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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영 기자

새 학기가 시작되고 새 봄을 맞는 3월은 학생이 아니더라도 새해의 다짐을 돌아보고 미뤄두었던 일에 다시 손을 내밀게 되는 시기다. 이번에 소개하는 네 권은 그간 지면에 담지 못했던 신간 가운데 ‘예술의 조건’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책들로 선정했다. 인공지능 시대에 달라진 창작 환경을 짚는 논의, 동시대 예술가의 실천적 태도를 다룬 기록, 한국 현대미술의 한 축을 이룬 화가의 삶을 연구한 평전, 그리고 자기 서사를 이론의 언어로 확장하려는 시도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결을 지닌 책들은 예술이 어떤 환경과 태도 속에서 형성되는지를 다각도로 비춘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서 예술을 새롭게 사유하게 하는 이야기들을 살펴보자.

『AI, 예술의 미래를 묻다』
장병탁 외 7인 지음 · 시공사 260쪽 · 2024
18000원

오늘날 인공지능은 인간을 돕는 도구 이상의 창작의 새로운 주체로 거론되며 예술의 정의를 다시 쓰게 만들고 있다. 서울대학교미술관이 기획한 『AI, 예술의 미래를 묻다』는 생성형 AI라는 기술의 변곡점에서 예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심도 있게 탐색한다. 장병탁 심상용 등 각계 전문가들은 AI가 발휘하는 창의성이 과연 인간의 창의성과 동등한 지위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책은 AI 기술이 가져온 변화를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기술의 내부 작동 원리인 ‘블랙박스’적 속성이 창작 과정에 미치는 영향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저작권 및 윤리적 쟁점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여기서 블랙박스의 속성이란 어떤 계산과 판단 과정을 거쳐 나왔는지 투명하게 알기 어려운 상태를 가리킨다.

과거 사진술의 등장이 회화의 역할을 변화시켰듯, AI 또한 예술 표현의 한계를 확장하는 동시에 인간 고유의 역할이 무엇인지 되묻게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라 책은 강조한다. 그리고 AI를 예술가를 대체하는 존재로 단정하지 않고 새로운 미적 가능성을 제안하는 협력자로 바라보는 시야를 제안한다. 『AI, 예술의 미래를 묻다』는 급변하는 기술 환경 속에서 예술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미래의 창작 지형이 어떻게 재편될 것인지를 가늠하게 하는 통찰을 담고있다.

『예술가로 살아가기』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 지음 · 조서현 옮김 · 아트북프레스 332쪽 · 2025
25000원

영국 개념미술의 선구자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은 책에서 예술가라는 직업이 지닌 이상과 현실을 자신의 삶을 통해 이야기한다. 그는 화려한 수사로 예술을 포장하기보다 매일의 일상을 창작으로 채워가는 작가의 태도와 시선에 집중한다. 예일대 학생 시절 경험한 지적 교류와 교육자로서의 시간, 그리고 작가로서의 시행착오까지 그가 지나온 과정은 예술을 꿈꾸는 이들에게 구체적인 생존 전략과 사유의 토대를 제공한다.

예술가의 창작에 재기하던 질문, ‘무엇을 만들 것인가’를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의 문제로 전환한 마틴은 창작을 기술의 습득이 아니라 삶을 독창적으로 해석하는 시선을 기르는 과정으로 정의한다. 그러면서도 개념미술은 비물질적이거나 텍스트 중심이어야 한다는 당대의 통념에서 벗어나 개념과 시각적 감각이 공존할 수 있음을 자신의 작업으로 증명했다. 그의 흔들리지 않는 작가 정신이 담긴 이 책은 자신의 내면을 사유하고 그것을 명료한 형식으로 드러내는 태도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때문에 마틴의 『예술가로 살아가기』는 성공한 작가의 삶을 정리한 회고록이라기보다 창작의 방향을 모색하는 이들을 위한 실천적 안내서에 가깝다. 작업을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영감의 번뜩임이 아닌 사고의 명료함과 꾸준한 태도임을 강조하는 그의 담백한 조언은 예술을 특별한 재능의 영역으로 고립시키기보다 매일의 선택과 판단 속에서 다듬어가는 삶의 방식으로 바라보게 한다.

『화가 김종학』
심은록 지음 · 에디트 마이데이 392쪽 · 2025
48000원

『화가 김종학』은 김종학 화가의 삶과 예술 세계를 집대성한 평전이다. 저자 심은록은 3년여에 걸친 치밀한 조사와 연구를 거쳐 흔히 ‘설악산의 화가’라는 수식어 뒤에 가려져 있던 예술가의 생존을 위한 사투와 작가로서의 실존적 고뇌를 입체적으로 복원했다. 4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기록은 시대적 풍파와 개인적 비극을 어떻게 예술로 승화시켰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책은 김종학의 예술 궤적을 ‘도시(중시)’, ‘산(중산)’, ‘바다(중해)’라는 세 개의 공간적 축으로 재구성했다. 특히 1970년대 말 김종학이 미국 뉴욕 체류 시절 겪었던 극심한 슬럼프와 좌절은 작가 인생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설악산으로 들어간 그는 이름 없는 들꽃과 엉킨 덤불, 거친 생태계 속에서 자연의 찬란한 생명력을 발견한다. 여기서 탄생한 ‘기운생동’의 미학은 차가운 추상에 머물러 있던 당시 한국 화단에 강렬한 원색과 생동감 넘치는 에너지를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다.

저자는 김종학의 회화가 풍경의 재현이 아니라 보이는 현상 너머의 기운과 정신의 본질을 드러내려는 미학적 태도임을 강조한다. 또한 작가가 평생 수집해온 목기, 보자기, 농기구 등 전통 기물에 대한 안목이 그의 붓질과 색채 감각에 어떻게 스며들었는지도 세밀하게 분석한다. 최근 부산 해운대 시기에 이르러 더욱 대담해진 오방색과 자유로운 필치는 산을 넘어 바다와 우주로 확장되는 작가의 원숙한 세계관을 보여준다.

책에 수록된 250여 점의 풍성한 컬러 도판은 그 자체로 ‘종이 위의 미술관’으로 연구자들을 위한 미술 연구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작품을 통해 자연이 건네는 위로와 회복의 가능성을 전하는 기록으로 평가받는다.

『자기이론』
로런 포니에 지음 · 양효실 외 4인 옮김 · 마티 480쪽 · 2025
28000원

로런 포니에의 『자기이론』은 주관적 경험과 객관적 이론을 분리해 온 전통적 구도를 재검토하며 삶과 사유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지식이 생산될 수 있음을 제안한다. 그리고 자신의 예술 활동이나 연구를 동시대 담론 속에서 위치 짓고자 하는 이들에게 개인 서사가 어떻게 이론의 언어로 전환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포니에는 그동안 학문 제도 안에서 주변으로 밀려나 있던 여성, 유색인, 성소수자의 경험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들의 삶이 사례나 증언에 머무르지 않고 기존 지식 체계가 배제해 온 감각과 신체, 정체성의 문제를 전면에 드러내며 새로운 개념적 틀이 생성됨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자기’를 재료로 삼는 글쓰기와 예술 실천은 작가 개인의 고백이 아니라 사회 구조를 분석하고 권력의 작동 방식을 드러내는 비평적 행위로 전환된다.

책은 1960년대 이후 페미니즘 이론의 전개와 함께 이러한 흐름을 역사화한다. 매기 넬슨과 에이드리언 파이퍼의 작업을 사례로 제시하며 신체와 정체성에 대한 경험이 어떻게 엄밀한 사유의 형식으로 조직되는지를 추적한다. 이 과정에서 ‘자기’는 고립된 자아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복합적 존재로 이해된다. 따라서 ‘자기이론’은 개인의 특수성을 강조하면서도 그 특수성이 사회적 조건과 맞물려 있음을 드러내는 방법론이 된다.

자신의 삶을 이론화하려는 ‘자기이론’의 시도는 제도적 기준에 자신을 맞추기 위한 전략이 아니라 기존 담론이 놓친 관점을 드러내고 새로운 지식의 좌표를 제시하는 작업인 것이다. 『자기이론』은 작가의 개인적 경험이 어떻게 사회적 의미를 획득하고 더 나아가 공적 담론을 재구성하는 힘으로 작동하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2026년 3월호 (VOL.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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