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리뷰] 한국화의 반란

contents 2014.2. review | 한국화의 반란

위·이동협 <닮아도>(사진 오른쪽) 종이에 먹, 물감 33×25cm(각) 2005
아래·진현미 <겹-0103>(사진 앞) 투명필름, 한지에 먹 400×320×300cm 2012
안국주 <우리 엄마는 어디있어? 8>(사진 맨 왼쪽) 혼합재료 130×194cm 2013
사진・박홍순
‘한국화의 반란’이라는 자극적 제목만큼이나 놀라움을 주는 것은 미술관이 들어선 노원구 중계동의 풍경이다. 그곳은 아파트가 많은 정도가 아니라, 아파트만으로 이루어진 동네 같았다. 도미노 게임처럼 끝도 없이 펼쳐진 시멘트 블록은 진정 ‘현대적’ 도시 그 자체로 다가온다. 아파트 사이로 물질적, 정신적 차원의 대량 소비를 소화할 수 있는 대형 마트들과 극장들이 보이고, 고층 건물이 품고 있는 작은 공원 속에 자리한 미술관은 무슨 전시를 해도 최소한의 흥행은 보장받을 것 같은 흐뭇한 믿음을 준다. 한국 사회에서 예술의 전반적인 타자화에도 불구하고, 시민의 문화 향수권 확대라는 계몽주의적 모토로 탄생한 근대적 제도가 예술의 힘을 사회에 알리는 전초기지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과거나 현재의 자리(place)인 땅보다 미래의 공간(space)인 허공에 더 많은 사람이 살고 있으며, 칸막이 쳐진 단편들을 잇는 것은 자연발생적 구조가 아니라 어느 날 동시에 시행된 공시적 구조로서의 산물이다. 현대는 옳고 그름이나 미적 취향의 문제를 떠나 우리의 삶의 구조적 차원에서부터 자리를 잡았다. 미술관을 향해 최소한 몇 분간이라도 걸어가 본 관객은 전통에 관계된다고 믿어지는 한국화가 반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온몸으로 깨달을 것이다. 동시에 체계는 체계 자체를 유지시키려는 관성이 있기에, 대학에 한국화과라는 전공과목이 건재하는 한그 위기라는 것도 때 되면 나타났다 사라지는 담론 소비의 일환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벽지를 닮은 한국적 모더니즘이 미학적이거나 사회적인 담론의 우위 이전에, 막 생겨나기 시작한 아파트의 하얀 벽면들을 채우기에 적절했기에 유예없는 시장의 선점이 가능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한국화 역시 현대에 대한 나름의 상황파악을 통한 특단의 조처가 필요한 것이다.
12명의 젊은 한국화과 출신자가 참여한 이 전시가 ‘반란’에 값하는 도발이나 대안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에서 우리를 전면적으로 규정짓는 현대의 증후가 보인다는 점은 확실하다. 그 증후 중의 하나가 단편화이다. 완전하다고 믿어지는 원형적(전형적) 모델로서 간주된 전통, 그 유기적 총체성은 해체되었고, 단편들은 결핍 또는 충만의 기호로 나타난다. 여러 방식으로 구현된 30여 점의 작품을 묶어낼 수 있는 ‘동양화의 새로운 실험’은 어떤 전체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단편들이 조합되는 방식을 말한다. 한지 위에 고서 콜라주, 수묵과 아크릴채색으로 그려진 권인경의 풍경화는 서로 다른 기원을 가진 것들이 충돌하는 현대의 풍경이다. 짧은 시간 압축 성장한 우리의 근대화는 긍정적인 의미든 부정적인 의미든 이질적 코드의 공존을 낳았던 것이다. 입체로 구현된 이정배의 산수는 전통의 바탕인 자연의 현 상황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의 작품에서 자연은 깊은 뿌리를 가지는 온전한 전체, 또는 본질이 아니라 단편의 조합이다. 사진이나 플라스틱 모형으로 축소된 자연은 탈색되어 있고 잘려나갔으며, 인간이라는 이물질에 의해 오염되고 잠식된다. 어수선하게 가지를 뻗는 식물로 대변되는 빈약한 토양의 산물, 그리고 포획을 위해 걸쳐놓은 막과 망들은 자연을 착취하고 소유하려는 인간의 과도한 욕망을 알려준다. 그러나 단편은 나형민의 풍경에서 천상의 도시 같은 충만함으로 떠오른다. 그는 평범한 동네 한켠을 잘라내 뭉게구름 있는 푸른 하늘 위에 붕 띄워놓았다. 그곳으로부터의 낙하도 아찔하면서 신나는 놀이로 나타난다. 한지에 토분채색으로 담백하게 그려진 그의 풍경에서 단편화는 박탈감보다는 해방감을 낳는다. 근대도시가 소외와 자유를 동시에 낳았듯이 말이다.
전통, 풍경, 인물 등이 짙은 안개 속 모호한 분위기에 잠겨 있는 안국주나 이은실의 작품은 단편화의 이면이다. 전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단편은 수수께끼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단편의 비의적 속성을 극대화한 그들의 작품은 은은하면서도 자극적이다. 전통적 산수화에 포함된 이상향적 가치는 단편의 모서리를 최대한 둥글려서 통합된 가상을 창출하려 한다. 일월도처럼 해와 달이 동시에 떠있는 이용석의 풍경은 이국적 동식물로 가득한 이 시대의 이상향이다. 열대의 섬이 떠오르는 풍경은 전통사회에서는 흔하지 않았던 관광의 산물이다. 관광은 전통뿐 아니라 현대예술을 대체하는 문화소비 품목으로 자리 잡았다. 수십 장의 겹쳐진 투명 필름으로 만들어진 진현미의 산수풍경은 단편을 전체로 종합하기 위한 장치가 독특하다. 아마도 현대의 대표적인 문화예술로 자리 잡은 시간예술(영화)을 공간화한다면 이런 모습이 될 것이다. 일상의 대소사를 기록하는 기념사진의 틀을 빌린 변윤희의 인물화, 그리고 같은 크기의 화선지에 수백 명의 인물을 그린 이동협의 작품은 시공간의 박편인 사진을 활용한다. 기계로 수집된 박편들은 기계적으로 재배열된다. 단편화된 인간은 사물과 구별되기 힘들다. 서민정은 안팎이 불분명한 공간에 고립된 인간인지 인형인지 알 수 없는 인물을 그린다. 단편화된 인간에게 몸의 온전한 경계를 기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지요상은 두개골 안에 있어야 할 뇌를 몸 안팎을 넘나드는 머리카락으로 가득 펼쳐놓았다. 중력에 순응하는 검은 선의 다발들이 하얀 벽 위에서 변화무쌍하게 유영하는 권기범의 작품은 단편의 확대를 꾀한다. 그는 바닥에 놓고 그리는 한국화의 전통을 순순히 따르지만, 그것을 일으켜 세우고 확장하며 벽체라는 물질과 결합했을 때의 기념비적 효과를
노린다.
이선영・미술비평

권기범 <JUMBLE PAINTING 09_GRAVITY TS (Tube)> 혼합재료 380×3100cm 2009

[전시리뷰] 유비호_Belief in Art

contents 2014.2. review | 유비호_Belief in Art
그는 무엇을 보았을까? <신념의 선, 2013>의 영상에서 사람은 그저 하나의 점에 불과하고 대지와 지평선만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목적지는 그곳에서 자신이 정해놓은 하나의 선(線)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어디에 서 있든 그곳에서 보면 광활한 대지와 지평선만 보일 것이다. 자신이 정해놓은 선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할까? 그것은 그 순간 하나의 사치일지도 모른다. 그 순간은 생각이 정지하고 목적지도 사라지며 방향 감각 또한 사라지는 것이다. 아니 그것은 또한 시간의 의미를 상실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목적지가 사라지는 것은 미래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미래가 사라지는 것은 과거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목적지가 사라질 때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고자 했던 과거의 모든 노력은 한순간 주마등 같이 스쳐가며, 허탈함과 공허함만이 밀려올 것이다.
자신이 정해놓은 선이 사라지면, 과거와 미래가 사라지고 몸뚱이 하나만 남아있는 현재의 자신을 보게 된다. 자신이 정해놓은 선은 남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 목적지가 정해지는 순간 우리는 주변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그저 주변의 모든 사람을 자신의 목적지로 가기 위한 하나의 징검다리로 볼 뿐이다.
예술은 정해진 선이 있을까? 예술의 정의는 각자 자신들이 정해놓은 선만 있을 뿐 그것은 <신념의 선>의 영상에서 보듯이 대지나 지평선과는 상관없다. 아니 그보다 예술은 어떤 목적을 지녀야 하는 것인가? 예술 또한 어떤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통해 현재의 자신을 보고, 주변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까?
유비호의 <신념의 선>의 영상은 광활하고 무한한 공간 앞에서 겪게 되는 방향성의 상실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그것은 예술에 어떤 정해진 목적지가 있는 것과 같이 나아갔던 작가 자신의 개인적인 성찰을 이야기하는 고백록과도 같을 지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정해진 선이 사라지고 광활하고 무한한 공간에 선 순간 또다시 <긴 슬픔 공허한 숨>(2007)의 영상에서 느꼈던, 자신만이 혼자 이 세상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듯한 작고 왜소한 마음이 또다시 밀려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위안의 숲>(2013)의 영상은 자신이 <신념의 선>(2013)과 <긴 슬픔 공허한>(2007)의 영상에서 느낀 것과 같은 마음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안하는 것이자 또한 자신을 위안하기 위한 작은 몸부림과도 같다. 나무는 사람들처럼 어떤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지도 않으며, 사람들을 하나의 징검다리로 이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기 때문이다.
유비호의 <Belief in Art> 전시는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다가 방향성을 상실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예술이 어떤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는 것이며, 우리는 누구를 위해 목적지를 정해 나아가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한 것이다.
조관용・《미술과 담론》 편집장

<위안의 숲_겨울(남)>(벽면 왼쪽 사진) <<위안의 숲_겨울(여)>(벽면 오른쪽 사진) 120×180cm(각)2 013

[전시리뷰] 박경률_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 가능성의 릴레이

contents 2014.2. review | 박경률_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 가능성의 릴레이
박경률의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는 프로젝트 성격을 띤 전시로 먼저 용산구 치매센터에서 치매 노인 3명과 함께 실행(인터뷰/4주간 24회, 드로잉)한 <가능성의 릴레이>(2013.11.2~29)와 연결된 구성을 보인다. 전체적으로는 치매환자인 친할머니의 인터뷰 영상과 치매 노인 3명의 인터뷰를 각색하여 노인 배우의 연기를 통해 제작한 페이크 다큐멘터리 영상, 그리고 그 노인들과 함께 얘기하며 풀어낸 드로잉들과 그 얘기들을 토대로 작가의 상상력을 더한 단편 소설(<고요한 소녀>, 세 개의 거울액자 속에 새김), 또한 이러한 경험과 자신의 기억을 의식과 무의식 관계 속에서 배설한 낱개의 드로잉 및 서술된 드로잉들로 구성되었다.
여기서 작가는 의식과 무의식에 관한, 즉 ‘무의식적으로 그린다?’라는 의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그 화두를 프로젝트로 증명해보이려고 했다. 작가가 자율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어떤 대상을 ‘채우고-지우기’를 반복하며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상, 현상, 사건, 기억, 번안, 편견 등을 자신의 언어로 전환하여 콜라주하거나 스토리화하는 과정을 겪는다고 가정한다면, 그 화두도 이러한 되새김질 현상을 시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동안 그는 자신의 주변에서 부딪히는 일상의 사건들과 잠재된 기억들을 자신만의 여과장치를 통해 걸러서 해체시키는 일련의 드로잉들을 페인팅으로 구조화하는 작업을 했었다. 반면, 이번 전시에서는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과정에 불과했던 드로잉들을 전면에 부각시키면서 자신의 언어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를 실험하며 유연한 태도로 접근하고 있다.
작가는 어떤 측면에서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거나 너무도 일반적 의
미인 ‘무의식’을 화두로 삼아 치매 환자분들을 만나고 대화한다. 그 과정이 다시 자신을 들여다보며(거울 현상) 이미 형성되었거나 무의식을
경험하는 태도로 자신의 언어를 해체하는 자각현상과 같은 의미로 다
가왔다.
무의식의 태도로 접근한다는 자체가 자신의 정체성을 내어놓고 다시 시험받는, 그래서 역으로 영역화된 페인팅을 유연하게 해체시켜’연약한 드로잉’이라고 명명한 것이 아닐까.(큰 작품의 드로잉은 여느작가들의 드로잉에 비해 구조적이다.) 그렇다면, 이번 전시는 언어의 환영체가 구축되어 관객들로 하여금 일방적으로 감상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아닌, 언어와 이미지 사이를 열어놓고 탐색하는 드로잉적인 사유의 태도로 접근하게 하여 보는 이들과 묵언의 대화를 나누며 호흡을 유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고요한 소녀> 작품이다.
자기언어를 구축해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박경률 작가의 프로젝트를 통한 시각적 행위는 끊임없는 화두로 시작되었고, 이어서 나와 사회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예견치 못한 내러티브적인 얘기들을 들춰내어 이미지효과를 떠나 메시지 전달로서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이로써 그가 앞으로 유형과 무형, 사람과 사람, 글과 이미지, 책 속의 앞뒤 간지 등의 수많은 ‘사이 공간’에까지 사유를 넓혀갈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객체와 주체 사이의 이분법적 구별을 거부하는 정서적 흐름이 그의 인문학적 태도에 기인하며, 동시에 주체의 인식에 따라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그의 이면과 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가능한 시도들이었고, 하나의 매체에만 국한되지 않는 다차원적 성향을 지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관훈·Project Space 사루비아다방 큐레이터

왼쪽·<고요한 소녀>(가운데 액자 작업) 혼합재료 70×53(각, 총3점) 2013
오른쪽·<연약한 드로잉 No.650-미래와 할머니와 복잡함에 대한 1차원적 반응들>(부분) 240×650cm 2013

[전시리뷰] 사진과 사회: 소셜아트

contents 2014.2. review | 사진과 사회: 소셜아트
롤랑 바르트는《 카메라 루시다》에서 “사진은 침묵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진과 사회전>의 사진들은 대체로 침묵과는 거리가 멀다. 네 개의 전시장을 채운 26인의 작품 150여 점과 37인의 팀 프로젝트의 사진작업들에는 이 전시의 담론인 ‘소셜아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아우성으로 가득하다. 이러한 목소리를 끌어내는 네 개의 프레임은 ‘비판, 행동, 공동체, 공공’이다. 먼저 ‘비판’이란 부제가 달린 전시공간에서 관객이 만나게 되는 첫 작품은 백승우의 <아카이브 프로젝트>이다. 현실의 시공을 자르고 붙인 듯 조합된 백승우의 허구적 건축물 사진은 이전시 전체가 이 땅의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만드는 ‘초현실주의적’ 풍경을 수집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일상적 풍경의 내면을 꿰뚫는 카메라의 시선은 집요하고 긴장감을 유발한다. 후쿠시마의 바다 앞에서, 카메라가 시선을 던져야 할 길을 찾는 박진영의 <카메라의 길>은, 우리의 의식에 휘두르는 마치 쓰나미와 같은 폭력적 이데올로기의 쇠망치를 ‘쇠못’으로 가두고픈 박불똥의 <길>로 이어진다. 이는 폭력을 폭력으로 제어하고자 하는 것이라기보다 어쩌면 자기 치유를 위한 동종요법과 같은 시어로 읽힌다. 아도르노를 따라 말하자면, 현실의 고통을 모방하는 ‘어둠의 미메시스’야말로창으로 상처를 치유하는 동종요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진이 걷는 ‘길’은 현실 비판적이면서도 이처럼 자기 상처를 드러내 치유하고자 하는 측면이 있다.

이때 상처의 노출은 보는 이의 시선에서 곧 비판의 언어로 전유될 수 있다. 장지아의 ‘서서 오줌 누는 여성’의 사진 또한 남근 중심적 폭력과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금기한 것들에 대한 조소이면서, 그만큼 여성에 대한 사회의 통념이 만든 상처를 노출시킨다. 마찬가지로, 오형근의 카메라에 포착된, 꽃 같은 나이에 징집된 한국 남성들도 남근 중심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들일 수 있다.

어떤 사진들은 이러한 ‘비판’을 ‘행동’으로, 참여와 개입의 ‘새로운 퍼블릭아트’로, 즉 사회적 실천으로 옮기고자 한다. 이 때문에 이러한 행동주의 예술에 선 사진은 침묵하기가 어렵다.

보는 이의 시선을 명료하게 찌르는 ‘푼크툼’을 파생시키도 전에 충분히 의미가 전달될 만큼의 정보와 주장으로 보는 이의 호기심을 채워주고 마는 즉, ‘스투디움’이 가득한 사진 속에서 행동주의 예술가들의 성마른 외침이 넘친다. “모래강 내성천을 함께 지켜요”(리슨투더시티)의 사진과 “표현의 자유”(이윤엽)의 목판, 여성그룹 입김의 시위적 퍼포먼스사진, 이하의 정치인들에 대한 풍자적 몽타주사진들, 공공예술의 프로젝트보고서 성격의 사진들은 ‘행동’의 프레임 안에서 오직 한 가지 목소리를 낸다. ‘비판’의 장에서 보였던 예술의 아우라와 다의성은 이 ‘행동’의 장에서는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편 어떤 공동체의 장소특정적인 사진작업들은 조금 다른 목소리를 낸다. 지워지고 소외되고 상처받은 역사의 기억을 불러와 어루만지는 ‘공동체’의 프레임에 와서, 사진의 목소리는 낮아지고 조용해졌다. 그중에서도 재일조선인 김인숙이 유치원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다닌 13년간의 오사카조선학교시절에 대한 사진과, 지금은 폐쇄된 이강우의 정선탄광촌 사진은 오래전 그 장소를 거닐고 그곳의 물건들을 마음에 담아둔 이 작가들의 ‘지속된 기억’의 편린들을 나누게 한다.

개인의 역사와 공동체의 역사가 오버랩되는 역사적 궤적의 어딘가에서 그들이 본 어떤 ‘소중한 것’이 거기 있다. 그 사진들은 묘하게도 허구와 현실의 중간에서 부유하는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럼으로써 소외된 공동체의 아픔에 우리 자신의 감정의 빛깔을 덧입히게 만든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것, 눈을 감을 것, 하찮은 세부로 하여금, 홀로, 감정적 의식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도록 내버려둘”(롤랑 바르트) 침묵 가운데 듣는 예술의 음성과 함께 말이다.

유현주・미학, 미술평론

왼쪽·박진영 <시리즈 사진의길 카메라들 14.7m>(사진 왼쪽) c-print 220×180cm
오른쪽·입김< 아방궁종묘점거프로젝트-거리행진>(사진 왼쪽 벽면) 2000

[전시리뷰] 최수정_확산희곡-돌의 노래

contents 2014.2. review | 최수정_확산희곡-돌의 노래
갤러리와 극장이 오늘날처럼 가까워진 적은 없었다. 모더니즘의 정점에서만 하더라도, ‘연극성(theatricality)’은 “미술의 가장 노골적인 적”(마이클 프리드)이 아니었던가. 미니멀리즘이 ‘매체’에 대한 성찰을 공간의 맥락으로 우아하게 확산시키고 있을 때에도 ‘오브제’의 배척적인 순혈주의는 성역으로 남아 있으려 했다. 오브제 중심의 잉여가치를 배제하겠다던 관계미술이 미술 ‘시장’을 장악한 지도 오래된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꽤나 아득한 외침이다.

그러고보면 21세기가 15년이나 깊어진 이 시점에 연극 무대에 캔버스를 대놓고 걸어놓는 행위가 그리 도발적이거나 이단적으로 다가올 근거는 별로 없다. 문제는 그러한 행위가 어떤 문제의식을 촉발시키고 미술의 (이미 사라진) 경계를 어떻게 재설정하는가가 될 것이다. 회화와 연극이 계속 변화하고 있다면, 그 관계의 변화는 더욱 역동적일 수밖에 없으리라.

최수정은 ‘오브제’를 무대 위에 걸었다. 모두 5점의 그림. 그리고 무대조명을 비췄다. 배우를 대체하겠다는 듯이. (아니, 배우는 관람객이 맡는다. 우리는 ‘관람객’의 역할을 맡으며 무대에 오른다.) 그림 속 이미지는 (프리드가 원했던 그대로) 시간을 망각하고 얼어붙어 있다. 실어증 환자처럼. 무대공포증에 점령당한 배우처럼. 이 잔혹하리만큼 강렬한 스폿조명은 회화의 무엇을 ‘재조명’하는 걸까.

<확산희곡–돌의 노래>가 전시된 삼일로창고극장은 살아서 꿈틀거린다. 아니 그렇게 느껴진다.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그림이 죽은 척하기 때문이다. 비디오벽화 속의 원숭이의 시선, 의례적인 안부인사(“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즘 근황은 어떠십니까?”)를 발산하는 무심한 LED전광판, 같은 인사말을 모르스 부호로 전환한 다섯 가지 버전의 “돌의 노래”, 그리고 그 소리에 변죽을 맞추며 객석에서 번쩍거리는 섬광, 분장실의 헤드폰을 통해 새어나오는 누군가의 반복적인 귓속말 등 작고 규칙적인 ‘움직임’들로써 극장은 유기체적인 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그림들만이 ‘돌처럼’ 굳어 있다. 극장의 다른 모든 것이 살아있음을 역설하겠다는 듯이. 그 묵묵함은 (프리드가 말한) ‘오브제의 숭고미’를 과묵하게 수호하려는 비장함인가. 모더니즘의 순수성에 대한 향수인가. 아니면, 회화와 연극의 물질적 조우의 불가능에 대한 냉소인가. 어쨌건 간에, 말없는 그림 위에서 스포트라이트의 화려함은 시체애호증적 집착
을 닮아간다.

그 아집스러운 부동성에도 불구하고 그림이 이 ‘확산된 희곡’ 그러니까 ‘아직 연출/완성되지 않은 연극’의 ‘주인공’임에는 틀림없다. 각 그림은 작가가 일상에서 수집한 기억의 조각들에 대한 짧은 인용구들로 가득 차 있다. (다분히 ‘연극적’ 징표인) 마스크라는 모티프로 엮이는 단상들이다. 배우의 분신임을 자처하는 마스크들은 그림을 독자적인 소우주로 편성한다. 극장 여기저기 ‘설치’된 비디오나 오디오 따위의 기계적 기호들이 한결같이 관객의 관심을 구하며 말을 걸고 있지만, 그림들은 과묵하게 관객의 응시를 초대한다. 모든 기계적 단상들이 정해진 시간의 궤적을 따라 순환하고 있다면, 그림들만큼은 그들의 세계가 관객각자가 스스로에게 용인하는 시간에 따라 펼쳐지도록 유연하게 방치되어 있다. (2층에 과거의 공연사진들과 짝을 이뤄 주석처럼 전시되는 돌들이 그러하듯) 그림은 시간의 기록이다. 관객의 신체를 매개로 다시 선형적으로 풀어헤쳐지는 시간. ‘화가’ 최수정은 이 상호모순적인 두층위의 시간을 ‘희곡’으로 각색한 게다. 관람객은 그림을 (객석 뒤쪽으로부터) 원경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소소한 디테일에 이끌려 눈을 캔버스에 밀착시키기도 한다. 시간은 공간으로 환산되는 것이다. 기계적 기호들을 ‘감상’하는 관람자의 위치가 시시각각 변할 수 있다면, 그림들만큼은 시선의 위치를 정확하게 지정한다. 회화적 현실의 가시성을 정확한 산술성으로써 안무한다. ‘확산희곡’은 결국 그림과 신체의 역동적이고 가변적인 관계를 변형시키는 일종의 연산 프로그램인 셈이다. 어쩌면 ‘전시’되는 것은 캔버스를 초월하는 회화의 확장된 사유 영역을 재고하는 ‘작품’이 아닌, 회화의 환원적 물성을 소환하는 ‘연극적’ 제스처다. 회화의 의롭고도 외로운 독백이랄까. 자기노출이자 자기연민이기도 한 자기성찰. 30년 전 바로 이 극장에서 공명했던 빨간 피터의 소외된 외침처럼.

서현석・연세대대학원 교수

<광물회화(Mineral Painting)> 캔버스에 혼합재료 130×130cm(각) 2013

[전시리뷰] 박미나_Grey & 12

contents 2014.2. review | 박미나_Grey & 12
이번 박미나의 전시는 연필로 그린 드로잉, 추상유화작업, 유화물감작업 등 크게 3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1층 전시장을 들어가면 왼쪽에 드로잉작업이 자리한다. 그의 색칠공부 연작과 연결된 작업이다. 50개의 드로잉으로 이루어진 <Drawings>에서는 ‘해’가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박미나는 해가 그려진 학습용 색칠공부의 낱장을 수집하고(여러 나라에서 모았기에 해의 모양이 조금씩 다름), 해를 제외한 부분을 연필로 색칠하였다.(여러 미술재료 회사가 만든 다양한 연필 사용) 이때 작가는 종이에 그려진 형상과 그 형상에 내포된 이야기를 감안하여 연필의 터치를 정했다고 한다. 달이 등장하는 <Greys>와 별이 돋보이는 <12 Colors Drawings>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1층 안쪽 전시실에는 0호부터 200호까지 총 22개의 그림이 걸려 있다. 제목은 <Figure>이다. 모두 인물형 캔버스 크기지만, 정작 화면에는 구체적 형태의 인물은 없다. 박미나는 자신이 겪은 사람들에 대한 기억과 감정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각 사람마다 미묘하게 다른 감정을 잡아내기 위해, 그는 감정을 나타내는 형용사를 각각 떠올렸고, 다양한 유화의 표현기법으로 그 감정을 각각 시각화했다. 그의 감정이 다양했던 만큼 사용된 표현기법도 매우 다양하다.
2층에 설치된 <12 Colors>는 유화물감을 주목한 것이다. 국내에서 유통되는 12색 유화물감 11종을 수집하고, 각각의 물감을 모두 캔버스에 칠했다. 회사마다 12색의 기본색을 뽑았지만, 그 색은 제품마다 천차만별이다.
이처럼 박미나는 물감, (색)연필, 캔버스, 교본 등 미술과 관련된 기본 도구와 재료를 다룬다. 사실 이것들은 그림을 그릴 때 기본적인 것이어서, 또 너무 쉽게 접하는 것이라서, 우리가 이것들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너무 기본적이어서 언제나 똑같을 것 같지만, 이것들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쉽게 달라진다. 그리고 그 이유를 살피다 보면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통념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마지막으로 박미나는 이번 전시를 통해 무엇을 수집했을까? 금세 눈에 띠는 것은 유화물감, (색)연필, 색칠공부 교본, 여러 크기의 캔버스이다. 또 무엇을 수집했을까? 유화와 연필의 표현기법, 다양한 형태의 해·달·별, 이야기 등도 수집했다. 수집한 것이 더 있다면? 12란 숫자도 있을 것 같다. 사람에 대한 감정. 그리고 사람들의 사고방식.
류한승・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박미나 <Drawings> 종이에 연필 2011~2013 총50점

[전시리뷰] 김지영_(주)김지영출판사

contents 2014.2. review | 김지영_(주)김지영출판사
마흔 살을 넘긴 한 늦깎이 신인작가가 개인전으로 자신의 이름을 건 ‘출판사’를 차렸다. 물론 작가의 개념과 의도를 담은 미술전시지만, 작품들은 저마다 실제 출판물과 관련성을 띠고 있다. 대형마트의 총천연색 전단지를 이용해 만든 일종의 수산물도감인 <마트 어보(魚譜)>, 현실에서 기피 대상인 바퀴벌레를 소재로 작가가 직접 만든 색칠공부 책자<세계의 뒤편 색칠공부-바퀴벌레의 세계>(전시장에서 2000원에 실제 판매), 엄마의 부탁으로 신경숙의 베스트셀러 <엄마를 부탁해>를 한 글자씩 확대하여 드로잉으로 전환하고 다시 영상매체로 제작한 <엄마를 부탁해를 엄마가 부탁해>(총 282쪽 중 4쪽의 분량밖에 하지 못한 미완의 작업), 전시 기간에 관람객들이 임의로 옮겨놓는 바둑돌들의 형상을 매일 ‘기보(棋譜)’의 형태로 사진과 함께 기록하는 <생활바둑> 등이 대표적 작업이다. 이들 대부분은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오브제나 매체로 제작되었으며 이미 존재하는 대상을 참조로 하여 특별한 예술적 재능보다는 오랜 노동의 축적으로 완성된 결과물들이다. 무엇보다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하찮은 소재를 진지하고 집요하게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의도된 가벼움 이면에는 시각예술의 위기와 미술제도의 모순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관점이 담겨있다.
전시 설명문에서 작가는 전단지 수집이 취미라며 “선명하고 얇고 공짜인 그것들을 볼 때마다,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이유가 있나 싶은 생각마저 든다”고 말한다. 원본이 복제에 의해 아우라를 상실하고 사본과의 차이조차 무너진 지 오래인 오늘날, 예술가의 ‘독창적인(original)’ 창작에 의한 유일무이한 작품으로서 시각예술이 지니는 힘은 사실상 미약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창작의 기회마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작가가 되는 것이, 또 설령 된다 하더라도 예술활동을 통해 수익을 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에 대한 회의가 작업의 계기라고 밝힌다. 그리고 출판물이라는 형식을 빌려, 다수에게 소비되는 대중예술이 오히려 저작권이라는 정당한 시스템을 통해 원작을 존중받는 것은 아닌지, 반면 여전히 많은 미술작가가 독창성과 원본의 신화를 떨치지 못하고 삶과 예술 사이의 간극에서 허우적대는 것은 아닌지 묻고 있다. 그러나 작가의 이러한 깊은 성찰은 한없이 가볍고 재기발랄하다. 무서운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 재주를 가졌다 할까. ‘김지영출판사’의 차기작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신혜영・미술비평

김지영 <생활 바둑>(사진 오른쪽) 가변설치 2013
사진・조영하

[전시리뷰] 박수영_오름-그리다

contents 2014.2. review | 박수영_오름-그리다
서울 인사동에 위치한 가나아트스페이스갤러리에서 박수영 작가의 7번째 개인전인 <오름-그리다>가 지난 12월 말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오름’은 제주도 방언이다. 큰 화산 옆에 붙어 생겨난 작은 화산, 일명 기생화산(寄生火山)을 지칭하는 용어가 오름이다. 370여 개의 오름이 존재하는 화산섬인 제주도를 ‘오름의 왕국’으로 비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박수영의 <오름-그리다전>은 아름다운 오름의 모습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대신 제주를 상징하는 오름을 통해 67년 전의 제주의 아픈 역사 한 부분을 담아낸다.
본 전시에는 25점의 평면작품이 출품되었다. 한지로 마련된 화폭에혼합재료(수채, 유화, 크레용, 목탄 등)를 이용해 완성해낸 작품들은 서정적이고 명상적이다. 전체 작품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작은 집의 형상은 의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이 집들은 창문이나 대문 혹은 지붕이 없다. 집을 상징하는 형상만으로 홀연히 큰 나무 아래 쓸쓸히 등장하거나, 때로는 황량해 보이는 대지 위에 줄지어 등장하기도 한다. 혹은 사발의 음식그릇 모양 안에 담겨져 등장하기도 한다.
중도와 겸손을 읽게 하는 모노톤의 바탕 위에 그려진 집의 형상들은 크기가 제각각 이다. 반(半)추상의 풍경을 배경으로 하는 집의 형상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지닌 ‘물질의 실재성’을 빌려, 실은 ‘정신의 실재성’을 시각화해낸다. 집을 삶으로 은유하면, 그 삶의 주체는 인간이다. 그래서 개개의 집 형상은 실재성이라는 규정하에 정신적 존재가 될 수 있다. 떠난 자와 남겨진 자, 과거와 현재, 망각과 기억 그리고 진실과 진실의 그림자 등을 공간적인 물질을 통해 정신적인 실체로 옮겨놓는 것이다. 이를 박수영은 자신만의 반복적인 집 형상 속에 시간성을 그리고 존재를 시각화해낸다.
이 시각화가 보다 극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집의 형상들이 모두 하얀색으로 처리된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하늘과 땅을 뜻하는 구극(究極)의 색으로 또한 불멸의 색으로도 해석되는 백색은 또 존 로크(John Lock)에 의하면 인간의 의식과 정신세계를 상징하는 “화이트 페이퍼(white paper)”로도 규정된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빈 공간”이기에 자유로운 사색이 가능하며, 또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삶을 표출할 수 있는 공간인 로크 식의 “화이트 페이퍼”는 “광활한 대우주”로도 표현된다. 박수영의 하얀 집은 역사와 기억을 등에 업고 로크 식의 자유로운 미래에 대한 또 다른 제시일 것이다.
인사 가나아트스페이스갤러리 전시공간에서 수많은 관람객을 맞이했던 작가의 작품들이 의미 있었던 것은, 기억에 의거한 현재와 미래의 의미에 대해 쉽게 답할 수 없는 부분 그래서 가시화될 수 없는 부분을 드러내며 예술창작의 의미를 더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김은지・홍익대 교수

박수영 개인전 <오름-그리다> 전시 광경

[전시리뷰] 김성윤_athlete

contents 2014.2. review | 김성윤_athlete
이제 첫 번째 시리즈 작업 <athele>를 선보인 김성윤은 젊은 작가군 중 보기 드문 아카데믹 화가의 유형을 보여준다. 고전주의풍 초상화를 보는 듯한 리얼한 표현은 자칫 자신만의 그리기 기법에 승부를 거는 작가라는 인상을 줄 수 있고, 초기 올림픽 선수들이라는 주제는 몇몇 작가에게 유행하는 ‘리스트를 채우기 위한’ 주제 선정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김성윤 작업이 흥미로운 지점은 그리기 기법과 주제 선정 배후에 분명하게 자리한 회화에 대한 고민의 깊이에 있다.
김성윤은 작업의 근간을 잡기 위해 회화의 가능성이라는 오래된 질문을 고민했다. 이 질문에는 한 작가의 작업의 맥락을 이뤄가는 동력에 관한 것과 회화의 장 전체와 관련된 비평적인 성격이 포함되어 있었다. 독창성에 비롯한 스타일의 확립에는 관심이 없어 보이는데, 미래의 작업의 가능성을 구속하는 폐쇄적인 회로가 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독창성이라는 테제를 ‘조합하기’라는 룰로 치환한 작가는 별개의 카테고리에 담겨 묻혀있는 사건들과 작풍을 소환해 조합하여 그릴 수 있는 확장된 회화의 세계를 연다.
이번 개인전에서 선보인 <athele>시리즈는 존 싱어 사전트라는 19세기 초상화 작가와 초기 올림픽 선수들이라는 두 가지 다른 계열의 사건을 취합해 구성한 장면들이다. 사전트는 새로운 회화를 실험하던 동시대 작가들과는 다르게 순전한 초상화 작가로만 남은 작가이다. 외부 코드들과의 무리 없는 조합을 위해 회화사에 부각되지 않은 익명의 기법을 선택한 작가는 사전트의 생애 시기와 초기 올림픽의 시기가 맞아떨어진다는 데 착안해 사라진 운동종목의 선수들을 그렸다. 모델 섭외와 의상 및 소품 제작, 촬영을 거쳐 얻은 사진을 보고 그리는 방식이 뒤따랐는데, 이는 충실하게 사전트답게 그리기 위한 과정이었다. 자기 자신을 사전트에 용해시킴으로써 그의 회화가 도달하는 곳은 과거의 사건들에 대한 새로운 기시감의 세계이자, 회화로 여는 가능성의 공간이다.
한편 사전트 식 기법과 초기 올림픽 선수라는 주제의 결합은 필연적이지 않아 보이는데, 바로 그 독립성에 의미가 있다. 이는 아카이브의 논리와도 유사하다. 푸코는 아카이브를 말해질 수 있는 것의 법칙, 말들의 출현을 지배하는 체계라고 정의하면서, 말들이 상이한 도식들로 그룹화되고, 복수적인 관계에 따라 서로를 구성하도록 기능한다고 했다. 김성윤은 그려질 수 있는 것들을 소환하는 조합의 시스템을 구축했고, 앞으로 서로 이질적으로 보이는 기법과 주제의 출현을 반기면서 다양한 시리즈를 구축해갈 것이다. 그가 앞으로 매 시리즈 작업을 통해 어떻게 이 조합의 물꼬를 터 나갈지, 아직은 두고 봐야 할 것이다. 이것이 김성윤의 다음 번 시리즈 작업을 기대하는 이유다.
우아름・미술이

김성윤 <Skijoring, Jonathan Bennette>(사진 오른쪽) 캔버스에 유채 250×212cm 2013
<Cycle Polo, Kenneth Drenen>(사진 왼쪽) 캔버스에 유채 240×146cm 2013

[전시리뷰] 김동윤 이정배_Space is the place

contents 2014.2. review | 김동윤 이정배_Space is the place
갤러리 조선에서 1월 9일부터 선보이고 있는 김동윤, 이정배 작가의 2인전 <Space is the place전>은 우리를 둘러싼 공간과 장소에 대한 이야기다.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동윤 작가는 교차로, 놀이터, 주차장과 같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소에 주목한다. 그는 쉽게 인식되지 못하는 이와 같은 언저리 공간을 360도로 촬영하여 그 각각의 이미지를 한 화면에 쌓아 올린다. 한 장의 사진 속에 담긴 다른 시각적 지점과 시간의 모멘트들은 서로 중첩되며 사라질 듯 남겨진 채, 우리 일상에서 흔히 만나는 특정 공간이 담고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긴 기억과 시간을 환기시킨다. 작가는 겹쳐진 사진들 위에 함께 찍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요소들을 인덱스(Index)라고 부르는데, 김동윤 작가는 그 인덱스들과 함께, 혹은 그 인덱스 너머에 존재하는 공간의 실재를 탐구함에 작품핵심을 두는 듯하다.
이정배 작가의 작품 또한 우리 주변의 풍경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된다.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에게 풍경화의 정의는 “실재로 그러한” 자연의 모습이다. 하지만, 오늘날 풍경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도시 외관에 의해 가려지고 훼손되어 실재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이 변화되고 있다. 이정배 작가는 그 요인을 “자본주의”에 두고 자본주의 논리 속에서 가려지고 훼손된 풍경 ‘사진’과 그 사진 속에서 조각난 풍경을 ‘부조’의 형태로 제작함으로써, 자본의 욕망에 의해 ‘조각난’ 오늘의 풍경이 무엇인지를 관람객에게 직시하게 한다.
우리 주변에서 발견되는 특정 풍경, 혹은 장소를 소재로 삼으며, 그것 이면에 담긴 실재를 탐구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두 작가는 동일한 관심사를 지닌다. 하지만, 그것을 다루는 방식과 그들이 직시하는 실재는 서로 다르다. 김동윤 작가에게 공간은 시간과 기억들의 중첩지이며, 이정배 작가에게 공간은 자본의 논리와 인간의 욕망이 아로새겨진 현장이다. 각기 다른 공간에서 다른 경험을 가지고 살아가는 두 작가가 ‘공간’에 주목하며 풀어내는 각기 다른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는 것에 본 전시의 의미를 두고, 앞으로 이들 작가가 현재의 작품을 발전시켜 나가는 방향을 또한 주목해볼 만하다.
주연화・아라리오갤러리 디렉터

김동윤 <Sentinel Bridge>(사진
맨 왼쪽) c-프린트 135×180cm 2013
이정배 <Play>(사진 맨 오른쪽) 레진
100×140×185(높이)cm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