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배우고,
세상과 나누는 컬렉션
컬렉터 그룹 아르케II의 첫 소장품전
《미완의 지도》
헤레디움 3.15~4.26
심지언 편집장
Sight&Issue

《미완의 지도》헤레디움 전시 전경 2026 제공: 헤레디움
2019년, 베를린의 한 스튜디오. 열네 명의 한국인 컬렉터가 올라퍼 엘리아슨을 만났다. 빛과 공기, 온도와 감각을 매개로 인간의 지각 방식을 재구성해 온 작가의 작업은 ‘보는 것’을 ‘경험하는 것’으로 전환시켜왔다. 그날 그들이 마주한 것은 자연과 인공, 개인과 공동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끊임없이 생성되는 하나의 실험실이었다. 이 방문은 스튜디오 견학을 넘어선 체험으로 다음의 질문으로 이어졌다. ‘무엇을 소유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세계를 삶 가까이에 두고 지속적으로 마주할 것인가.’ 그 질문의 한 응답이 지금 대전 헤레디움 전시장 입구에 놓여 있다. 빛과 그림자로 공간의 방향 감각을 뒤틀며 관람자의 지각을 흔드는〈Conscious Lava Compass〉(2018). 국내 컬렉터 그룹 아르케 II의 첫 공동 소장품전 《미완의 지도》는 이처럼 축적된 경험과 질문에서 출발한다.
공동의 안목으로 일군 예술적 기원: 아르케II
아르케II는 2017년, 건축을 공부하는 CEO 포럼 ‘파이포럼’에서 만난 14명이 결성한 컬렉터 그룹이다. 그룹의 이름 ‘아르케(ARCHE)’는 그리스어로 ‘기원’ 혹은 ‘근원’을 뜻하는 철학적 개념이다. 만물의 근원을 탐구했던 고대 철학자들처럼, 이들 역시 예술의 가치를 탐구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들은 함께 공부하고 전시를 관람하며 각자의 취향을 성숙시켜 왔다. 매년 공동 회비로 작품을 구입하고, 해외 컬렉터와의 교류나 작가 스튜디오 방문 등 수집의 전 과정을 공유한다. 투자가 아닌 예술 애호가이자 작가를 후원하는 메세나의 역할, 그것이 이들의 명확한 지향점이다. 2017년 런던 프리즈를 시작으로 바젤, 홍콩 등 주요 아트페어를 통해 ‘뻔하지 않은’ 가능성을 지닌 작가들을 발굴해 왔다.
그룹을 이끌어온 영상의학과 전문의 한송이 대표는 아르케 그룹의 첫 컬렉션의 기억을 전했다. 회원들은 프리즈 런던 기간 중 방문한 소호의 아넬리 주다(Annely Juda) 갤러리에서 앤서니 카로의 ‘테이블피스(Table pieces)’ 연작에 매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초보 컬렉터였던 이들에게 갤러리는 수장고를 흔쾌히 열어주었고, 충분히 고민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컬렉터 출신 창업자답게 수집가의 진심을 먼저 읽어준 환대였다. 그 결과, 이들의 첫 컬렉션은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컬렉터 그룹이라는 형태 자체가 낯선 것은 아니다.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활동한 컬렉터 조합 ‘곰 가죽(La Peau de l’Ours)’이 그 선구적인 예다. 이들은 당시 제도권 미술계에서 확고한 위치를 확보하지 못했던 앙리 마티스, 파블로 피카소, 앙드레 드랭 등의 작품을 공동 매입하여 신진 예술가들에게 시장 진입의 동력을 제공하고 새로운 미술에 대한 관심과 가능성을 공유했다. 이들의 활동은 결과적으로 현대미술이 시장의 제도권 안으로 안착하는 데 유의미한 교두보 역할을 했다.1 예술의 역사는 창조적 개인에 의해 쓰이지만, 그 역사가 지속되고 확장되는 과정에는 늘 컬렉터라는 조력자가 존재했다. 그 오랜 컬렉팅의 정신과 안목을 오늘날 아르케II의 활동에서 발견할 수 있다.
공동 컬렉션의 과정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초기 한 회원이 양혜규의 설치 작품을 구매하자고 제안했을 때, 작가를 잘 모른다며 강하게 반대한 회원도 있었다. 그러나 2년 후, 그 회원은 그룹에서 가장 열렬한 예술 지지자 중 한 명이 되었고, 양혜규의 작품은 회원 만장일치로컬렉션에 포함되었다. 이 에피소드는 아르케II 활동의 핵심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공동 수집이라는 구조는 단순히 취향의 합산이 아니라, 서로의안목을 끌어올리는 장치이다. 이렇게 공동으로 구매한 작품은 회원들이 나눠 보관하며 사옥이나 집에 걸어두고 감상해 왔다. 관리의 책임도 함께 나눠 맡으며, 작품은 각자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었다.
아르케II 회원들은 말한다. “작품을 수집한다는 것은 단순한 소유가 아니라, 세상과 나누고 싶은 마음을 간직하는 일이다. 그것은 물질만능 시대에 아름다움의 숭고함을 지켜내고, 그 아름다움이 미래의 삶을 밝혀주기를 바라는 조용한 기도라고 생각한다.” 이번 전시는 그 기도를 공적인 공간으로 불러낸 자리다. 5년간의 그룹 컬렉션을 총체적으로 돌아보는 이 전시는, 개인의 취향이 응집된 소장품이 전시장에 제시되었을 때 가지는 의미와 영향력을 보여주는 실험이기도 하다.

왼쪽 올라퍼 엘리아슨 〈Conscious Lava Compass〉 오목거울, 용암석, 스테인리스 스틸, 자석, 안료(흰색, 빨간 색), 드라이버, 와이어
32×32×32cm 2018 © Olafur Eliasson courtesy the artist and neugerriemschneider, Berlin
오른쪽 르 코르뷔지에 〈Biche〉/〈Licorne〉/〈Femme〉/〈Musicienne〉/〈Couple〉 종이에 과슈, 연필 각
58.5×29.3cm 1952 © FLC / Adagp, Paris 2026
제공: 헤레디움
열린 지도 위에서 – 《미완의 지도》
전시가 열리는 헤레디움은 1922년 지어진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을 복원한 공간이다. 근대 건축의 흔적 위에 르 코르뷔지에, 올라퍼 엘리아슨, 데미안 허스트, 데이비드 호크니, 양혜규, 아니카 이 등 국내외 작가 22명의 작품 30점이 펼쳐진다. 전시 제목 ‘미완의 지도’는 아직 닫히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는 세계를 가리킨다. 지도는 본래 길을 안내하는 도구이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불완전함과 미지의 영역을 찾아 나서는 상징으로 작동한다. 헤레디움 함선재 관장은 “각 작품은 하나의 좌표이자단서로서 관람객이 스스로 사유의 경로를 만들어가는 열린 지도가 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관람객 각자가 서 있는 위치를 새롭게 가늠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스스로 그려보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는 뜻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올라퍼 엘리아슨의 〈Conscious Lava Compass〉가 관람객을 맞는다. 거울과 용암석, 스테인리스 스틸을 결합해 빛과 그림자, 자연과 인공의 경계를 흐트러뜨리는 이 작품은, 아르케II가 2019년 베를린에서 작가의 스튜디오를 방문한 인연과 닿아 있다. 현대 건축의 아버지 르 코르뷔지에의 회화도 이번 전시의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건축가로서의 면모 뒤에 가려진 다채로운 색감과 유려한 선의 르 코르뷔지에 회화 세계를 살필 수 있다. 데이비드 호크니의 사진 드로잉〈Inside It Opens Up As Well〉(2018)과 인물을 바라보는 특유의 시선이 담긴 〈Scarlett Clark〉(2019), 그리고 데미안 허스트의 〈Day in Day out〉(2003)도 주목할 만하다. 수많은 알약을 정교하게 배열한 이 작업은 현대인의 의존과 불안을 드러내며, 기술은 진보했지만 사유의 밀도는 가벼워진 시대를 향한 질문과 맞닿아있다.
아르케 II는 이번 전시가 예비 컬렉터들에게 용기를 주길 희망한다. 완벽한 안목이나 전문적 지식보다 중요한 것은, 많이 보고 자신의 취향을 알아가는 시간임을 몸소 보여줌으로써 말이다. 이제 5년간의 그룹 컬렉션은 일단락됐다. 공동으로 모은 작품들은 향후 그룹 내 경매나 경매회사를 통해 매각할 예정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의 활동이 끝난 것은 아니다. 이제 회원 각자가 변별력 있고 진지한 수집가이면서 예술가들의 메세나로 남기를 스스로 바라고 있다. 함께 길러온 안목은 이미 각자의 컬렉션으로, 그리고 이번 전시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완의 지도》라는 제목처럼, 이들의 컬렉션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진행형이다.
1 ‘곰 가죽’ 클럽은 순수한 후원 목적보다는 미술품 투자 조합의 성격이 강했다. 그들의 활동은 작가를 지속적으로 후원하는 제도적 장치라기보다는, 공동의 안목을 바탕으로 한 실험적 컬렉팅에 가까웠으며, 매입 10년 후 경매를 통해 수익을 분배하는 것이 명확한 목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새로운 예술을 지지하고 확산시키는 하나의 방식으로서, 컬렉터가 미술 생태계에서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을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