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시대의 눈 – 회화

시대의 눈 –  회화

OCI미술관 9.12~10.31

그곳에 가면 물감 냄새가 자연스레 콧등에 와 닿으며 눈과 머리를 자극한다. 어렴풋한 잔상들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미술관의 흰 벽은 그간 수많은 이미지의 거소였다. 2010년에 개관한 OCI 미술관은 시작부터 회화에 대한 고집스러운 시선을 드러냈다. 신진 작가부터 젊은 작가의 개인전을 지원하고, 중견 작가들의 날카로운 혜안 또한 놓치지 않고 회화가 가는 길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당시 미술시장의 침체로 인해 그간 마켓에서 선호되던 회화가 잠시 주춤하고, 대신 설치 형식의 복합매체 작업이 전시공간에 활력을 불어넣던 시기라 회화에 대한 미술관의 진득한 관심은 화가들에게 여러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회화의 물성과 치열한 화폭 그 자체를 담아내던 전시장에 이번에는 강서경, 공시네, 박미나, 박진아, 배윤환, 안두진, 정수진, 차혜림, 허수영 총 9명의 작품들이 모아졌다. 주로 30대 중후반에서 40대 초반 사이의 작가들은 현재 미술계에서 왕성히 활동하며 화단의 주목을 받는 화가들이다. 이 중 절반의 작가는 국내의 주요 상업 갤러리와 관계하고 있으며, 다수의 작가가 국공립미술관 전시, 레지던시 프로그램 참여, 국내외 미술상 수상, 대안공간에서의 활동 등 국내 미술계 시스템과 관련해 총체적인 활동 범위를 지닌다. 본 전시가 접근하고 있는 회화의 ‘동시대성’은 국내 화단에서 대두되어 온 회화의 범주를 관통한다.
작년 이맘때쯤 OCI미술관에서는 <진경, 眞鏡>이라는 제목으로 한국화를 동시대적 관점에서 조망했다. 이번 전시는 지난해 동양화 전시에 이은 두 번째 회화 기획전으로, 한국 현대회화의 현주소를 살피며 컨템포러리 회화에서 두드러진 변화와 특징적 현상을 주목하고 있다. 본 전시가 접근하고 있는 회화의 동시대성은 전시제목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시대의 눈-회화: Multi-Painting>에서 페인팅 앞에 붙은 ‘멀티’는 다중, 혼성, 복합성, 다시점 등 다원주의적 성향의 현시대성으로부터 부여된 것이다. 전시장에 걸린 회화작품들에는 켜켜이 내러티브들이 중첩돼 있으며, 화가의 손끝에서 사투한 붓질의 흔적도 가득하다. 게다가 벽으로부터 나와 공간에 놓인 설치 형식으로 인해 회화의 복합적 형식과 중층의 내러티브는 현실 공간 속으로 연장되어 나간다. 전시된 작품에 내포된 멀티의 관점은 내용, 형식, 기법, 소재 등 회화의 안팎에 걸쳐 살펴볼 수 있다.
9명의 작가가 다루는 회화에 대한 관점은 미술관의 수직적인 공간 구성에 의해 세 개의 층에서 진행되며, 각 공간이 특정 주제로 구분되지 않더라도 자연스레 몸의 움직임에 따른 시각적 구성을 따르게 된다. 회화를 멀티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은 기본적으로 세상을 감지하는 화가의 시선으로부터 시작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서 대면하는 박진아와 허수영의 작품은 시공간의 흐름을 가시적 영역으로 확장시켜 보인다. 스냅사진을 활용하여 동일 인물의 흔적을 중첩된 시공간으로 파악한 박진아의 회화와 1년간의 계절 변화를 하나의 화면에 겹겹이 중첩시킨 허수영의 회화에는 스쳐지나가는 시공간의 흐름이 그림 속에 담긴다. 비가시적이라고 믿고 있는 것에 가시적인 실존을 부여하는 과정은 정수진의 회화에 담긴 의식의 다차원적 세계관, 그리고 공시네의 작업에서 상상의 실체가 차원의 과정을 거쳐 회화의 실체로 나아가는 것과 관련된다. 박미나의 ‘딩벳 회화’와 안두진의 회화는 형상을 재현하는 방식으로부터 벗어나 정보, 개념적 교환체계로서의 독창적인 회화의 언어를 구사해낸다. 이렇게 무가 유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생성된 다층적 언어는 회화의 매체적 측면에서도 새로운 시도들로 이어진다. 강서경, 차혜림의 회화는 설치 형식을 통해 회화적 개념을 공간 속으로 확장시켜 현실 공간과 환영 공간 사이를 매개시킨다. 50m의 두루마리 형식으로 벽면을 가득히 에워싼 배윤환의 작품에서 회화는 무궁무진한 저장고와 같다. 그는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다양한 장면과 내러티브를 복합적으로 화면에 배치시켜, 회화에 여전히 새롭고 독창적인 묘사법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란 듯이 펼쳐 보인다.
근래 젊은 화가들이 회화의 전통적인 재현 기능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매체적 가능성을 찾아 나선다. 그 과정에서 회화는 더 많은 정보를 유입하고, 발견되지 않은 미지의 영역들이 화면 안에 담긴다. 가시화를 더하는 과정은 보는 것에 한정된 닫힌 층을 파괴하고, 멀티적인 층으로서의 새로운 층들을 화면으로 이끌어낸다. 하지만, 이 다층의 회화들은 더 이상 관람객들로 하여금 유유히 전시장의 동선을 따라 차분히 그림을 감상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멀티-회화는 관람객들에게 전통적인 관람 형식에서 벗어나 현실 공간과 환영 공간 사이를 저울질하며, 이 사이의 영역을 더 적극적으로 탐색하길 요한다.
심소미・갤러리 스케이프 책임 큐레이터