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를 담론으로 ‘기록’하는 사람들 ④
윤원화 미술비평가
문혜진 미술비평가
월간미술 편집부
4월 특집기사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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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의 감각을 ‘전환’하는 사람들 ③
윤원화
미술비평가
전시는 어떤 ‘몸’으로 확장되는가?
전시의 기록 영상, 도록, 아카이브 자료 등은 그 자체로 정보와 정동을 실어나르는 일종의 ‘몸’을 형성한다. 매체로서의 몸(‘어떻게 전달되는가?’)과 수신자로서의 몸(‘누구에게 전달되는가?’)을 구별해볼 수도 있는데, 전자가 반드시 사물이어야 하거나 후자가 반드시 사람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기록자를 매체의 일부로 볼 수도 있고, 미술사를 궁극적인 수신자로 가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몸으로 논의를 한정하자면 비평과 연구는 전시라는 사건을 겪은 몸이 그것을 겪지 않은 몸에게 무언가 전달하려는 노력이자, 스스로 그것을 겪어낸 이후의 몸으로 변해가는 과정이다. 나는 비평을 기본적으로 작가에게 보내는 엽서처럼 생각한다. 때로 몇 년이 지나 다른 전시에서 그에 대한 답장을 받았다고 느낄 때가 있는데, 이런 캐치볼 같은 대화는 비평가와 작가 양쪽의 몸을 얼마간 변형시키는 듯하다.
전시를 담론과 연구의 언어로 옮길 때 무엇이 남고 무엇이 사라지는가?
주관적인 경험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는 정말로 어렵다. 전시장에 무엇이 어떻게 배열되어 있었다는 사실에서 판단과 생각을 도출해내는 과정에는 어쩔 수 없는 비약이 발생한다. 나는 눈에 보이는 것에 상응하는 개념이나 논지를 ‘찾아서 끼워 넣기’보다는, 감각을 말로 번역하려고 애쓰는 편이다. 여기서 ‘번역’은 작가가 작품 속에 심어놓은 의미를 끄집어내는 것보다는, 작가의 경험과 생각이 작품으로 구현됨으로써 그에 잠재된 어떤 의미를 읽어내려는 시도에 가깝다.
작가가 원래 생각했던 게 작품으로 전부 전달되지도 않을 거고, 비평가가 그걸 보고 느꼈던 게 비평으로 전부 전달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애초에 그게 목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변형과 번역의 연쇄에서 무언가 거기 없었던 것이 생겨나고, 그것이 중요하다. 그건 ‘부여되는’ 것, 그러니까 작품에 투영되는 것보다는 작품이 작동하면서 ‘발생하는’ 것에 가깝다. 그렇다면 비평과 연구는 큐레이팅과 마찬가지로, 그런 생성의 역량을 재활성화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비평은 어디까지 전시를 다르게 읽을 수 있는가?
앞에서 ‘작가와 캐치볼을 한다’는 표현을 썼다. 개인적으로 스트라이크 존의 경계선에 최대한 붙여서 공을 던지는 것을 좋아한다. 정중앙에 던지거나 외곽으로 보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공산이 크다. 약간의 놀라움과 긴장감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은 쉬워도 실제로 잘 되진 않는다.
그렇지만 설령 기대했던 방향은 아니라고 해도 예기치 못한 변화는 늘 일어난다. 작업의 논리든 시대적 상황이든, 미술사적 계보든 간에 맥락은 고정된 상태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 계속 재구성된다. 우리가 맥락에 맞추는 게 아니라 맥락을 만들어 간다는 것, 그게 단순히 개인적 성취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인식이 중요하다. 개별적인 것들 사이에 관계가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관계망 속에서도 개체들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공통의 맥락을 그리려는 시도가 좀 더 활발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전시는 언제 ‘사건’을 넘어 ‘역사’가 되는가?
어떤 전시가 기억에 남는다는 게 반드시 그 전시 자체만의 힘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부각되도록 하는 상황과 맥락이 있었을 거다. 트라우마에 가까운 충격적인 사건을 지향하는 게 아니라면 (지금 시대는 미술이 충격적인 것으로 비미술과 경쟁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기억할 만한 것을 구별, 보존, 재생하는 미디어 또는 ‘기억의 하부구조’가 필요하다.
보통은 미술사가 그 역할을 할 텐데 21세기 초반 동시대 미술은 20세기 현대 미술과는 조금 다른 척도로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그 자신의 미술사는 아직 가지지 못한 상태다.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고 무엇을 흘려보낼 것인가 하는 판단을 이제 막 시작한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모순되는 부분도 나타난다. 이를테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 작품이 아니라 전시라는 휘발성의 사건을 미술사의 단위로 생각하게 된 걸까? 그런데 왜 큐레이터는 여전히 미술사의 주체로 충분히 고려되지 못하는 걸까? 단순히 전시의 수명을 늘이는 것을 고민하기 전에 기본적인 수준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이 있다.
*윤원화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시각문화 연구자, 비평가, 번역자. 동시대 미술을 21세기 초반의 과도기적 상황이 상연되는 무대로 바라보며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1002번째 밤』(2021), 『그림 창문 거울』(2018), 『껍질 이야기, 또는 미술의 불완전성에 관하여』(2016) 등이 있다
문혜진
미술비평가

홍성민〈빠지다 빠지다 빠지다〉1998 《틈》 아트선재센터 설치 전경 2층 1998
제공: 작가
전시는 어떤 ‘몸’으로 확장되는가?
전시는 작품과 달리 기본적으로 휘발성 사건이다. 서문이나 리뷰 등으로 기록된다 하더라도 극히 일부분만 남고, 그마저도 필자의 필터를 통과하며 변형된다. 엄밀히 말해 전시를 비평하는 것과 연구하는 것은 다른 종류의 확장이다.
비평의 경우 휘발되는 전시라는 사건을 전시를 실견한 관점에서 최대한 생생하게 기록하고, 당대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역할이다. 이를 통해 전시는 일차적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당대 미술계에서 어떤 의미였는지 가치가 부여된다.
다음으로 연구는 이미 과거가 된 전시를 다시 소환해서 역사적 맥락을 부여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전시 리뷰와 서문 등은 일차 자료의 역할을 하고 여기서 빠진 부분을 작가나 큐레이터의 구술 인터뷰 등으로 보완한다. 연구는 부분적으로만 남아있는 전시에 구체적 형상을 부여하고 전시를 미술사와 담론 속으로 편입하는 역할을 한다. 현장의 전시가 몸으로 체험하는 사건이라면, 비평과 연구는 휘발된 전시를 역사와 담론 속의 의미체로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김세진〈중독〉(스틸) 1999 《The Cross》동숭시네마텍 1999
제공: 작가
전시를 담론과 연구의 언어로 옮길 때 무엇이 남고 무엇이 사라지는가?
현장에서의 감각적 경험은 아무리 노력해도 완전하게 텍스트로 옮겨질 수 없다. 비평에서 최대한 현장의 분위기를 묘사할 수는 있겠지만, 공간 속에서 관객의 몸과 작품의 배치가 어우러지며 자아내는 정확한 인상은 텍스트로는 옮겨지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전시를 보는 것은 눈이라기보다 몸이다. 그래서 몸으로 느끼는 현상학적 체험은 묘사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지만 결코 온전히 텍스트로 옮겨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비평과 연구가 현장의 감각적 경험의 열화 버전이라고 볼 수는 없다. 전시는 비평과 연구를 통해 역사와 담론의 장으로 이동하고, 다른 전시나 작업과의 관계 속에서 위치 지어진다. 비평을 거쳐 공시적으로 당대 미술계 전체 속에서 해당 전시의 의미가 부여되고, 연구를 거쳐 통시적으로 미술사 속에서 해당 전시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가 결정된다.
비평은 어디까지 전시를 다르게 읽을 수 있는가?
대상이 전시든 작품이든 비평은 비평가의 관점으로 분석 대상을 해석하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비평가는 작가나 기획자의 의도를 존중하고 숙지하지만, 그것에 크게 기대지 않는다(창작자의 의도가 차지하는 비중이 리뷰와 서문의 가장 큰 차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 명의 관객으로서 비평가 자신에게 해당 전시가 어떻게 읽히느냐다.
기획자의 의도는 문자 그대로 의도이지 그것이 구현이 잘 되었느냐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에 비평가는 전시가 기획자의 의도를 반영하고 있는지, 아니라면 왜 그러한지, 기획 의도의 반영과 별개로 전시가 무엇을 전달하고 있는지를 스스로의 몸으로 느끼고 판단한다. 기획 의도에서 다소 비껴가더라도 전시가 좋을 수 있으며, 의도가 잘 구현되었다 하더라도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은 전시일 수도 있다.
가장 좋은 리뷰는 전시의 실제를 가장 가깝게 기록하고 그 장단점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다. 요즈음의 리뷰는 여러 가지 구조적 문제로 갈수록 서문과 구분이 되지 않는데, 리뷰의 경우 기술과 해석 못지않게 평가의 측면이 중요하고 그런 지점에서 판단에 있어 비평적 비판성을 잃지 않으려 한다.
해석의 정도는 당대의 리뷰를 넘어 연구(역사 기술)의 단계가 되면 훨씬 더 운신의 폭이 커진다. 여기서 전시 해석은 기획자가 미처 파악하지 못하던 역사적·담론적 맥락을 획득하며 당시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니는 지점까지 나아갈 수 있다. 기획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출품작들이 당대의 경향을 잘 반영하고 있을 수도 있고, 기획 의도와 정반대로 전시가 작동할 수도 있다. 미니멀리즘을 비판하기 위해 쓴 마이클 프리드의 글이 역설적으로 미니멀리즘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글이 된 것처럼 말이다.
전시는 언제 ‘사건’을 넘어 ‘역사’가 되는가?
생명력이 긴 전시는 단순히 트렌드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라 모종의 정신(spirit)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기획자나 작가의 에너지나 패기, 해당 시기의 특수성, 이 전시를 왜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절실한 이유와 열망 같은 것이 존재해야 그 전시가 역사에 남는다. 최근 연구의 측면에서 살펴본 두 전시가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1990년대 말 열렸던 《틈: 싱글채널 비디오》(아트선재센터, 1998)전과 《The Cross: Exhibition for Videography》(동숭시네마텍, 1999)전이 그것이다.
아마도 당시 이 전시들은 최신 비디오아트를 소개하는 청년 작가들의 트렌디한 전시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The Cross》의 경우 리뷰가 없고 《틈》의 경우 리뷰 하나가 남아있는데, 내러티브가 약세인 한국 비디오 작업과 달리 스토리텔링에 기반한 《틈》 출품작의 차이를 감지하면서도 언어가 과잉이라고 지적하는 당시의 리뷰는 흥미롭다. 이후 《틈》은 영상 공동 창작, 비선형적 내러티브 실험, 본격적
서사가 가미된 단채널 비디오라는 점에서 1990년대의 예외적 사례이자, 이미지 중심이던 당시 국내파 작가들의 비디오아트에 대한 감각과 서구 교육을 받은 유학파 작가들의 비디오아트에 대한 개념 차이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전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The Cross》는 당시에는 앙팡테리블들의 도발적 전시로 인식되었지만, 후대에 이르면 당시 국내파 비디오 작업의 경향뿐 아니라 아직 분화가 덜 되어 장르 간 교류가 활발하던 1990년대의 시대 특수성을 반영하는 역사적 가치가 부여된다.
비디오아트의 본질은 시간성이라는 생각으로 국내에 제대로 된 단채널 비디오 작업을 선보이고 싶다는 《틈》 작가들의 마음과, 비디오아트는 원론적으로 TV와 같은 원리를 지니고 있는데 미술 제도의 제약을 벗어나 더 많은 관객을 만나고 장소와 자본의 제약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The Cross》 기획자들의 생각을 담은 두 전시가 남은 것은, 당대의 미술 지형에서 새롭고 의미있는 전시를 하고 싶은 설득력 있는 기획 의도가 시간이 흐른 뒤 역사적으로 재평가받았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이 같은 사후적 해석은 하나가 아니며 연구자나 연구 방향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기에, 역사적 재해석은 특정 전시의 소비기한을 끝없이 연장시킬 수 있다.
*문혜진
미술비평가이자 미술이론 및 시각문화 연구자. 기술 매체와 시각성, 동시대 미술 및 시각문화를 주요 연구 분야로 삼고 있다. 저서로 『90년대 한국 미술과 포스트모더니즘』(2015)이 있으며, 『면세미술』(공역, 2021), 『사진이론』(공역, 2016),『테마현대미술노트』(2011) 등을 번역했다. 2023년 제19회 월간미술대상 비평 부문을 수상했다
월간미술 편집부
전시는 잡지에서 어떤 ‘몸’으로 다시 구성되는가?
잡지에 이르러 전시는 특정 공간과 시간에 묶인 사건이 아니라, 텍스트와 이미지, 그리고 편집이라는 매개를 통해 재구성된 또 하나의 ‘매체적 몸’으로 전환된다. 전시가 현장에서 관람자의 몸을 통해 경험되는 사건이라면, 잡지는 그것을 다시 ‘읽히는 몸’, ‘사유되는 몸’으로 전환한다. 이때 전시는 서로 다른 층위의 언어들(비평, 정보, 서사, 이미지)이 교차하는 복합적 구조로 다시 조직된다. 전시에서의 동선, 작품 간의 긴장, 공간의 밀도와 같은 요소들은 문장과 이미지의 배열로 치환되며, 그 과정에서 다른 의미의 층위가 발생한다. 잡지는 이 변환의 틈에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생산한다.
이 과정에서 편집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어떤 전시를 선택할 것인가, 어떤 필자의 시선을 경유할 것인가, 어떤 이미지와 문장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는 중요한 조건이다. 한정된 지면이라는 제약 속에서 에디터는 리드, 캡션, 도판, 도해, 여백까지 포함한 총체적 구성으로 전시의 구조를 다시 설계한다. 이때 편집은 전시의 의미를 재배치하는 일종의 이차적 큐레이팅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잡지 속에서 전시는 물리적 전시가 끝난 후에도 미술계 내에서 끊임없이 참조되고 유통될 수 있는 ‘담론의 몸’을 얻게 된다.
전시를 기사로 옮길 때 무엇이 남고 무엇이 사라지는가?
전시를 기사로 옮기는 과정에서 먼저 사라지는 것은 신체적·감각적 경험이다. 전시는 눈으로 보는 동시에 몸으로 겪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대신 기사화 과정에서 전시는 구조를 획득하고 동시대의 맥락 속에 위치하며, 나아가 미술사적 해석의 단초를 갖게 된다.
오늘날 잡지는 해석과 축적의 매체로 기능한다. 전시는 기사화되는 순간 하나의 아카이브가 되며, 미래를 위한 자료로 남는다. 아직 충분히 해석되지 않은 전시에 대해 입장을 제시하는 일 역시 이후 담론을 촉발하는 역할을 한다. 잡지는 현장감을 완전히 재현할 수는 없지만, 대신 사유 가능한 구조를 구축해 지속적으로 읽히는 텍스트로 남는다.
잡지는 전시를 어떻게 ‘담론’으로 확장하는가? 정보 전달을 넘어 ‘담론’을 형성하기 위해 필요한 편집적 장치가 있다면 무엇인가?
잡지가 전시를 담론으로 확장하는 출발점은 무엇을 의제로 설정할 것인가에 있다. 이는 정보 전달을 넘어, 동시대 미술에서 아직 충분히 가시화되지 않은 문제를 포착하고 공론화하는 일이다. 이는 미술계에서 잡지만이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이라고 본다.
전시는 개별 사건으로 존재할 때보다, 다른 전시, 작가, 이벤트와의 관계 속에서 담론적 밀도를 얻게 된다. 잡지는 이러한 관계망을 구성하는 매체이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편집적 장치다. 비평적 언어, 인터뷰와 리서치의 교차 배치 등의 구성은 복수의 시선을 교차시키며 생태계 내에서 전시의 역할과 자리를 조명한다. 또한 편집부 내부의 토론과 판단은 잡지 고유의 관점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잡지는 담론을 전달하는 매체가 아니라, 그것이 생성되는 장이다. 전시를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놓일 사유의 좌표를 구성하는 것이다.
월간미술이 수십 년간 쌓아온 기록들은 현재의 미술사적 서술에 어떤 ‘데이터’를 제공하고 있는가?
『월간미술』의 아카이브는 한국 현대미술의 전시사(史)를 구성하는 1차적 사료이자, 핵심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종료된 전시는 도록과 일부 이미지로는 그 구조와 의미를 온전히 복원하기 어렵다. 이때 잡지의 리뷰, 전경 사진, 인터뷰와 다양한 필자의 교차하는 시각과 논쟁 기록 등은 서로 보완되며 하나의 복합적 아카이브를 형성하게 된다. 이 자료들은 특정 전시의 기획 의도와 동시대의 평가, 이후의 재해석을 추적할 수 있게 하며 나아가 시대별 전시 경향과 담론 지형을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잡지는 당대의 감각과 판단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사후적 연구와는 다른 층위의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결국 『월간미술』의 기록은 반복해서 호출되고 재해석될 수 있는 데이터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전시를 사건에서 역사로 이행시키는 과정에서 작용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