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파리 아랍문화원, 빛의 기하학

아랍의 전통문양을 연상시키는 프랑스 파리 아랍문화원 건물 정면 외벽의 창문

아랍의 전통문양을 연상시키는 프랑스 파리 아랍문화원 건물 정면 외벽의 창문

심은록 감리교신학대 객원교수, 미술비평

에펠탑, 루브르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노트르담 성당 등 중요 미술관과 건축물들은 파리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센 강을 따라 세워졌다. 아랍문화원Institut du Monde Arabe(아랍세계 연구소, 이하 ‘IMA’)도 예외가 아니다. IMA는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시절 문화예술을 통해 프랑스와 아랍 19개 국가(이후 3개국 추가)의 우호를 증진한다는 취지로 기획되어 1987년에 완공됐다. 이러한 원래 의도를 상기시키듯, “우리는 모두 샤를리다”라는 붉은색 문장이 IMA 건물 정면에 과격할 만큼 큰 글씨로 쓰여져 있다. 올해 1월 7일, 시사풍자 주간지 《샤를리 엡도》가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를 불경하게 묘사한 데 대한 보복 테러로 17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붉은색 문장은 테러에 반대하는 강한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또한 아랍의 봄을 예술적으로 재현한 <모로코 현대미술전>(2014.10.15~3.1)을 계기로 IMA광장에는 건축가 타릭 우알랄루Tarik Oualalou가 기획한 서부 사하라식 텐트가 세워져 있다.
장 누벨, 질베르 레제네, 피에르 소리아와 아르쉬텍튀르 스튜디오의 공동 작업으로 건립된 IMA는 서구와 근동의 건축적 콘셉트를 조화시킨 알레고리적 종합이다. 현대식 재질인 유리와 알루미늄으로 건축된 지하 2층, 지상 10층 규모의 IMA 건물의 외벽은 아랍의 전통 문양 마슈라비아mashrabiyya를 연상시키는 240여 개의 창문으로 꾸며졌다. 이들 창문은 정교한 장치에 의해 햇빛 강도에 따라 자동으로 조절되는 카메라 조리개 같은 기능을 한다. 창문은 원, 사각형, 육각형 등의 형태와 수학적인 정확함, 빛의 기하학적 아름다움이 어우러져 신비함을 내뿜는다. 섬세함과 정교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외부와 달리, 내부는 퐁피두센터처럼 가설구조물을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건축물 높이규정에 따라, IMA의 건물 높이도 주변 건물들과 같다. 좀 더 높은 느낌을 주기 위해서 퐁피두센터 앞 광장처럼 IMA의 광장 지대를 낮추었음에도, 층간 높이가 낮아 답답한 인상을 준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인지, 유리 재질 특유의 투명한 느낌이 드는 건물 내부의 한가운데는 더운 지역의 내부 뜰인 파티오patio처럼 비워놓았다. 승강기 또한 4면이 유리로 되어있어, IMA의 파티오를 오르내리며 투명함을 즐길 수 있다. 이 투명함과 반대되는 지하의 닫힌 공간은 수많은 기둥에 의해 천장이 지탱되는 고대 이집트의 히포스타일hypostyle을 연상시키며 무겁고 안정된 느낌을 준다.
IMA는 아랍권 국가의 문화와 예술을 보여주는 ‘상설 미술관’과 현대미술을 비롯 다양한 전시를 보여주는 ‘특별 전시장’으로 나뉜다. 1층에는 서점, 카페, 매표소가 있으며, 옥상에 올라가면 노트르담 성당, 유유히 흐르는 센 강, 파리의 정경이 내다보이는 아름다운 테라스가 있고, 옥상 입구에는 레스토랑이 있다. 현재 공사 중인 도서관에는 아랍 전문서적과 신문·잡지 등이 비치되었다. 특히 계단이 인상적인데, 바빌로니아, 수메르, 아시리아의 지구라트ziggourat에서 영감을 얻은 피라미드식 계단에 책장이 있어,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필요한 책을 꺼내 읽을 수 있다.
21세기가 시작되면서부터, 서구와 아랍은 교류가 늘고 서로간 이해가 충돌하는 등 점점 더 예민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IMA 입구에 설치된 거리작가 콤보Combo의 작품 <공존하다COEXIST>는 서로 다른 세계와의 교류에서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자 IMA의 궁극적인 정신을 말해준다. 이 작품에는 이슬람의 초승달, 유대교의 별, 기독교의 십자가, 이렇게 세 개 유일신 종교의 상징이 한 단어(세계)에 공존한다. ●

아랍문화원 입구에  설치된 작가 콤보(Combo)의 〈COEXIST(공존하다)〉 사진·심은록

아랍문화원 입구에 설치된 작가 콤보(Combo)의 〈COEXIST(공존하다)〉 사진·심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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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슬람교중앙회 서울중앙성원의 외관

한국이슬람교중앙회 서울중앙성원의 외관 서울시 용산구 우사단로 10길 39

Report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기

국내 이슬람교도 인구는 3만5000명(한국이슬람교중앙회 홈페이지 참조)에 달한다. 우리에게 이슬람문화는 그야말로 “먼 나라 이웃 나라” 이야기다. 우리 주변에서 이슬람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공간은 의외로 제법 많다. 이태원에 있는 한국이슬람교중앙회 서울중앙성원은 무슬림의 예배공간이지만 모스크의 이국적인 분위기에 호기심이 동한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태원의 대표적 관광명소이기도 하다. 방문에 제한은 없으나 이슬람법에 따라 사원2층의 예배실은 여자의 출입이 금지된다. 서울중앙성원은 국내 최초이자 최대의 모스크로 1976년 개원했다. 현재 국내 이슬람 사원은 부산, 전주, 경기도 광주, 안산, 파주, 제주 등 전국 14곳에 있다.
음식을 맛보는 것은 이슬람문화를 접할 수 있는 좀 더 간단하고 직접적인 방법이다. 얼마 전 한 TV 프로그램에서 국내 무슬림 가족이 할랄 인증 식품을 구매하는 과정을 소개하면서 할랄음식점에 대한 대중적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할랄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은 꽤 많지만 한국이슬람교중앙회의 공식인증을 받은 할랄 식당은 전국 5곳에 불과하다. 그 중 전통 터키 음식을 판매하는‘케르반Kervan’은 국내 최초로 할랄인증서를 발급받은 레스토랑이다. 여기서는 터키의 피자, 피데와 각종 케밥 등을 맛볼 수 있다. C.S. 루이스의 소설 《나니아 연대기》에서 하얀 마녀가 건네는 달콤한 유혹의 젤리로 알려진 로쿰, 직접 구운 바클라바 등 터키식 디저트를 판매하는 베이커리도 운영하고 있다. ‘케르반’을 관리하는 (주)투트라 비디엠의 황은하 부장은 “한국이슬람교중앙회의 할랄인증서를 받으려면 점검받을 사항이 40여가지가 넘는다. 조리 시 국내외에서 이슬람법에 따라 도살되지 않은 고기, 알코올 사용을 금하다 보니 식재료부터 각종 소스나 향신료까지 예민하게 확인해야 한다”며 까다로운 할랄인증서 발급과정을 설명했다.
한편 이슬람문화를 시각적으로 접하고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공간도 있다. 강남구 역삼동 주한이스탄불문화원은 1998년에 설립된 민간 문화원이다. 이곳은 ‘이슬람’에 방점이 찍혀 있기보다는 이슬람문화권인 ‘터키의 문화’에 방점이 찍혀 있다. 터키어, 터키요리 강좌를 비롯해 한국·터키 간 문화적 이해를 돕는 다양한 강의와 행사를 진행한다. 터키 관광지에 대한 자료와 터키 관련 서적을 700여 권 보유하여 열람 및 대출이 가능하고 소규모 전시실이 있어 터기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공예나 도자기를 전시하고 있다. 단체 신청자에 한해 터키 전통의상을 입어볼 수도 있다.
이외에도 문화체험 공간을 따로 마련하지는 않았지만 이슬람문화 관련 외부 행사를 주최하는 대표적인 기관으로 한국-아랍소사이어티(KAS)를 들 수 있다. 한국 및 아랍 22개국 정부(왕실), 기업, 단체가 참여하는 민・관 합동 비영리 공익 재단법인으로 한국과 아랍국가간 문화, 학문, 비즈니스 교류를 목표로 세워진 기관이다. 매년 진행되는 ‘아랍문화제’는 이곳의 대표적인 문화사업이다. 아랍국가의 공연팀을 초청하고 아랍문화를 소개하는 다양한 전시를 열 뿐 아니라 아랍영화를 상영하는 영화제도 개최한다.
임승현 기자

한국이슬람교중앙회 서울중앙성원 2층 남성예배실 내부. 서울시 용산구 우사단로 10길 39

한국이슬람교중앙회 서울중앙성원 2층 남성예배실 내부. 서울시 용산구 우사단로 10길 39

한국이슬람교중앙회가 인증하는 할랄인증서를 국내 최초로 발급받은 정통 터키 레스토랑 ‘케르반(Kervan)’.  02-792-4767 kervanturkey.co.kr

한국이슬람교중앙회가 인증하는 할랄인증서를 국내 최초로 발급받은 정통 터키 레스토랑 ‘케르반(Kervan)’. 02-792-4767 kervanturkey.co.kr

주한이스탄불문화원의 내부. 소규모 강의실과 터키 전통의상을 입어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02-3452-8182 www.turkey.or.kr

주한이스탄불문화원의 내부. 소규모 강의실과 터키 전통의상을 입어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02-3452-8182 www.turkey.or.kr

 한국-아랍소사이어티가 주최한 아랍문화제의 공연 모습. 02-551-7130 www.korea-arab.org

한국-아랍소사이어티가 주최한 아랍문화제의 공연 모습. 02-551-7130 www.korea-arab.org

 

SPECIAL ARTIST 강은엽

조각가 강은엽은 형식과 내용의 스펙트럼이 넓고 깊은 작가다. 전통적 조각어법에 충실한 초기작부터 일상과 자연, 그리고 생명에 대한 성찰이 담긴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은 탁월한 감각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강은엽의 예술세계는 결국 ‘사랑’과 ‘모성’, ‘생명’에 대한 깊은 사색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타자에 대한 관심과 시선은 작가가 오랫동안 추구해온 대상에 대한 애틋한 정서와 감각적인 표현으로 구체화 된다. 작가 강은엽의 작품세계를 탐구한다.

만남의 용법

유진상 계원예술대 교수

강은엽은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50여 년의 세월 동안 한국 조각에서 매우 독보적인 작품세계를 보여주었다. 그의 작업은 전통적인 조각으로부터 새로운 영역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적인 탈출을 시도해왔다. 잘 알려진 <창窓> 연작과 같은 테라코타 작업은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당대로서는 파격적인 입체적 평면을 선보였다. 그는 조각적 표면 위에 선묘線描뿐 아니라, 루치오 폰타나에게서 볼 수 있는 평면의 투과透過를 우의적으로 감행함으로써 조각적 매스에 안과 밖, 혹은 내면과 외양이라는 서사적 구조를 부여했다. 이러한 시도들은 초기 모더니즘 조각이 뿌리내리던 시기에 여성 조각가로서 그가 확보할 수 있었던 중요한 표현의 가능성들로 해석된다. 다시 말해, 남성 위주의 당대 조각계에서 그는 자신의 삶, 특히 여성으로서 삶의 경험-사랑, 모성, 신체성, 소수성 등과 같은-이 일으키는 폭넓은 감성의 영역들을 조각을 통해 기록한 것이다. 1979년 공간미술관에서 열린 그의 두 번째 개인전은 이러한 작업의 정수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전시다. 이 전시에서 강은엽은 테라코타, 즉 흙을 중심으로 한 작품을 대거 선보였는데, 이 작품들은 그가 일관되게 추구해 온 ‘유기적 형태의 창조’가 어떤 단초에서 출발하는지 잘 보여준다. 여기서 ‘유기적 형태’란 단지 형식적인 요소들의 조합이 아닌, 감정적이고 신체적인 요소들과의 상호작용으로부터 생성되는 물질적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그것들은 자연으로부터 비롯되거나 그것에 속하는 형태이며, 삶과 죽음의 순환적 과정에서 파생되는 형태이기도 하다. 여기서 ‘흙’은 단지 재료일 뿐 아니라 이러한 유기적 순환과 생성의 가장 중요한 바탕이며 개념적 질료이다. 그러므로 그가 흙 대신 돌이나 나무를 사용할 때조차 흙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그것이 대표하는 신체적이고 동시에 관념적인 출발점을 끊임없이 환기시키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1987년에 도쿄의 마키眞木화랑에서 열린 개인전 제목은 ‘Escape’, 즉 ‘탈출’이었다. 작가의 개인사를 차치하고라도, 한국의 여성 조각가로서 그가 살아온 시대를 떠올릴 때 그리 의외의 주제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 전시에서 작가가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육각의 나무 프레임은 흡사 프랜시스 베이컨의 회화에서 볼 수 있는 투명한 육면체의 틀을 떠올린다. 후자의 틀 안에서는 인간 군상이 마치 유령처럼 사라져가거나 원초적 감정들에 사로잡혀 절규하고 있는 반면, 강은엽의 틀 안에서는 어떤 존재의 파편들이 일어난 사건의 기억을 간직한 채 허공에 떠 있거나 그 안에 쌓여있다. 특기할 것은 기존의 테라코타 작업 이후에 이러한 형태와 재료들로 이어지는 양상이다. ‘창’ 연작에서 테라코타의 표면을 날카롭게 꿰뚫어 벌려놓음으로써 형태의 안쪽을 암시하고자 하던 제스처는 여기서 파열 혹은 내파內破, implosion의 그것으로 이어진다. 이는 특히 <하늘과 땅 사이>(1987)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또한 이 전시에서 선보인 <9개의 방>은 이 나무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목에서부터 직접 가리키고 있다. 각각의 틀 안에는 마치 소설의 챕터들처럼 다양한 사건들이 벌어지는데,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통해 서사적 관계들을 함축하는 이러한 방식은 작가의 다른 작품들로 이어진다.
강은엽의 작품 가운데 가장 격정적인 작업은 1989년 갤러리 서미에서 열린 <Embrace전>에서 발표한 돌, 철판, 유리 연작을 들 수 있다. 50대에 접어든 작가의 열정과 통찰이 번뜩이는 이 작품들의 키워드를 떠올리라면 ‘고통’과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전의 나무 프레임 작업들과 더불어 새롭게 소개된 돌, 철판, 유리 작업은 신체적 고통과 그것의 항구적인 지속을 직접적으로 시각화하고 있다. 거칠게 깎이거나 잘린 돌과 철판을 관통하는 것은 바로 비수처럼 날카롭게 깨진 유리 파편과 뾰족한 금속의 봉棒들이다. 제목에서 언급한 ‘embrace’, 즉 ‘포옹’은 이러한 날카로운 관통을 견디고 있는, 그것을 붙잡아 영원히 품고 있는 존재의 단단함을 가리킨다. 이 드라마틱한 작품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관객조차 신체적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다. 예컨데 1989년 작인 <만남 Encounter>은 세 개의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창끝처럼 나란히 돌에 박혀있는 작품으로, 운명적 만남이 야기한 환희와 고통을 더없이 간결하게 표현한 시각적 시詩다. (수정과도 같은 세 개의 유리 파편은 작가 자신의 아이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강은엽의 독특한 ‘시적 연결’poetic association에 대해 오병욱은 ‘상대적인 관계항들의 대조적인 배합에서 파생하는 갈등의 부산물’이라고 표현했다. 즉 작가의 방법론 속에서 시각적 형식의 탁마琢磨 대신 시적이고 심리적인 직관적 개입이 부각된다는 의미이다. 작가는 이러한 방법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모든 물질이 자체의 경이로움을 가질 만큼 그 물질과의 만남은 언제나 감동적이다 어떤 재료와의 만남은 적중된 예감처럼 필연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한 재료 그리고 또 다른 재료와의 만남이 상대적인 관계로서의 새로운 국면의 창조를 낳게 하는 것이 아닐까…”
1992년에 서미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시간의 배후 The Other Side of Time>에서 강은엽은 이러한 ‘경이로움’에 대한 통찰을 독보적인 방식으로 풀어놓았다. 이 전시에서 그는 말 그대로 거칠게 깎여진 오석烏石들을 전시장 바닥에 늘어놓았다. 전시 서문을 쓴 서울대 환경대학원 김형국 교수는 이 전시의 제목이 ‘시간의 배후’인 것에 대해 “인위의 문명에 때묻지 않은 시간에서만 존재할 수 있었던 ‘자연다운 자연’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그것을 점점 빨라지는 공간이동 수단에 의해 시간이 중요해지는 ‘시간의 공간대체현상’에 대한 반대급부적 대응이라고 보았다. 즉 바닥에 놓인 정적인 사물들은 여전히 느리게 흐르는 시간과 사물 자체의 존재를 지탱하는 공간의 간격들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전시는 개별적 작품이 아닌 설치작업처럼 보이며, 전시된 바위들은 최소한의 인위적 가공만이 가해진 고대의 거석 집단처럼 보인다. 그중에 한 작품에 붙어 있는 <지금은 고요할 때>라는 제목은 작가의 의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돌, 스테인리스 스틸 40×90×30cm 1986

<만남> 돌, 스테인리스 스틸 40×90×30cm 1986

 돌(烏石) 40×210×30cm 2003 당시 작가의 관심사였던 문명과 도구에 관한 연작 가운데 하나

<바늘> 돌(烏石) 40×210×30cm 2003 당시 작가의 관심사였던 문명과 도구에 관한 연작 가운데 하나

생명에 대한 공감능력
1992년에 창설을 주도한 계원예술대학교의 설립 이래로 전력을 다해 몰두해 온 예술교육 활동은 지난 20여 년 간 강은엽의 창작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에게 창작의 핵심 동력인 타자에 대한 사랑과 공감은 교육이라는 광범위한 프로젝트 안에 녹아들었다. 이 시기에 그는 자연적 재료들로부터 인공적이고 건축적인 기념비적 구조들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조형성의 영역을 탐구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발견을 전달하고 확산하는 일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작품 속에 일관되게 녹아든 삶과 타자에 대한 애정은, 특히나 그의 동물에 대한 적극적인 사랑으로 인해 잘 알려져 있다. 강은엽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동물보호협회 ‘카라’ 회장으로서의 활동은 그 일부에 해당한다. 실제로 그는 10여 마리의 유기견을 거두어 함께 생활하고 있다. 동물에 대한 그의 관심과 헌신은 일상적 삶에서나 창작에서 생명에 대한 공감능력이 얼마나 핵심적인 요소인가를 웅변으로 보여준다. 나는 이것을 ‘생명 공명life resonance’이라고 부른 바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강은엽의 작업이 형식적 조형성의 완성이 아닌 세계와 삶의 관계에 대한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생명 공명’이란 다름 아닌 다른 존재의 형태에서 나의 존재를 발견하는 것으로, 예술의 기본적인 작동방식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생명공명’은 최근에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열린 2인전 <타이틀매치>에 전시된 작품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강은엽에게 산책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20년 가까이 살아온 청계산 자락 자택에서 인근의 산을 오가는 산책을 통해 그는 버려진 유기견들을 보살피고, 마찬가지로 꺾이거나 죽어버린 나무들을 거두어왔다. 이렇듯 버려진 것들을 거두는 일은 그가 평생 동안 해온 작업들의 의미와도 깊은 연속성을 지닌다. 그에게 작업이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랑’과 ‘모성’, 그리고 살아있는 혹은 살아있던 것들의 ‘몸’과 관련된다. 그리고 버려진 것들 안에 내재하는 ‘작아진’ 생명에 대한 연민 역시 그의 마음과 맞닿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타자에의 관심과 시선은 그간 해온 작업들 속에서 자연적인 대상들에 대한 애틋한 공감과 공감각적인 시적 몰입으로 발현되었다. 오랜 세월 성장하면서 아름답게 형태를 잡은 나무들이 어느 순간 최후를 맞게 되어 그 형해形骸가 나뒹구는 것을 발견하면, 작가는 그것에 염을 하듯이 작업을 입혀 다시 새로운 시간을 부여한다. 이 전시에서 그는 살아있는 나무들과 쓰러진 나무들이 함께 존재하는 숲의 사진들, 쓰러진 죽은 나무들의 몸을 다룬 조각들(<쉼>)과 나무들의 나이테를 탁본이나 도장처럼 찍어 놓은 판화들(<말과 글>)을 전시했다. 다른 작품들에서도 그렇듯이 제목은 강은엽의 작품들에 있어 중요한 조형적 요소가 된다. 전시장 벽에 기대어져 있는, 작가가 산을 오르내릴 때 지팡이 삼아 짚었던 나무 작대기에 그는 <돌아봄_한 그루 나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가 하나의 존재와 생명의 시간을 공명하고 의지하며 그것의 삶을 반추하는 작품인 것이다. 숲 속에 나뒹굴던 나무 껍질을 주워 그대로 ‘레디메이드’로 사용한 <긴 여행에 관한 책>은 작가의 창조적 삶과 익명의 존재 사이에서 오가는 깊은 밀어密語를 연상시킨다. 이번 전시를 통해 이 원로작가는 어떤 새로운 전환의 에너지를 발견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것은 이제까지의 작업들에서 작가가 꾸준히 깊이를 더해 온 것이다. 버려진 것들과 약한 것들, 사라진 것들과 감추어진 것들에 대한 따듯한 공명은 강은엽의 작품세계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일관된 내용이다. 그에게 인간과 사물, 동물과 자연은 모두 동일한 시선의 거리에 놓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들을 그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보듬고, 말을 걸고, 버려진 것들을 거두어들인다. 삶과 세계의 경험 안에서 그의 작업은 말 그대로 함께 살아가는 과정을 다룬다. 그가 보여주는 반세기에 걸친 창작적 삶은 그 어떤 형식적 완결과도 다른 새로운 차원의 예술적 예시를 열어주고 있다. 그것은 삶 속에서 일어나는 숱한 ‘만남’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며, 이는 삶과 세계의 새로운 용법들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나갈 것이다. 강은엽의 작품은 그러한 가능성의 스펙트럼을 더욱 넓혀가고 있다. ●

2014년 1월 7일부터 11월 23일까지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열린  전시광경

2014년 1월 7일부터 11월 23일까지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열린 <타이틀매치> 전시광경

판화 12점으로 구성된 과 시멘트로 캐스팅한  연작

판화 12점으로 구성된 <말과 글>과 시멘트로 캐스팅한 <쉼> 연작

강 은 엽 Kang Eunyup
1938년 태어났다. 1963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하고, 뉴욕 Art Students League에서 Jose De Ceieft에게 조각수업, 뉴저지 몽클레어주립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2년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5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1993년 제7회 김세중조각상을 수상했고, 계원예술고등학교 예술연구소장(1980~1993), 계원조형예술대학 교수(1993~2005)를 역임했다. 현재 사단법인 동물보호 시민단체 카라(Korea Animal Rights Advocate) 명예대표, 한국현대문학관 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ARTIST REVIEW 이수경

도자기 파편을 이어 붙여 작업하는 이수경의 개인전 <이수경, 내가 너였을 때>가 2월 10일부터 5월 17일까지 대구미술관에서 열린다. ‘주체에 대한 부정’을 키워드로 하는 이수경의 작업세계는 변화무쌍하고 종잡을 수 없는 유동성이 특징이다. 회화, 영상설치, 드로잉 등 250여 점의 작업을 통해 작가가 펼치는 다채로운 변주를 살펴보자.

임시적인 주체와 전생 퇴행

황인 미술비평

이수경의 이번 대구미술관 전시회는 개인전이 아닌 그룹전을 보는 듯하다. 한 작가가 짧은 주기에 변덕스러울 정도로 급격한 변신을 거듭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작업과 작풍을 보여주는 경우는 이수경을 제외하고는 별로 없다.
작품세계를 분석할 때 맨 먼저 동원되는 것이 환원작업이다. 그리하여 추출된 요체에서 작가의 특징적 성격을 도출한다. 이를 작가적 주체의 한 양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론은 이수경의 작품세계 앞에서는 요령부득이 되고 만다.
모더니즘 이후, 대부분의 작업 행위는 작가 자신의 주체에 대한 확신을 암묵적인 전제로 하고 출발한다. 변화무쌍한 대상을 작가와 같은 장소성에서 현상적으로 다루거나, 대상을 장소성을 초월한 절대적인 균질공간으로 월경시켜 다루더라도 그 이면에는 확고한 주체가 버티고 있다는 사실의 인정에는 강약의 차이가 없다. 그러한 주체가 있어 이와 대립항인 객체 사이의 역학관계를 부여하여 이 둘 사이의 긴장감을 유도한 건 근대주의의 성과다. 그런데 이러한 성과를 부정하고 주체 그 자체에 대해 의심을 내세우는 미술은 어찌해야 할 것인가.
이수경의 작업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변화와 굴곡이 많은 듯하지만 굳이 첫 개인전 <나와의 결혼>에서부터 이번 전시 <내가 너였을 때>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작업을 한마디의 키워드로 정의하자면 ‘주체에 대한 부정’이라 하겠다.
주체subject 란 ‘아래根底 에 놓인 것’이란 뜻이다. 시간에 따라 변화를 거듭하려는 현상을 담고 있으되 자신은 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공간을 확보한 그릇이 주체다. 그런 만큼 주체는 일관성을 지녀야 한다. 이것이 미술가의 작업에는 일관된 작풍으로 암시된다. 작품이 시종일관 일관성을 지닐수록 작가의 주체는 강화된다.
반대로 일관성을 상실한 주체, 변덕스럽게 변신을 거듭하는 주체는 적어도 근대주의에서는 병리적으로 취급된다. 주체와 주어에 대한 강박을 거부하고 술어적 세계를 더 강조했던 모노파에서조차 그 이면을 보면 작가는 작품의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주체의 일관성을 유지하려 한다(이들 중 작풍의 변덕스러운 변신을 통해 주체마저 거부한 작가는 스가 기시오가 유일하다).
이수경은 초기작업 <나와의 결혼>(1992)에서 모더니즘 이후 확고하게 자리 잡은 주체의 지위에 반역을 도모했다. 나와 그의 결혼이 그러하듯 주체와 객체라는 대립항으로 분리된 상태가 결합하는 방식이 아닌, 임시적인 나라는 허술한 주체와 또 다른 임시적인 나라는 가상의 객체가 뒤엉켜 합체合體(결혼)하는 경지의 작업이었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아메바처럼 자웅동체이던 것이 포유류처럼 자웅이 분리되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 진화의 일반적인 방식이다. 자웅을 공간적으로 대응하는 개념으로 분리하여 이를 다시 구조적으로 결합시키는 것이 결혼의 방식이다. 그러나 공간화를 거부하는 퇴행적인 자웅은 분리와 결합의 과정을 거절한다. 이수경의 작업은 초기부터 이런 낌새를 보였다.
신체적 자아, 심리적 자아 과정을 넘어서서 칸트가 언급한 대로 ‘선험적 의식’을 가진 자아는 본질적인 그릇으로서의 주체가 되어 객체와 완벽하게 대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시간에 의해 수시로 변화하는 주체가 아니라 공간성을 확보한 주체로서 정의되는 과정은 근대주의의 특징인 시간과 장소의 공간화와 맥을 같이한다. 그리하여 주체와 대상Gegenstand, 마주보고 섬 사이의 위치성과 선형적인 방향성이 분명해졌다. 여기서 대상이라는 3인칭으로 나아가느냐 주체의 1인칭으로 남느냐는 작가 개인의 몫이고 또 개성의 몫이기도 하다. 근대주의 미술은 이러한 토대 위에서 성립하려 한다.

 연작이 설치된 대구미술관 전시장 광경

<번역된 도자기> 도자기 파편 에폭시 금 가변설치

 연작이 설치된 대구미술관 전시장 광경

<번역된 도자기> 연작이 설치된 대구미술관 전시장 광경

자기동의성의 상실
그런데 이수경은 근대주의의 토대와 기반을 계속 부정하려 한다. 퇴행이라고 할 수도 있고 병리라 할 수도 있다. 한편으론 주체의 강화에 대한 신념으로 가득 찬 근대주의에 대한 조롱일 수도, 새로운 시대정신을 열려는 돌파구이자 가능성일 수도 있다.
<파라다이스 호르몬전>(2008) 이후 나는 그녀의 작업을 1인칭과 3인칭의 관점에서 논한 적이 있다. 영기문靈氣文 을 연상케 하는 <불꽃> 연작을 1인칭 작업으로 그리고 그녀의 대표작처럼 알려진 <번역된 도자기> 연작을 3인칭 작업으로 분리해 보았다.
이번 전시의 큰 타이틀은 ‘내가 너였을 때’이다. 앞서 열거한 작업들 외에 <눈물>, <달의 이면>, <불꽃변주>, <이동식 사원>, <가장 멋진 조각상>, <순간이동연습용 그림>, <매일 드로잉>, <환상의 섬>, <휘황찬란 교방춤> 등 그동안 해온 다양한 시리즈의 작업이 대거 동원되었다. 이번 전시에서 이수경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작업은 처음으로 선보이는 <전생퇴행그림> 연작이다.
작가는 최면을 통해 전생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전생을 그림으로써 여기서 종잡을 수 없는 여러 개의 주체가 나타난다. 주체는 자기동일성identity 을 가진 하나여야 하고 일관성을 가져야 하며 불변이어야 하는 것이 근대주의의 입장이다. 그런데 최면을 걸 때마다 다른 주체가 나타난다. 여자였다가 남자였다가, 높은 신분이었다가 비천한 신분으로. 노루가 되었다가 곰이 되었다가 혹은 무생물이 되기도 한다.
전생前生 은 술어적述語的 상태가 주체를 가장하고 드러난 모습이다. 술어적 상태가 주체를 대체하거나 압도할 때 본질적인 그릇으로서 완강한solid 근대주의적 주체는 유동적인liquid 분자 상태로 와해되고 만다. 이런 유동성 속에서는 나는 너가 될 수 있고 너는 내가 될 수 있다. 나라는 주체의 그릇이 깨어지고 그 조각마저 완전히 마모돼버려 허공만이 남은 빈자리를 메우는 것은 분자화된 나와 너를 다 안고 있는 광대무변의 우주universe 라는 그릇이다. 우주에는 주체와 객체, 1인칭과 3인칭 혹은 2인칭 사이의 구별과 대립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하나의 통uni-verse 으로 함께 존재할 뿐이다. 이는 나라는 주체를 우주의 근원적인 질료로 환원한 종교적인 경지다. 주체의 무한한 확장을 미덕으로 삼은 근대주의와는 반대되는 입장이다.
이수경은 ‘내가 너였을 때’라고 타이틀을 붙였다. 종교의 궁극적인 경지에서는 ‘너’를 나의 은유적인 의미에서의 거울로 여긴다. 너라고 하는 2인칭은 사실은 또 다른 모습을 한 나라고 하는 1인칭일 뿐이다.
여기서 너는 하나의 너가 아닌 무수한 숫자의 너다. 변화무쌍한 빛의 도움을 받아 거울을 통해 드러난 주체는 현상적이며 또한 술어적이다. 거울 속에서 현상적이며 술어적으로 드러난 무수한 너를 나로 받아들일 때 나라는 주체는 근대주의가 구축하려는 자기동일성을 잃어버리고 만다.
자기동일성으로서의 주체는 하나여야 하는데 복수의 주체를 받아들이게 되니 전생이 성립한다. 복수의 주체란 다름아닌 주체의 여러 양상 즉 술어적 양태인 것이다. 전생이란 게 술어적 상태가 주체를 가장하여 드러난 모습 혹은 주어와 술어가 역전된 상태라고 한다면 그 전생은 나를 비추는 무수한 거울과 같은 너일 수가 있다. 그리하여 ‘내가 너였을 때’라는 타이틀은 설득력을 갖게 된다. 그녀가 ‘전생퇴행그림’을 그리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

 영상설치 2004

<환상의 섬> 영상설치 2004

 이 수 경 Yee Sookyung
이수경은 1963년 태어났다. 서울대 미술대학 서양화과와 동 대학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한국을 비롯, 타이완, 브라질, 벨기에 등지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국내외 다수의 기획전과 그룹전에 출품했다. 미국, 프랑스, 독일 등지의 레지던스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현재 서울에서 작업하고 있다.

ARTIST REVIEW 전소정

삶과 예술 사이가 궁금하다. 작가 전소정은 삶 속에 스며든 예술을 다양한 레퍼런스의 융합으로 표현한다. 문학과 미술, 음악 그리고 사람이 함께하는 그의 작품은 우리에게 울림을 전달한다. 혼재된 레퍼런스가 거미줄처럼 촘촘히 연결되어 만들어낸 내러티브를 마주한 관객은 자신을 바라본다. 그렇다면 작가는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볼까. 작가의 작업을 통해 그가 취하는 예술적 태도를 살펴본다.

보물섬〉Inkjet print 262×350cm 2014(왼쪽) 〈나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Embroidered on fabric 90×70cm 2014(오른쪽) 송은아트스페이스 전시광경

〈보물섬〉Inkjet print 262×350cm 2014(왼쪽) 〈나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Embroidered on fabric 90×70cm 2014(오른쪽) 송은아트스페이스 전시광경

예술가와 예술적 태도

류한승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초창기 전소정의 관심사 중 하나는 ‘내러티브’이다. 일반적으로 내러티브는 사건이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건은 어떤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하는 것인데, 소위 내러티브가 되려면 그런 사건들이 시간적 선후관계나 인과관계에 따라 연쇄적으로 이어져야 한다. 미술에서도 내러티브는 낯선 것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역사적 사건, 신화, 전설, 일상적 이야기가 회화, 두루마리 그림, 부조, 스테인드글라스 등으로 시각화한 바 있다. 물론 모더니즘 시기에 잠시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그렇다면 사람들이 내러티브를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삶을 사는 일이 바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며, 사람 사는 곳에 이야기가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종종 자신에게 적용해 그가 보고 느끼는 것이 곧 자신이 보고 느끼는 것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미술의 내러티브(주로 영상)는 소설이나 영화의 내러티브와는 다소 다르다. 이미 많은 영상 작업이 논리적 인과관계를 뒤엎거나 시간적 전후관계를 엉클어 놓으며 비선형적이고 파편적인 내러티브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영상을 중간부터 봐도 괜찮은 것 같다. 그런데 전소정은 하나의 비선형적 내러티브가 아니라 복수의 내러티브를 중첩시키고 있다. 즉 다층적인 내러티브를 구성하는데, 독특한 것은 그중 하나는 작가로 살아가는 자신의 내러티브라는 점이다.
우선 전소정이 눈여겨봤던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일찍이 그는 <일인극장>을 통해 보통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작가는 그들의 이야기를 극화한 후 자신이 만든 무대에 그들을 올렸다. 비록 작은 무대였지만 그 무대의 주인공은 그들임에 틀림이 없었다. 무대에 올린 이야기는 허구인 듯해도 실제 이야기였으며, 극이 진행되면서 실제 이야기는 허구처럼 보였다. 연극이 주는 극도의 몰입감이 이야기를 특별하게 만들지만, 때론 실제의 삶도 그에 못지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전소정에게 많은 영감을 준 것은 ‘엘리스’라는 무용수였다. 2006년 핀란드로 여행을 간 작가는 우연히 숲속에 들어갔고, 친구로부터 그곳에 사는 무용수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가 살던 공간을 보면서 그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과 떨어져 지내던 무용수는 자신의 이상을 좇아 자신의 삶을 살아간 것으로 추정된다. 설령 남의 눈엔 거지처럼 보여도. 무용수의 삶에 담긴 예술적 측면이 작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귀국한 그는 숲에서 체험한 것과 무용수에 대한 상상을 토대로 시나리오를 썼고, 수공예적인 방식으로 무대, 소품, 의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금발의 가발을 쓴 무용수를 무대에 올려 숲속에서 헤매다가 헝겊인형과 춤추게 했다.
무용수를 실제로 만나고 싶었던 전소정은 2009년 그를 찾아 핀란드에 다시 가지만, 이미 그는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하지만 작가는 어떻게든 그를 알고 싶어 그를 기억하는 3명의 친구를 만난다. 흥미롭게도 무용수에 대한 이들의 경험과 기억은 상당히 엇갈렸다. 첫 번째 인물은 숲에서 무용수의 흔적을 보며 그를 기억했고, 두 번째 인물은 무용수의 출생, 이동, 경력 등 정확한 데이터로 그를 기억했고, 세 번째 인물은 엘리스를 기록한 영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 세 가지 내러티브와 자신의 내러티브를 더해 나온 것이 〈Three Ways to Elis〉이다.
엘리스와의 만남을 계기로 전소정은 삶과 예술이 결합된 사람들 혹은 예술가는 아니지만 어떤 경지에 이르려는 사람들을 모티프로 삼아, 역으로 예술과 예술가에 대해 자문하는 작업들을 본격적으로 기획한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일상의 전문가’ 연작이다. 이 시리즈는 지금껏 4번에 걸쳐 총 10편이 발표되었다. 이 작업은 인물의 실제 모습을 담은 영상,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극화된 텍스트, 비전문 성우가 읽는 내레이션, 그와 평행하게 볼 수 있는 문학으로 이루어진다.

05_the_twelve_rooms

〈열두 개의 방〉 single channel video, stereo sound, color, HD 7분35초 2014

〈열두 개의 방〉 single channel video, stereo sound, color, HD 7분35초 2014

일상의 전문가
가장 먼저 제작된 것은 〈The Old Man and the Sea〉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낚시하는 노인이다. 핀란드에 체류했던 전소정은 가끔 바닷가에서 낚시를 했지만 물고기를 거의 잡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 이 노인이 그에게 여러 조언을 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기다림’이었다. 짧은 순간 그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사실 기다림은 고기를 잡는 사람뿐만 아니라 예술가도 가져야 할 덕목이며, 나아가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덕목이다. 이때 그가 연결지은 문학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이다.
계속해서 전소정은 김치공장의 아주머니, 변검술사, 줄광대, 기계자수사, 간판장이 등을 만나면서 전통과 현대(개별성과 보편성), 내면과의 싸움, 이상과 현실, 자신만의 호흡, 상업과 순수(작품의 유한성과 초시간성) 등의 문제를 고민했고, 동시에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 괴테의 〈파우스트〉, 카프카의 〈최초의 고통〉,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프로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같이 보는 문학으로 각각 제시했다.
한편 당시 전소정은 예술가의 덕목을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예술하는 습관〉이라는 7채널 비디오를 제작한다. 그는 열정, 성실, 무모함, 우직함, 균형감 등을 염두에 두고 조각 불태우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손에 공을 놓고 움직이기, 성냥개비 쌓기, 물에 비친 달 떠내기, 불 링 통과하기, 평균대 위 걷기 등의 미션을 마련했다. 이것들을 몸소 실현하면서 그는 예술의 생명력과 한계, 주술성과 신기루, 죽음과 불멸, 인정과 부정, 어리석음 등을 느끼게 된다.(이중 2개는 대역)
지난해 말 전소정은 ‘일상의 전문가’ 연작의 일환으로 〈Treasure Island〉와 〈The Twelve Rooms〉를 선보였다. 하지만 과거와는 다른 측면이 나타난다. 명시적인 주인공(해녀, 조율사)과 암시적인 주인공(제주도, 12개의 음)이 함께 등장하며, 하나의 레퍼런스(문학)가 아닌 다수의 레퍼런스(문학, 설화, 인물 등)가 혼재되면서 보다 중층적인 구조를 갖는다. 게다가 이전엔 보통 사람이 가진 예술적 태도로 작가 자신을 되돌아봤다면, 이제는 그 예술적 태도를 재구성하여 예술가가 추구하는 이상을 조심스럽게 표현한다.
〈Treasure Island〉에서 작가는 해녀를 통해 여성, 노동, 기술의 전수 등을 언급했고, 설화에 얽힌 제주도를 신비의 섬으로 상상했으며,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이상의 섬(이어도)을 노래하는 해녀를 예술가에 비유했다. 관련 문학은 차학경의 〈딕테〉와 〈보물섬〉이다. 또 〈The Twelve Rooms〉에서 작가는 무대 뒤 조율사를 무대 중앙으로 옮겼고, 바하, 쇤베르크, 칸딘스키를 통해 12개의 음에 색깔을 입혔으며, 이상적인 음을 찾는 조율사를 궁극의 미를 찾는 예술가에 비유했다. 관련 문학은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이다.
완성된 작품을 가장 먼저 보는 사람은 대부분 작가 자신이다. 그 작품을 보고 작가가 감응을 받지 못하면, 관객이 그 작품을 보고 어떻게 감응을 받을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작품을 보고 작가가 감동하지 못하면, 관객이 그 작업을 보고 어떻게 감동할 수 있겠는가. 전소정은 예술적 태도를 가진 사람을 통해 자신을 바라봤다. 필자는 예술적 태도를 가진 사람을 통해 자신을 바라본 작가를 통해 나를 돌아본다. 만약 관객이 전소정의 작업을 보고 자신을 반성한다면, 그의 작업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이 예술이 존재하는 궁극의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

전 소 정 Jun Sojung
1982년 출생했다. 서울대 조소과와 연세대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미디어아트학과를 졸업했다. 2008년 갤러리 킹에서 첫 개인전 이후 6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한국, 프랑스, 독일, 영국 등에서 열린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2014년 12월 12일부터 1월 31일까지 열린 〈송은미술대상전〉에 참여하며 제 14회 송은미술대상 대상을 수상했다. 3월 4일부터 4월 4일까지 두산갤러리 서울에서 개인전이 열린다.

EXHIBITION FOCUS 환영과 환상

환영과 환상은 예술의 가장 본질적인 측면과 연결된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는 기획 전시로 <환영과 환상>(2.10~5.6)을 열어 사실적 재현에 기반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한 국내 작가 7명의 작품 30여 점을 선보였다. 필자는 환영과 환상은 시각적 요소에 제한되지 않으며 감각의 차원을 너머 비일상적인 경험과 맞닿아 있다고 말한다.

네가 보는 것이 네가 보는 것이 아니다

진휘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환영은 미술에서 끊임없이 논의되는 화두 중 하나이다. 입체, 덩어리와 공간의 현실을 평면에 옮겨 그릴 때부터 진짜가 가짜로 변화하는 환영의 전제는 미술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회화의 평면성을 인식하고, 눈속임을 벗어나려는 형식주의 모더니즘 논쟁을 통해 회화는 구상적 소재나 내용을 배격하면서 평면이라는 매체의 한계에 집중했다. 그러나 단순히 매체가 미술의 본질이 아니기에 그림이 눈속임이라는 주장은 시기적 한계와 시각적 도그마를 가질 뿐이었다. 재현이 모방이나 허구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미술의 실체를 오도하지 않듯이, 환영과 환상은 미술의 본질적인 성격 중 하나이다.
오히려 환영과 환상을 통해 즐거움을 추구하려는 작가와 관객들은 부정적인 강조를 제거하고 감각과 인식의 왜곡을 통한 경험의 확장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맥락에서 환영은 다양하고 복합적인 상황을 통해 제시될 수 있다. 시각화된 이미지뿐 아니라 감각과 인식의 변형, 왜곡을 가져올 수 있는 환경, 공간, 소재와 기술 등 환영의 기법이 확장될 때, 환상도 동전의 양면처럼 작동한다.
20세기 전반,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무의식의 존재와 그것의 작동에 대해 연구했고, 환상을 창출할 수 있는 다양한 이미지를 제작했다. 작가 여러 명이 몰려다니면서 놀이처럼 무의식의 존재를 실험했다. 특별한 의도 없이 무언가를 선택했을 때, 그 뒤에는 반드시 이성이 아닌 어떤 영역, 적어도 이성에 의해 조정 받지 않는 동인이 나로 하여금 그것을 선택하고 표현하게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들은 작품의 결과물이 무의식을 반영하고, 그것을 통해 나의 무의식이 더 발달하고 드러날 것을 기대했다. 당시 작가들은 이성과 다른 방식의 작동기제로서 무의식만 염두에 둔 듯하다. 다시 말하면 무의식을 이성과는 완전히 배타적 관계인 것으로 보았다. 과연 그럴까?
그들이 발견한 무의식을 자극하는 이미지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다양한 환상을 체험할 수 있게 했다. 이미지는 익숙한 것들과 이질적인 상황, 또는 보편적인 대상들이 빚어내는 이상한 조합들로 수렴되었다. 프로이트는 ‘언캐니’의 개념을 이론화하면서 보편적이고 일상적이어서 충격을 주지 않는 이미지가 비일상적인 요소나 맥락을 만나서 우리에게 특별한 경험을 제공한다고 했다.
‘이상한데 익숙하고, 맥락에 맞지 않는데 친밀한’ 무엇이 우리 인식의 불일치를 가져오고 매력과 거부의 상반된 모순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심리분석 이론을 떠나 이미지와 인식 간에는 떨어지지 않는 복잡성이 존재하고, 이성과 다른 방식의 전제를 갖는 것이 있다. 기이함은 시각예술에서 오랫동안 시도된 요소라 할 수 있다.
특히 이성적 인식과 왜곡된 감각을 자극하는 환영은 실체와 수용 간에 혼돈을 주어 그 간극을 탐구함으로써 즐거움, 또는 묘한 느낌을 갖게 한다. 환영이 감각적 트릭이라면, 환상은 주체의 주도적 실체 밖의 무엇에 대한 꿈, 생각, 조작, 놀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와 다른 환상을 통해 우리는 이성, 감각, 인식, 감정, 무의식의 많은 것을 이용하고 포괄한다.
환상幻想의 상상력을 상象으로 치환하고, 이것의 이미지들을 기획한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환영과 환상>이다. 이 전시는 7명의 중견작가와 그들의 대표적 스타일의 작품들로 구성됐다. 작가의 선택과 작품의 내용이 전시 의도를 매우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광호 (왼쪽) 캔버스에 유채 259.1×181.8cm 2008

이광호 <선인장(No.30)>(왼쪽) 캔버스에 유채 259.1×181.8cm 2008

유현미 , 잉크젯 프린트 195×130cm(5점), 195×650cm(1점) 2013

유현미 <작업실 안의 우주>, 잉크젯 프린트 195×130cm(5점), 195×650cm(1점) 2013

환영과 환상, 시각의 영역을 넘어
이광호는 큰 캔버스 위에 선인장들을 그렸다. 지나치게 섬세하고 사실적인 식물의 모습은 부분적으로 기괴하게 느껴지는데, 예를 들어 선인장의 일부가 고름이나 사람의 피부, 또는 잘 알지 못하는 어떤 생물이나 특수한 지형같이 보인다.
천성명은 <그림자를 삼키다>에서 아들을 안고 있는 아버지처럼 보이는 두 인물상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이는 부자관계가 아닌 자라지 못한 나, 미니-미mini-me와 자신의 모습을 담은 조각이다. 다른 공간엔 피를 흘리며 물고기를 든 사람의 조각과 나무 패널 위에 얼음산과 바위를 그린 큰 그림이 배치되었다. 각각은 서로 이질적이고 상호 논리성을 갖지 않으며 조각과 가운데 놓인 그림의 역할도 모호하다. 상황은 입체적인 환경과 엮임 안에서 더욱 의아하고 기괴해 보일 뿐이다.
최수앙은 이질적인 부분들이 섞여서 인체에 버금가는 형상을 갖는 조각상을 제작했는데, 캐스팅하고 버린 껍질 부분들을 진열하거나 가판대 위에 인체의 일부분을 배열, 마치 고기 덩어리를 판매하는 광경처럼 보인다. 진짜와 가짜, 전체와 부분, 안과 밖 등 단순한 인식의 전제를 전복한다.
강형구는 반 고흐, 마일스 데이비스, 자화상 등 익숙한 인물들을 큰 화면에 그렸는데, 자세한 디테일 표현이 강렬하다. 강렬한 색채와 회화적 세부 묘사가 팝아트와 극사실주의 어디에도 정확히 속하지 않는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고명근은 이국적 건물을 디지털필름으로 구성해서 콜라주 작품을 만들었다. 실제 공간과 건물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표현되지만, 작은 모형처럼 변한 공간은 다시 유사 공간화하고, 현실의 장소성은 미술품 안에 박제된 것으로 전환된다.
유현미 작품은 자신의 스튜디오, 인물을 포함한 공간의 여러 모습을 사진 찍은 것이다. 그 사진은 실제 공간과 모델에 물감과 붓으로 채색하여 회화의 터치, 색채가 더해진 상태이다. 실제 대상과 회화적 과정, 재료, 기법의 개입을 드러내고, 그것을 다시 사진 찍음으로써 작가는 재현과 표현의 오랜 관계를 구체적으로 가시화한다. 회화 같은 사진, 가짜 같은 진짜, 그 사이에서 관객은 모호한 감각의 층위를 경험하게 된다. 특히 그 과정을 실제 사람들이 등장하는 뉴미디어 동영상으로 보여준 작품은 많은 관객을 불러 모았다.
강영민은 현대사회의 물질 숭배와 강박증을 컴퓨터 픽셀을 키우고 깨뜨려 조작했다. ‘가위눌림-자본주의적 건설과 파괴의 딜레마’란 매우 친절한 제목처럼 신경증적 상황과 조건이 설치물의 거대함과 복잡함, 사실적 표현과 낯선 모습으로 결합되었다.
이번 전시는 안정된 스타일과 개성 있는 표현을 구사하는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을 만나는 즐거움을 준다. 이들 작품은 환영과 환상을 불러올 수 있는 일종의 ‘언캐니’함을 갖고 있다. 익숙함 안에 이상하게 낯선 요소가 있고 전체와 부분의 관계가 왜곡되거나 비틀려있다. 그런데 작품들은 주로 재현의 방식에 집중했고, 작품은 ‘보기’에 한정되었다. 환영을 재현의 방식에만 귀결시킨 것은 환상을 불러오는 다양하고 다층적 작동보다는 시각적인 매체로서의 미술만 상정한 까닭이다. 전시된 작가들의 작품 전시 방식이나 서로의 관계도 단선적으로 느껴져서 통합보다는 분리된 모습이었다.
오감을 자극하는 다양한 방식, 그리고 현대 작품의 복잡한 상황, 매체의 확대와 맥락의 다변화 등이 더해진 작품들의 환영 창출 방식을 떠올릴 때, 이번 전시는 매우 전통적이었다. 재현이 단순히 시각적 요소로 제한된다면 환영이나 환상은 그저 표현의 문제에 귀착될 것이다. 그러나 환영과 환상은 단순한 감각의 영역만도, 인식이나 이성의 문제만도 아닌 설명하기 어려운 교환과 교체 간에 이루어지는 비일상적 경험의 추구에 더 가까워보인다. 이때 이것을 제시하는 방식의 동시대성, 경험되지 못한 새로운 제시가 요구되지 않을까 한다. ●

강형구  캔버스에 유채 193×386cm 2006 영은미술관 소장

강형구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93×386cm 2006 영은미술관 소장

 

EXHIBITION TOPIC 숭고의 마조히즘

과거 미술관에서 관객들이 제한된 동선 안에서 작품을 만지는 것도 금지되었다면 오늘날에는 관객참여형 작품이 급속도로 증가했다. 하지만 관객과 작품 사이에는 항상 긴장관계가 팽배하다. 서울대학교 미술관에서 열린 <숭고의 마조히즘전>(2.4~4.19)은 관객과 작가, 작품과 관객이 맺는 새로운 관계를 ‘숭고’와 ‘마조히즘’이라는 개념을 통해 재조명한다.

예술의 권력관계를 의식하라

이필 홍익대 미술대학원 교수

<숭고의 마조히즘전>은 관객과 남다른 소통을 꾀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모아 작가와 관객의 권력관계에 문제를 제기한다. 숭고가 쾌와 불쾌의 감정을 동시에 주는 미학적 개념이라는 점에 착안해 관객의 참여를 끌어내고자 하는 작가의 작품과 관객의 긴장관계를 ‘불편한’ 관객의 입장에서 조명한다. 전시 기획자가 관객이 작품을 대할 때 어떤 생각과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전시공간에서 작품과 관객 중 누구에게 더 큰 힘이 있다고 생각 하십니까” 하고 묻는다. 전시 기획자는 뉴미디어 시대의 작품이 관객의 참여를 적극 유도하지만 그것이 곧 관객이 권력을 이양받았다는 사실이 아님을 환기시킨다. 이는 마조히즘적 성행위에서 여성이 남성을 가학하는 권력을 부여받았으나 그 권력은 가학을 즐기는 남성에 의해 주어졌기에 진정 여성의 것이 아니라는 점과 비유된다. ‘숭고의 마조히즘’이라는 제목은 숭고의 경험에서 인간이 느끼는 고통과 쾌의 감정의 공존을 마조히즘의 처벌과 쾌락이라는 이중적 관계에 대입한 것이다.
이 전시는 숭고를 느끼는 주체를 관객이 아니라 작가로 상정했다. 전시서문에서 밝혔듯이 기획자들은 숭고라는 개념을 작가 안에서 일어나는 쾌와 불쾌의 감정의 이중성으로 보았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관객이 개입하는 것에 불쾌의 감정을 느끼지만 동시에 관객이 계획대로 움직일 때 불쾌의 감정은 쾌로 돌아선다는 것이다. 이는 숭고를 작가와 관람자의 권력관계로 이해한 개념적 혼란에서 빚어진 오류로 보인다. 기획자들은 작가와 관객, 남성과 여성,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를 비정상적인 마조히즘적 성관계에 비유하고 권력을 가진 자가 느끼는 지배의 쾌락을 숭고의 감정에 비유한 것이다. 숭고는 관찰자가 대상을 보고 느끼는 체험적 감정이다. 그렇다면 전시에서 숭고는 대상을 마주하는 주체, 즉 관람자가 작품을 보고 느끼는 두려움, 좌절, 감동, 불쾌와 쾌가 뒤섞인 복합적인 감정이어야 마땅하다.
숭고는 본래 롱기누스의 미학과 문학비평에 대한 글인 <숭고에 대하여>에서 뛰어난 수사학을 구사해 위대한 사고와 강렬한 감정 등을 표현한 작품을 칭송하는 개념이었지만 그 정의는 변해왔다. 18세기 유럽에서 숭고는 장대한 자연에서 인간이 느끼는 공포와 좌절의 감정으로 묘사됐다. 버크는 숭고의 심리적 효과로 공포와 끌림이라는 감정의 이중성을 지적하며 이러한 혼란스러운 감정의 격앙 끝에 고통의 감정이 제거될 때 인간은 쾌를 느낀다고 했다. 칸트에게 숭고는 절대적으로 위대한 것으로, 대상의 형태와 결부된 감정인 미와는 달리 웅장, 장려, 두려움을 주는 무한대적 무정형의 형태에서 이성이 개입해 느끼는 공포의 감정으로 초감각적인 것이다. 쇼펜하우어에게 숭고는 관찰자를 위협하는 대상으로부터 느끼는 쾌로, 격동하는 자연이 그 예이다. 리오타르는 인간의 마음이 이성적으로 정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대상의 존재가 있다는 점, 그 대상을 마주했을 때 인간이 경험하는 위기감, 감정과 이성, 마음과 개념의 ‘갈등the differend’을 모던기의 근간이 되는 변화라고 보고 이를 숭고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숭고는 18세기의 장엄한 자연을 대상으로 한 인간의 경험을 묘사하는 데서 시작해 모던시기의 웅대한, 산업적이고 도시적 대상으로, 동시대에는 상상을 초월한 새로운 기술을 대상으로 논의되고 있다. 마리오 코스타는 뉴미디어아트의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네트워크는 그 소통방식에서 주체를 약화시키고 예술과 그 각 경계가 무너지는 가늠하기 어려운 ‘유동flux’의 상태를 심화시키는데, 이를 ‘테크놀로지의 숭고the technological sublime’라는 개념으로 정의했다.

구동희  혼합재료 2015

구동희 <무제> 혼합재료 2015

박준범  8채널 HD비디오, 2싱글 채널 HD 비디오 5분 2015

박준범 <7개의 언어> 8채널 HD비디오, 2싱글 채널 HD 비디오 5분 2015

작품과 관객, 작가와 관객의 역학관계
<숭고의 마조히즘전>을 찾는 관객은 작품을 통해 경험하게 될 숭고의 감정을 기대하며 설렌다. 그러나 전시장에서 관객은 전통적 의미의 숭고의 경험도, 예견치 못한 숭고에 대한 동시대적인 새로운 개념적 접근도 쉽지 않다. 관객은 전시된 작품을 통해 숭고와 관계된 장대함, 거대함, 무한함, 공포, 위협감 혹은 유사 숭고 등을 만나지 못하고 전시 개념의 난해함 속에 남겨진다. 이는 ‘숭고’를 느끼는 기본 구도인, 대상 (이 전시에서는 작품)과 관찰자의 조우에서 관찰자가 느끼는 복잡한 감정의 발생이라는 틀을 기획자들이 작가와 관객의 권력관계로 치환한 의도를 명확히 설명하지 않은데서 기인한다. 예술작품의 의미 생성에 작품과 관객, 작가와 관객의 역학관계를 다루는 전시라면 숭고라는 개념이 반드시 필요한지 의문이다.
전시 기획자가 던진 명백한 주제는 관객 참여적인 작업에서 작품과 관객의 권력관계이다. 예술에 있어 작품과 관객의 권력관계의 전회는 롤랑 바르트가 <저자의 죽음> <작품에서 텍스트에로>에서, 미셸 푸코가 <저자란 무엇인가>에서 피력했고, 후기 구조주의자들과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논의해왔다. 그들의 논의에서 작품의 의미를 통치하는 존재인 저자의 권력이 약화되고 작품이 미처 의도하지 않은 의미마저 자유롭게 생성하는 전제조건은 독자 혹은 관람자의 권력 획득이다. 미술사적 맥락에서 관객 참여적인 미술은 다다, 초현실주의, 러시아 아방가르드 등 20세기 미술운동의 주된 관심사였다. 작품을 대하는 관객의 신체와 심리, 긴장 등 관객 참여가 구체적으로 논의된 것은 미국의 미니멀리즘에서다. 이 전시가 관객과 작가/작품 간의 긴장, 혹은 그러한 권력관계의 이양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비판이라면 이러한 미술사적 미술이론적 맥락을 놓친 점이 아쉽다.
작가와 관객의 권력관계에서 드러나는 마조히즘을 다루고자 한 기획자의 입장에서 작품 선정을 이해하자면 고창선, 구동희, 박준범의 작품은 사전에 설정된 작가의 의도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된 관객에 임상빈과 오용석은 조작된 일루전을 제시하는 숨은 권력을 행사하는 작가라는 개념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손몽주와 정재연의 작업에서 관객은 억압적인 권력관계나 가학, 긴장을 느끼기 어렵다. 고무 밴드로 구축한 손몽주의 역동적인 공간을 체험하는 관객과 정재연이 제공한 하얀 벽에 즐거이 흔적을 남기는 관객들의 쾌마저 마조히즘적 관계에 대입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 전시는 저자(작가)의 죽음을 부인하고 독자(관람자)의 탄생을 논하는 관객 참여적인 미술에서 관객에게 권력이 이양됐다는 사실이 허구임을 드러내고 여전히 권력을 행사하는 작가의 힘을 드러내려 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점에서 동시대미술의 대세적인 관점을 부정하고 여전히 바뀌지 않은 관객과 작품의 권력관계를 재조명하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작품을 통해 숭고와 마조히즘이라는 개념 및 상호 연관성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에는 미흡해 보인다. ●

정재연  스틸 파이프, 밧줄, 공 2014

정재연 <라는 제목의(Entitled)> 스틸 파이프, 밧줄, 공 2014

WORLD REPORT 제2회 CAFAM 미래전 : 관찰자 창조자 ·중국청년예술의 현실 표징

을미년 새해 목표를 세우는 첫 달, 베이징은 수년 뒤의 목표를 세우고 이를 향해 달리는 젊은 작가들의 패기로 가득하다.
지금, 여기 젊은 작가들은 구정(춘절) 연휴 가족들에게 풀어놓을 이야기보따리에 담을 소중한 인연 챙기기에 여념이 없어 보인다. 대학 미술관은 대륙의 호방함으로 학연으로부터 자유로운 전시를 개최하고 덕분에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참여 작가와 미술 관계자들로 베이징 미술계는 연일 잔칫집 분위기이다. 이는 바로 중앙미술학원 미술관 CAFAM(China Cental Academy of Fine Arts Museum)이 3년 만에 선보인 <CAFAM 미래전>이 선사한 새해 선물이리라. 대륙의 미술계계 점치는 미래상은 어떤지 미술관으로 향해 보자.

관찰하고 창조하는 중국 젊은 예술가의 오늘

권은영 중앙미술학원 미술사 박사과정

우리의 오늘은 지난날 청춘을 불태운 선배들이 일군 미래이며, 오늘의 젊은이들은 우리의 미래를 짊어지고 갈 것이다. <CAFAM 미래전>은 중국의 미래를 책임질 젊은 작가들을 후원하고 지지한다는 뚜렷한 목적을 표방한 정기 기획전이다. 2012년 대학 미술관임에도 졸업장과 무관한 <CAFAM 미래전: 서브-현상亞现象: 중국 청년예술 생태 보고>로 테이프를 끊으면서 본 프로젝트는 시작되었다. 중앙미술학원 미술관이 대학 교정에 있는 미술관이지만 전국구 전시를 개최할 수 있는 것은 2008년 아라타 이소자키矶崎新 디자인 신관을 개관하고, 2009년 난징예술학원을 졸업한 광둥 출신의 왕황성王璜生 교수가 관장에 취임하는 파격 인사, 그리고 2010년 ‘국가 중점미술관’에 선정되면서 국공립 미술관의 면모를 갖춘 덕분이다.
작가 쉬빙徐冰과 파리 소재 팔레 드 도쿄Palais de Tokyo 관장 장 드 루아지 Jean de Loisy가 공동 총감독을 맡은 이번 전시는 동시대 젊은 작가들을 ‘창객創客, Observer-Creator’로 정의하고 그들의 오늘을 분석했다. 여기서 ‘創客’은 금세기에 이르러 출현한 신조어로 ‘Maker’로 번역하는 서구의 DIY 문화에서 비롯됐다. 본래 ‘客’는 ‘-쟁이’를 의미하는 접미사로 ‘創客’는 ‘창작쟁이’로 이해할 수 있는데, 영문 제목을 통해 “관찰하고 창작하는 사람”으로 보충 설명하고 있다. 쉬빙은 전시 서문에서 오늘날 젊은 작가 작업 방식에서 “관찰하고 창작”하는 예술 창객의 특징이 발견된다며, 동시대예술의 양식화와 제도화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이러한 경향은 1회 <CAFAM 미래전>에서도 강조된 바 있는데, 당시 주제인 ‘서브-현상’ 역시 주류보다는 비주류의 가치를 높이 사고 있다.
<CAFAM 미래전>의 특징 중 하나는 넓은 범위의 여러 단체와 맺은 긴밀한 협력 관계다. 이번 전시는 대륙, 대만, 홍콩을 포함한 중국 전역의 64개 기관에서 추천한 작가들을 바탕으로 중앙미술학원 미술관 기획자 2명과 외부 독립 기획자 2명이 팀을 이루어 기획했다.
《예술시대艺术时代》, 《미술문헌美术文献》 등 잡지사, 금일미술관今日美术馆, 선전 OCT 당대 예술센터深圳OCT当代艺术中心, 광저우시대미술관廣州时代美术馆, 난징예술학원 미술관南京艺术学院美术馆, 타이베이 당대 예술센터台北当代艺术中心 등 미술관, 리셴팅 영화기금栗宪庭电影基金, 비타민 예술공간维他命艺术空间, AAAAsia Art Archive, 청년예술100青年艺术100 등 비영리 기구를 비롯해 젊은 작가를 후원해 온 중앙미술학원 ‘천리길千里之行’, 중국미술학원 ‘TOP 15’와 같은 프로젝트도 하나의 기관으로 작가 추천권을 행사했다.
이를 통해 선정된 232개 조의 작가가 도록을 통해 문헌전 형식으로 예선을 치르고, 95개 조가 최종 선정되어 대망의 본선, 즉 실제 전시에 참여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전시는 총 5개의 소주제로 나뉘어 4개의 본전시는 중앙미술학원 미술관에서, 하나의 특별전은 798예술공장에서 동시에 개막했다. 83개 조가 참여한 본전시의 첫 번째 소주제는 ‘공동 지식共智場’으로 지식 공유의 시대를 사는 지금의 젊은이들이 인터넷, SNS, APP 등을 통해 자신의 인식과 행동 나아가 예술과 주체에 대한 인식에 끼치는 변화에 주목한다. 미술관을 들어서자마자 마주하게 되는 허샹위何翔宇(랴오닝성, UCCA 추천)의 <탱크 프로젝트> 역시 시각을 통한 간접 경험이 주는 충격과 내면의 갈등을 시각화하고 있다. 샤오반뤄肖般若(후베이성, 우한미술관 추천)는 전시 기간 동안 화초를 관객들에게 나누어주고, 각자의 방식으로 키우는 화초 사진을 수합하여 작품의 일부로 삼는 보다 적극적인 공유를 실험하고 있다.
객관적인 코드를 생성하거나 소프트웨어를 설명하는 ‘원시 코드源代碼’는 작업을 하는 사람에게 사회를 이해하고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는 과정과 닮아 있다. 두 번째 소주제는 바로 사회를 관찰하고 해체해서 작품으로 재탄생시키는 오늘의 젊은 작가들이다. 3층 전시장에 울려 퍼지는 빠른 비트의 힙합 선율을 따라가면 한껏 힘을 준 영상설치 작품을 마주하게 된다. 그 주인공 천톈줘陳天灼(베이징, K11예술재단・상하이비엔날레・격월지 《예술계》 등 추천)는 종교적 기호를 해체해 일상 생활용품과 주변 이미지에 삽입하고 재조합하여 가상의 종교적 경험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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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룽룽(毕蓉蓉) LED 스테인리스 스틸 유리 가변크기 2013 © 사진 권은영

양민스(楊牧石)  나무 먹 알루미늄 가변크기 2014 © 중앙미술학원 미술관 사진 권은영

양민스(楊牧石) <소모> 나무 먹 알루미늄 가변크기 2014 © 중앙미술학원 미술관 사진 권은영

중국 젊은 작가에 대한 새로운 기대
분홍빛 네온 등을 원시 코드로 사용하는 왕신王欣(후베이성, 상하이 다룬多伦 현대미술관・지하실6 추천)의 <여기서 우리는 미래의 작가를 창조한다>는 꽉 막힌 틀 안에 가두어 작가를 찍어내듯이 교육시키는 현실의 한 단면을 재치 있게 풍자하고 있다.
세 번째 소주제 ‘클라우드 생산云生产’은 인터넷 시대를 살아가며 연동 기능이 장착된 생활 기기에 익숙한 청년 작가들의 모습에서 도출했다. 이는 “클라우드 컴퓨팅”에서 출발한 개념으로 서로 다른 물리적 위치에 존재하는 컴퓨터들을 인터넷으로 연결하여 통합 처리하는 기술을 바탕으로 한다. 클라우드 생산의 분절과 통합의 논리는 천페이링陳佩玲(마카오, C&G Apartment 추천)의 담청색 나뭇잎 상자들 곁에 놓인 남청색 별자리표를 통해 미루어 짐작해봄직하다. 대상을 픽셀로 분절시켜 작은 색점의 통합으로 다시 형상화하는 타오나陶娜(후난성, 청년예술100・중국 청년예술가 프로젝트 추천)의 작업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인터넷이 교류와 소통의 매개체일 뿐만 아니라, 사고의 틀을 깨는 전환점 구실을 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본전시의 마지막 주제는 “E 순환循环”으로 요약되었다. 쉬저위許哲瑜(대만, 타이베이 당대예술센터 추천)의 영상작품은 기억과 망각,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서 매체가 가진 전달력에 집중하고 있다. 린저우林周(광둥성, 53미술관 추천)는 과학 기술과 인간과 자연의 모습을 극적으로 대비시키며 어느덧 기술 발전의 속도를 따라가기 버거운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CAFAM 미래전>은 미술관에서 진행하는 본전시와 더불어 798예술공장에서 같은 기간 동안 <미래 방정식: 제2회 CAFAM 미래전 추적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특별전에 참여한 작가들은 1회에 참여한 작가들 중에 2회에 재차 추천받은 12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한국에서도 전시를 연 바 있는 차이위안허蔡遠河(광둥성, 53미술관 추천)를 비롯하여 겅쉐耿雪(지린성, 중앙미술학원 천리길 추천), 리칭李青(저장성, 벌집 당대예술센터 추천)의 작품이 포진해 있다. 총감독을 맡은 쉬빙은 기존에 참여했던 작가들을 특별전을 통해 다시 참여케 하여 그들의 성장을 관객과 함께 목도하고, 전후 전시의 연결고리를 견고히 하는 데 의의가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중국 작품가격의 거품 논란이 지나간 자리에 언젠가부터 젊은 작가들에 대한 관심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있다. 베이징을 비롯한 대륙의 중소도시에서 젊은 작가들의 전시를 심심치 않게 접하는 요즘이다. 이러한 시점에 상하이와 홍콩 순회전도 기획하고 있는 <CAFAM 미래전>은 순풍에 돛을 단 듯 중국 젊은 작가 항해의 든든한 지원군처럼 보인다.
대륙의 호방함은 학연과 지연의 굴레를 벗어나, 대만, 홍콩, 마카오에 이르는 거대한 중국을 아우르며 미래를 설계하는 추진력이 되고 있다. 물론 냉혹한 사회에서 일정 선별과정을 거치고 십수 년 뒤 과연 몇 명의 작가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분명 오늘을 버티는 젊은 작가들에게 큰 힘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샤오반루오(肖般若) 종합재료 가변크기 2013~2014 © 중앙미술학원 미술관 사진 권은영

샤오반루오(肖般若) <식물 키우기 프로젝트> 종합재료 가변크기 2013~2014 © 중앙미술학원 미술관 사진 권은영

 

리우지아위(劉佳玉)  300개 바람개비 및 LED 가변크기 2014 © 중앙미술학원 미술관 사진 권은영

리우지아위(劉佳玉) <투명한 안에서> 300개 바람개비 및 LED 가변크기 2014 © 중앙미술학원 미술관 사진 권은영

NEW FACE 2015 유은석

“유은석의 작업은, 작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소소한 상상력에서 출발해 차츰 현실로 다가가 보이지 않던 문제들을 조금씩 들춘다. 때문에 무겁지도 그리 가볍지도 않은 그의 (비)현실적인 상상은 어찌 보면 현실의 이면을 꼭 닮아있는 듯하다.”
– 안소연 미술비평

유쾌함 이면의 냉소

지난해 5월 말, 부산시내 모 백화점 외벽에 설치된 한 작품이 문제가 되었다. 유명 만화캐릭터인 스파이더맨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데, 다소 민망한 생리적 현상이 도드라진 작업이었다. 이른바 ‘발기 스파이더맨’ 사건으로 명명된 이 사태는 끝내 작품이 철거되는 것으로 마무리됐지만, 일반인이 오고가는 장소에 설치되기에는 부적절했다는 의견과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을 코믹한 소스를 첨가해 표현했다는 의견이 맞서고 외설시비도 일었다.
이 작품은 부산 출신 작가 유은석의 손에서 탄생했다. 최근에 자신에게 큰 영향을 준 일로 주저없이 이 사건을 언급한 유 작가는 최근 다녀온 라오스 여행과 함께 작업활동의 일대 전환기를 가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발표된 유 작가의 작업을 살펴보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물 이면의 의미를 살펴보는 <건축된 농담>, 영웅캐릭터를 곤충의 형상과 이종교배한 <곤충영웅기>, 그리고 영웅캐릭터의 반전된 행동을 담은 <사적인 시간> 등으로 나뉜다. 대부분 일상성에 근거해 다소 희화화한 요소가 눈에 띄는 작업이다. 유 작가는 일상에서 흔히 벌어지는 유머러스한 상황을 항상 작업과 연관지어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작업이 항상 유머러스한 상황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두바이의 ‘부르즈 알 아랍’ 호텔에 보수적인 성향의 이슬람교를 상징하는 터번을 씌워 막대한 오일머니를 앞세워 화려하게 건설한 두바이와 보수적인 종교성향의 모순을 표현했습니다.”
유 작가의 작업은 작품에 등장하는 대상의 면밀한 연구로부터 시작한다. <건축된 농담>의 경우 해당 건축물에 대한 역사, 상징성, 뒷이야기 등을 수집했다. “뭔가 재미있는 이미지가 나오면 사전 조사한 정보에 이리저리 끼워 맞춰서 의미를 부여해봅니다. 그러다보면 신기하게도 퍼즐처럼 잘 맞춰집니다. 간혹 제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해석을 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이에 반해 <곤충영웅기>는 사회적 비판의식을 기저에 깔고 시작했는데, 거미줄은 우리 법구조를 상징한다고. “<곤충영웅기>는 음주 사고를 일으킨 사회지도층 자녀가 부친의 인맥과 재력으로 풀려났다는 뉴스를 보고 나서 시작했어요. 힘없는 곤충들은 거미줄에 걸리면 빠져나올 수 없지만 상대적으로 몸집이 큰 동물들은 거미줄을 찢고 지나가버립니다. 곤충은 서민, 동물은 사회지배층에 비유했어요.”
그 자신도 애니메이션 관련 일을 하는 것이 바람이었다고 밝힌 유 작가는 만화의 영웅캐릭터를 소재로 작업한다. 유 작가의 작업에는 우스꽝스러운 영웅이 등장한다. 우락부락 헐크는 스마일맨 트렁크를 입고 쥐를 무서워하고, ‘쫄쫄이’를 입은 스파이더맨은 발기된 상태로 거꾸로 매달려 있다. 웃고 있는 원더우먼은 치아교정 장치를 달고 있다. 단 하나의 장치를 이용해서 관객의 허를 찌르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관객을 겨누는 이 뾰족한 반전은 과연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거죠. 바로 <사적인 시간>은 방안에서 스스로 완전히 무장해제한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방귀를 손에다 뀌고 냄새를 맡는다든지, 코딱지를 먹어본다든지, 웃긴 춤을 춰본다든지…. 뭐 그런 모습들을 영웅들에게 적용한 겁니다, 영웅의 일반인 같은 모습들이 더 코믹하게 느껴지는 거죠. 아! 그렇다고 제가 그러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하하.”
유은석의 작업에 대한 비평문 하나에 눈길이 간다. “그의 쓴웃음에는 세습에 의해 강력한 권력을 획득한 자에 대한 냉소와 인간적인 연민이 동시에 응축되어 있다.”(안소연) 따라서 그의 작품을 대할 때는 그가 은닉한 이면의 ‘무엇’을 찾아야 할 것이다. 올 하반기에 있을 개인전과 얼마 전 다녀온 라오스 기행전을 준비 중이라는 유 작가. 현재 ‘내 청춘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화두로 삼고 있다는 그는 “이 시기에 할 수 있는 모든 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황석권 수석기자

유은석은 1986년 태어났다. 부산대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조소를 전공했다. 2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2009년부터 다수의 기획전과 그룹전에 출품했다. 부산비엔날레 바다미술제 특선(2011), 부산미술대전 특선(2013), 제5회 맥화랑 미술상(2014) 등을 수상했다.

위  포맥스 레진 자동차도색 90×60×20cm 2013

위 <태권의사당> 포맥스 레진 자동차도색 90×60×20cm 2013

 

NEW FACE 2015 유한숙

“유한숙 작가는 이를 진지하지만 심각하지 않게, 유머러스한 텍스트와 이미지를 병치한 작품으로 승화시키며 “나만 좌절하고 불안한 건 아니잖아요?”라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동의를 구하고 있다.”
– 김윤영 큐레이터

내겐 너무 뒤늦은 그 말

한 여성의 뒷모습이 보인다. 뒷모습의 그녀와 너무나 닮은 한 여인이 마주보고 서서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그리고 그들 위에 한마디 글귀가 떠오른다. “그래 넌 성공하겠다.” 또 다른 여인이 있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에서는 눈물이 도로로 흐르는 순정만화의 여주인공 같은 모습이다. 그녀의 머리 위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한마디의 말이 적혀 있다. “아마 난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말 거야.”
작가 유한숙의 작품은 허를 찌르는 사회 풍자적 한마디와 만화적인 인물 표현, 그리고 어린 시절 학교에서 한번쯤 그려봤을 ‘포스터’형식을 차용해 어수룩한 매력을 뽐낸다. 누군가에게는 공감 가는 한마디로 작용하고, 또 다른 이에게는 일상 속 흘러가는 뻔한 이야기로 보일 수 있다. 그녀의 그림에 등장하는 텍스트의 의미는 세대의 공감을 자아내는 힘을 갖는다. 텍스트에 얽힌 스토리와 무관하게 말은 무겁지 않게 다가온다. 누구나 일상에서 쉽게 내뱉는 어구와 포스터 형식 덕분일 것이다. 작가가 처음부터 포스터를 차용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려던 것은 아니다. 유한숙은 작업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고민했다. 오히려 하지 말아야 한다고 쉬쉬하는 것을 해보고 싶은 청개구리 심보가 발동한 셈이다. “만화의 형식을 취하지 말라”는 한 교수님의 조언은 지극히 만화요소가 다분한 인물 표현과 그의 눈에 욕설을 적은 ‘개년미술’작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인물의 눈동자 안에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담기에는 자리가 부족했다. 보다 긴 텍스트 표현이 가능한 포스터 형식을 택한 이유다.
유한숙은 말수가 적다. 목소리도 작고 유난히 차분하다. 그렇다보니 누군가를 만났을 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채 다 풀어내지 못하고 뒤돌아서서 상황을 되새기며 전했어야 하는 말, 하고 싶었던 말을 떠올리며 아쉬워했다. 뒤늦게 떠오른 적절한 표현이 그의 작업에 등장한다. 지인들과의 대화, 인터넷상의 끊없는 대화와 발언 등 일상 속 매 순간 쏟아지는 말들이 그에게는 윌리엄 텔의 화살처럼 대뇌에 꽂혀 잊히지 않는다.
사실 그녀가 적은 가볍지만 풍자적인 문장은 SNS를 뜨겁게 달구며 최근 책으로도 출간된 하상욱의 《서울 시》나 최대호의 《읽어보시집》을 떠올리게 한다. 트위터라는 공간에 두어 줄의 짧은 시를 써 많은 이에게 공감과 웃음을 주는 이들 시의 형식은 문학적 수사가 아름답거나 표현력이 뛰어난 일반적인 시와는 미감이 다르다. 생활 속 툭툭 내뱉는 말을 짧게 압축해 적어 둔 “일상의 말”을 하나의 주제로 묶는 식이다. 이 키치한 방식의 글은 유한숙의 어수룩한 포스터와 묘하게 일치하는 점이 있다. SNS상에서는 무겁고 긴 글 보다는 싫지만 단순하면서도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무릎을 탁 치며 공감할 만한 내용이 환영 받는다. 포스터는 최고의 프로파간다 수단이다. 이미지와 텍스트가 하나의 캔버스에 압축돼 메시지를 전달한다. 한눈에 내용을 알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한번 보면 쉽게 잊히지 않는 “강렬한 한 방”이 필요하다. 유한숙의 작업은 단순히 그 세대가 공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유사한 문화를 공유하는 많은 이에게 공감을 사는 요소가 있어 주목받고 응원을 받고 있는 듯하다.
전시장에 걸린 그녀의 작업은 생각 많은 작가의 복잡한 머릿속을 살펴본다는 관음증적 자극을 준다. 하지만 일방적 선언이라기보다 대화를 시도한다. 심각한 내용을 가볍게 표현한 방식은 전시장에서는 실소를 자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돌아서서 한참이 지나도 이미지와 텍스트가 머릿속에 맴돈다. 관객과의 간접적인 대화를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하지 말아야 할 것”에서 공감을 찾아낸 작가는 최근 고민이 깊어졌다. 주변에서 만류하던 형식을 취해 하던 작업을 오래하다보니 작업의 형식이 반복되기 시작한 것이다. 과연 또 다른 금기를 찾아낸 작업으로 공감을 자아낼 수 있을까. 말을 곱씹는 작가의 머리에는 오늘도 수많은 말과 고민이 스치운다.
임승현 기자

유한숙은 1982년 태어났다. 서울과학기술대 조형예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2012년 조선화랑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총 3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2월 27일부터 6월 5일까지 하이트컬렉션에서 열리는 〈두렵지만 황홀한전〉에 참여한다.

〈시집이나 갈까〉 캔버스에 아크릴 60×60cm 2012

〈시집이나 갈까〉 캔버스에 아크릴 60×60cm 2012

 

NEW FACE 2015 이은새

“이은새는 프레임(인식의 창) 밖에서 일어나는 현실적 풍경을 대하고 자신만의 감각적 레이어로 그 현상들을 쪼개어 파장이 증폭되는 순간들을 포착해낸다. 일상에서 다양한 층위로 몸을 이동하듯 일렁이는 현상을 목격한다. 다른 회화 작가들의 장면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긴 하지만, 그런 상황을 만들어내는 풍경은 쉽게 번역될 수 없고 예측할 수도 없는 연속성을 띤다.”
– 이관훈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큐레이터

불안정한 순간의 기록

작가 이은새의 회화는 뚜렷한 내러티브가 있는 것도 아니고 분명한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유난히 정체를 알 수 없는 형태, 균열을 일으키며 터져 나오는 것, 구멍이 뚫린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때로는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바닥에 무엇을 덮은 검은 천을 바라보거나 거대한 구덩이를 지켜본다.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무기력한 모습이다. 하지만 보는 이의 마음을 계속 비집고 들어오고, 때로는 가슴 깊숙한 어느 부분이 툭 터져버리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은새는 변화가 발생하는 불안정한 순간을 탐구한다. 자신의 실제 경험이나 신문기사, 인터넷 사진, 영화 등 다양한 이미지들이 분류되지 않은 채 작업의 원천이 된다. 하지만 그녀가 탐구하는 변화의 순간은 눈으로 지각할 수 있는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다. 구체적인 의식보다는 현실 속에서 감각적으로 언뜻언뜻 인식하게 되는, 결코 이성적인 순간도 아니다. 이은새는 “변화가 일어나고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모든 것이 흔들리고 뒤집힐 수 있는 파장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이것은 대다수 심리적인 풍경에 가깝다. 일상에는 이러한 크고 작은 파장이 수없이 발생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변화에 곧 무뎌지고 파장이 자신에게 남긴 상처나 타인의 고통에 무심해진다.
작가는 이런 현실을 안타까워 한다. “요즘 제가 느끼는 세상은 엉터리로 둘러싸였지만 그것들이 단단한 벽처럼 굳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굳어진 상태에서 가끔 터져 나오는 부분들이 결국 금방 다시 굳어 단단해진다고 해도 그때의 작은 움직임을 의도적으로 의식하고 붙잡아두고 싶습니다.” 이은새는 무력함 때문에 모든 것을 놓아버리기보다는 그런 상태를 먼저 솔직하게 인정한다. 그리고 굳이 잡아내지 않으면 금방 잊히거나 아예 인식조차 할 수 없는 순간들을 계속해서 찾아내고 기록하는 것이 자신의 몫이라고 여긴다.
최근 그녀는 첫 번째 개인전을 야심차게 선보였다. 갤러리 조선에서 열린 <틈; 간섭; 목격자>(1.23~2.3)와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개최한 <틈; 간섭; 목격자들>(2.1~13)이 그것. 전시 제목에서 미묘하게 드러나지만 작가는 다른 콘셉트로 두 개의 전시를 구성했다. 갤러리 조선에서 전시한 작품이 작가 자신이 일상 체험에서 발견한 이미지들을 파편적으로 보여준 것이라면 서교예술실험센터에 설치된 대형작품은 복수의 인물이 등장해 일종의 상황극을 보여준다. 변화하는 순간은 주체적인 관점에서 자발적으로 발생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외부 힘에 의해 불쑥 나타나기도 한다. “저만의 시각에서 벗어나 그런 변화의 순간을 목격하는 사람들, 같이 경험하고 느끼는 사람들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여기에는 다양한 인물이 존재하고 그들의 역할이 고정되지 않고 유동적이죠.”
긴장된 순간, 어떤 사건들이 변화하는 순간을 담아낸 작업은 과도한 색상이나 반전된 색상을 통해 실제의 감각을 벗어나 다른 감각이 뒤섞여 나오는 시각적 뒤틀린 효과를 드러낸다. 그러다 보니 일상적인 색의 조합과는 거리가 멀다. 때로는 비슷한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전혀 다른 색으로, 다른 분위기로 변주된다. 그 순간들이 매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작가는 그에 대한 회화적인 표현 자체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은새가 표현하는 세계는 불안정하고 무기력한 세계인 동시에 언제 어디서라도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의 세계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각자의 일상에서 정체를 알 수 없게 숨어있던 하나의 단서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매체를 회화에 한정해 작업했지만 앞으로는 계속 변화하는 상황을 움직이는 조형물로 구현해보고 싶단다. 한 젊은 작가의 변화무쌍한 실험과 탐구가 기대된다.
이슬비 기자

이은새는 1987년 출생했다.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과정 조형예술학과를 졸업했다. <무겁고 깊고 검은>(이목화랑), <오늘의 살롱>(커먼센터), <Unfamiliar air>(스페이스BM) 등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캔버스에 유채193.9×260.6 2014

<떨어지는 물 앞의 사람들> 캔버스에 유채193.9×260.6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