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JONGWON
ARTIST REVIEW

대한민국은 스스로 정립하지 못한 근대의 뒤안으로 사라진 것들에 대해 미처 애도하지 못했다. 산사태처럼 덮친 서양문물을 접할 때는 망조가 든 옛것에게 다정하게 안녕을 고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백 년쯤 지나고 나니, 우리들이 서둘러 배웠던 모든 것도 해체되기에 이르렀으며, 우리의 유산과 전통이 무엇인가 더듬을 여유도 생겼다. 여기 그 애도를 묵묵하게 이어온 한 서예가, 아니 작가가 있다. 서양 타이포그래피와 동양 서예 중간에서 매일 문자의 몸을 만지면서 작업해온 1세대 북디자이너 정병규의 해설에 기대어 그의 작업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올 2022 - 8〉(사진 왼쪽) 종이에 먹 100.5×69.5cm 2022, 〈올 2022-1〉 종이에 먹 214×150cm 2022

김종원은 1954년 태어났다. 제주대를 다니며 소암 현중화 문하에서 서예공부를 시작해 고려대 교육대학원에서 문자학을 공부했다. 한국서예협회 결성에 관여, 경남지부 회장을 맡았으며 일본의 서도단체 “태현회(太玄會)”에서 심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창원성산아트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아트링크, 토포하우스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벨기에EU의회 한국문화의날기념, 영국런던한국문화원 G20런던정상회담기념 한글퍼포먼스에 초대되었다. 주요 단체전으로는 〈2021 전남수묵비엔날레〉, 〈BVLGARI COLORS〉(2021,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ㄱ의 순간〉(2020,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Beyond Line〉(2019, LA카운티미술관) 등이 있다. 현재 경남도립미술관 관장, 한국문자문명연구회장 등을 지내며 창원에서 작업 중이다. 8월 29일부터 9월 25일까지 토포하우스에서 개인전 〈결〉을 개최했다.

왼쪽부터 〈결 2022 - 1, 2〉, 〈겹 2022 - 5〉 종이에 먹 100.5×69.5cm 2022

서를 애도하기

배우리 | 본지 기자

문자 이후  - 정병규
“서예는 죽었습니다. 하지만 전통적 서예의 상황을 빼고 한국미술을 논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건 한국 1세대 북디자이너 정병규의 생각이다. 그는 활동 초반, 디자인이라는 것이 서양에서 왔다고 굳게 믿었지만 어느 날, 언어학 층위 너머에 있는 ‘훈민정음’의 문자적 이미지성(그는 이를 따로 ‘한글 문자학’이라 부른다)에 눈이 번쩍 뜨였다. 훈민정음에 대한 관심은 이후 타이포그래피와 맞닿는 서예, 그리고 현대미술로까지 확장되었다.
그가 지켜봐 온 서예는 이렇다. 계급사회, 사대부 계층이 무너지면서 서예는 그것을 뒷받침하던 한문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한글 서예가 쓰이긴 하지만 대표 격인 궁체는 한글 서예 모델이 될 수 없다. 궁체의 서예적 특성은 서민과 민중을 위한 글씨라는 훈민정음 창제 이념과 상충하거니와 판본체도 한글서예의 바람직한 대상이 아니다. 즉, 궁체를 한글서예의 전형으로 삼은 것은 훈민정음의 창제 정신과 한글의 문자적 특성을 도외시하고 한자서예의 이데올로기로 한글과 붓글씨를 강제 결합시킨 결과다.
더구나 서예의 예술성은 서론(書論) 없이는 애초에 성립될 수 없는 것이었다. 서론이 서예를 쓰게 한다고까지 한다. 한글 서예는 아직 서론이 없다. 그래서 그의 주장은 이렇다. “한글 서예는 없다. 단, 아직은 없다.” 붓이라는 도구로 쓴다고 해서 문자의 예술, 서예가 될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그는 한글서예를 단순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한자가 사라지고 난 이후, 새로운 획(劃)의 미학을 요청한다. 미술 또한 획의 범주와 필연적으로 관련성을 가진 장르이니 새로운 획의 미학은 한국 근현대미술과 함께 한글 서예를 새롭게 보게 할 것이다. 서구가 재현의 ‘사라짐’을 끈질기게 파고들었던 것처럼 우리나라 근대 예술·문화의 현상으로서 한자의 ‘사라짐’을 서와 문자의 예술성으로 살피는 것은 한국 근현대미술을 새롭게 좌표화할 관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서예 작업을 통해 이런 과제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김종원이다. 정병규가 보기에 그는 서예를 애도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작가이기도 하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서(書)’가 ‘화(畵)’와 분리되고, 광복 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는 ‘서예’가 하나의 장르로 인정받은 것처럼 보였지만, 서는 대학의 미술교육에 편입되지 못하고 반세기 넘도록 어떤 새로운 예술적 담론도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 서예가 죽었다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 서예가들은 그동안 큰 붓을 휘두르는 퍼포먼스를 하거나 글씨인지 그림인지 모호한 획을 써내거나 먹물을 뿌리고 묵에 색을 가하는 등의 실험을 하곤 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2020년 전시 〈미술관에 書〉를 통해 서예를 미술로 격상하려는 야심만만한 시도를 했지만 이는 서예가 더 이상 동시대적 가치를 생산할 수 없음을 확인한 자리이기도 했다. 이미 때는 늦었다. 최소한 정병규에게는 이 전시가 서예의 조종을 울리는 사건처럼 보였다. 새로운 서론과 서의 미학이 없는 서예는 그렇게 구천 떠돌 듯 떠돌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예를 배우기 위해 제주로 유학 갔던 김종원도 마찬가지였다. 글자의 의미적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하는 표현주의적 시도를 통한 도전도 했으며, 색도 써보았다. 정병규가 이런 김종원의 작업을 계속해서 유심히 지켜보는 이유는 그가 어느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서예의 가능성을 끝까지 밀고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문자를 자신만의 상형문자로 변환시키는 실험을 해온 그는 최근 획만 남긴 채 모든 전통 서예적 의미와 잔재들(?)을 걷어내는 데까지 나아갔다. 개인전 〈결〉을 통하여 김종원은 서예의 장에서 현대미술의 장으로 진입한다.
의미를 초월하고 획과 물질만 남기는 건 회화 쪽에서 이미 실천했다. 정병규는 이우환 윤형근 이강소 오수환 등이 서양미술 기반 위에서 예술적 직관과 통찰로 자신들만의 획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말한다. 다만 ‘획파’로 불릴 이들이 근년에 “단색화라는 한 바구니에 담겨 상품성을 높이고 있지만” 잃어버린 전통과 근대를 애도했다고 평가하기에는 얼마간의 아쉬움이 남는다는 것이다. 하여 그는 서양 철학과 동양 노장사상, 그리고 신비주의로 그림을 치장할 것이 아니라, 근대 이후 한자와 서예의 ‘사라짐’과 그 이후의 획으로부터 우리 현대미술을 다시 보기를 제안한다.

문자 이전 - 김종원
서예로 작업을 시작한 김종원은 문자라는 외피를 해체하고 문자가 형성되기 이전의 ‘행위’에 주목한다. 그는 “교조적 우상”인 문자, 즉 한자를 넘어서면서, 버렸다. 김종원은 시서화가 각자의 몸 없이 엉켜있던 혼돈을 그린다. 만일 시와 서와 화가 하나가 되는 그 지점이 사유 자체라면 그 사유를 획의 행위로 끌어낼 수 없을까. 이런 고민 속에서 획 하나로 시서화가 하나가 되기 이전을 드러낸다.
서예가로 출발한 그는 여기로 오기까지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마산고 재학 시절 우연히 마주친 소암 현중화(1907~1997) 전시를 보고 서예에 입문한 그는 묵과 한문학 바깥을 떠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서단에서 그의 태도는 다른 서예가와는 조금 달랐다. 전통을, 스승을 그대로 받들어 모시는 서예를 한 적이 없다. 그랬더라면 왜색이 보인다고 비판받기도 했던 소암 문하에 들어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소암의 글씨에서 어린 시절 국전 도록에서 보았던 소전 손재형(1903~ 1981)이나 원곡 김기승(1909~2000), 일중 김충현(1921~2006), 여초 김응현 (1927~2007)의 것과 다른 어떤 참신함을 발견했다. 그 참신함이 어떤 것인지는 아직도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소암의 글씨가 보편적 ‘미’를 다루고 있음을, 그것이 글자의 현상적인 미가 아님을 어린 나이에도 어렴풋이 간파하고 있었다. 그렇게 서 안에서 분투하며 글씨의 기능을 넘어서는 심미적인 상황(游於藝)을 향하게 된다. 목구멍과 귓구멍에 담았던 경전과 시들을 그대로 토해내 자신만의 문자로 써내려간 〈문문자자(文紋字)〉 시리즈를 그렸고, 종이에 붓만 대도 문자가 남는 자동기술법을 체득한 뒤에는 갑골문의 주술성을 담은 〈문자성령(文字聖靈)〉, 〈곡신불사(谷神不死)〉, 〈통영신명 (通靈神明)〉, 〈풍신영가(風神詠歌)〉 등의 시리즈를 그려냈다. 먹을 먹인 종이에 주사로 그려낸, 글자 없는 〈용(龍)-통영신명 택풍산뢰(澤風山雷)/천지수화(天地水火)〉 등의 시리즈는 한반도에 유교가 정착되기 이전 무교시대의 “풍류(風流)”를 현재로 불러오기도 한다. 여기까지 보면 문자는 버렸지만 아직 영과 정신은 버리지 못했다.
그런 그가 의미의 빈 곳을 채우던 ‘이름’들을 마저 버리고 “결”만 남겼다. 1 화면에서도 작품 제목에서도 마찬가지다. 화면 가득 받아쓴 경전도 숨을 고르며 빈칸을 남기고 있다. 이번에야말로 서예의 근원인 갑골문 ‘더’ ‘이전’의 빈 몸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봐도 될 지….

미술사 바깥
정병규는 김종원의 실험을 “원획(元劃)” 이라고 명명하며 그가 근 백 년 만에 전통 서예 이후, 서예를 바탕으로 한국현대미술의 새로운 물꼬를 트는 샘플 하나 내놓은 것으로 본다. 원획은 거시성의 장에서 서예의 한정적 역사적 장을 넘어서기 때문에 시간과 장소를 뛰어넘어 미술-회화의 본질에 주목하고 확인하는 행위에 가까워진다.
바로 여기에서 정병규와 김종원은 예술이 관념이 아닌 행위로서만 존재했던 시대를 동시에 바라보게 된다. 예술의전당 수석큐레이터 이동국은 한국 서예계의 실험이 여기까지 온 일이 없다고 증언한다. 하지만 정말 없었던 걸까. 이노우에 유이치(1916~1985)로 대표되는 일본의 전위서예를 넘어서는 온갖 괴이한 실험들이 한반도 남쪽에서도 있어 왔지만 서양미술중심주의자들 중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고 소위 전통 서예계에서도 이를 근거로 하는 이론적 재무장은 없었다.
늦게 출발해 아직 정신을 붙잡고 있는 김종원의 획은, 물질을 건너 장식을 떼놓고 다시 서사와 정신으로 돌아오는 서양미술(동시대미술)과 만나고 말았다. 이런 만남이 다시금 아포칼립스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문자 바깥을 발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걸어온 김종원 같은 ‘작가’들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배운 서양미술사에서는 추상이 재현 이후 등장한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결〉 기획자 이동국이 보기에 동양에서는 구상 이전, 점획 그 자체가 추상이었다.2 이제는 미술사 바깥으로 향할 차례다.

김종원은 개인전 〈결〉에서 재명명한 작품을 선보였다. 〈문문자자〉, 〈풍신영가〉는 〈올〉, 〈곡신불사〉는 〈결〉이 되었다. 주술적 형상이 드러나는 〈통영신명〉 시리즈는 아예 공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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