나란히 들어서 있는 충남 천안시 신부동 일대는 전부 김창일 회장의 소유이면서 서울에서도 보기 힘든 재미있는 미술거리다. 코헤이 나와의 높이 13m 폭 16m 대형 작품을 중심으로 김인배, 수보드 굽타, 키스 해링 등의 작품들이 거리에 전시되어 있고, 그 옆 아라리오 갤러리에는 김창일 회장의 가장 유명한 컬렉션인 데미안 허스트의 <찬가>를 비롯해 아라리오가 소장하거나 전시하는 동서양의 첨단 미술작품들이 교체되며 보여 진다.
그는 천안의 얼굴을 바꿨고, 이를 통해 천안이라는 우리나라의 작은 도시의 이름을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천안에서 시외고속버스터미널, 백화점, 외식사업, 갤러리를 운영하는 사업가로, 처음엔 천안 아라리오 갤러리로 시작해 딜러 겸 컬렉터로 점점 이름을 알렸다. 세계적인 미술잡지 《아트 뉴스》가 뽑은 세계 컬렉터 200명에 들어간 유일한 한국인으로 유명한 그는 ‘미술 사업’ 영역을 확장해 작년에는 서울과 제주도에 ‘아라리오’ 이름의 미술관을 지었다.
김창일 회장의 미술 컬렉션은 좋다 나쁘다를 떠나, 우선 우리나라에서 매우 새로운 것이었다.
김창일 회장 이전까지 우리나라에서 미술컬렉터나 미술관 설립자라면 으레 재벌가를 떠올릴 수 있었다. 특히 재벌가의 며느리로 대표되는 ‘여성 컬렉터’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의 컬렉션은 해외미술의 경우 유럽과 미국의 근현대미술 대가들에게만 초점을 두었다. 김창일 회장의 ‘아라리오 컬렉션’은 이런 세상에 나타난 참 새롭고 다른 컬렉션이었다.
김창일 회장이 등장하기 전에 국내에서 세계적인 현대미술 컬렉터로 꼽힐만한 사람은 삼성미술관 리움 홍라희 관장이 유일했다. 그런데 홍 관장의 리움 컬렉션만해도 이미 서양미술사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전통적인 대가’들의 작품이 대부분이다. 유명 작가들의 대표작이 골고루 갖춰진 교과서적이면서 ‘아트뱅크’에 가까울 정도로 투자가치 있는 작가들로만 형성되어 있다. 이에 비해 김창일 회장은 소위 가장 ‘핫’한 지금 현재의 미술에 집중한 새로운 개념의 컬렉팅을 보여줬다. 예컨대 2000년대 초에는 데미안 허스트, 마크 퀸, 트레이시 에민 등 영국의 yBa작가들을 수집하면서 주목을 받았고, 곧이어 중국현대미술 작가들과 우리나라의 독특한 젊은 작가들을 수집하고 후원하기 시작했다. 흔히 재벌가와 부자들의 컬렉션은 당장 내일이라도 경매회사에 들고 나가면 비싸게 값 매겨질 환금성 있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아라리오 컬렉션은 비싼 작품도 있고, 잘 팔리지 않을 실험적인 작품들도 있다. 그가 꼭 투자에 연연해 작품을 모은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 이유다.
한마디로 아라리오가 한국 미술계에 등장한 이후 많은 게 새로워졌다. 김창일 회장이 설립한 아라리오 갤러리가 2006년 여름에 〈중국의 현대미술과 시대정신〉이라는 제목으로 그룹전시를 열었을 때만 해도 장 샤오강, 위에민 준, 팡리 준, 왕 광이 등 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중국 현대작가들이 그렇게 한꺼번에 우리나라에 온 것은 처음이었고, 매우 신선했다. 그는 일찍이 중국 현대작가들과 친분을 쌓아놓았기에, 세계 미술시장이 아시아에 눈을 돌리던 2000년대 중반에 이들을 한 번에 한국으로 몰고와 전시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는 한국 미술애호가들의 관심을 일약 중국현대미술로 끌고 갔다.
좋은 컬렉션에는 뚜렷한 ‘테마’가 있다. 이런 점에서 김창일 회장의 ‘아라리오 컬렉션’은 뚜렷한 테마 아래 수집한 표가 난다. 그는 특히 한국과 중국의 현대미술에 일관된 관심을 가졌다. 중국현대미술이 이렇게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기 전에 일찍이 중국에 가서 중국작가들을 직접 작업실에서 만나면서 작품을 보고 소장했다. 작품 크기는 소장하고 팔기 쉬운 작은 사이즈에서부터, 실내에는 전시가 불가능한 어마어마 큰 것까지 다양하고, 회화뿐 아니라 조각, 설치, 미디어까지 장르도 다양하게 수집해왔다. 어떤 작품은 투자가치가 있지만 어떤 작품은 투자가치를 불분명하되 그냥 신선한 충격을 주는 작품들이다. 뭔가 고집이 있고 의도 자체가 남다르게 보인다.
두번째로, 그는 자신의 컬렉션을 공개해 대중에게 보여주는 방법이 색다르다. 그가 서울 종로에 있는 옛 공간사 사옥을 사서 개조한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를 방문해본 사람들은 안다. 건물을 요리조리 뚫고 헤집고 다니면서 그 작품들을 감상하는 동선이 얼마나 드라마틱하고 재미있는 지. 더군다나 “외국 여행 갔을 때 미술관이 문을 닫으면 슬프다”며 미술관을 365일 무휴로 열고 있다. 작품 수집하는 방법이나 그 작품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방법과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대중에게 자기 모습을 늘 훤히 드러낸다는 점에서도 우리나라 다른 컬렉터들과 참 다르다. 전시 오프닝 리셉션에서는 사회자 역할을 자청하고, 오프닝을 자축하는 ‘고성방가’에 가까운 노래를 부르곤 한다. ‘자기 갤러리에서 자기가 전시한다’는 미술계의 눈총을 받아가면서도 벌써 개인전을 6번이나 가진 아티스트가 아닌가. 사업가로서 아트딜러로서 컬렉터로서 유명한 그이지만, 어딘가에 있는 그런 아티스트 기질 때문에 모험적이고 고집스러운 컬렉션을 추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해외에는 이렇게 대중 스타급의 컬렉터들이 꽤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김창일 회장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한테도 이렇게 색다르고 재미있고 역사에 남을 컬렉터가 있다는 점, 열정과 고집으로 일관되게 밀고 나가는 미술 컬렉션이 결국 성공한 ‘미술사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점에서 우리 미술계는 그를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

아트숍 전경

아트숍 전경

안토니 곰리 Antony Gormley   191×68×137cm 2001

안토니 곰리 Antony Gormley < Reflection > 191×68×137cm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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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러티(Charity))> 브론즈에 도색 680×200×200cm 2002~2003

 

SPECIAL FEATURE 아라리오를 아시나요?

씨킴에게 선물 받은 행복한 외로움

강형구 작가

언젠가 친하게 알고 지내던 기자가 내게 물었다. “아라리오 씨킴 회장의 작품을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그 질문은 씨킴 회장이 직접 그림을 그리는 것에 대한 부정적 인상이 전제된 것이었고, 사업가의 개인적 취미에 불과하지 않냐는 비아냥거림이 강하게 풍겼다. 나는 단호히 대답했다. “유명하지만 게으른 작가보다 그가 훨씬 작가답다고 생각한다”고. 이런 나의 반응에 그는 당연히 머쓱해 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기자는 나와 친하다는 생각에 그 비아냥거림에 내가 동조하리라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지금 제주도 성산 하도리라는 아름다운 마을에 자리 잡은 아라리오 스튜디오 ‘생각곳’에서 작업하고 있다. 이곳에 와서 보니 씨킴 회장의 작업장에는 그의 작업 흔적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했다. 씨킴 회장은 평소 “I have a Dream, 나는 꿈을 가지고 있다”는 슬로건을 입버릇처럼 자주 말한다. 그의 말처럼 꿈을 실현하고 있는 결과물과 그 과정은 앞선 기자의 질문을 무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증거인 셈이다. 그는 이렇게 꿈을 꾸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고 있었다. 자신이 그리고 싶은 욕망이 큰데 세속의 요구에만 충실한, 그래서 꿈을 포기한 소위 잘나가는 작가가 많은데 비해 이런 점에서 그는 정말 훨씬 더 작가다웠다. 나는 여기서 씨킴 회장의 꿈에 대한 실천과 결과물에 대해 언급하려는 게 아니다. 그 작품에 대한 실천은 바로 작품 외적인 부분에서 예술을 향한 그의 유별난 애착을 검증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말하려 함이다.
이런 씨킴의 열정으로 지금의 이 스튜디오가 만들어졌고 나는 지금 여기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비록 제주도가 고향은 아니지만, 지금 나는 마치 낙향한 선비처럼 내 마음의 세속성과 서울이란 중심에서 일탈해 있다. 대인관계가 없는 외로움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내가 세상에 소위 이름이 알려지기 전, 이와 비슷한 외로움이 자연스레 연상되었다. 당시 미술의 시장성은 아예 고려조차 않고 확대된 얼굴을 200호 크기로만 그려댔던 무모함 속의 외로움은 공포였지만 그 순수성 속의 내가 생각난 것이다. 감상자들의 고마운 사랑을 받으며 아라리오와 함께한 지난 10년은 영광의 시간이었다. 이제는 세속의 굴레를 벗어나 새로운 절제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고 나는 제주 스튜디오를 택했다. 나는 요즘 젊을 때 꿈속으로 다시 들어와 있음을 느낀다. 아라리오와 씨킴 회장은 내게 그 꿈을 다시 꿀 수 있도록 기회를 줬다. 뿐만 아니다. 나는 그의 진취적 엉뚱함에서 뜻밖의 에너지를 얻는다. 누군가는 내게 외롭지 않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나는 다시 스스로 외로움을 선택했다. 나는 지금 행복한 외로움을 즐기고 있다. 나는 행복할 때 외롭기를 각오한다. 가끔 친구에게 전화가 온다. “야, 강형구! 너 요새 잘나가더라?” 나는 답한다. “아냐! 요새도 작업실에서 잘 안 나가!”라고. ●

철새 도래지로 유명한 제주도 하도리 해변에 있는 아라리오 창작 스튜디오 외관

철새 도래지로 유명한 제주도 하도리 해변에 있는 아라리오 창작 스튜디오 외관

 

SPECIAL FEATURE 아라리오를 아시나요? “Art is Life, Life is Art”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탑동. 공항에서 차로 약 10분, 제주항 여객터미널에서 걸어서 20여 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에 제주 아라리오 뮤지엄이 있다. 이렇게 좋은 입지 조건에도 불구하고 이 일대는 자칫 도심 공동화 현상이 우려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었다. 하지만 지난해 아라리오 뮤지엄이 개관하면서부터 다시 사람들 발걸음이 잦아지고 있다. 아라리오 뮤지엄 개관으로 심폐소생술을 받은 듯 활력을 되찾았다. 새로운 ‘핫 플레이스’로 급부상했다. 쇠락했던 제주 구도심의 분위기를 극적으로 반전시킨 주인공이 바로 김창일 회장이다. 성공한 사업가이자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컬렉터로, 그리고 뮤지엄 설립자인 동시에 작가로도 활동하며 1인 4역의 삶을 살고 있는 김 회장은 요즘도 한 달에 거의 반을 제주도 스튜디오에 머물며 작업하고 사업 구상도 한다. 아라리오 뮤지엄 탑동 시네마 바로 옆 건물에 있는 김 회장의 집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Art is Life, Life is Art”

이준희 편집장

미술, 나아가 미술관에 대한 꿈을 언제부터 가졌나요?
저는 서울 남산 기슭 회현동에서 자랐어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비가 갠 후 햇빛이 쫙~ 비치면서 엄청나게 큰 무지개가 뜬 하늘을 봤어요. 그 광경은 마치 천국 같았고, 우주 같았어요. 어린 나이였지만 그때 제 인생에 대해 자문했지요. “도대체 나는 뭐지?”라고.
아무튼 처음으로 작품을 산 건 1978년입니다. 스물여덟 살 때죠. 당시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아트페어에서 남농과 청전의 작품을 샀어요. 지금 생각해도 너무 신기한 게, 누가 가르쳐주거나 시키지도 않았고 얘기해준 것도 아닌데 뭐에 홀린 것처럼 제 발로 찾아가서 그림을 구입했어요. 그 다음부터 차츰 그림 보는 안목이 생겼어요. 하나에 절대적으로 몰입하다보니 감각이 진화했다고 볼 수 있죠. 저는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거나 외국 유학을 한 사람이 아닙니다. 누구한테 배운 것도 없고 오직 필드에서 온몸으로 느끼고 배운 거죠.
그래도 미술관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LA현대미술관(MOCA)을 방문했을 때의 기억입니다. 모카MOCA는 제 인생에 터닝 포인트가 됐어요.
컬렉션의 기준이랄까, 작품 구입을 결정할 때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원칙은 무엇인가요?
한마디로 말해 ‘생명’과 ‘영혼’이 있는 작품을 삽니다. 오리지널리티와 아이덴티티가 확실한 작품 말이죠. 저는 작가의 이름을 보고 컬렉션하지 않습니다. 대신 ‘생명과 영혼’이 깃든 작품이라는 판단이 서면 두 배 값을 주고라도 살 수 있습니다. 요즘 한국 미술시장에서 단색화 얘기가 많은데, 단색화가 중요한 게 아니라, 단색화 중에서도 어떤 단색화 작품이 좋은 건지가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좋은 컬렉터란 어떤 인물일까요?
무엇보다 아트 컬렉터는 인격과 신뢰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컬렉션 리스트에는 그 컬렉터의 인격이 반영됩니다. 그리고 누군가 그 컬렉션의 가치를 인정하게 되면 자연스레 그 컬렉터를 존경하게 되지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생명과 영혼’이 있는 작품을 사야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다보면 결국 나중에 돈도 벌게 되는 거고요. 처음부터 짧은 기간에 컬렉션으로 돈을 벌겠다고 생각하면 남길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건 결국 10년, 20년 후에 가치가 증명되니까요.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배운 점이 있다면요?
갤러리는 생존게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모든 걸 라이브로 배웠어요. 갤러리를 하면서 실제경험을 통해 온몸으로 직접 피부에 와 닿게 공부했어요. 뉴욕에 갤러리를 냈다가 결국 손해를 봤지만, 더 큰 재앙을 막을 수 있는 예방주사를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전시는 무엇인가요?
2005년 라이프치히 화파를 국내에 처음 선보인 그룹 쇼입니다. 라이프치히 작가들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때고, 누구도 그들의 작품을 선뜻 사지 않을 때였죠. 하지만 당시 제가 보기에 그들의 작품엔 ‘생명과 영혼’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봐도 이런 전시를 유치했다는 데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직접 작업하는 컬렉터로도 유명합니다.
아티스트는 하느님과 닮아가려는 존재입니다. 왜냐면, 창조하려고 하니까요. 저도 그렇습니다. 제가 작업하는 이유는 유명해지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지금처럼 작업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인생을 망쳤을 겁니다.(웃음) 젊어서 제 인생은 극과 극을 달렸어요. 진짜 헐크 같았다니까요.(웃음) 하지만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면서 평양에서 월남하신 부모님께 물려받은 제 DNA는 굉장히 착하고 말이 없고 소심하고 남 앞에 나서지 않는 조용한 성격이었어요. 휘문고등학교 동창들한테 물어보세요.(웃음) 그런데 원하던 대학에 두 번이나 떨어지고, 특히 군 복무하면서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육군본부 의장대에서 근무할 때 무진장 맞았고, 아무 연고도 없는 천안에서, 그것도 험한 터미널에서 사업을 시작하면서 저도 모르는 집념과 집중력이 생겼어요. 그래선지 그때는 사람 많은데 갑자기 테이블에 올라가서 노래 부르고 그랬어요. 그러면 안정감이 생기고 차분해졌거든요. 일종의 정신병이었죠(웃음)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작업이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 작업하지 않았으면, 저는 지금 정신병원에 들어가 있을지도 몰라요.(웃음)
원래 컬렉터보다 아티스트 피가 진하게 흐르고 있었군요?
한때는 식당을 25개나 운영하기도 했는데, 그때 그 모든 식당 인테리어에 제가 다 관여했어요. 천안터미널에서 처음 매점 사업을 시작할 때도 당시로는 잘 사용하지 않던 알루미늄으로 직접 인테리어를 했어요. 그리고 처갓집이 있는 LA에 갔을 때, 한 식당에 들어섰는데 인테리어가 아주 마음에 들더라고요. 그런데 그때만 해도 요즘처럼 식당에서 자유롭게 사진 찍는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아날로그 필름카메라에 플래시 펑펑 터뜨려야 했으니까요. 허락 없이 사진 찍었다가는 경찰한테 잡혀가는 때였으니까요. 그래서 식당 분위기를 직접 드로잉 했지요. 요즘도 식당 뿐 아니라 옷집이나 카페처럼 맘에 드는 공간과 장소에서 닥치는 대로 드로잉을 한답니다. 그리고 여행할 때마다 엄청나게 많은 사진을 찍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구도를 익히게 된 것 같아요. 이런 훈련이 지금 작업에도 큰 도움이 되고요.
항상 열정과 에너지가 넘칩니다. 에너지의 원천은 무엇인가요?
에너지는 방전시키지 않고 필요할 때 집중적으로 쓰는 게 중요합니다. 간혹 친구가 집을 설계해 달래요. 하지만 저는 안 해줘요. 하기 싫어요. 왜냐면, 그걸 하면 내 에너지가 방전되니까요.(웃음)
저는 사업 초기부터 운전기사와 비서를 꼭 두었습니다. 1978년에 운전면허를 땄지만 직접 운전하지는 않아요. 그 시간에 집중해서 생각을 하거나 피곤하면 자면서 에너지를 충전하지요. 그러니 기사 월급 주는 게 남는 장사라고 생각해요. 비서도 마찬가지죠.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업무는 비서가 처리해주고, 저는 창의적인 일만 합니다. 스마트폰이나 이메일도 안 써요. 비서가 팩스로 전달해줍니다.
아라리오라는 이름은 직접 지으셨나요?
앞서 얘기한 것처럼 소심한 성격이라 남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고 눈에 띄지도 않았죠. 대학 두 번 떨어지곤 괜히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죠.(웃음) 그러다 대학 2학년 때 군대를 갔는데 정말 악몽이었어요. 지금은 말도 안 되겠지만, 엄청 얻어맞고, 기합 받고…. 졸병 때 헬기장에서 보초 서면서 아무도 없는 새벽에 풀벌레소리를 들으며 명상을 했어요. 완전히 킬링 타임용. 그렇게 몰입하다보니 한 시간이 십 분처럼 느껴지더라고요. 그런데 나도 모르게 갑자기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가 떠올랐어요. 그때 결정했죠, 내가 앞으로 사업을 하면 회사이름을 ‘아라리오’로 정하겠노라 말이죠.(웃음) 알파벳 A로 시작하는 영어 표기로도 좋고, 한자도 없는 순수 한글이라 좋아요. 다른 회사이름도 제가 작명했어요. 우스갯 소리로 “홍도야 우지마라”를 세 글자로 줄이면 “홍도뚝”이라고 하는 것처럼, ‘야우리’라는 회사이름은 명상하던 중 떠오른 “야! 우리들만의 세상”에서 앞 세 글자를 따서 졌어요. 제주도 아라리오 뮤지엄 이름도 누구는 구겐하임 뮤지엄이나 바이엘러 뮤지엄처럼 ‘씨킴 뮤지엄’이 어떻겠냐는 의견도 주었지만, 원래 건물의 역사와 특성을 살리고자 ‘탑동 시네마, 바이크샵, 동문모텔’로 정했답니다.
막상 뮤지엄을 개관하기란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텐데요?
첫 컬렉션을 시작한 게 1978년이고, 1989년에 백화점 내에 처음으로 갤러리를 오픈해서 1999년에 문을 닫고, 2002년에 갤러리 건물을 새로 지어서 조각광장을 만들었죠. 이렇게 20년 넘게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국내외 다양한 릴레이션 십도 형성됐고, 특히 외국 미술관을 둘러보면 그날 저녁 몇 시간 동안 습관적으로 눈을 감고 낮에 본 미술작품을 머릿속으로 리와인드 합니다. 그렇다고 목적이 있는 학습은 아니고, 호텔방에서 저녁에 할 일이 없으니까 심심풀이로 하는 거죠.(웃음) 이런 과정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저도 모르는 ‘촉觸’이 생겼어요.
그러고 보면 예전엔 단순하게 갤러리와 작가가 미술계를 이끌었어요. 두 바퀴 자전거 처럼요. 그런데 이제는 네 바퀴로 가는 자동차처럼 더욱 복잡해졌어요. 갤러리와 작가뿐 아니라 컬렉터와 뮤지엄이 공존공생하며 유기적으로 얽히고 관계 맺는 시대가 됐어요. 예전엔 미술관이 직접 작가를 상대했는데, 이제는 만약 죽은 작가를 전시하려면 그 작가와 관계를 맺었던 갤러리나 컬렉터를 찾을 수밖에 없어요. 좋은 컬렉터가 현대미술을 이끄는 시대인 거죠.
기존 건물의 구조와 특성을 최대한 살린 점이 눈에 띕니다.
제가 미술사 전문가는 아니지만,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시기의 작품은 대부분 페인팅이 주도했다고 봅니다. 그 페인팅에 맞는 공간은 ‘화이트 큐브White Cue’였고요. 하지만 동시대미술은 꼭 그렇지 않습니다. 페인팅뿐 아니라 비디오나 설치처럼 다양하죠. 즉 이런 경향을 소화하기에 화이트 큐브는 적합하지 않아요. 깔끔하면 재미없거든요, 새로 지어도 맛이 안 나고요. 건축이란 원래 100~200년 지나야 제 맛이 우러나요. 오래된 절에 있는 석탑처럼. 요즘에 지은 매끈한 화강암 건물은 맛이 안 나잖아요. 그래서 저는 인간이 만든 최고의 건축자재를 시멘트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마치 곰팡이처럼 과거의 시간과 흔적이 배어있는 거기에 동시대 작품이 조화롭게 어울리면 새로운 맛을 풍깁니다. 화음이 잘 맞는 거죠. 그래선지 건축과 학생들도 견학을 많이 옵니다.
서울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처럼 이곳 제주도 뮤지엄도 전시장뿐만 아니라 레스토랑과 수제 맥주 펍, 아트숍 등이 어우러진 ‘아트 타운’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제주 사람들이 이 동네를 ‘아라리오 로드’라고 부릅니다. 뮤지엄 하루 관람객을 1000명으로 목표하고 있는데, 제주도민뿐만 아니라 외지에서 관광 온 관람객 비중이 60%가 넘습니다. 4월에 동문모텔Ⅱ와 편집매장이 오픈하면 제주 뮤지엄 프로젝트가 1차적으로 완성된다고 봅니다. 저는 패션이 미술관을 완성시킨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음식점에 들어가면 무조건 음식을 먹어야 하지만 옷 가게는 그렇지 않거든요. 꼭 구입하지 않더라도 구경을 할 수 있어요. 미술관도 마치 옷가게처럼 편하게 구경할 수 있는 문화가 형성돼야 합니다. 그럴 때 진정한 의미에서 “Art is Life, Life is Art”가 실현되는 거니까요.
최근 구입한 작품은 어떤 건가요?
크리스티 경매에 나온 일본작가 다츠오 미야지마의 작품입니다. 저는 뮤지엄 디렉터는 지휘자 같다고 생각합니다. 오케스트라 마에스트로가 각기 다른 악기 소리를 듣고 전체 음악의 색깔을 구상하듯 저는 항상 머릿속에 미술관에 전시될 작품의 레퍼토리와 화음을 생각합니다. 여기서 물론 개별 작품도 중요하지만 전시의 화음이 더 중요하니까요. 그래서 머릿속에 그려봅니다. 비디오작품이 이쯤에 있고, 이쯤에 회화가 걸리고, 이쯤에 설치작품이 놓여지고…. 예를 들어 탑동 시네마에 전시된 앤디 워홀 판화시리즈는 제가 250만 불을 주고 산 작품인데, 원래는 제가 10만 달러에 구입했다가 25만 달러를 받고 되팔았던 그걸 10배 값에 다시 구입했어요. 뮤지엄의 화음을 위해서요. 마찬가지로 서울 인 스페이스 5층 구석방에 있던 이탈리아 작가의 작품을 이번에 故 류인 작가의 조각으로 바꾸었습니다. 다츠오 미야지마 작품 역시 뮤지엄 인 스페스 전시공간의 화음을 고려해 구입한 거고요.
가장 기억에 남는 미술관이나 롤모델이 있다면?
앞서 말한 대로 모카를 처음 보고 무의식적으로 미술관을 꿈꾸었는데, 디아 비컨Dia:Beacon을 보고 그 꿈을 실제로 이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실로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너무 좋았어요. 다 둘러보고 나와서 거의 쓰러질 지경이었죠. 아내와 아들이 부축해서 간신히 야외 벤치에 한참을 앉아 복기했어요. 그 미술관에서 제 상상력의 실체와 미래 비전을 보게 됐답니다. 미술을 핑계로 한 사치와 허영을 버리고, 미술관의 권력을 다 내려놓았더군요. 디아비컨을 둘러본 경험과 그 잔상이 지금 이 미술관을 가능하게 했어요.
앞으로 꿈꾸는 미술관은 어떤 모습일까요?
어쩌면 지금 뮤지엄은 예행연습일지도 몰라요. 제가 생각하는 뮤지엄의 최종은 하나의 박스형태입니다. 덩어리 같은 박스를 툭툭 던져 놓은 듯한 공간에 오직 한 작품만 있는…. 작품은 팔수도 없고, 박스-공간에 작품이 없다면 그 공간은 아무 의미가 없는 공간이 되는 그런 미술관 말입니다. 제 스튜디오가 있는 하도리에 땅 15만 평(49만5000여㎡)을 구입했습니다. 앞으로 또 다른 가능성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

탑동 시네마에 전시된 씨킴의 작품

탑동 시네마에 전시된 씨킴의 작품

그동안 발간된 작가 씨킴의 도록

그동안 발간된 작가 씨킴의 도록

 

SPECIAL ARTIST 최병소

작가 최병소는 한국 현대미술사의 궤적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무한반복되는 선 긋기 방식으로 제작된 그의 작품은 시간과 노동이 집약된 독창적 표면으로 드러난다. 이와 같은 작가의 작품은 1970년대 한국의 주류 미술경향이던 단색조회화뿐만 아니라 사회적 의미를 담은 실험미술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도 있다. 지난 40여 년간 최병소가 몰두해온 작품세계는 유의미한 인식과 행위의 결과물이다. 전통적인 회화 영역을 넘어 소멸함으로써 재탄생하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탐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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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신문용지 볼펜 54×82×1cm 2009

섬약하고도 강건한 검은 화면, 그 ‘애매성의 예술’

신혜영 미술비평

여기저기 찢기고 갈라진 새까맣고 얇은 최병소의 평면작품을 처음 접한 사람은 그 정체를 궁금해 하며 한참을 쳐다볼지 모른다. 그것은 캔버스나 종이 위에 검은색 물감을 칠한 여느 색면회화와는 다르며, 오히려 연소된 얇은 나무껍질이나 금속성의 광물질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그 둘 모두 아닌 듯하다. 다 타버린 재와 같이 금세 바스러질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오랜 시련에 더 단단해진 철판과 같은, 섬약纖弱하고도 강건剛健한 이 물질의 정체는 무엇인가.
뜻밖에 그것은 종이(주로 신문지)가 얇아지다 못해 찢어질 때까지 볼펜과 연필로 선을 긋고 또 그어 만들어낸 작가의 시간과 노동이 집약된 화면이다. 재현된 어떠한 형상이나 붓 자국도 없는, ‘회화’라는 호칭이 무색하리만큼 새로운 이 인공물artifact은 전체적으로 윤이 나면서 군데군데 비정형으로 갈라지고 찢긴 표면이 시각적이기보다는 촉각적이고, 어느 회화에서도 접해보지 못한 차갑고 저릿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면 최병소의 이러한 검은 화면을 회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것은 분명 전통적인 의미의 회화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종이에 볼펜으로 수없이 많은 선을 긋고 그 위에 다시 연필로 더 많은 선을 그어 만들어낸 그것은 “여러 선이나 색채로 평면상에 형상을 그려내는 조형미술”이라는 회화의 사전적 정의를 벗어나지 않는다. 마침내 전면화되어 묻히지만 수없이 반복되는 ‘선’, 색으로 느껴지지 않지만 사실상 작가가 선택한 볼펜과 연필의 검은 ‘색’, 미술의 재료는 아니지만 신문지라는 확실한 2차원의 ‘평면’, 의도적으로 그려낸 것은 아니지만 반복되는 선 긋기에 의해 드러나는 갈라지고 찢긴 무정형의 ‘형상’, 그 모두를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최병소의 회화는 일반적인 색면회화와 구조적으로 전혀 다르다. 그것은 캔버스 위에 물감이 얹히는, 지지체와 안료의 고정된 관계를 탈피한 전혀 새로운 구조다. 사실상 지지체와 안료의 관계는 아주 오래전부터 최병소에게 중요한 화두였다. 안료가 칠해진 지지체를 ‘찢는’ 루치오 폰타나, 지지체를 완전히 뒤덮도록 안료를 ‘칠하는’ 바넷 뉴먼, 지지체를 안료로 ‘적시는’ 이브 클랭 등의 회화에 관심을 갖던 그는 종이 위에 아크릴 물감을 두껍게 칠한 후 뒤집어 종이를 사포로 밀어버림으로써 물감덩어리만을 남기는 지지체의 ‘소거’를 시도한 바 있다. 이렇듯 지지체와 안료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던 최병소는 마침내 지지체를 소거하지 않으면서도 안료와 일체화하는 방법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것은 캔버스 위에 물감을 올리는 면의 축적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선의 축적으로서, 지지체 위에 안료가 얹히는 것이 아니라 안료(볼펜과 연필)가 지지체(신문지) 속으로 파고들어 양자가 일체 되는 구조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러한 지지체와 안료의 일체로부터 본래 재료가 지닌 물성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물성을 지닌 화면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신문 잉크 볼펜 연필 12×32×41cm 2009

<무제> 신문 잉크 볼펜 연필 12×32×41cm 2009

최병소 작품세계의 차별성과 고유성
이른바 “사라짐으로부터의 탄생”, 즉 “소멸하면서 태어나”1는 이러한 최병소 회화의 근원적인 동력은 주지하다시피 지지체 위에 끊임없이 선을 긋는 작가의 반복적 행위다. 신문지의 전면全面이 까매지다 못해 찢겨질때 까지 볼펜과 연필로 선을 긋는 그의 반복적인 행위는 그야말로 보통 사람은 할 수 없을 정도의 극단적인 인내와 시간을 요구한다. 작가는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선을 긋고 또 긋는다. 그리고 그러한 작가의 ‘긋기’는 그 자체 자율성을 가지고 확장되어 나가다가 마침내 물질 자체가 한계에 달하는 지점에서 멈춘다. 따라서 최병소의 회화는 어떠한 결과물을 내기 위해 붓을 움직이는 전통적인 회화와 달리 행위 자체가 우선시되고, 결과물로서의 화면이 과정으로서의 행위를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선을 긋는 손이 멈추는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물질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최병소 회화가 지닌 고유함의 또 다른 요인은 재료의 선택과 그 변용에 있다. 작가가 신문지를 본인 작품의 주된 재료로 선택한 것은 그것이 “저렴하고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라는 일차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최근에는 신문용지를 구입해 쓰기도 하지만 그가 사용해 온 지지체는 주로 신문지와 잡지, 때로는 비행기표나 지폐 등과 같은 일상의 오브제고, 그가 사용하는 안료/매체는 물감을 묻힌 붓(화구)이 아니라 책상 옆에 굴러다니는 볼펜과 연필(문구)이다. 물론 미술사 내에서 많은 예술가가 일상의 오브제를 예술의 소재로 사용했으나, 그것들 대부분은 재료가 가진 ‘물성’에도 불구하고 ‘개념적’ 측면이 강했다. 그러나 최병소가 사용하는 일상의 오브제는 단지 용도와 의미를 변경하는 관념적인 차원이 아니라, 작가의 극단의 반복적 행위를 통해 전혀 새로운 물질로 변모하는 실질적인 차원에서 작동한다.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는’ 재료로 ‘누구나 할 수 있는’ 선 긋기라는 행위를 통해 전혀 새로운 형태의 미적 산물을 만들어내는 최병소의 회화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일상과 예술의 경계 흐리기일 것이다. 사실상 이러한 최병소의 일상과 예술의 혼재는 삶과 밀착된 그의 작업 태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평생을 집에 딸린 작은 골방에서 잠자고 밥 먹는 시간 외에는 음악을 들으며 끊임없이 손을 움직이는 그에게 일상과 예술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기 때문이다.
물론 최병소가 사용하는 신문지라는 재료를 단지 일상의 오브제로서만 고찰하기에는 미흡함이 있다. 그 이면에는 ‘신문’이 지닌 상징적 함의와 시대적 배경이 있다. 그가 미대를 졸업하던 1974년은 유신체제가 공포된 지 1년 남짓한 정치사회적 격동기로서, 사회 전반적으로 표현의 자유가 억압된 침체된 분위기가 팽배했다. 당시 미술계도 정신적으로 황폐해지고 사회로부터 소외된 작가들이 의도적으로 현실을 외면하고 자연으로 회귀하려는 단색화 사조로 편중되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1960년대 후반부터 지속되어 온 – AG와 ST로 대변되는 – 한국 실험미술 작가들 일부는 현실을 그대로 외면하기보다는 예술 영역 안에서 직간접적으로 자신의 발언을 표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언론의 편파성을 비판하고자 신문을 이용해 행위예술을 선보인 성능경과 같은 작가다. 최병소의 신문 작업 역시 1970년대의 시대적 배경에서 신문이 지닌 상징적 의미와 무관하지 않다. 당시 그는 매일 날아드는 신문을 읽으면서 답답하고 침통한 마음을 참다못해 신문의 내용을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결국 읽을 수 없도록 지워지고 애초에 무엇이었는지 흔적조차 사라졌지만 그것은 당대의 현실을 보여주던 바로 그 신문이었으며, 그는 직접적인 방식은 아니지만 당시 사회상을 자신의 작업에 적극 반영했던 셈이다.
이후에도 그는 줄곧 원래 화면을 뒤덮어 지움으로써, 읽을 수 없는 신문, 내용을 알 수 없는 잡지, 탈 수 없는 비행기표, 쓸 수 없는 지폐 등, 의도적으로 용도를 폐기하고 예술적 맥락에서 새롭게 탄생케 하는 일련의 작업들을 발표했다. 짐작할 수 있듯, 최병소의 작업은 사실상 상당 부분 실험미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특히 초창기 작업들은 그러한 성향이 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1974년 첫 전시 <한국 실험작가전>과 1974년부터 5년간 참여한 <대구 현대미술제> 등의 전시에서 그는 화병에 꽂아놓은 꽃을 쳐서 바닥에 떨어진 꽃잎 몇 장을 분필로 표시해둔다거나 여름철에 전시장에 생선을 가져와 도마에 난도질하여 냄새가 진동하도록 하는 해프닝작업과 특정 장면의 사진 옆에 단어를 나열해 놓는 개념작업2 등을 선보인 바 있다. 또한 최근 신문작업 중에도 평면이 아닌 부서진 조각들은 접시에 담아두거나 책의 모서리 낱장들을 긁어 아크릴 박스 안에 세워놓는 등의 설치작업을 병행해왔다.
그러나 여전히 최병소의 주된 작업은 ‘회화’의 범주 안에 있다. 또한 1970년대 당시 그의 회화는 주로 단색화로 분류된 바 있다.3 표면적으로 단색이고 물성이 강조되며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화면을 중성화하는 단색화와의 유사성 때문이었다. 특히 그러한 인식에는 그의 작업이 단색화의 대표 격인 박서보의 묘법과 – 계속해서 ‘연필’을 사선으로 ‘긋는’ – 재료와 행위 측면에서 부분적으로 유사하다는 사실이 일조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작가의 작업은 방법과 개념상 상이하다. 박서보의 묘법에서 연필이 어디까지나 유화물감을 긁어내거나 밀어내기 위해 사용되는 보조도구 – 손가락, 나무, 쇠붙이 등과 유사한 – 에 해당한다면, 최병소의 신문작업에서 연필/볼펜은 화면을 전면화하는 유일한 도구다. 또한 물감이 얹힌 캔버스 위에 연필이 지나간 자리를 남겨 행위의 궤적을 드러내는 박서보의 묘법과 달리, 최병소의 작업은 신문지에 연필/볼펜의 선을 긋는 극단의 반복적 행위 끝에 결국 행위의 흔적은 사라지고 표면 전체가 균질해진 새로운 물질이 탄생한다. 이렇듯 최병소의 작업을 일정 부분 단색화와 비교할 수는 있을지언정, 온전히 그것을 단색화 사조 안에 넣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것은 그의 작업이 실험미술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결국 ‘회화’라는 결과물로 귀착돼 온전히 그 안에 머무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논리다. 이렇듯 최병소는 1970년대 한국 현대미술에서 일어난 단색화와 실험미술이라는 결코 양립할 수 없던 중요한 두 사조 사이를 표류하며 자신만의 고유한 예술 영역을 구축한 작가다.
작가 스스로 “그리기인 동시에 지우기고, 채우기인 동시에 비우기며, 의미이자 무의미다”고 밝히고 있듯, 최병소의 회화는 ‘애매성’을 본질로 삼는다. 선을 그리지만 결국 그것은 글자를 지우는 일이고, 선을 채우는 동안 작가 자신과 본래의 물질은 비워지며, 신문의 글자를 지움으로써 의미를 무화無化하지만 그것은 애초에 아무것도 없었던 무의미와는 다르다. 그리고 그것은 실질적으로 지지체와 안료, 과정과 결과물, 개념과 노동, 오브제와 회화, 일상과 예술, 실험미술과 단색화 등 수많은 미술사의 대립항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 위치에 서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애매성’이 곧 고유함을 담보한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그 사이 어딘가에서 유연하게 그만의 의미를 생성하는 것이다. 현대미술의 중요한 논제와 사조를 관통함에도 그간 그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나 논의가 부재했던 것은 어쩌면 이러한 ‘애매성’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로 인해, 지나간 사조의 작가가 아닌 여전히 삶과 밀착해 작업을 지속하는 동시대 작가로서 제대로 평가받을 기회가 남은 것은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의 섬약하고도 강건한 검은 화면이 고유한 ‘애매성의 예술’로서 다시금 평가받길 기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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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신문 볼펜 연필 240×110×1cm 2007의 부분

 신문(《The Time》) 볼펜 연필 230×2250×1cm 2012

<무제> 신문(《The Time》) 볼펜 연필 230×2250×1cm 2012

최 병 소 Choi Byungso
1943년 태어났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서양화과와 계명대학교 대학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1975년 대구 시립도서관 화랑에서의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6회 개인전과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2010년 이인성미술상을 수상했고 현재 대구에서 작업하고 있다.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에서 3월에 개인전이 열릴 예정이다.

1 <소멸하며 태어나다(Birth from disappearance)>는 2006년 대구 갤러리M에서 열린 작가의 개인전 부제였다
2 그것은 허공 위에 두 마리 새가 뒤엉켜 있는 모습의 사진 옆에 ‘sky, cloud, wind, birds, flying, meeting’ 여섯 단어를 나열해 놓은 작품이었다.
3 최병소는 <한국 현대미술의 단면전>(도쿄 센트럴미술관, 1977)과 <에꼴 드 서울>(국립현대미술관, 1976~79) 등 주요 단색화 전시에 참여했다.

 

 

ARTIST REVIEW 이은우

작가 이은우의 작업은 사물의 기능과 형태나 미술과 디자인의 경계 측면에서 이야기된다. 그는 사물에 부여된 관념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사물이 다른 사물과 맺는 관계에 주목한다. 그 관계항 속에서 물건을 변형시키면서 일반적인 물건 새로운 의미와 일상의 모습을 교차시켜 나간다. 새로운 세대의 물건 고안자, 이은우를 만나본다.

물건들의 역사

이병희 독립큐레이터

여기 새로 등장한 물건들이 있다. 우선 이들은 미술이라는 시스템에 의해 등록됐다. 한 물건의 이름은 ‘사각’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물건은 비록 ‘사각’이라고 하지만, 사각에 고정되지 않으므로, 차라리 사각의 파생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푸른 사각형>, 2014) 또 다른 물건은 원통에서 고안됐지만, ‘반복과 접합 그리고 배치’라는 부제를 붙이고 싶을 정도로, 여기서 ‘원’이라는 것은 하나의 참조, 혹은 클리셰에 불과하다(〈녹색 원〉, 2014). 재현을 거부하는 듯한 순수-노란색 원이 있다. 그런데 이것이 일렬로 나열된 스테인리스 스틸 파이프의 좌측 중앙에 배치되자 그 재현의 거부라는 추상적 역할은 사라지고, 이 배열이 야기하는 속도감과 시각적 균질감을 방해, 혹은 차단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물건 3〉, 2014). 기존 형태를 참조하는 작업은 또 있다. 수평 균일하게 나열된 철판들은 분해와 조립이라는 반복기능 자체에만 몰두하는 모듈로서 존재할 것 같지만, 이 기능을 방해하는 오렌지 색 원추 때문에 이것은 아마도 잠시 한때, 영원히 버티는 조각으로 존재할까를 고민했던 것 같다(〈물건 2〉, 2014). 이런 반복 배열은 당연히 어떤 속도감을 야기하고, 나아가 물리학적 법칙에 의해서, 당연히 시간성을 환기시킨다. 대부분 3차원에 존재해야 하는 이 물건들은 반복 배열, 분해 조립 운동을 하는 시공간-참조물이다.
재현이냐 아니냐, 쓸모가 있냐, 순수 미적 대상이냐 등의 이분법적 경계를 깨뜨리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 전략으로 불린 ‘차용’ 혹은 ‘키치’였다. 물론, 이 모더니즘의 아우세대격 물건들은 이런 포스트-행위로써 선배세대의 시도들을 맥락에 ‘등록’시키는 아주 충실한 기호놀이를 했다. 그 기호 놀이가 맥이 빠진 것은 ‘상품’으로서의 물건들이 여기저기에서 마구 쏟아져 나오고, 전지구적으로 유통되고, 소비되고, 향유되면서부터다. 대다수의 물건은 현재, 등록과 폐기를 쉴 새 없이 반복하는 소모전에 처해 있다.
현대 물건들의 짧은 역사를 생각해보자. 신자유주의 시대의 물건들은 1980년대경 전지구적 대량생산의 메커니즘으로 본격 진입했다. 전지구적 대형마트 체인점들에서도 생산라인과 마찬가지로, 넘쳐나는 이 갖가지 대량생산 물건들을 배열하고 판매하기 위하여 규모 있는 배열과 수납, 저장, 배달과 조립 같은 일련의 자동적인 시스템들을 고안해냈다. 소비자의 삶의 패턴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이런 일률성, 자동성은 일정 정도 폭력적이다. 즉, 전지구적 경쟁에서 엘리트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보다 효율적으로 일들을 해치워야 하며 여기에서 물건들은 효율성을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쓸모없는 물건이 된다. 아니 나아가 나쁜 물건이 된다. 왜냐면 효율적이지 않고, 일을 방해하며, 심지어 사색하게 하므로.
다른 물건들이 있다. 소위 디자인용품, 수공예품, 예술작품 등과 같은 것이다. 이런 물건들은 일종의 저작권물이다. 전지구적 대량생산 물건들에 비하자면, 대부분은 한정된 수량으로 생산되는 소수의 엘리트 물건, 혹은 소수의 사적인 물건들이다. 이 물건들을 선호하는 자들은 이것을 딱히 어떤 특정 목적을 위해서 구매하지 않는다. 오히려 매우 복합적인 욕망을 교차 투영시킨다. 가령 예쁘다, 오래 간직하고 싶다,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 같다, 제작자의 손길이 느껴진다, 뭔가 유일한 것을 갖고 있다는 느낌에 자아가 숭고해지는 것 같다 등 여타의 개인적인 욕망들이 투영될 여지를 반영한다. 이 소수의 저작권, 혹은 엘리트 물건들과 대량생산물과 비슷한 점이 있다면, 등록된 물건이라는 것이다. 다른 점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차원에서 취향이 반영된 문화생산물이라는 점이다.
물건의 약사에서, 인간사로 논의를 돌려보자. 얼마 전에 파리에서 한 언론사에 대한 총기사건이 벌어졌다. 프랑스의 젊은 청년들이 언론인과 노인 삽화가를 죽인 일이었다. 발단은 성스러운 인물에 대한 각기 다른 표현방식과 그것의 소비에 있었다. 하나는 매우 천박하게 조롱함으로써 그 아우라를 발가벗기는 스타일을 대량생산해내는 시스템 속에서의 소비. 다른 하나는 역사적으로 해온 습관 그대로 성스러운 영역을 보존하려는 숭고의 논리. 물론 이런 성스러운 것 혹은 숭고한 어떤 유일성과 천박한 대량의 복제 사이에는 항상 갈등이 있어왔다. 엘리트주의와 대중주의, 아트와 상용품(대량생산), 전통과 현대(키치), 남자와 여자(출산이라는 복제) 혹은 이성애중심주의와 LGBTIQ lmnop(성소수자 인권단체) 등의 사이에서처럼.
현대에 이르러 이런 갈등들은, 물론 새롭지 않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이 갈등 사이에서 배태된 세대들이 자행하는 폭력의 잔인함 냉소적 강렬함이다. 아주 오래된 역사적인 갈등 속에서 왜 총으로 해당 대상을 매우 잔인하게 일일이 쏴 죽이는 사건을 파생시키기에 이르렀냐는 것에, 그토록 노력한 어떤 휴머니즘적,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 예술적 기타 등등의 노력은 도대체 뭐였냐는 질문에 이르는 것이다. 노력과 애증의 결과로 겨우 낳은 자식세대가, 어째서 그들의 할아버지 세대를 처단하기에 이른 것인가.

〈물건2〉 철판, 우레탄 페인트, 고무줄, pvc파이프, 목재, 73×40×40cm 2014

〈물건2〉 철판, 우레탄 페인트, 고무줄, pvc파이프, 목재, 73×40×40cm 2014

〈물건 3〉 철판, 우레탄 페인트, 스테인리스 파이프, 크리스탈, 102×212×65cm 2014

〈물건 3〉 철판, 우레탄 페인트, 스테인리스 파이프, 크리스탈, 102×212×65cm 2014

물건들의 위계질서
물건들 사이에도 위계질서와 갈등이 있다. 대량생산물이라는 어떤 천박함과 예술작품이라는 어떤 숭고함 사이에 놓여있는 차이들은 그것의 생산 메커니즘과 소비-소유 메커니즘, 그리고 엘리트주의 속에서의 서술과 단순 사용 매뉴얼에 이르기까지 그 차이들은 잔인할 만큼 극단적으로 차별화된다. 오늘날의 인간사가 그렇듯이, 그 물건들의 위계질서는 상품들의 위계질서로 대체됐을 뿐 갈등의 메커니즘 자체는 불완전한 역사가 되고 있을 뿐이다. 만일 어떤 물건이 감정이 있거나, 적어도 기억장치가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언젠가 물건들의 트라우마에 대해서 깊이 반성하고, 애도하며, 새로운 역사를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획일적인 대량생산물의 글로벌한 유통과 소비, 숭고한 예술작품들의 전지구적인 키치화와 나아가 새로운 특정 예술-상품으로의 재생산. 이 둘 사이 교배에 의해서 태어난 새 세대의 물건들이 적어도 인간계와는 달리 뭔가 극단적인 액팅아웃을 하지 않는 것은 약간 다행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결코 순수 온화한 존재들일 수는 없다. 때로 그들은 매우 공격적이고 직접적이다. 동시에 때로 방어적이며, 때로 거부도 한다. 그러나 이들이 처한 맥락 자체가, 유사-역사, 유사-메커니즘이라는 (가상적인) 현실이기 때문에 이들은 전 세대처럼 ‘그것이 아니오’라는 모더니즘적 히스테리 반응을 모른다. 즉, 히스테리적 증상이 없는 한, 극단적인 액팅아웃도 생기질 않는 것이다. 그것이 폭력적이건 아니건 간에 말이다. 일단, 지금의 물건들이 하는 것은 이것이다. 하나는 ‘소비 혹은 소모’, 다른 하나는 ‘그럴수도 있겠죠’ 라고 하고는 딴 짓 하기.
근-현대에 적어도 한 번쯤 역사는 반복됐다. 1960~1970년대를 거쳐 반성된 움직임은 1980~1990년대를 거치면서 ‘포스트’ 혹은 ‘유사’ 혹은 ‘차용’의 메커니즘으로 반복됐다. 이제 역사는 그 포스트-역사를 참조하는 듯하다. 참조란 행위는 역사로부터의 어떤 거리감, 즉 객관성이 어느 정도 생겼고, 그것을 다른 차원으로 변형시킬 준비가 됐다는 증상적 행위다. 이 참조란 행위는 쉽게 관심을 돌리는 행위라고 하겠다. 사실 역사에서, 관심의 몰두 혹은 집중과 분산 사이에서 갈등했던 히스테리적인 반응이 사이코패스나 히키코모리와 같은 질병적 상태를 더 많이 잉태했기에, 현시점에서의 관심 돌리기, 환기 역할은 중요하다. 물론 새 세대의 물건들이 새로운 페티시의 재영토화할지, 아니면 거부와 그것의 반복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히스테리적 반응의 반복이 될지, 혹은 실로 취향의 차원에서 관심 밖의 어떤 차원이 될지는 나도 모르겠다.
앞서 언급한 새로운 미술공간에서 먼저 등록된 물건들을 예로 들어보자. 이들은 모더니즘적 숭고함과 포스트모더니즘적 키치 사이에서, 순수미술형태와 용도 사이에, 형태와 색깔과 배열 사이에 있다(존재한다). 그런데 이 물건들은 이 거부와 동경, 쓸모와 특수성 사이에서 존재하는 어떤 in-between의 존재감을 만끽하는 듯하다. 이들은 단단해보이고, 견고해보이며, 더욱 강해지고, 더욱 날렵해지고, 메커니즘적으로 시스티믹해지려는 듯하다. 물건에도 욕망이 있다면, 이런 in-between적인 상황에서 교배되고 태어나 이 세상이 놓였을 때 그들의 유전자를 무관심하게 대상화시키는 ‘object’가 되려는 게 아닐까. 즉, 이들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근친상간적 교배의 산물임을 부끄러워하거나 부인하지 않는다. 적어도 억압으로부터 일정 정도 거리가 생긴 것이다.
새로운 세대의 물건 고안자의 이름은 이은우. 디자인 툴을 사용하여 오브제를 구상하고, 업체에 프린팅을 맞긴다. 물론 제작을 맞긴다고 해야겠지만, 왠지 지금은 ‘프린팅’이란 말을 쓰고 싶다. 아마도 이 제작자는 앞으로도 어떤 특정 물건들을 참조, 변형시키고 역사적, 일상적 여타의 물건들이 환기시키는 기존의 아우라를 끊임없이 교차-통풍시켜 나갈 것으로 보인다. 보다 자세한 제작과정이나 전시 장면, 평면작업에서 오브제 작업으로의 변화과정, 레디메이드 설치 과정과 공간작업, 그리고 미술사적인 참조 등은 제작자의 홈페이지를 참조하라. 나는 최근 이 제작자의 오브제 작업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야기했다. 나는 변화에 있어서 과거를 소급해서 서술하는 것에 한계를 느낀다. 그보다는 실제로 단절이 필요해 보인다. 그러고 보면 이은우의 최근 작업이 명쾌한 어떤 출발선으로 보인다. 이들은 부모세대와 말끔하게 단절하고, 영리하게 앞으로도 한동안은 반복, 재생산되면서 스스로를 속도감있게 참조해나갈 것으로 보인다. ●

〈시공사례 1〉〈시공사례 2〉 합판, 타일, 몰딩, 폴리우레탄 바퀴, 조명, 벽지 가변크기 2012 문화역서울284 설치장면

〈시공사례 1〉〈시공사례 2〉 합판, 타일, 몰딩, 폴리우레탄 바퀴, 조명, 벽지 가변크기 2012 문화역서울284 설치장면

 

〈특정물건〉 간유리, 반투명거울, 무늬유리, 색유리, 망입유리, 원목, 2013 아트스페이스풀 설치장면

〈특정물건〉 간유리, 반투명거울, 무늬유리, 색유리, 망입유리, 원목, 2013 아트스페이스풀 설치장면

이 은 우 Lee Eunu
1982년 출생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예술사와 동 대학원 전문사를 졸업했다. 2009년 대안공간 루프에서 열린 개인전을 시작으로 2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2005년부터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오는 3월에 아트선재센터 라운지에서 전시할 예정이다.

WORLD REPORT 칼 안드레 : 장소로서의 조각, 1958 – 2010

서구 미니멀리즘의 태두 칼 안드레(Carl Andre, 1935~). 그를 정의하는 말은 이뿐만이 아닐 것이다. 지난해 5월 개막한 그의 대규모 회고전 <칼 안드레: 장소로서의 조각, 1958~2010(Carl Andre : Sculpture as Place, 1958~2010)>이 뉴욕 디아: 비컨에서 3월 9일까지 계속된다. 여타 미니멀리스트와 확연히 구별되는 시적인 그의 작업이 전시공간과 어우러져 그 자체의 물성을 한껏 드러낸 자리였다.

살아있는 미니멀리즘의 전설을 만나다

서상숙 미술사

칼 안드레의 작품은 심플하다.
바닥에 깔린 사각형 동판들의 규칙적인 반복, 낮은 담처럼 쌓여 있는 벽돌들의 소박함, 무심하게 뿌려진 듯한 금조각들의 빛남…. 그리고 고대의 문화 유적처럼 묵직하게 서있는 목재들. 그의 작품이 전시된 공간은 늘 침묵한다.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작품들이 남겨 놓은 텅 빈 공간, 자연에서 발굴된 원재료에서 읽히는 시간성, 단순한 선과 면이 이루어내는 직설법의 리듬. 미니멀리즘의 선구자 칼 안드레Carl Andre, 1935~의 50여 년에 걸친 작업을 모은 뉴욕주 디아:비컨의 전시장을 걷고 바라보며 떠오른 단상들이다.
이 미술관에 장기 전시 중인 도널드 저드, 댄 플래빈, 솔 르윗, 로버트 스미드슨 등 그와 동시대의 미니멀리즘 작가들의 철저히 공업적인 차가운 작품들과 달리 안드레의 작품은 시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냈다. 허드슨 강변의 나즈막한 언덕 위 나무숲에 둘러싸인 디아:비컨 미술관은 1960년대 미니멀리즘 작업과 그 후의 현대미술품을 소장 전시하는 곳이다.
뉴욕시 맨해튼에서 북쪽을 향해 자동차로 한 시간쯤 올라가다 보면 이르게 되는 작은 도시 비컨에서 디아 미술재단 Dia Art Foundation이 운영하는 디아:비컨은 2003년 문을 열었다.
칼 안드레의 회고전 <장소로서의 조각Sculpture as Place, 1958–2010>은 지난해 5월 개막해 오는 3월 9일까지 진행된다. 올해 80세의 그는 미술사에 기록되는 미니멀리즘의 거장이지만 미술관 규모의 서베이전으로는 처음이고 미국에서는 1970년 구겐하임에서의 회고전 이후 45년만이다. 1985년 부인이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었고 그 사고와 관련해 범인으로 지목되어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그후 자신의 전시 오프닝은 물론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않는 은둔자의 생활을 해왔기 때문이다. 아직도 미술계에는 그의 유죄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번 회고전이 시작된 지난해 5월에 뉴욕시 첼시의 디아갤러리 앞에서 벌어진 작은 시위가 화제가 되었다. 이들은 길바닥에 플래카드를 붙이고 (마치 안드레의 조각처럼) 시를 읽은 후 (안드레의 시 작품처럼) 피가 흐르는 닭의 내장을 바닥에 쏟아 붓고 경찰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자리를 떴다. 그러나 뉴욕에서의 전시는 지속되었고 미국에서는 그의 딜러인 파울라 쿠퍼 갤러리를 통해 작품을 발표해왔다. 1958년부터 2010년까지—안드레는 몇 년 전 공식적으로 은퇴했다—작업한 조각품 45점과 160여 점의 구조주의 시,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만든 종이작업 등이 그가 직접 만든 전시상자에 넣어져 전시되었다. 특히 지금까지 소개된 적이 거의 없는, ‘다다 모조품’이라고 불리는 아상블라주 작품, 사진 등이 함께 선보여 흥미롭다.
“내 작품의 주제를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사물들이 가지는 엄청난 잠재력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는 안드레는 작업에서 재료의 물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번 전시 카탈로그에는 그가 쓴 재료를 금속, 광석, 자철광, 합성재료, 나무, 풀 등 유기재료로 나누어 도표를 만들었는데 무려 100여 종에 달한다. 안드레는 1960년대 전시포스터를 화학기호표처럼 만들 정도로 초기부터 한 가지 재료의 물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작업에 몰두해왔다. 이같은 작업을 그는 “물질을 물질화한다matter mattering”고 축약한 바 있다.
안드레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작업실을 가져본 적이 없다. 전시할 곳에 도착해 전시공간을 확인한 후 주변을 돌아다니며 눈에 들어오는 물건을 줍거나 누군가의 소유라면 얻기도 하고 전시가 끝난 후 돌려주기로 하고 빌리기도 한다. 아니면 그 지역의 철공장이나 목공소 등에 벽돌, 나무, 철판, 스티로폼, 금 혹은 은 등을 사각형이나 원 같은 가장 단순한 형태, 특정한 크기로 잘라달라고 주문한다. 이렇게 구해진 재료들을 그 물성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색도 칠하지 않고 변형시키지 않은 채 그가 직접 하나 하나 전시장 바닥에 배열하거나 쌓는다. 따라서 주문하는 재료의 크기는 그가 직접 옮길 수 있는 크기와 무게이며 전체 완성된 작업도 작가가 신체적으로 움직여 닿을 수 있는 크기에 한정된다. 못이나 접착제 등은 전혀 사용하지 않아 전시가 끝나면 쉽게 수거해 다시 되돌려주거나 차곡차곡 쌓아 보관할 수 있다. <조인트Joint>는 1968년 작으로 건초더미 183개를 길게 한 줄로 늘어놓은 작품이다. 167m 길이의 이 작품은 이번 전시를 위해 디아 비컨 미술관 야외에 재현되었는데 10개월에 걸친 전시 중 짐승들에 의해 옮겨질 수도 있고 먹힐 수도 있으며 날씨에 따라 썩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전시가 끝나면 쓰레기로 처분된다.

Installation view, Carl Andre: Sculpture as Place, 1958–2010, Dia:Beacon, Riggio Galleries, Beacon, New York. May 5, 2014–March 2, 2015. Art © Carl Andre/Licensed by VAGA, New York, NY. Photo: Bill Jacobson Studio, New York.

Carl Andre: Sculpture as Place, 1958–2010, Dia:Beacon, Riggio Galleries, Beacon, New York. May 5, 2014–March 2, 2015. Art © Carl Andre/Licensed by VAGA, New York, NY. Photo: Bill Jacobson Studio, New York.

“재료의 물성만이 나의 관심사”
1966년에는 한 컬렉터가 작품을 사겠다고 하자 작품값만큼의 네모 반듯한 금괴 하나를 주문해주었다. 0.37×67.6cm 크기의 이 작품의 제목은 <금밭Gold Field>
이었다. 그가 국제적 명성을 얻은 첫 작품, <520 오래된 도시의 사각형들Altstadt Rectangles>은 1967년 독일 뒤셀도르프의 콘라드 휘셔 갤러리에 전시된 작품으로 100장의 얇은 철판Hot–rolled Steel, 열간압 연강을 타일처럼 갤러리 바닥 전체에 깐 것이다.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은 긴 통로처럼 생긴 전시장에 들어와 벽에 걸린 작품을 찾느라 두리번거리다가 자신이 작품을 밟고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관람객이 작품을 밟도록 한 것은 그때까지 조각의 개념을 뒤바꾼 것으로 마르셀 뒤샹이 가게에서 산 변기를 그대로 전시한 이래로 현대미술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도전이었다. 이 때문에 일부 이론가들은 안드레의 작품을 개념주의 작업으로 보기도 했으나 작가 자신은 “재료의 물성만이 나의 관심사”라며 부정했다.
안드레가 작품에 관람객을 포함시킨 이후 현대미술은 장소특정적site-specific, 퍼포먼스, 인스톨레이션(설치), 프로세스 아트 등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포스트 미니멀리즘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장르가 무너지고 만드는 이와 보는 이의 경계도 없어지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1960년 여름 뉴욕의 그린갤러리에서 열린 마크 디 수베로Mark di Suvero의 작품전에서 전시대를 없애고 바닥에 직접 놓은 조각을 보고 감명받은 안드레는 이렇게 말한다. “프랭크 스텔라가 조각의 개념을 바꿀 전시가 있으니 꼭 봐야 한다며 나를 데려갔다. 그 이후 더이상 작품대에 올려놓는 조각bench–top sculpture은 할 수 없었다. 그 전시는 나에게 바닥에서 직접 솟아 올라오는 조각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새로운 시도가 언제나 그렇듯 안드레의 작품 또한 대중에게 받아들여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게 미술이냐?”는 아직까지도 그의 작품에 따라다니는 의문이다.
1976년에는 영국의 일간 《데일리 미러》가 테이트 미술관이 구입한 벽돌 120장으로 이루어진 <등가 V III Equivalent V III>(1966/1969)에 대해 “이런 쓰레기 더미를!”이라는 제목으로 예산 낭비의 대표적 예로 들어 1면에 실었다. 안드레는 일명 ‘벽돌 스캔들’의 주인공이 됐다. 960장, 8개의 단위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팔린 작품에 쓰인 벽돌 120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벽돌공장에 돌려 주었다고 한다. 칼 안드레는 어디를 가든 트레이드 마크인 가슴받이와 멜빵이 달린 블루진 작업복을 입고 다녀 공사장 인부를 연상케 한다. 매사추세츠 주 퀸시 출신인 그는 할아버지가 벽돌공이었고 아버지는 해군 조선소에서 배를 고치는 일을 했으며 아버지의 작업장에서 철판과 나무조각, 그리고 연장을 가지고 놀던 어린시절, 현 뉴욕철도사 암트랙의 전신이던 펜실베이니아 레일웨이의 보수공으로 일한 경험들이 자신의 작업 원천임을 누누이 밝혔다.
그는 명문 사립교인 필립스 아카데미를 장학금을 받아 다녔는데 대학을 가지 않은 안드레에게 이곳에서 받은 교육은 정규 미술교육의 전부다. 뉴욕에서 고교 동창인 작가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 1936~와 아방가르드 영화감독 홀리스 프램프턴Hollis Frampton, 1936~1984 등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미술가의 길을 가게 된다. 특히 그의 작업은 프랭크 스텔라의 스튜디오를 함께 쓰면서 스텔라의 초기 블랙페인팅에 영향을 받았다. 스텔라가 그의 조각되지 않은 나무의 단면을 가리키며 “이것도 조각”이라고 말한 것에 아이디어를 얻어 현재의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작업은 50여 년이 지난 후에도 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더욱 세련되어 보인다. 마치 미술의 법칙을 일깨우고 나아가 삶의 정곡을 찌르는 듯한 단순함의 힘이 그 어느때보다 강렬하게 다가온다.
안드레는 2010년 미니멀리즘의 메카인 텍사스의 치내티 재단Chinati Foundation 건물과 건물 사이의 야외공간에 그의 마지막 작품인 <Chinati Thirteener>을 설치했다. 또 이번 디아 비컨전과 2013년 파이돈에서 출판된 모노그래프 책 발간을 계기로 30년의 침묵을 깨고 오랜만에 인터뷰에 응하고 전시를 준비 중인 디아:비컨을 직접 방문해 관계자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는 현재 “매일 밤 술에 취해 있던 나를 구해준 사람”이라고 부르는 4번째 부인이자 작가인 멜리사 크레취머Melissa Kretschmer, 1962~와 뉴욕대학 근처 아파트에 살고 있다. 2013년 《인터뷰》지에 실린 친구이자 미술비평가인 바바라 로즈와의 대담에서 안드레는 노자의 말을 인용했는데 격동적으로 살아 온 그의 인생에 대한 담담한 소회를 듣는 것 같아 흥미롭다.
“훌륭한 여행자는 정해진 계획이 없으며 도착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 자이다.” ●

Installation view, Carl Andre: Sculpture as Place, 1958–2010, Dia:Beacon, Riggio Galleries, Beacon, New York. May 5, 2014–March 2, 2015. Art © Carl Andre/Licensed by VAGA, New York, NY. Photo: Bill Jacobson Studio, New York.

Carl Andre: Sculpture as Place, 1958–2010, Dia:Beacon, Riggio Galleries, Beacon, New York. May 5, 2014–March 2, 2015. Art © Carl Andre/Licensed by VAGA, New York, NY. Photo: Bill Jacobson Studio, New York.

맨위 <Breda>(사진 앞, The Hague) 97개의 석회암 , 1986 Courtesy the artist and Konrad Fischer Galerie, Düsseldorf <Neubrückwerk>(사진 가운데, Düsseldorf) 19개의 나무 1976 Musée d’Art Contemporain, Montreal

EXHIBITION FOCUS Anxiety and Desire 류인 작고 15주기 기념 개인전

 

요절과 천재라는 수식어가 동시에 붙는 조각가 류인(1956~1999).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5주년을 맞았다. 故 류인은 김복진에서 권진규로 이어지는 한국 근현대 구상조각의 계보를 잇는 조각가다. 사실주의적인 인체형상을 바탕으로 드라마틱한 조형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그의 조각은 인간 내면의 본질을 담고 있다. 아라리오 갤러리 천안에서 <Anxiety and Desire>이라는 타이틀로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1월 20일부터 4월 19일까지 계속되는 이 전시는 작가의 초기작부터 최초 공개작에 이르기까지 생전에 그가 창조한 작품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기회다.

류인이라는 조각적 사건

김종길 미술비평

형상조각이 공간과 장소의 성격을 뒤흔들고 급기야 그 성격마저 미학적 개념으로 변화시킨 대표적 예는 로댕의 <칼레의 시민>일 것이다. 그것은 기념비가 아니라 조각이 서 있는 그 장소의 상징이고, 칼레시市를 재사유하게 하는 예술적 언어이기 때문이다. 로댕은 <칼레의 시민>을 세우기 위해 좌대를 두지 않았다. 로잘린 크라우스가 ‘확장된 장에서의 조각’이라 말하며 무위계성無位階性, 무위상성無位相性의 현대조각을 로댕에게서 찾은 이유다. 그의 조각은 그렇게 대지 위에서 인간과 눈 맞춤하며 가장 인간적인 현실주의 미학과 만났고, 새로운 형상조각론의 출현을 예고했다.

 FRP 철350×130×228cm 1993

<부활-조용한 새벽> FRP 철350×130×228cm 1993

< Their Attributes > 철 브론즈188×325×85cm 1995

조각의 혼(魂), 몰입과 감동의 거리
류인의 조각에서 로댕의 무위계적, 무위상적인 조각정신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의 조각들 또한 좌대 위가 아니라 대지 위에 섰을 때 그 미학적 상징어가 파닥거리며 싱싱하게 살아난다. 아라리오 갤러리 천안(이하 아라리오)에 들어찬 그의 조각들은 갤러리 공간의 여백까지 밀도를 한껏 높이는 조형적 에너지를 확장시키고 있었다. 낯선 추상적 공간이었을 것이 분명한 갤러리 공간이 그의 조각들과 만나서 통감각적 체험의 구체적 장소들로 변환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공간이 조각에 장소성을 부여하지 않고, 오히려 이렇듯 조각이 공간을 곧장 ‘장소화’ 해버리는 이런 미학적 사태는 흔치 않다. 도대체 류인 조각의 무엇이 이런 사태 즉 ‘조각적 사건’을 형성하는 것일까?
작고 15주기를 맞아 기획된 <불안 그리고 욕망>전은 추모전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려운 전시지만 그동안 우리가 기존의 연구를 바탕으로 류인을 인식했거나 그렇게 인식했던 것의 신화적 관념을 고착시키지 않도록 유도하는 새로운 측면이 있는 것 같다. 2004년 모란미술관에서 기획한 작고 5주기 추모전과 달리 이번 전시는 ‘15년’이라는 시간성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조각의 존재론적 현상이 새롭게 드러나는 것이다. 안타까운 요절에의 추모가 끝나고 그와 그의 조각을 차분히,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 우리에게 다시 주어졌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예술에는 ‘시간의 눈’으로 보아야만 보이는 그 어떤 실체, 진리, 상징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다.
아라리오 전시장을 채운 류인의 작품들은 그 이전의 전시들에서 느낄 수 있었던 ‘혼의 미학’으로서의 격정적 조각미와 달리 조각들이 조각작품으로 보이는, 오롯이 인간 류인이면서 조각가 류인이고 그래서 그의 조각이 순수하게 인간의 조각임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연출했다. 그것은 마치 연극에서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보여준 이른바 소외효과疏外效果 alienation effect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관객이자 비평가인 ‘나’를 몰입과 감동의 지점으로부터 일정 거리 밖으로 밀어냄으로써 역설적으로 주제의 핵심에 더 가까이 가도록 유인하는 전략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그것은 누구의 전략이었을까? 큐레이터일까, 아니면 15년 전에 작고한 류인이었을까?
이번 전시 <불안 그리고 욕망>은 우리를 다시 류인의 앞자리에 불러 세운다. 그 자신을, 그가 세운 조형론의 피고인이자 피의자로 소환해 놓은 셈이다. 그는 우리에게 그를 ‘낯설게 하라’고 말한다. 그런 다음, 왜 그의 조각들이 자연의 신화와 이종교호異種交互하면서 인간의 조각으로 세워졌는지, 또 각각의 조각들이 하나의 조형적 사건이면서 동시에 전체적 조형 사건들과 긴밀하게 연결되는지를 묻는다. 어쩌면 바로 그 부분에 “공간을 ‘장소화’하는 조각”으로서의 샤먼적 토테미즘이 있을 것이고 조각적 사건의 진실이 숨어 있을 것이다.
호해壺孩는 단지에서 나온 수로왕이요, 마란馬卵은 말 곁의 알에서 탄생한 혁거세의 탄생신화다. 혁거세가 나고 5년 뒤, 용이 알영의 우물에 나타나 옆구리에서 여자 아이를 낳았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류인의 <아들의 하늘>은 두 개의 알에서 깨어나는 인물을 형상화한 것이다. 알을 깨고 일어선 아버지가 한 손은 깨어 나오는 알을 딛고, 한 손으론 아들의 알을 받치고 있다. <지각의 주>는 <아들의 하늘>과 이어지는 미학적 구조를 갖는다. <지각의 주>는 다만 알이 아니라 생명 탄생의 모반이 대지일 뿐이다. 이러한 탄생신화의 원형에 대해 미술평론가 최태만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서 아브락사스Abraxas의 상징을 빗대어 분석하기도 했다.
용龍은 신화 속 상상이어서 실체는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여섯 동물의 부분을 조합해서 용을 그렸으나 사실 그 실체를 변태變態에 있다. 이무기가 용이 될 때 빛(번개)이 터진다. 용의 실체는 빛光이어서 눈으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인간은 욕망에 휩싸여 있어서 쉽게 용이 될 수 없다. 인간의 불안, 인간의 욕망은 그래서 일그러진 이무기일 뿐이다. <지각의 주>가 빛龍으로 깨어나는 ‘참나眞我’로서의 인간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숨소리Ⅱ>는 다다르지 못하는 이무기(욕망)의 한계상황을 드러낸다. 거대한 뱀의 입에서 토해지듯 솟구치는 벌거벗은 육체를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지각의 주>에서 <입산>까지의 연작에는 ‘몸뚱이로서의 나’인 육체적 ‘몸나’에서 ‘참된 나’로서의 ‘참나’로 변태하고자 하는 작가의 미학적 열망이 담겨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은 인체만이 아니라 입방체로 등장하는 구조들의 상징에서 명확해진다. <입산Ⅱ>-업, <윤의 변Ⅱ>-무한의 고통, <정전>- 번뇌 해탈, <그와의 약속>-참나…. 이런 상징구조는 1980년대에서 1990년대로 넘어가는 시대령(嶺)이 그의 화두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1990년대는 1980년대와 달리 너무나 다른 시대적 상황이 펼쳐졌다.
그의 이른 죽음만큼이나 빠르게 변화했던 현실. <급행열차-시대의 변>, <황색음-묻혔던 숲>, <부활-조용한 새벽> 등은 삶의 현실이 아니라 상징어로서의 시대와 역사를 묻고자 했던 작품들이다. 그는 1990년대의 시간을 온통 그 두 가지 테제를 조각을 통해 물었다. 그 이전의 조각들이 그 자체로 사건이 되는 신화요 조각이었다면, 1990년대의 작품들은 21세기를 묻는 화두였을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그의 조각이 새롭게 던지는 예지적 전망들을 살필 수 있다. 아라리오에서 그의 작품들은 완전히 현존 상태로 우리를 불러 세운다. 과거의 실존이 아니라 현재의 “세계 내 존재”로서 조각의 미학적 언어를 터뜨리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류인이 남긴 아주 오래된 조각적 화두일지도 모른다. 그 화두를 인식하는 것, 바로 그것이 이 전시의 사건이다. ●

EXHIBITION TOPIC 이중섭의 사랑, 가족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이중섭(李仲燮, 1916~1956)의 위치는 공고하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그의 인간적인 면모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구성된 전시가 열리고 있다. 1월 6일부터 2월 22일까지 현대화랑에서 진행되는 <이중섭의 사랑, 가족전>이 바로 그것. 이중섭의 유화, 드로잉, 은지화, 편지화 등 70여 점이 소개되는 이번 전시에는 특히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소장하고 있는 은지화 3점이 최초로 공개되어 화제를 낳았다.

현대화랑과 이중섭 그리고 가족의 귀환

최열 미술비평

현대화랑, 다시 말해 박명자 대표와 이중섭은 뗄 수 없는 인연이다. 이중섭이 세상을 떠나고 열여섯 해가 지난 1972년 박명자 대표는 이중섭의 친구 구상, 박고석, 유강렬과 함께 전국에 흩어져 있던 유작을 한자리에 모았다. 이것이 저 유명한 <15주기 기념 이중섭 작품전>이다. 이 전람회는 이중섭을 부활시킨 기점이었다. 이중섭이라는 신화와 전설의 기원인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20세기가 끝나는 1999년 또다시 현대화랑과 박명자는 <이중섭 특별전>을 열었다. 뿐만 아니라 박명자가 국립현대미술관, 이중섭미술관에 이중섭 작품을 기증하기까지 그 관계는 운명과도 같이 질긴 것이었다.
이번에 ‘이중섭의 사랑, 가족’ 주제의 전람회가 열리는 장소와 관련하여 조용하지만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이 벌어졌다. 현대화랑이란 이름의 부활이다. 그러니까 27년 전인 1987년 ‘갤러리 현대’로 이름을 바꾸면서 사라졌던 이름 ‘현대화랑’이 이중섭과 함께 귀환한 것이다. 이제 갤러리 현대는 현대화랑과 함께 두 개의 건물로 나뉘었고 홈페이지도 두 개의 누리집(홈페이지)으로 구성됐다. 양날개를 펼친 형세를 갖춘 것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이 사건은 한국 화상畵商의 살아있는 역사 박명자의 귀환이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성장한 2세가 경영 일선에 참가하던 금세기 초 성급하게도 2세체제 전환이 임박한 듯 호들갑을 떨었지만 이후 10여 년의 과정을 보면 사실은 1세대의 주도 아래 2세대가 실전 훈련을 치르는 수준임이 드러났다. 그러므로 이중섭을 앞세운 현대화랑의 부활은 이제 2세대의 진출이 완만하게나마 현실화되고 있으며 따라서 지금에야 겨우 신구세대가 공존하는 시대임을 상징하는 사건인 셈이다.
이번 전람회가 지닌 두 번째 의미는 가족의 기억과 가치다. 전시 주제인 ‘이중섭의 사랑, 가족’은 주최 측이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6·25전쟁으로 파괴당한 가족의 기억 그리고 세월호 침몰 사건 이후 사회를 뒤흔든 가족의 가치를 환기시켜주고 있다. 이번에 출품된 작품은 모두 가족을 소재로 삼고 있다. 난민의 고통과 이별, 재회를 향한 간절한 소망 그리고 죽음으로 나아가는 절망에 이르기까지 그 하나하나에 가족 이야기가 숨쉰다. 전후 60여 년 동안 우리 사회는 개발과 성장이란 늪에 빠져 가족이란 이름의 사랑을 옆으로 밀어냈다. 개발과 성장의 다른 이름은 경쟁과 욕망이다. 오늘날 가족이란 탐욕의 그늘에 가려 어둡고 무거운 초상화일 뿐이다. ‘사랑, 가족’이란 제목 아래 우리 앞에 홀연히 나타난 ‘이중섭’과 지워졌던 ‘현대화랑’의 부활은 우리를 일깨우려는 빛처럼 느껴진다.
이번 전시에는 개인 소장가의 품 안에 꼭꼭 숨어있던 엽서화葉書畵, 편지화便紙畵 그리고 춘화春畫가 공개된다. 또 1956년 바다 건너 뉴욕현대미술관MoMA 수장고로 들어간 이래 근 60년 만에 조국으로 귀환해 처음으로 세상 빛을 보는 저 은지화銀紙畵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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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화된 이중섭에 대한 연구 필요
필자는 《이중섭 평전》에서 저 엽서화를 ‘주소 없는 편지’로써 ‘사랑의 기호학’이며 미술사상 아주 희귀한 사례로 기록될 ‘우리 미술사의 축복’이라고 묘사했다. 출품된 10점 가운데 최고의 걸작은 <마사マサ>다. 벌거벗은 몸의 애인 야마모토 마사코가 나무와 한 몸으로 이어져 있고 탐스러운 열매 한아름을 받쳐들고 있다. 사랑의 연서戀書는 많은 시인, 문인들이 남겼지만 이처럼 80여 장에 달하는 사랑의 엽서화는 전에도 후에도 없는 오직 하나뿐인 연화戀畵다.
편지화 또한 예를 찾기 어려운 사랑의 그림이다. 지금껏 부인에게 보내는 38편과 두 아들에게 보내는 20편의 번역본만 알려져 있었을 뿐이다. 편지화 원본은 겨우 몇 점만 공개돼 있었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에야 비로소 그 원화를 마주할 수 있음은 어쩌면 그 사랑이 그만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번에 공개되는 20편의 편지 연화가 아름다운 까닭은 첫째, 두 아들에게 사랑을 호소하는 문자 하나 하나에도 감정이 어려있어 간절하다는 것. 둘째, 그림과 글씨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 셋째, 이중섭만의 능수능란한 필력이 거침없이 노출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니까 한결같이 서화일치의 경지에 다가선 예술 그 자체라는 것이다. 누군가 냉소하는 말투로 “편지 한 장이 웬 1억 원이나 가는거야”라고 했다. 그건 이 예술을 편지일 뿐이라고 여기는 선입관 때문이다. 공개되지 않은 나머지 편지들도 모두 공개되기를 기다리는 까닭은 바로 이중섭의 편지화, 그 서예술書藝術을 진심으로 마주하고 싶은 욕망에 있다.
은지화는 잘 알려진바 대로 이중섭이 탄생시킨 아주 특별한 미술품이다. 아니, 그것은 이중섭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전쟁과 난민이라는 시대가 탄생시킨 것이다. 탄생의 기원도 자못 비장하거니와 거기 담긴 이야기도 비극에서 환희에 이르기까지 20세기 방황하는 정신을 모두 담고 있으므로 몇 백 점의 은지화가 공개될 적마다 탄성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 공개되는 ‘춘화’는 매우 극적이다. 남녀가 서로 성기를 마주한 모습 그대로 노출된 은지화는 지금껏 극소수만이 본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놀라운데 한걸음 더 나아가는 충격은 다름아닌 MoMA 소장 은지화 3점의 귀환이라 하겠다.
뉴욕현대미술관에 소장됐다는 사실은 한국이 20세기 100년 동안 서구문명권으로 편입된 이래 일어난 가장 거대한 사건이다. 그런데 누구도 그 소장작품을 볼 기회를 얻지 못했다. 무려 59년만에 귀향한 석 점은 상상보다도 훨씬 놀라운 충격이었다. 수백 점의 은지화 가운데 가장 빼어난 조형성을 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사냥꾼과 비둘기와 꽃>은 유사한 소재를 그린 은지화들 가운데 가장 아기자기하고 충실한 구성을 갖춘 작품이며 <신문 읽기>는 몽환이 아닌 현실을 소재로 삼았으되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나눈 위에 여러 인물을 배치함으로써 현실을 뛰어넘는 분위기를 연출한 작품이다. 전시장에 걸린 3점과 마주하는 순간, 기증자인 맥타가트 박사가 말한바 그대로 ‘특별한 매력’이 넘친다는 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후 60년 그리고 탄생 99주년인 2015년 이중섭의 귀환을 맞이해 우리는 ‘가족, 사랑’을 반추한다. 아마도 그것은 숱한 상처로 얼룩진 가족이란 이름의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일 게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그 오랜 세월 이중섭은 신화와 전설 속으로 빠져들었고 그 사이 작품은 시장에서 진위眞僞시비를 일으키는 진원지였으며 그의 예술에 대한 가치평가 또한 찬사와 비난의 극단을 오갔다. 탄신 백주년 행사를 준비해야 할 이때 미술인들이 해야 할 단 하나의 일은 신화가 된 이중섭의 예술에 대한 아주 차분하고 진지하기 그지 없는 탐구일 것이다. 현대화랑과 함께 귀환한 이중섭이 우리에게 희망하는 것도 그게 아닐까. ●

EXHIBITION & THEME 眞景山水畵 우리 강산, 우리 그림

보편성 위에 펼쳐진 고유의 독자성

백인산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진경산수화는 많은 이에게 조선의 문화 역량과 우수성의 정점으로 평가받는다. 2014년 12월 14일부터 5월 10일까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디자인박물관에서 진경산수화를 대규모로 만날 수 있는 전시, <진경산수화: 우리 강산, 우리 그림>이 계속된다. 이번 전시는 진경산수화를 정립한 정선의 서울, 금강산 그림부터 정선의 화풍을 부분적으로 이은 심사정, 정조시대의 김홍도, 이인문을 이어 조선 말기에 활동한 근대화가들까지 이어지는 진경산수의 맥을 짚어본다. 이를 통해 조선 성리학과 우리 땅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한눈에 살펴본다.
간송미술관을 대표하는 소장품으로는 《훈민정음》, 〈청자상감운학문매병〉, 〈미인도〉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모두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문화재이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단일 작품이 아닌 특정 분야를 꼽는다면, 역시 진경산수화가 아닐까 싶다. 겸재 정선을 중심으로 하는 진경산수화는 소장품 양과 수준에서 간송미술관을 따라올 곳이 없다. 간송 전형필 선생이 뚜렷한 목적과 의지를 가지고 진경산수화를 집중적으로 수집한 결과이다. 간송은 우리 문화재를 선조들의 삶과 정신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결정체로 생각했다. 그래서 문화재를 모으는 것이 곧 우리 역사와 문화를 지키고 되살리는 일이라고 확신했다. 간송 선생은 특히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후대에 올바르게 전해주고자 했다. 일제에 의해 우리 역사와 문화가 심각하게 폄하되고 왜곡된 시대였기 때문이다. 간송은 진경산수화야말로 조선 문화의 역량과 우수성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간송의 뜻에 부응하여 간송미술관은 수십 년 동안 심도 있는 연구와 다양한 전시를 통해 진경산수화를 집중 조명하여 그 가치와 의미를 널리 알리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해왔다. 그런 점에서 진경산수화는 간송 선생과 간송미술관의 신념과 지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분야라 할 수 있다.

6. 삼일포 - 심사정

심사정 〈삼일포〉 지본담채 27×30.5cm (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참된 경지眞境로 나아가다
진경산수화는 실재하는 경관을 사생한 그림이다. 그러나 실경을 그렸다고 모두 진경산수화라 하지는 않는다. 실경산수는 고려시대나 조선전기와 중기에도 있었지만 주로 실용적인 목적으로 그렸으며, 기법도 중국의 관념산수화풍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조선후기의 진경산수화는 자존적 인식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화풍을 구사하여 이전의 실경산수화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이런 자존감과 독창성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문화를 식물에 비유하면 이념이 뿌리이고, 예술은 꽃이라 한다. 이전과 다른 꽃이 피었다면 그 바탕이 되는 뿌리가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그 뿌리는 다름 아닌 조선 성리학이었다. 조선 성리학은 율곡 이이에 의해 정립된 신학설로 성리학의 발원지인 중국에도 없는 고유 이념이었다. 진경산수화는 조선 성리학이라는 고유 이념의 뿌리에서 피어난 꽃인 셈이다. 당연히 주체적이고 독자적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 시기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하자, 조선의 지식인들은 중화문화를 계승할 유일한 국가는 바로 조선뿐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이른바 조선중화주의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곧 세계문화의 중심’이라는 생각이었다. 영조시대 문인인 조구명趙龜命은 “예술은 본래 두 가지 이치가 없을 진대, 어찌하여 제 스스로 중국의 문명을 기준으로 삼겠는가” 라고 갈파했다. 우리의 시각으로 우리의 산천을 그린 진경산수화가 왜 이 시기에 크게 유행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말이라 하겠다.
진경산수화의 출현은 조선 성리학이라는 고유 이념과 조선중화주의라는 주체적 자의식에서 움튼 조국애와 국토애가 조형적으로 발현된 현상이었다. 진경산수화의 발전을 주도한 이들이 주로 조선 성리학의 정립자인 율곡계 문인들인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겸재 정선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정선은 우리 산천의 조형적 본질과 내재된 정신성을 면밀한 관찰과 많은 사생을 통해 정확하게 파악했다. 그리고 역대 중국 산수화풍의 장점을 취합한 뒤, 성리학의 기본 경전인 《주역》의 원리에 입각해 음양의 대비와 조화로 화폭에 풀어냈다. 우리 산천의 ‘진짜 경치眞景’를 사생하여 ‘참된 경지眞境’로 승화시킨 과감하고 혁신적인 시도였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금강산, 한양 주변의 명승, 관동팔경과 단양팔경, 박연폭포 등 정선이 그린 40여 점의 작품을 통해 그 진수를 제대로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정선에 의해 정립된 진경산수화풍은 다음 세대인 현재 심사정으로 이어졌다. 그는 어린 시절 정선에게 그림을 배웠지만, 진경산수화풍을 좇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중국 문인화풍의 관념산수화를 더 잘 그렸다. 그러나 진경산수화의 도도한 흐름을 끝내 외면할 수 없었던지 중년 이후 정선의 화풍을 부분적으로 끌어들여 금강산의 명소들을 사생해낸다. 이렇게 그려진 작품들이 이번에 출품된 〈만폭동〉과 〈삼일포〉이다. 정선에 비해 사생성과 현장감은 다소 미흡하지만, 문인 취향의 그윽한 아취가 결합된 독특한 진경산수화풍을 보여준다.
진경산수화의 대미를 장식할 역할은 정조시대를 중심으로 활동한 김홍도, 이인문 등 화원 화가들의 몫이었다. 그중에서도 김홍도는 화원화과 특유의 시각적인 사실성을 중시하는 정교하고 섬세한 화풍으로 진경산수화를 그려 앞선 문인화가들과는 또 다른 흥취를 자아낸다. 한편 김홍도와 더불어 정조시대를 풍미했던 동갑내기 화가 이인문은 서양화풍이 가미된 진경산수화를 그려 독특한 감흥과 더불어 시대의 변화를 느끼게 한다.
조선후기를 화려하게 수놓은 진경문화는 정조대를 넘어서며 제 수명을 다하고 스러져갔다. 진경산수화도 생명력을 잃어갔다. 진경산수화 출현과 발전의 토대가 되었던 조선 성리학이 말폐 현상을 드러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조선말기 예원의 종장이었던 김정희金正喜가 “겸재 정선과 현재 심사정은 모두 명성이 대단하지만, 한갓 안목만 어지럽게 할 뿐이니 절대 들춰보지 말라”한 것은 이 시기 진경산수화가 처한 입지와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몇몇 화가에 의해 진경산수화가 간혹 그려졌지만, 대체로 과거의 전통에 안주하여 형식화하거나, 새로운 활로를 찾지 못하고 의미 없는 변주만 지속하며 박제처럼 굳어져 갔다. 이번 전시에서는 김기서金箕書, 조정규趙廷奎 등 조선 말기에 활동한 화가들과 조석진趙錫晋, 안중식安中植, 김은호金殷鎬 등 근대 화가들의 진경산수화도 함께 전시된다. 정선이나 단원 등 진경산수화풍의 절정기에 그려진 작품과 비교하면 내면의 정신성을 상실한 진경산수화의 여맥과 잔해가 어떤 모습으로 조락해가는지를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는 겸재 정선에서 근대화가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진경산수화를 망라한다. 따라서 전시 동선을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시기별 변화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동일한 장소를 그린 작품들을 위주로 비교 감상하면 그 유사점과 차이점이 더욱 도드라져 보일 것이다. 그것이 조금 어렵다면, 실경과 그것을 소재로 한 그림을 비교하며 보는 것도 나름대로 소소한 재미를 준다. 이를 위해 전시장 한켠에 실경을 찍은 사진과 그림을 한 화면에서 동시에 감상할 수 있도록 꾸며놓았다. 이를 세심하게 보면 지금과는 너무도 다른 300년 전 우리 국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진경산수화의 본질적인 지향을 조금이나마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이나, 우리 그림의 아름다움을 보아도 좋다. 하지만 조금 더 욕심을 부린다면, 보편성을 공유하면서도 고유의 독자성을 한껏 펼쳐보인 진경산수화가 문화적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를 고민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더욱 좋겠다. 이번 전시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거기에 있다. ●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전시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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